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국립국악원에서 평생을 봉직하며 가야고 정악 음악의 법통을 이어온 최충웅 원로사범이 자신의 음악 세계를 총정리하는 소중한 음반을 출간했다. 수록 곡목도 영산회상과 가곡만년장환은 물론 여민락, 도드리, 천년만세, 취타, 황하청, 경풍년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으로 명실상부하게 정악 가야고 음악의 전 분야를 망라했다. 실로 필생의 업적으로 칭송할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그간 시중에는 한악韓樂 관련의 여러 가지 음반이 많이 나와 있고, 정악 음악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최충웅 원로의 연주로 출간된 음반은, 그의 오랜 경륜에서 우러나는 난숙한 기량이나 풍진 세월을 거쳐 온 달관된 곡 해석을 미루어 볼 때, 단연 정악 음악의 표본으로 삼을 만한 군계일학의 압권이 아닐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음악도 학문도 결국은 각자 인생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또한 자기 완성을 위해 이를 연마하고 궁구窮究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저간의 세태는 이 같은 상식적인 진리가 뒤바뀌어 있다. 인간 완성을 위한 예술이요 음악에서, 인간의 문제는 증발되고 오로지 음악을 위한 음악, 기교를 위한 예술만이 횡행한다. 한마디로 자기 완성을 위한 음악이기보다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음악에만 매몰되어 무한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자연히 허세와 분식과 위선으로 포장되기 마련이며, 그만큼 지고지순해야 할 음악의 정체는 속물주의적 욕망의 도구로 전락되고 있다.
사람 됨됨이는 박덕하면서도 음악적인 재승才勝만을 앞세우며 대가연 행세하는 명사들이 지천인 세상에서, 묵묵히 음악을 통한 수기修己의 경지까지 염두에 두는 예인을 만나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내가 최충웅 원로의 가야고 음악에 남다른 관심이 쏠리는 까닭은, 바로 이 원로야말로 음악과 인성을 구분하지 않고 양자간의 조화와 상승 작용을 통해서 이상적인 자기 완성을 추구하는 음악가라는 심증을 평소에 지녀왔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에 발간된 주옥같은 정악 음반들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유별함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과연 정악正樂이란 무엇일까? 글자 뜻대로라면 ‘바른 음악’이란 뜻이 되겠는데, 한마디로 좋은 음악이란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면 ‘좋은 음악’은 또 어떤 음악을 지칭하는 것일까? 정답이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 윤곽을 찾아볼 수 있다.
일찍이 신라의 우륵은 가야고 음악 열두 곡을 작곡했다. 그런데 우륵의 제자들계고, 법지, 만덕은 선생의 음악이 번잡하다고[繁且淫] 불평하며 이를 다섯 곡으로 압축하여 개작했다. 우륵은 자신의 음악을 함부로 개작한 제자들의 행위에 크게 노여워했지만, 개작된 제자들의 음악을 거듭 듣고 나서는 오히려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때 우륵은 ‘즐거워도 방종에 흐르지 않고, 슬퍼도 비탄에 빠지지 않으니[樂而不流 哀而不悲]’ 가히 ‘바르다 하겠다[可謂正也]’라며 제자들의 개작곡을 칭송했다.
여기 우륵이 ‘바른 음악’이라고 평가한 기준으로 내세운 ‘낙이불류 애이불비樂而不流 哀而不悲’는 일찍이 《논어》에 그 원형이 담겨 있다. ‘낙이불음 애이불상樂而不淫 哀而不傷’이 곧 그 원조다. 아무튼 우륵의 ‘낙이불류 애이불비’이건 《논어》의 ‘낙이불음 애이불상’이건, 양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은 한마디로 과過하지도 않고 불급不及하지도 않은 중용中庸의 정서 지대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중용과 중화의 경지가 곧 정악의 분령인 셈이다.
급변하는 시대 사조는 한국 전통음악계에도 상전벽해의 변모상을 초래했다. 감정의 절제를 미덕으로 삼았던 정악의 위상은 퇴조한 반면, 희로애락의 적나라한 표현을 기조로 하던 대중적인 음악은 날로 번창하고 있다. 이 같은 세태의 변천은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경천동지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방송사 PD로 일하던 60년대 후반의 일이다. 당시 거문고의 명인 임석윤林錫胤 선생을 모셔다가 가곡 반주 음악을 연주할 때였다. 당시 임 명인은 정악곡 외에는 어떠한 음악도 거문고에 올리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에 유행하던 산조 음악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이다. 하기사 광복 전후쯤의 기록물에서도 우리는 감정을 절절히 노출시키는 산조 음악의 대두를 개탄하는 글들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니, 가히 당시의 시대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세상은 바뀌어 유현심수幽玄深邃한 정감의 정악보다는 감각적이고 재기발랄한 대중적 음악이 우리 생활 주변을 풍미하고 있다. 감정을 우아하게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과장되게라도 감정을 백일하에 분출하는 것을 음악의 본모습이요 자신의 남다른 기예인 양 착각하는 예가 비일비재할 만큼, 세상은 바야흐로 감성의 노출 시대로 변모하고 있다. 따라서 음들을 아끼고 절약하지 않고 쓸데없이 남용해 가면서 되도록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기법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유혹하려 한다.
이 같은 표피적이고 자극적인 음악들은 결국 우리 시대의 배면에 깔려 있는 물질 만능의 상업주의와 맞물리면서 야금야금 사람의 심성을 상하게 하고, 급기야는 사회를 병들게 하기 일쑤다. 옛말을 빌리자면 치세지음治世之音이 아닌 난세지음亂世之音이 곧 오늘의 우리 일상을 포박捕縛해 가고 있는 게 숨김 없는 저간의 음악계 실상이다.
이 같은 음악계 풍조를 감안할 때 최충웅 명인의 독실한 정악 음반 출간은, 작게는 수신修身과 정심正心의 의미와 크게는 이풍역속移風易俗의 사회적 효능면에서 한층 돋보이는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 평생 정악계에 몸담아 오면서 정악의 정통적 맥을 이은 원로 명인이 정악 음악의 정수를 진솔하게 음반에 수록하여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둘째로는 요즘 음악치료학music theraphy이라는 장르가 각광을 받아가고 있듯이, 번잡한 음악들로 오히려 황폐해져 가는 우리 시대의 심성을 청결한 샘물 같은 단아한 정악의 음율로 한층 정화시켜 가며 정악의 본질은 물론 예술의 고마움을 새삼 일깨울 수 있겠기 때문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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