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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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봄날 퇴계의 생각은?안개 걷힌 봄 산이 비단처럼 밝은데 진기한 새들은 서로 화답하며 온갖 소리로 우네 그윽한 곳 요즘은 찾는 손님이 없다보니 푸른 풀이 뜰 안에 마음껏 났구나 霧捲春山錦繡明 珍禽相和百般鳴 幽居更喜無來客 碧草中庭滿意生 1565년 봄 퇴계 이황은 4년 전 완공된 서당에서 봄을 맞으며 서당 앞 정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자신이 머물며 수양과 교육에 진력할 좋은 땅을 구해 5년 여 공사기간 끝에 마련한 도산서당의 앞 뜰에 봄이 왔음을 시(詩)로 표현해 본 것이다. 퇴계는 봄날의 아침 풍경에 이어 한 낮을 묘사하는 시도 지었다. 뜨락에는 비 갠 뒤에 고운 볕이 더딘데 꽃향기는 물씬물씬 옷자락에 스미누나 어찌하여 네 제자가 모두 제 뜻 말하는데 시 읊고 돌아옴을 성인이 감탄했나 庭宇新晴麗景遲 花香拍拍襲人衣 如何四子俱言志 聖發咨嗟獨詠歸 아침이 한 낮으로 바뀌면서 살짝 비가 온 마당에 햇빛이 서서히 들고 있고, 비에 씻긴 풀과 꽃 향기가 옷자락에 스며든다는 것이다. 앞 두 줄은 그런 뜻인데 뒤의 두 줄은 무슨 뜻일까? 네 명의 제자가 무슨 말을 했는데, 그 중에 유독 시 읊고 돌아온다는 말에 대해 성인(공자)가 감탄을 했다는 것이고,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내용의 시다. 무언가 금방 이해하기 어려운 사연을 담고 있는 것 같다. 퇴계가 무심코 이런 귀절을 넣어 시를 지을 분이 아니다. 무슨 뜻일까? 알아보니 귀절의 배경에는 공자가 네 제자와 나는 대화가 있었다. 공자는 어느 날 자로(子路)와 증점(曾點),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 네 제자에게 차례로 각자의 포부를 말해보라고 하니 자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전차 천 대의 군비를 갖춘 제후의 나라가 강국 사이에 끼어 군대의 침략으로 인한 전쟁으로 피폐하여 기근이 덮쳐 곤궁에 쳐했다면 제가 그 정치를 맡아 3년 만에 다시 활기를 되찾게 하고, 도의를 존중하는 나라로 키워보고 싶습니다. 염유(冉有)가 대답했다. 사방 6, 7십리 또는 5, 6십리 쯤 되는 지역의 정치를 제가 맡아 3년 만에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어 보이고 싶습니다. 공서화(公西華)가 대답했다. 저는 꼭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희망을 말씀드리면 종묘의 조상 제사와 빈객이 모이는 회동(會同)의 제사 때에 단(端)의 예복을 입고 장보(章甫)의 관을 쓰고 의례를 보좌하는 소상(小相)의 역할을 맡고 싶습니다. 증점(曾點)은 그때까지 슬(瑟)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볍게 튕기고 있다가 퉁하고 내려놓더니 자세를 고쳐 대답했다. 춘삼월이 되면 봄옷으로 갈아입고 젊은이 대여섯 명과 동자 예닐곱 명을 데리고 나가서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의 광장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올까 합니다. 말하자면 자로는 강병(强兵)의 나라, 염유는 부민(富民)의 나라, 공서화는 예악(禮樂)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했고 증점(曾點)은 기수라는 데서 물놀이하다가 바람 쐬고 놀다가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공자가 다른 제자들 말에는 빙긋이 웃기만 하다가 증점의 말은 그것을 인정하고 허락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퇴계는 갑자기 그의 시에 왜 이 구절을 집어 넣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 주희(주자)는 다른 제자들이 섣불리 정치에 뜻을 두고 있지만 증점은 참다운 인간으로서의 가치관과 자세에 대해 올바르게 천명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다른 제자들이 남을 부리고자 하는 의욕을 이야기했지만 증점은 자기를 다스리고 싶은 그 마음이 표현한 것이며, 그것을 공자가 높이 인정한 것은 증점이 자기 자신이 처한 위치를 알고 그 속에서 자신이 취할 태도를 정해 자기완성의 길로 가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어서 그것이 곧 올바른 군자의 길이라고 풀이한 것이다. 퇴계가 봄날의 시에다 이런 뜻을 담은 것은 퇴계가 고향인 안동 도산에 내려와 서당을 열고 생활할 때의 생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퇴계는 친형님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목숨을 잃자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완전히 굳혀 1561년에 서당 건물을 완성했고, 서당 주변에는 집 옆의 샘을 살리고 연못부터 울타리, 화단까지 직접 디자인했고, 집 앞 오솔길의 입구와 낙동강 변의 천연대와 천광운영대까지를 찾아 다듬어놓음으로써 서당 일대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정리해놓았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학문과 수양과 교육을 시작했다. 퇴계는 그렇게 도산서당을 세워 거기에서 증점이 말하고 공자가 인정한 학문의 방법론을 일상생활에서 구현한 것이라 하겠다. 증점의 일화는 세상을 자기가 다스리겠다고 호기를 부리는 것보다는 먼저 자기부터 갖추어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퇴계는 선비들이 ‘도를 밝히고 세상을 구하다(明道救世)’의 삶을 치열하게 사는 것은 반드시 관료의 삶을 사는데 있지 않고, 자기 수양을 해서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다시 인용한다. 그것이 도산서당으로 들어와 서당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려한 그의 속마음이었다. 참된 수양과 학문과 교육으로 진정한 인간을 만들어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자는, 이른바 ‘물러섬(身退)의 학문’이 퇴계의 속 뜻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학자들도 모두가 논어를 읽고 주희를 공부했기에 공자가 증점에 대해 평가한 이 부분을 다 공부하고 주희가 말한 이런 경지를 추구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삶을 산 인물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은일적 삶을 항상 즐기면서 산다는 것은 때론 관료적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기에 세속에서의 성공과 명성의 유혹을 넘어서기가 어렵다. 그러나 퇴계는 겉으로만 물러가는 척하는 풍토를 아쉬워하며 진정으로 자연으로 돌아와 공자의 속 뜻, 공자가 말한 요순의 세상을 위한 방편을 몸으로 체현하자는 것이며, 그 말을 봄에 대한 시의 두 번째 연(聯)에서 말한 것이다. 겉으로 보면 하루가 지나는 과정을 쓴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공부와 수양의 길을 제시하고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퇴계는 학문과 덕행을 힘쓴 옛 성현들의 삶을 시 속에 녹여 그들의 길을 함께 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퇴계가 도산에 들어온 이유이자 까닭이라고 생각하고 필자의 최근 저서 『퇴계가 도산으로 간 까닭은』에서 밝혀 보았다. 많은 분들이 학문을 하고 있지만 세상은 왜 이리 어지럽고 혼란스러운가? 학문은 진실을 탐구하는 과정이라면, 학문을 하신 분들은 진실해야 하는데 왜 온갖 요설과 사설이 난무하고 세상이 어지러워도 학자들이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가? 학문을 하는 분들이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완성을 추구한다면 세상이 밝아질 것이고,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하다는 퇴계의 생각을 이 멋진 봄에 다시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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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도산서원의 품격세계유산으로까지 지정된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찾은 게 몇 번쯤 될까?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을 정도다. 그러함에도 첫 번째 봉심(奉尋)만은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된다. 1980년 추향(秋享)이었는데, 초헌관(初獻官)으로는 퇴계 선생의 직손(直孫)인 백주(白洲) 이원윤(李源胤) 옹(翁)이, 상례(相禮)는 도산(陶山) 하계(下溪) 출신인 이윤항(李潤恒) 옹(翁)이었다. 진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초성까지 참 좋았던 어른이었다. 안동대학교 한문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필자는 어떤 계기에서였는지는 모르나, 그 경건한 도산서원 향사에 ‘학생’ 신분으로 참사(參祀)하게 되었다. 같이 간 이로는, 고등학교 5년 선배인 권혁윤(전 안동과학대 교수), 한 해 선배인 박명철(전 고등학교 국어교사), 한 해 후배로 현재 안동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임 중인 이성규 박사였다. 그때가 벌써 43년 전 일이다. 2023년 3월 12일 일요일, 도산서원에도 매화가 피었겠지? 싶어서 귀경을 잠시 미룬 채 서원으로 차를 몰았다. 혼자 ‘도산탐매(陶山探梅)’에 나선 셈이다. 예상대로 매화는 막 피기 시작했다. 도산서당(陶山書堂) 옆에 조성된 매화원은 물론 역락서재(亦樂書齋) 앞의 노거수(老巨樹)에도 어김없이 꽃은 피었다. ‘산다는 것은 꽃 소식을 듣는 일’이라더니, 와서 보니 ‘참 잘 왔다’였다. 퇴계 선생께서 남긴 "문 닫은 채 솔바람 듣고(松風關院聽), 눈 속 매화를 화로 낀 채 바라보네(梅雪擁爐看)”라는 선생의 싯구가 떠올랐다. 아직은 쌀쌀한 봄날, 아랫목이 그리울 때인지라, 도산서당 완락재(玩樂齋)의 아담한 방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선생께서 계셨다면 문을 열고 이렇게 막 핀 매화를 바라보고 계시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매설(梅雪)’은 눈을 맞은 채 핀 설중매(雪中梅)일 텐데, 그것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옹로(擁爐)’ 즉 화로를 낀 채 본다는 표현은 신의 도움까지 받은 게 아닐까 싶었다. 숙종 때 이조판서에다 15년간 대제학까지 지냈던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 1657-1723)가 퇴계시 가운데 더욱 맛을 느꼈다는 시이기도 하다. 이처럼 상쾌한 기분을 품고 선생의 유품을 전시한 옥진각(玉振閣)으로 걸음을 옮겼다. 늘 보아도 감명 깊었던 지극히 소박한 서기(書丌, 冊床)와 아울러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매화연(梅花硯)과 매화등(梅花燈)이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있었다. 이들 기물(器物)을 보는 것만으로도 선생을 뵙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유가 있어 시선을 다른 자료들로 옮겼다. 복제품들로 전시장의 대부분이 채워져 있었다. 사연이야 있겠지만,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진품(眞品)들에 눈길이 더 갔다. 영문으로 번역까지 된 안내문을 가만히 읽게 되었다. 퇴계 선생께서 편집해 조선 선비들의 필독서가 되었던 ‘회암서절요(晦菴書節要)’가 펼쳐져 있었다. 그 책 첫째 장 하단(下段)에 ‘도산서원(陶山書院) 상(上)’이라는 묵서(墨書)가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도산서원 광명실(光明室)에 소장된 책 가운데 한권 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를 소개한 안내문에는 "1561년 문인 황준양(黃俊良)에 의해 간행된 목활자본 15권 8책이다.”라고 되어있었다. 문제는 ‘황준양’이라는 표기다. 혹시 싶어 황금계(黃錦溪) 종손에게 확인해보니 그렇게 쓴 예는 없다고 했다. 오식(誤植)이다. 이어진 "선생의 수택본으로 곳곳에 비점(批點)과 주기(註記)가 있다”는 부분은 일견 완전해 보이지만, 첫째 장 상단에 주묵(朱墨)으로 주서(註書)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주기(註記)’는 ‘주기(朱記)’가 바른 표기일 듯하다. 문제가 있다 싶어 다른 안내문까지 이어서 읽어보게 되었다. ‘이퇴계서초(李退溪書抄)’다. "선생의 8대손 초초암공(草草唵公:泰淳)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김이교(金履蕎)에게 빌려 복사한 것이다. 10권 10책이다.”라는 것이었다. ‘초초암공’은 대사간을 지낸 ‘초초암공(草草庵公)’이 정답이고, ‘김이교(金履蕎)’는 우의정을 지낸 죽리(竹里) ‘김이교(金履喬)’이며 ‘복사’는 ‘필사(筆寫)’가 바른 표현이다. 그 옆에 있는 등경(燈檠) 설명문에는 "등잔을 엊어 놓던 등잔거리로서”라는 것에 ‘엊어’라고 오식(誤植)한 것을 진작 인지해서인지 ‘ㄴ’을 ‘수기(手記)’해 궁색하게 잘못을 수정해 두었다. 그러나 이 역시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도산서원의 품격에는 모두 어울리지 않는 잘못된 방식이다. 고식지계(姑息之計)다. 우리의 유산은 ‘세계유산 등재’를 자랑하는 것을 넘어서 이를 기리고 배워 후대에 이어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오식을 오래도록 간과, 방치하고 있는 현실은 분명 문화재 당국이나 도산서원 관계자는 물론 필자를 포함한 관람객 모두에게도 등한(等閑)히 여겨 지나친 잘못이 없지 않다고 본다. 조속한 시일 내에 그 정오(正誤)를 살피고 가려서 바로잡아야 한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다. *고식지계 (姑息之計):임시방편으로 당장 편한 것을 택하는 꾀나 방법.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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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머니즘박물관.....'신복 神服'을 발간하며샤머니즘박물관에서는 2022년 사업으로 '신복(神服)' 도록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살아있는 신령 그림 신도(神圖)” (2018년), "샤먼 영물(靈物)” (2019년)에 이어 발간되는 샤머니즘박물관의 도록 시리즈입니다. 이번에 발간되는 '신복(神服)>에는 의대(衣襨)를 비롯한 띠, 가사, 갓, 포, 주머니, 가체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록되는 신복 모두가 신앙 현장에서 쓰였던 것이고, 서울굿 금성당제 신복의 경우에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복은 무교의 본질과 신앙 구조를 비롯한 기능∙의미∙형태 등을 알게 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유형적 자료입니다. 이들은 신앙성이 강조되는 신성한 귀물(鬼物)이면서 신물(神物)이며 인간이 신과 만나는 매개체로서의 성물(聖物)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복을 한 권의 도록으로 묶어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 굿은 함경도굿, 평안도굿, 황해도굿, 서울굿, 경기도굿, 충청도굿, 전라도굿, 경상도굿, 남해안굿, 동해안굿, 제주도굿으로 나누어집니다. 이와같은 구분은 굿의 형태가 지역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역적 굿에 따른 신복 또한 형태와 의미 등이 다르게 응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도록에 수록된 신복은 서울굿, 황해도굿, 평안도굿의 것입니다. 황해도굿과 평안도굿은 북한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남한에서 전승이 이어지고 있고 그 종류도 무척 다양합니다. 서울굿은 한때 한양굿으로 불리면서 인접 지역의 경기도굿과 다소 차이를 갖고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두 지역의 굿이 섞이면서 신복 또한 혼합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에 본 도록에서는 서울굿 신복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신복(神服) 발간에 도움 주신 평안남도무형문화재 성황대제 예능 보유자 이정연님을 비롯한 송석란 전승교육사님, 최송인 이수자님, 황해도무형문화재 해주본영대동굿 김정숙 보유자님, 국가무형문화재 서울새남굿 이수자 및 금성당제보존회 강민정 부회장님에게도 고마움 전합니다. 끝으로 은평구 김미경 구청장님과 은평구의회 기노만 의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모든 분께도 감사의 말 전합니다. 금성당·샤머니즘박물관(관장 양종승)에서는 2022년 사업으로 『신복(神服』 도록을 발간하였다. 이는 『살아 있는 신령 그림 신도(神圖)』(2018)와 『샤먼 영물(靈物)』(2019)에 이은 세 번째 도록(圖錄) 시리즈이다. 신복은 신앙성이 강조되는 신성한 귀물(鬼物)이면서 신물(神物)이며 인간이 신과 만나는 매개체로서의 성물(聖物)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복(神服)은 무교(巫敎)의 신앙 의례적 본질과 구조를 비롯한 기능, 의미, 형태 등을 알게 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유형(有形)의 자료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이번 『신복(神服』에 수록된 유물은 샤머니즘박물관의 소장품으로써 의대(衣帶)를 비롯한 띠, 가사, 갓, 포, 주머니, 가체(加髢) 등 과거 신앙 현장에서 쓰였던 것과 현재도 전승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금성당제 신복을 포함하고 있다. 신복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며 그 하나하나에 담긴 유무형 유산의 의미는 한민족 전통신앙 및 민속의 한 면을 알게 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에, 이번 샤머니즘박물관이 발간한 『신복(神服』 도록은 앞으로의 민속학 및 복식학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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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성 생애구술사 첫 책 출간 ‘여성의 삶으로부터, 전통을 잇다’전통문화 계승에 수십년을 헌신한 경남 여성 8명의 삶을 담은 책이 나왔다. 경상남도여성가족재단은 7일 "경남여성의 삶을 기록하고 재조명하는 ‘경남여성 생애구술사’ 첫 책으로 <여성의 삶으로부터, 전통을 잇다>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책에서는 이옥수(88) 거창삼베길쌈 예능보유자, 김옥연(80) 통영오광대 명예 예능보유자, 조순자(79) 가곡 예능보유자, 배순화(77) 매듭장 보유자, 김태연(75) 진주검무 예능보유자, 강옥선(71) 고성농요 전승교육사, 황둘선(62) 사천마도갈방아소리 전승교육사, 최선희(62) 밀양백중놀이 전승교육사 등 8명의 삶을 재조명하고 있다. 재단은 경남을 대표하는 전통 문화예술 분야에서 20년 이상 헌신한 60대 이상 여성으로서, 국가 또는 경남도 무형문화재 보유자 또는 전승교육사를 대상자로 선정했다. 연구책임을 맡은 재단의 이정희 연구위원은 "전통 문화예술 분야 여성을 책 주제로 정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영화 <서편제>였다. 하지만 이들을 만나서 들은 삶의 이야기는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딸에게 남도소리를 전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서편제>의 아버지는 영화 속 인물일 뿐이었다. 여성을 집안의 일원으로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던 시대에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문화를 딸에게 도제식으로 훈련시킨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고 덧붙였다. 책에 실린 여성 대부분은 우연히 또는 운명적으로 배운 전통 문화예술을 오랜 기간 연마하면서, 전통 문화예술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됐다. 8명 가운데 어릴 때부터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배운 이는 조순자 가곡 예능보유자뿐이다. 이옥수씨는 여자라면 당연히 삼베길쌈을 해야 하는 경남 거창 시골마을에서 태어났고, 70년 넘게 하다 보니 거창삼베길쌈 예능보유자가 됐다. 강옥선씨는 결혼해서 남편 고향마을에서 살았는데 고성농요가 계승되는 마을이어서 주민들과 함께 노래를 배우고 부르다 보니 고성농요 전승교육사가 된 사례다. 김태연씨는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국악학교에서 춤과 악기를 배우다가 진주검무 예능보유자가 됐고, 황둘선씨는 우연히 찾아갔던 여성 농악단에서 무용·판소리·민요까지 배우면서 사천마도갈방아소리 전승교육사가 됐다. 최선희씨는 부녀소방대에서 오북 강연을 접하면서 북의 매력에 빠져 밀양백중놀이 전승교육사의 길을 걸었고, 배순화씨는 생계를 위해 편물점에서 배운 기술을 더 발전시켜 매듭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김옥연씨는 먹고사는 일의 괴로움을 해소하려고 춤을 배우러 갔다가 통영오광대 명예 예능보유자가 됐다. 이정희 경남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은 서문에서 "여성 전통문화 보유자들의 삶은 영화 ‘서편제’를 떠오르게 하지만, 실제 만나서 들은 삶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갔다”며 "여성을 집안의 일원으로 인정도 안 하고, 기본적인 교육도 안 시키는 분위기에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문화를 ‘도제식’으로 훈련시킨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시대를 살아왔던 분들이었다”고 말했다. 책은 재단에서 수행한 ‘여성 생애구술사 기록전문가 양성과정’ 수료생 중 필진 7명을 선발해 공동으로 진행했다. 지역 생애구술사 전문가로 구성된 편찬위원회로부터 주제 선정부터 연구자문, 감수를 받았다. 경남여성가족재단은 경남여성 생애구술사 연구를 지속 추진할 계획이며, 올해 한일합섬과 관련된 주제로 구술작업을 진행한다. 재단은 "2021년 ‘경남여성사 발간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경남여성 생애구술사 편찬위원회를 구성해 사업을 시작했다. 올해는 옛 마산과 흥망성쇠를 함께 한 여성노동자 등 한일합섬 관련 여성들을 발굴해서 책으로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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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당의 덧뵈기(문진수.남정숙)전승 재담 및 가사 복원 남사당은 꼭두각시놀음으로 1964년 4월에 중요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되었고, 1988년 나머지 5개 종목 모두 중요무형문화재가 되었으며, 2009년 9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대표적인 전통연희 종목이다. 그동안 남사당 덧뵈기에 관한 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68년 문화재관리국에서 펴낸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40호」, 1974년 심우성의 「남사당패연구」등 연구서 형태의 파편적인 자료들이 남아 있을 뿐 전공자∙전승자들이 참고할 수 있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도서들은 부족한 편이었다. 「남사당의 덧뵈기」를 통해 남사당의 역사적 조망, 남사당 선대 예인들의 공연모습, 덧뵈기의 구조와 내용, 전승자의 계보, 남사당의 탈, 재담 및 가사, 음악, 춤 등에 대한 자료들을 최대한 모으고 기록했으며, 전승되어 오는 원형에 가깝도록 구현하므로 가능하면 전공자∙전승자들, 연구자들의 교과서가 될 수 있도록 구체화했다. 또한 기록만 한 것이 아니라 1965년, 2003년, 2018년 영상기록 및 채록을 기본으로 배역, 의상, 탈의 모양, 출연진, 대사 변화 등 시대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비교분석도 하고, 타 장르와 구분되는 덧뵈기의 탈∙음악∙춤∙재담 및 가사에 대한 특징을 분석해서 넣었다. 1965년∙1974년∙1990년∙2018년 등 총 4개의 재담 및 가사 본은 전공자들에게는 교본이 될 뿐만 아니라 현장성 강한 공연예술의 전승자들과 연구자들에게는 전통예술의 역사적 변화양상을 살펴보기 좋은 전문자료가 될 것이다. 남사당은 백정들(?)이 아닌 궁중예인 남사당놀이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온 산대(山臺)라는 대형무대를 중심으로 열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궁중축제의 일환이었다. 특히 중국 등 외국 사신들이 방문할 때 환영행사로 이루어졌던 산대놀이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들에서는 '남사당=백정'이라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제기되었으나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서는 왕이 참석하고 의금부에서 주관하는 국가행사에 칼을 사용하여 소를 도살하고 신분도 불분명한 내∙외국인이자 비전문가인 백정이 출연한다는 것은 현대와 비교해도 어색한 주장이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남사당놀이의 전신인 산대놀이 공연을 하기 위한 궁중에 소속된 전문재인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조선 후기까지 의금부, 나례청 등에서 전문적으로 관리할 만큼 교육받고 훈련받은 전문가들이었으며, 비단 옷과 한삼 옷 등 고급스런 무대의상을 입었던 전문재인의 신분으로 대우받았다는 그림과 기록들을 제시하므로 남색과 남창, 백정이라는 등의 남사당의 신분에 관한 광범위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고자 했다. 안성남사당놀이 이전에 한양본산대놀이 대부분의 국민들은 남사당놀이하면 안성을 떠 올릴 것이다. 그리고 탈놀이 전문가들은 남사당의 덧뵈기가 양주별산대놀이의 한 유파이거나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또한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남사당의 덧뵈기」에서는 남사당의 덧뵈기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온 궁중 산대놀이를 전승한 탈놀이로, 마을굿에서 유래된 탈놀이와 다른 계통임을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산대놀이가 금지되자 조선시대 궁중에서 산대놀이에 참가하던 전문재인들은 생계를 위해 먼저 애오개, 녹번, 사직, 홍제동, 구파발, 노량진 산대놀이 등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이후 서울지역 산대놀이들이 양주, 송파, 퇴계원으로 퍼져 나갔는데 이들 산대놀이를 궁중의 산대놀이와 구분하기 위해서 별산대놀이라고 지칭했다. 그래서 지금도 양주별산대놀이, 송파별산대놀이, 퇴계원별산대놀이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별산대놀이와 구분해서 본래의 산대놀이를 본산대놀이라고 구분해서 부르고 있다. 이후 서울지역 별산대놀이들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고 대형 장시나 마을굿에 참여하면서 남사당놀이가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안성남사당놀이, 양주별산대놀이 이전에 한양본산대놀이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남사당 덧뵈기 전승의 정신적 교본 유네스코에 등재하기 위해서는 전승되어 온 문화예술 등이 공동체에서 인정받아야 하는 것과 함께 전승을 위한 교재와 교육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동안 남사당에서도 전승되어 오는 자료들이 있었으나 대부분의 전승예술단체에서 그렇듯이 흩어져 있거나, 부분적인 자료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승자와 교육시스템은 존재하고 있으나 교재가 부실한 채로 전승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번 「남사당의 덧뵈기」는 남사당 최초의 종합 완결판과 같은 성격으로 우리시대에 구현되고 있는 남사당 덧뵈기의 탈, 음악, 춤, 재담 등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로서 오늘에 와서야 남사당의 덧뵈기 교재가 완성되므로 전승문화예술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 구비되었다고 하겠다.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소중한 자산이자 전통예술, 전통연희임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고, 현장예술인 남사당놀이가 변형되고 왜곡되는 운명을 극복하고 전승을 위해 애쓰신 선대 전문재인들에게 존경을 표하면서 동시에 현재와 미래 남사당놀이 전승자들에게 남사당놀이의 올바른 전승을 위한 기준과 표준모델을 제시하고 싶다. 문진수 한양대학교 무용학 박사 대한민국 연희춤 협회 대표 前)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보존회/사단법인 남사당 회장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 이수자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이수자 무형문화재 제15호 승무 이수자 무형문화재 제17호 영광우도농악 이수자 전북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장구, 북) 전수자 사단법인 남사당 대전지회장 광양버꾸놀이보존협회 부이사장 (주)예맥코리아 무용/연희감독 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 한국무형유산연구소 부소장 전 한양대, 진주교대, 극동대 외 다수 출강 남정숙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예술경영학 석사 성균관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문화마케팅 정책 수립으로 문체부 장관상 안동하회별신굿탈놀이 유네스코 등재 연구 유네스코아시아태평양 무형문화유산센터 중장기 발전전략 수립 유네스코아·태무형유산센터 국제상 연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교류지원센터 중기전략 수립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을 소재로 한 체류형 관광활성화 연구 예술의 전당 중기 발전전략 수립 한국관광공사 체코 프라하ASTA총회 총감독 순천 낙안읍성 민속문화축제 총감독 익산서동축제 총감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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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섬, 사할린을 떠나며판데믹 함께 눈물의 섬, 사할린에 들다 판데믹이 고개를 들던 3년 전, 나는 용케 국내 판데믹을 피하듯 한국을 떠나 눈보라를 헤치며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에 내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거센 풍설에 비행기가 착륙이나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은 '눈의 나라' 러시아 사할린 조종사들에겐 모욕적일 수 있겠다는 걸 알았다. 도착하자마자 사할린한인문화센터 앞뜰의 '일제강제동원희생자추모비'와 '이중징용희생자추모비'에 묵념하고 동포들과의 문화교류를 위한 희망을 품고 교육원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단 열흘만에 판데믹으로 인해 한국어·문화강좌를 원격수업으로 전환했고, 기존의 활발한 국내 교류사업들은 모두 취소되었다. 일제 강제동원과 냉전 역사에 연유한 이산과 슬픔의 섬은 4, 5월까지 산을 하얗게 덮었던 얼음눈이 녹으면서 차가운 물이 도시 전체를 돌아 흘러 차갑고 고립된 눈물섬이 되었다. 새로운 사업이 보다 많이 필요했던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깊이 정들며 사랑에 빠지다 정신 차린 3년을 되돌아 보고자 한다. 재미와 의미를 충족할 교육원(장) 역할 찾기 교류 단절의 시대 문화의 메신저가 되어야 했다. 극동 3개 교육원장은 공무비자 90일이 만료될 즈음 국내(대한민국) 출장을 통해 비자를 새로 발급받아 복귀해야 한다. 판데믹 기간과 경제 제재 시기에 국경을 넘는 일은 PCR 음성증명, 2주간 격리, 멀고 먼 항로의 힘겨움과 모험이 늘 함께 했다. 그럼에도 여행가방엔 한국어 및 문화체험·교육에 필요한 물품, 동포예술단체나 한국어채택교 선생님이 부탁한 물품(한복, 문화지도, 한지, 단어카드, 민속놀이도구, 공연도구 등)으로 채워졌다. 이런 것들은 교류가 원만할 때엔 방문하는 당사자나 단체가 사할린에 오면서 가져오거나 외교파우치를 통해 운송하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아내가 준비해준 내 자취 삶의 반찬꾸러미들은 포기하거나 최소화 해야했다. 한국과 사할린 사이 한국어교육․문화 물품을 나르는 메신저의 역할은, 힘들지만 독보적인 보람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 정부의 한 교육공무원이 거의 고립된 사할린 동포들을 망각하지 않았구나 하는 인식을 드리지 않았을까 하는.....자족적으로 나름 생각해 본다. 한국의 한국어와 한글, 그리고 전통문화에 대한 재미와 의미를 결합하는 어떤 새로운 사업들을 찾고 실행했다. 사할린 동포와 러시아 현지인들이 잘 어울려 사는 것, 한국, 한국어·문화에 대한 호감과 친밀감을 유지․증진하는 것은 서로 관련이 깊다. 교육원의 역할은 문화적 스며듬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다소 썰렁한 문화센터 로비에 이동식 TV를 배치하고 사할린우리말방송과 KPOP, 세계문화유산, 전통과 현대의 한국문화, 경제적 성취에 대한 영상을 거의 매일 상영했다. 영상을 안보는 것 같아도 센터에 출입하는 어른, 어린 학생들이 자주 시청하는 것을 확인했다. 러시아 유일한 한글신문 새고려신문도 놓아두면 금방 없어졌다. 또 학기초 가끔 학교의 교문맞이처럼 한국어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파티안경을 쓰고 어른, 청소년 수강생들과 하이파이브를 했고 연말이 되면 한국노래 버스킹(대중 앞에서 노래하기)을 했다. 사할린에서 원장의 이런 모습은 낯설 것이다. 어색하지만 서로 웃음이 나오고 잘 통하지 않는 언어의 장벽을 넘는 바디랭귀지라고 할까... 재미있으며 쉽게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원장이 품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조금 망설이긴 했으나, 품위, 권위로 살아 온 삶이 아니었으니 오히려 그것을 의식하며 사는 것은 무덤과 같은 홀로 생활을 더 힘들게 할 뿐이라 생각하여 그냥 시도했고 즐겼다. 또한 평생교육 강좌 ‘세계의 민속춤’ 클래스를 열어 2세 동포 어르신과 현지인 함께 센터 강당과 도시 공원, 스키장 리조트 위에서 춤추고 어울리는 기회를 가졌다. 1세 어르신이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사할린 할머니들이 춤추며 즐거워하는 것을 처음 본다. 사할린 할머니들은 너무 힘들게 살아와서 춤추며 밝게 웃는 모습을 도통 보기 어려웠다”고 하셔서 큰 보람을 느꼈다. 평생교육 강좌 ‘글쓰는 사할린’도 인상적이다. 사할린 동포 2세 ‘빅토리아 최’ 작가님을 강사로 모시고 동포 2세분들의 부모와 성장 시절에 대한 기억을 글로 써 역사와 유산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탄생한 강좌였다. 한국어가 서툴다면 러시아어로 써도 좋으니 제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부모들의 아픔과 그 아픔을 보며 자란 기억을 되살려 생명을 주자는 취지였다. 우리말방송과 새고려신문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였고 나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살려 글을 썼고,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새고려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동포 단체들의 행사나 잔치 등에 초대되면 꼭 한국탈과 한삼, 소고, 블루투스 노래방 마이크를 지참했다. 언제라도 민속춤클래스에서 함께한 밀양아리랑을 같이 추고, 소고춤과 탈춤, 사할린동포 애창곡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정체성(идентичность)의 실마리와 함께 카레이츠(корейцы)의 신명나는 문화를 보여드리고자 하는 의미였지만, 실제로는 내 적성에 너무 맞기 때문이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모국)과의 문화교류 단절을 보완하는 업무 찾기 교육원의 본연 업무는 한국어와 한국문화교육이다. 판데믹 전까지 방학에 활발히 오고 가던 사업이 중단되자 한국어 학습의 동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외국어학습은 익숙한 접촉과 소통이 핵심인데,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교육원장 과제 수행 대회”였다. 한국의 시낭송, 자신의 꿈 말하기, 한식만들기나 KPOP 춤·노래 영상, 한국영화 감상 말하기 영상 등을 제출하면 한국음식 체험권이나 한국 기념품 등을 상품으로 주었다. 주말에는 한지공예와 매듭공예, 김밥만들기 등의 특별수업을 가끔 운영했다. 교육원 공간을 십분 활용해야 하고 말하기 기회를 자꾸 주는 것이 언어학습에 중요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2022년 여름방학에는 처음으로 사할린 초·중등학생을 위한 한국어·문화캠프를 열었다. 한글학교와 한국어채택교 선생님·학생, 아리랑무용단이 리더가 되어 한식만들기, 한글쓰기, 민속춤, 민속놀이 코너를 운영하여 한국어와 문화에 대한 친밀감을 갖도록 했다. 학교에서 제2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과 채택 가능성이나 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지방도시 10개교 학생 900여명이 참여했고 전세버스를 빌려 포로나이스크와 마카로프 도시를 향해 새벽에 출발하기도 했다. 캠프가 끝나고 많은 학생들이 다가와 사진을 찍자고 했고 자신들의 작품을 자랑했다. 한글학교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시작했지만, 단절의 시대에 참 괜찮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이 지면을 빌어 선생님과 학생들, 아리랑 어르신들게 감사드린다. 단절을 보완하는 또 하나의 시도는 하바로브스크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 동포의 만남이다. 하바로브스크한국교육원이 개최한 "한국어말하기 큰잔치”에 초대를 받아 사할린 아리랑무용단원을 모시고 참석했다. 무용단은 대회 축하의 의미로 무대에서 ‘도라지’ 춤을, 나는 개량된 ‘봉산탈춤’을 선보였다. 하바로브스크 고려인 아리랑예술단의 환대를 받았고 공연의 반응은 뜨거웠다. 무엇보다도 하바로브스크 아리랑센터에서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의 뜨거운 포옹, ‘도라지’ 민요와 춤을 화합하여 공연하는 장면, 밀양아리랑 민속춤을 함께 추는 흥겨운 수업 장면은 마치 다큐멘타리의 한 장면 안에 들어간것 같았다. 문득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가르치는 블라디보스톡 24학교 교장 선생님의 제안, 즉 "지금 한국과 교류가 어려우니, 블라디보스톡·사할린·하바로브스크의 한국어 채택교끼리 공동수업이나 대면 교류 같은 것을 해보자.”는 말씀이 생각났다. 연해주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 동포의 교류가 우선 현실화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내가 이런 역사적인 자리에서 밀양아리랑을 가르쳐 드리다니, 참 믿을 수 없는 장면이고 보람된 시간이었다. 사실 교사연수에서 배운 봉산탈춤 기억을 살려 처음 체부라슈카 유치원 행사에서 모험적으로 초연한 적이 있다. 이 영상을 본 사할린국립대 엘비라 교수님의 제안으로, 한국 탈 색칠하기 행사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공연하고, 행사 참가자들에게 가르쳐 함께 탈춤을 추게 되었다. 사할린에 처음으로 탈춤을 소개한 격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2022년 11월 30일, 한국의 탈춤이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재에 등재 결정되어 남달리 보람이 컸다. 사할린 우리말방송 <한국의 상징> 코너에 ‘한국의 탈춤’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상징> 코너에는 3년간 ‘한글’, ‘추석’, ‘아리랑’, ‘설’, ‘정월대보름’, ‘한식(절기)’, ‘한식(KFOOD)’, ‘온돌’, ‘직지·금속활자·한지’, ‘이순신·난중일기·거북선’, ‘독도’ 등 한국의 상징을 소개했고, ‘한국의 무술’, ‘청자와 백자’의 촬영을 마쳤다. 한국의 공무원으로서 사할린 동포들께 드리는 기억의 노래 선물을 녹음했다. 국내출장 중에 KBS라디오 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에 나가 사할린 동포 소식을 전하는 자리에서 교육원 수강생 사할린 동포 2세 김경순님의 개사곡 두곡을 무반주로 불렀다. 부모와 어린 큰오빠의 이별과 50년 만의 만남 또 이별과 사별의 한맺힌 사연을 담은 가사였다. KBS한민족방송을 진행하는 박해상 MC가 당신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사할린에 의미있는 노래들을 녹음하여 사할린 동포들께 선물로 드리라는 제안을 하셔서 녹음한 후 음악 CD를 만들어 주셨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분이 지으신 가사가 그 분의 부탁으로 불러준 나의 목소리로 녹음이 되었다. 디아스포라의 가족사 사연을 개사하신 김경순님이 2022년 제24회 KBS세계한민족체험수기대회 성인 부모님과 큰오빠의 한맺힌 사연을 수기로 제출하여 대상을 받은 것이다. 사할린 동포를 대표해서 받았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글쓰기를 통해 이산의 아픔을 치유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십여년만에 교육원 수강생 두분의 사연이 KBS한민족 방송에 사연이 소개되어 녹음하여 보내드리고 드리고 소정의 원고료도 받아 전해드렸다. 자주 글쓰시고 방송에 보내셔서 기록으로 남기시길 간곡히 소망한다. 3년 동안 맞이한 3번째 봄날, 헤아릴 수 없는 신명과 의미의 기억들이 사계절의 천연색으로 바뀌며 지나간다. ① 가을의 김치축제에서는 한국에서 가져 온 24시간 막걸리를 담가 현지인들과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막걸리 더 없냐고 묻는 현지 공무원이 계셔서 한번 더 담가 드렸다. ② 공무출장에서 복귀하며 가져 온 팽이, 제기, 딱지, 국궁, 비석치기 등 민속놀이 도구들을 배치하여 추석맞이 민속놀이체험 코너를 운영했다. 교육원과 문화센타로서 당연히 보여야 할 모습이어서 보람이 컸다. ③ 이 행사를 목격한 모스크바 고등경제대학의 연구진이 한국교육원 활동에 대한 인터뷰를 요청하여 난데없이 영어 인터뷰에 뛰어 들었다. 끝내고 난 보람과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던 기억이 있다. ④ 한인회 여성회 초대로 야유회를 가서 6시간 동안 춤을 추었다. 러시아인 한 남성이 몇시간을 지켜보던 모습은, 마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3일 낮과 밤’ 동안 춤추던 동이족을 묘사하던 이웃 민족의 모습이 저러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⑤ 코르사코프 한인회에서 여름날 주최한 ‘한국의 맛’ 행사에서 원없이 노래하고 춤추었고 땀 흘렸다. 여름 한복이 없어 땀으로 고생했지만 그것은 고생이 아니라 사랑이고 신명이었다. 고스란히 인생의 끝까지 가져갈 장면들이 너무 많아 이렇게 이임한 후 떠나, 다시 돌아오기 쉽지 않은 이 시대가 야속하다. 떠나는 이의 소망과 감사 지난 3년은 비록 판데믹과 제재로 인해 고립과 긴 우회로 값비싼 왕래의 비용을 치루었지만, 그 상황을 살아내기 위한 가치있는 역할 찾기와 재미와 신명을 주는 모험적 사업의 시도는 스릴과 보람을 준 시간이었다. 이제 떠나는 즈음에 동포분들께 소망하는 것은, 한국어든 러시아어든 글쓰기를 계속해 주십사 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한인사회에서 그런 기록들이 대대로 전달되어야 고통의 역사가 치유되고 생명과 힘을 얻을 것이라 본다. 사할린 동포들이 글을 쓰고 번역하여 다듬어 KBS 한민족 방송에 자주 보내시면 좋겠다. 그러면 다음세대들이 역사를 기억하고 모국과의 연결을 쉽게 하여 자부심을 갖고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1세대 부모님이 영주귀국을 못하고 돌아가신, 2세대 어르신들은 부모의 고난과 갈망, 자신의 성장기를 더듬어 소중한 감성과 기원, 소망과 원망 등을 글에 마땅이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해자와 모국의 정부는 무한의 책임을 져야 한다. 끝으로 고립과 고독, 환율의 공격과 온갖 제한들 속에서도 잊을 수 없는 보람으로 엮여진 교육·문화 여행과 모험을 보람있게 해주신 사랑하는 부모님, 가족, 형제자매, 첫날부터 끝까지 반갑게 응대해 주신 사할린 동포 어르신들게 마음을 다해 감사드린다. 특히 교육원생 중 작년 KBS한민족방송체험수기에서 대상을 차지한 김경순 여사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또 사할린의 한인 언론방송·대학 및 교육계·문화예술계 지도자와 구성원 단원 여러분들, 또 다른 민족 이웃들, 늘 정성 가득한 한글학교와 교육원·한국어채택교의 한국어․문화 학습자 여러분·선생님들, 또한 성실한 우리 공관과 재외국민 이웃들, 사할린을 사랑하고 기억하는 한국의 국악신문, 아리랑연합회에도 감사드린다. 3개년 교육원장 임기 시절 사할린에서 맞이한 열두 계절동안 하루하루가 저에겐 빛나는 선물이었다. 어떻게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지 정리하고자 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스파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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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함흥도시 연구인가도시공간이 흥미로워 관련된 도서를 읽기 시작한 계기가 있다. 2012년 경기남부지역 통일교육센터 상근직 강사로 2년간 활동했다. 통일교육강의를 하면서 살아온 고향에 대해 무지함을 느꼈다. 경험으로 강의를 이어가기에는 지식이 한참 부족했다. 무지함을 벗어나고자 북한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관련 수업을 듣으며 내가 살았던 공간이 궁금해졌다. 함경남도 고원군 수동구는 시골답지 않는 도시다. 석탄이 식량만큼이나 중요해 탄맥 있는곳에 인력을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1980년대까지 고층건물이 희소하고, 하모니카로 부르는 급조된 단층집이 많았다. 생산에 집중했기에 서비스업이 부족하고 문화생활이 자유롭지 않다. 새로 나온 영화는 명절시즌에 맞추어 방영되는데, 그걸 보려고 사람들이 빼곡하게 늘어섰다. 뒷거래로 뭉치표를 구매해 야매로 파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유행되었던 음악, 무용, 영화가 흑백화면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도시연구는 평양 위주로 많았고 지역도시 함흥관련 선행연구가 적었다. 중요하게 식민도시에서 사회주의도시이행 관련 연구가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석박사 논문을 함흥으로 준비했다. 함흥을 읽다보니 내가 살았던 고원군 수동구보다 훨씬 이야기가 많았다. 함흥은 외사촌형제들이 살고 있고 친언니가 함흥 주변으로 시집가는 바람에 닳도록 드나들었던 지역이다. 함흥에 있는 ‘도지방총국기능공학교’에서 직업교육도 받았다. 함흥역전과 동흥산구역, 회상구역으로부터 장진, 부전으로 가는 신흥선 기차를 타고 다녔다. 함흥냉면에 원조 ‘신흥관’에서 농마국수도 먹었다. 1984년에 지어진 함흥대극장 앞으로 수 없이 지나다녔다. 함흥에 얽힌 이야기를 담으니 살아온 생애처럼 사람들이 도시를 만들어온 흔적이 보였다. 아득한 옛날부터 길이 생기고 사람이 모여 도시를 만들어왔다. 사람이 도시를 만들고 도시가 사람을 만들듯 도시생애를 통해 사람과 사회가 변화해온 과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떠한 이유로 도로가 생기고, 건물을 올리고,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흔적을 남겨놓았다. 도시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그래서 도시를 변압기에 비유한다. 도시는 새롭게 태어나 성장하기도 하지만 쇠퇴하고 몰락하면서 사라지기도 한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회가 연결되어 도시 성격을 만든다. 사람이 모여 있는 만큼 정치적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인 것이 공간을 지배하고 도시문화를 만든다. 도시와 도시는 비교 가능하다. 개발된 지역과 덜 개발된 지역을 살펴보면 사람과 사회를 알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시간에 도시가 있다. 공간은 영원한데 사람과 사회는 시대에 따라 모습을 달리해왔다. 색바랜 기억과 지식으로 도시에 얽힌 이야기를 꺼낸다. 자연, 사람, 사회 요소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는다. 북한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북한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고,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도시기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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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땅을 열어라, 캥~마주깽 놀아라 (조춘영)통일의 그날에 벌일 ‘나라풍물굿’을 할 날을 그리며 2019년 3월 1일, 광화문 사거리에서 시청역 광장에 이르는 세종대로에는 전국 팔도에서 모여든 수백 개의 풍물패, 수만 명의 풍물꾼들이 울리는 ‘만북’(만 개의 북) 소리가 웅장하고 신명나게 울려 퍼졌다. ‘만북 울림!’이다. 이날 전국의 풍물꾼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풍물굿판에 이어 <만북으로 열어 가는 새로운 100년 선언문>을 선포, 채택하면서 3·1운동 100주년을 ‘새로운 100년, 생명의 새 세상’으로 향해 가는 원년(元年)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모인 이들 모두가 굿쟁이이고 보면, 이날의 선언문은 단순한 말모이가 아니라, 신력(神力)을 갖춘 기도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의 풍물굿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날이 된 것이다. 그에 앞서 2014년에는 농악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해방 이후 무형문화재 정책과 제도가 생긴 이래 국가무형문화재와 지방무형문화재에 40여 개의 풍물 단체가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와 1950~1960년대 근대화 지상주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농악은 한때 천덕꾸러기 신세를 지나 절멸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이후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며 여성농악단과 사물놀이를 중심으로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하여 80년대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대학풍물굿 운동을 통해 폭발적인 부흥을 이루고, 사물놀이의 세계화를 거쳐, 당당히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풍물굿 문화와 21세기의 풍물굿 농악/풍물굿은 한민족의 대표적인 기층 오락, 예술이다. 전통적으로 민간에서는 세시풍속으로 일 년 중의 각종 절기에 맞춰 다양한 쓰임새와 목적으로 농악/풍물굿을 놀았다. 농악/풍물굿은 그 양식 안에 음악, 무용, 연극, 놀이, 종교, 군사, 교육, 사회, 문화 등의 요소가 망라되어 총체문화를 이룬다. 풍물굿은 바로 민중 자체요, 민중생활의 요체이며 한민족 시민대중문화의 원천이다. 온갖 신과 만나게 해 주는 매체다. 굿은 신이다. 신명이다. 신탁이다. 일상 속에서 성스런 것들을 끌어들여 정성으로 놀리고 참 마음으로 풀어내어 현실 가운데 어려움을 깨나가는 도구다. 전국의 마을 당산 앞에서, 중앙마당에서, 집집 처소에서 장구, 징, 쇠, 소고들 풍물소리가 끊긴 적은 없었다. 21세기에 들어와도 풍물굿은 죽지 않고 새로이 재창조되어 깊어지며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20세기를 지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풍물굿은 한편으로 급격하게 탈-맥락, 재-맥락화 되어 가고 있다. 특히 촛불시민혁명 과정에서 풍물굿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 다른 흐름으로는 10여 개 대학에 전통연희과에서 전공자들이 풍물굿을 공부하고 졸업한다. 무형문화재 지정을 준비하고 있는 지역 풍물굿, 토박이 풍물굿이 여전히 산재해 있다. 풍물굿은 이 시대 그리고 21세기를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가고 있다. 상쇠, 풍물굿의 지휘자이자 예술가이자 살림꾼! 이러한 풍물굿의 저력과 생명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전국에 얼마나 많은 상쇠가 있을까? 굿문화와 풍물굿이 진정 이 시대에 필요한가? 어찌하여 그러한가 직접 묻고 싶었다. 어떠한 실천들이 있었고, 어떠한 지향이 있었고, 그래서 지금 우리 풍물굿은 어디로 가는 있는지 답을 듣고 싶었다. 답은 현장에 있다. 『하늘땅을 열어라, 캥~마주깽 놀아라』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필자가 오늘의 풍물굿 현장을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게 풍물굿문화를 이어줄 다리 공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부지런히 다리품을 팔고, 입덕을 베풀어[인터뷰] 일구어낸 소중한 공덕의 탑이다. 저자는 세계, 전국, 지역, 지방, 마을을 누비며 풍물굿의 현장을 섭렵하였다. 저자 조춘영은 풍물굿 연구자, 담론가로서 이 시대 풍물굿 현장을 기록하고 풍물굿쟁이의 소리를 담아야 할 사명감에 넘치지만, 그것인 힘겨운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노동, 두레적 품팔이라는 생각이 뚜렷하다. 그중에서도 이 책에서 풍물굿의 굿쟁이(지휘자)이자 지도자이며, 살림꾼(일꾼)이자 스승이고, (풍물) 사상가이자 예술가로서의 상쇠에 주목하였다. 무엇보다 상쇠는 시대를 읽고 예술문화를 말하며 지역과 생명공생체를 이끌어가야 할 감수성과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다. 여전히 대다수 민속학자나 풍물굿 연구자들이 전통문화라는 범주 속에서 풍물굿을 바라본다. 풍물굿 연구의 결과물은 무형문화재 정책이나 제도에 포함된 일부 단체들 혹은 전통마을풍물굿으로 한정된다. 저자는 이러한 흐름에서 새 길을 내고 이 시대 담론, 시대 의식이라는 지평에서 풍물굿을 바라본다. 그래서 20세기 풍물굿이 아니라 ‘21세기 풍물굿’, 즉 풍물굿의 현재와 미래를 상쇠들과 더불어 조망하고자 한다. ‘21세기 상쇠론’ 전과 후 이것이 저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업이 아니다. 2016~2017 박근혜 국정농단 촛불집회에서 풍물굿쟁이들은 매주 풍물굿판을 벌였고, 저자는 이를 동영상과 면담 구술집으로 기록했다. 1차 결과물로 《새나라로 가는 길굿 - 촛불시민혁명 풍물굿에 대한 기록과 담론》을 세상에 내놓았다. 박근혜국정농단 촛불집회는 이미 과거지만 촛불시민혁명은 과거형, 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시대의식의 연장에서 본 ‘21세기 풍물굿 상쇠론’은 기획되었다. 이제 풍물굿쟁이도 당당하게, 이제 풍물굿이라는 이름도 떳떳하게, 이제 무시와 멸시와 천시의 프레임에서 벗어난 풍물굿판을 벌이고자 하는 염원도 담겨 있다. 촛불시민혁명이 현재형이듯 풍물굿도 현재형이다. 과거, 역사, 전통이라는 옛것 프레임으로 한정할 수 없다. 왜? 전국의 수많은 풍물굿쟁이와 광장, 마당에서 벌인 풍물굿판이, 박근혜 국정농단 촛불집회에서 새나라로 가는 길굿이, 2019년 3.1 100주년 기념 만북울림 나라굿이 증명하였다. 그래서 21세기 풍물굿 상쇠론이다. (풍물굿을 농악이라는 20세기 무형문화재 제도 속 국가주의에 예속된 종목으로 잡아놓을 수 없어서 21세기 미래 시점을 펼쳐내고자 했다.) ‘21세기 상쇠론’은 계속되어야 한다 전국 30여 명의 상쇠를 목표로 시작했지만 남녀노소, 지역과 영역을 고려하여 25명에서 그쳤다(그중 10명을 이번 권1에 수록하였다. 나머지는 곧 나오게 될 다음 책에 수록된다). 풍물굿이라는 연구 주제로는 최초로 전국 범위에서 다양한 (풍물적) 배경을 가진 상쇠들을 만났다. 면담을 하기 전에 이미 수년 전부터 교류를 하였음은 물론이고, 실제 면담에 들어가서도 두 번의 밤을 새고서야 면담 완결된 상쇠도 있고, 면담 후 이어진 이틀간 뒷풀이를 계속한 경우도 있었다. 비오는 날 강화 들판을 보며 꽹매기 소리도 주고받고, 보존회 사무실에서 수시로 결재를 주고받는 가운데 진행된 수고로운 면담도 있었다. 저자의 후일담에 따르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간 겪어온 고난과 고민의 고통이 떠올라 눈물을 흘린 일은 다반사요, 같은 동지로서 굿판을 지키는 일의 어려움에 공감의 눈시울이 번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왜 이 작업을 시작했을까? 꼭 했었어야만 했나? 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며 상쇠를 만날 기대와 설렘에 충분히 행복했으니 이제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 책을 읽는 당신, 굿쟁이들의 일이라고 고백한다. 무엇보다 통일의 그날에 남과 북의 모든 풍물패가 모드들어 휴전선을 넘나들며, 지난 역사의 원망과 한숨을 모두 씻어내며, 신명으로 새 나라 건설을 축원하게 될 ’나라풍물굿’을 벌일 것을 기약하고 있다. 권1 말미에 논문 '21세기 풍물굿 현장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실어 풍물굿 현장의 다양한 활동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 권2(2020년 하반기 출간 예정)에서는 종합적인 차원에서 ‘21세기 풍물굿 상쇠론’을 제시할 예정이다. 저자 조춘영 박사는 풍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이며, 현자에서의 풍물 상쇠이기도 하다. 전국의 풍물 현장을 두루 답사하며, 전문 풍물패 또는 마을공동체 풍물패의 상쇠들을 만나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동안의 풍물굿 문화의 변천, 성장, 진화 과정을 들어보고, 특히 상쇠를 중심으로 하여 풍물굿과 상쇠의 예술가적 특성, 문화적/장르적 미래, 한국사회에서 풍물의 의의와 전망 등을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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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소리 '꽹과리'와 풍물굿 악기 특성(조춘영)풍물굿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지방의 마을과, 도시, 학교 등지에서 연행되고 살아있는 전통문화이다. 이는 우리 민족이 생긴 이후 줄기차게 전승하고 발전시켜 온 공동체 민중예술이다. 필자는 이미 풍물굿의 연원을 단군신화의 환웅이야기로부터 보아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 내용을 간략히 보면, 하늘에서 천부삼인(天府三印)을 받은 신인(神人) 환웅(상쇠)은 풍백(징), 운사(북), 우사(장구)와 함께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목적으로 이 지상세계로 내려온다. 그리고 신단수(당산나무)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니 그곳을 바로 신시(마당)라 한다. 이 환웅 이야기가 현 풍물굿의 신화적, 사상적 토대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 전승되는 마을풍물굿에서의 악기, 굿물, 당산나무 등의 신화적 상징은 이를 바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밝혔다. 풍물굿의 꽹과리는 지역과 용도에 따라 쇠, 매구, 깽매기, 깽쇠, 광쇠, 꽝쇠, 깡쇠, 소금, 동고, 쟁, 갱정 따위로 불린다. 정악에서는 소금(小金), 불교음악에서는 광쇠, 무속음악에서는 설쇠 등으로 불리운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음악의 목적, 바탕이 되는 신화와 사상 또한 각각 다르다. 본고에서는 꽹과리라는 악기를 이해하기 위하여 풍물굿 악기의 일반적 특성을 정리하며, 꽹과리의 연주자이자 풍물굿의 리더인 상쇠를 중심으로 꽹과리를 해석해보고자 한다. 그래서 결국, 풍물굿은 꽹과리라는 ‘빛’을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가 하나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총체적 행위임을 밝히고자 한다. 풍물굿 악기의 일반적 특징 풍물굿은 꽹과리, 징, 장구, 북의 네가지 타악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들 악기는 매구, 굿물, 풍물, 금고 등으로 각 지방에서 부르고 있다. 이는 악기가 음악연주라는 측면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악기가 가지는 기능과 목적이 다르다. 위는 제의적, 음악적, 무용적, 놀이적, 군사적인 악기의 기능을 설명해주는 명칭들이다. 그렇다면 풍물굿 악기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점은 풍물굿 악기가 ‘마을 공동체의 신물(神物)’이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당집이거나 마을공동창고에 모셔놓다가, 풍물굿을 울릴 때에만 치배들이 악기를 매고 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풍물굿 악기의 일반적인 특징에는 어떠한 점들이 있는가? 마을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고, 함께 신을 모시고 놀아보는 풍물굿 악기의 특징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무율(無律)타악기이다 종족음악학에서 악기분류는 새롭게 4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 중 풍물굿 악기는 몸통울림악기(꽹과리와 징, 金)와 막울림악기(장고와 북, 鼓)로 구성된다. 이들 모두는 고정된 음계를 가지지 않는 ‘무율타악기’이다. 타악기의 장단(리듬)만으로 음악적 완결성을 만들어낸다. 풍물굿은 원천적으로 장단리듬의 반복성이 강하다. 같은 리듬의 반복은 감성과 흥분을 고조시켜 몰아(沒我)와 최면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신비체험을 하게 하는 영적행위(靈的行爲)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풍물굿의 타악 연주는 단순한 리듬을 반복함으로써 공동체를 다시 확인하고 신과 하나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로써 풍물굿의 공동체성, 주술성, 자연성을 볼 수 있다. 꽹과리는 나머지 세 악기를 리드하는 악기이다. 꽹과리의 전두리는 징에 비해 안쪽으로 굽어 있고 짧다. 그래서 소리가 빨리 퍼져나가고, 음고가 높고 엄청나게 커서 강렬하고 충동인 느낌을 준다. 원-하나를 지향한다 풍물굿 악기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원형임을 볼 수 있다. 꽹과리와 징은 정면이 원형이고, 장구와 북도 양편이 모두 원이다. 각 악기채의 끝도 기본적으로 원형이다. 풍물굿 악기가 원형이라는 점은 이 세계를 둥근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자 하는 가치관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둥근 알이라는 형태는 우리 민족의 종족사고와 미의식의 기반이다. 원은 만물생성의 원리와 완전성을 의미하며, 원만무결(圓滿無缺)과 원융무애(圓融無碍)와 통한다. 원은 달과 해 등 우주를 상징하기도 하고 정신세계를 상징하기도 하다. 가장 단순한 출발점인 동시에 종착점이 되는 영원성을 상징한다. 정병호가 지적하듯 우리민족은 원형을 지향하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공통된 의식이다. 원은 순환하는 시간관과 연관되고 음양오행을 형상화하는 우주론적 도형이 되기도 한다. 원의 세계는 바로 일원론의 세계를 말한다. 우주는 하나이고, 만물은 모두 평등한 공동체라는 의식이다. 악기의 구조와 소리는 둘 혹은 셋으로 분화된다 풍물굿 악기는 채 없이 자체만으로 보았을 때 음양의 구조를 가진다. 즉 하나의 악기 안에 서로 다른 성질의 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상대적으로 볼 때 음양의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악기의 구조는 둘 혹은 셋으로 분화된다. 실제 풍물을 칠 때에는 왼손과 오른손, 안과 밖, 왼쪽과 오른쪽으로 구분이 되기도 한다. 징과 꽹과리는 엎어서 보면 평평한 바닥을 가진 그릇모양이다. 드러난 부분이 있고 숨겨진 부분이 있다. 평평한 면을 치게 되면 그 소리는 반대편으로 퍼져 나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종과 유사한 구조로서, 그 내부에서의 소리는 서로 간섭을 하여 새로운 혼돈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구조이다. 특히 꽹과리의 앞면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양성(陽性), 뒷면은 어둠이라는 음성(陰性)의 상징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장구와 북은 좌우의 편을 구분하여 사용한다. 장구는 왼손에 궁채와 오른손에 열채를 쥐고 각각 음양의 소리를 낸다. 이는 소리의 음양성(陰陽聲)을 확실하게 구별해 내기 위한 노력이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죽뿐만 아니라 장구통 역시나 신경을 썼다. 여자소리(저음)가 나는 궁편쪽은 크게 만들고 남자소리(고음)가 나는 채편 쪽은 작게 만드는 것이 그렇다. 채에 있어서도 남자소리를 내야 하는 채편 쪽은 강하고 높은 소리를 위해 막대기(채)를 쓰고, 궁편쪽은 같은 가죽성질인 사람 손바닥을 그대로 쓰거나 채를 쓰더라도 부드러운 소리를 위해 궁굴채를 쓴다. 악기, 몸, 채의 삼즉일 구조를 가진다 풍물굿의 중요한 특징이라 한다면 악기를 메고, 서서 춤을 추거나 걸으며 진풀이를 엮어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악기를 연주한다는 자체가 춤도 되고, 음악도 된다. 악기를 걸개에 걸어서 치거나, 엎어놓고 치거나, 앉아서 치는 것과는 그 논리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악기는 소리를 만들어 내는 도구이자 대상으로 인식된다. 악기를 연주한다고 할 때에 연주자(주체)는 악기를 대상(객체)으로 인식한다. 대부분의 악기와 연주자의 관계는 이러한 틀과 인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풍물굿에 있어서 악기는 대상이 아니고 내 몸의 일부가 된다. 몸과 악기를 이어주고 메타화시켜주는 ‘채’가 있기 때문이다. 몸(주체)은 채를 대상으로 하고, 채는 악기를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악기를 몸통에 메거나 손에 들게 되면서 채의 방향은 악기와 내 몸을 향하게 된다. 악기 ⇙ ⇖ 몸 ⇒ 채 결국 내 몸 자체가 악기와 일체가 되면서 채는 내 몸을 대상화하게 되는 순환관계가 형성된다. 그런데 채는 다름 아닌 내 몸(손)이 주체가 되어 다루는 것이니 또한 주체가 된다. 몸과 채는 각각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가 되는 역설이 발생하게 된다. 이 때 단순히 채를 이용한다고 해서 이러한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채를 이용하는 실로폰 연주의 예를 생각해보라. 연주자는 놓여져 있는 악기를 채를 이용해 두드릴 뿐 위와 같은 인식이 있을 수 없다. 이에 비해 풍물굿의 ‘악기’와 ‘채’와 ‘몸’의 관계가 순환하여 하나되는(삼즉일-삼신) 구조는 악기를 메고 걸어다니며 춤을 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우리 민족의 독특한 ‘장단’이라는 개념이 이러한 몸의 공간적인 연출과 합치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꽹과리춤, 북춤, 설장구, 소고춤 등에 있어서 악기는 내 몸과 하나되어 춤을 만들어 낸다. 꽹과리,하나되는 빛의 소리 꽹과리를 치는 상쇠(쇠잽이)는 해, 광명, 빛을 상징하는 굿물이 몇가지 있다. 우선 꽹과리가 그렇다. 전라도 지역 일부 풍물굿에서는 ‘일광놀이’라 하여 상쇠가 꽹과리를 잃고, 그것을 찾는 과정을 극화하는 대목이 있다. 이는 풍물굿패와 마을공동체가 꽹과리를 빛과 생명으로 인식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를 잃은 상태는 죽음, 무질서, 어두움의 세계이고 다시 찾은 상태는 생명과 질서, 광명의 세계인 것이다. 또한 명칭을 통해서도 꽹과리를 빛으로 이해하는 예를 볼 수 있다. 광쇠, 꽝쇠, 깽쇠, 꽹과리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광은 빛 광(光)자를 나타내며, 깽, 꽝은 천둥, 번개의 의성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상쇠의 등 뒤에 붙이는 일광월광, 머리에 쓰는 전립의 하얀 부포가 해, 광명, 흰빛의 상징이다. 영남과 호남 일부 지역에서는 ‘상쇠’ 등 뒤에 해와 달을 상징하는 두 개의 쇠붙이를 단다. 지방마다 ‘공모’, ‘홍박씨’, ‘일광월광’ 등으로 부르는데, 반드시 상쇠만 단다고 한다. 정병호는 이를 무굿에서의 명도(명도)와 연관지어 설명을 하고 있다. 이에 관한 비교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상쇠가 빛을 등에 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쇠잽이가 머리에 쓰는 전립의 부포가 이와 같은 상징을 가진다. 김헌선은 『풍물굿에서 사물놀이까지』에서 사물악기를 천둥번개 소리, 바람소리, 구름 소리, 빗소리로 비유하였다. 필자는 그 신화적 근거를 환웅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이미 밝힌바 있다. 태양숭배(토템)부족인 ‘한’(한. Han)부족의 수장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주도하여......태양숭배 토템부족은 환인. 환웅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한’(한. Huan. Han)부족이다. 이들은 ‘한울님’의 아들. 자손이라고 생각하며, 태양(해). 밝음(광명), 햇빛, 새빛(東光)을 숭배한다. 그들은 ‘태양’, ‘하늘’, ‘하느님’과 자기들을 연결시켜 주는 동물매체를 ‘새’(鳥)라고 생각하여 ‘솟대문화’, ‘소도문화(蘇塗文化)’를 공통으로 형성하여 갖고 있었다. 고조선문명권의 원민족들은 ‘태양’과 ‘새’를 결합하여 태양신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할 때는 ‘삼족오(三足烏)’, ‘세발 까마귀’로 상징화하여 그리고 표현하였다. 신용하는 위와 같이 환웅족이 태양숭배와 함께 삼족오(새)숭배를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전통이 풍물굿 상쇠의 꽹과리와 부포로 이어진다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신화적 세계를 보여주는 유물이 있다. 일찍이 김재원은 『단군신화의 신연구』(1947년)에서 중국 산동성 가상현 무씨사 화상석각을 단군신화와 대비시켜 8.9할이 복합된다고 밝힌바 있다. 이를 바탕으로 안동준은 무씨사 화상석 그림을 환웅이야기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환웅을 뇌공, 뇌신으로 보고 있다. 이는 풍물굿 악기의 상징이 신화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보면 고구려의 벽화와 중국 한대의 고분벽화는 유사한 신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중국 대륙에서도 광범위하게 보이는 해, 일신의 상징으로 삼족오가 보인다. 토끼, 두꺼비, 삼족오, 구미호가 각각 음양적 존재이며, 음양을 나타내는 우주적 차원의 상징체인 해와 달의 구성요소라는 점에 의해 보다 뚜렷이 뒷받침된다. 달의 구성요소이자 상징인 토끼와 두꺼비, 해의 구성요소이자 상징인 삼족오와 구미호...... 삼족오는 물론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도 역시 일신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해모수의 오우관(烏羽冠), 신라 화랑의 조우관(鳥羽冠), 조선의 상모(象毛)와 공작우(孔雀羽) 등 새깃털 장식의 전통은 바로 삼족오, 새 신앙으로부터 시작하여 풍물굿의 부포에까지 이른다고 볼 수 있다. 풍물굿은 제의이면서 동시에 놀이이다. 그래서 풍물굿놀이라고도 한다. 굿은 그 민족 전통의 신화를 재현하여 우주․ 자연․ 신과 인간이 하나임을 확인해가는 총체적 행위이다. 여기에는 분명 그 민족공동체의 고유한 세계관과 사유체계가 뿌리를 이루고 있다. 악기는 소리를 내기 위하여 만들어진 도구이지만, 또한 그 악기를 만드는 인간의 창조적인 산물이자 그 문화적 특징을 보유한다. 그러므로 음악소리를 만드는 기능적인 요소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인간과 문화사회의 전반적인 요소와 연결되어 악기가 연구된다. 위에서 보이듯이 꽹과리라는 악기는 소리와 음악의 영역을 넘어서 이해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우리 민족의 인식이 그 안에 담겨져 있다. 풍물굿의 꽹과리는 하나의 악기(부분)이면서도 풍물굿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꽹과리 자체가 해와 빛이 되어 밝고 신명난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것이 바로 풍물굿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우리 안의 신을 밝히는 ‘신명(神明)’이다. 그 가운데에 꽹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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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12월은 춥다(2)매서운 추위가 계속된다. 버스를 기다리는 잠깐 사이 볼이 빨갛게 얼어 든다. 아무리 추워도 영하 30도씩 오르내리는 겨울을 살았기에 지금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고 살았던 사람이 눈 속을 뒹굴러도 끄떡없을 패딩을 입고 춥다고 야단이다. 춥지도 않을 추위가 춥다고 생각되니 따뜻한 남쪽에 적응이 되었나 싶은데 다시 보면 추위보다 마음이 추울 때가 있다. 시린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면 북한이탈주민 모두는 시인이다. 돈을 벌어서 가족에게 보내고 현재 삶에도 충실하려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남쪽 사람들처럼 좀처럼 여유를 즐기지 못한다. 시는 마음에 여유가 있어 생기는 것도 아니요. 아프니 그냥 써 본 것이 어느 날 시가 되어 시린 마음을 다독인다. 시를 쓰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고 누군가 읽어주고 공감한다면 기쁨은 배가 되고 살아갈 이유가 된다. 북한이탈주민 이지혜 씨는 시를 써본 적 없다. 그는 십 년이 지나도록 돌아가지 못하고 또 다시 맞이하는 새해가 두렵다. 떠난 것이 불효가 되어 못 견디게 그리운 부모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보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 편지를 쓴다. 다섯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에 바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얼음산이 막혀 있는 것도 아닌데, 가로 지른 분단선 하나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혹하고 야속하다. 그리움을 담으면 꿈속에 엄마가 꼭 안아준다. 엄마품이 따뜻하고 포근해서 온기로 추위를 견딘다. 행복을 멀리한 적 없고 이별을 가까이한 적 없으나 돌아갈 수 없는 고통이 평범한 사람을 시인으로 만든다. 그렇게 그리움을 한 자 한 자 새겨 시를 짓는다. 북한이탈주민은 가을과 겨울 사이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워 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고 잊기에는 인연이 남아 있다. 헤어진 시간이 길어질수록 잊혀질까 두려워 시를 쓰는 사람이 있고, 혼란한 사이를 탈출해 완전한 남쪽 사람으로 변신한 사람도 있다. 아직 사이를 벗어나지 못해 아픔을 느끼는 사람이 시를 짓는다. 시린 마음에 온기를 유지하려 문장을 만든다. 차가운 시선이 머무를 때 시와 문장을 만들며 마음을 덥힌다. 고향에 12월은 춥다. 동지섣달 한 허리를 베어 먹을 만큼 춥다. 무너지게 내리는 눈사태에 연탄불에 모여들어 배가 볼록한 도루메기를 구워먹었다. 오그랑 팥죽을 먹으며 긴나긴 겨울을 보냈던 시기도 있다. 따뜻한 기억은 가족과 함께 있었을 때이고, 차가운 기억은 상실했을 때 마음이다. 자식을 두고 온 어미와 어미를 잃은 자식이 괜찮다고 아프지 않다고 느낀다면 가을과 겨울 사이를 벗어난 사람이다. 시를 써본 적 없는 사람이 시인이 되어 아픔을 노래할 수 있다면 다가오는 새해가 두렵지 않겠다. 고향이 추우면 따라서 마음도 시리다. 남북관계가 얼음이 되면 따라서 마음도 얼어 든다. 북쪽도 따뜻한 남쪽처럼 등 따시고 배부른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주저 없이 추위에 당당하겠다. 주저 없이 가을과 겨울 사이를 벗어나 새해를 맞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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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악신문 선정 국악계 10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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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악계 10대 뉴스 1차 선정, 29題2022년 국악계의 이슈, 성과, 변화상을 볼 수 있는 국악신문 선정 ‘국악계 10대 뉴스’ 1차 26제가 선정되었다. 2차 선정위와 원로자문단의 최종 심의를 거쳐 ‘10대 뉴스’ 선정, 29일 발표한다. 21일까지 각 기관 단체 홍보팀을 통해 40여제를 응모 받아 22일 1차 선정에서 24제를 아래와 같이 선정했다. 제1차 28제 선정 뉴스(응모 順) 1 조선일보, 조순자 가곡 가사 보유자 방일영국악상 수상 2 국공립 국악단체 수장 임명(선정) 난맥상ㅡ국립극장장(미정), 국립국악원장(낭설), 국악 방송(비전공자 임명 논란), (사)국악협회장(교체 미완) 3 국립국악원, 송년 공연 성공 이룬 ‘임인진연’ 4 안숙선 가야금병창에서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로 재지정 5 2013년 시작된 아리랑 주제 ‘서울아리랑페스티벌’ 행사 폐기 및 총감독 별세 6 문화계 별 이어령, 김지하 선생 별세 7 정선군과 40개 지역 아리랑 전승단체 참여, 아리랑 등재 10주년 기념,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비 건립 8 문화재청, 국가 종목지정 전승공동체 맞춤형 지원 제도화 발표(아리랑, 제다, 씨름, 해녀, 김치담그기, 제염, 온돌문화, 장 담그기, 전통어로방식-어살, 활쏘기, 인삼재배와 약용문 화, 막걸리 빚기, 떡 만들기, 갯벌어로) 9 국립극장, 해외 초청 공연 호평 받은 ‘트로이의 연인’ 10 유튜브 아리랑 3600곡 탑재 ‘정창관의 아리랑’ 기념공연 11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 12 문화재청, 문화유산 가치보존을 위한 한국 원칙’ 선포 13 전국노래자랑 진행자 송해, 재담꾼 김법국(김뻑국)(1937년생/김진환)선생, ‘선소리산타령’ 최창남 (1935년생), 황용주(1937년생) 예능보유자 별세 14 문화재청, 2022년 대한민국 탈춤-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15 국립무형유산원, ‘명인 오마주-이은주, 김석출, 박봉술 편’ 공연, 16 문화재청, 창덕궁 후원에서 만나는 궁중 음악과 춤, ‘창덕궁 풍류’ 공연 17 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 문화도시' 지정(서울을 제외한 광역시권(인천, 대전, 부산, 대구, 광주), 경기권, 충청권, 강원권, 경상권, 전라권, 제주권 등 7개권역으로 구분-문화를 통한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 문화를 통한 지역사회 문제 해결, 지역주민 문화 향유 확대, 지역 문화 기반 조성 및 역량 강화 등을 달성 목표) 18 국립무형유산원, 인간문화재 10인‘, 전통예능의 품격’ 공연 19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밀양 분원’ 건립 확정 20 문화재청, 60년 만에 정책방향 대전환, ‘문화재’에서 ‘유산(Heritage)’ 개념 사용 21 문화재청, 600년전 세종대왕 ‘관현맹인(管絃盲人)’제도 재현 공연(관현맹인전통예술단), 경복궁 집경당 22 문화재청, 문화유산 가치보존을 위한 ‘한국원칙’ 선포(국제 사례 호주 ‘버라 헌장(Burra Charter)’, 영국 ‘역사적 환경의 지속가능한 관리를 위한 보존 원칙, 정책과 지침’, 캐나다‘캐나다의 역사적 장소 보존을 위한 표준과 지침’, 중국 ‘중국 문물고적 보호준칙’) 23 공연문화예술 6개 관계기관(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국립국악원, 국립극단, 국립아시 아문화전당, 국립중앙극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공연문화예술자료 수집․보존과 공동서 비스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 체결 24 문화체육관광부, ‘공연전통예술분야 경연대회 장관상장 지원기준 발표’(예비평가 최소 3년 이상 지속한 전국 규모 대회로, 상장심사위원회의 심사를 통해 선정함) 25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60년 ‘한국민속예술제’ 기록의 산물, 민속예술 디지털 아카이브 ‘민속곳간’ 공개 26 국립무형유산원, ‘2022 대한민국 무형유산대전’-자연과 사람을 잇는 무형유산 13개 공연. 27 국립무형유산원, ‘이수자뎐’-무형문화재 이수자 이예랑, 박천경, 백진희, 공민선, 원진주 정수인, 김재민, 방지원, 성슬기 28 국악방송, 송년특집-22년 대통령상 수상자를 만나다 29 문체부, 예산이 2022년도 7조3968억에서 2023년 6조7408억원으로 9% 가까이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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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고향 12월은 춥다(1)갑자기 추워졌다. 날씨도 추워지는데 고향에서는 김장이나 식량이나, 땔감은 마련하고 있는지 걱정이 된다. 단단히 준비를 해야 추운 겨울을 이길 수 있다. 북쪽 고향에 추위는 매섭다. 김장독이 꽝꽝 얼고 밖에 나가면 코끝이 베어진다. 추워지고 있는데 남북의 정치상황은 그 보다 더 춥다. 일상인듯 날아오르는 미사일과 현실성이 의심되는 통일정책을 듣는 것도 이제는 지친다. 북쪽 고향 12월은 남쪽만큼이나 바쁘다. 12월에 어떻게 해서라도 계획을 끝내려고 몰아치기 전투를 하고, 가정에서는 식량이나 땔감도 마련해야 한다. 집안이나 집밖이나 마지막 12월을 넘기려 힘을 써야 할 때다. 날아오르는 미사일을 지켜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러니 눈이 오기 전에 산에 내린 도토리나 밭에 널려있는 시래기를 한톨도 남기지 말고 집으로 가져와야만 기나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 12월에는 각종 행사가 많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몰라도 수령 생모 김정숙을 기념하는 행사에 목청껏 노래를 불러야 한다. 12월 24일 행사 준비를 하려고 근무시간이 끝났어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노래연습을 했다. 진달래를 연상시키느라 흰 종이에 분홍물감을 들였다. 노래를 뽑는데 에너지를 쓰고는 1972년 12월 27일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한 날이 공휴일이라 쉬는가 싶다. 그런데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사망 추모 행사가 계속 이어지게 생겼으니 고향에 12월은 분주하고 춥다. 춥기도 한데 북쪽은 더욱 살기가 많이 어려워진듯하다. 가족과 연계되어 송금하는 사람들 이야기로 코로나19로 국경이 막혀서 장사도 할 수 없게 되자 더욱 어렵다도 한다. 지금까지는 너만 잘 살면 된다고 격려하던 가족들이 어렵다고 하면 정말로 어려운 것이라 말한다. 자식 이 있고, 부모가 있는 사람들은 적게 쓰고 적게 먹으며 돈을 모아 보내주지 않을 수 없다. 돈이 마련되지 않아 보내주지 않으면 그런대로 마음이 아파 가슴앓이를 한다. 고향에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은 늘 마음을 졸인다. 미사일이 날아오르고 남북관계가 얼음이 되면 죄인이나 된듯 숨죽인다. 북쪽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남쪽 사람인듯 정말로 남한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자식이 있고, 가족이 있는데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사람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마음이 찢긴다. 그래서 아픔을 멈추려고 어떻게 해서라도 가족을 데려오는데 올인한다. 얼마 전에는 공안에 잡혀있는 아들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는 엄마를 보았다. 12월은 춥다. 고향이 추워지면 따라서 여기서는 더 추워진다. 하늘만 아는 미사일은 아니본듯 냉각된 남북관계에 떨지 말고 산이나 밭에 있는 땔 것이나 먹을 것은 모두 걷어 곳간에 넣을 일이다. 어야든 살아남아야지. 그래서 올해 마지막 12월을 마무리하고 새해를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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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주의 춤 그리고 춤론에 담긴 생명철학Ⅰ. 들어가며 우리 춤의 뿌리를 붙들고 무궁 창성에 앞장섰던 전통춤 계승자, 추악하고 해로운 액운을 제치고 새로운 세상 문을 열어 이로운 기운을 불러들였던 시국춤 창안자, 그가 시대의 춤꾼 이애주1)이다. 옛 전통과 시대적 창안을 오가며 무한히도 개전되었던 그의 춤 세계는 세기에 부응하여 신명의 날개를 활짝 펴고 민족의 춤으로 거듭났다. 가락에 흥과 멋을 얹어 신명에 거듭난 춤으로 불태웠고, 그 자태는 궁극에 달하여 예술로 승화되었다. 그 춤새가 혼돈에 처한 시국에 올라앉으니 그 또한 민주화를 울부짖는 바람맞이춤으로 승화되었다. 전통춤 계승자로 그리고 민중의 희로애락을 풀어낸 시대의 바람맞이 춤꾼으로 우뚝 선 그가 우리 시대를 풍미한 이애주이다. 본 글은 학술적 이론을 내 세우거나 특정 논지를 쟁점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2022년 5월 세 번에 걸쳐 개최된 춤꾼 이애주 추모행사2)에 참여하며, 상기한 그의 전통춤 계승 가치, 그가 시대적으로 창안한 창작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춤의 생명철학을 사회적 시각과 사상적 관점에서 살핀 것이다. 이러한 작업 이면에는 오늘날 한계에 도달한 한국춤의 기능적, 형태적, 예술미학적 접근을 뛰어넘어 사회와 정치 그리고 이념과의 관계 속에서 작용되고 응용되는 우리 춤의 본질 및 존재 가치를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적 예술 현상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움직임의 목표가 삶의 생명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첫째 이애주 전통춤의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을 예증 삼아 그의 춤 생애 그리고 그의 전통춤 세계관을 살펴 볼 것이다. 이애주 1주기 추모행사는 2022년 5월 10일 (화) 오전 11시 그가 묻힌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서 <시대의 춤꾼: 이애주 선생 1주기 추모 나눔굿>으로 개막되었다. 다음 날 5월 11일 (수) 오후 8시에는 그가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던 경기아트센터의 소극장에서 '우리 춤의 혼과 맥 그리고 기억'의 이름으로 추모공연이 있었고, 5월 27일 (목) 오후 2시부터 과천 이애주문화재단에서 '이애주 저, 한성준 바탕 한영숙 류 이애주 맥: 승무의 미학'(2022), '고구려 춤 연구'(2022), '춤꾼은 자기 장단을 타고난다'(2022)의 출판기념회 및 '이애주 춤: 학예굿'이 개최되었다. 추모행사에는 이애주와 함께 민족춤 문화 회복을 위해 사지 동거했던 동지 및 춤계 선후배, 동료 그리고 제자가 함께하였다. 춤 '땅끝', '나눔굿 밥', '도라지꽃' 등 세 개 작품에서 드러난 기획 의도, 춤판 현장, 이면에 담긴 이애주 춤의 생명관에 대해 논할 것이다. 세 개의 작품에는 겉 치장을 요하는 미학적 춤이 아닌 내면의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이른바 영혼이 살아 숨쉬는 춤, 공동체 정신을 살리는 춤, 민중의 아픔을 품어 내는 치유의 춤 사상과 사회적 시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통춤과 창작춤을 넘나들며 표명하고자 했던 이애주 춤의 본성과 의미를 탐색하고 그 속에 담긴 생명철학을 파악하고자 한다. Ⅱ. 시작하며 1. 이애주의 전통춤 및 계승 여기서는 전통춤 계승자 이애주가 전수한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 그리고 이애주 춤 맥을 잇고 있는 현재의 계승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애주가 전승한 여러 전통춤 중,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만을 다루는 까닭은 첫째, 한성준-한영숙-이애주가 전승한 여러 전통춤 들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이면서 기본적인 춤이라는 점, 둘째, 경기제 대풍류 및 경기 무속음악을 춤 장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 셋째, 살풀이춤을 통해 보건대, 단아하고 우아한 독창적 춤 새로 추어진다는 점(이은주, 1998), 넷째, 전승 계보가 명확하다는 점 등의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중, 「태평춤」은 이애주 자신이 늘 주장한 바와 같이 태평무의 원 춤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공연에서도 원 춤에는 원 장단을 써야 한다며 경기도당굿 악사를 대동하여 「태평춤」 공연에 임하곤 하기 때문이다. 이애주 전통춤은 춤계에 익히 알려진 충남 홍성출신 한성준(남, 1874-1941) 그리고 그의 손녀 한영숙(여, 1920-1990)으로 이어져 온 족보 있는 전승계보를 갖고 있다. 한성준은 일찍이 전통연희 무대화와 예술화에 주목하여 이를 성취적으로 이룩해 낸 한국 근대 연희사의 거목이다. 그의 민족춤 예술화에는 신앙, 놀이, 의례로써 사유된 민중사상과 시대적 철학이 담겨 있어서 민족주의적 사고와 미래를 향한 예술 창달의 미래관을 일깨웠다. 그동안 버림받고 묻혀 있던 옛 춤을 세상에 펼쳐 보이며 춤 예술 발전을 도모하였기에 그를 한편에서는 춤 문화운동가라고도 한다. 한성준의 춤 무대화 업적 뒷면에는 그의 천부적인 음악적 재질을 바탕삼아 이루어진 우리 것 지키기에 대한 투철한 의지가 서려 있다. 한편, 한성준의 「승무」 및 여타 춤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경기도 용인 출신의 명인 김인호(남, 1858-1932)와 연결된다(이병옥, 2022, pp. 1-21). 그 까닭은 명고수 한성준이 광무대(光武臺, 1898에서 1930년까지 서울에 존속했던 전통연희전문극장)에서 김인호 춤을 전문적으로 반주했고, 김인호가 권번에 나가 춤을 가르칠 때도 동참하여 장단을 잡아 주었다(이병옥, 2018). 명인으로 이름 석 자를 떨친 김인호는 전남 담양 출신 이날치(남, 1820-1892)의 제자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성준은 김인호에게서 많은 춤을 익혔고, 1930년대에 이르러 김인호가 사망한 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여 김인호가 남긴 춤을 정립하고 가르치게 된 것이다(이병옥, 2022, 15). 이와는 또 달리, 한성준의 「승무」 등 전통춤은 또한 전북 정읍 세습무 출신의 전계문으로부터 전수되기도 하였다. 전북지역 단골로서 큰 명성을 얻었던 전계문(남, 1865-?)은 명고수였을 뿐만 아니라 거문고, 가야금, 해금, 해적, 대금 등의 기악과 성악 그리고 춤에도 밝았던 인물이었다(김익두, 2022, 48; 김익두, 전종구, 최동현, 최상화, 1992, 245-247). 이처럼 한성준 춤은 윗대로 올라가면 그 전승 계보가 김인호 그리고 전계문과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이러한 명인들이 모두 남자였다는 것이고, 또한 음악에 능통한 고수였다는 것이며 그 출신 지역을 호남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정통한 계보를 잇는 이애주는 1947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출생했다. 그가 출생할 당시, 운니동에는 국립국악원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 이애주는 일찍이 국악원 활동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애주는 어머니 손을 잡고 국악원 악사로 활동하다 춤을 가르치고 있던 김보남(남, 1912-1964) 문하에 입문하게 되었다. 한국동란 때 황해도 사리원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부모는 일찍이 이애주의 춤 길을 열었고, 특히 어머니의 뒷바라지는 헌신적이었다. 어린 이애주가 김보남으로부터 배운 춤은 기본춤을 비롯한 「승무」, 검무, 소고춤, 무고, 민요 가락으로 추어졌던 아리랑, 밀양아리랑, 노들강변, 양산도, 천안삼거리 및 궁중정재 춘앵전 등이었다. 성장한 이애주는 1965년 서울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무용 전공으로 입학하였고, 국립무용단 객원으로 공연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학 4학년이던 1968년 문화공보부가 주최한 무용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주의를 놀라게 하였다. 필자: 양종승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전공하고 문화인류학을 부전공하여 Folklore and Cultural Politics in Korea: Intangible Cultural Properties and Living National Treasures (민속과 문화정책: 한국의 무형문화재와 인간문화재) 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민속기록학회 회장,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한국전통춤협회 부이사장으로 있으며, 연구 관심사는 샤머니즘, 무형유산, 전통춤 등이며, 주요 연구로 "한국의 굿" (공저), "서울 이태원 부군당굿", "God Pictures in Korean Contexts (한국 샤머니즘 神圖) (공저), '우리춤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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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나의 할머니 김씨 이야기’ 수상 소감사할린으로 이주한 한인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나의 할머니 김씨 이야기’가 KBS한민족방송이 주최한 '제 24회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성인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번 수상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2020년에 제 22회 KBS라디오 방송 체험수기 공모에서 나의 『가라우토로 팔려간 우리 이쁜 고모』가 '한민족'상을 수령했습니다. 심사위원님들께 나의 소박한 글을 높이 평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KBS 한민족방송은 지난 24년간 북방동포체험수기 공모를 펼쳐 우수작에 대해 수상을 해왔습니다. 2020년부터 ‘북방동포체험수기 공모전‘을 ‘한민족체험수기 공모전’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고려인과 사할린한인 동포들 대상으로는 정체성 제고를 위해 특별히 ‘한민족상’을 선정해 수여했습니다. 제가 첫번째 수상자로서 영예를 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2020년 11월 21일 토요일에 방영된 KBS라디오 한민족방송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연출 김경희, 작가 김경순)은 토요초대석(진행 이소연, 박해상) 프로에 출연하여 수기작품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사할린 한인 동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2020년 제22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당선 '낮선 이름 앞에서 당당히' 작품집에서 김이정 소설가는 심사평에서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동포들은 "중국 동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응모원고가 적지만 서사의 밀도와 인물들의 생동감은 뒤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사할린 한인 1세대는 혼자 또는 가족과 사할린에 강제로 이주하여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목숨을 담보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탄광, 산판과 군사기지 건설장에서 모진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건강의 악화와 자녀의 양육 및 교육 문제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모국귀환의 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의 지원 대상자들은 영주귀국을 선택하느냐, 사할린에 잔류하느냐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출생한 사할린 한인은 영주귀국 지원 대상에 제외되기 때문에 또 다시 형제자매와 자손들과 헤어져 살아야 합니다. 이산의 이산은 세대를 거치면서 반복됩니다. 사할린 한인의 역사라면 주로 남자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수만명의 여성들이 남편을 찾아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라후토로 가서 모진 고통을 이겨낸 사실을 묘사한 글은 전혀 없습니다. 작은 글이나마 그들의 공적을 공평하게 평가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아버지의 고향은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입니다. 사할린에 가족이 이주하게 된 것은 1929년경 고모가 제일 먼저 사할린 땅을 밟게 되면서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1939년 결혼 후 한달 반만에 강제모집으로 가라후토에 가게됐습니다. 그 당시 오찌아이 (현 돌린스크) 산판에 배치됐습니다. 어머니는 충청남도 금산에서 태어나셨고 시부모를 모시고 고향에 거주하기를 원했지만 임신 상태에서하여 일본을 경유해서 가라후토에 들어 오셨습니다. 사할린에서 누이가 태어나고 1942년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945년 해방 전 할머니와 큰 아버지 가족들도 사할린으로 이주해 왔다고 합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그리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시고 끝끝내 타국의 땅에 묻혔습니다. 한국에서 일본 교장선생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할머니가 아버지가 있는 사할린으로 오길 희망해 1945년 해방 직전 큰아버지 가족과 함께 사할린으로 이주해 와서 할머니를 비롯해 부모 형제가 모두 사할린으로 이주해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 이야기를 쓴 수기를 통해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할린 한인 여성의 삶을 이야기해주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할린에서 여자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남자들은 탄광에서 노동을 하고, 여자들은 아이 기르면서 텃밭에서 일하며 시장에 내다 팔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모집꾼에 의해 속아서 사할린으로 이주하게 된 20대 젊은 한인들은 대부분 빈농 출신들입니다. 남자들은 탄광에서 석탄 채취 노동을 하거나 산림에서 벌목공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월급이 많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은 사할린의 혹독한 기후 조건 속에서 맨손으로 땅을 일구어 텃밭을 만들고 거친 농사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고 가족 뒷바라지를 하며 생활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강했다고 말합니다. 1945년 일제 패망 후 사할린에서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귀국했지만 조선에서 이주해간 한인들을 무국적 상태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젊은이들은 무국적이다 보니 사할린섬을 벗어나 대학을 진학하고 싶어도 못했습니다. 후에 일부는 소련 국적을 부여받아 모스크바에서 대학교육을 받거나 일부는 북한 국적을 부여받고 김일성대학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한이 고향인 사할린한인 대부분 무국적자로 있으며 한국으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했습니다. 나는 1945년 해방 후 북한 교사가 가르치는 조선학교에서 7년간 조선어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할린국립사범대학에 들어가서는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면서 우리말을 많이 잊게 되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사할린땅에 ‘한국 붐’이 일었습니다. 이후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사할린국립대학에서 19년간 한국어, 한국문화, 한국경제를 가르치는 한국학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1990년대에 사할린의 '새고려신문'에서 '무궁화' 문학콩클을 진행했는데 많은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과 독자들의 작품들이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할린 한인 사회에서도 안타깝게도 한국어가 많이 잊혀져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러시아에 정착해 사는 젊은 층에게서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필요성을 못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이 40대에 들어서면서 한인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한국어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게 됩니다. 나는 여기에 희망을 두고, 사할린 한인의 우리말 언어문화 복원․재생 사업에 매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사할린 한인 1세대가 조국으로 영주귀국함에 따라 사할린 한인 문학 활동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그래도 'K-한류' 붐을 타고 한국문화를 체험하고 한국어를 배우는 어린 세대가 늘어난다고 하니 다음 세대에서도 사할린 한인문학이 꽃 피울 수 있도록 바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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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명인에게 고희연보다 중요한 공적대우지난 17일, 민족음악원 주최로 ‘풍물명인전’이라는 공연이 있었다. 이광수 명인의 고희연(古稀宴)의 형태로 이광수 명인이 65년 외길인생에 대한 독백과 제자들의 헌정형식으로 이루어져 매우 풍성하고 세련되게 진행되었다. 프로그램은 문굿과 길놀이, 비나리, 삼도설장고, 삼도사물놀이, 사물판굿과 개인놀이, 퉁소와 사자춤 등 앉은반뿐만 아니라 풍물의 다양한 종목과 김묘선 (사)우봉이매방춤보존회 이사장의 승무•이선영, 공윤주, 김도연 경기민요 이수자들의 우정 출연으로 2시간이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프로그램 전환 시 이광수 명인이 직접 등장하셔서 들려주는 사물놀이 창시와 관련된 독백은 재담처럼 재미있고 구수했으며, 몰래 카메라처럼 공연 중간에 제자들이 등장해서 이광수 명인의 칠순을 축하하고 큰 절을 올리는 모습은 큰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마무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전 국민이 알다시피 이광수 명인은 사물놀이의 창시자이다. 이광수 명인의 기억으로는 고 심우성 선생께서 ‘사물놀이’라는 명칭을 작명해 주신 후 ‘사물놀이’라는 브랜드명으로 한 첫 공연은 1980년 9월 29일 '공간 사랑'에서 한 공연이 ‘사물놀이’의 시작이 되는 셈이다. 이광수 명인의 의견대로라면 올해는 사물놀이 탄생 42주년 되는 해이다. 80년대 사물놀이팀은 영국의 비틀즈에 비견될 때가 있었다. 전통음악의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실력 있는 4인의 청년들이 세계를 무대로 낯선 한국전통음악을 세계 곳곳에서 연주했다. 80년대 기획자로 세계로 공연을 다니다 보면 사물놀이팀을 만나는 것이 낯설지 않았고, 함께 다닌 사물놀이팀들도 자부심이 대단했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 사물놀이 지부가 생겼고,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사물놀이를 배우러 우리나라에 속속 입국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BTS급이었던 것 같다. 한류(韓流)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에 그들은 전통문화로 세계를 제패했고,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오늘날 한국대중문화는 정말로 세계적인 문화가 되었고, 이는 태초에 한국인의 리듬 DNA를 전 세계에 점진적으로 이식한 사물놀이팀의 공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류의 첨병이자 80년대 사회문화 현상의 중심이었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위정자들은 한국문화확산 정책의 방법론으로서 그들을 이용했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마케팅 구호를 만들어냈으며, 일부는 권력에 부역해서 엘리트 음악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물놀이는 꽹과리•징•장구•북이 한팀이 될 때만 가능한 음악이다. 그러나 팀을 떠나서 개인적 치부나 영달을 욕망하는 순간 팀은 깨지고 사물놀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어쩌면 사물놀이팀을 구성할 때 ‘욕망’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일부는 개인적 욕망을 달성한 동안, 일부는 가치를 지키려 평생 개인적 욕망을 거세한 채 고향에서 민중예술가로 살아가고 있다. 누가 사물놀이의 가치를 지킨 사람인가? 비틀즈처럼 빛나고, 비틀즈처럼 청춘을 불사른 청년들도 이제 칠순이 되었다. 이광수 명인에게는 65년 간 남사당패 후손으로 살아 온 개인적인 자부심과 축하연도, 제자들의 존경과 감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사물놀이는 기존 남사당패들이 마당에서 진을 짜고 길놀이를 중시하던 풍물놀이라는 퍼포먼스 중심의 집단놀이를 음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전문 연주자 중심으로 개편했으며, 비전문적인 민간 고사패에서 신라시대부터 궁중연희에 참여했던 전문연희 재인단처럼 남사당패의 음악분야를 전문 연희음악인들로 예술적 지위를 격상시켰다. 더구나 엄혹한 유신과 군사정권 시절 미신타파를 이유로 전통뿐만 아니라 압제와 통제가 일상화된 권위주의문화를 젊은 예인들이 사물을 두드리며 청년들을 깨우고 민족문화의 가치와 우수성을 세계로 다니면서 증명했다. 그들이 지킨 건 ‘정신’이고, 지금까지 잊지 않고 지켜온 이는 이광수 명인이다. 사물놀이 창시자라는 개인적인 수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문화로 세계로 진출해서 우리 시대 글로벌 문화사회적 현상을 만들어 냈고, 사장되어 가던 전통문화의 위기를 재창조를 통해 전통의 보존과 계승•재창작에 대한 불꽃을 살려 생명력을 불어넣은 원사물놀이팀과 이광수 명인에 대해 대우와 평가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화사적 공로에 비해 문화예술계의 인정과 평가가 너무 박하다는 것에 실망하고 마음 아프다. 살아있는 거인과 동시대를 산다는 것은 영광이고 감동이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그 축복과 존경을 문화부와 문화재청에서 공적•정책적으로 구현해야 한다. 초대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어령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도 아쉽고 허전했다. 국민을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하고 공적 삶을 사셨던 우리 시대 거인들이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고 영광과 보람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대우와 공적을 표현해야 문화예술계도 지속발전할 수 있다. 사물놀이팀 창설 45년이 되는 정주년에는 제대로 된 학술대회라도 준비하고, 전국사물놀이축제라도 열어서 명인께 헌정하고 싶다. 혹시 아는가? 전국사물놀이축제에서 한국문화로 세계를 제패한 원사물놀이팀과 BTS 합동공연이라도 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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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봉에서 사할린까지' (한만희)나는 40여 년의 공직생활을 마감하면서 전 공직생활에 특히 음양으로 영향을 준 생사를 넘나들며 수행했던 4년의 군 생활과 역시 무에서 유를 창조한 4년의 '사할린한국교육원장' 체험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2021년 2월19일부터 ROTC4기 중앙회 카페에 향노봉의 북쪽사면인 1031골짜기에서의 4년 군 생활을 14회에 걸쳐 연재했다. 첫회에 AP(잠복초소)에 근무하면서 잠복근무 나갔을 떄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썼는데 부관병과로 사단사령부 인사처에서 근무했던 동기가 말하기를 "나의 경우 전방 전투사단에 배속되어 근무를 하긴 했어도 영외 거주라 출퇴근했고 주말이면 통근 버스로 서울 외출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근무했는데, 한 소위가 근무한 이야기를 읽으니 나는 너무 편하게 근무하다가 제대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의 댓글을 보면서 참 내가 힘들게 군 생활을 했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바보같이 너무 힘들게 군 생활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 그러나 얼마 전 공부하는 수필교실에서 "인생을 다시 산다면” 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힘들었던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쉽지 않았던 사회생활이나 그 어려운 외국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고 그 결과로 여유로운 인생의 후반부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오히려 힘들었던 4년의 군 생활과 역시 4년의 외국생활이 고맙게 생각되었다. 1943년생인 나는 태어나고 바로 해방을 맞았고 곧 이어 6.25동란이라는 대혼란을 겪었다. 이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갑작스러운 아버님의 죽음을 맞았고 거기에다 고부갈등으로 어머니까지 가출하면서 우리 5남매의 운명은 할머니의 몫이 되었다. 우리 5남매의 삶을 위하여 정상적인 논농사에 비해 몇 배가 힘든 13마지기의 천수답 농사와 1,000여 평 밭농사 일도 할머니의 몫이었다. 무슨 말로 할머니의 고생을 설명할 수 있을까. 사회 전체가 6.25가 가져온 엄청난 비극 속에서 헤어나려 허덕이고 있는 그 당시의 시골은 발전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암울한 상태였다. 그저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반복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매일 매일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 혼란스럽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나는 성장했고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빼곰히 내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시골생활이 싫어 온다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출하여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고모 집에 몸을 의탁했다. 새로운 꿈을 꾸고 가꾸고 싶어 박차고 나왔지만 모두가 살기 바쁘다 보니 누구하나 관심 가져 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얼마동안 우왕좌왕하다 시골로 내려가기를 바랐는지도 모르는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하든 길을 찾아야했다. 어떻게 해서 나온 길인데 돌아갈 수는 없었다. 혼자 길을 찾고 찾다보니 희망의 끈이 보였고 한번 붙잡은 끈을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그 끈을 쫓아 고등학교를 가고 대학을 갔다. 망망대해의 쪽배 같은 고학 생활 속에서도 희망은 하루하루를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었다. 꿈과 희망의 끈은 대학졸업과 ROTC장교 임관이라는 결실을 안겨 주었다. 계속되는 적의 습격으로 생과 사가 교차하는 어려움 속에서 4년의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친 것도 힘들었던 농촌에서의 경험과 고학하면서 체질화된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의 정신자세가 바탕이 되었던 것 같다.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하면서 잠시 모교의 조교로 근무하다 중등교사 공채고시에 합격하여 교사가 되어 학교를 전전했다. 그리고 교사 생활 20년 만에 많은 교사가 소망하는 장학사가 되었다.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해외 근무의 길이 있다는 걸 알았고 사할린교육원장 공모에 지원해 합격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날 준비룰 했다. 바쁘긴 해도 비교적 안락한 장학사의 생활을 과감히 접고 떠나는 나를 친구들과 지인들은 말리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가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변환하는 격변기여서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떄 였다. 정치 사회 문화가 180도 다른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바뀌는 전환기라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악조건의 러시아를 일부러 찾아 들어간다는 것을 친구들은 이해 못했고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악조건도 과거 펜팔할 때부터 가졌던 외국에 대한 호기심을 막지 못했다. 이런 저런 난제를 극복하고 사할린에 도착하여 성공적으로 교육원을 개원하고 운영 할 수 있었던 것도 어려웠던 4년의 군대생활이 밑받침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당시 러시아의 열악한 상황 때문에 교육부에서 3번씩이나 전국에 사할린한국교육원장 모집 공모를 했음에도 응모자가 없었던 상황에서, 감히 응모할 수 있었던 용기도 또한 어릴 때 시골에서의 고생, 고학, 그리고 생과 사를 넘나드는 AP(잠복초소), CP(검문초소), GP(비무장지대 경계초소)장 생활이 포함된 힘들었던 4년의 군 생활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모든 조건이 열악한 러시아 땅 사할린에서 교육원을 개원해서 본 괘도에 올려놓기까지, 나는 사할린과 한국을 오가면서 온갖 힘들고 궂은 일을 기지와 지혜로움으로 잘 해결하고 뒷받침해 주어 교육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데 도움을 준 집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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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휴먼과 SF (최병구)2020년 1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19가 지구를 덮쳤다. 그리고 이 책의 머리말을 쓰고 있는 2020년 12월, 전 세계적인 3차 대유행이 한참 진행 중이지만, 백신 승인 소식이 들려오면서 코로나 종식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힘든 일상이 지속되는 가운데, 터널의 출구가 보인다는 희망이 교차하는 시기이다. 지난 1년 동안 우리의 일상은 큰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우리의 과거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글도 여럿 제출되었다. 그 요지는 대략 자본주의가 파괴한 환경과 시장경제가 뒤바꾼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한 인식과 비판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근대 문명사회가 자연환경을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며 발전한 것과 성장 중심의 시장경제가 인간을 자본에 종속시킨 것에 대한 경고는 최근까지도 수없이 이루어졌다. 불과 6년 전에도,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 체제에서 시민의식을 상실한 자기를 반성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생활을 이유로 무관심해졌고, 세월호 사건은 곧 잊혔다. 그러니까 그간 수없이 이루어진 경고가 코로나 19를 겪으며 나의 신체에 직접적인 제약이 가해지자 새삼 다시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코로나 이후, 우리는 진짜 변할 수 있을까? 지켜볼 일이지만, 과거를 돌이켜볼 때 긍정적인 답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어쩌면 문제는 반성과 성찰이 아니라 쉽게 바뀌지 못하는 우리의 몸과 마음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에서 ‘왜 우리는 쉽게 바뀌지 않을까?’로 말이다. 우리는 지금-현재 사회의 문화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에 공감한다. 다만 그 잘못되었다는 인식과 행동 사이에 괴리가 생기고 더 나아가서는 잘못되었다는 인식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습성이 문제이다. 이 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올바름과 행동 사이의 괴리, 혹은 올바름을 잊어버리는 이유를 찾고자 한 결과이다. 2011년 경향신문 특집기사에서 처음 생겨난 신조어가 ‘삼포세대’이다. 취업과 내 집 마련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의 탄생을 포착한 것이다. 그리고 2021년을 눈앞에 둔 현재, 대한민국의 가장 뜨거운 화두가 바로 ‘집’이다. 폭등하는 아파트 가격을 목격하며 누군가는 투자자 주체로 재빠르게 탈바꿈했고, 또 누군가는 하염없이 올라가는 아파트 가격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문화가 20-30대에 자리 잡은 지는 오래되었다.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은가? 지난 10년 동안 출산율을 높이고 아파트 가격을 잡기 위해 정부가 쏟아 부은 돈과 노력이 엄청난데, 왜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된 것일까? 두 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하나는 정부의 무능이다. 지난 10년 진보 정권과 보수 정권이 번갈아 나라를 통치했으니, 무능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공통된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최고의 엘리트만 모인 정부의 관료가 무능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정부의 정책이 대중들에게 반영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들의 (무)의식이 고정되었을 가능성이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우리는 자본을 쫓는 삶이 부끄럽거나 부도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올바른 선택이다. 이 두 가지는 상당 부분 겹쳐있는 것 같다. 얼마 전 벌어진 의사 파업 사태가 보여준 것처럼 우리 사회의 엘리트는 철저하게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에 의해 키워진 존재다. 2019년 초 방영되어 큰 인기를 모은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의대 입시가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처럼 ‘명문대’와 ‘의대’가 합쳐지면 타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거대한 성을 이룬다. 그리고 그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한 보통의 사람들은 그 너머를 욕망하면서 일상을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욕망,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진실을 만들어낸다. 자본 증식을 위해 인간을 도구화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기준이 진부한 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승자독식’의 논리를 깊게 체득한 사람들의 세상에서 승리한 엘리트들의 인식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이런 습성은 지난 20년간 정치, 경제, 교육, 사회문화 등 다양한 영역이 복잡하게 얽혀져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로부터의 예외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우리가 10년 전부터 문제를 인지했음에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이유는 개인의 내면과 사회제도가 상호작용을 한 결과이다. 그간 우리는 문제를 개인 혹은 사회, 어느 한쪽으로 수렴시켰다. 개인의 문제로 수렴되면 더 많은 노력을 하라는 명제로 귀결되고, 사회의 문제로 수렴되면 불평등한 사회제도의 개선을 촉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적 현실 인식으로는 지금까지의 역사가 증명하듯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내면과 사회제도가 접촉하는 방식이다. 시스템은 오래기간 다양한 주체 사이의 힘의 논리가 작용하여 구축된다. 가령 현재 대학이라는 제도는 해방 이후 역사적 변곡점마다 이루어진 정부 정책과 ‘학벌’에 대한 대중의 욕망이 중첩된 결과이다. 1990년대까지 가능했던 흙수저의 서울대 입학이 2020년 현재 불가능한 이유는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들의 교육 격차를 만들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의 교육은 경제와 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와 중첩되어 있다. 실물경제와 자산가치의 불균형이 날로 심화되는 코로나 국면에서 세계 경제가 확인시켜주듯, 오늘날의 빈부격차는 그간의 시스템이 낳은 결과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상황이 이러니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 개인의 욕망을 먹고 자란 시스템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제도의 변화란 요원한 일이다. 이 지점에서 지난 30여 년의 시간동안 우리 사회의 과학기술이 급격히 발전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07년 아이폰이 처음 등장하고 불과 10여년 만에 스마트 폰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그 변화의 핵심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삶의 다양한 요소들의 경계가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경계가 점차 사라져가는 모습을 주위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부모의 재력이 자식의 미래를 결정하고 노동소득으로 아파트 한 채 사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정치적 입장도 사회문화도 이러한 경제에 근거한 삶으로부터 결정된다. 최근 10년 간 이루어진 이러한 변화가 온전히 과학기술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과학기술이 큰 원인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다. 스마트 폰의 등장이 ‘서학개미’ ‘동학개미’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자본에 대한 욕망을 부채질하는 최근의 상황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이렇게 볼 때 개인의 내면과 제도는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만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테크놀로지, 젠더, 노동을 열쇠말로 삼고, SF소설을 통과하며 이러한 상황을 진단하고 가능한 미래를 가늠하고자 했다. 이매뉴얼 윌러스턴이 ‘역사적 자본주의’라고 명명한 근대 자본주의 체제를 구성한 항목이 과학과 인종/젠더 차별주의이다. 근대과학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인종과 젠더에 따른 서열화가 구축되었다. 오로지 자본 증식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러한 방향은 과학의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맹목적으로 따르는 이념이기도 하다. 포스트 휴먼에 대한 논의가 학계에서 유행한지는 제법 되었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변화해야할까라는 질문은 절박하다. 코로나 정국에서 근대의 시스템 전반의 위기가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포스트 휴먼, 다시 말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인간은 어떤 공동체를 꿈꿔야할까? 나의 삶이 아니라 우리의 자식 세대를 위해 반드시 묻고 답해야 하는 질문이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이 물음에 미약하게나마 답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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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강부원)누구나 빛나고 윤기 있는 삶을 살길 원한다. 남루하고 보잘것없는 인생을 원하는 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스스로 밝은 빛을 내는 발광체는 드물다. 대부분 눈에 띄지 않거나 살며시 타오르다가 이내 꺼져버린 성냥개비 같은 신세다.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보통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의 경우가 대개 그렇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은 모두 밝게 빛나 보이게 마련이다. 범인은 상상도 하지 못할 크고 높은 업적을 남기거나 초월적 능력을 발휘한 한 시대의 영웅들이 연상된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대표할 인물을 손꼽을 때 불세출의 지도자나 역경을 이겨내고 승리한 정치가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껏 그래왔고 그렇게 배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역사책엔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큰 성과를 남긴 인물들의 이야기만 주로 회자된다. 그 외 다른 분야의 인물들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성장주의와 발전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 한국 사회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조금만 고개를 돌려 살펴보면, 경쟁에 매몰된 짓무른 세상에 생기를 불어넣고 황금만능주의로 혼탁했던 시절을 맑게 정화했던 빛나는 사람들이 보인다. 스스로의 삶을 가꾸고 정돈하는 건 물론 남을 위한 희생과 헌신도 마다하지 않은 존재들. 척박한 영토를 개척하며 수백 번 넘어져도 스스로 다시 일어선 자들. ‘대문자 역사’에 이름을 새길 정도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건 아니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들 말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인물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한낮의 태양처럼 강렬하고 뜨겁진 않지만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처럼 은은하게 반짝이는 사람들. 지난 한 세기 동안 자신만의 고유한 색을 띠며 밝게 빛나던 존재들을 찾다 보니 아무래도 그렇게 모아졌다. 이들이 일평생 온몸으로 써내려간 자기 서사를 역사란 이름으로 다시 정리해 옮겨 적었을 따름이다. 한편 이들 대부분은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방면에서 활동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당대엔 ‘괴짜’ 혹은 ‘별종’으로 불렸지만, 지금 돌아봤을 때 이들이야말로 미래의 시간을 앞서 살아간 전복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들에겐 혼자만 잘살기보다 타인과 함께 두루 잘사는 방법을 고민하느라 애쓴 흔적도 깊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출세와 성공을 쫒는 입신양명의 가치관으론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삶의 궤적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와 명예보다 ‘자유’와 ‘해방’을 선택했고, 불의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공의로운 이상’을 추구하는 길을 걸었다. 이들 모두는 ‘진취적인 사상’과 ‘유연한 생각’을 품은 새로운 인간형이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며 신문과 방송 같은 미디어가 세상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면서 대중문화의 힘은 더욱 세지고 강해졌다. 곰곰 돌이켜 보건대 20세기는 과연 ‘문화의 시대’라 부를 만하다. 공교롭게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들은 거의 모두 대중문화의 현장에서 활약하거나, 영화나 드라마 같은 재현물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여기에 소개된 사람 전부를 20세기 한국사의 주역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최소한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의 생각을 크게 변화시키고 감정을 격발한 존재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힘겨운 지난 세기를 살아내며 이들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거나, 이들의 활동 덕분에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도 했다. 이들이 끼친 유무형의 영향력은 세상의 많은 걸 바꿨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어려운 이웃을 위해 먼저 발 벗고 나서거나 사회와 문화 예술 분야에서 찬란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들을 ‘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이라고 부르려 한다.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지금껏 누려온 성숙한 제도와 풍요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주역이며, 일상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가장 앞선 곳에서 적극적으로 노력한 존재들이다. 이들이 더욱 돋보이는 이유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였기 때문이라기보다, 우리 사회의 어둠과 두려움을 몰아내고자 눈에 불을 켜고 세상 한복판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리라. 또한 이들은 어떤 작은 빛이라도 더 밝게 반사하며 온 세상에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전하는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이 책에 나오는 스물여섯 명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참기 힘든 일을 잘 견뎌내며, 어려운 이웃에게 손 내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20세기 한국 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마련되길 바란다. 그러면 비로소 성장과 개발의 압력에 치여 살던 소시민들이 느꼈던 마음의 소외와 영혼의 갈증을 빈틈없이 위로해준 이들이 누구였는지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출간한 책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은 격동하는 20세기 한국사의 현장에서 세상과 맞서 싸운 자들의 일대기를 다뤘다. 이번 책 '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은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흐름과 분위기를 만들어낸 반짝이는 자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우뚝 세운 이야기다. 지난 번 책이 한국사에 숨겨진 인물들의 남모를 행적에 주목했다면, 이번 책은 누구나 얼핏 알고 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다시보기’에 해당할 터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두 책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동일한 구성과 일관된 형식을 취해 ‘20세기 한국사 인물 시리즈’로서 연속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은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의 후편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이 책이 단순히 1권에 이어 나온 2권으로서의 소박한 지위로만 그치길 바라지 않는다. 이 책은 1권에서 서술한 인물들과 분별되는 명확한 기준과 새로운 시각을 반영해 선정한 매력적인 인물들을 다루고 있는 독자적인 별권이기도 하다. 두 책 모두 2020년부터 2021년까지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일상에 영감을 더하는 지식 채널 ‘아홉시’에 매주 연재했던 글을 분류하고 새로 고쳐 묶은 것이다.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유행하던 팬데믹 상황에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자료를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온라인 매체에 연재하며 애독자를 얻고 그 결과 출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사람들과 멀어지다 보니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법을 새로 배우게 된 셈이다. 즉 이 책은 코로나 유행이 가져온 역설과도 같은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나 마찬가지다. 첫 책을 냈을 때,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던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 생생히 기억난다. 격려해준 선생님들과 축하를 전해 준 동료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은 매한가지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날카로운 서평과 정성스러운 후기를 남겨준 이름 모를 독자들에게도 어떻게 감사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소중한 독자들을 생각하면 좀 더 성실하게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고에 한결같이 관심과 애정을 보내준 김형욱 편집자께 특별히 고마운 마음이 크다. 성긴 원고가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게 된 건 온전히 그의 공로 덕분이다. 김형욱 편집자는 출간을 준비하는 나에게 든든한 조력자이지만, 나 역시 그가 매체에 연재하는 글의 열렬한 독자이기도 하다. 그도 나와 같이 매주 글을 쓰고 연재를 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묘한 동지애가 생기기도 했다. 책을 준비하는 동안 명민하고 따뜻한 그의 글을 보고 깊이 배울 수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라기보다 은은하게 자신을 드러낸 밤하늘의 별빛이다. 그러니 이 책이 유명한 인물들의 위인전이라기보다 다정하고 친근한 이웃의 삶을 기록한 수기로 읽혔으면 좋겠다. 역사란 결국 나를 포함한 우리의 소소한 삶을 세밀하게 기록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0세기 한국의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방면에서 활동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약자들과 함께했으며 시련을 견뎌낸 인물 26명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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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聖 난계 박연 소설 ‘흙의 소리’ 特別展 축시‘달리 없어 이러니다’ 시조시인 우명환 山水가 부드럽고 人心厚德 영동에서 蘭溪 朴堧 태어남은 하늘이준 膳物이니 가꾸며 기리이다 樂聖偉業 이으리다 現代의 文章家라 畵家라며 의시대나 어느누가 감히나서 樂聖藝魂 담아내랴 한데도 이 方法外에 달리없어 이러니다 半千年 지난세월 國樂의香 더욱짙어 온누리에 祝祭마당 때맟추어 펼처지니 얼씨구 嶺同人이여 自矜心을 뽐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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