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김연갑의 애국가 연구] (13) 왜 ‘찬미가’는 역술(譯述)인가?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연갑의 애국가 연구] (13) 왜 ‘찬미가’는 역술(譯述)인가?

  • 특집부
  • 등록 2023.07.18 22:12
  • 조회수 2,443
애국가작사자 연구.jpg
'역술'에 대한 해석을 가한 '애국가 작사자 연구'

 

현 ‘애국가’와 ‘무궁화가’와 또 한 편의 창작 찬미가 1편이 수록되어 주목을 받는 ‘찬미가’의 판권(板權)에는 작사자로 주장되는 윤치호가 ‘譯述者’로 되어 있다. 이 ‘역술’이란 표기 때문에 윤치호는 애국가 작사자가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아왔다. 이런 문제 제기는 오해임으로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대략 다음의 두 가지를 들어 주장되어 왔는데, 그 하나는 역술은 곧 번역(飜譯)이란 주장이고, 또 하나는 역술은 감수(監修)의 뜻이라는 것이다.


번역(Translation)이란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으로서 한자로는 '뒤집다'의 뜻이 있는 飜(번)과 '풀이하다'의 뜻이 있는 譯(역)의 조합어다. 영어 동사 translate는 라틴어 translatio에서 왔으며 원래의 뜻은 '옮기다'이나, 의미가 확장되어 이식(移植)의 뜻도 갖고 있다. 번역의 1차적인 목적은 원문과 번역문이 동등한 관계, 즉, 똑같은 의미를 갖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술을 이런 번역으로 본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다른 언어의 원문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12편의 찬송가 중 6장과 13장을 제외한 10편은 모두 이미 우리나라 찬송가집에 수록되었고, 나머지 2편은 당시에는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 1983년 ‘합동찬송가’에 수록되어 현재로서는 전체 12편 모두가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가 되어있다. 이렇게 원문의 존재가 분명히 확인되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1장(KOREA), 제10장(Patriotic Hymn 뎨十 No[1]), 제14장(Patriotic Hymn 뎨十四) 3편은 위의 찬송가와 같은 원문의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원문이 없음은 물론, 다음의 가사를 번역한 것으로 볼 수가 없다.

 

4무궁화가  (1).jpg
무궁화가, 찬미가 제10장 가사 4절이 주목된다.

 

제1장-"산놉고물고흔 우리대한뎨국 하나님도으사”

제10장-"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본국일세”

제14장-"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이상과 같은 가사의 3편을 번역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 제10장, 즉 ‘무궁화가’의 창작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졌다는 사실이다. 즉, ‘독립신문’ 1897년 8월 19일 자 독립신문 발행인 서재필이 쓴 '편집자 노트'에서 확인이 된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8월 13일 조선 개국 505주년을 맞아 독립협회 주최 행사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무궁화 노래(National Flower)’를 불렀다. 이 노래는 한국의 계관시인(桂冠詩人/Poet Laureate) 윤치호(Mr T. H. Yun)가 이 행사를 위해 작사하였다. 배재학당 학생들은 이 시를 스크랜턴(이화학당 설립자) 여사가 오르간으로 반주한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곡에 맞춰 불렀다. ‘무궁화노래’ 가사 일부는 ‘우리나라 우리님군 황텬이 도으샤 님군과 백셩이 한가지로 만만셰를 길거야 태평 독립 하여 보셰’이다.”


이 기사의 윤치호 작사 ‘무궁화노래’ 일부는 1908년 재판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0장 4절과 일치한다. 이에 의하다면 수록 3편 중 1편이 분명하게 윤치호가의 창작으로 확인된다. 나머지 2편도 창작임은 물론, 윤치호 작사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감수로 주장하는 것도 같은 문제이다. 역시 사전적인 의미를 대입해 보면 이렇다. 감수(監修)란 책의 저술이나 편찬 따위를 지도하고 감독하는 것을 말한다. 내용 등에 대해 잘못된 것이 없는지, 그 내용 자체에 대해 확인 또는 수정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런 의미를 갖는 감수와 역술을 동일하게 보는 것은 무리이기는 마찬가지다. 당연히 원본의 존재를 갖고 대비해야 하기 때문인데, 이런 이유에서 역술은 번역이나 감수가 아닌 독자적인 술어임을 알 수가 있다.

 

5 (1).jpg
무궁화가를 작사한 직후의 윤치호 대중 연설 모습

 

역술은 1880년대부터 1910년까지의 근대 계몽기 신지식 수용 과정에서 수용한 용어이다. 특정 대상 문헌에 대한 번역과는 달리 여러 문헌을 편역(篇譯)하거나 견해를 포함하는 저술 활동의 하나이다. 번역의 유사 개념인 번안과도 다르게 당시 지식 수용과 주체화 과정에서 일부는 번역하고 일부는 자기 지식을 반영한 ‘번역과 일부 지음’의 합성어이다. 굳이 ‘번역(飜譯)’이란 용어가 사용되는 상황에서 이 용어를 쓸 이유는 없었을 것이니, 분명 전체 번역에 일부 창작(저술)이 포함된 것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이러한 역술 활동이 필요했던 이유는 지식의 근원이 되는 문헌이 빈약하고 유통되는 지식의 양이 부족한 상황에서 근대 지식 보급이 급선무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용어를 일본으로부터 받아들였다. 당시 일본에서의 정의는 이렇다. 1895년도에 발행된 ‘제국문학’ 8월호의 ‘번역의 진상(眞相)’이란 글에서 역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번역이 곤란하여 때로 오류가 불가피한 경우가 있으니 이것이 역술로 되는 것이고, 이것 역시 가능하더라. 무릇 역술이라 함은 7할의 번역과 3할의 창작을 가미한 것이라더라.”


이 용어가 일본에서 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면 이상의 정의는 수용할 수밖에 없다. 이런 역술 자료들은 수없이 많다. 단행본은 물론 잡지와 신문 기사도 상당하다. 예컨대 현채(玄采, 1856~1925)의 역술 ‘동국사략(東國史略)’이 있는데, 이 책은 일본인 임태보(林泰輔)의 ‘조선사’를 번역하고, 원본에 없는 단군 기사나 임진왜란 기록이나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 같은 기사를 끼워 발행한 책이다. 특히 원본의 결론과는 반대로 임진왜란을 우리가 승리했다고 서술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동국사략’은 현채가 대분분은 일본 ‘조선사’를 역하고, 특별한 부분은 술(述)하여 역술로 발간한 책이다.


이외에도 역찬(譯纂), 중역(重譯), 역(譯), 번안(飜案), 집술(輯述), 선술(選述), 보술(補述) 등을 함께 사용하였다. 특히 ‘집술’과 ‘선술’은 역술과 유사한데 여러 자료를 보고 기술하였다는 뜻이다. 전자는 1895년 유길준의 ‘서유견문록’이고, 후자는 1906년 발행된 김상연 선술 ‘精選 萬國史’가 대표적인 출판물이다. 이런 사례의 ‘술(述)’은 곧 번역이 아닌 부분적인 ‘작(作)’ 또는 ‘술(述)’인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이미 1989년 발행한 졸저 ‘애국가 작사자 연구’(집문당, 1989, 183~184쪽)에서 ‘번역과 일부 지음’이라 밝힌 바 있다. 이런 용어를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하여 이해하고, 미국에서 신학을 전공하여 정확하고 소박하게 표현하는 것을 체화한 윤치호가 이를 혼동하거나 자의적으로 썼을 리는 없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윤치호는 이미 서양과 국내에서 번역되어 불리는 찬송가 10편을 새로이 번역하고, 새로운 찬송가 두 편을 더 번역하였다. 여기에 자신이 시기와 계기를 달리하여 창작한 찬미가 3편을 더하여 총 15편, 16쪽의 소책자 찬미가집을 발행하였다. 이때 판권에 ‘역술자 윤치호’로 표기하였다. 이때의 역술이란 뜻은 ‘대부분 번역하고 일부를 창작한 것’을 뜻하는 것이니 당시로서나 오늘날에서나 적확(的確)한 표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