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도자의 여로(116) 백자음각지석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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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116)
백자음각지석편

  • 특집부
  • 등록 2023.10.06 07:30
  • 조회수 25,329

해서체로 음각의 글씨를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로 만든 지석이 중요한 것은 제작 연도를 알 수 있어 편년 자료가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든다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청화흥녕부대부인묘지석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 지석은 윤번(1384~1448)의 부인인 인천이씨(1383~1456)의 묘역에서 출토된 것이다. 인천이씨는 조선 7대 임금인 세조의 장모이자 정희왕후의 모친인 흥녕부대부인으로 지석은 6장이 석함에 담긴 채로 2001년 5월18일 묘역을 사초하던 중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덮개 구실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순백자 지석 2장과 청화 글씨가 새겨진 4장의 백자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태 7년(병자년)인 1456년 7월14일 대부인이 사망 10월8일에 매장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보이는 1456년은 지금까지 알려진 기년명 백자청화의 제작 시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1467년경의 관요 설치 이전에 이미 높은 수준의 백자청화 제작기술이 실재하였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도자기 지석이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는 이 뿐이 아니다. 청자에서 진사(동화)가 사용된 것은 12세기 후반 경으로 중국보다 백여 년이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선조로 넘어 와서는 실물을 볼 수가 없다. 그러다 처음으로 보이는 것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숭정후갑자명(1684년) 백자진사접시형지석 3점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늦어도 17세기 후반 경부터는 백자에서 진사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도자기로 만들어진 지석은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편년 자료로서 귀중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따라서 도자기에 관심이 있다면 어찌 한 점의 지석인들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백자음각지석편은 상단에 장일(張一)이라는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장 중 첫째장임을 알 수 있다. 지석 중에는 한 장짜리도 있지만 여러 장짜리도 있는데 여러 장 중에서는 마지막 장이 중요한 것은 간기가 있어 제작 연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백자음각지석편은 첫째장이어서 제작 연도가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적혀 있는 내용만으로도 여러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는 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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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음각지석편(편고재 소장) 가로x세로x두께 13.5x25x2.5Cm

 

백자음각지석편은 유명조선통훈대부사섬시정조공묘지명(有朝鮮通訓大夫司贍寺正趙公墓誌銘)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주인공은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평양조씨 유형(有亨)이라는 사람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제목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섬시(司贍寺) 정(正)이라는 것이다. 사섬시란 태종1년(1401년)에 설치한 사섬서(司贍署)를 세조6년(1460년)에 개칭한 것으로 저화(楮貨)의 제조 및 지방 노비의 공포(貢布)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다. 여기서 정(正)이란 사섬시에서 가장 높은 정 3품의 직위를 말하는 것으로 백자음각지석편의 주인공은 바로 이 사섬시를 총괄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본문에 들어가서는 평양 조씨 인물들이 몇몇 보이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무래도 6대조 인규(仁規)다. 조인규라고 하면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몽고어 통역관으로 출세해 충선왕의 장인으로 권문세가의 반열에 올라 문하시중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조인규는 이런 사실 외에도 한국 도자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 주목되는 인물이다. 일찍이 화금청자를 원나라 세조에게 가져가 받치며 대화를 나누었던 일화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백자음각지석편은 기본적으로는 세로로 된 장방형이지만 네 모서리를 약간씩 눌러 각을 죽인 형태다. 상당히 무게가 나가는 두께에 평저에는 모래받침을 하고 있다. 세로로 기준을 잡기 위해 가는 선을 긋고 그 위에 해서체로 음각의 글씨를 선명하게 새기고 있다. 관요가 아닌 지방 가마에서 제작한 것으로 깔끔한 맛은 없어도 오히려 묵직해 보이는 것이 위엄과 품위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하면 이 백자음각지석편은 실제 부장했던 것일까. 내가 보기에 첫 장만 남아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과 아래 위가 깨져 분리되어 있는 것을 수리했다는 점, 그리고 일본에서 건너 왔다는 사실 등을 미루어 볼 때 가마터에서 부적격으로 판단되어 폐기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정확한 제작연도는 알 수 없지만 음각의 글씨나 지석의 형태로 볼 때 조선 전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