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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광대, 문진수의 연희창작 ‘뫼비우스’정형호(전 한국민속학회 회장) 공감과 소통이 멀어지는 이 시대에 전통 연희를 바탕으로 어떻게 새롭게 창작해낼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 아시아1인극제-거창2023에서 문진수가 보여준 ‘뫼비우스’는 하나의 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당시 거창문화회관에서 처음 선을 보인 ‘뫼비우스’라는 창작 연희극 '일명 흑사 위에 백사' 를 선보이며, 이 시대의 진정한 광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전통 사회에서 광대인 우인(優人)들은 ‘우희(優戱), 일명 ’소학지희(笑謔之戱)’를 통해 양반관료층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소극을 보여주었다. 1505년 연산군 시절에 우인 공길(孔吉)이 늙은 선비놀이(老儒戲)에서 논어를 인용하면서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君君臣臣父父子子 君不君臣不臣 雖有粟 吾得而食諸)라고 풍자한다. 왕은 그 말이 불경스럽다고 하여 공길이를 곤장쳐서 먼 곳으로 유배를 보냈다. 임금이 임금다워야 한다는 말이 거슬렸을 것이다. 이미 고려 말기 공민왕 시기에 광대들은 권신 염흥방과 시종들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자 광대놀이로 이를 비판한 일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때에 어느 광대는 어전에서 정평부사 구세장의 안장 구입 관련 비리를 폭로했으며, 광대 귀석(貴石)은 궁중에서 고관들의 매관매직을 풍자한 일도 있었다. 또한 광대들이며 대장장이인 고룡(高龍)은 술취한 장님 흉내를 잘 냈다고 한다. 따라서 광대의 ‘우희’는 부패한 양반관리를 비판하거나, 현실의 비정상적 인물을 우스광스럽게 흉내 내는 것 등을 두루 포함한다. 고려와 조선을 관통하는 광대들의 비판 정신은 20세기 후반의 군사독재 시대에 마당극이나 창작 판소리를 통한 문화운동에서 다양하게 선보였다. 문진수의 ‘뫼비우스’를 보면서, 김지하의 창작판소리 ‘똥바다’와 ‘오적’, 또한 1세대 마당극 출신들의 치열한 시대 비판정신을 떠올리게 된다. 또한 21세기에 새롭게 깨어난 통렬한 말뚝이의 모습도 연상시킨다. 문진수는 21세기에 이런 시대비판적 광대의 모습을 이어받고 있다. 그는 남사당놀이 이수자 출신으로 춤, 농악, 소리, 재담 등을 두루 익힌 뛰어난 기량을 지닌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가무악의 가량을 단순히 익히는 데에 그치지 않고, 광대의 시대정신을 고민하고 이를 예술혼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뫼비우스’의 작품 내용은 단순하다. 부제인 ‘흑사 위에 백사’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권력을 휘두르는 흑사의 횡포에 맞선 백사가 등장해서 응징한다는 단순한 설정이지만, 그는 다양한 연행요소와 뛰어난 춤과 재담으로 판을 이끌어 가고 있다. 30여분간 진행된 작품에서 관객들은 때로는 그의 멋진 춤에 감탄을 하고, 재담의 시대비판에 추임새로 적극 호응하면서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몰입했다. 근래에 이렇게 관객과 소통하면서 뜨거운 호응을 받은 작품이 있었을까? 그가 말하는 흑사는 권력만을 쫓는 인물로서, 남에게 엄격하고 스스로 관대하며, 힘없는 자에게 온갖 횡포를 부리는 특권층이다. 그는 검은색 법복에 검은색 상모 모자를 쓰고 등장한다. 처음에 흑사가 되어 긴 상모의 한쪽만을 쥐고 흔드는데 마치 검을 휘두르는 권력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무대 가운데에 앉아서 상모를 천천히 돌리면서 관객을 향해 거만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는 나중에 백사로 변신해서 이번에는 정의의 사도로서 흑사를 응징한 다음에 다시 긴 상모를 돌린다. 이때 돌리는 상모의 큰 원은 포용과 화합을 상징한다. 그는 다양한 연희요소를 바탕으로 판에 변화를 주고 시대풍자의 다양한 장치로 이용한다. 상모 줄은 짧거나 길게 사용하면서, 어떤 때는 사람을 해치는 검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거대한 원을 그리며 사람들을 감싸기도 한다. 심지어 줄넘기 줄로 사용하는 재치를 부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갑자기 뱀을 파는 약장사로 변신하기도 한다. 뱀이 지닌 정력을 통해 온갖 ‘사’자가 들어가는 목사, 박사, 변호사 판사, 검사 등의 비행과 무기력을 폭로하면서, 사회 특권층을 비판한다. 그는 다양한 고품격의 춤을 선보이며, 보는 이들의 넋을 빼앗는다. 탈춤 춤사위를 응용한 덧뵈기춤, 신칼대신무를 바탕으로 한 넋풀이춤, 상모를 이용한 다양한 상모춤 등의 높은 예술적 완성도의 춤을 선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냥 그의 다양한 춤만을 보아도 손색없는 한 마당의 공연이 된다. 중간에 '아시아1인극제-거창2023 '주제가인 ‘난리버꾸통’에 맞추어 춤을 추고, 익살스런 현대춤이나 어린이의 춤동작까지 선보이고 있다. 그는 무거운 주제를 다양한 연행요소를 섞어 가볍게 풀어가는 재주를 지녔다. 시대풍자의 무거움을 뱀장사로 변신해서 즐거움을 주고, 현대의 "따르릉 전화왔어요”라는 메시지로 세상이 바뀌었음을 알리기도 한다. 이렇게 관객의 한 사람으로 웃거나 분노하다가, 뒤에 진한 여운을 남긴다. 임진택이 김지하의 '똥바다'나 '오적'을 창과 사설 중심의 창작판소리로 풀어갔다면, 문진수는 ‘뫼비우스’에서 춤, 재담, 소리, 몸짓의 전통적 연행요소를 혼합해 새롭게 풀어간다. 그는 1인극의 새로운 도전과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혼자서 사물 반주에 맞추어 풀어가는데, 복색은 기본적으로 법복에, 흑사는 벙거지가 검은색, 백사는 흰색으로 구분하고, 상모를 소도구로 사용할 뿐이다. 근래에 전통 연희의 현대화에 여러 방식의 시도가 이루어진다. 기존에 ‘더광대’, ‘천하제일탈공작소’ 등은 전통연희를 바탕으로 시대 비판의식을 담아내거나, 아니면 무의미한 일상의 인물을 해학적으로 표현한다. 근래에는 외국 고전작품을 한국화하는 작업도 하며 여러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문진수는 시종일관 전통 연행요소를 바탕으로 통렬한 시대비판 의식을 담아내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전통연희의 현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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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소리 '꽹과리'와 풍물굿 악기 특성(조춘영)풍물굿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지방의 마을과, 도시, 학교 등지에서 연행되고 살아있는 전통문화이다. 이는 우리 민족이 생긴 이후 줄기차게 전승하고 발전시켜 온 공동체 민중예술이다. 필자는 이미 풍물굿의 연원을 단군신화의 환웅이야기로부터 보아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 내용을 간략히 보면, 하늘에서 천부삼인(天府三印)을 받은 신인(神人) 환웅(상쇠)은 풍백(징), 운사(북), 우사(장구)와 함께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목적으로 이 지상세계로 내려온다. 그리고 신단수(당산나무)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니 그곳을 바로 신시(마당)라 한다. 이 환웅 이야기가 현 풍물굿의 신화적, 사상적 토대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 전승되는 마을풍물굿에서의 악기, 굿물, 당산나무 등의 신화적 상징은 이를 바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밝혔다. 풍물굿의 꽹과리는 지역과 용도에 따라 쇠, 매구, 깽매기, 깽쇠, 광쇠, 꽝쇠, 깡쇠, 소금, 동고, 쟁, 갱정 따위로 불린다. 정악에서는 소금(小金), 불교음악에서는 광쇠, 무속음악에서는 설쇠 등으로 불리운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음악의 목적, 바탕이 되는 신화와 사상 또한 각각 다르다. 본고에서는 꽹과리라는 악기를 이해하기 위하여 풍물굿 악기의 일반적 특성을 정리하며, 꽹과리의 연주자이자 풍물굿의 리더인 상쇠를 중심으로 꽹과리를 해석해보고자 한다. 그래서 결국, 풍물굿은 꽹과리라는 ‘빛’을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가 하나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총체적 행위임을 밝히고자 한다. 풍물굿 악기의 일반적 특징 풍물굿은 꽹과리, 징, 장구, 북의 네가지 타악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들 악기는 매구, 굿물, 풍물, 금고 등으로 각 지방에서 부르고 있다. 이는 악기가 음악연주라는 측면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악기가 가지는 기능과 목적이 다르다. 위는 제의적, 음악적, 무용적, 놀이적, 군사적인 악기의 기능을 설명해주는 명칭들이다. 그렇다면 풍물굿 악기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점은 풍물굿 악기가 ‘마을 공동체의 신물(神物)’이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당집이거나 마을공동창고에 모셔놓다가, 풍물굿을 울릴 때에만 치배들이 악기를 매고 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풍물굿 악기의 일반적인 특징에는 어떠한 점들이 있는가? 마을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고, 함께 신을 모시고 놀아보는 풍물굿 악기의 특징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무율(無律)타악기이다 종족음악학에서 악기분류는 새롭게 4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 중 풍물굿 악기는 몸통울림악기(꽹과리와 징, 金)와 막울림악기(장고와 북, 鼓)로 구성된다. 이들 모두는 고정된 음계를 가지지 않는 ‘무율타악기’이다. 타악기의 장단(리듬)만으로 음악적 완결성을 만들어낸다. 풍물굿은 원천적으로 장단리듬의 반복성이 강하다. 같은 리듬의 반복은 감성과 흥분을 고조시켜 몰아(沒我)와 최면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신비체험을 하게 하는 영적행위(靈的行爲)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풍물굿의 타악 연주는 단순한 리듬을 반복함으로써 공동체를 다시 확인하고 신과 하나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로써 풍물굿의 공동체성, 주술성, 자연성을 볼 수 있다. 꽹과리는 나머지 세 악기를 리드하는 악기이다. 꽹과리의 전두리는 징에 비해 안쪽으로 굽어 있고 짧다. 그래서 소리가 빨리 퍼져나가고, 음고가 높고 엄청나게 커서 강렬하고 충동인 느낌을 준다. 원-하나를 지향한다 풍물굿 악기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원형임을 볼 수 있다. 꽹과리와 징은 정면이 원형이고, 장구와 북도 양편이 모두 원이다. 각 악기채의 끝도 기본적으로 원형이다. 풍물굿 악기가 원형이라는 점은 이 세계를 둥근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자 하는 가치관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둥근 알이라는 형태는 우리 민족의 종족사고와 미의식의 기반이다. 원은 만물생성의 원리와 완전성을 의미하며, 원만무결(圓滿無缺)과 원융무애(圓融無碍)와 통한다. 원은 달과 해 등 우주를 상징하기도 하고 정신세계를 상징하기도 하다. 가장 단순한 출발점인 동시에 종착점이 되는 영원성을 상징한다. 정병호가 지적하듯 우리민족은 원형을 지향하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공통된 의식이다. 원은 순환하는 시간관과 연관되고 음양오행을 형상화하는 우주론적 도형이 되기도 한다. 원의 세계는 바로 일원론의 세계를 말한다. 우주는 하나이고, 만물은 모두 평등한 공동체라는 의식이다. 악기의 구조와 소리는 둘 혹은 셋으로 분화된다 풍물굿 악기는 채 없이 자체만으로 보았을 때 음양의 구조를 가진다. 즉 하나의 악기 안에 서로 다른 성질의 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상대적으로 볼 때 음양의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악기의 구조는 둘 혹은 셋으로 분화된다. 실제 풍물을 칠 때에는 왼손과 오른손, 안과 밖, 왼쪽과 오른쪽으로 구분이 되기도 한다. 징과 꽹과리는 엎어서 보면 평평한 바닥을 가진 그릇모양이다. 드러난 부분이 있고 숨겨진 부분이 있다. 평평한 면을 치게 되면 그 소리는 반대편으로 퍼져 나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종과 유사한 구조로서, 그 내부에서의 소리는 서로 간섭을 하여 새로운 혼돈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구조이다. 특히 꽹과리의 앞면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양성(陽性), 뒷면은 어둠이라는 음성(陰性)의 상징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장구와 북은 좌우의 편을 구분하여 사용한다. 장구는 왼손에 궁채와 오른손에 열채를 쥐고 각각 음양의 소리를 낸다. 이는 소리의 음양성(陰陽聲)을 확실하게 구별해 내기 위한 노력이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죽뿐만 아니라 장구통 역시나 신경을 썼다. 여자소리(저음)가 나는 궁편쪽은 크게 만들고 남자소리(고음)가 나는 채편 쪽은 작게 만드는 것이 그렇다. 채에 있어서도 남자소리를 내야 하는 채편 쪽은 강하고 높은 소리를 위해 막대기(채)를 쓰고, 궁편쪽은 같은 가죽성질인 사람 손바닥을 그대로 쓰거나 채를 쓰더라도 부드러운 소리를 위해 궁굴채를 쓴다. 악기, 몸, 채의 삼즉일 구조를 가진다 풍물굿의 중요한 특징이라 한다면 악기를 메고, 서서 춤을 추거나 걸으며 진풀이를 엮어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악기를 연주한다는 자체가 춤도 되고, 음악도 된다. 악기를 걸개에 걸어서 치거나, 엎어놓고 치거나, 앉아서 치는 것과는 그 논리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악기는 소리를 만들어 내는 도구이자 대상으로 인식된다. 악기를 연주한다고 할 때에 연주자(주체)는 악기를 대상(객체)으로 인식한다. 대부분의 악기와 연주자의 관계는 이러한 틀과 인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풍물굿에 있어서 악기는 대상이 아니고 내 몸의 일부가 된다. 몸과 악기를 이어주고 메타화시켜주는 ‘채’가 있기 때문이다. 몸(주체)은 채를 대상으로 하고, 채는 악기를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악기를 몸통에 메거나 손에 들게 되면서 채의 방향은 악기와 내 몸을 향하게 된다. 악기 ⇙ ⇖ 몸 ⇒ 채 결국 내 몸 자체가 악기와 일체가 되면서 채는 내 몸을 대상화하게 되는 순환관계가 형성된다. 그런데 채는 다름 아닌 내 몸(손)이 주체가 되어 다루는 것이니 또한 주체가 된다. 몸과 채는 각각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가 되는 역설이 발생하게 된다. 이 때 단순히 채를 이용한다고 해서 이러한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채를 이용하는 실로폰 연주의 예를 생각해보라. 연주자는 놓여져 있는 악기를 채를 이용해 두드릴 뿐 위와 같은 인식이 있을 수 없다. 이에 비해 풍물굿의 ‘악기’와 ‘채’와 ‘몸’의 관계가 순환하여 하나되는(삼즉일-삼신) 구조는 악기를 메고 걸어다니며 춤을 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우리 민족의 독특한 ‘장단’이라는 개념이 이러한 몸의 공간적인 연출과 합치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꽹과리춤, 북춤, 설장구, 소고춤 등에 있어서 악기는 내 몸과 하나되어 춤을 만들어 낸다. 꽹과리,하나되는 빛의 소리 꽹과리를 치는 상쇠(쇠잽이)는 해, 광명, 빛을 상징하는 굿물이 몇가지 있다. 우선 꽹과리가 그렇다. 전라도 지역 일부 풍물굿에서는 ‘일광놀이’라 하여 상쇠가 꽹과리를 잃고, 그것을 찾는 과정을 극화하는 대목이 있다. 이는 풍물굿패와 마을공동체가 꽹과리를 빛과 생명으로 인식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를 잃은 상태는 죽음, 무질서, 어두움의 세계이고 다시 찾은 상태는 생명과 질서, 광명의 세계인 것이다. 또한 명칭을 통해서도 꽹과리를 빛으로 이해하는 예를 볼 수 있다. 광쇠, 꽝쇠, 깽쇠, 꽹과리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광은 빛 광(光)자를 나타내며, 깽, 꽝은 천둥, 번개의 의성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상쇠의 등 뒤에 붙이는 일광월광, 머리에 쓰는 전립의 하얀 부포가 해, 광명, 흰빛의 상징이다. 영남과 호남 일부 지역에서는 ‘상쇠’ 등 뒤에 해와 달을 상징하는 두 개의 쇠붙이를 단다. 지방마다 ‘공모’, ‘홍박씨’, ‘일광월광’ 등으로 부르는데, 반드시 상쇠만 단다고 한다. 정병호는 이를 무굿에서의 명도(명도)와 연관지어 설명을 하고 있다. 이에 관한 비교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상쇠가 빛을 등에 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쇠잽이가 머리에 쓰는 전립의 부포가 이와 같은 상징을 가진다. 김헌선은 『풍물굿에서 사물놀이까지』에서 사물악기를 천둥번개 소리, 바람소리, 구름 소리, 빗소리로 비유하였다. 필자는 그 신화적 근거를 환웅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이미 밝힌바 있다. 태양숭배(토템)부족인 ‘한’(한. Han)부족의 수장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주도하여......태양숭배 토템부족은 환인. 환웅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한’(한. Huan. Han)부족이다. 이들은 ‘한울님’의 아들. 자손이라고 생각하며, 태양(해). 밝음(광명), 햇빛, 새빛(東光)을 숭배한다. 그들은 ‘태양’, ‘하늘’, ‘하느님’과 자기들을 연결시켜 주는 동물매체를 ‘새’(鳥)라고 생각하여 ‘솟대문화’, ‘소도문화(蘇塗文化)’를 공통으로 형성하여 갖고 있었다. 고조선문명권의 원민족들은 ‘태양’과 ‘새’를 결합하여 태양신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할 때는 ‘삼족오(三足烏)’, ‘세발 까마귀’로 상징화하여 그리고 표현하였다. 신용하는 위와 같이 환웅족이 태양숭배와 함께 삼족오(새)숭배를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전통이 풍물굿 상쇠의 꽹과리와 부포로 이어진다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신화적 세계를 보여주는 유물이 있다. 일찍이 김재원은 『단군신화의 신연구』(1947년)에서 중국 산동성 가상현 무씨사 화상석각을 단군신화와 대비시켜 8.9할이 복합된다고 밝힌바 있다. 이를 바탕으로 안동준은 무씨사 화상석 그림을 환웅이야기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환웅을 뇌공, 뇌신으로 보고 있다. 이는 풍물굿 악기의 상징이 신화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보면 고구려의 벽화와 중국 한대의 고분벽화는 유사한 신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중국 대륙에서도 광범위하게 보이는 해, 일신의 상징으로 삼족오가 보인다. 토끼, 두꺼비, 삼족오, 구미호가 각각 음양적 존재이며, 음양을 나타내는 우주적 차원의 상징체인 해와 달의 구성요소라는 점에 의해 보다 뚜렷이 뒷받침된다. 달의 구성요소이자 상징인 토끼와 두꺼비, 해의 구성요소이자 상징인 삼족오와 구미호...... 삼족오는 물론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도 역시 일신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해모수의 오우관(烏羽冠), 신라 화랑의 조우관(鳥羽冠), 조선의 상모(象毛)와 공작우(孔雀羽) 등 새깃털 장식의 전통은 바로 삼족오, 새 신앙으로부터 시작하여 풍물굿의 부포에까지 이른다고 볼 수 있다. 풍물굿은 제의이면서 동시에 놀이이다. 그래서 풍물굿놀이라고도 한다. 굿은 그 민족 전통의 신화를 재현하여 우주․ 자연․ 신과 인간이 하나임을 확인해가는 총체적 행위이다. 여기에는 분명 그 민족공동체의 고유한 세계관과 사유체계가 뿌리를 이루고 있다. 악기는 소리를 내기 위하여 만들어진 도구이지만, 또한 그 악기를 만드는 인간의 창조적인 산물이자 그 문화적 특징을 보유한다. 그러므로 음악소리를 만드는 기능적인 요소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인간과 문화사회의 전반적인 요소와 연결되어 악기가 연구된다. 위에서 보이듯이 꽹과리라는 악기는 소리와 음악의 영역을 넘어서 이해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우리 민족의 인식이 그 안에 담겨져 있다. 풍물굿의 꽹과리는 하나의 악기(부분)이면서도 풍물굿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꽹과리 자체가 해와 빛이 되어 밝고 신명난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것이 바로 풍물굿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우리 안의 신을 밝히는 ‘신명(神明)’이다. 그 가운데에 꽹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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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8일 김진옥, 정명자, 박경랑, 3인3색 명무전길라잡이 강신구 / 전통예술평론가 박경랑선생은 어디서든 준비된 곳이라면 멋을 알고 휘어 감는 관능미를 지닌 무용가라 할 수 있다 어릴 적 4세부터 경남 고성에서 외증조 김창후로부터 대를 이어 영남춤의 맥을 올곧이 이어 가고 있다. 부산, 진주시절은 춤 선생 김수악, 김진홍, 동래 권번(捲番)의 마지막 기녀인 강옥남으로 부터 엄격한 규율과 강한 성품으로 무용 수업을 받아 오늘날 든든한 교방청춤 전승자로 지켜 온 분이다. 교방청춤, 교방소반춤, 교방승화무(敎坊僧花舞), 교방검화무(敎坊劍花舞), 교방건무(敎坊巾舞) 등, 문화재 지정종목에 가려 묻히고 사라져 가는 선현들이 추어 온 교방가무연 춤가락이 발현되지 못한 점을 못내 아쉬워한다. 박경랑은 50여년을 전통춤과 함께 살아 온 2세대 중심 춤꾼으로 깊숙이 자리매김한 본능적인 끼가 확연히 자리 잡힌 풀뿌리 춤꾼이다. 명인의 등용문인 전주대사습 무용부 장원, 서울전통공연예술대회 대통령상, 김수악류 진주교방굿거리 1기 이수자로서 영남 교방청춤하면 바로 박경랑을 전무후무한 독보적으로 떠올릴 만하다. 반듯한 춤 태와 완성도 높은 내공으로 무대 적응을 철저하게 표현해 냄으로서 자신만의 작품을 극대화 시키는 곰삭은 멋과 한을 표현해 낸다. 이로 하여 원형을 재현하는 신명난 춤 세계를 구현 하므로서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춤꾼이다. 문둥춤을 보노라면 공옥진여사의 짠한 마음은 누구나 같은 마음 일찐데.... 김진옥선생은 열정과 진취적인 무용지도자로 단아한 전통미를 갖춘 춤꾼이다. 일찍이 스페인 무용의 1세대인 주리선생으로부터 인체의 기초를 다진 다부진 몸매로 우리 춤 몰두를 위해 마산 출신 김해랑, 최현, 정민에 이은 2세대 명맥을 이어 온 성실하고 폭 넓은 활발한 춤꾼이다. 우리 춤이 시대에 가려진 7,80년대, 이매방과 정민이 우정이 두터운 사이였던 시기, 무용가 양정화는 두 분의 선생을 가까이 모시면서 일본 오사카를 오가며 묻혀져 가는 전통의 맥을 계승하고자 힘든 시기를 겪은 무용계에 깊이 점철된 무용가 분이셨다. 김진옥은 1.5세대인 양정화, 정재만에 이어,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신념과 열정으로 정민류의 교방무, 교방타고무, 교방검무 등의 기법을 오롯이 이어 가는 역정에 사로잡힌 춤꾼이다. 김진옥은 정민류교방춤보존회을 발족, 전승에 혼신을 바쳐 오늘에 이르러 수많은 제자 양성과 다양한 수상 경험을 이루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갖춘 괄목할 현실 전통무용가로 자리를 잡았다. 박병천의 진도북춤, 벽사 춤에 대한 열의와 방송매체와 여러 대학에서 교육과목으로 몫을 다지면서 전국 규모의 전수활동으로 우리 춤 본연의 역할을 담담히 수행하고 있다. 멋과 흥을 품어 내며 풍류색색의 가락은 휘엉청 감아내는 치마폭에 여실히 자아냄을 찾아 볼 뜻있는 춤판이다. 방방곡곡 춤꾼이어라... 정명자선생은 5세부터 쉼 없이 춤 공력에 전념으로 살아 온 한마디로 팔방 춤색이 역력한 매력 있고 다부진 춤꾼이다. 1983년 정명숙 명무 문하에 입문, 1985년 전사습 명인, 황재기 명인, 김숙자 명무에 이어, 1980년대 후반, 차례로 이동안, 박병천, 김진걸, 이매방, 김수악, 권명화 명무에게 전통춤 사사에 빠짐없이 수학한 이수자로 검증된 무용가이다. 제1회 발표회가 1986년 바탕골소극장에서의 인연과 문예회관(현, 아르코)에서 제2회 개인공연, 42회에 걸친 제작발표회, 전통을 바탕으로 한, 익히고 삭힌 민족의 혼을 담은 대형 무용극, 뮤지컬"이육사, 이순신의 바다, 의병장 곽재우, 문무대왕, 선덕여왕, 북소리, 농자천하지대본, 화랑의 혼”, 여성국극 "혜경궁 홍씨, 햇님 달님, 황진이” 창작화 작업에 초청되는 등,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위대한 업적을 다룬 시대적 표상 작품을 올린 바 있다. 미래 지향적인 춤꾼 정명자선생은 새롭고도 역량 있는 작업으로 오는 12월 대한민국 국제뮤지컬페스티발 초청작으로 ‘김유신장군’에 몰입 중에 있다. 이는 내재된 무한한 작품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예술가로서 묵혀 둔 본능적인 감각이 발현하는 소신 있고 범상치 않은 작업을 마땅히 해낼 분이라 본다. 소리와 악기에도 소질이 많은 정명자선생의 또 다른 멀티 콘서트도 기대해 볼만한대 언제가 될지 궁금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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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 논단, '산유화 단상(斷想) 3題'국중성(익산 향토사학자) 산유화 노래는 옛 백제시절 농민들이 불러온 농부가였다. 원래 백제의 풍토에서 발상한 국민적 얼이 담긴 민중의 소리요 그것은 그들만의 속성에서 나온 농민의 소리가 원형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 산유화였다 할 것이다. 오늘날 민속음악에서 ‘산유화’니 ‘메나리’니 하는 용어에 이론(異論)이 있기도 했으나 이에 대한 어원적 본의(本義)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산유화가는 백제의 농부가였다 산유화에 대하여는 가람 이 병기 선생이 제기한 한산세고 흡제고서(韓山世稿翕齊稿序)를 소개한 내용에 의하면 산유화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었다. "산유화라는 노래가 농가에서 불러져 세전(世傳)하였는데 이는 백제시절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부여에 그 내력을 아는 노인이 말하기를 의자왕 때 까지 산유화와 고란(皐蘭)의 두 노래가 있었는데 나라가 망한 후 산유화는 남고 고란은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이 같이 전하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부여의 고적 보존회에 백제의 산유화 노래가 보전되어 전한다 하는데 그 가사는 이러하다. 가람 이병기 선생의 문집에 소개된 내용이다. 산유화야 산유화야 저 꽃피어 농사일 시작하고 저 꽃 지더락 필역(畢役)하세 얼럴럴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또 민속학자 임동권 박사는 「한국민요사」에서 "부여지방에는 세전된 백제유가(遺歌)산유화가 있으며. 그 노래는 이양 할 때나 수확 시에 남녀 농가인 들이 모두 부른다.” 하였다. 이와 같이 산유화가는 농사철에 농부들이 농사일을 내용으로 부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양주동 박사의 ‘고가연구’에서는 "산유화가는 옛 백제 유민(遺民)의 노래”라 하였는데. 백제 유민이라면 나라가 멸망한 후의 유이민들을 말함인데. 앞의 흡제고 서문에 의하면 산유화는 의자왕 이전에도 있었다. 함을 보아서는 백제가 멸망 이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산유화는 ‘여지승람’에도 옛 백제 시절에 불러온 노래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백제가 멸망한 이후의 전승여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영조 때 학자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 1712~1775)선생이 답사차 호남 지방에 들어서니 온 들판의 푸른 논에서 산유화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더라는 것이다. 그가 평소 그 지방의 수령과 교유관계가 있어 당도한 곳은 금마(익산)였다 한다. 그 날은 수령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날인지라 백성들이 전별의 정을 못 잊어 떠나는 행차를 둘러싸고 눈물바다를 이루는 정경을 보고 신 광수 선생은 ‘금마별가’라 하는 32수의 연작시를 남겼는데 그 중의 열여섯 번째가 ‘산유화가’였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處處 山有花 곳곳에 산유화 가락 齊發翠和中 푸른 논에 일제히 퍼진다네 欣然謂農夫 흔연히 농부에 이르는 말 善哉勤用功 좋구나 부지런히 지었구나(국역 금마별가에서 인용) 이에서 미루어 볼 때 호남지방 에서는 산유화의 노래가 조선 후기까지도 이어 왔다는 실증적 사례라 보아진다. 그리고 앞에 부여의 보전 산유화에서 보듯이 산유화는 농부들이 농사일을 내용으로 부르는 노래였고. 신 광수 선생이 채록한 산유화 내용에서도 푸른 논에서 일하면서 산유화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은 벼가 푸르게 자란 물 논에서 논매기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일면에서 보아도 산유화가는 모심고 논매는 일을 노래한 것이 산유화가라는 것임을 확인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일반 사전에서도 정의하기를 논에서 모심고 김매기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를 농요 또는 농부가라 하였으니 산유화가는 곧 농요요 농부가임을 알 수 가있다. 이에 산유화에 관심을 두어 채록한 석북 선생의 학문과 위상을 참고하여 둔다. 이가원 박사는 그의 ‘한문학연구’에서 석북 신광수(1712~1775)는 성호 이익(1681 ~ 1763)보다 31년의 후배요 연암 박지원(1737~1805)보다는 25년의 선배로서 행시(行詩). 악부(樂府). 염체(艶體-詩體의 하나). 전기(傳記)등의 모든 학문적 방면에서 걸출한 대가였다고 한다. 석북의 작품은 앞서 개척하지 못한 영역에서 개척한 것은 악부였으며. 악부는 당시 사회상을 가장 잘 표현한 문학이라 하였는데. 이에서 그의 악부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한벽당 십이곡(寒碧當 十二曲)과 금마별가(金馬別歌)와 관서별곡(關西別曲)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관서별곡이 가장 이름 높은 대표작 이었다고 한다. 내용은 우리나라 승경지가 중국인의 호평과 국내 사대부들의 풍류가 이곳에 집중하면서도 중국과 같이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중국은 이름 높은 시가(詩歌)로 강산을 빛내지만 우리는 그럴만한 시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북은 지난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지어진 것이 관서 별곡이라 한다. 이 관서 악부가운데 제15절에 일반시조 배장단(一般時調排長短)이라 하여 때 시자를 쓴 ‘시조’라는 용어가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의미에서 이를 시조(時調)라는 용례의 효시로 삼기도 한다. 또한 석북의 명성은 당대를 풍미하여 그를 만나기를 원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라 하였다 한다. 석북의 행력은 60세에 연천 현감 기로과(耆老科) 장원 당상에 오르고. 우승지의 명을 제수 하였고. 그 뒤 영월부사를 거쳐 우승지로 여생을 마쳤다. 2. 농부가의 유래와 산유화가 앞장에서 산유화 노래는 농요 또는 농부가라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농요가 언제부터 어떻게 부르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전하는 기록으로는 저 중국의 고 사서인 삼국지위서 동이열전 또는 진서 등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마한의 풍습은 해마다 5월이면 하종(夏種)을 마치고 제사를 지내고는 무리를 지어 술 먹고 노래와 춤을 추는데 밤낮없이 즐긴다. 그들의 춤은 수십명이 뒤를 따라 땅을 밟으며 몸을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이 중국의 탁무(鐸舞)와 흡사하다. 10월에 추수를 마치고도 그와 같이 한다.”(국사편찬위 중국정사 조선전 참조) 이에서 마한 이라면 백제의 전신이니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는 이전부터 농요를 즐기며 농사일을 해 왔던 것 같다. 그리고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보다도 일찍이 일본 땅에 노래와 춤을 전수한 나라였다 하며 그에 따른 악기도 중국 것이 아닌 백제의 악기로 가르쳤다 하며. 그 음악도 백제의 풍속무(風俗舞) 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우리 문헌에는 없고 전해줘서 받았다는 일본의 기록에서 찾았다. 하니 한편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서 주목이 되는 것은 일본에 전했다는 가무는 백제 지방의 풍속무(風俗舞)였다 하니 그것은 곧 전통적으로 이어온 농요풍임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옛 백제의 풍속요가 후대로 이어 왔기에 근래에 까지도 시골 농촌에서는 동네마다 모심고 논매기 때가되면 두레를 지어 집단으로 풍장을 치며 농사일을 해 왔던 것을 우리는 보아 왔다. 원래 민요와 농악은 그 유래가 전문 소리꾼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일하면서 그 일을 흥겨롭게 노래로 표현한 것을 일러 농요라 하였고. 또한 민간에서 불렀다 해서 민요라 하기도 한다 하였다. 다시 말하면 농요란 농사꾼들이 농사일을 가사로 표현한 노래가 농요요, 민요란 농사일과 관계없는 것 까지 민간에서 불렀다 하여 총칭한 표현으로 구분된다. 원래부터 농요라 할 때 요(謠)란 무리를 지어 노래를 부른다 하여 무리 도(徒)자를 써서 도가(徒歌)라 하였고. 또한 도가의 원뜻은 진흙 논 에서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라 하여 진흙도(塗)자를 써서 도가(塗歌)라 하기도 한다 하였다 (謠. 徒歌曰 塗歌-대동 운부군옥) 그리고 도가(塗歌)라 함은 옛날부터 농민들이 무리를 지어 곡조도 문서도 없이 부르는 노래라 하여 도가 무장곡(塗歌 無章曲 자전)이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농요의 본의는 농부들이 물 논의 진흙 속 에서 모심고 김매는 일을 노래지어 부르는 소리를 농요 라하고, 이는 농부들의 노래라 하여 농부가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遙)의 본의는 농요이며 산유화요 ‘산유화’의 원형이라 보고자 한다. 3. 산유화는 산나리 꽃이었다 산유화(山有花)라는 말은 옛날부터 백제의 농부들이 불러온 노랫말 이었다 하는데. 그러면 산유화라는 말의 어원이 궁금하다. ‘부여고적보존회에서 전한다는 산유화 노래의 가사를 다시 보자. 산유화에 산유화야 저 꽃피어 농사일 시작하여 저 꽃 지더락 필역(畢役)하세 얼럴럴 상사뒤 어여 뒤여 상사뒤 또 충청도 예산 지방에서 전하는 산유화 노래도 있다. 메나리 꽃아 메나리 꽃아 저 꽃 피어 농사일 시작하여 저 꽃 져서 농사일 필역하세 이 상의 두 편 가사에서 보면 산유화는 메나리꽃 이라는 답이 나와있다. 산(山)을 뫼(메)라 함은 백제시절부터 학습교제로 가르쳐온 천자문(千字文)에 산(山)은 뫼(메)로 해석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와서도 어린이 학습교재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도 같은 내용으로 해석이 되어 있음을 보면 산을 메(뫼)로 불러진 것은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와서도 메산(山)자로 읽혀오고 있다. 그래서 산에 있는 나리를 메나리로 불러진 것은 당시부터 일상 그렇게 전승되어온 명칭이 ‘메나리’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앞의 두 산유화 노래가 나온 부여와 예산은 같은 옛 백제의 연고지라는 의미에서도 신빙성이 있다할 것이다. 그 산유화 가사에서 볼 때 옛 백제인들은 산(메) 나리꽃이 피고 지는 시기를 보아가며 농사일을 해 왔다는 것을 알게 한다. 옛날부터 농사일중에 가장 중요한 농사는 논농사 였으므로 모심고 논매는 시기에 맞게 피고 지는 꽃이 산에서 피는 나리꽃(메나리)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두 노래가사를 조합하여 보면 이런 해석이 된다. 메나리 꽃이 필 때 모를 심고 메나리 꽃이 질 때 김을 매세 그래서 옛날부터 시골 농촌에서는 모심고 논매는 일이 끝나면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큰 행사가 끝나는(필역) 셈이었다. 나라에서도 논농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농사교본인 「농사직설」에서도 5월에 모를 심고 6월에 김매기를 세 번해야 마감(필역)된다고 명시 하고 있다. 저와 같이 식물의 생태를 보고 농사시기를 삼아 온 것은 조선 후기에 나온 ‘산림경제’나 ‘임원십육지’ 에서도 동 지후 새 싹이 돋는 시기에 밭갈이를 하고, 찔레꽃이 피면 목화를 심고. 복사꽃이 질 때면 콩과 팥을 심으라는 등의 기록이 있다. 그와 같이 산야에는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지는데 그 중에는 농사에 해당한 시기에 어떤 꽃이 필 때는 무슨 일을 하고 어떤 꽃이 질 때는 무슨 일을 해 왔던 그 같이 자연의 생태를 보고 농사의 시기를 가늠해 왔던 관습을 농민들은 더 믿어 왔던 것이다. 그 같이 눈으로 보이는 식물력(曆)이라 할가 거기에 인습이 되어온 데에는 그럴만한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난 관습이라 보고자 한다. 농사란 인간이 먹어야 사는 생명업 임에도 농사는 무식하고 천한 백성들이나 하는 것이 농사였다. 그러다 보니 농사에 밝은 백성들은 글을 몰랐고. 글줄이나 아는 양반네들은 농사일 같은 것은 아예 모르는 것이 당연한 사회적 풍조요 관행이었다. 그러한 사회적 풍습은 중세기 유럽에서도 있었던 지라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유행한 노랫말이 있었다고 한다. 아담은 밭갈이를 하고 하와는 길 삼을 하던 시절 도대체 그 누가 양반이었다 하더냐 이는 극히 원론적인 논리다. 너나없이 편한 데로 빠지면 식량 농사는 누가 할 것인가 누가해도 해야 할 농사인 것을. 조선시대 초기까지도 나라에서는 권농정책은 있어왔어도 농민을 위한 농서는 없었다. 세종 연간에 와서야 우리 농서인 농사직설(1429)이 처음 나왔고. 이어서 농가집성이니 ‘세시찬요’(1655). ‘산림경제’(1715). ‘임원십육지’(1827)등 여러 농서가 나왔으나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한문체로 되어 있어서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중국에서 전래한 24절기력이 있었으나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자연에서 눈으로 보이는 식물력(曆)을 더 믿어왔던 것이다. 그것은 전국 어느 지방이던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백제지방에서는 산에서 피고 지는 메(산)나리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논농사를 지어 왔기에 산(山)에 있는(有) 그 꽃(花)을 가리켜 산유화라 했던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우리네 조상들은 산야에서 피고 지는 자연 현상을 본 받아 농사일을 해온 것은 아마도 먼 조상 때부터 이어왔던 생활방식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 농민들은 모심고 논매는 때를 기하여 피고 지는 메(山)나리 꽃에서 농사의 절기를 삼아 왔고 그 또한 산에 있는 꽃이라는 순박한 뜻에서 산유화라 하였으니 산유화는 곧 메나리였고. 메나리는 ‘산나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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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시공을 횡단, 소우주와 우주를 공명하는 '풍물굿'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수컷 굴뚝새는 영토를 얻게 되면 흔히 있기 마련인 침입자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음악상자 리토르넬로'를 만들어 낸다. 그러고 나서 영토 안에 직접 집을 짓는다. 심지어 12개씩이나 지을 때도 있다. 암컷이 다가오면 한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집 속을 들여다보는 암컷에게 들어오라고 재촉한다. 꼬리를 낮추고 노랫소리를 점차 약하게 한다.(중략) '구애'의 기능 역시 영토화되어 있다. 하지만 영토의 리토르넬로를 매혹적으로 만들기 위해 강도를 바꾸기 때문에 그 정도는 집짓기보다 덜하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이하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에 나오는 설명이다. 오래전 소리의 영토와 재영토화에 대해 소개하면서 인용해둔 대목이다. 리토르넬로에서 공명(共鳴)까지란 부제를 붙였던 이유는 지난 칼럼에서 다룬 'ᄆᆞᆷ톨로지'와 수렴 및 확장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 다시 들뢰즈를 소환한다. 맘과 몸 곧 ᄆᆞᆷ의 영토를 얘기해보고자 함이다. 수컷 굴뚝새가 경고의 의미로 만들어 내는 지저귐의 공간이 소리의 영토다. 이렇게 비유한다. 화가는 체세포(soma)에서 생식질(germen)로 향하는 반면 음악가는 생식질에서 체세포로 향한다. 소마(Soma)는 정신에 대칭되는 몸 혹은 신체라는 뜻이고 저민(Germen)은 유전과 생식에 관여한다고 생각되는 생식세포다. 음악가의 리토르넬로는 화가의 리토르넬로와 역상(逆像)이다. 반대라는 뜻이 아니라 대칭(對稱)이다. 나는 이를 주역의 대대성(對待性)으로 풀이해왔다. 서로 대립하면서 의존하는 관계, 곧 대답하고 기다리는 관계다. 마침 임실 필봉에서 열리는 한국풍물학회에 발표할 기회가 생겨 이를 재정리해두었다. ᄆᆞᆷ은 어떻게 확장되고 이어지는가? "우리 언어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우리는 짐승의 새끼를 또 하나의 짐승이라 부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 어버이의 한 가지라든가 연장이라 불러야 옳다. 왜냐하면 짐승의 태아는 어버이의 한 부분이거나 한 부분이었고,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태어날 때에 완전히 새로운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은 그 어머니가 지녔던 행동 습성의 일부를 그대로 간직하게 된다. "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였던 에라스무스 다윈이 일명 '유기적 생명의 법칙'이라고 하는 그의 저서 「주노미아」(Zoonomia, 1794)에서 한 말을 장회익이 인용한 글이다. 마굴리스와 세이건이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 1995)에서 말한 'Global life'를 '온생명'으로 번역한 이유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곁들인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뿌리 뻗은 끝자락에 묘목을 길러내는 모양이라고나 할까. 육상의 생물들이 탯줄을 통해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가 마침내 광명한 세상으로 나오는 사건이라고나 할까. 나는 이를 유교적 ᄆᆞᆷ의 상속 혹은 ᄆᆞᆷ의 확장이라는 의미로 읽고 그것을 재생 모티프 혹은 부활의 모티프로 해석한 바 있다. 지난 칼럼에서 남도씻김굿의 영돈말이 즉 이슬털이를 증류주 내리는 방법의 모티프로 읽어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삼 말하거니와 망자의 옷을 돗자리에 말아서 그것을 쑥물, 향물, 맑은물로 씻는 '이슬털이'는 마치 조상의 피와 살을 술과 떡으로 만드는 과정과 같은 것이다. 음복이란 이를 먹고 마셔, 칠성별로 돌아간 조상 혹은 망자와 합일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죽은자와 산자는 ᄆᆞᆷ의 상속과 확장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졸고, 「산자와 죽은자를 위한 축제」 참고). 농악과 풍물, 확장된 ᄆᆞᆷ의 공명은 무엇일까? 수컷 굴뚝새는 '울음'을 통해 ᄆᆞᆷ을 수렴하고 확장한다. 우리가 이를 '운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더불어 울림(共鳴)'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보성지역에서 농사짓는 모습을 보고, 장흥사람 안유신(安由愼, 1580~1657)이 지은 '유두관농악(流頭觀農樂)'으로부터 '농악'이라는 호명이 발견되기 시작한다는 점 본지 칼럼을 통해 몇 번 밝혀두었다. 16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한 이 호명 방식은 매우 여러 차례 시문과 일기 등을 통해 등장한다. 다수의 민속 관련 학자들은 <농악>이란 호명을 일제강점기의 잔재라고 주장했다. 농악이 '더불어 울림'의 방식을 통해 스스로의 영토를 재구성해왔다는 점을 간과한 해석들이다.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된 농악의 범주를 제외하면 '풍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동호인들이 늘었다. 농악이란 이름을 축소하여 풍물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일까? 농악이란 이름을 확대하여 풍물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일까? 나는 지난 연구에서 농사에 초점을 두어 해석하였고 굳이 농악이란 이름을 폐기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2022. 1월 7일 본 칼럼 참고). 하지만 근자에 농악을 더 공부하면서 후자의 생각으로 다시 정리할 수 있었다. 예컨대 16세기 기록의 농악은 '두레풍장'에 가까운 것이다. 시기를 특정할 수 없지만, 오늘날의 농악은 수많은 장르를 혼합하고 재구성하면서 완성되었다. 마을굿(당산굿, 성황제, 여제, 기우제 등), 두레풍장(들노래, 향약, 계 등), 나례희(궁중과 지방관아 중심 정초 의례, 성문의례), 군사훈련(진법, 점고, 걸군, 걸궁 등), 유랑연희(중매구, 중걸립, 남사당, 각설이, 풍각쟁이 등), 무격의례(성주의례, 기우의례 등) 등은 물론이려니와 오늘날 탈굿이나 탈놀이 등으로 분화된 장르까지 복합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각종 장단이며 복색이며 놀이의 구성 등이 모두 그러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대의 풍속을 모두 그렸다고 하는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에 어찌 지금 형태의 농악이 단 한 번도 출현하지 않겠는가. 풍물의 수렴과 확장, 풍물놀이의 위상 농악이란 호명이 일제강점기의 잔재라는 해석은 틀리다. 다만, 현재 광범하게 사용하는 풍물이라는 용어가 가진 함의를 더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ᄆᆞᆷ의 수렴과 확장을 상고하다보니 이르게 된 생각이다. 'ᄆᆞᆷ톨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이기도 한데, '풍물'의 역사에 대해서는 따로 지면을 할애하겠다. 나의 이런 생각은 해관 장두석 선생의 '한민족생활연구회' 활동으로부터 출발했다(2018. 3월 30일 본 칼럼 참고). 약칭 '한민연'이라 한다. 이들의 관심은 몸과 사회가 하나고 남한과 북한이 하나라는 데 있다. 아픈 몸, 분단된 한반도의 문제를 묶어서 이해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사회가 꼬이고 뒤틀리는 것을 몸의 내부가 뒤틀리고 꼬여 질병을 얻는 데에 비유한다. 몸뿐만 아니라 맘에 적용해도 해석은 같다. <동의보감>이나 <황제내경>의 인체도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풍물굿이 발전하고 정착해온 내력을 보면 더욱 명료해진다. 몸과 맘 곧 ᄆᆞᆷ을 수렴하고 확장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거의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집돌이'의 집은 ᄆᆞᆷ의 작은 확장이고, 이를 확장하면 '마을굿'의 마을이 되며, 더 확장하면 나라가 ᄆᆞᆷ이고 지구별과 우주가 ᄆᆞᆷ이 된다. 인간을 소우주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지난해 (사)나라풍물굿이 벌였던 나라터밟이 행사는 국토를 ᄆᆞᆷ의 확장으로 이해한 의례다. 수렴의 방식 강강술래에 대해서는 따로 지면을 만들겠다. 이처럼 호명의 방식 곧 이름짓기는 시대정신을 담아 변천하고 정착해왔다. 마치 판소리가 1900년도 초반까지 성악, 창악, 창극, 음률 등의 용어를 혼용하다가 '판소리'라는 호명으로 정착한 것과 같다. 어느 시대고 난세이지 않은 적 있으랴만, 자살률 십수 년째 일등을 하고, 지도자들이 자꾸 퇴행하는 풍경들을 마주하다 보니, 'ᄆᆞᆷ톨로지'에 대한 생각이 더욱 깊어진다. 시공을 횡단하여 소우주와 우주를 한 몸 삼아 울리(共鳴)는 방식, 그 정점에 우리는 풍물놀이의 리토르넬로를 만들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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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동두천 이담농악, 경기북부에서 '국악의 메카'로 도약인류무형문화유산 '농악'(農樂) 우리 나라의 고전음악이나 고전무용이 과거 봉건 시대에는 왕공가(王公家)에서부터 일부 특권 계급의 예속물로 인식이 된 일도 있으나 '농악무'만은 고대로부터 농민 대중이 주체가 되어 발전시켜 2천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속문화이며 대중예술의 꽃이다. 전국 농촌에서 많이 행하여지는 권농(勸農) 음악 무용으로 독보적 장르이다. 농악무(農樂舞)는 공동체의 연장자들이 젊은 세대에 전승하는 대중적인 풍습이다. 풍장, 풍물놀이라고도 한다. 특히 즉흥적이며 씩씩하고 활기 넘치는 신명성이 뛰어난 종목이다. 지역마다 다양한 농악놀이가 지역성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한반도에서 19세기 중국 동북삼성에 이주한 조선족들이 향유하는 '농악무'가 200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가 되어있다. 우리가 지역마다 너무 많다는 이유로 등한시 하는 사이에 중국이 동북공정 일환으로 '중국 조선족 농악무(Farmer’s dance of China’s Korean ethnic group)'라는 명칭으로 중국의 전통으로 둔갑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큰 교훈을 얻었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는 우리 스스로가 지켜나가야만 한다."라는 것이다. 이후 2014년 11월 27일 대한민국 '농악'이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다.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리는 제9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열린 24개국 심사위원이 만장일치로 등재를 결정했다. "활력적이고 창의적인 농악은 일년내내 다양한 형태와 목적으로 많은 행사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공연자와 참여자들에게 정체성을 제공하는 유산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관객들도 참여할 수 있다는 개방성과 공동체 결속 기여도에 주목한 것이다. 아직도 나는 이날의 기쁨은 생생하게 가슴에 남아있다. 동두천 국악협회와 '동두천이담농악보존회' 어제 오늘 2일간 동두천 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동두천 '이담농악두드림대축제'와 함께 제6회 동두천 전국농악경연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치었다. 전세계를 멈추게 했던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빚어졌던 일상생활의 정체기가 서서히 마무리 되어가고 있다. 최근 줄확산으로 멈칫하지만, 2년간 멈췄던 지역 축제와 크고 작은 공연들이 재개될 것처럼 보인다. 움츠렀던 공연예술계가 미루었던 작품들을 다시 무대로 소환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관객들도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비대면 공연과 관객 감소로 주춤했던 축제와 대회들이 활발히 진행되는 가운데, 한국국악협회 동두천 지부와 '동두천이담농악보존회'에서 주관하는 '동두천 전국농악경연대회'도 3년 만에 대면으로 개최되었으며, 내년도에는 '동두천 김옥심 국악대제전(전국국악경연대회)'를 유치하여 국악 3개 부문(농악부문, 민요부문, 무용부문) 개최하고자 추진하고 있다. 동두천은 대한민국 최북단에 있는 도시로, 처음 방문했때 첫 인상은 문화적으로 미개척지라는 도시였다. 하지만 이처럼 척박한 곳에서도 경기민요, 서도소리, 가야금 병창을 전승해오던 문화인들이 존재했다. 이들과 함께 동두천 국악협회를 경기 북부, 나아가 한국 최고의 지부로 만들기 위한 변화의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동두천 국악협회와 '동두천이담농악보존회'는 동두천시와 동두천시 문화유산의 계승·발전 및 홍보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동두천시 무형문화재 제3호 '이담농악'을 위한 학술세미나 개최 및 경기도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전 회원들이 하나가 되어 집중하고 있다. 서울 및 경기 남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문화예술의 기반이 적었던 경기 북부 지방을 부흥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코로나 19로 인해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문화예술이 다시 관심과 주목을 받는 상황 속에서, 위기를 기회 삼아 경기 북부의 국악을 대표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두천 이담농악 보존회' 주요 수상 이력 2019년 제7회 부안전국농악경연대회 '대상' 2019년 제21회 (서산)전국농악명인경연대회 명인부 단체부문 '대상' 2019년 제45회 전주대사습놀이대회 농악부 '장원'(국무총리상) 2019년 제1회 난계풍물경연대회 단체부문 '대상' 2020년 제6회 계샹산국악제 전국대회 풍물부문 '대상' 2020년 제19회 전국웃다리농악경연대회 농악부분 '종합대상' 2021년 2021대한민국 예술축전 국악부문 대상, 종합부문 '최우수상' 국악인 김경수가 걸어 온 길 나는 1965년 충청남도 인삼의 고장 금산군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밴드부 활동을 하는 등....음악부 교사에게서 예술적 기질이 엿보인다는 칭찬을 받으면서 어느새 주변에서 국악영재라고 불렸졌다. 어느 날 어머니 어깨 너머로 보기만 했던 장구장단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자연스레 농악을 전공하게 되었다. 금산농업고등학교 농악부에서 '좌도농악'을 김봉열 선생님께 사사받고, 졸업후 한국민속촌 국악연주단에 입단하여 정인삼 선생님께 '전라우도 농악'을 사사받았다. 뼈를 깍는 노력으로 전주대사습놀이 대통령상, 금산인삼제 농악경연대회 개인 최우수상 수상하였다. 이후 송순갑 선생님께 '웃다리 농악'을 사사받으며 전국 각지의 다양한 농악을 체험하게 된다. 전역 이후, 예맥 남사당 사물놀이와 워커힐 예능부, 김덕수 사물놀이패 활동을 거치며 사물놀이 ‘진쇠’와 (사)한울림예술단 창단 멤버로 활동하면서 전세계 무대에서 활발한 공연을 펼쳤다. 동두천 여상 풍물반, 국립전통예술 중-고등학교 출강, 선화예술중학교 출강, 예원예술대학교 공연예술학부 무용과를 졸업하였다. 현재는 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외래교수, 성신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겸임교수 등 교육계를 통해 후대를 이어나갈 제자들에게 농악을 전수하고 있다. 동두천 혁신교육지구 이담초등학교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동두천시 무형문화재 제3호 '이담농악' 예능보유자이자 동두천시립 이담농악단 꼭두쇠(단장)로서 동두천과 동두천시 국악 교육에 앞상 서고 있다. '국악실기 사물놀이 지도자 교본'을 출판하며, 학계에서 사물놀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고 쉽게 기술해 사물놀이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는 평을 받았다. 이 밖에도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이수자, (사)한국국악협회 동두천지부 지부장, (사)대한명인회 선정 사물놀이 '채상설장구' 명인, (사)한국국악협회 이사, (사)한국국악협회 경기도지회 이사, (사)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동두천지회 부지회장 등 동두천 국악교육을 위해 힘쓰고 있다. 현재 성산효대학원대학교 효예술융합학과 박사과정에서 국악교육에 대한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마을굿 '행단제'에서 동두천 '이담농악' 발굴 동두천과 인연이 시작 된 것은 1990년 초반 김덕수 사물놀이에서 수학하고 있는 동안 송귀철 선생님을 통해 동두천 여상 김흥래 선생님을 알게 되면서다. 당시 ‘사물놀이 진쇠’ 팀원들과 함께 동두천 여상의 풍물반을 지도하게 되면서 동두천 땅에 첫발을 들였다. 1994~1995년 2년 동안 동두천 여상 풍물반 지도를 하면서, 동두천 지역은 북한계를 따라서 흐르는 내천과 농사짓는 땅이 풍부한 지역이라서 집약적 농사를 짓는 마을을 중심으로 '농악'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게 되었다. 사당골(현 이담로 161)에서는 마을 사람이 주축이 되어 오는 마을굿이 내려오고 있었다. 어유소 장군이 1000년이나 살았다는 은행나무 아래 단을 쌓고 학문과 무예를 연마한 데서 유래된 ‘행단제’라는 마을축제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주변 지역에서는 송내농악과 안흥농악 등 농악들이 다수 존재했다. 출신지역 사람이 아닌 타지인이 동두천 지역 농악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모습을 처음엔 백안시 하던 사람들도 점차 마음을 열게 되었다. 마을 어른들과 함께 마을굿을 알리고 재현하고자 시작한 초심이 현재의 이담농악을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동두천 옛 지명인 '이담'을 따서 만들어진 이담농악은 동두천 지역에서 행해지던 가락, 즉 행단농악, 송내농악, 안흥농악 등이 정착된 웃다리 가락을 기본 바탕을 근간으로 하여 재구성 된 농악이다. 각 과장은 행단제와 같은 제의 의식과 마을과 마을이 대항하는 줄다리기, 씨름대회 등에서 주민의 안녕을 기원하고 단합을 이끄는 소재로 이어온 동두천 지역 고유한 '마을굿'에서 즐기던 풍물놀이로 구성되었다. 동두천 시립 이담농악단과 이담농악보존회 현재 총 12개의 전국 지부로 운영되고 있으며, 약 120명의 회원들로 구성되어 이담농악의 전승과 개발에 힘쓰고 있다. 1990년 초반 이담농악을 연구하며 이담농악보존회를 창단하였다. 당시 동두천은 문화 불모지 지역에 가까웠는데, 시민들은 문화공연에 대한 관심도가 적었고 관내 행사에 무료 공연으로 불려가도 교통비조차 지급받지 못했다. 이후 보존회를 활성화하기 위해 동두천시와 함께 노력하여 '동두천시립 이담농악단'을 창설하게 되었지만, 당시 시립이담농악단의 첫 월급은 13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 맨땅에서부터 시작한 이담농악이지만 전 회원들과 열정을 들여 정성을 다했다. "예술이냐 가족이냐"를 택해야 하는 길에서 흔들리는 나를 오늘까지 함께 한 사랑하는 가족과 전 미담농악 회원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자본주의가 만연한 대한민국 양키문화 1번지 동두천에서 국악에 대한 인식과 공연에 대한 관심은 희박했다. 그러나 우리는 공연비를 못 받을지언정 무대에서 시민들에게 한민족 전통문화 '농악'을 알린다는 간절한 염원으로 무대에서 뜨거운 의지를 불태웠다. 이러한 진정성이 조금씩 동두천에서 입소문을 타게 되면서 후원회 이사회가 결성되었으며, 경기 북부에서부터 서울, 나아가 전국까지 '동두천 이담농악'을 알려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 보존회 전 회원들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 들어가서 관객들의 눈과 귀를 어떻게 사로잡을 수 있는가라는 과제를 풀어야 한다. 이담농악단의 단장으로서 해결해야 할 선결문제이다. 이를 위해 "농악단 전원의 한국음악학 석-박사” 과정 이수를 실천하고 있다. 즉 실기와 이론을 겸비하는 국악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담농악보존회 농악단은 이담농악 전승과 보존에 집중하고, 동두천시립 이담농악단에서는 시대에 맞는 창작활동을 통해 외부에 동두천의 전통문화를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첫째로 전승주체 집단(연희자)이 피나는 노력과 공력을 들여야 한다. 둘째로 민과 관이 하나가 되어 동두천 시민을 비롯한 동두천 시장님, 시의회 의장님의 관심이 절대적이다. 오늘도 우리는 하루종일 땀에 젖은 북과 채를 뉘어 놓으며, 동두천이 경기 북부에서 새로운 국악의 메카로 떠오르기를 고대하고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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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를 기록한 통역관이자 서화가, 청운 강진희청운菁雲 강진희姜璡熙라는 이름은 생소했다. 1851년에서 1919년까지 살다 가셨으니 일면식이 있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와 조우하게 된 것은 2022년 5월 29일 서울 강남의 가로수길에 위치한 예화랑에서였다. ‘연緣, 이어지다’라는 제목으로 사후 백여 년만에 처음 열린 기념전이었다. 예화랑 김방은 대표가 청운 선생의 피를 이어받은 혈연관계이고, 이혜신 큐레이터가 관련 자료들을 수집했으며,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대표이사가 소장하고 있던 청운의 저서 '악부합영樂府合英'을 전시회에 내놓은 연유로 ‘인연’이 강조됐다. 예화랑 측은 한자로 쓰여진 악부합영을 고전번역원에 맡겨 번역해 소개하고, 관직에 있으면서 서화와 판소리 분야에서도 활동했던 강진희 선생의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그를 조명했다. 청운은 제대로 부각된 적이 없지만,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어학 실력도 뛰어나 한문 지식을 바탕으로 중국어사전을 펴냈으며,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일어와 영어를 구사해 1886년 일본공사접응관차를 거쳐, 1887년 통역원으로 박정양1841~1904 주미공사의 미국 수행을 맡았다. 주로 일어로 미국측과 소통했고, 그 내용을 우리측에 통역했다. 어떤 생김새였을까? 궁금해하던 기자에게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1888년 4월 26일 조지 워싱턴1732~99의 생가 버지니아 주 마운트 버넌Mount Vernon을 찾았을 때의 모습이다. 박정양 공사, 이종하 무관, 이하영 서기관과 나란히 섰는데, 그들보다 훨씬 큰 체격이다. 머리 하나는 차이가 날 정도로 키 차이를 보인다. 서화에 능했던 통역관은 처음 마주하는 서구의 문명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카메라가 없던 나라의 주재원이었던 까닭이다. 당시 서구의 과학문명은 당시 조선인들에겐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박정양보다 5년 앞서 미국을 방문했던 조선보빙사가 겪은 일화는 웃음짓게 만든다. 1년 뒤 갑신정변의 주범으로 멸문지화를 당하는 홍영식을 단장으로 민영익, 서광범, 유길준 등 20대의 조선 엘리트들이었다. 서구 문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춘 인물들이었음에도 그들이 받은 문화 충격은 컸다. 에디슨이 발명한 전기는 이해불가였고, X-RAY는 "귀신의 소행”이었으며, 엘리베이터는 경악 그 자체였다. 사절단은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를 만나자 넙죽 큰 절을 해 미국 신문에 그 모습이 실리기도 했다. 식탁에 흉기인 포크와 나이프가 오르는 건 "상스럽다”고 느꼈고, Y-shirts에 대해서는 "편리하겠다‘며 호감을 표했다. 청운은 큰 문화 간극 속에서 1년간 미국에 체류하며 목격한 풍경을 머릿속에 각인했다가 조선에 돌아와 화선지에 붓으로 옮겨 소개했다. '미사묵연-화초청운잡화합벽'이다. 청운은 1911년부터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1853~1920 등과 서화미술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청운은 금석학에 밝아 위창 오세창1864~1953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덕분에 위창은 전서와 예서를 익혀 ‘당대 최고의 서예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청운의 인물됨과 생애에 대해서는 남겨진 자료가 많지 않다. 이혜신 큐레이터가 찾은 김영욱의 2017년 논문 '청운 강진희의 생애와 서화 연구'에 서화가로서의 청운이 소개돼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청운의 저서 악부합영은 판소리 애호가로서의 청운의 면모를 보여준다. 두 자료를 근거로 그를 형상화해본다. 강진희는 35세에 관직에 진출해 60세까지 법부와 학부의 요직에서 관원으로 일했다. 지금으로 치면 법무부와 교육부에 근무한 셈이다. 61세부터는 서화에 전념해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진주 강씨姜氏인 그의 가문은 누대로 의관醫官 집안이었다. 모친 역시 의관 집안이었다. 조모는 역관 집안 출신이었다. 청운은 의관 대신 역관을 선택했다. 조모인 천녕 현씨玄氏 가문의 영향이 컸다. 왜학倭學을 전공해 잡과에 합격해 사역원 종 9품직인 참봉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현재의 일어 통역관이었다. 당시 주미 공사관에는 참찬관 이완용1858~1926, 서기관 이상재1850~1927, 번역관 이채연1861~1900 등 10인이 근무했다. 이 당시 청운은 이미 전서에 조예가 있었던 모양이다. 강민기의 논문 '근대 전환기 한국 화가의 일본화 유입과 수용'에 한 일화가 소개된다. 청운이 미국행 배를 타기 위해 요코하마에 들렀을 때 일본 화가 야스다 베이사이安田米齌1845~88를 만나 '추경산수도' 1점을 선물 받고 자신의 전서 글씨를 선물한 까닭이다. 주제에 대한 접근의식도 집요했던 모양이다.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배에 19일간 동승했던 훗날의 주한미국대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의 목격담에 따르면, 청운은 가벼운 옷 차림으로 여객선의 홀에 나가 누구에게나 말을 걸고 다녔다. 알렌은 그런 청운을 "the snoop”으로 표현했다. 꼬치꼬치 캐묻고 다니며 탐색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청운은 그만큼 호기심이 많았으며 알고자하는 열망이 컸던 인물로 이해된다. 청운은 미국 체재 시절 박정양을 수행해 28개 공사관을 방문하며 외교 활동을 벌였고, 이상재, 이채연 등과 볼티모어 등 여러 지역을 유람하며 서양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1889년 귀국해 1910년 한성고등여학교 서기에서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법부와 학부에서 활동했다.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국한회어國韓會語' 편찬을 돕고, 역사와 지리 서적 간행에도 관여했다. 61세이던 해부터 1919년 타계하기까지 9년간은 서화가의 길을 걸었다. 앞서 워싱턴 주재 시절에도 장승업 풍의 '묵매도墨梅圖', '괴석국란도怪石菊蘭圖' 등의 수묵화를 그렸다. 1888년에는 훗날 순종이 되는 동궁 이척1874~1926의 15번째 탄강일을 축원하는 '승일반송도昇日蟠松圖'도 그렸다. 오세창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강진희는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잘 썼고, 그림은 매화를 잘 했다”고 평했다. 강진희의 생애를 연구한 김영욱은 "강진희 30대의 회화는 화면의 구성과 소재에서는 19세기 화단의 경향을 수용하고, 맑은 담묵을 즐겨 사용해 담담한 느낌의 남종문인화풍을 구사했다. 제작 목적에 맞는 소재를 포착하고 간략한 필치로 묘사하여 그림의 이야기를 잘 전달했다. 또한 전각의 인장을 회화와 연계시켜 시·서·화·인 ‘四全’을 지향한 작화 방식은 서화가 시기까지 지속되었다.”라고 평했다. 귀국한 후 머리 속의 풍경들을 화첩으로 남겼다.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 '종남귀래도終南歸來圖' 등이다. 이 화첩은 1983년 ‘최초의 미국견문화美國見聞畵’라는 제하로 동아일보에 보도됨으로써 처음 알려졌다. 화차분별도는 워싱턴 공관에서 멀리 두 열차가 오고 가는 풍경을 보고 그린 것이다. 조선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가는 여정 중에 함선과 기차를 경험했으나 두 열차가 교행하는 모습은 겁이 날 정도로 신기했던 모양이다. 제목 옆에 ‘웃음이 나왔다’라는 뜻의 ‘부지일소付之一笑’를 날인했다. 철도와 기차를 중심으로 많은 배경은 생략하고 간략한 필치로 스케치했다. 이국적 풍경의 핵심만 포착하여 묘사함으로써 그림의 주제를 뚜렷하게 전달했다. 청운 강진희는 서화가 외에 판소리 연구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이 부분이 의외이다. 당시 선비들이 남종화의 영향을 받아 그림 속에 시를 쓰던 ‘화중유시畵中有詩’의 인문화人文畵에 몰두하는 게 트렌드였던 만큼, 서書와 화畵에 관심과 재능을 보인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있지만, 판소리에 관심을 가진 건 매우 이례적인 경우인 까닭이다. 그냥 즐기기만 한 수준이 아니라 전문 서적을 펴냈을 정도였으니 놀랄만 하다. 입으로만 전해져 오던 속요들의 가사를 채록하고 수록한 악부합영樂府合英이 그 업적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대목이다. ‘악부’는 노래가사를 한시 형태로 옮긴 것이다. 고려 때 이제현李齊賢1287~1367 이래로 몇몇 학자들이 이 작업을 해왔다. 한시漢詩의 기본 형식은 한 구句당 5자나 7자로 이루어지지만, 악부 한 편이 몇 구로 구성되는지, 한 구는 몇 자로 이루어지는지 등에 대해 정형定型은 없었다. 노래가사의 길고 짧음에 따라 시가형태도 들쭉날쭉이었다. 청운의 악부합영은 모두 5부로 구성돼 있다. 각 부마다 자신의 필명인 일소헌一笑軒의 이름으로 제사題詞를 지었다. 신헌申櫶과 신위申緯가 채집한 곡들을 정리하며 ‘푸른 갈대 수풀을 배로 헤치고 다니며 소악부小樂府를 읊조리다碧蘆吟舫小樂府’라고 표현하고, 자기가 기록한 곡들에는 ‘푸른 갈대서리를 배를 타고 다니며 소악부를 읊고 후기를 짓다題碧蘆吟舫小樂府後’라고 썼다. 벼슬아치로서 판소리를 연구했던 송만재1788~1851가 광대놀이를 보고 지은 시, 관우시觀優詩를 옮기며 감상평을 덧붙이고,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세상에 떠도는 유행가 아홉 수九歌’는 스스로 채록했다. ‘합영合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여러 영걸들의 합작품‘이라는 점을 나타낸 것이라 풀이된다. 청운은 악부합영의 서문에서 "일소헌一笑軒이 소악부小樂府를 모방하다.”라고 스스로 소악부의 형식을 따랐음을 밝히고 있다. 소악부는 한시의 절구체絶句體를 고수하는 악부이다. 즉, 시처럼 절구 형태를 따른 작은 시小詩의 형식이다. 악부합영은 구전으로 전해오던 우리 노래를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당시 소리하던 사람들이 한자를 몰라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청운의 작업은 의미가 크다. 선대인 신위, 신헌과 후대로서 천재 소리를 듣던 육당 최남선1890~1957 등도 같은 작업을 한 바 있다. 청운은 그들이 빠트려 국문가사만 전해져오던 곡들의 가사를 한자로 옮겨 기록했다. 그의 한문 실력이 작용했다. 일소헌一笑軒이 기록한 속요 46수에 벽로운방소악부碧蘆韻舫小樂府 40수 그리고 여산노초(礪山老樵, 송만재)의 관우시觀優詩 50수를 묶었다. 청운은 기록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자하紫霞 신위申緯 선생이 소요(小謠 : 우리나라 민요)를 채집하여 <벽로운방 소악부>라 명명한 칠언절구 40 수는 가사가 오묘하고 가락이 뛰어났기 때문에 세상에 전해졌다.”라고 선대의 업적을 칭송하고, 자신이 기록한 속요 46수는"무더위에 비까지 와서 후텁지근한 날, 풍등風燈을 앞에 두고 우연히 남악주인(南岳主人, 최남선, 1890~1957)이 찬정撰証한(골라서 정한) 가곡(歌曲, 원 제목은 歌曲選)을 읽고, 그 가운데서 무명씨無名氏가 지은 것만을 찾아내어 국문(한글)은 버리고 한자로 문장을 짓고 압운(押韻, 시가에 규칙적으로 운을 다는 일)까지 해서 뜻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자세히 서술하고자 하였다.” 청운은비록 칠언절구의 형식을 빌려서 쓰기는 했지만, 노래의 원 맛을 제대로 낼 수 있을 것인지, 걱정하고 있다. 다만 ‘변변치 않은布鼓雷門’ 작품이지만, "꽃그늘 아래 술동이를 앞에 두고 혹시라도 지음자知音者가 한번 목청껏 뽑아주기를 기다리노라.”라며 겸손을 보였다. 서언의 말미에는 중국 강소성의 "난정蘭亭에서 왕희지가 수계修契한 지 26번째 계축년(1913)에 고송유수관 주인古松流水館 主人이 홍두紅荳 꽃 아래서 글제를 쓰다.”라며 한껏 고양된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악부합영의 모두에 밝힌 서언緖言에도 그런 감정이 드러난다. "음악은 울적함을 풀어주고 노래는 마음을 드러내는데, 모두 감정에서 나온 것이다.시詩에 읊고 감흥하는 것에 의한 비유가 있다면음音에는 고음과 저음 및 맑은 소리와 탁한 소리의 구분이 있다. 이것은 시대에 따라 기풍氣風이 변하는데, 예로부터 변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성운聲韻이다. 광대가 다른 사람을 흉내내고,상말로 대사를 하고 거리에서 노래하는 것은, 자기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입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광대가 소리를 길게 빼서 노래하고 악기를 두드려서 연주하여 권선징악을 표현하는 데서 비분悲憤한 감정을 일으키니, 즐거운 데서 즐거워하고 슬픈 데서 슬퍼하게 된다.그러므로 음악을 듣고 정치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니, 어찌 음악을 얕잡아 볼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음악은 국문이 아니면 가락을 만들 수 없어서 곡조를 맞추기 어려우니, 시로 번역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이번에 국문을 버리고 압운押韻한 것은 비속함에서 벗어나서 우아함을 얻으려는 것이다. 시경詩經의 작자가 민요를 채집했던 이유도 어찌 이와 비슷하지 않았겠는가. 구전되던 노랫말을 한문으로 기록한 것은 "비속함에서 벗어나 우아함을 얻으려는” 취지라고 언급했다. 문자가 권력이던 시절의 인식이다. 이제 청운의 작업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자. '임의 자취 사라진 꿈夢無跡'은 어쩐지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라는 가곡을 연상시킨다. 夢爲我請遠方君 꿈이 날 위하여 먼 데 임을 데려왔건만 不勝欣起影無存 기쁨에 겨워 일어나니 그 모습 사라졌네 君或怒而飄然去 임이 혹시 노해서 홀연히 가셨는가 如何覺來不見痕 잠에서 깨니 자취가 보이지 않네. '문밖에 나와서 기다리다出門望'는 친구를 그리며 기다리는 정을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夜雨花開酒初熟 밤비에 꽃은 피고 빚은 술도 막 익었네 琴朋留約帶月回 벗이 거문고 가지고 달이 뜰 때 온다 하니 分付兒童仔細看 아희야, 자세히 보아라 茅檐月與故人來 초가집 처마에 달이 뜰 때 벗도 함께 오는지 '당신이 직접 오세요宜身至前'는 당시 여인으로서는 당찬 모습을 담았다. 莫倩他人尺素馳 남에게 편지 전하지 마시고 當身曷若自來宜 당신이 직접 오시면 좋겠어요 縱眞原是憑傳札 아무리 진심을 편지로 전해도 成否從遠未可知 참인지 아닌지 알 수 없거든요 '백마는 울고 아가씨는 옷을 잡고白馬靑娥'는 "백마는 가자 울고 해는 기울어”라는 유행가 가사를 떠올리게 한다. 欲去長嘶郎馬白 낭군의 백마는 가자고 길게 울고 挽衫惜別小娥靑 어여쁜 아가씨는 옷을 잡고 이별을 아쉬워하네 夕陽冉冉銜西嶺 석양은 뉘엿뉘엿 서산에 기울고 去路長亭復短亭 갈 길은 멀고도 머네 '나비야 청산 가자胡蝶靑山去'는 노랫말이 일품이다 白胡蝶汝靑山去 흰 나비야 너도 청산 가자 黑蝶團飛共入山 호랑나비야 떼지어 함께 청산으로 날아가자. 行行日暮花堪宿 가다가 날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花薄情時葉宿還 꽃이 푸대접하면 잎에서라도 자고 가자 황진이의 '벽계수碧溪水'는 청운 덕에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진 가사이다. 마지막 연만 "명월明月이 만건곤滿乾坤하니 쉬어감이 어떠하리”로 바뀌었다. 대중성을 의식한 소이일 것이다. 靑山影裏碧溪水 청산 그림자 속의 벽계수야 容易東去爾莫誇 동쪽으로 쉬이 흘러감을 자랑마라 一到滄海難復回 푸른 바다로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데 滿空明月古今是 온산 가득 밝은 달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네 '동짓달 긴긴 밤冬至永夜'은 황진이黃眞伊가 지은 애절한 연시戀詩이다. 국문으로 전해져오던 가사를 청운이 한자로 옮겨 적었다. 截取冬之夜半强 동짓달 기나긴 밤 절반을 애써 잘라서 春風被裏屈蟠藏 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말아 두었다가 燈明酒煖郞來夕 등 밝히고 술 데워 놓고 임이 오신 날 저녁에 曲曲鋪成折折長 굽이굽이 길게 펴리라 청운은 채록곡마다 직접 제목을 지어 붙이고 작사가의 이름을 명기했다. 없는 경우에는 ‘무명씨’로 표기했다. 신위 등 선대 기록자들에게는 헌사의 의미로 직접 절구를 지어 올렸다. 청운은 악부합영의 의미를 ‘기록’과 ‘전승’으로 보았다. "문장의 인연”을 살리려는 또 다른 예술의 장르가 아닐 수 없다. "인간 세상의 백년은 천상의 하루에 불과할 뿐인데, 더구나 그 하루 동안의 영고성쇠와 희로애락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민요를 노래로 전할 경우에도 흥망성쇠에 따라 존속되거나 사라지는 안타까움이 있다.시구詩句는 오랜 시일을 세상에 남아 있으니, 사람에게 문장의 인연은 참으로 귀중하지 않겠는가.” 송만재가 광대놀이를 보고 쓴 '관우희오십수觀優戱五十首'는 광대패의 소리와 재담, 재주를 보고 느낀 저자의 감상문 형식이다. 줄여서 '觀優詩'라고 부르는 그 글에는 영산(靈山, 혹은 단가短歌)에 대한 디테일한 평이 들어있어 후대의 판소리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영산은 놀이판에서 목을 풀 때의례적으로 하는 몇몇 재담과 타령打令을 포함하는 여러 곡의 혼칭混稱이다.요령要令은 광대가 재주를 부릴 때 하는 재담과 발림이다. 觀優詩는 광대패의 놀이를 눈 앞에서 직접 보듯 하게끔 묘사했다. "거문고 타고 피리불며 촛불 밝히고 밤새 노는데, 서늘한 정자와 높은 누대에 바람에 꽃이 떨어진다. 정신은 북과 함께 움직이고소리는 몸동작과 함께 표현한다. 방자한 웃음에서 해학이 물결처럼 나오고 입에서 말이 샘솟듯이 흘러나온다.” 청운은 송만재의 '관우시' 뒤에 서둘러 기록으로 남겨야 했던 사정을 밝혔다. "우리나라의 정악正樂은 모두 여항(閭巷, 시중)에서 전습된 것과 장악원梨院의 고악古樂과는 차이가 있다.최근에 창을 부르는 기생이 요모조모 뒤섞어서 두서가 없어지니 억지로 기억하기는 어렵다.” 청운이 언급한 정악들은 조선 시대 중기에 널리 불리던 12가곡으로, <백구사白鷗詞>, <죽지사竹枝詞>, <어부사漁父詞>, <행군악行軍樂>, <황계사黃鷄詞>, <처사가處士歌>, <춘면곡春眠曲>, <상사별곡相思別曲>, <권주가勸酒歌>, <양양가襄陽歌>, <매화타령梅花打令>, <수양산가首陽山歌> 등이다. 고려시대 시조작가 이현보李賢輔의 <어부사漁夫詞>만 빼고는 모두 작자가 미상이다. 12가곡은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가사歌辭보단 길이가 짧지만 풍류적인 서정을 담고 있다. 바뀌고 사라지는 추세여서 회자되는 노래들을 기록해 소개하며 당부했다. "널리 한 번쯤 전해주시라.” 광한루 위로 아른거리는 봄빛, 오작교가의 긴 그넷줄. 염문설(艶說)을 뿌리는 이는 지금 이 어사(李御使)라 아름다운 인연으로 옥중에서 향기를 쌓네. (서춘향(徐春香)과 이몽룡(李夢龍) 누가 알았으랴, 심청이 천상(天上) 선녀의 몸으로 잘못을 저질러 맹인 집안에 떨어질 줄을 해신(海神)의 아내가 되려고 공양미 300석과 몸을 바꾸었는데 궁궐 잔치에서 맹인들의 눈을 뜨게 했구나. (심청(沈淸) 낭자) 화(禍)는 악행으로 인해서 쌓이고 복(福)은 인덕(仁德)으로 말미암는다. 부귀는 쓰디쓴 가난에서 나온다. (연흥보(延興甫)) 가소로운 인간이여, 어리석고 한심한 자여, 이제 제비가를 부르며 서로 친하게 지내려무나. (연자가(燕子歌)) 도시락과 표주박, 대지팡이와 짚신으로 천리강산에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네. (유산가(游山歌)) 세상엔 갖가지 즐거운 일이 많으니, 사람들이 이별가를 부르게 하지 마라. (이별가(離別歌)) 시중에 떠돌아 다니던 작자 미상의 노래 아홉 곡을 채록해 한자로 옮겨 적으며 청운이 밝힌 후기에는 노래에 반영된 인간의 어리석음을 적시하고 있다. "하루는 친구의 책상에서 고시古詩를 보고 빌려서 소맷자락 속에 넣고 와서구가九歌만 베끼고 돌려주었다. 그리고 향을 피우고 등불을 켜고 저녁에그 맛을 세밀하게 완미하였다. 아! 인생은 꿈이니 좋은 꿈도 있고 나쁜 꿈도 있다. 하지만 깨어나면 조만간에 또다시 즐거움을 좋아하여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잊어버리는데, 사람의 마음이 본래 그러한 것이다.어떤 사람은 악몽을 만나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왜 그러한가.대체로 어진 사람은 꿈을 꾸지 않으니, 꿈조차 사람의 선악을 따르는 것인가.항심恒心이 있는 사람은 망상妄想을 하지 않고항심이 없는 사람은대부분 이치에 어긋나게 행동한다.잠꼬대 역시 정상적인 꿈과 배치되는 것이다.깨어나는 것에도 도가 있으니,배우지 않으면 깨어나기 어렵다. 하물며 꿈은 흔적이 없으므로 먼저 마음에서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푸른 하늘에 항상 뜬구름이 있어서 하늘을 가리고 있는 것과 같으니, 그 구름을 쓸어내고 하늘을 본다면 어찌 상쾌하지 않겠는가. 구름이 항상 무심하게 굴에서 나와서 하늘을 가리는 것은 이 시끄러운 세상의 업장業障과 같아서,올 때에는 빠르게 오지만 갈 때는 아주 더디게 간다. 그러므로 한 구절을 베낀 것이다.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상심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어찌 크게 탄식하지 않으리오.아, 부질없는 인생이 꿈인 줄 알지만 깨어나기도 어렵고 또 이해하기도 어렵다. 청운은 게송 '성미가醒迷歌'를 좋아했다. 이런 노랫말을 담고 있다. 그의 삶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라 할 만하다. 미혹을 벗어난 사람은 담백함을 즐기니 초가집에 살며 베옷을 입어도 마음이 편하다 영예를 구하지 않으니 치욕이 가까이 오지 않고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분수대로 살면서 시속을 따르네 사물은 언제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면 만사에 만족하고 수행을 하면 자신의 복록을 만들게 되네 참고문헌: 김영욱,"청운 강진희의 생애와 서화 연구, 미술사 연구," 2017 강진희, '악부합영',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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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수원 평동 벌말 도당에서 펼쳐진 경기도당굿양종승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2022년 5월 17일 화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6시간 동안에 걸쳐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한국문화재재단, 수원특례시, 평동행정복지센터가 후원하고 경기도도당굿보존회와 평동도당굿보존회가 공동 주관한 '경기 도당굿'이 수원 평동 벌말 도당에서 개최되었다. 마을 부녀회와 주민들이 준비한 제물 그리고 문화재청 및 수원특례시의 재정적 지원으로 지난번 도당굿 후, 두 해를 지내고 삼 년째 되는 올해 이른바 ‘이태 말미 삼 년 시력’의 정성으로 치른 것이다. 도당 인근의 공군비행장에서 매번 날아오르는 비행기 굉음이 의례에 적지 않은 지장을 주긴 했지만, 마을의 오랜 전통을 이어가려는 벌말 주민과 도당굿 전승자 모두의 정성을 억누르지는 못했다. 수원 평동 벌말은 서호천(西湖川) 아래의 물이 풍부한 벌판 한가운데에 형성된 전통 마을이다. 이곳에 약 2백여 년 전부터 도당이 있었다. 행정구역상 수원특례시 권선구 평동로76번길 2-7(평동)이며, 2003년 11월 27일 수원특례시가 지정한 향토유적 제12호이다. 도당 안에는 말을 탄 김부대왕과 안씨 부인이 그려져 있는 신화(神畵)가 정면 벽에 걸려 있으며, 그 밑으로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벌말 도당의 주신(主神) 김부대왕(金傅大王, 재위 기간 927-935)은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이 시호(諡號)를 받기 전의 칭호이다. 경순왕은 신라 제56대 마지막 왕이었고, 당시 신라가 고려와 대립하여 전쟁을 일으켜 많은 백성의 목숨을 잃게 하는 것보다는 시대적 개혁과 새로운 나라 건립에 순응하였던 군주였다. 시운을 다한 신라를 전쟁 참화로부터 피하게 하였던 것이고, 그로 인해 민중들은 김부대왕이 죽은 후 사당을 지어 영검한 신으로 신봉하게 된 것이다. 김부대왕이 이곳 벌말 도당에 모셔진 까닭도 시흥 군자봉 구준물(구지정마을)에 서낭신으로 모셔져 있는 김부대왕이 마을로 내려와 유가(遊街)를 돌다가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평동 벌말 주민들은 이곳에 도당을 짓고 김부대왕을 모시면서 구준물의 작은당이라고 불렀다. 경기 도당굿 큰 무녀로 활약했던 오수복(1924-2011)은 구준물 도당을 원도당이라 하였고, 안산 잿머리 도당은 처가 도당이며, 이곳 벌말 도당은 작은 도당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평동 벌말 도당집은 원래 초가였으나, 6, 25전쟁 때 파괴되어 보수하면서 오늘과 같은 한 칸의 시멘트 벽돌에 기와를 얻은 당집이 되었다. 매년 정월 초, 길일을 받아 마을에 닥칠지도 모를 화(禍)를 피하고 풍년이 들 것을 염원하는 목적으로 제를 지냈는데, 큰굿으로 할 때는 이태 말미 삼 년 시력으로 하고, 평년에는 마을 아녀자들이 모여 동탱이(퉁탱이굿)로 굿을 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의 의례는 마을 주위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점차 도시화되어 가자 풍농의 목적보다는 대동을 기원하는 굿으로 바뀌게 되었다. 굿을 하는 날도 조광현(1941년생)만신이 당주가 되면서 매년 정월 열하룻날로 변경하여 개최하다가, 올해부터는 추운 겨울을 피해 늦은 봄날에 하게 된 것이다. 굿 형식도 변화를 겪어 과거에는 당주 집에서 당주굿을 먼저 하였다. 도당굿을 행하기 전날 오후부터 당주집에서 가족 성원 모두에게 혹여라도 붙어있을 좋지 못한 잡귀 잡신을 몰아내고 명복을 발원하는 굿을 한 것이다. 당주굿을 한 후에 다음 날 아침부터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돌돌이를 하고 본격적인 도당굿을 했었다. 또한 도당굿이 시작되면 마을의 남녀노소 모두가 당 앞으로 나와 풍장을 울리고 축제의 한판을 펼쳤다. 마을 공동체는 통돼지를 잡아 굿상을 차리고 마을민 모두가 함께 제물을 나눠 먹으며 대동 잔치에 펼쳤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의 도당굿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어졌었다. 그 형식과 모습이 마치 동해안지역의 별신굿, 호남지역의 당산굿, 강화지역의 곶창굿, 서울지역의 도당굿 및 부군당굿, 황해도지역의 대동굿, 평안도지역의 성황굿과 같은 것이었다. 평동 벌말 도당굿 주관은 관습적으로 경기도 일대의 세습 화랭이집단에 의해 행해졌다. 화랭이는 세습무계를 잇고 있는 남자이며, 도당굿에서 청배를 하고 굿 음악을 바라지 하는 잽이이다. 이러한 화랭이 세습무계 집단에 소속된 여자 무당을 미지라고 하는데 이들은 선굿을 담당하였다. 화랭이와 미지는 서로 간에 부부관계를 맺어 가족 집단을 이루면서 무업을 함께 하였다. 그러면서 화랭이 세습무 집단은 때에 따라서는 판소리를 하면서 광대 역할을 하기도 하고 국악판이나 놀이판에서 여러 가지 기예능 재주를 보이기도 한 것이다. 경기지역 화랭이패 무당들이 집단을 이루며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마을마다 당골판 조직체계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무교에 대한 마을민들의 종교 신앙심과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인식이 공존하면서 마을 단위의 공동체 신앙체계가 절대적 종교 가치관으로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랭이패 집단은 당골판이 형성된 마을에 매여 있으면서 정기적인 마을굿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마을민들의 갖가지 신앙 행위를 만족시키는 데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러면서 마을민의 신앙 욕구를 충족하여 주면서 그에 대한 적절한 대가를 받아 내는데 이를 ‘영동’이라 하였다. 마을 각 가정에서는 봄가을 햇곡식을 거두면 으레 화랭이패 집단에 내어 줄 곡식을 따로 정해 두었다가 무당이 영동에 나서면 내주곤 한 것이다. 이러한 당골판 세습무는 자연스럽게 그들 후손에게 대물림 되었고, 그러한 관습은 적어도 1970년대 중반까지도 면면히 이어졌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강신무가 세습무의 기예능을 학습하여 도당굿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게 되었다. 한편, 경기 도당굿의 과거 흔적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 『해동죽지(海東竹枝)』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 자료를 보면, 오래전부터 도당굿이 행해졌었고, 그 유래는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목적은 매년 시월 큰 굿을 행하여 풍년의 은혜를 갚는 것이라 하였다. 경기 도당굿은 지역적 특징을 담고 있는 도살푸리, 살푸리, 살푸리모리, 발뻐드래, 올림채, 올림채모리, 겹마치(또는 곁마치), 진쇠, 부정놀이 등의 다채로운 장단으로 경기 시나위 곡이 연주되고 부정청배, 시루청배, 제석청배, 조상청배, 군웅청배, 손님노정기, 군웅노정기, 뒷전 등의 신가(神歌)가 가창 된다. 굿 순서는 ⓵ 돌돌이 및 장문잡기 ⓶ 부정청배 및 선부정굿 ⓷ 도당모시기 ⓸ 시루청배 및 시루돋음 ⓹ 살풀이춤 ⓺ 제석청배 및 제석굿 ⓻ 손굿 ⓼ 신장대감굿 ⓽ 무감 ⓾ 군웅청배 및 군웅굿 ⑪ 서낭대 내리기 ⑫ 뒷전 등이다. 여기서 무감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공(空)거리(또는 공구리), 즉 정식 굿거리가 아닌, 굿판에 참여한 마을민들이 신복을 입고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서 신명놀이를 하는 것이다. 무감을 서고 나면 일 년 내내 신덕(神德)을 입어 병도 없고 복을 받는다고 믿는다. 한편, 이번 평동 벌말 도당굿에 참여한 전승자는 당주 조광현 그리고 보존회장 승경숙을 비롯한 전승교육사 오진수, 장영근, 변진섭, 이수자 소명자, 김순중, 유홍란, 박덕근, 백윤하, 이철진, 김영은, 목진호, 고현희, 전수생 고미순, 이인자, 김정분, 김지혜, 정웅태, 박용철, 박지혜, 우성정, 안중범, 이세영, 이재섭, 송병주, 김현아, 남기선, 류정호, 유은경, 김형구 등이다. 경기도당굿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70년 이후부터이다. 집안 대대로 세습무계를 이어 온 오산 출신의 화랭이 이용우(1899-1987)를 비롯한 1990년 경기도당굿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보유자로 인정된 조한춘(1919-1995), 오수복(1924-2011) 그리고 전승교육사 방돌근(1941-2001) 등이 경기지역의 전통신앙 옛 모습을 공개적으로 선보이며 그 참모습을 세간에 드러내면서부터이다. 그러다가 명인들이 작고하자, 한때 그 전승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근년에는 조광현(1941년생)도 활동을 못 하는 상황에 이르면서 위축되었고, 경기도도당굿보존회 자체 갈등으로 적지 않은 고통도 겪었다. 다행히도 분열을 극복하고 일어나 미래 발전을 위한 화합의 장을 마련하였고, 이번 평동 벌말도당굿 또한 개최하게 된 것이다. 이와함께 참여 주민들도 옛 도당굿 모습을 살리려는 노력과 성의가 덧보여 흐믓하였다. 앞서 논한 바와 같이 경기 도당굿은 경기지역 일대의 마을 곳곳에서 풍농 및 풍어 그리고 마을민의 안과태평과 대동단결을 위한 목적으로 이어져 왔던 지역 공동체 민간 신앙이었다. 그러나 마을의 집단조직이 산업화 및 도시화로 붕괴하면서 굿 목적도 바뀌게 되었다. 인근의 영동 거북산당 도당이나 고색동 큰말 코잡이 도당 그리고 부천의 장말 도당, 시흥의 군자봉 서낭당도 마찬가지이다. 관계자 모두가 모두 애를 쓰면서 산이제 도당굿을 행하고는 있지만, 공동체의 옛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굿 형태 또한 과거와는 달리 전통문화 및 신앙예술을 표방하는 굿으로 전환되어 가는데에 의미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시점에 도달한 경기 도당굿은 지역 신앙으로서의 전통을 최대한 지킬 수 있도록 노력을 하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범국가적 및 세계 속의 한민족 전통문화로서의 신앙의례 그리고 민족예술 증표로서 역할도 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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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이 oo협회야!”정작 중요한 것을 모르고 허둥대거나 분별없이 헛다리를 짚고 흔들 때 하는 말이 있다. 호소이고, 외침이고 절규이다. 못 견디게 아프다는 외침이 있어야 누군가가 청진기를 들고 뛰어 온다. 치유의 절대 방편이다. 왜곡과 소문으로 얽힌 사건을 다룬 영화 ‘곡성’(2016년 개봉/곽도원 주연)에서 딸이 애비에게 절규하며 부르짖는 대사가 그것이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이다. 국악인 누군가가 이를 외쳐야 하는 순간을 맞고 있다. 27대 선거 체계를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여 선거 자체를 무효로 만든 ‘前 26대 집행부’ 체제, 법에 의하였든, 사퇴의 결과였든 무효화를 수용하여 재선거를 준비하는 ‘현 집행부’ 체제. 이 두 체제가 21일과 23일 각기 단일 후보로 무투표 당선에 의한 이사장을 배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단체에 두 수장이 나오는 상황이니 파국이 눈에 보인다. 2년 반 동안 비난과 무시로 명목뿐인 ‘국악인 유일 단체 oo협회’를 이번에 다 태워 없앨 것이냐, 아니면 마지막 본체(本體)만은 살릴 것이냐의 절체의 순간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 미구(未久)의 파국은 영화 ‘곡성’에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굿판을 벌리는 애비 ‘종구’와 정신을 차리라며 애비(세상)를 향해 절규하는 딸이 벌이는 막장 장면이 그것이다. ‘마주보고 달리는 기차’의 형국이다. 마지막 절규를 질러보자.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이 oo협회야!” 원점 타격을 해 본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재구성하여 전개하기로 한다.(소설임에도 이하 인물의 경칭은 생략하고자 한다.) 사건 발단: 2017년 7월 21일, 장소는 창덕궁 앞에 자리잡은 한 의상실 지하(당시 oo협회 홍oo 이사장 주관의 여성국극 단체 연습실로 건물 주 이oo에 의해 무상으로 사용하는 공간), 농악분과위원회 총회장. 이 회의에 당시 홍oo 이사장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또한 이oo 부이사장이 참관(27대 이사장 무효소송 원고)하여 적법한 절차대로 개최함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박oo 상임이사와 한oo 과장이 입구에서 출석한 회원을 검수하였다. 그 결과 농악분과 회원이 총 169명임을 확인하고, 그 비례대로 대의원 13명을 배정하였다. 사건 배경: 위와 같이 집행부 주요 4인이 확인한 농악분과 회원 수를 이사회에서 승인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13명의 대의원을 인정하여 투표권을 부여하였다. 이로써 정관 제5조 ‘정회원은 이사회의 승인을 얻은 자’라고 하는 조항을 26대 집행부가 27대 선거를 주관하며 위배하였다. 그래서 불씨를 만들었다. 사건 전개 #1: 26대 집행부가 정관을 위배한 채로 2020년 2월 25일 27대 이사장 선거 개최, 이에 부이사장 이oo이 입후보하여 김oo, 임oo가 나서서 대의원 179명 중 167명이 투표, 이oo이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과반수 득표를 하지 못해 결선투표, 그 결과 이oo 78표, 임oo 86표로 8표를 더 얻은 임oo이 당선되었다. 사건 전개 #2: 26대 체제 부이사장으로, 27대 이사장 선거 집행부 주요 임원으로, 또한 27대 이사장 입후보자로, 그리고 낙선한 자로 이oo이, 자신이 확인하여 준 농악분과 총회 169명을, 자신이 소속된 집행부에서 인준을 하지 않아 절차 위반을 범하고서는 낙선을 했다고 이를 문제 삼았다. 선거무효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소송 이유는 이렇다. 맥락 관계를 생략하면 농악분과만의 문제가 되고 만다. 원래 법적 진술체는 이럴 수가 있다. 그래서 대충 보아서는 전개상의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 "농악분과 총회 회원 169명은 이사회 승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이에 비례(100명 이상의 분과위원회는 13명)하여 배정받은 대의원 13명은 정관상 투표권이 없다. 그러므로 이들이 투표한 13표는 무효이고, 8표 차이는 이의 영향 관계로 보아 선거는 무효이다.” 이를 풀어 말하면 이렇다. 전후 맥락을 담아 재구성하였다. 소설은 다 사실을 바탕으로 꾸미고 더 한 것이다. 최후 진술: "내가 부이사장으로서 2017년 임oo가 분과위원장인 농악분과 총회에 참석하여 회원이 169명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내가 부이사장인 이사회에서 농악분과는 물론, 모든 분과 회원에 대하여 인준하는 절차를 무시해 버려 죄를 범하였다. 그래서 문제의 불씨를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이를 모르고(숨기고) 이사장에 입후보하여 1차에서 최고 득표를 하였다. 나는 불법적인 요소가 있는 투표임을 발설하지 않고 과반수 득표 결선에 나갔다. 승리를 자신하였다. 만일 당선되면 이죄를 관행(慣行)이라고 덮고 이사장에 취임하려고 했다. 그런데 낙선하였다. 그래서 이를 관행이라도 하자(瑕疵)는 하자이니 법으로 심판하자고 하였다. 내가 1차에서 이기고 겨우 8표 차로 결선에서 졌으니 억울해서다. 여기에 공탁금과 선거 비용 등 많은 돈을 쓴 것도 참을 수가 없다. (나는 이 억울함을 내용증명에 담아 전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n/1 죄가 있는 27대 이사장 선거가 불법적인 요소가 있으니, 무효로 다시 선거를 하게 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하였다. 내가 승인 절차를 무시했으니 불법 선거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자신한 것이다. 드디어 변호사를 바꾸어 가며 대응하여 예상대로 1심과 2심에서 승소하여 선거를 무효화 시켰다. 그리고 나는 ‘가처분 정지’ 같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제기해 가며 이미 해체된 26대 집행부를 2년 반만에 복구(?)하여 이사장 선거 체제를 갖추고 다시 입후보 할 수 있게 되었다. 혼자 나오니 100% 당선이다. 이제 취임식 준비를 해야겠다.” 한 인물이 북치고, 장고치고, 춤추고, 모두 다 하고 있다. 김oo 판사가 단호하게 주문을 낭독했다. "피고가 2020년 2월 25일 실시한 이사장 선거는 무효임을 확인한다.” 자,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주문의 패소 피고는 ‘oo협회’이지 ‘27대 이사장 당선자 임oo’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패소한 피고는 실질적으로는 '26대 집행부의 oo협회'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당선자 임oo가 패소한 피고인줄로 알고 있다. 다시 맥락대로 부연하면 이렇다. "원고이면서 동시에 n/1 피고이기도 한 이oo이 승소한 원고이고, 동시에 패소한 원고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더불어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이사장 당선자 임oo은 이 소송의 피고 oo협회의 대리인이다. 그래서 임oo은 집행부의 결정에 따를 뿐이지 적극적으로 독자적인 결정을 할 위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이 때문에 언론과 ‘쟁송수습위원회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이해할 여지가 있다.) 자. 그러면 이제 이 위급한 시점에 누구를 원망하고, 후회하고, 땅을 치고 할 여유가 없지 않는가? 치유책을 찾자. 확실한 것 하나를 찾자. 둘 중 하나를 변별하여 심판할 잣대를 찾자는 것이다. 본질에 접근한다는 것. 이것이 결론이다. "2021년 3월 15일 1차 이사회 신입회원 승인 6월 14일 2차 이사회 분과 총회 대비 회원 승인 7월 10일 각 분과 총회 개최” 이 같은 기록은 ‘현 집행부(부이사장 이호연)’의 내부 이사회 회의록에서 확인한 사실이다. 문제는 이 체제의 회원 승인 절차는 자격이 있는 자를 이사회에서 결의한 것이라면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 2년 반 동안 소송의 주범(?)인 ‘회원의 이사회 승인 절차’ 문제를 발견 이후, 정관을 준수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선거 주체의 정통성을 결정짓는 필수 요건으로 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소용돌이를 겪은 뒤의 개전(改悛)의 징표이며, 승인 절차를 수행한 집행부의 존재 증명과 그 존재의 계속성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21일과 23일 선거는 이사회 승인 절차를 거친 자격이 확인된 대의원들에 의한 투표여야 정통성을 인정받는다. 그러므로 그 대의원들은 반드시 다음 세 가지를 주목하여 선별해야 한다. 첫째, 기록으로 확인 가능한 이사회 회원 승인 절차 여부, 둘째, 공식적인 계좌로 확인되는 회비 납부 실적 여부(대납 관행 불용), 셋째, 집회 과정에서의 금품수수 의혹 행위 여부 등을 살펴야 한다. 다시 말해 소송에서 문제가 된 정관 규정대로 ‘이사회 승인’ 절차라는 하자 치유(治癒)가 된 대의원들에 의한 이사장 선출 여부가 잣대라는 것이다. 과연 23일 선거(총회)를 하는 ‘현 집행부(부이사장 이호연)’가 선출한 이사장이 정통성이 있는가. 아니면 ‘전 26대 집행부(부이사장 김학곤)’가 선출한 이사장이 정통성이 있는가. 이는 투표한 대의원 자격을 적확하고, 세세하게 따져 그들에 의해 선출된 이사장을 문화체육관광부에 보고하면 되는 것이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문제를 치유한 주체가 시행하는 선거가 진짜인겨, 이 oo협회야!” "그럼, 누가 진짜인지를 검증하지?” "바보야. 그건, 두 선거 주체와 투표한 대의원들의 ‘집단 양심’, ‘집단 지성’에 맡기는 거야! 이 처분 말고, 이제 뭐 더 있어?” *사족: 이 글은 픽션을 가미한 것임으로 반론은 정중히 사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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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악협회와 유네스코, ‘불구부정’의 두 장면찻잔 속의 향기 나는 물은 더럽지 않다. 이 물이 버려져 하수구에 이르면 깨끗하지 않은 물이 된다. 다시 이 물이 땅에 스며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물은 더럽지 않다. 이런 관점의 이동을 ‘불구부정(不垢不淨)’이란 말로 표현한다.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고 풀이하지만. 처한 곳에 따라 가치와 성격이 달라진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다음의 두 상황도 이런 경우가 아닐까 한다. #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는 지난 1월 13일 서울고등법원 민사재판부 항소심에서 패소했다. 이로써 27대 이사장 선거는 무효가 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국악협회는 지난 1월 19일 ‘입장문’을 냈다. "절체절명의 위기로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는 부끄러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라는 고백했다. 그리고 "2012년 이후 당시 이사장과 집행부는 정회원 승인 없이 협회를 운영해 왔던 것”이라며 전임 집행부에 책임이 있음을 밝혔다. 나아가 당시 부이사장이 출마하여 낙선한 분(이용상)이 소송을 제기한 것이니 ‘황당’하다고 하였다. ‘입장문’은 이를 공론화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주장은 소를 제기한 시점이거나 적어도 1심 패소에 직면해서라면 호소력이 있지만 항소심까지 패소한 이후이니 의미가 없다. 더욱이 항소심 막바지에 수습위원회가 결성되어 합의를 종용하였음에도 불응한 상태이니 더욱 호응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입장문’에서 매우 긍정적이고 주목되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그것은 이번 판결을 수용한다고 한 사실과 이의 결과로서 전면적인 개혁에 대한 의지가 담겨있다는 점이다. "한국국악협회는 현재의 위기를 딛고, 새로운 체제로 다시 태어나 구습의 허물을 벗겨내고 새 도약의 한국국악협회로 거듭나는 환골탈태(換骨奪胎)할 것을 약속한다.(중략) 한국국악협회는 백만 국악인들과 함께 노력할 것이다.” 분명하게 개혁 의지를 표명한 것은 분명하다. 나아가 매우 진보적인 개혁 의지를 내보이기도 하였다고 본다. 즉, ‘입장문’의 "내부 여러 문제도 민주적인 절차가 필요하고 한 명 회원의 소리도 귀 기울여야 하는 현실”이란 대목이다. 이는 전 조직의 수평적 관계 설정과 실질적인 전승 주체인 전국 170여 개 지부에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여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한다는 획기적인 발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해 12월 5일 결성되어 중립적인 위치에서 양측의 합의로 쟁송을 끝내자고 호소한 수습위원회 4차의 성명서 개혁 방향과 일치하는 것이다. 매우 긍정적인 입장 표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개혁의 주체이다. ‘입장문’의 맥락상으로는 한국국악협회가 개혁의 주체인 듯하지만, 과연 ‘현 이사장과 이사회’가 또는 ‘한국국악협회 집행부’가 주체가 될 수 있는가이다. 왜냐하면 당선 이후 개혁의지를 보이지 않다 한정된 자격만을 가지게 된 피고측 입장에서 주체로 나선다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주체에 따라 개혁의 원천인 명분과 정당성의 담보 여부가 결정된다. 그 주체는 소송 당사자가 아닌, ‘수습위원회’여야 한다. 수습위원회는 ‘양측은 항소심 판결을 무조건 따르고 개혁에 함께하라’고 권유한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서 법적·제도적 권한 이상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한국국악협회가 한정적인 권한을 가진 입장에서 발표한 ‘입장문’일지언정 ‘환골탈태’를 표명한 것은 수습위원회와 개혁 방향이 일치한다. 이런 사실에서 개혁은 정당성이 있는 수습위원회를 통한 완성해야 한다. # 최근 일본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눈물로 아리랑을 불렀던 니가타(新瀉)현 사도(佐渡)시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일단은 내각의 제지를 받았다고 하지만, 2024년으로 미뤘다는 것이지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논란은 계속될 듯하다. 유네스코와 인류 문화유산, 그리고 아리랑을 생각해 본다. 유네스코(UNESCO)는 1997년 제29차 총회에서 산업화와 지구촌화 과정에서 급격히 소멸하고 있는 무형문화유산을 보호하고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제도’(Masterpieces of the Oral and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를 채택했다. 이 때 마련된 ‘아리랑상’(Arirang Prize)은 이 제도의 일환이며, ‘아리랑’은 이 제도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그리고 2012년 우리는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로, 2년 후 북한은 ‘조선민요 아리랑’으로 각각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아리랑이 유네스코라는 국제적 권위로부터 인류 보편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에서 흐뭇해하였다. 그러나 등재 10년을 맞는 오늘에 와서는 유네스코의 권위에 대해 결을 달리하게 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2012년 아리랑 등재 심사 기간에 문화운동 단체의 "남북 합의로 공동 신청하겠다”고 한 제안을 무시한 사실이다. 이 때문에 2년 후 각각 다른 국명, 다른 이름으로 등재하여 ‘아리랑 분단’을 시키고 만 것이다. 아리랑이 한민족의 노래라는 사실과 상징성을 고려하라는 주장을 배려했다면 ‘아리랑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당사국이 합의하면 공동 등재를 수용한다는 유네스코 정신을 위배한 것이기도 하다. 다음 역시 유네스코가 큰 실망을 준 사례이다. 바로 2015년 강제노역의 역사를 가진 하시마섬(端島)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한 사실이다. 서구와의 기술 교류를 통해 비서구 국가 최초의 산업화를 이뤘다는 점을 내세워 지정했는데, 조선인 113만 명에서 146만 명을 강제노역시킨 소위 ‘갈등 유산’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한 문화단체는 명동 유네스코 한국본부 앞에서 "아리랑 등재 유네스코, 군함도 문화유산 등재 반대”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인 강제노역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정보센터 설립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유네스코는 "한국이 우려하는 점을 유네스코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를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 의제문에 반영할 것"이란 조건을 달아 등재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과 유네스코는 등재 후 위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도 등재 취소를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일본은 역시 반인도 범죄가 이루어진 강제노역 시설로 '제2의 군함도'로 불리는 나가타현 '사도금광'을 2023년 6월 등재를 겨냥하고 신청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우리는 즉시 1940년대 한국인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동원되어 가혹한 환경하에서 ‘강제로 노동한(Forced to work)’ 사실을 들어 등재를 반대하게 되었다. 일본 내각은 이런 반대에 부담을 느꼈는지 1월 20일 전략상 물러서 신청을 자진 취소하였다. 20여년 간 회비를 가장 많이 내는 회원국이란 일본의 자만심, 이를 거부하지 못하는 유네스코의 처사는 인류 보편가치를 공인하는 권위를 스스로 훼손한 것이다. 이제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의 가치도, 또한 아리랑의 남북 공동 재등재의 명분도 약화되었다. 당연히 유네스코의 권위가 실추된 것에 따른 것이다. 같은 유산을 담은 그릇의 퇴색으로 그 빛이 흐려졌다. ‘수습위원회의 개혁’ 그리고 ‘유네스코 아리랑’, 신년 들어 마주한 불구부정의 두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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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아리랑의 연원(淵源) 소고 -격암유록을 중심으로-국중성/익산 향토사학자 우리가 불러온 ‘아리랑’의 뜻이 무엇인지 그 근원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학자들로 하여금 많은 연구가 있어 왔으나 아직까지 정설이라는 결론은 없었던 것 같다. 그 발생설에 대한 제설의 몇 가지 예를 보면 대략 여섯 가지가 있다. 이외에도 관련설이 많으나 생략하고 필자도 여기에 제시하는 의견 또한 하나 더 보탠다는 의미라 하겠다.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불러온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이토록 오랫동안 전 민족 구성원이 불러왔겠는가? 필자는 이에 대해 격암유록 갑을가 중 아리령(아리랑) 기록을 주목하여 왔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아리랑은 ‘후천개벽 천기도가(後天開闢 天機道歌)’이다. 이를 풀이하면 아리랑고개는 ‘아리령’(亞里嶺)이며 ‘아리(亞里)’는 십승의 마을이나 궁을촌으로 가는 고개(嶺)다. 십승촌(十勝村)은 다른 표현으로 ‘천파(千坡) 즉 하늘고개’이다. 그 고개 위에는 정거장이 있는데, 넘어가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이를 전제로 아리랑 대표사설을 풀이하면 이렇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는 아리(亞里)’로, ‘버금 아(亞)’자에 담긴 십(十)의 형상 그대로 ‘마을 리(里)’는 십승촌=궁을촌=신선 세계를 뜻한다. 곧 아리랑고개 (亞里嶺)는 모든 사람들이 예부터 그렇게 고대하던 극락의 신선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넘어야만 하는 고개(위험한 고비)인 것이다. 바로 하늘 고개(天坡)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사랑이라는 우주 원리를 저버린 자를 말한다. 사랑을 망각하고 그 영혼이 저급하게 타락한 사람들을 말하며, 십리(십승촌)도 못 가고 발병난다(멸망한다)는 것이다. 이러함에서 아리랑은 천기를 감춘 노래로서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 본래 천손(天孫) 민족이요 신선족이던 한민족의 집단무의식에서 발현한 노래이다. 먼 고대의 도인(道人)들이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부르기 시작한 노래인 것이다. 이를 입증한 하나의 단서가 ‘격암유록(格菴遺錄)’ 갑을가(甲乙歌)에 7언의 아리령(아리랑)을 담아 둔 것으로 본다. 격암유록은 시대적 변화에 묻혀있는 우리 고유한 정신문화를 담은 기록으로 ‘아(亞)’를 주목하였다. 이는 하도(하도)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 선현들의 정신문화 요체로소 조선시대 학문적 이념이 되었다. 퇴계 이이선생의 이기론(理氣論) 형성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에 필자는 아리령 대목에 대한 다양한 풀이를 정리하고자 한다. 甲乙歌 아리령(1) 亞裡嶺有停車場 苦待苦待多情任 아리령유정거장 고대고대다정임 亞亞裡嶺何何嶺 極難極難去難嶺 아아리령하하령 극난극난거난령 亞裡亞裡亞裡嶺 亞裡嶺閣停車場 아리아리아리령 아리령각정거장 험난한 산에 수레가 머무는 곳 괴로움이 많으나 뜻에 맡기고 험난해 오르기 힘든 산 어려움을 겪으며 가는 산 아주 험난하고 험난한 산 험난한 산위 수레 머문 곳 甲乙歌 아리령(2) 亞裡嶺有停車場(아리령유정거장) 苦待苦待多情任(고대고대다정임) 亞亞裡嶺何何嶺(아아리령하하령) 極難極難去難嶺(극난극난거난령) 亞裡亞裡亞裡嶺(아리아리아리령) 亞裡嶺閣停車場(아리령각정거장) 아리령에 정거장이 있네 몹시 고대 고대하던 다정한 님 아아리령은 무슨 고개인가 고되고 넘기 어려운 고개일세 아리아리 아리고개 아리령누각이 정거장이로다 甲乙歌 아리령(3) 亞裡嶺有停車場 苦待苦待多情任 아리령유정거장 고대고대다정임 亞亞裡嶺何何嶺 極難極難去難嶺 아아리령하하령 극난극난거난령 亞裡亞裡亞裡嶺 亞裡嶺閣停車場 아리아리아리령 아리령각정거장 乙矢口耶所望所望 人間生死甲乙耶 生死決定龍蛇知 을시구야소망소망 인간생사갑을야 생사결정용사지 아리랑 고개 위에 정차장이 있다 고대하던 다정한 임 부르며 아리랑 고개는 어떤 고개인가 고개 넘어가기 어려운 고개로다 아리 아리 아리랑고개 아리랑고개 전각에 정거장있네 을시구야 아리랑고개 넘기가 소망이로다 인간의 살고 죽음이 갑을 새 질서다 생사가 용과 뱀의 해 결정됨을 알지어라 甲乙歌 아리령(2)는 아리랑 박사 제1호인 박민일 교수(강원대)의 학위논문에서의 해석이다. 甲乙歌 아리령(3)은 4행에 ‘乙矢口耶~ ’를 첨가했다. 3편 모두 같으면서도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모두 ‘亞’를 주목하고 강조한 사실이다. 이는 필자의 소견이기도 하다. 이를 기본으로 격암유록과 아리랑에 대한 맺음말을 하고자 한다. 아리랑의 ‘아(亞)’는 역(易)의 구도(構圖)에서 나왔으며 그 의미는 천체 우주관적인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원리가 담겨있다. 그 뜻이 아리령(亞裏嶺) 이었다. ‘하도’가 중국 땅에서 건너온 낮선 학문이었으나 우리대로의 생활풍토에서 여과의 세월을 거쳐 우리 모습으로 나타난 ‘亞’자 속의 ‘十’자의 과정은 저 멀리 원시 선민적부터 고난의 고개와 고개를 넘고 넘어 이어져온 행로가 한반도에 이르러 아리령(亞裏嶺)의 고개를 넘어 아리랑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이 글은 2020년 12월 ‘익산향토문화’에 수록한 논고를 중심으로 새로 작성한 글이다. 그리고 김득황 ‘한국사상사’, 조남현 외 ‘조정래 아리랑연구’ 등을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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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잡상 - 모기, 복숭아 그리고 국악협회 -갑작스레 규모를 줄여 이사하다 보니 모든 공간을 책으로 채우게 되었다. 에어컨 설치도 선풍기 놓을 자리조차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빌라 맨 위층 끝이라 모든 문을 열고 살아도 되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모기에 시달리게 되었다. 오늘 밤도 겨우 잠들려는 즈음에 웨~이~잉 하는 모깃소리에 잠자리를 털고 말았다. 불을 켜고 소리 낸 놈을 추적하려다 보니 아예 잠은 멀리 보내야 했다. 내친 김에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어 불면의 ‘한여름 밤의 잡상(雜想)’을 끄적이게 되었다. 60년대 전깃불이 없던 시골 벽촌에서 산 이들이라면 ‘7월의 공포’(?)란 말에 공감을 표할 것이다. 중복(中伏)을 전후한 7월 한여름 밤의 모기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 흔히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나게 되면 ‘학(瘧)을 뗐다’라고 하는데, 이는 무서운 질병 말라리아를 ‘학질(瘧疾)’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병의 감염원이 모기라는 사실에서 그 위험성을 알게 한다. 대개 외양간 같은 가축우리와 화장실 문을 개방하고, 논이나 개울 같은 물을 가까이하는 주택 구조 때문에 모기의 극성을 함께 하게 된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유일한 대처법은 기껏 등잔불을 끄고 모깃불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린 나이로서는 모기에 대해 증오와 공포를 느낄 만도 한 것이다. 모기에 대해서는 조상들도 극히 증오를 표하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이 시 ‘모기를 증오함(憎蚊)’에서 "몸통도 그리 작고 종자도 천한 놈이/어째서 사람을 보면 침을 그리 흘리느냐”라고 투정하고 "부리 박아 피를 빨면 족함을 알아야지/어찌하여 뼈에까지 독기를 주고 가냐”라며 공포를 드러낸 데서 알 수가 있다. 이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생태에 대한 연구가 매우 깊다는 데서 알 수가 있는데, 그 결과를 인용하면 이렇다. 모기는 1억 7천만 년 전에 출현하여 3천 5백여 종으로 진화했고, 암컷은 한 번에 100~200개씩, 한 달에 3~7번 알을 낳는데 매일 수십억 마리를 탄생시킨다. 암컷은 수컷과 단 한 번 짝짓기 하여 일생에 필요한 모든 정자를 받아 몸속에 저장했다가 조금씩 꺼내 수정해 알을 낳는다. 흡혈하는 종은 200여 종으로 이들은 보통 초속 0.5m로 나르며 소리를 낸다. 부리는 톱날침과 바늘침 1쌍씩과 흡혈관 1개로 자기 몸무게의 2~3배나 되는 6~9㎎을 흡혈하며 이때 내뿜는 액(液)으로 발병을 시킨다. 이 액의 독성(毒性)으로 학질을 일으켜 매년 72만 명을 사망하게 한다. 이는 광견병으로 죽는 사람은 2만 5천 명, 뱀에게 물려 죽는 사람은 5만 명, 전쟁이나 테러 등에 의해 죽는 사람은 47만 명이니 ‘지구상 가장 치명적인 동물’일 수 있다. 극히 작은 액의 독성이 치명적이라니 그저 귀찮은 존재를 넘어 공포의 대상이 될 만도 한 대상이다. 잠 못 들게 한 모기를 미워하다 보니 자정을 막 넘기는 순간이다. 이때 나와 같이 잠 못 드는 이가 또 있었다. 경쾌한 이메일 도착 벨이 울려 열어 보니 조치원에 사는 지인 Y가 먹고 남는 복숭아를 보내려 하니 새 주소를 알려 달라는 내용이다. Y는 10여 년 전 ‘복숭아 축제’를 기획했던 지역문화 운영에 탁견을 가진 분이다. 매년 맛있는 복숭아를 보내주는 분인데, 큰 모자를 쓰고 땀을 흘리며 복숭아를 따는 환한 모습을 떠올리니 미소가 머금어진다. 그리고 나를 40여 년 전의 한 기억으로 내달리게 한다. 기억 속의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1975년 12월 24일, 훈련소 입소를 위해 친구와 함께 논산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이때 여인숙 근처의 작은 식품점에서 복숭아 한 무더기를 보고 호기심에서 모두 샀다. 안주를 겸해 샀는데 매우 특별한 맛을 보았다. 말랑하면서 향이 매우 강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이 복숭아는 10월 숙기(熟期)를 거쳐 11월 첫눈을 맞고서 수확하는 ‘설(雪)아’라는 백도 종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한겨울까지도 보관이 된다는 데, 당도와 향이 일반 복숭아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이다. 이때의 경험 이후 나는 복숭아에 대한 암묵지(暗默知)를 갖게 되었고, 여름 과일로 참외나 수박보다는 복숭아를 꼽게 되었다. 오래 전의 경험이지만 회상하면 크리스마스 이브의 쓸쓸함과 삭발의 허전함을 채워준 그 친구가 그립고, 향과 맛으로 가장 좋아하는 과일로 만든 그 겨울의 복숭아가 떠올라 입맛을 다시게 된다. ‘복숭아’는 원래 이름이 '복셔ᇰ(화)'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복사꽃을 뜻하는 ‘복셔ᇰᇰ+花’를 열매까지 뜻하게 되어 ‘복셔ᇰᇰ화-> 복숭아’로 변화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복숭아는 전 세계에 약 3천여 품종이 있는데, 원산지는 중국이고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양으로 전해졌고 17세기에는 아메리카 대륙까지 퍼지게 하였다. 중국 명대(明代)의 소설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9천 년이 걸려 익는 과일을 먹고 달아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과일이 복숭아인 판타오(蟠桃)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야생의 돌복숭아가 있는데, 천식, 기침, 기관지염 등의 약재로 쓰인다. 이 야생 돌봉숭아의 약성(藥性)과 강한 향으로 하여 민속적 대상으로 활용되어 오기도 한다. 그러다 오늘과 같은 품종을 갖게 된 것은 1906년 황실(皇室) 시설인 ‘원예모범장(園藝模範場)’에서 백도·천홍·대구보·백봉 같은 개량 품종 20여 종을 재배, 보급한 것으로부터라 한다. 복숭아의 주성분은 수분과 당분이며 유기산이 1%가량이다. 비타민A가 풍부한데 과육은 씨 주변이 분홍색이냐 흰색이냐로 나뉘는데 모두 아스파라진산이 많다. 발그스레한 색깔과 탐스러운 모양을 꽃으로 착각한 벌레나 벌이 많이 꼬이는 편이라 일반적으로 제맛을 볼 수 있는 기간이 초여름에서 초가을로 짧은 편이어서 제철이 아니면 맛보기가 힘든 과일이다. 식감은 익은 정도나 종류나 품종에 따라 묘하게도 다른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 복숭아에도 미워해야 할 약점이 있다. 모기의 액 못지않은 독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과육과 털에 의한 알레르기이다. 이 증세는 유전적인 경우가 많은데, 항원-항체 반응의 결과로 연속되는 재채기에서부터 심한 생리적 기능까지 마비시킨다고 한다. 이런 독성을 범죄에 이용하기도 하는데, 몇 년 전 개봉한 영화 ‘기생충’에서 털 알레르기를 이용한 위계(僞計) 장면 같은 것이 그 예가 된다. 세상 이치가 참 묘하다. 그토록 향과 맛이 매혹적인 복숭아가 이런 독성을 지니고 있다니. 아마 맛과 향의 지나침에 대한 절제라는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싶다. 모기에서 복숭아로 이어진 잡상을 갖다 보니 잠은 점점 멀리 가버린다. 동틀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와있는 메일 하나를 열었다. 그런데 이 메일 내용이 나를 오늘의 현실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것은 국악계의 현안인 국악협회 사태에 대한 것이다. 현 제27대 임웅수 이사장이 선거와 관련하여 문제가 있어 차점 후보가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이 때문에 이사장이 결위(缺位) 되는 사태를 맞았다. 국악계의 큰 잔치인 창립 60주년 사업도 추진하지 못하고, 코로나로 어려움에 부닥친 국악계에 전승 의욕을 추동시키지도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사실 이 협회는 명실상부한 민속악계의 최고 협의체로 국립국악원과 함께 우리 국악을 이끌고 온 주체이다. 이런 단체가 법원 결정에 따라서는 수장(首長) 없이 관선이사(변호사)로 대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관선 이사가 현 사태를 알고 관리할 수 있는 국악인이 아니고 법률가일 뿐인 일개 변호사가 선임된다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이러니 비판은 당연할 듯하다. 메일을 꼼꼼히 읽어 보니 국악협회에 대한 이 비판의 속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근래 20여 년간 시행된 이사장 선출 선거 방식에 독소조항(毒素條項)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투표권을 갖는 회원 자격을 매우 허술하게 규정한 조항이다. 이 때문에 후보가 회원 자격이 없는, 또는 상실된 회원들을 확보하여 회비를 일시에 대납시키는 등의 편법으로 이들의 표를 매수하여 당선되는 부당행위를 해 온 것이다. 이의 부작용으로 많은 이사장들이 당선 후 후유증을 앓거나 이번처럼 발목이 잡혀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협회 정관상의 회원 자격 부여와 회원 자격 회복에 관한 규정이 완비되지 못하였고, 규정을 무시할 만큼 무질서한 상태에서 선거가 치러졌다는 것이 된다. 당연히 관례(慣例)라는 이름으로 묵과(黙過)해 온 적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행 정관 제3장 임원선출 조항에서 "후보 등록 6개월 이전 가입한 회원만이 선거권을 갖는다.”는 등으로 자격을 강화해야 한다. 또한 선거인단은 반드시 후보자의 기본적인 도덕성 검증 절차를 도입하여 시행할 것을 규정해야 한다. 이와 함께 회원들의 자세도 일신되어야 한다. 국악인으로서 예술 분야에 종사한다는 자존심을 갖고 공동체 정신으로 운영에 참여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동안 독소조항을 관례라고 안고 왔던 적폐를 단연코 단절해야 할 것이다. 뜬금없는 잡상으로 한여름 밤을 뒤척였다. 그러고 보니 독성은 증오하는 모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맛과 향으로 매료시키는 복숭아에도 있고, 전문 예능인들의 모임에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에는 나름의 독성이 있다는 것이고, 그 독성은 화(禍)나 병(病)을 유발하는 것이니 피하거나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먼저 독성의 여부와 정도를 가려내는 눈을 가져야 함은 당연할 것이다. 아, 혹시 나는 누군가에게 독성을 지닌 사람은 아닌가? 잠이 확 깬다.(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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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용의 史事是非] 부끄러운 이천시, 애련정(愛蓮亭) 해설문 오류투성이서수용/한국고문헌연구소장 몇 해 전 고향에서 추석을 쇤 뒤 서울로 올라오다가 차도 막히고 해서 고속도로에서 내려 ‘산 좋고 물도 좋다’는 이천(利川)을 찾았다. 물이 좋다는 것은 이천시 도처에 자리 잡고 있는 온천(溫泉)에서 체험할 수 있었고 산천경개(山川景槪)는 길을 오가면서 저절로 느낄 수 있었다. 더욱이 필자는 달성 서씨이긴 하지만 이천 서씨가 큰집이라서 이천시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어 온 터다. 대문호(大文豪) 이문열(李文烈) 선생님과의 편안한 만남, 이천 쌀밥으로 대표되는 우리 반상 문화에 대한 체험 그리고 이천 도자기의 그 높은 격조까지 느낄 수 있으니 금상(錦上)에 첨화(添花)가 먼 곳에 있지 않다. 온천장에서 일행보다 조금 일찍 나온 터라 시간도 있고 해서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애련정(愛蓮亭)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로만 들었던 바이지만 아름다운 애련정이 이렇게 지척에 있는 줄은 몰랐다. 필자에게 애련정은 퇴계 이황 선생이 어릴 적 공부했던 안동부(安東府) 관아(官衙)의 부속 건물로 익숙하다. 물론 가장 유명한 애련정은 주렴계(周濂溪)의 정자일 것이고, 창덕궁 비원(祕苑)의 어수문(魚水門) 동쪽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정자도 빠질 순 없다. 정조(正祖) 3년 기해(1779) 8월 6일(정사)일, 양력으로는 1779년 9월 15일이었다. 정조대왕이 이천 행궁으로 납시었던 날이다. 필자처럼 온천을 한 뒤 애련정을 찾았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필자와 240년을 뛰어넘어 묘하게 날짜까지 겹쳐졌다. 『조선왕조실록』을 펼쳐서 보니, "주상이 여주(驪州) 행궁에 나아갔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좌의정 서명선(徐命善), 호조 참판 송덕상(宋德相), 행 부사직(行副司直) 김양행(金亮行)은 입시하라고 명하였다.”와 "다시 이천 행궁(利川行宮)에 이르러서는 경기감사(京畿監司) 정창성(鄭昌聖). 이천현감(利川縣監) 이단회(李端會)에게 명하여 백성을 거느리고 앞으로 나오게 하고 승지(承旨) 서유방(徐有防)에게 명하여 하유(下諭)하게 했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날 주상이, "행궁(行宮)의 뜰 가에 연정(蓮亭)이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애련정(愛蓮亭)’인가? 언제 건립되었는가?”라고 묻자 경기감사 정창성(鄭昌聖, 溫陽 鄭氏)은 애련정의 의미를 설명한 뒤 "고을의 고로(故老)에게 물으니, 고(故) 읍쉬(邑倅) 이세보(李世珤)가 처음으로 이 정자를 세웠고, 상신(相臣) 신숙주(申叔舟)가 ‘애련’이란 편액(扁額)을 걸었다고 합니다.”라 하였다. 대화는 이어져서 주상이 다시, "풍월정집(風月亭集, 月山大君 李婷)에 ‘새 못을 파고 또 연을 심으니(鑿得新塘又種蓮), 풍류 사랑스럽고 주인 어질다(風流可愛主人賢)’라고 한 것이 있는데, 이 정자를 이르는가?”하였고, 정창성은 이를 확인한 뒤 "그렇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실록 기사는 마치 어제인 듯 이 정자의 역사와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정조 대왕이 박람강기(博覽强記)하다지만 세조의 장손이요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아들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애련정을 노래한 시를 단번에 외웠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유서 깊은 애련정은 마치 중국 소주(蘇州)에 있는 서호(西湖)의 한 곳을 옮겨온 듯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안흥지(安興池) 중간으로 아치교가 나 있고 그 중심의 작은 섬 위에 단청으로 곱게 장식된 팔작지붕 정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정자는 유서 깊은 연못 위에 조성된 아름다운 정자다. 그런데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정자가 하루아침에 일제의 만행(蠻行)으로 소실(燒失)되었을 때 이천 시민들이 가졌을 분함과 상실감은 어떠했을까? 그러한 한과 염원을 담아 민선 시대의 시장과 시민들은 다시 정자를 짓고 주변을 정화해 오늘날과 같은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름 모를 많은 분의 노고에 존경을 표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역대 관찰사와 수령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선정비군(善政碑群)을 구경했다. 낯익은 인물이 보였다. 학봉 김성일의 후손으로 이천부사를 지냈던 탄와(坦窩) 김진화(金鎭華, 1793~1850)의 선정비다. 이제 좀 미안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렇게 의미 있고 좋은 일을 한 뒤 금상첨화(錦上添花)나 화룡점점(畵龍點睛)은 아닐지라도 이렇게 오래도록 ‘오점(汚點)’을 남길 수 있을까 싶어서 쓰는 것이다. 전제해 둘 것은, 필자 또한 글을 쓰다 보니 오자나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오금이 저릴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보는 안내 표지판이나 금석문의 경우는 일반적인 글과는 차원이 다르다. 보고 또 보아 오류를 없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한 뒤라도 잘못이 발견되면 즉시 이를 따져서 겸허하게 고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애련정 앞에 정자를 복원하면서 아름답게 금속물로 조성된 애련정 표지판의 경우다. 안내판에 간혹 오자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렇게 많은 오자와 오류가 뒤섞여 있는 경우는 처음 본 바라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대략 손꼽아보더라도 이런 현상을 유지한 채 지나온 세월이 글을 쓰는 현재로 23년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더 문제가 아니겠는가. 안내판 하나를 조성할 때의 과정을 생각해 보자. 기안을 올려 업자에게 넘기기까지 길게 이어졌을 ‘결재 과정’이다. ‘담당자-계장-과장-국장-부시장-시장의 결재를 얻어서 다시 담장자-해당 제작업체-제작 완료-시공업자-시공-담당자 확인-제막식-일반에 공개’라는 긴 과정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꼴이다. 따지자면 누구를 탓할 일도 못 된다. 『논어(論語)』에 보면 ‘子曰 不在其位하야는 不謀其政이니라.’라 했다.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일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함에도 이런 글을 쓴 것은 이러한 현상이 비단 이천시의 애련정 안내판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합리화를 하자면 요즈음은 ‘민주시민 사회’요 그런 사회에서는 ‘시민 참여’가 중요하다고들 하지 않는가? 이제 문제의 애련정 현판의 현상과 이를 필자가 바로잡아 보았다. 붉은 글자는 오류 또는 탈자이다. 이를 바로잡은 것이 수정안(修正案)이다. 현 애련정 안내판 애련정(愛蓮亭) 이천시 향토유적 제15호, 경기도 이천시 안흥동 404호 이천읍지(利川邑識)에 의하면 객사(客舍) 남쪽에 정자(亭子)가 언제 창건(創建)되었는지는 모르나 세종10년(1428)에 중건하고 세조 12년(1456) 이천부사(利川府使) 이세보(李笹珤)가 다시 중건(重健)하였으며 정자 옆 습지에 안흥지(安興沚)를 파서 그 한가운데 연꽃을 심고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孰舟)에게 애련정(愛蓮亭)이란 명칭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월산대군(月山大君):이정(李婷)(조선9대 성종의 형), 서거정(徐居正), 조위(曺偉)등 많은 시인들은 애련정의 경치를 읊은 시를 남겼고 임원준(任元濬)과 김안국(金安國)의 애련정기(愛蓮亭記)와 애련루기(愛蓮樓記)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중종 23년(1528), 숙종 14년(1688), 정조3년(1779)의 기록에는 역대 임금님들이 영릉(英寧陵) 행차길에 이천행궁(李川行宮)에 머무르며 으레 붉은 연꽃이 어우러진 애련정(愛蓮亭)을 돌아보았다고 전한다. 순종황제 원년(1907) 벌떼같이 일어났던 정미의병(丁未義兵)때 일본군(日本軍)이 이를 진압하고자 이천읍내 483가구를 불태운 충화사건(衝火事件)이 있었으니 이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본다. 이천시에서는 지방자치 시대를 맞이하여 18만 시민의 의견을 모아 1998년 애련정을 복원하였다. 필자 수정안(修正案) "애련정(愛蓮亭) 이천시 향토유적 제15호 경기도 이천시 안흥동 404 번지 이천도호부(利川都護府)의 객사(客舍) 남쪽에 있었던 이 정자(亭子)가 언제 창건(創建)되었는지는 미상(未詳)이다. 이천읍지(利川邑誌)에 의하면 세종 10년(1428)에 중건하고 세조12년(1466)에 이천부사(利川府使) 이세보(李世珤)가 중건(重建)하였으며, 정자 옆 습지에 안흥지(安興池)를 파서 그 한가운데 연꽃을 심은 뒤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叔舟)에게 애련정(愛蓮亭)이란 편액(扁額)을 걸게 했다 한다. 그 뒤 월산대군(月山大君:李婷, 조선9대 成宗의 兄)과 서거정(徐居正), 조위(曺偉) 등 많은 시인 묵객들이 애련정을 찾아 시를 지었고, 임원준(任元濬)과 김안국(金安國)은 애련정기(愛蓮亭記)와 애련루기(愛蓮樓記)를 남겼다. 중종 23년(1528), 숙종 14년(1688), 정조 3년(1779)에 국왕들은 영릉(英陵) 행차(行次)에 이천행궁(利川行宮)에 머물며 애련정(愛蓮亭)의 아름다운 연꽃을 구경했다고 전해진다. 정미의병(丁未義兵, 1907) 봉기(蜂起) 당시 일본군(日本軍)이 이들을 강제로 진압하고자 이천 읍내 483가구를 불태운 만행(蠻行)이 있었는데 유서 깊었던 이 정자는 이때 불타 사라졌다. 이천시에서는 지방자치 시대를 맞이하여 18만 시민의 의견을 모아 1998년 애련정을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역사성을 갖고 있는 애련정, 이천시는 빨리 바로잡아야 한다. ‘애련정(愛蓮亭) 해설문 바로잡기’를 위해 자문단을 꾸려 수정, 교체해야 한다. 무지와 무관심의 결과이다. 후손에 부끄럽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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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아리랑읍’으로 개명(改名), 어떻습니까이동식/ 前 KBS 해설실장 前부산총국장 2002년 해외 근무를 마치고 잠깐 시간을 내어 고향 문경을 방문하는 길에 초등학교 3년 반을 다닌 충북 진천의 광혜원을 찾았다. 그때 승용차로 이동하면서 물어물어 만승초등학교를 찾았는데, 교정으로 가는 길이 조금씩 바뀌고 학교 건물도 새로 지어 옛날 추억을 되살리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학생 때 타고 오르던 느티나무가 그대로 있어서 그걸 보는 것으로 추억의 아쉬움을 메울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학교가 있는 곳은 원래 진천군 만승면 광혜원리였고, 만승면에 있다고 만승국민학교(초등학교로 바뀜)였는데, 이 만승면의 이름이 언젠가부터 광혜원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게 궁금했지만,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지내다가 최근에 보니 2000년에 이름이 바뀌었단다. 만승면이란 이름은 한자로 ‘萬升’(만승)이어서, 어릴 때는 뜻을 알기 어려웠는데, 升이란 글자는 곡식의 양을 재는 되, 말이라는 계량 단위 중의 되에 해당하니 이곳이 됫박으로 만 개 이상의 소출이 나는, 너른 옥토가 있는 땅이란 뜻이 되어 굳이 나쁜 뜻은 아니라 하겠다. 그런데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인 1910년 우리나라 전 행정구역을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광혜원이란 오래된 이름을 제쳐놓고 자의적으로 갖다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광혜원은 사통팔달의 교통 요로였기에 조선시대 나라에서 공무 출장이나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관원들의 숙식과 갈아탈 말을 제공하던 원(院)이 있던 곳으로, 충주 감영에 근무하던 충청 관찰사들도 이곳에서 업무 인수인계하였고 그 터가 지금도 남아있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유서 깊은 동네였다. 또 널리 베풀다는 뜻도 담겨 있어 만승보다는 뜻이 더 좋다. 그러기에 지방의 읍면 이름을 주민들의 뜻에 따라 바꿀 수 있게 된 이후인 1999년 상반기에 주민들이 ‘만승’이라는 이름 대신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광혜원’으로 이름을 바꿔 달라는 청원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주민 1천57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97.2%의 주민이 찬성함으로써 진천군에서 주민들의 의사를 확인하고 충청북도에 행정구역 조정계획을 올려 승인을 받음으로써 2000년 초에 드디어 이름이 광혜원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행정구역에서 읍면의 이름을 바꾸는 것은 주민 90% 이상이 찬성한다고 하더라도 해당 도의 타당성 분석과 도의회 승인, 행정자치부 승인 등의 복잡한 절차가 있지만 최근 우리나라는 자신이 사는 행정구역의 이름을 기왕이면 일제시대에 멋대로 책정된 이름보다는 그 땅의 역사와 유래, 지정학적인 인연, 인물과 풍속, 특산물 등을 고려해서 많은 곳이 새 이름을 얻고 있는데,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못한 것 같다. 충북 영동군의 황금면은 이미 1991년에 추풍령면으로 바뀌었고,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은 2007년에 대관령면으로 바뀌었다. 내가 충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듣던 이름인 상모면이 2005년에 온천 이름을 딴 수안보면으로, 이류면이 2012년에 대소원면으로 바뀌었다. 눈에 띄는 것으로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이 2009년에 김삿갓면으로 바뀐 것과 동강에 있는 유명한 한반도 지형의 이점을 살라기 위해 2015년에 영월군 서면을 영월군 한반도면으로 바꾼 것, 또 영월의 수주면을 2016년에 무릉도원면으로 바꾼 것 등 전국에서 나름대로 지명의 특색과 이점(利點)을 살리기 위해 그동안 참으로 많은 변경이 있었음을 김윤승 지리산 문학관장의 조사 결과를 보고 알게 되었다. 전남 담양의 남면은 2019년에 가사문학면으로 고쳤다. 이 일대에 역대 문인들이 부른 멋진 가사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 것에 착안한 것이리라.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은 2015년에 남한산성면으로 고쳤다. 훨씬 알기가 쉽다. 그 전의 지명을 보면 일제가 한 군(郡)의 경우 읍을 기점으로 동서남북의 방위를 표시하는 명칭을 많이 갖다 붙였는데, 이런 것들이 어느새 각 지자체와 주민들에 의해 자기 고을, 마을을 자랑하고 알리는 지명으로 바뀐 것이다. 자 그러면 문경이 고향인 필자에게도 욕심이 생긴다. 문경이라는 이름은 옛날 경상도 쪽에서 과거시험을 보러 올라갔다가 급제했다는 경사스러운 소식(慶)을 제일 먼저 듣고(聞) 접하는 것이란 뜻이어서 그 유래와 역사가 찬연하다. 따라서 그 문경이라는 이름 자체를 굳이 피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이제 문경이 그동안 군(郡)에서 시(市)로 바뀌면서 예전 군청 소재지인 점촌이 문경시로 바뀌는 바람에 그전에 그냥 문경이라고 부르던 문경읍(邑)의 명칭이 애매해지고 혼란이 오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문경읍에 대해서는 더 나은 이름을 찾아가는 것이 어떤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김윤승 지리산 문학관장은 문경에서 나온 국연문집(國硏文集)창간호에서 문경을 ‘문경아리랑읍’으로 부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고 나섰다. 알다시피 문경은 문경아리랑의 본고장이다. 문경아리랑은 2012년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리랑의 원조라고 한다. 문헌상 처음으로 ‘아리랑’에 ‘문경새재’가 등장하는 것은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1896년 오선악보로 남긴 ‘아리랑’에서이다.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오 / 아르랑 얼사 배띄어라 // 문경새재 박달나무 / 홍두깨 방맹이 다나간다" 이 노래는 경북에 있는 ‘문경새재’를 거론하였지만 동부민요의 메나리 토리가 아닌 서울·경기를 중심으로 하는 경(京)토리 선율구조로 되어있어서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아리랑을 부르는데 거기에 문경새재 박달나무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리랑 연구가 김연갑에 따르면 '문경새재'는 이어 조선조 말 음악교육자인 이상준(李尙俊, 1884~1948)이 1914년 펴낸 朝鮮俗曲集(조선속곡집)에 오선악보로 소개된 아르랑타령에도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 / 아리령 아리령 아라리오 아리령 띄여라 노다가게 ...."라고 등장한다. 이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는 전국적으로 당시 대중들 사이의 야한 유행어로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문경새재’는 경남 밀양시 지명이 달린 <밀양아리랑>에도 등장한다. 1926년 대구 달성 권번 출신 김금화(金錦花)가 유성기 음반으로 취입한 초기의 밀양아리랑타령에는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얼시고 날 넴겨줄까 / 문경아 새자는 웬 고개드나 구부야 구부로 눈물이 난다 /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얼시고 날 넴겨줄까" 이다. 물론 문경지방에서 부르는 문경아리랑에도 ‘문경새재’가 등장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 문경새재에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가네 /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 애기 손길로 놀아나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 문경새재를 넘어갈 제 구비야 구비 구비가 눈물이 나네" 아리랑 고개라는 것은, 어느 특정 지역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들이 대체로 수긍하는 것이지만 이처럼 전국의 아리랑에 문경새재와 박달나무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문경’이야말로 아리랑 음악과 문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문경에서는 <문경새재아리랑>을 이어받은 송옥자 씨가 신문 방송을 통해 문경의 아리랑 전통을 전국에 활발히 알리고 있다. 2008년부터 문경시는 ‘문경새재아리랑제’와 아리랑 관련 행사들을 매년 성대하게 펼쳐오고 있다. 문경새재 입구에는 각 지역 아리랑 노래비를 세워 놓았다. 바로 앞 ‘옛길박물관’ 내에는 음반, 영화 아리랑 대본, 아리랑에 관련된 서적 등이 모여 전시되고 있다. 전국 방방곡곡 전해오는 아리랑 가사 10,068수가 책으로 집대성됐다. 국내 유명 서예가 122명이 2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아리랑 가사를 붓으로 쓴 것이 50권의 책으로 완성되어 문경시 옛길박물관에 영구히 보존되고 있다. 문경읍 관음리에는 시조시인 권갑하 님이 세운 '문경아리랑시조문학관'이 시조 속에 녹은 아리랑 문화를 모아 보여준다. 문경시 문경읍 하초리는 2014년 8월 14일에 '문경새재아리랑 마을'로 선포됐다. 이 마을에서 1917년부터 2001년까지 84년 동안 살았던 송영철 옹은 <문경새재아리랑>을 문경새재아리랑답게 부른 마지막 가객(歌客)으로, 그가 부른 소리는 다른 아리랑과 확연히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아리랑에 관한 한 역사적으로나 민속적으로나 정선아리랑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곳이 문경읍이기에 차제에 이 읍의 이름을 ‘문경아리랑읍’으로 하자는 것이 그 제안의 취지이고, 필자도 이에 적극 공감하고 있다. 문경시가 아리랑의 본향이라는 정체성을 극대화하고 브랜드 효과를 선점하려면 문경읍을 ‘문경아리랑읍’이란 이름으로 먼저 개칭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계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름을 처음 쓰는 지역이 된다. 이미 경상북도에서는 지난 2007년 이후 최근까지 10개 시·군이 13개 행정구역의 이름을 변경했거나 변경을 추진 중이다. ‘문경아리랑읍’이란 이름을 선점하는 것은 절대 빠르지 않고 오히려 늦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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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대한국인 안중근-최태선과 안용희’ 출시"대한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소”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한복을 입은 안중근 의사의 형장 유언(遺言)이다. "송죽절개 남아일도 굽힘없이 나는 가리 대한국인 안중근” 2021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기념일 출시된 가요 '대한국인 안중근'의 가사 일절이다. 111년 오늘, 32세로 조국독립과 동양평화를 염원하며 순국하셨다. 그 영웅적 삶은 세월이 흐름에도 찬란함을 더하고 있다. 이를 기념하여 가요 <대한국인 안중근>을 수록한 특별음반 ‘대한국인 안중근-최태선과 안용희’가 출시되었다. 늦깎이 여가수 최태선 서원대 휴머니티 교양대학 교수(1965년생)의 절절한 가족사를 투영(投影)하고 작곡, 작사, 편곡, 연주, 구성, 제작, 1인6역의 열정을 투여한 색소폰이스트 안용희의 합작이다. 타이틀곡은 안의사의 정신을 담은 '대한국인 안중근'이다. 이어 수록한 곡은 '대한의군 최부길', '강제징용 최방발', '보고싶은 아버지'가 수록되었다. 최무길, 최방발은 노래한 최태선의 조부와 부친, 두 분의 영웅은 안중근의사, 최태선의 영웅은 조부와 부친이다. 그리고 노래를 듣는 우리들의 또 하나의 영웅은 가수 최태선이다. 모두 노래는 최태선, 작사, 작곡은 안용희이다. 최씨 3대의 가족사는 곧 민족사이다. 조부 최무길(1889~1965)은 안의사의 정신을 따라 3.1 김천시장 만세운동으로부터 만주 항일투쟁에 참여하였고, 부친 최방발(1914~1992)은 가난을 유산으로 받아 북해도 탄광 강제징용 후 귀국하여 머슴살이, 그 가난 속에서도 주위에 학문하기를 권하며 안의사 전기를 머리맡에 두고 사신 부친, 두 분의 정신을 따라 고학으로 고난을 이겨낸 최태선(1965)이다. 최태선, 우리시대 영웅적 삶을 살았다. 버스안내와 보험외판 등으로 이룬 성취를 2009년 저서 '최태선의 아름다운 변화'에 담아 출간했다. 눈물겨운 부친의 ‘머슴살이와 꽃신’ 사연, 3살 위 언니의 ‘2만3천원과 김천성의여중 졸업’ 등의 회고와 청주대학 경영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같은 벅찬 순간들이 담겼다. 부친의 유언, 조부의 독립유공 공적 추서를 실현하였다. 2018년 부친의 유언을 따라 조부의 독립유공 공적 증빙을 보훈처에 상달, 드디어 인정 받았다. 대전 현충원 5묘역에 ‘독립운동 애국지사 최무길’로 모셨다. 우리시대 작은 영웅 최태선의 이 같은 삶에 영감을 받은 안용희는 기록과 현장 답사를 통해 가사를 짓고, 곡을 새겨 음반으로 기록했다. 타이틀 곡 <대한국인 안중근>은 2절 가사에 구국의지의 웅장함을 전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산화한 넋을 기렸다. 후렴에서 이를 강조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의거 당시 하루빈 역두의 정황을 효과음과 나레이션으로 처리하여 실감을 준다. 후렴이 호쾌하다. "만민평화 너를 위해 비호같이 초개같이 이 한 목숨 다 바쳤노라 만민자유 만민통일 만민행복 만민사랑 나의 조국아 영원하라" '대한의군 최무길 '은 안의사 정신을 따라 독립운동을 한 최 교수의 조부의 가려진 삶을 애통해 하였다. 김천 장날 시위에 참여하고 안의사의 정신을 따라 만주로 가 이름 없이 독립운동을 한 사적을 그렸다. 손녀 딸의 눈물어린 모습이 그려진다. "아-어찌할꼬 아-어찌할꼬 온 천지 강토가 짓 밟혀져 추풍 낙엽이로다/선량한 만백성 바람 앞에 등불이로다." 선량한 만백성 바람 앞에 등불이로다." '강제징용 최방발'은 부친의 수난사를 그리고 있다. 일제강점기 질곡의 상징인 강제징용의 한 가운데를 산 부친의 고난에 눈물어려 부르짖고 있다. 탄광 갱 속의 암울이 분노로 변하게 한다. 후렴은 고난의 서사를 그리고 있다. "영문도 모르고 도라꾸에 실려 이름모를 배에 실려 망망대해 파도를 넘으니 외적 땅이 아니던가." 마지막 곡 '보고싶은 아버지'는 최교수의 사부곡이다. 동시에 이 시대 모두의 사부곡이기도 하다. 2절 가사를 전재한다. 십원짜리 동전 쥐어 주시고 가슴깊이 안아 주시며 어디 좀 다녀오마 말씀만 남기시고 떠나신 그 길이 머슴살이라는 걸 철부지소녀 알 수가 없었어요 2년 후 어느 여름 밤 모기 불 연기 속 대문 열리니 아하 아버지 꿈속에서 그리던 아버지 캄캄한 밤 무섭고 두려워 소리죽여 불렀던 아버지 노란나비 꽃무늬 고무신 막내딸 주시려고 사오셨어요 너무 너무 이쁘고 갖고 싶던 꽃신이지만 어찌 아버지 품속만 하오리까 어찌 아버지 숨결만 하오리까 아버지 아버지 보고 싶어요 2년 후 어느 여름 밤 모기 불 연기 속 대문 열리니 아하 아버지 꿈속에서 그리던 아버지 캄캄한 밤 무섭고 두려워 소리 죽여 불렀던 아버지 노란나비 꽃무늬고무신 막내딸 주시려고 사오셨어요 너무 너무 이쁘고 갖고 싶던 꽃신이지만 어찌 아버지 품속만 하오리까 최태선 교수의 가족사이자 곧 우리 근대사이다. 4가지 가요가 기록한 소중한 기록이다. ‘특별음반’이란 수식어가 자랑스럽다. 음반 제작을 마친 작곡가 안용희는 1996년 작곡하여 널리 연주된 '대한국인 안중근'이 최태선 교수의 가족사와 인연을 맺어준 것을 뜻 깊다고 하였다. "부끄럽게도 안중근 의사님 의거일(10월 27일) 및 순국일(3월 26일) 국가 공식 행사시 숭의여고 합창단, 대한민국 군가 보존회 합창단, 서울대 음대, 동아대 음대 등 교수 및 음대 학생들의 합창 및 중창으로 매년 정성어린 공연을 해주셔서 감복 할 따름입니다. 이 인연으로 최태선와의 소중한 인연으로 연결되어 가족 3대를 소재로 이번 음반을 낳았습니다. 이 인연을 소중히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최태선 교수는 소감을 묻는 통화에서 "할아버지와 아버님의 수난사는 나의 고난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안의사의 정신을 따른 할아버지, 머슴살이 중에도 이웃에 한문을 가르치신 계몽 정신, 이는 제가 받들어 계승해야 할 가풍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모든 고난은 두 분의 빛나는 삶으로 하여 반사된 일부로 생각합니다. 이 번 음반을 통해 할아버지의 만주 독립운동 사적이 인후보증 등을 통해 복원되리라 믿습니다. 이 음반을 안의사와 할아버지와 아버님께 바칩니다.”라고 당당함을 보였다. 한편 최태선 교수와 안용희 작곡가는 오늘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숭모회 행사에 참석하여 음반 기증을 한다고 밝혔다.(金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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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시대적 어려움을 극복하다김 세 종 (다산연구소 소장) 연말연시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희망찬 새해맞이에 들뜬 때이지만, 코로나19 전염병으로 인하여 전 세계가 어둡고 불안에 떨고 있다. 2020년 3월 18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 범유행 사태의 지시사항과 몇 가지의 사회적 고려사항을 다루어 정신건강 및 정신사회적 문제와 관련된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코로나시대는 "격리 및 사회적 활동의 제한, 공포, 실업 및 재정적인 요인으로 인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고, 자살율의 잠재적 상승에 대한 우려로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하였다. 상식적으로 불안과 공포, 우울이 지나치면 몸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또 다른 코로나19 전염병 증후군이 되고 있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불안과 공포, 우울을 떨쳐내는 생활 속 지혜로 음악을 추천해 보고 싶다. 음악은 마음이 움직여서 소리로 표현된 예술이다. 따라서 음악은 기분이 다운됐을 때, 바로 기분을 전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음악의 3요소인 선율[멜로디], 화음, 리듬[장단] 중에서 선율에서 주는 긴장 완화나 화성에서 주는 편안함, 포근함, 리듬에서 주는 역동성 등이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음악은 쉽게 동화하고 조화롭게 어울리는 효용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은 음악을 가까이하였는데, 이유로, 첫째, 음악은 바름[正]과 그름[邪]을 분별한다. 둘째, 음악은 서로 다른 소리를 하나로 만든다. 셋째, 음악은 몸을 닦고 성품을 다스려 본래의 참마음으로 되돌린다. 넷째, 음악은 혈맥을 뛰게 하고 정신을 유통시킨다. 다섯째, 음악은 마음을 즐겁게 한다. 등을 들고 있다. 이는 코로나시대에 사람들의 심리성향이 점점 내향적으로 변하는 변곡점에서, 음악 활용은 불안과 공포, 우울을 다스리는 힐링의 대안이 된다. 곧, K-Music이 침체한 국민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달래주며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K-Music이 K-방역으로 자리매김 요즘 TV만 틀면 트롯트가 흘러나온다. 그야 말로 트롯트 전성시대이다. 트롯트는 한 때 일본의 ‘엔카’와 닮았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기도 하고, 특별한 이름 없이 ‘유행가’, ‘유행소곡’ 또는 ‘뽕짝’이라고 불리며 쇠퇴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할아버지 할머니, 중·장년층이 즐겨듣던 음악이라는 인식을 넘어 2030세대는 물론 10대까지 열광적으로 향유층에 합류하면서 새로운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국민의 생활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일단 트롯트는 멜로디가 따라 부르기 쉽고, 노랫말이 직설적이고 솔직하며, ‘꺾기’식 창법(바이브레이션)에서는 우리나라 민요의 어법을 수용한 신민요 양식을 변별적으로 응용하고 있다. 또한 박자에서는 한 박자를 3박으로 나누기 보다는 한 박자를 2박, '쿵짝 쿵짝' 하는 4분의 2나 4분의 4박자 리듬으로 구분하고 있다. 3박으로 나누어 느릿느릿한 3박 보다는 2박을 둘로 나누어 듣는 사람에게는 역동적이고 신나게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트롯트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누가 뭐래도 토롯트 가수의 목소리에 흐르는 감정이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있기 때문일 게다. 가령 우리가 어떤 감정을 슬프다고 말할 때 사실은 그 안에 슬픔이라는 말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있다. 그 슬픈 감정 속에는 서러움, 애절함, 절박함, 상실감, 원망, 쓸쓸함 등이 담겨 있는 것처럼 음악에서 표현되는 소리의 짙음과 옅음을 나타내는 농담(濃淡)이 아닐 수 없다. 분명 트롯트는 사람의 저 깊은 마음에서 길러낸 감정 표현과 다양한 음색이 창의성으로 어우러져 만들어낸 소리 예술이요, 시간 예술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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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송별회, 그러나 따뜻한 안녕!종로3가 국악로, 거기서 ‘~형’이나 ‘형수’ 소리가 들리면 그건 열에 아홉은 그의 목소리다. 김호규, 국악신문 사장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지 1년이 지났다.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누구나 기억되지 않는다. 누구나 기록되지도 않는다. 김호규는 기억되고, 기록으로 남는다. 국악인으로, 언론인으로, 문화운동가로. 풍류의 태토 정읍에서 태어났다. 설장고 명인 김병섭의 아들로 자랐다. 국악예술고등학교를 나와 장고를 멨다. 그러다 돌연 독보적인 길을 걸었다. 국악신문 편집 겸 발행인 ‘김호규의 길’이다. 오늘 그를 회고하고, 추모하는 모임이 있었다. ‘국악신문 창간자 故 김호규 1주기 추모 소상씻김’이다. 진행자 진옥섭이 눈물지어 회상했다. 장남 김하늘이 꿋꿋하게 해적이를 풀었다. 마지막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발행한 293호 1면 기사 주인공 임웅수가 후배로서 추모했다. 여건상 모임은 조촐했다. 참석한 지인들은 잔 올려 재배하며 영 이별을 고했다. 가까운 예인들은 악가무로 위로했다. 씻김 과장은 넘치도록 충분했다. 쑥물 향물 청계수로 씻겨서 넋풀어 넋올리고 길닦음으로 배송했다. 여보게 호규, 지난 해 황망히 보낸 서운함을 오늘에서야 풀게 되었네. 우리의 따뜻한 마음 잘 받았겠지. 그랬다면 마음 놓고 가게나. 자네가 남긴 ‘국악신문’, ‘국악 사랑’ 잊지 않고 기리겠네. 내내 내일은 국악로에 가서 내가 먼저 "김호규 사장~”하고 불러 보겠네. 아, 대답하지 않아도 되네. 그대 어디 있는지 아니까! "김호규 사장~”(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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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대한민국국악제’ 첫 런칭 매치 공주시백제문화의 고도 공주시에서 ‘2020 제39회 대한민국국악제’가 펼쳐진다. 공주시(김정섭 시장)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임웅수 이사장)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39년 역사상 첫 지방 개최이다. 이는 국악협회가 전국 17개 지회와의 새로운 관계설정의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1981년 ‘제1회 대한민국국악제’를 시작으로 39회를 맞는 이번 국악제는 한국 대표 국악축제라는 위치를 갖고 있다. 이번 행사는 코로나19의 여파로 각종 국악 공연이 취소되는 상황에서 지방과의 런칭 공연으로 활로를 튼 것으로 판단된다. 더불어 국악 공연에 관심 많은 국악 애호가들에게는 규모나 출연진으로 볼 때 큰 선물이 될 듯하다. 대한민국국악제의 첫 런칭 매치를 공주시와 함께 한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우선 중고제 판소리의 중심지이자 박동진 명창의 고향인 공주라는 사실이다. 이는 공주시가 내세우는 ‘중부권 문화중심 도시 공주’의 큰 배경이기도 하다. 다음은 ‘충청권 국립 충청국악원’ 유치를 위해 노력하는 지자체 격려차원이란 명분이다. 공주시는 충청권 국립국악원 설립이 우리나라 지역 국악 발전 기여와 향수권 확보라는 큰 뜻을 갖고 유치위원회를 운영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번 국악협회 지방 공연은 위와 같은 당위성과 명분을 제시하면 런칭 매치가 가능하다는 전범이 될 것으로 본다. 국악제는 두 분야로 진행된다. 학술 세미나와 공연이다. 학술 세미나는 30일 공주문화원에서 2시부터 ‘국립 충청국악원의 시대적 요구’라는 주제로 박일훈(전 국립국악원장) 원장을 비롯한 국악계 저명인사들이 국립충청국악원의 가치와 전망을 논의한다. 공주시는 강릉, 문경 등 지자체의 유치사업 중 가장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지역이고, 발표자 박일훈 원장은 공주유치위원회 주역으로 지역 국악원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해 왔다. 31일에는 ‘영혼으로 빚어내는 역사의 소리’라는 슬로건으로 공주시 아트센터 고마 야외특설무대에서 4시 개막식을 시작으로‘전통 연희 한마당’과 ‘본 공연’이 개최된다. ‘전통 연희 한마당’에서는 공주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광명농악’ ‘진도북춤’ 등 7개의 전통 연희팀들이 전통 연희 모꼬지 공연을 벌일 예정이다. 이어서 열리는 본 공연은 박성환 명창의 중고제 판소리를 시작으로 이광수(비나리), 안숙선 명창, 이호연·유지숙·김차경(민요) 명창, 경기도당굿시나위춤보존회, 왕기철·왕윤정 부녀(심청가), 송선원·박준규(매나리), 박종필(덧배기 춤), 사물놀이 진쇠, 모선미(해금),가수 마야 등이 공연을 펼쳐지며 안산시립국악관현악단(임상규 지휘자)이 연주로 참여하는 다채로운 공연이 진행될 예정이다.(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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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담소리 최영숙재담소리는 고종 때에 가무별감을 지낸 박춘재(1881-1948, 또는 1883년생)가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초에 적립한 재담과 소리를 결합한 독특한 형태의 서사적 음악극이다. 1910-1920년대에 축음기 판이 남아 당시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백영춘(1946년생)은 이창배(1916-1983)로부터 경서도 소리를 배우고, 소리꾼 정득만(1909-1992)으로부터 박춘재의 재담소리를 배웠다. 따라서 이를 복원하여 1999년에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처음 선을 보였다. 특히 백영춘은 박춘재의 제자이며 발탈 보유자였던 박해일(1923-2007)로부터 발탈과 재담소리를 아울러 전수받았다. 따라서 재담소리는 2008년에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았으며 보유자로는 백영춘이 인정받았다. 2014년 백영춘이 명예보유자로 인정된 이후 2017년에 최영숙이 보유자로 인정받아 전수활동에 전념해 오고 있다. 재담소리는 각종 재담과 경서도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등장인물의 연기력과 춤이 가미되어 가무악극이 결합된 종합예술이다. 재담이란 즉흥성이 강한 해학적이고 재치있는 말을 지칭하는데, 전통연희에 광범위하게 전승된다. 따라서 가면극, 인형극, 발탈, 줄타기, 진도 다시래기, 굿놀이, 각종 놀이 등에 재담이 두루 나타난다. 그런데 백영춘이 전승하는 서울 지역 장대장타령, 장님타령 등의 재담소리는 고유한 재담에 경서도 소리를 삽입하고, 일정한 서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한양의 장대장이 가산을 탕진하고 만포첨사로 부임하는 과정과 무당과 눈이 맞아 살림을 차리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등이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다. 재담과 소리가 결합되어 서사적으로 전개되는 연희 중에서, 발탈은 발탈이란 독특한 도구와 검은 막을 이용하며, 인형극은 인형과 검은 막, 다시래기는 장례도구와 장례의식이 첨가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에 비해 재담소리는 재담극의 성격에 소리가 가미되어 있으며, 두 인물이 직접 등장해서 소리와 함께 연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징이다. 따라서 다른 도구 없이 오직 재담, 연기력, 경서도 소리, 춤 등의 다양한 예술적 능력을 보여주는 종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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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영화] 춘향뎐 (2000년)판소리 춘향가 구구절절 애처롭다. 춘향전 스토리를 살피면, 조선조 숙종 시대. 남원부사 자제 이몽룡(조승우 분)은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남원고을에 내려온 지 수삭이 지났으나 오로지 책방에 갇혀 공부만 하자니 짜증이 나던 차에 방탕한 마음이 생겨 관아의 하인 방자를 앞세우고 광한루 구경을 나선다. 날나리 흥겨운 가락과 함께 농악놀이가 펼쳐지는 단오날. 씨름판도 벌어지고 녹림속 그네터엔 처녀들의 그네놀이가 신명나는데 그 무리속에서 해도 같고 달도 같은 뛰어난 미인을 발견한 몽룡은 그만 넋을 잃는다. 퇴기 월매(김성령 분)의 딸 춘향(이효정 분)이라고 방자가 넌지시 이르자 몽룡은 당장 불러오라고 재촉한다. 몽룡의 성화에 못이긴 방자는 춘향에게 몽룡의 뜻을 전하지만 춘향은 "안수해, 접수화, 해수혈"이라는 아리송한 말을 남기고 향단(이혜은 분)과 함께 그네터를 떠나버린다. 기러기는 바다를 따르고, 나비는 꽃을 따르고, 게는 굴을 따른다는 뜻인 즉, 직접 자신을 찾아로라는 춘향의 뜻을 알아챈 몽룡은 야심한 밤을 틈타 춘향집을 방문한다. 묭룡은 춘향 어미 월매에게 춘향과의 백년가약을 원한다는 뜻을 밝히고 불망기를 써서 자신의 마음이 영원히 변치않을 것임을 맹세한다. 전날 밤, 연못에 잠긴 청룡의 꿈을 꾸었던 월매는 이 일을 길조로 믿고 쾌히 수락한다. 그 밤으로 이루어진 몽룡과 춘향의 사랑은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인 격이어서 16세 아직 어린 것들이 서먹함도 부끄러움도 없이 놀아나는데 순식간에 정신도 육체도 깊이 함몰되어 꿈결같은 세월을 보낸다. 하지만 몽룡의 아버지 이사또가 동부승지로 승진 내직으로 가게되니 몽룡인들 별 수 없이 부모따라 한양으로 가게 된다. 여러 고을을 두루 거치며 호색한으로 소문난 변학도는 남원골 춘향이 절색이란 소문을 듣고 밀양, 서흥 좋은 자리 마다하고 굳이 남원부사 임명받아 서둘러 부임한다. 부임 삼일만에 부랴부랴 치뤄진 기생점고에 춘향이 빠져있자 동헌으로 불러들인 변사또는 어미가 기생이면 종모법에 따라 딸인 너 또한 기생이라며 수청 들기를 강요한다. 비록 기생의 자식이나 명부에 올리지 않았음으로 기생일 수 없고 구관댁 도련님과 백년가약 받들기로 하였으니 이부종사는 할 수 없다고 버틴다. 화가 난 변사또는 춘향에게 거역관장 죄를 물어 동틀에 매달고 모진 고문을 가하지만 춘향은 절개를 굽히지 않는다. 한편, 몽룡은 부지런히 공부해 장원급제 벼슬길에 오르고 암행어사로 임병받아 전라도로 내려온다. 남원 근방에 이르러 여러모로 탐문하던 중에 변학도의 폭정과 춘향의 높은 절개에 칭찬이 자자함을 알게 된다. 걸인 차림으로 몽룡은 옥방의 춘향을 만나고 춘향은 몽룡을 향해 변함없이 뜨거운 사랑을 보낸다. 몽룡은 천기를 누설할 까,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돌아서며 분노를 삭힌다. 다음날 광한루, 각읍수령들의 참석하에 변학도의 생일잔치가 장대히 벌어진다. 잔치가 무르익을 무렵, 암행어사 출두가 붙여지고 몽룡은 변학도를 응징한다. 몽룡과 춘향은 재회하고 동헌은 축제 분위기로 충만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