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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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國樂)국악이란 예로부터 전해 오는 우리 민족 고유의 노래와 연주와 춤의 총칭이다. 국악은 현재 한국전통음악(韓國傳統音樂)과 한민족음악 등 다양한 용어로도 통용되고 있는데, 그 용어들은 범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국전통음악은 전통적으로 전승된 한국음악이며, 한민족음악은 우리민족의 생활 속에서 계승 발전된 음악을 가리킨다.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을 근간으로 계승된 음악을 통칭한다. 이미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을 전통음악이라고 부르는데, 시대적으로는 일제강점기, 즉 1910년 이전부터 있었던 음악을 가리킨다. 또 한편으로는 지금부터 약 50년 전, 즉 30년대 이전부터 있었던 음악을 전통음악이라 부르기도 한다(문화재보호법 참조). 국악은 아악(雅樂)·당악(唐樂)·속악(俗樂) 곧 향악(鄕樂)을 모두 포함하며, 일반적으로 전통음악과 최근의 한국적 창작음악까지를 포함하는 우리나라 음악이다. 이 밖에 한국적인 아이디어에 의하여 작곡된 현대의 음악도 한국음악의 범주에 속한다. 한국음악이란 한국에서 연주되는 모든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 또는 한국적 토양에서 나온 음악을 가리킨다. 한국에서 연주되는 모든 음악 속에는 서양음악도 많기 때문에 이것을 한국음악이라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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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대한민국농악연합회 임웅수 이사장 신년사금년은 농악인 모두가 어느 해 보다 분주했고 바쁘게 보낸 한 해였습니다. 남과 북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서로서로 손을 맞잡고 한반도의 평화를 다짐하며 전쟁과 분단의 가슴 아픈 역사를 청산하고 공동번영의 새날을 열어 나갈 4.27 공동선언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민족의 경사에 전국의 농악인들은 6월13일 광화문 광장에서 [평화가 옵니다, 희망이 옵니다, 정의가 옵니다]라는 깃발을 앞세우고 광화문 광장에서 청와대 앞까지 농악으로 신명을 불러내어 하늘과 땅에 우리민족의 소원을 비는 길놀이를 하였고 구름떼같이 몰려든 세계 만방의 시민들과 어우러져 흥에 겨운 뒤풀이를 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염원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내는 대동의 한마당을 이루었습니다. 10월14일에는 전국의 농악인 2,000여명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매년 11월 27일을 농악의 날로 선포하고, 질경이같은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농악이 민족의 전통문화 유산의 상속자로 당당하게 자리 매김하는 기념일을 갖게 되었습니다. 존경하는 전국의 국악인 여러분 !!!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국적 불명의 문화의 홍수 속에서 올곧은 전통문화의 뿌리를 틀어쥐고 고군분투하시는 여러분은 전통문화의 도도한 역사를 미래의 세대들에게 이어주는 문화유산의 상속자이며, 전령사입니다. 국악인 여러분의 작은 몸짓 하나 하나가 모여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을 엮어내는 정신문화의 주체이고 주인입니다. 황금 돼지의 해 기해년에는 국악인 여러분의 소망을 이루시고 장독과 곳간에도 차고 넘치는 축복의 한해가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대한민국농악연합회 이사장 임웅수 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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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무형문화재 '시조창' 이영준 보유자서울시 무형문화재 된 이영준 명창을 지난 주말에 찾았다. 인간의 삶을 아름답고 값지게 가꾸는 사람이야말로 그의 생애가 뭇 사람으로부터 흠모와 칭송을 받는다. 우리는 오늘날 걸출한 예술가요. 희대의 풍류객인 한 사람을 주목한다. 이영준 문학박사가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47호 시조창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영준 보유자는 지난 2006년 12월 3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고희기념 우리소리음악회(시조, 가사, 가곡)을 마련하여 그동안 갈고 닦아온 시조창을 선보였다. 또한 그는 뛰어난 작품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고 단체전에서도 다수 참가하는 등 예술활동을 벌여왔다. 일찍이 시조창과 삼절(三絶)사상에 투철, 시·서·화에 빼어난 문인화의 대가로서 도인다운 기품을 지녔다. 일세의 경지를 이룬 그의 예술혼, 드높은 이상과 고귀한 투혼으로 자신을 준엄하게 담금질하여 마침내 사계의 권위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청죽(靑竹)같은 지조, 고아(高雅)한 아취(雅趣), 매운 향기로 불굴의 기개를 지녔다. 이영준 보유자의 생애는 실로 드라마틱하다. 특히 예술세계에 심취하게 된 동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30여년 전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큰 병에 걸렸었다. 대학병원에서 큰 수술을 두 번씩이나 받는 등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수술 후 운동을 해야 하는데 장이 제 기능을 하도록 장운동을 꾸준히 하라는 의사의 권유 때문에 단전호흡을 하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일간신문에서 시조를 통해 건강을 회복했다는 김월하 선생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김월하 선생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였고, 이영준 씨은 이때 자신도 시조를 배워야겠다는 마음에 그날부터 시조를 가르치는 곳을 수소문하였고, 시조명인 김규식 선생에게 가서 시조를 배우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시조를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이영준 씨은 마음도 안정되고 건강도 차츰 좋아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전형적인 외유내강인 그의 성격은 굳건했다. 무슨 일이던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이제 막잠에서 깨어난 예술적인 흥미까지 겹쳐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경 야독하며 시조를 읊어도 신명은 날로 더해갔다. 그의 후암동 사무실에는 시조를 읊기 위한 악보며 장구, 음향기기가 질서 정연하게 갖춰져 있다. 시조 생활을 하며 심혈을 기울인 결과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고 다른 예술분야인 그림을 그리고 글씨도 꾸준히 쓰고 있다. 특히 그는 현대미술협회장직을 추대 받아 10여 년간 신진작가들의 등용문인 현대미술대전을 주관하여 국내외 화단에 이름이 나도록 공헌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을 손수 제작, 출품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건강 때문에 배운 시조창은 우리나라는 대표하는 시조인들의 모임인 대한시조협회 중앙본부가 주최하는 전국시조가사가곡경창대회에서 문화부 장관상, 시조인에게 주는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리고 전주대사습놀이 시조부에서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 (사)대한시조협회 이사장직을 추대 받아 60여개 지부 지회를 115개로 확장시켜 우리나라 시조인의 대부분을 망라하는 큰 조직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그는 전통음악을 시조창을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넣게 함으로써 시조사에 빛나는 업적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정신적인 풍요와 건강한 육체를 시조를 통해 얻었다고 자부하는 이영준 보유자는 앞으로 우리 문화의 진수인 시조문화를 더욱 발전시켜 국민 모두가 1~2수의 시조창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읊을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기를 열망하고 있다. 건강 때문에 입문한 시조창이 그에게 명창이란 명예와 시조창계의 전설인 석암 정경태선생의 뒤를 이어받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7호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김호규 기자 hg14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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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설장고 명인 김병섭김병섭 선생은 장고 하나로 한국농악판에서 최고의 기량을 인정받았던 명인이다. 1921년 정읍시 북면에서 태어나 김학순에게 설장고를 배워 우리나라 최고의 설장고 명인으로 올라섰던 김병섭은 어려운 형편 때문에 운명적으로 농악과 만나게 됐다. 김병섭은 자신의 나이 열 한 살 때 자신의 형이 수리조합에서 돈을 빌어서 농악기를 장만하면서 농악을 접하게 된다. 당시 최고의 명성을 날렸던 김학순을 스승으로 사흘 만에 기본가락을 배울 만큼 김병섭은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김병섭은 사흘 만에 기본가락을 웬만큼 터득할 만큼 배우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김학순 씨도 김병섭의 타고난 재주에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나흘 만에 작파(作破)할 수밖에 없었다. 손자가 장고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의 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김병섭은 몰래 숨어서 사흘 동안 배운 가락을 혼자서 연습을 해야만 했다. 대동아 전쟁 때 일본인에 의해 싱가포르 함락 기념축제에서 장고잽이로 나서기도 했던 김병섭은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징용에 끌려 나가 아오지 탄광에서 스물다섯 살 때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마을마다 농악을 다시 쳤고 서울에서는 농악경연대회도 열렸다. 특히 일본군은 당시 정읍농악단의 명성을 알고 기념축제를 하라고 악기를 내주기까지 했으며 정읍마을 농악대회를 불러모아 굿을 하라고 해서 장고를 신나게 쳤다는 기록도 보여 당시 정읍농악의 인기가 우수성이 얼마나 높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이승만 정권시절 그는 새로운 삶을 맞는다. 이승만 정권은 농악을 장려, 해마다 농악경연대회를 열었고 재주 있는 잽이 들은 이곳 저곳에 불려 다니면서 솜씨를 뽐냈다고 한다. 당굿이며, 풍장이며, 걸궁이 쉼 없이 이어졌고 잽이 대접도 푸짐해졌는데 이 때 그의 솜씨는 최고의 주가를 올리게 된다. 이 시기에 정읍을 중심으로 전북 일원에서 그의 가락은 가장 높은 경지의 수준을 보여주게 된다. 이렇게 한창 장고잽이로서 유명해졌을 때, 남원국악원이 우리나라 처음으로 여성들로만 구성된 여성농악대를 만들었다. 이 여성농악대가 순회공연을 하면서 성공을 거둑자, 흥행만을 목적으로 한 여성농악대들이 여기저기서 만들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결국 남자들은 찾아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남자들은 농악을 배우려고 하지도 않고 김병섭은 그러한 여성농악대만을 지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여성농악대는 처음부터 농악의 원형과는 관계없이 흥행만을 노렸기 때문에 변질된 농악이 되어버렸고 그나마 여성농악대가 자취를 감추자 전통농악은 맥이 끊기고 말았다, 그 후 전국민속경연대회가 생겨나서 자유당 때 하던 농악경연대회를 그곳에 합류시켰다고 한다. 1956년 전국농악대회에서 정읍농악으로 개인상을 수상하며 중앙무대에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한 김병섭은 1963년과 1964년에 개최된 제4회와 제5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정읍우도농악이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며, 1956년에 이어 1964년 서울에서 열린 제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설장고로 개인상을 수상해 명인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 전국민속경연대회는 원형보존보다는 우선 눈에 잘 띄게 하는 것이 관심을 더 쏟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그나마 부분적으로 남아있던 여러 지방의 특색 적인 농악의 원형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생전에 몹시 애석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김병섭은 정읍을 벗어나서 1968년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김병섭을 서울로 불러들인 사림이 바로 한국인이 아닌 평화봉사단원로 활약했던 미국인이라는 사실이다. 이 미국인은 김병섭의 장고솜씨를 보고 그에게 매달려 서울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때 김병섭은 식구들을 고향에 둔 채로 올라와 서울 안국동에서 미국인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미국인과 동료들에게 장고를 가르쳤다. 서울로 올라온 후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김병섭은 그의 명성에 걸맞게 한양대와 서울예고, 선호예고 등에 나가 후학들을 지도하며 동암동에 있던 김병섭 농악연습소에서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그의 가락은 전라우도 농악 즉 정읍농악의 진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명인으로 추앙 받을 만큼 튼튼했다. 혼자서 할 때는 설장고와 둘이 할 때는 쌍장고라 하는데, 그의 장고잽이놀이는 느린굿거리, 활발한 동살풀이, 구성진 구정놀이, 흥겨운 덩덕궁이, 격렬한 다르래기로 가락을 달고 맺고 풀면서 몰아간다. 김병섭은 한국 농악사에서 장고잽이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은 전통문화유산에 밑거름이 된다. 특히 그의 장기였던 고깔 설장고는 우도농악의 최고로 꼽히는 김도삼의 제자 김학순, 백남길에게서 배운 정확한 계보를 갖고 있어서, 설장고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온 명인 김병섭, 당시 젊은 세 사람 이정범, 전사섭,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향토적인 가락을 발전 시켰으나 그 내용과 형식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김병섭은 자신만의 독특한 가락을 근저로 정읍농악우도농악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산파(産婆)역할을 했다. 김학순으로 이어졌던 설장고를 이정범이 이어받았고, 또다시 김병섭이 이정범의 전통을 이어냄으로써 정읍우도농악 설장고의 전승구조를 이어내는 가교 역할을 하게 한 인물이 설장고 명인 김병섭이다. 특히 김병섭은 설장고를 체계화하는데 큰 힘을 경주 한 것으로 확인된다. 김병섭의 장고가락을 악보로 만들기 위해 음악을 전공한 외국인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그의 음악세계가 이해가 된다. 그것을 계기로 김병섭은 점차 학구적인 쪽으로 관심을 갖게 되어 농악을 정립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돈암동, 동대문, 종로5가 등 여러 곳으로 농악연구소를 이전하면서 장고교습에 심혈을 기울였다. 김병섭 선생은 1987년 9월 11일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폐암이라는 지병으로 사망했다. 이제 김병섭은 떠났지만, 김병섭의 고깔 설장고는 우도농악의 최고로 꼽는 김도삼 제자 김학순, 백남길에게서 배운 뚜렷한 계보를 갖고서, 설장고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 온 명인으로서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고 있다. 정읍에서 배운 정읍우도 설장고를 중앙무대에 수놓고 세계적 인물들에게 가르쳤던 선구자적 예술인생은 이제 전국 각지로 펴져 나간 후학들로 꽃을 피우고 있어 김병섭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농악사 속에서 예혼(藝魂)을 불태우고 있다. 김병섭은 자신의 설장고가 앞장서기만 하면 대낮의 장도 파해버릴 정도로 기량면에서 최고를 구가했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천하의 김병섭”만이 쳐낼 수 있는 가락과 사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전에 이순을 넘겨서도 일단 설장고만 잡으면 신명을 몰아오고 놀음판은 그의 독무대가 되어 버리고 만다. 판굿놀이의 변화가 다양하고 흥겨워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전설적인 김병섭의 설장고가 그립다. (김병섭류 설장구보존회 정기공연, 김병섭선생 25주기 추모공연에서, 2013-07-26(금) 우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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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응백의 재미있는 국악사설 이야기2012년 신년호부터 국악신문 편집위원으로 하응백 선생이 국악신문 편집에 필진으로 참여한다. 또 <하응백의 재미있는 국악사설 이야기>를 연재하기로 했다. 하응백(河應柏)은 대구에서 태어나 대건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1985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1993년에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청원고등학교, 경희여중 교사를 거쳐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국민대학교 문창대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문학평론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신춘문예, 여성동아 장편소설상, 세계일보문학상 등 문단의 비중 있는 문학상의 심사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이옥봉의 몽혼』등 15권의 편저서가 있으며 2002년 <휴먼앤북스> 출판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국악에 심취하여『 창악집성』(2011)이라는 국악사설을 총망라한 대작을 펴내기도 했다. 현재 <휴먼앤북스> 출판사 대표이자, 사단법인 서도소리진흥회 이사장이다.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을 부탁드린다.(편집자 주) 은근하면서 아름다운 황진이 시조 시조창으로 자주 부르는 황진이의 시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동짓날 밤이 얼마나 긴가. 그 동짓날 밤 시간을 뚝 잘라다가 이불 아래 넣어두었다가, 어룬님 오신날 밤, 잘라놓은 밤을 다시 펴겠다는 내용이다. 동짓날 밤을 잘라다가 어룬님 오신 날 같이 보내면 밤이 더욱 길어질 것이 아닌가. 이 시조는 독수공방하는 여인네가 임과 함께 긴 밤을 보내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어룬님’은 무슨 뜻일까. 간단하게 말하면‘ 얼운 사람,’ 즉 성관계를 가진 사람이다. 신라의 향가 <서동요>에, 선화공주님은 맛둥바을 남 그스지 얼어두고 라는 대목이 있다. 해석을 하면" (신라의) 선화공주님은 맛둥방(훗날의 백제 무왕)을 남 몰래 얼어두고”라는 뜻이 되는데, 이때도‘ 얼어’는 성관계를 뜻하는 말이다. 요샛말로 하면" 선화공주님은 맛둥방과 남 몰래 통정(通情)을 하고” 정도가 된다. ‘ 얼우다‘’, 어루다’가 동사형이며 여기에 명사형 접미사‘ 이’가 붙으면‘ 어룬이’가 되고 이것이 변해 ‘어른’이 되는 것이다. 즉‘ 어른’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성관계를 가진 사람이란 속뜻이 숨어 있다. 황진이와 어룬님이면서 그토록 애타게 황진이를 기다리게 했던 그 복많은 사나이는 누구였을까? 황진이의 시조는 은근하면서도 점잖고 아름답지만, 다음의 가곡 계면조 언편의 시조 한 수는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백발(白髮)에 환양 노던 년이 젊은 서방을 맞초아 두고 센 머리에 먹칠하고 태산준령(泰山峻嶺)으로 허위허위 넘어가다가 과그른 소나기에 흰 동정 검어지고 검던 머리 희였고나 그를사 늙은이 소망(所望)이라 일락배락하더라 ‘환양 노던 년’이란 ‘서방질하는 년’이라는 뜻이다. 머리가 흰 늙은 여자가 젊은 남자와 약속을 해놓고 흰 머리에 염색을 하고 고개를 넘어가다가 마침 소나기를 만났다. 요즘처럼 염색약이 좋았으면 다행이련만, 먹으로 염색을 한 탓에 물이 빠져 저고리의 흰 동정은 검게 변하고 염색했던 검은 머리는 도로 백발로 변했다. 그래서 늙은 여자 소망이 좋았다 나빴다 했다는 것이다. 여자 입장에서 보면 낭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시조는 늙은 여자의 성욕을 비난하면서 풍자하는 내용이지만 그 여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쩐지 좀 슬프다. 유전적으로 좀 일찍 머리가 세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체질적으로 성욕이 강한 여자도 있게 마련인데, 그런 것이 조선시대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남자의 경우는 아주 뻔뻔하다. 남자의 수작과 여자의 유혹 옥 같은 임을 잃고 임과 같은 자네를 보니 자네 긘지 긔 자네런지 아무긘 줄 내 몰라라 자네 긔나 긔 자네나 중(中)에 자고나 갈까 하노라 가곡 계면조 편수대엽 중의 한 수인데, 좀 상상력을 보태 설명을 하면 이런 내용이다. 한 남자가 아내 혹은 자신이 좋아하던 기생(첩)을 잃었다. 죽었는지 다른 곳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옥 같은 임을 잃고 기생집으로 갔다. 그런데 새로 만난 기생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 기생에게 자네는 전번 그 여인과 너무 닮았다고, 그 여자가 환생한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며 수작을 건다. " 자네가 그 사람인지, 그 사람이 자네인지 누가 누구인지 나는 모르겠다”고 뻔한 수작을 건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네이거나 그 사람이거나 누구이든지 간에, 자신은 하룻밤 자고 가겠다는 것이다. 바람둥이 남자가 여자를 꼬실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 중의 하나이다. 여자가 넘어갔을까? 가곡 우조 소용에는 더 재미있는 내용의 시조가 있다. 어흠아 그 뉘 오신고 건너 불당(佛堂)에 동령(動令)중이 내 올러니 홀거사(居士) 홀로 자시는 방안에 무스것하러 와 계신고 홀거사(居士) 노감탁이 벗어 거는 말 곁에 내 고깔 벗어 걸러 왔음네 이 시조의 상황을 재구성 해보자. 깊은 산 조용한 절간에 밤이 왔다. 요사체에는 남자 거사가 혼자 머물고 있다. 건너 불당에는 동냥을 다니는 여승이 혼자 있다. 밤이 깊어지고, 싱숭생숭해진 여승이 거사의 방 앞에 와서,'어흠’하고 기척을 한다. 거사가 묻는다. " 누구신가? ” " 저예요, 건너 방에.” " 남자 혼자 있는데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오셨는가?” " 거사님 탕건 거는 곳에 내 고깔도 벗어 걸려구요.” 여기에 다른 말이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들은 그날 밤, 한숨도 못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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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응백의 재미있는 국악사설 이야기 4-2또 하나 미스터리한 가사가 있다. 육구함도(六衢咸道) 대사중로 얼씨구나 절씨구나 (경기놀량, 이창배의 『한국가창대계』) 육구함도 대삼월이라 얼씨구나 절씨구나 (서도놀량, 김정연의 『서도소리대전집』 '육구함도’는 도대체 무슨 말일까? 이창배는 여기에 " 옛날 진(秦)의 서울 함양(咸陽)의 거리가 넓어서 여섯 갈래가 된다는 말. 넓은 길을 말함.”이라는 주석을 달아놓았다(김정연의 책에는 주석이 없다). 황용주의 『한국경서도창악대계』에는 가사는 이창배의 『 한국가창대계』와 동일하나 해설 부분에서‘ 대사중로’가 갑자기‘ 대사옹구리’로 변해 있다. 황용주의 ‘ 육구함도’에 대한 해석은 이창배와 동일하다. 황용주의 책에도‘ 대사중로’, 혹은‘ 대사옹구리’에 대한 주석은 없다. 1910년대부터 간행된 잡가집에는 이 부분이 어떻게 표기되어 있을까. 즉‘ 육부암도’ 계열과‘ 육구암사(六九庵寺)’ 계열로 나눌 수 있는데 과연 어느 것이 원래의 뜻일까? <놀량>은 원래 사당패들이 불렀던 노래의 하나이다. 사당패는 조선시대에는 천대받은 예인집단이다. 조선말인 1867년 진주목사를 지낸 정현석(鄭顯奭)의 저서『 교방가요』에 보면" 雜(잡요) 山打令(산타령) 遊令(유령) 놀량”을 분류하고 이어 "이것들은 걸사나 사당이 부르는 것이다. 모두 노랫말이 음란하고 비루하다. 지금 거리의 아이들과 종 녀석들까지도 이 노래 를 잘 따라 부를 줄 안다”(성무경 역주, 『교방가요』)고 하고 있다. 즉 <놀량>은 당시의 기록에‘ 노랫말이음란하고 비루하다’고 했고 그 담당층이 걸사나 사당인데, 이창배의 해석대로‘ 육구함도’와 같은 어려운 한문을 사용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 육구함도’가 아니라『 조선잡가집』 계열의 가사‘ 육구암사(六九庵寺)’가 원본이라면 전체적으로 해석이 자연스러워진다. 즉 육구암사는 절 이름이고 대사는 스님을 높여 부르는 말‘, 뭉구리’는 스님(중)을 놀림조 로 부르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앞뒤가 맞아 떨어진다. 서도놀량 가사에서" 어린 낭자 고운 태도 눈에 암암하고 귀에 쟁쟁, 비나이다 비나이다 님 생겨 달라고 비나이다, 삼월이라 육구암사 대사뭉구리 얼씨구나 절씨구나”로 읽으면 연결이 자연스럽다". 육구암사 대사뭉구리 얼씨구나 절씨구나”는‘ 대사’와‘ 뭉구리’의 결합과‘ 얼씨구나 절씨구나’가 가지는 (성행위까지 암시하는) 남녀의 어울림에 대한 포괄적인 표현으로 인해 해학과 풍자의 구절이 된다. 때문에 이 구절 은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실제 공연될 때는 청중 쪽에서 웃음이 한바탕 터지는 바로 그러한 대목인 것이다. 때문에 점잖은 사대부였던 정현석이 『교방가요』에서 <산타령>을‘ 음란하고 비루하다’고 했을 가능성이 많다. 현행가사의‘ 육구함도’는 원래 육구암 혹은 육부암을 나타내는 절 이름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렇다면‘ 육구암’‘, 육부암‘’, 육구암사’가 왜‘ 육구함도’로 변했을까? 1.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사 법당뒤 칠성단에 2.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유점사 법당뒤 칠성단을 1과 2 중에서 원래의 가사는 2다. 그런데 1로도 많이 부른다‘. 팔만구암자’ 즉 금강산에 암자가 많다는 뜻이‘ 팔만구암사’라는 얼토당토않게 절 이름으로 변한 것이다. 경기 놀량의‘ 육구함도 대사중로’도 이런 식으로 와음이 진행되어 전혀 엉뚱한 말이 된 것인데 여기에 진지하게 六衢咸道(육구함도)라는 한자음을 집어넣고"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풀이하였고(이창 배의 『한국가창대계』), 그의 제자인 황용주도 『한국경서도창악대계』에서 그대로 답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필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들의 해석을 그대로 믿어왔던 것이다. 이것이 미스터리가 아니고 무엇일까. (문학평론가) - 하응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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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응백의 재미있는 국악사설 이야기 4-1'산타령’은 산천경계를 노래하는 입창이다. 서서 부르기 때문에 입창(立唱)이라 한다. 이‘ 산타령’에는 경기산타령과 서도산타령이 있다(서도산타령은 원래 ‘ 놀량 사거리’라고 하는데 편의상 여기서는 산타령이라 통일했다). 경기산타령은 현재는 놀량, 앞산타령,뒷산타령, 자진산타령 이렇게 부르고 여기에 개구리타령을 덧붙이기도 하지만 원래는 판염불, 앞산타령,뒷산타령, 자진산타령 이렇게 불렀던 노래이다. 서도산타령은 놀량, 사거리, 중거리, 경발림으로 이루어지기에 산타령이라 하지 않고‘ 놀량 사거리’라 불렀던 것이다. 경기산타령에서 놀량의 원조격인 판염불 가사를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진군명산만장봉에 청천삭출금부용 음도로 음도로 시법이라나무어살바에 동내라 안산이라 주산이라좌우라도 졍용 나무살바 마무라도살바 나무살바충청도라 내포산에 두루두루 한량님이 와 계신데막걸니 여닷동이 걸넛으니 자시거나 말거나나무라도살바 나무살바 일세 동방에 졀도령이세남방에 득청룡 삼세서방에 부정토사세북방에 영안강 도령청정에 무활예삼보철영에 강차지 아금지송에 묘진언 나무라셔살바 나무살바산천초목이 셩님어 나에 구경가기에 좃쿠나 에에헤띄여 네로구나나에에에헤야 에혜띄여 네헤에야 어어 듸이이 이이얼 네로구나말은 네에야 어 이놈 말 들어봐라녹양 버든 길로 평양감영 쑥 드러간다 에에에헤이어네로구나아모려도 네로구나낙낙장송 늘어진 가지 다떠러져 줄거리만 나머지와자 조홀시구 어 이놈 말 들어봐라청산귀영에 올아 황운을 검쳐잡고 에에 이얼네로구나어린 양자 고운 소래 눈에 암암 귀에 쟁쟁비나이다 하나님전에 님생겨 달나지이다고 비내이다락락장송 늘어진 가지 한 마리는 남게 앉고 또 한 마리 들에 앉어체어다보니 울음을 울고 내리 구버보며 우름을 운다해당화 그늘 속에 비만 맞은 제비 새끼 졸졸 흐늘거려 거드려거려노는 사랑 어화둥둥 내사랑이야 어화둥둥 내 간간이로구나(『신구시행잡가』, 1914) 현재의 경기 놀량은 이 판염불에서 불교적이며 무속적인 앞부분을 과감히 버리고‘ 산천초목’부터의 뒷부분만 남겨놓은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재의 가사와 판염불의 가사, 또 서도 놀량의 가사를 비교해 보면 경기 놀량은 판염불의 가사 일부분과 서도 놀량의 가사 일부분을 차용해서 새롭게 짜깁기한 흔적이 확연히 눈에 띈다. 즉 구음부분을 제외한다 해도‘ 육구함도 대사중로’ 부분과‘ 사랑초’ 부분은 서도 놀량에서 차용한 흔적이다. 그런데 경기 놀량의 가사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종일 가도 안성은 청룡이로구나 몽림 일월이 송사리나 삼월이며 도대체 무슨 뜻일까". 종일 가도 안성은 청룡이로구나”는‘ 놀량’이 원래 사당패가 노래한 것이니 이해가 간다. 종일 걸어가 안성 청룡사에 도착했다 혹은 못했다라는 뜻일 것이다. 사당패들의 힘든 삶을 표현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 "몽림 일월이 송사리나 삼월이며”는 무슨 뜻일까? 도무지 알 수 없다. 황용주의 『한국경서도창악대계』에도 이 부분의 뜻은 풀이하지 않고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몽림(夢林) 일월(日月)이 송사리나 삼월이며”라고 한자음을 달고 그 뜻을 "꿈속의 수풀에서 노는 것이 기껏해야 애숭이나 심부름하는 아이의 뜻일 듯하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 해석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앞뒤의 의미 연결이 부자연스러워 전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이러한 해석의 문헌적 어학적근거는 전혀 없는 것이다. 즉 이 가사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용인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간행된 여러 잡가집을 보아도 이러한 가사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구조(舅調) 경기산타령에서 놀량 부분에 해당하는‘ 판염불’에도 이러한 가사는 없다. 현행 경기산타령에서" 종일 가도 안성은 청룡이라 / 몽림 일월이 송사리나 삼월이며”부 분은 이창배의 경기산타령에서만 보이는 것으로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신종 가사인 것으로 판단된다. (문학평론가) - 하응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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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응백의 재미있는 국악사설 이야기 5서도 시창(詩唱)으로 부르는 <관산융마>는 조선 영조 때의 문인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 1713-1775)가 과거 때 시험 답안지로 제출한 시이다. 모두 44구의 칠언(七言)으로 되어 있다. 원제목은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嘆關山戎馬: 악양루에 올라 관산의 전쟁을 탄식함)>이었고 1746년(영조22년) 가을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여 2등에 오른 작품이다. 이 시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 두보(杜甫)가 만년에 천하를 유랑하다가 악주(岳州)의 악양루에 올라 안녹산의 난으로 어지러워진 세상을 한탄하며 지은 오언율시인 <등악양루(登岳陽樓)>와 시인 두보의 유랑을 소재로 하고 있다. 신광수는 과거에 응시하여 2등이 되었지만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하고 팔도를 떠돌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게 된다. 신광수는 과거를 치르고 4, 5년이 지난 30대 후반 평양에 유람삼아 놀러 갔다. 그때 평양의 유명한 소리기생인 모란을 만난다. 평양은 뱃놀이가 예로부터 유명했던 곳. 달밤에 신광수와 모란은 술을 배에 싣고 뱃놀이를 하는데 이때 모란이 신광수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불렀다. 자신이 지은 시를 가사로 하여 노래를 부르다니. 신광수는 감격하지 않 을 수 없었다. 당대의 시인과 당대의 명창이 만나 불꽃이 튀었던 것이다. 그 장면을 후에 신광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일찍이 평양에서 놀 때 매양 모란과 함께 경치좋은 누각이나 멋진 배를 타고 등잔불 앞과 달 아래에 있었다. 모란이 문득 <관산융마>를 노래하면 그 목소리가 지나가는 구름도 멈추게 하는 것 같았다. 이 기록을 보면 신광수와 모란은‘ 매양’ 늘 함께 붙어 있었다는 것이며 연광정 같은 누각이나 배에서 소리를 듣고 놀았다는 것이다. 모란이 노래를 얼마나 잘 불렀으면 지나가는 구름이 멈추는 것같이 느꼈을까. 모란이 노래를 잘 부르기도 했지만 신광수의 감정이 더 고조되어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신광수는 평양을 떠났고 세월은 흘러 25년이 지나갔다. 신광수는 가난뱅이 시인으로 전국을 떠돌다가 60줄이 넘어 영조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 관리가 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청와대 비서실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이때 평양 기생 모란이 서울로 올라왔 다. 공연을 하러 온 것이다. 그녀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수많은 장안의 한량들이 모여들어 그녀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의 장면을 신광수는 시로 남기고 있다. 평양기생 모란이 이원에서 소리함을 듣고 붙임 명기 모란이 머리 희어 소리하러 서울에 왔네 그 노래 솜씨 만인을 놀라게 한다네 평양 연광정 위에서 듣던 관산융마 오늘밤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청류벽 아래 모란배 타고 노래 소리 듣고 놀기를 몇 번이나 하였던고 서울 장안 오늘밤도 그때 가을 대동강 밤같이 소슬하다 이원은 남으로 광통교에 접하고 지척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하지만 신선은 멀다 들으니 그대 고운 노래 소리 여전히 좋은데 아름답던 홍안에는 주름이 잡혔네 2연의‘ 모란배’를 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들이연인 관계임을 암시하는 말일 수도 있다. 여하간에 모란은 머리가 희어 서울에서 옛날의 연인 앞에서 노래를 했다. 그렇다면 모란은 서울에 왜 왔을까. 당시의 여러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평양 기생이 서울에 와서 노래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혹 그제서야 벼슬길에 올라 힘이 좀 생긴 신광수가 마련한 자리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옛 연인과의 해후와 그 소리와의 해후를 위해 신광수가 애써 마련한 자리였다고 믿고 싶다. 그렇게 해서 신광수는 젊은 날 모란에게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관산융마>에는 그들의 애절한 사연이 담겨 있다. (문학평론가) -하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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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응백의 재미있는 국악사설 이야기 6경기명창이나 서도명창들이 자주 부르는 민요 중에 <양산도>라는 노래가 있다. 많이 부르는 가사는 다음과 같다. * 에라 놓아라 아니 못 놓겠네 능지를 하여도 못 놓겠네 에헤이 에- 양덕맹산(陽德孟山) 흐르는 물은 감돌아든다고 부벽루하(浮碧樓下)로다 * 삼산(三山)은 반락(半落)에 모란봉(牧丹峯)이요 이수중분(二水中分)에 능라도(綾羅島)로다 도화유수(桃花流水) 흐르는 물에 두둥실 배 띄우고 떠 놀아볼까 * 일락(日落)은 서산(西山)에 해 떨어지고 월출동령(月出東嶺)에 달 솟아온다. 대동강(大同江) 굽이쳐서 부벽루(浮碧樓)를 감돌고 능라도(綾羅島) 저문 연기(煙氣) 금수산(錦繡山)에 어렸 네 * 아서라 말어라 네 그리 마라 사람의 괄세를 네 그리 마라 이 노래를 두고 경기민요라고 분류하고 있는데 이는 과연 사실일까. <양산도>가 어디 노래냐를 두고 많은 이설이 있어 왔다. 첫째, 충북 양산 지방에서 내려오는 민요라는 설. 『 삼국사기』에 신라의 장군 김충원이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백제와 전투를 했는데 양산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양산도>를 불렀다고 한다. 그 기록을 토대로 지금의 <양산도>는 충북 영동이 방생지라는 것이다. 특히 ‘ 에라 놓아라 아니 못 놓겠네’라는 가사가 말리는 사람과 이를 뿌리치는 김충원 장군의 실랑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둘째, 조선의 창업을 송축(頌祝)한 〈양산가〉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셋째,〈향산가(香山歌)〉에서 왔으므로 〈향산도(香山道)〉가 옳다는 설이 있다. 넷째, 보다 그럴 듯한 것으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회(灰)방아를 찧으면서 부른 노동요(勞動謠)로서, 대들보 위에 회를 바른다는 뜻인 〈양상도회(樑上塗灰)〉에서 와전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설은 모두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이른바 설(이야기)일 뿐이다. 가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개 평안도 지방의 경치와 풍류를 노래하고, 남녀간의 애정을 표현하는 말이 대부분이다. 부벽루 역시 평양에 있는 누각 이름이다. 대동강, 능라도, 금수산 같은 지명도 모두 평양 지방에 있다. 때문에 이 노래는 개화기 무렵 평양 지방을 중심으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서도민요임이 확실하다. ‘ 에라 놓아라 아니 못 놓겠네’라는 가사는 남녀 간의 정의 밀고 당기기를 표현한 말이다. 여기서 김충원장군을 상상하는 것은 지나친 역사적 상상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 노래의 음조가 서도민요 풍이라는 것이다. 노래 제목은 대동강의 발원지인 평안도 양덕 맹산 지역에서 한 음절을 따서 <양산도>라고 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이 노래가 요즘 경기민요로 분류되는 것은 수적으로 서도민요를 부르는 사람보다 경기민요를 부르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경기명창들이 많이 부르니까 자연스럽게 경기민요로 분류하는 것인데 원칙적으로 따진다면 이는 오류인 것이다. 김옥심과 같은 경기명창들도 이 노래를 잘 불렀다. 무형문화재 제도가 생기기 이전에는 서도소리와 경기소리의 뚜렷한 구분 없이 서로의 노래를 서로 주고받았고 서도소리다, 경기소리다의 영역 다툼이 없었다. 즉 서도소리와 경기소리는 요즘 말로 하면 호환성이 강해서 서로가 서로의 노래를 거리낌 없이 불렀던 것이다. 그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기야 <양산도>가 서도소리면 어떻고 경기소리면 어떠랴. 잘 부르고 재미있게 듣고 흥을 내면 그만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창부타령>을 경기소리라고 해야 하는 것처럼, <양산도>는 서도소리라고 해야 한다. 듣고 즐길 때는 구분이 필요 없지만 학술적으로 말할때는 엄격한 구분이 필요한 것이다. -하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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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황원의 미완성 시> 하응백의 재미있는 국악사설 이야기 8김황원의 미완성 시 12세기 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 고려 예종 때 김황원(金黃元)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 · 한림학사(翰林學士)등을 지냈다. 학문에 힘써 고시(古詩)로 이름을 떨쳐 해동제일이라는 일컬음을 받았다고 하며, 청직하여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예종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요나라에 가는 길에 대기근이 있는 북부지방에서 주군(州郡)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했다. 귀국 후 예부시랑 · 국자제주(國子祭酒) · 한림학사 ·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를 역임했다. 그는 임금이 책을 보다가 의심나는 것이 있어 물으면 대답할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었으나, 청직한 성격 때문에 남의 모함도 많이 받았다. 시와 관련하여 그가 남긴 일화 한 편이 있다. 요즘도 그렇지만 경치가 좋은 누각에 가면 그곳 산천 풍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들이 누각 안쪽에 판각을 해서 많이 걸려 있다. 고려시대 평양 부벽루도 그러했던 모양이다. 하루는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랐다. 그런데 김황원이 보기에 그 시들은 하나같이 졸작이었다. 김황원은 그 시들을 모두 떼어 불태워 버렸다. 내심 그 시들보다 훨씬 뛰어난 후세에 길이 남을 시 한편을 써서 걸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김황원은 시상을 떠올리며 하루 종일 경치를 보다가 드디어 시 두 구절을 얻었다. 긴 성벽 한편으로는 넘쳐넘쳐 흐르는 물이요(長城一面溶溶水) 넓은 들 동쪽에는 한점한점 산이로다(大野東頭點鮎山) 하지만 그 뒤를 지을 수가 없었다. 7언 절구란 뒤에 두 구가 있어야 완성되는데, 아무리해도 뒤의 두 구절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김황원이 해가 지고서야 통곡을 하면서 자신의 시재(詩才)의 모자람을 한탄하면서 부벽루를 내려왔다고 한다. 김황원은 통곡을 하고 내려왔지만, 이 시 두 구절로도 썩 훌륭하여 후대 사람들이 널리 기억하였다. 국악가사에도 이 시 구절이 가끔 등장한다. 다음의 ‘사설 지름’이 이 시구를 인용하고 있다. 백구(白鷗)는 편편(翩翩) 대동강상비(大同江上飛)오 장송(長松) 낙락(落落) 청류벽상취(淸流壁上翠)라 대야동두점점산(大野東頭點點山)에 석양(夕陽)은 비꼈는데 장성일면용용수(長城一面溶溶水)에 일엽어정(一葉漁艇) 흘리저어 대취(大醉)코 재기수파(載妓隨波)하야 금수능라(錦繡綾羅)로 임거래(任去來)를 "갈매기 훨훨 대동강 위를 날고, 낙낙장송은 청류벽 위에 푸르도다. 넓은 들판 점점 산은 석양에 비끼고, 긴 성벽 한편 흐르는 물에 배 한 척 띄워, 크게 취해 기생을 실은 채로 물결 따라 흘러가니 금수산 능라도로 흘러 들어가네”라는 의미다. 김황원의 시구를 인용했지만, 김황원의 시구에 비하면 훨씬 졸작이며 천박하기까지 하다. 놀량사거리의 ‘사거리’에도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백구(白鷗) 편편(翩翩) 대동강상비(大同江上飛)하고 장송(長松)은 낙락(落落) 청류벽상취(淸流壁上翠)라 아하아 *장성일면(長城一面)은 용용수(溶溶水)요 대야동두(大野東頭)는 점점산(點點山)이라 즉, 김황원이 처음 시를 지었고, 그 다음 누군가가 이를 인용하여 사설 시조를 지었고, 이 시조를 다시 ‘놀량사거리’가 차용한 것이다. 70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서도 김황원의 시는 민중들의 노래 속에 살아있게 된 것이다. 이는 훌륭한 예술의 이어짐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미완의 세계에 대한 후대인들의 아쉬움이기도 할 것이다. -하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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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장타령의 해학성> 하응백의 재미있는 국악사설 이야기 12경기도 재담소리에 <장대장타령>이란 것이 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8호). 한양의 정승이 슬하에 자식이 없어 명산대찰에 가 발원을 하여 아들을 하나 얻었다. 그가 바로 장대장이다. 장대장은조숙했지만, 부모가 돌아가시고 가난하게 살다가친구들의 도움으로 만포첨사에 제수된다. 부임지로 길을 떠나는 황해도 해주에서 장단에서 하룻밤 머물게 되는데 이때 장단에서 소‘ 굿’이 벌어진다. 한양에서도 굿판이라면 빠지지 않고 구경했던 터라 장대장은 굿을 구경하는데, 만신이 뜻밖에도 장대장에게 수작을 건다. 노랫가락에 자신의 뜻을 실어 표현한 것이다."들으니 농부라더니 창녀(唱女)의 집이 무삼 일고,오시긴 오셨지만 주무시고는 못 가리라, 아희야신 돌려 놓아라 열사흘 내세.”노래하는 여자의 집(唱女)에 왔으니 하룻밤 자고가서는 아니 되고 열사흘 정도는 정을 들이고 가라는 말이다. 장대장 역시 노랫가락으로 화답한다."뉘라서 농부라더냐 만경창파(萬頃蒼波)의 사공일다, 광풍(狂風)에 배를 잃고 오는 바이 네 집이라, 들으매 네 배가 논다기에 네 배 타러 예 왔노라.”장대장이 확실하게 대답한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제석거리 막불겹이로 직설적으로 주고 받는다. "어디 사오? (무당)-한양 삽네 (장대장), 뉘 댁이시오?-장서방일세, 첩이나 있소?-홀아비일세, 나하고 살까?-작히나 좋지, 어디를 가오?-만포첨사, 주인이 어디오?-건넛말 일세, 어디쯤 되오?-주막집일세, 이따나 갈까?-고대나 하지.”이렇게 두 사람은 인연을 맺고 만포로 가서 살림을 차린다. 그 당연한 결과로 아들을 하나 낳는다. 세월이 흘러 장대장이 한양에 벼슬을 받아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자 장대장은 무당에게 엄포를 놓는다. 만약 자네가 무당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남남이 될 것이니 절대로 내색하지 말라는 것이었다.한양에 와서 살던 중 이들의 아들이 병에 걸려 온갖 약이 효과가 없어 결국 굿을 하게 된다. 굿을 하던 중 아이의 엄마가 나서 푸념을 하는데 춤도 잘 추고 푸념도 잘한다. 원래 무당이었으니 잘 할 수밖에. 이때 경을 외던 허봉사가 그녀의 정체를 눈치채고 협박을 한다. "이를 테야 이를 테야 장대장 보거든 이를 테야.” 무당은 큰일이 났다.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하니까. 그래서 금은보화를 주겠다고 사정사정해도 허봉사는 막무가내로 협박을 한다. 결국 여인은 "새끼 장님을 낳더라도 원대로 해줄게 장대장 보거든 이르지 마소” 하며 허봉사와 타협을 한다. 허봉사는 창부타령으로 끝을 맺는다. "…장구만도 잘 쳐라 지화자자 좋을씨고 장대장 보거든 시치미 땜세 지화자자 좋을씨고, 진작이나 그러할 일이지 얼씨구나 지화자 좋다 지화자 지화자 좋을씨고.” <장대장타령>은 이러한 내용의 코미디(재담소리)인데, 구한말의 박춘재 명창이 완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서도의 <배뱅이굿>과 서사 구조가 비슷하지만, <배뱅이굿>보다는 길이가 짧고 내용이 간략하다. 하지만 <배뱅이굿>과 마찬가지로 <장대장타령>도 실제 공연되었을 때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서사적으로 본다면 <장대장타령>은 상당히 흥미롭다. 판소리의 주제이기도 한 당대의 보편적인 도덕성에서 벗어나 불륜이나 간통을 백일하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판소리보다 욕망에 적극적이다. 점잖지 못하고 비도덕적이다. 이 말은 기층 민중들에게 훨씬 다가가기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억압된 민중들의 분출구로 작용할 수 있다. 여러 탈춤의 해학과 풍자가 기능하는 이치와 동일한 것이다. 그것에다 <장대장타령>은 서울굿과 황해도굿의 편린을 담고 있고, 노랫가락과 창부타령의 굿판에서의 발생론적 원리를 담고 있다. <장대장타령>은 굿과 국악의 상관관계를 알려주는 화석 같은 자료이면서 한편으로 거친 해학을 통해 직접적 웃음을 주는 몇 안 되는 재담소리 중의 하나이다. - 하응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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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응백의 '창악집성', 30일 출판기념회. ■ 문학과 소리의 운명적 만남! " 인사동에서 우연히 <수심가> 한 자락을 들었다. 서도소리의 목청은 가을 햇빛과 바람에 산란(散亂)하는 백양나무의 나뭇잎 같은 것이었다. 그 소리에는 묵직하게 다가오는 둔중한 슬픔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렇게 내 마음이 움직인 것은 신의주가 고향인 선친(先親)의 삶이 그 소리 한 자락에 겹쳐 나의 잠재의식을 일깨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후 전태용의 <창부타령>, 지연화의 <대감타령>, 김옥심의 <아리랑>, 김정연의 <관산융마>,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들으면서 점점 소리는 나에게 가깝게 다가왔다. 소리가 나에게 다가오자 소리의 가사 즉 사설(辭說)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문학이 나의 업(業)이기에 이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시와 소설과 같은 문학 텍스트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30년 가깝게 내가 한 일이었고, 내가 소리를 접하게 되자 또한 당연히도 텍스트로서의 소리의 사설에 대한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자 서문에서 ■ 국악 가사(사설)를 정확하고 쉽게 풀이한 책 - 국악 사설의 모든 것을 총망라한, 21세기 현대적 국악 사설집의 결정판! 21세기의 한국 독자들을 고려하여, 국악 사설을 현대적으로 집대성한 《창악집성》이 출간되었다. 국악 가사의 오류를 바로잡고 정본(定本)을 확정하고 상세한 풀이를 싣고 있는 이 책은 한 마디로, 현대판 국악 사설 백과사전이다. 문학평론가인 이 책의 편저자는 국악 전문인들이 부르는 현행하는 거의 모든 ‘소리'의 사설을 수집하여, 몇 가지 원칙 아래 국악 사설을 총정리하고 주석과 해설을 달았다. 이 책의 집필 원칙은, 첫째, 구전되어 오면서 와음(訛音)이 심해 원래의 가사의 뜻을 상실한 국적불명의 가사를 바로잡았다. 둘째, 전수되는 ‘소리'의 특성상 가락과 음이 중요하므로 가사의 뜻이 조금 달라졌다 해도, 그 의미가 전달되는 경우에는 전문 가창자들의 ‘소리'를 우선시하여 가사를 표기했다. 셋째, 가사의 의미가 어려운 구절이나 단어는 그 풀이를 모두 달았다. 특히 단어 하나의 풀이보다는 노래 전체의 뜻을 이해하기 쉽게 구절풀이와 전체 풀이를 달았다. 넷째, 소리 사설의 출전(出典)과 소리의 영향관계에 대한 맥락을 풀이했다. 우리 소서 사설은 중국 한시나 조선시대의 고시조에서 비롯하는 것이 많으므로 이를 일일이 찾아 출전을 명확히 했다. 다섯째, 국악의 여러 장르적 특성을 명기하면서 하위분류에 해당하는 여러 국악 사설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돕고자 그 연원을 발생론적으로 추적했다. 여섯째, 판소리를 제외한 현행 가창되는 전문 소리꾼의 모든 사설을 담고자 했고, 이본이 있는 경우에는 가치가 있을 경우 다 수록함을 원칙으로 했다. 일곱째, 구전된 전통 민요의 경우 현행 가사를 수록함을 원칙으로 했다. 이러한 원칙으로 《창악집성》은 집필되었다. 이 책의 집필 목적은, 첫째, 자신이 부르는 소리의 사설 내용을 정확히 모르고 있는 국악전문인, 혹은 국악 지망생들에게 자기가 부르는 노래의 뜻을 정확히 알려주고자 함이다. 실제 국악현장에서는 정확한 사설의 내용을 모르고 부르는 경우가 허다하고, 이는 소리의 내용에서 소리꾼이 이탈하는 주원인이 되며, 청중들의 감동을 반감시키는 결과도 가져온다. 소리꾼이 ‘소리'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정확히 자기의 ‘노래'의 뜻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 소리를 듣는 청중에게 가사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국악이 서양 클래식이나 서양 대중음악, 우리 대중음악에 비해 선호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현재의 대중이 국악가사의 뜻을 모르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뜻을 알고 ‘소리'를 들으면, 우리 국악의 해학과 정과 한을 훨씬 가깝게 체득할 수 있지만, 한국어로 부르고 있건만, 그 뜻을 모르니 국악에 대한 흥미가 없거나 국악을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청중이 가사의 뜻을 정확히 안다면 국악을 훨씬 더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국악교육현장에서 교재로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현재의 국악교육에서는 실기와 국악사 같은 과목은 교육되지만 국악 가사에 대한 교육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당대의 언어로 당대의 노래를 했던 과거에는 이러한 교육이 필요 없을 지도 모르지만, 전통언어를 구사하는 국악 소리는 교육을 토해 습득, 유지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국악 사설교육의 자료가 부실한 형편에서 이 책은 교육의 기초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국악 사설의 소통을 위하여 지금까지 나온 소리 가사집은 전문 소리꾼을 위한, 즉 공급자 중심의 가사집이 대다수였다. 따라서 국악에 관심이 있는 일반 대중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면이 없지 않았다. 특히 그 이유 중 하나로 언어적 소통의 불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국악의 사설이 아주 천천히 변화한 것에 비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구어(口語)는 너무도 빨리, 또 많이 변해버렸다. 18세기에 통용되던 노래를 듣는 21세기의 한국인들은 음악 그 자체가 풍기는 정서엔 어느 정도 감응할 수 있을지언정, 그 이면에 얽힌 민속적 사연까지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창악집성》은 그러한 일반 대중을 고려하여 적절히 현대적인 맞춤법을 반영하고 그 눈높이에 맞추어 자세한 풀이와 해설을 첨부한 것이 특징이다. 모든 사설에는 풀이를 달아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으며, 특별히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는 별도의 자세한 해설을 달기도 했다. 아울러 이미 출간된 다른 가사집들에 비해 큰 활자를 배치하고 깔끔한 편집 디자인으로 가독성을 높였고, 가나다순 제목으로 찾을 수 있는 색인도 첨부하였다. 이 책은 국악 전문인뿐만 아니라, 국악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사람이나 국악을 즐기는 사람 모두에게 유익한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 5년간의 연구와 노력으로 집필된 국악 사설의 백과사전! 《창악집성》은 가곡, 가사, 시조창, 경‧서도민요, 남도민요, 동부민요, 좌창, 잡가, 단가, 가야금병창, 송서, 불가, 재담소리 등 판소리를 제외한, 현재 가창(歌唱)하는 거의 모든 국악의 사설을 담고 있다. 기존의 가사집은 현장의 사설을 옮기는 것에만 주안점을 두어, 그 문학적 전문성이 결여되거나 해석이 부정확한 곳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소리의 전수 특성상 처음엔 스승의 소리를 그대로 모방하기에 잘못된 사설도 따라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결국 틀린 사설이 전승되기에 이른다. 현재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그런 해설과 작품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각 지방의 풍속과 전설, 그리고 방언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 원본을 확정하고, 거기에 내재된 올바른 문학적 의미를 밝혀내고자 하였다. 특히 기존의 책들에서 보이는 소리의 사설(텍스트) 자체의 오류와 해석의 오류를 모두 바로잡았다. 이 책의 분류 체계는 이창배의 《가창대계》를 따르면서 편의상 북한의 소리는 서도소리로 모았으며, 충청도와 제주도 민요는 남도소리로, 경상도와 강원도 민요는 동부소리로 모으고 있다. 또한 <배뱅이굿>이나 <장대장타령>과 같이 서사성이 강한 소리는 재담 소리로 명명(命名)했고, 송서와 불가는 따로 부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분류는 국악 현장의 현실성에 맞춘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기본적으로 현대적인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면서, 그것에 어긋나더라도 가급적 현장에서 실제 창을 할 때의 발음이라든가 호흡을 반영하여 가사를 표기하고자 하였다. 이는 이 책이 단지 학술적인 연구서나 자료로서의 가치만 지니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창악집성》은 전문 소리꾼뿐만 아니라, 국악에 관심 있는 일반 대중들까지 참고할 수 있도록 집필된 책으로, 앞으로 우리 국악에 대한 이해의 밑바탕을 이루며 국악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 저자 소개 편저_하응백 문학평론가. 경희대학교 국문과, 경희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 국민대학교 문창대학원 교수 역임. 저서에 『김남천 문학연구』, 『문학으로 가는 길』, 『낮은 목소리의 비평』, 『친구야 이제 다리를 건너거라』등이 있고, 편저로는 『황동규 깊이 읽기』, 『한승원의 삶과 문학』,『이옥봉의 몽혼』 등이 있다. 현재 휴먼앤북스 대표이며, 사단법인 서도소리진흥회 이사장이다. ■ 목차 제1부 정악 악 1. 가곡 가) 우조 초수대엽 | 이수대엽 | 중거 | 평거 | 두거 | 삼수대엽 | 소용 | 반엽우롱 나)계면조 초수대엽 | 이수대엽 | 중거 | 평거 | 두거 | 삼수대엽 | 소용 | 언롱 | 평롱 | 계락 | 우락 | 언락 | 편락 | 편수대엽 | 언편 | 태평가 | 장진주 2. 가사 수양산가 | 양양가 | 처사가| 권주가 | 매화가 | 백구사 | 어부사 | 죽지사 | 황계사 | 길군악 | 상사별곡 | 춘면곡 3. 시조 평시조 | 사설시조 | 여창지름시조 | 남창지름시조 | 우조지름 | 사설지름 *작자소개 제2부 서도소리 1. 서도민요 수심가 | 엮음수심가 | 반엮음수심가 | 긴아리 | 자진아리 | 긴난봉가 | 자진난봉가 | 사설난봉가 | 타령난봉가 | 연평도난봉가(나나니타령) | 사리원난봉가 | 개성난봉가(박연폭포) | 숙천난봉가 | 자진배따라기(서도뱃노래) | 더자진배따라기(빠른뱃노래, 자진서도뱃노래) | 봉죽타령 |배치기 | 술비타령 | 몽금포타령 | 산염불 | 자진염불 | 개성산염불 | 느리개타령 | 날찾네 | 풍구타 령 | 야월선유가 | 금드렁타령 | 간장타령 | 해주아리랑 | 함경도애원성 | 안주애원성(물레타령) | 싸름타령 | 금다래타령 | 신고산타령(어랑타령) |궁초댕기 | 양산도 | 관음세기(관음타령) | 호무가(호미가) | 호미타령 | 방아찧기 | 투전풀이(투전불림) | 돈돌라리 | 전갑섬타령 | 굼배타령 2. 서도좌창 초한가 | 공명가 | 사설공명가[제갈량 동남풍 축] | 배따라기 | 영변가 |관동팔경 | 제전 | 향산록 | 초로인생 | 장한몽 | 봉황곡 | 전장가 3. 서도입창 놀량사거리 초목이 | 놀량 | 사거리 | 중거리 | 경발림(경사거리) 4. 서도시창 관산융마 5. 서도재담소리 배뱅이굿 | 개(가이)타령 | 맹인덕담경 | 파경 제3부 경기소리 1. 경기민요 노랫가락 | 무속노랫가락[ㄱ)본향노랫가락 ㄴ) 상산노랫가락 | 창부타령 | 대감타령 | 청춘가| 이별가 | 사발가 | 베틀가| 오돌독 | 한강수타령 | 태평가 | 닐리리야 | 양류가 | 풍년가 | 매화타령 | 군밤타령 | 경복궁타령 | 아리랑 | 긴아리랑 | 도라지타령 | 노들강변 | 오봉산타령 | 뱃노래 | 자진뱃노래 | 방아타령 | 자진방아타령 | 사설방아타령 | 는실타령 | 건드렁타령 | 도화타령 | 사철가(화전놀이) 2. 경기잡가 유산가 | 적벽가 | 제비가| 소춘향가 | 집장가 | 형장가 | 평양가 | 선유가 | 출인가 | 십장가 | 방물가 | 달거리(월령가) | 풍등가 | 금강산타령 | 토끼화상 | 범벅타령 | 자진방물가 | 변강쇠타령 | 장기타령 | 만학천봉 | 곰보타령 | 병정타령 | 기생타령 | 육칠월 | 생매잡아 | 바위타령 | 맹꽁이타령 | 한 잔 부어라 | 비단타령 | 국문뒤풀이 | 개성팔경 가 3. 경기입창 놀량 | 앞산타령 | 뒷산타령 | 자진산타령 | 개고리타령 4. 경기재담소리 장대장타령 제4부 남도소리 1. 남도민요 육자배기 | 자진육자배기 | 흥타령 | 진도아리랑 | 보렴 | 새타령 | 화초사거리 | 삼산은 반락 | 개고리타령 | 농부가 | 남원산성 | 까투리타령 | 강강술래 | 둥 당개타령 2. 충청도민요 흥타령 | 등타령 | 총각타령 3. 제주도민요 오돌또기(둥그대당실) | 이야홍타령 | 너영나영 | 이어도사나(해녀 노 젓는 소리) | 서우제소리 4. 단가 사철가 | 사철가 2 | 명기명창 | 백발가 | 소상팔경 | 초한가 | 호남가 | 불수빈 | 진국명산 | 강상풍월 | 운담풍경 | 죽장망혜 | 홍문연가 | 조어환주 | 광대가 | 만고강산 | 편시춘 | 공도라니 | 대장부한 | 고고천변 | 녹음방초 | 백구가 | 청석령 지나갈제 5. 가야금병창 김매기노래 | 꽃타령 | 날 오라네 | 내 고향의 봄 | 님 그린 회포 | 님이 그리워 | 복숭아꽃 | 둥둥게타령 | 멸치잡이노래(남해뱃노래) | 박꽃 핀 내 고향 | 범벅타령 | 봄노래 | 봄총각 | 가야금 애상곡(가야금타령) | 뽕 따러가세 | 제주남풍가 | 상사천리몽 | 애수의 가을밤 | 청산별곡 | 꽃이 피였네 | 노들강 초록물 | 발림 | 신방아타령 | 야월삼경 | 풍년노래 | 함양양욠삼경 |찠자뒤풀이 | 사랑삼경 |기생점고 | 군로사령 | 중타령 | 감계룡 | 유색황금눈 | 구만리 | 피점고 | 제비노정기 | 가난타령 | 화사자 | 여보라 주부야 | 가자 어서 가 | 제기럴 붙고(토끼가 욕하는 대목) | 관대장자 | 화초타령 | 올라간다 | 심봉사 좋아라고 | 그 자리에 엎드러 | 방아타령 | 어전사령이 나간다 | 천지신령님이 | 예 소맹이 아뢰리다 | 얼씨구나 절씨구 | 화용도 | 장승타령 제5부 동부소리 1. 경상도민요 밀양아리랑 | 울산아가씨 | 쾌지나칭칭나네 | 상주모심기노래 | 영남들노래 | 상주아리랑| 영천아리랑 | 옹헤야(보리타작노래) | 진주난봉가(진주낭군, 시집살이노래) | 담바귀타령 1 | 담바귀타령 2 | 성주풀이 1 | 성주풀이 2 | 골패타령 | 통영개타령 2. 강원도민요 한오백년 | 강원도아리랑 | 정선아리랑 | 정선아라리 | 정선엮음아라리 | 정선자진아라리 제6부 송서 추풍감별곡 | 삼설기 | 적벽부-서도 | 전적벽부-경기 | 후적벽부-경기 | 어부사 | 춘야연도리원서 | 등왕각서 | 짝타령 | 출사표 제7부 불가 회심곡-소릿조 | 회심곡-불가조| 화청[ㄱ)반회심곡 | ㄴ)육갑시왕원불지옥십악업] | 탑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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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회 한국민속축제와 고증(考證)문제KBS와 MBC가 번갈아 생중계를 한 이후로는 심사하지 않는 해엔 굳이 축제의 현장을 찾지않아도 되었었는데, 작년엔 생중계를 하지 않고 녹화방영을 하였던 관계로 올해엔 행사장인 정읍을 방문하기로 예정을 잡아놓았다. 행사 첫날인 토요일(9월 30일) 아침, 정읍I.C에 가까운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려 둘러보니 정읍고을의 큰행사에 대한 홍보 현수막이나 포스터가 보이지 않았다. 대전, 고양시 등 적지않은 지역에서 같은 날에 축제가 열리고 있는 터라 참여 대표단 이외엔 찾아오는 외부 관람객이 더욱 없을 것이 염려되었었는데, 주최 측에서 아예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같아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지난 2, 3년 동안은 민요분야 출품이 늘어나는 경향이었는데 금년엔 21개 시도 대표단 중 4, 5개팀만이 소리로서 경연에 나섰다. 익일 심사평에서는 놀이와 민요 분야를 분간못한 작품이 있다고 하였지만 사실 우리 민속엔 북청돈돌날이나 강강술래, 지신밟기, 율면 달구소리처럼 민요적 요소와 놀이적 요소가 비등하여 어느 쪽으로도 구성할 수 있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다만 민요로 출품하였을 때에는 소리의 고증에 대하여 보다 엄격한 잣대로 재어야 할 것이다. 이번 축제의 심사는 좀더 젊은 층의 새로운 인물로 심사위원을 대폭 교체하고, 심사위원장도 사상 처음으로 여성을 내세우면서 공정한 심사를 위해 주최측이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민속분야의 전문가란 현장을 발로 뛰어 얻은 귀납적 지식을 토대로 스스로 얻은 안목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새로운 지역의 새 작품에 대하여는 자기의 안목을 그대로 고집하기 보다는 일단 현지의 고증적인 문제에 대하여 문의해 보는 것이 순서다. 필자는 민요 전문가적 입장에서 ‘인천 서곶들노래’에 대하여 의문이 들어 문의를 하였다. 서곶이란 1995년에 김포군에서 인천으로 편입된 검단면 지역을 일컫는다고 가창자들은 알려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애벌매기를 부른 42세의 선소리꾼은 그 소리를 어디서 배웠는지를 대질 못하고, 고증자는 이를 강화군에도 널리 있는 소리라고 한다. 두벌매기는 제법 긴 입말로된 받음구를 가졌는데 60세된 전라도 출신이 불렀고, 고증자는 파주에 널리 있는소리라고만 한다. 필자는 1980년대에 강화군 전읍면과 파주군의 전 읍면 및 김포군의 검단면을 포함한 전읍면의 농요를 현장방문하여 녹음하였고, 1990년대 이후에 재차 보충녹음하여 강화군지에 <강화군의 민요>를, 김포군지에 <김포군의 민요>를 게재한 바 있다. 또한, 450여 페이지에 달하는 [파주민요론]을 집필하여 CD와 함께 1997년도에 문화원을 통해 출간하였다. 이러한 필자의 안목으로 볼 땐, 서곶들노래라고 부른 애벌매기는 검단면이나 강화군에 없는 노래이고, 두벌매기를 고증자가 굳이 파주지역 민요에 의지한다면 파주 헤이리소리의 변격일 따름이지만, 헤이리소리는 검단면을 포함한 김포군에 전하여있지않다. 또한, 세벌매기로 여자 가창자가 ‘닐 닐닐’상사를 불렀는데 이는 고양 호미걸이에서 예외적으로 부르는 받음구이므로, 팜프렛 대로 ‘넬 넬넬’상사로 부름이 적합하다. 필자가 염려하는 것은 한국민속축제 출품을 계기로 이러한 둔갑민요들이 그 지역의 전승민요인양 계속 가르쳐 짐으로써 민요사를 왜곡하는 점이다. 놀이분야에서는 더욱 둔갑민요들이 자주 등장하고, 종종 큰상을 받음으로서 민속‘경연’의 존재의의를 크게 감쇄시킨다. 한국민속축제에 출품된 작품들은 언젠가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보호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들이 고증에 문제가 없는지를 우선적으로 심사하여야 한다. 구성의 문제, 연습의 정도 등은 일반인도 알 수 있지만 고증 문제는 전문가의 몫이되, 민속의 성질상 전문가의 안목에 안주하지말고, 의문에 대해 물어 그 연유를 캐는 자세가 필요하다. 유감스럽게도 이번 대회의 심사위원들 중엔 서곶일노래의 고증문제를 의식한 분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 민요분야에서 1등을 준 것을 보면.. ‘제47회 대회’에서 민요분야가 농악이나 놀이분야보다 뒤쳐졌던 것도 아니고 고증상의 문제가 없는 좋은 작품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민요분야 1등이 전체로는 8등 이하인 ‘동상’이라는 것도 문제다. 민속의 심사라는 것이 절대적인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간에 분야별 배려를 하였던 것인데 이러한 배려가 이번 심사엔 보이지 않는다. 심사평에서 전승민속에 기한 창작예술적 작품은 또 다른 기회에 맡기고 ‘한국민속축제’에서는 실제로 전승되어온 민속을 재구성하여야 하며, 큰상을 받았다 하더라도 계속 잘 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를 바란다고 한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본다. 다만, 큰상을 받고 지정보호까지 된 작품은 돌아가며 시연의 기회만 주고, 그렇지못한 작품에 대하여는 7년이후엔 재출품할 수 있다는 등의 제한적 허용을 해야할 것이다. 한국민속축제 추진위원회에서는 고증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필히 마련해야 되겠다. 또 하나 느끼는 것은 공연장이 TV촬영을 위해 너무 편중되고 제한되어 연구자들이 필요한 사진 한 장이라도 제대로 찍을 수 없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찾아오는 연구자들에 대한 고 배려도 한국민속축제의 질적인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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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국회, 문화/국악 예산 이렇게 적어도 되나...국가 발전의 기본과제는 무엇인가. 국악, 국어,국군,국사가 아닌가. 여기서 국민의 자주,자유,자립, 자활이 발상되지 않는가. 또 이들 4대 과목에서 주권 / 국민 / 영토 / 국가가 존립하지 않는가. 특히 한 국가에 있어 국악은 자주문화를, 국어는 자유문리를, 국군은 자립문명을, 국사는 자활문사(自活文史)를 낳지 않는가. 또 이들 네 과목을 인체에 비유한다면, 국악은 머리에, 국어는 가슴에, 국군은 허리에, 국사는 손발에 해당하지 않는가. 바로 이들의 체계가 확립되었을 때 그 나라의 경제/교육/과학/정치가 제 궤도에 진입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이들 국가 4대 과목 중에서 그의 머리는 바로 국악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정부는 국악을 문화관광부의 예산계정과목인 문화예술/관광/체육/문화재/기타 문화 및 관광부문 중에서 문화예술과목 속의 일개 분과로 쳐 박아 놓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 이 나라의 자주와 주권 및 경제 그리고 머리가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사실 국악의 국가적인 비중은 국악 / 교육 / 국방 / 행정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산도 이들 4개가 같은 비중으로 편성되어야 국가가 세계무대에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예산의 비중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무시된다면 국가라는 거대한 배는 침몰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국회의 예산처방은 그렇지 못하다. 금년을 보면 총예산 1백 44조 8천여억 원 중에서 교육은 28조여 원이고, 국방은 약 21조원이었으며. 행정은 26조원이었는데, 국가역사의 머리에 있는 자주주권의 수호자인 국악예산은 단돈 삼삼팔억원이었을 뿐이다. 물론 한국문화의 사령탑인 문화관광부에는 고작 1조 2천억 원이 배정되었을 뿐이다. 이럴 수가 있는가. 거기다 국악원에 있어서도 국제적으로 내 놓을 극장하나 반반한 것이 없다. 세계 어느 나라를 돌아보아도 국가극장만은 웅장거대하다. 돈 가방을 든 국빈들이 한국을 찾아왔다 치자. 그들을 데리고 욕망의 불길을 태워 줄 곳이 어디겠는가. 노래방인가 술집인가. 우리에게는 세계적인 국가공연장이 있어야 한다. 사실 국빈수용 세계수준의 극장하나도 없이 무슨 세계시대를 경륜하겠는가. 그것이 대한민국 국악극장이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 극장이 있는가. 장충동 국립극장인가. 서초동 국립국악원인가. 이런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국악우등생인 공무원과 국회의원들에게 내년도 국가예산중 문광예산만은 최소 20조를, 국악 분야 예산은 적어도 15조 정도를 지향 책정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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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규 - 우리의 오랜 친구, 개1, 민중의 심리에 잠재된 개의 의미 개는 우리 민족에게 오랜 세월 동안 사랑을 받아왔던 동물이다. 그의 위치는 집을 지키는 수호신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죽어서 인간을 보신시켜 주는 희생양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의 속성을 바탕으로 하여 개의 의미는 여러 가지 상징을 부여받아 왔다. 개가 출현한 꿈의 경우는 법관쪾경찰관쪾경비원쪾신문기자쪾탐정가 등의 사건해결사로, 충복, 머슴 등의 경우는 개의 충성스러움을 뜻하기도 한다. 동시에 전염병이나 방해물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중적인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개띠의 사주로는 天藝星(천예성)이라고 하여, 기예가 뛰어난 사람들이 많고 마음이 착하고 유순하다. 부지런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재물 운이 좋아 성공이 빠르며, 청렴하고 정직한 편이다. 남자는 색욕이 강한 편이고 호언장담을 잘하여 가정에 소홀 하는 경향이 많다. 구비문학을 통해서 살펴 본 개의 존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개가 전형적인 忠(충)의 실천적인 동물로 표현되어 있으며, 이러한 이야기가 개관련담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주로 속담에 나타나는 것으로 비천한 개의 본성을 통해 인간의 그릇된 성질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설화를 중심으로 할 때 개는 미물이기는 하지만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상징적인 존재물로 부각되어 있다. 개가 그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개무덤형 전설>의 유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와 유사한 형태의 이야기까지도 형성하면서 전승을 이루었다. 이러한 이야기의 형성은 개의 속성이 사람을 잘 따른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고 생각된다. 이외에도 개는 악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관적인 위치에 놓여진 이야기도 있는데, 이 역시도 개가 후각을 통해 물건을 잘 찾아내는 본성과 관련되어 형성된 것이다. 민요의 경우는 낱말의 유희요와 같이 개의 반복을 통한 개타령도 있으나, 대개는 정요(情謠) 형태의 내용을 취하고 있다. 즉 여자가 임을 기다리는 심정을 바탕으로 개가 이것을 방해한다는 일종의 심리적인 미움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의 역할은 임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밤중에 집으로 접근하는 일반인을 경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개의 상징은 절대적인 미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심리적인 상황을 노출하는 의미 상징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평가된다. 속담에서도 개의 본성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 대부분이며, 이러한 비유는 원초적으로 사악하거나 멍청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나쁘게 말할 때 사용되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개의 본성, 예컨대 똥을 먹는다거나 흙구덩이에서 노는 습성들이 속담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개의 존재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이며 인간에게 매우 친근한 동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세계에 오래 전부터 소속되어 왔기 때문에 개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그 만큼 높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현재 인간들의 생활공간이 변화되면서 개의 육체를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는 작태를 벌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파트의 공간에서 개를 못 키우게 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개의 성대를 잘라 버리는 수술이 유행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2, 우리의 일상생활 중 개와 관련된 말들 중에는 좋은 말보다 나쁜의미로 사용되는 말이 많다. '말도 안되는 무슨 개 같은 말’이냐고, 또 ‘개 같은 짓’을 한다며 비상식적인 일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형편없이 나쁜 상황을 개 같은 일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개떡이란 말도 있다. 심하게는 욕을 할때도 개 같은 ××란 말로 남을 비하하기도 한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자’ 라는 말에서도 개같이 번다는 뜻의 의미는 별로 좋은 뜻은 아니다. 이처럼 개와 관련된 말을 하면서 고상해지는 경우는 없다. 3, 우리의 일상생활 중 개는 사람들을 위해 충복의 역할을 한다. 먹을 것도 사람이 먹다 남은 것을 먹는다.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게 주인 없는 집을 지키고 노인분들에게는 친구가 되어주는가 하면 맹인이 길을 걸을 때 길을 안내하기도 한다. 사냥할 때는 사냥감을 찾아 주기도 한다. 마약탐색도 해 주고 범죄 수사시 많은 활약을 한다. 최근에는 사람들의 취미생활을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즐거움을 주고 있다. 심지어 배가 고프거나 영양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살신성인의 역할로 잡아 먹히기까지 한다. 죽어가는 주인을 위해 수건에 물을 적셔와 회생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개는 인간을 위해 하지 않는 일이 없을 정도로 고마운 일을 많이 한다. 사람들이 개를 넣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때면 개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개들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개자를 넣는지’하고 억울해할 것이다. 4, 개는 꼭 필요한 일을 위해 짖는다. 생각해 보면 동물이 소리를 낼 때 운다고 하고, 노래한다고 표현한다. 새가 울고 꾀꼬리가 노래하고, 여우도 운다고 하지 짖는다고 하지 않는다. 새도 여우도 닭도 짖는다고 하지 않는다. 개는 노래한다고, 운다고 하지 않는다. 짖는다는 표현은 개에게 붙이는 대표적인 수식어다. 개가 짖는다고 한다. 왜 개는 짖는다고 할까. 사전을 찾아보면 ‘짖는다’는 지껄이다를 농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일상 말하는 것을 농으로 표현하면 짖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용될 때는 그런 의미로 상용되지는 않고 있다. 개는 세가지 경우에 짖는다. 도둑이 들어왔을 때 짖어 겁을 먹게 하고, 도둑이 들어 왔음을 주인에게 알린다. 또 주인이 왔을 때 반가워서 짖는다. 그 어느 경우가 헛소리로 해석될 것인가. 개는 가장 중요하고 필요할 때 짖는다. 도둑을 물리치거나 마약탐색을 하는 개들의 행위는 매우 의미있고 보람있는 일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인도하는 것은 약자를 위한 숭고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그 같은 일을 어느 누가 개같은 짓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올해는 개의 해다.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하지 말자. 개는 다산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태어난 자기 자식도 열심히 키운다. 우리 개의 해에 다같이 개같이 잘 살자. 무엇인가 열심히 자기 몫을 다하는 개처럼 뛰자. 개는 꼭 필요한 일을 위해 짖는다. 우리사회가 지향하는 평등하고 누구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꼭 필요하고 보람된 일을 위해 개처럼 열심히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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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살풀이 춤 최 선 명무"혼(魂)이 담겨있고 정신이 스며있는 춤을 춰야한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이 텅 빈 동작을 만들어내서는 안된다”고. 선생의 한평생 무용철학이기도 한 이 말은 곧 ‘춤의 기본과 본질을 알고 창작과 전통의 구분을 명확히 하면서 인간성과 도덕성이 바탕이 된 바른 춤, 바른 동작을 깊은 내면에서 이끌어 올려야 한다’는 춤의 대한 정신을 말한다. 전북 춤계에서 영원한 뿌리로 평가받는 호남 살풀이춤 인간문화재 최 선 선생 ! 「이제 나는 한 사람의 춤꾼으로서 개인의 영욕에만 사로잡힐 수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나의 춤은 곧 나의 희망이요. 겨레의 희망이기를 소망하고 기원할 따름입니다.」고 고뇌 하면서 최 선 선생은 춤과 같이 지나쳐 버린 60년이란 긴 세월을 돌이켜 본다. 「최 선.」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춤꾼! 이렇게 부른다. 그것은 무대에서 삶이 잠잔 시간 보다 훨씬 많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생을 잘 모르더라도 무용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선생의 몸에는 「춤끼」가 자르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는 일제의 식민 탄압이 극에 달하던 1935년 11월 7일 전북 임실에서 유교집안의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두명의 형님들은 일본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였고 부친은 유학에 밝은 시골 선비여서 최 선 선생도 당연히 그런 가풍을 따라야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기질은 일반적인 학문을 공부 하는 쪽보다는 예능쪽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그러한 자기 기질을 발견했고, 수많은 질타와 역경을 고집 하나로 이겨내며 일생을 춤꾼으로 살아오고 있다. "춤은 무당이나 하는 것이거늘 어찌 남자인 네가 춤군이 되어 집안 망신을 시키려느냐”며 무섭게 질타하는 부친의 노여움, 집안 식구들의 눈치, 동네 사람들의 비아냥이 열 살도 채않된 그에게는 너무 벅찬 부담이 됐을텐데도 그런 모든 아픔을 당차게 이겨낸 것을 보면 아마도 선생은 춤을 위해 태어난 일것이다. 오지추운 겨울 밤에도 어머니의 옷가지를 몰래들고 마을 뒷산에 올라 달빛을 조명삼아 혼을 불사르다가 동상에 걸려 발톱이 빠지고 오한에 떨던 꼬마, 보통학교(초등학교) 학예회 때면 인기를 독차지하던 꼬마 최 선이 오늘 한국 무용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는 계기를 이룬 것은 완산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월북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인 김미화 선생과의 인연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전주에 내려와 무용 강습을 하고 있던 김미화 선생이 한눈에 춤 꾼으로 뛰어난 재질이 있음을 알아보고 체계적인 무용을 가르치면서부터 선생의 춤은 탄탄한 바탕과 독창적인 예술성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의 나이 불과 열 두어살 때였다. 이때부터 선생의 춤 인생은 한번도 쉴틈없이 이어진다. 동족 상잔의 비극인 6. 25 사변중에도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며 춤을 추었고, 하반영 선생 등을 따라 전주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연극도 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엔 마침 전주에 국악원이 개설되고 주위에서 전주국악원에 계신 추월이라는 할머니 선생이 판소리도 잘하지만 춤을 잘 추신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 갔다. 그 분은 항상 단아한 모습으로 국악원의 넓은 대청마루에 계셨으며, 방이 여러곳이 있는데도 거기서 판소리도 하고 춤을 추셨다. "그 때 당시에 봤을때 돗자리를 깔고 춤을 추시더라구요. 당시만 해도 수건춤이라 것만 알았지 살풀이 라는 것은 처음 알았지요. 또한 그때는 음악이 없기 때문에 무 장단이나 장구, 북, 꽹과리 등 구음으로만 춤을 했지요. 추월 선생이 직접 장구도 치시고, 돗자리 위에서 수건춤을 가르쳤던것을 기억한다는 선생은 지금 선생이 일궈낸 호남살풀이춤의 기초를 배우게 된다. 소위 "수건 춤”을 배우게 되는데, 한량들이 흥에 겨워 기교도 없이 추던 그런 춤, 다시 말하면 춤의 가장 기초적인 동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왠만한 사람들에겐 그 수건 춤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을 망정 선생에게는 가장 한국적인 춤, 가장 전라도 같은 춤으로 인식됐고,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어떤 사명감에 사로 잡혀 밤낮으로 춤다운 춤으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 수건춤이 바로 선생을 오늘의 한국무용계 거목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남자 초립동이 춘다는 의미로 "동초(童草) 수건춤” 또는 "호남살풀이 춤”으로 불리우는 이 춤으로 최 선 선생은 지난 84년 11월 개천 예술제 특장부문에서 「호남살풀이」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안았으며, 96년 3월 전라북도 지정무형문화재 15호가 인정됐다. 그래서 이기반 시인은 「닫혔던 하늘 문이 열리고 / 막혔던 강물이 흐른다. / 천만년 억겁에 / 쌓인 세월의 갈등도 / 원한에 사무친 시름이랑 / 철 철 철 녹아내린다. 」중략 이렇게 「살풀이춤에서」시로 찬양해 줬다. 어쨌든 최 선이 그 수건 춤에 매달리는 사이 어느 덧 그도 스무살 청년으로 성장했고, 춤 실력도 인정 받는 등 예술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는 자신감에 전주에서 처음으로 "최 선 무용연구소”를 차려 후진 양성에도 힘쓰게 된다. "6. 25 직후 무용가가 거의 없어 애로사항이 많았서요 아마 황무지인 전주에 한국 춤을 개척한것은 저 밖에 없을겁니다”라고 선생은 전한다. 전쟁도 끝나고, 공비 소탕도 대충 마무리돼 사회질서가 잡혀가던 1954년 전주도립극장에서 「논개」「승무」 「장고춤」 등으로 첫 개인발표회를 가져 전북 무용계에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전주도립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앞 에서 자신의 춤을 마음껏 펼치고 난 그날 밤, 그는 복받치는 서러움으로 밤새껏 울었다. 너무나 거칠었던 세파를 헤쳐온 지난 날들의 그림자가 안개처럼 그의 가슴에 퍼져왔기 때문이었다. 이 첫 무용 발표후 그는 당시 서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얻고 있던 정인방 선생을 만나 정식으로 사사를 받는 영광을 안는다. 이때 서울 무대 입성과 전통 무용의 맥을 잇는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굳어진 계기가 바로 정인방 선생과 만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은 인정 받면가면서 한국무용 최고로 꼽히는 선생은 개인발표나 후진양성면에서도 그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승무 살풀이 무당춤 등 한국 전통무용 뿐아니라 창작무용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생은 1979년에 열린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가잿골의 전설」로 대상이 없는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정신없는 국내외 공연과 발표회 등이 선생의 춤 진수를 과시하기도 했다. 80년엔 한길무용회 특별회원으로 일본 자유중국 미국등지를, 그리고 85년엔 대통령상 수상 혜택으로 미국 동남아공연을 가졌고 그 밖에도 미국 일본등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가하는 열의를 보였다. 70년대부터 무용협회 전북지부 지부장직을 맡아 오랫동안 일해온 선생은 그동안 전라예술제를 비롯, 각종무용제를 주최, 전북에 무용의 뿌리를 내리고 맥을 잇는 활동을 지금까지 펼쳐왔다.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 죽어야지, 우리 전통춤을 좀 더 멀리 또많이 전수, 보급하는 일이 남은 삶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확신하는 선생의 춤은 현재 전북대 무용학과의 장인숙 교수, 이해인 교수, 김원(현대무용), 원광대 이길주 교수, 충남대 정은혜 교수, 서울 고선아 선생, 광주 허순선 교수, 그리고 선생의 딸 최지원 씨에 의해 전수되고 있다. 끝으로 선생은 제자들과 딸 지원 씨에게 부탁한다. 호남살풀이 춤이 영원히 살아 전승 보존되고, 꽃을 피었으면 한다고. 특히 딸이 아버지의 염원과 꿈, 그리고 다 추지 못하것을 열심히 하여 아버지 보다 나은 춤을 추었으면 한다. 김호규 기자 hg1411@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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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華城)’과 ‘화성재인청’의 복원은 함께 추진되어야한다.조선조 공연예술사의 중심을 이루었던 재인(才人)은 여러 명칭으로 존재해왔는데 예컨대, 광대(廣大), 창우(倡優), 화랭이, 산이 등의 명칭으로 불리어졌던 집단이다. 재인청(才人廳)은 이들을 관장하는 행정기구로 신청(神廳), 악사청(樂師廳), 광대청(廣大廳), 화랑청(花郞廳)이라고도 불렸으며 경기, 충청, 전라도에 있었다. 재인청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경기도창재도청안(京畿道唱才都廳案)〉〈경기재인청선생안(京畿才人廳先生案)〉 등을 통해 1784년에서 1920년까지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재인청 가운데 ‘화성재인청’은 수원에 있던 집단으로 전국적인 재인청 가운데서도 그 존재와 의의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집단적 기구였다. 재인청의 재인들은 평상시에는 자기 고장에서 굿 등을 통하여 백성과 접촉하면서 기예능으로 먹고 살다가, 국가적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서울로 동원되어 공연에 참가했다. 이들은 땅재주, 솟대타기, 줄타기, 방울받기, 만연어룡지희, 대접돌리기, 무동, 불토해내기, 판소리 단가, 판소리, 12가사, 가곡, 검무, 각종 가장(假裝) 동물춤, 우희, 유희, 홍패고사 등을 연행하였으며 조선조 공연예술사의 중심이었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종목 중 많은 종목들이 재인청을 통해 전승되어온 것이며 일부 종목의 전승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고증을 통하여 반드시 복원되어야 한다. 경기도와 수원시는 조선조 정조대왕이 축조한 수원 ‘화성(華城)’ 내부에 해당되는 수원 도심 한복판 66만평에 이르는 시가지를 1조4000억원을 들여 2018년까지 원형을 복원하는 대역사(大役事)를 추진하고 있다. 경기도와 수원시는 수원 ‘화성’의 복원은 서울시의 청계천 복원사업에 비견되며 ‘화성’이 복원되면 수도권은 물론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될 것이 틀림없다고 장담하고 있으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막대한 재원을 투입하여 완성될 수원 ‘화성’은 건축물의 복원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도 함께 복원되어야 진정한 복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선조 공연예술의 중심이었던 ‘화성재인청’의 복원이야말로 그 시대의 문화를 복원하는 것이다. 수원 ‘화성’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덩그러니 유형의 건축물만 보고 간다면 복원의 효과는 반감될 것이다. 관광객들이 수원 ‘화성’을 방문하여 건축물 뿐만 아니라 당시의 수준 높은 전통예술을 체험 할 수 체계가 마련되어야 진정한 복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지난 해 화성재인청복원사업 추진위원회(추진위원장/홍윤식, 집행위원장 /김승국)가 결성되었으며, 경기문화재단의 후원으로 ‘화성재인청’ 복원을 위한 1차 학술회의를 개최하여 ‘화성재인청’ 복원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올 11월에도 2차 학술회의가 예정되어 있으며, 향후 복원을 위한 연구조사활동을 거친 후 에 상설공연장, 전통예술 체험관 등이 포함 된 ‘화성재인청’을 복원하여 수원 ‘화성’과 연계하여 한국 전통 무형예술의 메카로서의 역할은 물론 수원 ‘화성’이 국제적인 문화체험 관광명소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사업을 발전시켜 나갈 예정이다. ‘화성재인청’복원사업은 당연히 경기도와 수원시가 추진하고 있는 수원 ‘화성’ 복원 사업 계획의 틀 안에서 병행되어 추진되어야 하나, 현재는 전혀 연결체계 및 재원 지원체계가 전혀 수립되어있지 않다. 경기도와 수원시는 지금이라도 수원 ‘화성’의 온전한 복원을 위하여 ‘화성재인청’복원사업에 관심을 갖고 연계 체계 및 재원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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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예술세계-칠인칠색(4) 하용부의 예술세계'거장의 예술세계' 네 번째 무대는 밀양백중놀이 인간문화재이자 마당춤의 큰어른인 하보경 옹의 손자로 할아버지를 지게에 모시고 다니며 춤을 익힌 하용부의 춤판이다. 그의 춤은 세계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아 나라 안팎으로 왕성한 공연을 하고 있으며, 우리극연구소의 밀양연극촌장으로도 활동하며 전통연희 발전에 힘쓰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밀양백중놀이의 백미인 양반춤, 범부춤, 북춤과 창작 춤인 영무(靈舞)를 선보이며, 사물놀이패 ‘노름마치’가 함께 한다. ◈ 공연소개 ○ 밀양백중놀이 : 농경민족인 우리 선조들은 예부터 농사철에 맞춰 갖가지 놀이를 하면서 풍년을 기원했다. 밀양백중놀이도 세벌 논매기를 마친 칠월 보름 경 용날(辰日)을 택하여 그동안 고된 일을 해오던 머슴들이 지주들로부터 여가를 얻어 하루를 흥겹게 노는 놀이를 말한다. 춤사위는 그 동작이 철저하게 장단박자에 일치한다. 모든 춤동작이 활달하고 오른손과 오른발, 왼손과 왼발이 같이 움직이는 것이 특이하다. 또 주된 춤사위는 어느 지점으로 한발을 던져 동작을 맺고 제자리에서 양손으로 어깨춤을 추며 얼었다가 다시 풀어가는 배김새 사위라고 할 수 있다. 양반춤은 양반의 복식에 부채를 한 손에 들고 추는 춤으로 북춤이나 범부춤에 비해 춤사위가 많지 않으며 양반의 성격 묘사에 걸맞게 위풍스러우며 단조롭게 엮어져 있다. 겉으로는 동작이 거의 없는 듯 하면서도 그 속에 잠재되어 흐르는 미묘한 움직임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정중동(靜中動’이라고 한다. 이것은 수많은 움직임을 하나의 동작으로 집중하여 완결시킨 경지이다. 범부춤은 평범한 남자가 추는 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 명칭은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공식화된 것이다. 원래는 ‘벌춤’이라 불려졌고 이는 밀양지방의 방언으로 ‘넓은 곳에서 아무렇게나 추며 더불어 노는 춤’이라는 뜻이다. 북춤은 밀양북춤은 느린 덧배기 장단과 빠른 덧배기 장단에 추는 춤으로 장단의 변화가 거의 없고 힘찬 동작과 담백한 춤동작이 가끔 엇박자의 흐름 속에 더욱 흥을 돋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춤에서 나타나는 춤사위는 다른 어느 지방과의 춤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판이하고 독특한 멋을 지니고 있다. 보다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넘칠 뿐만 아니라, 한번 울리는 북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심금을 울리는 멋이 가득하다. 영무(靈舞)는 영무는 우리 전통 몸짓의 한편인 제의의식과 농경문화의 풍년을 기원하는 영남의 들춤에서 비롯되었다. 정적이면서 동적인 우리전통춤꾼들의 호흡으로 신명과 멋을 배제한 전통춤사위의 형식으로, 깊고 넓은 호흡의 길이로 음악을 타고 넘나드는 몸짓을 표현하고 있다. 약력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인간문화재 우리극연구소 밀양연극촌 촌장 수상경력 1980년 ~ 현재 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연20회 공연 1984년 동경 히비야 공원 '밀양백중놀이' 양반춤, 범부춤ㆍ북춤 공연 1991년 사할린 남북민속제 참가 1993년 동숭아트센타 5주년 개관기념공연 하용부 춤판 1997년 ‘96 프랑스 '발드마른 국제댄스페스티벌' 참가 1999년 ‘98 프랑스 '발드마른 국제댄스페스티벌' 참가 2002년 '男舞' 호암아트홀 공연 2003년 '사랑, 영혼 그리고 춤' 창작공연 서울스타시티극장 개관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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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무형문화재 제22호 '마들농요'를 찾아서(이소라)마들동요는 경기도 지역의 농요를 본바탕으로 하고 강원도 지역 농요의 영향을 일부 받으면서 형성된 소리이며 농사를 지을 때 힘든 일을 잊고 흥을 도우기 위해 부른 민요이다. 전승되는 농요에는 아침소리, 모심기 소리(하나, 둘...열소리), 상사소리(넬넬넬 상사도야), 애벌맬 때 소리(에 두루차 하...에헤에와), 점심소리, 방아타령, 두벌맬적 소리(미나리), 새쪽는 소리(우이여라 훨훨), 저녁소리(둥기야 당실-꺽음조)가 있다. 미나리는 본시 논보다 밭이 많은 강원도에서 모심을 때 또는 밭을 매면서 부르던 소리인 것이 경기도 포천으로 들어가면서 논의 김(잡초)을 맬 때의 소리로 전환되고 그것이 의정부의 길을 따라 전파되면서 가락이나 가사, 가창방법 등에 이 지방의 정서가 가미되어 색다른 풍의 민요가 형성되었다. 이 중 두루차 소리와 꺽음조는 마들농요의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 곡들이다. 마들농요가 불리우는 노원구 지역은 고려 현종이래 양주관할이었으나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마들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상계동에 역참기지가 있어 말들을 들에 놓아 키웠기 때문에 생겼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상계동 일대가 삼밭이 많아 삼밭의 순 우리말인 마들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비록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예전에는 볍씨만 800석을 넘게 뿌렸던 대 평야였다. 그 마들 대평야에서 모를 심고 김을 매고 수확을 하며 농사일의 어려움을 잊기 위해 흥얼거렸던 노래가 바로 마들농요이다. 그러나 노원의 급속한 도시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은 모두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농요 또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더욱이 시간이 흐를수록 당시 농요를 부르며 일을 했던 어르신들이 고령화되고 한 분씩 돌아가시면서 농요의 보존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렇게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전승의 맥이 끊겨가던 농요를 되살려 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분이 있다. 마들농요보존회장인 김완수(만 56세)씨다. 마들농요 보유자이자 보존회장인 김완수씨는 45년 흥덕면 오태마을에서 김이중씨와 이종임씨의 6남매중 5째로 태어났다. 흥덕초등학교(33회)를 졸업하고 흥덕중학교에 다닐 때 인간문화재 이은관 선생이 초청한'배뱅이굿'을 보고 소리공부가 하고 싶어 무작정 서울 보따리를 쌌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상계동 지금자리에 40년전에 자리를 잡게됐다. 그때는 서울이 아니었고 양주군 노회면으로 호박밭과 미루나무가 많은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만원버스를 타고 서울의 이은관 선생이 운영하는 경기민요학원에 나가 전수장학생이 되었다. 민요를 처음 접했던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가 정식으로 입문하기 위해 처음으로 문을 두드렸던 곳이 바로 이은관 선생이 운영하던 민요학원이었다면, 또 이것만큼 자연스러운 세상사도 없지 않을까! 그 때가 1970년, 조금 늦깍이로 민요를 시작한 감이 없지 않지만, 이미 천성적으로 타고 난 끼와 열정은 그 늦은 시간을 만회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1978년에는 우리국악 순회 공연단 대표 자격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국악을 보급하는 활동을 시작했던 그는 그 외에도 경기산타령 개인 발표공연, 한국 민속 예술제 3회 출연, 국립 민속 박물관, 덕수궁 중화문, 남산골 한옥마을, 서울시청 본관 마들농요 발표공연 등 얼핏 헤아려도 수 백회가 넘는 공연을 해왔다. 이것이 바로 더도 덜도 없는 그의 인생이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뒤에는 바로 수더분한 아내와 1남 2녀의 자녀가 있다. 하지만 가족들의 고통스러웠던 인내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늘상 가슴이 무거워진다고 한다. 지금도 집에서 소리를 하면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는 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목이 잠기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 그러나 이젠 당당하게 자식에게 자신의 일이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것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마들농요 복원을 위한 10년 고생이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22호라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경기민요를 줄곧 해왔던 그가 서울시의 유일한 농요인 마들농요를 처음 접한 시기는 1990년 이소라 문화재 전문위원의 채보를 통해서이다. 그는 노원구에 근근히 마들농요가 전승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앞이 아뜩해졌다고 한다. 지금까지 계속 눈앞을 맴돌며 뚜렷하게 잡히지 않았던 삶의 방향타를 확실하게 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그 말로만 간신히 전해 내려오는 농요를 제대로 복원하는 것이 도서관에 앉아서 자료 몇 줄 찾는 것으로 끝나는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그는 경기도 양주군 일대와 노원구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는 본토 노인네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장애물은 늘 예기치 못했던 곳에 숨겨져 있는 법. 마들 벌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던 노인 분들은 막상 자신의 입으로 농요를 재현해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열망이 그분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일까. 사람들은 그에게 기억나는 노래 몇 소절씩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분들이 상계1동에 있는 갈월 경로당분들이다. 고 윤충보, 서은남, 박우석, 한동식, 박준형, 이면우, 문사용, 이영흠, 장영태씨 등 그가 얼핏 말하는 분들도 10여명에 가까운 것을 보면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수많은 어르신들의 얼굴이 스쳐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1990년 故 윤선보 옹에게서 받은 사사는 마들농요의 전체적인 윤곽을 세우는 문제 뿐만 아니라 당시 농요를 부르며 일을 했던 사람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수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배움의 시간이었다. 그리하여 7년에 걸친 멀고도 지난했던 복원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마들농요는 1996년 완성이 되고 그해 제37회 한국 민속예술제 서울시 대표로 출연해서 공로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복원한 마들농요를 꾸준히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 1996년 7월 정회원 50명, 준회원 평화노인대학 100명으로 보존회를 구성했다. 문제는 회원들의 고령화로 마들농요의 맥을 이어나가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보존회의 입장에서는 젊은 회원의 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젊은 회원이 들어와도 반갑지만 못하다. 넉넉치 못한 재정 형편은 언제나 고민거리! 하지만 어려운 조건속서도 요즘 마들농요보존회에 활기가 넘친다. 농요가 지정된후 전수장학생, 전수자, 이수자 배출에 이어 전소조교로 지난 5월에 신진성, 박운종 씨가 지정됐다. 또한 이분들 외에도 안향단(이수자), 양재순(이수자), 이순경(전수생), 장선녀(전수생), 안영숙(전수생), 이정님(전수생), 조정선(전수생) 씨 등이 마들농요보존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의 순회공연도 하고 정기적으로 발표회도 갖는 등 왕성한 활동을 통해 농요의 보급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어렵사리 복원한 마들농요이긴 하지만, 지금 자라나는 학생들에겐 상당히 생소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이제 남은 일은 노원의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인 농요를 쉽게 부를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농요 테이프를 제작 배포하고 꾸준한 공연활동을 통해 보급에 힘써 왔지만 아직도 대중적인 인지도는 부족한 편이다. 실제 농사를 지으며 노래를 불렀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 영상자료로 만들어 내거나 또는 단지 농요의 재현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내기를 하는 현장에서 온 가족이 참여하는 "모내기 이벤트"와 같은 행사를 기획해 나간다면 그 교육적 효과는 배가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김완수씨에게는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 그것은 회원들이 마음놓고 연습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강습도 할 수 있는 "마들농요 보존회관"을 건립하는 것이다. 전통문화에 관심있는 사람들의 의지가 하나 둘씩 모인다면 그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듯 싶다. 마들농요보존회 : 02) 936-3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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