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김연갑의 애국가 연구] (20) ‘찬미가’ 제1장 작사 배경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연갑의 애국가 연구] (20) ‘찬미가’ 제1장 작사 배경

  • 특집부
  • 등록 2023.10.09 11:11
  • 조회수 7,938

윤치호 역술 ‘찬미가’에는 서양 찬송가 번역 12편과 애국가류 3편이 수록되어있다. 이 중 애국가 3편은 제1장, 제10장, 제14장에 배치하였다. 이 같은 배치 이유와 각 편의 작사 배경은 주목이 된다. 이 3편은 윤치호의 기독교적 신앙심과 애국심을 배경으로 문학성 발휘와 찬미가의 형식을 빌려 시대정신을 반영한 작품이다. 그럼으로 작품 배경으로서의 작사자 윤치호 생애를 살피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먼저 제1편 ‘KOREA’의 가사를 살펴 작사 계기와 년도를 살피기로 한다. 이를 통해 제14장 현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명확히 할 수 있는 것이다.

 

KOREA

Tune America 664 6664 제1

 

一 우리 황상폐하

텬지일월 같이 만수무강

산 높고 물 맑은 우리 대한뎨국

하나님 도으샤 독립부강

 

二 길고 긴 왕업은

룡흥강 프른 물 쉬지 안듯

금강 쳔만봉에 날빗 찬란함은

태극기 영광이 비취는 듯

 

三 비단 같은 강산

봄꽃 가을 달도 곱거니와

오곡 풍등하고 금옥구비하니

아셰아 락토가 이 안인가

 

四 이천만동포난

한 만 한 뜻으로 직분만다하세

사욕은 버리고 츙의만 압세워

님군과 나라를 보답하세

   

화면 캡처 2023-11-26 231541.png
[국악신문] 니콜라이2세 대관식 참석한 대한제국 사절단 (1896년) 사진은 앞줄 왼쪽 2번째 영어통역관 윤치로.3번째 대한제국사절단장 민영환 (사진-국악신문 소장본)

 

당시로서는 매우 세련된 노랫말이지 않을 수 없다. 1절과 4절은 당시 찬미가나 애국시가의 내용이지만 2절과 3절은 시적인 표현과 짜임새가 돋보이는 가사이다. 제1절은 황제(황상)와 대한제국의 독립부강을 하나님께 빌었다. 이는 당시 영국 국가의 1절과도 통한다. 제2절은 태극기 영광이 긴 왕업과 같이 하리라는 염원을 표현했다. 국가상징을 통해 국민적 통합의 애국심 고취 의지가 담긴 가사다. 제3절은 대한제국이 금수강산의 아시아의 낙토(樂土)임을 자랑하였다. 국토예찬 역시 상징 조작의 한 방편이다. 제4절은 이천만 동포가 직분을 다하자고 다짐하였다. 대한제국으로의 독립을 기리고 국토를 예찬하는 주제가 명료한 기도문이며 애국가인 것이다.

 

곡명은 ‘대한제국’(KOREA)이다. 초기에는 대한제국을 ‘Empire of Dai Han’으로 쓰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KOREA’(프랑스어 Corée/러시아어 Корея)로 정한 것을 반영한 것이다. 곡조는 ‘Tune America’, 즉 미국 국가 곡조로 부르라고 하였다. 이는 당시 미국 국가를 영국 국가(God save the Queen) 곡조로 하고, 이를 ‘America’로 표기하고 있었다. 윤치호의 지식과 대한제국의 위상을 고려한 표기이다.


윤치호는 유길준과 유정수와 함께 1881년 16세에 어윤중(魚允中) 수행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몇 개월 후 일본의 계몽사상가이자 기독교도인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가 세운 학교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이 때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 인물과 일본 개화 선구자 후쿠자와(福澤諭吉)·나카무라(中村正直) 등과 교류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옥균의 충고로 주일본 영사관원들로부터 일본어는 물론 영어를 공부했다. 이 덕에 초대 주한 미국공사 푸트(Foote. L. H.)의 통역관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다른 두 사람 보다 1년여를 더 유학하여 1883년 4월까지 머물렀다. 그리고 1884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가 되어 고종과 푸트와 개화당 간의 교량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 고종의 총애를 받는 반면 청국에 대한 조선의 자주권 확립과 조정의 개혁이란 포부를 갖게 되었다.

 

1885년 1월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했다. 윤치호는 직접 관여는 않았지만 주역들과의 연류 여지로 신변이 위협을 느꼈다. 이 때 고종의 허락과 푸트 공사의 추천서를 지니고 상해로 피신하게 되었다. 여기서 감리교계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체계적인 근대학문을 배웠다. 상해에서 3년 반의 수학을 마치고 중서서원의 후원으로 미국 유학을 하게 되었다. 1888년 9월 상해를 출발, 일본을 거쳐 박영효와 김옥균을 만나고 11월 미국 내슈빌에 도착했다. 밴더빌트(Vanderbilt)대학에 입학, 신학을 전공했다. 이어 1891년 에모리(Emory)대학에서 2년간 인문사회과학을 수료했다. 이 기간 미국사회에 대한 경험을 위해 다양한 아르바이트와 선교활동을 했다.

 

화면 캡처 2023-11-26 231507.png
[국악신문] 1930년대 초 윤치호 가족 사진. (사진-국악신문 소장본)

 

에모리 대학을 수료하는 1993년까지 두 대학의 대표적인 스승인 조직신학자로 저명한 틸레트 교수와 총창 캔들러(W. A Candler) 교수로부터 정치사회적 의식은 물론 품격 있는 기독교적 인격형성에 영향을 큰 받았다. 특히 캔들러 교수와는 귀국 후의 조선 선교에 대한 약속을 주구 받기도 하였다.

 

7년여의 미국유학을 마치고 상해에 도착, 잠시 모교의 교수직을 거쳐 1895년 귀국하였다. 즉시 외무협판과 학부협판을 맡았다. 그리고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조선인 축하사절단 대표 민영환의 수행원이 되었다. 이 때 중추원 1등 의관 칙임관 3등에 특별 임명되었다. 대관식 사절 업무를 마치고 홀로 세계여행을 하고 귀국하였다. 1897년 7월 성립된 민중계몽단체 독립협회(1897. 7~1898. 12)에 참가, 서재필, 이상재, 유길준 등과 협회운동에 참여했다. 이 시기 고종은 1897년 2월 연호를 광무라 바꾸고 10월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였다.

 

10대 말로부터 40대 초까지의 윤치호 생애는 일본, 중국, 미국 유학 기간으로 귀중한 시기였다. 10대말 3년의 일본 유학 기간에는 명치유신의 근대화 과정과 자유민권운동을 체험하고, 20대 초 4년여의 중국 유학 기간에는 중국과 조선의 낙후된 전통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고, 기독교에 입교하여 세례 교인이 된 시기이다. 그리고 미국 유학 기간에는 민주주의와 과학문명에 기초한 성숙한 근대 사회를 체험하였다. 특히 1888년과 1892년 두 번의 대통령 민선 광경을 목격하고, 감옥 수인(囚人)과 흑인지역 선교를 통해 인종 차별을 체감하여 미국의 양면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체험을 바탕으로 조국을 전통 사회로부터 근대 사회로 전환시키려는 강력한 근대 변혁 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 결과로 그는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신념으로 삼게 되었고, 문명개화 노선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윤치호는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애국 찬미가 1편을 작사하여 미국 국가 곡조로 부르자고 하여 그 대한제국 국가로 그 위상을 확정하였다. 그 결과 전체 15편 중 첫 자리 제1장에 위치시킨 것이다. 물론 이는 윤치호 개인의 신앙심과 애국심에 의한 발로로 의미상 위상이지 외부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윤치호는 ‘국가’라거나 ‘애국가’라고 쓴 바가 없고, 찬송가적 표현으로 표기했을 뿐이다.

 

윤치호로서는  미국을 비롯한 수교국들의 공식 승인을 받아 청국과의 대등한 관계를 선포하고 독립적 국가 운영 의지를 밝힌 대한제국 수립을 찬동하고, 황제의 안녕을 기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앞서 개최한 7월의 505회 조선국 개국기원 독립관 경축행사 강연에서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한 배경이기도 하다. 그래서 애국적 찬미가를 작사하게 되었다. 이 시기 윤치호 만큼 국민통합을 위한 상징 조작(symbol manipulation의 효용성을 인식하고 실천한 이는 달리 없었다.

 

이런 시대 배경과 윤치호 전반기 생애는 찬미가 제1장 'KOREA' 작사의 배경이 되었고, 이는 당대 선지 지식인의 책무를 다 한 것이었다. 이제 제1장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1장 ‘KOREA’는 윤치호가 1897년 10월 고종황제의 대한제국 선포식을 기념하여 작사했다. 애국가 3편 중 작사 순서로는 두 번째이지만 그 위상이 다른 두 찬미가에 비해 의미를 두어 제1장에 위치시켰다. 신앙고백적 내용이나 당시 위치 등으로 보아 윤치호 작사임이 분명하다. 당시 윤치호로서는 국기 태극기와 국화 무궁화는 있지만 국가는 없다는 것을 고려하여 국가(國歌) 위상의 찬미가를 작사했다. 이후 이 제1장 가사는 국가의 지위를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1902년 공식 국가인 ‘대한제국애국가’ 가사에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