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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국내춤기행, 동해안 별신굿, <세존굿> ‘중춤’은 전통춤 ‘승무’와 연관성이 있을까?'세존거리'의 중춤 한국의 굿에서 불교적인 연관성을 지닌 굿거리는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진도씻김굿의 <제석거리>, 서울·경기도당굿에서 <불사거리>, <제석거리>, 황해도굿의 <제석거리>, <칠성거리> 등이 고깔을 쓰고 불교적인 의식을 연행한다. 동해안별신굿에서는 <제석거리>와 <세존거리>가 있다. 제석신은 재복을 관장하는 신이며, 세존굿은 고깔을 쓰고 ‘중춤’을 추고 ‘바라춤’을 추지만, 아이의 잉태, 출산, 성장을 관장하는 신으로 모시고 있어 명칭과는 달리 많이 변이된 내용으로 전개된다. 또한 흔히 제석과 세존은 같은 신으로 혼용하기도 하지만 동해안별신굿에서는 굿거리가 나누어져 있다. 제석거리의 연행구조는 6단계의 기본구조로 푸너리춤, 청보무가와 춤, 거무춤, 토구름춤, 어포춤, 축원민요, 수부물림 등으로 연행하였다. 세존거리의 연행은 변형구조로 되어 있어 연행이 조금 다르다. 푸너리춤에 이어 제마수장단의 당금애기 서사무가와 춤(1시간30분), 드렁갱이와 삼오동(삼오장)장단에 중춤, 바라춤을 추고 마쳤다. 세존거리는 변형구조로 되어 있어 연행이 조금 다르다. 부채와 고깔을 들고 푸너리춤에 이어 제마수장단의 당금애기 서사무가와 춤(1시간30분), 드렁갱이와 삼오동(삼오장)장단에 중춤, 바라춤을 마친다. 이어서 무악이 계속되는 동안 무언극을 한다. 노승이 부채를 쥐고 자다가 긴 하품을 하고 이를 잡아먹는 시늉, 양치질과 세수하고 화장하기, 거울보기 허리띠 풀어 짚신 엮기를 한다. 무언극이 끝나면 무녀는 일어나서 다시 빠른 춤을 추다가 바라(제금)을 들고 춘다. 특히 ‘중춤’은 <세존거리>에서만 추는 춤이다. 이번 신암별신굿에서 세존거리는 원로 무녀 김영숙 무녀와 김용택 양중이 연행하였는데 연행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무녀가 당금애기 무가를 마치고 활옷과 고깔을 쓰면 양중들이 드렁갱이장단으로 빠른 분위기를 바꾼다. ①무녀는 활옷장삼자락을 좌우로 뿌리면서 왼쪽으로 한 바뀌, 오른쪽으로 한 바뀌 돈다. ②앞을 향해 엎드려 한동안 꿈쩍하지 않고 마치 승무의 복무(伏舞)처럼 움직임이 없이 부동자세이다. ③ 양중이 삼오동 1장단(♩×5×3박 -첫박 1징)에 "중아 중아 너 어디~”하고 사설무가를 하면 무녀는 몸을 꿈틀이며 고개를 조금씩 흔든다. ④ 엎드린 채 장삼을 한 팔씩 돌려 머리 위로 올렸다 내리고 좌우로 흔든다. ⑤ 다시 좌우로 장삼을 흔들어 머리 위로 한 팔씩 얹어 모은다. ⑥ 삼오동 2장단(8박중 1,2,3,5박-불규칙적 징)에 고개를 약간 들고 다시 한 팔씩 휘감아 모리에 얹었다 내리고 양팔을 좌우로 ∞자로 흔든다. ⑦ 고개를 들고 다시 한 팔씩 돌려 머리 뒤로 얹었다 내리고 반대 팔로 반복한 다음 양팔을 동시에 휘저어 머리에 얹었다 내리기를 반복한다. ⑧ 일어서서 장삼을 휘저으며 왼쪽으로 450도 돌아 우측방향을 향해 앉아 한 팔씩 흔들어 얹었다 내리고 양팔 동시에 흔들어 얹고 뿌린다. ⑨ 일어서서 양팔을 흔들며 오른쪽으로 540도 돌아 좌측을 향에 앉아 반복해서 한 팔씩 흔들고 얹고 양팔을 흔들 뿌린다. ⑩ 다시 일어서서 오른쪽으로 돌며 오른팔을 들어 뿌리고 왼쪽으로 돌며 왼손 뿌린다. ⑪ 장삼을 좌우로 크고 빠르게 흔들며 앞을 향해 전진후진 하면 삼오동3장단(빠르고 규칙적 징)에 좌우치기, 상하치기, 감아치기로 빠르게 흔든다. ⑫ 뒤로 돌아 굿당을 향해 좌우치기, 감아치기, 몰아치기, 비빔무관, 도리깨무관 등 손신무관으로 빠르게 뛰며 다양한 손춤을 춘 다음 천천히 왼쪽으로 돌아 장삼을 서서히 흔들고 앉는다. ⑬ 두나백이장단(징을 2번씩)에 앉아서 하품을 하며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가만히 있다가 머리를 끄덕끄덕 흔든 다음, 부채를 내리고 있다가 다시 머리를 끄덕끄덕 흔들며 존다. ⑭ 양치질 시늉과 물을 손으로 떠 입에 넣고 입 헹구기와 품기 두 번 시늉. ⑮ 세수하고 비듬 털고 머리 다듬기 ⑯ 부채거울 보며 얼굴 매무새 하고 좋다고 끄덕이기 ⑰ 가슴 띠를 앞으로 돌려 낸 다음 발가락에 끼고 엮어 짚신삼기 시늉 ⑱ 장단을 멈추게 하고 제주를 불러 발에 맞춰 보이고 짚신값을 부채에 받는다. ⑲ 두나백이2장단에 굿당을 향해 장삼을 흔들며 두 바퀴 돌아 굿당을 향해 절을 하고 마친다. ⑳ 장단이 멎으면 활옷을 벗는다. 이어서 양중이 장고만 치면서 "나무아미타불 원왕생 왕생~어떤 스님 꽝새들고 어떤 스님 죽비들고 어떤 스님 바라들고~” 하면서 염불소리를 하면 활옷을 벗고 고깔을 쓴 채 쾌자와 가슴띠 매무새를 다듬는다. 다시 굿거리장단으로 꽹과리, 징, 장고, 태평소가 합주하면 무녀가 손춤을 춘다. 왼손 들고 오른손 뒷짐지고 제자리에서 지숫고 반대로 지숫고 전진하였다가 왼쪽으로 돌아 굿당을 향하여 양손을 천천히 흔들며 허튼춤을 춘다. 다시 천천히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아 양손을 들어 흔들다가 내려 앞뒤로 여미고 제자리에서 어른다. 다시 좌우세로 천천히 흔들고 전진하였다가 왼쪽으로 돈다. 덩덕궁이장단으로 빨라지면 팔을 들고 자진 허튼춤을 추며 돌고 제자리에서 어르고 좌우세를 한 다음 바라 앞에 엎드려 좌우로 팔을 흔든다. 바라를 쥐고 앉은 자세에서 고개를 들고 양팔을 벌려들고 바라만 휘돌리고 한쪽씩 바라를 휘돌린다. 바라를 친다. <세존거리>와 연행하는 <도둑잡이거리>의 희극적인 재담과 ‘병신춤’ 마을 제관을 불러 ‘상제’라고 칭하며 뒤에 앉힌다. "명밥도 먹이고 복밥도 먹입시다. 우리 상제 명과 복을 받게 해주어야 하는데 일어나 먼저 춤을 추어야 복 받으니 춤을 추세요.” 자진모리를 치나 제관이 허튼춤을 덩실덩실 춘다. 무녀가 쓰고 있던 고깔을 벗어 씌워주며 고깔값을 받는다. 이어서 활옷도 입히고 중바랑도 어깨에 걸치고 꽹과리를 주고는 마을에 가서 시주해 가지고 오라고 주민들에게 보내고 중염불을 부른다. 꽹과리에 시주돈을 모아오면 염불축원을 마친다. 양중이 "시주 해왔다! 거기 앉으소!” 해놓고 "이 동네 도둑났다!” 하면 양중대표가 나와 <도둑잡이>를 진행한다. 이처럼 양중들이 굿거리 중간에 희극적인 놀이로 주민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곤반’이라고 한다. <도둑잡이거리>는 마을의 재물을 보호하고 손재를 막기 위한 남무들의 놀음거리로 세존굿에 이어 연행하기에 <세존곤반>이라고도 한다. 도둑잡이에 나오는 반주는 기악합주로 굿거리, 휘모리, 단오리이며, ‘병신춤’에는 타령장단을 연주한다. 18시 50분 먼저 양중대표가 등장하여 "났다 났다. 신암리 대동에 중도둑이 났다. 우리 얼사촌부터 불러보자. 부산의 칠암리에 사촌아! 서울에 사촌아!.....”하면 반주하던 양중이 하나 둘씩 앞으로 나오고 장고와 징 반주자만 남는다. 다함께 창부타령을 돌아가며 노래한다. "자! 도둑 잡으러 가자! 중아!”하고 주민들이 구경하는 장내로 모두 퍼져나가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양중 하나가 징채를 들고 앉아 있는 중 앞에 절하듯이 물구나무 서다가 털썩 엎드린다. 일어나 병신춤을 춘다. "도둑잡다가 병신됐다!” 양발 ‘안짱다리춤’, 징채를 흔들며 ‘곰배팔이춤’을 춘다. 다른 양중이 징채로 중의 고깔을 쳐 벗겨버린 다음 엎드려 절을 하다가 일어나 안짱다리와 ‘뻗정다리춤’을 춘다. "풍 맞았다. 한방에 가서 침 맞아야 된다!” 또 다른 양중이 중 앞에 물구나무서기로 절을 하다가 일어나 ‘얼굴병신춤’으로 ‘할개눈춤’과 ‘합죽볼춤’로 표정연기를 하면서 ‘어깨삐뚤춤’을 곁드린다. 또 다른 양중이 징채를 받아 주민들 앞으로 뛰어가 넙죽 엎드려 물구나무서기로 절을 한 다음 ‘곱추춤’을 추며 시주돈을 달라고 한다. 계속해서 양중들이 차례로 시줏돈을 받아오면 중한테서 바랑을 받아 들고 나와 도둑맞은 물건을 하나씩 꺼내며 "아이고! 큰일 났다!” 하면서 쌀 헹구는 조리를 꺼낸다. "이건 절의 은저다!” 조리를 중의 고깔을 벗기고 어깨에 얹힌다. 이번엔 "길다!” 하면서 밥주걱을 꺼내들고 "절간 똥간에서 밑 닦은 것이다.” "아니다. 은박주 놋박주다” 다시 중의 어깨에 얹는다. 이번엔 바랑에서 물바가지를 꺼내 머리에 씌운다. 사과를 꺼내어 천도복숭아라고 하며 노인회회장 주라고 전한다. 귤을 꺼내 이건 알이다. 홍두깨를 가까스로 꺼내들고 갖은 재담들을 늘어놓으면서 굿판을 웃음바다로 만든다. 다시 바랑에 주어 담아놓으면 무녀가 나와 술비소리를 하면서 중을 춤추게 하고 활옷을 벗게 하고 굿당에 재배하게 하고 마친다. 무녀가 수부잔을 굿상에서 들고 나와 사자풀이채에 맞춰 수부물림소리를 하고 술잔을 굿당 밖에 뿌리고 마친다. <세존거리>의 ‘중춤’과 전통춤 ‘승무’, 탈춤 ‘노장춤’의 근원성이나 연관성 이번 동해안별신굿 기행에서 필자가 주목한 굿은 <제석거리>와 <세존거리>였다. 그것은 우리 전통춤의 백미(白眉)라고 일컫는 ‘승무’와의 연관성이 있을까하는 문제였다. 승무는 춤사위의 멋과 춤가락의 흥을 고루 갖춘 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무의 기원이나 유래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입증자료나 변천과정을 실증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실정이다. 승무의 유래에 대하여는 불교의식무 기원설과 지족선사를 파계시킨 황진이의 무용설, 파계승의 번뇌에서 기원한다는 설,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 설, 그리고 가면극의 노장 과정에서 유래한다는 설 등 그 기원설이 구구하나 어느 것이 확실하다고는 단정하기가 쉽지는 않다. 승무와 불교의식무의 법고춤은 그 기법이 같고, 승무의 춤사위 구성이 불교의식무의 춤사위들과 관련 있다는 점, 반주음악이 염불로 시작되는 점, 몸과 발의 놀림, 장삼을 사용하는 법 등으로 승무가 불교와 법고춤에서 그 기원을 이루었으나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숭유억불 정책에 영향을 받아 종교예술에서 민간예술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하였고, 이렇게 민간예술로 자리잡아가며 점차, 승무는 변천과정을 거쳐 조선조 말에 이르러 하나의 예인춤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갖가지 형태로 발생되어지는 것이 전통예술의 특질이기 때문에 어느 것으로부터 기원되었으며, 그 최초의 형태는 무엇이었으며, 또 어떻게 변모되어 왔는가를 단정짓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상과 같은 불교의식무 기원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지만, 어떻게 하여 기원과는 전혀 다른 예인춤의 대표작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의 전이과정을 밝혀야 할 과제가 남는다. 굿은 아주 오랜 한국역사 속에서 한국인들의 삶 속에 전승해온 춤으로 승무의 전승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이나 연관성이 있나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였다. 특히 승무의 시작에서 보이는 복무(伏舞)와 같은 중춤의 시작, 고개들고 장삼춤, 일어서서 추는 장삼춤 등의 춤사위의 유사성, 제석거리와 세존거리라는 불교관련 명칭, 고깔을 쓰고 장삼을 입은 무복과 무구 등에서 승무와의 유사성도 보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한국 탈춤에 나타난 파계승들의 노장춤의 춤사위 구조와도 유사성이 많았다. 노장춤에서도 복무와 고개 들고 장삼춤, 일어서서 소무들 향한 장삼춤들과 세면하는 무언동작까지도 세존굿의 중춤과 무언춤이 상호간 유사성이 많은 것은 단순한 우연을 뛰어넘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동해안별신굿 춤기행에서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은 1976년 10월17일, 제7회 동해안 무속무용발표회, 서울예술고등학교 강당에서의 굿판이었다. 그러니까 40년 전으로 돌아가 고 정병호(중앙대, 춤평론가)교수가 조직한 한국전통춤연구회가 전국의 전통춤 명인과 민속단체를 초청하여 서울무대에 소개 시키던 작업에 함께 참여하면서 봤던 당시 김석출 일가가 보여줬던 동해안별신굿의 면모와 전승을 다시 재현하는 굿판이라서 감회가 새로웠다. 고 김석출과 그 가족들 중에 큰 따님인 김영희 보존회장이 이제는 고령의 보유자가 되었고, 둘째와 셋째 딸과 손자 내외 세대가 굿의 주역을 맡고 있는 것도 새로웠지만, 특히 오래 전일이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굿거리는 역시 세존거리였다. 당시에도 전통춤 ‘승무’와 탈춤의 ‘노장춤’의 춤사위와 마임춤들의 유사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이번 굿판에서도 똑같은 감흥을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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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손양희 명창 여섯번째 '동편제 판소리 ‘수궁가’ 완창발표회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9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 후보 손양희 명창의 완창 발표회가 8월15일 사천문화원 공연장에서 열린다. 손양희 명창은 10세에 국악계에 입문하여 17세(1985년)에 판소리에 입문하였고, 사천읍에서 故 선동옥(1936~1999년)선생님께 본격적으로 지금까지 38년째 각종 공모사업, 기획공연 및 판소리 전수활동을 이어오고 있으며, 이번 발표회는 ‘후보’자라는 수식어를 떼어내고, 예능보유자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경상남도의 유일한 판소리 예능보유자였던 故 선동옥 선생이 타계한 이후, 예능 보유자의 부재가 25년 이상 장기간 지속되어 이번 완창발표회는 문화재로 다가가는 계기가 되리라고 본다. 손명창은 이번 완창발표회를 준비하면서, "경상도는 장기간 판소리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의 부재로, 타 지역에 비해 판소리 관련 문화가 열악한 현실이다. 열악한 판소리 문화를 타파하고, 세계인류문화유산이자 우리 국악의 꽃인 판소리를 더 융성하게 활성화시키고, 지역민의 눈높이에 맞는 대중적인 음악으로 점차적으로 나아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또한 올해도 지리산 자락에서 보름간 '판소리 하계캠프'를 제자들과 28년째 이어오고 있는데, 故선동옥선생님과의 산공부의 기억을 회상하며 감사의 인사와 함께, '이번 완창발표회는 (故)선동옥 선생님께 공손히 바치고 싶다'고 전했다. 이번 손양희 동편제 판소리 수궁가 완창발표회는 1999년, 2006년, 2021년, 2022년 3월, 2022년 4월에 이어 이번이 여섯 번째이다. 한편 손명창은 2017년 제28회 대구국악제 명창부 종합대상을 수상했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예술대학원에서 한국음악학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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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지역춤의 개념과 형성 배경 (종합)지역춤이란 특정 지역의 생태문화적 배경 속에서 지역민들에 의해 공통적 특징을 형성하면서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춤을 말한다. 지역춤은 지역의 기후풍토와 사회환경에 따라 민족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지역마다 춤사위 형태나 내용이 다르게 파생된다. 예를 들면 추운 지역과 더운 지역의 춤이 다르고, 산악지대와 평야지대의 춤이 다르고, 유목민들의 춤과 농경민들의 춤이 다르다. 또 세시풍속과 시대, 향유자의 사회신분과 종교에 따라서도 춤이 달라지고, 반주음악이나 의상에 따라서도 달라지게 된다. 전통춤의 문화권은 대체로 영남권, 호남권, 충청권, 강원권, 수도권, 이북권 등으로 나누어진다. 자연풍토적 배경과 지역춤의 상관성 추운 지역은 수직춤과 도약(跳躍)춤, 더운 지역은 수평춤과 답지(踏地)춤 추운 지역은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도약하는 수직춤과 강렬한 춤을 춘다. 수직춤이란 발과 다리를 많이 사용하여 무릎 굴신이 많고 온몸을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도약(跳躍)춤이다. 북방민족인 몽골의 기마민족춤, 러시아 코사크 댄스(Cossack Dance)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 북부지역의 춤은 일반적으로 남부지역춤에 비해 강렬하고 도약이 많은 특징을 보이는데 해서지방 탈춤과 무당춤, 북한민속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더운 지역에서는 뛰는 춤을 추면 금방 더위와 땀으로 범벅이 되기 때문에 온몸으로 뛰지 않고 에너지 소비를 줄여 부드럽게 손과 발만 추는 말초부위춤을 추거나 엉덩이만을 좌우로 흔드는 수평춤을 춘다. 수평춤은 몸통 사용을 억제하고 손을 주로 사용하거나 제자리에서 엉덩이를 흔들거나 걸어다니며 추는 평면적인 답지(踏地)춤이다. 동남아시아 태국과 인도 등 남방민족의 말초부위만 움직이는 눈춤과 손가락춤, 폴리네시아의 허리춤과 하와이 훌라춤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의 남부지역의 춤은 북부에 비해 부드럽고 도약이 적고 땅을 밟는 답지춤이 많은 특징을 보여주는데 산대탈춤, 남부무당춤, 강강술래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아프리카 열대지역도 더운 곳인데 마사이족이 도약춤(Jumping dance)을 왜 출까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이들은 대평원의 수렵생활로 맹수의 위협에 대한 사전방지와 사냥감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 높이 뛰어 먼 곳을 확인해야 하는 삶의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대평원의 춤은 수렵이라는 생업의 방식으로 인해 춤의 생성요인이 다른 배경에 놓여있다. 산악지대는 천상지향춤, 평야지대는 대지지향춤 산악지대의 경우는 이동하기도 불편하고 숲과 나무 등 주변의 공간적 장애로 움직임이 제한적이어서 보이는 태양과 하늘을 향해 춤을 추는 천상지향춤, 상향춤이 주로 나타난다. 또한 좁은 공간 때문에 팔과 손도 옆으로 펼치기보다는 위를 향한 발산적인 춤을 추며 고도가 높아 추운 지역의 춤들과 유사성을 보인다. 티베트의 장삼자락춤, 멕시코 아즈텍의 태양신춤, 한국의 백두대간을 따라 존재하는 함경도 돈돌라리춤과 애원성춤 등에서 그 특징이 나타난다. 평야지대는 드넓은 지역이라 춤 종류도 다양하고 땅에서 일용한 양식이 창출되기에 대지에 고마움을 가지고 몸을 낮춰 추는 대지지향춤, 하향춤, 흥겨운 춤, 손과 팔을 옆으로 마음껏 펼치며 부드러운 예능성이 높은 춤이 발달한다. 평야지대는 대체로 따뜻한 지역이 많아 더운 지역의 춤과 유사성을 보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평야지대는 대부분의 농경지로 농업을 영위하면서 풍농을 기원하고 추수를 감사하는 농경춤이 발달하고 있다. 농경민족은 손춤, 유목민족은 발춤 흔히 유럽춤은 발레처럼 발춤을 주로 추는데 한국춤이나 아시아춤은 발보다 손춤을 주로 추는가? 라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문화현상에 대한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농경생활이 주업인 한국과 아시아인들은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기 위해 파종부터 김매기와 추수까지 모두 손으로 작업을 하게 된다. 춤의 중요한 기원 중 하나가 바로 먹거리를 찾아야하는 생업을 모방하는 유형이다. 예를 들면 원시시대의 수렵춤과 채취춤으로부터 유목춤과 농경춤이 이어져 왔는데, 이것은 풍요를 기원함과 동시에 생업의 몸짓을 표현으로 옮긴 모방춤들이다. 농경활동은 주로 허리를 굽히거나 몸을 낮춰 손으로 하는 농사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에 발춤보다는 농경을 모방한 손춤이 더 발달할 수 있었고, 이것이 아시아 농경춤들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유목은 많은 가축을 이끌고 초원을 찾아 걷거나 뛰어다니는 이동생활이 근간이기에 유럽 유목민들의 춤은 손춤보다 월등히 발춤이 발달하고 있다. 서양 발레나 아일랜드의 탭댄스(Tap Dance)가 발춤 중심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따라서 생업적 요인으로 볼 때 농업이 주업인 아시아춤은 손춤, 유목이 주업인 유럽춤은 발춤이 발달하게 된 이유이다. 사회환경적 배경으로 형성된 지역춤 앞서 밝힌 자연풍토적 배경들인 온난의 기후적 요인, 산간과 평야 등 지리적 요인, 농업과 유목 등 생업적 요인이 지역춤 형성의 초석으로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다음으로는 사회환경적 배경인 세시풍속적 요인, 역사적 요인, 사회적 요인이 지역춤의 줄기를 형성하게 된다. 세시풍속(歲時風俗)이란 일상생활에서 계절에 맞추어 관습적으로 되풀이하는 민속을 말한다. 지역에서 행해지는 축제, 카니발, 명절, 추수감사제 등에서 연행하는 지역춤 형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에서는 정월 대보름 농악춤과 무동춤, 단오절의 탈춤, 백중절의 허튼춤, 추석절의 강강술래 등 다양한 민속춤들이 지역마다 전승된다. 역사적 요인으로 고대춤, 중세춤, 근대춤 등 시대변천에 따라 다양한 춤들이 생성되고 소멸되고 전승되었다. 동시대라 할지라도 한국의 역사에서 보면 상고시대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고구려 동맹(東盟) 등이 있었고, 삼국시대에도 고구려의 호선무(胡旋舞), 백제의 기악(伎樂), 신라의 사자춤, 처용무 등 각기 다른 지역춤들이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요인이 되는 신분, 행정구역, 교류관계로 인해 지역춤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봉건시대의 신분과 관련한 춤으로는 궁정(궁중)춤과 민속춤, 귀족(양반)춤과 서민(농민)춤, 기방춤과 재인춤 등이 있다. 여기서 궁중춤은 지배자(왕, 황제)가 통치할 때 쓰이는 춤으로 단일하기 때문에 지역 유파(流派)가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행정구역은 지역춤의 권역을 나누는 기준이 되고 지역춤의 유파가 확실하게 나타나게 되는 특성이 있다. 예로부터 ‘조선팔도’라는 말은 한국을 8도로 구분한 것인데 이것은 곧 8도의 지역춤이 제각기 형성되어 있다는 뜻과도 같다. 교류관계란 전파문화인지 창조문화인지를 파악하는 관계를 뜻한다. 우수한 문화는 주변지역으로 전파되는 특성이 있다. 반대로 특정지역에서 창조된 문화는 다른 지역과 차별성이 있다는 특성도 있다. 이러한 이중적 성향의 비중에 따라 전파지역인지 독창지역인지가 나타나는 원리를 가진다. 즉 전파한 유사성보다 창조한 독창성이 많을 때 타 지역과 차별이 나타나고 지역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농악춤은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악기연주자는 연주만하고 연희자는 춤만 추는 것이 기본원리인데, 한국의 농악춤은 타악연주자 모두가 연주하면서 집단춤을 추고 게다가 상모돌리기까지 하는 연행형태를 띠는데,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일한 것이다. 민족문화적 배경으로 형성된 지역춤 지역춤을 형성하는 민족문화적 배경은 종교의식과 반주음악, 춤의상 등의 요인을 들 수 있다. 종교는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지역에서 민족의 사상 감정과 윤리 도덕의 기반을 형성하기 때문에 자연히 춤문화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종교의식은 춤의 요소가 많은 무교(巫敎),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수니파) 등도 있지만, 춤의식을 거부하는 기독교일지라도 지역춤의 성격이나 장르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무속의식은 소리와 춤과 공수내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의식도 영산재, 수륙제 등에서 범패와 작법춤으로 진행하며, 힌두교도 가락과 춤으로 푸자(puja)의식을 거행하며, 이슬람교 수니파의 의식춤으로는 터키 세마(Sema)춤과 이집트 탄누라(Tanoura) 등 선회(旋回)춤이 유명하다. 춤은 무반주로도 추지만 대부분 음악반주에 맞춰 춘다. 따라서 악기, 선율, 리듬, 노래 등의 음악적 상관관계가 클 수밖에 없다. 나라마다 다양한 민족악기와 민요와 장단 등에 맞추어 민족정서가 담긴 춤이 형성되고 전승되므로 음악반주의 영향력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지역춤은 지역민들의 의식주와 관련성이 있으며 그중에서도 지역민들의 종족의상을 입고 추는 경우가 많다. 특히 무복의 맵시와 소품들에 의해 춤의 성향과 춤사위가 형성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밖에도 통과의례의 요인으로 출산의례춤, 성년의례춤, 혼례춤, 장례춤이 있으나 문명화됨에 따라 의례만 남고 춤은 생략되는 경향이 있다. 결론적으로 지역춤을 형성하는 배경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역춤은 자연풍토적 배경으로 ‘뿌리’를 내리면 사회환경적 배경으로 ‘줄기’를 이루고 민족문화적 배경으로 ‘열매’를 맺게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병옥 전통예술 연구가, 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무용평론가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 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 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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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하늘재 옛길 복원…"156년 기록된 첫 고갯길"경북 문경시는 하늘재 옛길을 복원했다고 10일 밝혔다.시에 따르면 하늘재는 문헌상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고갯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아달라이사금 3년(156년)에 열었다고 기록돼 있다.이 때부터 하늘재는 군사, 교통, 물류, 문화 등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하늘재를 통해 신라에 불교가 전파됐고, 하늘재를 두고 삼국이 치열하게 대립했다.특히 고구려 온달 장군은 목숨을 걸고 하늘재를 탈환하고 싶어 했다. 하늘재는 문경 도자기의 판로가 됐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초 문경새재길이 공식화되기 전까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반드시 하늘재를 넘어야 했다.이 역사적인 길이 지금까지 충주 구간에만 남아 있었다.문경시가 이번에 하늘재 옛길을 복원함으로써 문경과 충주를 잇는 하늘재 옛길이 완성됐다.하늘재 옛길 복원사업은 하늘재 관광 자원화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난 2019년부터 시작됐다.하늘재 정상에서 포암산을 지나 관음1리 마을로 이어지는 2.48㎞의 옛길을 복원하고, 마을 특산품 판매 및 하늘재 홍보를 위한 마을 공동구판장도 건립했다.신현국 문경시장은 "오랜 역사의 현장이며,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가 담겨 있는 하늘재가 2000여 년 만에 다시 열린다니 감회가 새롭다"며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힐링할 수 있는 명품 옛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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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의 불교문화 산업’ 대한민국불교문화엑스포불교 문화콘텐츠 산업의 진흥을 꾀하는 ‘2023대한민국불교문화엑스포’가 오는 9월 14일부터 17일까지 대구 엑스코에서 ‘대구·경북의 불교문화 산업’을 주제로 개최된다.4일 대한민국불교문화엑스포 사무국에 따르면, 이번 엑스포에서는 ‘열암곡 마애부처님 바로모시기 특별전’이 주제전으로 진행된다.아울러 신라시대에 찬란히 꽃피운 불교문화의 중심지 대구·경북의 매력을 선보이는 문화사업전, 기획특별전, 체험·무대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될 예정이다. 열암곡 마애부처님 바로모시기 특별전은 지난 4월 ‘2023서울국제불교박람회’의 열기를 이어받아 ‘열암곡 마애부처님 바로세우기 사업’에 대한 대중의 지속적인 관심을 고취하고 ‘입불(入佛)운동’의 단초 역할을 하고자 마련됐다.특별전에서는 열암곡 마애부처를 주제로 한 오리지널 아트워크를 감상할 수 있다. 또 관람객들이 사업의 원만 회향을 기원하는 메시지를 적어 ‘발원문 기원나무’에 직접 매다는 참여형 체험프로그램도 함께 진행된다. 대구·경북지역의 전통문화와 불교사상을 담은 상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문화사업전은 이번 대한민국불교문화엑스포의 백미다.섬유·금속·도자 등을 활용한 불교공예전과 전통미술과 현대미술을 아우르는 불교예술전, 건축·식품·차·의복·문화상품 등을 볼 수 있는 불교문화전은 관람객에게 한국 전통문화를 새로운 시선과 감성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할 예정이다.대구 무형문화제전수교육관 소속 장인들(조각장·소목장·창호장 등)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장인의 공방전’과 대구·경북지역 문화콘텐츠 및 지역특산품을 홍보하는 ‘지자체 특별전’도 관람객의 기대를 모은다.무대프로그램으로 대구·경북을 대표하는 스님들의 법문·강연과 전통공예, 지역 주요사찰의 유·무형 콘텐츠를 오감으로 느끼는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된다.조직위원회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찬란하게 피어난 불교와 한국전통문화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한편 전통문화의 진흥을 꾀하고 지역사회 성장을 위한 지속가능한 문화콘텐츠를 개발·발굴하고자 한다”고 밝혔다.이번 엑스포는 불교신문과 BBS불교방송이 공동 주최하고 대한불교조계종·경북도·대구시 등이 후원한다. 대한민국불교문화엑스포 참가를 원하는 업체 및 사찰은 7월21일까지 신청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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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수년 전 본 지면을 통해 초분을 다룬 바 있다. 최길성이 보고한 전북 위도의 증골장(蒸骨葬) 사례를 다시 주목한다. 초분에서 뼈를 추려가지고 집으로 와서 시루에 넣고 찌면서 당골이 굿을 한다. 발목 묶인 제물(祭物) 수탉이 울면 영혼이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굿을 중지한다. 비로소 시루에서 뼈를 꺼내어 깨끗이 한다. 최덕원은 시커먼 뼈라도 시루에 넣고 찌면 새하얗게 고운 모습으로 변한다고 말한다. 임산부일 때는 반드시 초분을 한다고 증언한다. 빈(殯)이라는 초분의 장례법 모두가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던 독장 즉, 항아리 등에 넣어 돌로 묻어두는 아이들의 주검처리 형태와 연관된다. 왜 뼈를 찌거나 닦아내어 다시 매장하는 것인가? 초분으로 대표되는 이차장례에는 살보다 뼈를 중시하는 어떤 관념 즉 영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주검 자체를 자궁의 메타포인 동굴에 넣는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육신과 영혼을 분리하고 썩어 없어지는 살보다는 오랫동안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뼈에 거듭남과 재생 등의 관념을 부여했다는 뜻이다. 초분장을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러한 스토리텔링 또한 죽음의 극복이나 치유의 한 측면을 다룬다. 뼈와 살의 분리, 인간의 몸에서 영혼을 증류해내는 방식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대로부터 장례식을 인간의 몸으로부터 영혼을 증류해내는 기술로 독해하기 시작하였다. 이창익은 그의 연구 「죽음의 연습으로서의 의례」에서, 장례식은 부패하는 신체로부터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일련의 세밀한 절차들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단일한 장례식이 몸의 장례식과 영혼의 장례식 혹은 살의 장례식과 뼈의 장례식으로 이중화되는 사례들이 예시된다. 내가 『산자와 죽은 자를 위한 축제』(민속원)에서, 장례를 두 개의 단위 즉 주검의 처리와 영혼의 처리로 나누어 분석했던 것도 이런 일환이다. 예컨대 살의 장례식을 일차장례식으로, 뼈의 장례식을 이차 장례식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일차장에서는 영혼이 깃든 뼈를 살로부터 구분해내는 작업을 하고 이차장에서는 영혼의 귀천 혹은 재생의 염원 등을 담은 서사극 축제, 특히 씻김굿의 영돈마리를 통해 증류주(음복주)를 만든다는 것이 내 책의 요지다. 망자가 더 오래도록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혹은 어떤 형태로든 재생을 염원하는 표현이 바로 망자의 주검을 다루는 방법과 절차에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프레이저가 보고한 『황금가지』의 다양한 사례들은 우리들에게 방대한 영감을 선사해준다. 캄보디아의 외딴 밀림 속 신비스러운 '불의 왕'과 '물의 왕이 있다.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이 나라의 일반적인 관례와는 달리 이 신비스러운 두 왕은 화장(火葬)을 한다. 손톱과 이빨, 뼈 같은 것은 부적으로 경건하게 보관한다. 시체를 장작더미에 태우는 동안 죽은 주술사의 인척들은 왕이라는 싫은 직책에 오르게 될까봐 숲으로 달아나 숨는다. 사람들이 가서 그들을 찾는데, 은신처를 제일 먼저 들키는 사람이 다음 차례로 왕이 된다. 1891년 2월 한 프랑스인 장교가 이 외경스러운 왕을 만나지 않았다면 마치 우리가 단군신화를 설화로 대하듯 서구는 물론 인류사에 하나의 우화로 남았을 법한 이야기다. 우리에게도 유사한 장속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세 개의 복주머니를 준비한다. 한 주머니에는 손톱을 다른 주머니에는 발톱을, 또 다른 주머니에는 머리칼을 담는다. 육신은 죽었어도 손톱발톱 그리고 머리칼은 일정 시간 자라기 때문이다. 무슨 뜻일까? 손톱발톱이 피부의 하나이긴 하지만, 죽어서도 죽지 아니하는 뼈에 대한 관념의 대신이라고 나는 풀이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승려들이 다비식을 마치고 획득하는 사리(부처나 성자의 유골)도 뼈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같은 맥락 아니겠는가. 뼈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지극한 관념 뼈에 대한 이 지극한 관념은 어디서 온 것일까? 썩는 살과 오랫동안 보존되는 뼈에 대한 분리 관념 말이다. 이 생각들이 좀 더 확장되면서 육신과 영혼의 분리 혹은 영혼의 구제나 재생, 부활을 따지는 종교의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일차장으로서의 육신을 탈각하고 이차장으로서의 영혼을 좀 더 오래 혹은 영원히 존재하게 하는 장법으로 발전된 셈이다. 이차장으로서의 초분장이 살과 뼈의 장례를 분리하는 대표적인 장례법이다. 내가 현지 조사한 자료를 포함해 여러 선학들이 보고한 자료들에도 초분장에 대한 현지인들의 구술은 대동소이하다. 자연적으로 육체의 살을 없애고 뼈를 좋은 곳(선산 등)으로 모시려고 초분을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뼈에 영혼이 담겨 있다는 영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시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주검 자체를 동굴에 넣거나 혹은 고인돌이라는 인공굴에 넣었다가 점차 육탈 후 뼈만 추려서 매장하는 장례법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난 칼럼에서 고인돌과 옹관을 인조굴로 해석하고, 독(瓮)이라는 용어 자체가 도가지, 도가니 등의 용례로 알 수 있듯이 돌(독)과 관련 있음을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고인돌 아래 매장 혹은 풍장(風葬)되었을 주검이 살과 뼈를 분리하는 방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고고학자들의 현답을 좀 더 추적해봐야겠다. 진도군 덕병리 장승제에서 소의 턱뼈를 바치는 이유 뼈에 대한 관념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고분에서 발굴되는 동물의 뼈들을 고고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레이저의 보고는 중요한 시사점들을 제공해준다. 예컨대 돼지 형태의 곡물정령은 추수 때와 파종기에 각각 등장한다. 코울란트의 노이아우츠에서는 그 해에 처음으로 보리씨를 뿌릴 때, 농장주의 아내가 돼지 등뼈와 꼬리를 삶아서 밭에서 씨 뿌리는 일꾼에게 가져온다. 일꾼들은 꼬리를 잘라서 밭에다 꽃아 놓는다. 곡식 이삭이 그 꼬리만큼 길게 자란다고 믿기 때문이다. 파종기에 미혼 남자를 밭에서 잔인하게 살인하는 사례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 돼지의 형상으로 그는 파종기에 땅에 묻히며, 추수 때 무르익은 곡식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내가 공부한 바로는 미혼 남자보다는 주로 처녀가 이런 시작이나 증식, 생산의 기제로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돼지뼈를 재생과 생산 및 풍요를 기원하는 즉,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는 영혼력으로 관념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프레이저의 이 이론들을 유감주술(혹은 모방주술)과 접촉주술이라고 한다. 비슷한 것이 비슷한 효과를 내며 그것과 접촉하면 비슷한 기능을 한다는 뜻이다.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의 당산제(거리제로 호명한다)에서는 두 기의 석장승에 해마다 소 턱뼈를 바친다. 인근의 군내면 세등마을 당산제에서도 소턱뼈를 바친다. 벌교읍 대포리 당제에서는 도깨비고사라고 해서 끄렁치에 소뼈(한 마리라고 여기는 분량)를 담아 개펄에 헌식한다. 분화된 생각들이긴 하지만 모두 뼈에 대한 지극한 관념들을 뿌리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문이다. 화장(火葬)이 보편화된 현재, 이것이 영혼관에 대한 치열한 논의를 거친 풍속인지 인류사의 한 지점에 내 질문을 던져둔다. 죽음관과 영혼관은 곧 삶의 태도에서 비롯되며 또한 삶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늦가을 문턱 가로수 아래 나는 그저 무심한 아파트숲을 응시할 뿐이다. 죽음의 극복이나 치유의 측면들을 고려하지 않는 저급한 관념들이 진중한 논의도 없이 우리들의 도시를 배회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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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부터 국립정동극장 정오의 사랑방 음악회 '정동茶音' 첫 시작차와 명상 그리고 음악이 함께하는 정동극장의 정오에 만나는 '정동다음(茶音)' 힐링 콘서트가 오는 7월 열린다. 국립정동극장은 한 달에 한 번, 매월 첫째 주 수요일에 진행된다. 클래식을 즐길 수 있는 브런치 콘서트 <정동팔레트>에 이어 <정동다음>으로 우리 소리를 쉽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차별화된 시간을 마련할 계획이다. 올해 6회차를 예정하고 있는 <정동다음>은 정가보컬리스트 하윤주가 진행을 맡아 매회 새로운 게스트와 함께 무대를 꾸밀 예정이다. 하윤주는 국가무형문화재 가곡 이수자 하윤주는 고전적인 목소리로 현대적인 감성을 아우르는 정가 보컬리스트이다. 깊고 아정한 전통음악인 정가에 매료되어 한국 전통 소리의 근원을 이어가고 있다. 현대인들의 바쁜 일상 속, 여유와 쉼을 만끽할 수 있는 <정동다음>의 60여 분은 국악을 통한 사운드 테라피, 차를 통한 티(Tea) 테라피, 명상을 통한 마음 테라피로 구성해 어지러운 심상을 비워내고 음(音)을 받아들이는 시간으로 가득 채운다. 7월 5일, 그 첫 번째 시간은 2022 청년국악인큐베이팅사업 <청춘만발>의 우승팀 김다혜, 황규창 듀오 ‘DQ(디큐)’가 함께한다. 또한 개막을 기념해 주한캐나다대사관과 협력한 무대를 준비 중이다. 한국-캐나다 수교 60주년을 맞아 방한하는 ‘롤스톤 스트링 콰르텟’이 이번 공연에 참여해 문화예술교류의 장을 넓혀 그 의미를 더할 예정이다. 매달 ‘이달의 차’를 선정해 다양한 차의 매력을 선보일 <정동다음>은 7월의 차로 ‘녹차’를 제공한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차문화콘텐츠학과 강사진들이 출연해 다도 문화를 소개하고 시연과 시음 체험을 진행한다. 또한 공연 20분 전, 자유 명상으로 공연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이번 달은 티베트의 전통악기 싱잉볼 연주가 흐르는 명상 시간을 갖는다. 국립정동극장 정성숙 대표는 "새롭게 선보이는 오전 콘서트 <정동다음>이 쉼 없는 삶에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편안하게 내려놓고 재충전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고풍스런 사랑방 공간에 소수의 관객들만을 모시는 이번 공연을 통해 악기 본연의 소리를 그대로 즐기며 차와 명상을 더한 이완의 시간을 만끽하시길 바란다.”며 기획 의도를 전했다. 명상, 차담회, 음악감상 등 1석 3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2023 <정동다음> 7월 공연 예매는 국립정동극장 홈페이지 및 인터파크를 통해 가능하다. 티켓 가격은 전석 2만 원이며, 첫 공연 개막을 맞아 관람객을 위한 30% 특별할인 등을 진행한다. <정동다음> 첫 공연을 관람한 모든 관객에게 주한캐나다대사관 머그컵과 파우치 선물을 제공하는 이벤트도 준비된다. (예매 및 문의: 국립정동극장 02-751-1500 www.jeongdo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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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고인돌은 '굄돌'을 놓아 만든 무덤이라는 뜻이다. 굄돌 위에 대형의 판석을 덮었으니 사실은 '덮은돌' 혹은 '누운돌'이라는 이름이 정확할지 모른다. 세운 돌을 '선돌', 한자말로 '입석(立石)'이라 한다. 세운 돌과 대칭관계를 이룬다고 봤을 때 서있는 돌과 대칭되는 개념은 '누운돌' 혹은 '덮은돌'이다.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 등으로 호명한다. 석붕의 붕(棚)이 시렁이나 선반 같은 것을 말하므로 '돌선반'이나 '윗덮개' 즉 '덮은 돌'에 의미를 둔 것으로 보인다. 'Dolmen'의 'men'이 돌이라는 뜻이고 'dol'이 탁석(卓石)이라는 뜻이니 테이블 모양의 돌 즉 이것도 위의 덮은 돌에 의미를 둔 호명 방식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위에 덮은 판석보다 밑에 고인 굄돌에 의미를 부여하는 '고인돌'이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한자말 지석묘(支石墓)의 지(支)가 지탱하다 버티다 괴다 등의 뜻이 있으므로 이 또한 굄돌의 의미를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의 분포가 세계적이라고는 하지만 그 거석들과는 다르게 왜 우리는 덮개돌보다 굄돌에 의미를 더 두었을까. 덮은돌과 고인돌, 한반도를 왜 고인돌의 나라라고 부를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니 고인돌을 한반도 특유의 묘제를 지칭하는 용어라고 풀이해두었다. 그런데 고인돌의 분포지역은 북유럽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유럽의 영국으로, 프랑스, 스위스와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지중해의 북쪽 연안지방, 중동, 인도, 동남아시아 등지와 중국의 복건성, 절강성, 산동반도, 요동반도, 길림성 남부를 거쳐 한반도 전역, 일본의 규슈 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해있다. 거의 세계적이다. 그 중에서도 한반도에 집중적으로 분포해있기 때문에 유네스코에서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지 않았겠는가.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하천유역의 대지와 낮은 구릉에 많이 축조되었다. 넓은 평야지대보다는 산과 구릉이 가까운 약간 높은 평지와 해안지대 등지에 많다. 시기적으로 보면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 무덤양식이다. 대개 유력자의 무덤이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문제제기 하나, 고인돌을 세계적인 거석문화의 하나로 보는 견해에는 이견이 없으나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 등 이집트나 아프리카 대륙의 각종 석조물 또는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 카르낙의 열석(列石) 등을 한 그룹에 넣어 해석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광의의 맥락에서는 예컨대 누운돌이나 덮은돌의 개념이라면 돌멘(Dolmen)의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협의의 맥락 즉 '굄돌'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는 격이 다르지 않을까? 무덤의 구조로 봐도 한반도의 고인돌이 가장 확실하고 수량도 가장 많다고 한다. 고인돌은 함경북도의 일부 지방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에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특히 고창, 화순 등 남부지역에 유달리 많이 분포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많이 없어지거나 훼손되었다지만 아직도 15,000개에서 20,000여개가 남아있어 심지어 한반도를 고인돌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중 대부분이 남도에 있으니 바꾸어 말하면 남도지역을 사실상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러도 무방할까? 고인돌은 굄돌을 통해 만든 인조동굴이다 문제는 왜 그냥 덮지(덮은돌) 않고 돌을 고였(굄돌)을까 하는 점이다. 까닭이 있을 것이다. 땅에 있는 구조물을 이용하거나 평지 혹은 땅을 파고 돌을 덮으면 덮은돌 혹은 누운돌이 된다. 굄돌을 사용한 이유는 돌을 고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떤 환경 즉 판석과 굄돌간의 공간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굄돌을 괴면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은 지상으로부터 떠 있기도 하고 혹은 지표 아래 조성되기도 한다. 진도군 조도면 가사도의 할아버지당을 사례 삼아본다. 쭈뼛쭈뼛 세운 거석들 위로 마치 고인돌처럼 판석을 덮은 형국이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혹은 청동기시대의 잔존물을 후대에 마을당(堂)으로 삼은 것일까? 이런 형식은 서남해안 특히 섬지역에서 산견되는 '고려장' 혹은 '고린장'이라고 부르는 묘제에서도 발견된다. 하나같이 돌을 좌우로 쌓아 올리고 판석이나 흙을 덮는 구조로 되어 있다. 지난 칼럼에서 옹장(甕葬)과 석장(石葬)의 아우라를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크게 보면 동굴의 다른 형태이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의 지면을 통해 자연토굴에서 인위적 토굴로 이어지는 맥락을 주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같은 동굴의 이미저리는 고인돌에서 옹관으로 특히 아이들의 주검을 처리하는 독장으로 이어져왔다고 본다는 점도 밝혀두었다. 이천년을 지나고서도 유독 아이들의 주검을 독담 혹은 독장 형식으로 처리하는 이유를 상기해보면 한편의 답이 주어질 수 있다. 주체세력이 다를 수는 있지만 선대는 고인돌로 후대는 옹관으로 장묘제가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초분과의 관련은 차차 설명해나간다. 어쨌든 '굄돌'을 강조하여 고인돌이라 호명한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 돌을 괴서 만든 인조동굴, 여기서 말하는 동굴은 자궁 모티프이며 고대인들의 생산관념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즉 고인돌은 무덤 양식이면서 생산을 하는 재생의 동굴이기도 하다. 고인돌에 그려진 북두칠성이나 윷판바위, 불교의 관음설화는 물론 수많은 여음굴 설화들도 관련된다. 고대인들은 고인돌에 어떤 신화들을 투사하였던 것일까. 단군신화, 웅녀가 탄생한 동굴은 어디에 있을까? 동굴 관련 설화의 역사는 깊고도 넓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단군신화다. 이들 설화소는 남근바위와 대칭을 이루며 음양론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동굴 자체 즉 음기(陰氣) 만으로 출산 혹은 생산의 의미를 완성하기도 한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 아래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천부인 3개를 받아 3개의 큰 봉우리가 있는 태백산 정상에 내려왔으며 무리 3000을 거느리고 정상의 신단수 아래 '신시(神市)'를 열고 환웅천왕이 되었다. 3이라는 숫자를 주목하자. 단군신화 동굴의 삼칠일에 대해서는 대개 7일이 세 번 거듭된 날짜로 해석해왔다. 현재까지 전승되어온 세이레 습속에 착안한 해석이다. 예컨대 아이가 출생하면 7일째 되는 날은 초이레, 14일째 되는 날은 두이레, 21일이 되는 날을 세이레라 한다. 출입문에 숯과 한지 등을 끼워 넣은 왼새끼 즉 금줄을 걸어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 이레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 착안하면 이것이 세 번의 칠일임을 알 수 있다. 북두칠성을 상징 삼는 부족이 3이라는 숫자를 상징 삼는 세력과 연대했을까? 숫자 3이 동서고금을 통하여 유익한 숫자로 이해되었던 점 불문가지다. 특히 동양권 예컨대 우실하에 의하면 몽골리안의 3이라는 숫자는 다시 그것을 3번 더하는 숫자 9를 최정점으로 여긴다. 불교의 장례기간 사십구재(四十九齋)도 이 7을 다시 일곱 번 더한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문제 제기, 그렇다면 웅녀가 태어난 동굴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난 칼럼에서 다룬 중국 지린성의 국동대혈이나 수많은 설화 속에 등장하는 천연동굴 곧 여음굴일까? 단군신화가 지극한 상징이고 비유라면 동굴 또한 지극한 상징과 비유 속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신약성경 요한복음 20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동굴)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그렇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곳도 동굴 무덤이었다. 출입문에 숯과 한지 등을 끼워 넣은 왼새끼 즉 금줄을 걸어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 이레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 착안하면 이것이 세 번의 칠일임을 알 수 있다. 북두칠성을 상징 삼는 부족이 3이라는 숫자를 상징 삼는 세력과 연대했을까? 숫자 3이 동서고금을 통하여 유익한 숫자로 이해되었던 점 불문가지다. 특히 동양권 예컨대 우실하에 의하면 몽골리안의 3이라는 숫자는 다시 그것을 3번 더하는 숫자 9를 최정점으로 여긴다. 불교의 장례기간 사십구재(四十九齋)도 이 7을 다시 일곱 번 더한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문제 제기, 그렇다면 웅녀가 태어난 동굴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중국 지린성의 국동대혈이나 수많은 설화 속에 등장하는 천연동굴 곧 여음굴일까? 단군신화가 지극한 상징이고 비유라면 동굴 또한 지극한 상징과 비유 속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신약성경 요한복음 20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동굴)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그렇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곳도 동굴 무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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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3김덕명의 전통춤은 양산지역의 사찰(寺刹)과 권번(券番)에서 전승하던 독특한 춤들을 전수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며 후학들에게 전수시켰다. 더구나 사찰과 권번은 수행도장과 세속이라는 서로 상반된 환경이기에 어울릴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김덕명의 춤은 그런 상반된 춤 세계를 모두 포용하면서 조화를 이루면서도 남성적이고 영남적이고 사찰적인 춤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 김덕명의 춤의 장점이라고 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부산·경남지방의 민속을 발굴하고 복원하고 전수하는 탁월한 악가무의 재능까지 겸비한 예인이며 재인이며 기인이었다. 이제 그가 남긴 춤과 민속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사찰계춤(4종), 기방계춤(11종), 민간계춤(13종) 3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1. 사찰계춤김덕명의 사찰계춤을 전승한 통도사는 경남양산시 하북면 영축산에 자리한 사찰로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하지만 전승계보는 조선말기 철종시대까지의 무수(舞手)승려(魚山僧)는 알 수 없으며 계보가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고종시대의 이월호(李月浩, 1880~ ?)로부터 김설암(金雪岩, 1885~ ?)→신경수(新京壽, 1893~ 1965)→양대응(梁大應, 1897~ 1972), 그리고 김덕명에게 까지 이어진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1) 양산사찰학춤양산학춤은 1880년대 통도사의 이월호스님으로부터 사찰계에서 민간재인계로 4갈래로 전승되었다. ①김설암-신경수-양대응으로 사찰계 전승에서 민간재인 김덕명으로, ②사찰관련 민간예인계의 김두식(金斗植)-안화주(安化周, 1894- 1965)-황종열(黃鐘烈, 1897-1957)에서 김덕명으로, ③이주서-서상근에게 전승은 단절되었고. ④이주서–김동원 전승은 동래학춤으로 전승되었다.이렇게 양산에서 유일하게 통합전승된 김덕명 양산학춤은 그 사찰계 원형성과 민간재인계의 독특한 덧배기 춤사위와 교방계의 섬세한 바디(성향)가 깃들여져 예술성이 높은 춤으로 전승되었다. 학춤의 유래는 신라 선덕여왕 15년(AD646) 통도사가 창건된 이래 수륙재, 영산재, 종무대재 때 의례행사무로 승려들을 중심으로 전승되어왔다고 전한다. 김덕명의 양산사찰학춤은 24가지 춤사위를 4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단계별 의미로 학을 표현하면서 춤사위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1단계> 자연의 새가 하늘을 날고 땅으로 내려앉는다. 먹이를 찾기 위해 동료를 위협하며 존재감을 알린다. <2단계> 먹이를 찾기 위해 사방을 살피며 걷는다. 날개 짓하며 돌고 먹이를 고르며 으쓱인다. <3단계> 학은 먹이를 집고 죽이고 먹는다. 배부른 학은 쉴 터를 찾아 걸으며 따뜻한 햇살에 몸을 맡기니 졸음이 온다. 주위 소음으로 깜짝 놀란 학은 일어서면서 기지개 편다. <4단계> 동료 학과 짝을 이루고 끌어 주며 동료에게 먹이를 찍어 먹여주고 노닐다 날아간다. 양산사찰학춤은 사대부차림의 모습에서 학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갓과 도포자락에서 나타나는 우아한 학의 날개 짓, 몸짓 등에서 학의 동태가 사실적으로 전달된다. 하체중심에서 이루어지는 도약과 집중, 배김새 등 굵직한 남성의 멋이 내재된 춤사위는 학춤에서만이 볼 수 있다.(박계현의 박사학위 논문발췌) 2) 지성승무지성승무는 일반적으로 성행하는 승무와 다른 의미를 지닌 독특한 춤이다. 춤의 근원은 인간중심적 구도, 순도한 도승과 상좌간의 기구한 운명적 사연으로 소산한 전통 불교 춤이다. 검정 승복에 붉은 가사(袈裟)의 강렬한 구도(求道)의 여한(餘恨)으로 중생구제의 부처님이 수행한 수많은 선행과 공덕, 정진 수행을 찬미하는 불교의 정통춤 지성승무는 장엄하면서도 신성한 몸놀림으로 재현되고 있다. 수도승이 수행 길목에서 부모를 잃은 동자를 구해 등에 업고 토굴로 돌아와 불도성상 십여년에 열반하신 스님의 액운을 풀어 소생케 하고 상좌는 스님과의 운명적인 이별을 해야 하는 슬픈 숙명을 적(赤)과 흑(黑)의 대비로 보여주는 춤사위가 전율스럽기까지 하며, 절정에 다달아 검은 허울, 붉은 허울 벗어 던지고 미친듯이 북을 두드리며 흰 적삼이 꿈결처럼 너울거리는 정서가 강렬한 춤이다. 춤의 순서는 <염불장단춤>꿈에서 깨어나서 스님을 살리고 떠나야하는 슬픔으로 흐느끼며 슬픔을 억제하는 춤사위다. <도드리장단춤> 상좌가 스님의 움직임을 엿보며 눈물 닦는 춤사위이다. 움직이는 스님에게 다가설 수 없는 괴로움이 묻어나온다. <타령장단춤>꿈속에 나타난 도승이 가르친 소생의 춤이다. 타령 춤을 출 때 스님이 좌정하기 시작하며 상좌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자진타령장단춤> 차츰 깨어나는 스님의 모습을 장삼자락 사이로 엿보며 눈물 닦는 춤사위다. <굿거리장단춤> 스님이 좌정하니 희비가 엇갈리며 떠날 준비를 하고 북을 울린다. 장삼–가사–홍띠–염주-고깔 등을 차례로 북에 걸은 후 스님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울면서 떠난다. 이 춤에서 상좌가 떠나는 의미는 스님과 상좌가 서로 상극이라 소생하는 스님의 모습에게 다가설 수 없는 상좌의 아픔이 춤사위를 통해 나타난다. 이렇게 짜인 승무는 경기도 재인청승무와 강태홍류 승무 등 재인계통의 승무의 공통적인 성향이다. 지성승무의 복식은 스님의 평상복으로 우아한 자태를 나타내기 위해 고급소재에 의존하는 일반 승무와 상반되며, 승모와 소 가사, 염주, 홍 가사 등으로 구성된 소품에서 사찰의 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홍가사에는 원과 학, 토끼를 수놓았는데, 원은 우주를 나타내며 학은 태양, 토끼는 달을 의미하며 지구의 음양조화를 일컫는 것이다. 홍띠는 안태(安胎)의 의미가 내재된 것으로 김덕명의 춤에서만이 볼 수 있다. 북은 죽음을 의미하며 스님을 살린 상좌가 남으로 떠나며 생사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연등나례살풀이춤연등나례 살풀이춤은 고려대전 연등회 때 국태민안을 위한 고려 초부터 행해졌던 축귀의례(逐鬼儀禮)로서 잡귀잡신을 달래고 쫒아 단지 안에 가두어 땅에 묻는 신앙적 성격이 강한 춤이다. 중국에서 들어 온 나례는 고려 정종 6년(1040)에 나례의 기사가 보여 정종 대부터 계동대나례가 시행된 것으로 기술되었다.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잡귀와 사신(邪神)을 내쫒는 뜻으로 행해진 의식이었다. 연등나례살풀이는 푸닥거리를 시작으로 살풀이장단에 맞추어 액을 풀고 자진모리를 통해 푸닥거리를 한다. 연등나례살풀이에서 액을 푸는 춤사위에서는 사신을 수건위에 올려서 어르고 달래는 춤사위와 거부하는 사신을 잡아서 푸닥거리로 정신을 잃게 한 후 단지에 가두어 땅에 묻으러 가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춤 순서는 <푸닥거리춤> 대나무와 살풀이 수건을 활용해서 축귀형식으로 뛰고 때리며 사신의 정신을 잃게 한다. <살풀이춤> 사신을 달랜다. 수건위에 사신을 올려놓고 어르고 달랜다. 고리 푸는 사위에서 사신과 무언의 대화로 달래지만 사신은 더욱 거센 반응을 보인다. 수건 하나에 사신을 달래며 위협하던 무당은 감춰둔 수건을 꺼낸다. <타령춤> 사신을 단지에 가두기 위해 두 개의 수건으로 사신을 유혹한다. 수건위에 앉은 사신을 진정시킨다. <자진모리춤> 두 개의 수건 위에 올려진 사신을 때리고 돌리며 푸닥거리로 정신을 잃게 한 후 수건을 던진다. 이때 무당은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기절한 사신이 깨어나기 전 단지에 가두고 땅에 묻는다. 연등나례살풀이춤은 살풀이춤과 무속춤이 조화된 춤으로 춤사위의 전반적인 호흡은 푸닥거리에서 기를 돋우고 살풀이장단에서 깊은 호흡과 함께 몸을 느슨하게 풀어주며 무속의식을 엿볼 수 있는 특이함이 내재되었다. 무당의 복식과 소품으로 흰 치마저고리에 홍띠를 두르며 얹은 머리에 수건을 두른다. 한 개의 수건으로 춤을 추다 푸닥거리에서 두 개의 수건을 사용하는 것도 이 춤에서 만이 볼 수 있는 특이함이지만 경기지역 등 무속계 살풀이춤은 대체로 두 개를 사용한다. 대나무가지와 단지가 소품으로 활용된다. 4) 연등바라춤붉은 장삼을 휘날리며 원을 따라 도는 보살들의 양손에 갈라 쥔 동발을 부딪칠 때마다 장엄하면서도 저린 속을 시원하게 쓸어내리는 바라춤이 탑돌이의 의미를 더해 가면 태평성대를 희망하는 구국불교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김덕명선생이 생전에 들려주는 염불소리와 함께 탑을 돌아간다. 동발이 짝을 찾아 울어댄다. 노구에도 좌중을 휘어잡는 선생의 염불 소리, 목탁 소리에 맞춰 탑돌이로 추는 바라군무는 불교의례춤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2. 교방계춤 김덕명이 기녀 김농주에게 전승받은 춤은 그녀가 개성권번 제1기생으로 기예를 익히고 30세 되면서 평양권번을 그만두고 양산권번에 정착한 후 유일하게 남긴 작품들이다. 해방 후 사회분위기에서 기녀가 생활 일선에 나설 수 있는 무대는 요릿집으로 한정되었고 재능이 뛰어난 기녀들은 연구소를 차려 후학들을 지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에 김덕명과 함께 김농주의 춤을 배운 기녀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예술생활을 접으면서 김덕명만이 유일하게 김농주의 춤을 전승하게 되었다. 양산지역에서 권번의 춤은 세가지로 전승되는데, ①이주서-고수길의 계보로 이어지는 교방양반춤과 한량무가 전승되고 있었고, ②고수길이 김설암 스님에게 배운 신라장검무, ③고수길-김농주의 다양한 춤이 펼쳐진 것이다. 그녀가 보유한 전통춤은 교방타령무를 기본으로 하여 교방양반춤, 교방진연무, 교방살풀이, 소고춤, 한량무, 장기춤, 잉어춤, 신선무, 부마도의 등 다양한 작품이 있었다. 1) 교방타령(敎坊打令)춤교방타령은 교방의 전문 예기들의 기초 교양과목 증 하나로 양반들과 어울려 여흥으로 추던 춤이다. 춤사위는 남성적이며 부드러운 멋이 조화로우며 절도 있고 흥겨운 속멋이 내재된 품격 있는 춤이다. 타령이란 우리 고유 전통음악의 곡조로서 판소리, 민요, 잡가 등에 많이 쓰이는 순수 전통 고전의 음률이다. 이 타령장단에 맞춰 춤을 추며 춤 선은 전, 후를 오가고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춤은 한량과 기녀가 마주보고 추는 형식으로 한량과 기녀가 서로 추파를 던지고 공감형성 되는 춤사위가 조화롭게 나타난다. 교방타령에서 연결되는 굿거리 춤사위는 1983년 이후 제자들에게 전승되지 않았다. 교방타령은 양반과 기녀가 어울리며 추는 춤으로 무게감이 있다면 굿거리 춤은 기녀가 화답하는 춤이다. 여성의 춤이면서 남성적인 멋이 묻어 나오며 발 디딤새에서 사뿐거리는 멋이 이 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춤사위 순서는 마주보고 서는 사위→팔 감는 사위→우, 좌 향 감는 사위→감아올리는 사위 →상 하 평행 반원사위→평 솟대사위→흥 돋우며 올리는 사위→상, 하 눌려서 젖히는 사위→손목 돌리며 활개 펴는 사위→양팔 상하 움직이는 사위→상하 팔 감는 사위→흥 올리며 전후 감는 사위→앞뒤 감고 교차하는 사위→평사위→사선 끌어올리는 사위→열림 사위→외발 서고 팔 감는 사위→사선 회전사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춤의 복식은, 남성은 흰 바지저고리, 검정조끼, 상투에 흰 수건을 묶고, 여성은 얹은 머리 또는 명주수건을 두루며, 자주색 호장저고리, 검정치마를 입고 소품으로 귀주머니를 단 자주색 허리끈을 맨다. 2) 교방양반춤(호걸양반춤)교방양반춤은 양반이 관기들과 여흥(餘興)으로 즐겨 추던 춤으로 단아하며 사대부(士大夫) 양반들의 의젓한 귀품과 천하를 눈 아래로 보며 남성의 기백과 근엄함, 청초하고 담백함이 돋보이며 해학(諧謔)이 있는 양반의 기세와 품격(品格)을 느낄 수 있다. 춤사위에서 표출되는 무언의 속삭임은 사실적으로 전달되며 이춤은 교방의 전문예인들에 의해 창안되었다. 장죽과 부채를 활용한 춤사위에는 추파 던지는 사위, 햇볕가리는 사위, 공감형성사위, 위엄사위, 엿보는 사위 등 표현이 다양하다. 춤의 특징은 남성의 모습이 강하며 다양한 춤사위에 꾸밈이 없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팔의 움직임은 자유로우나 절제된 멋이 나타난다. 좁은 보폭과 굴신걸음으로 연결되며 기를 모우고 풀면서 안정된 걸음걸이로 중심을 잡는다. 부채와 장죽을 활용하고 도포자락의 움직임이 조화롭게 나타나는 춤사위는 동적이며 우아한 선학을 연상하게 한다. 도약과 디딤의 폭이 넓고 깊으며 하체의 강한 힘을 필요로 한다. 춤사위 순서는 장죽물고 바라보는 사위→양팔 펴서 감아올리는 사위→추파 던지는 사위→상 하 반원 평행사위→양 팔 들고 걷는 사위→햇볕가리며 엿보는 사위→활개 펴는 사위→으쓱이는 사위→상하 휘젓는 사위→위엄 주는 사위→부채 펴서 엿보는 사위→뒤축 굴림 사위→팔 돌림사위→선별하는 사위→옆걸음 사위로 이어진다. 춤의 복식과 소품은 흰 바지저고리에 대님, 행전, 속 두루마기, 황금색 또는 옥색도포를 입고, 소품으로 상투, 검정 갓, 장죽, 부채 등으로 구성된다. 3) 한량무(閑良舞)한량무에서는 한량과 색시, 승려의 만남은 삼각구도의 갈등으로 희비가 엇갈린다. 이는 알력이 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해학적이며 흥미진진함과 문란한 단면을 도출한 풍자예술로 인식된다. 한량무는 조선후기 관기에 의해 창안되고 기방춤으로 성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한량무에서 비중이 큰 인물은 승려의 출현이다. 승려는 한량과 색시와 함께 삼각관계의 중심에 선 인물이며 탈춤의 노장과장에서도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승려는 등장 후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파계하는 과정에서 종교인으로서의 품위와 가치를 잃게 된다. 이 춤에서 승려는 수도승의 참모습이 아닌 파계승(破戒僧)으로서의 모습은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배불(排佛)정책 내지 억불(抑佛)정책의 일환에서 승려의 인격을 실추(失墜)시키며. 탈춤이 나 각종 민속춤에서 파계승(破戒僧)으로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 의하여 승려들은 환속하여 민간의 재인이나 광대와 어울리게 되면서 승광대(僧廣大)가 되어 사당패(祠堂牌)가 성립되었다. 불교에서 형성된 춤의 대부분은 승광대에 의해 창안된 것이며, 19세기 말에는 사찰에서 춤을 금지하였으며 오늘날 전승되는 각종 민속춤이나 탈춤, 광대놀음에서 승려는 파계승으로 등장시키며 삼각관계로 인해 타락하며 품위를 잃게 된다. 한량무의 배역은 한량, 승려, 색시, 별감, 주모, 마당쇠, 상좌 등 7인이 등장하여 각 배역의 춤에서는 욕망-허망함-깨달음-화합하는 단계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김덕명은 1924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 양산 통도사에 입사하면서 춤의 인생이 시작되었고, 1934년 평양기생 김농주와의 만남으로부터 권번춤의 진수를 전수받았다. 그리하여 김덕명춤의 세계는 사찰춤과 권번춤으로 크게 대별된다. 그는 일반인으로 사찰춤을 계승한 사람이며 남성으로서 기생들의 춤인 권번춤을 전승받았다는 점이 일반 춤꾼들과는 다른 특이점이다. 그의 사찰춤은 ‘양산사찰학춤’, ‘지성승무’, ‘연등나례살풀이춤’, ‘신라장검무’, ‘연등바라춤’ 등이 있으며, 그의 권번춤으로는 ‘교방타령’, ‘교방양반춤’, ‘한량무’, ‘교방진연무’ 등 다양한 춤을 보유하고 있다.그리고 김덕명의 춤인생 경로는 출생지인 양산 동면에서 시작되어 장년기의 진주, 노년기의 김해를 거쳐 다시 양산으로 이어진다. 그의 독특한 춤사위는 춤 인생이 시작된 통도사에서 스님에게 남성의 활기찬 춤사위를 익힌 후 평양명기 김농주로부터 부드럽고 우아한 춤사위를 학습하면서 그에게서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춤사위가 생성된 것이다. 대처승인 양대응·신경수스님은 상좌들에게 춤을 지도하며 각종 재를 도맡아서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다. 그러나 활성화 되어야 할 사찰예술이 단절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재의식을 통제하는 조선총독부의 사찰령(1911년)과 그 이듬해 제정된 본말사법(本末寺法)에 따라 범패가 금지되었고, 해방 후 6.25전란 등 시대 변화와 불교정화운동에 의해 대처승을 정리함으로서 양대응과 신경수 스님도 통도사를 떠나게 되면서 차츰 사찰예술은 종적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통도사의 춤을 보유한 김덕명은 불교중앙문화원 예술원장의 신분에서 사찰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는 일이 잦았고 그와 함께하는 행각스님(魚山僧)의 범패와 바라춤, 승무, 학춤, 연등나례살풀이춤 등은 신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통도사에서 전승된 춤은 통상적 사찰의 춤으로 알려진 작법이나 나비춤과 달리 독창적인 춤이 전승되었다는 것이 특이하며, 전승자 신분이 승려에서 민간예인으로 전이됨으로서 전승단절을 막고 계승할 수 있었다는 것이 변환기인 근대무용사에서 중요한 점이며, 그 전환점에 김덕명이 서있다는 것이 무용사의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어야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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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현대 아우르는 향연 ‘제9회 국제 불교무용대전’ 개최불교문화단체 구슬주머니가 제9회 국제 불교무용대전을 개최한다.불교무용의 개념도 없던 열악한 환경 속에 시작된 불교무용대전이 어느덧 9회째를 맞이했다. 불교무용대전은 2015년부터 불교무용예술의 전승과 저변 확대를 위해 시작됐다. 이제 불교무용대전은 한국을 대표하는 불교무용 페스티벌, 나아가 한국의 무용 활성화를 위한 무용 페스티벌로 자리 잡았다.2018년에 열린 불교무용대전은 몽골, 싱가폴, 홍콩 등의 해외 무용팀을 초청해 불교무용대전을 국제행사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해 불교무용대전은 한동안 국내 사업으로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2023년 올해 열리는 불교무용대전은 코로나19 방역 수칙이 완화됨에 따라, 국제사업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에 국내 무용팀과 더불어 베트남, 일본, 인도를 비롯한 해외 유수의 무용팀이 참가해 더욱 풍성한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제9회 국제 불교무용대전은 올 2월부터 4월까지 참가 공모가 진행됐고, 이때 선발된 20여 개 팀 가운데 12개 팀이 4주간 열띤 경연을 벌이게 된다.이를 기본으로 올해는 다음과 같은 4개의 의미 있는 섹션으로 페스티벌이 진행될 예정이다.△기념 쇼케이스 및 기자 간담회(성균소극장) △기념 콘퍼런스 IDANS ‘불교무용을 통한 한-베트남 교류 활성화 방안 모색’(메이플레이스호텔 콘퍼런스룸) △불교무용대전 본선(스튜디오SK) △결선 및 시상식(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야외 공연장)이 그것이다.쇼케이스 및 기자 간담회는 불교무용대전을 기념해 교계 및 관련 단체에 불교무용대전의 개최를 알리고 널리 홍보하기 위한 행사로, 무용팀이 5분 내외의 공연을 선보인 후 기자 및 참관자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 자리이다.제9회 국제 불교무용대전 기념 콘퍼런스(IDANS)는 ‘불교무용을 통한 한-베트남 교류 활성화 방안 모색’을 주제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에 불교춤 예술의 진흥에 힘쓰고 있는 이철진(구슬주머니 대표)의 기조 발제를 시작으로, 베트남 The Youth Theatr 부대표 Ms. Cao Ngoc Anh, The Vietnam Dance Artists association 회장 PhD. Pham Anh Phuong, Vetnam Academy of Dance 총장 PhD, Tran Van Hai 등 내로라하는 베트남의 학계와 무용계의 불교무용 선구자들이 참가를 확정했다. 제9회 국제 불교무용대전 본선은 6월 9일(금)부터 7월 2일(일)까지 매주 금요일 오후 7시 30분, 토·일요일 오후 4시에 스튜디오SK에서 공연이 진행되며, 7월 8일(토) 마로니에공원 야외공연장에서 결선 및 시상식이 진행될 예정이다.2023년 제9회 국제 불교무용대전은 모든 행사가 무료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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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도난 불교문화유산 32점, 조계종에 반환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전국 사찰 14곳에서 도난당했던 불화와 불상 30여점이 제자리를 찾는다. 문화재청은 "도난당했다가 되찾은 불화 11점, 불상 21점 등 불교문문화유산 총 32점을 지난달 대한불교조계종에 돌려줬다"고 22일 밝혔다.계종은 오는 23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환수 고불식을 연다. 조계종이 돌려받은 불교문화유산에는 1988년 도난당한 '구례 천은사 제석천상과 나한상', 1999년 도난당한 불화 '포항 보경사 영산회상도' 등 역사적·학술적·회화사적 가치를 지닌 작품들이 포함됐다.구례 천은사 제석천상과 나한상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조선 후기 조각 장인 색난 등 여러 화원이 제작한 불상이다. 포항 보경사 영산회상도는 18세기 후반 불화의 전형적 설채법과 세련된 필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재청은 "감정위원들이 32점을 모두 진위 감정한 결과 조계종 소속 사찰 14곳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도난당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일부 훼손되거나 파손된 불상과 불화는 보존 처리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환수된 불교문화유산들은 지난 2020년 1월 경매사에 불화 2점이 출품되며 수사가 시작됐고 수사 과정에서 은닉처가 발견됐다. 은닉처에서 장기간 은닉해 온 불상과 불화 등 30점이 추가로 발견됐다. 피의자는 형사처벌을 받았고 지난 4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의 압수문화재 원 소장처 환부결정에 따라 이들 문화유산은 조계종에 돌아가게 됐다.조계종은 "환수된 불교문화유산들은 고불식 이후에 원봉안처인 사찰로 이운해 봉안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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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전라도 진포 바깥 군산바다에 나타난 진언상, 1406년 8월 11일 태종실록의 기록에 나오는 이름이다. 2017년 이맘때쯤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풍경이기도 하다. 그 한 장면을 다시 소환한다. 나주바다, 지금의 신안군 북쪽 언저리를 돌아 왕등도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다. 내안 방향에서 왜구들의 배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모두 열다섯 척이었다. 조류 흐름을 타고 있던 터라 왜구의 배들이 순식간에 이물에 이르고 말았다. 대비할 틈도 없었다. 뱃전으로 뛰어오르는 왜구들을 향해 결사항전을 벌였다. 긴 칼과 삼지창이 무용지물이었다. 복부가 터지고 머리가 잘려 물속에 곤두박질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피투성이가 되어 물에 떨어진 자들이 고물 너머로 쏜살같이 밀려났다. 들물 받은 배들이 엉키면서 지금의 고군산 관리도 깃대봉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왜구들이 함성을 지르며 깃발로 신호를 했다. 다행이랄까. 황급히 선두를 돌리는 왜구들을 뒤로 하고 뱃전의 모든 돛폭을 폈다. 앞섬을 향하여 전력 질주했다. 군산도에 이르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다시 청정해졌다. 파도만이 호흡을 멈추지 못하고 갯바위에 부딪치며 헐떡댔다. 이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40명이었다. 실록에 나오는 진언상은 인도네시아 사람일까? 태종실록에는 진언상을 조와국(지금의 인도네시아) 사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조흥국 등의 연구에 의하면 태국의 사신들인 장쓰다오의 예를 들며 남중국해 및 동중국해에서 무역활동을 하던 중국 상인 즉 화교일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진언상이 처음 등장하는 1394년 조선왕조실록에 그에 관한 상세한 언급이 없는 점으로 보아 사신이라기보다는 무역상인 쪽에 비중을 두는 셈이다. 이후 1405년 진언상이 다시 조선을 찾게 되는데 사신이든 상인이든 그 성격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근거는 약해 보인다. 진상품이라는 약재와 각종의 남방 조류, 물품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관건이다. 스위스의 역사학자 우르스 비테를리의 분류로는, 14세기 말-15세기 초 우리와 인도네시아 혹은 인도차이나 여러 지역들 간의 교류는 문화접촉 차원에서 끝나버려 문화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흥국은 이를 동중국해의 해상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해적의 위협과 조선 정부의 무관심이 가장 두드러진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언상을 비롯한 동남아 해역을 누리던 이들이 조와국 즉 자바국의 사신이었을지 중국계 상인이었을지는 향후 후학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둬야 하는 것일까. 이보다 앞선 여러 가지 문화적 유사성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해양실크로드, 남해로(南海路)를 따라 온 것들 뱃길을 통해서 인도로부터 동아시아 전반으로 전래된 불교를 사례 삼아 본다. 수많은 물질과 문화의 교류를 수반했기 때문이다. 동인도에서 불교경전을 익힌 법현(337~420)이 스리랑카를 거쳐 중국 광동성으로 가는 배를 탄다. 하지만 200여명이 승선한 배가 폭풍으로 인도네시아 자바에 표류한다. 이곳 야바제(耶婆提)가 자바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지금까지의 해석대로라면 진언상이 왔다는 나라일텐데 수마트라 동부 해안의 어느 도시라는 해석에 비중이 실리는 듯하다. 이후 다시 광동으로 향한 배가 폭풍우에 밀려 410년 산둥반도 칭저우(靑州)에 귀착한다. 나는 이 뱃길이 1394년이나 1406년 진언상이 지났던 뱃길이며 1831년부터 귀츨라프가 만주 타타르족을 만나러 지나갔던 뱃길이라고 생각한다. 심재관의 연구에 의하면 4세기에서 6세기경 사이에는 푸난-광주-남경루트 즉, 인도-스리랑카-푸난-광주-남경 항로를 이용하는 승려들이 늘어난다. 이 항로가 법현의 항로와 같다. 현장과 동시대인이었던 의정(義淨, 635~713)은 해로를 이용해 인도를 왕복한다. 광주에서 출발해 수마트라 팔렘방을 거쳐 인도로 들어갔다가 20여년 후 다시 동일한 해로를 통해 귀환한다. 강희정의 연구에 의하면, 남해로(南海路)로 일컬어지는 해상 실크로드는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물동량이 육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대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기복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확대되었다. 불교과련 물품 즉 불상이나 보살상, 사리탑, 기타 불구뿐만 아니라 향로에 피우는 향, 음식, 약재를 만드는데 쓰는 각종 식물, 불교관련 용품의 재료가 되는 광물질, 정향, 설탕, 용뇌, 후추, 침향 등의 식물, 대모, 비취조, 앵무새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진언상의 기록에 나오는 항목들과 비교해 봐도 비슷한 것들이 많다. 특히 '삼국유사' 탑상편에 나오는 바, 인도에서 아육왕(Asoka)이 황철 5만7천근과 금 3만금을 인연 있는 땅으로 실어 보냈고 이것이 마침내 경주 땅에 이르러 황룡사 장육존상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는 것 아닌가. 이처럼 철광석이나 구리와 같은 광물질이 이 시기 중요한 해상 교역물품이었다는 것이다. 445년 베트남 중부에 있던 참족의 나라 임읍에서 금 만근, 은 10만근, 동 30만금을 중국에 조공했다는 기록도 인용하고 있다. 2004~2005년 사이에 인도네시아 치르본(Cirebon)에서 발굴된 난파선에서 주석괴, 납괴 등 여러 종류의 광물 덩어리가 다량 발굴된 것도 이와 관련하여 해석하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동남아간 해상교류의 흔적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뜻이니 불교가 수입되었듯 이들 교역품도 한반도와 거래되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아직은 오리무중, 시간을 거슬러 옛 자바에서 온 편지를 읽으려는데 무심한 동남풍만 내 마당 가득하다. 슈리비자야에서 황룡사까지 강희정은 동남아시아 교역루트를 황룡사 설화와 연결시킨다. 단순한 인연설화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배를 통해 특정한 물질이 오고갔고 그 가운데 일부는 불교문화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였다는 것이다. 기록에 나오는 433년의 가라단(呵羅單, 자바 혹은 Kelantna 추정)이나 435년 사파파달(闍婆婆達, 자바 추정)의 사절도 사례 중 하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지금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신라 사람들이 동남아의 여러 나라와 그 산물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각주로 빼서 기록해두긴 했지만 신라인들이 국제항구로 발돋음 하던 천주와 광주 등지에서 동남아시아 상인들과 활발하게 교역했을 가능성들을 열어두고 있다. 이들 교역의 중심에는 신라초, 신라방 등이 있는 동중국의 여러 포구들뿐만 아니라 불교의 중심지이자 무역의 중심지였던 슈리비자야 즉 지금의 말라카 해협을 둘러싼 말레이시아 남부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자바섬 등이 있다. 인도에서 한반도까지의 물길을 고려해보면 구법승들이 자연스럽게 수리비자야를 들렀을 것이다. 이주형의 논의를 인용한 조흥국은 불교의 동아시아 전래 이후 경전을 얻거나 불적을 답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난 아시아 구법승의 숫자는 대략 695명이라고 주장한다. 이중 이름이 알려진 경우만 해도 165명에 이른다.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승 혜초(慧超, 704~780)도 인도로 출국할 때는 해로를 이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인돌 등의 고고유적, 벼농사권 등 우연이나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치부되는 유사성들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라카해협을 포함한 인도네시아와 한반도와의 물길교류는 충분히 검토 가능한 항목이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슈리비자야에서 온 광물과 종교가 황룡사를 만들었듯이 오늘날 또 무엇이 서로 교류되어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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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는 신통일아리랑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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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옛길에서 보는 서낭당과 장승 3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이만유 장승은 우리가 집단으로 삶을 영위했던 전통마을의 대표적인 공동체 신앙물로써 마을 또는 절 입구나 길가에 세워 둔 사람 머리 모양을 조각한 기둥으로 돌로 만든 석장승과 나무로 만든 목장승 등이 있다. 장승의 유래와 기원을 살펴보면 고대의 남근숭배에서 나온 것, 고려 시대 재화를 빌려주고 그 이자를 받아 불교 행사나 사찰 보수, 그리고 병자나 빈민을 구제하는 데 쓰기 위해 사찰에서 설치한 금융기관이었던 장생고(長生庫)에 속하는 사전(寺田)의 표지(標識)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목장승은 부족국가 시대의 솟대(소도-蘇塗)에서, 석장승은 선돌[입석-立石]에서, 돌무더기로 만든 제당(祭堂)의 하나인 누석단(累石壇)에서 비롯되었다는 둥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다. 장승의 명칭도 여러 가지인데, 조선 시대에는 한자로 후(堠), 장생(長栍), 장승(長丞, 張丞, 長承) 등으로 썼고, 지방에 따라 장승, 장성, 벅수, 법수, 당산할아버지, 수살목 등의 이름을 가졌다. 장승의 기능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지역과 지역의 경계표 구실과 길가에 장승을 세워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몇 리가 떨어졌고 이웃 고을 이름이 무엇인가를 기록해 두어 길을 안내하는 안내판 및 이정표 구실도 했으며,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의 수호신 역할과 개인의 소원성취(득남, 풍년, 풍어, 건강)를 기원하기도 했는데 수호신으로 세운 장승에는 이정(里程) 표시는 없으며 ‘천하대장군’ 등의 표시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장승을 서낭당, 산신당, 솟대와 동등한 신물(神物)로 인정하며 동제(洞祭)의 주신 또는 하위 신으로서 신앙의 대상이며 액운이 들었을 때나 질병이 전염되었을 때는 장승에게 빌거나 제사를 지내 화를 피하고자 하였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쌍을 이루며 생김새는 인면형(人面形), 귀면형(鬼面形), 미륵형(彌勒形), 남근형(男根形), 문무관형(文武官形) 등으로 나뉜다. 인면형의 경우 남장승은 머리에 관(冠)을 쓰고 눈을 부릅뜨고 덧니와 수염을 단 형상이며, 더러는 몸체가 붉게 채색되기도 한다. 반면 여장승은 관이 없고 얼굴에 연지와 곤지를 찍고 몸체를 청색으로 칠하기도 한다. 귀면형은 왕방울 눈과 주먹코에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다. 미륵형은 불상(佛像)과는 달리 꾸밈이 없이 수수하며 자비스럽고 친밀감이 있다. 이 밖에도 석비형, 입석형, 석적형 등이 있다. 장승의 모양은 장소에 따라 채색, 형상, 크기 등이 다르나 모양이 괴엄(魁嚴)한 점만은 일치한다. 얼굴을 아주 무섭고 험악하게 만든 이유는 염병, 마마 등 병귀나 액귀(厄鬼)를 쫓아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장승의 명문(銘文)으로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 주류지만, ‘동방청제장군(東方靑帝將軍), 서방백제장군(西方白帝將軍), 남방적제장군(南方赤帝將軍), 북방흑제장군(北方黑帝將軍)’ 등의 방위 신장류, 불교의 영향을 받은 호법선신(護法善神), 방생정계(放生定界), 금귀(禁鬼), 수소대장(受昭大將) 등의 호법 신장류, 풍수도참과 결부된 진서장군(鎭西將軍),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 등의 비보(裨補) 장승류, 두창(痘瘡) 장승류 등이 있다. 근래에 와서는 장승 본연의 기능도 변하였고 명문도 다양화되었다. 마을 이름이나 안내판 또는 전시물, 장식물, 통일을 기원하는 상징물과 신앙체로서 시국 장승을 깎아 세웠고 명문은 ‘민족통일 대장군’, ‘백두대장군, 한라여장군’ 등이 있으며 지리산 노고단과 문경새재, 계룡산 등지에 ‘민족통일 대장군, 평화통일 여장군’을 세웠다. 이는 전통적인 형식으로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고 마을과 국가의 단결을 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예부터 전해지는 장승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그중 ‘장승이 마련해 준 삼백 냥’이라는 이야기는 박문수 어사 행장기 중 하나로 전해지는 작가 미상의 이야기인데, 암행어사 박문수가 거지 모양새를 하고 여기저기 팔도를 돌아다니던 때였다. 하루는 날이 저물어서 주막에 들었는데, 봉놋방에 들어가 보니 웬 거지가 큰대자로 퍼지르고 누워 있었다. 사람이 들어와도 본체만체하고, 밥상이 들어와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이튿날 아침 거지가 "보아하니 댁도 거지고 나도 거진데, 이럴 게 아니라 우리 같이 다니면서 빌어먹는 게 어떻겠소?” 하고 말을 거니 박문수도 영락없는 거지꼴이라 그런 말을 할 만도 하다고 생각하고, 짐짓 "좋소, 그럽시다”하고는 그날부터 둘이 이곳저곳을 같이 다니게 되었다. 어느 날 한 마을 큰 기와집으로 썩 들어선 거지가 다짜고짜 한다는 말이 "지금 이 댁 식구 세 사람 목숨이 위태롭게 됐으니 두말 말고, 지금 당장 마당에 멍석 깔고 머리를 풀고 곡을 하시오. 안 그러면 세 사람이 죽소”라고 하였다. 여인은 사람이 죽는다고 하니 엉겁결에 시키는 대로 했다. 그때 이 집 남편은 아들 둘을 데리고 뒷산에 올랐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자, 비를 피하기 위해 큰 바위 밑으로 들어갔다. 그때 저 아래서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코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나 보다. 어서 내려가자.” 급한 마음에 부리나케 내려오는데 뒤에서 큰 바위가 쿵 하고 무너져 내렸다. 간발의 차이로 위험을 모면하고 내려온 남편은 전후 사정을 듣고 거지에게 절을 열두 번도 더 하면서 "우리 세 사람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겠소? 내 재산을 다 달라고 해도 내놓으리다” "아, 정 그러면 돈 백 냥만 주구려” 그래서 돈 백 냥을 받았다. 받아서는 대뜸 박문수를 주는 게 아닌가. "이거 잘 간수해 두오. 앞으로 쓸데가 있을 테니.” 박문수가 가만히 보니 이 거지가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시키는 대로 돈 백 냥을 받아서 속주머니에 잘 넣어 두었다. 며칠 후 어떤 마을로 가게 됐다. 그 동네 큰 기와집에서 온 식구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거지는 망설임 없이 박문수를 데리고 그 집으로 쑥 들어갔다. "이 댁에 무슨 일이 있기에 이리 슬피 우시오?” 하니 "우리 집에 7대 독자 귀한 아들이 지금 병이 들어 다 죽어갑니다” "어디 내가 한 번 봅시다.” 그러더니 병 든 아이가 누워 있는 곳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사랑채로 들어가선 주인에게 말했다. "아이 손목에 실을 매어서 그 끄트머리를 가져오시오.” 미덥지 않았으나 주인은 아이 손목에다 실을 매어 가지고 왔다. 거지가 실 끄트머리를 한 번 만져보더니 "뭐 별것도 아니구나. 저기 바람벽에서 흙을 한 줌 떼어 오시오” 하더니 동글동글하게 환약 세 개를 지었다. 주인이 환약을 받아 아이한테 먹이니 다 죽어가던 아이가 금방 말짱해졌다. 주인이 그만 감복해서 절을 열두 번도 더 했다. "7대 독자 귀한 아들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내 재산을 다 달란 대로 드리리다.” "아, 그런 건 필요 없고 돈 백 냥만 주구려.” 이렇게 해서 또 백 냥을 받아서는 다시 박문수를 주었다. "잘 간수해 두오. 앞으로 쓸데가 있을 거요.” 다시 길을 가다가 보니 큰 산 밑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웬 행세깨나 하는 집에서 상을 당해 장사를 지내는 것 같았다. 기웃기웃 구경하고 다니더니 마침 하관을 끝내고 봉분을 짓는 데 가서는 "에이, 거 송장도 없는 무덤에다 무슨 짓을 하나?”하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일하던 사람들이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네 이놈! 그게 무슨 방정맞은 소리냐? 그래, 이 무덤 속에 송장이 있으면 어떡할 테냐?” "아, 그럼 내 목을 베시오. 그렇지만 내 말이 맞으면 돈 백 냥을 내놓으시오.” 일꾼들이 달려들어 무덤을 파헤쳐 보니 참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과연 송장 든 관이 없었다. "내가 그걸 찾아 주려고 온 사람이오. 염려 말고 북쪽으로 석 자 세 치 떨어진 곳을 파보시오.” 그곳을 파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거기에 관이 턱 묻혀 있었다. "여기가 명당은 천하명당인데 도둑혈이라서 그렇소. 지금 묻혀 있는 곳에 무덤을 쓰면 복 받을 거요.” 이렇게 해서 무사히 장사를 지내고 나니 상주들이 고맙다고 절을 열두 번도 더 했다. "묫자리를 이렇게 잘 보아주셨으니 우리 재산을 달란 대로 다 내놓겠습니다.” "아, 그런 건 필요 없으니, 약속대로 돈 백 냥만 주구려.” 그래서 또 돈 백 냥을 받았다. 그리곤 역시 박문수를 주었다. "이것도 잘 간수해 두오. 반드시 쓸데가 있을 거요.” 어느 날 첩첩산중이라 한참을 가도 사람 사는 마을이 없는 곳에서 갑자기 거지가 "자, 이제 우리는 여기서 그만 이별해야 하겠소” "아, 이 산중에서 헤어지면 나는 어떡하란 말이오?” "염려 말고 이 길로 쭉 올라가시오. 가다가 보면 사람을 만나게 될 거요.” 그러고는 거지는 연기같이 사라졌다.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한참 동안 올라가니 고갯마루에 장승 하나가 딱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앞에서 웬 처녀가 물을 한 그릇 떠다 놓고 빌고 있었다. "장승님! 장승님!, 영험하신 장승님!. 우리 아버지 구원 백일 정성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꼭 제 아버지를 살려주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처녀에게 박문수가 "무슨 일로 이렇게 빌고 있소?” 하고 물으니, 처녀가 울면서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관청에서 일하는 심부름꾼인데, 심부름 중에 나랏돈 삼백 냥을 잃어버렸습니다. 내일까지 돈 삼백 냥을 관청에 갖다 바치지 않으면 아버지 목을 벤다는데 돈을 구할 길이 없어 여기서 백일 정성을 들이는 중입니다” 하였다. 박문수 어사는 거지가 마련해 준 돈, 삼백 냥이 떠올랐다. 반드시 쓸데가 있으리라 하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 생각했다. 돈 삼백 냥을 꺼내어 처녀한테 건네줬다. "자, 아무 염려 말고 이것으로 아버지 목숨을 구하시오” 이렇게 해서 억울한 목숨을 구하게 됐다. 그런데 그 처녀가 빌던 장승이 비록 나무로 만든 것이지마는 박문수 어사가 가만히 바라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아까까지 같이 다니던 그 거지 얼굴을 쏙 빼다 박은 게 아닌가! 이렇듯 장승은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선하고 정 많은 우리의 이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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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 1양산학춤은 2014년과 2016년, 2017년 등 지금까지 네 차례 무형문화재 지정 시도가 있었지만 심사 단계에서 신청자에 대한 관련 단체 전체의 동의를 받지 못해 제대로 심사도 받지 못하고 지정이 무산된 것이다. 양산문화원은 양산학춤 전수회관 건립도 추진하는 등 양산학춤을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 문화자산으로 적극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양산학춤은 통도사에서 전래해 지역에서 동면 출신의 학산 김덕명 옹이 전수해 민간 계보로 전승된 지역 고유 춤으로써 선비 사상을 강조한다. 이병옥 교수가 김덕명의 중후반의 행적을 살피고 예술성과 학술적 가치를 고찰하기로 한다.(편집자 주) 중반의 시련을 딛고 일어선 영남 명무 1975년 11월 5일 제6회 김덕명 전통고전(춤)전수자 발표공연을 부산대학교 대극장에서 마치고 한량무 강습을 할 때 진주팔검무회가 찾아와 진주시립국악원 및 진주 팔검무회의 상임사범을 부탁하여 승낙하게 되었다. 이듬해 1976년부터 1981까지 5년간 진주에서 전통춤을 가르치게 되었다. 1975년 제6회 발표회를 마친 후 그는 모처럼 동래야류 공연이 있어 전수관을 찾아갔다. 그동안 그들과 친분이 있어 공연 후 뒤풀이로 학춤을 선보였던 것인데 때마침 동래야류 공연을 참관하려 방문한 문화재 전문위원 서국영(徐國英)은 그의 학춤을 보고 탄복했다. 그는 즉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는 김천흥(金千興, 1909~2007, 처용무 보유자)에게 발굴할 가치기 있는 학춤을 찾았다고 부산에 올 것을 알리자 소식을 듣고 증인확보를 위해 수제자 이흥구(李興九, 1940~ , 학연화대무 보유자)와 함께 부산에 왔다. 그리하여 1975년 김덕명은 김천흥 일행과 부산 동래별장에서 춤판을 벌였다. 3일 동안 이어진 그의 춤은 독특한 멋이 담긴 춤사위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절로 흥이 났다. 김천흥도 흥이나 직접 궁중정재 춘앵무와 학춤을 추었으며, 이흥구는 김덕명의 남성적이며 호방한 학춤에 반하여 기록수첩을 잃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부산·경남지방에서 전승되는 학춤에는 양산지역 학춤과 이미 1972년 9월 19일 부산시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된 동래학춤 등 두 종류가 있었다. 서국영, 김천흥 조사자들의 공동작업(1975.7.25.~8.25까지 조사활동)으로 이듬해인 1976년 12월 7일 『(양산)사찰학춤』(중요무형문화재 보고 제122호, 1976년5월 보고서 제출)의 무보를 수록한 조사보고서를 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여기서 양산사찰학춤의 유래(寺刹鶴춤의 由來)에 대해 수록내용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사찰학춤에 관한 문헌은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조사할 수 있는 무수(舞手)들을 알아내어 그 계보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양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창건된 이래 그 어느 때부터 인지는 모르나 대재(大齋)행사 때나 종무(宗務)총회 시에 의례(儀禮)행사로서 승무와 학춤을 대대로 계승해 왔다는 말을 명무승려인 신경수(辛景壽, 1893~1965)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보광(寶光)중학교 교장 및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김말복(金末福)의 증언을 얻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조말엽 청종 시대까지의 무수(舞手)승려는 미상(未詳)이나 고종시대인 1980년부터는 이월호(李月浩, 당시 어산종장(魚山宗長)), 1980년대부터는 김설암(金雪岩), 그리고 1920년 이후에는 전술한 신경수와 양대응(梁大應, 1897~1972)등으로 승무와 학춤이 계승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통도사에서는 특히 사찰학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 김말복은 신경수, 양대응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寺下) 부락인 신평리(新坪里)에 나와서 남소석(南小錫, 1904~1960)의 꽹과리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대로 신경수의 사찰학춤이 사하부락에 흘러나오기 이전에 이미 양산군(梁山郡) 동면(東面) 내송리(內訟里)에 학춤이 계승되어 왔는바 향토무용에 관심이 있었던 안화주(安化周, 당시 83세)의 증언에 의하면 동(同) 내송리 거주 김두식(金斗熄, 1843~1930)은 당시 곡수(穀收)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 출입을 한 분으로서 향토무에 자질이 있어 사찰에서 학춤을 즐겨 전수받아 추었으며, 이 춤을 다시 동(同) 부락거주 황종렬(黃鐘烈, 1897~1957)에게 전수했고, 이어 김덕명(52세, 김두식씨의 손자)에게 전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앞에서 언급한 신경수의 사찰학춤의 춤사위를 기억할 수 있다고 하는 김말복은 현재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의 학춤사위를 보고 통도사의 사찰학춤사위와 흡사하다고 인정하므로 김덕명의 학춤은 분명히 통도사 사찰학춤의 계열임을 결정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양산군 동면 내송리에서 전해 온 이 학춤은 정월 대보름이나 팔월추석은 물론 이 이외에도 부락 경사가 있을 때마다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통도사에서는 1935년경부터 이 학춤의 자취가 없어지고 내송리(內訟里)의 민간계(民間系) 학춤만이 겨우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그러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 그에게는 평생의 숙원이었지만 1976년 김덕명의 학춤이 문화재지정에서 보류되었다. 그의 학춤이 보류된 이유로는 사찰학춤의 사찰계의 단절과 민간(재인)계로의 명맥 전승, 명칭의 불확실성(양산사찰학춤, 사찰학춤, 양산학춤 등) 과거 친구의 권유로 동래야류의 이수자에 등록된 것이 사적인 민원으로 영향을 미친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물론 그의 학춤은 조사과정에서 통도사 주지승을 지낸 김말복(金末福)을 중심으로 월하(月下)스님, 성파(盛波)스님, 김동만(金動萬)등 증언자들을 통해 전승경로가 이미 확인되었던 것이며, 양산사찰학춤이란 명칭도 학춤이 양산 통도사에서 전승된 춤이라는 이유에서 발굴조사자들이 정한 것이었다. 전문위원들이 그의 학춤조사를 위해 생존한 증언자들을 찾아다니며 채록할 때 통도사에서 비중이 큰 스님(경봉스님)의 증언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번복된 증언이 반대 세력을 통해 제출되었고, 경봉스님의 고백으로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시키는 대로 번복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김덕명에게 유리한 일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전문위원들이 조사 보고한 학춤은 지정 심의에서 보류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덕명은 1977년 12월 8일에 문화계의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양산사찰학춤’의 특별 강습회 및 실연을 선보이게 되었다.여기에 참가하였던 무용평론가 박용구는 "묻혀있는 우리춤이 제대로 발굴만 되면 훌륭하고 좋은 점이 이와 같이 다양하다”고 감탄했으며, 역시 무용평론가인 조동화도 "어찌 인간으로서 그토록 잘 출 수 있는가?”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예능보유자 김천흥도 흥에 겨운 나머지 그가 춤을 출 때는 손수 장고를 잡으셨다고 하며 덩실덩실 같이 춤을 추실 때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때까지는 동래야류에도 친분을 유지하고 하고 있었지만 지역적인 대립으로 인하여 중도에서 인연을 아주 끊고 말았다.그리고 비록 무형문화재 지정은 보류되었지만 양산사찰학춤 발굴조사로 인하여 김덕명은 중앙의 원로예술인들의 관심을 더욱 받게 되었고, 동연배의 예술인들과 교제하며 입지를 넓혀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김천흥과 성경린(成慶麟, 1911~2008, 이왕직 아악양성소 수료, 국악원장 역임)은 그의 학춤에 매료되어 영남지방의 독특한 덧배기춤을 보급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를 중앙무대의 예술인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던 직접적인 도화선은 1976년 4월 16일 서울YMCA에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특별 초청으로 시연(양산학춤)을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1976년 6월 3일 주위의 권유로 제2회 전주대사습대회에 52세의 나이로 경남 춤꾼으로 출전했고, 심사위원인 김천흥, 최현, 김숙자 등은 이미 서울 시연회에서 그의 춤을 보고 탄복한 바 있다. 양반춤에 내재된 남성의 멋이 담긴 춤사위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서 장내가 떠들썩할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 심사위원들이 그를 찾아와서 격려할 정도였고 그의 춤이 경연대회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한 것이었다. 그 후, 1976년 12월 8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초청으로 2차 시연회를 갖게 되면서 그의 춤은 전승보급에 발돋움하였다. 그가 ‘교방춤’(교방타령굿거리, 교방 살풀이, 교방양반춤)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면서 오늘날 무용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교방’ 명칭을 유행시킨 춤꾼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77년 4월 13일 서울 YMCA 제3회 전통무용 발표회에서 춤을 추었을 때는 400여명의 관객이 모두 찬탄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때 춘 춤은 양산사찰학춤을 비롯한 지성승무, 한량무 등이었다. 그 뒤 한양대학과 이화여대에서 10여 일 간의 강습회를 갖기도 했고, 같은 해 6월6일에는 양산에 있는 양산극장에서 방위성금 모으기를 위한 고전무용 발표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의 호의적인 반응과 함께 호평을 듣기도 했다. 그의 춤에 대한 평으로는 1976년 11월11일자 국제신문에 "양산사찰학춤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1977년 6월 6일자 부산일보에 "20사위에 깃든 庶民들의 애환”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고, 1978년 『산업한국』 3월호에서는 "양산학춤에 대한 역사적 고찰 및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소개된 바 있었다. 1977년 7월에는 진주무용인들의 청을 받아 진주 민속예술보존협회의 전통무용부문 선생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78년 4월에는 진주시립국악원에서도 전통무용을 담당하여 가르쳤다. 11월9일에는 개천예술제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 최우수상을 받음으로써 그의 한량무가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로 지정되고 예능보유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본인뿐만 아니라 같이 한량무를 춘 8명의 무용가들도 모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도록 노력했는데 그 출연자들은 김덕명(한량), 성계옥(승려), 정행금(각시), 정필순(마당쇠), 서정남(별감), 김연이(주모), 최금순(상좌), 김정애(장고)등이었다. 이밖에도 그에게 춤을 사사받은 제자로는 조을주, 박계현 등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본인의 평생 목표인 양산사찰학춤만이 뇌리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양산사찰학춤의 지정보류는 기쁨보다는 아쉬움만 더했다. 이어 1979년 11월 26일에는 서울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전통무용 발표회를 가졌는데 레퍼토리는 양산학춤을 비롯한 한량무, 양반춤, 타령, 굿거리, 지성승무, 나래무(살풀이), 잉어춤 등이었다. 이때에도 그의 춤을 본 김기수(국립국악원 원로사범, 보유자)는 "이것이 춤의 오리지날”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의 활동은 무용에 대한 그의 의지와 욕망에 비례해서 점점 발표회나 전수에 열정을 쏟게 되어 1980년 5월에는 80불교 봉축제의 공연을 가졌고, 8월에는 진주에 "교방청 김덕명 전통무용 연구소”를 냈다. 또한 올바른 전통무용을 후세에 전수하고자 1981년 1월 9일 부산에도 전통무용 연구소를 내기에 이르렀다. 부산과 진주의 연구소를 오가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해 11월 23일은 일본 제총산(帝塚山) 대학의 초청으로 우리의 전통무용을 공연하여 그곳의 유일한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에 "한국의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김덕명!”이라는 제목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1982년 1월 10일에 발간된 계보(季報) 제총산(帝塚山) 대학에는 청초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춤이라고 특집으로 다루었고 그 학교의 교과서에까지 그의 춤에 관한 부문을 서술하고 있다고 한다. 그 후 1982년 3월부터는 부산전문대학 무용과 민속무용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렇듯 그의 무용에 대한 평가가 퍼져나가게 되자 부산지구 J.C신문은 1982년 6월 30일자에 "양반춤에 대한 소고”라는 제목으로 일면 전체를 그의 기사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의 춤이 사찰무용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불교 관계의 제반 공연에도 참가했던 바 1982년 11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불교협회 주최 자선공연에도 참여하여 양산사찰학춤과 양반춤을 추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는 늘 학춤을 출 때면 그 스스로가 학처럼 추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사람이 학이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1996년에도 구희서, 김옥진 조사자에 의해 ‘양산학춤’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하여 명칭을 변경하여 다시 제출하여 학춤이 문화체육부 관보에서 지정을 위한 예고까지 나왔으나 동래학춤과 병행해서 전승과정을 탐문 조사를 하던 중 계보에서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로 부각되어 나타나게 되어 학춤 전승이 부산 동래와 양산으로 분류되었지만 다 같이 이주서(李周瑞, 1865~1930)로부터 전승된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으로 나중에 지정 여부에 논란의 단서가 되었고, 또 다시 주위의 방해(동래 M씨가 문화재청에 찾아가 민원 제기)로 인하여 역시 철회 부결되고 말았다. 이렇게 김덕명은 문화재 지정에 있어서 두 번의 실패를 겪게 되면서 좌절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김덕명 전승춤의 전승계보 김덕명(金德明,1924~2015)은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8살(1932)에 범어사에 들어가 불가(佛歌)를 부르거나 불교(佛敎)의식무를 흉내 내었다. 김덕명이 전문적으로 전수받은 춤 계보는 4가지로 정리되며 그중 민간춤놀이는 마을전승이기에 계보로 말할 수 없다. 첫째, 사찰에서 전승하던 학춤은 고종 때부터는 이월호(李月浩, 1825년생, 당시 어산종장)―김설암(金雪岩, 1885년생)―신경수(辛景壽, 1893~1965)―양대응(梁大應, 1897~1972, 통도사 주지) 스님으로 계맥이 이어져 김덕명 씨가 보유하고 있다. 그때 양대응스님은 조부 김두식(金斗熄)과 절친한 사이로서 양산학춤, 지성승무, 바라춤의 명인이었는데, 1940년 16세에 이 춤들을 전수받았다. 또 당시 해인사에 있다가 통도사에 온 신경수스님으로부터 승무와 학춤을 전수받았다. 즉 두 분(신경수, 양대응)의 스님으로부터 사찰춤을 전수받았다. 둘째, 민간인으로부터 전수받은 재인춤은 통도사 소속의 민간인 김두식(金斗熄, 1843~1929, 김덕명 조부)이 곡수(穀數, 수사찰 재산 관리자)로 있으면서 학춤을 전수했는데 민간인 안화주(安化周, 1894~1965), 황종렬(黃鍾烈, 1897~1957)이 전수받아 다시 김덕명이 이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셋째, 기방춤으로 이주서(李周瑞, 1882년생)―고수길(高壽吉, 1888~1965, 당시 양상 권번 원장)으로 이어지는 춤맥을 전수받게 된다. 양산권번의 권번장(춤사범)인 고수길(高壽吉, 1888~1965, 동래권번에서 양산권번이적)로부터 그의 딸 고채봉(高綵峰)과 고채숙(高綵淑, 기명은 山月)과 함께 한량무, 교방양반춤, 교방타령무, 신라장검무, 교방진연무, 태극무 등을 배웠으나 사찰춤과 춤바디가 달라 애를 먹었다. 이어서 개성권번에서 양산권번으로 이적해온 김농주(金農宙, 1905~1955)와 오누이를 맺으며 기생소고무, 타령춤, 굿거리춤 등을 배웠고, 군무(群舞)로는 장원급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40~50여명의 인원이 함께 추는 부마도위춤도 배웠다. 넷째, 그가 복원한 민간춤놀이들은 딱히 전승자를 밝힐 수 없는 지역민들이며 김덕명은 탈춤과 토속민요 등 향토민속적인 기예능도 뛰어나 지역민속을 발굴하는데 참여하여 발굴한 것들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종목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사찰춤과 권번춤과 민간춤으로 크게 3계통으로 대별된다. 그는 일반인으로 사찰춤을 계승한 사람이며, 남성으로서 기생들의 춤인 권번춤을 전승받았다는 점이 다른 춤꾼들과는 다른 특이점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27종은 크게 3계통으로 기방계(10종), 사찰계(4종), 민간계(13종)이 있다. 1. 기방계춤으로는 한량무(한량, 기생, 승려, 주모, 별감, 상좌, 사환 등), 교방타령춤, 교방양반춤(호걸양반춤), 교방진연무, 기생소고춤, 굿거리춤, 신라장검무, 태극무, 부마도위춤(군무), 장기춤. 2. 사찰계춤(재인계와 혼합)으로는 사찰학춤, 지성승무, 연등바라춤(탑돌이춤), 연등나례살풀이춤. 3. 민간계춤으로는 성주풀이춤, 쾌재나 청청춤, 각설이타령춤, 신노심불노춤, 농사요놀이춤, 장원급제놀이춤, 기우제놀이춤, 망시꼽배기놀이춤, 가락오광대놀이춤, 석전놀이춤, 망부석사록놀이춤. 회심곡춤, 떳배기춤(得排鬼춤). 김덕명의 춤사위 특징은 첫째, 특별한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정신 집중과 무게, 관절조절을 통해 안정적인 자세로 이루어지는 동작이라는 점이다. 단전을 이용한 깊은 호흡과 기가 조화를 이루며, 발을 디디고 누르는 굴신동작의 걸음걸이에서 관절의 유연함이 나타난다. 남성의 투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춤사위는 사찰춤과 권번춤에 두루 정통하여 지극히 예술적으로 승화된 춤이다. 쌍벽을 이루는 동래학춤은 이주서로부터 김귀조, 김문수, 김필상, 최순백, 김태현, 유봉오가 학춤을 사사 받았고 김귀조는 아들인 김희영에게, 김문수는 아들인 김동원에게 각각 전수하였으며 작고 이전에 김희영이 외조카 이현경에게 전수하였으나 중단되었고 김동원이 유일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현재 구음보유자로 유금선이 지정되었으며 김태형, 이성훈이 기능보유자 후보로, 김정양 이광호가 전수조교로 꾸준히 전승하고 있다. 이에 비해 양산사찰학춤은 1976년 당시 무형문화재보고서 조사자 서국영의 기록에 의하면 김말복이 증언하기를 1880년대 이후 이월호(1852~?), 1983년대부터는 김설암(1885~1970), 1920년 이후에는 신경수(1893~1965)와 양대응(1897~1972)스님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부락인 신평리에 나와서 남소석(1904~1960)의 꽹쇠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양산사찰학춤」이 통도사에서 전승되었음은 민간인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윤장우씨는 1938년부터 통도사 광원에 있으면서, 1945년까지 절에 있었는데 스님들 중에서 끼가 있는 스님들이 사하부락인 평산리 주막에서 춤과 소리를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태어나 하북면의 면장이 된 지명구씨는 어릴 적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양대응(1897~1972)스님이 장구장단에 맞추어서 학춤을 추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통도사에 있었던 신경수(1893~1965) 스님은 당시 명무 승려로서 학춤을 잘 추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사찰에서는 대제(영산재 등)를 지낸 후 신도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사찰경내 마당에서 사찰의식 외에 여흥을 펼치는 사례가 많았다. 이때 외부에서 놀이꾼을 초빙하기도 하고 또는 장기가 있는 승려가 직접 춤을 추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김덕명(1924~2015)은 통도사에서 신경수, 양대응 스님에게 「양산사찰학춤」을 배웠다. 남사당의 북소리에 이끌려 동네잔치에서 춤을 추는 김덕명을 부모는 아들이 혹여 광대라도 될까 통도사로 보냈으나 오히려 통도사에서 「바라춤」, 「지성승무」, 「장검무」, 「학춤」 등을 배웠다. ‘학산’ 이라는 호는 절에서 나올 때 통도사 보화스님이 지어 주었다고 한다. 학춤공부를 많이 한 덕명이 나무 위에서 학이 날듯, 학춤을 잘 춘다는 뜻이었다. 위의 계보 외에 「양산사찰학춤」을 추었던 스님들은 더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점차 사찰계에서 학춤의 자취가 사라지고 현재는 추어지지 않고 있다. 둘째, 민간(재인)춤의 형성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무형문화재 보고서 제 122호에 따르면, 처음 민간으로 전승되어진 과정은 김두식(金斗熄1843-1930)에 의해서였다. 김두식은 당시 곡수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를 출입했으며, 사찰에서 학춤을 전수받아 추었다. 이 춤을 다시 동부락 거주 황종렬(黃鐘烈,1897-1957)이 전수받았고 이어 김덕명(金德明)에게 전해졌다. 동면의 황종렬은 춤에 대한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동면 내송리 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주도적으로 춤을 통해 흥을 도왔다고 하며 양산 출입도 매우 빈번했다. 특히 내송리에 있는 주점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의 전승계보 외에 양산에는 학춤을 즐겨 추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양산에서 명무수로 이름난 이주서(1869-1944)란 사람이 학춤을 잘 추었으며 당시 이 춤이 서상건(1982-1967)에게 전승되었다며 1976년 당시 조사자인 서국영에게 증언하였다. 서상건씨는 양산에서 가장 큰 포목점(일신상회)을 경영하면서 매우 부유하게 생활하였고, 풍류를 즐겼던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춤을 즐겨 추었다. 그래서 양산에서는 그의 별호가 "춤 잘 추는 서상건”이란 소문이 생겨났고 주로 동래온천장에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우성렬(1930- :서상건의 먼 친척)씨가 증언하였다. 이렇듯 양산에는 여유로운 풍류객들이 많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김두식, 황종렬에 이어 김덕명은 통도사에서 학춤을 배웠으며 민간에서 또한 전수받아 꾸준한 활동과 「양산사찰학춤」의 보존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감덕명이 증언(2015. 5.16, 김덕명자택에서)한 지성승무에 대한 배경설화는 다음과 같았다. 지성승무는 두 가지가 있는데 군무와 독무로 춘다. 김덕명 선생님이 중언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어느 사찰의 스님이 불도를 닦다가 탁발하려 동네에 내려갔는데, 동네 어구의 밭두렁에서 어린아이가 풀을 뜯어먹고 있어 의아하게 생각하여 아이를 업고 동네를 들어가니 마을사람들이 돌림병으로 모두 죽고 아이만 살아서 먹을 것이 없어 밭두렁에서 풀을 뜯어먹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스님이 아이를 데리고 사찰로 돌아와 상좌승으로 키우게 되었다. 그 후 상좌가 두 명(악기다루는 어산상좌, 수발과 교육하는 상좌)이 있었다. 그 후 노승은 불법해탈을 위해 토굴에서 여러 해를 불법을 깨닫기 위해 참선을 하며 불공을 드리고 마치고 돌아서 나오던 중 연유도 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뒤에서 함께 불공을 드리던 상좌가 심히 놀라 동분서주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고 상좌의 보살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승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노승의 시신을 끌어 앉고 통곡을 하던 상좌도 너무 슬픈 나머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어려서 데려다 키운 상좌는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노승이 쓰러지니까 슬픔이 깊어 기절해 같이 쓰러진 것이다. 상좌가 기절하여 비몽사몽간에 백발도승이 검은 지팡이를 짚고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지팡이를 쿵쿵 두드리며 "네 이놈 상좌야! 노스님은 너의 불거지운명(不居之運命)로 너의 살기(殺氣)에 스님이 죽어가고 있는데 너마저 누워 있으니 한심하구나! 빨리 일어나 스님을 구해라!” 하고 도승이 지팽이로 "꽝!”하고 땅을 치는 호통소리에 놀라 상좌가 벌떡 일어나 "소승의 스님을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을 하며 세세사정을 말하니 "허허, 너의 갸륵한 마음이 기특하니 노스님을 살리는 비법과 방도를 가르쳐 줄 테니 그대로 이행하거라” 그러자 순간 몇 명의 악단이 좌우로 둘러앉아 장단이 울려 퍼지고 도승은 가락에 맞춰 춤을 추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추는 춤을 잘 보아라. 이 춤을 너의 노스님 앞에서 정성껏 추게 되면 분명코 살아날 것이다.” 이어 말하기를 "그러나 너는 나와 몇 가지 약조를 꼭 지켜야 한다. 노스님이 살아나시거든 내가 전해준 그 승복을 벗어 북에 걸어 두고 소생하신 노스님을 부축도, 말도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곳에 잠시도 지체 말고 노스님과 바로 하직하고 남으로 계속 내려가면 깊은 산골짜기에 암자가 있을 것이니, 그 암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필경 성불할 것이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있는 상좌에게 도승은 다시 "노스님과 너는 숙명적으로 액과 악이 맺혀 영원히 동거생활이 불가능하리라. 만약 나의 명(命)을 어기면 너와 노스님은 변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놀라 깨어난 상좌는 선몽이 분명하며 옆에 도승이 준 승복과 염주가 있어 착용하고 노스님을 살려야한다는 일념으로 어려워 잘 생각나지 않는 춤이지만 정성껏 춤을 이어 추었다. 그러자 노스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몸을 돌리며 긴 숨을 내어 쉬며 깨어났다. 환희에 차 기쁨의 춤을 추며 노스님을 부축해 일으키고 싶었지만 도승의 명을 염두에 두니 앞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노스님을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상좌의 마음은 오죽했겠지만 등지고 떠나 일러준 남으로 가서 암자에서 노스승을 살린 고귀한 이 춤의 연유를 고이 간직하여 후세에 물려주며 이르기를 "이 춤을 지성껏 전수시켜 만대에 전하라” 이르렀고, 이름 하여 '지성승무'라고 전했다.” "나(김덕명)는 춤이라면 좋아서 승무든 학춤이든 열심히 배웠다. 하루는 내가 잘 아는 통도사 스님(당시 대처승, 단청제작)이 내려와 보시고 승무 내용이나 아나? 하시면서 한 시간에 걸쳐 승무설화를 이야기를 해주셨고, 스님 급수에 따른 가사장삼에 대한 복색이야기도 해주셨다. 당시 금강암(지금은 비구니들이 기거하는 암자)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부인이 기거하였다. 그때 이동안(수원화성재인청 소속, 발탈보유자)이 부산에 내려와 활동할 때인데 내 스승이라 하면서 암자 작은방을 소개하여 공짜로 기거할 수 있게 해주고 살림과 음식장만을 내가 다해주었다. 광대줄타기를 했는데 기능이 약해 그 후 다시 서울로 갔다.”한편 향토민속예술의 발굴활동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하여 ‘진주의 한량무’, ‘김해의 석전놀이’, ‘가락오광대’, ‘양산의 웅상망시곱배기놀이’등이 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김덕명이 결코 춤을 떠날 수 없었던 춤 인생은 세속적인 고초를 겪으면서도 단념하지 않은 운명이었다. 그렇게 걸어온 그는 남성의 멋을 잃지 않았고, 굵은 선과 힘, 부드러움이 조화된 그만의 특출한 춤사위를 지켜왔다. 오늘날 남성춤이 중성화 또는 여성의 모습이 강하게 묻어나온다면 그의 한량무와 학춤은 남성의 장점을 표출시킨 것으로 남성춤의 지존을 지킨 마지막 사찰춤과 영남춤꾼이었다. 김덕명 춤사위 성향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크게 두 가지 계통을 잇고 있다. 우선 사찰계통춤의 춤이며, 다음은 기방계춤이다. 그렇다면 그이 춤은 어떤 계통의 성향일까? 전수내용적으로는 사찰계와 기방계의 혼합성향이지만 그의 인생 후반에 나타난 춤 성향은 기방계통보다는 사찰계(재인계)적 성향이 월등이 높게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에 김농주로부터 엄격한 기방춤 기법을 몸에 익혔지만 성장하면서 기방춤의 교태미는 사리지고 남성성향이 큰 재인계적 성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게다가 거구의 체격에다 탈춤에서 나타난 영남춤의 덧배기춤적 특성을 강렬하게 품고 있어 국내 전통무용가 중에서 가장 영남성향과 재인성향을 간직한 춤꾼이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기방계적 섬세함이 덧씌워져 있어 거친 남성성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올곧은 전통춤 즉 기방춤의 섬세한 기법이 몸에 배어나 춤집이 크고 활기가 넘쳐도 투박한 마당춤이 따를 수 없는 표현력을 지녔다. 비교의 예를 들자면 동시대 같은 남성무용가라도 이매방은 어린 시절 처음 입문한 춤이 기방춤(권번 함국향의 첫 가르침)으로 형성된 춤바탕이었다. 그 후 재인춤인 이대조, 박용구의 춤들을 익혔지만 이미 몸과 마음의 성향이 기방계로 고착된 춤성향이 평생춤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래서 이매방춤은 기방계통성을 지켜온 ‘춤속’과 ‘춤바디’를 평생 지켜 전승한 것이다. 반대로 김덕명은 맨 먼저 체득한 춤이 사찰계춤이다. 사찰계의 특성은 재인계적 성향과 불교의례적 성향이 혼합된 것이지만 김덕명은 범패작법을 주로 행하는 어산승(魚山僧)이 아닌 민간인이었기에 춤성향에서 불교의례적인 성향은 약화되고 재인계적 성향만이 남게 된 춤성향이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김농주라는 개성권번에서 활동한 명기의 가르침도 어린 시절에는 기초로서 가능했지만 성인이 되면서는 춤의 본성이 나타난 것이다. 마치 궁중의 무동들처럼 어린 시절에는 중성적인 성향으로 여성적인 고운 춤을 익혔어도 사춘기를 넘어서면 남성성향이 나타나 악사로 전향하거나 퇴출한 것과 같은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하나 그간 문제가 되었던 동래학춤과 양산사찰학춤의 전승계보에서 윗대에 같은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라는 점으로 양쪽 학춤의 실존성은 함께 증명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전승과정에서 성향이 아주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즉 현전하는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을 비교해볼 때 동래학춤은 동래권번을 중심으로 전승되다보니 기방계적 성향이 강해졌고, 동래는 부산이라 춤추는 인적자원이 풍부해 군무형태로 전승되었다. 이에 비해 양산은 시골이라 춤추는 인적 자원도 부족하고 통도사를 중심으로 전승한 사찰춤으로 재인계적 성향이 강화된 춤이다. 따라서 두 지역 학춤을 보면 동래학춤은 기방계적 성향에다 동래기생 유금선(1931~2014)보유자의 구음소리가 흥을 돋우어 곱고 부드러운 날개춤사위로 여러 마리 학이 어우러지는 ‘기방계적 군무학춤’으로 발전하였고, 양산학춤은 사찰중심으로 춤집도 크고 활기 넘치는 춤사위로 전승한 ‘사찰(재인)계적 독무 또는 쌍무 학춤’으로 차이가 있다. 학춤사위의 구체적인 표현에서도 동래학춤은 학의 형상을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데 비해 양산학춤은 학의 생태성과 겉모습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춤사위가 많다는 점이다. 즉 동래학춤은 동래야류의 양반춤사위 중에 학춤과 유사한 배김사위, 옆걸음사위, 활갯짓 뜀사위 등과 모이 줍는 사위, 외발사위 정도이고 양팔을 어깨 위로 들고 추는 날개사위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발사위도 한쪽다리를 구부려들고 다른 쪽 다리는 길게 뻗어 학의 긴 자태를 나타내는 발사위 특징을 보이며 주무수와 조무수가 윤무형태의 군무로 대형변화가 많은 점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양산학춤의 팔사위는 학날개, 학머리로도 표현하고 땅에 내려앉는 사위, 위엄을 보이는 사위, 좋아서 으쓱이는 사위, 먹이 쪼는 사위, 놀라 펄쩍뛰는 사위, 짝을 어르는 사위, 동사위, 비상하는 사위 등 24가지 학의 습성을 나타내는 학춤사위가 다양하며 발사위는 양다리를 균등하게 구부리며, 독무나 군무로 출 때도 앞으로만 진행하거나 시계반대방향으로만 진행하는 등 대형보다는 학춤사위에 치중하여 동래학춤과는 사뭇 다르고 다양하며 예술성이 높고 활기가 넘친다. 또한 양산권번 고문인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권번으로 가서 학춤을 전승시켰다고 하는 것은 학춤의 본류가 양산(통도사)이고 지류가 동래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며, 양산과 동래의 춤전승 환경이 달라 서로 달라진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지역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동래는 이주서의 학춤 영향력이 절대적이고 단일적 계보(이주서>김귀조, 김문수>김희영, 김동원>유금선, 김태형, 이성훈)였다면, 양산은 이주서 외에도 동시대 전승자(김설암, 김두식, 고수길)도 많았고, 계통 계보도 사찰계(김설암>신경수>양대수>김덕명), 재인계(이월호>김두식>안화주>황종열>김덕명), 기방계(이주서>고수길>김농주>김덕명) 등 다양하였기에 학춤의 풍부한 내용과 전승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은 같은 영남지역춤이라 할지라도 춤성향과 춤사위 특징이 많이 달라 무형문화재로 양산학춤을 지정하는데 동래학춤이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산사찰학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보까지 올랐으나, 동래 측의 반발로 무산된 것은 한국전통춤 중에서 가장 남성다운 학춤(한량무 계열)이 지정되지 못하게 되어 여성성이 강한 살풀이춤, 태평무, 승무 등만이 편중되는 역사적 오류를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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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조계사 동자승 삭발수계식...어린이 9명 단기출가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한불교조계종 총본산 조계사에서는 6∼7세 남자 어린이 9명이 참가하는 동자승 단기출가 '보리수 새싹학교' 삭발 수계식이 열렸다. 2019년 이후 코로나19로 인해서 4년 만에 개최되는 조계사의 동자승 삭발 수계식은 행사 전부터 불교신자들에게는 많은 주목을 받았다. 동자승들은 이날부터 29일까지 21일 동안 부모 곁을 떠나 조계사에서 지도 교사나 스님들과 지내며 예불을 올리고 예절을 배우는 등 출가 생활을 한다. 첫날 행사로 어린이들은 그간 길러온 머리를 깎고 장삼을 입었으며 '인'으로 시작하는 법명을 저마다 부여받았다. 조계사 관계자는 "잘못된 식습관, 스마트폰 중독 등에 노출되어 정신적·육체적으로 불안전한 환경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어린이들에게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바르고 좋은 생활 습관을 지닐 수 있도록 3주 동안 교육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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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51) <br> 이애주의 명인의 '승무' 춤사위승무 승무는 우주가 열리면서 생명이 태어나 자라고 성숙하고 열매 맺은 다음 다시 제자리로 회귀하는 생명 본성의 근본을 형상화한 춤이다. 승무에서 춤 이름에 나타난 ‘승’의 의미는 소승小乘을 넘어선 대승大乘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 자신을 포함한 온 중생, 우리 모든 사람들을 뜻하여 인간의 춤, 우리들의 춤이라는 큰 의미의 보편성을 갖고 있으며 춤에 불교의 고깔과 가사·장삼이 차용되어 승무라는 이름으로 정립되었다.춤은 사람들이 살면서 움직여지던 몸짓이 토대가 되어 나왔듯이 승무 또한 우리가 대대로 살아왔던 삶의 몸짓에서 그 골격이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고대 부족국가시대부터 하늘을 숭배하고 제의를 지내던 몸짓, 수렵과 사냥의 몸짓, 농사의 몸짓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지신을 밟고 씨를 뿌리는 모습, 김매고 추수하는 움직임에서 승무의 가고 오는 발놀림이라든지 장삼을 뿌리고 앉는 사위 등이 서로 일맥상통하고, 울러 메고 타작하는 모습 등이 승무에서는 어깨에 메고 흩뿌리는 춤사위로 나타난다. 이애주 (1947-2021) 서울 출생 1954년 김보남(1912~1964) 선생 입문 1970년 한영숙(1920∼1989) 승무 사사 1992년 전수교육조교(현 전승교육사) 199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보유자 2017년 제7회 박헌봉 국악상 2013년 옥조근정훈장 2003년 제7회 만해대상 예술부문 2019년 제1회 대한민국 전통춤 4대명무 한영숙상 수상 2020.03~2021.05 경기아트센터 이사장 2019.09~2020.03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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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회 학술상 금관상.... 조효식·권영우·허형욱12회 국립중앙박물관회 학술상 금관상 수상자로 조효식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권영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허형욱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선정됐다고 4일 밝혔다.국립중앙박물관회에 따르면 조 학예연구사는 '신라 성곽 연구-수창군 호국성의 위치 비정', 권 학예연구사는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당문서가 부착된 삿자리(葦席)의 복원-투루판(吐魯番)문서 및 대곡문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허 학예연구관은 '예천 용문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의 불교신행내용과 ’주역‘괘상표현'으로 금관상을 받는다.은관상 수상자는 김혁중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윤종균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명세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강삼혜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 안선규 안동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정대영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연구사, 신용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지호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원이다.특별상은 국립진주박물관의 '조선무기 특별전 화력조선', 국립공주박물관의 '백제 귀엣-고리,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장려상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의 '금란지교, 위대한 동맹'이 받는다.국립중앙박물관회 학술상은 전국의 국립·공사립박물관 학예직 및 직원의 논문을 대상으로 시상한다. 올해는 연구논문 26편, 전시도록 12편 등 38편이 응모했다. 시상식은 오는 9일 오전 11시30분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 제2강의실에서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회는 기부, 기증을 통해 박물관 전시, 연구, 교육 등을 후원하는 모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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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5월 7일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 행사 개최천도교중앙총부(이하 천도교)는 5월 7일(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만남의 광장에서 어린이날 축하행사인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당초 5월 5일 어린이날로 예정돼 있었지만 우천 예보로 변경됐다. 올해는 천도교소년회가 어린이인권선언을 한지 100년째 되는 해다. 천도교소년회는 1922년 세계 최초로 ‘어린이 날’을 만들고, 이듬해인 1923년에는 세계 최초로 ‘어린이 인권 선언’을 주도했다. 천도교소년회는 1921년 5월 1일 어린이의 인격옹호, 정서 함양, 건전한 사회성 함양을 목적으로 소춘 김기전, 소파 방정환, 현파 박래홍 등의 천도교 청년들이 중심이 돼 만든 천도교청년회 산하단체다. 당초 천도교는 어린이들을 위한 소년부를 설치했었는데, 소년부의 부원이 늘어나자 천도교소년회가 조직됐다. 그동안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들을 위한 운동회와 동화회, 토론회, 등산회 전람회 등 활동을 활발히 전개해왔다. 창립 1주년을 맞은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 날’로 정하고 어린이를 위한 행사를 개최했다. 첫 어린이날 행사는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기념식, 선전지 배포, 시가행진, 축하회로 진행됐으며 이는 이후 어린이날 행사의 기본틀이 됐다. 또한 어린이를 위해 잡지 ‘어린이’도 창간했다. 동화와 동시, 민담, 소설, 생활 상식, 특집 기사, 퀴즈 등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많아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1925년경에는 3만부의 판매 부수를 자랑할 정도였다. 잡지 ‘어린이’는 일제 강점기 최장수 어린이 잡지로 어린이운동을 대중화하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특히 천도교소년회는 1923년 4월 17일 불교소년회, 조선소년군 등 소년운동단체와 연대하기 위해 조선소년운동협회를 결성하고 같은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다시 정했다. 그리고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거행된 어린이날 기념식에서 ‘어린이인권선언’의 효시라 할 ‘소년운동 선언문[1]’이 발표됐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이 같은 인식은 천도교의 종지인 ‘시천주’와 ‘개벽’ 사상에서 비롯됐다.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라는 시천주 사상은 시대를 앞서는 근대적 만민평등사상이기에 조선의 신분제를 부정하고, 남녀차별에 반대하며, 세상을 개벽하고자 했다. 이것이 억압하는 이들에 맞서 동학혁명을 일으키고, 3.1혁명을 일으킨 원동력이 됐으며, 천도교는 믿기만 하는 종교가 아니라 행하는 종교인 만큼 1920년대에 농민, 노동, 학생, 상민, 청년, 소년, 여성의 7개 부문에서 활발한 사회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올해는 어린이날 101주년, 어린이인권선언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번 어린이날 축하행사인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는 소파 방정환 선생과 천도교소년회 활동가들의 어린이인권선언에 깃든 만민평등과 인권존중의 의미를 널리 알리고, 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5월 7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봉황각에서 10시 30분 시작해 오후 4시까지 진행된다. 이날 체험존과 놀이존에서는 캐리커처, 페이스페인팅, 풍선아트, 버블아트공연, 숲놀이, 방정환 어린이 길동무체험관, 봉황각 만세 체험관, 어린이 100년사 전시회, 대형에어바운스, 마술쇼, 어린이인권 100년사 전시 등 다양한 행사가 운영된다. 또한 오전 11시 ‘어린이인권선언 100주년’과 ‘어린이날 제정 101주년’ 기념식이 예정돼 있으며, 오후 2시에는 세계 어린이인권 말하기대회도 열린다. 천도교는 코로나19로 움츠려 있었던 어린이들이 풍성한 체험을 하면서 야외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에 많은 방문 바란다고 밝혔다. [1] 소년운동 선언문 1.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예우를 허라게 하라. 2.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3.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할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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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부터 국립공원 사찰 등 문화재 관람료 무료4일부터 국립공원 사찰 등 문화재 관람료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문화재관람료 61년 만에 폐지된다. 문화재청은 4일부터 무료로 전환되는 조계종 산하 사찰의 문화재 관람료를 지원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5월 1일 오전 10시 30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서울 종로구)에서 대한불교조계종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한다. 1970년부터 국립공원 입장료와 통합 징수되던 문화재 관람료가 2007년 1월 국립공원 입장료 폐지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면서 국립공원 탐방객과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어왔으며, 이러한 관람료 문제의 개선을 국정과제로 정한 윤석열 정부는 문화재보호법령을 개정하여 국가지정문화재의 민간 소유자가 문화재 관람료를 감면하는 경우 그 감면분을 국가(지방자치단체)가지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바 있다. 문화재청의 이번 문화유산 관람 지원 사업으로사찰의 관람료 징수와 관련한 국민갈등이 해소되게 됨에 따라 국민들이 불교문화유산을 보다 부담없이 향유할 수 있게 되어 문화향유권이 크게 증진되고, 나아가 불교문화유산의 관람객 증가로 인한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까지도 기대된다. 양 기관은 1일 협약을 통해한국 전통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 유산인불교문화유산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향유 기회를 확대하는 제반 여건을 조성하기로 했으며, 이에 따라 관람료의 단순 감면이나 그에 따른 비용의지원 외에도 사찰의 기존 ‘관람료 매표소’를 ‘불교문화유산 관람안내소’로 변경해 불교문화유산 향유 문화 조성과 안전 관람을 위한 안내 역할을 수행토록 하기로 했다. 문화재청은 문화재관람료 지원을 위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아닌 국가지정문화재의 소유자 또는 관리단체가해당 문화재를 공개하면서 관람료를 감면하는 경우 그 비용을 지원받을 수있도록 6월 30일까지 감면 비용 지원신청서를 접수받을 예정이며, 편리하고안전한 관람환경이 조성될 수 있도록 소유자(관리단체), 관계부처 및 지방자치단체 등과 지속적으로 협의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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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화적 성격의 문화재 체제, 문화‧자연‧무형의 국가유산 체제로 바뀐다재화적 성격의 문화재 체제가 문화·자연·무형의 국가유산 체제로 전환된다.27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지난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이래 변화된 문화재 정책 환경을 반영하고 유네스코 등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국가유산 체계로 전환하기 위해 제정 추진한 국가유산기본법이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윤석열 정부의 문화재청 소관 국정과제인 ‘미래지향적 국가유산 관리체계 마련’의 근거가 되는 국가유산기본법은 재화적 성격이 강한 문화재(財)를 과거・현재・미래를 아우르는 ‘유산(遺産)’으로 명칭을 변경 확장하고, 문화유산, 자연유산, 무형유산으로 세부 분류해 국제기준인 유네스코 체계와 부합하도록 하고, 이를 통틀어 ‘국가유산’ 이란 용어를 채택하여 문화재 체제를 국가유산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취지다. ‘문화재’ 용어는 일본의 문화재보호법(1950년 제정)에서 인용, 유네스코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1972년) 제정 이래 ‘유산(Heritage)’ 개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기존의 문화유산을 지정・등록문화재 중심으로 보호하던 것에서 미래의 잠재적 유산과 비지정유산들까지 보호하는 포괄적 보호체계로 전환하고, 보존・관리 중심에서 활용・향유・진흥 정책으로 전환하기 위해 국민의 국가유산 향유 권리, 온전한 가치의 계승, 보존과 활용의 조화, 교육・홍보, 산업 육성 기반 조성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유산 보호 정책 방향을 담고 있다. 전 지구적인 기후위기 상황에서 기후변화가 국가유산에 미치는 영향과 취약성을 조사·진단하여 대응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내용과 매년 12월 9일을 국가유산의 날로 정하는 내용도 담았다. 문화재청은 국가유산 체제 전환을 위해 지난 해 1월부터 문화재 명칭 및 분류체계 개선안을 마련하여 지자체, 문화재위원회, 언론계, 불교계 등을 대상으로 의견수렴을 실시하고, 정책토론회 및 국민・전문가 설문조사등 사회적 공론화를 거쳐 지난 해 9월 국가유산기본법안을 비롯한 국가유산체제 전환을 위한 다양한 법률 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문화재청은 앞으로도 국민 친화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국가유산 보호체제를 통해 우리의 소중한 국가유산이 새롭고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활용・진흥되고 나아가 미래 세대에 온전히 계승될 수 있도록 적극행정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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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화려한 불전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보물 예고문화재청은 전라남도 강진군에 있는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27일 밝혔다.강진 백련사는 고려시대 말 원묘국사 요세(1163~1245)의 결사처(結社處)로써 조선시대에도 많은 승려가 수행했던 주요 사찰이다. 백련사의 중심 건축물인 대웅보전은 1760년 화재 이후 1762년에 중수한 정면 3칸·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단층 건물이다.요세는 백련사에서 백련결사문을 주도해 신앙결사 운동의 이론적 측면을 완성함으로써 지눌의 수선결사와 함께 대표 신앙결사의 축을 이룬 인물이다.백련사 승려들은 당시 다산 정약용(1762~1836)과 협업해 '만덕사지' 편찬하는 등 불교와 유교가 서로 교류했다는 면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1760년 화재 후 1762년에 중수한 단층 건물이다. 팔작지붕에 정면 3칸과 측면 3칸으로 이뤄졌다. 문화재청은 "이는 18세기 이후 불전 건축이 장식화 하는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 불전의 공포 형식과 초각 세부기법이 섬세하고 화려하다. 기둥 상부 용머리 조각과 천장 상부 용머리 장식은 해학적이고 섬세하게 표현됐다. 실내에는 용과 봉황 여러 마리가 장식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이처럼 백련사 대웅보전은 화려한 18세기 건축적 특징과 관련 기록이 풍부하다"며 "역사적 의미가 담긴 건축물로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실제 대웅보전 중수 기록 '만덕산백련사대법당중수기'와 사찰 기록 '만덕사지'를 통해 대웅보전 중수 배경과 불사에 참여한 장인 계보와 교류를 확인할 수 있어 불교사와 건축사를 고찰할 수 있어 학술 가치도 있다.문화재청은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에 대해 30일간 예고 기간 중 수렴된 의견을 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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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희국악예술단, '2023하동세계차엑스 대한민국 명창대전' 개최한다지난 4일 1,200년 역사를 이어온 국내 최대 야생차 생산지 하동에서 '세계 차 엑스포'가 개막했다. 하동야생차박물관 및 하동스포츠파크 일원에서 오는 5월 4일부터 6월 3일까지 한달동안 개최된다. 하동군과 '손양희국악예술단'은 하동세계차엑스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한다. 명칭은 '하동세계차엑스 대한민국 명창대전'(05.11-12.)과 '하동세계차엑스 전국청소년국악경연대회'(05.27.)을 개최한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은 대한전통예술보존회 경상남도 지회를 맡고 창원 지역을 비롯해 경상남도와 타 시도의 축제, 기념비적인 행사 등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다양한 축제와 행사에도 참여하고 있다. 2009년부터 창원어린이국악단,' 대한전통예술보존회' 경상남도 지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단장과 지회장을 손양희 단장이 맡고 있다. 특히 25년째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해오고 있다. 25년 구독자인 손양희국악예술단의 활동과 전국국악경연대회 진행에 대해서 국악신문 기미양 객원기자가 손양희국악예술단 손양희단장을 한달동안 전화와 방문을 통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편집자 주) 손양희 국악예술단 설립목적과 전승활동 Q. 손양희 국악 예술단 설립 목적은 A. 손양희국악예술단은 민족예술의 정수 국악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몸으로 느끼고 배우며, 나아가 우리 음악을 이끌어갈 전문 국악인의 밑거름인 차세대 명창과 명인들을 육성할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Q. 손양희국악예술단은 언제 조직되었나요 A. 손양희국악예술단은 창원에서 1996년 제1회 창원 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를 주관하면서부터 조직되었다. Q. 손양희국악예술단 소개해주세요.. 설립 목적, 전승활동, 회원수.전승활동 A. 손양희국악예술단은 1995년 손양희국악교습소로 시작하여, 2007년 손양희국악예술단으로 거듭났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은, 자체 기획공연과 시, 도, 국가 공모사업을 기본으로 실행하면서, 각 시군의 축제나 국가 공식 기념일 행사에 초청을 받고 전국 순회공연을 한다.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을 비롯 미국, 유럽 등 20여개국 해외 순회공연을 하며 폭넓게 공연 활동을 하는 전문 국악공연단체이다. 또한 후진양성과 계승발전을 위해 규칙적인 전승교육 활동에도 30여 년간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올해로 26회차가 되는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통해, 인재 양성발굴에 핵심 사업 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전문예술단체이다. 회원은 100여 명과 예술단원은 25여 명이 활동한다 Q. 초대회장, 역대회장은? A. 초대 대회회장은 1996년 당시 창원국악협회장이셨던 故 박미숙선생을 필두로 노키아티엠씨 이재욱 회장, 공민배 전창원시장, 현, ㈜부경 김찬모회장으로 연결되어 국악발전에 도움을 주고 계신다. 26년이 되는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Q. 1996년 제1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가 올해는 26회가 되는데, 언제부터 손양희 회장이 이어오고 계시나요 A. 1996년 제1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하였으나, 창원 국악협회장의 별세로 존립의 기로에 선 국악경연대회를, 2년 지난 1998년 제2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25살밖에 안된 제가 맡아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작년 11월까지 제25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했다. 초반기 국악 불모지 창원에서 이 국악경연대회를 알리기 시작할 때, 국악신문 김호규 사장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Q.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가 올해 26년 돐을 맞이하는데, 자랑 좀 해주세요. A.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는 창원이 공업도시라, 예술 장르 특히 국악 분야는 아직도 열악한 편이다. 하여 고른 발전을 꾀하며 종합대회를 유치했다. 종합대상은 국회의장상이며,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교육부장관상, 도지사상, 창원시장상, 도교육감상, 시교육장상 등 판소리, 기악, 민요.가야금병창, 무용, 풍물... 5개부문을 각파트에 5분의 권위있는 심사위원을 모시며 투명한 대회를 만들어 왔다. 그 결과 문화관광부에서 3년마다 실시하는 평가에서 작년(2022년)은 B+ 등급과 그 3년 전에는 A등급을 받아 공명정대하고 내실있는 우수대회로 평가받았다. Q.최근 서울에서 하동차엑스포 알리기 행사를 했는데..오셨나요? 특별한 행사가 있었나요 A. 그날 행사가 이미 잡혀 있어서 참석못했다. 특히 ‘수사반장’과 ‘전원일기’ 김 회장으로 유명한 국민배우 ‘국민 아버지’ 최불암 씨를 행사 중 2023하동세계차엑스포 명예 홍보대사로 임명하는 뜻깊은 위촉식도 가졌다는 소식을 방송을 통해 들었다. '2023하동차엑스포'와 '2023하동차엑스포 대한민국 명창대전' Q. '2023하동차엑스포' 소개해주세요. A. 산수가 아름답고 인심 좋은 하동... 1,200년 역사를 이어온 국내 최대 야생차 생산지 하동이지요. 하동야생차박물관 및 하동스포츠파크 일원에서 오는 5월 4일부터 6월 3일까지 2023하동세계차엑스포가 개최된다. Q. 전국에서 산수가 아름답가로 유명한 하동의 유래에 대해 자랑 좀 해주세요. A. 통일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은 하동의 아름다움을 ‘호중별천(壺中別天)’으로 표현하며 ‘동쪽 나라 화개동은 호리병 속의 별천지라 신선이 옥베개를 밀치니 순식간에 천년이 되었네’라고 극찬했다. 천년이 지난 오늘날 바로 세계적 차(茶)의 주산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Q. 이번 손양희국악예술단에서 하동세계차엑스포를 널리 알리기 위해 개최하는 국악경창대회 취지는 A. 2023 하동세계차엑스포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23 대한민국 명창대전'과 '2023 전국청소 년국악경연대회'을 개최한다. 이는 세계가 주목하는 엑스포장에는 신명나고도 우수한 우리 전통음악인 풍악이 빠질 수 없으므로, 단순한 경연대회가 아닌, 축하공연 같은 경연대회를 통해 우리음악의 신명, 전통성을 하동을 찾은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함으로 엑스포장을 더욱더 활기차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꾀한다. 손양희 명창 국악계 입문과 국악활동 Q.국악계 입문은 어떤 계기로 언제 들어오셨는지요. 스승은? A. 부산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3년에 한국무용에 입문하였고, 초등학생때부터 노래를 잘 부른다고 인정 받아, 합창부 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한국무용에도 두각을 나타내며 열심히 하였으나, 고2때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유한 가세가 기울자, 9년 동안 받아온 무용교습은 포기해야 해서 절망적이였다. 그런데 그즈음 한국국악협회 창원지부에서 판소리 무료 강습회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무작정 찾아가서 판소리를 시작하게 되었다. 판소리가 나를 다시 소생시켰다. 故 선동옥 선생님(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9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 입문하여 지금껏 소릿꾼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고 있다. 故 선동옥(수궁가), 故 이명희(흥보가,춘향가), 故 한갑주(적벽가), 성준숙(심청가)선생님들께 이수를 받았다. 2008년 12월에 경상남도 무형 문화재 제 9호 판소리 '수궁가' 전수조교로 지정되었다. Q.손양희 선생님 전국경연대회에서 상을 많이 타셨는데, 가장 큰 상을 받은 때는 언제인가요 A. 2017년 판소리 입문 32년만에 제28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2005년 제16회 대구 국악제에서 판소리 부문에 참가하여 종합대상 국무총리상을 받은후 12년만에 받은 상이다. 이때 가장 공력을 많이 들였을 때, 받은 상이다. Q. 창원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국악단체로 손꼽히는 손양희국악예술단 자랑 좀 해주세요. A. 국악 분야를 전공하는 대학의 학부 출신 또는 재학생을 회원이 많다. 그만큼 젊고 활력 넘치는 전문 국악단체이다.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대상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한 김선희, 타악과 풍물로 전국 국악 경연 대회에서 종합 대상인 문화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한 송기혁, 가야금 전공의 김수아 등이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부터 겨울방학 여름방학 기간 ‘2008 국악학교’를 개설하여 창원과 주변 국악인을 대상으로 현재까지 지속해오고 있다. 그래서 창원은 물론 경남에서는 널리 알려진 국악단체이다. Q. 가장 뜻깊고 추억에 남는 공연은 A. 2003년 10월에는 조선시대 최고의 명기이자 여류 문인으로 꼽히는 황진이를 소재로 한 창극 '황진이'를 창원 성산아트홀 대극장 무대에 올렸다. 국립 창극단 수석 단원 등 주요 출연진과 연출, 시나리오, 음악 등 주요 제작진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주인공은 창원 지역의 소리꾼을 대표하여 제가 황진이 역을 맡았죠. 대한전통예술보존회 경상남도 지회가 제작한 최초의 경상남도 지역 창극이었다. 2006년에는 창원 성산 아트홀 소극장에서 '제2회 손양희 판소리 '수궁가' 완창 발표회'를 가졌다. 2009년 창극 '토끼야 수궁가자' 에서 창원에서 연출자를 구하지 못해서 연출과 주인공을 맡았다. '황진이' 역과 '별주부'역을 맡은 때가 저희 소리에 대한 정열을 태웠던 시절인가 보다. 수궁가 완창발표회가 큰 동력이 되었다. 이후 큰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Q. 기억에 남는 해외공연은 A. 2011년 캄보디아에서 ‘앙코르왓에서 한국의 아리랑 콘서트’를 공연하였다. 우리가 갔던 곳은 캄보디아의 우리나라의 불교인 조계종이 세운 고아원 겸 보육시설 '아름다운나라'이다. 그해 여름 창원어린이국악단 14명의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맞아 지리산 산공부(합숙) 대신, 봉사 차원으로 15일 일정으로 갔다. 원장님은 조계종의 스님이셨고, 직원들도 한국분들이 고생하고 계시며,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우리는 캄보디아 학생들과 교류 및 캄보디아 학생들에게 풍물과 민요를 가르키며 함께 공부하고 신나게 뛰어 놀았다. 우리 창원어린이국악단 학생들이 신명나는 공연도 선보여주는 등 우리 전통음악의 우수성과 신명을 잘 전달하고 왔다. 이는 학생들에게 봉사하는 마음과 우리 국악의 뿌듯한 자긍심을 가지게 했던 큰 계기로 기억된다. 양명창은 어려운 청년기, 국악에 입문하면서 판소리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한다, 일찌기 20대 중반에 제2회 창원전국악경창대회를 맡으면서 국악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대구국악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명실공히 판소리 명창 반열에 올랐다. 가무악에 타고난 재능으로 판소리·풍물·전통무용 등을 섭렵하고 공연 연출까지 해오고 있다. 그 배경에는 초창기 2003년 뮤직컬 형식 창극 작품을 맡았지만 창원에서 국악 분야 연출자를 찾지 못해서 시작했다고 한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의 전승활동 Q. 하동 출신으로 유명한 국악인 누구신가요 A. 여러분이 계셨지만, 손꼽히는 두분을 소개합니다. 하동 악양에 '명창 유성준, 이선유 판소리 기념관'이 있는데, 유성준(1873~1949)명창은 판소리 근대 5대명창중의 ‘동편제의 제왕’으로 불리어졌으며, 하동 악양면 신대마을에서 활동하시다 세상을 떠나시고, 이선유(1873~1949) 명창은 송우룡 명창과 김세종 명창에게 사사했고, 최초로 판소리 다섯마당 창본 '오가전집'을 펴냈으며 진주권번의 소리사범으로 활동하셨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두 분의 명창이 하동을 기점으로 폭넓게 활동을 하셨고, 이 두 분을 기리는 판소리 기념관이 하동 악약면 있으며, 판소리 전승발전을 위해 중점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Q.그동안 창원에서 국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A. 첫째로는 판소리를 30여년간 후학을 가르키며 차세대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자체 기획공연 및 타 지역 축제 기념비적인 행사이 공연과 시, 도, 국가의 다양한 공모사 업 지원 및 선정으로 경남을 비롯하여 국내외 등 수 많은 순회공연을 하였고, 26년째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하며 인재 발굴과 대중화에 힘쓰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Q. 가장 좋아하시는 민요는 A. 우리의 민요는 웬만하면 다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 '육자백이', '흥타령'을 특히 좋아한다. 구성지면서 질펀한 우리네 삶이 녹아있어 절로 빠져들어가는 것 같다. Q.한국국악협회 창원시지부, 하동지부와 같이 국악활동을 하시나요 A. 초창기 한국국악협회 창원지부 창단 맴버였으나, 현재는 협회 활동은 하지 않고, 개인적이지만 공적인 일을 하며 활동하고 있다. 한국국악협회 하동지부는 풍물놀이, 판소리, 한국무용 등을 통해 지역민들에게 국악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저변을 확대하며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Q. 하동에는 어떤 축제가 있나요. 그 축제에서 판소리를 많이 알리고 계시죠 A. 하동 송림 백사장과 섬진교에서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 및 다리밟기 행사,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 먹점마을에서 산골 매실 매화 축제, 제17회 화개장터 벚꽃 축제, 하동군민의 날 기념식, 새해맞이 공연, 하동 야생차 문화 축제 등에 초청 받아서 판소리를 알리고 있다. Q.코로나 3년간 경창대회 치루시면서 힘드신 부분은 A. 비대면이라는 새로운 방법에 처음에는 우왕좌왕 했지만, 곧 적응이 되었고 큰 어려움 없이 대회를 치뤘다. 예상보다 많은 지원자가 참가해주었다. Q. 20대 중반부터 쉬지않고 30여 년이 넘게 공적 국악활동 단체를 이끄시면서 힘드셨던 점, 보람이 되신 점은 A. 국악단체를 이끌어 간다는게 다른 단체도 그렇겠지만, 경제적으로 녹녹치 않아 어려움도 있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단원들과 더불어 함께 하면서 지혜를 모으고 마음을 모아서 슬기롭게 해결하며 걸어 온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지역에서 후원자들도 차츰 생겨나면서 공고히 자리를 잡아가며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Q. 국악발전을 위해 한 말씀하신다면. A. 우리 경남에는 대학에 국악과도 없고, 시립.도립 국악예술단체도 없다 보니, 국악발전에 악순환이 되고 있다. 특히 영남민요는 동부민요로 몰아가서 딱히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서울까지 가서 경기민요를 배워서 이수증을 받고 학원간판을 내걸고 있다. 이렇게 국악발전이 타 시.도에 비해 열악한 현실을 못 벗어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회원들과 창원시립 또는 도립국악단 창단을 희망하며 오늘도 묵묵히 걸어 간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의 전승활동을 통해 경상남도 창원 지역 국악 발전의 현황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올해 26회를 맞이하는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통해 국악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뒤에는 손양희국악예술단의 노력이 숨어있다. 이러한 활동을 인정 받아서 이번 하동군과 함께 하동차엑스포 대한민국 국악명창대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가 된다. 손양희 2012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9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 후보. 2003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한승호 '적벽가' 사사. 2005 대구무형문화재 제8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 이명희 '흥보가' 사사 2020 전북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성준숙 '심청가' 사사 경상남도판소리보존회장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총집행위원장(26회) 경상남도무형문화재 판소리전수관 외 다수 출강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 대표 (2016~2022) 동국대학교(한국음악과-판소리) 외래교수 (2005~2008) 마산창신대학교(음악과-판소리) 외래교수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판소리 학사 및 석사 졸업 2017 제28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 2016 제24회 전국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2016 제25회 땅끝해남 전국국악경연대회 명인부 대상한국문화예술위원장상 2016 제19회 서편제 보성소리축제 명창부 우수상 '전남도지사상' 2015 제3회 미주 한국국악경연대회 '지도자상' 2006 제16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 종합대상 국무총리상' 2005 제2회 DELPHIC GAMES(문화올림픽) 한국대표(판소리) '단체우수상' 수상(말레이시아 쿠첸) 2003 제21회 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부문 명창부 최우수상 '전남도지사상' 2000 제2회 여수 전남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부문 명창부 '우수상' 2000 제18회 광주특장부문 판소리전국대회 특장부 '우수상' 1995 제6회 대구 전국국악제 '금상' 1989 제8회 창원 고향의 봄 축제 전국민요경창대회 '장원' 1985 제30회 부산 영남무용제 '최우수상' 1979 제1회 영남지구 무용콩쿨 '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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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관현악단 5월 '정오의 음악회'국립극장 전속단체 국립국악관현악단은 국립극장 대표 상설공연 '정오의 음악회'를 다음달 11일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 한낮에 즐기는 고품격 국악 브런치 콘서트로 2009년 첫선을 보인 이후 15년째 관객과 만나며 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아나운서 이금희가 해설을 맡아 특유의 부드럽고 편안한 진행으로 관객의 이해를 돕고 국립국악관현악단 타악 수석 단원을 지내고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음악원 총지휘자로 활동 중인 박천지가 지휘자로 나선다. 음악회는 ‘정오의 3분’으로 포문을 연다. 젊은 작곡가들에게 3분 안팎의 짧은 관현악곡을 위촉해 선보인 '2022 3분 관현악' 중 한 곡을 소개하는 코너다. 5월에는 엄기환 작곡의 ‘구름정원’을 연주한다. 서양음악 중심으로 활동 해온 작곡가가 처음 국악관현악을 작곡하며 느낀 감정을 그린 곡으로, 미지의 세계인 구름 위 정원을 상상하며 떠올린 동심과 호기심의 정서를 담아낸다. 특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25현 가야금 선율이 매력적인 곡이다. 이어지는‘정오의 협연’은국립국악관현악단 단원들의 협연으로 꾸며지는 무대다. 이고운 작곡의 해금과 피리를 위한 2중 협주곡 ‘끌림의 노래’를 피리에 이상준 단원, 해금에 변아영 단원이 연주한다. 음악을 매개로 서로 이끌고 이끌리는 관계를 표현한 곡으로, 전통 정악인 ‘영산회상’ 중 관악 편성으로 연주되는 ‘관악영산회상’의 선율을 주재료로 삼았다. 상령산․염불도드리 등 20박 혹은 10박이라는 긴 호흡의 곡 안에 자유롭게 부유하는 관악기의 선율이 돋보인다. ‘정오의 여행’은 세계 여러 나라의 전통음악이나 민요를 국악관현악으로 재해석해 영상과 함께 들려주는 코너다. 이달에는 박한규 편곡의 ‘바다가 있는 풍경’을 들으며 북마리아나 제도로 여행을 떠난다. 고향을 떠나 느낀 그리움과 돌아와 만끽하는 행복감을 노래한 북마리아나 제도 대표곡 ‘Marianas Faluwei’를 모티브 삼았다.주한 마리아나 관광청에서 제공한 북마리아나 풍광을 배경으로 국악관현악 연주가 펼쳐져 1년 내내 깊고 푸르며 따뜻한 바다를 가진 지상낙원 북마리아나 제도를 거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대중가요·판소리·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 스타들과 함께하는 ‘정오의 스타’에서는 뮤지컬 배우 최재림이 함께한다. 국악관현악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정오의 관현악’에서는 박범훈 작곡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뱃노래’를 연주한다. 경기민요 ‘뱃노래’ 가락을 주선율로 돛을 올리고 바다를 향해 출범하는 대선(大船)의 모습을 극적으로 묘사한 곡으로, 나발·북·징 등의 웅장한 소리로 대해(大海)의 존재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다양한 할인 혜택과 이벤트도 마련된다. 지난해와 올해 3·4월 정오의 음악회를 관람한 관객은 30% 할인된 가격으로 티켓을 구매할 수 있으며, 모두 관람하고 티켓을 모은 관객에게 선물을 제공하는 ‘정오의 도장 깨기’ 이벤트도 준비된다. 출출해질 시간인 오전 11시, 모든 관객에게 맛있는 간식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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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반세기만에 공개되는 '직지' 프랑스 현지 전시 지원문화재청이 프랑스에서 반세기만에 공개되는 '직지' 전시를 지원한다.문화재청과 프랑스국립도서관은 1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를 공개하는 특별전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전시지원 및 학술적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프랑스국립도서관은 루이 11세가 1480년에 창설한 왕실도서관에서 비롯된 프랑스 중앙국립도서관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으로 꼽힌다. 현재 직지를 포함한 한국 관련 책 2000여권을 소장하고 있다. 직지는 12일부터 오는 7월16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에서 반세기만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번 협약의 주요 내용은 해당 특별전 관련 대중강연, 전시 관련 이미지 제공 및 번역 지원, 전시회 홍보, 향후 도서관 소장 한국문화유산에 대한 학술조사나 연구추진상호 협력 등이다. 이번 협약 관련 세부 업무는 문화재청 산하기관인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맡는다. ‘직지’는 승려 백운(1298-1374)이 고승들의 어록을 가려 엮고 그의 제자인 석찬과 달잠이 간행한 불교서적이다. 참선을 통해 스스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주제들과 선종불교 진리를 담고 있어 제자들을 위한 교본으로 사용됐다.정확한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며 독일에서 1455년 제작된 '구텐베르크 성경'보다 무려 78년을 앞선 1377년 청주 흥덕사서 금속활자로 상하 2권이 먼저 인쇄됐다.1378년 취암사에서 목판으로 재인쇄됐고 목판본 ‘직지’는 1992년 보물로 지정돼 현재 완전한 형태로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상·하권을 보관하고 있다. 2001년 9월4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현재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은 금속활자본 하권이다 직지는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후 주한대리공사를 지낸 프랑스인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1853∼1922)가 수집해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처음 공개 전시했다. 프랑스 동양학자 모리스 쿠랑(1853~1935)이 쓴 '한국서지'에 게재됐다.플랑시가 죽은 후 직지를 구입한 예술품 수집가 앙리 베베르(1854∼1943)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됐다. 1952년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소장품 목록에 편입됐다. 직지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 전시, 1972년 '세계 도서의 해' 전시, 1973년 프랑스국립도서관의 '동양의 보물' 전시에서 공개됐다. 이번 공개는 반세기만이다. 파리 프랑스국립도서관 측은 "구텐베르크보다 78년 먼저 앞선 '직지'는 당시 아시아의 인쇄 기술이 유럽보다 압도적으로 앞서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50년 만의 대중공개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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