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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청와대’…“야외조각 전시와 체험”문화체육관광부는 야외조각 전시와 국민 체험 행사 등으로 구성한 ‘모두를 위한 청와대’를 29일부터 순차적으로 진행한다고 밝혔다. 먼저 이날부터 내년 1월 29일까지 소정원과 녹지원 등에서 ‘야외조각 프로젝트: 해후(邂逅)’를 개최한다. 오랜 시간 청와대 야외 곳곳에 있던 강태성, 신석필, 이순석 작가의 작품 3점을 비롯해 김수현, 윤영자, 최만린, 최병훈 등 기존 소장 작가의 다른 작품을 포함해 모두 10개 작품을 전시한다. 현재 녹지원에 있는 강태성 작가의 작품 ‘해율(海律)’은 1966년 제1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대통령상 수상작이고, 강태성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여일’(1983)도 녹지원에서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청와대 본관에 있는 고풍스러운 가구를 디자인한 최병훈 작가도 이번에 소정원에서 새로운 아트퍼니처 작품을 선보인다. 관람객들은 청와대가 소장하고 있었던 작품과 새롭게 전시하는 작품을 동시에 보며 작가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달라지고 연결되는지 느껴볼 수 있다. 내년에는 관람객들이 가족, 친구들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1월 춘추관에서는 매주 목요일 다례 체험 행사 ‘새해맞이 차(茶) 한잔, 덕담 나누기’와 매주 금요일 청와대를 듣고, 읽고, 경험하는 강의&공동연수회 ‘청와대 관물도’를 진행한다. 체험 프로그램 참여 방법은 올해 12월 중에 청와대 누리집(https://www.opencheongwadae.kr/)에서 안내할 계획이다. 아울러 대통령 가족 공간인 관저와 집무 공간이었던 본관 집무실도 개방 전 모습으로 만나볼 수 있고, 대통령 재임 때 실제 사용했던 기물을 중심으로 원래 모습으로 재현할 계획이다. 유병채 청와대관리활용추진단 단장은 "청와대는 관람객들의 의견을 반영해 단순히 보는 관람보다는 체험하고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확대해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자연과 건축, 예술품에 참여와 체험이 더해지면 청와대는 더욱 사랑받는 국민 문화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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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극장-국립중앙도서관 ‘이야기, 무대에 오르다’ 순회전시국립중앙극장과 국립중앙도서관은 국립극장 남산 이전 50주년을 기념한 공동기획전 '이야기, 무대에 오르다-도서와 아카이브로 보는 공연예술'을 14일(화)부터 24년 3월 31일(일)까지 120일간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에서 개최한다. 세계가 열광하는 K-컬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옛이야기가 담긴 책과 공연 기록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1차 전시를 성황리에 마무리하고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으로 장소를 옮겨 선보이는 순회전시다. 극장으로 돌아온 만큼 공연 관련한 새로운 전시자료를 추가해 풍성한 볼거리로 관람객을 기다린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문학이 공연으로 재창작되는 과정과 창작물을 비교 관람할 수 있는 전시로 총 3부로 구성된다. 1부 ‘무대에서 노래하는 옛이야기’에서는 대표적 구비문학 중 하나인 판소리를 조명한다.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이 담긴 판소리는 문학, 음악, 극 요소가 어우러진 전통예술이다. 판소리 속 이야기는 1900년대부터 서민보급형 책자인 ‘딱지본’ 형태로 발간되며, 국민에게 사랑받아 왔다. 소설 <심청전> <별주부전> 등 오랜 흔적이 깃든 딱지본 원형을 전시에서 확인하고, 이어 옛이야기가 공연 <심청가> <수궁가>로 발전한 모습을 국립창극단 작품의 포스터, 대본, 영상 등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2부 ‘무대에서 펼쳐지는 옛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신화‧전설‧민담 등을 다룬다. 특히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서동설화’, ‘처용설화’ 등이 기록된 문헌『삼국유사』『삼국사기』의 영인본(影印本)이 공연예술박물관 전시를 통해 공개된다. ‘견우와 직녀’ ‘아기장수’ 설화를 바탕으로 만든 국립무용단 <은하수>(1986), 국립창극단 <용마골장사>(1986) 등의 공연 실황 영상도 시청할 수 있다. 3부 ‘아카이브로 보는 공연예술 이야기’에서는 1950년 설립된 국립극장 73년 역사가 묻어나는 공연예술 기록물을 선보인다. 현재까지 연극‧무용‧창극‧오페라 등 공연예술 아카이브 자료 약 46만 점을 보유한 공연예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50여 년 전 공연의 사진 앨범과 기사 스크랩북 등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다. 또한 전시 관람객을 대상으로 ‘엽서체험존’도 마련된다. 옛이야기를 각자 재해석해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해 보는 공간도 준비된다. 한편, 국립극장 73년 역사의 전환점 남산 이전 50주년 의미를 되짚어보는 특별 전시가 오는 12월 해오름극장 로비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전시 관람은 무료이며 자세한 내용은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홈페이지(www.ntok.go.kr/museum)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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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0) <br> 청자귀면장식기대편즐겁고 황홀해 지는 심사를 이규진(편고재 주인) 청자기대(靑磁器臺)는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드물다. 그러나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부안 유천리 청자 가마터에서 출토된 도편들 중에는 의외로 청자기대편들이 많이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그런데 문제는 완형이 잘 보이지 않다보니 용도에 대해서도 확실치 않은 점이 많다는 사실이다. 화병이나 매병 그리고 향로 등을 받쳤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청자기대의 도편만 해도 종류가 여러 가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청자기대는 부안의 유천리 청자가마터에서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강진 사당리 도요지 발굴조사 보고서>를 보면 여기서도 도편들이 보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유천리에서 볼 수 없는 귀면이 장식된 청자기대 도편이 사당리에서 두 점이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는 점이다. 귀면은 기대의 하단부 옆면에 붙어 있는데 부릅뜬 눈과 벌름거리는 코 그리고 입술 밖으로 내민 이빨 등이 인상적이다. 그러니까 귀면 중에서도 다른 것은 생략된 채 안면만이 노출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청자기대편에 대해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것은 양식이 비슷한 도편을 한 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청자귀면장식기대편은 아래쪽으로 풍열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등 여의두형 다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리 위에는 연판문을 장식하고 있고 위로 올라가며 투각이 있는 원통형의 대가 층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손상이 있어 원형을 유추해 보기는 쉽지 않다. 귀면은 여의두형 다리와 연판문 장식 경계에 걸쳐 양각으로 조각이 되어 있는데 눈알을 검게 칠해 액센트를 주고 있다. 두드러진 코도 인상적이지만 이 귀면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넓게 벌리고 있는 입을 가득 메우고 있는 돋을무늬의 날카로운 이빨이 아닐까 생각된다. 도편은 산화가 심한 편이어서 원래의 색감을 알 수 없지만 언뜻언뜻 내비치는 푸른빛의 유색이며 귀면장식으로 보아 강진 사당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청자기대는 아무래도 독자적인 아름다움 보다는 그 위에 올려놓는 기물의 모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에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자기대는 여의두형 다리에 투각이 있는 대가 단을 이루는 등 그 자체로 정성을 들여 만든 고급품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하면 그 위에 올려놓기 위한 기물들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이었을까. 따라서 청자귀면장식기대편을 보고 있노라면 그 위에 올리고자 했었을 기물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화분이었을까 매병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향로였을까. 그 것이 어떤 기물이요 기종이 되었던 범상치 않은 아름다움을 뽐냈을 것이 분명하고 보면 이를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황홀해 지는 심사를 금할 수가 없다. 아, 그 아름다움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이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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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한일회담 60주년 기념, “아리랑으로 한일관계 재정립하자”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체결. 이는 일본이 한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한 것으로써 법적지위, 청구권, 경제협력, 어업문제에 대한 협정 체결이다. 1910년으로부터의 긴 한일관계의 정치적 매듭으로, 전후 격심한 혼란을 겪었지만 한일국교정상화라는 새로운 시대의 출발임은 분명하다. 이로부터 60년을 보낸 오늘, 새로운 개념의 진정한 한일관계 정상화를 문화의 저력으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문화 저력에 의한 한일관계 재정립, 이 시대적 과제의 단서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에 의탁할 수가 있다. 다음의 다섯 가지에 근거한다. 하나는 아리랑 역사상 첫 활자 기록을 일본인에 의해 존재한다. 바로 1894년(明治27년) 5월 31일자 『郵便報知新聞』(유우빈호우치신문) 기사 <朝鮮의 流行謠 아리랑>이다. 이는 조선 민중의 정서를 청취하기 윈한 목적으로 조선의 유행요 아리랑에 관심을 둔 결과이다. 이는 1896년 미국 선교사 H.B 헐버트의 <Korean vocal music> 보다 2년 앞선 기록이다. 둘은 한일회담 과정에서 아리랑은 양국 국가를 대신한 사실이다. 한일회담 최고 난제였던 대일청구권 문제 해결로 한일회담의 실질적인 타결이라는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오히라(金鍾泌大平) 메모’ 서명 순간, 일본 외무성이 아리랑을 연주해 주었다. 한일 국가 연주를 대체한 것으로 매우 의미가 크다. 이는 1993년 11월 6일 일본 수상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가 김해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리랑으로 환영한 것과 같은 것이다. 셋은 "앞당긴 통일”로 평가되는 남북단일팀 ‘단가 아리랑’ 합의에 따른 단일팀 출전에 공동 국가 아리랑을 처음으로 시행된 곳이 일본이란 사실이다. 1990년 남북단일팀 결성 후 첫 국제경기가 일본 고베에서 개최된 세계탁구경기였다. 이때 분단 46년만에 처음으로 ‘코리아KOREA’란 이름으로 한팀이 되어 ‘한반도기’를 들고 아리랑 연주 속에 출전하여 세계의 장벽 중국을 꺾고 우승을 하였다. 당연히 수상식에서 우승 메달을 받는 순간 아리랑이 국가(國歌)로 연주되었다. 명실공히 아리랑이 한민족의 노래임을 세계에 입증한 것이다. 넷은 1930년대부터 1965년까지 일본에서 유통된 ‘일본아리랑’이 48종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일본아리랑’이란 일본에서, 일본 작곡가에 의해 작곡/편곡 되고, 일본 작사가에 의해 작사 되고, 일본 가수가 일본어로 부른 ‘아리랑’ 표제 작품을 말한다. 그런데 이 ‘일본아리랑’이 1931년 ビクター文藝部 編曲, 西條八十八 작사, 小林千代子 노래 ‘アリラン’이 첫 작품이다. 이어 하세가와 이치노(長谷一郞)로 알려진 채규엽이 일본말로 부른 ‘アリランの唄’이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널리 유행했는데, 1932년 일본 최고의 작곡가 古賀政男 編曲, 佐藤惣之助 作詞, 淡谷のり子와 長谷川一郎(蔡奎燁)의 노래이다. 이로부터 ‘아리랑 야곡(’アリラン夜曲), ‘아리랑 추억(アリランの思ひ出)’, ‘도도이야쓰 아리랑(都々逸アリラン)’, ‘아리랑 부시(アリラン節), ’아리랑고우타(アリラン小唄), ‘아리랑이야기(アリラン物語) 등 ‘아리랑’ 표제의 총 48종이나 된다.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어느 나라도 이런 노래의 사연을 갖는 경우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다섯은 아리랑에 얼킨 숙제 하나가 일본에 있다는 사실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그것은 우리 영화 최고의 작품이지만 필름이 없어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영화 아리랑’ 필름이 일본에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대동아전쟁기 폭약 제조용으로 관리하고 있던 일본 한국 대만의 영화필름 속에 나운규 감독 영화‘아리랑’이 포함되어 있다”는 아베 요시시게(阿部善重)씨의 생전 주장에 근거한다. 아베씨는 군속(軍屬)으로 폭약 제조를 하다 1945년 패전이 되자 3인이 불하(拂下)를 받아 소장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조총련 영화제작소장 여운각에 의해 남북한에 알려진 것이다. 2005년 사망하여 유품이 일본영상센터에 이관되어 "영화‘아리랑’ 필름이 없음이 확인되었다”고 하지만, 생전 증언에는 "영화‘아리랑’ 필름은 불하를 받은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소장했는데, 고베에 보관하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여지가 있는 것이다. 특히 아베씨를 나봉한(나운규 선생 차남) 선생과 세 차레나 만난 바 있는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이 조사한 보고서 ‘아리랑이 보고 싶다’에 의하면 3인이 합동으로 작성한 소장 영화필름 목록은 일본영상센타에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 여지는 있다고 본다. 이 문제는 다시 접근할 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상의 ‘일본아리랑’과 일본 속의 아리랑을 통해 한국과 일본 간에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특히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써 국가 간의 대화 주제임은 분명하다. 이로서 한일회담 60주년을 앞에 둔 시점에서 일본아리랑 주제 학술모임, 양국 공동 타큐멘타리 제작, 한일 교차 공연 등으로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국가무형문화재 아리랑, 그리고 일본아리랑을 새로운 한일관계의 중요한 문화 자산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아리랑 정신은 대동 상생에 있다는 사실에서 주목해야 한다. 이제 공동의 실행 위원회 구성으로부터 아리랑을 통한 한일관계 교류의 힘찬 걸음을 내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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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해외춤기행. 스리랑카의 불교문화와 전통춤(1)의식적이며 가면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 2018년 1월3일 9시35분. 스라랑카의 불교문화유산을 탐사하고 대표적인 캔디안댄스(Kandyan Dance)와 전통춤들을 살피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이번 배낭여행도 만만치 않아 하루를 넘기는 여정으로 6시간 만에 도착한 태국 방콕에서 환승하기 위해 9시간을 더 지체했다. 다시 스리랑카 콜롬보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Bandaranaike International Airport)에 3시간 후 한 밤중(00:10, 한국시간 03:40)에 도착하여 1박을 하고 다음날 전용버스로 6시간에 걸쳐 아누라다푸라에 도착(19:30)하였다. 스리랑카의 첫 왕국, 아누라다푸라의 이수루무니아 사원 불교유적과 춤유산 1월5일 아침 일정대로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불교유적답사에 나섰다. 신성도시(神聖, Sacred City)인 아누라다푸라는 BC 5세기~AD 8세기 신할리족(Sinhalese族, 인도 아리안계) 왕국의 수도로 ‘깨달음의 나무(tree of enlightenment)’인 보리수(Sri Ma Bodhi) 주변에 건설되었다. 1,300년 간 실론(Ceylon, 지금의 스리랑카)의 정치적·종교적 수도였으나, 933년경에 인도로부터 타밀족(Tamil族, 인도 드라비다계)이 침입함으로써 황폐해졌다. 그 후 많은 탑(Dagoba, stupa, 파고다, 塔婆)과 사원(寺院)터, 석조 연못 등 유적들은 한동안 정글 숲에 묻혀 있었으나 19세기에 복구되어 1982년 UNESCO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세계의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첫 탐방 유적은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 이수루무니아 바위사원(Isurumuniya rock temple)이었다. 연못 뒤의 바위 앞뒤에 건립한 사원과 코끼리와 불상의 부조상과 보기 드문 와불(臥佛)과 스님상들이 있다. 와불상(臥佛像)과 열반상(涅槃像)의 차이는 발가락을 모은 모습으로 구분하는데 오른쪽 발가락이 약간 위로 올라간 것은 열반상이고 나란히 된 것은 와불상이다. 이곳 이수루무니아 박물관(Isurumuniya museum)사원박물관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화강암 조각 솜씨가 뛰어난 ‘연인상(Lovers)'이다. ‘춤추는 난쟁이’ 바마나(Vamana) 신화와 스리랑카 부조상의 특징 항상 춤추는 조각상이나 벽화가 있는지를 눈여겨 찾던 중 반갑게도 ‘춤추는 난장이(Dancing Dwarfs)’ 조각상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으로 봐서는 파괴 또는 폐허화된 힌두사원의 잔해인 것 같았다. 비록 난장이 모습으로 보이지만 힌두신 비슈누(Vishnu)의 다섯 번째 화신(avata)이었다. 무릎을 굽힌 스리랑카의 전통춤 자세에다 양팔을 들고 어깨를 치켜든 기본춤사위와 눈을 크게 뜬 모습까지도 캔디안댄스(Kandyan Dance)와 유사하다. 또한 압사라(Apsara)는 ’춤추는 여신‘ 또는 ’천상의 무희‘라는 뜻으로,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회랑 벽면에 새겨진 군상인데 스리랑카에서도 엿보인다. 다만 탑면의 높이 제한에 따라 한쪽으로 쪼그려 앉은 조각상이자만 상하체를 편 자세로 살펴보면 압사라의 춤사위를 알 수 있다. 춤추는 난장이 남녀상은 하반신이 동물하체처럼도 생겨 반인반수상과 같기도 하다. 난쟁이 바마나(Vamana)에 대한 힌두경 리랑카전 바마나 푸라나(Purana)의 기록에 의하면 비슈누(Vishnu)의 다섯 번째 아바타(avata)로 최초로 인간으로 육화(肉化)한 화신(化身)이라 한다. 그리고 난쟁이 바라마는 늘 나무 우산을 들고 다니는데, 자비로운 발리 왕의 궁전을 찾아가 세 걸음만큼의 땅을 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마하발리는 왕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낙한다. 그러자 곧바로 바라마는 자신의 본 모습(비슈누)을 내보이며 거대한 발걸음으로 첫 걸음으로 천상 세계에서 지상 세계까지 건너고, 두 번째 걸음으로 지상 세계에서 지하 세계를 성큼 넘어섰다. 그러자 약속을 거둘 수 없게 된 마하발리는 세 번째 걸음 자리에 자신의 머리를 내밀었다. 바마라는 마하발리에게 겸손함에 대한 대가로 영생불사의 권능을 주었으며 해마다 마하발리가 왕국을 찾아오는 걸 허락하였다고 한다. 다음 그림들과 조각상은 난쟁이 바마나(Vamana) 힌두신화의 내용이다. 그림들은 대체로 마하발리왕에게 세 걸음 땅을 요청하는 형상, 수락 후 비슈누 신으로 현신(現身)하여 천상에서 지상과 지하세계로 한걸음 하는 형상과 발리 왕이 머리 조아리는 형상 등으로 나타난다. 도상무용학적으로 볼 때 동양춤에서는 볼 수 없는 발레나 현대무용의 쳐든 특이한 발춤사위로 보인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불교사찰에서 보이는 난쟁이들은 사원이나 탑의 기단석(基壇石) 등에 주로 보이는데, 본체를 받쳐주는 역할이거나 억눌린 모습이나 귀여운 난쟁이들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악마들로 가둬놓거나 짓누른 모습(Kelaniya 사원, 콜롬보)으로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인도의 힌두교와 신화가 스리랑카에 전래되었다가 불교문화가 정착하여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힌두신의 존재는 미약해지고 악마신이나 단순한 난쟁이로 변화되어 춤추는 난쟁이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천상의 무희’ 압사라춤의 의미와 지역 특징 박물관에 전시된 부조상 압사라(apsara)는 ‘천상의 무희’라는 뜻으로 인도신화에는 젊고 우아한 초자연적인 여성으로 특히 춤 예술이 뛰어나 신들의 궁전에서 간다바스(Gandharvas)가 만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신들과 남자들을 즐겁게 하는 천사로 알려져 있다. 압사라춤으로 꽃을 피운 나라는 캄보디아이다. 사원에는 수많은 압사라 부조상이 있으며 황실 발레라고도 하며 천상의 춤을 추는 신성한 사람들로 여겨져 왕궁에서 살았다고 한다. 압사라 춤은 손동작이 다양하고 화려하여 습득하기 어려운 춤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스리랑카의 압사라는 힌두문화의 쇠락과 함께 미미할 수밖에 없었고 불교문화에 융해되어 버렸다. 따라서 스리랑카의 압사라 유물 역시 아누라다푸라의 이수루무니아 박물관(Isurumuniya museum)의 전시품에서나 겨우 흔적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반인반수(半人半獸)춤 킨나라(kinnaras)의 의미 춤과 관련한 또 하나의 부조상 유물은 킨나라(kinnaras)로 불교 신화와 힌두교 신화에는 전형적인 연인, 천상의 음악가, 반인반마(半人半馬)이며, 동남아시아(특히 태국)에서 자비로운 반인반조(半人半鳥)로 인간의 안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특히 여성은 춤, 노래 및 시로 유명하며 여성의 아름다움, 은혜 및 성취를 상징한다. 하지만 힌두문화의 전래보다 불교문화가 꽃피운 스리랑카에서의 힌두신화와 종교적 색채는 엷어지고 미약한 흔적만이 박물관에 소장된 모습이었다. 아누라다푸라의 다양한 사원(Temple, Vihara)과 탑(Dagoba)들 이어서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새하얀 루반벨리사야 다고바(Ruvanvelisaya Dagoba)였다. 눈부시고 거대한 '위대한 탑(Great Stupa)'이라 일컫는 탑으로 높이가 무려 91m에 달하는 이 탑은 반원 모양의 탑신 위에 우리 석탑의 상륜에 해당하는 부분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탑 주변은 불교에서 평화와 정의를 상징하는 코끼리 1900마리를 조각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세 번째로 아바야기리 비하라(Abhayagiri Vihara) 및 다고바(Dagoba)를 찾았다. 아누라다푸라에서 가장 큰 사원이고 대규모 사원으로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사원이다. 승원의 교육기관으로 한때는 5천 명 이상이 거주했다고 한다. 비하라(vihara)란 승려들의 수련을 하는 참선공간으로 돌침대와 대중들에게 설법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뜻한다. 스리랑카 국민 70%가 불교를 믿는데 사원이나 불탑이나 보리수에는 흰옷 입은 이들이 꽃을 올리고 기도하는 것이 일상처럼 보였다. 끝으로 찾아간 곳은 제타바나 다고바(Jetavana Dagoba)였다. 마하비라하(Maha vihara)의 명에 따라 120m 높이로 건축되어졌다. 그 규모는 그 당시 세계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 2개 다음으로 높은 건축물이었으나 지금은 83m 정도로 낮아졌다. 두 번째 수도 폴론나루와(Polonnaruwa)의 불교문화유산 첫 번째 수도 불교사원 답사를 마친 일행들은 전용차량으로 두 번째 수도 폴론나루와(Polonnaruwa)로 이동하였다. 스리랑카 싱할라 왕조는 기원전 377년부터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서 약 1,400년간 풍요를 누렸다. 그러나 9세기에 인도 타밀에 촐라 왕조(Chola Dynasty)가 들어서면서부터 힌두세력의 침략이 잦아지고 11세기에 접어들어 동쪽으로 약 80km 떨어진 폴론나루와(Polonnaruwa,1153~1186)로 두 번째 수도를 옮겨 180년간을 유지했다. 12세기에 파라크라마바후(Parakramabahu) 1세가 만든 전원도시(garden-city)의 놀라운 고대도시는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파라크라마바후 1세는 3중벽으로 된 성곽 안에 굉장한 전원도시를 건설하여 궁전과 성지들을 그의 치세 기간에 만들었다. 스리랑카의 전통춤 유형 스리랑카의 전통춤(Natum)을 개괄적으로 분류해보면 오랜 세월 왕실에서 춤과 음악으로 사랑을 받으며 전승해온 고전춤(classic dance), 민간에서 수확과 생활을 표현하는 민속춤(folk dance), 주로 가면을 쓰고 치병의식으로 추어왔던 의식춤(ritual dance)으로 장르를 구별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고전춤은 크게 3가지 주요 지역 스타일이 있다. ① 캔디안 댄스(Kandyan dance, Uda Rata Natum), ② 파하타 라타 댄스(Pahatha Rata Natum, Low Country Dance), ③ 사바라가무와 댄스(Sabaragamuwa Natum)가 전승되고 있다. ① 캔디안 댄스(Kandyan dance, Uda Rata Natum)캔디안 댄스가 스리랑카춤의 대표적인 춤으로 알려진 것은 세 번째 왕국이었던 캔디지방에서 오랜 동안 왕실을 중심으로 현재까지 오롯이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리랑카의 중부 고원지대(hill Country)인 캔디지역에 고유하고 다양한 춤 형식들을 포괄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까지 널리 전파되어 있기도 하다. 캔디안 댄스의 기원은 캔디안 지역에서 여전히 행해지는 스리랑카 ‘악마의 춤(Devil Dance, Kohomba-kankariya)’라고 불리는 의식춤 형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악귀의 저주병(Divi Dosa, 표범의 저주)에 괴로워 병약해진 판두바사디바(Panduvasadeva) 왕을 치료하기 위해 샨크라(Śakra, 帝釋天) 신의 요청으로 세 명의 샤먼이 인도에서 스리랑카 섬에 왔다. 왕이 악귀가 몸에 실려 매일같이 악몽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말하자, 샤먼들이 코홈바 카나리야(Kohomba kankariya)를 연행하자 악령이 사라졌다. 그 후 많은 원주민들이 이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의식춤 형식의 세련미를 갖추고 체계화되어 나중에 ‘우다라타 나툼(Udarata natum)’ 즉 Kandyan dance’ 형식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나 주로 남성들만이 참여하였다. 오늘날 Kandyan dance는 종교적인 화려한 행렬과 사원의식 및 모든 축제 행사에서 연행되고 있다. ② 파하타 라타 댄스(Pahatha Rata Natum, Low Country Dance, Ruhunu Natum)파하타 라타 댄스(Pahatha Rata Natum)은 지역을 구별하는 명칭으로 신할리족(Sinhalese)의 남부 평원의 저지대(Low Country)춤이다. 이는 ‘악마의 춤(devol madu, devil dance)’이라고도 불리며 악마나 신비한 존재의 퇴마의식(exorcism ritual)과 관련이 깊다. 춤의 내용은 조류, 악마, 파충류 등 다양한 18개의 가면을 착용하고 인체에서 여러 질병을 쫓아내기 위해 연행하기에 ‘다하 아타 사니야(Daha Ata Sanniya) 또는 ’사니 야쿠마(Sanni yakuma, 질병 퇴치, 영적 구제의 뜻)’로 부른다. 이 의식은 환자에게 질병을 옮길 것으로 생각되는 악마를 부르며, 인간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악귀를 몰아내는 내용으로 밤새도록 연행하는 것으로 마을에서 가장 즐거운 행사 중 하나이다. 흔들리는 손놀림, 넓고 각진 발놀림, 독특한 드럼 리듬과 의상은 루후누(Ruhunu) 댄스의 특징 중 일부이다. ③ 사바라가무와 댄스(Sabaragamuwa Natum)사바라가무와(Sabaragamuwa)춤은 라트나푸라(Ratnapura)와 켈라리(Kegalle)지역에서 전승되며, 초기에는 초기에 캔디안 왕국에 속한 지방이었다. 캔디안 댄스 형식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저지대(Low Country)춤 양식도 흡수하게 되어 캔디안 댄스와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사바라가무와 전통에는 현지 사람들이 존경하는 샤먼(Saman)신의 숭배와 관련이 있으며, 독특한 의상, 노래, 드럼 비트 및 드럼 스타일이 있다. 춤사위도 손이 머리 위로 결코 들어올려지지 않지만 대신 팔이 몸에 비스듬히 뒤로 젖혀지는 특징이 있다. 또한 반주악기인 다우라(daula)도 양쪽에서 같은 소리를 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전통춤은 대체로 무릎이 반쯤 구부러져 바깥쪽으로 벌려진 포즈이며, 팔은 가슴과 나란히 팔꿈치에서 구부러진 모양으로 매우 의식적이며 가면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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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에 ‘활옷이 활짝 피었습니다’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활옷 만개(滿開), 조선왕실 여성 혼례복’ 특별전(9.15.~12.13.) 개최를 기념하여 10월 28일부터 30일까지 관람객이 전시를 더욱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문화행사 ‘활옷이 활짝 피었습니다’를 현장과 온라인으로 나누어 개최한다.먼저, 10월 28일 토요일 오전 11시 국립고궁박물관 2층 로비에서 개최되는 현장행사에서는 당일 배포되는 홍보물(리플릿)에 나와 있는 문제의 정답을 맞히거나 현장 설문조사에 응한 선착순 각 200명에게 문화상품 2종(반짇고리 꾸러미 1종과 박물관 캐릭터 배지 1종)을 증정한다. (중복 참여 가능)온라인 행사는 10월 28일부터 30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공식 인스타그램(instagram.com/gogungmuseum)에서 진행된다. 참여방법은 국립고궁박물관 인스타그램을 구독하고, 행사 당일 게시되는 문제의 정답을 댓글로 작성하면 추첨을 통해 100명에게 반짇고리 꾸러미 1종을 증정한다.국립고궁박물관의 입장료와 행사 참가는 모두 무료이며, 더 자세한 사항은 국립고궁박물관 누리집(www.gogung.go.kr)을 확인하거나 전화(☎02-3701-7500)로 문의하면 된다.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이번 행사를 통해 조선왕실 여성들의 혼례복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지길 기대하며, 적극행정의 하나로 앞으로도 전시 내용이나 소장품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들을 기획하여 박물관이 즐거운 문화공간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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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18) <br>청자상형용문편(靑磁象形龍文片)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이규진(편고재 주인) 용(龍)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아마도 강력한 왕권(王權)이 아닐까 생각된다. 용이 이처럼 왕권을 상징하다 보니 왕의 얼굴은 용안(龍顔)이요 왕의 평상은 용상(龍床)이요 왕의 옷은 용포(龍袍)로 불리기도 한다. 왕이 즉위하는 것을 용비(龍飛)라고 하는데 <용비어천가>의 제목은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용은 왕권만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용은 민간신앙에서는 비를 가져오는 우사(雨師)이고, 물을 관장하고 지배하는 수신(水神)이며, 나쁜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주는 벽사(辟邪)의 선한 신으로 인식되어 용신제 및 용왕굿 등이 행해지기도 한다. 용은 또 무소불위의 권능과 천변만화의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따라서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상징성을 보이다 보니 그 모습도 다양하다. 중국의 삼정구사설(三停九似說)에 의하면 낙타의 머리, 사슴의 뿔, 토끼의 눈, 소의 귀, 뱀의 목, 개구리의 배, 잉어의 비늘, 매의 발톱 등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 뿐 아니라 자유자재한 초월적인 존재를 암시하기 위해 구름 속으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운룡문(雲龍文) 형태로 그려지기도 한다. 용은 순수한 우리말로는 미르라고 하며, 용이 되려다 못되고 깊은 물속에서 사는 큰 구렁이를 이무기라고도 한다. 이러한 용은 조선조에서는 백자항아리에 청화로 운룡문이 많이 그려지지만 청자와 분청에서도 보이고 있다. 비색청자나 상감청자의 문양이나 상형청자의 용은 대개 최상급의 품질을 보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물결과 함께 표현된 수룡(水龍), 용두구신(龍頭龜身)의 구룡(龜龍), 용두어신(龍頭魚身)의 어룡(魚龍) 등이 그 것들이다. 조선조 백자청화에서 많이 보이고 있는 운룡문은 청자에서는 후기에 와서야 상감청자에서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라면 특징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청자 중 용이 장식된 대표적인 기명은 무엇이 있을까. 그런 청자는 적잖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명품 중의 명품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일본의 야마토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자양각파도문구룡정병(靑磁陽刻濤文九龍淨甁)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전라도 어느 고분 석관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정병은 고려 12C 것으로 높이가 33.5Cm나 되는 당당한 크기로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 첨대(尖臺)와 목 그리고 주구{注口)에 아홉 마리의 용머리를 장식하고 있는데 입을 크게 벌려 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포효하는 무시무시한 모습이 정교하고도 정성스럽게 조각을 해 형상화 되어 있다. 몸체 전면에도 용이 휘감기는 모습을 음양각 기법으로 박진감 넘치게 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청자를 통 틀어서도 명품중의 명품으로 꼽을만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청자양각파도문구룡정병에서 보이고 있는 아홉 마리의 용이다. 아홉 마리의 용중 목이 보이는 것은 주구와 첨대에 장식된 것뿐이다. 다른 것들은 용머리가 몸체에 바짝 붙어 있다 보니 목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주구의 것도 흔적만 보일 뿐 비늘에 덮인 목을 제대로 뽑아 올리고 있는 것은 첨대에 장식된 용뿐이다. 왜 아홉 마리 용중에서도 첨대에 장식된 이 용머리가 내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그 것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청자상형용문편 때문이다. 형태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뽑아 올린 목, 쩍 벌리 입, 뒤로 날리고 있는 갈기, 거기에 눈이며 비늘 등을 음각으로 처리한 점, 비색의 색감 등이 동일한 양식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청자상형용문편이 정말이지 청자양각파도문구룡정병의 첨대에서 보이고 있는 용머리 조각과 같이 청자정병첨대에 붙어 있던 장식이라고 하면 이 얼마나 귀하고도 희한한 자료인가. 하지만 나로서는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추측을 떠나서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전혀 없고 보면 오로지 신나고 즐겁고 감격스럽기만 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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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한국실 관리 , 문체부 소속기관 전담제 필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이병훈 의원 (더불어민주당, 광주 동구남구을) 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 , 국외전시 수요가 크게 늘고 있지만 , 예산과 인력이 부족해 역사 왜곡 , 오류 등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 최근 베를린의 훔볼트포럼 특별전에서 일본 식민사관을 드러낸 ‘ 맨 가슴의 한국 여인 ’ 사진이 걸려 논란이 일자 문제의 사진이 전시장에서 철거됐다 . 한국 관련 해외 전시에서 문제가 발견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 지난 2016 년 LA 의 ‘ 게티 미술관 ’ 메인홀에는 중국 만리장성이 한반도까지 뻗어 있는 세계지도가 걸렸고, 2019 년 프랑스 ‘케 브랑리 미술관에서는 국경선이 없어 한반도가 중국에 포함된 것처럼 그려진 지도가 걸리기도 했다 . 한국의 역사와 유물을 소개하는 국외박물관 한국실은 전 세계 25 개국 70 개 관이 설치 · 운영 중이지만 이들 중 일부는 자체 소장품이 전혀 없거나 조악한 복제품을 전시하는 등 일회성 사업으로 설치되며 유지 · 관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 2022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던 한국실 지원사업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했으나 , 기존에 운영 중인 한국실뿐만 아니라 국외전시 수요의 폭발적 증가로 예산과 인력이 업무량을 따라가지 못하며 역사 왜곡 , 오류 등에 대해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 이병훈 의원은 " 한국실 관리를 중박에만 맡길게 아니라 , 전문성을 가진 문체부 소속기관들이 분담해 관리할 필요가 있다 ”면서" 전시 규모나 유물 종류에 따라 ▲ 국립중앙박물관 , ▲ 국립민속박물관 , ▲ 한국국제교류재단 , ▲ 국립무형유산원 등을 전담 기관으로 지정해 내용 검토와 관리를 맡기는 전담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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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도서관 장서포화율 심각, 장서폐기도 제각각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교육위원회, 충북 청주흥덕)이 학술정보통계시스템(Rinfo)을 통해 서울대를 포함한 지방거점국립대 열 곳의 도서관 장서포화비율을 분석한 결과, 열 곳 모두 실제 소장책수가 한계 소장책수를 넘어선 포화 상태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각 대학의 장서포화비율을 살펴보면, 2022년 기준 경북대학교의 한계 소장책수는 1,688,640권인 반면 실제 소장하고 있는 책수는 3,427,573권으로 장서포화비율이 무려 203%에 이르렀다. 제주대(189%), 부산대(173%), 서울대(160%) 순으로 장서포화비율이 높았고, 장서포화비율이 가장 낮은 전북대학교도 한계 소장책수를 넘긴 113%의 수치를 보였다. 건물연면적이 정체상태인 것을 감안하면, 적절한 장서 폐기로 소장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 3년간 열곳의 대학도서관이 총 1,123,744권의 장서를 폐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증가책수는 총 494,297권으로 소장 장서는 지속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상국립대는 총 265,505권을 폐기했으며, 제주대(171,060권), 경북대(161,800권), 부산대(129,665권) 순으로 많은 양의 장서를 폐기하였다. 한편, 「도서관법 시행령」에 따르면, 도서관자료 폐기 및 제적의 범위는 연간 해당 도서관 전체 장서의 7%를 초과할 수 없다. 연간장서증가량에서 연간장서폐기량을 뺀 실제 증가책수를 살펴보면, 경상상국립대가 224,343권으로 장서가 가장 많이 증가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전북대(92,662권), 서울대(90,495권), 부산대(56,249권) 순이었다. 소장공간 확보를 위한 장서폐기의 당위성과는 별개로, 대학도서관의 장서폐기는 대중 도서가 많은 다른 공공도서관과는 달리 학문의 보고(寶庫)로서 보다 엄격한 기준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각 대학이 의원실로 제출한 장서폐기 현황 자료를 분석한 결과, 폐기예산 편성유무·폐기 방법·폐기 위원회 운영 현황·폐기 담당 직원 수 등 장서폐기 여건이 각 대학도서관별로 제각각인 것으로 드러났다. 제주대의 경우 장서폐기를 담당하는 직원이 16명(분담 직원 포함)인 반면, 충남대와 부산대는 각각 1명의 인력만 있는 등 그 격차가 컸다. 장서폐기관련 예산 또한 서울대를 비롯한 6개 대학은 아예 없고, 경상국립대 등 4개 대학만 편성되어 있었다. 한편, 9곳의 대학도서관은 별도의 폐기 관련 위원회가 편성되어 폐기 도서 리스트를 심의 후 처리하지만 서울대의 경우 장서 폐기 위원회 심의 없이 폐기처리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관련하여 서울대 측은 학술정보운영과에서 팀별로 폐기목록을 작성, 도서관장 결재를 거친 후 폐기처리된다는 답변을 하였다. 도종환 의원은"버릴 책을 잘 정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예산이나 인력, 폐기목록 검토기간 등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폐기자료 선정기준과 처리방법을 보다 구체화하는 한편 지역거점 공동보존서고 설립을 통해 귀중한 자료가 모르는 상태에서 폐기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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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잡지협회, 세종시립도서관과 ‘근현대잡지 특별전’한국잡지협회(회장 백종운)는 26일부터 11월 말까지 세종시립도서관 지하 1층 전시 공간에서 세종시립도서관과 공동으로 ‘근현대잡지 특별전’을 개최한다.지난해 ‘잡지주간 2022’ 프로그램의 하나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선보인 잡지 특별전은 관람객들의 좋은 반응에 힘입어 올해는 첫 지역 전시에 나섰다. 이번 지역 전시는 고(古)잡지에 담긴 역사적·문화적 가치와 다양한 근현대잡지의 매력을 지역민들과 함께 향유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고(古)잡지부터 현대잡지까지 250여 종의 전시 잡지로 구성된 2023년 근현대잡지 특별전은 ‘잡지, 시대와 공존하다’라는 주제 아래 5개 파트로 나누어 전시될 예정이다.파트1 ‘문화와 역사를 담은 그릇’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인 ‘대죠선독립협회회보’를 포함해 ‘소년’, ‘개벽’ 등 근대 초기 잡지 54종을 127년의 잡지사(史)와 함께 영인본으로 소개한다.파트2 ‘기록물로서 매체’에서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해 잡지에 실렸던 광고의 기록을 소개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잡지를 광고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다.파트3 ‘잡지가 있는 삶’에서는 시대별 문화 흐름과 대중의 취향을 반영한 잡지 200여 종이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전시된다. 대중의 트렌드 및 세대 간 취향을 다룬 다양한 콘텐츠의 잡지를 일상 공간에서 친밀하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파트4 ‘잡지 아카이브’ 공간에서는 한국잡지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역사적·문헌적·정보적 가치가 높은 중요 고(古)잡지를 디지털화해 제공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잡지를 접할 수 있도록 한다.파트5 ‘세종의 문화를 담은 잡지’에서는 ‘백수문학’, ‘세종문단’, ‘세종시마루’, ‘세종우먼’, ‘세종복지애(愛)’, ‘세종시정소식지’, ‘행복도시이야기’ 등을 중심으로 세종시의 지역사·정체성을 조명하는 특별 섹션 전시 공간도 마련할 예정이다.전시 개막행사는 10월 26일(목) 오전 11시 세종시립도서관 지하 1층 야외무대에서 열릴 예정이며, ‘근현대잡지 특별전 ‘잡지, 시대와 공존하다-문화, 소통, 그리고 기록’’의 일반 전시 관람은 개막 행사 당일인 10월 26일(목)부터 11월30일(목)까지다. 전시 프로그램은 세종시립도서관 휴관일을 제외하고 상시 운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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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카르텔에 포획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구매 사업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이병훈 의원 (더불어민주당 , 광주 동구남구을) 이 23 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품을 구매하며 응찰보고서를 누락시켜 규정을 위반하고 , 내부직원을 심의위원회에서 배제하는 규정이 없는 등 그들만의 카르텔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 국립현대미술관은 내부 규정상 경매로 작품을 구매할 때 ‘ 응찰보고서 ’ 를 사전에 반드시 제출하게 되어 있다 . 이병훈 의원실에서 지난 3 년간 경매구입 현황을 살펴보니 , 총 115 건의 응찰 건수 중 ‘ 응찰보고서 ’ 가 누락 된 작품이 34.8% 인 40 건에 달했다 . 이 중 16 건은 응찰보고서 없이 경매에서 최종 낙찰됐다 . 명백하게 규정 위반이다 . 또한 ,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장품의 수집을 미술관 임직원인 ‘ 내부 제안권자 ’ 와 50 명의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 외부 제안권자 ’ 가 제안할 수 있다 . 그런데 , 심의과정에서 ‘ 외부 제안권자 ’ 가 제안한 작품은 사회자가 작품설명을 대독하고 마는 반면 , ‘ 내부 제안권자 ’ 는 평가장에 직접 출석해 신분을 밝히고 작품을 설명하고 질의응답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작품수집심의위원회 외부위원 구성에도 문제가 드러났다 . 국립현대미술관은 200 여 명의 외부위원 인력풀을 두고 있음에도 외부 평가위원 5 인 중 특정 인물을 중복 , 반복해서 인선하는 사례가 발견됐다 . 또한 , 외부 심의위원은 배제하는 규정이 있지만 , 내부위원에 대해서는 관련 규정을 안 두고 있었다 . 이병훈 의원은 "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구매과정이 내부 카르텔에 포획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 라면서 " 소장품 구매과정의 규정과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구성해야 하고 , 외부의 관리 감독을 받도록 할 필요가 있다 ” 라고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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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탈문화재 돌려준다는데 , 무엇을 돌려받아야 할지도 파악 안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이병훈 의원 (더불어민주당 , 광주 동구남구을) 이 12 일 문화재청과 그 소속기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국외소재 우리 문화재의 반환 준비 실태를 지적했다 . 2023 년 현재 23 만점에 육박하는 우리 문화재가 일본 , 미국 , 영국 등 27 개국에 소재하고 있다 . 이들 문화재의 상당수는 개화기 , 일제 강점기 , 6·25 전쟁 시기에 국외로 반출된 것들리다 . 정상적인 가격을 지불하고 사들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약탈 , 밀거래 등 불법적인 방식으로 국외로 반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최근 영국의 영국박물관 ( 브리티쉬 뮤지엄 ),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소장 문화재 중 소장과정이 불법적이거나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문화재들에 대해 원소유 국가에 반환했거나 반환을 준비하고 있다 . 독일 , 일본 , 이스라엘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 제국주의 시절의 약탈적 문화재 수집 행위에 대해 반성적인 분위기가 국제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분위기를 활용하여 우리도 해외 주요 박물관에 소장 중인 우리 문화재의 환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필요가 있다 . 해외 소재 문화재의 관리와 환수를 위해 설립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작년과 올해 1,719 점의 국외소재 문화재 환수를 성사시켰다 . 이와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외소재 문화재의 환수 여건은 매우 열악하다 . 문화재의 환수를 위해서는 어디에 어떤 문화재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실태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실태조사 인력은 2 명에 불과하다 . 매년 국정감사에서 지적되지만 여전히 제자리 걸음인 상태다 . 그 결과 해외 소재 우리 문화재에 대한 실태조사는 적기에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 이병훈 의원실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 약탈문화재의 환수에 가장 적극적인 박물관인 브리티쉬뮤지엄과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대한 우리문화재 실태조사는 2006 년과 2016 년이 마지막이었다 . 그 이후의 소장 내역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이병훈 의원은 " 국외 소재 우리 문화재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대변하는 것 ” 이라며 " 세계 주요 박물관들이 약탈해갔던 문화재를 돌려주겠다고 해도 무엇을 돌려받아야 할지 모르는 것이 우리 문화재 반환 정책의 한계 ” 라면서 국외 문화재에 대한 면밀한 실태조사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이를 위한 인력확충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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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문학의 확산 : 세계와 함께 읽는 한국 문학” 공동학술대회국립중앙도서관·국립한국문학관은 10월 13일(금) 오후 1시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이미륵’부터 ‘차학경’까지, 세계적으로 활약한 한국 작가를 조명하는 ‘K-문학의 확산 : 세계와 함께 읽는 한국 문학’ 공동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김일환 국립중앙도서관장 직무대리, 염무웅 국립한국문학관 초대 관장, 문정희 국립한국문학관장, 박균 이미륵기념사업회장을 비롯해 국문학계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 연구자들이 참석하여 세계문학 속 한국 문학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칠 계획이다. 학술발표에 앞서 박혜진 문학평론가의 사회 아래 ‘세계 속의 한국 작가’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소설가 윤고은과 편혜영의 대담도 주목할만하다. 이번 공동학술대회는 최근 한국 문학의 세계적 확산에 주목하여 마련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1994년 전(前)성신여자대학교 독문과 정규화 교수로부터 "압록강은 흐른다" 등 근대 한국 문학의 외연을 확장했던 이미륵의 자료 319점을 기증받았다. 국립한국문학관은 2026년 개관을 앞두고, 2021년에 전(前)성균관대학교 국문과 최박광 교수를 통해 김소운의 육필원고 등 1,830점을 기증받았다. 1부에서는 염무웅 국립한국문학관 초대 관장의 기조 강연은 이러한 문학 자료 수집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살펴본다. 이어 박균 이미륵기념사업회 회장이 독일어로 한국을 알린 작가 이미륵 문학을 소개한다. 박현수 경북대학교 교수는 일본어로 조선 시를 번역한 김소운의 문학사적 위치에 대해 논의한다. 2부에서는 세계 각 지역에서 활약한 한국계 작가들의 작품을 한국 문학의 확산과 변환,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본다. 강원대학교 정주아 교수는 ‘모국의 기억과 이국의 언어’라는 주제로 김은국, 김용익의 문학을, 서울대학교 김정하 교수는 ‘경계인의 시선과 세계문학의 지평’이라는 주제로 이창래, 이민진, 수잔 최의 작품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중앙대학교 정은경 교수는 차학경 문학의 문제성과 현재성을 논의한다. 국립중앙도서관 고문헌과는 최근 고문헌의 범위를 확대하여 해방 이전 자료들까지 전문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번 학술대회에 소개되는 이미륵 자료뿐만 아니라 가치 있는 근대 문헌 자료들을 모든 국민이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원문 디지털화 등을 통해 이용자 편의를 확대할 계획이다. 김일환 국립중앙도서관장 직무대리는 "이번 학술대회가 국립중앙도서관과 국립한국문학관 양 기관의 협력을 강화하고, 세계 속에서 한국 문학을 알린 작가들이 다양한 시선에서 조명되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국립한국문학관 문정희 관장은 "국립한국문학관은 그동안 김소운, 하동호, 김규동, 박화성, 김용직 등 문인들의 소장자료를 기증받아 보존·복원하고 있다”며 "특히 김소운은 일본에 조선 문화를 소개한 최초의 문화기획자이며 최초의 한류 조성자로, 이번 공동학술대회는 김소운 자료의 학술적 의미와 가치를 찾아보고 세계 속으로 뻗어나가는 한국 작가의 위상과 경험 등을 확인해보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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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훈 의원 , “ 광화문 현판은 대한민국의 간판 , 당연히 한글로 쓰여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이병훈 의원 (더불어민주당 , 광주 동구남구을 ) 이 12 일 문화재청과 그 소속기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광화문 현판의 한글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 광화문 현판은 1968 년 광화문 복원 시 함께 제작되었는데 , 아무런 고증도 없이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을 현판으로 만들어 걸었다 . 2010 년 광화문을 다시 건축하면서 나름의 고증을 거쳐 조선 말 경복궁 중건 당시 훈련대장 이었던 임태영의 글씨를 복원하여 한자 현판이 걸리게 된다 . 새로운 한자 현판은 석달만에 금이가면서 현판의 고증과 제작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고 다시 같은 형태로 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 2017 년 문화재청은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소장자료와 구한말 궁중화가 안중식의 작품을 토대로 광화문 현판이 ‘ 어두운 바탕에 밝은 글씨 ’ 라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제작에 들어가 검정 바탕에 황동 글씨의 현판을 제작한다 . 글씨체는 임태영의 한자 글씨 그대로이다 . 이 현판이 15 일 새롭게 광화문에 걸리는 것이다 . 광화문 한자 현판에 대한 찬반의견은 팽팽하다 . 한자 현판을 반대하는 주된 논거는 현재의 현판이나 새롭게 걸릴 현판 모두 고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 현재 경복궁 재건당시 광화문의 정확한 형태를 고증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 글시체의 주인공인 임태영에 대한 자격 논란도 있다 , 임태영은 무관으로 천주교도들을 박해한 경신박해의 주모자로 행실이 좋지 못하여 조정으로부터 파면당했다는 기록이 있는 인물이다 . 조선의 정궁 경복궁의 정문 현판 글씨의 주인공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의견이다 . 이병훈 의원은 광화문 한글 현판의 필요성을 지난 국정감사와 상임위원회에서도 꾸준히 제기해 왔다 . 이병훈 의원은 " 광화문은 해외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곳인데 그곳의 이름이 중국의 글씨로 쓰여져 있는 것은 말이 안된다 ” 라며 " 세종대왕의 동상이 자리잡은 세종로가 시작되는 지점이자 , 한글이 창제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현판은 한글이어야 한다 ” 고 광화문 한글 현판의 당위성을 힘주어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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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대 산학협력단, ‘하회선유줄불놀이의 전승과 무형문화적 가치’ 학술대회안동 하회선유줄불놀이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규명하고, 축제화 방안을 모색하는 학술대회가 개최된다. 오는 20일 오전 10시부터 국립안동대학교 국제교류관 중회의실에서 열린다. 이번 학술대회는 문화재청의 ‘2023년 미래무형문화유산 발굴·육성 사업’ 공모에 선정된 안동대 산학협력단의 줄불놀이 사업단이 주최하며, 경상북도와 안동시가 후원을 한다. 양반 놀이문화의 정수로 평가되는 하회선유줄불놀이는 하회의 방풍림인 만송정쑤에서 화천을 가로질러 부용대로 이어지는 줄불, 맞은편 절벽 위의 부용대에서 불타는 솟갑단을 절벽 아래로 던지는 낙화,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화천 위를 수놓아 떠다니는 달걀불로 이뤄졌다. 과거 하회에서는 7월 기망(旣望)의 시기에 선유줄불놀이가 행해졌으나, 일제강점기에 그 전승이 단절되고 말았다. 1960년대 이후 선유줄불놀이의 재현을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어졌고, 현재에는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을 비롯한 지역의 중요 행사 프로그램으로 연행되는 등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하회선유줄불놀이의 전승과 무형문화적 가치'를 주제로 개최되는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민속학자, 문화콘텐츠 전문가 등이 참여해 선유줄불놀이의 역사, 현대적 재현과정, 문화유산적 가치와 축제화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제1세션에서는 한양명 안동대 문화유산학과 교수의 ‘낙화놀이의 유형과 하회 선유줄불놀이의 위상’을 주제로 발표가 시작되며, 이어 놀이연구소 ‘풂’의 소장인 이상호 박사가 ‘낙화놀이의 분포와 유형 비교'를 주제로 발표한다. 제2세션에서는 지역 문화산업체 도움소의 우종익 대표가 ‘낙화봉의 제작방법과 전승지식’을, 국립무형문화연구원의 정형호 박사가 ‘하회선유줄불놀이의 무형유산적 가치’를, 안동대 문화유산학과 이진교 교수가 ‘하회선유줄불놀이의 현대적 전승양상과 축제화 방안’을 주제로 발표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학술발표뿐만 아니라 하회마을보존회 전현직 이사장을 비롯한 주요 전승자가 참여하여, 선유줄불놀이 활성화를 위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경청·반영할 수 있는 자문회의도 함께 열린다. 이진교 교수는 이번 학술대회가 "하회마을의 대표적 볼거리이자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선유줄불놀이의 문화유산 지정과 현대적 활용방안을 위해, 그동안 진행되었던 조사·기록화 사업의 추진 성과를 집약해 논의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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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17) <br> 청자사자향로뚜껑편고려인들의 그 간절한 마음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일찍이 고려의 개경을 방문했던 송나라 서긍(徐兢)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비색(翡色)이라는 단어를 세 번 사용하는데 그 대상이 비색소구(翡色小甌) 과형주존(瓜形酒尊) 산예출향(狻猊出香)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산예출향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이다. "산예출향 역시 비색이다. 위에는 짐승이 웅크리고 앉아 있고 아래에는 벌어진 연꽃 문양이 이를 받치고 있다. 여러 물건 가운데 이 물건만 가장 정교하고 빼어나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산예란 원래 용의 아홉 아들 중 하나로 연기를 좋아하여 앉아 있기를 잘하고 사자의 형태를 하고 있는 상상의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하면 산예출향에 걸 맞는 사자를 장식한 청자 향로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산예출향에 근접한 것으로 자주 거론되는 것 중의 하나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제60호인 청자사자유개향로(靑磁獅子蓋香爐)다. 뚜껑은 사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를 받치고 있는 대좌에는 꽃무늬를 장식하고 있다. 사자는 입을 벌린 채 한 쪽 무릎을 약간 구부린 상태에서 앞을 보고 있는 자세이며 두 눈은 검은 점을 찍고 있다. 몸체에서 피워진 향의 연기가 사자의 몸을 통과한 후 벌려진 입을 통해 내뿜도록 된 구조다. 이 청자사자유개향로는 기형도 기형이지만 유색 또한 비색으로 맑고 깔끔하다.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주목해 볼만한 상품의 청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산예출향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도 사자를 장식한 청자 향로가 한 점 있다. 향을 피우는 몸체는 없지만 둥근 받침 위에 향의 연기를 뿜어내게 속을 비운 사자 형태를 하고 있는 청자 뚜껑이 있는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국보 제60호인 청자사자유개향로와 동일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유색도 녹청의 비색이 곱게 입혀져 있어 서긍이 언급한 비색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색감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청자사자향로뚜껑편은 손상이 있어 수리를 했던 것이다. 도자기 수리에 있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손상 부분을 알 수 있게 나타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충 보아서는 아예 모르도록 정교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 청자사자향로뚜껑편은 후자 쪽으로 이른 바 호마이카 수리라고 해서 고가로 수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점이 못마땅한데다 어느 정도의 손상이 있는 것인지 궁금도 해 수리 부분을 모두 제거해 보았다. 그랬더니 아래턱이 없어지고 꼬리부분이 잘려 나갔는가 하면 다리와 엉덩이 쪽에 뚫린 부분이 있었다. 사자를 지탱하고 있는 받침 부분은 훼손할 수가 없어 그대로 두었는데 여기에는 돌려가며 장식한 음각의 뇌문이 보이고 있다. 청자사자향로뚜껑편의 수리한 부분을 제거한 후 나는 몹시도 즐거웠다. 그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손상이 적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소의 손상이 있기는 하지만 원형의 받침대 위에 몸을 세우고 있는 사자는 금방이라도 사자후를 토해낼 듯 당당하고도 위엄이 있는 모습이 아닌가. 거기에 유색 또한 비색을 보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즐겁고도 감사한 일이랴. 소장 중인 적지 않은 도편 중에서도 그야말로 애지중지해야 할 귀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자는 우리나라뿐이 아니라 중국도 서식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우리나라 공예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와의 관련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자사자향로편 또한 예외는 아니어 불단에 향을 피우기 위해 만들어진 기물은 아니었을까. 비록 향을 피우던 몸체는 없어지고 향을 뿜어내던 사자 뚜껑은 손상이 있지만 그래도 청자사자향로뚜껑편을 보고 있노라면 현세와 내세에 대한 염원이랄까 고려인들의 그 간절한 마음이 이토록 아름다운 형태와 빛깔로 나타난 듯싶어 마음이 숙연해지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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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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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찬미가’ 제1장 작사 배경윤치호 역술 ‘찬미가’에는 서양 찬송가 번역 12편과 애국가류 3편이 수록되어있다. 이 중 애국가 3편은 제1장, 제10장, 제14장에 배치하였다. 이 같은 배치 이유와 각 편의 작사 배경은 주목이 된다. 이 3편은 윤치호의 기독교적 신앙심과 애국심을 배경으로 문학성 발휘와 찬미가의 형식을 빌려 시대정신을 반영한 작품이다. 그럼으로 작품 배경으로서의 작사자 윤치호 생애를 살피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먼저 제1편 ‘KOREA’의 가사를 살펴 작사 계기와 년도를 살피기로 한다. 이를 통해 제14장 현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명확히 할 수 있는 것이다. KOREA Tune America 664 6664 제1 一 우리 황상폐하 텬지일월 같이 만수무강 산 높고 물 맑은 우리 대한뎨국 하나님 도으샤 독립부강 二 길고 긴 왕업은 룡흥강 프른 물 쉬지 안듯 금강 쳔만봉에 날빗 찬란함은 태극기 영광이 비취는 듯 三 비단 같은 강산 봄꽃 가을 달도 곱거니와 오곡 풍등하고 금옥구비하니 아셰아 락토가 이 안인가 四 이천만동포난 한 만 한 뜻으로 직분만다하세 사욕은 버리고 츙의만 압세워 님군과 나라를 보답하세 당시로서는 매우 세련된 노랫말이지 않을 수 없다. 1절과 4절은 당시 찬미가나 애국시가의 내용이지만 2절과 3절은 시적인 표현과 짜임새가 돋보이는 가사이다. 제1절은 황제(황상)와 대한제국의 독립부강을 하나님께 빌었다. 이는 당시 영국 국가의 1절과도 통한다. 제2절은 태극기 영광이 긴 왕업과 같이 하리라는 염원을 표현했다. 국가상징을 통해 국민적 통합의 애국심 고취 의지가 담긴 가사다. 제3절은 대한제국이 금수강산의 아시아의 낙토(樂土)임을 자랑하였다. 국토예찬 역시 상징 조작의 한 방편이다. 제4절은 이천만 동포가 직분을 다하자고 다짐하였다. 대한제국으로의 독립을 기리고 국토를 예찬하는 주제가 명료한 기도문이며 애국가인 것이다. 곡명은 ‘대한제국’(KOREA)이다. 초기에는 대한제국을 ‘Empire of Dai Han’으로 쓰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KOREA’(프랑스어 Corée/러시아어 Корея)로 정한 것을 반영한 것이다. 곡조는 ‘Tune America’, 즉 미국 국가 곡조로 부르라고 하였다. 이는 당시 미국 국가를 영국 국가(God save the Queen) 곡조로 하고, 이를 ‘America’로 표기하고 있었다. 윤치호의 지식과 대한제국의 위상을 고려한 표기이다. 윤치호는 유길준과 유정수와 함께 1881년 16세에 어윤중(魚允中) 수행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몇 개월 후 일본의 계몽사상가이자 기독교도인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가 세운 학교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이 때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 인물과 일본 개화 선구자 후쿠자와(福澤諭吉)·나카무라(中村正直) 등과 교류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옥균의 충고로 주일본 영사관원들로부터 일본어는 물론 영어를 공부했다. 이 덕에 초대 주한 미국공사 푸트(Foote. L. H.)의 통역관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다른 두 사람 보다 1년여를 더 유학하여 1883년 4월까지 머물렀다. 그리고 1884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가 되어 고종과 푸트와 개화당 간의 교량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 고종의 총애를 받는 반면 청국에 대한 조선의 자주권 확립과 조정의 개혁이란 포부를 갖게 되었다. 1885년 1월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했다. 윤치호는 직접 관여는 않았지만 주역들과의 연류 여지로 신변이 위협을 느꼈다. 이 때 고종의 허락과 푸트 공사의 추천서를 지니고 상해로 피신하게 되었다. 여기서 감리교계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체계적인 근대학문을 배웠다. 상해에서 3년 반의 수학을 마치고 중서서원의 후원으로 미국 유학을 하게 되었다. 1888년 9월 상해를 출발, 일본을 거쳐 박영효와 김옥균을 만나고 11월 미국 내슈빌에 도착했다. 밴더빌트(Vanderbilt)대학에 입학, 신학을 전공했다. 이어 1891년 에모리(Emory)대학에서 2년간 인문사회과학을 수료했다. 이 기간 미국사회에 대한 경험을 위해 다양한 아르바이트와 선교활동을 했다. 에모리 대학을 수료하는 1993년까지 두 대학의 대표적인 스승인 조직신학자로 저명한 틸레트 교수와 총창 캔들러(W. A Candler) 교수로부터 정치사회적 의식은 물론 품격 있는 기독교적 인격형성에 영향을 큰 받았다. 특히 캔들러 교수와는 귀국 후의 조선 선교에 대한 약속을 주구 받기도 하였다. 7년여의 미국유학을 마치고 상해에 도착, 잠시 모교의 교수직을 거쳐 1895년 귀국하였다. 즉시 외무협판과 학부협판을 맡았다. 그리고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조선인 축하사절단 대표 민영환의 수행원이 되었다. 이 때 중추원 1등 의관 칙임관 3등에 특별 임명되었다. 대관식 사절 업무를 마치고 홀로 세계여행을 하고 귀국하였다. 1897년 7월 성립된 민중계몽단체 독립협회(1897. 7~1898. 12)에 참가, 서재필, 이상재, 유길준 등과 협회운동에 참여했다. 이 시기 고종은 1897년 2월 연호를 광무라 바꾸고 10월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였다. 10대 말로부터 40대 초까지의 윤치호 생애는 일본, 중국, 미국 유학 기간으로 귀중한 시기였다. 10대말 3년의 일본 유학 기간에는 명치유신의 근대화 과정과 자유민권운동을 체험하고, 20대 초 4년여의 중국 유학 기간에는 중국과 조선의 낙후된 전통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고, 기독교에 입교하여 세례 교인이 된 시기이다. 그리고 미국 유학 기간에는 민주주의와 과학문명에 기초한 성숙한 근대 사회를 체험하였다. 특히 1888년과 1892년 두 번의 대통령 민선 광경을 목격하고, 감옥 수인(囚人)과 흑인지역 선교를 통해 인종 차별을 체감하여 미국의 양면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체험을 바탕으로 조국을 전통 사회로부터 근대 사회로 전환시키려는 강력한 근대 변혁 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 결과로 그는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신념으로 삼게 되었고, 문명개화 노선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윤치호는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애국 찬미가 1편을 작사하여 미국 국가 곡조로 부르자고 하여 그 대한제국 국가로 그 위상을 확정하였다. 그 결과 전체 15편 중 첫 자리 제1장에 위치시킨 것이다. 물론 이는 윤치호 개인의 신앙심과 애국심에 의한 발로로 의미상 위상이지 외부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윤치호는 ‘국가’라거나 ‘애국가’라고 쓴 바가 없고, 찬송가적 표현으로 표기했을 뿐이다. 윤치호로서는 미국을 비롯한 수교국들의 공식 승인을 받아 청국과의 대등한 관계를 선포하고 독립적 국가 운영 의지를 밝힌 대한제국 수립을 찬동하고, 황제의 안녕을 기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앞서 개최한 7월의 505회 조선국 개국기원 독립관 경축행사 강연에서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한 배경이기도 하다. 그래서 애국적 찬미가를 작사하게 되었다. 이 시기 윤치호 만큼 국민통합을 위한 상징 조작(symbol manipulation의 효용성을 인식하고 실천한 이는 달리 없었다. 이런 시대 배경과 윤치호 전반기 생애는 찬미가 제1장 'KOREA' 작사의 배경이 되었고, 이는 당대 선지 지식인의 책무를 다 한 것이었다. 이제 제1장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1장 ‘KOREA’는 윤치호가 1897년 10월 고종황제의 대한제국 선포식을 기념하여 작사했다. 애국가 3편 중 작사 순서로는 두 번째이지만 그 위상이 다른 두 찬미가에 비해 의미를 두어 제1장에 위치시켰다. 신앙고백적 내용이나 당시 위치 등으로 보아 윤치호 작사임이 분명하다. 당시 윤치호로서는 국기 태극기와 국화 무궁화는 있지만 국가는 없다는 것을 고려하여 국가(國歌) 위상의 찬미가를 작사했다. 이후 이 제1장 가사는 국가의 지위를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1902년 공식 국가인 ‘대한제국애국가’ 가사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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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훔볼트포룸에서 한국유물 특별전 '아리 아리랑'주독일 대한민국대사관 한국문화원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및 국립중앙박물관과 함께 '한-독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오는 12일(목) 베를린 훔볼트포룸(Humboldt Forum)에서 한국유물 특별전 '아리 아리랑'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한-독 수교 140주년을 맞아 독일 프로이센 문화유산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유물을 대중에 공개함으로써 일반인들의 생각보다 훨씬 오래된 양국 수교의 역사와 그 의미를 널리 인식시키기 위해 마련됐다. 옛 베를린 궁전에서 선보이는 한국의 유물 전시회가 개최되는 훔볼트포룸은 독일 정부가 과거 식민주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기치로, 예전 프로이센 왕가의 베를린 궁을 재건해 만든 복합 문화공간으로서 한국실을 포함한 아시아미술관과 민족학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특히, 훔볼트포룸 측은 한국실 전시관 운용을 위해, 지난해 10월 <한국실 큐레이터>를 채용한 바 있는데, 이번 행사는 신규 채용된 큐레이터가 한국을 위해 특별히 기획한 첫 번째 전시회다. 한국 민속품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시대 회화 작품들도 선보여 이 전시회에서는 구한말 개화기 이후 독일인들이 수집한 장신구, 생활용품 등 당시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민속품 160여 점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이 특별 대여한 조선시대 회화 작품 4점도 선보인다. 회화작품 중에는 특히, 조선후기 좌의정을 역임한 이성원의 초상과 고종황제 어진(高宗皇帝 御眞)을 그린 바 있는 화가 채용신의 유소심 초상 등 외부 대여가 제한적인 회화유물이 전시될 예정이어서 관람객들이 한국 서민들의 과거 생활상과 함께, 고품격 미술작품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개막식 행사에는 독일 정관계, 문화예술계 주요 인사들도 대거 참여 10월 12일(목) 오후 6시에 개최되는 전시회 개막식은 한국실 큐레이터의 도슨트를 시작으로 김홍균 주독일한국대사의 환영사에 이어, 프로이센 문화유산재단의 헤르만 파칭어 이사장, 훔볼트포룸의 하르트무트 도게로 관장 등의 축사가 예정되어 있는 등 독일 정관계 및 문화계 대표 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다. 주독일 한국문화원은 이번 전시회를 10월 12일부터 내년 3월 말까지 약 6개월 간 운영할 예정인데, 이를 통해 보다 많은 독일 국민이 현대 케이컬쳐의 뿌리인 한국의 전통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특히 훔볼트 포룸은 연간 300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베를린의 ‘박물관 섬’일대에서도 최근 가장 핫한 명소여서 수많은 방문객들이 이번 특별전시장을 찾을 것으로 문화원은 기대하고 있다. 주독일 한국문화원은 이번 특별전을 계기로 훔볼트포룸 내에서 다양한 행사를 보다 활발히 개최하여, 해당 기관 내 한국의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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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116)<br> 백자음각지석편해서체로 음각의 글씨를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로 만든 지석이 중요한 것은 제작 연도를 알 수 있어 편년 자료가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든다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청화흥녕부대부인묘지석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 지석은 윤번(1384~1448)의 부인인 인천이씨(1383~1456)의 묘역에서 출토된 것이다. 인천이씨는 조선 7대 임금인 세조의 장모이자 정희왕후의 모친인 흥녕부대부인으로 지석은 6장이 석함에 담긴 채로 2001년 5월18일 묘역을 사초하던 중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덮개 구실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순백자 지석 2장과 청화 글씨가 새겨진 4장의 백자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태 7년(병자년)인 1456년 7월14일 대부인이 사망 10월8일에 매장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보이는 1456년은 지금까지 알려진 기년명 백자청화의 제작 시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1467년경의 관요 설치 이전에 이미 높은 수준의 백자청화 제작기술이 실재하였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도자기 지석이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는 이 뿐이 아니다. 청자에서 진사(동화)가 사용된 것은 12세기 후반 경으로 중국보다 백여 년이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선조로 넘어 와서는 실물을 볼 수가 없다. 그러다 처음으로 보이는 것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숭정후갑자명(1684년) 백자진사접시형지석 3점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늦어도 17세기 후반 경부터는 백자에서 진사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도자기로 만들어진 지석은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편년 자료로서 귀중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따라서 도자기에 관심이 있다면 어찌 한 점의 지석인들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백자음각지석편은 상단에 장일(張一)이라는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장 중 첫째장임을 알 수 있다. 지석 중에는 한 장짜리도 있지만 여러 장짜리도 있는데 여러 장 중에서는 마지막 장이 중요한 것은 간기가 있어 제작 연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백자음각지석편은 첫째장이어서 제작 연도가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적혀 있는 내용만으로도 여러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는 있을 듯싶다. 백자음각지석편은 유명조선통훈대부사섬시정조공묘지명(有明朝鮮通訓大夫司贍寺正趙公墓誌銘)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주인공은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평양조씨 유형(有亨)이라는 사람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제목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섬시(司贍寺) 정(正)이라는 것이다. 사섬시란 태종1년(1401년)에 설치한 사섬서(司贍署)를 세조6년(1460년)에 개칭한 것으로 저화(楮貨)의 제조 및 지방 노비의 공포(貢布)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다. 여기서 정(正)이란 사섬시에서 가장 높은 정 3품의 직위를 말하는 것으로 백자음각지석편의 주인공은 바로 이 사섬시를 총괄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본문에 들어가서는 평양 조씨 인물들이 몇몇 보이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무래도 6대조 인규(仁規)다. 조인규라고 하면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몽고어 통역관으로 출세해 충선왕의 장인으로 권문세가의 반열에 올라 문하시중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조인규는 이런 사실 외에도 한국 도자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 주목되는 인물이다. 일찍이 화금청자를 원나라 세조에게 가져가 받치며 대화를 나누었던 일화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백자음각지석편은 기본적으로는 세로로 된 장방형이지만 네 모서리를 약간씩 눌러 각을 죽인 형태다. 상당히 무게가 나가는 두께에 평저에는 모래받침을 하고 있다. 세로로 기준을 잡기 위해 가는 선을 긋고 그 위에 해서체로 음각의 글씨를 선명하게 새기고 있다. 관요가 아닌 지방 가마에서 제작한 것으로 깔끔한 맛은 없어도 오히려 묵직해 보이는 것이 위엄과 품위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하면 이 백자음각지석편은 실제 부장했던 것일까. 내가 보기에 첫 장만 남아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과 아래 위가 깨져 분리되어 있는 것을 수리했다는 점, 그리고 일본에서 건너 왔다는 사실 등을 미루어 볼 때 가마터에서 부적격으로 판단되어 폐기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정확한 제작연도는 알 수 없지만 음각의 글씨나 지석의 형태로 볼 때 조선 전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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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오세창 서거 70주년기념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국립중앙박물관은 3·1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이자 우리 서화 연구에 힘쓴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 서거 70주년을 기념해 ‘근대 문예인’으로서 위창 오세창을 집중 조명한다고 12일 밝혔다.. 오는 12월25일까지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에서 그의 생애와 예술 활동, 감식안을 보여줄 수 있는 유물 30건 56점을 선보인다. 근대 격동기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오세창의 생애, 예술 활동, 감식안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조명하는 기회로, 서화실 정기 전시품 교체의 일환으로 전시를 마련했다.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을 살아온 오세창은 16세인 1879년(고종 16) 한어(중국어) 역관譯官을 시작으로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예가 등 여러 직업을 거쳤다. 그의 다양한 이력은 통번역 업무를 담당한 관원 명단을 적은 '통문관 관안'과 1906년 그가 신문사 사장 시기에 발행한 '만세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19년 3·1운동 때 인쇄된 '기미독립선언서'에도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 일로 2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지만, 이후 서화가들과 교류하며 활발한 예술 활동을 펼쳤고, 탁월한 감식안으로 서화 연구에 전념해 ‘근역서화징’과 ‘근묵’ 등 저서를 남겼다. 그가 수집한 서예, 회화, 금석문 등 여러 자료도 전시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근역석묵'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금석문 탑본 78건이 수록돼있다.특히 이 첩에는 469년 고구려가 평양 성벽을 축조하면서 새긴 '고구려 평양성 석편' 탑본이 수록됐다. 석편은 1855년 오경석이 수집해 오세창에게 전해졌다. 이후 일부 결실됐으나 '근역석묵' 탑본은 결실 전 모습으로 가치가 높다. 옛 글씨를 바탕으로 독창적 상형고문과 전서 작품을 제작했던 그의 예술 활동을 보여주는 작품은 '종정와전임모도'다. 그가 금석문을 따라 쓰고 문구와 설명을 적어 만든 작품이다.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그의 작품에는 '전서로 쓴 우리나라 문인의 시'가 있다. 이 작품에는 '영동관란도인(바다 동쪽에서 물결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는 사람)’호가 적혀 있다. 박물관은 이 호는 그가 1902~1906년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일본에 망명했던 때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감식안을 길러 서화를 품평했던 그를 알 수 있는 유물도 볼 수 있다. 서체가 독특해 진위 논란이 있었던 '김정희(1786~1856)가 쓴 '손자孫子''에 그는 이 책을 감식하고 뒷면에 김정희가 제자 신헌을 위해 쓴 것이며, 여러 필체를 참고해 쓴 진품이라는 의견을 남겼다.박물관은 서화Ⅱ실 202-2·3호실에 서화 전시품 16건도 새로 전시했다. 그 중 '책가도8폭병풍'은 책가도로 이름난 화원화가 이형록(1808~1883)이 그린 작품도 있다. 이 작품은 이형록이 1864년 이응록으로 개명한 뒤 제작했음을 병풍 제9폭 그려진 '이응록인' 인장으로 알 수 있는 유물이다.국립중앙박물관은 "오세창은 격변의 시기 민족의 계몽과 독립을 위해 힘썼고, 한편으로는 우리 서화를 연구해 옛 것을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서체를 이룬 근대기 문예인이었다"며 "오세창의 손길이 남아있는 작품들을 감상하며,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이루고자 했던(법고창신法古創新) 그의 노력을 느껴보았으면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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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RM이 되살린 조선왕녀 '활옷' 첫 공개조선의 공주·옹주 등 왕실여성이 없던 활옷(혼례복) 11여점이 한자리에 모인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15일부터 12월 13일까지 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공주, 옹주, 군부인(왕자의 부인) 등 왕실 여성들의 활옷 9점을 포함한 관련 유물 총 110여 점을 선보이는 특별전시 ‘활옷 만개(滿開)-조선왕실 여성 혼례복’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조선 전기 국가기록물에 홍장삼(紅長衫)으로 기록되었던 활옷은 고유 복식의 전통을 이은 긴 겉옷으로, 치마와 저고리 등 여러 받침옷 위에 착용하는 대표적인 조선왕실의 여성 혼례복이다. 사치를 배격했던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화려한 자수, 가장 진한 붉은 빛깔인 대홍(大紅)의 염색, 아름다운 금박 기법 등 많은 노력을 들여 제작했던 만큼 왕실을 넘어 민간 혼례에서도 착용이 허락되었던 옷이기도 하다. 대홍은 8월에 피는 홍화(紅花)로 수십 번의 염색을 통해 얻은 가장 진한 홍색. 진홍(眞紅), 목홍(木紅), 토홍(土紅) 등 다양한 홍색 중 얻는 과정이 까다로운 귀한 색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현존 활옷 가운데 유일하게 착용자가 알려진 ‘복온공주 활옷(1830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등 국내에 전하는 활옷 3점과 미국 필드 박물관(Field Museum), 브루클린 박물관(Brooklyn Museum), 클리블랜드 미술관(The Cleveland Museum of Art),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활옷을 비롯한 국외소장 활옷 6점 등 조선왕실 활옷의 특징을 잘 간직한 작품들이 대거 나왔다. 특히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소장 활옷은 지난해 방탄소년단 RM의 후원을 받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최근 보존처리를 완료한 작품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려보내기 전 국내에서 최초로 선보이는 자리라서 더욱 뜻깊은 전시가 될 것이다. 전시는 총 2부로 구성된다. 먼저, 1부에서는 ▲ 긴 홍색의 옷, 홍장삼(紅長衫)과 활옷 ▲ 가례(嘉禮), 아름다운 왕실의 혼례 ▲ 공주, 궁을 떠나다 의 3개 세부 주제를 통해 왕실 여성들의 의례복, 혼례복과 그에 관한 왕실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왕비, 왕세자빈의 육례(六禮)와 비교하여 간소한 절차로 치렀던 공주, 옹주의 사례(四禮)와 이 중 활옷을 착용했던 동뢰를 각종 문헌과 혼례 물품 등 관련 자료를 통해 소개하였다. 아울러, 유일하게 현존하는 박물관 소장의 대형 왕실 ‘교배석(交拜席)’을 영상으로 선보여 왕실 혼례 핵심 공간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활옷의 자수 무늬를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도록 국립고궁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클리블랜드 미술관 등에서 소장 중인 총 6점의 국내외 활옷과 함께 민간 혼례에서 착용되었던 사진자료 등도 같이 전시된다. 2부 ▲ ‘여러 손길로 정성스레 만든 활옷’에서는 상의원(尙衣院) 등 관청과 장인을 중심으로 온갖 재료를 조달하고 각 재질이나 작업에 따라 세분화되어 완성되는 활옷의 제작과정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소장 활옷’의 보존처리 과정 등을 살펴본다. 또한 활옷 등에 활용되었던 ‘덕온공주 홍장삼 자수본(1837년)’은 조선 왕실 자수의 섬세함과 우수함을 증명해 주는 유물들로서 완성된 활옷과 견주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외에도 여러 받침옷을 착용한 후 겉옷으로 완성되는 활옷의 차림과정을 비롯하여 활옷 제작 장인의 작업과정을 담은 영상, 활옷 자수를 모티브로 한 미디어 아트 등을 상영하고, 활옷에 사용되는 실, 직물과 같은 기본재료로 활옷 작업 공간을 연출하는 등 평소 접근하기 어려웠던 전통 복식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또한 적극행정의 일환으로 특별전시 기간 중에는 활옷의 역사, 제작 방법 등에 대해 전문가에게 배울 수 있는 ‘왕실문화 심층탐구 강연’(성인 대상, 9.20, 10.4.~10.25 중 매주 수요일, 총 5회)과 ‘공주의 웨딩드레스 활옷’(초등학교 1~3학년 어린이 대상, 9.22.~12.8. 매주 금요일, 총 9회) 체험교육도 함께 진행된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국내외에 소재한 활옷 관련 유물과 다양한 자료들을 확인할 수 있는 이번 특별전을 통해 국민이 조선왕실 여성들의 혼례 문화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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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관의 ‘국악-신반’ <13>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정회석 보성소리 <강산제 심청가 완창> 엄청 반가운 음반이다. 거의 4년 만에 선보이는 판소리 완창음반, 정회석 명창이 부르는 보성소리 <강산제 심청가> 4장 음반이다. 정회석 명창은 2008년에 실황녹음으로 악당이반에서 <심청가>(3D)를 출반한바 있다. 15년 만에 선보이는 음반이다. 정회석 명창은 전남 보성 출생으로 부친 정권진 명창, 조부 정응민 명창 등 판소리 가문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판소리와 함께 일상생활을 시작한 명창이다. 명창의 ‘심청가’는 박유전(강산제)-정재근(종증조부)-정권진-정응민-정회석 명창으로 이어지는 보성소리로 2020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음반은 4장 21트랙으로 3시간 52분 담겨져 있다. 해설서에는 명창의 설명과 프로필, 가사가 채록되어 있다. 북은 조용복 고수가 맡았다. 정말 오래간만에 만나는 판소리 완창음반이다. 저물어가는 CD시대, 이 음반이 마지막 완창음반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일청을 권해본다. 1916 하와이 호놀룰루 <애국창가>-인천콘서트챔버- 1902년, 제물포에서 하와이로 향한 발걸음이 한국 이민역사의 시작이다. 초기 하와이 이민자는 인천 출신이 상당수였고 대부분이 감리교 신자였다고 한다. 노래를 부르기 좋아하는 국민성은 타국인 하와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916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는 ‘애국창가’ 악보집이 탄생하였다. 여기에는 제목 그대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노래집에는 타향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 조국의 독립 염원을 담고 순국열사를 추도하기 위해 부른 노래, 우리말을 잊지 않기 위해 부른 노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악보집에 근거하여 출반된 음반이다. ‘국민군가’ ‘애국가’, ‘국문가’ 등 모두 11곡이 수록되어 있다. 인천콘서트챔버, 서양악기 연주자, 성악가 등 많은 분들이 참여하였고 특히 이민으로 건너 간 감리교 신자들을 배출한 내리교회 성가대가 참여한 의미있는 음반이다. 1883년 인천은 타국에 처음 항구를 열었습니다.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음악도 같이 들어왔다. 그 때부터 유입되어 한국의 정서와 만난 음악을 추적하고 새로운 시각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음반을 제작한 인천콘서트챔버의 의도이다.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다. 이 음반은 인천콘서트챔버의 3번째 음반으로 LP음반으로도 출반된 비매품이다. 해설서는 아주 자세하며 음악은 모두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 있다. 고영열 & 존노 <Cantar> 소리꾼 고영열, 테너 존노이 만난 음반이다. 판소리계의 라이징스타'라 불리는 고영열 소리꾼은 퓨전 국악, 크로스오버 등 다양한 분야와 협연하며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피아노 치는 소리꾼'답게 혼자서 창자와 고수 역할을 같이 하는 피아노 병창이 특기이다. 거문고에도 깊은 조예가 있으며 트럼펫도 다룰 줄 안다. 바로크 음악부터 현대음악까지 다양한 음악을 소화하는 테너 존노는 세계적인 오페라전문 잡지에서 "감미로운 테너”, "천부적인 테너”로 극찬을 받았다. 존노는 존스홉킨스 대학교 피바디음악대학 성악과를 수석 졸업하였으며 예일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졸업하는 한편 예일오페라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음반에는 ‘INTRO’, ’TU ERES LA MUSICA QUE TENGO QUE CANTAR’ 등 모두 9곡이 수록되어 있다. 서양노래 위주로 그리스의 유명한 곡 ‘8시에 기차는 떠나고’ 도 들어 있다. 19 * 19 센티 크기의 큰 음반은 화보이다. 포토카드, 포스터카드도 들어 있다. 제작비에 비해 음반은 착한 가격으로 출반되었다. 두 사람의 팬이라면 꼭 소장할 것 같다. 청우 정창관 헌정음반 <그리운 고향, 새로운 아리랑> 이 음반은 (사)경기음악연구회(이사장 전병훈)가 필자에게 헌정한 음반이다. 이 음반에는 필자와 관련된 ‘정창관아리랑’(2버전), ‘창녕아리랑’(3버전)과 ‘창녕양파타령’(4버전) 등 총 9곡이 수록되어 있다. 민족의 노래, 아리랑, 수많은 아리랑이 있다. 이제 개인도 아리랑을 가지는 시대를 열기 위해 필자가 만든 아리랑이다. 곡은 필자가 발굴한 1896년 에디슨 원통음반에 녹음한 ‘유학생아리랑’을 전병훈 소리꾼이 편곡하고 필자가 편사하여 담은 ‘정창관아리랑’이다. 남창, 여창, 2가지 버전으로 담았다. ‘창녕아리랑’, 2016년 필자가 고향을 위해 작곡 의뢰하여 만든 아리랑으로 고향에 헌정한 아리랑이다. 1930년 조선민요연구라는 논문에 ‘창녕아리랑’이 나타나지만 지금은 부르는 이가 없어 창작한(작곡 함현상) 아리랑이다. 가사는 고향의 풍광을 담았다. 여장, 청소년남창, 청소년여창, 3가지 버전으로 담았다. 경남 창녕은 양파의 시산지로 어린 시절 기억엔 고향에서 양파가 엄청 많이 생산되었다. 지금은 다른 지역에서 양파가 더 많이 생산되고 있다. 고향의 양파를 널리 알리기 위해 필자가 작곡(함현상)을 의뢰하여 창작한 ‘창녕양파타령’이다. 가사는 양파의 시산지인 대지면에 거주하고 성기각 시인이 맡았다. 남창, 여창-표준어, 여창-창녕사투리, 청소년-표준어, 4가지 버전으로 담았다. 필자에게 헌정된 디지털음반으로 이 음원들은 음원사이트에 쉽게 구할 수 있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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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류 특별전 "희귀 LP 음반으로 보는 한국현대사"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류 특별전 연계 토크콘서트가 9월2일 박물관 3층 다목적홀에서 열린다.이번 토크콘서트에서 근현대건축사를 전공한 김정동 목원대 교수가 자신이 소장한 희귀 LP 음반을 통해 한국현대사를 전한다.김 교수는 본인 음악 편력 뿐아니라, 소장 음반 중 엄선한 음반 66개의 레코드재킷 사진과 수록곡을 해방, 6·25전쟁, 새조국건설과 수출, 남/북의 노래, 88올림픽노래 등 총 7개 주제로 분류해 현대사를 이야기한다.소개되는 LP 음반 중 '종점/잘있거라 日本땅 : 이봉조 작곡집', '잘있거라 東京 : 임화춘 vs 신화자' 음반이 희소성이 있다. 현대사측면에서는 이승만대통령의 제2대 대통령 취임식 기념사가 수록된 '싸워라 이겨라 고국동포여!' 음반이 주목할 만하다. 강연 후 이어지는 공연에 한민국역사박물관 클래식공연단이 편곡한 정훈희의 안개, BTS의 IDOL, 클래식 1곡을 연주한다.오는 9월3일 막을 내리는 한류특별전은 오는 10월 초 문경석탄박물관에서 지역순회전으로 다시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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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진방송, 서울국제사진전 수상 작품집 전 국민에 무료 배포한국사진방송이 8월 21일 ‘서울국제사진공모전’ 수상 작가 시상식 및 ‘대한민국국회문화예술초대전’ 개막식과 출판 기념회를 국회의원회관에서 거행했다. 서울국제사진전 SEOUL KOREA International Photographic Exhibition 2023(대회장 김용열, 총괄 류신우)은 세계 44개국에서 보내온 2050여점 작품 가운데 100여점의 입상 작품을 엄정하게 선정, 7월 22일 수상작 발표를 하고 이날 국회의원회관에서 김용열 대회장이 수상 작가들에게 메달 및 리본 등을 시상했다. 또 엄태영 국회의원실, 비채나세계운동연합(총재 윤재환), 한국사진방송이 주최한 대한민국국회문화예술초대전이 이날부터 8월 24일까지 회화, 민화, 사진, 시화 퍼포먼스 등 다양한 예술 작품 80여점을 의원회관 로비에서 전시해 많은 관람객의 발길을 사로잡으며 민화·사진 작품들이 쏠쏠하게 팔리기도 했다. The highest quality Magazine ‘예술지존(藝術至尊, 프레지던트 이용만)’은 국회 초대전 기념 특별판으로 세계 최고급 양장제본 작품집(정가 6만원, 230페이지)으로 2500권이 제작돼 이날 출판 기념식을 겸했다. 예술지존은 서점, 도서관 등을 통해 널리 배포되고 구글 책방을 통해서는 전자책으로 판매될 예정이다. 한국사진방송은 위 행사들의 성공 기념으로 서울국제사진전의 세계적인 PDF 입상 작품집과 입선작 모음, 싱가포르·중국·브라질·마케도니아·인도·슬로베니아 등 세계적인 국제사진 입상 작품집을 전 국민에게 무료로 배포, 이 시대 최고의 사진 작품들을 소장함으로써 예술과 문화에 대한 안목을 높이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 이메일로 신청하면 무료로 받아볼 수 있다. 한국사진방송은 사진 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온라인 매체다. 현재 약 1만명의 예술가가 모여 세미나, 촬영, 출판, 전시 기획 등 오프라인 활동과 한국 모든 예술가의 전시회, 작품, 행사 및 근황 등 문화 예술을 중심으로 널리 뉴스를 내고 있다. 1984년 창립한 유서 깊은 동아리 ‘산영사진연구회’를 모태로 뉴스 기능을 추가해 2010년 2월 언론사로 등록하고, 한국사진방송으로 개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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