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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예술을 이해하는 키워드(2)멋, 속에서 배어나는 난숙한 일탈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또 다른 키워드로 ‘멋’이라는 말도 빼놓을 수 없다. 대상을 보는 느낌이 좋아서 전적으로 공감할 때, 우리는 ‘멋있다’ 혹은 ‘멋지다’라고 표현한다. 이 멋이라는 개념 또한 간결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이라는 단어가 한국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하다. 멋에도 농도의 차이가 있다. 흔히 어설픈 멋은 ‘겉멋’이라 하고, 농익은 멋은 ‘속멋’이라 한다. 겉멋은 경멸의 대상이고, 속멋은 상찬의 대상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멋은 ‘속멋’이다. 멋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가늠해 보기 위해서 내 나름의 주관적인 윤곽을 더듬어 본다. 흔히 우리는 올곧게 뻗은 나무보다는 구부정하게 휘어 자란 소나무가 멋있어 보인다. 똑바로 흘러가는 강줄기보다는 한 번 휘청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에서 멋을 느낀다.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펼쳐진 들녘에서도 봉긋 솟은 언덕이 있어야 제격인 듯싶고, 비스듬히 내려 뻗은 기와지붕에서도 살짝 위로 향한 상승곡선이 있어서 근사해 보인다. 그러고 보면 멋을 유발하는 근원은 상도常道나 정형定型에서 약간 벗어나는 경지임을 알 수 있겠다. 상도나 상궤常軌에서의 일탈, 일상성이나 정체성停滯性에서의 일탈, 속박성이나 규격성에서의 일탈, 진부한 관행이나 상투적인 인위에서의 일탈, 그것은 곧 한국의 멋을 창출해 내는 지렛대들임에 틀림없다. 무용의 춤사위에서는 고요한 한 동작의 끝부분에 가서 살짝 강세를 주곤 한다. 허공으로 큰 포물선을 그리던 수건을 마지막 순간에 살짝 잡아채는 살풀이춤의 율동이 그렇고, 속으로 물결치는 내면의 흥을 간간이 어깨로 들썩 표출해 내곤 하는 한량무閑良舞의 춤사위가 그렇다. 고요한 정靜의 세계를 바탕으로 하다가 사뿐하게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동적動的인 변화로 흥을 돋우고 정서적 클라이맥스를 마련하는 것, 그것은 마치 서예에서 끝을 살짝 반대 방향으로 삐치는 운필運筆의 묘미처럼 전형적인 일탈의 예이자 멋의 원천이 아닐 수 없다. 음악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모체가 되는 기본적인 악흥으로 일관하던 악곡이 어느 대목에 가서는 전혀 이색적인 분위기로 살짝 탈바꿈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악곡의 진미와 유현幽玄한 멋을 한층 실감하게 된다. 서사적인 가락들로 일관하다가 좀 더 서정적인 수심가愁心歌 가락으로 끝을 여미는 서도잡가西道雜歌의 돌출성이 그 예며, 구수한 사설로 흘러가다가 창부타령 선율로 한층 흥을 돋우는 경기잡가京畿雜歌의 종지형이 그 예다. 판소리 연창에서 간간이 튀어나오는 재치 있는 재담이나 질펀한 육두문자들이 그러하고, 유장하게 노래해 가던 선율을 단칼에 동강내듯 아무 예비 없이 종지하는 평시조의 창법이 그러하다. 조용히 흘러가는 거문고의 음향 속에서 간간이 투박하게 대모玳瑁, 공명통을 보호하기 위해 씌운 가죽를 내려치는 술대거문고를 뜯는 가는 막대의 타현음打絃音도 일종의 음악적 일탈이랄 수 있고, 부드럽고 유순한 대금 가락에 짐짓 청공淸孔에서 울리는 갈대청의 파열음으로 긴장을 고조시키는 수법 또한 일탈의 멋 부리기에 다름 아니다. 모르긴 해도 일탈이 빚어낸 한국의 멋으로는 전통음악의 엇몰이장단만 한 게 없을 것이다. 엇몰이의 ‘엇’이란 삐뚤거나 어긋난 상태를 가리킨다. 엇시조가 그 좋은 예다. 마흔다섯 자의 정형시가 아니라 그보다 사설이 좀 길게 첨가된 시조가 엇시조다. 정형시조에서 어긋난 시조인 셈이다. 일종의 일탈이다. 따라서 엇몰이장단이란 곧 일상적인 장단과는 달리 일종의 변용을 추구한 이색적인 장단임을 알 수 있다. 정규적인 장단에서 짐짓 어깃장을 부려 본 장단이다. 이 어깃장 장단의 속멋이야말로 한국 문화의 멋의 핵심이자 진수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엇몰이장단의 멋을 알면 이는 이미 한국 문화의 멋의 진미를 터득한 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로 엇몰이 장단의 리듬을 그 변화형과 함께 서양의 음표로 소개한다. 긴 가로선의 밑부분 음표는 장고나 북의 왼쪽 면을 왼손바닥으로 치는 리듬이고, 윗부분의 음표는 오른손으로 장고채나 북채를 들고 우측면의 중앙이나 변죽을 치는 리듬이다. 양손으로 각자의 무릎을 치며 따라 해 봐도 엇몰이장단의 윤곽이 잡힌다.(속으로 〈라 쿰파르시타 La Cumparsita〉의 리듬도 연상해 가면서) 우선 엇몰이장단에서는 자유자재의 원숙미가 넘친다. 분명 그것은 통상적인 규칙성에서의 일탈임에도 괴리감이 느껴지거나 격格이 깨지지 않는다. 득도의 경지에 이른 예인藝人의 일필휘지가 신품神品이 되듯, 그것은 탈선하듯 어깃장스럽게 짚어 가는 고법鼓法인데도 오히려 난숙한 흥과 멋이 넘친다. 해탈한 고승의 무애無碍의 세계랄 수도, 혹은 마음 가는 대로 따라 해도 결코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경지에 비견될 수도 있다 하겠다. 그러고 보면 우리 멋을 유발하는 일탈의 개념이란 일단 원숙과 노련을 전제한다고 하겠다. 설익은 멋을 위한 억지의 이탈이나 거역을 위한 의도적인 탈선이 아닌, 속에서 배어나는 난숙한 일탈, 그것이 곧 한국의 멋을 양조釀造시키는 효모酵母로서의 일탈이라고 하겠다. 예컨대 때가 되어 숙성되면 석류가 익어 터지고, 밤송이가 무르익어 알밤이 떨어지듯이, 난숙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불거져 나오는 일탈, 바로 그 자연성과 완숙성이 멋의 원천인 일탈의 본질인 것이다. 한편 멋과 풍류風流는 상친관계相親關係가 아닐 수 없다. 일탈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관념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진부한 일상성에서 탈피해 무소기탄無所忌憚의 해방감을 누리는 경계, 세속의 영욕을 떠나 거문고와 함께 기인처럼 살다 간 신라시대 물계자勿稽子의 행적과 같이 예술의 경지를 넘나드는 유어예遊於藝의 세계, 명산대천을 찾아 가악歌樂으로 인생을 다듬어 가던 화랑花郞들의 경우처럼 인위의 구각舊殼을 벗고 합자연적인 섭리를 좇아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이 처세하는 달관의 경지, 끼니가 없어도 음악으로 자적自適했던 백결百結의 일화처럼 바다만큼이나 넓은 도량의 낙천적인 세계관, 바로 이런 경지로의 감성적 혹은 정신적 일탈에서 오는 흥취와 자족이 풍류의 본 모습이라고 하겠다. 아무튼 멋과 풍류적 흥취를 빚어내는 일탈은 노련미의 결정체이자, 새로운 창조의 동인動因이라고 하겠다. 나뭇등걸에서 새순이 일탈하여 새로운 거목이 되고, 작은 씨앗에서 새싹이 일탈하여 새 생명을 만들고, 동일한 산조지만 개인적인 시김새나 더늠으로 일탈하여 새로운 자기류의 음악을 형성해 내는 사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일탈은 곧 새로운 세계, 새로운 생명체로의 창조과정임에 다름 아니라고 하겠다. 일탈이되 이질감을 느끼지 않음은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기 때문이며, 일탈이되 소멸이나 파괴가 아님은 진眞·선善·미美를 바탕으로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연계되기 때문이며, 일탈이되 치졸稚拙이나 겉멋이나 부조화로 전락되지 않음은 곰삭은 원숙미와 풍류적 기품氣稟이 전제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일탈이 빚어내는 한국의 멋은 생명순환적인 창조의 원의지原意志에 다름 아니고, 우리 존재를 긍정해 주는 삶의 진체眞體이자 원형질이며, 한국적 자연관이나 인생관에서 발효된 희한한 향취의 미적 감흥이요 문화적 정서지대라고 하겠다. 결국 음악을 통해 본 우리의 멋은 난숙한 일탈, 풍류적 일탈에서 오는 일련의 ‘일탈의 미학’인 셈이다. 한국 문화를 표상하는 미적 개념의 마지막 단계는 운치韻致이다. 인생으로 비유하자면 흥은 청년기에, 멋은 장년기에, 운치는 노년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정서적 흥취를 있는 그대로 발랄하게 드러내는 흥이 혈기 방장한 청년기를 닮았다면, 자신의 감성을 십분 숙성시켜서 은유적으로 넌지시 드러내는 멋은 산전수전 겪어내며 인생의 내면을 음미해 가는 장년기에 흡사하다. 이에 비해 흥도 아니고 멋도 아니면서 격조 있는 미감을 표출하는 운치는 영락없이 결삭고 곰삭은 삶의 지혜들이 응축된 노년기의 풍취를 대변한다. 운치라는 개념은 우선 품격과도 통한다. 품격이 높아야 운치가 생긴다. 또한 귀티가 있어야 한다. 단아하고 고급스런 분위기가 있어야 운치를 느낀다. 뿐만이 아니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절조節操도 있어야 하고, 고도로 정제된 균제미均齊美가 있어야 한다. 또한 티 없는 창공처럼 속기俗氣가 없어야 하고, 경중미인鏡中美人의 표정 같은 맑음이 있어야 한다. 이 같은 몇 가지 요건들이 용융되어 더없이 우아하고 청초한 고품격의 예술미를 담아내고 있는 게 곧 운치의 세계다. 운치라는 한국 문화 특유의 미감을 확인하려면 전통사회의 선비문화를 일별해 보는 게 상책이다. 그만큼 선비문화 속에는 운치라는 개념의 미감美感이 두루 편재해 있다. 조선시대 평균적인 선비의 일상을 한번 되돌아보자. 온돌방 기름 먹인 장판 위에는 화문석 돗자리가 깔려 있고, 그 위에는 선비의 서안書案이 놓여 있다. 의관을 단정히 한 선비는 보료방석에 앉아서 서안에 놓인 경전을 읽어 간다. 고요히 앉아서 천하를 주유하고 천지를 요량해 보는 것이다. 깨우침의 희열이 있을 때는 잠시 끽다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은은한 차향이 중후한 고서들의 서권기書卷氣와 어우러지며 묘한 분위기의 운치를 더해 준다. 드디어 밤이 되자, 사위는 고요하고 무주공산에는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오른다. 교교한 달빛이 완자무늬 창호로 새어 들면 분위기는 한층 정감적이다. 서가에 기대 놓은 거문고를 가져다가 줄을 고른다. ‘싸랭 덩 딩 슬기둥’ 하고 술대로 유현遊絃과 대현大絃을 애무하듯 아는 가락을 탄주해 본다. 심산유곡의 낙락장송이 우줄우줄 춤을 추듯, 고색창연한 음향이 잔물결을 이룬다. 때마침 창밖에는 산들바람이 지나가는지 하얀 창호지에는 벽오동 잎새들이 달빛에 어른대며 맞장구를 친다. 이래저래 주인공은 달빛에 취하고 거문고에 취하고 그윽하게 밀려드는 난향蘭香에 취해서, 이내 벽에 걸린 산수화 속의 풍경들과 물아일체가 되어 반신선半神仙이 되고 만다. 지난날 선비들의 서재에는 으레 문방사우가 갖춰져 있었다. 글 읽는 선비들의 네 가지 필수품으로, 붓과 먹과 벼루와 종이가 곧 그것이다. 심오한 경전에 몰입하다가 자못 한유閑裕한 흥취라도 일게 되면 지체 없이 지필묵을 마련하여 일필휘지로 유어예의 몽상여행을 떠나 보기 일쑤였다. 이럴 때 즐겨 그리던 전형적인 소재가 매·난·국·죽의 사군자였다. 이들 사군자는, 몸체는 단순해도 개성은 뚜렷하다. 매화와 난초는 그윽한 향기로 선비들의 총애를 받았고, 국화와 대나무는 굽히지 않는 오상고절의 지조로 선비들의 상찬을 받았다. 한결같이 선비의 품도와 절조를 닮은 자연물들이다. 생각해 보면 사군자가 선비적인 성향을 닮은 게 아니라, 평생을 벗 삼아 온 이들 사군자의 개성이 그처럼 운치 있고 지조 있는 선비 기질을 조성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사군자와 선비의 일상은 떨어질 수 없는 바늘과 실의 관계였다. 지금까지 전통문화를 꽃피워 온 선비생활의 몇 가지 편린들을 더듬어 보았다. 이들 몇몇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된 예술적 향취가 다름아닌 운치다. 비록 선비생활의 단면을 통해서 운치의 개념을 그려 보았지만, 기실 운치의 미감은 전통문화의 도처에 스며들어 있다. 서화가 그렇고, 가구가 그렇고, 도예나 건축 등이 모두 그러하다. 특히 윤기가 자르르 한 자개장의 단아하고 고졸한 귀티는 가히 세계적 보물감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운치라는 화두를 가지고 한국의 고급스런 전통문화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한결 정확하게 그들의 진수를 포착해 볼 수 있다. 그만큼 운치는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화두다. 한국 속담 중에 ‘오동나무 씨만 보아도 춤을 춘다’는 말이 있다. 한국인의 기질을 아주 정확히 집어낸 표현으로, 한마디로 흥이 많다는 뜻이다. 잘 알다시피 오동나무는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만드는 재료다. 그 같은 악기의 재료인 나무의 씨앗만 보고도 그 나무가 자라서 악기가 되어 멋들어지게 뽑아낼 가락을 연상하며 미리 춤을 추게 된다니, 도대체 얼마나 흥이 많기에 그러하겠는가. 실로 기막힌 신명기의 소유자들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한국인의 기질은 이지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다. 냉철한 지성보다는 따뜻한 감성을 선호한다. 머리의 기능보다는 가슴의 효용에 친근감을 느낀다. 요즘에 와서는 20세기 후반 서구 문화의 본격적인 수용을 통해서 이상적인 균형을 이뤄 가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의 전통문화는 주로 감성을 기반으로 한 감성의 문화였대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여기 가슴속 깊은 심저心底에 용암처럼 고여 있던 감성이 어떤 계기를 만나 화산처럼 분출하는 것이 다름 아닌 흥이요 신바람이다. 이 역동적이고 원색적인 흥이나 신바람이 서서히 내면화되면서 은근한 흥으로 변용된 감성이 곧 멋이다. 한편 운치란, 감성의 텃밭에 뿌리를 두었으나 감성의 색깔이 크게 희석되고, 오히려 지성적 미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단아하게 정련된 경지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한국 문화, 특히 전통예술에서 본질처럼 드러나는 몇 가지 개념어들을 소개했다. 흥과 멋과 운치가 곧 그들이다. 이 세 가지 어휘가 내포하는 미적 개념 간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숙성도에 따른 편차 또한 크다. 공통점이란 물론 삼자 모두 예술적 감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름이 있다는 것은 미적 질감의 섬세한 차이를 말한다. 한국 전통예술의 미적 질감의 진행과정은 흥에서 멋으로, 멋에서 운치로 이행한다. 물론 주관적 견해다. 이미 언급했듯이, 흥이 감성의 원색적인 표출이라면, 멋은 이를 감싸서 내면화시킨 단계라고 하겠으며, 운치는 지성의 체로 감성의 원료를 걸러내어 한 단계 더 승화시킨 경지라고 하겠다. 이 같은 설명은 결코 이들 간의 질적 우열을 뜻하는 게 아니다. 시간의 경과와 함께 축적돼 가는 숙련미와 그에 따른 개성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앞서의 비유로 말한다면, 노년기가 장년기보다, 장년기가 청년기보다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는 바와 마찬가지다. 각각의 단계마다 모두 개성이 있고 특질이 있다. 흥과 멋과 운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무튼 흥과 멋과 운치는 한국의 전통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키워드이자 길라잡이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복잡한 안내서를 읽을 필요 없다. 이 세 가지 낱말의 개념만 몇 번 음미해 보자. 동트는 새벽처럼 한국 전통예술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지금까지 국악신문 독자들에게 귀한 글을 보내주신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이지출판사에게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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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예술을 이해하는 키워드(1)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한국 전통예술을 감상하면서 흔히 쓰는 어휘가 있다. 바로 ‘흥’과 ‘멋’과 ‘운치’라는 낱말들이 그것이다. 음악을 듣거나 춤을 보거나 그림을 감상하고 나서도 흔히 이 세 가지 말 중의 어느 단어로 각자의 감동을 표현한다. 그만큼 흥과 멋과 운치는 한국 전통예술을 관류貫流하는 공통된 미감美感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들 세 가지 용어의 개념을 잘 파악하면 한국 전통예술의 남다른 특징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정서적인 느낌을 담아내는 추상적인 어휘의 개념을 정확히 설명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들 몇몇 용어에 대해서는 관심 있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좋은 단서가 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흥은 ‘재미나 즐거움을 일어나게 하는 감정’이라고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평상적인 감정을 어떤 행위와 상황을 계기로 기분 좋게 고양시킨다는 뜻이라고 하겠다. 흥은 한자로 興이라고 표기한다. 일어날 흥, 즉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논어》에 ‘흥어시興於詩 입어례立於禮 성어악成於樂’이라는 말이 있다. 대중들의 순박한 정서가 두루 담긴 《시경》의 좋은 시들을 많이 익혀서 오탁汚濁되지 않은 사무사思無邪의 마음을 북돋워 가라는 것이 곧 ‘흥어시’다. 또한 순수한 감성이라도 지나치면 탈이 생기니, 일정한 절제와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입어례’요, 조화를 본질로 하는 음악을 통해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균형 잡힌 경지에 도달해야 비로소 이상적인 인재가 될 수 있다는 게 ‘성어악’이다. 흥이란 일단 좋은 감정이 흥기興起됨을 말한다. 희로애락 등의 여러 감정 중에서도 유쾌하고 화락和樂한 감정이 유발될 때 우리는 흥을 느낀다. 따라서 흥이란 문학적 시심詩心이나 예술적 희열로 연결된다. 우리 전통예술 속에 유난히 난숙한 흥의 색조가 두드러진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 음미할수록 흥취 있는 시조가 있다. 졸다가 낚싯대 잃고 춤추다가 도롱이 잃어 늙은이 망령이라 백구白鷗야 웃들 마라 십 리에 도화桃花 발發하니 춘흥春興 겨워하노라 한겨울 추위가 지나고 새봄이 돌아왔다. 바람은 보드랍고 햇살은 따뜻하다. 온 천지가 연초록으로 물들어 가고 십 리나 뻗어 있는 복숭아꽃도 빨갛게 만발했다. 겨우내 움츠렸던 감성이 아지랑이처럼 스멀대기 시작한다. 음산한 방안에만 박혀 있을 수가 없어 일단 자연 속으로 봄나들이를 나간다. 얼음 녹은 물가에서 낚싯대도 드리워 본다. 하지만 고기잡이는 안중에 없다. 깜박 졸다 낚싯대를 놓친다. 따사로운 햇볕은 잠자는 춘흥春興을 서서히 흔들어 깨운다. 절로 수지무지手之舞之 족지도지足之蹈之의 어깨춤이 나온다. 일할 때 입던 도롱이가 벗겨져 나간다. 이런 광경을 지나던 백구白鷗가 봤다. 일면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빨간 복숭아꽃이 십 리 길이나 피어 있는데. 그래서 "창공을 배회하는 흰 갈매기야, 늙은이 주책이라고 비웃들 마라. 모두가 주체하지 못하는 봄날의 흥취 때문이 아니더냐” 하고 말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흥이라는 말 외에도 ‘신’이나 ‘신명’ 또는 ‘신바람’이라는 말들도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흥이 났다’는 말을 쓸 자리에 ‘신이 났다’, ‘신명이 났다’, ‘신바람이 났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흥이란 곧 신기神氣와 같은 핏줄임에 분명해 보인다. 다시 말해서 한국 전통문화의 기층이자 원형질이라고 할 샤머니즘적인 토양에서 자라난 문화 인자다. 한국 고대국가의 풍속을 기록한 중국의 옛 사서史書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동맹東盟과 부여의 영고迎鼓와 예맥의 무천舞天을 설명한 기록이 그것이다.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이들의 축제에서는 한결같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무음주歌舞飮酒했다는 사실이다. 영락없이 굿판의 상황과 닮아 있다. 많은 군중이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며 밤낮을 이어가는 정경을 가상해 보자. 감성이 넘쳐서 질펀하게 펼쳐지는 놀이굿 한판의 정취, 그것이 곧 흥과 신바람의 산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흥과 신바람을 빼면 한국 예술은 박제품에 불과하다. 특히 감성 표출의 진폭이 큰 민속예술이 그러하다. 민속예술에는 추임새라고 하는 독특한 장치가 있다. 산조를 연주하거나 판소리를 할 때 반주자가 연주가의 흥을 돋워 주기 위해서 발성하는 몇 마디 말들을 추임새라고 한다. 연주만이 아니라 줄타기 같은 마당놀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추임새가 있어야 제대로 된 연주나 놀이가 된다. 추임새란 말 그대로 추켜세워 준다는 뜻이다. 칭찬해 주는 것이다. ‘얼씨구’, ‘잘한다’, ‘좋지’ 등의 입말로 분위기를 고양시켜 주는 것이다. 그래야 창자나 연주가는 더욱 악흥이 고조돼 가며 감동적인 공연을 해낼 수 있다. 그만큼 추임새의 기능은 민속악 공연의 중요한 필요조건이다. 그러고 보면, 민속예술 공연에 추임새라는 장치가 있다는 사실은 민속예술의 본질이 흥이나 신바람에 뿌리내려 있음을 방증하는 또 다른 실마리가 되는 셈이다. 신명기가 넘치는 분야는 비단 노래나 연주만이 아니다. 춤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다. 장고춤이나 북춤 같은 무용이 그러하고, 한량춤이나 강강수월래 같은 춤이 그러하다. 마당놀이 역시 마찬가지다. 사당패의 놀이판이 그러했고, 해학과 풍자와 재담이 번뜩이는 탈춤이 그러하다. 모두가 흥을 바탕으로 치러지는 흥겨운 놀이판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선시대 풍속화가들의 그림을 봐도, 흥의 정체를 가시적으로 그려 볼 수 있다. 그림 속에도 한국 예술의 공통분모 중 하나인 흥의 실체가 은연중에 배어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기질 속에는 지성보다는 감성이 농후하다. 사소한 얘기 같지만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지성적인 문화권 사람들이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동일한 씨앗이라도 토양에 따라서 외양이 달라지듯이, 같은 계보의 예술이나 문화라도 그들이 싹트고 자라난 바탕색에 따라서 그 결실은 현저하게 다를 수 있는 것이다. 한국 문화의 그 중요한 바탕색 중의 하나가 곧 흥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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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41: 늦가을 햇살녘의 잔상, 박병천 명인·김영태 시인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서재 창유리로 늦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그 화사한 햇살을 되받으며 나뭇잎들은 표정과 농암을 달리하며 형형색색으로 오색의 향연을 연출해 내고 있다. 여느 수목들보다 키가 월등한 은행나무는 간간이 스치는 소슬바람결로 파란 하늘폭에다 황금색 노란 붓질을 하고 있고, 늘 푸른 실향나무와 반송 사이로 진홍빛 얼굴을 내민 빨간 단풍가지는 왠지 오늘따라 먼 옛날 농본 시절의 ‘선녀와 나무꾼’ 같은 아련한 사랑 이야기라도 애써 발설해 내고 싶은 품새다. 대자연의 호흡 같은 바람이 또 지나는 모양이다. 울안의 활엽수 단풍잎들이 짧은 포물선을 그리며 우수수 떨어진다. 그들 낙엽 중에서도 기품 있는 노란 은행잎의 낙하는 단연 압권으로 인상적이다. 필경 차생此生과의 인연을 하직하는 어느 소중한 이들과의 작별만 같아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황홀한 전면의 풍광을 바라보는 눈길과는 달리, 고삐 풀린 나의 상념은 느닷없이 거꾸로 회전하며 엉뚱하게도 저만큼 어제의 어떤 죽음의 단상들을 떠올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망령스런 상념들의 변덕이 아닐 수 없다. 달짝지근한 추억과 서정적인 밀어들로, 아니면 부평초 같은 인생 행로에 묵직하게 철들어 가는 사색의 추錘를 달아주기 일쑤이던 단풍과 낙엽들이, 어느새 느닷없이 쇠락과 죽음을 첫 화면으로 떠올려 주고 있으니 정녕 희한한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엉뚱하다 싶다가도 곰곰 되짚어 보니 이내 수긍이 가며 괜히 계면쩍어지기도 한다. 초속 230여 킬로미터로 내닫는 지구의 공전 속도를 까맣게 잊은 채, 아직도 앞날이 창창한 장년쯤이려니 하고 어이없는 몽환 속에 지내온 게 민망해서인 것 같다. 그래, 그러면 그렇지. 어쩐지 나들이 때면 지하철 역무원들은 내가 창구에 채 다가서기도 전에 늘 한 박자 빨리 ‘공짜표’를 민첩하게 밀쳐 내주더라니! 적료한 침묵 속에서 나는 진양조 가락 같은 끈적한 곡선으로 낙하하는 노란 은행잎을 바라보며, 어느새 어떤 죽음의 풍경을 아련히 떠올려 보고 있다. 그리고 그 풍경들을 뒤적뒤적 음미해 본다. 그러고는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내일의 죽음에 대한 다짐도 슬며시 해 본다. 지난해 늦가을이었다. 나는 아산중앙병원으로 문상을 갔다. 진도 씻김굿 하면 으레 대명사처럼 떠올리던 이름 박병천 예인의 타계였다. 당혹스러우리만큼 빈소의 분위기가 여느 상가와 달랐다. 상주들의 표정도 침울하기는커녕 화평하기만 했고, 조문객들의 분위기도 전혀 낌새가 달랐다. 웬걸, 낯익은 얼굴들과 자리를 함께한 후 들은 얘기는 내심 적잖은 충격이었다. 함께 자리한 당대 명인들인 김덕수나 장사익의 설명조에는 오히려 신명기까지 느껴졌다. "어제 저녁에도 노래로 한판 벌였는데, 내일 저녁에는 더 많은 끼쟁이들이 모여 정식으로 한판 벌일 예정”이라고 했다. 그래야 고인도 흐뭇해하실 거고, 우리 또한 고인의 진의를 받드는 일이 될 거라는 것이다. 아, 가는 자와의 이별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나는 언젠가 다가올 나의 죽음에 대한 기발한 대안이라도 찾은 양 괜스레 기분이 고양돼 그들과 또 한 번의 소주잔을 부딪쳤다. 귀갓길에 탄 버스가 잠실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서울 야경이 새삼 아름다워 보였다. 강심에 잠긴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그 불빛 사이로 훤칠한 키의 박병천 옹이 멋들어지게 북춤을 추는 환상이 실루엣처럼 어른거렸다. 정말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더니 당대 명인과 영별을 하고 나니 아까운 사연들이 한둘이 아니구나 싶었다. 연습으로 익힌 기예가 아니라 조상 대대로 세습돼 물려받은 멋의 원형질에서 우러나는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은 예술판을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정도 그렇거니와, 특히 열두 가지가 있다는 진도 씻김굿 중에서 그가 재현해 낼 수 있다고 하던 일곱 가지 유산마저 끝내 역사의 미궁 속으로 영영 사라졌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버스가 한강 다리의 야경을 뒤로 하고 강변길로 들어섰을 때, 내 생각의 끈은 또다시 죽음을 한판 놀이굿으로 받아들이는 낯설지만 매력적인 장면으로 이끌려 갔다. 아니 인생을 얼마나 달관하고 해탈했기에 만인이 칙칙하게 여기는 죽음을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키며 여유작작하게 한판 통과의례적인 놀이판까지 벌일 수가 있을까? 골똘한 생각 끝에 떠오른 답은 곧 진도 씻김굿이었다. 알려진 대로 진도 씻김굿은 죽은 자의 영혼을 깨끗이 정화시켜 극락세계로 천도薦度시키는 굿의식이다. 절망이나 비탄이 끼어들 계제가 아니라, 오히려 함께 기리고 축원해야 할 상황이다. 진도 씻김굿판이 비감悲感의 페이소스를 넘어 일렁이는 신명기를 느끼게 되는 연유도 아마 이래서일 게다. 그러고 보니 어려서부터 평생을 죽음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신바람의 굿판을 별여 온, 그래서 삶과 죽음이란 종이 한 장 차요, 유명幽明이라고 하는 밝고 어둠의 변환에 지나지 않음을 체관諦觀한 박 옹의 입장에서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는 저만큼 하찮은 다반사茶飯事쯤으로 여겨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쩐지 내가 기획했던 베트남이나 몽골 같은 해외 공연에서도, 무대에 오르기 전 거나하게 술 한잔 곁들이고는 무르익은 신명판을 풀어내더라니….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미 그는 가망 없이 남몰래 암 투병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때 문상 중에서야 알았다. 진정 죽음을 초탈했다는 것은 이런 경지이지 싶었다. 7월 12일 저녁이었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아르코 예술극장에서는 고 김영태 시인 1주기 공연이 있었다. 잘 알고 있듯이 김영태 시인은, 시인이자 화가이자 클래식 음악 마니아이자 무용평론가로 활약한 19세기적 기인奇人 같은 멋쟁이 로맨티스트였다. 문화예술계에 스며든 그의 인간적 매력이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증표가 바로 그 추모 공연이었다. 서울현대무용단 대표 박명숙 교수와 국립발레단 단장 박인자 교수가 주축이 된 그날 밤 범무용계의 헌정 공연은, 고인에 대한 사모의 정은 물론 죽음에 대한 또다른 의미망을 각자의 가슴속에 촉촉이 새겨 주는 기회가 됐다. 칠흑같은 공간에 침묵이 흐르고, 은빛 같은 한 줄기 조명 핀이 어느 좌석에 꽂힌다. 가열 123번 좌석이다. 특히 무용 공연 때면 늘 개근하던 고인의 붙박이 지정석이다. 핀이 밝힌 좌석에는 채 온기가 가시지 않았을 고인의 모자와 바바리코트와 지팡이가 놓여 있었다. 순간 고인에 얽힌 숱한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뭉클한 회억懷憶에 젖게 했다. 무대는 고인의 면면을 떠올리는 편집 화면과 무언의 몸짓들로 차분하게 이어져 갔다. 야릇한 비감과 미감의 조화로운 교직交織은 가슴에 잔잔한 물무늬를 일으키며 현실을 예술의 진경眞境 속으로 환치해 가고 있었다. 아하, 죽음도 이렇게 삶처럼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 그날 밤 추모 공연의 마지막 장면은 자신의 수목장을 예상해서 고인이 마지막 남긴 유작시 낭송이었다. 제목은 ‘전등사 나무’였다. 강화도 전등사를 내 한 손으로 들지 모르겠다 가볍다 그리고 어질다 어머니의 가슴처럼 내 몸인 나무가 정해졌다 나뭇가지에 손이 매달려 내 등을 두드린다 "자네 여기 올 줄 알았지” 잘 왔다고 전등사의 밤 추녀 진보라 곡선 아래 나를 맡겨 버린 나무 서 있다 서해 바다에 떠 있는 빈 배를 향해 늦가을 햇살은 여전히 눈부신데, 창밖에는 또 대지가 후~ 하고 입김을 내뿜는 모양이다. 노란 은행잎들이 우수수 지는 걸 보니.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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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40: 한악계의 은인, 조선일보 방일영국악상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세상에는 상도 참 많다. 갖가지 상들이 넘쳐나고 있다. 상들이 지천이다 보니 개중에는 뒷말이 개운찮은 상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 많은 상 중에서 과연 좋은 상이란 어떤 것일까.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겠지만, 내가 보는 좋은 상이란 우선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상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상금의 과다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주최측의 명성이나 위엄에서 오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상의 권위는 공평무사한 운영에서 온다. 아름아름 주고받는 상에는 권위가 쌓일 리 없다. 주는 자와 받는 자 공히 그저 주기적으로 치르는 요식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주는 자도 받는 자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받는 자도 수상에 대한 자긍심을 갖기 어렵다. 시를 쓰는 어느 지인의 말이다. 자기가 아는 문인이 얼마 전 어느 문학상을 받았단다. 그런데 상을 받은 대가로 주최측이 발간하는 정기 간행물을 상금 이상으로 팔아줘야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이 문학계에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수상자가 얼마를 내겠다고 먼저 언질을 주고 상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시상제도가 하나의 생계수단으로 전락한 셈이다. 상 받았다는 것을 시큰둥하게 보거나 우습게 알기 십상이다. 이 같은 폐단은 전통음악계에서도 간간이 들려온다. 심사위원으로 선정되면 은연중에, 어떤 때는 아예 드러나게 자기 제자나 지인이 수상자가 될 수 있도록 서슴지 않고 부끄러운 짓들을 한다. 꽤 오래전 일이다. 전남 고흥에서 김연수 명창을 기리는 제1회 김연수국악상 심사를 위촉받고 참여한 적이 있다. 김 명창의 수제자를 자임하고 남들도 그렇게 인정하는 오 아무개 명창이 심사위원장 역할을 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국악 전공자도 아닌 인물을 수상자로 극구 추천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인데 전주에서 국악계를 위해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수상 조건에도 맞지 않는 사람이라며 나부터 적극 반대했다. 결국 안숙선 명창을 제1회 수상자로 선정했다. 선정 회의가 끝난 후 은밀히 알아보니 오 명창이 열렬히 추천했던 인물은 바로 자기 남편이었다. 이 같은 전통음악계의 시상 풍토를 일거에 쇄신하고 등장한 시상제도가 다름이 아닌 방일영국악상이다. 하기사 방일영국악상은 기존의 여느 국악상들과 같은 지평에서 운위할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만큼 격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 이 상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일보를 한국 대표 신문으로 키워 낸 우초愚礎 방일영方一榮 선생이 1994년에 제정한 국악상이다. 기억하는 분들도 많겠지만 1994년은 소위 ‘국악의 해’라고 해서 정부가 한 해 동안 국악계를 집중적으로 지원한다는 취지로 출범한 해다. 이어령 문화부장관 시절 그분의 아이디어로 한 해에 예술계 어느 한 분야를 당시 10억 원씩 특별 지원한다는 정책을 실행했는데, 무용과 문학에 이어 세 번째로 국악의 해가 선포된 것이다. 아무튼 유달리 국악을 좋아하며 국악인들을 자별히 배려해 주셨던 우초 선생은 국악의 해를 맞이하여 명실상부한 상다운 상을 출범시켰다. 지난해로 4반세기를 맞이한 방일영국악상은 그동안 전통음악계에 적지 않은 자극과 활력을 불어넣어 왔다. 사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들이라면 누구나 내심 수상을 소망하는 선망의 대상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방일영국악상의 권위와 위상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다. 그간의 역대 수상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누구나 그 상의 존재가치를 십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 제1회 때의 수상자부터 순차적으로 열거해 본다. 제1회 판소리 명창 김소희, 제2회 국악학자 이혜구, 제3회 판소리 명창 박동진, 제4회 정재무 김천흥, 제5회 종묘제례악 성경린, 제6회 서도소리 오복녀, 제7회 판소리 명창 정광수, 제8회 정가 정경태, 제9회 배뱅이굿 이은관, 제10회 가야고 황병기, 제11회 경기민요 묵계월, 제12회 대금 산조 이생강, 제13회 경기민요 이은주, 제14회 판소리 오정숙, 제15회 판소리 고법의 정철호, 제16회 민속음악학 이보형, 제17회 판소리 박송이, 제18회 피리 정재국, 제19회 판소리 성우향, 제20회 판소리 안숙선, 제21회 경기민요 이춘희, 제22회 거문고 김영재, 제23회 사물놀이 김덕수, 제24회 가야고 이재숙, 제25회 한국음악학 송방송. 이쯤 되고 보면 방일영국악상은 상이되 상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를 증언하는 한국문예사의 거대한 물줄기이자 척추 같은 산맥이다. 따라서 그 상은 곧 음악상이되 하나의 독특한 문화현상이자 역사의 실록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영예로운 국악상에 나는 직간접적으로 꽤 자주 연계돼 온 셈이다. 직접적으로는 심사위원이나 심사위원장을 했고, 간접적으로는 수상자들이 부탁한 축사의 글들을 시상식 유인물에 기고해 왔다. 총 25회에 걸친 시상 중에서 16회에 걸쳐서 나의 심사평이나 축하의 글이 실렸으니 이 상과의 인연도 적지 않은 연륜이 쌓였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국악신문 독자들에게 귀한 글을 보내주신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이지출판사에게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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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9: 유어예(遊於藝)의 귀명창, 호암 이병철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연주자와 청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하겠다. 연주자 없는 청중이 있을 수 없고, 청중 없는 연주자도 존재 의미가 없다. 전통음악계에서도 사정은 여일하다. 좋은 명인 명창 뒤에는 반드시 귀밝은 애호가가 있기 마련이다. 자신이 스스로 노래는 못하지만 듣고 즐기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을 일러 귀명창이라고 한다. 여기 진실로 국악을 아끼고 애호하던 ‘귀명창’을 한 사람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고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 선생을 앞세울 것이다. 전공이 아닌 사람이 어떤 특정 분야의 예술을 관심 있게 알기만 해도 세간의 화제가 되기 일쑤다. 그런데 호암 선생은 국악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쳇말로 가히 마니아 수준이었대도 과언이 아니다. 늘 국악을 듣고 즐기며 생활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논어》에서 말하는 ‘지지知之’와 ‘호지好之’의 단계를 넘어 ‘낙지樂之’의 경기에 들어 ‘유어예遊於藝’의 세계를 소요逍遙했던 분임에 틀림없다. 호암 선생의 국악 애호 덕분에 나는 그분을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수시로 나를 불러 국악 관련 심부름을 시켰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에서 일해 본 사람이면 잘 알 것이다. 조직 내에서 호암 선생의 위상이란 가히 소왕국의 황제격이었다. 사장단도 만나 뵙기 힘든 처지인데, 하물며 평사원이 호암 회장을 만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요행히도 나는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했다는 이력 때문에 그 ‘지엄한 회장님’을 때때로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TBC에 입사하기 전만 해도 호암 선생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세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선 그분에 대해 아는 정보가 없었으니 세평을 그대로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분에 대한 세간의 별칭은 ‘돈병철’이었다. 돈 많은 기업가라는 뜻의 속칭이었다. 나도 그 같은 평소의 인상을 지닌 채, 당시 중앙매스컴센터 공채 3기로 호암 선생 회사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금도 그때 정황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해지는 민망스런 일이 하나 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을 그대로 실천했구나 싶은 자괴감이 앞서기도 했던 장면이다. 사내 물정을 모르던 입사 초년생 때의 일이다. 이 회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당시 중앙일보 사옥이었던 서소문동 9층짜리 건물 3층에 호암 선생의 방이 따로 있었다. 물론 호암 선생의 집무실은 당시 소공동 반도호텔 맞은편 삼성 본사 건물에 있었지만, 갓 창설한 중앙매스컴센터에 애착이 많았던 호암 선생은 중앙일보사 회장실을 자주 사용했다. 아무튼 집무실 옆에 응접실이 있고, 거기에 여섯 사람이 서로 대좌해서 앉을 수 있는 낮은 탁자가 길게 놓여 있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여섯 자리에 다섯 분이 앉아 있었다. 호암 선생이 그곳에 들를 때마다 종종 배석하는 멤버들이었다. 중앙에는 이 회장이 앉아 있고, 그분 좌측에는 홍진기 중앙일보 사장, 우측에는 김덕보 동양방송 사장이 앉아 있었다. 호출된 나는 이 회장님 맞은편에 앉았고, 내 우측에는 당시 승계 수업을 받고 있던 이건희 씨가 있었으며, 좌측에는 비서실장이 있었다. 이어서 여비서가 차를 날라왔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였다. 무언가 지나치게 엄숙하다는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나는 용감하게(?) 차를 마셨다. 당시 이십 대 젊은 혈기에, 또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갔다는 내 나름의 우쭐함도 있던 터라 그랬는지, 아무튼 나는 속으로 ‘아니, 먹으라고 주는 차인데 왜 못 마셔’라는 객기와 함께 차를 마셨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자리에서 차를 마신 사람은 나를 제외하면 딱 두 사람밖에 없었다. 물론 이 회장과 홍진기 사장이었다. 아들 이건희 씨도 김덕보 방송 사장도 차를 그대로 보고만 있다가 물렸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나 역시 차를 마시지 못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알아채고 세상눈을 뜬 이후였다. 내가 겪어 본 이병철 회장은 실로 걸출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분만큼 우리 전통문화예술을 아끼고 귀히 여기는 명사를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전문가가 민망할 정도로 문화적 소양이 풍부하고, 좋은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꿰뚫고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70년대 초였을 것이다. 당시 해군에서는 문명의 혜택을 못 누리는 섬 지방을 순회하며 의료봉사를 하곤 했다. 나는 해군본부와 협의해서 그 순회선을 타고 낙도를 돌며 민요 채집을 하기로 했다. 이 계획을 이 회장께 말씀드리니 아주 반색하며, "그 같은 일은 문공부 사람들이 해놔야 하는데 아직 꿈도 안 꾸니, 뉘 할 수 있으면 하그라. 그런데 돈은 운현궁 홍두표에게 얘기해라.” 아니, 국악을 우습게 알던 시절에 낙도의 민요까지 소중히 여겨 채록을 반기며 흔쾌히 허락을 하다니! 호암 선생의 전통문화 사랑은 이처럼 넓고도 깊었다. 며칠 후 나는 작업복에 배낭을 챙겨서 승선 준비를 하고 출근했다. 갑자기 이사실에서 호출이 왔다. 훗날 삼성그룹을 떠나 대원외국어학교를 창설한 이원희 이사의 호출이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다짜고짜 험한 소리로 화를 부리며, 캐비넷을 열더니 서류철 하나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뭐 당신만 민요 채집할 줄 알아? 나도 다 계획이 있어. 그리고 당신 라디오 소속이야 텔레비전 소속이야? 왜 텔레비전 쪽 사람하고 일해?” 그러고는 당장 운현궁에서 근무하던 텔레비전 파트 홍두표 국장을 부르더니 민망할 정도로 몰아붙였다. 같은 방에 나란히 책상을 하고 있던, 후일 삼성전자를 일으킨 강진구 이사와 최당 이사는 불편한 듯 말없이 외면하고 있었다. 아마 그날 이후 홍두표 국장은 내심 어금니를 물고 와신상담하며 훗날을 도모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소동의 속내는 뻔한 것이었다. 서로 눈치껏 이 회장에게 잘 보여 빨리 출세 좀 해 보려는 심산이었음은 불문가지였다. 호암 선생의 특출난 문화 안목 외에 또 다른 개성이라면 나는 그분의 명쾌하고도 단호한 성품을 손꼽고 싶다. 한 번은 민속악 계 원로였던 박헌봉 선생한테 가서 국악곡을 하나 복사해 오라는 분부였다. 정남희 산조를 구할 수 없느냐고 말씀했을 때도 그랬고, 그 후 백낙준 거문고 산조를 수소문해 보라는 지시에도 얼른 대안이 안 보여 막막했지만, 이번에도 악곡명이 내겐 익숙한 게 아니어서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다. 당시의 곡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흔히 알려진 곡이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아무튼 나는 정릉의 박 선생 댁을 찾아가 회장님 뜻을 전했다. 그런데 박헌봉 선생도 연세가 높아 노망기가 있었는지, "아, 이건 내가 진주에서 얼마나 어렵게 채록해 온 건데…’라는 등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복사를 기피했다. 그 후의 상황은 불을 보듯 뻔했다. 호암 선생은 모든 것을 단칼에 결론낸다. 한 번의 지시로 결론이 나야 한다. 재고나 두 번 다시라는 말이 있을 수 없다. 바로 저런 성품이 큰 기업을 일군 비결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쾌도난마의 명쾌한 과단성이 있었다. 키가 작고 가냘픈 체구에 목소리는 작고 조용했으며, 안경 너머 입가로는 늘 자애로운 미소가 잔잔히 흐르던 호암 선생이었지만, 이때만은 아주 단호한 어투로 내게 잘라 말했다. "니 다시 한번 그 집에 가면 내한테 혼난다!” 소탐대실의 전형적인 예다. 복사본을 받으면 그냥 있을 이 회장이 아니다. 더구나 그 이전부터 당시 8백여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남산에 국악예술학교를 지어 주는 등 갖가지 배려를 해 주던 상대가 아니던가. 그러니 호암 선생이 느꼈던 배신감은 여간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고, 사람의 평가는 사후에 제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라는데, 유명幽明을 달리한 호암 선생의 진면목이라면 역시 내게는 여일하게 국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꼈으며, 겪어 보지 않고는 예상할 수 없을 만큼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전문가가 부끄러울 정도의 탁월한 ‘귀명창’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와 생각해도 아쉽기 짝이 없는 사연이 있다. 한 번은 이 회장님께 명인 명창들이 더 늙거나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들이 부를 수 있는 모든 곡들을 전부 녹음해서 후세에 남겼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물론 호암 선생은 흔쾌히 공감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이은관 선생을 모셔다가 배뱅이굿을 필두로 그분의 노래를 수록했다. 그리고 박녹주, 박초월, 김연수, 신쾌동 같은 명인 명창들도 틈틈이 모셔서 녹음했다. 그 후 김소희 명창을 모셔서 그분이 부를 수 있는 민요와 단가들을 전부 녹음했다. 그런 다음 판소리 전 바탕을 녹음 기록할 차례였다. 그런데 국악사의 한 흐름은 거기서 끝났다. 언젠가는 따로 언급할 계기가 있을지 모르지만, TBC와 나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호암 선생의 문예 사랑의 열정은 시정市井의 상식을 초월한다. 여기 그분의 다방면에 걸친 국악 사랑의 진정성을 방증할 몇 가지 좋은 사례를 소개한다. 앞서 정남희와 백낙준의 음악을 구해 보라는 호암 선생의 언급이 있었다는 얘기는 얼핏 했다. 글로 전하는 얘기들이니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누군지도 모르고 찾을 길도 없는 사람의 음악을 복사해 오라는 지엄한 회장님의 주문을 받은 당사자의 입장은 실로 당혹스럽고 막막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상상이 되겠지만 차도 제대로 못 마시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정남희가 누구고 백낙준이 누구냐고 언감생심 반문해 볼 수도 없는 일이고, 일단은 "네, 알았습니다” 하고 무조건 복창하고 나오는 길밖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 보니 정남희는 월북 음악가였다. 당시로서는 알 길이 없는 인물이었다. 월북자는 이름조차 거론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시절이니 더더욱 안개 속의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의 가야고 산조를 구해 온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정남희 명인의 얘기가 나온 김에 그가 월북하게 된 동기를 전해 두는 것도 좋을 성싶다. 어느 날 박동진 명창이 내게 직접 들려준 얘기다. 정남희의 월북은 한마디로 애정 관계 때문이었다.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속담처럼 사귀던 애인을 빼앗긴 홧김에 월북을 했다고 했다. 당시 그는 요정에 나오던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 시절 서슬이 시퍼렇던 서울경찰청의 총책 장택상이 그녀를 채갔다고 한다. 찍소리도 못한 정남희는 분통을 참지 못하고 월북을 결행했다. 다시 국악 얘기로 돌아가서, 난감하던 백낙준의 거문고 산조는 어렵사리 수소문 끝에 유성기 녹음을 복사해다가 호암 선생께 진상했다. 그때 그 난제를 해결해 준 사람이 후일 민속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긴 이보형 선생이다. 이 선생은 당시 신촌에 살고 있었는데, 어렵게 집을 찾아가서 통성명을 하고 백낙준의 음반을 빌려다가 복사했다. 그 같은 인연으로 이보형 선생과는 그 후 꾸준하게 동학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사람의 관계란 참으로 묘하다는 느낌도 떨칠 수가 없다. 한 번은 당시 미술계 원로였던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선생을 모셔다가 시조음악을 녹음해 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물론 당시 나는 김은호 화백이 어떤 사람인지 알 턱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즐겨 듣던 민요나 판소리 같은 음악도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졸립다며 외면하는 시조창을 녹음해 보라니, 내심 의아하게 여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호암 선생은 국악 전반에 달통해 있었고, 모든 분야를 두루 즐기며 감상했다. 한편 그분 덕분에 나는 ‘한국 언론의 사표’니 ‘민족 지성’이니 하는 호칭으로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 선생 댁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호암 선생이 직접 청암 댁 방문을 지시했는지, 아니면 호암 선생이 원하던 음악을 수소문하던 끝에 청암 선생 댁을 가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한 시대를 이끌던 최고의 지성이요 대언론사동아일보 편집국장의 집 치고는 상상외로 초라했다는 사실이다. 그분의 가옥은 동작동 국군묘지 산자락과 연결된 흑석동 왼쪽 능선 비탈배기에 있었다. 주변의 집들도 유사했지만 청암 선생의 거처도 영락없이 퇴락한 빈촌의 모습 그대로였다. 비가 오면 새는 비를 피하려고 방 안에서 삿갓을 쓰고 살았다는 황희 정승의 얘기처럼, 청암 역시 야와육척夜臥六尺의 허름한 집에서 오상고절의 선비정신을 궁행하며 간고한 시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음을 그분의 청빈한 삶 속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같은 한 시대의 사표를 뵐 수 있었던 연분 또한 호암 선생 덕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어느 해 여름방학 때였다. 당시 국립국악원에서는 전국 중고교 음악 선생들에게 하계 국악 강습을 시키고 있었다. 교육기간이 끝나자 나는 국악원의 협조를 얻어 음악 교사들을 중앙일보사로 초청하여 사옥 9층 라운지에서 다과회를 열어 주었다. 호암 선생이 챙겨 보라는 소리음반의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고는 그분들에게 한 가지 청을 했다. 각자의 지역 학교로 돌아간 후 혹시 국악 유성기 음반이 눈에 띄면 내게 연락 좀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후 전남 강진인가 어느 지방에서 SP판 몇 장을 보내왔다. 임방울의 쑥대머리가 수록된 유성기판이었다. 그 음반을 정성껏 스트레오로 재생했다. 당시 그 같은 일을 함께 한 엔지니어는 훗날 삼성 르노자동차 사장이 된 임경춘 텔레비전 기술국의 사우였다. 아무튼 재생된 노래는 지글지글하는 소음 소리만 요란했지, 임 명창의 소리는 저 뒤편 속에서 개미소리만 하게 들렸다. 웬만한 사람이면 두 번 다시 들으래도 고개를 저을 판이었다. 그러나 호암 선생은 그 잡음 투성이의 소리를 벤츠600 안에 장착해 두곤 수시로 즐기셨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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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8: 화정 김병관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동아일보 발행인으로 존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내가 화정化汀 김병관金炳琯 선생을 직접 뵌 것은 딱 한 번이다. 언젠가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였다. 나는 안국동 쪽에서 인사동 네거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는데, 반대 방향에서 올라오던 이수성 총리를 우연히 만났다. 그때 이 총리와 동행하고 있던 분이 바로 화정 선생이었다. 그때 이 총리는 내게 "한 교수, 인사드려. 동아일보 김 회장님이셔”라며 선선한 어투로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듯 이수성 총리는 자칭 호형호제하는 사람이 수만 명이 된다는 한국의 마당발이다. 잔정이 많으면서도 호방한 데가 있어서 많은 지인들이 그분을 따랐다. 나보다 2년 위인 그를 나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대학 때부터 알고 지냈기 때문에 격의 없이 그를 좋아했다. 아무튼 이 총리를 통해서 나는 화정 선생을 뵙게 되었는데, 내가 느낀 첫인상은 유난히 온후하고 과묵하다는 느낌이었다. 언론계 인사들은 아무래도 이지적이고 예리한 구석이 있으려니 여겨오던 선입견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화정 선생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소탈하고 후덕하다고 느꼈던 경험이 지금까지도 완연하다. 화정 선생과의 해후는 이렇게 일회성으로 끝났지만, 세상만사 인연의 실타래는 누구도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화정 선생과의 인연도 이와 같아서, 나는 훗날 그분의 장례식에서 조창弔唱 가사를 쓰게 되었으니 참으로 인생살이 인연의 고리들이란 도시 그 정체를 가늠할 길이 없다. 고려대학 영결식장에서 내 조사에 안숙선 명창이 가락을 얹어 진양조의 비탄 조로 조가를 부르자 장내는 이내 눈물바다가 되었다. 인사동에서 스친 인연이 화정 선생의 마지막 이별 예식에서 일종의 해로를 통해 다시 이어졌으니, 참으로 인연이란 현묘玄妙하기 짝이 없다고 하겠다. 정녕 가시나이까 화정 선생님 만경 들 고창 골에 봄비 내리고 진국명산 삼각산에 서설瑞雪이 내리며 온누리 삼라만상 생명의 물결 가득하니, 김 회장님 당신께서도 연년익수延年益壽 만수무강 누리시리라 믿었는데, 이 무슨 비보란 말씀이외까. 이 무슨 대경실색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외까. 존경하는 화정 선생님! 나라가 어려울 때, 겨레가 곤고困苦할 때 항상 민족의 희망으로 국체를 지켜내던 민족언론 동아 가족, 국내외 자랑스런 민족의 대학 고려대에 모여든 천하 영재들, 고려중앙학원의 요람 속에서 웅지를 키워 가는 나라의 동량지재, 이들 모든 화정 선생 평생의 분신들은 어찌하라고 이처럼 홀연히 모습을 숨기시나요. 이렇게 황망히 작별을 고하시나요. 제 소리 제 장단을 아끼시며 민족문화 창달에 헌신하신 화정 선생님, 안중근 의사와 홍범도 장군 같은 신작 창극에, 중앙아시아 알마티와 타슈켄트, 러시아 모스크바, 조국의 선율 아리랑 가락으로 촉촉이 위무하던 고려인의 눈물! 이제 어느 누가 그들의 외로움을 보듬어 주고, 이제 어느 누가 문화국민의 품격을 이토록 드높여 가며 이끌어 주시나요. 안 되지요. 안 되지요. 이건 정말 아니지요. 인자하고 후덕하신 화정 선생님! 정녕 무정하게 가시나이까. 만경창파에 배 띄워서 총총히 가시나이까. 산지니 수지니 해동청 보라매도 쉬어 넘는 고봉 장성령 고개, 그 너머 피안의 세계로 정녕 가시나이까. 선조 선친 혈육의 정이 그다지도 그리우셨나이까. 비익조比翼鳥 연리지連理枝라 사모님의 자애로운 모습이 그다지도 애틋하게 사무치셨나이까. 추월이 만정할 때 청천靑天을 울어예는 외기러기처럼, 창졸간에 홀연히 이승을 하직하시니, 남은 자들 하염없이 진양조 이별가로 목이 메어 우옵니다. 언젠가 김소희 선생께 배우신 소리라며 흥타령을 부르셨지요. ‘아깝다, 이내 청춘 언제 다시 올거나. 철따라 봄은 가고 봄따라 청춘 가니, 오는 백발 어이할까! 아이고 대고 흥 성화가 났네 흥’ 그렇습니다, 화정 선생님. 사람이 비록 백년을 산대도 인수순약격석화人壽瞬若擊石火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왜 아니 모르리까만, 화정 선생님 남기신 업적 너무 높고도 커서, 화정 선생님의 후덕한 감화 더욱 깊고도 두터워서, 못내 아쉽고 애통할 뿐입니다. 동원도리東園桃李 편시춘片時春을 언제 다시 맞을 게며, 백천百川이 동도해東到海면 언제 다시 서쪽으로 되돌아오겠나이까! 부디 하늘나라 선계에서 명복을 누리소서. 천복天福을 누리소서. 영생을 누리소서.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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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7: 서암 권승관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세상살이 어찌 보면 장강의 물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통상 우리는 표면만 보며 그 대상을 이해하기 마련이다. 동시에 흘러가는 물줄기련만 그 저변에 흐르는 물살은 알 길이 없다. 우리 인생살이도 이와 같아서 세상에 널리 회자되는 인물만 기억하고, 초야에 묻힌 인재는 비록 그가 보옥 같은 존재라도 좀처럼 알아채질 못한다. 전통음악계에도 그 같은 사례가 있다. 그분만큼 국악을 사랑하고 그분만큼 국악을 몸소 익히며 심취한 예가 드묾에도 불구하고 중앙 한악계에서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초야의 보옥을 알아볼 정보나 안목이 부족했던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모든 문화예술 분야가 대동소이했지만, 전통음악 역시 일제 문화말살정책에서 가까스로 기사회생했다. 바로 그 기사회생의 생기가 움트고 뿌리내린 텃밭이라면 누가 뭐라든 남도의 예향 광주 고을이라 하겠다. 여유 있는 집안 자녀들이 일본 유학을 거치면서 누구보다도 먼저 전통예술의 소중함과 그 남다른 진가를 선구적으로 터득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일제 암흑기에도 광주 유지들은 유달리 국악을 사랑하고 국악을 육성하려고 애써 왔다. 고장의 몇몇 명인 명창들을 찾아가서 직접 배우고 교유하면서 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미음물을 떠먹이며 원기를 회복시켜 주듯, 살뜰히도 보듬으며 국악의 명맥을 이어냈다. 바로 그 같은 고마운 선각자 중의 한 분이 곧 서암瑞巖 권승관權昇官 선생이다. 전북 김제 출신인 서암 선생은 한국기계공업의 선각자요 개척자라고 할 기업인이었다. 6·25전쟁 와중에 화천기공사라는 합명회사를 차려 기계공업 분야의 초석을 놓았는데, 오늘날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세계로 뻗어가고 있는 화천貨泉그룹이 바로 그 후신이다. 서암 선생이 한국의 기계공업 육성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느냐 하는 평가는, 정부가 그분에게 어떠한 예우를 해 드렸는가를 살펴봐도 자명해지는 일이다. 한마디로 정부는 그간 그분에게 금탑산업훈장을 포함해서 훈·포장만 여덟 번 수여했다. 이처럼 서암 선생은 한국 굴지의 저명한 기업가였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광주 지역 국악 발전의 태산북두泰山北斗였다. 광주국악진흥회 초대 이사장이라는 직함이 단적으로 증언해 주듯, 서암 선생은 당시 그곳의 뛰어난 예인들과 교유하고 후원하며 광주 지역 국악 진흥의 견인차 역할을 한결같은 열정으로 해 왔다. 나남출판사에서 나온 《기계와 함께 걸어온 외길》이라는 서암의 자서전을 보면, 당시 그분이 광주 지역에서 교유했던 국악인 중에는 훗날 서울 중앙무대로 올라와서 크게 양명揚名한 명인 명창들이 한둘이 아니다. 대충만 돌이켜봐도 판소리에 임방울, 정광수, 김연수, 김소희, 박초월, 조상현 등이 있으며, 고수에는 김득수, 김명환 등이 있다. 또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국악인이나 애호가들로는 병신춤의 대가 공옥진의 아버지 공대일, 진도 지방의 명창 양홍도, 광주기예조합의 소리꾼 안채봉, 그밖에 박동실, 임세균, 김비현 등 뛰어난 예인들이 줄을 잇는다. 서암 선생은 국악을 사랑하며 후원하던 애호가나 독지가에만 머문 분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소리북의 달인인 명고수였다. 북장단 몇 가지 익혀 본 정도가 아니었다. 북장단의 속멋을 속속들이 터득한 경지였다. 그래서 그분의 장단에는 전통음악의 총체적 맛과 멋이 배어 있고, 소리꾼의 소리 길도 자연히 그분의 북가락을 따라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임방울 명창이 말년의 광주 공연에서 서암의 북장단을 주문했던 사실은 널리 회자되는 일화다. 또한 서암 선생은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고 널리 장학사업을 펼쳐 온 독지가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4반세기 이상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지를 매년 순회하며 그곳 고려인 동포들을 위한 위문공연도 하고 한글도 가르쳐 주는 일을 해 왔으며, 그 나라 유력 인사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양국의 가교 역할을 했다. 그 무렵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한국의 광주 분들이 그곳에 와서 고려인들에게 한글도 가르쳐 주는 등 여러 가지 고마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내심 반갑기도 놀랍기도 했다. 나만이 선각자인 양 실천해 오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지방 도시인 광주 분들이 그 같은 일에 앞장설 수 있었을까 심히 의아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웬만한 한국인들은 중앙아시아가 어디쯤 붙어 있는지도 모를 때였다. 더구나 그때는 직항로도 없어서 멀리 모스크바를 경유해야 했다. 그 같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광주 분들은 고생하는 핏줄들이 안됐어서 머나먼 타슈켄트까지 찾아간 것이다. 훗날 안 사실이지만, 그 같은 미담의 주역이 곧 서암 권승관 선생이셨다. 《논어》에 ‘흥어시興於詩 입어례立於禮 성어악成於樂’이라는 말이 있다. 일언이폐지해서 서암 선생의 한평생은 일찍이 십 대 때부터 이미 기업보국企業輔國의 대망을 마음속에 새겨 분기시켰으며[興], 편법이 아닌 정도 경영에 입각해서 이상적인 기업인상을 확립했으며[立], 결국에는 조화와 균형으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아우르는 음악의 속성 그대로 기업과 사회와 인생과 예술을 하나로 용융시켜 세상이 우러러 칭송하는 이상적인 인물상을 체현하며[成], 한 시대를 덕인德人이자 대인大人으로 사셨다고 하겠다. 덕 있는 부모 밑에서 효자 나듯이, 서암 선생의 덕성과 가치관을 청출어람靑出於藍으로 이어받은 권영열 화천그룹 회장은 선친의 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독일, 인도 등 세계로 뻗어가는 탄탄한 중견 기업의 기틀을 다졌으니, 가문의 융성은 물론 묵묵히 기업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신실信實한 기업인의 모범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권영열 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기여에도 남다른 소신이 있어서, 선친의 호를 딴 서암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전통예술의 본향이랄 전남 문화예술 발전에 각별한 애정과 열정을 쏟고 있다. 그 중의 한두 사례가 곧 이 고장의 인재들을 선별해서 장학금을 수여한다든가, 혹은 전통문화예술에 공적이 많은 호남지역 예술인을 선정하여 매년 ‘서암전통문화대상’을 시상해 오고 있는 예들이라고 하겠다. 특히 금년이 벌써 9회째인 서암상은 회를 거듭하면서 호남 예술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음으로 양으로 확실한 격려와 분발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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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6: 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작곡가, 황병기 교수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한국 전통음악계에 문화사적인 자긍심을 심어 온 방일영국악상이 올해로 열 돌을 맞았다. 유구한 민족음악사의 맥락에서 볼 때 10년의 시간이란 하나의 작은 눈금에 불과하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한국 음악계의 시대 상황을 감안할 때, 그 작은 시상 경력 10년의 눈금은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우리는 이내 간파할 수 있다. 그것은 외래문물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묵시적으로 일깨워 온 하나의 시대적 계도啓導였고, 국제화의 조류 속에서 민족예술이 지향해야 할 원대한 좌표와 체질을 확고하게 제시하는 역사적 선언의 뜻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언간 20세기 문화적 격랑의 시대도 갔다. 주객전도의 부끄러운 문화 구도도 눈에 띄게 바로잡혀 가고, 법고法古 없이는 창신創新도 어렵다는 자각에서 주체적 문화의식도 점점 높아가고 있다. 명실상부한 문화적 과도기를 넘어서고 있는 셈입니다. 말하자면 한국 문화사의 한 굵은 마디竹節를 형성해 가는 시점이라고 하겠다. 이 같은 시대적 변이의 마디에 상응하여 방일영국악상 10년의 마디에서도 작은 변화를 꾀해 보았다. 일부 심사위원들을 교체하여 새로운 감각과 가치관을 보안했고, 수상 대상도 연령층을 낮추고 현재 활동을 중시하는 쪽으로 변신을 모색해 본 게 그것이다. 이러한 일신된 체제로 제10회 방일영국악상 심사회의가 열렸다. 이보형, 정재국, 황준연, 안숙선, 박범훈, 한명희 6명의 심사위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는 먼저 방일영국악상의 발전적 운영을 위한 자유 토론이 있었고, 이어서 제10회 수상자로 황병기 교수를 선정했다. 황병기 교수가 만장일치로 선정된 이유는 그분의 공적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가야고 연주가로 국내에서는 국악의 위상을, 해외에서는 한국의 국위를 선양했고, 불모의 창작계에 현대적 감각을 접목한 주옥같은 신작을 만들어 냄으로써 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공로 등은 비단 국악계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인정하는 황 교수의 공적이 아닐 수 없다. 황 교수는 본디 법학도였다. 한때 엘리트 코스의 대명사처럼 회자되던 경기고에 서울법대를 나왔다. 하지만 그는 학창 시절부터 국립국악원에 드나들며 가야고를 배웠다. 그 덕에 당시 60년대 초부터 서울음대 국악과 강사로 출강했다. 이처럼 취미로 시작한 가야고가 대학 교단으로 연계가 되었고, 끝내는 법조인이 아닌 음악인으로 업을 삼으며 평생을 이바지하게 된 것이다. 연주자로 출발한 황 교수는 또 한 번의 변신을 한다. 이번에는 작곡가로의 새로운 지평에 들어선다. 물론 그가 작곡 활동을 시작한 60년대 초반 이전에도 국악 작곡 활동은 있었다. 특히 40, 50년대에는 당시 국립국악원에 봉직하고 있던 김기수 선생이 거의 독보적인 활동으로 종래 정악풍의 신작을 발표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음대에 국악과가 창설되면서 전통음악 작곡계도 환골탈태되기 시작하는데, 다름 아닌 서양 음악의 작곡어법을 매체로 한 창작곡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황 교수의 작곡 활동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는데, 특히 그는 당시 서양 현대 음악기법으로 작곡 활동을 활발히 하던 서양 음악 전공의 강석희, 백병동 등과 교유하며 서구적인 작곡기법으로 가야고 음악의 신곡들을 창작해 내기 시작했다. 이런 경위로 시작한 황 교수의 작곡 활동은 ‘비단길’, ‘미궁’, ‘가라도’ 같은 자기류의 신곡을 만들어 내며 가야고 음악의 레퍼토리를 획기적으로 확충해 갔다. 결국 황병기 교수의 일생은 법학도로 출발하여 가야고 연주가로, 가야고 작곡가로 변모해 가며 다채로운 삶을 살아간 셈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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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5: 정악 가야고의 법통을 잇는 최충웅 명인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국립국악원에서 평생을 봉직하며 가야고 정악 음악의 법통을 이어온 최충웅 원로사범이 자신의 음악 세계를 총정리하는 소중한 음반을 출간했다. 수록 곡목도 영산회상과 가곡만년장환은 물론 여민락, 도드리, 천년만세, 취타, 황하청, 경풍년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으로 명실상부하게 정악 가야고 음악의 전 분야를 망라했다. 실로 필생의 업적으로 칭송할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그간 시중에는 한악韓樂 관련의 여러 가지 음반이 많이 나와 있고, 정악 음악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최충웅 원로의 연주로 출간된 음반은, 그의 오랜 경륜에서 우러나는 난숙한 기량이나 풍진 세월을 거쳐 온 달관된 곡 해석을 미루어 볼 때, 단연 정악 음악의 표본으로 삼을 만한 군계일학의 압권이 아닐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음악도 학문도 결국은 각자 인생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또한 자기 완성을 위해 이를 연마하고 궁구窮究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저간의 세태는 이 같은 상식적인 진리가 뒤바뀌어 있다. 인간 완성을 위한 예술이요 음악에서, 인간의 문제는 증발되고 오로지 음악을 위한 음악, 기교를 위한 예술만이 횡행한다. 한마디로 자기 완성을 위한 음악이기보다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음악에만 매몰되어 무한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자연히 허세와 분식과 위선으로 포장되기 마련이며, 그만큼 지고지순해야 할 음악의 정체는 속물주의적 욕망의 도구로 전락되고 있다. 사람 됨됨이는 박덕하면서도 음악적인 재승才勝만을 앞세우며 대가연 행세하는 명사들이 지천인 세상에서, 묵묵히 음악을 통한 수기修己의 경지까지 염두에 두는 예인을 만나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내가 최충웅 원로의 가야고 음악에 남다른 관심이 쏠리는 까닭은, 바로 이 원로야말로 음악과 인성을 구분하지 않고 양자간의 조화와 상승 작용을 통해서 이상적인 자기 완성을 추구하는 음악가라는 심증을 평소에 지녀왔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에 발간된 주옥같은 정악 음반들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유별함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과연 정악正樂이란 무엇일까? 글자 뜻대로라면 ‘바른 음악’이란 뜻이 되겠는데, 한마디로 좋은 음악이란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면 ‘좋은 음악’은 또 어떤 음악을 지칭하는 것일까? 정답이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 윤곽을 찾아볼 수 있다. 일찍이 신라의 우륵은 가야고 음악 열두 곡을 작곡했다. 그런데 우륵의 제자들계고, 법지, 만덕은 선생의 음악이 번잡하다고[繁且淫] 불평하며 이를 다섯 곡으로 압축하여 개작했다. 우륵은 자신의 음악을 함부로 개작한 제자들의 행위에 크게 노여워했지만, 개작된 제자들의 음악을 거듭 듣고 나서는 오히려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때 우륵은 ‘즐거워도 방종에 흐르지 않고, 슬퍼도 비탄에 빠지지 않으니[樂而不流 哀而不悲]’ 가히 ‘바르다 하겠다[可謂正也]’라며 제자들의 개작곡을 칭송했다. 여기 우륵이 ‘바른 음악’이라고 평가한 기준으로 내세운 ‘낙이불류 애이불비樂而不流 哀而不悲’는 일찍이 《논어》에 그 원형이 담겨 있다. ‘낙이불음 애이불상樂而不淫 哀而不傷’이 곧 그 원조다. 아무튼 우륵의 ‘낙이불류 애이불비’이건 《논어》의 ‘낙이불음 애이불상’이건, 양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은 한마디로 과過하지도 않고 불급不及하지도 않은 중용中庸의 정서 지대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중용과 중화의 경지가 곧 정악의 분령인 셈이다. 급변하는 시대 사조는 한국 전통음악계에도 상전벽해의 변모상을 초래했다. 감정의 절제를 미덕으로 삼았던 정악의 위상은 퇴조한 반면, 희로애락의 적나라한 표현을 기조로 하던 대중적인 음악은 날로 번창하고 있다. 이 같은 세태의 변천은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경천동지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방송사 PD로 일하던 60년대 후반의 일이다. 당시 거문고의 명인 임석윤林錫胤 선생을 모셔다가 가곡 반주 음악을 연주할 때였다. 당시 임 명인은 정악곡 외에는 어떠한 음악도 거문고에 올리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에 유행하던 산조 음악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이다. 하기사 광복 전후쯤의 기록물에서도 우리는 감정을 절절히 노출시키는 산조 음악의 대두를 개탄하는 글들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니, 가히 당시의 시대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세상은 바뀌어 유현심수幽玄深邃한 정감의 정악보다는 감각적이고 재기발랄한 대중적 음악이 우리 생활 주변을 풍미하고 있다. 감정을 우아하게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과장되게라도 감정을 백일하에 분출하는 것을 음악의 본모습이요 자신의 남다른 기예인 양 착각하는 예가 비일비재할 만큼, 세상은 바야흐로 감성의 노출 시대로 변모하고 있다. 따라서 음들을 아끼고 절약하지 않고 쓸데없이 남용해 가면서 되도록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기법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유혹하려 한다. 이 같은 표피적이고 자극적인 음악들은 결국 우리 시대의 배면에 깔려 있는 물질 만능의 상업주의와 맞물리면서 야금야금 사람의 심성을 상하게 하고, 급기야는 사회를 병들게 하기 일쑤다. 옛말을 빌리자면 치세지음治世之音이 아닌 난세지음亂世之音이 곧 오늘의 우리 일상을 포박捕縛해 가고 있는 게 숨김 없는 저간의 음악계 실상이다. 이 같은 음악계 풍조를 감안할 때 최충웅 명인의 독실한 정악 음반 출간은, 작게는 수신修身과 정심正心의 의미와 크게는 이풍역속移風易俗의 사회적 효능면에서 한층 돋보이는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 평생 정악계에 몸담아 오면서 정악의 정통적 맥을 이은 원로 명인이 정악 음악의 정수를 진솔하게 음반에 수록하여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둘째로는 요즘 음악치료학music theraphy이라는 장르가 각광을 받아가고 있듯이, 번잡한 음악들로 오히려 황폐해져 가는 우리 시대의 심성을 청결한 샘물 같은 단아한 정악의 음율로 한층 정화시켜 가며 정악의 본질은 물론 예술의 고마움을 새삼 일깨울 수 있겠기 때문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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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4: 영년퇴은이 유발하는 무정세월 조운조 교수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소암素庵 조운조 교수가 벌써 정년을 맞았다니, 세월의 속절없음이 다시 한번 새삼스러워진다. 특히 곱살한 인상의 조 교수도 영락없이 노인세대로 편입된다는 사실 앞에 서고 보니 마치 화개화락의 덧없는 세상살이를 곱씹는 듯싶어 절로 마음이 공허해지기도 한다. 나의 뇌리에 각인된 조 교수의 이미지는 우선 매사에 부지런하고 적극적이었다는 점이다. 나 역시 인생을 비교적 폭넓게 적극적으로 살아왔다고 자임하는 처지이기에, 바로 이 같은 조 교수의 진취적인 삶의 자세에 내심 많은 공감대를 느끼곤 했다. 여기서 세세하게 나열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동안 조 교수는 교육자로 연주가로 문필가로 사회활동가로 누구보다 폭넓은 인생을 살아왔다. 이 같은 행적은 물론 조 교수의 인생관에 기반한 삶의 유형이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에서 그를 그만큼 필요로 했다는 반증임과 동시에, 또한 조 교수가 그만큼 남다른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조운조 교수가 한국 음악계에 참 좋은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되는 일 중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한국정악원의 맥을 이어온 것을 높이 사고 싶다. 정악원에 열정을 쏟은 일은 누가 뭐래도 역사의 맥을 잇는 일이었다. 통시적인 역사의식이 앞서지 않고는 될성부른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을 조 교수는 묵묵히 해냈다. 한편 모르긴 해도 조 교수의 체질이나 품성은 ‘정악적’이지 않나 싶다. 물론 내가 겪은 이심전심의 주관적 느낌이다. 과연 정악이란 무엇일까. 작게는 조선조 5백년을 뻗어내렸고, 넓게는 유교사상의 근간으로 수수백년을 풍미하며 시대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던 정악禮樂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선 음악적으로는 《논어》의 낙이불음 애이불상樂而不淫 哀而不傷, 즉 우륵의 표현을 빌리면 낙이불류 애이불비樂而不流 哀而不悲의 경계가 아니던가. 한마디로 그것은 곧 유학의 핵심사상이랄 중용의 세계가 아니던가. 이렇게 볼 때 조운조 교수는 영락없이 정악적인 인물임을 공감하게 된다. 그의 인품에서 스며나는 인간적 따듯함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내게는 그 수다한 일들을 소화해 가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견지해 가는 항상성恒常性이 유달리 눈에 띄기 때문이다. 조 교수의 그 같은 인생 행로를 지켜보며 문득 윤집궐중允執厥中이라는 어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학자로 예술가로 다양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한결같은 인상과 처세와 평판을 잃지 않고 있는 그 굳건한 내면의 신념은 곧 천변만화의 세파를 겪으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수시처중隨時處中의 의연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맥락에서 조 교수의 품성은 다분히 정악적이요 예악적이라는 표현이 걸맞지 않을 수 없다. 소암 조운조 교수가 드디어 대학교수직을 졸업한다. 서양에서 졸업(Commencement)이라는 말은 ‘시작’을 뜻한다. 하나의 단원을 마침과 동시에 다음의 새로운 단원으로 이행하는 것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대나무도 생육하면서 마디節를 하나 만들고, 그 마디를 발판으로 다시 쭉 뻗어나간다. 삼라만상 대자연의 이치다. 소암 선생도 이제 영년퇴은盈年退隱이라는 하나의 옹골찬 인생의 마디를 만들었다. 이 소중한 마디 다음에는 다시 제2의 광할한 인생 드라마 무대가 펼쳐져 있다. 2모작 인생 드라마에서도 성실하고 존경받는 주인공으로 명연기를 해내길 고대한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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