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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고창 동리대상에 박양덕 명창 선정국내 판소리 분야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동리대상에 박양덕 명창이 선정됐다.8일 전북 고창군 동리대상 심사위원회는 판소리 진흥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된 박양덕 명창을 ‘제31회 동리대상’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박양덕 명창은 1947년 전남 고흥출신으로 11세때 박복선에게 흥보가를 배우고, 18세때 김소희(1917-1995, 고창출신)에게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를 배웠다.이후 정광수, 박초월에게 수궁가를 배우고 박봉술에게 적벽가, 수궁가를 배웠다. 성우향에게 심청가를 남해성에게 수궁가를 이수 받았다.또 제17회 남원춘향제 전국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1987년 수궁가 완창 발표회를 시작으로 흥보가, 심청가 완창을 12차례나 했다.박양덕 명창은 국립민속국악원 예술감독, 남원시립국악단 단장을 역임했다. 한국판소리보존회 남원지부장에 재직하며 제자를 양성하고 있다. 2003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로 인정됐다.동리대상은 고창군과 (사)동리문화사업회가 동리 신재효 선생의 문화예술사적 업적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제정한 상이다.판소리 진흥에 업적을 남긴 사람이나 단체 등을 선정해 매년 상장과 1500만원의 상금을 수여하는 국내 판소리 부문 최고 권위의 상이다.올해 동리대상 시상식은 오는 11월 6일 고창 동리국악당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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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반] 정창관의 신보유람 & 명반유람 54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가야금연주자 김명신(1951~ )은 일찍이 부모님의 영향으로 국악과 인연을 맺었다. 1967년 당시 최고 권위의 제1회 5.16 민족상 음악부문 가야금 우수상을 수상하며 장래가 촉망되는 연주자였다. 김윤덕, 성금연 선생에게 가야금산조를 박귀희 선생에게 가야금병창을, 한영숙 선생에게 춤을 사사하면서 기악, 소리, 춤 등 수준 높은 기예를 익혔다.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 시절에는 대학축제에서 메이퀸으로 선발될 만큼 미모도 출중했다. 이 음반은 1972년 4월에 녹음한 것이다. 그 뒤 8월에 김소희, 박귀희, 이영희 명인 등과 독일 뮌헨올림픽 공연 및 유럽, 동남아 등 24개국 순회공연을 마지막으로 결혼 후 국악계를 떠났다. 20대에 한 장의 음반만을 남기고 떠난 것이다. 그래서 음반명이 <김명신, 갓 스물에 숨어버린 가야금산조>가 된 것이다. 1972년 대도레코드에서 LP음반으로 출반할 때는 ‘김정아’라는 예명으로 소개되었다. 음반에는 ‘김윤덕류’와 ‘성금연류 가야금산조’가 실려 있다. 긴 산조가 아닌 17-18분의 짧은 산조다. 가락 한 올 한 올 마디마디에 젊음과 패기가 서려있다. 각기 성격이 다른 두 바탕 산조의 깊은 맛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완벽에 가까울 만큼 마음껏 발산하고 있다. 당시에는 21살에 가야금산조 음반 출반은 대단한 기록이었다. 녹음기사의 객기로 가야금소리가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왔다 갔다 하지만, 애호가들은 날아다니는 가야금이라 여기고 두 바탕의 산조를 만끽하고 있다. 반주는 장덕화(1942~2017) 명고가 맡았다. 명고의 첫 번째 산조 반주 녹음이다. 이 음반은 잊혀 질 뻔한 귀한 명반이다. 한 개인이 LP음반으로 듣고 가야금산조가 너무 좋아 재출반하기 위해 3년 동안 연주자를 찾아 헤맸고, 어렵게 설득한 끝에 CD음반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출반되고 연주자를 뵌 적이 있다.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생활을 마치고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연주자는 가야금을 다시 연주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다. 만약 김명신 연주자가 연주를 계속 했더라면 지금의 가야금산조계의 판도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현재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음반이다. 영어 해설도 수록되어 있어 외국인에게 선물로도 좋은 산조음반이다. 반가에 꼭 비치해두기를 권하는 명반이다. 관련 음반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TOPCD-048&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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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동리국악당서 ‘동학선봉, 재인부대의 울림’ 무료 공연전북 고창군이 "동학선봉, 재인(才人)부대의 울림”을 주제로 오는 11일 오후 3시 고창 동리국악당에서 2021년 동리국악 테마공연 두 번째 무대를 선보인다.이번 공연은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북과 꽹과리만을 들고 농민군 선봉에 섰던 재인(才人)부대원의 넋을 기리는 추모공연으로 고창군이 주최하고 (사)동리문화사업회 주관과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고창군지부 후원으로 열린다.공연은 ▲새로운 세상으로 일어나라 ▲재인부대의 함성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등 4장으로 구성됐다.만정 김소희 명창의 전라도 산타령을 개사한 "전라도 아리랑”, 우리네 고달픈 삶에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함께 그 꿈을 이루어 나가자는 의미를 담은 노래로 동리정사예술단이 마지막 대미를 장식한다.군 관계자는 "동학선봉, 재인(才人)부대의 울림으로 우리가 재인부대의 후예임을 더욱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장기화 되는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로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지만, 동리국악 테마공연을 통해 우리의 소리를 감상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한편 안전한 공연관람을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지침에 따라 관객 발열체크, 문진표 작성, 개인 손 소독 및 전 관객 마스크 착용 의무화, 특별방역 및 주기적 환기, 객석 거리두기 시행 등 철저한 자체 방역수칙을 준수해 진행된다.관람료는 선착순 무료(객석 거리두기 객석 170석 오픈)이며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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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최고 권위 ‘동리대상’, 수상자 후보 모집판소리의 성지는 고창이다. 매년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 선생의 문화예술사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1년부터 고창군과 (사)동리문화사업회(이만우 이사장)은 동리대상을 제정하였다. 판소리 진흥에 크게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하여 시상해 왔다. 동리문화사업회는 구 동리연구회를 모태로 창립한 이후 판소리 연구 활동과 전국어린이 왕중왕 대회, 대한민국 판소리 한마당 등의 사업으로 판소리 보급과 대중화에 앞장서 왔다. 판소리 사설 여섯마당을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 선생의 유업을 계승․발전 시키고자 제정된 상이다. 판소리 진흥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판소리 창자, 고수, 연구자나 법인단체를 선정하여 동리 대상을 시상하고자 수상 후보자를 공개 모집한다. 제31회 동리대상 모집기간은 9월 13일부터 30일까지이다. 동리대상은 심사위원회 비공개 토론 무기명 투표로 수상자를 선정한다. 제31회 동리대상 시상식은 오는 11월 6일 토요일 오후2시 동리국악당에서 열리며 수상자와 제자 등이 꾸미는 축하공연도 함께할 예정이다. 지난해 동리대상을 수상한 박계향 명창은 1987년 제13회 전주대사습놀이 장원(대통령상)으로 명창 반열에 오른 후, 후학 양성과 각종 공연 등으로 판소리 보존과 전승활동에 공헌한 공로로 수상했다. 고창군은 지난해 ‘제30회 동리대상 심사위원회(위원장 정병헌)’를 개최해 전국에서 접수한 4명의 후보자 가운데 박계향 명창을 동리대상으로 최종 선정했다.박계향 명창(1941년생)은 목포에서 태어났다. 9세 때 우연히 임방울 ‘협률’ 단체의 공연 춘향가를 보고, 장월중선의 국악원에서 판소리를 접하게 된다. 이후 보성 정응민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춘향가와 심청가를 사사 받았다. 이어서 박초월 선생에게서는 수궁가를, 김소희 선생에게서는 흥보가를 사사 받아 판소리 다섯 바탕을 익혔다. 박동진 선생의 지도로 판소리 예능인으로 명성을 쌓아나갔다.40대초부터 20여 년간 인사동에 판소리 학원을 개원해 후학을 양성해 왔다. 2012년부터는 인천에서 판소리 전승과 보급을 위해 판소리보존회 인천지부를 개설, 현재까지 활동해 오고 있다. 국내·외 주요 공연에서 판소리를 세계에 널리 알려오고 있다. 접수처는 전북 고창군 고창읍 모양성로 11길 고창문화의전당(063-560-8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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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기록, 대단한 업적, ‘아리랑 3천곡’ 올렸다음반에 수록된 ‘이 세상의 모든 아리랑을..’이라는 슬로건으로 아리랑 음원만 올리고 있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정창관의 아리랑’ 채널, 2018년 4월에 개설하여 3년 4개월 만에 3,000곡의 아리랑 음원을 올려놓았다. 국악CD음반을 수집·정리(정창관의 국악CD음반세계:www.gugakcd.kr)있는 정창관 선생은 아리랑이 2012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아리랑을 체계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 채널을 개설하게 되었다. 채널에는 아리랑 음원을 코드화하고 68개의 재생 목록을 활용하여 같은 아리랑들은 묶어 놓았다. 먼저 무슨 아리랑인지 잘 구분하지 못하는 아리랑 초보자들은 ‘N:아리랑입문’ 재생 목록으로 묶은 아리랑을 감상하면 된다. 다음 ‘A:주요아리랑’을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여기에는 1896년 7월 24일 미국 워싱톤에서 녹음하여 에디슨 원통음반에 수담은 한민족 최초의 아리랑 3곡, 상업용 음반으로는 최초로 확인되는 1913년 ‘경성란란타령’, 1916년 독일에서 원통음반과 디스크음반에 담은 ‘고려인아리랑’ 6곡, 1926년 최초의 ‘밀양아리랑’,이 소개된다. 학술적으로 주목해야 할 곡명은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 불렀던 아리랑이 처음 소개되는 1929년 ‘영화설명 아리랑’,이다. 1934년 최초의 ‘진도아리랑’은 김소희 명창의 인터뷰와 같이 올라가 있다. 광복 이후 1947년 최초의 아리랑, 1968년 최초의 ‘해주아리랑’ 등 30곡이 묶어져 있다. 이 후에는 자기가 관심있는 아리랑을 재생 목록을 참고 삼아서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목록은 ‘S코드’로 묶은 특별재생목록이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에 금지된 아리랑 4곡, 6.25전쟁시의 해외아리랑 6곡 등 특별한 아리랑들이 테마별로 묶어져 있다. 일제강점기의 아리랑 유성기음반은 150종 정도인데 110종이 ‘CA-SP아리랑(1945년 이전)’으로 올라가 있다. 현재 운영자가 수집한 모든 국악CD음반에 수록한 아리랑은 거의 소개되어 있다. 운영자는 대중가요, 한국가곡, 해외에서 출반된 모든 아리랑을 망라한다면 아리랑 음원은 약 5,000곡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정창관은 "앞으로 음반을 수집하여 올려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최대한 노력하여 올린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3,000곡의 목록은 곧 정리하여 공개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네티즌은 "어느 국가기관도, 어느 아리랑단체도 시도하지 못한 일을 외부의 지원 없이 혼자 달성한 작업으로 이 이상의 아리랑을 들을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에 없다"라고 전했다. 이 소식에 국악관련 표상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이무성 화백은 "이 기록을 도자기에 새겨 영구 기념 하겠다”고 밝혔다.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정은하 회장은 "아리랑계의 경사입니다. 코로나가 아니라면 큰 잔치라도 벌려야 하는데 아쉽습니다. 대신 모든 회원들을 대신하여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라고 했다. 또한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는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 등제를 준비하자는 제안을 해오기도 했다. 한편 정창관 선생은 이를 기념하는 공연을 10월중으로 예정했는데, 코로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가 고민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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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문화 기행(5)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판소리가 유네스코 지정 인류 구전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된 것은 2003년 11월 7일이다. 2001년 종묘 제례 및 종묘 제례악이 지정되고 나서 두 번째 맞이한 경사였다. 이에 앞서 1964년 다섯 번째로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그만큼 판소리가 갖는 국내외적 위상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유네스코 지정 판소리의 영문명은 'Pansori epic chant'이다. 에픽은 장편서사시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고 찬트는 구송(口誦)이라는 점을 강조한 번역이다. 춘향전 심청전 등 예로부터 전해져 온 장편 이야기를 노래로 꾸민 장르임을 분명하게 해두었다. 또 챈트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비롯해 불교의 독경이나 범패 등 성가 혹은 송가를 말하는 것이어서 반복적인 곡조로 부르는 노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판'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 또는 그 장면을 말한다. 처지, 판국, 형편 등의 뜻을 지닌 말이다. '마당'이라고도 하고 '장(場)'이라고도 한다. 판소리가 마당에서 비롯된 예술 양식임을짐작하게 해준다. 따라서 판소리는 어떤 마당에서 옛이야기를 지어 부르는 노래 양식의 하나라고 정의할 수 있고, 여러 과정과 변모를 거듭해 오늘날 독립된 음악 양식으로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판소리의 음악적 기원을 전라도 무가로 여기는 연구자들의 주장이 '무가 기원설'이다. 하지만 고전소설이라고 하는 거대 서사가 있고, 판소리꾼으로 불리는 광대들의 활동 내력이있다. 문학적 지형과 음악적 재구성을 두루 살펴야 실체에 더 접근할 수 있다. 두부 자르듯 이것이다 저것이다 일방적인 규정을 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전라도의 억양과 말하기 방식, 노래하고 의사소통하는 방식 등이 주요하게 채택된 장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거창하게 판소리 미학까지 따질 필요도 없이 소리 자체가 그렇다. 예컨대 '니 광한루 댕개왔노!'라고 아니리를 하면 어색한 것과 같은 이치다. 고창의 바닷가에서 나들이를 시작한다. 우리 판소리의 자존심이라는 김소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판소리를 정리한 신재효의 고을이기도 하다.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후포는 지금도 줄포, 우포, 사포 등 포구 혹은 옛 포구들에 쌓여 줄포만을 형성하는 지류 중 하나다. 김소희 생가는 마을로부터 포구 쪽으로 분리되어 있다. 지금은 바닷물 길이 끊겨버렸지만 고대로 거슬러 오를수록 서남해 물길과 맞닿는 공간이다. 후포의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동학혁명의 주요 인물인 전봉준이 나고 자랐던 고을에 이르고 판소리를 정리하고 가르쳤던 신재효의 고을 고창읍에 이른다. 법성포와 변산반도를 눈앞에 두고 줄포만을 나온 배들은 서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을 거쳐 영산강에 닿고 나주에 닿는다. 김소희는 나중에 박석기가 마련한 담양 지실마을 초당에서 박동실로부터 판소리를 연마하게 되지만 광주가 영산강의 상류라는 점에서 그 문화적 맥락은 서남해 바닷길과 무관하지 않다. 서편제와 여성 판소리꾼의 탄생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흥선 대원군과 신재효의 드라마틱한 삶도 어쩌면 이 물길들을 통해서 탄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재효의 아버지가 수도 한양에건정(말린 물고기) 물류사업을 하며 큰돈을 벌었다는 점, 신재효 땅을 밟지 않고는 고창 땅을 지날 수 없었다는 항간의 이야기도 조선 후기 판소리 후원자들의 지형을 설명해주는 풍경들이다. 고창에서 물길을 따라 내려오면 영광, 함평, 무안, 목포를 거쳐 나주 영산포에 이른다. 서편제의 확산이 사실상 나주사람 정재근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을인정한다면 이 물길을 더욱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나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서편의 판소리는 광주를 비롯해 여러 바닷길을돌며 한 지형을 형성했다.근대기 진도와 목포에서 형성한 판소리의 맥락도 눈여겨봐야할 대목이다.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목포의 장월중선과 안향련, 진도의 신치선과 이병기를 기억해둘 일이다. 다시 뱃머리를 돌려 해남, 완도, 강진, 장흥, 고흥으로 향하면 우리나라 판소리의 거대 지류와 형성사를 만나게 된다. 우리 판소리를 크게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누고 그 하위 분류로 보성소리와 동초소리로 나눈다. 동편제의 중요한 줄기 중 하나인 동초제는 고흥 거금도 사람 김연수가 재구성한 양식이다. 그의 호를 따서 동초제라고 한다. 동초제를 평생의 업으로 보듬고 살았던 오정숙은 그녀의 소원대로 일면식도 없는 땅 거금도 스승의 곁에 묻혔다. 서편제의 중요한 줄기 중 하나인 보성소리는 나주사람 정재근의 법통을 이은 정응민이 지금의 보성에서 재구성한 양식이다. 순창사람 박유전을 서편제의 시조로 삼긴 하지만 나주와 보성을 빼면 그 맥락을 제대로 좇기 어렵다. 내륙지역으로 들어가면 구례의 송흥록으로부터 남원, 전주의 소릿길로 이어진다. 하지만 바닷길만 통해서도 우리 판소리사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전라도의 해안을 나들이하며 철썩이는 파도와 탁한 뻘물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섬들을 마주한다. 판소리를 품은 움직이는 그림, 아니 이 풍경은 어쩌면 판소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남도의 판소리 마실을 가려면 바닷길을 따라 둘러보기를 권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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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추천 휴일의 시 46: 8월의 시 (오세영)8월의 시 오세영(吳世榮, 1942~ )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번 쯤 돌아가라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한 오는 것 풀섶에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번 쯤 녹음에 지처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하는 달이다. 추천인:김명기(상주아리랑보존회 사무총장) "마음도, 세상도, 절기로도 무덥고 지리한 8월 말이다. 그럼에도 이 시기를 건너뛸 수 없다. 9월의 영근 과실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남은 8월의 무더위를 견디련다. 그리고 시에서처럼 8월의 녹음을 기억하며 오는 가을의 낙엽을 상상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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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4)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남도 풍속의 핵심을 보려면 진도를 보라. 남도 풍속의 지형은 넓고도 깊다.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도 어렵고 풀어서 설명한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삼국시대의 향가로부터 오늘날의 가요까지, 영산강이며 섬진강에서 한라 백두까지 남도에서 발원하고 재구성된 문화들이 켜켜이 쌓이고 확산하였다. 이 스펙트럼을 가늠하기란 어린 날 운저리(망둥어) 잡으러 개옹에 나갔다가 잊어버린 검정 고무신짝 찾는 일보다 어렵다. 전문적인 연구자라도 그럴진대 일반인들이야 말할 것이 없다. 그래서다. 어딘가 혹은 무엇인가 샘플이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는 다양한 장르가 국가의 강제나 지방정부의 요청에 따라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하고 더러는 잔존 유산으로 남아있는 지역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진도다. 전국 유일이라고 말하면 다른 지역에서 오해하겠지만 인구 삼만 안팎의 작은 섬에 강강술래, 씻김굿, 다시래기, 만가, 들노래, 남도민요 등 십수 개가 넘는 무형유산들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탄탄하게 보존 전승되어 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중의 다섯 가지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내가 줄곧 주장해왔던 상가의 윷놀이나 유네스코 지정 매잡이 풍속 등은 거의 세간에 알려져 있지도 않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겪는 전통적인 통과의례, 씨줄 날줄로 엮는 의례와 놀이, 들과 산과 바다에서 행하는 생업의 풍경들이며 그림과 글씨, 몸짓과 소리 예술들이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축약해놓은 듯, 거대 보고서를 압축해놓은 듯 구성되어 있다. 우리 시대에 시, 서, 화, 창의 각 장르들을 이처럼 압축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지역을 갖고 있다는 점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즐겨 말해왔다. 남도 풍속의 핵심을 보려면 진도를 보라! 진도지역 판소리 소사(小史), 이병기와 신치선에서 신영희까지. 진도 문화 중에서 그 위상에 비해 덜 알려진 것이 판소리다. 우리 판소리의 자존심이라는 김소희를 이어받은 인간문화재가 진도사람 신영희라는 점을 놓고 보면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기 그 일단을 소개해두기로 한다. 판소리에 전념한 예인들로 박동준, 신치선, 이병기, 양상식, 허회, 최귀선 등을 들 수 있고, 고수로는 김득수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진도지역 판소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신영희의 부친 신치선과 이태백의 부친 이병기(본명 이병규)를 거론해야만 하다. 신치선은 1899년 전남 담양에서 신창연(申昌連)과 나주임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년을 담양에서 보내고 소년기는 목포에서 성장했다. 당시 명창이던 김정문(송만갑의 제자)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배웠다. 1920년대 20세에 협률사에 들어가 활동했다. 나이 40에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 정착하여 신영희를 낳았다. 1946년 임회면 석교리로 이사하여 진도사람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쳤다. 1948년 의신면 초사리로 옮겨 아들 하나를 더 두었다. 이때 제자들이 안득윤, 박연수, 박옥수, 신홍기, 신천행, 회동리의 허휘 등이었다. 제자 중 지산면 인지리의 박병두는 촉망받는 명창이었으나 1960년대에 요절했다. 초사리에서는 흥보가를 창극화하여 공연하기도 했다. 제자 안득윤은 군산, 인천 등지에서 크게 알려진 소리꾼으로 경기 명창인 전숙희(全淑姬)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목포로 옮겨 안향련의 부친 안기선을 도와 목포 판소리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춘향전을 창극화하여 전국 순회공연 및 만주 공연 등을 했다. 1959년 지병의 악화로 타계했다. 이병기는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 사람이다. 해방 직후 정의현이 설립한 진도 최초의 국악원에서 판소리 강사 생활을 했다. 진도 전역을 돌며 판소리 강습과 창극 지도 및 활동을 했다. 특히 지산면 지역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다. 판소리 강습생이었던 이임례와 혼인하여 지금의 아쟁 명인 이태백을 낳았다. 이 스토리를 토대로 만든 것이 영화 '휘모리(1994년 작)'다. 최근 국가 지정 판소리 문화재로 지정된 이난초, 해남 씻김굿 명인 이수자, 우수영 부녀요 보유자 이인자, 광주시 지정 판소리 문화재 이임례 등이 모두 형제 조카 사이다. 이병기 작곡이라고 전해지는 해물유희요 <빈지래기타령>을 포함하여 <숙영낭자전> <봄이 오면> 등이 전해진다. 진도사람 신영희는 김소희 수제자로 판소리 인간문화재가 된 국창이다. 1942년 2월 6일 지산면 인지리에서 신치선의 딸로 태어났다. 인지리에서 성장하다가 의신면 초사리로 이사하였고 다시 아버지를 따라 목포로 이주했다. 어려서 부친 신치선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이후 안향련의 부친 안기선, 정순임의 모친 장월중선, 이난초의 스승 강도근 등 수많은 명창에게 소리를 배웠다. 1975년에 서울에 올라가서 김소희에게 판소리를 배워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소희 문하에서 수업하여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 후보로 있다가 인간문화재로 인정되었다. 흔히 신영희, 안향련, 김동애를 판소리 삼걸이라고 했다. 1976년부터 국립창극단 단원, 1979년 연극 '다시라기'로 배우 데뷔를 했다. KBS 코미디 쇼비디오자키-쓰리랑 부부(도창역)로 장기간 출연하여 판소리의 확장에 힘을 쓰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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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성 인물사] 국악발전의 어머니 박귀희국악발전에 모든 것 희사 2011년 11월 3일 인구 11만의 경북 칠곡에 우리나라 국악인들이 총출동하다시피 다 모여들었다. 2011 향사香史 박귀희朴貴姬(1921.2.6~1993.7.14) 명창 기념공연 「국모」에 출연하기 위해 선생의 후배, 제자, 국립전통예술학교 재학생, 동국대 관현악단 등이 천리길을 마다 하지않고 내려온 것이다. 20세기 국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국악의 어머니를 기리는데 두 마음은 없었다. 국악계의 은인을 위해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한 창설자를 위해서, 바쁜 시간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모두들 기꺼이 내려온 것이다. 향사 박귀희는 어떠한 남자들도 해내지 못했던 문화예술계의 크고 다양한 일들을 앞장서서 추진하고, 양악에 밀리는 국악의 발전을 위하여 또 소외된 여성국악의 활성화를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기부한 여장부다. 가히 국악 발전의 어머니 역할을 다한 국모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적통이 아닌 서얼 출신에 무당의 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국악학교 설립이라는 소망을 세웠고, 그 원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희사한 참인간이다. 박귀희는 한국의 혼이 담긴 국악을 사랑하고 키운 우리나라 국악사의 빛나는 스승이다. 여성이지만 국악인으로서의 민족음악의 발전에 물심양면으로 기여한 전무후무한 경북여성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공간과 6·25를 지나오면서도 민족정신을 되살릴 새로운 시작은 국악뿐이라는 것을 박귀희 명창은 이미 알았던 것일까? 박귀희 명창은 이화중선의 소리를 들으면서 넋을 잃었고, 그 가락을 잡으려고 소리판에 들어섰다. 단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는 선택이었고, 한 사람의 뛰어난 선택이 우리 국악계를 받쳐주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라났다.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안달이 났던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해방이 되어도 국악인들에 대한 냉대와 멸시는 적지 않았다. 설상가상 신탁통치로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양악은 선풍적으로 확산되었고 국악은 고개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었다.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양악이 우리 민족과 함께 반만년을 흘러 온 국악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낼 듯 확산되어도 국악인들은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저 속만 태울 뿐이었다. 당시 국악인들은 해방 나흘만인 1945년 8월 19 일에 대동단결하여, 민속음악을 올바른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국악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해방을 맞이하여 국악인들은 희망에 부풀어 국악중흥운동을 펼쳤으나 냉대받고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수도경찰청장을 역임한 창랑 장택상은 달랐다. 장택상은 박귀희의 친아버지 장병관과 한 집안으로 국악에 대한 조예가 상당했을 뿐만 아니라, 국악인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준 것으로 국립전통예술학교 초대 교장 기산 박헌봉은 『국악운동 반생기國樂運動 半生記』에 적고 있다. 여러 해 외국생활을 했던 장택상은 구수한 된장찌개나 깍두기만큼 맛있는 음식은 먹어보지 못했고, 우리 국악같이 흥겨운 음악은 들어보지 못했다면서 국악을 사랑했다. 창랑의 도움으로 박귀희는 국악 발전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감상회를 열었다. 이때 박귀희, 김소희 명창의 판소리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하루 저녁 감 상회를 계기로 국악학교 설립기성회가 조직되었고, 본격적인 학교설립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대 내각도 외면하고, 6·25도 터지면서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흘러갔다 국립전통예술학교를 세우다 국립전통예술학교 초대이사장 박귀희는 1955년 김소희와 함께 서울 돈암동 적산 가옥 7백평을 불하받아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했다. 무용과 기악, 창 악을 가르치기 시작한 한국민속예술학원이 사립 국악예술학교의 전신이다. 3 년동안 약 380명의 학생이 모여들자 국악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를 세워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전남방직 김용주 회장, 삼양 사 김연수, 경성방직 김용완 사장,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 윤병호 서울은행장, 코오롱그룹 이원만 회장 등 각계 인사들의 협조를 얻어 건평 5백평 규모의 신축 관훈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1960년 3월 5일에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개교한 사립 국악예술학교는 5천 년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악예술학교로 그 중요성을 지닌다. 1964년 4월 15일 윤태일 당시 서울시장의 호의로 서울 장안을 내려다보는 남산으로 이전하였 다. 일제강점기 조선신궁 사무실로 쓰던 낡은 건물이었지만 위치나 규모가 한결 나았고, 주변 민원의 소지도 줄었다. 그해 7월 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 악관현악단을 창설하였다. 1968년에는 돈화문 앞으로 옮겼다가 1970년 9월 30일 서울 석관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84년 12월 17일에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92년 10월 29일에는 석관동에서 서울시 금천구 시흥3동 산 24-17번 지로 교사를 이전하였으며, 2002년 3월 2일에는 서울특별시교육청지정 자율 학교가 되었다. 전통예술학교는 박범훈, 김성녀, 김영임, 오정해 등 걸출한 졸 업생들을 배출한데다 국악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2008년 3 월 1일 사립에서 국립으로 전환되었다. 국악예술학교가 1970년에 서울 석관동으로 이사한 후 박귀희는 운동장이 없 는게 마음에 걸려 1989년 서울 운니동에 있던 자신 소유의 운당여관을 국악예 술고등학교 이전 비용으로 내놓았다. 석관동 교사 판매 대금 20억원에다 박귀 희 명창이 살던 사저 운당여관 그리고 명창의 대전 과수원까지 판 전 재산 38 억원으로 전통국악예술학교는 1992년 금천구 시흥2동의 넓은 땅으로 이주하 게 된 것이다. 전통예술학교가 넓은 교사로 옮긴 것은 더없이 축하할 일이나 서울의 전통 숙박시설 명소로 사랑받던 운당여관이 헐린 것은 너무 아쉬운 일 이다. 박귀희 명창의 고택이 된 운당은 척박하던 195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문화예술인들의 보금자리이자 국수전이 열리던 바둑 대국장이었다. 운 당이 박귀희 명창의 소유가 된 것은 1951년이다. 원래는 조선 순조 때 궁중 내 관이 왕으로부터 목재를 하사받아 지은 양반 가옥이었다. 여기에 구한말 세 도가였던 한상억이 한옥을 사들여 1958년부터 구름집을 뜻하는 운당雲堂으 로 이름지었다. 서울 경기지방 정통 사대부 가옥을 보여주는 운당은 종로의 명소로 알려져있고, 박귀희는 이 집을 여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했다. 운당여 관은 문화예술인들의 놀이터이자, 한국가옥의 곡선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 다. 1989년 자금난에 시달리던 국악예술학교에 기증된 후 헐렸던 운당여관은 1994년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서울종합촬영소 내에 복원되었다. 국모 박귀희 명창이 기산 박헌봉 등과 함께 민족정신을 보듬고 민족음악을 보존하기 위해 뿌린 씨앗은 이제 개교 반세기를 넘어 반만년 민족정서를 싣고 있는 우리 음악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첫 국악교육기관으로서 뚜렷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국립전통예술고에서는 향사 박귀희의 예술관이 실천되고 있다. 박귀희는 예 술을 공부하려면 먼저 인성을 닦고 예능을 공부해야하며, 예술인은 기예 뿐 아니라 학식도 겸비해야한다고 강조하였고 몸소 실천하였다. 박귀희 명창의 국악살리기는 완전히 자유의지로 시작되었고, 어떠한 어려움에도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전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국악에 는 없던 가야금 병창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해낸 자유의지의 발로이자 전 인미답의 신개척지를 찾아나선 것이다. 소리로 풀어내야 할 출생스토리 박귀희 명창은 경북 칠곡군 가산면 하판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장영심으로 친아버지는 장병관, 인동 장씨 집안이다. 장병관은 기골이 장대하고 말도 잘하며 돈도 많았다고 한다. 알아주던 대농이었던 칠곡 갑부 장병관이 경영하던 술 도가는 6·25때 폭격으로 불타 없어졌다. 장병관은 아들을 얻지 못하자 아랫 마을 속칭 탑고개에 살던 큰 무당 박금영(박귀희의 친어머니)과 동거했다. 장병관은 박금영이 딸을 낳자 호적에도 올리지 않고, 딸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무당으로 사는 삶의 지난함을 알고 있는 박금영은 처음에는 어린 박귀희 즉 장영심을 자신의 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장병관은 혼인 외 딸이라고 해서 외면하는 바람에 박귀희는 인동 장씨 호적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후 친모 박금영이 오씨 성을 가진 사람과 재혼하자 오씨 호적에 오계화라고 올렸으나 박귀희는 나와 아무런 관련 없는 오씨 성을 따를 수 없다면서 어머니 성을 따랐다. 상당히 앞서서 주체적인 생각을 보인 셈이다. 이후 장영심 즉 오계화는 국악에 입문하면서 지은 귀희라는 예명에 어머니 박씨 성을 붙여서 박귀희가 되었다. 한국 국악계의 대들보 역할을 한 명창 박귀희의 이름 세 글자에 출생에 서린 애환과 신분 차별의 굴레 그리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한 사람의 뛰어난 인간승리의 의지가 서려있다.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 박귀희는 가야금과 무관하지 않은 배경을 안고 태어났다. 박귀희는 능력있는 아버지를 두었으나, 축복받는 출생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혼외 자식이라는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태어난 박귀희의 인생 고민과 고뇌는 일찍 싹텄을 것이며, 그것이 깊은 예술적인 공명으로 승화되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어찌보면 박귀희와 국악과의 인연은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닐곱살쯤 철이 들만하자 어머니는 박귀희를 대구 봉산동 외가로 보냈다. 대구공립보통학교 3학년 때 무성영화를 처음 접하였다. 이때부터 예술세계에 대한 동경의 씨앗이 뿌려졌는지도 모르겠다. 향토음악사를 정리한 손태룡은 박귀희가 대구에서 달성권번과 대구공립보통학교를 거치면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1931년 11세때 대구극장에서 열렸던 조선성악연구회 공연을 보면서 예술적 자질이 움트기 시작했다. 박귀희는 권번 담을 넘어 들려오는 소리를 귀동냥으로 들은 것을 따라하다가 손재광 앞에서 단가를 부르게 되었다. 손재광은 그래 쓰겄다. 너 소리 배워라고 한마디를 던졌다.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 셈이다. 손재광이 어린 박귀희에게서 소질을 캐냈다면, 첫 스승은 박지홍이다. 박지홍으로부터 판소리와 「화초사거리」 등을 사사받았다. 박지홍은 나주 출신으로 명창 박기홍과 종형제간이었다. 이화중선의 소리에 홀린 듯 빠져들다 박귀희가 데뷔를 한 것은 보통학교 졸업을 앞둔 14세 때 달성권번 손광 재에게 판소리를 배우다가 이화중선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화중선 (1898~1943)은 김초향과 더불어 그 시절 여류 창악계의 쌍벽이었다. 열일곱살 때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홈실 박씨 문중으로 출가하였으나 협률사 공연을 보 고 홀리듯 집을 나가 장득주에게 판소리를 배운 이화중선은 천부적인 목소리와 재질을 지닌 여류명창으로 인기가 높았다. 이화중선은 대동가극단을 이끌고 지방 순회공연에 이어서 일본 순회공연을 다녔는데. 1943년 재일동포 위문 공연 도중 별세하였다. 이화중선의 대동가극단이 대구극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손광재가 박 귀희를 이화중선에게 소개시켰다. 박귀희의 소리를 들어본 이화중선은 바로 입단을 허락하였다. 박귀희가 대동가극단에 입단한 것은 1934년이었다. 대구극장에서 「소상팔경가」로 공식적인 데뷔 무대를 가졌다. 대동가극단과 일년여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은 쌓았지만 오태석의 가야금 병창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생겼다. 토막 판소리에 만족하지 말고 명창이 되려면 제대로 소리를 배워야한다고 결심하고 대구로 내려온 박 귀희는 한국 소리계의 대부들을 찾아서 가르침을 받았다. 박지홍에게 「춘향 가」와「화초사거리」,「보렴」,「편락」을 배웠다. 15세이던 1935년에는 강태홍에게 가야금과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였고, 승무, 박전무, 검무, 살풀이 등을 김남수에게 일년간 배웠다. 16세 되던 1936년 여름에는 대구 화원 용연사에서 박기홍의 의발衣鉢을 받은 조학진에게 백일 공부를 하면서 「춘향가」와 「적벽가」를 배웠다. 백일공부는 불가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듯이 암자나 절에 스승을 모시고 들어가 성음의 경지를 터득하는 것을 말한다. 국악인들은 이렇게 절에 들어가서 소리공부 하는 것을 흔히 도야陶冶라고 하고 소리공부는 절에서 수도하는 스님들과 똑 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세 차례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밤 11시에 잠드는 시간까지 마치 좌선하듯이 소리공부를 하는 것을 말한다. 박귀희 명인의 가장 큰 특징은 국악에는 없던 가야금 병창의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는 사실이다. 한때 불이익 가야금 병창 광범위한 사랑받아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야금 병창대회에 나가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가야금을 뜯으면서 노래를 하는 새로운 연주 방식인 가야금 병창에 대해서 기존 국악계가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최 근에는 이런 일들이 사라져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뿐이지만, 한 동안은 가야금 병창은 금지된 예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야금 병창은 대중의 가슴 속에 파고 들었다. 창을 하며 가야금을 뜯는 병창은 마치 서양 아티스트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것처럼 대중속으로 스며들었다. 박귀희의 열정과 헌신으로 이제 가야금 병창은 국악계의 대표적인 장르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18세에는 전남 담양에서 박동실 선생을 모시고 두 번째 백일공부에 들어가 「흥보가」,「심청가」를 배웠다. 박동실과 공부를 마친 다음해인 1939년 19 세 때는 유성준을 모시고 경북 하동군 쌍계사에서 세 번째 백일공부를 하면서 「수궁가」한바탕을 배웠다.3) 공부를 마친 박귀희는 대동가극단으로 다시 들 어가려 했으나 대동가극단이 일본 공연을 떠난 터라 종합예술단체인 한양창 극단에 입단하였다. 이때가 17세인 1937년이었다. 스승인 오태석과의 만남은 한양창극단에 입단하면서 시작되었고, 공부 장소는 봉익동 대각사 근처 익선 동이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3년을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였다. 오태석은 목청이 좋고, 판소리 한바탕을 가야금 병창으로 노래할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후 박귀희는 한양창극단을 거쳐 임방울, 박초월 등과 함께 1943년 동일창 극단을 재창단하여 동일창극단 단장을 맡았다. 동일창극단은 창작창극 「일목장군」 등을 공연하였다. 창작창극은 신파조에 창을 혼합한 형식으로 아직 창극다운 창극을 접해보지 못했던 시민들은 새로운 형식의 창극에 큰 관심을 보였다. 동일창극단의 성공작인 「일목장군」에서 박귀희는 남자주인공을, 박초월은 여자주인공을 맡았다. 미모에 연기력까지 뛰어났던 박귀희가 남자 역으로 분장한 선화공주는 대히트를 쳤다. 창극에서 여자가 남자역으로 출연한 것은 박귀희가 시초이다. 동일창극단은 서울 공연이 끝나면 계속 지방 각 도시를 순회공연하였으나 광복되던 1945년 부산에서 해산되었다. 박귀희는 가야금 병창 무형문화재였지만 여창남역 배우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30대에 국악학교 설립의 뜻을 품다 1945년에는 여성국극단의 효시인 여성국악동호회를 창설하고 상무이사로 피임되어 활동하였다. 창립공연으로 「옥중화」 이후 1949년 2월에 공연된 햇님과 달님의 성공으로 여성국극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단 하나의 작품으로 단 1년만에 전국을 뒤흔들어놓고 뚜렷한 대중예술장르로 자리를 굳힌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드물다. 적어도 1950년대는 여성 국극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국극의 대유행으로 종래의 창극단들은 거의 사라졌다. 여성국극단이 초기의 음악극으로서 공연적인 성취보다 남녀간의 사랑 등을 확대하며 인기를 좇아 변질되자 박귀희는 여성국극을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된다. 여성국극단은 1960년을 전후로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5·16 이후 민족적 민주주의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기존 국립극단 국립오페라단 국립무용단 외에 국립국극단을 더 두게 되었다. 박귀희는 국립국극단 창 단을 앞두고 자격있는 국극인을 양성하는 국극요원양성소 개설을 거론할 정도로 국극단 창단에 음양으로 기여를 하였다. 국립국극단은 1973년부터 국립 창극단으로 바뀌는데, 이때 박귀희는 단장(1980~1982)을 맡았다. 1960년대 들어 문화의 소용돌이가 거세지자 박귀희는 일본 교포 위문공연 으로 돌파구를 찾기도 했다. 일본에서 고생하며 살던 교포들에게 우리 음악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한을 풀어내기에 안성마춤이었고 이런 심리적인 현 상을 박귀희는 잘 알아차렸다. 1961년 일본 거류민단장 박수정의 제의에 따라 동경에 무악원을 세웠다. 강사는 박귀희를 비롯하여 민요에 안비취, 가야금에 문경옥, 장고춤에 강문자, 민속무용에 이춘자 등 5명이었고 박귀희는 운영 대 표 겸 판소리를 가르쳤다. 동경 무악원은 무려 17년간이나 운영된 뒤 1979년에 문을 닫았다. 공연은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서독, 베네수엘라 등 세계 각 국으로 확대시켰다. 국내에서도 가야금 병창활동을 62회나 펼쳤다. 전통예술에 대한 국가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박귀희는 제23호 가야금 병창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1968년의 일이다. 어릴때부터 명민하고,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박귀희는 시대 변화에 대 한 이해도 빨라 민족음악의 새 장을 여는 흐름에 항상 같이하고 있다. 1972년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효녀 심청」에 박귀희는 영화음악으로 참여하 여 「심청가」일부 대목을 불렀다. 향년 72세를 일기로 타계 할 때까지, 호남세가 주류인 국악계에서 드물게 영남맥을 이어내었다. 평생 소리를 하면서 번 돈을 국악계의 앞날을 위해 선뜻 내놓았던 박귀희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교육과 민요수집 작곡 악보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예는 도이다 박귀희의 소리는 1950년대에 취입한 유성기 음반부터 1993년 작고 직전에 녹음한 콤팩트 디스크까지 다양하게 남아있다. 박귀희의 자서전 『순풍에 돛 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에 따르면 60년대말부터 민요 채집을 구상했고, 이를 국악예술학교 교장이던 박헌봉에게 알렸다. 두 사람이 먼저 뜻을 맞추고, 아시아문화재단에서 지원을 받아 전국 각지에서 모은 전승민요를 문화재관리 국에 기증하였고, 박귀희는 1979년 『향사 가야금병창곡집』을 출판하게 되 었다. 50여곡이 실린 『향사 가야금병창곡집』은 지금까지도 가야금 병창을 배우는 이들에게 유용한 교본이다. 종전까지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구전심수口傳心授 방식에서 벗어나서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고 혼자서도 마음만 먹으면 따라할 수 있는 교본으로 만든 것이다. 흔히 민요가 수들이 부르는 「꽃타령」,「뽕따러 가세」,「옹헤야」 등은 박귀희에 의해 만들어져 불려지고 있다. 예藝에 산다는것은 험난하다. 예를 도道로 닦기에는 더 힘이 든다. 그런 예 도의 길을 박귀희는 걸어왔고 역사 속에 살아남았다. 소리꾼으로서는 동편제 의 법통을 이어받은 유성준의 제자로서 동편제에 속한다 할 수 있으며, 가야 금 병창으로는 고종 때 가야금 명인인 박팔괘의 정통 가야금 병창의 맥을 이 어온 오태석의 제자로서 법통을 이어받았다. 또한 판소리와 창극 그리고 여성국극 발전에도 큰 자취를 남긴 박귀희 명창은 평생을 국악살리기에 투신했 다.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향사 박귀희 추모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인 김덕수는 사람이 개인의 안위가 아니라 다수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걸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을 통해 확인했다. 나는 박귀희 선생님을 통해 전통을 어떻게 후대에 전승시킬 수 있는지 그 방법과 가능성을 보고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 박귀희 명인의 고향인 경북 칠곡군은 2021년 향사 박귀희 명창 뮤지컬(연희 창극)을 제작·발표하고, 전국가야금병창대회도 열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칠곡군에서 호국평화공원과 연계하여 향사 박귀희 명창 기념관을 건립하여 국립전통예술고 유품전시관으로부터 유품을 확보하여 전시할 계획이다. 평생을 국악발전에만 쏟은 국모 박귀희가 있었기에 우리 국악은 체계를 잡고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국악을 통해 우리 문화의 초석을 다진 향사 박귀희의 숭고한 예술정신은 날이 갈수록 그 향기가 더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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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모정 이명희 명창기념 상주종합국악제 7월 3일본 경연대회는 코로나 19 감염예방 및 사회적 거리두기 정부 방침에 동참하고자 전 부문 "비대면 동영상 심사”로 진행합니다. ■ 목 적 상주를 빛낸 문화인물 (故)모정 이명희 명창의 뜨거웠던 애향심을 받들어 전통음악의 보존육성과 대중화를 위하고 우수한 국악인재 발굴 육성함과 동시에 전국 국악인들과 참여하는 전국 국민들에게 전통예술을 사랑하는 삼백의 도시 상주를 알린다. ■ 방 침 스승이신 (故)만정 김소희 국창이 만드신 ‘상주아리랑’을 제자인 (故) 모정 이명희 명창과 함께 널리 보급화 시키고자 그녀의 어릴 적 태어나 자란 고향 상주에 2008년 첫 대회시작으로 정신문화 창달에 기여하고자하는 전국국악경연대회로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전국의 국악 신인 발굴 육성과 권위 있는 국악 등용문으로 정착시키고, 우수한 국악 인재를 발굴하여, 훌륭한 전통 국악의 전승 보전과 우리 전통예술의 육성 창달에 기여하고, 객관적이며 공정하고 엄격한 대회가 될 수 있도록 운영규정을 제정 매년 연례 행사로 시행한다. ■ 일 시 : 2021년 7월 3일(토) 10:00 ~ 16:00 (전 부문 비대면 동영상 심사) ■ 장 소 : 상주 태평성대 경상감영공원 ■ 주 최 : 상주시 ■ 주 관 : 상주문화원, 사)영남판소리보존회 ■ 후 원 : 경상북도, 경상북도교육청, 상주교육지원청, (사)영남판소리보존회 상주지부, (주)피플홀딩스, 국악신문 ■ 참가대상 : 초등부, 중고등부, 일반부 ■ 경연종목 1.판소리/가야금병창 2.기악 3.연희 4.무용 ■ 경연방법(진행상 변경될 수 있음) ▪ 경연시간 - 전 부문 단심제 (동영상 촬영 유의사항 참고)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부 3분 3분 4분 4~5분 ▪ 경연곡목 - 기악 : 산조 및 정악(초등부는 단소포함) 피리, 대금, 해금, 가야금, 아쟁, 거문고 - 판소리 : 흥보가,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 가야금병창 : 단가, 민요, 판소리대목 - 무용 : 전통무용, 전통창작무용 - 연희 : 선반, 앉은 반 개인놀음 ■ 동영상 촬영 방법 ① 동일한 조건의 평가를 위하여 휴대폰으로 촬영 및 녹음함 해상도 1920×1080(FHD), mp4 파일로 설정해 주시길 바랍니다.(마이크 및 필터 사용 불가) ② 첫 화면은 A4용지에 참가 대회명과 촬영일 을 크게 작성하여 화면에 제시 한 후 녹화 시작함 (예시)상주국악제(대회명) / 21년 월 일(녹화일) (첨부파일 '동영상촬영시사용' 확인) ③ 출전자는 본인의 정면에 거치대를 고정하여 전신 촬영함, 반주자는 영상 안에 노출되지 않아야 함. (장구장단 및 소리 북 반주외 다른 악기반주 불가) ④ 전 종목 인사 생략, 한복착용, 무용은 짙은 화장 불필요 작품의상 입고 촬영 ⑤ 타 대회 제출영상이나 과거 공연영상 불가 ⑥ 영상의 화질과 음질은 심사가 가능 할 정도의 소음이 없고 밝은 공간에서 촬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촬영장소의 배경은 심사에 영향을 주지 않음.(거울 및 유리 앞 촬영 삼가) ⑦ 공고기간 촬영한 동영상만 인정, 영상 편집 및 사운드 조절 등 2차 가공 절대 불가 ✻ 위 7가지 사항이 준수 되지 않을시 접수 불가합니다. ✻ ■ 유의사항 - 전 부문 비대면 동영상 심사 단심으로 경연 종료 - 당일 영남판소리보존회 홈페이지에 심사위원 공개 및 심사결과 공지 - 상장 우편 발송 합니다. ■ 참가신청 ▪ 접수기간 : 2021년 6월 1일 ~ 25일 18:00 ▪ 접수방법 : 이메일 제출 ▪ 제출서류 : 참가신청서 1부, 경연영상 1개 ※ ‘이메일 제목’, ‘신청서 파일명’, ‘동영상 파일명’은 "○○부 ○○부문 ○○○”로 동일하게 할 것 (예시) 중고등부 판소리부문 춘향이, 초등부 기악부문 홍길동 ▪ 접수처 : (사)영남판소리보존회 사무국 - 이메일 : ynpsori@naver.com - 홈페이지 : (사)영남판소리보존회 홈페이지(www.pansoriyn.com) - 전화 : 053-793-9535, 010-8738-7848(사무국장) ▪ 참가비 - 일반부 30,000원 / 학생부 무료 - 입금계좌 : 대구은행 504-10-282697-9 / 예금주 : (사)영남판소리보존회 정정미 ■ 시상내역 구 분 시상내용 훈 격 인원 시 상 일반부 판소리 기 악 무 용 연 희 종합 대상 국회의장상(추진중) 1명 상장 및 상금 각 1,000,000원 대 상 경상북도지사상 3명 상장 및 상금 각 500,000원 최우수상 상주시장상 4명 상장 및 상금 각 300,000원 우 수 상 상주문화원장상 4명 상장 및 상금 각 200,000원 장 려 상 사)영남판소리보존회 이사장상 4명 상장 및 상금 각 100,000원 중고등부 판소리 기 악 무 용 연 희 대 상 경상북도교육감상 4명 상장 및 장학금 각 200,000 최우수상 상주문화원장상 4명 상장 및 장학금 각 100,000 우 수 상 대회장상 4명 상장 및 부상 장 려 상 사)영남판소리보존회 이사장상 4명 상장 및 부상 초등부 판소리 기 악 무 용 연 희 대 상 상주교육지원청교육장상 4명 상장 및 장학금 각 100,000원 최우수상 상주문화원장상 4명 상장 및 장학금 각 100,000원 우 수 상 대회장상 4명 상장 및 부상 장 려 상 사)영남판소리보존회 이사장상 4명 상장 및 부상 특별 수상 전 부문 우수 지도자상 국회의원 상 4명 상장 및 부상 국악 공로상 주)피플홀딩스 대표이사상 1명 상장 및 부상 ※ 시상내역은 변경 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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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일본의 심장을 쏘다, 창작판소리 <안중근> 초연호국의 달 6월을 맞이하여 창작판소리 <안중근>이 6월 5일(토), 6일(일)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창작판소리 <안중근>은 만고의 영웅 대한국인 안중근의사의 일대기를 판소리로 엮은 작품으로 창작판소리연구원의 예술총감독 임진택 명창이 안중근의사의 옥중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를 기본으로 사설을 집필하고 소리를 붙여 작창하였다. 안중근은 누구인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경, 중국의 하얼빈 역에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아시아 전체가 치를 떠는 공공의 적을 저격하는 순간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선봉장이자 대한제국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의사의 총탄에 쓰러져 곧 숨을 거두었다. 현장에서 바로 체포된 안중근의사는 뤼순감옥에 수감되어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모두 여섯 번의 공판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항소를 거부하고 그해 3월 26일(향년 31세)에 순국하였다. 안중근의사는 왜 이토를 쏘았을까?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살아 있는 한 동양평화는 계속 어지러울 것이고 대한제국과 일본은 서로 증오할 것이기에, 대한국의 의병 중장 자격으로 처단한 것이다.” 안중근의사 의거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는 단순히 이토의 제거가 아닌 일본이 계획하는 침략전쟁을 막고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다시 조명되는 안중근의 사상 사형 집행을 앞두고 미완성인 채 후대에 남긴 ‘동양평화론’ 속에 담긴 안중근의사의 선구적인 발상은 오늘날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라는 시대적 화두로 다시 이어지고 있다. 침략 가해자였던 일본은 지금도 여전히 사죄와 반성은 커녕 역사를 왜곡하고 자기네 평화헌법마저 부정하면서 극도로 우경화하여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군국주의적 경향을 노골적으로 다시금 내비치고 있다. 안중근의사의 사상을 되짚어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다. 창작판소리 <안중근> 줄거리 창작판소리 <안중근>은 안중근의사가 1879년 9월 황해도 해주에서 안응칠로 태어나 을사늑약에 비분강개하고 결국 조국이 사라진 시대에 의병활동에 투신하여 대한의군 참모 중장으로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계획하고 하얼빈 의거를 결행에 옮기기까지의 삶의 궤적과 전쟁포로로서 국제법을 따르는 재판의 요구는 묵살된 채 끝내 일본의 짜인 각본대로 사형선고를 받고 뤼순감옥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던 중에 오늘날까지도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 유언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소리로 지었다. 임진택 명창은 왜 판소리 <안중근>을 창작하였는가? 안중근의 투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소리를 이끄는 도창으로 직접 실연하는 임진택 명창은 "해방 직후 박동실 명창이 이준, 안중근, 윤봉길 세 분의 의거를 담은 ‘열사가’라는 판소리를 창작한 바 있다. 허나 명창이 6.25 때 월북함으로써 그가 남긴 열사가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었으며, 또한 열사가 안에 안중근 대목은 불과 20분 정도 분량으로 온전한 한 바탕의 소리로서는 부족함이 있기도 하다. 새로운 안중근 판소리의 필요성과 작금의 급박한 한반도와 동아시아 정세로 불 때 안중근이 자칫 과거의 인물로만 박제 되어서는 안 될 터이며, 따라서 이를 뛰어넘는 창조적 예술정신이 요구된다.”면서 "창궐하는 일본 군국주의와 열강의 야합에 맞서 싸우는 안중근이라는 대한국인을 우리시대의 새로운 의사(義士)로 부활시키는 작업을 시작하고자 한다.”고 이번 작품의 각오를 밝혔다. 의사의 서거 111년이 지난 오늘은 기필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대로 그의 유해를 대한의 조국으로 모셔오고 그가 바라는 진정한 독립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창작판소리 <안중근>에 구사된 기법과 미학 창작판소리 <안중근> 공연은 1인 다역을 하는 한 사람의 광대와 한 사람의 고수가 등장하는 판소리 전통 방식에 변화를 주었다. 다수의 소리꾼이 어머니 조마리아, 빌렘신부, 채가구 역장, 일제 검찰관 등의 여러 배역을 맡아 안중근의사와 함께 시대의 증인으로 무대에 서는 입체창의 형식으로 구성된다. 이는 전통판소리의 미적 특징을 고수하면서 중립적으로 관찰되어 객관화된 사건의 분위기와 인물의 신분, 성격에 따르는 이면(裏面)의 효과를 높이는 장치이다. 판소리 <안중근>의 눈대목(절정)은 이토의 북만주 시찰 정보를 듣고 하얼빈 역에서 저격하는 1909년 10월 21에서 26일까지 안중근의사의 행적이다. 거사 결정과 작전수립, 동지들과 블라디보스톡에서 하얼빈으로 이동 그리고 계획의 변경, 역에서의 기다림과 이토의 저격이 이루어지는 엿새간의 장면이 아니리(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 줄거리를 설명하는 부분) 없이 소리 장단으로만 비장함, 긴박감, 긴장감, 통쾌함, 의연함이 20여 분간 그려지는데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이 표현된다. 창작판소리와 그림 영상의 만남 이번 공연에는 화가 박불똥이 미술감독을 맡아 작화에 나섰다. 일반적으로 판소리 무대의 배경으로 쓰이는 병풍 대신에 화가의 포토꼴라주 작품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안응칠 역사’를 자신만의 리얼리즘으로 포착한 시각 이미지들을 분해 조립하고 유기적으로 엮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특히 정지된 하나의 이미지 위에 다른 이미지가 중첩되고 반복과 복제되는 작업은 동영상을 보는 듯한 율동감마저 자아낸다. 무심하게 숨어 있는 작은 이미지들이 뭉쳐져 만들어진 ‘안응칠 역사’는 작은 힘들이 모여 하나의 큰 역사를 이루어 낸 우리 민중들의 삶 하나하나의 역사인 셈이다. 나오는 사람들 ‘우리시대의 광대’ 임진택은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으로 명창 정권진(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으로부터 소리를 배운 이른바 ‘비가비광대’이며 1970년대 이후 마당극 운동을 주도한 연출가이자 문화운동가이다. 특히, 전통판소리의 박제화를 극복한 ‘살아있는 판소리꾼’으로서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 다섯 마당(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을 넘어 새로운 ‘창작판소리12바탕’ 완성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백범 김구>(2010년)를 시작으로 <남한산성>, <다산 정약용>, <오월광주, 윤상원가>, <세계인 장보고>, <전태일>에 이은 <안중근>은 그의 일곱 번째 작품이다. 어머니 조마리아 역을 맡은 중견 소리꾼 남궁성례는 정권진 명창과 김소희 명창(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에게 사사하고 현재 유튜브 ‘풍류당 보라사부’ 채널에서 판소리 남도창을 강의하고 있다. 소리꾼 강응민(안중근 역)은 현재 안양국악예술단을 이끌고 있는 청년 국악인으로서 지역의 전통예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으며 지난 2019년 <수궁가>를 완창 바 있다. 소리꾼 최민종은 단국대학교 국악과를 졸업하고 소리패 ‘낭만판소리’를 꾸려 판소리의 대중화에 노력하고 있으며 제12회 인천국악대전 판소리부 일반부 최우수상(2012년)을 수상했다. 소리꾼 배재정은 전국금속노동조합 기아자동차지부장 출신으로 임진택 명창으로부터 창작판소리를 사사하고 있으며 2020년 창작판소리 <전태일>에 출연하며 제2의 인생을 소리꾼으로서 시작했다. 북채를 잡는 박명언 고수는 박봉술 명창(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의 손자로서 소리와 고법을 모두 익혀 ‘소리할 줄 아는’ 고수로 이름이 높으며 나주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고법 일반부 대상(2008년)과 완도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 일반부 최우수상(2010년)을 수상한 재원이다. 이번 창작판소리 <안중근>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0년도 원로예술인공연지원 사업 기금과 기아(주) 노사합동 사회공헌기금을 지원받아 제작되었다. 공연은 전석초대, 무료이며 예약은 전화(010-3675-1518), 홈페이지(www.pansorilab.com)로 날짜와 관람인원을 남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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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40: 한악계의 은인, 조선일보 방일영국악상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세상에는 상도 참 많다. 갖가지 상들이 넘쳐나고 있다. 상들이 지천이다 보니 개중에는 뒷말이 개운찮은 상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 많은 상 중에서 과연 좋은 상이란 어떤 것일까.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겠지만, 내가 보는 좋은 상이란 우선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상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상금의 과다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주최측의 명성이나 위엄에서 오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상의 권위는 공평무사한 운영에서 온다. 아름아름 주고받는 상에는 권위가 쌓일 리 없다. 주는 자와 받는 자 공히 그저 주기적으로 치르는 요식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주는 자도 받는 자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받는 자도 수상에 대한 자긍심을 갖기 어렵다. 시를 쓰는 어느 지인의 말이다. 자기가 아는 문인이 얼마 전 어느 문학상을 받았단다. 그런데 상을 받은 대가로 주최측이 발간하는 정기 간행물을 상금 이상으로 팔아줘야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이 문학계에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수상자가 얼마를 내겠다고 먼저 언질을 주고 상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시상제도가 하나의 생계수단으로 전락한 셈이다. 상 받았다는 것을 시큰둥하게 보거나 우습게 알기 십상이다. 이 같은 폐단은 전통음악계에서도 간간이 들려온다. 심사위원으로 선정되면 은연중에, 어떤 때는 아예 드러나게 자기 제자나 지인이 수상자가 될 수 있도록 서슴지 않고 부끄러운 짓들을 한다. 꽤 오래전 일이다. 전남 고흥에서 김연수 명창을 기리는 제1회 김연수국악상 심사를 위촉받고 참여한 적이 있다. 김 명창의 수제자를 자임하고 남들도 그렇게 인정하는 오 아무개 명창이 심사위원장 역할을 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국악 전공자도 아닌 인물을 수상자로 극구 추천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인데 전주에서 국악계를 위해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수상 조건에도 맞지 않는 사람이라며 나부터 적극 반대했다. 결국 안숙선 명창을 제1회 수상자로 선정했다. 선정 회의가 끝난 후 은밀히 알아보니 오 명창이 열렬히 추천했던 인물은 바로 자기 남편이었다. 이 같은 전통음악계의 시상 풍토를 일거에 쇄신하고 등장한 시상제도가 다름이 아닌 방일영국악상이다. 하기사 방일영국악상은 기존의 여느 국악상들과 같은 지평에서 운위할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만큼 격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 이 상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일보를 한국 대표 신문으로 키워 낸 우초愚礎 방일영方一榮 선생이 1994년에 제정한 국악상이다. 기억하는 분들도 많겠지만 1994년은 소위 ‘국악의 해’라고 해서 정부가 한 해 동안 국악계를 집중적으로 지원한다는 취지로 출범한 해다. 이어령 문화부장관 시절 그분의 아이디어로 한 해에 예술계 어느 한 분야를 당시 10억 원씩 특별 지원한다는 정책을 실행했는데, 무용과 문학에 이어 세 번째로 국악의 해가 선포된 것이다. 아무튼 유달리 국악을 좋아하며 국악인들을 자별히 배려해 주셨던 우초 선생은 국악의 해를 맞이하여 명실상부한 상다운 상을 출범시켰다. 지난해로 4반세기를 맞이한 방일영국악상은 그동안 전통음악계에 적지 않은 자극과 활력을 불어넣어 왔다. 사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들이라면 누구나 내심 수상을 소망하는 선망의 대상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방일영국악상의 권위와 위상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다. 그간의 역대 수상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누구나 그 상의 존재가치를 십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 제1회 때의 수상자부터 순차적으로 열거해 본다. 제1회 판소리 명창 김소희, 제2회 국악학자 이혜구, 제3회 판소리 명창 박동진, 제4회 정재무 김천흥, 제5회 종묘제례악 성경린, 제6회 서도소리 오복녀, 제7회 판소리 명창 정광수, 제8회 정가 정경태, 제9회 배뱅이굿 이은관, 제10회 가야고 황병기, 제11회 경기민요 묵계월, 제12회 대금 산조 이생강, 제13회 경기민요 이은주, 제14회 판소리 오정숙, 제15회 판소리 고법의 정철호, 제16회 민속음악학 이보형, 제17회 판소리 박송이, 제18회 피리 정재국, 제19회 판소리 성우향, 제20회 판소리 안숙선, 제21회 경기민요 이춘희, 제22회 거문고 김영재, 제23회 사물놀이 김덕수, 제24회 가야고 이재숙, 제25회 한국음악학 송방송. 이쯤 되고 보면 방일영국악상은 상이되 상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를 증언하는 한국문예사의 거대한 물줄기이자 척추 같은 산맥이다. 따라서 그 상은 곧 음악상이되 하나의 독특한 문화현상이자 역사의 실록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영예로운 국악상에 나는 직간접적으로 꽤 자주 연계돼 온 셈이다. 직접적으로는 심사위원이나 심사위원장을 했고, 간접적으로는 수상자들이 부탁한 축사의 글들을 시상식 유인물에 기고해 왔다. 총 25회에 걸친 시상 중에서 16회에 걸쳐서 나의 심사평이나 축하의 글이 실렸으니 이 상과의 인연도 적지 않은 연륜이 쌓였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국악신문 독자들에게 귀한 글을 보내주신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이지출판사에게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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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9: 유어예(遊於藝)의 귀명창, 호암 이병철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연주자와 청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하겠다. 연주자 없는 청중이 있을 수 없고, 청중 없는 연주자도 존재 의미가 없다. 전통음악계에서도 사정은 여일하다. 좋은 명인 명창 뒤에는 반드시 귀밝은 애호가가 있기 마련이다. 자신이 스스로 노래는 못하지만 듣고 즐기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을 일러 귀명창이라고 한다. 여기 진실로 국악을 아끼고 애호하던 ‘귀명창’을 한 사람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고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 선생을 앞세울 것이다. 전공이 아닌 사람이 어떤 특정 분야의 예술을 관심 있게 알기만 해도 세간의 화제가 되기 일쑤다. 그런데 호암 선생은 국악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쳇말로 가히 마니아 수준이었대도 과언이 아니다. 늘 국악을 듣고 즐기며 생활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논어》에서 말하는 ‘지지知之’와 ‘호지好之’의 단계를 넘어 ‘낙지樂之’의 경기에 들어 ‘유어예遊於藝’의 세계를 소요逍遙했던 분임에 틀림없다. 호암 선생의 국악 애호 덕분에 나는 그분을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수시로 나를 불러 국악 관련 심부름을 시켰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에서 일해 본 사람이면 잘 알 것이다. 조직 내에서 호암 선생의 위상이란 가히 소왕국의 황제격이었다. 사장단도 만나 뵙기 힘든 처지인데, 하물며 평사원이 호암 회장을 만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요행히도 나는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했다는 이력 때문에 그 ‘지엄한 회장님’을 때때로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TBC에 입사하기 전만 해도 호암 선생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세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선 그분에 대해 아는 정보가 없었으니 세평을 그대로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분에 대한 세간의 별칭은 ‘돈병철’이었다. 돈 많은 기업가라는 뜻의 속칭이었다. 나도 그 같은 평소의 인상을 지닌 채, 당시 중앙매스컴센터 공채 3기로 호암 선생 회사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금도 그때 정황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해지는 민망스런 일이 하나 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을 그대로 실천했구나 싶은 자괴감이 앞서기도 했던 장면이다. 사내 물정을 모르던 입사 초년생 때의 일이다. 이 회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당시 중앙일보 사옥이었던 서소문동 9층짜리 건물 3층에 호암 선생의 방이 따로 있었다. 물론 호암 선생의 집무실은 당시 소공동 반도호텔 맞은편 삼성 본사 건물에 있었지만, 갓 창설한 중앙매스컴센터에 애착이 많았던 호암 선생은 중앙일보사 회장실을 자주 사용했다. 아무튼 집무실 옆에 응접실이 있고, 거기에 여섯 사람이 서로 대좌해서 앉을 수 있는 낮은 탁자가 길게 놓여 있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여섯 자리에 다섯 분이 앉아 있었다. 호암 선생이 그곳에 들를 때마다 종종 배석하는 멤버들이었다. 중앙에는 이 회장이 앉아 있고, 그분 좌측에는 홍진기 중앙일보 사장, 우측에는 김덕보 동양방송 사장이 앉아 있었다. 호출된 나는 이 회장님 맞은편에 앉았고, 내 우측에는 당시 승계 수업을 받고 있던 이건희 씨가 있었으며, 좌측에는 비서실장이 있었다. 이어서 여비서가 차를 날라왔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였다. 무언가 지나치게 엄숙하다는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나는 용감하게(?) 차를 마셨다. 당시 이십 대 젊은 혈기에, 또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갔다는 내 나름의 우쭐함도 있던 터라 그랬는지, 아무튼 나는 속으로 ‘아니, 먹으라고 주는 차인데 왜 못 마셔’라는 객기와 함께 차를 마셨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자리에서 차를 마신 사람은 나를 제외하면 딱 두 사람밖에 없었다. 물론 이 회장과 홍진기 사장이었다. 아들 이건희 씨도 김덕보 방송 사장도 차를 그대로 보고만 있다가 물렸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나 역시 차를 마시지 못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알아채고 세상눈을 뜬 이후였다. 내가 겪어 본 이병철 회장은 실로 걸출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분만큼 우리 전통문화예술을 아끼고 귀히 여기는 명사를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전문가가 민망할 정도로 문화적 소양이 풍부하고, 좋은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꿰뚫고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70년대 초였을 것이다. 당시 해군에서는 문명의 혜택을 못 누리는 섬 지방을 순회하며 의료봉사를 하곤 했다. 나는 해군본부와 협의해서 그 순회선을 타고 낙도를 돌며 민요 채집을 하기로 했다. 이 계획을 이 회장께 말씀드리니 아주 반색하며, "그 같은 일은 문공부 사람들이 해놔야 하는데 아직 꿈도 안 꾸니, 뉘 할 수 있으면 하그라. 그런데 돈은 운현궁 홍두표에게 얘기해라.” 아니, 국악을 우습게 알던 시절에 낙도의 민요까지 소중히 여겨 채록을 반기며 흔쾌히 허락을 하다니! 호암 선생의 전통문화 사랑은 이처럼 넓고도 깊었다. 며칠 후 나는 작업복에 배낭을 챙겨서 승선 준비를 하고 출근했다. 갑자기 이사실에서 호출이 왔다. 훗날 삼성그룹을 떠나 대원외국어학교를 창설한 이원희 이사의 호출이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다짜고짜 험한 소리로 화를 부리며, 캐비넷을 열더니 서류철 하나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뭐 당신만 민요 채집할 줄 알아? 나도 다 계획이 있어. 그리고 당신 라디오 소속이야 텔레비전 소속이야? 왜 텔레비전 쪽 사람하고 일해?” 그러고는 당장 운현궁에서 근무하던 텔레비전 파트 홍두표 국장을 부르더니 민망할 정도로 몰아붙였다. 같은 방에 나란히 책상을 하고 있던, 후일 삼성전자를 일으킨 강진구 이사와 최당 이사는 불편한 듯 말없이 외면하고 있었다. 아마 그날 이후 홍두표 국장은 내심 어금니를 물고 와신상담하며 훗날을 도모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소동의 속내는 뻔한 것이었다. 서로 눈치껏 이 회장에게 잘 보여 빨리 출세 좀 해 보려는 심산이었음은 불문가지였다. 호암 선생의 특출난 문화 안목 외에 또 다른 개성이라면 나는 그분의 명쾌하고도 단호한 성품을 손꼽고 싶다. 한 번은 민속악 계 원로였던 박헌봉 선생한테 가서 국악곡을 하나 복사해 오라는 분부였다. 정남희 산조를 구할 수 없느냐고 말씀했을 때도 그랬고, 그 후 백낙준 거문고 산조를 수소문해 보라는 지시에도 얼른 대안이 안 보여 막막했지만, 이번에도 악곡명이 내겐 익숙한 게 아니어서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다. 당시의 곡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흔히 알려진 곡이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아무튼 나는 정릉의 박 선생 댁을 찾아가 회장님 뜻을 전했다. 그런데 박헌봉 선생도 연세가 높아 노망기가 있었는지, "아, 이건 내가 진주에서 얼마나 어렵게 채록해 온 건데…’라는 등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복사를 기피했다. 그 후의 상황은 불을 보듯 뻔했다. 호암 선생은 모든 것을 단칼에 결론낸다. 한 번의 지시로 결론이 나야 한다. 재고나 두 번 다시라는 말이 있을 수 없다. 바로 저런 성품이 큰 기업을 일군 비결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쾌도난마의 명쾌한 과단성이 있었다. 키가 작고 가냘픈 체구에 목소리는 작고 조용했으며, 안경 너머 입가로는 늘 자애로운 미소가 잔잔히 흐르던 호암 선생이었지만, 이때만은 아주 단호한 어투로 내게 잘라 말했다. "니 다시 한번 그 집에 가면 내한테 혼난다!” 소탐대실의 전형적인 예다. 복사본을 받으면 그냥 있을 이 회장이 아니다. 더구나 그 이전부터 당시 8백여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남산에 국악예술학교를 지어 주는 등 갖가지 배려를 해 주던 상대가 아니던가. 그러니 호암 선생이 느꼈던 배신감은 여간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고, 사람의 평가는 사후에 제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라는데, 유명幽明을 달리한 호암 선생의 진면목이라면 역시 내게는 여일하게 국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꼈으며, 겪어 보지 않고는 예상할 수 없을 만큼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전문가가 부끄러울 정도의 탁월한 ‘귀명창’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와 생각해도 아쉽기 짝이 없는 사연이 있다. 한 번은 이 회장님께 명인 명창들이 더 늙거나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들이 부를 수 있는 모든 곡들을 전부 녹음해서 후세에 남겼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물론 호암 선생은 흔쾌히 공감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이은관 선생을 모셔다가 배뱅이굿을 필두로 그분의 노래를 수록했다. 그리고 박녹주, 박초월, 김연수, 신쾌동 같은 명인 명창들도 틈틈이 모셔서 녹음했다. 그 후 김소희 명창을 모셔서 그분이 부를 수 있는 민요와 단가들을 전부 녹음했다. 그런 다음 판소리 전 바탕을 녹음 기록할 차례였다. 그런데 국악사의 한 흐름은 거기서 끝났다. 언젠가는 따로 언급할 계기가 있을지 모르지만, TBC와 나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호암 선생의 문예 사랑의 열정은 시정市井의 상식을 초월한다. 여기 그분의 다방면에 걸친 국악 사랑의 진정성을 방증할 몇 가지 좋은 사례를 소개한다. 앞서 정남희와 백낙준의 음악을 구해 보라는 호암 선생의 언급이 있었다는 얘기는 얼핏 했다. 글로 전하는 얘기들이니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누군지도 모르고 찾을 길도 없는 사람의 음악을 복사해 오라는 지엄한 회장님의 주문을 받은 당사자의 입장은 실로 당혹스럽고 막막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상상이 되겠지만 차도 제대로 못 마시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정남희가 누구고 백낙준이 누구냐고 언감생심 반문해 볼 수도 없는 일이고, 일단은 "네, 알았습니다” 하고 무조건 복창하고 나오는 길밖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 보니 정남희는 월북 음악가였다. 당시로서는 알 길이 없는 인물이었다. 월북자는 이름조차 거론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시절이니 더더욱 안개 속의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의 가야고 산조를 구해 온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정남희 명인의 얘기가 나온 김에 그가 월북하게 된 동기를 전해 두는 것도 좋을 성싶다. 어느 날 박동진 명창이 내게 직접 들려준 얘기다. 정남희의 월북은 한마디로 애정 관계 때문이었다.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속담처럼 사귀던 애인을 빼앗긴 홧김에 월북을 했다고 했다. 당시 그는 요정에 나오던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 시절 서슬이 시퍼렇던 서울경찰청의 총책 장택상이 그녀를 채갔다고 한다. 찍소리도 못한 정남희는 분통을 참지 못하고 월북을 결행했다. 다시 국악 얘기로 돌아가서, 난감하던 백낙준의 거문고 산조는 어렵사리 수소문 끝에 유성기 녹음을 복사해다가 호암 선생께 진상했다. 그때 그 난제를 해결해 준 사람이 후일 민속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긴 이보형 선생이다. 이 선생은 당시 신촌에 살고 있었는데, 어렵게 집을 찾아가서 통성명을 하고 백낙준의 음반을 빌려다가 복사했다. 그 같은 인연으로 이보형 선생과는 그 후 꾸준하게 동학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사람의 관계란 참으로 묘하다는 느낌도 떨칠 수가 없다. 한 번은 당시 미술계 원로였던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선생을 모셔다가 시조음악을 녹음해 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물론 당시 나는 김은호 화백이 어떤 사람인지 알 턱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즐겨 듣던 민요나 판소리 같은 음악도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졸립다며 외면하는 시조창을 녹음해 보라니, 내심 의아하게 여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호암 선생은 국악 전반에 달통해 있었고, 모든 분야를 두루 즐기며 감상했다. 한편 그분 덕분에 나는 ‘한국 언론의 사표’니 ‘민족 지성’이니 하는 호칭으로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 선생 댁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호암 선생이 직접 청암 댁 방문을 지시했는지, 아니면 호암 선생이 원하던 음악을 수소문하던 끝에 청암 선생 댁을 가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한 시대를 이끌던 최고의 지성이요 대언론사동아일보 편집국장의 집 치고는 상상외로 초라했다는 사실이다. 그분의 가옥은 동작동 국군묘지 산자락과 연결된 흑석동 왼쪽 능선 비탈배기에 있었다. 주변의 집들도 유사했지만 청암 선생의 거처도 영락없이 퇴락한 빈촌의 모습 그대로였다. 비가 오면 새는 비를 피하려고 방 안에서 삿갓을 쓰고 살았다는 황희 정승의 얘기처럼, 청암 역시 야와육척夜臥六尺의 허름한 집에서 오상고절의 선비정신을 궁행하며 간고한 시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음을 그분의 청빈한 삶 속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같은 한 시대의 사표를 뵐 수 있었던 연분 또한 호암 선생 덕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어느 해 여름방학 때였다. 당시 국립국악원에서는 전국 중고교 음악 선생들에게 하계 국악 강습을 시키고 있었다. 교육기간이 끝나자 나는 국악원의 협조를 얻어 음악 교사들을 중앙일보사로 초청하여 사옥 9층 라운지에서 다과회를 열어 주었다. 호암 선생이 챙겨 보라는 소리음반의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고는 그분들에게 한 가지 청을 했다. 각자의 지역 학교로 돌아간 후 혹시 국악 유성기 음반이 눈에 띄면 내게 연락 좀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후 전남 강진인가 어느 지방에서 SP판 몇 장을 보내왔다. 임방울의 쑥대머리가 수록된 유성기판이었다. 그 음반을 정성껏 스트레오로 재생했다. 당시 그 같은 일을 함께 한 엔지니어는 훗날 삼성 르노자동차 사장이 된 임경춘 텔레비전 기술국의 사우였다. 아무튼 재생된 노래는 지글지글하는 소음 소리만 요란했지, 임 명창의 소리는 저 뒤편 속에서 개미소리만 하게 들렸다. 웬만한 사람이면 두 번 다시 들으래도 고개를 저을 판이었다. 그러나 호암 선생은 그 잡음 투성이의 소리를 벤츠600 안에 장착해 두곤 수시로 즐기셨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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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8: 화정 김병관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동아일보 발행인으로 존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내가 화정化汀 김병관金炳琯 선생을 직접 뵌 것은 딱 한 번이다. 언젠가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였다. 나는 안국동 쪽에서 인사동 네거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는데, 반대 방향에서 올라오던 이수성 총리를 우연히 만났다. 그때 이 총리와 동행하고 있던 분이 바로 화정 선생이었다. 그때 이 총리는 내게 "한 교수, 인사드려. 동아일보 김 회장님이셔”라며 선선한 어투로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듯 이수성 총리는 자칭 호형호제하는 사람이 수만 명이 된다는 한국의 마당발이다. 잔정이 많으면서도 호방한 데가 있어서 많은 지인들이 그분을 따랐다. 나보다 2년 위인 그를 나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대학 때부터 알고 지냈기 때문에 격의 없이 그를 좋아했다. 아무튼 이 총리를 통해서 나는 화정 선생을 뵙게 되었는데, 내가 느낀 첫인상은 유난히 온후하고 과묵하다는 느낌이었다. 언론계 인사들은 아무래도 이지적이고 예리한 구석이 있으려니 여겨오던 선입견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화정 선생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소탈하고 후덕하다고 느꼈던 경험이 지금까지도 완연하다. 화정 선생과의 해후는 이렇게 일회성으로 끝났지만, 세상만사 인연의 실타래는 누구도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화정 선생과의 인연도 이와 같아서, 나는 훗날 그분의 장례식에서 조창弔唱 가사를 쓰게 되었으니 참으로 인생살이 인연의 고리들이란 도시 그 정체를 가늠할 길이 없다. 고려대학 영결식장에서 내 조사에 안숙선 명창이 가락을 얹어 진양조의 비탄 조로 조가를 부르자 장내는 이내 눈물바다가 되었다. 인사동에서 스친 인연이 화정 선생의 마지막 이별 예식에서 일종의 해로를 통해 다시 이어졌으니, 참으로 인연이란 현묘玄妙하기 짝이 없다고 하겠다. 정녕 가시나이까 화정 선생님 만경 들 고창 골에 봄비 내리고 진국명산 삼각산에 서설瑞雪이 내리며 온누리 삼라만상 생명의 물결 가득하니, 김 회장님 당신께서도 연년익수延年益壽 만수무강 누리시리라 믿었는데, 이 무슨 비보란 말씀이외까. 이 무슨 대경실색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외까. 존경하는 화정 선생님! 나라가 어려울 때, 겨레가 곤고困苦할 때 항상 민족의 희망으로 국체를 지켜내던 민족언론 동아 가족, 국내외 자랑스런 민족의 대학 고려대에 모여든 천하 영재들, 고려중앙학원의 요람 속에서 웅지를 키워 가는 나라의 동량지재, 이들 모든 화정 선생 평생의 분신들은 어찌하라고 이처럼 홀연히 모습을 숨기시나요. 이렇게 황망히 작별을 고하시나요. 제 소리 제 장단을 아끼시며 민족문화 창달에 헌신하신 화정 선생님, 안중근 의사와 홍범도 장군 같은 신작 창극에, 중앙아시아 알마티와 타슈켄트, 러시아 모스크바, 조국의 선율 아리랑 가락으로 촉촉이 위무하던 고려인의 눈물! 이제 어느 누가 그들의 외로움을 보듬어 주고, 이제 어느 누가 문화국민의 품격을 이토록 드높여 가며 이끌어 주시나요. 안 되지요. 안 되지요. 이건 정말 아니지요. 인자하고 후덕하신 화정 선생님! 정녕 무정하게 가시나이까. 만경창파에 배 띄워서 총총히 가시나이까. 산지니 수지니 해동청 보라매도 쉬어 넘는 고봉 장성령 고개, 그 너머 피안의 세계로 정녕 가시나이까. 선조 선친 혈육의 정이 그다지도 그리우셨나이까. 비익조比翼鳥 연리지連理枝라 사모님의 자애로운 모습이 그다지도 애틋하게 사무치셨나이까. 추월이 만정할 때 청천靑天을 울어예는 외기러기처럼, 창졸간에 홀연히 이승을 하직하시니, 남은 자들 하염없이 진양조 이별가로 목이 메어 우옵니다. 언젠가 김소희 선생께 배우신 소리라며 흥타령을 부르셨지요. ‘아깝다, 이내 청춘 언제 다시 올거나. 철따라 봄은 가고 봄따라 청춘 가니, 오는 백발 어이할까! 아이고 대고 흥 성화가 났네 흥’ 그렇습니다, 화정 선생님. 사람이 비록 백년을 산대도 인수순약격석화人壽瞬若擊石火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왜 아니 모르리까만, 화정 선생님 남기신 업적 너무 높고도 커서, 화정 선생님의 후덕한 감화 더욱 깊고도 두터워서, 못내 아쉽고 애통할 뿐입니다. 동원도리東園桃李 편시춘片時春을 언제 다시 맞을 게며, 백천百川이 동도해東到海면 언제 다시 서쪽으로 되돌아오겠나이까! 부디 하늘나라 선계에서 명복을 누리소서. 천복天福을 누리소서. 영생을 누리소서.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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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7: 서암 권승관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세상살이 어찌 보면 장강의 물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통상 우리는 표면만 보며 그 대상을 이해하기 마련이다. 동시에 흘러가는 물줄기련만 그 저변에 흐르는 물살은 알 길이 없다. 우리 인생살이도 이와 같아서 세상에 널리 회자되는 인물만 기억하고, 초야에 묻힌 인재는 비록 그가 보옥 같은 존재라도 좀처럼 알아채질 못한다. 전통음악계에도 그 같은 사례가 있다. 그분만큼 국악을 사랑하고 그분만큼 국악을 몸소 익히며 심취한 예가 드묾에도 불구하고 중앙 한악계에서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초야의 보옥을 알아볼 정보나 안목이 부족했던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모든 문화예술 분야가 대동소이했지만, 전통음악 역시 일제 문화말살정책에서 가까스로 기사회생했다. 바로 그 기사회생의 생기가 움트고 뿌리내린 텃밭이라면 누가 뭐라든 남도의 예향 광주 고을이라 하겠다. 여유 있는 집안 자녀들이 일본 유학을 거치면서 누구보다도 먼저 전통예술의 소중함과 그 남다른 진가를 선구적으로 터득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일제 암흑기에도 광주 유지들은 유달리 국악을 사랑하고 국악을 육성하려고 애써 왔다. 고장의 몇몇 명인 명창들을 찾아가서 직접 배우고 교유하면서 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미음물을 떠먹이며 원기를 회복시켜 주듯, 살뜰히도 보듬으며 국악의 명맥을 이어냈다. 바로 그 같은 고마운 선각자 중의 한 분이 곧 서암瑞巖 권승관權昇官 선생이다. 전북 김제 출신인 서암 선생은 한국기계공업의 선각자요 개척자라고 할 기업인이었다. 6·25전쟁 와중에 화천기공사라는 합명회사를 차려 기계공업 분야의 초석을 놓았는데, 오늘날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세계로 뻗어가고 있는 화천貨泉그룹이 바로 그 후신이다. 서암 선생이 한국의 기계공업 육성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느냐 하는 평가는, 정부가 그분에게 어떠한 예우를 해 드렸는가를 살펴봐도 자명해지는 일이다. 한마디로 정부는 그간 그분에게 금탑산업훈장을 포함해서 훈·포장만 여덟 번 수여했다. 이처럼 서암 선생은 한국 굴지의 저명한 기업가였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광주 지역 국악 발전의 태산북두泰山北斗였다. 광주국악진흥회 초대 이사장이라는 직함이 단적으로 증언해 주듯, 서암 선생은 당시 그곳의 뛰어난 예인들과 교유하고 후원하며 광주 지역 국악 진흥의 견인차 역할을 한결같은 열정으로 해 왔다. 나남출판사에서 나온 《기계와 함께 걸어온 외길》이라는 서암의 자서전을 보면, 당시 그분이 광주 지역에서 교유했던 국악인 중에는 훗날 서울 중앙무대로 올라와서 크게 양명揚名한 명인 명창들이 한둘이 아니다. 대충만 돌이켜봐도 판소리에 임방울, 정광수, 김연수, 김소희, 박초월, 조상현 등이 있으며, 고수에는 김득수, 김명환 등이 있다. 또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국악인이나 애호가들로는 병신춤의 대가 공옥진의 아버지 공대일, 진도 지방의 명창 양홍도, 광주기예조합의 소리꾼 안채봉, 그밖에 박동실, 임세균, 김비현 등 뛰어난 예인들이 줄을 잇는다. 서암 선생은 국악을 사랑하며 후원하던 애호가나 독지가에만 머문 분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소리북의 달인인 명고수였다. 북장단 몇 가지 익혀 본 정도가 아니었다. 북장단의 속멋을 속속들이 터득한 경지였다. 그래서 그분의 장단에는 전통음악의 총체적 맛과 멋이 배어 있고, 소리꾼의 소리 길도 자연히 그분의 북가락을 따라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임방울 명창이 말년의 광주 공연에서 서암의 북장단을 주문했던 사실은 널리 회자되는 일화다. 또한 서암 선생은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고 널리 장학사업을 펼쳐 온 독지가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4반세기 이상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지를 매년 순회하며 그곳 고려인 동포들을 위한 위문공연도 하고 한글도 가르쳐 주는 일을 해 왔으며, 그 나라 유력 인사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양국의 가교 역할을 했다. 그 무렵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한국의 광주 분들이 그곳에 와서 고려인들에게 한글도 가르쳐 주는 등 여러 가지 고마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내심 반갑기도 놀랍기도 했다. 나만이 선각자인 양 실천해 오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지방 도시인 광주 분들이 그 같은 일에 앞장설 수 있었을까 심히 의아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웬만한 한국인들은 중앙아시아가 어디쯤 붙어 있는지도 모를 때였다. 더구나 그때는 직항로도 없어서 멀리 모스크바를 경유해야 했다. 그 같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광주 분들은 고생하는 핏줄들이 안됐어서 머나먼 타슈켄트까지 찾아간 것이다. 훗날 안 사실이지만, 그 같은 미담의 주역이 곧 서암 권승관 선생이셨다. 《논어》에 ‘흥어시興於詩 입어례立於禮 성어악成於樂’이라는 말이 있다. 일언이폐지해서 서암 선생의 한평생은 일찍이 십 대 때부터 이미 기업보국企業輔國의 대망을 마음속에 새겨 분기시켰으며[興], 편법이 아닌 정도 경영에 입각해서 이상적인 기업인상을 확립했으며[立], 결국에는 조화와 균형으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아우르는 음악의 속성 그대로 기업과 사회와 인생과 예술을 하나로 용융시켜 세상이 우러러 칭송하는 이상적인 인물상을 체현하며[成], 한 시대를 덕인德人이자 대인大人으로 사셨다고 하겠다. 덕 있는 부모 밑에서 효자 나듯이, 서암 선생의 덕성과 가치관을 청출어람靑出於藍으로 이어받은 권영열 화천그룹 회장은 선친의 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독일, 인도 등 세계로 뻗어가는 탄탄한 중견 기업의 기틀을 다졌으니, 가문의 융성은 물론 묵묵히 기업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신실信實한 기업인의 모범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권영열 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기여에도 남다른 소신이 있어서, 선친의 호를 딴 서암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전통예술의 본향이랄 전남 문화예술 발전에 각별한 애정과 열정을 쏟고 있다. 그 중의 한두 사례가 곧 이 고장의 인재들을 선별해서 장학금을 수여한다든가, 혹은 전통문화예술에 공적이 많은 호남지역 예술인을 선정하여 매년 ‘서암전통문화대상’을 시상해 오고 있는 예들이라고 하겠다. 특히 금년이 벌써 9회째인 서암상은 회를 거듭하면서 호남 예술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음으로 양으로 확실한 격려와 분발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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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1978년) 종목과 예능보유자국가무형문화재란 원형 보존의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무형문화재를 칭한다. 1978년까지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이 지정한 무형문화재의 종목과 예능보유자는 다음과 같다. 제1호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성경린(成慶麟)·김기수(金琪洙)·김성진(金星振)·김태섭(金泰燮)·김종희(金鍾熙)·이강덕(李康德)·박영복(朴永福)·김천흥(金千興)·장인식(張寅湜)·봉해룡(奉海龍)·이석재(李奭載); 제5호 판소리 춘향가(春香歌): 김소희(金素姫)·김여란(金如蘭), 흥보가(興甫歌): 박녹주(朴綠珠), 수궁가(水宮歌): 정광수(鄭珖秀)·박초월(朴初月), 심청가(沈淸歌): 정권진(鄭權鎭), 적벽가(赤壁歌): 박봉술(朴奉述)·박동진(朴東鎭)·한갑수(韓甲洙); 제11호 농악십이차(農樂十二次): 문백윤(文伯允); 제12호 진주검무(晉州劍舞): 이윤례(李潤禮)·김자진(金子鎭)·김수악(金壽岳)·이음전(李音全)·최예분(崔禮分)·성계옥(成季玉); 제16호 현금산조(玄琴散調): 신쾌동(申快童)·한갑득(韓甲得); 제19호 선소리 산타령: 이창배(李昌培)·정득만(鄭得晩)·김순태(金順泰); 제20호 대금정악(大笒正樂): 김성진(金星振); 제23호 가야금산조(伽倻琴散調) 및 가야금병창(伽倻琴併唱): 김윤덕(金允德)·박귀희(朴貴姫); 제27호 승무(僧舞): 한영숙(韓英淑); 제29호 서도소리: 김정연(金正淵)·오복녀(吳福女); 제30호 가곡(歌曲): 김월하(金月荷)·홍원기(洪元基)·전효준(田孝準); 제39호 처용무(處容舞): 봉해룡(奉海龍)·김기수(金琪洙)·김태섭(金泰燮)·김천흥(金千興)·김용(金龍); 제40호 학무(鶴舞): 한영숙(韓英淑); 제41호 가사(歌詞): 이양교(李良敎)·정경태(鄭坰兌); 제42호 악기장(樂器匠): 김광주(金廣冑); 제45호 대금산조(大笒散調): 강백천(姜白川); 제46호 대취타(大吹打): 최인서(崔仁瑞); 제50호 범패(梵唄): 박희덕(朴喜德)·장태남(張泰男)·김명호(金明昊); 제51호 남도(南道)들노래: 설재천(薛在天)·조공례(曺功禮); 제56호 종묘제례(宗廟祭禮): 이재범(李在範); 제57호 경기민요(京畿民謠): 안복식(安福植)·이관옥(李觀玉)·이운란; 제59호 판소리고법: 김명환(金命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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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신영희·안향련·김동애 일행 남도민요 '육자배기' ‘전라도 산타령’ ‘개고리타령’ Korean folk song 1975년 촬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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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기] 김소희, 춘향가_오리정_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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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인간문화재 김소희 명창 단가 '운담풍경'판소리 인간문화재 김소희 명창 단가 '운담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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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5정범태가 밝힌 사진 설명 정범태 선생이 남긴 국악계 에피소드는 끝이 없다. 지난 회에 이어서 이번에도 귀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로 한다. 다음은 만정 김소희 선생의 등장에 대한 것으로 12세 때의 일이다. 승주군 낙안면 송만갑 선생 댁에서 소리 공부를 하고 있었다. # "순천에 협률사가 들어왔다. 당시 협률사에는 정정렬, 이화중선, 박록주 등이 있었는데 순천에서 노래로 낙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때 이화중선이 송만갑 선생에게 인사를 왔다. 이때 송만갑 얼굴에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듯 회색이 만면했다. 그래서 이화중선이 궁금해서 무슨 말이라고 붙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요즘 좋은 일이 있다. 보물이 하나 들어왔어’ 송만갑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무슨 좋은 일인데요?’ 이화중선이 선생의 앞에 가서 조바심을 냈다. 송만갑은 말을 할 듯 말 듯 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이화중선은 선생이 그러면 그럴수록 궁금증이 더했다. 이튿날 이화중선이 다 선생에게 물었다. ‘보여주면 달라고 하지 마라.’라고 했고, 이화중선은 ‘절대로 달라고 하지 않을게요.’라고 했다. 선생이 옆방에 대고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모깃소리로 예라고 답하며 나왔다. 볼이 발그레한 소녀였다. ‘아가 단가를 하나 해 봐라’ 아가가 단가를 뽑았다. 이화중선을 몇 소절을 지나지 않아 타고남 목이란 것을 알았다. 이화중선이 말했다. ‘선생님 아까 그 약속 못 지킬라요. 내가 데리고 갈라요. 저 주세요.’ 이렇게 하여 이화중선이 데리고 서울로 와 지도를 하게 된 애기가 바로 김송희였다.” 이렇게 이화중선의 눈으로 명창의 재목으로 선발된 김소희는 정정렬의 문하를 거쳐 한갑득, 한애순, 박동실 명인 명창을 거쳐 판소리를 취입하여 명창으로 섰다. 목이 좋은 제자를 두는 것이 얼마나 뜻있는 일인가를 알게 하는 에피소드이다. 김소희는 스승들의 소리 중에서 장점만을 자기 것으로 삼아 독특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이로써 그의 이런 특징을 ‘섞어제’라고도 하고 ‘만정제’라고도 한다. 제자로는 안숙선, 신영희, 박윤초, 박계향, 성창순, 오정혜 등이 있다. 다음은 일제강점기 동기(童伎)가 머리를 올리는 이야기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평양기생 영산홍의 사연이 있는데, 1930년 조흥은행 평양지점 민 두취(전무)가 영산홍의 머리 올린 값을 하기 위해 은행 지점을 냈다는 얘기다. 정 선생은 일반적인 머리 올리는 값을 간단히 정리하였다. #"일제 때 동기의 머리를 올리는 사람은 대개 큰 부호나 토호, 유지, 조정의 친일파 대감, 도, 평의원 정도는 되어야 머리를 올린다. 동기는 권번에서 머리를 올려 줄 동기를 찾아야 한다. 서방을 얻으면 한 재산을 받는데 이때 그동안 빚진 것을 갚기도 한다. 동기는 서방을 정하고 요리집에 나가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없지만 1930년대까지만 해도 동기가 머리를 올리는 것은 다 이런 경우였으니 기생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1930, 40년대 동기가 있어 많은 에피소드를 낳은 요정은 남원의 명문장, 진주의 봉황각, 목포의 청수장, 나주의 영산관, 진주의 서울관이 알려진 곳이고 서울의 명월관, 국일관, 식도원, 천양각을 꼽았다. 1930년대 초 진주 촉석루에서 명창들이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장소와 시기 정도만 알려졌을 뿐 그 면면을 밝히지 못하고 전해졌다. 1930년대 진주는 한 집 건너 기생집이 많아 명창들이 모여들었다는 얘기의 배경으로, 또한 어떤 유명한 명창이 이 사진 중에 들어 있을 것이란 정도로만 설명되는 사진이었다. 그런데 정범태 선생이 바로 이 사진의 중요 면면들을 밝혀냈다. 조상선(창극), 송만갑(명창), 한성준(고수), 김창룡(명창), 이동백(명창), 오태석(가야금), 정정렬(명창) 등이 함께 찍었다. 이 사진 설명은 1998년 지상을 통해 알렸는데, 정 선생이 이 사진을 소장했던 명창으로부터 확인한 것이다. 이 렇게 정확하게 밝힌 것은 전공을 살린 업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국악인들과의 교류가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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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 - 상주모심기, 상주아리랑 (노래/박정선)[KBS국악관현악단 초청 연주회] 민요 - 상주모심기, 상주아리랑 (노래/박정선) (2016.08.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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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한악계의 별들" (양장)이 책은 가곡 [비목]의 작시자로 널리 알려진 한명희 선생이 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보석 같은 인연들의 이야기를 역사라는 시간의 대리석에 새겨놓은 것이다.작가가 유려한 문체로 새겨놓은 주인공들은 우리 한악(국악)계의 터를 다듬고 보듬어 온 명인 명창들과 한악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분들이다.그리고 우리의 문화가 된 아리랑과 한국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흥, 멋, 운치)에 대한 해박한 고찰은 한국의 전통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길라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서울대 음대 국악과를 나와 TBC(동양방송) PD 시절부터 국악에 남다른 애정과 사명감을 갖고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우리 국악계를 이끌어 온 분들과 각별한 교분을 나누어 온 저자 또한 우리 음악을 계승 발전시켜 온 산증인이다.대학교수와 국립국악원 원장을 지내면서 『하늘의 소리 민중의 소리』 『우리가락 우리문화』 『한국음악, 한국인의 마음』 『하늘의 음악이란 무엇인가』 『학 떠난 빈터에는』 등의 저서는 우리 음악계의 소중한 문헌들이다.004서문인연 한 자락1부010가야고 병창으로 그린 비천상 _ 강정숙 명창012사물놀이로 세계를 제패한 선구자 _ 김덕수 명인016반듯한 기개 꼿꼿한 자존심 _ 김소희 명창022회심곡의 프리마돈나 _ 김영임 명창026월하의 음악 세계가 그립다 _ 김월하 가객028천진무구한 가섭의 염화미소 _ 김천흥 선생034둥둥 북을 울리면 신명이 솟는다 _ 김청만 명인036경기민요의 외연을 넓혀 가는 열정 _ 김혜란 명창038경기민요의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주인공 _ 묵계월 명창041국악교육에 헌신한 선견지명 _ 박귀희 명창044끈기와 집념의 화신 _ 박동진 명창048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해 내는 능력과 수완 _ 박범훈 교수053늦가을 햇살녘의 잔상 _ 박병천 명인, 김영태 시인059청초한 유덕遺德은 한악계의 등불 _ 성경린 선생061학문의 바탕 체상體常을 튼실히 한 학자 _ 송방송 교수063소리꾼의 판소리 사설 정립 _ 송순섭 명창065장인 정신의 사표가 될 판소리 여왕 _ 안숙선 명창076서도지방의 맛과 멋을 이어 준 고마운 은인 _ 오복녀 명창078동초제 판소리 정립에 기여한 공적 _ 오정숙 명창081소쇄원 광풍각의 죽림풍류 _ 원장현 명인085실사구시의 학문을 궁행한 성실한 학자 _ 이보형 선생088고소한 해학이 일품인 경중예인鏡中藝人 _ 이상규 교수090대금산조의 달인 _ 이생강 달인093노래로 그려 낸 한 시대의 풍속사 _ 이은주 명창096가야고 음악의 경중미인 _ 이재숙 교수099소중한 문화지킴이 한국정가단 _ 이준아 가객101노래와 인품이 교직된 경기민요의 대가 _ 이춘희 명창103학덕과 인품을 겸비한 음악학의 태두 _ 이혜구 박사107심금을 퉁겨서 노래하는 국민가객 _ 장사익 가걸歌傑110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소리꾼 _ 정광수 명창113피리로 세상을 보듬어 온 외곬 인생 _ 정재국 명인116영년퇴은이 유발하는 무정세월 _ 조운조 교수119놀이마당문화의 파수꾼 _ 지운하 명인122한국전통음악연구회의 창단 _ 최경만 명인125정악 가야고의 법통을 잇는 금객琴客 _ 최충웅 명인130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작곡가 _ 황병기 교수133내 삶의 인드라망을 수놓은 한악계 별들 _ 김연수, 이창배 외2부144전통음악을 사랑하는 고마운 기업인 _ 초해 윤영달 선생148초야에 묻힌 국악계의 보옥 _ 서암 권승관 선생153어느 인연이 그린 삶의 무늬 _ 백석의 연인 자야 여사158기인처럼 살다 간 풍류객 _ 연정 임윤수 선생161정녕 가시나이까 _ 화정 김병관 선생165유어예의 귀명창 _ 호암 이병철 선생175한악계의 은인 _ 조선일보 방일영국악상179문화가 된 노래 아리랑185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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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숙 - 가시밭길 걸으며 지켜 온 불 같은 김연수제 소리뛰어난 목구성 하나로 대중을 휘어 잡으며 반(班)ㆍ상(常)을 뛰어넘었던 역대 명창들. 구전되는 판소리 다섯 바탕의(춘향가ㆍ심청가ㆍ흥부가ㆍ수궁가ㆍ적벽가) 가사를 한 자도 빼놓지 않고 기억해 내는 그 총기는 놀라운 것 이었다. 소리 내용의 변환이나 단원이 달라질 때 사이사이에 껴 넣는 임기응변적 추임새가 이른바 ‘붙임새’다. 갑자기 사설 가사를 잊거나 분명히 안 떠오르면 붙임새를 절묘하게 이용하여 위급한 순간들을 모면하곤 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인, 명창들의 소리에도 붙임새를 적절히 사용한 경우가 적지 않다. 고사성어나 순 한문투로 열거된 사설 내용을 사실은 소리꾼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불러 댄 경우가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이런 오살할 잡놈 같으니라구······.”, "요런, 시러배 같은 연놈들 하는 짓거리라능게 겨우······.” 등의 익살과 욕설로 얼렁뚱땅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걸쭉한 소리꾼들의 이런 붙임새 속임수가 요즘이라고 없을 리는 없다. 그러나 ‘동초제’ 판소리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아니리, 발림, 붙임새는 물론 가사 전달까지 확실하며 소리 마디마다의 맺고 끊는 매듭이 분명하다. 이는 살아 생전 동초 김연수(金演洙, 1907~1974)의 성격과도 통한다. "우리 선생님의 성격은 한마디로 불꽃이었습니다. 소리에도 경우가 반듯한 것이라며 흐지부지하거나 얼버무리는 건 딱 질색이었어요. 똑똑한 가사 발음으로 슬픈 대목에선 울리고 웃길 때는 박장대소케 하라고 늘 가르치셨습니다.” 김연수 씨의 유일한 제자로 ‘동초제’ 소리 맥을 이어 내고 있는 여류 명창 오정숙(吳貞淑ㆍ57, 1935년 6월 21일생) 씨. "소리가 아니었으면 살아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란 박복한 운명을 털어놓기까지엔 한동안의 망설임이 계속됐다. 준인간문화재(1982년 9월 30일 지정)로 10년 가까이 있다가 1991년에 인간문화재로 지정(제5호, 춘향가)될 때는 자기 설움에 복받쳐 평평 울었다고 한다. 경남 진주시 옥봉동의 외가에서 태어난 오씨는 세 살 적 부모가 갈라서면서 아버지 오삼룡(吳三龍) 씨를 따라 전주에서 성장했다. 환갑이 가까워지는 지금의 나이에도 어머니 문설행(文雪行) 씨에 대한 정은 별로 없다고 한다. 어렸을 때 나무등걸에 걸려 넘어져도 ‘아이구, 우리 아버지’였지 어머니라고는 안 불렀다는 것이다. 부친은 전북 완산 출신으로 전라 좌도 농악패들이 손꼽던 유명한 상쇠였으며 한때는 창극단 활동도 한 전통 예술인이다. "부모 덕봐야 자식 덕본다더니 자식 복도 없어요. 무남독녀로 태어나 친 혈육 하나 없으니 제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더욱 죽으나 사나 소리밖에 없는 것이 ‘내 인생’입니다.” 오씨는 자식보다도 더 소중한 ‘동초제’ 소리와 그 소리의 맥을 이어주는 제자들이 유일한 희망이며 삶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이일주(李一珠, 전북 지방 무형문화재, 전주대사습놀이 제5회 대통령상, 현 전주 도립국악원 강사), 조소녀(調小女ㆍ51, 제2회 남도문화재 판소리 대통령상), 민소완(閔小完ㆍ47, 전주 개인 학원), 은희진(殷熙珍ㆍ45, 국립창극단원), 김소영(41, 전북 도립창극단 수석), 윤소인(尹昭仁ㆍ43, 국립국악원), 강정숙(姜貞淑ㆍ39, 국립국악원), 홍성덕(洪性德ㆍ43, 서라벌창극단 단장), 김정민(金貞敏ㆍ40), 김규형(金奎亨ㆍ32), 강선숙(姜仙淑ㆍ31, 극단 ‘민예’ 단원), 남궁정헌(南宮貞憲ㆍ30, 중앙대 국악과), 최영란(崔英蘭ㆍ25, 대전국악원), 박미애(朴美愛ㆍ25, 이대 국악대학원), 나태옥(羅泰玉ㆍ22, 국립창극단) 씨 등이 각 분야서 왕성한 활동을 하며 정정렬(丁貞烈)―김연수―오정숙으로 이어지는 창맥을 지켜 내고 있다. 이들 외에도 수십 명의 문하생들이 더 있어 오씨의 후계 걱정은 마음놓아도 된다. 국악계서 괴팍하고 오기 많기로 알려져 후학들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동초 김연수 씨는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출신으로 14세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당시로는 드물게 서울 중동중학교(5년제)를 졸업한 창악계의 지성인이다. 향리에서 축음기를 통해 판소리 공부를 하다가 29세 때 상경, 송만갑(宋萬甲), 이동백(李東伯), 정정열(丁貞烈), 김창환(金昌煥), 유성준(劉成俊) 명창 등을 만나면서 본격 명창 수업에 뛰어든 인물이다. 특히 독보적인 정정열(1873년생) 명창의 춘향가를 물려받아 오정숙 명창에게 전수했다. 김연수 창극단을 통해서도 명성을 날렸고 1962년 초대 국립창극단장을 지내며 1964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됐었다. 비위 안 맞으면 욕도 하고 큰소리도 잘 쳤지만 죽기 전날까지 후학을 지도했다는 일화를 갖고 있다. 와전과 오자가 많던 판소리 사설을 해박한 그의 지식으로 정리해 놓은 공로는 크게 기억되고 있다. 다섯 바탕 중 춘향전 창본은 김씨 생전에 출간 됐으나 네 바탕은 빛을 못 본 채 1974년 3월 9일 간암으로 급서하고 말았다. 이러한 스승 문하에서 제대로 소리 학습한 오씨다. 철들기 전 7세 때 전주와 익산을 오가며 이기권(李基權, 익산 출신 정정열 명창 수제자) 씨한테 소리맛을 들인 후 14세 때 김연수 씨의 ‘우리창극단’에 입단하며 사제간 만남이 시작된다. "선생님 보다는 차라리 부모였어요. 이리 ‘소라단’ 다산 정씨 제각에서의 백일 독공 이후 후계자로 지목하셨던 것 같습니다.” 23세 때는 서울에서 만정(晚汀) 김소희(金素姬)를 만나 3년여 소리 공력을 보태 오씨의 소리는 더욱 힘있게 뻗는다. 오씨 소리의 춘향가 중 어사출두 후 춘향모가 신바람나 휘젓고 나오는 대목은 앉았던 사람이 일어설 정도로 의기양양함을 준다. 1975년 제1회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부 장원, 제1회 남도문화재 대통령상(1983년), KBS 국악대상 수상(1984년) 등 묵직한 수상 경력이 다채롭다. 베를린 세계민속음악제(1985년), 제4회 국제평화음악제(1986년 바그다드), 일본 무사시노 예술제(87년), 유럽 순회 공연(89년)과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90년 10월 14일)까지 참석, 대중의 열광과 환호도 받아 보았지만 오씨 가슴은 아직도 덜 채워진 예술혼과 여자 일생의 각박함으로 텅 빈 듯하다고 한다. 남편 배기봉(裵基峰ㆍ57, 국악협회 전북지부장) 씨는 충남 논산 출신으로 고교 시절 전국고수대회(제3회)에서 일등한 한량북의 명인. "좋은 소리 들으면 여운이 3일 간다.”는 시어머니의 이해 속에 오늘까지 살아 왔다고 명창의 험했던 인생길을 말한다. 맹장 밑에 약졸 없다고 이렇게 해서 김연수 씨의 올곧은 소리제는 오정숙 씨를 통해 탄탄히 살아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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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9국악신문 특집부 「국악신문」의 박헌봉 선생 회고록 ‘國樂運動 半生記’는 제98호부터 6회에 걸쳐 수록했다. 원래는 「신동아(新東亞)」 1966년 7월호부터 9회에 걸쳐 발표한 글이다. 결국 작고하기 11년 전에 쓴 것이니 이후 10여년의 생애는 진술하지 못한 것이 된다. 본 회에서는 10여년의 생애 중 중요한 업적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박헌봉 선생의 민속악 발전에 기여한 실상이 제시 될 것이다. #해방 직후 혼란기 국악을 재건한 업적은 무엇보다 앞서 평가되어야 한다. 다음은 전 한국불교민속학회 황윤식(1934~2020)회장의 이에 대한 평가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민속음악계는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신분사상에 의하여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였고,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는 민족혼이 강하게 배어있다고 하여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한 우리 민족은 해방의 환희를 민속음악을 통하여 한껏 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민속음악은 천시의 대상도 아니고 탄압의 대상도 아닌,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재평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기산 박헌봉 선생을 중심으로 국악건설운동본부, 국악학교 기성회 등이 조직되었고, 이를 통해 국악의 새로운 발전을 추구하려는 문화운동이 전개되어 갔다.” #1960년 3월 5일 국악예술학교가 개교했다. 이는 첫 손에 꼽히는 업적이다. 민속음악 교육뿐만 아니라 민속악 위상 정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이후 학교는 세 번에 걸쳐 개명을 하게 되는데,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로 바뀌며 발전해왔다. 지금은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이후 규모를 갖춘 학교로 발전시킨 박귀희 선생만을 기억하지만 아무것도 없던 초창기부터 국악을 정상의 궤도에 올려놓고, 학교의 체계를 정립한 박헌봉 선생의 업적 역시 중요한 것이다. 물론 혼자만으로 이룬 것은 아니다. 향사 박귀희 선생, 만정 김소희 선생이 학교 설립에 많은 힘을 보탰고, 지영희, 성금연, 한영숙선생 등 많은 국악인들이 뜻을 모았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국악의 명인들을 제도적인 교육기관에서 수용하면서 효과적인 교육이 가능하였다. 또한 전국에 흩어져 있던 민족예술인을 정규 교육기관에 수용하게 되면서 이들에게 민족예술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했다. 이와 같은 과정은 국악교육의 정상화를 기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국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확산시킴으로써 국악발전의 한 이정표를 마련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이들을 규합하여 함께한 지도력은 당시 선생의 열과 성에 동의한 결과이다. 국악계의 회고 중에는 "국악예술학교를 중심으로 국악인들을 규합하지 못했더라면 민속악은 아악계에 눌려 제대로 된 평가와 대우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문화재 지정은 고사하고 존재마저 유야무야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상황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한 생각이 든다.”라는 발언이 있게 된 배경이다. 또한 이에 더하여 사단법인(社團法人)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을 설립하여 후에 현 한국국악협회(韓國國樂協會)로의 발전을 견인했음으로 기성국악인(旣成國樂人)의 단합과 국악계 혁신(革新)에 디딤돌을 놓은 일은 주목되는 업적이다. 생님이 품었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소중히 전승되어야 한다. #선생의 두 번째 업적은 민속악계 국악인들에 대한 국가적 예우를 제도화 한 사실이다. 즉, 당시 문화재관리국의 기예능보유자 지정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사실 60년대 이전의 민속악계 국악인들은 탁월한 예술적 재능이 있다 해도 교육수준이 극히 낮다는 이유로 예능에 대해 이론적 투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전무했다. 그러니 오늘날 소위 인간문화재(국가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의 지위를 누리고 예술성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과, 오늘날과 같은 국악의 진흥을 가져오게 된 것은 선생의 공로이다. 1964년 6월에 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을 조사했고, 이를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꼭두각시놀음’으로 지정하였다. 1964년에는 판소리 ‘춘향가’를 조사하고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로 지정하였다. 1965년에는 ‘진주농악’을 조사하고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하였다. 1966년에는 ‘진주검무’를 조사하고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하였다. 1965년에는 진주 농악을 조사하고 이듬해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하였다. 1966년에는 ‘거문고산조’를 조사하고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로 지정하였다. 이상과 같은 초기 민속음악의 제도적 관심과 지원을 이끌어 낸 것은 선생 자신이 문화재위원으로 위촉 받은 상황이어서 가능했고, 반대파나 다른 분과 위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도 국악에 대한 이론과 설득력 때문이다. #세 번째는 1966년 이론서 ‘창악대강(唱樂大綱)’의 대작 저술 실적이다. 이는 이선유(李善有, 1873~1949)와 유성준(劉成俊, 1873~1944) 같은 경남 지역의 판소리 명창들과의 교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선유 판소리 동편제 명창으로 1933년에 ‘오가전집(五歌全集)’을 펴낸 판소리 이론가인데 창악뿐 아니라 국악 관련 이론을 배웠다. 유성준은 경남 하동에서 박귀희 등에게 판소리를 지도하기도 한 명창이다. 역시 이분으로부터도 창악을 배웠다. 1934년에 사재를 털어 ‘진주음률연구회’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역임한 전후의 일이다. ‘창악대강’은 판소리와 단가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서술하였고, 정확하면서도 방대한 주석을 단 것이 특징이다. 첫 째는 ‘창악의 개념’을 제시했다. "唱樂은 우리 겨레의 民俗音樂”이라고 선언하면서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이 본디 창악의 참모습"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창악의 범주로 단가, 판소리, 창극을 주요하게 다루었다. 다음은 ‘창악의 기원과 유래’를 제시했다. 판소리 광대의 기원과 유래, 전승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증하였다. 광대의 유래에 대해서는 무속과 연관시켜 고찰하였고, 창악의 초기 모습을 굿판과 잡희에서 찾아내어 이를 민족음악의 출발로 보았다. 이 책을 통해 선생의 국악관과 연구자의 자세를 확인할 수가 있다. #네 번째는 경남의 대표 지역축제 ‘개천예술제’의 창안이다. 이 축제는 1949년 정부 수립 1주년을 기리고 예술문화의 발전을 위해 시작되었다. 당시 행사는 10월 3일 개천절부터 6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되었고, 이러한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대통령이 참석하는 예술제로 규모가 커졌는데, 1974년부터는 예술의 대중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행사의 변화를 꾀하였다. 1981년 제31회 대회 때에는 개천예술재단이 설립되었으며, 1983년에는 경상남도 종합예술제로 지정되었다. 2000년에는 진주문화예술재단이 설립되면서, 이후 개천예술제는 전통문화예술과 지역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로 이 행사를 선생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한다. 1949년 전후는 대한국악원의 원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때였다. 문교부 예술위원회의 음악위원으로 국악뿐 아니라 전통예술 문화 조사를 준비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에서 고향에 축제를 제안한 것으로 해방후 출현한 최초의 축제를 선생이 창안한 것이다. 선생은 「국악대관」(國樂大觀)의 저술에 힘쓰시다가 1977년 5월 8일 세상을 떴다. 선생의 빛나는 공적은 국민훈장 동백장(冬栢章)과 금관문화훈장(金冠文化勳章)으로 국가가 인정하였다. 이상에서 간추린 선생의 업적은 더 많은 연구로 더해 질 것이다. 「국악신문」 기사를 통해 보면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선생을 기리는 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 2013년에는 산청군에 ‘기산국악당’이 건립되었다. ‘사단법인 기산국악제전위원회’가 본격적으로 현창 사업을 맡게 되면서, ‘기산국악제전 및 전국국악경연대회’ 등 선생을 추모하고 정신을 잇는 여러 행사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뜻 깊은 창악이 탄생하였다. ‘산청아리랑’이다. 박범훈 작곡에 홍윤식 작사로 산청군이 낳은 명사들과 명소, 지리산의 아름다움과 지역의 특색들을 세마치장단의 경쾌함으로 묘사했다. ‘산청아리랑’은 선생이 다시 산청으로 돌아와 다시금 고향을 품은 듯한 푸근한 느낌마저 주기도 한다. 현재 산청군에서 개최하고 있는 각종 행사에서 이 지역 문화를 대표하는 노래로 불리고 있다. 이상에서 4회에 걸쳐 박헌봉 선생의 회고록 '國樂運動 半生記'를 살폈다. 이를 통해 박헌봉 선생이 국악의 가치를 정립하고 그 바탕에 민속음악이 있다는 소중한 논지를 정립하는데 기여한 거의 유일한 인물임을 확인했다. 이에 대해 국악신문이 일반 독자들에게 확산 시키는데 기여하기 위해 선생의 회고기를 재수록 한 것이다. 이는 곧 「국악신문」의 ‘국악의 위상정립 사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선생이 집필하고 출간을 보지 못한 ‘국악대관’과 ‘국악사’는 선생이 말년에 혼신을 기울인 것으로 상당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원고가 발굴되기를 고대한다. 이에 국악신문은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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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8국악신문 특집부 박헌봉 선생의 <國樂運動 半生記>는 해방전후 국악의 위상 정립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자전적인 글이다. 이를 「국악신문」은 제98호 2000년 10월 25일자부터 재수록 하였다. 취지는 당연히 국악의 중심이 민속악에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제6회는 ‘초대 내각마저 국악을 외면’하여 설득하고 이해시켜 지원하게 하는 상황을 회고한 대목이다. 국악학교설립기성회는 이승만 초대 내각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래서 요리집 청향각(淸香閣)에서 주요 각료들을 초청하여 국악감상회를 개최했다. 우선은 각료들이 국악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범석 국무총리 이하 9장관 3처장을 대상으로 선생이 국악의 가치를 설하고, 이어 김소희와 박귀희 명창을 통해 국악학교설립기성회의 난관을 호소했다. 공연은 판소리, 민요, 기악곡, 춤 등 전 분야를 통해 국악의 분야를 보여주었다. 각료들은 나름 심취한 모습으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더불어 일부 각료는 자진하여 지원을 하겠다는 언약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전례로 보아 이 언약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언약한 각료를 개별 방문하여 도움을 청하려고 연락해도 정무가 바쁘다는 답변만이 올 뿐이었다. 다만 총무처장 전규홍, 동아일보 사장 최두선, 채신부 장관 후보 장기영씨는 격려와 후원금을 지원해 주었다. 이 후원금은 유용하게 쓰게 되었다. 1949년 7월 경, 부민관(府民館) 개관기념 공연으로 ‘향토민요대전(鄕土民謠大典)’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해방후 전국 대상 지역민요를 무대화 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규모도 컸고, 의미도 있어 꼭 치러야 할 무대였다. 이 기념공연에는 신익희, 윤보선, 이기붕 등 주요 인사들이 참관을 하여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결과로 정부에서 2백 3십여만환의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물론 큰 돈은 아니지만 국가 지원금이라서 인건비를 제하고는 예산을 비축하기로 하였다. 1950년 봄, 시민위안 공연을 준비했다. 시민위안이라는 명분은 실내보다는 야외여야 했고, 창경원이라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 문제는 이승만 대통령이 창경원 등의 궁궐을 보호하라는 엄명이 있어 이를 관리하는 구황실재산관리국이 이를 용납할 리가 없다는 소문이나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장 이기붕을 만나 요청했다. 예상대로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내었다. 당연히 구황실재산관리국 이병주 국장은 대통령의 용단을 따르겠다며 허가와 관련한 협조를 하겠다고 했다. 장소문제가 해결됨으로 6개 국악단체를 동원하여 재담 같은 프로그램을 배치하는 등 시민위안을 목표로 구성했다. 공연료는 창경원 입장료 80원에 20원을 더하여 받는 것으로 낙착(落着)을 보았다. 대회는 대성공이었다. 돈암동과 원남동이 막힐 정도라 기마대가 출동하여 공포탄을 쏘며 관리할 정도였다. 당시 여론은 해방후 최대인파 집결이라고 보도했고, 창경원 관객도 최고였다고 하였다. 시민위안대회의 성공 여세는 이어져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이를 대학생 국악행사로 방향을 정했다. 당시 선생의 장남 예종(당시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3년)을 통해 전국 대학생 대상 학생국악동연회(學生國樂同演會/회장 연세대생 박노우)를 조직, 450여명의 회원을 확보한 상태였다. 이 공연 역시 국악보급을 위해서는 대학생들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는 당면과제로 관심 속에 준비되었다. 학생 중에는 호기심으로 회원이 된 이들도 많았지만, 의외로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학생들이 있었기에 고무되어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행사는 7월 3일, 그러나 8일을 남기고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당연히 행사는 무산되었다. 이 전쟁은 모든 분야의 발전을 가로막았으니 국악에도 지대한 지장을 주었음은 물론이었다. 특히 대학에서의 국악 운동은 싹을 틔우지도 못한 것이다. 제7회는 ‘자유당 때 大統領에게도 呼訴’라는 제하로 한국 전쟁 후의 상황을 증언하였다. 폐허에서 국악의 씨를 다시 틔우려면 당연히 재정이 절실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직접 호소할 기회를 갖고자 했다. 최규남 문교부장관에게 가능하도록 다리를 놓아 달라고 협의하였다. 그러나 소식이 없었다. 다시 내무부장관 이익홍을 찾아가 국악을 살릴 길을 열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통보가 왔다. 그런데 단 30분만 시간이 된다는 것이었다. 다급히 대학생 중에서 기량있는 학생을 선발하고 명인 명창을 꾸려 경무대로 갔다. 가설로 꾸민 무대 옆에는 대통령 내외가 앉았고, 그 옆에 두 장관이 양수거지(兩手据地)로 서있었다. 친히 방문자를 악수로 치하해 주어 안심한 분위기에서 공연을 하였다. 대통령도 진지한 분위기로 함께하는 것에 고무되어 공연은 예정보다 20분을 더하여 끝났다. 대통령 내외의 미소를 본 박헌봉 선생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각하 자고로 예와 악이 무너지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는데 지금 우리 현실이 바로 예괴악붕(禮壞樂崩)입니다. 각하께서 지금 칭찬하신 명창과 명인들이 연습할 장소가 없어 방황하고 있읍니다.” 이에 두 장관이 뒤에서 옷자락을 당기며 말렸다. 그래도 선생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 말을 이었다. 그러자 당황한 최장관이 말을 가로 막았다. "각하 대학생들과 국악인들에게도 매년 일정액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거짓 보고이지만 선생은 두 장관의 체면을 위해 꾹 참았다. 다행히 대통령이 두 장관에게 양악만큼 국악에도 지원을 하라고 지시하여 결국 소득은 거둔 것이다. 이렇게 경무대를 방문하여 호소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예산 부족이라는 답변이었다. 결국 선생은 화병으로 병석에 들게 되었다. 병명은 황달(黃疸)이었다. 그러나 적수공권(赤手空拳)에 치료비 문제로 입원은 못하고 여관방에서 견뎌야 했다. 무교동의 락천여관인데, 주인장은 의원까지 불러 치료해 주었다. 물론 여관비와 치료비도 모두 외상이었다. 다행히 와병 7개월만에 차도가 있어 일어나게 되었다. 선생은 50을 넘긴 나이에 홀로 눈물 짖는 신세로 서글픔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1958년 2월, 사경(死境)을 헤치고 나서 다시 뛰었다. 김은호, 문영희, 이병각, 박귀희선생과 함께 장교구락부(張橋俱樂部)를 구성하고 학교설립 후원금을 모집하는 일에 매진했다. 유수한 재벌들과 사회 동호(同好)를 찾아가 호소했다. 다행히 삼성의 이병철씨만 500만환을 기부했다. 이 500만환으로는 학교설립은 불가했다. 1959년 초, 이재학 국회부의장을 필두로 이병철과 자유당 중진들을 운니동 박귀희 선생 댁으로 초청하여 저녁을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선생은 산궁수진(山窮水盡), 이 자리가 최후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선언(宣言)하였다. 선생의 떨리는 손에는 원고뭉치가 들려있었다. "각종 경축 행사나 외국 귀빈이 올 때면 국악을 소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왔습니다. 장고와 가야금을 둘러메고 고생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국악의 진가를 알게 될 날이 오겠거니 했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고관대작인 여러분조차도 이처럼 국악을 무시하고 홀대하는 것을 보면 지난날 우리들의 노고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 4천장에 달하는 원고를 모두 불 살라버리고 심산유곡의 절을 찾아 여생을 마칠 생각입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 이 부의장이 다른 장관들은 정무에 바쁜 탓이고, 문교부와 재정부에서 각 1천만환을 준비한다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이 말이 끝나자 이병철씨가 받았다. "정부에서 그만한 돈을 기부한다면 나도 작년의 두 배를 기부하지요.”라고 밝혔다. 예상 외의 결과다. 총 3천 5백만환이 약속 된 것이다. 그러나 정부 지원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이하단, 이용주, 방일영씨 등이 참가하여 관훈동에 학교 부지를 사고 설립 인가를 받게 되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9회는 국악예술학교 설립 과정을 진술한 부분으로 마지막 회의이다. 1960년 3월 5일 국악예술학교가 개교되었다. 학생은 27명이고 교사는 22명이었다. 선생은 "나는 이날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5천년 한국역사상 최초의 국악예술학교가 그 문을 연 날이기 때문이다.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 나는 그날 목이 메어 취임사를 제대로 읽을 수 없었고, 자리를 같이 했던 국악인들도 모두 뜨거운 감루(感淚)를 흘리고 말았다.”라고 회고했다. 이는 선생뿐만 아니라 당연히 우리 국악사에서 기념할 만한 일대 경사인 것이다. 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시국은 격동에 휘말렸다. 개교 15일 만에 4.19가 일어났고, 8월에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 모든 기관장들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아세아재단’의 후원을 받는 전국 민요조사이다. 유기룡, 지영희, 김광식, 이태극, 정병욱 등이 함께한 조사로 전국 산간벽지에서 조사되었다. 70세를 넘긴 이들을 대상으로 희귀한 민요 300여곡을 채록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할만한 민속음악을 조사하여 나갔다. 1964년 4월 서울시의 협조로 관훈동에서 전 조선신궁(朝鮮神宮) 사무실인 남산으로 교사를 옮겼다. 위치나 규모에서 개선되었다. 학생수도 270여명, 20여종의 악기 300여개를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교과 과정도 국어 영어 수학 같은 일반과목도 하고, 창작, 농악, 무용, 시종 등 과목도 늘였다. 또한 구미 각국의 국제 대회 등에도 출전시켜 예능을 향상시켰다. 이상과 같은 선생의 공적은 문교부 표창과 서울시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공적을 인정한 것이다. 반생의 회고록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아직도 우리나라 국악의 길이 험준하기만 하니 국악의 참다운 민족음악의 자리에 서는 날까지 헤쳐 나갈 각오이다.” 국악조직창설 및 관련활동, 국악예술학교 교육 및 산하 기관 창설, 「창악대강」 편찬 등 저술활동, 민요채집 및 무형문화재 조사 연구 등에서 박헌봉 선생의 업적은 길이 빛난다. 그 업적을 「국악신문」은 36년만에 다시 게재하여 국악사 정립과 참 국악인의 생애를 조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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