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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왜 ‘찬미가’는 역술(譯述)인가?현 ‘애국가’와 ‘무궁화가’와 또 한 편의 창작 찬미가 1편이 수록되어 주목을 받는 ‘찬미가’의 판권(板權)에는 작사자로 주장되는 윤치호가 ‘譯述者’로 되어 있다. 이 ‘역술’이란 표기 때문에 윤치호는 애국가 작사자가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아왔다. 이런 문제 제기는 오해임으로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대략 다음의 두 가지를 들어 주장되어 왔는데, 그 하나는 역술은 곧 번역(飜譯)이란 주장이고, 또 하나는 역술은 감수(監修)의 뜻이라는 것이다. 번역(Translation)이란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으로서 한자로는 '뒤집다'의 뜻이 있는 飜(번)과 '풀이하다'의 뜻이 있는 譯(역)의 조합어다. 영어 동사 translate는 라틴어 translatio에서 왔으며 원래의 뜻은 '옮기다'이나, 의미가 확장되어 이식(移植)의 뜻도 갖고 있다. 번역의 1차적인 목적은 원문과 번역문이 동등한 관계, 즉, 똑같은 의미를 갖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술을 이런 번역으로 본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다른 언어의 원문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12편의 찬송가 중 6장과 13장을 제외한 10편은 모두 이미 우리나라 찬송가집에 수록되었고, 나머지 2편은 당시에는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 1983년 ‘합동찬송가’에 수록되어 현재로서는 전체 12편 모두가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가 되어있다. 이렇게 원문의 존재가 분명히 확인되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1장(KOREA), 제10장(Patriotic Hymn 뎨十 No[1]), 제14장(Patriotic Hymn 뎨十四) 3편은 위의 찬송가와 같은 원문의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원문이 없음은 물론, 다음의 가사를 번역한 것으로 볼 수가 없다. 제1장-"산놉고물고흔 우리대한뎨국 하나님도으사” 제10장-"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본국일세” 제14장-"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이상과 같은 가사의 3편을 번역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 제10장, 즉 ‘무궁화가’의 창작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졌다는 사실이다. 즉, ‘독립신문’ 1897년 8월 19일 자 독립신문 발행인 서재필이 쓴 '편집자 노트'에서 확인이 된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8월 13일 조선 개국 505주년을 맞아 독립협회 주최 행사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무궁화 노래(National Flower)’를 불렀다. 이 노래는 한국의 계관시인(桂冠詩人/Poet Laureate) 윤치호(Mr T. H. Yun)가 이 행사를 위해 작사하였다. 배재학당 학생들은 이 시를 스크랜턴(이화학당 설립자) 여사가 오르간으로 반주한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곡에 맞춰 불렀다. ‘무궁화노래’ 가사 일부는 ‘우리나라 우리님군 황텬이 도으샤 님군과 백셩이 한가지로 만만셰를 길거야 태평 독립 하여 보셰’이다.” 이 기사의 윤치호 작사 ‘무궁화노래’ 일부는 1908년 재판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0장 4절과 일치한다. 이에 의하다면 수록 3편 중 1편이 분명하게 윤치호가의 창작으로 확인된다. 나머지 2편도 창작임은 물론, 윤치호 작사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감수로 주장하는 것도 같은 문제이다. 역시 사전적인 의미를 대입해 보면 이렇다. 감수(監修)란 책의 저술이나 편찬 따위를 지도하고 감독하는 것을 말한다. 내용 등에 대해 잘못된 것이 없는지, 그 내용 자체에 대해 확인 또는 수정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런 의미를 갖는 감수와 역술을 동일하게 보는 것은 무리이기는 마찬가지다. 당연히 원본의 존재를 갖고 대비해야 하기 때문인데, 이런 이유에서 역술은 번역이나 감수가 아닌 독자적인 술어임을 알 수가 있다. 역술은 1880년대부터 1910년까지의 근대 계몽기 신지식 수용 과정에서 수용한 용어이다. 특정 대상 문헌에 대한 번역과는 달리 여러 문헌을 편역(篇譯)하거나 견해를 포함하는 저술 활동의 하나이다. 번역의 유사 개념인 번안과도 다르게 당시 지식 수용과 주체화 과정에서 일부는 번역하고 일부는 자기 지식을 반영한 ‘번역과 일부 지음’의 합성어이다. 굳이 ‘번역(飜譯)’이란 용어가 사용되는 상황에서 이 용어를 쓸 이유는 없었을 것이니, 분명 전체 번역에 일부 창작(저술)이 포함된 것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이러한 역술 활동이 필요했던 이유는 지식의 근원이 되는 문헌이 빈약하고 유통되는 지식의 양이 부족한 상황에서 근대 지식 보급이 급선무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용어를 일본으로부터 받아들였다. 당시 일본에서의 정의는 이렇다. 1895년도에 발행된 ‘제국문학’ 8월호의 ‘번역의 진상(眞相)’이란 글에서 역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번역이 곤란하여 때로 오류가 불가피한 경우가 있으니 이것이 역술로 되는 것이고, 이것 역시 가능하더라. 무릇 역술이라 함은 7할의 번역과 3할의 창작을 가미한 것이라더라.” 이 용어가 일본에서 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면 이상의 정의는 수용할 수밖에 없다. 이런 역술 자료들은 수없이 많다. 단행본은 물론 잡지와 신문 기사도 상당하다. 예컨대 현채(玄采, 1856~1925)의 역술 ‘동국사략(東國史略)’이 있는데, 이 책은 일본인 임태보(林泰輔)의 ‘조선사’를 번역하고, 원본에 없는 단군 기사나 임진왜란 기록이나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 같은 기사를 끼워 발행한 책이다. 특히 원본의 결론과는 반대로 임진왜란을 우리가 승리했다고 서술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동국사략’은 현채가 대분분은 일본 ‘조선사’를 역하고, 특별한 부분은 술(述)하여 역술로 발간한 책이다. 이외에도 역찬(譯纂), 중역(重譯), 역(譯), 번안(飜案), 집술(輯述), 선술(選述), 보술(補述) 등을 함께 사용하였다. 특히 ‘집술’과 ‘선술’은 역술과 유사한데 여러 자료를 보고 기술하였다는 뜻이다. 전자는 1895년 유길준의 ‘서유견문록’이고, 후자는 1906년 발행된 김상연 선술 ‘精選 萬國史’가 대표적인 출판물이다. 이런 사례의 ‘술(述)’은 곧 번역이 아닌 부분적인 ‘작(作)’ 또는 ‘술(述)’인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이미 1989년 발행한 졸저 ‘애국가 작사자 연구’(집문당, 1989, 183~184쪽)에서 ‘번역과 일부 지음’이라 밝힌 바 있다. 이런 용어를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하여 이해하고, 미국에서 신학을 전공하여 정확하고 소박하게 표현하는 것을 체화한 윤치호가 이를 혼동하거나 자의적으로 썼을 리는 없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윤치호는 이미 서양과 국내에서 번역되어 불리는 찬송가 10편을 새로이 번역하고, 새로운 찬송가 두 편을 더 번역하였다. 여기에 자신이 시기와 계기를 달리하여 창작한 찬미가 3편을 더하여 총 15편, 16쪽의 소책자 찬미가집을 발행하였다. 이때 판권에 ‘역술자 윤치호’로 표기하였다. 이때의 역술이란 뜻은 ‘대부분 번역하고 일부를 창작한 것’을 뜻하는 것이니 당시로서나 오늘날에서나 적확(的確)한 표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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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역술 ‘찬미가’에 대한 오해와 진실윤치호는 일본, 중국, 미국에서 유학을 했다. 어려서는 전통 학문 한학을 했고, 일본어, 중국어, 영어를 생활어로 일기를 썼다. 중국 중서서원 교수, 대한제국 외부협판, 학부협판, 한성부 판윤,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사장 등을 역임했다. ‘우스운 소리’, ‘영문법첩경(英語文法捷徑)’, ‘영어문법사전’, ‘유학자취(幼學字聚)’를 지어 출판했고, ‘의회통화규칙’, ‘이색우언’, ‘걸리버유람기’ 등을 번역 출판했다. 이런 경력의 윤치호는 찬미가 세 차례에 걸쳐 3편을 작사하고, 서양 찬미가 12편을 번역하여 묶어 ‘찬미가’를 출판했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를 조사를 할 때 주요 증거 자료로 수용한 세 가지 중 하나이다. 판권에는 "譯述者 尹致昊 , 隆熙 二年(1908) 6월 25日 再版 發行, 發行者 金相萬, 발매소 廣學書鋪, 定價 金 二錢 五兩”으로 되어있다. 출판 시기로 보아 관직에서 벗어난 대한제국 말기의 마지막 저작인 듯하다. 1905년 을사조역 체결로 상심하여 공직에서 물러나 민간 주도의 애국계몽운동에 나서는 시기이다. 그의 지식과 신앙과 애국심과 시국관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찬미가’에 대해서 몇 가지 오해가 있어 왔다. 그동안 제기된 몇 가지 오해를 풀어 보기로 한다. ‘1908년 재판’에 대하여 출판에서 초판과 재판 등의 표기는 인쇄의 회수, 즉 쇄(刷)를 표기한다. 이 경우는 ‘초판 2쇄’와 같이 표기한다. 그러나 ‘재판’ 또는 ‘3판’과 같은 표기는 판매를 위해 인쇄를 거듭하는 경우이기 보다는 출판물의 형태나 내용을 달리하기 위해 조판(組版) 자체를 새로이 하여 인쇄하는 경우이다. 근대 출판물의 이런 원칙을 적용하면 이 ‘찬미가’의 경우는 후자가 된다. 그러나 이런 원칙을 무시하고 판매량을 과시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관행적으로 ‘쇄’와 ‘판’을 거의 무시해왔다. 이런 원칙을 구분하는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한 윤치호로서는 이를 적용했을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전자로 해석을 하여 초판이 없어 비교할 수 없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초판 년도가 불명하니 ‘1907 作’이라 표기한 ‘자필 가사지’를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찬미가’의 출판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책명 ‘찬미가’라는 점에서 기독교 찬송가집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찬송가집 발행은 감리교와 장로교계라는 국제기구의 심의를 거치고 허가를 받아 발간하는 것인데, 이 출판물은 17쪽의 소규모인데다 윤치호가 번역과 지은 찬송가 15편을 엮어 김상만을 발행자로 하여 펴낸 개인 출판물이다. 이런 사항으로 볼 때 이 출판물은 비공식적 사찬(私撰) 찬송가집으로 교계의 공식 찬송가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바로 1906년 개성에서 개교한 ‘한영서원(韓英書院)’의 학생 배포용 찬송가집인 것이다. 한영서원은 1906년 10월 3일 미국 남감리 교회 계열의 지원과 당시 3,000원 상단의 기부금을 낸 윤치호가 개성에 세운 중등 수준의 사립학교다. 대한자강회 조직과 함께 애국계몽운동 전개의 일환이다. 첫 입학생은 총 16명이었다. 1908년에는 15세 이상의 남학생이 225명으로 확대되어 인문교육 및 실업교육을 하며 소학과 4년, 영어전수과 2년, 고등과 3년, 반공과(半工科) 3년 등의 과정을 두었다. 그래서 같은 해 9월에는 지상 3층의 현대식 석조건물로 교사를 신축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한영서원의 개교와 학생현황에서 ‘찬미가’의 발행과 재판 발행 상황을 추론할 수 있다. 즉, 윤치호는 설립자 겸 교장으로서 감리교계 미션스쿨 학생들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찬송가집을 발행하였고, 그 초판은 프린트(가리방)본이란 한계로 20여부 정도의 소책자로 발간하였다. 그리고 1907년 애국계몽운동 차원의 시국관을 담은 새 찬미가의 필요성을 느껴 새 찬미가를 작사하고, 교세의 확대에 따른 보급과 일반 판매용으로 새로운 조판을 하여 재판 ‘찬미가’를 1908년 정식 활판 인쇄본으로 발행한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영서원 개교시 학생 16명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찬미가’ 등사본 20여부를 발행하였다. 여기에는 ‘찬미가 제14장, 현 애국가’는 수록되지 않았다. 둘째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에 나서면서 애국적인 찬미가 작사의 필요성을 갖게 되어 새 찬미가(제14장)를 작사하였다. 셋째, 학생 수의 확대와 새 찬미가의 보급을 위해 개교와 함께 인수한 광학서포를 발매소로 하여, 1908년 정가를 붙여 정식 활판 인쇄본 재판 ‘찬미가’를 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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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 애국가 수록국사편찬위원회가 주관하는 애국가작사자 조사 중인 1955년 7월 30일, 연합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왔다. 윤치호 측의 중요 자료가 위원회에 전해진 결과이다. "윤씨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단정하게 된 물적 증거는 윤치호 친필 애국가 사본(寫本)과 샌프란시스코 거주 양주은(梁柱殷) 씨로부터 보내온 앨범 복사판 및 윤치호 작 찬미가(讚美歌)를 목도(目睹)하였다는 人士들의 중언 등에 의한 것이다.” 세 가지 증거 자료가 제시되었다. 하나는 지난 회에 제기한 윤치호 자필 ‘가사지’이고, 둘은 "샌프란시스코 거주 교포 양주은 씨로부터 보내온 앨범 복사판”, 즉 신한민보 1910년 9월21일자 게재 ‘윤티호’작 애국가 4절(게재 곡명은 ‘국민가’) 자료이다. 마지막은 윤치호 역술(譯述) ‘찬미가’이다. 총 15편의 찬미가를 수록한 가집이다. 이번 회에서는 이 찬미기집을 분석해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재확인하기로 한다. 이 ‘찬미가’의 존재는 현 애국가와 ‘무궁화가’를 윤치호가 작사했음을 명백히 하는 자료이다. 다음의 서양 찬송가 번역 12편과 함께 창작의 애국적 가사 3편이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 KOREA TUNE: AMERICA 664, 646 뎨一 一 우리황상폐하 턴디일월갓치 만수무강 산놉고물고흔 우리대한뎨국 하나님도으사 독립부강 二 길고긴왕업은 룡흥강푸른물 쉬지안틋 금강쳔만봉에 날빗찬란함은 태극긔영광이 빗취난듯 三 비닷갓흔강산 봄꼿가을달도 곱거니와 오곡풍등하고 금옥구비하니 아셰아락토가 이아닌가 四 이천만동포난 한맘한뜻으로 직분하세 사욕은바리고 충의만압셰워 님군과나라를 보답하셰 ㉡ Patriotic Hymn, TUNE: AULD LANG SIGN, 뎨十 一 승장신손 천만년은 사롱공상 귀천업시 직분만 다하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충군하는 일편단심 북악같이 높고 애국하는 열심의기 동해같이 깊어 三 천만인 오직 한마음 나라 사랑하여 사농공상귀천없이 직분만 다하세 四 우리나라 우리님군 황천이 도으사 국민동락 만만세에 태평독립하세 ㉢ Patriotic Hymn, TUNE: AULD LANG SIGN, 뎨 十四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높고 밝은 달은 우리가슴일편단심 일세 四 이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사랑 하세 이상과 같이 창작 찬미가 3편, 이 중 ‘무궁화가’(㉡ Patriotic Hymn)와 현 애국가(㉢ Patriotic Hymn)가 수록되어있다. 이 때문에 이 찬미가집은 중요한 증거자료였다. 그래서 조사 기간인 5월 2일에 "윤치호씨 저 ‘찬미가집’ 가지신 분 알려 주시길 요망”이란 연합신문에 기사가 나온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이를 검토한 결과가 기사로 나온다. 이 자료의 존재는 1970년 7월호 ‘국회도서관보’ 52~53쪽에 사서 윤학구(尹鶴求)가 발표한 ‘解題 讚美歌’가 나와 확인 된다. "尹致昊 著(譯述), 隆熙 二年(1908), 活字本(金屬活字) 一冊, 17.5cm x 12.5cm 18p, 裝幀 赤黃色 表紙 湖附裝” 이 같은 서지사항과 함께 "명치45년(1912) 2월 7일 판매금지도서가 되었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마무리하였다. 이 자료를 증거로 할 때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주장이다.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하여 국가기관에서도 엄연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적당히 넘겨왔으나 이제는 사실대로 밝혀서 그릇된 역사를 시정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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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절대적인 증거력, 윤치호 ‘자필 가사지’"안창호 선생은 평생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분이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가사를 지을 수 있었다고 보십니까?” 2000년내 들어 안창호 작사설이 다시 일고 있다는 말을 하자 기독교사가(基督敎史家)로서 정년을 앞둔 한 분이 보인 반응이다. 두 말할 여지 없이 안창호는 작사자가 아니라는 단언이다. 다음의 증언도 이에 견줄 만한 강력한 작사자 증거력을 가졌다. "1945년 12월 작고 직전 남긴 一九0七 尹致昊 作” 자필 가사(歌詞)는 명백하게 작사자가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증거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작자는 윤치호이다." 단언(斷言)은 위험성을 내포하지만 그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가늠이 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 여부로 진위를 알 수도 있다. 그런데 아직 이 두 말에 대해 설득력 있는 반론을 보지 못했다. 모두 주변적이고 사료 검증 안목을 갖추지 못한 단순한 반응 정도이다. 또 아니면 지나친 억지 주장을 담은 것들이다. 본 회부터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확인시켜 주는 자료들, 그 중에서 문제적 시점인 1907년을 전후한 시기의 사료들을 먼저 살피기로 한다. 이 시점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윤치호가 직접 작사 시점을 1907년으로 밝힌 사실 때문이다. 바로 애국가 ‘가사지(歌詞紙)’이다. 그런데 이 가사지는 1945년 12월 작고 2개월 전인 10월에 기록한 것으로, 이 존재가 알려진 것은 3년 뒤의 일이다. 1948년 10월 6일 자 동아일보에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1919~1985)이〈애국가고-주로 그 작사자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1949년 월북 1년 전에 쓴 글에서 "시대의 변천이나 역사의 개혁에 따라서 하나의 사관이 변동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떠한 역사의 사실을 조작할 수는 없다.”고 전제했다. 그리고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 사실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故 윤치호 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1947년 ‘도산 안창호’에서 안창호 작사설을 유포한 것에 대한 강한 반론이다. 좌파 음악평론가 박은용의 이 주장 근거는 바로 윤치호 자필 가사지의 존재 확인에서 알 수 있다. 한지에 묵서한 것인데, 곡명이 없다. 윤치호는 이를 ‘애국가’로 작사한 것이 아니라 ‘찬미가(讚美歌)’의 하나, 즉 ‘찬미가 14장’으로 작사한 것일 뿐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 ‘애국가’란 곡명은 당시 기독교계 학교로부터 전파되고 일반에 알려지면서 "애국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윤치호는 37년 전 작사 시점인 1907년을 밝히면서 일반적인 곡명 "애국가”를 쓰지 않은 것이다. 윤치호가 기록에 대한 엄밀성을 보여 준 결과이다. 이는 윤치호가 1945년 10월에 쓰면서도 마지막 간기를 "1945年 書”로 쓰지 않고 "1907年 尹致昊 作”으로 한 것은 서법(書法)에 맞게 표현한 것이다. 만일 "1945年 書”로 표현했다면 "1907년 자작(自作) 찬미가를 1945년에 쓴다”라고 해야 하는 것을 줄여서 쓴 것이다. 이런 사연은 가사 뒷면에 딸 문희가 기록으로 남겼다. 이러한 서법 구사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당시 누구보다도 능력의 소유했다. 전통적인 학문과 일본과 중국 그리고 미국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서예 작품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공직을 거치면서 공문서 작성 경험이 누구보다 풍부하다는 사실에서 확인이 된다. 1945년 10월 딸 문희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찬미가’ 4절 가사 묵서(墨書). 이는 윤치호가 1907년에 작사하였음을 명확히 밝혀 그 작사자와 작사 시점을 명확히 하였다. 최초의 감리교 기독교인으로, 독립협회장으로서 독립신문 운영, YMCA 총무로서의 계몽운동 등으로 작고 2개월 전의 자필 기록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국 이 묵서 자료를 통해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임을 확정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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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5회 안창호의 윤치호에 대한 배려’에 대한 脚注"선생이 작사하였지요 라고 물으면 웃고 답하지 않았다.”는 안창호가 자신이 작사라는 사실을 내 세우지 않는 겸손함을 표한 것이다.” 이 ‘겸손’의 표현은 사실일 수 있다! 필자는 4회를 쓰고 나서 많은 시간을 위의 문장을 되뇌었다. 이광수가 한 말이든,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가 가필한 것이든, 이 겸손의 표현이 사실이라면, 나는 30여년을 역사를 배신한 것일 뿐만 아니라 안창호설 주장자들을 향해 독설을 내뱉었다. "안창호 선생을 욕되게 하지마라. ‘거짓을 말하지 마라’란 선생의 말씀을 명심하라!” 어떻게 수습해야 하느냐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거의 3주 정도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5회 분 보내주세요.”라는 편집부의 성화를 들을 때마다 되뇌기를 되풀이 하였다. 모진 말이나 독한 말을 하고는 혼자 전전긍긍하는 내 성정대로 마음을 쓰고 또 썼다. 그러던 어느날, 출근길 전철 안에서 의외의 경험을 하고 생각을 되 돌릴 수 있었다. 그것은 지난 해 입었던 옷 주머니에 있던 이쑤시개에 약지 손가락을 찔린 일이었다. 순간,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렸다. 필자 나름의 이 말의 해석은 이렇다. "주머니 속의 뾰족한 것은 언제든지 뚫고 나 올 수밖에 없다” 작사자가 윤치호든 안창호든 사실이라면, 그 증거는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그리고 되돌아가 우연스럽게 또는 지인의 도움으로 받은 자료들은 떠 올려 보았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인사동 고서점에서, 방송 다큐맨터리에서, 해외 싸이트 경매품에서, 그리고 국가상진연구회 회원이 건네 준 자료들에서, 각 설 주장 가문(家門)에서 공개한 자료들을 속에서 드러낸 것들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들은 말 그대로 스스로 존재를 드러낸 것들이다. 예컨대 애국가 역사에서 문제적 시기로 볼 수 있는 1907년을 전후하여 생산된 자료들이 그것들이다. 다음의 네 가지를 대표적인 자료로 꼽을 수 있다. 하나는 ‘1907년 作’으로 표기된 ‘윤치호 자필 가사지’의 존재이다. 둘은 1908년 태극학보 2월호 애국생(愛國生/안창호) 명의 ‘贊愛國歌’의 존재 확인이다. 셋은 1908년 윤치호 역술 재판 <찬미가>의 존재다. 넷은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 게재 <국민가> ‘윤티호’ 표기 자료이다. 이상의 네 가지는 직접적으로 애국가의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가리키는 자료이다. 특히 두 번째 자료는 안창호가 작사한 ‘애국가’의 존재가 확인 된 것이니, 이와는 가사가 다른, 즉 현 애국가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를 예찬(禮讚)한 것이니 결과적으로는 1907년 작사한 윤치호 작사를 인정한 것이 되는 자료이다. 네 번째 자료는 매우 의미심장한 자료이다. 왜냐하면 이 번 회의 주제인 ‘안창호의 겸손(謙遜)’ 주장을 상쇄(相殺)시키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실질적인 안창호 주재의 신한민보가 애국가와 가사가 같은 4절을 <국민가> 곡명을 바꿔 윤치호 작사로 발표한 것은 앞의 ‘겸손’ 주장과는 상치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와 이에서 확산된 단순 기록을 제외한 모든 자료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향한다는 점에서 안창호설은 페기 되어야 하는, 풍화(風化)를 겪는 낭설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로서 제5호로 제시한 ‘안창호의 윤치호에 대한 배려’에 대한 脚注를 뒤늦게 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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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해악(害惡)'안창호 작사설'의 발단은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에서 비롯되었다. 임시정부와 그 요인들, 특히 안창호나 김구, 이승만, 그리고 이 책의 저자 춘원 이광수는 이미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실제 저자 이광수로서는 '안창호 작사'임을 시사하는 내용을 기술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는 저자 이광수라는 이름을 빼고 안창호 작사설을 가필하여 끼워 넣었다. 이 사실을 ‘도산 안창호’ 각 판을 대비하여 가필 사실을 밝힌 필자는 제6회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내용 불신’에서 "안창호설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한 바가 있다. 이런 저간의 사실을 모르는 독자들이나 특히, 1955년 문교부나 국사편찬위원회 같은 곳에서는 이 책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여 혼란을 야기했다. 대표적 사례가 1955년 미국 출판사의 문의에 문교부가 "안익태 작곡 안창호 작사”로 답하려 했다는 사실과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에 이 책의 일부를 인용한 것들이다. 큰 해악을 일으킨 책이다. 이번에는 이에서 확대된 문제, 즉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에 수록된 이광수 가족과 윤치호 가족 간의 주장을 살피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족 간의 서로 다른 주장은 근본적으로 이 책의 임시정부 시절 안창호의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도 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에서 야기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1955년 5월 13일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 회의 참고자료로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를 발행했다. 이 보고서에는 ‘도산 안창호’에서 인용한, 또는 관련한 사항이 네 곳에 이른다. 또한 윤치호에 대한 내용이 가장 많이 기술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안창호 대(對) 윤치호 두 가족이 ‘도산 안창호’의 내용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분명하게 대척되는 대목이다. ‘안창호 작사설’은 8쪽에서 11쪽에 기술되었다. 이 중에 문제가 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춘원이 도산 전기에 애국가의 작사자를 도산이라고 쓴 것에 대해 윤치호 씨의 자제가 문의했을 때 춘원이 그 유래를 설명하자 납득하고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도산 안창호’를 보고 찾아온 윤치호 자제에게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許英肅, 1897~1975)이 하였다는 말이다. 부연하면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어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 하였다.”는 등의 대목이 있어 윤치호 자제(3녀 문희로 추정됨)가 문제를 삼자 이광수가 설명하자 이해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전후 맥락을 짚어 구체화하면 이런 문제가 부각되기에 이른다. 즉, 1945년 해방이 된지 2개월 후쯤이고, 작고 2개월 전에 딸 문희가 부친을 만난 자리에서 다르게 불리는 부분이 있어 고치고, 친필로 가사를 친필로 받은 바가 있다. 곧 ‘자필 가사지’를 말한다. 3녀 문희와 2녀 보희(이화여대 음대 교수)와 함께 1970년대까지 부친이 작사자임을 증언한 장본인이다. 이런 사실을 대입할 때 과연 봉선사에 있던 1947년 1월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로부터 의뢰를 받아 5월에 출간한 이후, 이광수는 1949년 1월 반민특위 조사, 수감 등을 거처 1950년 7월 12일 납북 당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내왕하여 따졌다는 것이니 믿기가 어렵다. 특히 이 책이 발간되기 전인 1946년 5월 허영숙과 이혼을 한 상황인데, 이후 허영숙이 말했다는 것을 믿어야 할지 의심스럽다. 다음 인용문은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 18쪽에 있는 주영환의 서면 답변 일부이다. "이광수의 도산 전기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 씨라고 한 것은 이광수의 실책이다. 안영자 씨를 통해 정정할 기회를 만들기로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하나의 사안에 대해 ‘납득’과 ‘정정’이란 상반된 주장을 한 것임을 확인 한 것이다. "작사자를 안창호씨라고 한 것은 이광수의 실책이다”, "정정할 기회를 만들기로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는 이광수가 1950년 7월 12일 납북을 당한 상황이니 1947년 6월부터 방문하여 따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1948년 중반부터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시달리던 상황을 감안하면 이 방문 기간은 더 단축되어 의심이 든다. 이런 상황이기에 양측 주장 모두 증거력을 인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결국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가족들의 증언은 영원한 평행선일 수밖에 없다.(그러므로 기록 자료가 아닌 가족들의 구술 자료는 참고 자료일 뿐이다) 두 주장의 내용 자체도 구체적이거나 논증적이지 않아 각 주장 중에서 반드시 하나를 택해야 할 가치가 없다는 결론이다. ‘애국가작사자조사' 10쪽의 허영숙 주장과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 18쪽의 주영환의 주장은 모두 신뢰를 할 수 없다. 가족이나 인척의 주장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한 보고서에 상치되는 주장이기에 상쇄되는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에는 윤치호 작사설은 존재하지만 안창호는 ‘설(說)’은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작사자 조사’라는 소란은 근원적으로 문제를 야기한 ‘도산 안창호’의 해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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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임시정부의 애국가관, ‘애국가 유지’임시정부 요인들의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인식은 분명했다. 즉, 윤치호임을 알고 있었고, 애국가를 국가 대용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굳이 작사자를 밝힐 필요는 없었다. 이것이 1945년 환국까지의 기조이다. 이번 회에서는 임시정부의 애국가관, 즉 애국가의 기능과 위상을 살펴 임시정부의 기조를 재확인하고자 한다. 임시정부에서 애국가에 대한 논의는 세 번이나 있었다. 한 번은 ‘임시정부공보’ 1920년 3월 18일 자에 공시된 ‘애국가 수정안’ 논의이다. 이에 대해서는 첫 회 ‘임시정부, 안창호 작사 인식 없었다’에서 살핀 바 있다. 두 번째는 1940년 미주 대한인국민회 신곡보 사용 허가 의결이고, 세 번째는 1942년 ‘국가와 군가 제정 제의안’ 논의이다. 이번 회에서는 이 두 번의 논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상해임시정부는 1932년 상해를 떠나 항주 가흥 진강 장사 광주 유주 기강을 1940년 중경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양류가·석관가오·사야항을 거처 연화지에 정착하여 광복을 맞았다. 이 유랑 기간, 중경에 오기 전에는 해외와 우편의 수발도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1940년 12월 미주 대한인국민회가 보낸 허가 요청서를 접수했다. 그것은 ‘조선인 안익태 애국가 신곡보 사용허가 요청서’였다. 안익태가 1935년 11월 작곡한 새 애국가 곡조를 사용함에 있어 임시정부에게 허가를 청했다. 이에 대한 논의를 한 것이다. "-愛國歌 新曲譜 許可-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安益泰가 作曲한 愛國歌 新曲譜의 使用 許可를 要求하였으므로 大韓民國 22년 12월 20일 國務會議에서 內務部로서 그 使用을 許可하기로 議決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제69호, 1940년 2월 1일자 기사 전문이다. 작곡된지 5년 만에 북미 교민 단체의 요청으로 사용하는 것을 허가했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는 외국곡 ‘올드 랭 사인(AULD LANG SIGN)’에서 안익태가 작곡한 새 곡조로 부르는 것과 함께 국가로 준용되고 있음을 공식화 한 것이기도 하다. 아울러 주목하는 것은 가사(歌詞)에 대해서는 거론이 없었다는 점이다. 안익태 악보상의 가사나 임시정부가 부르는 가사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바로 중경 임시정부는 상해 임시정부의 애국가에 대한 기조를 유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경 임시정부의 안익태 새 곡조 사용 공식화는 1940년 9월 17일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典禮)식에서 사용되었다. 애국가로서는 역사적인 날이다. 한 나라의 군대 창설식에서 연주된 것이니 그 위상이 확인된 것이다. 곧 지금까지의 국가 대용(代用)에서 준용(準用)으로 제도화한 것이 된다. 1940년 후반기의 이런 상황은 흔들리는 듯했다. 즉, 2년 후인 1942년 11월의 상황인데,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제76호 11월 30자에는 ‘국가와 군가 제정’ 안(案)이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10월 25일 개원한 의정원 제34회 회의에 신영삼 외 3인에 의해 발의 되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提議案 主文 本院은 國歌와 軍歌를 制定하기로 함 理由 國家의 立國精神을 소리로 表現하는 것은 國歌며, 軍의 精神을 소리로 表現하는 것은 軍歌임으로 本院에서 制定 할 必要가 有하다고 認함 提案者 申榮三 王通 文逸民 韓志成 臨時議政院 議長 閣下 大韓民國 24年 10月 29日" 이때의 논의는 처음으로 국가(國歌)를 "國家의 立國精神을 소리로 表現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새 국가를 제정하려 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정의 대로라면 새 국가에는 임시정부 입국 정신이 담겨야 하나 이미 국기인 태극기도 대한제국 시기에 성안된 것을 사용하고 있듯이 시기에 얽매인 정의를 강조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여튼 이 안은 11월 4일, 의원 40인의 출석으로 상오 9시부터 의장 최동오(崔東旿) 주관으로 속개 되었다. 논의는 먼저 의장이 제의안(提議案)을 낭독(另備 詳文)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의장이 國歌 軍歌制定提案을 朗讀 審査案 報告는 院議로 함이 죠타고 報告 申議員榮三(提案者) 우리는 國歌가 없음으로 愛國歌를 부르는데 그 內容의 言句 가 不美하고 其外 唱歌할 시에는 弊端이 썩 많흐니 制定을 요구합니다. 嚴議員恒燮 院議에 反對는 無할 겄 임니다. 能力不足으로 금일껐 못하는데 곧 통고하면 죠켓소. 金議員鐵男 우리의 國歌를 맨들 人材가 없으니 國歌는 革命 成功後에 해도 죠코 現 愛國歌만 使用해도 죻소. 嚴議員恒燮 軍歌는 無하니 軍內에서 使用할 것이 無하다. 그럼으로 軍歌는 있어 야 하겠소. 最近 中韓文化協會 開式할 時에도 헐 수 업시 愛國歌를 使用한 것이요. 金議員鐵男 國歌는 討論합시다. 軍歌에 對해서는 곳 해도 죠켓습니다. 孫議員斗煥 國歌는 絶對로 必要합니다. 軍歌도 亦 이렀습니다. 原案은 贊成함 니다. 國歌나 軍歌의 作曲 作家는 對外 徵募해도 죠켓소. 直結하기로 同議햇소 嚴議員恒燮 再請 崔議員東旿 三請 議長이 可否를 묻은 바 滿場一致로 通過되다.” 자료에 의한다면 1942년 11월 4일 회의에서 국가와 군가 제정이 공식화 되었다. 특히 제정에 엄항섭 의원이 새 제정에 재청한 사실이 주목된다.(1945년 ‘金九題 大韓愛國歌’ 악보 발간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이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안의 요체는 국가가 없어 애국가를 그대로 부르고 있다. 가사의 일부가 아름답지 못하고 부르기가 어렵다.(실제 가사에 어려운 한 문구가 있다) 둘째, 필요성은 있으나 작사·작곡의 능력이 부족하니 해방 후에 제정하고 愛國歌를 그대로 부르자. 셋째, 작곡과 작사에 대해서는 대외 공모를 하자. 넷째, 국가와 군가 제정안을 최종, 통과시켰다. 이 안이 통과된 이후 어떻게 진전이 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945년 환국 후 발행된 ‘도왜실기’ 등을 통해 ‘용진가’·‘압록강행진가’·‘광복군아리랑’이 군가로 제정한 것이 확인되고, 이를 통해 볼 때 국가(애국가)에 대한 논의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 결과는 1946년 2월에 발행된 ‘大韓民國臨時政府에 關한 參考文件’과 10월에 발행된 ‘金九題 大韓國愛國歌’에서 확인이 된다. 이 두 문건에는 기존 애국가 가사와 안익태 작곡 악보가 수록되어 있어 결과적으로는 제정을 하지도 않았다. 또한 가사의 수정조차도 하지 않았고 유지하였음이 확인된다. 임시정부에서의 애국가와 국가에 대한 관(觀), 즉 입장을 정리한다. 임시정부공보에 의하면 총 세 번에 걸친 논의가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 초기 ‘애국가 개정안’, 중경 임시정부 초기 ‘안익태 곡보 사용 허가 및 자체 사용’, 그리고 ‘국가 제정안 통과’가 그것이다. 이는 곧 임시정부의 애국가에 대한 입장을 추출할 수 있다. "임시정부공보에 의하면 임시정부는 애국가 개정안과 국가 제정안을 발의하고 논의 한 바 있다. 최종적으로는 애국가를 폐하고 새 국가를 제정한다는 발의안을 통과시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애국가의 개정도 하지 않았고, 새 국가의 제정도 하지 않았다. 3.1운동 시기 민중이 선택한 애국가를 국가로 대용한다는 대의를 지킨 것으로, 일관되게 ‘애국가 유지’를 기조로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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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내용 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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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안창호의 윤치호에 대한 배려임시정부 시절 김구나 안창호는 애국가 작사자로서의 윤치호를 비난하거나 매도하지 하지 않았고, 오히려 배려했다는 점을 지난 회에서 확인했다. 그렇다면 그 배경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을 더 강화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필자는 2015년 12월 31자 통신사 뉴시스 ‘윤치호 애국가 작사 확정 조직적 방해세력 누구’에서 1947년 발행된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저자 표기 문제나 내용상의 가필 흔적 등을 들어 애국가 언급 부분의 신뢰성을 지적한 바가 있다. 특히 ‘상해시대편’의 수정 문제와 작사자를 묻자 ‘대답하지 않았다’는 부분은 아예 편집 과정에서 가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하였다. 그리고 진난 4회에서 대답하지 않은 이유를 세 가지로 분석했다. 그런데 세 번째 이유로 안창호가 윤치호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는 것을 제시했는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 이 문제는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라고 보아 이번에 다시 살피기로 한다. 김구는 애국가 작사자를 ‘50년 전 한 대한 애국지사’라고 표현하였다. 안창호는 당신이 지었지요라고 묻자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의 표현에는 윤치호에 대한 배려가 배어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고 윤치호다라고 답하게 되면 묻는 이의 의도대로 어떤 형태로든 윤치호의 부정적인 행적을 언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행적은 당연히 개인뿐만 아니라 애국가에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다. 즉, 1948년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1919~1985, 1949년 월북)이 동아일보에 발표한 ‘애국가考’에서 "윤치호 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이런 구구함을 피하기 위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것이니, 분명 배려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런 배려의 배경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이광수와 윤치호 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이광수가 안창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영숙과 임정을 떠나 귀국하여 쓴 글 중에 1927년 대중잡지‘동광(東光)’ 제10호에 쓴 ‘規模의 人-尹致昊 氏’가 주목을 끈다. 여기서 윤치호가 105인 사건에 피체된 것은 안창호와 깊은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밝혔다. "안창호 씨와 지기상통(志氣相通)하여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설립위원장이 되고 평양 대성학교 교장이 되었었다. 청년학우회는 조선 최초의 조직적인 정치적 결사라고 할 만한 신민회(新民會)의 별동대(別動隊)였고 평양 대성학교는 신민회의 3대 사업(정치적 결사, 산업진흥, 교육진흥)의 하나인 교육사업의 제1기 사업이요 아울러 본거(本據)였다. 이러한 사업에 수뇌(首腦)로 추대된 것이 둘째 이유가 되어 사내 총독 암살 음모 사건에 수모자(首謨者)로 걸리었던 것이다.” 1911년 105인 사건 전후 안창호와 뜻을 같이하는 사이라는 것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진술로 이어갔다. "좀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명망과 재능과 재산과 지위를 가지고서도 일신의 안락(安樂)에만 탐(耽)하여 세사를 잊어버린 사람이라 씨를 비난하였다. 나도 그러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러다가 기미년 간에 내가 상해에 유랑을 할 때 씨의 예전 동지이던 안 씨(안창호-필자)를 만나 ‘윤 씨는 전전긍긍(戰戰兢兢)한 수성(守成)의 인물일지언정 그가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하여 일하려 하는 지(志)와 성(誠)을 나는 굳게 믿노라’라고 누누이 역설(力說)함을 듣고 나와 및 나와 같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시 씨에 대하여 존경과 정중(鄭重)을 갖게 되었다.” 작가 이광수가 윤치호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계기가 임시정부 초기 안창호가 윤치호에 대해 힘주어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라고 했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로서의 윤치호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고 본다. 또한 적어도 1920년부터 이 글을 쓴 1927년까지는 이광수가 견지한 윤치호관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이것으로서도 이광수와 상호 배려의 관계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치호 일기’에는 이 시기 이후의 관계에서도 유지되었음을 알게 된다. 일기 1932년 4월 30일조를 보면, 29일 상해에서 안창호가 윤봉길 의사 사건으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결코 연루되었다고 믿지 않는다.”고 애통하였다. 그리고 서울 송치 19일 후인 6월 22일 수요일 밤 9시 30분에 경무국 경시(警視) 미와(二輪; 안창호 취조 담당 형사)가 자신을 찾아와 유치장에서 한 사람을 치과 치료차 병원에 데려갔다 함께 왔다고 했다. 함께 온 이가 바로 안창호였다고 썼다. "유치장 생활로 너무 변한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 오랜만의 만남이 있은 10일 후의 일기에는 또 이런 기록이 있다. "7월 11일 이광수가 찾아와 안창호가 사법 당국에 인계되면 상당 기간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여 건강이 크게 우려된다는 것으로 책임자인 다나카 경무과장을 만나 달라는 부탁에 약속을 했다. 7월 12일 화요일 아침 8시, 다나카 경무국장을 만났다. 친지를 대표하여 조건부 석방이 가능한지 물었다. 7월 15일 4시 반 이광수의 요청으로 안창호를 면회하였다.” 서울로 압송되어 39일간 취조를 받고, 1932년 7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 송치되는 상황이다. 이 기록에서 이광수의 역할이 확인되는데, 윤치호에 대한 신뢰가 묻어있다. 그런데 윤치호의 이러한 안창호에 대한 배려는 이광수와 말도 하지 않는 유억겸․신흥우․김활란 등으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내가 안창호와 이광수 같은 서북파 지도자들과 진솔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데 대해 기분이 상한 것 같다. 그러나 사적인 우정과 정치적 당파심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다.” 후에 밝혀졌지만 이 사건의 안창호 보석금은 윤치호가 댔다. 그리고 1938년 전후의 치료비도 여러 차례 내주었다. 이런 사실은 흥사단 기관지 ‘기러기’에 마지막 병상을 지킨 이갑(李甲)의 딸 이정희가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러 인사를 접촉하는 과정에서 안창호가 윤치호에게는 신세를 많이 졌으니 가지 말라고 했다는 증언 등에서 확인된다. 결국 안창호의 말년까지 관계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은 이렇다. 이상과 같은 도움이 있었다고 해서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가 양보했거나 이 때문에 윤치호가 금전적 도움을 주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둘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다. 단지 인간적인 신뢰가 굳건하였으므로 그 과정에서 상호 배려가 있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애국가와 그 작사자에 대한 경의(敬意)가 표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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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안창호가 답하지 않은 이유, 윤치호가 작사자이기에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 임시정부의 입장과 요인들의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첫 회에서 ‘임시정부공보 애국가 수정안’, ‘김구선생제 한국애국가’ 악보, 그리고 김구의 발언 등을 살폈다. 이번 회에서는 안창호의 발언으로 알려진 1947년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명의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기록을 살피기로 한다. 작사자가 누구이냐고 물었더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는 대목이다. ‘도산 안창호’는 초판부터 3판까지는 저자가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로 되어있으나 실제는 이광수 저작으로 알려졌다. 이광수의 해방 후 첫 번역서 ‘백범일지’가 선풍을 이르키자 기념사업회가 의뢰하여 썼다고 하는데, 1949년 재판 발행, 1953년 한글 3판 발행, 1978년부터는 ‘흥사단’ 명의로 발행, 이후 ‘춘원 이광수’ 명의로 발행되었다. 이 책 제6장 ‘상해시대 편’(3판 기준) 중 다음의 세 단락이 논란의 대상이다. "정청(政廳)은 매일 아침 사무 개시 전에 전원이 조회를 하여 국기를 게양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하는 애국가를 합창하였다. 도산은 그 웅장한 음성으로 힘을 다하여서 애국가를 불렀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점잔을 빼던 사람들도 아이들과 같이 열심히 부르게 되었다. 애국가 끝 절에,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하는 것은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라고 도산이 수정하였다.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하였다. 정청을 정제(整齊)하는 외에 큰일은 독립신문 발행과 민족운동 거두(巨頭)를 일당(一堂)에 모으는 일이었다.” 첫 단락은 임시정부 청사에서 아침 업무개시 상황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전원이 국민의례를 마치고 업무를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두 번째 단락은 안창호가 애국가 2절 ‘임금을 섬기며’를 ‘충성을 다하여’로 고쳤다는 것과 누가 지은 것인가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안창호의 주 업무가 민족 지도자들을 만나 설득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중 문제가 되는 것이 두 번째 단락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하였다.” 이 대목은 전거(典據)가 없다. 단지 임시정부의 ‘상해시대’라고만 했는데, 일반적인 기산으로는 1919년부터 1932년까지를 말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이광수라면 그가 상해에 있던 1919년부터 1921년 사이를 말하게 된다. 그런데 이 내용은 이후 몇 개의 버전으로 확산되어 유포되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 사이 전개된 몇몇 상황은 다음과 같다. "상해 계실 때에 학생들이 애국가를 선생이 지으셨다지요 물으시면 肯定도 不定도아니 하시고~”(1950, 강제환, 安昌浩 雄辯全集, 143쪽) "愛國歌를 안 先生님께서 창작하였습니까?고 仰問함에 대하여 선생은 아무 대답도 아니하셨다.(채필근, 신앙생활, 1955, 합병호)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 상해시대에 ‘이 노래는 선생님이 지으셨지요?’하고 도산에게 물으면, ‘웃고 대답이 없었다’는 것이다.”(주요한, 1971, 安島山 全書, 993쪽) 모두 네 가지에서 공통되는 것은 안창호에게"선생이 지었지요”라고 물었다는 것과 이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구조다. 이 상황은 주어가 생략된 형태이지만 지난 3회에서 살핀 김구의 발언과 같은 취지다. 즉, 김구가 상해 임정시절 愛國歌 작사자가 누구인가를 묻는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 때 태극기와 愛國歌로 싸웠는데, 누가 지었는지가 왜 문제인가?”라고 한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취지와 구조가 같다는 말이다. 이상을 통해 볼 때 1920년 전후 임시정부에서 딱히 설(說)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작사자를 안창호인줄로 알았는데 실제는 윤치호라는 것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를 전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단순하게 답을 안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구조상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윤치호 작사를 전제로 안창호에게 이를 부인하는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다. 그래서 대답이 없음은, 또는 대답하지 않았음은 곧 윤치호가 작사자라고 긍정한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는 자신이 작사하지 않았기에 기대하고 묻는 이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고, 둘은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사실대로 말하면 부르지 않겠다는 반발을 우려해서이다. 그리고 사족을 단다면 다른 길을 걷는 윤치호에 대한 배려의 뜻도 담았다고 보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상술한다.) 그런데도 굳이 이를 ‘안창호가 자신이 작사라는 사실을 내 세우지 않는 겸손함을 표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앞에서 제시한 세 가지 이유가 없다면 이런 해석을 할 수고 있다. 그러나 굳이 겸손을 표할 이유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일부 문제를 제기한 바가 있었다. 바로 대성학교 수학교사로 재직하여 교장 안창호를 잘 알고 있는 채필근(1885~1973) 목사가 ‘신앙생활’ 1955년 합병호에 비판을 한 바가 있다. "만일 안 선생이 創作하셨다면 直言하셨을 것이다. 誠一貫의 안 선생이 歷史의 大 文字에 대하여 謙讓의 沈黙이 있을 수 없다.” 사사롭지 않은 애국가 문제에 겸양(謙讓)을 표한다는 것은 안창호 답지 않다고 했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의 분석이니 더욱 그렇다. 이는 안창호와 함께한 이들이나 임시정부 초기 애국가 상황을 아는 이들은 결코 작사자를 안창호로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임을 알게 한다. 이제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에 있는 문제의 대목에 대한 결론을 맺고자 한다. "상해 임시정부 초기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 인가, 아니면 안창호 당신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안창호는 답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신이 작사하지 않았음을 밝혀 실망을 줄 필요가 없었고, 윤치호라고 사실대로 말하여 반발을 살 필요도 없었다. 또한 다른 길로 가지만 105인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윤치호를 배려를 한 결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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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구의 애국가 사연, “작사자는 윤치호다”"1945년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그 측근들은 애국가 작사자를 알고 있었다. 작사자는 바로 윤치호이다. 다만 윤치호를 작사자로 내세우지는 않았고, ‘50년 전 한 한국 애국지사’로 지금은 ‘숨은 이름’이라고 하여 적대시하지도 않았다.” 지난 제2회 ‘김구는 애국가 작사자를 알고 있었다’의 결론 부분을 인용하였다. 이번 회에서도 이를 전제로 임시정부 요인들의 작사자 인식을 확인하기로 한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애국가 작사자를 누구로 알고 있었는가를 살필 수 있는 에피소드가 두 가지 있다. 내용은 대동소이한데, 하나는 기독교 감리교계에 전해지는 김구의 발언이고 또 하나는 상행 임정에서 독립신문 등의 업무를 맡았던 이광수가 전(轉)한 것이다. 전자를 먼저 살피면 대략 이렇다. "김구선생이 상해 임정시절 愛國歌 작사자가 누구인가를 묻는 동지에게 말했다지요. ‘우리가 3, 1운동을 태극기와 愛國歌로 싸웠는데, 누가 지었는지가 왜 문제인가? 혁명이 완수될 때까지는 문제가 될 수 없소’라고 했다지요” 감리교 신학대학 역사박물관 전 관장 윤춘병(尹春炳/1918~2010) 목사의 전언이다. 유사한 내용이 2013년 ‘애국가법 제정 왜 필요한가?’(한국입법학회 연구보고서) 등에 수록된 내용이기도 하다. 김구의 단호함이 밴 발언으로 상해 인시정부 초기의 상황이다. 이런 입장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지사들의 입장으로 "적군의 무기와 식량을 빼앗아 싸우는 상황에서 이런 논란은 분열이다”라는 인식이 있었던 결과이다. 그렇다면 작사자를 묻는 의도와 이렇게 답변을 했어야 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인용한 결론의 맥락에서 해석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임시의정원회의 등에서 열정적으로 애국가를 부르는 안창호를 작사자로 알았는데, 정작은 윤치호라는 소문이 있어 이를 김구에게 물은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을 받은 김구는 ‘이다’, ‘아니다’라는 답변 대신 조국을 떠나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처지에 누가 작사했는가를 따질 필요가 있는가라고 답한 것이다. 적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로 적과 싸우는 상황에서 이 무기가 누구의 것이냐를 따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굳이 이 상황의 진의를 따진다면 이렇다. 묻는 이가 바라는 안창호가 아니라 유감이지만 윤치호라는 것이 된다. 이는 지난 회에서 도출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인식 기조임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런 정황의 연장선상에서 김구와 애국가의 관계가 의외로 곡진(曲盡)한 면도 있음을 알게 된다. 제시하는 사연은 김구 생애의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는 1945년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환국하는 상황의 애국가 사연이다. 이 감격을 장준하(1918~1975)가 1971년 발행한 ‘돌베개’에 수록하였다. "누군가가 조선 해안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일동은 ‘우아’ 하고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보인다! 저기 동북 편 손아래 조그맣게 그리고 희미하게 고국의 땅이 나타나고 있다. 저것은 바로 우리 땅인 것이다. 누구의 지휘도 없이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가 울려 나와 합창으로 엄숙하게 흘러나왔다. 비행기 속 공기를 흔드는 노랫소리는 어느덧 울음 섞인 노래가 되었다.(중략) 애국가는 우리들의 심장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조국을 주먹 안에 움켜잡은 듯이 떨게 했다. 드디어 애국가는 끝까지 부르지 못하고 울음으로 끝을 흐렸다. 울음 섞인 합창, 그것이 그때의 나의 가슴속에 새로 지어진 애국가다. 기체 안의 노 투사는 마치 어린이처럼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을 달래지도 못했다. 그 어느 누가 이 애국가를 울지 않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노래를 부르는 입모양인지, 웃음을 억누르는 모습인지, 분간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발음을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노 혁명가의 감격. 감상을 내어버린 지 오래고 울음을 잊어버린 지 이미 옛날인 강인한 백범선생, 그의 두꺼운 안경 알도 뽀오얀 김이 서리고 그 밑으로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번져 흘렀다. ‘조국을 찾고 눈물도 찾으셨구나’ 나는 마치 한 소년처럼 여울지는 가슴을 느끼며 어깨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환국의 감격, 눈물로 부르는 애국가 합창. 임시정부의 애환을 상징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김구의 애국가에 대한 경의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윤치호를 임시정부 내내 ‘한 대한 애국지사’로 예우를 견지한 배경이다. 제3회 ‘ 김구의 애국가 사연, "작사자는 윤치호다”의 결론은 이렇다.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에 반감을 갖고 묻는 이들에게 한 김구의 답변을 이렇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는 애국가의 작사자는 50년 전의 ‘한 대한 애국지사’이다. 이것을 왜 문제 삼는가라는 반문이다. 묻는 이들에게는 우회적으로 알리며 설득한 것이고, 작사자에 대해서는 나름의 배려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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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구는 애국가 작사자를 알고 있었다"임시정부는 애국가 작사자로 안창호를 염두에 준 바가 없다. 그리고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알면서도 드러내 거론하지 않았고, 다른 길을 걷는다고 매도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 기조를 견지하였다.” 지난 제1회 ‘임시정부 안창호 작사, 인식 없었다’의 결론 부분을 인용하였다. 임시정부의 이 기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해방 후 출현하는 자료에 대한 해석을 할 수가 없다, 즉, ‘金九先生 題 大韓愛國歌’ 악보 해설 부분이나, 1947년 이광수 저술 ‘도산 안창호’의 ‘소이부답(所以不答)’ 대목이나, 1948년 박은용의 동아일보 ‘윤치호의 작사 사실’ 기고문이나. 문제의 1955년 미국 출판사 문의에 대한 정부 입장과 그에 대한 반발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번 제2회 ‘김구는 애국가 작자를 알고 있었다’에서는 이 기조를 재확인하는 차원에서 악보의 해설을 살피기로 한다. 해방이 되어 환국을 고대하던 중인 10월 18일 김구의 친필로 제목을 단 악보이다. 비용은 중국국민당 정부와 한중 우호를 위해 설립한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가 담당했고, 악보전문 출판사인 음악월간사(音樂月刊社)가 출판했다. 당연히 원고와 편집 등의 업무는 측근인 엄항섭(嚴恒燮)과 민필호(閔弼鎬)가 전담하였다. 해방을 맞아 귀국을 준비하는 와중에서 애국가 악보를 발행하려 한 것은 애국가의 위상을 홍보하고, 김구 주석을 부각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런데 이 악보가 수록한 ‘한국 애국가에 관한 고사(古事)’ 부분은 매우 주목된다. 비록 단출하지만 애국가의 연혁과 작사자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단 두 문장으로 구성된 전문은 이렇다. "이 애국가는 50년 전에 한 한국 애국지사의 수필(手筆)로 창작되었는데, 이미 일명(佚名)해 버렸다. 처음에 서양 명곡을 채용하여 가사를 메워 노래를 불렀는데, 그 후 한국의 인사들이 안된다고 생각하여 10년 전에 한국 청년음악가가 새로운 곡조를 지으므로 말미암아 곧 한국 건국운동 중에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내용을 분석하면 다음 네 가지 점을 주목하게 된다. 하나는 작사 시점의 제시다. 즉, 1945년 시점에서 ‘50년 전’을 대입하면 1895년이다. 이는 ‘조선개국 기원 505회’ 기념식에서 애국가와 동일 후렴의 ‘무궁화가’를 발표한 시점과 2년의 차이가 있지만 이 노래의 작사 시점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 때는 안창호의 나이가 17세 때이다. 이 연치(年齒)는 국가적 행사에 노래를 지어 발표할 위치가 아니다. 그러나 윤치호는 30세로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상해 중서서원(中書書院)에서 교수로 있다가 귀국하여 외부협판직을 맡는 등의 능력과 직위로 ‘무궁화가’를 지어 발표할만한 인물일 수 있는 것이다.(안창호의 연치 문제는 1955년 4월 서울신문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 보도에서 지적된 바이고, 윤치호의 능력에 대해서는 서재필이 ‘무궁화가’를 작사한 윤치호를 ‘한국의 계관시인’으로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다.) 둘은 ‘10년 전~ 새로운 곡조를 지어’란 시점이다. 이는 안익태가 ‘올드랭 사인’ 곡조를 대체할 ‘신곡보 애국가’를 작곡한 1935년과 정확히 일치한다. 임시정부가 이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던 배경은 1940년 북미 대한인국민회의 요청에 따라 ‘안익태 곡보 사용 허가’를 한 바가 있어 이때 관련 정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은 이렇게 정확하게 작사와 작곡 시점을 표명하는 상황에서 그 작사자에 대해서만은 "오래전에 숨은 이름으로 지금은 알 수 없다”라는 의미로 "佚名해 버렸다”라고 한 인물의 문제다. ‘일명’이란 낯선 용어는 ‘미상’이거나 ‘모른다’는 표현을 피하기 위한 의도적인 익명화(匿名化)이다. 이의 주인공은 임정요인으로 활동하다 7년 전인 1938년 작고한 안창호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임시정부, 좁게는 김구와 그 측근들이 안창호란 이름을 숨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창호를 ‘한 한국 애국지사’라는 표현은 부적합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 시기 윤치호에 대해서는 ‘한 한국 애국지사’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이런 정황은 지난 제1회에서 살핀 임시의정원 ‘애국가 수정안’의 발의와 그에 대한 처리 결과를 통해 윤치호를 작사자로 확인한 과정과 같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악보의 ‘한국애국가에 관한 고사(古事)’ 부분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 해석 외의 결론은 탈맥락적이다. 가령 "북한에 거부감을 주지 않기 위해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사실을 숨긴 것”이란 주장 같은 것을 말한다. 이는 의도적인 왜곡이거나 문해력을 의심받을 만한 해석이다. "1945년 임시정부 김구와 그 측근들은 애국가 작사자를 알고 있었다. 작사자는 바로 윤치호이다. 다만 윤치호를 작사자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50년 전 한 한국 애국지사’로 지금은 ‘숨은 이름’이라고 하여 적대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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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시정부, ‘안창호 작사’ 인식 없었다임시정부에서는 1919년 4월 10일 오전 10시, 첫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에서 8개항을 논의하였다. 이 중 제8항은 국가상징 중 국호에 대한 논의였다. 이 때 오른 안(案)은 세 가지로 ‘고려공화국’·‘조선공화국’·‘대한’이었다. 이 중에 이영근 의원이 제청한 ‘대한’을 국호로 결정하였다. 여운형 의원이 "대한이란 우리나라 역사상 오래 사용된 말이 아니고 조선 말기에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기 때문에 다시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는 반대에도 제청자들은 오히려"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는 의미에서라도 대한으로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결과다. 결국 당시 중국이 신해혁명 이후 사용한 ‘중화민국’의 ‘민국’을 따서 ‘대한’에 붙여 ‘대한민국’으로 하게 된 것이다. 다음 국기는 비교적 늦은 1943년 6월 29일 국무회의에서 ‘국기양식 일치안(國旗樣式 一致案)’을 확정하여 공포한 바 있다. "국기에 대하야 종래에 설명이 다단(多端)하여 각언 기설(各言 其說)할 뿐 아니라 제도가 일치하지 못하야····제법(製法)과 척도(尺度)와 상징(象徵)···”을 규정하여 공포한다고 한 것이다. 그동안 다양한 논란 있어 뒤늦게 양식의 일치를 정해 발표한 것임을 알 수 있다.(이에 대해서는 여운형이 해방 후 북한정권 수립 과정에서 주역(周易) 등을 들어 태극기를 부인한 사실을 참고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國歌) 또는 애국가에 대해서는 국호나 국기와 같이 공포는 물론 규정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 어떤 경우든 현 애국가 외에 다른 노래(애국가)를 국가 기능으로 사용한 적이 없었는데도 그렇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수정(修訂) 논의가 있었던 사실에서 확인이 된다. 애국가 ‘수정’, 이는 곡조가 아닌 가사에 대한 문제로, 임시정부의 인식을 학인 시켜준다. 왜냐하면 국호와 국기의 논의와는 전혀 다른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선 초기 상해 임시정부에서의 애국가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임시정부 공식행사에서는 반드시 개회 선언 후 첫 순서로 애국가 4절 또는 1, 4절(首末節)을 부르고, 국기에 대한 ‘최경례’를 하였다. ‘임시의정원회의록’ 제8호에 의하면 개원식에서 "총의장의 사회로 개식을 선언하고 일동이 기립하야 애국가를 창한 후 국기를 향하야 최경례”를 행하였다. 구체적인 모습도 있다. 임시의정원 제34차 회의 취재기의 일부로 <우리통역> 제1호에 수록된 것이다. "전체 의원들이 극도로 긴장하고 엄숙한 정신으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곡조가 합(合)하지 않아서 3부 합창이 되고 말았다. 또 어떤 분은 첫 머리말을 떼고는 가사를 몰라 목소리를 슬그머니 철회(撤回)하고 만다. 제2절에 들어가자 각자 각창으로 어느 노선생님 한 분이 테너 식으로 고성(高聲)을 치니 창가 진행 중에 그만 모두가 웃고 말았다.” 애국가 제창이 임시정부 의식(儀式)의 첫 순서로 중요한 위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기능이 국가(國歌)이지만 그 명칭은 ‘애국가’이다. 이는 ‘태극기’란 고유명칭 대신 국가상징인 ‘국기(國旗)’로 표기한 사실과는 다른 것이다. 이런 차이 역시 살피게 될 수정 제안 배경과 관계가 있다. 애국가 논의는 비교적 이른 시점에 수정안(修訂案)이 제출되어 부결 처리 하였다. 1920년 3월 의정원 회의에 수정안이 상정되었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당시 안의 구체적인 내용과 제안자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전후 맥락으로 본다면 상정안이 수록된 앞선 일자의 ‘임시정부공보’가 발굴되지 않은 결과일 수 있지만, 안건 자체가 상정되었으나 부결된 것만은 분명하다. ‘임시정부공보’ 1920년 3월 18일자 ‘애국가 수정안’ 기사는 이렇다. "김춘숙 외 3 씨가 제출한 <애국가 수정안>에 대하여 오윤환 씨는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바로 국가를 제정할 필요가 있다면 모르거니와 ‘애국가’는 수정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 외 2~3 씨의 토론이 있어 제안자에게 퇴각하기로 가결되었다.” 이 기사를 통해 분명히 확인된다. 임시정부는 애국가를 그야말로 임시로 국가(國歌)로 대용(代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국가를 제정하는 논의가 아닌 이상 그 내용이 어떠하든 수정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다는 단호함을 표한 것이다. 이는 결국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 새 국가를 제정하려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가사의 일부를 수정하려 했다는 전제로 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시사받을 수 있다. 다음 네 가지이다. 하나는 가사의 일부 자구(字句) 정도를 수정 하자는 측과 전면적으로 애국가 자체에 흠결이 있다며 개정하려는 측이 있었다는 점이다. 둘은 이 중 전자는 안창호가 임시정부 요인으로 근무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사를 수정하자고 한 것이니 작사자가 안창호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 만일 안창호설이 있었다면 이런 안이 나올 수도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직접 요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은 후자의 경우, 애국가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인식한 것으로 보아 작사자 문제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가 아님은 분명한 것이다. 넷은 작사자 문제라면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다른 길을 가는 윤치호를 인식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1897년 발표된 동일후렴 ‘무궁화가’로 부터의 역사성과 3.1 운동 기간 민중들이 선택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와 애국가의 정통성을 부정할 수는 없어 ‘윤치호 작사’ 사실을 들어낼 필요가 없었다. 또한 이 시기 작사, 작곡에 의한 여력이 없었다는 점도 염두에 둔 결과이다. 이상에서 정리된 사항은 해방 후 안창호 작사설을 부인한 자료들과 주요 발언들에서 재확인이 된다. 즉, 1945년 발행 ‘대한국애국가 악보’에 반영된 김구 선생의 인식과 안창호 선생 측근으로 대성학교 교사를 지낸 채필근(蔡弼近, 1885~1973)목사와 해방후 흥사단 재건에 기여한 주요한(朱耀翰, 1900~1979)선생의 입장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제시하여 강화하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임시정부의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입장은 이렇게 단호하게 정리한다. "임시정부는 애국가 작사자로 안창호 선생을 염두에 준 바가 없다. 그리고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알면서도 드러내 거론하지도 않았고, 다른 길을 걷는다고 매도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 기조를 견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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