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한악계 별들 39: 유어예(遊於藝)의 귀명창, 호암 이병철 선생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악계 별들 39: 유어예(遊於藝)의 귀명창, 호암 이병철 선생

  • 특집부
  • 등록 2021.06.18 07:30
  • 조회수 55,856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연주자와 청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하겠다. 연주자 없는 청중이 있을 수 없고, 청중 없는 연주자도 존재 의미가 없다. 전통음악계에서도 사정은 여일하다. 좋은 명인 명창 뒤에는 반드시 귀밝은 애호가가 있기 마련이다.


자신이 스스로 노래는 못하지만 듣고 즐기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을 일러 귀명창이라고 한다. 여기 진실로 국악을 아끼고 애호하던 귀명창을 한 사람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고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 선생을 앞세울 것이다.


전공이 아닌 사람이 어떤 특정 분야의 예술을 관심 있게 알기만 해도 세간의 화제가 되기 일쑤다. 그런데 호암 선생은 국악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쳇말로 가히 마니아 수준이었대도 과언이 아니다. 늘 국악을 듣고 즐기며 생활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논어에서 말하는 지지知之호지好之의 단계를 넘어 낙지樂之의 경기에 들어 유어예遊於藝의 세계를 소요逍遙했던 분임에 틀림없다.

 

이병철.jpg
[국악신문] 이병철 (1910~1987년 ) 경상남도 의령 출생, 기업인. 1995년 제2회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호암 선생의 국악 애호 덕분에 나는 그분을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수시로 나를 불러 국악 관련 심부름을 시켰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에서 일해 본 사람이면 잘 알 것이다. 조직 내에서 호암 선생의 위상이란 가히 소왕국의 황제격이었다. 사장단도 만나 뵙기 힘든 처지인데, 하물며 평사원이 호암 회장을 만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요행히도 나는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했다는 이력 때문에 그 지엄한 회장님을 때때로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TBC에 입사하기 전만 해도 호암 선생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세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선 그분에 대해 아는 정보가 없었으니 세평을 그대로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분에 대한 세간의 별칭은 돈병철이었다. 돈 많은 기업가라는 뜻의 속칭이었다. 나도 그 같은 평소의 인상을 지닌 채, 당시 중앙매스컴센터 공채 3기로 호암 선생 회사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금도 그때 정황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해지는 민망스런 일이 하나 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을 그대로 실천했구나 싶은 자괴감이 앞서기도 했던 장면이다. 사내 물정을 모르던 입사 초년생 때의 일이다. 이 회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당시 중앙일보 사옥이었던 서소문동 9층짜리 건물 3층에 호암 선생의 방이 따로 있었다. 물론 호암 선생의 집무실은 당시 소공동 반도호텔 맞은편 삼성 본사 건물에 있었지만, 갓 창설한 중앙매스컴센터에 애착이 많았던 호암 선생은 중앙일보사 회장실을 자주 사용했다.

 

화면 캡처 2021-06-17 131743.jpg
[국악신문] 이병철


아무튼 집무실 옆에 응접실이 있고, 거기에 여섯 사람이 서로 대좌해서 앉을 수 있는 낮은 탁자가 길게 놓여 있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여섯 자리에 다섯 분이 앉아 있었다. 호암 선생이 그곳에 들를 때마다 종종 배석하는 멤버들이었다. 중앙에는 이 회장이 앉아 있고, 그분 좌측에는 홍진기 중앙일보 사장, 우측에는 김덕보 동양방송 사장이 앉아 있었다. 호출된 나는 이 회장님 맞은편에 앉았고, 내 우측에는 당시 승계 수업을 받고 있던 이건희 씨가 있었으며, 좌측에는 비서실장이 있었다. 이어서 여비서가 차를 날라왔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였다. 무언가 지나치게 엄숙하다는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나는 용감하게(?) 차를 마셨다. 당시 이십 대 젊은 혈기에, 또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갔다는 내 나름의 우쭐함도 있던 터라 그랬는지, 아무튼 나는 속으로 아니, 먹으라고 주는 차인데 왜 못 마셔라는 객기와 함께 차를 마셨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자리에서 차를 마신 사람은 나를 제외하면 딱 두 사람밖에 없었다. 물론 이 회장과 홍진기 사장이었다. 아들 이건희 씨도 김덕보 방송 사장도 차를 그대로 보고만 있다가 물렸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나 역시 차를 마시지 못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알아채고 세상눈을 뜬 이후였다.


내가 겪어 본 이병철 회장은 실로 걸출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분만큼 우리 전통문화예술을 아끼고 귀히 여기는 명사를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전문가가 민망할 정도로 문화적 소양이 풍부하고, 좋은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꿰뚫고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70년대 초였을 것이다. 당시 해군에서는 문명의 혜택을 못 누리는 섬 지방을 순회하며 의료봉사를 하곤 했다. 나는 해군본부와 협의해서 그 순회선을 타고 낙도를 돌며 민요 채집을 하기로 했다. 이 계획을 이 회장께 말씀드리니 아주 반색하며, "그 같은 일은 문공부 사람들이 해놔야 하는데 아직 꿈도 안 꾸니, 뉘 할 수 있으면 하그라. 그런데 돈은 운현궁 홍두표에게 얘기해라.” 아니, 국악을 우습게 알던 시절에 낙도의 민요까지 소중히 여겨 채록을 반기며 흔쾌히 허락을 하다니! 호암 선생의 전통문화 사랑은 이처럼 넓고도 깊었다.


며칠 후 나는 작업복에 배낭을 챙겨서 승선 준비를 하고 출근했다. 갑자기 이사실에서 호출이 왔다. 훗날 삼성그룹을 떠나 대원외국어학교를 창설한 이원희 이사의 호출이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다짜고짜 험한 소리로 화를 부리며, 캐비넷을 열더니 서류철 하나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뭐 당신만 민요 채집할 줄 알아? 나도 다 계획이 있어. 그리고 당신 라디오 소속이야 텔레비전 소속이야? 왜 텔레비전 쪽 사람하고 일해?”

 

그러고는 당장 운현궁에서 근무하던 텔레비전 파트 홍두표 국장을 부르더니 민망할 정도로 몰아붙였다. 같은 방에 나란히 책상을 하고 있던, 후일 삼성전자를 일으킨 강진구 이사와 최당 이사는 불편한 듯 말없이 외면하고 있었다. 아마 그날 이후 홍두표 국장은 내심 어금니를 물고 와신상담하며 훗날을 도모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소동의 속내는 뻔한 것이었다. 서로 눈치껏 이 회장에게 잘 보여 빨리 출세 좀 해 보려는 심산이었음은 불문가지였다.


호암 선생의 특출난 문화 안목 외에 또 다른 개성이라면 나는 그분의 명쾌하고도 단호한 성품을 손꼽고 싶다. 한 번은 민속악 계 원로였던 박헌봉 선생한테 가서 국악곡을 하나 복사해 오라는 분부였다. 정남희 산조를 구할 수 없느냐고 말씀했을 때도 그랬고, 그 후 백낙준 거문고 산조를 수소문해 보라는 지시에도 얼른 대안이 안 보여 막막했지만, 이번에도 악곡명이 내겐 익숙한 게 아니어서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다. 당시의 곡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흔히 알려진 곡이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아무튼 나는 정릉의 박 선생 댁을 찾아가 회장님 뜻을 전했다. 그런데 박헌봉 선생도 연세가 높아 노망기가 있었는지, ", 이건 내가 진주에서 얼마나 어렵게 채록해 온 건데라는 등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복사를 기피했다.


그 후의 상황은 불을 보듯 뻔했다. 호암 선생은 모든 것을 단칼에 결론낸다. 한 번의 지시로 결론이 나야 한다. 재고나 두 번 다시라는 말이 있을 수 없다. 바로 저런 성품이 큰 기업을 일군 비결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쾌도난마의 명쾌한 과단성이 있었다. 키가 작고 가냘픈 체구에 목소리는 작고 조용했으며, 안경 너머 입가로는 늘 자애로운 미소가 잔잔히 흐르던 호암 선생이었지만, 이때만은 아주 단호한 어투로 내게 잘라 말했다.


"니 다시 한번 그 집에 가면 내한테 혼난다!”


소탐대실의 전형적인 예다. 복사본을 받으면 그냥 있을 이 회장이 아니다. 더구나 그 이전부터 당시 8백여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남산에 국악예술학교를 지어 주는 등 갖가지 배려를 해 주던 상대가 아니던가. 그러니 호암 선생이 느꼈던 배신감은 여간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고, 사람의 평가는 사후에 제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라는데, 유명幽明을 달리한 호암 선생의 진면목이라면 역시 내게는 여일하게 국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꼈으며, 겪어 보지 않고는 예상할 수 없을 만큼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전문가가 부끄러울 정도의 탁월한 귀명창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와 생각해도 아쉽기 짝이 없는 사연이 있다. 한 번은 이 회장님께 명인 명창들이 더 늙거나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들이 부를 수 있는 모든 곡들을 전부 녹음해서 후세에 남겼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물론 호암 선생은 흔쾌히 공감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이은관 선생을 모셔다가 배뱅이굿을 필두로 그분의 노래를 수록했다. 그리고 박녹주, 박초월, 김연수, 신쾌동 같은 명인 명창들도 틈틈이 모셔서 녹음했다. 그 후 김소희 명창을 모셔서 그분이 부를 수 있는 민요와 단가들을 전부 녹음했다.


그런 다음 판소리 전 바탕을 녹음 기록할 차례였다. 그런데 국악사의 한 흐름은 거기서 끝났다. 언젠가는 따로 언급할 계기가 있을지 모르지만, TBC와 나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아무튼 호암 선생의 문예 사랑의 열정은 시정市井의 상식을 초월한다. 여기 그분의 다방면에 걸친 국악 사랑의 진정성을 방증할 몇 가지 좋은 사례를 소개한다.


앞서 정남희와 백낙준의 음악을 구해 보라는 호암 선생의 언급이 있었다는 얘기는 얼핏 했다. 글로 전하는 얘기들이니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누군지도 모르고 찾을 길도 없는 사람의 음악을 복사해 오라는 지엄한 회장님의 주문을 받은 당사자의 입장은 실로 당혹스럽고 막막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상상이 되겠지만 차도 제대로 못 마시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정남희가 누구고 백낙준이 누구냐고 언감생심 반문해 볼 수도 없는 일이고, 일단은 ", 알았습니다하고 무조건 복창하고 나오는 길밖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 보니 정남희는 월북 음악가였다. 당시로서는 알 길이 없는 인물이었다. 월북자는 이름조차 거론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시절이니 더더욱 안개 속의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의 가야고 산조를 구해 온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정남희 명인의 얘기가 나온 김에 그가 월북하게 된 동기를 전해 두는 것도 좋을 성싶다. 어느 날 박동진 명창이 내게 직접 들려준 얘기다. 정남희의 월북은 한마디로 애정 관계 때문이었다.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속담처럼 사귀던 애인을 빼앗긴 홧김에 월북을 했다고 했다. 당시 그는 요정에 나오던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 시절 서슬이 시퍼렇던 서울경찰청의 총책 장택상이 그녀를 채갔다고 한다. 찍소리도 못한 정남희는 분통을 참지 못하고 월북을 결행했다.


다시 국악 얘기로 돌아가서, 난감하던 백낙준의 거문고 산조는 어렵사리 수소문 끝에 유성기 녹음을 복사해다가 호암 선생께 진상했다. 그때 그 난제를 해결해 준 사람이 후일 민속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긴 이보형 선생이다. 이 선생은 당시 신촌에 살고 있었는데, 어렵게 집을 찾아가서 통성명을 하고 백낙준의 음반을 빌려다가 복사했다. 그 같은 인연으로 이보형 선생과는 그 후 꾸준하게 동학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사람의 관계란 참으로 묘하다는 느낌도 떨칠 수가 없다.


한 번은 당시 미술계 원로였던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선생을 모셔다가 시조음악을 녹음해 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물론 당시 나는 김은호 화백이 어떤 사람인지 알 턱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즐겨 듣던 민요나 판소리 같은 음악도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졸립다며 외면하는 시조창을 녹음해 보라니, 내심 의아하게 여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호암 선생은 국악 전반에 달통해 있었고, 모든 분야를 두루 즐기며 감상했다.


한편 그분 덕분에 나는 한국 언론의 사표민족 지성이니 하는 호칭으로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 선생 댁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호암 선생이 직접 청암 댁 방문을 지시했는지, 아니면 호암 선생이 원하던 음악을 수소문하던 끝에 청암 선생 댁을 가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한 시대를 이끌던 최고의 지성이요 대언론사동아일보 편집국장의 집 치고는 상상외로 초라했다는 사실이다.


그분의 가옥은 동작동 국군묘지 산자락과 연결된 흑석동 왼쪽 능선 비탈배기에 있었다. 주변의 집들도 유사했지만 청암 선생의 거처도 영락없이 퇴락한 빈촌의 모습 그대로였다. 비가 오면 새는 비를 피하려고 방 안에서 삿갓을 쓰고 살았다는 황희 정승의 얘기처럼, 청암 역시 야와육척夜臥六尺의 허름한 집에서 오상고절의 선비정신을 궁행하며 간고한 시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음을 그분의 청빈한 삶 속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같은 한 시대의 사표를 뵐 수 있었던 연분 또한 호암 선생 덕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어느 해 여름방학 때였다. 당시 국립국악원에서는 전국 중고교 음악 선생들에게 하계 국악 강습을 시키고 있었다. 교육기간이 끝나자 나는 국악원의 협조를 얻어 음악 교사들을 중앙일보사로 초청하여 사옥 9층 라운지에서 다과회를 열어 주었다. 호암 선생이 챙겨 보라는 소리음반의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고는 그분들에게 한 가지 청을 했다. 각자의 지역 학교로 돌아간 후 혹시 국악 유성기 음반이 눈에 띄면 내게 연락 좀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후 전남 강진인가 어느 지방에서 SP판 몇 장을 보내왔다. 임방울의 쑥대머리가 수록된 유성기판이었다. 그 음반을 정성껏 스트레오로 재생했다. 당시 그 같은 일을 함께 한 엔지니어는 훗날 삼성 르노자동차 사장이 된 임경춘 텔레비전 기술국의 사우였다.


아무튼 재생된 노래는 지글지글하는 소음 소리만 요란했지, 임 명창의 소리는 저 뒤편 속에서 개미소리만 하게 들렸다. 웬만한 사람이면 두 번 다시 들으래도 고개를 저을 판이었다. 그러나 호암 선생은 그 잡음 투성이의 소리를 벤츠600 안에 장착해 두곤 수시로 즐기셨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