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흙의 소리
이 동 희
'난계유고'부록에 시장諡狀 신도비명神道碑銘 발문跋文이 수록되어 있다. 시장은 유현儒賢 공신功臣 들의 시호諡號를 내릴 때 미리 세 가지를 의정議定하여 임금에게 올리고, 그 중에서 하나를 결정하였는데 그 시망諡望을 상주할 때 생존시의 한 일들을 적은 글발이다.
박연의 시장은 영조英祖 때 문신(이조판서) 홍계희洪啟禧가 찬撰하였다.
여기에 그 시장을 간추려 일대기一代記를 되돌아보는 것으로 박연의 생애 이야기를 맺고자 한다.
1378년 박연은 나면서부터 자질이 뛰어난 데다가 총명하였고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덕기德器가 침착하고 진중하여 어릴 때부터 하는 일이 성인과 다름 없었다. 어려서 아버님을 잃고 어머님 봉양을 극진히 하면서 뜻을 어기는 일이 없이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학문에 전념하여 약관의 나이에 문장을 이루었다.
박연은 개연慨然히 예악에 뜻을 두고 널리 유적遺籍을 구하여 강토講討하면서 종률鍾律에 정진하였다. 어릴 때부터 앉으나 누으나 마음 속으로 계획한 바가 있어 악기를 치는 형용을 하며 휘파람을 불다가 입을 다물고 율려律呂의 성음聲音을 입술로 불기도 하였다. 대개 스스로 그 묘리妙理를 얻은 것이다.
부모상을 당하자 죽을 마시면서 여묘廬墓하여 몸이 여위어 피골이 상접되었다. 3년상을 마친 뒤 또 3년 동안 여묘하니 효감소치孝感所致로 토끼가 따르고 범이 호위하는 이상한 일이 있어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旌閭하라는 명을 내렸다.
140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2년 진사시험 제일로 발탁되어 태종왕은 크게 포상을 하였고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간원헌부춘방諫院憲府春坊을 거쳤고 세종이 왕위에 오르고 예악과 문물을 갖추지 못한 것이 많았으므로 박연은 규칙을 세워 왕에게 건의하였으며 조의朝儀를 일신하도록 주청하였다.
그때 기장이 해주에서 생산되고 경석이 남양에서 생산되었는데 세종은 박연이 음률에 정통한 것을 알고 율악律樂을 맡아보게 하였다. 박연은 기장을 거두어 푼 촌을 적분積分하여 옛 제도에 의거 황종율관을 만들어 불어보니 그 소리가 중국 황종의 음보다 조금 높았다. 이에 다시 기장의 입자 형태를 밀랍을 녹여 조금 크게 만들어 적분하여 율관을 만들었다. 한 톨이 푼이 되고 열 톨을 쌓아 촌을 삼는 법으로서 9촌으로 황종의 길이를 삼아 삼분손익하여 12율을 산출하였다.
이듬해에 편경을 새로 완성하였는데 중국의 성음을 따랐으나 유빈이 도리어 임종보다 높고 이칙은 반대로 남려와 같았으며 응종 또한 무역보다 낮았다. 그 까닭을 알고 중국의 제도를 약간 변통한 뒤에 율에 맞추었다. 왕이 중국에서 준 편경과 박연이 새로 만든 율관을 맞춰보고 가상히 여겨 마지 않았다. 중국의 편경이 음률에 맞지 않고 새로 만든 편경의 성음이 맑고 아름다웠다.
"귀국의 악률이 바른 소리를 얻었으니 아마도 이인異人이 나와서 악률을 주관하지 않습니까.”
중국사신이 왔다가 음률을 듣고 찬탄하여 말하기도 하였다.
박연의 명성은 높았고 왕의 총애는 더욱 두터워 이조 병조 두 판서를 역임하였고 사법관으로 있을 때는 재판을 공명하게 하였다.
문종 때는 중추원사 보문각제학을 역임하였고 또 예문관 대제학을 제수받아 한 때의 사명詞命이 박연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세조가 왕위를 이어받자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아들이 육신六臣과 함께 화를 당하였고 박연은 삼조三朝의 기구耆舊로 연좌連坐를 면하였다. 1458년 81세로 생을 마쳐 영동 고당高塘, 부인(정경부인 여산송씨)의 묘 뒤에 있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맹우孟愚는 현령을 역임하였고 중우仲愚는 군수를 지냈으며 계우季愚는 육신의 화란禍亂을 당하였다. 1녀는 목사牧使 조주趙注의 아내가 되고 2녀는 사직司直 권치경權致敬의 아내가 되었으며 3녀는 감찰監察 방순손房順孫의 아내이고 4녀는 선비 최자청崔自淸의 아내가 되었다.
박연이 살던 곳에 난초가 많이 생장하여 난계선생이라 일컫는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선생의 정통한 학식과 정직한 도술道術은 우리의 사표가 된다고 하였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은 도덕은 해동海東에 높았고 명성은 중국에까지 현양顯揚되었다고 하였으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효성은 하늘에 닫고 덕행은 세상에 뛰어났으며 경륜經綸을 세워 국가를 도와 흥성하게 다스렸다고 하였다.
시장을 마무리하면서 찬자는, 아들이 6신과 함께 돌아갔으니 큰 소나무 밑에 맑은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與六臣同歸 則長松之下 果有淸風).
송설당松雪堂이라는당호堂號를 쓰기도 하였는데 박연의 생애는 한 마디로 큰 소나무 아래 불고 있는 맑은 바람소리 같은 것이었다. 흙의 소리였다. 아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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