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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8: 화정 김병관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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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8: 화정 김병관 선생

  • 특집부
  • 등록 2021.06.1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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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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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화정(化汀) 김병관(金炳琯) (1934 ~ 2008)선생, 동아일보 사장, 회장, 명예회장과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동아일보 발행인으로 존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내가 화정化汀 김병관金炳琯 선생을 직접 뵌 것은 딱 한 번이다. 언젠가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였다. 나는 안국동 쪽에서 인사동 네거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는데, 반대 방향에서 올라오던 이수성 총리를 우연히 만났다. 그때 이 총리와 동행하고 있던 분이 바로 화정 선생이었다. 그때 이 총리는 내게 "한 교수, 인사드려. 동아일보 김 회장님이셔라며 선선한 어투로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듯 이수성 총리는 자칭 호형호제하는 사람이 수만 명이 된다는 한국의 마당발이다. 잔정이 많으면서도 호방한 데가 있어서 많은 지인들이 그분을 따랐다. 나보다 2년 위인 그를 나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대학 때부터 알고 지냈기 때문에 격의 없이 그를 좋아했다.

 

아무튼 이 총리를 통해서 나는 화정 선생을 뵙게 되었는데, 내가 느낀 첫인상은 유난히 온후하고 과묵하다는 느낌이었다. 언론계 인사들은 아무래도 이지적이고 예리한 구석이 있으려니 여겨오던 선입견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화정 선생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소탈하고 후덕하다고 느꼈던 경험이 지금까지도 완연하다.

 

화정 선생과의 해후는 이렇게 일회성으로 끝났지만, 세상만사 인연의 실타래는 누구도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화정 선생과의 인연도 이와 같아서, 나는 훗날 그분의 장례식에서 조창弔唱 가사를 쓰게 되었으니 참으로 인생살이 인연의 고리들이란 도시 그 정체를 가늠할 길이 없다.

 

고려대학 영결식장에서 내 조사에 안숙선 명창이 가락을 얹어 진양조의 비탄 조로 조가를 부르자 장내는 이내 눈물바다가 되었다. 인사동에서 스친 인연이 화정 선생의 마지막 이별 예식에서 일종의 해로를 통해 다시 이어졌으니, 참으로 인연이란 현묘玄妙하기 짝이 없다고 하겠다.

 

정녕 가시나이까 화정 선생님

 

만경 들 고창 골에 봄비 내리고 진국명산 삼각산에 서설瑞雪이 내리며

온누리 삼라만상 생명의 물결 가득하니,

김 회장님 당신께서도 연년익수延年益壽 만수무강 누리시리라 믿었는데,

이 무슨 비보란 말씀이외까.

이 무슨 대경실색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외까.

존경하는 화정 선생님!

나라가 어려울 때, 겨레가 곤고困苦할 때

항상 민족의 희망으로 국체를 지켜내던 민족언론 동아 가족,

국내외 자랑스런 민족의 대학 고려대에 모여든 천하 영재들,

고려중앙학원의 요람 속에서 웅지를 키워 가는 나라의 동량지재,

이들 모든 화정 선생 평생의 분신들은 어찌하라고

이처럼 홀연히 모습을 숨기시나요.

이렇게 황망히 작별을 고하시나요.

 

제 소리 제 장단을 아끼시며 민족문화 창달에 헌신하신 화정 선생님,

안중근 의사와 홍범도 장군 같은 신작 창극에,

중앙아시아 알마티와 타슈켄트, 러시아 모스크바,

조국의 선율 아리랑 가락으로 촉촉이 위무하던 고려인의 눈물!

이제 어느 누가 그들의 외로움을 보듬어 주고,

이제 어느 누가 문화국민의 품격을 이토록 드높여 가며 이끌어 주시나요.

안 되지요. 안 되지요. 이건 정말 아니지요.

 

인자하고 후덕하신 화정 선생님!

정녕 무정하게 가시나이까. 만경창파에 배 띄워서 총총히 가시나이까.

산지니 수지니 해동청 보라매도 쉬어 넘는 고봉 장성령 고개,

그 너머 피안의 세계로 정녕 가시나이까.

선조 선친 혈육의 정이 그다지도 그리우셨나이까.

비익조比翼鳥 연리지連理枝

사모님의 자애로운 모습이 그다지도 애틋하게 사무치셨나이까.

추월이 만정할 때 청천靑天을 울어예는 외기러기처럼,

창졸간에 홀연히 이승을 하직하시니,

남은 자들 하염없이 진양조 이별가로 목이 메어 우옵니다.

 

언젠가 김소희 선생께 배우신 소리라며 흥타령을 부르셨지요.

아깝다, 이내 청춘 언제 다시 올거나. 철따라 봄은 가고 봄따라 청춘 가니,

오는 백발 어이할까! 아이고 대고 흥 성화가 났네 흥

 

그렇습니다, 화정 선생님.

사람이 비록 백년을 산대도 인수순약격석화人壽瞬若擊石火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왜 아니 모르리까만,

화정 선생님 남기신 업적 너무 높고도 커서,

화정 선생님의 후덕한 감화 더욱 깊고도 두터워서,

못내 아쉽고 애통할 뿐입니다.

 

동원도리東園桃李 편시춘片時春을 언제 다시 맞을 게며,

백천百川이 동도해東到海면 언제 다시 서쪽으로 되돌아오겠나이까!

부디 하늘나라 선계에서 명복을 누리소서.

천복天福을 누리소서. 영생을 누리소서.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