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8 (수)

[김연갑의 애국가 연구] (12) 역술 ‘찬미가’에 대한 오해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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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 연구] (12) 역술 ‘찬미가’에 대한 오해와 진실

김연갑(전 국가상징연구회 애국가분과위원장)

  • 특집부
  • 등록 2023.07.15 00:00
  • 조회수 4,215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 표지

 

윤치호는 일본, 중국, 미국에서 유학을 했다. 어려서는 전통 학문 한학을 했고, 일본어, 중국어, 영어를 생활어로 일기를 썼다. 중국 중서서원 교수, 대한제국 외부협판, 학부협판, 한성부 판윤,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사장 등을 역임했다. ‘우스운 소리’, ‘영문법첩경(英語文法捷徑)’, ‘영어문법사전’, ‘유학자취(幼學字聚)’를 지어 출판했고, ‘의회통화규칙’, ‘이색우언’, ‘걸리버유람기’ 등을 번역 출판했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발행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의 윤치호 부분

 

이런 경력의 윤치호는 찬미가 세 차례에 걸쳐 3편을 작사하고, 서양 찬미가 12편을 번역하여 묶어 ‘찬미가’를 출판했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를 조사를 할 때 주요 증거 자료로 수용한 세 가지 중 하나이다. 판권에는 "譯述者 尹致昊 , 隆熙 二年(1908) 6월 25日 再版 發行, 發行者 金相萬, 발매소 廣學書鋪, 定價 金 二錢 五兩”으로 되어있다. 출판 시기로 보아 관직에서 벗어난 대한제국 말기의 마지막 저작인 듯하다. 1905년 을사조역 체결로 상심하여 공직에서 물러나 민간 주도의 애국계몽운동에 나서는 시기이다. 그의 지식과 신앙과 애국심과 시국관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찬미가’에 대해서 몇 가지 오해가 있어 왔다. 그동안 제기된 몇 가지 오해를 풀어 보기로 한다.

 

‘1908년 재판’에 대하여

출판에서 초판과 재판 등의 표기는 인쇄의 회수, 즉 쇄(刷)를 표기한다. 이 경우는 ‘초판 2쇄’와 같이 표기한다. 그러나 ‘재판’ 또는 ‘3판’과 같은 표기는 판매를 위해 인쇄를 거듭하는 경우이기 보다는 출판물의 형태나 내용을 달리하기 위해 조판(組版) 자체를 새로이 하여 인쇄하는 경우이다. 근대 출판물의 이런 원칙을 적용하면 이 ‘찬미가’의 경우는 후자가 된다. 그러나 이런 원칙을 무시하고 판매량을 과시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관행적으로 ‘쇄’와 ‘판’을 거의 무시해왔다. 이런 원칙을 구분하는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한 윤치호로서는 이를 적용했을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전자로 해석을 하여 초판이 없어 비교할 수 없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초판 년도가 불명하니 ‘1907 作’이라 표기한 ‘자필 가사지’를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찬미가’의 출판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책명 ‘찬미가’라는 점에서 기독교 찬송가집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찬송가집 발행은 감리교와 장로교계라는 국제기구의 심의를 거치고 허가를 받아 발간하는 것인데, 이 출판물은 17쪽의 소규모인데다 윤치호가 번역과 지은 찬송가 15편을 엮어 김상만을 발행자로 하여 펴낸 개인 출판물이다. 이런 사항으로 볼 때 이 출판물은 비공식적 사찬(私撰) 찬송가집으로 교계의 공식 찬송가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바로 1906년 개성에서 개교한 ‘한영서원(韓英書院)’의 학생 배포용 찬송가집인 것이다.

 

한영서원 개교 상황이 상술된 좌옹 윤치호악전 표지

 

한영서원은 1906년 10월 3일 미국 남감리 교회 계열의 지원과 당시 3,000원 상단의 기부금을 낸 윤치호가 개성에 세운 중등 수준의 사립학교다. 대한자강회 조직과 함께 애국계몽운동 전개의 일환이다. 첫 입학생은 총 16명이었다. 1908년에는 15세 이상의 남학생이 225명으로 확대되어 인문교육 및 실업교육을 하며 소학과 4년, 영어전수과 2년, 고등과 3년, 반공과(半工科) 3년 등의 과정을 두었다. 그래서 같은 해 9월에는 지상 3층의 현대식 석조건물로 교사를 신축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한영서원의 개교와 학생현황에서 ‘찬미가’의 발행과 재판 발행 상황을 추론할 수 있다. 즉, 윤치호는 설립자 겸 교장으로서 감리교계 미션스쿨 학생들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찬송가집을 발행하였고, 그 초판은 프린트(가리방)본이란 한계로 20여부 정도의 소책자로 발간하였다. 그리고 1907년 애국계몽운동 차원의 시국관을 담은 새 찬미가의 필요성을 느껴 새 찬미가를 작사하고, 교세의 확대에 따른 보급과 일반 판매용으로 새로운 조판을 하여 재판 ‘찬미가’를 1908년 정식 활판 인쇄본으로 발행한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영서원 개교시 학생 16명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찬미가’ 등사본 20여부를 발행하였다. 여기에는 ‘찬미가 제14장, 현 애국가’는 수록되지 않았다. 둘째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에 나서면서 애국적인 찬미가 작사의 필요성을 갖게 되어 새 찬미가(제14장)를 작사하였다. 셋째, 학생 수의 확대와 새 찬미가의 보급을 위해 개교와 함께 인수한 광학서포를 발매소로 하여, 1908년 정가를 붙여 정식 활판 인쇄본 재판 ‘찬미가’를 발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