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이병옥 연구노트] (7)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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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옥 연구노트] (7)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3

이병옥/전통예술 연구가, 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 특집부
  • 등록 2023.06.03 07:30
  • 조회수 4,707

김덕명의 전통춤은 양산지역의 사찰(寺刹)과 권번(券番)에서 전승하던 독특한 춤들을 전수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며 후학들에게 전수시켰다. 더구나 사찰과 권번은 수행도장과 세속이라는 서로 상반된 환경이기에 어울릴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김덕명의 춤은 그런 상반된 춤 세계를 모두 포용하면서 조화를 이루면서도 남성적이고 영남적이고 사찰적인 춤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 김덕명의 춤의 장점이라고 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부산·경남지방의 민속을 발굴하고 복원하고 전수하는 탁월한 악가무의 재능까지 겸비한 예인이며 재인이며 기인이었다. 이제 그가 남긴 춤과 민속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사찰계춤(4종), 기방계춤(11종), 민간계춤(13종) 3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1. 사찰계춤

김덕명의 사찰계춤을 전승한 통도사는 경남양산시 하북면 영축산에 자리한 사찰로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하지만 전승계보는 조선말기 철종시대까지의 무수(舞手)승려(魚山僧)는 알 수 없으며 계보가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고종시대의 이월호(李月浩, 1880~ ?)로부터 김설암(金雪岩, 1885~ ?)→신경수(新京壽, 1893~ 1965)→양대응(梁大應, 1897~ 1972), 그리고 김덕명에게 까지 이어진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1) 양산사찰학춤
양산학춤은 1880년대 통도사의 이월호스님으로부터 사찰계에서 민간재인계로 4갈래로 전승되었다. ①김설암-신경수-양대응으로 사찰계 전승에서 민간재인 김덕명으로, ②사찰관련 민간예인계의 김두식(金斗植)-안화주(安化周, 1894- 1965)-황종열(黃鐘烈, 1897-1957)에서 김덕명으로, ③이주서-서상근에게 전승은 단절되었고. ④이주서–김동원 전승은 동래학춤으로 전승되었다.
이렇게 양산에서 유일하게 통합전승된 김덕명 양산학춤은 그 사찰계 원형성과 민간재인계의 독특한 덧배기 춤사위와 교방계의 섬세한 바디(성향)가 깃들여져 예술성이 높은 춤으로 전승되었다.

학춤의 유래는 신라 선덕여왕 15년(AD646) 통도사가 창건된 이래 수륙재, 영산재, 종무대재 때 의례행사무로 승려들을 중심으로 전승되어왔다고 전한다. 김덕명의 양산사찰학춤은 24가지 춤사위를 4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단계별 의미로 학을 표현하면서 춤사위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1단계> 자연의 새가 하늘을 날고 땅으로 내려앉는다. 먹이를 찾기 위해 동료를 위협하며 존재감을 알린다. <2단계> 먹이를 찾기 위해 사방을 살피며 걷는다. 날개 짓하며 돌고 먹이를 고르며 으쓱인다. <3단계> 학은 먹이를 집고 죽이고 먹는다. 배부른 학은 쉴 터를 찾아 걸으며 따뜻한 햇살에 몸을 맡기니 졸음이 온다. 주위 소음으로 깜짝 놀란 학은 일어서면서 기지개 편다. <4단계> 동료 학과 짝을 이루고 끌어 주며 동료에게 먹이를 찍어 먹여주고 노닐다 날아간다.

양산사찰학춤은 사대부차림의 모습에서 학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갓과 도포자락에서 나타나는 우아한 학의 날개 짓, 몸짓 등에서 학의 동태가 사실적으로 전달된다. 하체중심에서 이루어지는 도약과 집중, 배김새 등 굵직한 남성의 멋이 내재된 춤사위는 학춤에서만이 볼 수 있다.(박계현의 박사학위 논문발췌)

 


 2) 지성승무
지성승무는 일반적으로 성행하는 승무와 다른 의미를 지닌 독특한 춤이다. 춤의 근원은 인간중심적 구도, 순도한 도승과 상좌간의 기구한 운명적 사연으로 소산한 전통 불교 춤이다.

검정 승복에 붉은 가사(袈裟)의 강렬한 구도(求道)의 여한(餘恨)으로 중생구제의 부처님이 수행한 수많은 선행과 공덕, 정진 수행을 찬미하는 불교의 정통춤 지성승무는 장엄하면서도 신성한 몸놀림으로 재현되고 있다. 수도승이 수행 길목에서 부모를 잃은 동자를 구해 등에 업고 토굴로 돌아와 불도성상 십여년에 열반하신 스님의 액운을 풀어 소생케 하고 상좌는 스님과의 운명적인 이별을 해야 하는 슬픈 숙명을 적(赤)과 흑(黑)의 대비로 보여주는 춤사위가 전율스럽기까지 하며, 절정에 다달아 검은 허울, 붉은 허울 벗어 던지고 미친듯이 북을 두드리며 흰 적삼이 꿈결처럼 너울거리는 정서가 강렬한 춤이다.

춤의 순서는 <염불장단춤>꿈에서 깨어나서 스님을 살리고 떠나야하는 슬픔으로 흐느끼며 슬픔을 억제하는 춤사위다. <도드리장단춤> 상좌가 스님의 움직임을 엿보며 눈물 닦는 춤사위이다. 움직이는 스님에게 다가설 수 없는 괴로움이 묻어나온다. <타령장단춤>꿈속에 나타난 도승이 가르친 소생의 춤이다. 타령 춤을 출 때 스님이 좌정하기 시작하며 상좌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자진타령장단춤> 차츰 깨어나는 스님의 모습을 장삼자락 사이로 엿보며 눈물 닦는 춤사위다. <굿거리장단춤> 스님이 좌정하니 희비가 엇갈리며 떠날 준비를 하고 북을 울린다. 장삼–가사–홍띠–염주-고깔 등을 차례로 북에 걸은 후 스님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울면서 떠난다.

 

이 춤에서 상좌가 떠나는 의미는 스님과 상좌가 서로 상극이라 소생하는 스님의 모습에게 다가설 수 없는 상좌의 아픔이 춤사위를 통해 나타난다. 이렇게 짜인 승무는 경기도 재인청승무와 강태홍류 승무 등 재인계통의 승무의 공통적인 성향이다.

 

지성승무의 복식은 스님의 평상복으로 우아한 자태를 나타내기 위해 고급소재에 의존하는 일반 승무와 상반되며, 승모와 소 가사, 염주, 홍 가사 등으로 구성된 소품에서 사찰의 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홍가사에는 원과 학, 토끼를 수놓았는데, 원은 우주를 나타내며 학은 태양, 토끼는 달을 의미하며 지구의 음양조화를 일컫는 것이다. 홍띠는 안태(安胎)의 의미가 내재된 것으로 김덕명의 춤에서만이 볼 수 있다. 북은 죽음을 의미하며 스님을 살린 상좌가 남으로 떠나며 생사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연등나례살풀이춤
연등나례 살풀이춤은 고려대전 연등회 때 국태민안을 위한 고려 초부터 행해졌던 축귀의례(逐鬼儀禮)로서 잡귀잡신을 달래고 쫒아 단지 안에 가두어 땅에 묻는 신앙적 성격이 강한 춤이다. 중국에서 들어 온 나례는 고려 정종 6년(1040)에 나례의 기사가 보여 정종 대부터 계동대나례가 시행된 것으로 기술되었다.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잡귀와 사신(邪神)을 내쫒는 뜻으로 행해진 의식이었다.

연등나례살풀이는 푸닥거리를 시작으로 살풀이장단에 맞추어 액을 풀고 자진모리를 통해 푸닥거리를 한다. 연등나례살풀이에서 액을 푸는 춤사위에서는 사신을 수건위에 올려서 어르고 달래는 춤사위와 거부하는 사신을 잡아서 푸닥거리로 정신을 잃게 한 후 단지에 가두어 땅에 묻으러 가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춤 순서는 <푸닥거리춤> 대나무와 살풀이 수건을 활용해서 축귀형식으로 뛰고 때리며 사신의 정신을 잃게 한다. <살풀이춤> 사신을 달랜다. 수건위에 사신을 올려놓고 어르고 달랜다. 고리 푸는 사위에서 사신과 무언의 대화로 달래지만 사신은 더욱 거센 반응을 보인다. 수건 하나에 사신을 달래며 위협하던 무당은 감춰둔 수건을 꺼낸다. <타령춤> 사신을 단지에 가두기 위해 두 개의 수건으로 사신을 유혹한다. 수건위에 앉은 사신을 진정시킨다. <자진모리춤> 두 개의 수건 위에 올려진 사신을 때리고 돌리며 푸닥거리로 정신을 잃게 한 후 수건을 던진다. 이때 무당은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기절한 사신이 깨어나기 전 단지에 가두고 땅에 묻는다.

 

연등나례살풀이춤은 살풀이춤과 무속춤이 조화된 춤으로 춤사위의 전반적인 호흡은 푸닥거리에서 기를 돋우고 살풀이장단에서 깊은 호흡과 함께 몸을 느슨하게 풀어주며 무속의식을 엿볼 수 있는 특이함이 내재되었다.

무당의 복식과 소품으로 흰 치마저고리에 홍띠를 두르며 얹은 머리에 수건을 두른다. 한 개의 수건으로 춤을 추다 푸닥거리에서 두 개의 수건을 사용하는 것도 이 춤에서 만이 볼 수 있는 특이함이지만 경기지역 등 무속계 살풀이춤은 대체로 두 개를 사용한다. 대나무가지와 단지가 소품으로 활용된다.

 4) 연등바라춤
붉은 장삼을 휘날리며 원을 따라 도는 보살들의 양손에 갈라 쥔 동발을 부딪칠 때마다 장엄하면서도 저린 속을 시원하게 쓸어내리는 바라춤이 탑돌이의 의미를 더해 가면 태평성대를 희망하는 구국불교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김덕명선생이 생전에 들려주는 염불소리와 함께 탑을 돌아간다. 동발이 짝을 찾아 울어댄다. 노구에도 좌중을 휘어잡는 선생의 염불 소리, 목탁 소리에 맞춰 탑돌이로 추는 바라군무는 불교의례춤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2. 교방계춤

김덕명이 기녀 김농주에게 전승받은 춤은 그녀가 개성권번 제1기생으로 기예를 익히고 30세 되면서 평양권번을 그만두고 양산권번에 정착한 후 유일하게 남긴 작품들이다. 해방 후 사회분위기에서 기녀가 생활 일선에 나설 수 있는 무대는 요릿집으로 한정되었고 재능이 뛰어난 기녀들은 연구소를 차려 후학들을 지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에 김덕명과 함께 김농주의 춤을 배운 기녀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예술생활을 접으면서 김덕명만이 유일하게 김농주의 춤을 전승하게 되었다.

 

양산지역에서 권번의 춤은 세가지로 전승되는데, ①이주서-고수길의 계보로 이어지는 교방양반춤과 한량무가 전승되고 있었고, ②고수길이 김설암 스님에게 배운 신라장검무, ③고수길-김농주의 다양한 춤이 펼쳐진 것이다. 그녀가 보유한 전통춤은 교방타령무를 기본으로 하여 교방양반춤, 교방진연무, 교방살풀이, 소고춤, 한량무, 장기춤, 잉어춤, 신선무, 부마도의 등 다양한 작품이 있었다.


 1) 교방타령(敎坊打令)춤
교방타령은 교방의 전문 예기들의 기초 교양과목 증 하나로 양반들과 어울려 여흥으로 추던 춤이다. 춤사위는 남성적이며 부드러운 멋이 조화로우며 절도 있고 흥겨운 속멋이 내재된 품격 있는 춤이다. 타령이란 우리 고유 전통음악의 곡조로서 판소리, 민요, 잡가 등에 많이 쓰이는 순수 전통 고전의 음률이다. 이 타령장단에 맞춰 춤을 추며 춤 선은 전, 후를 오가고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춤은 한량과 기녀가 마주보고 추는 형식으로 한량과 기녀가 서로 추파를 던지고 공감형성 되는 춤사위가 조화롭게 나타난다. 교방타령에서 연결되는 굿거리 춤사위는 1983년 이후 제자들에게 전승되지 않았다. 교방타령은 양반과 기녀가 어울리며 추는 춤으로 무게감이 있다면 굿거리 춤은 기녀가 화답하는 춤이다. 여성의 춤이면서 남성적인 멋이 묻어 나오며 발 디딤새에서 사뿐거리는 멋이 이 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춤사위 순서는 마주보고 서는 사위→팔 감는 사위→우, 좌 향 감는 사위→감아올리는 사위 →상 하 평행 반원사위→평 솟대사위→흥 돋우며 올리는 사위→상, 하 눌려서 젖히는 사위→손목 돌리며 활개 펴는 사위→양팔 상하 움직이는 사위→상하 팔 감는 사위→흥 올리며 전후 감는 사위→앞뒤 감고 교차하는 사위→평사위→사선 끌어올리는 사위→열림 사위→외발 서고 팔 감는 사위→사선 회전사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춤의 복식은, 남성은 흰 바지저고리, 검정조끼, 상투에 흰 수건을 묶고, 여성은 얹은 머리 또는 명주수건을 두루며, 자주색 호장저고리, 검정치마를 입고 소품으로 귀주머니를 단 자주색 허리끈을 맨다.

 


 2) 교방양반춤(호걸양반춤)
교방양반춤은 양반이 관기들과 여흥(餘興)으로 즐겨 추던 춤으로 단아하며 사대부(士大夫) 양반들의 의젓한 귀품과 천하를 눈 아래로 보며 남성의 기백과 근엄함, 청초하고 담백함이 돋보이며 해학(諧謔)이 있는 양반의 기세와 품격(品格)을 느낄 수 있다. 춤사위에서 표출되는 무언의 속삭임은 사실적으로 전달되며 이춤은 교방의 전문예인들에 의해 창안되었다. 장죽과 부채를 활용한 춤사위에는 추파 던지는 사위, 햇볕가리는 사위, 공감형성사위, 위엄사위, 엿보는 사위 등 표현이 다양하다.


춤의 특징은 남성의 모습이 강하며 다양한 춤사위에 꾸밈이 없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팔의 움직임은 자유로우나 절제된 멋이 나타난다. 좁은 보폭과 굴신걸음으로 연결되며 기를 모우고 풀면서 안정된 걸음걸이로 중심을 잡는다. 부채와 장죽을 활용하고 도포자락의 움직임이 조화롭게 나타나는 춤사위는 동적이며 우아한 선학을 연상하게 한다. 도약과 디딤의 폭이 넓고 깊으며 하체의 강한 힘을 필요로 한다.


춤사위 순서는 장죽물고 바라보는 사위→양팔 펴서 감아올리는 사위→추파 던지는 사위→상 하 반원 평행사위→양 팔 들고 걷는 사위→햇볕가리며 엿보는 사위→활개 펴는 사위→으쓱이는 사위→상하 휘젓는 사위→위엄 주는 사위→부채 펴서 엿보는 사위→뒤축 굴림 사위→팔 돌림사위→선별하는 사위→옆걸음 사위로 이어진다.

 

춤의 복식과 소품은 흰 바지저고리에 대님, 행전, 속 두루마기, 황금색 또는 옥색도포를 입고, 소품으로 상투, 검정 갓, 장죽, 부채 등으로 구성된다.


 3) 한량무(閑良舞)
한량무에서는 한량과 색시, 승려의 만남은 삼각구도의 갈등으로 희비가 엇갈린다. 이는 알력이 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해학적이며 흥미진진함과 문란한 단면을 도출한 풍자예술로 인식된다. 한량무는 조선후기 관기에 의해 창안되고 기방춤으로 성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한량무에서 비중이 큰 인물은 승려의 출현이다. 승려는 한량과 색시와 함께 삼각관계의 중심에 선 인물이며 탈춤의 노장과장에서도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승려는 등장 후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파계하는 과정에서 종교인으로서의 품위와 가치를 잃게 된다. 이 춤에서 승려는 수도승의 참모습이 아닌 파계승(破戒僧)으로서의 모습은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배불(排佛)정책 내지 억불(抑佛)정책의 일환에서 승려의 인격을 실추(失墜)시키며. 탈춤이 나 각종 민속춤에서 파계승(破戒僧)으로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 의하여 승려들은 환속하여 민간의 재인이나 광대와 어울리게 되면서 승광대(僧廣大)가 되어 사당패(祠堂牌)가 성립되었다. 불교에서 형성된 춤의 대부분은 승광대에 의해 창안된 것이며, 19세기 말에는 사찰에서 춤을 금지하였으며 오늘날 전승되는 각종 민속춤이나 탈춤, 광대놀음에서 승려는 파계승으로 등장시키며 삼각관계로 인해 타락하며 품위를 잃게 된다.

한량무의 배역은 한량, 승려, 색시, 별감, 주모, 마당쇠, 상좌 등 7인이 등장하여 각 배역의 춤에서는 욕망-허망함-깨달음-화합하는 단계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김덕명은 1924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 양산 통도사에 입사하면서 춤의 인생이 시작되었고, 1934년 평양기생 김농주와의 만남으로부터 권번춤의 진수를 전수받았다. 그리하여 김덕명춤의 세계는 사찰춤과 권번춤으로 크게 대별된다. 그는 일반인으로 사찰춤을 계승한 사람이며 남성으로서 기생들의 춤인 권번춤을 전승받았다는 점이 일반 춤꾼들과는 다른 특이점이다.

그의 사찰춤은 ‘양산사찰학춤’, ‘지성승무’, ‘연등나례살풀이춤’, ‘신라장검무’, ‘연등바라춤’ 등이 있으며, 그의 권번춤으로는 ‘교방타령’, ‘교방양반춤’, ‘한량무’, ‘교방진연무’ 등 다양한 춤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김덕명의 춤인생 경로는 출생지인 양산 동면에서 시작되어 장년기의 진주, 노년기의 김해를 거쳐 다시 양산으로 이어진다. 그의 독특한 춤사위는 춤 인생이 시작된 통도사에서 스님에게 남성의 활기찬 춤사위를 익힌 후 평양명기 김농주로부터 부드럽고 우아한 춤사위를 학습하면서 그에게서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춤사위가 생성된 것이다.

대처승인 양대응·신경수스님은 상좌들에게 춤을 지도하며 각종 재를 도맡아서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다. 그러나 활성화 되어야 할 사찰예술이 단절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재의식을 통제하는 조선총독부의 사찰령(1911년)과 그 이듬해 제정된 본말사법(本末寺法)에 따라 범패가 금지되었고, 해방 후 6.25전란 등 시대 변화와 불교정화운동에 의해 대처승을 정리함으로서 양대응과 신경수 스님도 통도사를 떠나게 되면서 차츰 사찰예술은 종적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통도사의 춤을 보유한 김덕명은 불교중앙문화원 예술원장의 신분에서 사찰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는 일이 잦았고 그와 함께하는 행각스님(魚山僧)의 범패와 바라춤, 승무, 학춤, 연등나례살풀이춤 등은 신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통도사에서 전승된 춤은 통상적 사찰의 춤으로 알려진 작법이나 나비춤과 달리 독창적인 춤이 전승되었다는 것이 특이하며, 전승자 신분이 승려에서 민간예인으로 전이됨으로서 전승단절을 막고 계승할 수 있었다는 것이 변환기인 근대무용사에서 중요한 점이며, 그 전환점에 김덕명이 서있다는 것이 무용사의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어야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