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연재소설] 흙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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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09>

  • 특집부
  • 등록 2022.10.0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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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소리

 

이 동 희

못다한 이야기 <1>

2020917일 시작하여 이제 마무리를 하면서까지 2년이 넘는 동안 난계 박연 이야기에 매달려 썼다. 세종실록을 비롯한 몇 왕조실록 난계유고 등을 많이 인용하였고 박연에 대한 다른 두 세 소설을 참고를 하였는데 말년에 대한 사항은 새로 제시하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영동 박연이 태어나고 자란 길을 국악로라고 명명命名하고 있고 그곳에 난계국악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거기에 마지막 생애의 부분이 추가되고 고쳐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박연은 생을 마감하기 직전 고산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거기서의 고통스럽지만 귀중한 삶이 있었다. 앞에서 잠간 얘기했지만 그 부분 답사를 통하여 조금 더 써 본다.

수소문 끝에 연결된 전주 이승철 선생과의 만남은 행운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인 93세의 이선생은 완주향토문화연구소장으로 있으면서 완주 문화와 역사에 대한 글을 많이 썼고 완주 전주신문 <대문 앞 너른 마당> 칼럼에 최근 악성樂聖 박연이 고산 귀양지에서 피눈물로 쓴 가훈家訓 17조를 집필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그동안 사료史料에 많은 도움을 준 영동 심천深川의 이규삼李揆三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과도 아는 사이었다.

이승철 선생과 몇 차례 전화 통화를 하다가 611일 만났다. 이선생은 박연의 유배지를 정확히 일 수 없다고 하였고 몇 군데의 가능성이 있는 곳을 답사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선생의 경륜을 볼 수 있는 많은 전적典籍이 꽂혀 있는 서재에서 차를 마시며 답사 브리핑을 하고 출발하였다. 거실에 박연 연고 찾아/고산 여기 오다/영동문사!’라고 달필로 큼직하게 환영 문구까지 써붙여 놓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선생이 살고 있는 전주에서 완주군 고산면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고 여러 골짜기를 가게 되었는데 동행한 이명건 소설가의 승용차로 다 돌아볼 수 있었다. 가면서 이선생은 멀리 바라보이는 마이산馬耳山이라든지 고산의 입지와 주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을 줄곧 하였다.


그러나 박연이 안치되어 있던 유배지가 어디였던지, 바로 여기라고 지적해 주지는 못하였고 두 세 군데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이는 것이었다.

제일 가능성이 높은 장소는 거사리居士里였다. 운제산雲梯山이 바라보이는 만경강萬頃江 상류 물 속에 잠긴 마을이었다. 운제리 돌다리꼴 황꼴 쪽골 등 수몰水沒된 지역이었다. 언제 수몰이 되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너무 황당하고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갈 수는 없었고 멀리 바라만 보았다.

이승철 선생은 여기 저기 전망과 앉음새를 찾아서 자리를 잡는다. 그 지점이 바라보이는 비봉면 대아리 물가 언덕 위였다. 차를 세우고 가방 속에 챙겨가지고 온 제물과 막걸리 그리고 한지에 몇 줄 한시漢詩가 적힌 닥종이를 귀티가 나는 봉황문양의 봉투 속에서 꺼내어 축문祝文처럼 들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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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를 종이컵에 따르고 600년 전-정확히는 560-박연 선생께 간단한 예를 올리자고 하는 것이었다. 같이 저쪽 운제산 쪽 물 가운데를 바라보며 큰절을 두 번씩 하였다. 그리고 이선생이 말하였다.

"이 시는 90여 년 전 우리 조부(이성근李成根)께서 지으신 것인데, 언젠가 영동에서 사백詞伯이 이곳에 올 것이라고 예견을 하신 것이여. 가보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 시편을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옳을까, 아니면 조부님의 예견대로 찾아오신 영동 사백에게 주어 난계 박연선생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마땅할까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오늘 이 자리에서 박연 선생의 연고를 찾아 영동에서 오신 선생께 주기로 결심을 했어.”

그렇게 말하고 그 시를 필자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이제 이 시는 내 손에서 떠났으니 이사백께서 잘 보관해 주시오.”

주는 사람 받는 사람의 손이 떨리었다. 마치 박연 선생 그리고 명여 선생이 바라보고 있는 듯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시는 황음况吟이라 제하였다.

永同詞伯不遠來

蘭溪流謫何處在

薰風日域白顔紅

雲梯沈川添淚哀

대략 옮겨보면, 영동에서 사백이 머지 않아 올 것이다 / 난계 선생이 귀양 살다 간 곳은 어디쯤 있는가 / 훈훈한 바람 불고 햇빛 비치어 흰 얼굴이 붉어지고 / 운제산 밑 냇물에 잠겨 슬픈 눈물만 더하네.

시 뒤에 임신壬申 유월榴月 명여明汝라고 씌어 있는데 유월은 석류꽃이 피는 6월을 말하는가. 명여는 이선생 조부의 이다.

이로 볼 때 이 시는 90년 전 이선생이 4세 때 쓴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때 이선생 조부도 악성 난계 선생이 이곳에서 귀양살다 간 곳이 어디인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죄스러워 운제산 아래 냇가를 바라보며 부끄럽고 죄송스러움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는 뜻인 것 같다. 아니면 여기 이 부근인데 정확한 지점을 몰라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어느 집터라든지 바로 여기가 박연 선생이 살던 곳이었다고 추념追念도 하고 그런 것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이곳이 수몰되지 않고 마을이 존재하고 있을 때 말이다. 올곧은 선비의 마음이 근엄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