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김연갑의 애국가 연구] (10) 절대적인 증거력, 윤치호 ‘자필 가사지’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연갑의 애국가 연구] (10) 절대적인 증거력, 윤치호 ‘자필 가사지’

김연갑(전 국가상징연구회 애국가분과위원장)

  • 특집부
  • 등록 2023.06.17 11:11
  • 조회수 30,477

"안창호 선생은 평생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분이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가사를 지을 수 있었다고 보십니까?”


2000년내 들어 안창호 작사설이 다시 일고 있다는 말을 하자 기독교사가(基督敎史家)로서 정년을 앞둔 한 분이 보인 반응이다. 두 말할 여지 없이 안창호는 작사자가 아니라는 단언이다. 다음의 증언도 이에 견줄 만한 강력한 작사자 증거력을 가졌다.

 


"1945년 12월 작고 직전 남긴 一九0七 尹致昊 作” 자필 가사(歌詞)는 명백하게 작사자가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증거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작자는 윤치호이다."


단언(斷言)은 위험성을 내포하지만 그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가늠이 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 여부로 진위를 알 수도 있다. 그런데 아직 이 두 말에 대해 설득력 있는 반론을 보지 못했다. 모두 주변적이고 사료 검증 안목을 갖추지 못한 단순한 반응 정도이다. 또 아니면 지나친 억지 주장을 담은 것들이다.


본 회부터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확인시켜 주는 자료들, 그 중에서 문제적 시점인 1907년을 전후한 시기의 사료들을 먼저 살피기로 한다. 이 시점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윤치호가 직접 작사 시점을 1907년으로 밝힌 사실 때문이다. 바로 애국가 ‘가사지(歌詞紙)’이다. 그런데 이 가사지는 1945년 12월 작고 2개월 전인 10월에 기록한 것으로, 이 존재가 알려진 것은 3년 뒤의 일이다.

 

image014.jpg
1948년 10월 6일 자 동아일보

 

1948년 10월 6일 자 동아일보에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1919~1985)이〈애국가고-주로 그 작사자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1949년 월북 1년 전에 쓴 글에서 "시대의 변천이나 역사의 개혁에 따라서 하나의 사관이 변동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떠한 역사의 사실을 조작할 수는 없다.”고 전제했다. 그리고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 사실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故 윤치호 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image034.jpg

 

1947년 ‘도산 안창호’에서 안창호 작사설을 유포한 것에 대한 강한 반론이다. 좌파 음악평론가 박은용의 이 주장 근거는 바로 윤치호 자필 가사지의 존재 확인에서 알 수 있다. 한지에 묵서한 것인데, 곡명이 없다. 윤치호는 이를 ‘애국가’로 작사한 것이 아니라 ‘찬미가(讚美歌)’의 하나, 즉 ‘찬미가 14장’으로 작사한 것일 뿐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 ‘애국가’란 곡명은 당시 기독교계 학교로부터 전파되고 일반에 알려지면서 "애국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윤치호는 37년 전 작사 시점인 1907년을 밝히면서 일반적인 곡명 "애국가”를 쓰지 않은 것이다. 윤치호가 기록에 대한 엄밀성을 보여 준 결과이다.


이는 윤치호가 1945년 10월에 쓰면서도 마지막 간기를 "1945年 書”로 쓰지 않고 "1907年 尹致昊 作”으로 한 것은 서법(書法)에 맞게 표현한 것이다. 만일 "1945年 書”로 표현했다면 "1907년 자작(自作) 찬미가를 1945년에 쓴다”라고 해야 하는 것을 줄여서 쓴 것이다. 이런 사연은 가사 뒷면에 딸 문희가 기록으로 남겼다.


이러한 서법 구사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당시 누구보다도 능력의 소유했다. 전통적인 학문과 일본과 중국 그리고 미국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서예 작품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공직을 거치면서 공문서 작성 경험이 누구보다 풍부하다는 사실에서 확인이 된다.


1945년 10월 딸 문희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찬미가’ 4절 가사 묵서(墨書). 이는 윤치호가 1907년에 작사하였음을 명확히 밝혀 그 작사자와 작사 시점을 명확히 하였다. 최초의 감리교 기독교인으로, 독립협회장으로서 독립신문 운영, YMCA 총무로서의 계몽운동 등으로 작고 2개월 전의 자필 기록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국 이 묵서 자료를 통해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임을 확정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