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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7: 서암 권승관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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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7: 서암 권승관 선생

  • 특집부
  • 등록 2021.06.0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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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세상살이 어찌 보면 장강의 물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통상 우리는 표면만 보며 그 대상을 이해하기 마련이다. 동시에 흘러가는 물줄기련만 그 저변에 흐르는 물살은 알 길이 없다. 우리 인생살이도 이와 같아서 세상에 널리 회자되는 인물만 기억하고, 초야에 묻힌 인재는 비록 그가 보옥 같은 존재라도 좀처럼 알아채질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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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화천기공의 창업자 권승관(權昇官·사진) 명예회장


전통음악계에도 그 같은 사례가 있다. 그분만큼 국악을 사랑하고 그분만큼 국악을 몸소 익히며 심취한 예가 드묾에도 불구하고 중앙 한악계에서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초야의 보옥을 알아볼 정보나 안목이 부족했던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모든 문화예술 분야가 대동소이했지만, 전통음악 역시 일제 문화말살정책에서 가까스로 기사회생했다. 바로 그 기사회생의 생기가 움트고 뿌리내린 텃밭이라면 누가 뭐라든 남도의 예향 광주 고을이라 하겠다. 여유 있는 집안 자녀들이 일본 유학을 거치면서 누구보다도 먼저 전통예술의 소중함과 그 남다른 진가를 선구적으로 터득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일제 암흑기에도 광주 유지들은 유달리 국악을 사랑하고 국악을 육성하려고 애써 왔다.


고장의 몇몇 명인 명창들을 찾아가서 직접 배우고 교유하면서 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미음물을 떠먹이며 원기를 회복시켜 주듯, 살뜰히도 보듬으며 국악의 명맥을 이어냈다. 바로 그 같은 고마운 선각자 중의 한 분이 곧 서암瑞巖 권승관權昇官 선생이다.


전북 김제 출신인 서암 선생은 한국기계공업의 선각자요 개척자라고 할 기업인이었다. 6·25전쟁 와중에 화천기공사라는 합명회사를 차려 기계공업 분야의 초석을 놓았는데, 오늘날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세계로 뻗어가고 있는 화천貨泉그룹이 바로 그 후신이다.


서암 선생이 한국의 기계공업 육성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느냐 하는 평가는, 정부가 그분에게 어떠한 예우를 해 드렸는가를 살펴봐도 자명해지는 일이다. 한마디로 정부는 그간 그분에게 금탑산업훈장을 포함해서 훈·포장만 여덟 번 수여했다.


이처럼 서암 선생은 한국 굴지의 저명한 기업가였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광주 지역 국악 발전의 태산북두泰山北斗였다. 광주국악진흥회 초대 이사장이라는 직함이 단적으로 증언해 주듯, 서암 선생은 당시 그곳의 뛰어난 예인들과 교유하고 후원하며 광주 지역 국악 진흥의 견인차 역할을 한결같은 열정으로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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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남출판사에서 나온 기계와 함께 걸어온 외길이라는 서암의 자서전을 보면, 당시 그분이 광주 지역에서 교유했던 국악인 중에는 훗날 서울 중앙무대로 올라와서 크게 양명揚名한 명인 명창들이 한둘이 아니다. 대충만 돌이켜봐도 판소리에 임방울, 정광수, 김연수, 김소희, 박초월, 조상현 등이 있으며, 고수에는 김득수, 김명환 등이 있다. 또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국악인이나 애호가들로는 병신춤의 대가 공옥진의 아버지 공대일, 진도 지방의 명창 양홍도, 광주기예조합의 소리꾼 안채봉, 그밖에 박동실, 임세균, 김비현 등 뛰어난 예인들이 줄을 잇는다.


서암 선생은 국악을 사랑하며 후원하던 애호가나 독지가에만 머문 분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소리북의 달인인 명고수였다. 북장단 몇 가지 익혀 본 정도가 아니었다. 북장단의 속멋을 속속들이 터득한 경지였다. 그래서 그분의 장단에는 전통음악의 총체적 맛과 멋이 배어 있고, 소리꾼의 소리 길도 자연히 그분의 북가락을 따라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임방울 명창이 말년의 광주 공연에서 서암의 북장단을 주문했던 사실은 널리 회자되는 일화다.


또한 서암 선생은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고 널리 장학사업을 펼쳐 온 독지가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4반세기 이상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지를 매년 순회하며 그곳 고려인 동포들을 위한 위문공연도 하고 한글도 가르쳐 주는 일을 해 왔으며, 그 나라 유력 인사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양국의 가교 역할을 했다.


그 무렵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한국의 광주 분들이 그곳에 와서 고려인들에게 한글도 가르쳐 주는 등 여러 가지 고마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내심 반갑기도 놀랍기도 했다. 나만이 선각자인 양 실천해 오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지방 도시인 광주 분들이 그 같은 일에 앞장설 수 있었을까 심히 의아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웬만한 한국인들은 중앙아시아가 어디쯤 붙어 있는지도 모를 때였다. 더구나 그때는 직항로도 없어서 멀리 모스크바를 경유해야 했다. 그 같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광주 분들은 고생하는 핏줄들이 안됐어서 머나먼 타슈켄트까지 찾아간 것이다. 훗날 안 사실이지만, 그 같은 미담의 주역이 곧 서암 권승관 선생이셨다.


논어흥어시興於詩 입어례立於禮 성어악成於樂이라는 말이 있다. 일언이폐지해서 서암 선생의 한평생은 일찍이 십 대 때부터 이미 기업보국企業輔國의 대망을 마음속에 새겨 분기시켰으며[], 편법이 아닌 정도 경영에 입각해서 이상적인 기업인상을 확립했으며[], 결국에는 조화와 균형으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아우르는 음악의 속성 그대로 기업과 사회와 인생과 예술을 하나로 용융시켜 세상이 우러러 칭송하는 이상적인 인물상을 체현하며[], 한 시대를 덕인德人이자 대인大人으로 사셨다고 하겠다.


덕 있는 부모 밑에서 효자 나듯이, 서암 선생의 덕성과 가치관을 청출어람靑出於藍으로 이어받은 권영열 화천그룹 회장은 선친의 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독일, 인도 등 세계로 뻗어가는 탄탄한 중견 기업의 기틀을 다졌으니, 가문의 융성은 물론 묵묵히 기업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신실信實한 기업인의 모범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권영열 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기여에도 남다른 소신이 있어서, 선친의 호를 딴 서암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전통예술의 본향이랄 전남 문화예술 발전에 각별한 애정과 열정을 쏟고 있다. 그 중의 한두 사례가 곧 이 고장의 인재들을 선별해서 장학금을 수여한다든가, 혹은 전통문화예술에 공적이 많은 호남지역 예술인을 선정하여 매년 서암전통문화대상을 시상해 오고 있는 예들이라고 하겠다. 특히 금년이 벌써 9회째인 서암상은 회를 거듭하면서 호남 예술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음으로 양으로 확실한 격려와 분발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