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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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국악신문 연재소설 '흙의 소리'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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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11>흙의 소리 이 동 희 못다한 이야기 <3> '난계유고'부록에 시장諡狀 신도비명神道碑銘 발문跋文이 수록되어 있다. 시장은 유현儒賢 공신功臣 들의 시호諡號를 내릴 때 미리 세 가지를 의정議定하여 임금에게 올리고, 그 중에서 하나를 결정하였는데 그 시망諡望을 상주할 때 생존시의 한 일들을 적은 글발이다. 박연의 시장은 영조英祖 때 문신(이조판서) 홍계희洪啟禧가 찬撰하였다. 여기에 그 시장을 간추려 일대기一代記를 되돌아보는 것으로 박연의 생애 이야기를 맺고자 한다. 1378년 박연은 나면서부터 자질이 뛰어난 데다가 총명하였고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덕기德器가 침착하고 진중하여 어릴 때부터 하는 일이 성인과 다름 없었다. 어려서 아버님을 잃고 어머님 봉양을 극진히 하면서 뜻을 어기는 일이 없이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학문에 전념하여 약관의 나이에 문장을 이루었다. 박연은 개연慨然히 예악에 뜻을 두고 널리 유적遺籍을 구하여 강토講討하면서 종률鍾律에 정진하였다. 어릴 때부터 앉으나 누으나 마음 속으로 계획한 바가 있어 악기를 치는 형용을 하며 휘파람을 불다가 입을 다물고 율려律呂의 성음聲音을 입술로 불기도 하였다. 대개 스스로 그 묘리妙理를 얻은 것이다. 부모상을 당하자 죽을 마시면서 여묘廬墓하여 몸이 여위어 피골이 상접되었다. 3년상을 마친 뒤 또 3년 동안 여묘하니 효감소치孝感所致로 토끼가 따르고 범이 호위하는 이상한 일이 있어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旌閭하라는 명을 내렸다. 140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2년 진사시험 제일로 발탁되어 태종왕은 크게 포상을 하였고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간원헌부춘방諫院憲府春坊을 거쳤고 세종이 왕위에 오르고 예악과 문물을 갖추지 못한 것이 많았으므로 박연은 규칙을 세워 왕에게 건의하였으며 조의朝儀를 일신하도록 주청하였다. 그때 기장이 해주에서 생산되고 경석이 남양에서 생산되었는데 세종은 박연이 음률에 정통한 것을 알고 율악律樂을 맡아보게 하였다. 박연은 기장을 거두어 푼 촌을 적분積分하여 옛 제도에 의거 황종율관을 만들어 불어보니 그 소리가 중국 황종의 음보다 조금 높았다. 이에 다시 기장의 입자 형태를 밀랍을 녹여 조금 크게 만들어 적분하여 율관을 만들었다. 한 톨이 푼이 되고 열 톨을 쌓아 촌을 삼는 법으로서 9촌으로 황종의 길이를 삼아 삼분손익하여 12율을 산출하였다. 이듬해에 편경을 새로 완성하였는데 중국의 성음을 따랐으나 유빈이 도리어 임종보다 높고 이칙은 반대로 남려와 같았으며 응종 또한 무역보다 낮았다. 그 까닭을 알고 중국의 제도를 약간 변통한 뒤에 율에 맞추었다. 왕이 중국에서 준 편경과 박연이 새로 만든 율관을 맞춰보고 가상히 여겨 마지 않았다. 중국의 편경이 음률에 맞지 않고 새로 만든 편경의 성음이 맑고 아름다웠다. "귀국의 악률이 바른 소리를 얻었으니 아마도 이인異人이 나와서 악률을 주관하지 않습니까.” 중국사신이 왔다가 음률을 듣고 찬탄하여 말하기도 하였다. 박연의 명성은 높았고 왕의 총애는 더욱 두터워 이조 병조 두 판서를 역임하였고 사법관으로 있을 때는 재판을 공명하게 하였다. 문종 때는 중추원사 보문각제학을 역임하였고 또 예문관 대제학을 제수받아 한 때의 사명詞命이 박연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세조가 왕위를 이어받자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아들이 육신六臣과 함께 화를 당하였고 박연은 삼조三朝의 기구耆舊로 연좌連坐를 면하였다. 1458년 81세로 생을 마쳐 영동 고당高塘, 부인(정경부인 여산송씨)의 묘 뒤에 있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맹우孟愚는 현령을 역임하였고 중우仲愚는 군수를 지냈으며 계우季愚는 육신의 화란禍亂을 당하였다. 1녀는 목사牧使 조주趙注의 아내가 되고 2녀는 사직司直 권치경權致敬의 아내가 되었으며 3녀는 감찰監察 방순손房順孫의 아내이고 4녀는 선비 최자청崔自淸의 아내가 되었다. 박연이 살던 곳에 난초가 많이 생장하여 난계선생이라 일컫는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선생의 정통한 학식과 정직한 도술道術은 우리의 사표가 된다고 하였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은 도덕은 해동海東에 높았고 명성은 중국에까지 현양顯揚되었다고 하였으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효성은 하늘에 닫고 덕행은 세상에 뛰어났으며 경륜經綸을 세워 국가를 도와 흥성하게 다스렸다고 하였다. 시장을 마무리하면서 찬자는, 아들이 6신과 함께 돌아갔으니 큰 소나무 밑에 맑은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與六臣同歸 則長松之下 果有淸風). 송설당松雪堂이라는당호堂號를 쓰기도 하였는데 박연의 생애는 한 마디로 큰 소나무 아래 불고 있는 맑은 바람소리 같은 것이었다. 흙의 소리였다. 아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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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10>흙의 소리 이 동 희 못다한 이야기 <2> 그리고 이선생도 그래서 여기를 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선비가 살던 마을을 뜻하는 거사리, 거기에 박연의 유배 모습을 담아 보자. 어떤 기록이 나올 때까지. 이날 제2 제3의 마을을 찾아 그 가능성을 더듬어 보았다. 옥포리玉浦里, 백도리百島里, 옛 이름은 온섬 원셈 마을, 붉은 바위가 있는 자암紫巖마을, 평지마을 등. 아무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잠간 얘기한 대로 이선생은 박연이 고산 귀양지에서 쓴 가훈을 소개하고 그 배경을 설명하였다. 가훈을 먼저 보자. 열 일곱 항목을 17단락으로 발체 요약하였다. 아이들이 서너 살이 되면 곧 학업에 힘쓰도록 하라. 아침저녁으로 항상 소학小學을 스승으로 삼고 이 책을 정숙精熟 관통한 후에 사서四書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 바라건대 내 자손들은 형제간에 과오가 있으면 서로 경계하고 노여운 생각을 마음에 품어두지 말며 항상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꾸짖는 말로써 대하지 말라. 집을 다스리는 데는 화순和順이 제일이다. 서로 다투는 불상사는 첩을 두는 데서 일어난다. 후사後嗣를 두지 못하여 축첩하는 경우라도 한계를 엄격히 세워야 한다. 불행히 상처하는 일이 있더라도 전처의 자식이 조상을 받들 자가 있으면 후처를 얻지 말고 단산斷産한 여자를 택하라. 가문을 보존하는 하나의 절도節度인 것이다. 일가 중 때가 지나도록 출가出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거든 분수에 맞게 금전과 재물을 내놓아 때를 잃지 말게 하여라. 이것도 우리 가문의 미사美事가 될 것이다. 상례 장례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르도록 하고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 그리고 과음 포식 송사 여자관계 등 8가지 금기사항을 말하고 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아침 저녁으로 전奠을 지내고 삭망朔望으로 제사를 지내면 된다. 제물은 살았을 때와 같이 정결하고 간략하게 주안하여 3년을 마치면 된다. 효도 우애 충성 신의 예의 염치로써 가정의 법을 삼고 마음을 맑게 하여 욕심을 적게 하며 남을 해치지 말고 탐하지도 말며 남의 과실을 말하지 말며 남의 급한 것을 도와주며 남의 어려움을 구제할 것이며 성훈聖訓의 가르침에 따르라. 거문고와 비파와 같은 악기는 옛날부터 군자가 곁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여 성정을 길렀으니 손수 어루만져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청풍명월 아래서 술을 나누면서 시를 짓는 것은 좋은 일이나 늘어지게 취하여 노래하며 춤추는 것은 안 좋다. 매와 개로 사냥을 일삼는 일은 다른 동물의 생명을 죽이게 되니 잔인하고 의리를 상하는 일이다. 내 자손들은 삼가 몸을 보존하여 문호門戶를 잃지 않도록 하여라. 친척이나 벗이 소첩에 빠져 있는 집 미망인 과부 집에는 경솔히 드나들지 말아라. 여색女色은 가장 명예와 절조에 관계되는 문제다. 경박하고 소흘히 하지 말아라. 이 늙은이의 뜻을 명심하여 선조의 유풍을 욕되게 하지 말아라. 공사 간 연희 등 환락의 자리에서 기생들과 의혹될 일을 조심하며 오래 머물지 말고 핑계를 만들어 물러나라. 삼가고 삼가라. 몸을 다스리는 하나의 큰 절도이다. 판관判官이나 대사간大司諫의 임무를 맡게 되었을 경우 사족士族의 문제 흔적이 애매하거나 부녀의 간통 사건일 경우 경솔하게 판결해서는 안 된다. 증거가 없으면 재판을 물리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 집은 청렴하여 후손에게 전해줄 재물이나 보배는 없다. 다만 내가 평생 겪은 일들과 원하는 바를 기록, 가범家範을 만들어 장래에 영원히 전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렇게 조목 조목 쓰고 끝으로 결연히 덧붙였다. "을해乙亥 맹추孟秋 상한上澣 78세 늙은이 병을 무릅쓰고 써서 전하노라.” 세조 1년(1455) 음력 7월이다. 고통스런 귀양살이, 성하지도 않은 몸으로 박연은 왜 이런 글을 쓰고 있었을까. 꼭 그의 가정 자녀손에게만 전하고 싶은 덕목德目이었을까. 귀양 전의 박연과 그 이후의 박연의 생生을 나누어 본다. 앞의 생은 먹물로 썼다면 뒤의 생은 피는물로 쓴 것이다. 이선생의 칼럼에 쓴 대로. 「난계선생 문집文集」 「난계선생 유고遺藁」에 수록되어 있다. 가훈家訓-17칙서十七則序라고 되어 있는데 서문은 영조英祖 때의 문신文臣 이재李縡가 쓰고 있다. 앞 부분이다. "박공(박연)이 음률에 정통하였으므로 수백년을 지나 지금에 이르도록 소년들조차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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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09>흙의 소리 이 동 희 못다한 이야기 <1> 2020년 9월 17일 시작하여 이제 마무리를 하면서까지 2년이 넘는 동안 난계 박연 이야기에 매달려 썼다. 세종실록을 비롯한 몇 왕조실록 난계유고 등을 많이 인용하였고 박연에 대한 다른 두 세 소설을 참고를 하였는데 말년에 대한 사항은 새로 제시하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영동 박연이 태어나고 자란 길을 국악로라고 명명命名하고 있고 그곳에 난계국악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거기에 마지막 생애의 부분이 추가되고 고쳐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박연은 생을 마감하기 직전 고산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거기서의 고통스럽지만 귀중한 삶이 있었다. 앞에서 잠간 얘기했지만 그 부분 답사를 통하여 조금 더 써 본다. 수소문 끝에 연결된 전주 이승철 선생과의 만남은 행운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인 93세의 이선생은 완주향토문화연구소장으로 있으면서 완주 문화와 역사에 대한 글을 많이 썼고 완주 전주신문 <대문 앞 너른 마당> 칼럼에 최근 악성樂聖 박연이 고산 귀양지에서 피눈물로 쓴 가훈家訓 17조를 집필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그동안 사료史料에 많은 도움을 준 영동 심천深川의 이규삼李揆三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과도 아는 사이었다. 이승철 선생과 몇 차례 전화 통화를 하다가 6월 11일 만났다. 이선생은 박연의 유배지를 정확히 일 수 없다고 하였고 몇 군데의 가능성이 있는 곳을 답사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선생의 경륜을 볼 수 있는 많은 전적典籍이 꽂혀 있는 서재에서 차를 마시며 답사 브리핑을 하고 출발하였다. 거실에 ‘박연 연고 찾아/고산 여기 오다/영동문사!’라고 달필로 큼직하게 환영 문구까지 써붙여 놓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선생이 살고 있는 전주에서 완주군 고산면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고 여러 골짜기를 가게 되었는데 동행한 이명건 소설가의 승용차로 다 돌아볼 수 있었다. 가면서 이선생은 멀리 바라보이는 마이산馬耳山이라든지 고산의 입지와 주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을 줄곧 하였다. 그러나 박연이 안치되어 있던 유배지가 어디였던지, 바로 여기라고 지적해 주지는 못하였고 두 세 군데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이는 것이었다. 제일 가능성이 높은 장소는 거사리居士里였다. 운제산雲梯山이 바라보이는 만경강萬頃江 상류 물 속에 잠긴 마을이었다. 운제리 돌다리꼴 황꼴 쪽골 등 수몰水沒된 지역이었다. 언제 수몰이 되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너무 황당하고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갈 수는 없었고 멀리 바라만 보았다. 이승철 선생은 여기 저기 전망과 앉음새를 찾아서 자리를 잡는다. 그 지점이 바라보이는 비봉면 대아리 물가 언덕 위였다. 차를 세우고 가방 속에 챙겨가지고 온 제물과 막걸리 그리고 한지에 몇 줄 한시漢詩가 적힌 닥종이를 귀티가 나는 봉황문양의 봉투 속에서 꺼내어 축문祝文처럼 들고 있는 것이었다. 막걸리를 종이컵에 따르고 600년 전-정확히는 560년-박연 선생께 간단한 예를 올리자고 하는 것이었다. 같이 저쪽 운제산 쪽 물 가운데를 바라보며 큰절을 두 번씩 하였다. 그리고 이선생이 말하였다. "이 시는 90여 년 전 우리 조부(이성근李成根)께서 지으신 것인데, 언젠가 영동에서 사백詞伯이 이곳에 올 것이라고 예견을 하신 것이여. 가보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 시편을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옳을까, 아니면 조부님의 예견대로 찾아오신 영동 사백에게 주어 난계 박연선생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마땅할까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오늘 이 자리에서 박연 선생의 연고를 찾아 영동에서 오신 선생께 주기로 결심을 했어.” 그렇게 말하고 그 시를 필자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이제 이 시는 내 손에서 떠났으니 이사백께서 잘 보관해 주시오.” 주는 사람 받는 사람의 손이 떨리었다. 마치 박연 선생 그리고 명여 선생이 바라보고 있는 듯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시는 황음况吟이라 제題하였다. 永同詞伯不遠來 蘭溪流謫何處在 薰風日域白顔紅 雲梯沈川添淚哀 대략 옮겨보면, 영동에서 사백이 머지 않아 올 것이다 / 난계 선생이 귀양 살다 간 곳은 어디쯤 있는가 / 훈훈한 바람 불고 햇빛 비치어 흰 얼굴이 붉어지고 / 운제산 밑 냇물에 잠겨 슬픈 눈물만 더하네. 시 뒤에 임신壬申 유월榴月 명여明汝라고 씌어 있는데 유월은 석류꽃이 피는 6월을 말하는가. 명여는 이선생 조부의 자字이다. 이로 볼 때 이 시는 90년 전 이선생이 4세 때 쓴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때 이선생 조부도 악성 난계 선생이 이곳에서 귀양살다 간 곳이 어디인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죄스러워 운제산 아래 냇가를 바라보며 부끄럽고 죄송스러움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는 뜻인 것 같다. 아니면 여기 이 부근인데 정확한 지점을 몰라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어느 집터라든지 바로 여기가 박연 선생이 살던 곳이었다고 추념追念도 하고 그런 것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이곳이 수몰되지 않고 마을이 존재하고 있을 때 말이다. 올곧은 선비의 마음이 근엄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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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08>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5> 셋째 계우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연루가 되어 투옥 되고 종내에는 교형絞刑에 처해진 것이다. 청천벽력이었다. 단종 1년(1453)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사건이다. 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남지가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한 이후 좌의정은 김종서, 우의정은 정분鄭笨이 맡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문종의 유탁遺託을 받은 삼공三公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두 아들과 함께 죽였다.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한 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다고 거짓 상주하여 강화도로 귀양보냈다. 후에 사사賜死하였다. 수양대군은 정변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고 의정부영사와 이조 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직하였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았으며,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등 집권태세를 굳혔다. 그리고 2년 뒤 강제로 단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하였다. 세조이다. 계우는 이런 사태를 막아보려고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김문기金文起 등의 혈맹血盟에 가감하여 단종 복위復位를 시도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죽음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에게 안겨준 슬픔이었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단종 2년 9월 의금부에서 아뢰었다. "교형에 처한 정분 박계우 등에게 연좌緣坐된 사람을 청컨대 모두 율문律文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법대로 하라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다 열거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봉교奉敎하였다. "부모 아들 출가하지 아니한 딸, 처첩妻妾 조부모 손자 형제, 아직 출가하지 아니한 자매, 아들의 처첩은 원방遠方의 관노비官奴婢로 영속永屬시키고 백부伯父 숙부叔父와 형제의 아들은 원방에 안치安置하되, 나이가 아직 16세가 되지 못한 자는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서 예例에 의하여 시행하라.” 그리고 이어서 봉교, 왕명을 받들었다. "박계우의 아비 박연은 자원에 따라 외방外方에 안치하라.” 원방은 먼 지방, 먼 곳으로의 귀양을 말하고 외방은 서울이 아닌 지역을 말하며 안치란 글자 그대로 편안하게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양 간 죄인의 거주를 제한하던 형벌을 말한다. 박연은 삼조三朝에 걸쳐 공을 세운 것이 참작되어 목숨은 부지하게 되었고 관노가 되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죄를 받고 귀양가기를 자청한 것이었다. 그것도 서울만 벗어나면 되었지만 먼 지방을 자원하였다. 전라도 고산高山 땅, 산 설고 물 선 오지奧地 골짜기였다. 메투리를 한 죽 걸머지고 실신한 아내 송씨를 부축한 채 몇날 며칠을 걸어서 걸어서 남으로 남으로 될 수 있으면 멀리 멀리로 내려 갔던 것이다. 가다가 쓸어지기도 하고 들어눕기도 하였다. 계속 걸어서 땅 끝까지 가려 하였지만 그래서 마음만으로라도 그에게 베풀어준 은혜을 갚으려 하였지만 더는 갈 수가 없어 주저 앉은 곳이 고산 골짜기였다. 물가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영동 지프내보다 훨씬 외지고 험한 곳이었다. 현재 전주全州를 둘러싸고 있는 전북 완주完州군 고산면이다. 귀양 가서 산 마을 이름은 기록된 것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없고 몇 군데 가능성이 있는 장소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바람 속에 물 속에서나 박연의 자취를 찾아야 할 것이다. 세조 1년(1455) 8월 고산에 내려와 거처한 지 1년도 안 되어 아내 송씨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자 박연은 죽은 아내를 고향 영동에 돌아가 장사 지내게 해 달라고 상언하여 허락 받았다. 그러나 안치를 벗어나지 못한 지아비는 장례에 참석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로부터 3년 뒤 8월 박연은 경외종편京外從便, 서울 외에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이 결정되어 방면放免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 영동 고향 땅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그도 숨을 거두었다. 향년 81세(1378. 8. 20.∼1458. 3. 23.) 모진 대로 여한 없이 산 생애였다. 올곧은 한 선비의 쓸쓸한 죽음 뒷 얘기 두 가지만 추가한다. 하나는 고산에서 지낸 3년 동안 그는 가훈 17장을 썼다. 아들 손자가 죽거나 다 뿔뿔히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터에 누구를 위해서였던가. 그리고 또 하나는 여러 왕자들을 비롯한 뭇 한량들의 애욕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다래가 부음을 듣고 멀리 영동을 향해 땅바닥 엎드려 통곡을 하였다는 것이다. "선생님 선생니임 선생니이임!” 몇날 며칠 식음을 끊고 은사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일어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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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07>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4 셋째 아들 계우季雨로 하여 생긴 일이었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림학사를 역임하고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등과 도의道義 충의忠義의 의誼를 다지고 있었던 것인데 늘 꽁생원 아버지에게 ‘저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습니다’하고 입찬 소리를 하였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보다 못한 자식이 되면 쓰느냐고, 불초不肖 얘기만 하였다. 좌우간 얼마 뒤의 일이었다. 한 치 앞을 알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었다. 박연은 매일 매일 자신의 주어진 일에 매달려 있었고 끊임 없이 상언을 하고 그 준비를 하였다. 하루는 영의정 김종서金宗瑞가 아뢰었다. 여악女樂에 대해서였다. 세종께서 연향宴享과 회례會禮에는 처음부터 여악을 사용하지 않고 남악으로 대체시켰었는데 유독 중국 조정의 사신에게만 구습을 따라 개혁하지 못했으니 미편未便하다고 하였다. 임금(문종)도 같은 생각이었다. "비록 여악이 정수精粹하고 남악은 정수하지 못하더라도 정수하지 못한 남악을 사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지금 박연 같은 사람은 또한 얻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그로 하여금 다시 절차를 의논하여 그 음악을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 영의정이 다시 아뢰자 임금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명하였다. "만약 대신 사용할 만한 음악이 있으면 변경하기가 무엇이 어렵겠는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음률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관장管掌할만하다. 세상에는 사광師曠 같운 사람이 없으니 잠정적으로 박연으로 하여금 강구講究하게 하라고.” 사광은 춘추春秋 시대 진晉나라의 악사樂師로 음율을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하다. 문종은 그로부터 한 달 뒤 붕어하여 단종에게 모든 국사國事를 물려주었다. 단종端宗 즉위년(1452) 박연은 행중추원부사行中樞院副使로 배임拜任되었고 악학제조樂學提調 때의 「세종어제악보世宗御製樂譜」를 발간하였다. 이듬해 다시 중추원부사로 그리고 이어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으로 제수除授되었다. 또한 의정부 좌찬성 겸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의 명을 받았다. 그동안 여러 직책과 부서에서 일을 하였지만 내심 가고싶은 자리 오르고 싶은 자리였다. 관직이란 가고 싶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있고 싶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문각은 경연과 장서藏書를 맡아보던 관아로 마음대로 책을 보고 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 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없는 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영의정 좌의정 정승 같은 자리는 바라지도 않았고 책을 마음대로 읽고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리가 편하고 원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 원한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언저리에 또 하나의 일이 있었다. 일이라고 할까 책무責務였다. 단종1년 7월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정인지鄭麟趾가 경연에서 음악을 익히는 일과 악공에게 직을 제수하는 일을 계청하였으니 정인지의 말을 듣고 의정부에서 의논하게 하라고 하였다. 정인지는, 예전에 세종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림에 예禮보다 중한 것이 없으나 악樂의 소용 또한 큰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예는 중히 여기나 악은 소흘히 하여 한탄할 일이다 하시고 곧 명령하여 오례五禮를 찬정撰定하였고 정대업定大業을 제정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악보를 선정하여 무동舞童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고 무동이 늙으면 다시 쓸 수 없다하여 구폐救弊할 계획을 다시 꾀하였다 하면서 말하였다. "세종대왕께서 안가晏駕하시고 문종께서 사위嗣位하여 세종의 뜻을 이루고자 하여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음률을 알기 때문에 도제조都提調로 삼으시고 신臣을 명하여 참정參政케 하시며 하교하시기를……” 뒤의 얘기는 생략하지만 그런 연유로 해서 수양대군이 정인지에게 글을 보내었다. 그 글 중에 있는 말이었다. "어제 판서가 여러 정승들과 이 일을 의논한 것을 들으니 심히 기쁘다. 나와 판서 그리고 박부윤朴府尹 등 두 세 구신舊臣만이 맡아야 할 바는 선왕들의 뜻을 이루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판서는 정인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박부윤은 박연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을 연결하고자 한 것인데, 잘 아는 대로 수양대군은 단종의 왕위를 찬탈簒奪한 세조世祖로 그 이전부터 세력을 구축하고 또 휘두르고 있었다. 그것이 어쨌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박연을 꼭 필요한 사람으로 꼽고 있었고, 이제 마땅히 정대업 보태평의 춤을 속히 익혀야 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에 이어 문종 단종 세조까지 그를 아끼고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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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106>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3 어려 황황자화 남산유대 녹명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들이다. 궁정의 연회와 전례 때의 의식시儀式詩에 풍風 아雅 송頌이 있고 아에는 소아 대아가 있다. 정악正樂의 노래말이다. 앞에서도 몇 번 얘기하였지만. 중추원부사 박연은 또 다른 일로 상언하였다. "태봉胎峯 아래에 백성들의 오두막집을 철거하고 그 전토田土를 폐지하니 지극히 통석痛惜합니다.” 태봉 아래 여사廬舍를 철거하고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참으로 안타깝다고 아뢴 것이다. 풍수지리설에 닭이 울고 개가 짖고 저자가 열리고 마을에 연기가 나면 은연중에 융성하고, 장법葬法을 상고해 보아도 고금의 경험이 모두 사람이 거주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신라의 능묘陵墓는 대개 왕성王城 안에 있었고 중국 사람들의 묘는 전원田園의 두둑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인연人煙이 모인 것도 길吉한 기운이 되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런데 태실胎室이 인연을 꺼려할 것이 없는데 어찌 태봉의 천 길 아래에 있고 평지 땅인 전원田園과 제택第宅을 모두 남김 없이 철수한 뒤에야 길하겠는가. 이것은 심히 이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법규를 세운다면 나라의 전토는 줄어들어 민생의 원망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태평한 날이 오래 되어 백성들이 번성하여 사람이 많아지고 땅이 좁아지면 한 조각의 빈 땅도 없을 것이다. "백성들을 보호하고 먹는 것을 풍족하게 하는 것도 왕정의 급한 바입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구업舊業을 그대로 허락하시고 옛 사람의 태실의 예와 같이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박연의 상언은 바로 풍수학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으며 태봉 근방의 인가와 토전土田의 거리 등 실태를 조사하도록 하였고 태봉의 주혈主穴 산기슭 외에는 일찍이 경작한 토전과 태봉 주변의 사사寺社는 옛날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듣게 된다. 박연은 다시 성주星州 태봉 밑의 민가民家를 철거하지 말도록 상언한다. "백성을 해롭게 함은 중한 일인데 성상聖上의 마음을 힘들게 할까 두려워하여 그대로 있지 못하고 천총天聰을 어지럽게 합니다. 소신小臣의 명예룰 요구하는 계책이 아니고 성상의 덕이 곤궁한 백성에게 미쳐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는 자가 없고자 함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살펴 시행하소서.” 백성을 위한 간곡한 이 청원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박연의 상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아악의 종鍾과 경磬의 소리는 처음으로 만들 때에 오로지 죽률관竹律管에 따라서 교정校正하였습니다. 죽률은 가볍고 가운데가 비어서 추위와 더위에 쉽게 감응하므로 볕이 나고 건조하면 소리가 높고 흐리고 추우면 소리가 낮습니다. 이 이치가 미묘하여 일찍이 미리 헤아리지 못하다가 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사유를 갖추어 동률관銅律管으로 고쳐 만들어 가지고 교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미精微함을 다 하지 못하여 무릇 6년 동안 교정한 소리가 조금 높기도 하고 조금 낮기도 한데 역시 추위와 더위 때문에 변화가 있는 것이니 이 때문에 아악의 소리가 태반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문종 1년(1451) 4월에 올린 상언이었다. 종과 경을 더운 철이 오기 전에 소리를 교정할 것을 청원하는 것이었다. "지난 무오년戊午年 4월에 제향祭享과 조회악朝會樂의 종과 경을 다 모아서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철에 모두 교정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이에 ‘올 가을에 다시 아뢰어 시행하라’고 명하셨는데 지금까지 시일을 미루어 왔으니 참으로 작은 흠결이 아닙니다. 빌건대 금년 더운 철이 오기 전에 모름지기 바로잡아서 길이 후세에 전하도록 하소서.” 무오년이면 1438년, 14년 전이다. 세종 임금의 명이었다. 그것을 이제라도 실현시키고자 그 아들 임금 대에 다시 아뢰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로 예조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였고 예조에서는 가을까지 기다리기를 계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박연으로서는 마지막 상언이었다. 참으로 길고 끈질긴 상언 상소 상주의 행진이었다. 예악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잡박한 개혁의 의지 바로세우고자 하는 집념의 표출이었다. 마당 가운데 넘어진 지게 작대기를 일으켜 세워 놓고자 하는 시골 촌뜨기의 욕망이었다. 모든 일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의욕이 넘치고 너무나도 집요한 그의 그칠 줄 모르던 행진도 멈출 때가 되었다. 그 해 9월 도승지 이계전李季甸이 박연의 병세를 진맥하고 말미〔休暇〕를 주는 일로 인하여 우참찬 허후許詡가 이른 것이 문종실록(9권)에 기록되어 있는데 병 때문이 아니고 일흔 넷 다섯의 늙은 나이 때문도 아니고 아 참, 너무도 엄청난 비운의 소용돌이가 그의 삶의 한 가운데로 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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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105>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2 "가동歌童이 끊겨지지 않는 것은 전날 무동舞童의 남은 풍습에 인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를 폐지한다면 원묘原廟에서 송덕頌德하는 음音이나 공적으로 빈객을 연향宴享하는 악樂이 어찌 되겠습니까. 신의 망견으로는 가동은 폐지할 수 없으며 세종께서 무동은 혁파한 것은 오로지 계속하기 어려운 때문이라고 하였을 뿐이요 예가 아니기 때문에 없애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계속할 수 있어 오래 할 수 있는 대책을 얻게 되면 전의 법규를 수복修復하는 성주의 계술繼述하는 데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언필층 신의 망령된 의견이라고 자신을 낮추어 의견을 말하였다. 박연의 세종 때 이루지 못한 제도를 기어이 세워보겠다는 것이었다. 집념도 대단하지만 의지가 참으로 강하였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경외京外의 양인良人 남편에게 시집가서 낳은 사람을 추쇄推刷하여 입속入屬하게 하면 잇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나, 가동의 임무는 반드시 용모 성음聲音 성품 생리生理로 골라야 하므로 사람 수가 많은 곳에서 무리를 모아놓고 간택揀擇하여야 하는데 무동을 처음 설치한 법에 의하여 가동을 세운다면 잇댈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다. 외방外方 각 고을에 숫자를 책임 지우고 경상도 66 전라도 56 충청도 53 총 175고을에서 3고을에 한 사람의 아이를 정하여 내게 한다면 58인이 될 것이며 경기도 41 황해도 25 강원도 23 총 87고을에서 5고을에 한 사람의 아이를 정하여 내게 한다면 17인이 될 것이니 합하면 75인이 되는데 이로써 액수를 정하고 경외에 장부를 비치하고 윤차輪次로 숫자를 충당하면 될 것이다. 대개 동기童伎를 바꾸어 세우는 기한이 7, 8년 뒤에 있으니 만약 세 고을에서 윤차로 한 사람의 아이를 세운다면 반드시 21, 2년이 걸려서 도로 처음 세운 고을로 돌아가고 다섯 고을에서 윤차로 한 사람의 아이를 세운다면 모름지기 38, 9년이 걸린 뒤에 처음 세운 고을에 돌아갈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바꾸어 대신하게 하는 기간이 매우 넉넉하여 동기의 숫자가 항상 찰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며 양인良人의 남편에게 시집 가서 낳은 사람이나 여기女妓 무녀巫女의 자식을 이에 더하면 가동을 잇댈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종 임금이 창립한 회례연會禮宴 양로연養老宴의 악樂이 자연히 옛날로 복구하여져 오늘날 거듭 새로워지고 길이 후세에 전하여져 일거에 만전萬全할 것이다. 먼 앞날을 내다보는 계책이었다. 대단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이었다. 누가 있어 이렇게 주도면밀한 생각을 실현하는 묘책을 제시할 수 있을까. 예와 악의 분야 악의 분야, 그것도 그 하부 구조라고 할까 악과 관련한 세세한 분야에 이르기까지 소중하게 대처하는 그리고 너무나 전문적이고 자상한 방안이었다. 정말 박연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왕前王이 하지 못한 것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를 한번 시험하여 보소서.” 끈질기고 간곡한 박연의 상언은 계속되었다. 셋째 중국에서는 공공 연회에 여악女樂을 쓰지 않았고 태종 임금은 연향에 여악을 쓰지 말라고 하였고 세종 임금은 여러 대 내려오는 유풍遺風이기 때문에 가볍게 고치는 것을 무겁게 여겼으나 새 황제가 등극하고 마침 성주城主가 즉위하는 초기를 당하여 덕德을 새롭게 하는 바로 그러한 때에 구습舊習을 따라서 여악을 쓴다면 적의適宜한 바가 아니다. 넷째 악부樂部의 악에는 제향악祭享樂이 있고 연향악宴享樂이 있는데 제악祭樂은 봉상시奉常寺 십이궁보十二宮譜와 20여 장章이 있어서 이습肄習한 지가 오래이나 연악宴樂은 세종 임금이 주문공朱文公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중에서 아악시장雅樂詩章 12편의 악보를 얻어 표제表題하여 내었고 보법譜法이 크게 갖추어졌으며 그 중에서 성음聲音이 아름다운 것을 골라 회례연 양로연으로 들이었으며 보법 전체를 주자소鑄字所에 명하여 인출印出하도록 전한 지 지금까지 21년이나 아직도 인행印行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보법을 한 번 잃으면 이미 퍼진 금석金石의 음音도 소종래所從來를 알지 못할 것이니 융안지보隆安之譜가 어려魚麗 제4장에서 나오고 서안지보舒安之譜가 황황자화皇皇者華 제2장에서 나오고 휴안지보休安之譜가 남산유대南山有臺 제3장에 나오고 수보록受寶籙이 녹명鹿鳴 제1장에서 나온 것과 같은 사실을 후세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원컨대 전하께서 거듭 인행하도록 명하고 미루어 두지 말도록 한다면 심히 다행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박연의 상언을 의정부에 내려서 영의정 하연河演 우의정 남지南智 좌찬성 김종서金宗瑞 등이 의논한 결과 모두 그대로 따르고 여악을 사용하는 것은 우선 구습舊習을 따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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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104>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1 세종 32년(1450) 정월 인수부윤 박연을 응교應敎 김예몽金禮蒙 수찬修撰 유성원柳誠源과 함께 불러 내약방內藥房에서 의학에 관한 서적을 7일간 상고하여 보게 하였다. 그것이 세종 때 마지막으로 한 일이었다. 세종 임금에 이어 문종 단종 임금 때에도 박연은 같은 자리에서 하던 일을 전과 같이 하였다. 일흔을 넘은 노구老軀는 말을 잘 듣지 않았지만 마음과 필력筆力은 변함이 없었다. 문종 즉위년(1451) 3월 박연은 풍수학제조 이정녕李正寧 공조판서 정인지鄭麟趾와 함께 상언을 하였다. "대행왕大行王의 교지敎旨에 대부大夫 3월 제후諸侯 5월 천자天子 7월로 하는 법은 진실로 구기拘忌로 하여 변경하여 바꿀 수 없고 그 중간의 자세한 절차는 마땅히 분변分辨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오는 6월은 국장의 정한 기한이니 변경할 수 없습니다. 음양서陰陽書를 상고하여 본다면 5월 6월 7월은 모두 묘룡墓龍이 무덤에 있는 달이니 만약 음양서에 따른다면 지금 마땅히 합장해야 할 것이므로 이달에 능을 허물어야 되고 마땅히 4월에 시작해서는 안 되며 6월 12일에 이르러 장사한다면 꺼리는 데에 어긋나지 않고 5개월의 제도에 합당할 것입니다.” 문종 임금은 이에 대하여, 바로 의정부에 의논하겠다고 하였다. 같은 해 8월 박연은 행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로 임명되었다. 행은 품계가 낮은 직책을 맡을 때 붙인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배수拜受되었다. 10월에는 우승지 정창손鄭昌孫이 아뢰었다. 박연이 상소한, 여러 사단祀壇을 돌로써 축조하고 난원欄園을 설치하고 연향宴享에는 여악女樂을 사용하지 말게 하자는 데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우사단雩祀壇만을 돌로 쌓고 있었고 다른 사단은 다 흙으로 쌓아 만들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여악의 문제는 새 임금에게 다시 창원하는 것이었다. 문종은 사단에 대하여는 고제를 상고하여 아뢰고 여악의 문제에 대하여는 의정부에 내려서 의논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해 11월 박연은 체계를 세워 다시 상언하였다. "삼가 신臣이 봉직한 이래로 어명御命을 받고 아직 이루지 못하였으나 중지할 수 없는 일들과 개수改修하고 경장更張하여야 할 것으로서 일임一任할 수 없는 일들을 다음에 조목별로 갖추어서 우매愚昧한 것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예의를 갖추어서 하나 하나 말하였다. "첫째 향사享祀는 나라의 큰 일이요 단묘壇廟는 신神의 의지하는 바이므로 제왕帝王은 모두 이를 중하게 여겼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도 도읍都邑을 정하던 초기에 여러 사당에 단을 설치하였으나 대개 고제古制와 같지 않았습니다. 세종 때에 이르러 신의 망견妄見으로 유윤兪允을 받을 수가 있었는데 명을 내리던 처음에 먼저 종묘 사직을 바로잡았으나 그 나머지 여러 사당의 단은 그대로 두고 거행하지 못한 지금까지 20여년인데 구폐舊弊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행사를 당할 때마다 헌가軒架와 무일舞佾이 다 베풀어지지 못하고 등가登歌와 준소樽所가 그릇된 곳에 설치되어 예禮를 행하고 악樂을 쓰는 것이 모두 그 의례儀禮를 잃어서 설만褻慢하기 짝이 없습니다.” 상언은 만지장서였다. 단소壇所는 흙이 성기어 무너지기 쉬워 비가 오면 즉시 허물어지고 또 난장欄墻이 없어서 사람이 지킬 수가 없으니 소 양 개 돼지가 함부로 더럽히므로 그것이 온전하지도 못하고 깨끗하지도 못하게 됨이 심하다. 그 중에 소사小祀 7, 8곳 중사中祀 4단壇 등에 대한 얘기를 하고 세종 임금이 그에게 명하여 역대 단의 제도를 고증하게 하였으므로 주周나라로부터 송宋나라에 이르기까지 찾아 아뢰었고 임금은 옛 사람이 돌을 쓴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세종의 명命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둘째 세종은 원묘原廟와 문소전文昭殿의 제악祭樂을 정하여 초헌에는 당악唐樂으로 하고 아헌 종헌에는 향악鄕樂으로 하되 모두 조종祖宗의 공덕을 노래하여 읊은 것을 주로 하게 하였다. 만약 노래하여 읊조리는 소리가 맑지 못하면 비록 사죽絲竹의 악기가 조화되어 울리고 금석金石의 악기가 울리더라도 가물假物의 음音이 족히 귀하게 될 수 없다. 가동歌童이 없을 수 없는 첫째 이유이다. 세종이 이웃나라 객인客人에게 연락宴樂하는 기예技藝를 정하였는데 노래도 있고 춤도 있고 정재呈才도 있으니 이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면 노래가 소리를 이루지 못하고 춤이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또 그 정재도 기예를 이루지 못한다. 이것이 가동이 없을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이다. 정재는 대궐 잔치 때에 쓰던 노래와 춤이었다. 제례 제악 기예에 대한 박연의 식견은 누구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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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흙의 소리 <103>흙의 소리 이 동 희 순명順命 <5> 누가 명한 것이겠는가. 박연의 괴로움은 말할 수가 없고 부끄러움은 하늘을 덮었다. 사실이 그렇고 아니고를 따질 염치도 없었다. 그저 펑펑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나이이고 체면이라는 것을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았다.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 하지 않았던가. 공자의 말씀이다. 일흔 살에는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물론 그가 성현의 발뒤꿈치도 따라갈 수 없을지 모르지만 주야로 수신修身을 하고 마음을 고쳐 먹고 하였는데 조정이나 사회에는 아니 임금의 눈에는 차지 않았던 것 같다. 일흔 두 살이 되었다. 아직 눈은 밝고 귀는 잘 들렸다. 마음도 변치 않았다. 매일 아침 뉘우치며 매일 새로 다짐을 하며 글을 읽고 썼다. 파직되고 다시 인수부윤에 임용되어 하던 일은 멈추지 않았다. 상언할 글을 계속 썼고 예악 분야의 고치고 바로잡아야 할 문제점에 대한 정리를 하고 상언 준비를 하였다. 그의 일은 쉰 때나 일흔 때나 여일하였다. 그런데 큰 나무 그늘과 같은 세종 임금은 그의 옆에 오래 있어주지를 않았다. 임금은 박연에게 명하여 종률鍾律을 정하게 하였다. 박연이 일찍이 옥경玉磬을 올렸는데 임금은 쳐서 소리를 듣고 말하였다. "이칙夷則의 경소리가 약간 높으니, 몇 푼〔分〕을 감하면 조화가 될 것이다.” 박연이 가져다 보니 경쇠공〔磬工〕이 잊어버리고 쪼아서 고르게 하지 아니한 부분이 몇 푼이나 되어 모두 임금의 말과 같았다. 임금은 음률을 깊이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박연은 너무나 감탄하였고 몸둘 바를 몰랐다. 정말 너무 놀라웠고 황송하였다. 임금의 너무도 정확한 음감音感 너무도 정확한 지적에 대하여 참으로 송구스럽긴 하였지만 그렇게 흔쾌한 눈물이 날 수가 없었다. 두렵고 하늘 같은 존재감이 가슴 가득히 안기는 것이었다. 자신은 참으로 행복한 신하로구나 참으로 훌륭한 왕을 모시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너무나 극적인 대목에 대하여 앞에서도 얘기를 하였지만 실록에는 세종31년 12월, 선어仙馭 1년 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한 두 기록을 더 옮겨본다. 불당佛堂의 경찬慶讚 때에 정랑正郎 김수온金守溫이 글을 지어 부처의 공덕과 귀의歸依 존숭尊崇의 지극함을 말하고 여러 대군大君과 판서 민신閔伸 부윤 박연 도승지 이사철李思哲로부터 환시宦侍 공장工匠에 이르기까지 분향하고 부처와 맹세하고 함께 계를 맺고 한 것에 대하여 사헌부에서 금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임금이 말하였다. "계를 맺는 것은 성심이 있으면 귀의하는 것이고 성심이 없으면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대관臺官의 아랑곳할 것이랴.” 윤허하지 아니한 것이다. 대관은 벼슬아치들을 이르는 말이다. 임금은 영의정 하연河演 우의정 황보인皇甫仁 등에게 또 말하였다. "나의 안질은 이미 나았고 말이 잘 나오지 않던 것도 조금 가벼워졌으며 오른쪽 다리 병도 차도가 있음은 경들도 아는 바이지만 근자에는 왼쪽 다리마저 아파져서… 중략… 예전에 괴이하던 일이 내 몸에 이르렀다. 박연 하위지河緯地가 온천에서 목욕하고 바로 차도가 있었지만 경들도 목욕하고서 병을 떠나게 함이 있었는가.” 세종 임금은, 나도 또한 온천에 목욕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임금은 붕어崩御하였다. 그것이 임금과의 마지막 관계였다. 박연이 온천을 갔다가 온 것 그리고 무슨 병인지 차도가 있었던 것, 또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고를 다 알고 있었다. 스므살 정확히는 열 아홉 살 아래인 임금은 박연보다 8년 전에 명을 다한 것이었다. 비보를 듣고 박연은 왕궁을 향하여 계속 큰절을 하였다. 백배 천배 헤아릴 수도 없었다. 마구 눈물이 쏟아졌다. 헤어짐의 슬픔도 슬픔이지만 좀 더 잘 할 것을 좀 더 마음에 차게 할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서러웠다. 다시 고쳐 할 수 없으니 후회가 되고 더욱 슬펐다. 그리고 그립고 아쉬웠다. 옷깃을 여미고 마음을 가다듬어 되돌아볼 때는 슬픔을 가시었다. 공중에 소리 없이 오른 님 하늘나라 무사히 찾아 갔는가 (雲衢若許乘槎客 直欲尋源上碧穹) 난계선생 유고집 제일 앞에 실려 있는 시 「송설당에서(題松雪堂)」의 마지막 구절이다. 참으로 많은 업적을 쌓고 더러 같이 하다 떠나서 좋은 데로 잘 갔기를 빌고 또 빌었다. 송설당은 박연의 당호堂號이고 한양 살던 그의 집 이름이겠는데, 어디에 그 규모를 얘기해 놓은 데가 없지만, 삼남사녀三男四女가 복닥거리고 살던 집 어디에 가령 눈 맞고 있는 소나무를 뜻하는 당호 편액을 걸어놓았던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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