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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나요당농요상 수상, (사)국가무형문화재 통명농요보존회 안성배 전승교육사지난 12일에 나요당 농요상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제1회나요당농요상'은 경북 예천 (사)국가무형문화재 통명농요보존회 안성배(安成培) 전승교육사가 수상했다. 안성배(1973년 통명 출생)씨는 2020년부터 통명농요보존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으며, 농요의 현장과 이론을 겸비하고 있다. 2016년 중앙대학교대학원 국악교육학 석사과정 졸업, 2019년 안동대 민속학과 박사과정(지도교수 한양명)을 수료했다. 안성배 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제가 선배님 어른들 제치고 이런 큰상을 주셔서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아마도 큰 책임을 맡기신 것 같다. 농요의 현장과 기록을 남기기 위해 매진해왔다. 더욱 통명농요를 보존 및 계승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이어 "준비하고 있는 안동대 박사학위 주제도 무형유산 '통명농요' 전승활성화에 관한 것이라고 전했다. "10여년 동안 통명농요 전승계보 및 회원 등 보존회 전승활동 아카이브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다행히 150여 분 회원들의 자취를 발굴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잠시 단절된 민속예술이 명백을 이어오다가, 마을제에서 활발하게 계승되었던 민속예술이나 민속연희가 이제는 마을 인구가 줄어들면서 걱정이 앞선다. 광산이 산재해 있는 있는 주변 지역과 다르게 예천은 농업이 주를 이루면서 하늘을 섬기며 마을과 전통을 지켜왔다. 그래서 통명농요 '아부레이수나' 같이 아름다운 노래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고 덧부쳤다. 예천 순흥 안씨 집성촌에서 자라난 안성배씨는 자연스럽게 통명농요를 들으면서 자라났다. 아버지, 작은아버지, 당숙어른, 사장어른 등이 모두 통명농요보존회 단원이다. 1991년부터 대학 동아리에서 풍물활동을 하다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통명농요와 통명농악를 접하고, 아버지가 작고후 보존회에 들어와서 자리를 메꾸웠다. 통명농악 상쇠어른(윤석원, 1937-2008)이 작고 후, 2009년 제50회 한국민속예술축제 경북대표(상쇠)로 출전, 현재 통명농악 상쇠를 맡고 있다. 마을 동아리 단원들을 지도하고 있다. 농요란 농민들이 힘들고 바쁜 일손으로부터 피로를 잊고 능률을 올리기 위해 부르는 노래로, 들노래 또는 농사짓기소리라고도 한다. 예천 통명농요는 경북 예천군 예천읍 통명리의 농민들이 매년 모심기를 할 때 힘겨운 노동으로 인한 고달픔을 해소하기 위하여 부르는 농요로 조선 중기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심기할 때 부르는 '아부레이수나'와 모를 다 심고 논에서 나오면서 부르는 '도움소소리', 논을 맬 때 부르는 '애벌매기소리'와 '상사디야', 논을 다 매고 나오면서 부르는 '방애소리'·'에이용소리',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르는 '캥마쿵쿵노세, 마당논매기, 타작소리인 '봉헤야'가 있다. 모심기소리나 논매기소리가 모두 느리고, 길게 빼는 음을 많이 쓰고, 노래를 메기고 받을 때에 앞소리의 끝과 뒷소리의 앞을 부분적으로 겹치게 불러 이중창적인 효과를 내는 점은 예천 통명농요의 특징이다. 한편 재단법인 나요당 농요상기념사업회는 40여 년을 농요 보존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는 나요당 이소라 이사장의 단독 출연재산으로 운영되는 재단이다. 농요연구 권위자 나요당 이소라 이사장은 "이 상은 당분간은 농요의 전승,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참된 일꾼을 그동안 보아온 자들 중에서 수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최측은 "정관에는 3년마다 1회 수여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농요기념비가 2026년도에 세워진다면, 함께 제2회나요당농요상 시상도 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이어 "농요기념비를 금년에 세울려고 오석을 보령에서 주문해 놓고 새겨질 글씨도 서예가로부터 받아놓았지만, 보존회 건물이 새로 증축되어서 1회 농요상만 시상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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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농요 기획공연, 제39회 대한민국 민속음악대축제 개최국가무형유산 고성농요보존회(회장 신명균)는 지난 11일 상리면에 위치한 고성농요 공연장에서 제39회 기획공연 ‘대한민국 민속음악대축제’를 군민을 비롯한 무형유산에 관심이 있는 방문객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했다.이날 축제는 모든 관람객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태평무 공연을 시작으로 ▲상리초등학교 학생들의 농요시연 ▲국가무형유산 11-5호로 지정된 전북 임실군 임실필봉농악 ▲고성농요보존회 물레소리 ▲국가무형유산 제76호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인 대한민국 전통무예 택견 ▲고성농요보존회 보리타작소리 ▲경북 무형유산 제27호 구미 발갱이 들소리 ▲통영승전무의 초청공연이 진행됐다. 특히 고성농요보존회의 '칭칭이소리'를 마지막으로 즐거운 대동놀이에 관람객 모두가 함께하여 신명나는 공연을 마무리했다.신명균 고성농요보존회장은 "현대와 전통을 접목한 이번 축제로 고성 군민과 관람객들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소중한 유산을 경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고성농요보존회는 고성농요의 예술성과 문화적 가치를 계속해서 전승시켜 나갈 수 있도록 분발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고성농요는 농사일을 할 때 작업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부르던 고성 지역의 노래로, 독특한 가락과 장단으로 높은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국가무형유산 제84-1호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고성농요보존회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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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나요당 농요상 ‘예천통명농요보존회’ 확정지난해 12월 설립한 (재)나요당 농요상 기념사업회가 나요당 농요상 제1회 수상 보존회로 ‘(사)국가무형문화재 예천통명논요보존회’를 제1회 수상자로 결정, 수상식을 갖는다. 나요당은 농요연구의 권위자 이소라 선생의 호로 "지역의 개성적인 농요가 울려퍼지길 기원”하여 동명의 농요상을 제정한 것이다. 시상식은 5월 12일(일요일) 오전 10시 예천통명농요 전수교육관에서 개최한다. 관련 문의처는 010 9759 085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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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뱅이 두레'와 한국민속예술 축제2023년 9월에 영광군에서 개최된 제64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대전 서구의 ‘숯뱅이두레’가 1등상인 ‘금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최근에야 접했다. 대전 서구에 관련된 '농요'이라면, 2000년도에 필자가 서구문화원과 함께 펴낸 ‘민초의 소리’며, 대전광역시 논매기소리를 총괄한 ‘충남지방 논매기소리 총서(하권)’을 2015년 발간하였기로 ‘숯뱅이두레’가 어느 지역을 일컫는지 궁금하였다. 숯뱅이 지역은 대전 서구의 탄방동과 용문동 지역을 일컫는다. 대전 서구 지역의 마지막 생존자인 김용근(90세)의 고증과 시연으로 농신제로부터 '아시-이듬-만물매기'로 작품을 엮었다. 김용근 님에 대하여는 나는 이전부터 안면이 있고, 대전 서구문화원의 다른 출품작에 대하여도 관여하였음을 알고 있었다. 2016년에 논산문화원과 함께 ‘논산의 민요’를 발간했을 때도 논산의 ‘백중놀이’ 보유자이신 그를 취재하였다. 김용근 님은 1928년생이시며 대전이 아닌, 강경읍 출신이시다. 숯뱅이 두레 수상과 관련하여 몇 편의 영상물이 공개되어 있으면서, ‘백중놀이’의 농신제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을 농신제로 시작하였고, '아시-이듬-만물매기'의 논매기소리에 대하여는 전혀 한마디 언급이 없는 것은 그 이전의 서구 지역 출품 내용 등을 고증자료로 내세울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 염려되는 것은 그간에 한국민속축제(전국민속경연대회 후신)에서 국무총리상이나 대통령상을 받게 되면, 지정문화재와 같은 국내의 등재로 이어져 왔다는 점이다. 한번, 시도지정 문화재(2024년부터는 문화유산)가 되면, 출품 당시의 내용이 표본이 되어, 민속축제에서 큰 상을 받았던 그대로를 지켜나가야 하는 것으로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면, 충북 무형문화재 제11호인 ‘진천 용몽리 농요’는 2000년도에 제41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2003년도 이래 충북 제11호로 보호 받고 있다. 필자는 ‘충북지방 논매기소리 총서’를 2017년에 첨부 USB 음원과 함께 펴냈고, ‘진천 용몽리 농요의 개선점에 대하여’(2019년)도 관련 학회에서 발표도 하고, 보존회로 책과 음원을 보내면서 일 년에 1회 의무적으로 발표하는 정기 공연이 아닌, 일반 공연 때에는 이를 반영하여 더 풍성한 공연이 될 수 있기를 권해도 보았지만, 제도상 막혀 있어 요원한 얘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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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들소리'를 전승하는 자인계정들소리보존회자인계정 들소리는 경산시 자인면 일대에서 농사철에 부르던 농요(農謠)로 계정숲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 뿌리깊은 농업노동요로 이어져 왔다. 자인 계정들 소리는 자인면 일대에서 주로 농사철에 부르던 들소리(農謠)의 집성이다. 자인면 일대는 '신라의 서촌'이라 불리던 유서 깊은 곡창이며 민속예능의 보고이다. 계정들소리도 이 가운데서 형성된 뿌리 깊은 농업 노동요라 할 수 있다. 계정들의 가운데 자인이 위치하고 이곳에 자인단오굿의 '한장군놀이'로 유명한 계정숲이 있다. 계정숲을 중심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자인 단오굿이 해마다 단오절에 벌어진다. 계정숲에는 지금도 자인 단오굿에 관련되는 한장군 사당과 묘가 있고, 그 아래로부터 펼쳐지는 들판을 계정들이라 한다. 이 계정들을 중심으로 하여 불리어지던 다양한 농업 노농요를 수집하고 재구성한 것이 바로 '자인 계정들소리'이다. 제3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8)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자인 계정들 소리'는 후창자 24명이 추가되어 뒷소리의 발음이 더 씩씩하고 장(壯)하다. 계정들 소리의 소리꾼들은 선창 6명과 후창7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상도 민요의 특징인 메나리(산유화)제로 구성된 역동적인 소리로 풍년을 기리는 `들지신 밟기`로 시작돼 `모찌기 소리`, `모심기 소리`, `논매기 소리`, `메타작 소리`, `방아타령`으로 이어진다. 이와함께 산에 나무를 하러가거나 들에 풀을 베러 가면서 넋두리로 부르는 `어사잉어`와 못둑과 밭둑을 쌓을 때, 돌과 나무를 운반할 때 부르는 `목도 소리`와 `망깨 소리`, `보역사 소리`, `칭칭이` 등 모두 열한 개의 소리를 풍물장단에 흥겹게 춤을 추며 부른다. 다른 지역의 대부분 농요는 선율이 거의 같은 경우가 많지만 자인계정 들소리는 소리마다 각기 다른 선율로 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더욱이 대부분의 소리가 3박으로 흥청거리는 멋을 곁들이고 있으며 목도 소리와 타작 소리만은 2박으로 씩씩하고 힘차다. 풍년을 기리는 '시진밟기' 산에서 나무를 하거나 풀 베러 갈 대 넔두리로 불렀던 '어사잉이'(어사용)이가 있고, 둑을 쌓을 때나 산판을 할 때 나무둥글이나 돌을 운반하면서 부르는 '목도소리', 못둑을 다지는 '망깨소리', 보(洑)의 물길을 트는 보가래질을 할 때의 '보역사(洑役事)소리', 그리고, 본격적인 나락농사를 시작하면서 부르는 '모찌기소리', 모를 심으면서 부르는 '모심기소리', 논 맬 때 부르는 '논매기소리', 한 톨의 곡식이라도 알뜰히 거두려는 '타작소리'가 있다. 풍년을 기리는 '방아타령'과 신나고 흥겨운 '칭칭이'의 풍물장단에 흥겹게 춤을 추며 상일꾼을 소에 거꾸로 태워 마을로 돌아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산 자인계정숲 일원에서 개최되는 경산 자인단오제 첫날 호장장군 행렬과한장군대제를 시작으로 첫날은 국가무형문화재 한장군대제, 국가무형문화제 자인단오 큰굿, 경북무형문화재 보안농악, 경북무형문화재 계정들소리, 국가무형문화재 여원무,국가무형문화재 팔광대 공연등과 개막식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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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35개 농악 전승단체 대한민국농악연합회 총회 개최사단법인 대한민국농악연합회(이사장 임웅수)는 11시 대전전통나래관 무형문화재 전수관에서 전국 35개 지역 농악 전승단체가 모여 총회를 개최했다. 이 단체는 2014년 11월 27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농악의 보존·전승과 교육 등을 통해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2018년 결성되었다. 강원도 춘천농악을 시작으로 전국 대상 무형문화재 단체를 중심으로 비지정 농악보존회와 농요보존회까지 아우른 법인 단체이다. 임웅수 이사장은 총회 인사를 통해 "한평생 농악의 길을 걸으시며, 농악에 종사하고, 인류무형문화유산 농악 전승활동과 발전에 기여하신 설장구 명인 김동언, 정읍농악 예능보유자 유지화, 천황매기 예능보유자 김수기, 양주농악 예능보유자 황상복 선생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이분들은 80세를 넘긴 대한민국 농악의 산증인들이시다. 총회에서는 20개 단체에 지회 인준을 하여 지역 농악발전에 이바지할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여성농악단의 섬세함을 재현하고자 대한민국농악연합회 산하 ‘코리아여성농악단’을 창단하고 이수현(조선락광대 대표)을 초대예술감독으로 선임하였다. 이어, 진행된 특강에는 문화체육관광부 백익 前 국장의 강연이 있었다. "농악인들이 우리 농악의 뿌리를 이어오는 것에 감사한다고 하고, 주인이 되어 지역을 넘어 세계로 용솟음치게 하자"고 당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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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음악연구소 이소라 소장 지음 ‘상사소리’1980년대 초반에 전국의 읍면별 농요 녹음을 계획할 당시는 기존의 전국단위 민요조사로서 옛 정신문화원의 도별 구비문핚계와 월산 임동권 선생의 ‘한국민요집’ 6권이 출간되어 있었다. 읍면별 토박이 농민의 선율과 노매기소리의 종별을 알고자 하는 계획이었던 고로 기존서에서 가창자 물색을 위한 정보를 미리 알고 싶었으니 거리감이 있었다. 필자의 농요 중심 읍면별 농요 조사는 1989년 8월로서 일단락이 났다. 이후로는 개별 시군의 민요집 발간이나 시군지 발행의 민요편 집필등의 기회가 있는대로 설문지를 미리 보내어 답변이 있는 곳을 방문하거나 협조를 얻어 보충 조사를 하엿다. 2015년의 ’충남지방 논매기소리 총서(상하) 발간을 시작으로, 2022년도의 ‘강원도 논매기소리 총서-부록: 서울·인천·북한·제주-’까지 음원과 악보, 해설 및 전문가의 지도와 지리적 고찰까지 곁들인 한반도의 논매기소리 총서가 완간 되었다. 논매는 작업은 제초제의 보급과 기계화로 1960년대에 이미 들어서는 볼 수 없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부족한 대로나마 ‘총서’로 내 놓는다. 그 간의 ‘상사소리’ 논문들을 보면, 전국의 논매기소리 자료가 다 파악되지 못하였고, 토박이 가창자에 대한 고려가 없는 자료를 걸러내지 않은 통계들임. 1960년대 1970년대에 이주해온 자들의 가창 농요는 살고 있는 지역의 농요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배려가 없는 상사소리 통계는 부정확하다. 이리하여, 가능한 한 전국의 그 시군 토민(10세이전부터 그 시군에 계속 살아온 가창자)을 원칙적인 대상으로, 우선, 논매기소리에 있어서 상사소리의 종별과 그 분포 양상을 총괄 정리해 놓고 싶었음. 이는 인접 학문들을 포함한 한국학의 문화권 이론에 있어서, 읍면별 녹음자료인 점에서 참고자료가 되리라 기대한다. 수많은 가창자들과 녹음 협조자들, 지도 작업과 지리적 고찰을 해준 공주대 지리학 연구진, 음원 보존을 담당한 중부대 및 이 책이 나오기 까지 다방면에서 함께하신 분들과 관계 기관들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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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옥구들노래, 익산 삼기농요국악경연대회 일반부 대상11일 익산 충간공박물관에서 열린 제5회 익산 삼기농요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일반부 단체전 ‘대상’을 수상했다.익산시가 주최하고, (사)익산 삼기농요보존회가 주관한 대회는 명인·신인·단체·중고등·초등부 등 총 5개 부문으로 나눠 치러졌으며, 전국 각지 40여개 팀이 열띤 경연을 펼쳤다.이날 단체부에 출전한 옥구들노래보존회(회장 홍석기)가 대상의 영광을 안았다.옥구들노래보존회 홍회장은 "아직은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으로 어려움이 많이 있지만 이번 대상 수상을 계기로 잊혀지고 사라질 위기에 있는 옥구들노래를 잘 보존하고 계승해 국가지정 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아 후손들에게 자랑스런 문화유산을 꼭 물려 주고 싶다”고 밝혔다. 한편 주최측에 의하면 "옥구들노래는 500여년 전부터 대야면 탑동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농요로서 소리꾼인 고판덕 옹이 지난 1992년에 작고한 이후에 거의 불리지 않고 사라져 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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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군 장뜰두레놀이보존회, 제27회 충북민속예술축제 ‘대상’ 수상증평군 장뜰두레놀이보존회가 제27회 충북민속예술축제에서 단체 및 개인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지난 12일 옥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제27회 충북민속예술축제에 증평군 대표로 참가한 장뜰두레놀이보존회는 전년도 우승으로 참가하지 못하는 청주시를 제외한 일반부 9팀과 실력을 겨뤘다. 증평 장뜰두레놀이는 논농사를 삶의 근간으로 삼고 대를 이어 살았던 현 증평읍 사곡리 질벌마을의 농사짓는 모습과 영천에서 행해지던 정주제를 다양한 고증을 통해 발굴 및 재현하여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았다. 개인부문에서는 선소리꾼 지명현씨가 대상을 수상하여 증평군이 단체 및 개인부문 모두 대상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 대상을 수상한 장뜰두레놀이보존회는 내년도 제65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충청북도 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증평 장뜰 두레놀이는 증평군 일대에 전하는 민속놀이로 증평군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평지역에 전승되던 두레굿을 복원한 것으로 '장뜰'은 증평을 가리키는 옛 이름이다. 2002년 발굴하여 2003년 충북 민속예술경연대회와 한국민속예술축제를 통해 알려졌다. 논농사를 지으면서 부르던 농요에 농악가락을 합주하는 방식이며 놀이는 논농사의 단계에 따라 진행되는데, 모두 메기고 받는 형식이다. 고리질소리, 모찌기소리, 모심기소리, 초듭매기소리, 이듭매기소리, 방아찧기소리, 세듭매기소리 등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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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농요'를 남기신 나의 아버지 김 종술아버지께서는 1929년 10월, 물 맑고 공기 좋은 진양군 사봉면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유난히 유교적인 풍습이 많이 남아있던 마을에서 그리 풍족하지는 않지만 인내와 성실을 몸소 실천하시며 유년시절을 보내셨습니다. 6.25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해병대에 입대하여 참전용사로 7년간이나 군대생활을 하셨습니다. 군복무 중이던 스물여덟살에 결혼을 했지만 신혼의 단꿈은 고사하고 어무이(홍 복남)를 몇 년간이나 독수공방 시키셨다고 합니다. 군제대와 함께 보금자리를 찾아 자리 잡은 이곳 함안이 제2의 고향이 되었고, 이때부터 아버지께서는 농요에 애착을 가지시고 매우 즐겨 부르셨습니다. 함안지역 읍,면 곳곳에 전해오던 대부분의 보리타작. 모심기, 논매기 농요들을 모두 섭렵하게 되셨습니다. 슬하에 6형제를 두고 자식들에게는 어른을 공경하라 가르치시고, 예의바름을 강조하시며 언제나 성실하고 부지런한 자세로 저희를 키우셨습니다. 자식에게만큼은 엄했던 아버지는, 가끔은 저에게 자립심을 길러주시려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고질병인 위궤양 때문에 술을 일찍 끊으셨지만 한때는 술 도매상 일을 하시면서 약주를 즐겨 하셨는데, 어린 시절 저는 주전자에 막걸리를 사오면서 한모금씩 먹어보기도 하여 술심부름이 싫지만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평소에 아버지께서는 건축 감독일과 농사일을 함께 하셨는데, 새마을 운동이 시작될 때 올바른 국가관으로 지붕개량과 통일벼 재배를 마을에서 제일 먼저 시작하시면서 좋아하시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이외에도 여러 일들을 도맡아 하셨는데, 김해김씨 문중의 어른으로서 종친회장을, 2005년부터는 가야읍 본동 노인회장을 지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마을에서 전래되어온 우리선조들의 땀과 애환이 서린 소중한 농사 일소리와 농사일 모습을 살려야 한다는 신념으로 만들어진 함안농요보존회에서 함께 활동을 하시고, 2008년 4월 담도암으로 투병중이면서도 아라제 함안농요발표회에 어무이와 함께 참가하셨습니다. 항상 성실하고 바르게 살 것을 당부하시며,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은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시고 2008년 6월, 80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날 수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주셨고 애통해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떠나시고 4년 후.2012년 10월, 제53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함안군 함안농요보존회의 '함안농요'가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는데, 더불어 개인부문 연기상인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도 어무이께서 수상하시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함안 향토민속문화의 우수성, 함안지역만의 독특한 메나리조로 선조들의 삶을 마당놀음 형태로 구현한 ‘함안농요’를 전국으로 알렸습니다. 2016년 함안농요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9호 지정되는 영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이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노래는 아버지의 삶의 일부가 되셨습니다. 함안농요 속에 아버지는 살아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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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농요보존회, 농요를 바탕으로 농사재현 공연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9호 '함안농요'를 전승하고 있는 함안농요보존회(회장 이창근)는 전통적으로 이어온 농경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매년 가실걷이 한마당을 개최하고 있다. 제6회 함안농요 가실놀이한마당 공연에서 농요를 바탕으로 농사를 짓는 실제 연행이 지난 7일 법수면 악양둔치에서 이루어졌다. 함안농요 가실걷이는 보리타작부터 모찌기,모내기, 논매기, 벼베기, 벼타작까지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우리 농경문화의 생생한 면면을 볼수있어 전승가치가 매우 높은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조근제 함안군수는 "산업화가 되기전 우리 나라는 농경사회였고 오랫동안 농업에 종사해 왔던 일소리였다며 이제 함안에도 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이 필요 하다며 적극 추진해갈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축사에 가름하였다. 이날 시연 공연 현장에서는 함안농요보존회 약 50여 명 회원들이 둑방 둔치 논과 마당에서 보리베기, 보리타작, 모찌기, 모심기, 백중놀이 등 실제 농사 모습을 열정적으로 재현했다. 이창근 회장은 "모심기소리는 메나리소리 선율로 이어지는데, 힘을 내자는 소리라고 한다. 마을공동체를 이어가는 소리이다"라고 전했다. 대한민국농악연합회 임웅수이사장의 연출로 펼쳐진 특별무대에서는 조선락광대 이수현 장구놀이와 우도설소고춤 그리고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태평무춤으로 더욱 풍성한 축제가 되었다. 함안군 지역의 유구한 농경문화와 농사 일소리를 잘 담아낸 '함안농요'는 함안군 지역의 유구한 농경문화와 봄, 여름, 가을 , 겨울 농사 일소리를 하나의 틀로써 구성한 작품이다. '함안의 구전민요'와 함안지역 일소리 관련 서적 자료들의 취합하여 매년 정기발표회를 개최하고 있다.학계에서 함안농요는 사시사철 농작의 과정이 매우 세밀히 묘사되었으며, 기존의 농요들과 달리 빠른 작품 전개로 박진감이 넘치는 뛰어난 연출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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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이라~, 자라~, 어이~' 일종의 소모는 소리다. 관련 음영민요는 주로 한강 이북지역에서 채록된 것이 많아 남도지역 농요의 전통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명령어에 운율을 넣는 경우는 공통적인 듯하다. '이라~'는 오른쪽으로 '자라~'는 왼쪽으로 돌라는 뜻이고 '어~'는 서라는 뜻이다. 스무 살 되기 전부터 소 쟁기질을 하고 써레질을 해 본 탓인지, 나에게 소는 더없이 친숙하다. 전답이 없던 늙으신 아버지는 순전히 괭이로 서마지기 아홉 배미 산전답을 일구셨다. 한 이랑 쟁기질을 하면 막걸리 한잔을 해야 할 정도다. 산전 옹타리 치고는 사래가 너무 길고 논둑은 어른 키를 훌쩍 넘을 정도로 비탈졌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는 언 땅이 풀리기 전에 초벌갈이를 한다. 초벌에 갈아둔 이랑을 양옆으로 갈라치기하며 쟁기질하는 것이 두벌갈이다. 이렇게 이랑과 고랑을 반복해서 갈라치기하여 일곱 번을 갈아야 비로소 논둑을 붙일 수 있다. 일곱 번 갈이 논둑 붙이는 법이라고나 할까. 그제야 논에 물을 대고 써레질을 하며 몽근 흙들이 골라지면 모내기를 한다. 이런 환경 때문일 것이다. 내 카카오톡 이름이 '깔비고 소띠기고'다. 가입할 때부터였으니 근 10여년 써왔다. '소꼴을 베고 소에게 풀을 뜯긴다'는 우리 고향 말이다. 소를 뜯기는 일은 사실 나라의 모든 소년들이 행했던 통과의례 같은 것이기도 했다. 산과 들에 나가 소가 풀을 뜯어 먹도록 시키고 꼴망에 풀을 베어야 한다. 외양간에서는 '쇠죽(粥)'을 끓인다. 회갑을 넘긴 이들 중 상당수는 소 풀 뜯기는 일과 꼴 베는 일을 경험했을 것이다. 1960년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업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농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소 키우기가 그 중심에 있고 그 안에는 마치 관례처럼 씨압소 즉 배냇소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깔비고 소띠끼고', '씨압소'의 전통 "씨압 갖다 키워서 새끼 낳먼 쉬앙치 받기도 허고, 아니먼은 어린 쉬앙치를 가져다 한 2년 정도 키워서 고놈을 팔아갖고 주인하고 절반썩 돈으로 나누기도 허고 그래. 돈으로 나눈 것보고 '바넷소'라고 그러고..." 이기갑 교수 등(「새로 발굴한 방언13」, 한국방언학회, 2014)이 정리한 '씨압소' 용례다. '씨압소'의 표준말은 '배냇소'이다. 국어사전에서는 남의 소를 송아지 때 가져다가 길러서, 다 자라거나 새끼를 낳으면 원래 주인과 그 이득을 나누어 가지기로 하고 기르는 소라고 풀이해두었다. 제주에서는 '벵작쉐' 혹은 '멤쉐'라고 한다. 유사한 형태로 '반작소'가 있지만 배냇소와는 좀 다르다. 경남에서는 '배내이세' 혹은 '배내기소'라 하고, 경북에서는 '배미기', 또 일부지역에서는 '어울이소'라고도 한다. 진도에서는 '어시소', 영암에서는 '도짓소' 보성에서는 '배냇소' 곡성에서는 '씨압소/갈라먹기' 등으로 부른다. 남도지역에서는 '씨압소'가 보편적으로 통용되기에 나는 이를 준거 삼는 편이다. 송아지를 주고 어미소를 받거나 어떤 지역에서는 기른 사람이 어미소를 갖고 새끼를 낳아 주는 경우도 있다.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입히는 옷을 '배냇저고리'라 한데서 알 수 있듯이 '갓난 새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씨'는 의심의 여지없이 '종자'를 뜻하는 말이다. '압'의 출처는 약간 불분명한데, 이기갑 교수는 '아비'의 '압'에서 왔다고 풀이한다. '종자소를 줄 수 있는 부모 소'라는 뜻이다. 남도지역에 전하는 말 중에 씨아부지, 씨아부니, 씨압씨, 씨애비, 씨엄씨, 씨어매, 씨아자씨(시동생) 혹은 씨아잡씨, 씨숙(媤叔), 씨아재 등이 '압' 즉 부모라는 시댁(媤宅)을 넘어 '종자' 즉 '씨'와 연결된다. 씨압소의 전통은 우리나라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전통이었다. 흰소의 해에 생각하는 십우도(十牛圖), 소는 누가 키우나 열네 살이 되면 씨압소를 부릴 수 있게 된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입학생부터 그 자격이 주어지는 셈이다. 무상으로 분배받은 송아지가 생후 6개월이 되면 '목매기' 즉 목에 고삐걸이를 한다. 이후 뿔이 나오고 생후 1년여 후에 코뚜레를 뚫어 채운다. 생후 13달 정도 되면 새끼를 밴다. 임신 기간이 280일로 사람과 거의 같으므로 생후 2년이면 새끼를 분만하게 된다. 통상 이 새끼를 씨압소 받은 소년이 갖고 어미소를 씨압소 준 이에게 갚는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소년이 16세가 되면 자기의 소를 갖게 되는 것이고, 혼인할 수 있는 자격이랄까 성년으로의 도약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지금은 청년창업자금 정도로 퇴화되었지만 절대인구가 농업에 종사할 시기만 해도 통과의례와도 같은 중요한 일이었다. 나랏일을 맡아하는 이들은 이 점 눈여겨 두었다가 '배냇소 정책'을 펴도 좋을 듯하다. 물론 장성하여 가정을 이룬 이들에게도 씨압소 시스템은 가동되었지만 성년에 진입하는 아이들에게 무상 분배되는 이 맥락을 주목할 일이다. 그러하니 소년들이 어찌 허투루 소풀을 뜯기며 소꼴을 베겠는가. 오만 정성을 다 들여 일종의 씨드머니를 키우고 가꾸지 않았겠는가. 2021년 올해를 신축년 흰소의 해라 한다. 사방에서 흰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원대한 비전들을 얘기한다. 흰소에 의지해 팬데믹에서 탈출하자는 소망들일 텐데 현실은 암담하기만 하다. '신축년 남편 찾듯, 무진년 팥방아 찧듯', 비교적 잘 알려진 속담의 재현이랄까. 1661년 신축년 그해에도 이랬던 모양이다. 천재지변과 재난, 흉년이 겹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부부도 떨어져 서로 찾아다녔다는 데서 유래한 속담 아닌가. 기후위기와 역병의 창궐, 언택트와 비대면 활동들의 데자뷰 같다. 3~4년 주기로 이 환란이 반복될 것이라는 경고도 있다. 최재천 교수는 주문한다. 일시에 처방하여 환란을 끝내는 백신은 없다. 주기적으로 반복되거나 혹은 더 강한 역병 팬데믹에 대한 행동백신으로 나가야 한다. 어떤 행동으로 백신을 삼아야 할까. 언택트 비대면이 기본이다. 향후 모든 정책은 이 기조로 수립되어야 한다. 그래서다. 흰소는 누가 공짜로 데려다주지 않는다. 십우도를 우리 같은 땔나무꾼들이 풀이하자면, 그저 묵묵하게 '깔비고 소띠끼'는 일일 것이다. 그래야 검은소가 흰소 되지 않겠는가.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자 주문이다. 씨압소와 선불교의 십우도(十牛圖) 십우도를 인간이 깨달아 가는 과정으로 풀이하고 심우도(尋牛圖)라 얘기하니, 숭고한 영성을 어찌 우리 촌부들이 이해하겠는가만, 이를 씨압소에 기대 생각해보고 싶다. 열네 살의 소년이 씨압소를 받아 열여섯에 새끼를 낳게 하여 씨압을 갚고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는 과정, 소 키우는 일에 그만큼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뜻이다. 1. 심우(尋牛), 동자승이 검은소를 찾는다. 2. 견적(見跡), 동자승이 검은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간다. 3. 견우(見牛), 검은소의 뒷모습이나 소의 꼬리를 발견한다. 4. 득우(得牛), 검은소를 붙잡아서 고삐를 건다. 5. 목우(牧牛), 소에 코뚜레를 뚫어 길들이며 끌고 가는데 검은소가 머리부터 흰색으로 변해간다. 6. 기우귀가(騎牛歸家), 흰소에 올라탄 동자승이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온다. 7. 망우재인(忘牛在人), 흰소도 없고 동자승만 앉아있다. 8. 인우구망(人牛俱忘), 흰소도 동자승도 없다. 9. 반본환원(返本還源), 강물은 고요히 흐르고 꽃이 절로 핀다. 10. 입전수수(入廛垂手), 세속의 저잣거리로 들어가 중생에게 손을 드리운다. 십우도의 지극한 과정을 보니 알겠다. 역병 창궐의 해일지언정 그저 묵묵하게 '깔비고 소띠끼'는 것이 정녕 행동백신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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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국의 지역춤, 광주·전남지역춤지역춤이란 특정지역의 생태문화적 배경 속에서 지역민들에 의해 공통적 특징을 형성하면서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춤을 말한다, 한국의 전통춤은 지역마다 색다른 지역춤들이 전승되고 있다. 한국의 지역춤을 형성하게 된 생태문화적 배경을 살펴보고, 전국을 영남과 호남, 강원과 충청, 수도권과 북한 지역춤 등으로 나누어 대표적인 춤 종목과 특징을 연재한다. 기후와 지리환경에 따라 발달한 농경민속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국토 구조로 인해 위도에 따라 기후환경에 차이가 있다. 대체로 남부지역은 북부지역에 비해 온화하고 따뜻한 기후로, 삶이 여유롭고 느긋하여 속도가 빠른 춤이나 도약하는 춤보다는 느리지만 멋스러운 민간춤이 발달하였다. 지리적으로 평야지역은 풍농으로 인한 풍요롭고 흥겨운 춤이 많을 뿐만 아니라 교통이 발달하여 문화의 교류가 빈번하고 전파력이 좋아 춤의 종류도 다양하다. 평야지대로 갈수록 폭넓게 움직이는 ‘수평춤’이 많고, 산악지대는 ‘수직춤’이 많다. 수직춤이 발로 뛰어오르는 도약과 무릎 굴신이 특징이라면 수평춤은 발의 옮김과 손을 넓게 펴들고 추는 춤사위가 특징이다. 광주·전남지역은 따뜻한 남쪽지방에 위치하고, 산보다 평야가 많아 풍요로운 농경문화가 자리잡고 있어 농악과 농요를 비롯한 농경민속춤이 발달하고 있다. 특히 농경지를 향한 ‘앉은춤’, ‘엎드린춤’, ‘굴신춤’ 등 대지지향적인 ‘하향춤’이 많으며, 주로 손으로 이루어지는 농경생활은 농경모의적인 손춤, 팔춤, 곡선춤이 발달했다. 북쪽지역의 도약춤과 대비되는 남쪽지역의 춤 특징인 ‘답지(踏地)춤’을 비롯하여 ‘평걸음’, ‘지숫는 춤’, ‘양팔 들사위’ 등 수평춤의 특징을 보여준다. 따라서 도약을 억제하는 평면적인 춤과 빠르지 않으면서 흥이 넘치는 손춤, 내면적인 멋을 가진 승무와 살풀이춤, 입춤 같은 예인들의 춤이 주로 전승되고 있다. 세시풍속에 따른 추석문화권춤 세시풍속을 지역문화권으로 나누는 민속학계의 통설은 북부지방의 단오문화권, 중부지방의 단오·추석문화가 복합된 백중문화권, 따뜻한 서남지역 평야지대의 추석문화권으로 구별한다. 민속학자 김택규는 단오권이 ‘도당굿-입체적·동적’, 복합권이 ‘별신굿-평면적·동적’, 추석권이 ‘당산굿-평면적·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춤문화권 역시 단오권은 수직적·입체적·동적인 춤, 추석문화권은 수평·평면·정적인 춤, 복합권은 그 중간으로 수직·수평과 입체적·평면적인 정중동의 춤이다. 그중 호남지방은 추석문화권으로 넓은 평야가 있는 곡창지대에서 풍년을 가져다 준 천신과 지신에 감사드리며 그 기쁨의 축제를 벌이는 지역이다. 이들은 천신보다 지모신을 더 숭배하는 대지지향적 하향춤과 땅을 자근자근 밟는 강강술래의 답지춤, 수평적인 양팔사위와 여밀사위 등의 하향춤을 많이 춘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 때문에 광주·전남지역춤은 부드럽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느린춤’, ‘곡선춤’, 아래로 여미는 ‘하향춤’과 손목놀림이 많은 ‘손춤’이 발달하였고, 발걸음춤으로는 부드럽게 대지를 밟아주는 ‘답지(踏地)춤’이 발달하였다. <정범태(2006), 한국백년1, 서울: 눈빛출판사, pp.12~13.> 광주·전남지역 농악춤 한국의 농악권은 호남 우도농악, 호남 좌도농악, 경기 및 충청농악, 영동농악, 영남농악 등 다섯 지역으로 나뉜다. 호남지방은 농경문화가 발달하여 우도농악과 좌도농악, 두 가지 유파로 분류된다. 호남 우도농악은 익산에서 목포로 이어지는 평야지대로 쇠와 장구춤을 중시하고 가면잡색놀이가 특징이며, 당산제와 마당밟기를 중심으로 부포상모춤, 고깔소고춤이 발달하였다. 장구가락이 아주 발달하였으며 윗놀이보다 밑놀이가 발달하였고 악기별 개인놀이가 발달하였다. 이에 비해 호남 좌도농악은 전주, 남원, 여수로 이어지는 산악지대로 쇠와 장구놀이를 중시하고 잡색탈춤과 동물 등 배역놀이가 발달하였으며, 고깔보다 전립을 쓰는 채상소고춤이 발달하였다. 우도농악보다 가락이 빠르고 윗놀이가 발달하였으며 집단적인 진풀이가 특징이다. 특히 호남지방에서 걸립패들의 농악은 곡창지대에서 판굿에 대한 후한 쌀보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예능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탈춤 종목이 독립적으로 발달되지 못하고 잡색(雜色)들의 가면극놀이가 농악에 포함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다. 소리춤의 대표 <강강술래> 소리춤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장르를 말하며 대표적으로 강강술래가 있다. 남성들이 추는 소리춤과 여성들이 추는 소리춤으로 나눌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여성소리춤이 많이 발달했다. 기본적으로 원무 형식의 집단춤이지만 놀이적인 것이 혼합된 대형변화 형식도 많다. 전라남도 해안지방에서 전승되고 있는 강강술래에는 고사리 꺾기, 청어엮기와 풀기, 덕석몰이, 바늘귀 꿰기, 남생아 놀아라, 쟁기질놀이, 문지기놀이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강강술래는 일반적으로 여성소리춤으로 분류하고 있다. 남녀유별(男女有別) 사상이 깊었던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춤에서도 이런 현상이 깊게 투영되었다. 임진왜란 시기 일본해군의 야간 침투를 방어하기 위해 해안가에서 모닥불을 지펴놓고 부녀자들이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강강술래를 하였으며, 그 시간동안 군사들은 잠을 자고 대낮의 전투를 대비했다는 이야기가 강강술래의 기원설로도 전해지고 있다. 물론 현재도 전남 여러 지역의 강강술래가 여성소리춤으로 전승되고 있다. 하지만 신안 비금도 등지에서는 남녀가 함께하는 강강술래가 전승되고 있기도 하여 지역에 따라 남녀소리춤으로도 전승한 것으로 보인다. 이매방의 승무와 살풀이춤 이매방(1927~2015)은 전남 목포출신으로 어린 시절 집 옆의 목포권번에서 함국향이라는 권번장의 가르침으로 기방춤 기본을 익혔고, 이대조(검무, 승무), 박영구(승무, 법고), 이창조(검무)등으로부터 전통춤을 다졌고, 6·25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해서도 춤을 계속하였다가 상경하여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1987), 제97호 살풀이춤(1990) 두 종목의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평소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지”라는 말씀을 하였으며, 여성보다 더 고운 춤을 춘다는 평을 받았다. ‘하늘이 내린 춤꾼’, ‘국무(國舞)’등의 칭호를 붙인 『이매방화보집』(이병옥·김영란 집필, 2011)을 봉정할 만큼 이수자들만도 수백 명에 이르며 명무제자(너무 많아 명단 생략)들도 수두룩한 범한국적인 최정상의 춤꾼이었다. 한진옥류 검무와 재인춤 광주·전남지역 명무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나 타지방에서 춤사범이나 춤꾼으로 생애를 보낸 이들(강태홍, 박지홍, 김계화, 이매방 등)이 많은데, 이에 비해 끝까지 고향을 지킨 명무에는 한진옥(1911~1991)을 꼽을 수 있다. 한진옥은 ‘못 추는 춤이 없는 춤의 팔방미인’이라는 칭송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그가 선대 명무였던 이장선(굿거리·바라무·살풀이·부채춤·승무 등), 신갑도(팔도 검무), 이창조(검무, 창), 장판개(창) 등으로부터 다양한 춤과 소리를 전수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 있다. 그에게서 배운 제자들은 많았었는데, 대부분이 떠나자 "지방에 살다 보니 알아주던 사람도 떠나가고 남는 건 회한뿐”이라며 "백 가지 재주 가진 사람이 끼니 간 곳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곤 했었다. 자칫하면 맥조차 끊길 뻔했던 스승의 ‘팔방춤’의 맥을 제자 김다복, 임순자가 잇고 있을 때 지역의 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을 공연 해설 때마다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도 떠나고 김자연 등이 겨우 맥을 있고 있어 안타깝다. 속히 지역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전승의 맥을 끊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공옥진의 <1인 창무극>과 허튼춤 ‘1인 창무극’의 선구자로 알려진 공옥진(1931~2012)은 곱사춤, 병신춤, 원숭이춤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이 시대의 광대춤꾼이었다. 전남 영광 출신으로 남도 판소리의 대가였던 아버지 공대일에게 창을 배웠다. 1945년께 조선창극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고 고창 명창대회에서 장원에 입상했다. 1973년 남도문화제에서 '1인 창무극'을 창안하였고 1978년에는 익살맞은 병신춤과 판소리 창이 곁들어진 '1인 창무극'을 선보였다. 당시 문화재위원이었던 정병호(중앙대교수)에 의해 발굴된 공옥진의 특이한 춤들은 병신춤 외에도 곱사춤, 원숭이춤 등 동물을 모방한 춤으로 천연덕스러움과 청승맞음이 담겨있었으며, 『병신춤을 춥시다』(1982, 문순태 저)로 공옥진의 인생유전(人生流轉)이 세상이 알려지기도 했었다. 당시 ‘1인 창무극’ 공연을 봤던 필자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눈물범벅으로 울었다가 배꼽 빠질 지경으로 웃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장애인 단체의 거센 반발로 병신춤은 사리지고 동물 모방춤만 추게 되었으며, 그 후 뇌졸중으로 오래 고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에는 전남 무형문화재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무대에 서는 투혼을 보여주었고, 필자가 해설을 했던 제 71회 <한국의 명인명무전>(국립극장)에서도 살풀이춤으로 생애 마지막 무대를 선보여 커다란 감동을 주고 떠났다. 박병천의 진도북춤과 씻김굿 진도북춤의 명인이자 국가무형문화재 제 72호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였던 박병천 명인(1932~2007)은 무용계에서는 ‘진도씻김굿’보다는 ‘진도북춤’ 명인으로 추앙받았으며, 모두가 ‘박병천의 진도북춤’이라고 할 정도로 대표명칭이 되었다. 박병천 명인의 춤바디도 우리가 흔히 아는 곱디 고운 기방계춤이나 고고하고 담백한 재인계춤 바디가 아닌 독특하고 투박한 민간계 춤바디를 지녔다. 박병천 명인이 보유한 예능 중 최고의 걸작은 ‘구음시나위와 징(鉦)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전통춤꾼들은 앞을 다투어 살풀이춤이나 입춤 등의 반주곡으로도 많이 쓴다. 그런데 필자가 본 많은 공연무대에서는 구음소리만 들리고 춤이 묻혀 버리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박병천의 구음소리가 워낙 심금을 울리니까 관객들은 춤보다 소리 감흥에 매료되어 춤이 눌리는 분위기가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춤의 기량과 끼가 박병천 구음소리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춤꾼이 아니면 소리에 매몰될 수밖에 없을 정도이니 이 시대의 명인 중의 거장임을 증명해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광주·전남지역은 지리환경의 영향으로 좌·우사위(수평적, 평면적)가 많고 ‘땅기운이 온몸으로 지피는 춤(대지지향, 하향춤)과 땅을 밟는 춤(답지춤)’이 특징이다. 또한 넓은 평야와 농경지가 많아 농악(우도, 좌도농악)과 소리춤(강강술래)이 발달하였다. 추석 때가 되면 햇곡식과 햇과일의 추수를 천신과 지신에 감사드리는 추석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은 육자배기토리의 노래와 시나위 선율이 발달한 관계로 춤도 흩어지다 모아진 산조(散調) 음악의 느린 장단에서 점차 빠른 장단을 넘어가며 자지러질 듯 혹은 숨죽일 듯 손사위를 펼치는 ‘산조춤’과 구구절절 맺힌 한과 삶의 애환을 담았다가 차원 높은 신명으로 승화하는 ‘살풀이춤’, 그리고 농경사회의 영향을 받아 민초들의 고단함이 녹아있으면서도 풍요와 신명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허튼춤’이 발달하였다. 국가무형문화재에 판소리와 노동요 등이 지정되면서 광주·전남지역의 무형문화재에 판소리와 고법 12종목, 농악 6종목, 민요와 노동요가 15종이나 지정되어 가히 예향다운 면모를 보여주며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춤 분야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호남출신 이매방 명무를 국가무형문화재 승무와 살풀이춤 보유자로 지정하였을 뿐이며, 광주·전남지역에서는 한 종목도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아 지역춤들이 소멸될 위기에 있어 매우 안타깝다. 이병옥은 전통예술 연구가, 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 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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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남·제주의 들노래 합동공연영·호남·제주의 대표적인 농요가 고성 우산리 앞 들판에서 울려 퍼진다.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84호 고성농요보존회(회장 김석명)은 제19회 정기 공연 및 영·호남·제주의 들노래 합동 공연 한마당을 오는 20일 오후 2시 고성군 고성읍 우산리 앞 들판 고성농요 공연장에서 펼친다. 특이 이번 공연은 영·호남, 제주의 대표적인 들노래를 초청 모심기, 논매기, 밭매기, 보리타작, 길쌈 일 등을 직접 하면서 전승 민요를 부르는 전국 유일의 현지 공연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공연은 풍년 기원제를 시작으로 대통령상을 차지한 경북 공처농요와 전북 순창농요, 제주도 농요보존회의 공연, 그리고 경남 고성농요로 이어진다.특별 출연으로는 중요무형문화재인 진주·삼천포 12차 농악 및 고성 김임종 명창의 고성 전통상여소리, 우리소리 국악학원의 가야금 병창, 허덕순 국악연구소 삼도 설장구, 이영자 무용단의 전통 굿거리 등이 참여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 관중 모두에게는 고성막걸리인 농주(農酒)와 국수를 제공, 일요일 전통체험의 가족 나들이로 적당하다.김석명 회장은 "귀중한 문화유산인 전승민요와 농경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현지들판에서 공연하게 됐다”며 "농촌을 생각하고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청소년의 교육현장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문의는 ☎011-571-8668. 홈페이지 nongyo.com이나 고성농요(한글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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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모전들소리보존회 정기발표회 개최문경모전들소리보존회(회장 김제수)가 지난 8일 오후2시 문경새재 1관문 앞 잔디광장에서 제9회 공개행사 및 정기발표회를 개최하였다. 농사의 고달픔과 애환을 노래에 담고 문경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유일한 농요인 ‘모전들소리’는 초청 단체들의 길놀이를 시작으로 전체 마당을 선보였다. 특히 매년 정기 공연마다 관심과 사랑을 받는 전통 상여행렬도 이날 다시 재연되여 갈채를 받았다. 이번 정기발표회는 국내 우수한 무형문화재 단체인 '예천공처농요'와 '안동저전농요'를 초청하여 인근지역 농요들의 특징과 차이점을 이해하는 학습의 장을 마련함은 물론, 전통 상여소리 시연, 경기민요, 하늘재 난타공연 등 다양한 전통문화팀을 초청하여 정기발표회의 흥과 신명을 더욱 고조시켰다. 모전들소리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들판에서 불리고 전승되었으나 산업화와 도시화 등으로 인해 점차 사라져갔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안동대 민속학연구소 한 연구자가 2013년 ktv 방송과 안동MBC방송국에 알려서 연차로 2차례 소개되면서 문경시민들의 자발적 전승활동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당시 방송국에 소개를 한 사람은 안동대 구비문학대계 연구과제로 문경 지역 구비문학을 조사하러 온 안동대 BK 연구원 기미양씨이었다. 이후 금명효 기획국장의 민속조사를 통해 다시 알려지기 시작하여 2017년 한국민속예술축제 대통령상, 2020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문경지역의 무형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지금까지 전승∙보존되고 있다. 문경 모전들소리는 문경시 모전동 일대에서 전승해온 노동요와 의식요 및 유희요를 뜻한다. 가래질소리를 시작으로 목도질소리, 모심는소리 등 총 10가지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10년 창립한 모전들소리보존회에 의해 전승 보존되고 있다. 모전들소리보존회의 모태는 '모전중신기농악대'로, 1900년경부터 빈농들이 이 지역에 모이면서 연희되어 오다가 1940년대에 농악대가 정식으로 형성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농악대는 양수봉이라는 3대 상쇠를 통해 전승되어 현재 소리꾼 중심인물 5명 중 4명에게 전수되고 있다.음악적 측면에서 선율은 대부분 경상도 지역의 메나리 토리로 구성되었으나 인접한 상주, 예천지역의 소리와 다르고 강원도 소리와도 다른 문경 지역만의 독특한 소리가 있어 고유한 지역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 또한 '장원질소리'의 연행부분에서 상여소리를 삶과 죽음을 넘어선 일과 놀이의 일상으로 승화시키는 문경 지역민들의 독특한 사고도 모전들소리의 고유한 향토성이라 할 수 있다. 김제수 보존회장은 "늘 과분한 사랑을 받아서 감사한 마음으로 매년 정기공연을 준비한다. 오늘 자리에 함께 해주신 문경 지역민들에게 감사드리며 지역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모전들소리' 보존과 계승,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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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문화유산 농악!....사암리어린이농악단을 꿈꾼다지난달 춘천사암리농악회에서 주관한 '제4회 사암리공지어샘굿'이 지역 주민의 참여와 성원으로 성공적으로 마치었다. 공지어 전설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와 마을 곳곳에 공지어를 줄에 걸어두는 설치미술이 주목을 받았다. 지난달 국악신문에서 '춘천 사암리 샘굿' 행사 기사를 내보내고 나서 이 행사를 주관한 춘천사암리농악단 오선주 단장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되었다. 왜냐하면 잊혀져 가는 마을제의 복원과 샘굿의 주제를 전설의 물고기 '공지어'라는 신성한 대상을 구현해 내었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을 담보한 공지어는 샘에서 사는 주인장이고, 물의 신을 상징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공지어에게 소원도 빌어본다. 특히 샘굿에서 세계적 마임이스트 유진규가 공지어를 표상하는 퍼포먼스까지 더한 콜라보는 마치 한장의 그림처럼 각인이 되어버렸다. 마을제 샘굿의 전승주체는 마을사람들과 사암리농악보존회이다. 특히 여성이 상쇠라는 농악단이라서 더욱 오선주 단장을 만나보고 싶었다. Q. 안녕하세요. 오선주 단장님, 서울 출생이신 분이 어떤 계기로 전통을 만나서 '농악'을 택하고 오늘까지 춘천사암리농악보존회를 이끌어 오셨는지요. A.광화문에 있던 경기여자고등학교 학예회 무대에서 '소고춤'을 추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교때 활동하던 동아리에서 봉산탈춤 김선봉선생님께 탈춤을 배우면서 즐겁고 낭만에 젖었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고, 1996년 대학로에서 풍물 동아리 '굿누리'를 결성해 활동하다보니, 서울에서 소도예술단 상쇠로 활동하고, 2006년 정철기 선생의 '부포놀음' 장르까지 욕심이 나서 찾아가서 부포 돌리기까지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 2000년부터 마임이스트인 유진규씨와 함께 해마다 프랑스 미모스축제.영국 런던마임축제.독일 하노버엑스포,벨기에 하멜축제 등에 참가하여 상술놀이반주와 상포판굿 공연을 하면서 문화교류 민간외교사절단의 역할도 톡톡히 했습니다. 이후 남편을 따라서 춘천에 정착하게 되면서, 2005년부터는 춘천문화원에서 사물놀이와 농악을 지도하게 되었으며, 2009년 중국에서, 우리 한반도에서 발생한 농악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시키는 것을 보고 크게 자극을 받았습니다. 이후 2011년 문화원에서 사암리농악학술조사를 위해 사암리에 파견되면서, 나중에는 사암리에 이주하게 되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되고, '사암리 농악'과 반평생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Q. 본업인 농악보다도 '남사당놀이'를 먼저 배우게된 계기는, 남사당놀이 전수는 누구에게 받으셨나요? A. 풍물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욕구가 있던 차에 이화여대 다니던 20대 초 시절,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돌아가신 심우성 선생님이 기획하신 '발탈' 공연을 너무도 재미있게 본 기억이 생생해서 가슴에 담고 있다가....풍물과 인형극이 어우러지는 공부를 하게 되었지요. '남사당놀이' 보유자이신 고 박용태(1944년) 선생님을 찾아가 '꼭두각시놀음'에 접하게 되었고, 거기서 남사당놀이를 배우려다가 욕심이 나서 다른 장르의 농악도 함께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Q. '꼭뚜각시놀음'은 누구에게 전수받으셨나요. A. 고 박용택 선생님께 '꼭뚜각시놀음'을 전수받았습니다 아쉽게도 인형극 연습은 많이 못하고 풍물 반주에 관심이 더 있어서, 남사당놀이 중 농악 풍물공부를 더 많이 받았습니다 Q. '대전웃다리농악'도 사사했는데 스승의 계보를 밝히신다면? A.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호 '대전웃다리농악'을 인간문화재이신 송덕수'선생님을 찾아가 공부하여 전수자가 되었습니다. 전수조교 김은빈 선생님과 김경수 사무장님께서 보조 강사로 많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해마다 '농악전수 여름캠프'에 참여해 공부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Q. '사물놀이'를 언제부터 배웠는지요. A.사물놀이 공연은 1978년 공간사랑에서 김덕수 사물놀이 공연을 보고 매료되었으며, 직접 배우게 된건 1992년 춘천 사회문화연구회 강습을 통해서이고, 1993년에는 ‘우리소리' 풍물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96년 여성풍물패 '굿누리'를 결성하여 본격적으로 공연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소리에서 활동하던 분들과의 인연은 사암리농악단까지 어어지고 있습니다. 오단장은 여고시절 소고춤을 접하고 대학시절 발탈을 보고 영감을 받고나서, 고 김용택 선생님을 찾아가 '꼭두각시놀음'에 접하게 되었고, 거기서 남사당놀이를 배우려다가 농악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된다. Q. 농악을 하시는 분들이 탈춤. 회심곡, 비나리 같은 장르도 배우시는데. 오단장님은 민속문화, 즉 전통예술 장르 중 더 배우고 싶은 장르는 무엇인가요? A. 저희 동네에 강원도 도청 신청사가 신축되는데, 전통방식으로 부르는 토속소리 '지경다지기'를 배워서 농악단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올해 마을 공동체사업중 하나인 '농요배우기' 시간에는 마을 어르신들에게 '지경다지기소리'를 전수받을 계획입니다. 마을제 '샘굿'과 사암리농악보존회 Q. 사암리농악보존회를 결성하게된 계기 A. 2013년 춘천문화원학술대회에서 중국에서 2009년 유네스코에 등재돼 중국 조선 동포들이 향유하는 '농악무'의 뿌리가 "1927년 춘천 사암리 주민들이 가난을 피해 중국으로 이주해 영벽에 자리잡게 되었고, 낮선 이국땅에서 배고품과 추위를 달래기 위해 영벽바위 밑에서 풍물을 치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랬다"는 길림신문에 난 기사를 바탕으로 자료 수집을 위해 사암리농악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게 되었고 그 당시 생존해 계시던 97세 상쇠 최정하 옹을 만나 많은 고증을 통해 최상쇠님이 중국으로 이주해 간 선조들이 춘천에서 농악할 때, 무등을 타셨다는 사실, 또한 송봉규, 송학규, 김봉렬, 신현수님, 등 1950년대에 농악을 하셨던 어르신들의 고증도 수집하게 되었습니다. 파도파도 끝이 없는 인류무형문화유산 보물지도가 사임리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어 인류문화유산을 발굴해 가는 체계적인 과정을 이어 나가고자 2015년 보존회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Q. 농악대를 이끄는 여성 상쇠로서의 자부심이 어떤가요? A. 딱히 괭과리 소리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닌데, 1992년 취미생활로 참가한 '춘천사회문화연구회'에서 그나마 빨리 장단의 구조를 이해하다 보니 상쇠를 맡게된 후로는 계속 제 역할이 꽹과리를 맡게 되어 자연스럽게 꽹과리 인생이 풍물인생이 된듯 합니다. Q. 1999년 제1회 강원도 사물놀이 경연대회 '대상'을 수상하신 감동? A. 대상을 타기는 했는데 1회로 끝난 의미없는 대회였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제 이력에서 삭제하겠습니다. 수상해서 기뻤던 것은 2010년 강원도 문화원 사물놀이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탄 것으로 그 당시만해도 일반인이 상모돌리면서 연주하는팀이 거의 없었던 시기인데. 제가 지도하는 춘주농악팀 전원이 상모를 돌리며 연주하여 관객들이 깜짝 놀라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2017년 전국웃다리경연대회에서도 제가 지도하는 춘주농악팀이 차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Q. 2010년 전국농어민 풍물경연대회 강원도 대표 참가하셨는데, A. 춘천문화원에서 농악을 지도하다보니 전국대회에 까지 자연스럽게 참가하게 되었고 하도 긴장을 해서 우리가 어떻게 했냐보다는 전국의 다양한 민속놀이를 보며 흥미로웠고 남산한옥마을 구경하며 즐거워 했던 기억이 많이 남습니다. Q. 평창올림픽 때 어찌해서 참가하게 되었는지요? A. 평창문화올림픽 연출하시는 백형민 선생님과의 인연이 있어 문화버스킹 공연 총3회 참가하는, 저에게는 너무나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Q. 작년 예술의 전당 유진규 마임 50주년 기념 헌정공연으로 농악을 선보였는데, 궁금합니다. A. 유진규씨와는 춘천마임축제 총감독을 맡았던 2002년부터 프랑스 페리그 미모스마임축제, 영국 런던마임축제, 독일하노버엑스포, 네덜란드 하멜축제, 벨기에 마임축제,일본 도야마 마임축제, 홍콩 프린지 초청공연, 중국 상하이국제연극제 등에 참가했던 작품 "빈손”의 사물놀이 반주자로 오랜기간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임인생 50주년기념 헌정공연을 서울 예술의 전당과 대전 예술의 전당에서 기획하여 초청공연을 하게 되었고, 그런 뜻깊은 공연을 마치고 커텐콜을 할 때, 남편이 뜬금없이 관객을 향해 그동안 내조를 해 준 저를 언급해 쑥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한평생 예술가라는 외길 인생을 걸어온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난관들이 이상하게도 한번에 다 보상받는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Q. 2007년 풍물부 장원을 받으셨는데, 사진이 있나요? A.아쉽게도 그 당시 찍은 사진은 없고, 그 다음해 포스터에는 전해년도 장원 수상하는 사진이 들어가는 관습이 있어서, 제가 들어간 팜플렛 사진을 찾아서 보내드리겠습니다. Q. 해외공연 중 기억에 남는 장소는 A. 해외공연중에는 그저 비행기 타고 가서 공연장 주변에 숙소를 구하고 공연장 리허설, 그리고 공연후 귀국 등 바쁜 여행일정이었는데, 딱 한번 프랑스미모스축제 참가 후에는 공연을 마친 후 거의 한달간 벨기에, 스페인, 스위스, 이탈리아 등 주변,국가를 자유롭게 여행 다닌 기억이 제일 추억에 남습니다. 마침 축제기간과 겹쳐서 민속공연도 볼 수 있었는데,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국적불문하고 모두 통한다는 거죠. 외국어를 서로 몰라서 말이 안 통해도 예술은 통한다는거죠. 전통문화를 소중하게 지키려는 국민들이 선진국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고 돌아왔습니다. Q. 존경하는 국악인은 누구신가요? A. 농악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안성바우덕이' 상쇠입니다. 19세기 대원군이 경복궁 중수시 전국에서 강제동원된 젊은이들이 고향이 그리워서 밤마다 궁에 불을 지르자. 대원군이 이들을 위로하게 위해 전국 소리패 광대패들을 서울로 올려서 전국 단위 콘서트를 벌렸죠. 거기서 최고상으로 옥관자를 받은 바우덕이입니다. A. 전통이란 무게를 30여 년 동안 가지고 오시면서 가볍지는 않은 시절을 보내셨는데.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은 언제이셨는지요. Q. 의무기록을 보니 2010년에 뇌수막종 수술 받았네요. 너무 어지러워서 하던 농악 전수 공부를 더 이상 못한 게 가장 아쉽습니다. 이후에 이 전통놀이 농악대가 저를 살려낸 거지요. 우울하다가도 벽에 걸린 상모를 보면 농악이 생각나고. 그러면 몸을 추수려서 밖에 나가게 되지요. 그래서 지금은 완치해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있어요. 전환점이 된거지요. 다행인건 그 덕분에 우리 마을에 더 애정을 갖고 집중할 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마을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살아야 인간이 산다" Q. 세계적 마임이스트 유진규 선생과 이번 공지어축제를 같이 해보시고, 유진규 선생과 앞으로 '농악+퍼포먼스' 콜라보 작품 구상을 하시는지요. A. 올해 처음으로 개최한 동내면 '대룡산 공지어놀이'에서 유진규씨가 총연출, 제가 기획을 맡았습니다. 사암리 대룡산과 공지천 공지어를 잇는 스토리텔링으로 첫번째는 사암리 약물샘에서 샘굿으로 제의적 축제를 벌였고, 두번째는 동내면민이 함께하는 마을축제와 소리꾼을 찾는 경연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몸짓으로 제의적 행위를 할 때에 원초적 소리도 있어야지요. 반주가 곁드려져야 더욱 효과적이기에 마임과 풍물은 계속 함께 공동작업을 할겁니다. Q. 내년 제5회 샘굿에는 올해와는 좀 더 확장된 새로운 장르를 기대해도 될까요. A. 내년에는 퇴계선생이 공지천에 볏짚을 뿌리자 물고기로 변했다는 전설을 근간으로 공지어 제작에 좀 더 신비한 비주얼을 가미하고 싶습니다. 내년에는 '공지어 설화'를 소재로 한 마술도 축제 마당에 끌어오려 합니다. Q. 올해 샘굿은 언제 개최되었나요. 공지어 샘굿할 때 부르던 노래 가사는 기억나시나요 A. 첫번째 놀이 대보름맞이 ‘대룡산 샘굿’은 지난달 4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사암리 약물샘 (원창고개길 96-1)과 사암2리 마을회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신비한 물고기 ’공지어‘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공지천 곰짓내는 사암리 대룡산에서 발원합니다. 가사는 뚫으세 뚫으세 뻥뻥 뚫으세 수정같이 맑은 샘물 뻥뻥 뚫으세 대룡산 하늘기운 맑은물로 콸콸 솟아 곰짓내로 흘러흘러 공지어가 춤을 추니 올해도 풍년이요 내년에도 대풍일세 Q. 올해 제3회 샘굿에서 택한 주제는 '전설의 물고기 공지어'인데 어떤 역사적/지역적 배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신건가요. A. 춘천엔 퇴계 이황선생의 공지어 설화가 있고, 공지어가 살고 있는 곳이 공지천이며 공지천의 원류중 한곳으로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암리 약물샘에서 깨끗한 물과 대기순환을 기원하는 '생명굿'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Q. 내년 사암리 샘굿의 주제나 슬로건에 대해, 기획의도에 대해 구상해 놓으신 것이 있나요. A.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살아야 인간도 산다" 즉,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석유보다도 물이 더 비싼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다행히 평소 늘 생각한 이 말이 사암리 공지어전설과 맞아지고, 실제 전해지는 전설의 장소가 있습니다. 사암리 주민들이 지켜나갈 책임이고 과제라고 봅니다. Q. 이번 제3회 샘굿 개최에서 성과는 A.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마을사람들과 하루종일 얼굴 맞대고 볏집으로 공지어를 999마리 만들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정겨운 시간들을 공유했습니다. 이쁜 공지어에게 마을의 안녕을 빌면서 마을 곳곳에 매달면서 서로 인사하고 악수하는 모습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마을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Q. 언제나 마을제 샘굿을 함께 하시는 남편, 동반자를 떠나서 객관적으로 예술가 유진규 소개하신다면? A. 1981년 국악 관련 행사에서 만나 결혼을 해서 40년이 넘게 같이 살고 있습니다. 일상에서는 누구에게나 두절 두절 말이 없는 편이시고, 공부를 많이 하십니다. 시사, 철학, 다큐 등...늘 그냥 지나치는 것이 없습니다. 하늘 땅, 물... 등 발밑에 있는 개미까지.....최근에는 청개구리 집을 만들어서 같이 살고 있습니다. 특히 자기가 말한 것(작품)은 책임을 집니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 믿고 따르는 국내외 예술가들이 곳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진규 하면 '신뢰' 그 자체입니다. 춘천마임축제가 런던 마임축제, 프랑스 미모스축제와 함께 세계 3대 마임축제 중 하나로 정착하는 데는 유진규 선생의 신뢰가 모든 사람들을 집결하게 했습니다. Q. 단장님, 춘천사암리농악보존회의 미래를 위한 계획은 A. 사암리 마을에 다시 사람들이 살러 들어오고, 젊은 사람들이 귀촌을 하고, 어린이들이 태어나고, 학교종이 울리는 것입니다. 마을사람들과 함께하는 사암리농악보존회입니다. 그러면 힘이 나서 더 북을 치고, 어린 계승자들도 이어질거고, 욕심을 낸다면 향토문화재가 되어서 다음 세대에도 이어지는 지속가능성을 확고히 하는 겁니다. Q. 단장님, 사암리농악보존회 리더로서 꿈이 있으시다면? A. 어린이농악단을 결성하여 사암리농악을 전승하려는게 제 목표입니다 올해부터 어린이농악단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춘천을 대표하는 어린이농악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전통을 계승하는 꿈나무들을 육성하는 것이 꿈입니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제가 할 일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중국 조선족의 농악무'를 전승하고 있는 '왕청현농악단'과의 교류를 계속 진행할 겁니다. 3년간 코로나로 서로 오고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 김명춘 단장과 오늘도 통화해서 서로 교류하길 원한다고 확인했습니다. 올해 9.9절 조선자치족 행사에도 참가할 계획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술가는 두 부부 중 한 분은 안정된 직장이나 사업장을 운영할법도 한데, 모두 예술가의 길을 가신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오선주 단장이 자식들을 키워서 사회로 내보내는 20년 동안만 레스토랑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평생 예술의 길을 선택한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은 그냥 웃음뿐이다. 내년 제5회 사암리 공지어 샘굿이 기대된다. 전설 속의 공지어가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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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最古 아리랑(?), ‘만천유고 아로롱’삼목 作 청계천 8가 ‘수蒐’ 다방 계단을 오르는 삼목의 발걸음은 기대에 차서 유쾌하기까지 했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소위 ‘나까마’(무허가 중간 매개자)로 최고의 명성을 갖고 있는 김연창 선생으로 부터 1년간이나 벼르던 자료를 전달받기로 했기 때문이다. 외부인 연람을 규제한 데다 이미 등록 당시부터 ‘특수 귀중자료’로 지정한 것을 복사한 것이다. 김연창 선생은 ‘연박사’로도 불린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써 오세요”라는 낭랑한 유마담의 인사와 함께 특유의 검은색 가방을 멘 김선생 미소를 띠며 들어왔다. 앉기도 전에 X자로 맨 가방을 벗으며 생색을 냈다. "에이 세상에 도둑질하기보다 더 어려우니, 원 참. 매산梅山(김양선) 목사님만 계섰어도 이렇게 고생을 안해도 됐을 텐데, 그래도 김형이 끈질기게 매달려서 1년 만에 복사를 했우다. 자~” 제목 ‘農夫詞농부사’와 중간중간에 ‘啞魯聾아로롱’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A4 용지 3쪽 분량. 가는 붓글씨로 달필임이 느껴진다. 말로만 듣던 ‘최고의 아리랑 (아로롱) 기록’이다. 삼목에게는 많은 생각들이 밀려왔다. 우선 낼 아리랑 사설집에 수록할 수 있다는 충족감은 물론, 이의 해석이 곱씹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연박사는 삼목을 어지럽히는 얘기를 이어갔다. "김형이야 잘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선수들이 보기에는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이상한 점도 있어. 뭐냐 하면 다산 정약용이 이승훈이란 천주교사 개척 인물의 저작을 정리한 ‘만천유고蔓川遺稿’ 같은 깜짝 놀랠 자료 12종을 왜 40여 년이 지나서야 늦게 공개했고, 또 왜 전문공개를 꺼리느냐는 의문이야. 1967년 가톨릭신문인가 하는 신문에 공개했을 때 본 이들이 알음알음으로 전한 내용이거든. 아리랑이 있다는 것도 그렇게 알려진 거 일 뿐야.” 삼목에게는 김 선생의 이어지는 얘기가 잘 들리지 않았다. 김양선 목사에게 좋은 자료를 많이 양도했다는 등등의 얘기가 이어졌지만. 그러나 삼목의 머리속에서는 우선 ‘경자춘庚子春’이란 간지干支를 계산하여 만천 이승훈蔓川 李昇薰(1756~1801)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기 4년 전부터 지은 시를 연대순으로 배열한 것이고, 25세이던 1780년에서 27세인 1782년까지 3년간 지은 것이란 해석. ‘아로롱啞魯聾’이란 어휘가 후렴으로 있는 이 시편으로 가치가 엄청나다는 생각이 휩쓸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를 아리랑 역사에 어떻게 자리매김시킬지. 이런저런 생각뿐이었다. 필사본이긴 하지만 분명 아리랑 기록 중 최고最古의 자료이기 때문이다. 이 ‘농부사’는 2년여의 탈초 작업과 번역을 거처 1986년 발간한 ‘민족의 숨결, 그리고 발자국 소리 아리랑’(현대문예사 간)에 수록했다. 책머리의 첫 사진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그리고 번역문은 261~262쪽에 수록했다. 삼목이 가장 힘들게, 그러면서도 가장 뜻깊은 자료로 수록한 것 중의 하나다. 이 책은 고은, 박재삼, 나운영, 김연길 같은 아리랑 이해가 깊은 이들과의 간담회도 수록하는 등 성의 있는 편집을 한 아리랑 사설을 조사, 수집한 단행본으로는 첫 책이다. 원문의 일부를 사진판으로 수록하고 번역 전문을 게재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곡명에 대한주註는 ‘庚戌年里農請書農旗故作경술년이농청서농기고작’이라고 병기하여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고 와 경술년(1790년) 평택현감 재직 시 농부들의 농사 현장에 감화를 받아 지은 작품임을 밝혔다. 원문 대조를 하고 시인 박재삼 선생 등에게 자문을 받아 완성하여 수록한 번역문은 이렇다. 농부사農夫詞-아로롱 아로롱 어히야啞魯聾 啞魯聾 於戲也 신농후직(神農后稷)이 처음 밭을 갈고 김을 매니 민생(民生)을 그 근본으로 삼았네 징과 북을 울여라 징과 북을 울여라 잠깐 말하노니 우리의 모든 짝을 부르세 啞魯籠 啞魯籠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생을 힘써 길러 수고로워도 개탄하지 않을세 이윤같은 성인도 유신 땅에서 밭을 갈았고 도연명같은 처사도 전원으로 돌아 갔다네 旗들어라 旗들어라 북과 징소리가 행하는 마을 동문으로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태평만사가 농부의 마음이로다 밭을 갈고 풀을 뽑는 것은 공이 이루어지는 것일세 호미 드러라 호미 드러라 한결같이 앞을 향하여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아침에 윗 뜰에서 김을 매고 저녁에 들에서 떠나 온다 들북과 삿갓이 하늘에 가득하니 비바람도 홀로 근심이 없도다 징과 북을 울여라 징과 북을 울여라 슬픈 노래를 그대는 하지 마소 어히야 세상 일이 어느 곳을 연유하였던가 한낮이 되니 안주인은 밥을 가져오는도다 아 아 농사를 권하는 벼슬아치는 언제 돌아왔을까 旗세워라 旗세워라 그대에게 돌아와 술 삼배를 드리노라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배를 두드리며 흥겹게 노래 불러 즐겨보세 녹두잎 바람에 날리니 일기는 상쾌하고 벼꽃이 물에 젖으니 들녘이 풍요롭다 호미 씻어라 호미 씻어라 옥같은 산이 스스로 조수에 비치어 붉도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옛 곡조로 새로운 소리 섞어 부를 때 곡식 낱알 하나하나 천신만고 끝에 얻으니 가색의 어려움을 아는 사람 적을세 징과 북을 울려라 징과 북을 울려라 들밭 긴 이랑 날은 더디고 더디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이해가 다하도록 경영함이 이 한때로다 농사짓기 어려운 땅이라도 때때로 이용하여 내 직분을 다하고 비탈밭 밭갈이는 천옹의 책임이라 旗 내려라 旗 내려라 가을의 결실이 나의 가색과 동일하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군자를 크게 기른 것은 누구의 공인고 소떼와 풀꽃에 청산이 저물고 오리와 따오기 있는 모래밭에 이슬이 차구나 호미 너어라 호미 너어라 황혼에 달빛이 깃대에 가득하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석양에 농사 이야기 술 싣고 돌아오네 악기를 치며 김을 매는 두레풍장 모습이다. 기세배나 호미씻이 같은 농사 유풍이 그려졌다. 유학자적 입장에서 권농勸農 의식이 지배적이며 농사 과정을 낭만적으로 그렸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가 각련 끝에 반복 배치된 것으로 보아 후렴구임이 분명하다. ‘아리랑 아리랑 얼싸’의 음차音借인 것으로 尹善道의 ‘漁父四時詞’에 쓰인 ‘至菊棇 至菊棇 於思臥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같은 형태다. 이 작품이 1790년 작임을 전제한다면, 유명인사의 ‘아리랑’ 관련 한시 最古작이며, ‘아로롱’에서 ‘아리랑’까지의 어휘 음전音傳 현상을 보여주는 중요 자료이다. 경기도 평택일대의 농요에서 아리랑계 노래가 불렸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후 이 기록은 삼목의 다른 저서에서는 물론, 여러 글에서 재인용되었고, 다른 연구자들의 글에서 재해석되기도 했다. 이런 탓인지 2010년대 들어 경기도 천주교 성지에는 ‘아리랑노래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천주교와 아리랑 관계, 토착화 과정의 사례로도 해석되기도 한다. 이는 대종교와 아리랑과 같은 관계이다. 그런데 2014년 여름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삼목으로서는 너무나 뜻밖의 소식이었다. "선생님 저서에 이승훈의 만천유고 소재 아리랑 자료가 가짜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참고하세요. 제 학위 논문도 수정을 할 수밖에 없네요. 참 어이가 없네요.” "예? 가짜라니요? 만천유고가요? 농부사 아리랑도요?” "예, 농부사도 그렇다는 거지요. 가짜인지 위작인지 아직은 분명하지 않으나 어떻든 문제가 제기 됐네요. 저도 좋은 자료라고 생각하여 전문을 분석하여 논문에 반영했는데, 삭제해야 할 형편이네요.” 청천벽력이었다. 전화를 한 분이 누군지도 묻지도 못하고 끊었다. 낙담했다. 그날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급한 김에 두 정거장을 걸어가 가판대에서 주요 일간지를 샀다. 그런데 산 신문에서는 관련 기사가 없었다. 궁금증은 여전했다. 그래서 교계 학술부분에 도움을 받는 기독교문사 이덕주 교수에게 문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또 의외의 말을 들었다. "예, 어제인가요? 아니면 며칠 전에 윤민구 신부 그분이 발표한다고 한 것이 있어요. 이승훈의 ‘성교요지’는 사기다 뭐 이런 것이지요. 그러니 김 선생이 끔찍이 애지중지하던 그 아리랑 기록도 문제가 되지요. 하긴 이 뿐입니까? 박사학위 논문이 6편이나 나왔잖아요. 그게 더 심각하지요. 정확한 일자는 다시 확인하고 알려드릴게요. 그런데 김선생이 아직 모르고 있었을 텐데 사실은요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어요. 2003년에 이미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김양선 목사가 1930년대 수집해서 보관하고 있는 관련 자료는 모두 위작이란 판정을 내렸던 거예요. 다만 공론화하지는 않았을 뿐이지요.” 삼목으로서는 자괴감이 들었다. 나름으로는 학계 모임에 그래도 쌀쌀 거리고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10여년 전에 가짜 판정이 났다는 사실을 이제야 듣다니. 이튿날 이덕주 목사의 주선으로 윤민구 신부가 발간한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 쟁점 연구’를 받았다. 부리나케 해당 부분을 읽었다. 기가 막혔다. 요지는 ‘사학징의邪學懲義’(1801년 천주교 박해에 관한 정부 측 기록을 수집하여 정리한 천주교서)에 ‘만천유고’가 없다는 문제제기 정도가 아니라 이승훈의 저작으로 알려진 자료들이 모두 타인의 작이며, 교묘하게 관련 인물들과 지명 등을 바꿔 넣어 꾸민 것들로 특히, 가장 중요한 ‘성교요지聖敎要旨’는 이렇게 단정하고 있었다. "성교 요지는 중국에서 활동한 미국 개신교 선교사 윌리엄 마틴이 1897년에 쓴 ‘쌍천자문(雙千字文)’의 일부를 베낀 위작이다. 문건의 전체 용어 등으로 보아 1930년대 전후 시점에서 위작한 것이다.” 아!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만찬유고의 발문을 정양용이 쓴 것으로 믿고 인용한 이런 구절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강과 산은 옛 그대로이고 푸른 하늘과 흰 구름도 그림자 하나 변하지 않았으나 옛 선현과 벗은 어디로 갔는고. 나무와 돌의 신세가 되어 세상에 붙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흘러 다니던 중, 슬프다! 모두 뜻밖에 세상을 떠났구료! 만천공(蔓川公)의 행적과 아름다운 글이 결코 적지 않으나, 불행히도 불에 타 버리어 한 편의 글도 얻어 보기가 어렵더니 천만 뜻밖에도 시고(詩稿)와 잡록(雜錄)과 몇 조각의 글이 남아 있기에 내 비록 졸렬하게나마 초(抄)하여 기록하고 만천유고(蔓川遺稿)라 이름하였다.” 정약용이 강진 유배지에서 쓴 발문이란 믿음이 깨진 것은 엄청난 충격이다. 그러나 이 충격은 이어졌다. 한양대 정민 교수도 이에 확대된 논지를 내놓았다. 한시 70수가 수록된 ‘만천유고’를 양헌수梁憲洙 장군의 문집 ‘하거집(荷居集)’에서 베낀 "악마의 편집”이라고 한 것이다. 이어 서강대 서종태 교수도 또 다른 시편은 홍석기洪錫箕의 ‘만주유집(晩洲遺集)’ 등에서 옮긴 시들이라고 밝혀냈다. 연구자들은 이를 위작한 이는 단순히 이승훈과 정양용이란 이름을 팔아 돈을 벌려고 지난한 작업을 할리가 없었다고 보았다. 그 배경은 1930년대 유난히 기승을 부렸던 유사종교 집단과 무관치 않다고 보았다. 토착 신앙뿐 아니라 메시아니즘의 치장을 두른 ‘정감록鄭鑑錄’ 계통 신앙 전파 세력과도 모종의 관련이 있으리라고 분석했다. 그 사례로 1930년대 대종교 계통의 ‘규원사화(葵園史話)’와 ‘환단고기(桓檀古記)’, 유교 쪽의 ‘화해사전(華海師傳)’같은 위서들의 출현을 든 것이다. 이들은 이제껏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있어 심각성을 경고하였다. 당연히 ‘농부사 아로롱’도 이승훈의 소작일 수가 없고, 그 해악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입론과 논거가 타당한 연구결과이니. 그렇다면 ‘농부사 아로롱’에 대한 해석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삼목은 오랜 시간 이 자료의 처리를 놓고 고심해야 했다. 그리고 새로 발행할 ‘우리 아리랑 문화’에 새로운 해석으로 정리를 하기로 했다.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작품의 작자를 이승훈이 아닌 ‘미상未詳’으로, 시기를 경술년 1790년이 아닌 20세기 초로 한다. 둘째, 작품성을 인정하여 두레풍장 유습이 연행되던 20세기 초 농부와 농사를 그린 작품으로 본다. 셋째, ‘아로롱’이란 어휘는 ‘아리랑’의 음차가 아니라 ‘아리랑’이란 어휘로 정리되는 한 과정의 하나로 본다. 아리랑에 심취하여 고은선생, 박희준 형 등과 ‘아리랑기행단’을 꾸려 전국을 답사하고, 직원 4명과 함께 ‘한국방송출판정보센타’의 문을 열고 문헌 수집과 조사에 매달렸던 시기, 삼목의 열정의 일부는 ‘만천유고’ 수록 ‘농부사 아로롱’에 닿아있다. 의외의 사연과 충격을 담고.... 그런데 세월이 지나 수다방 유마담의 얼굴도 흐릿하고, 최고의 나까마로 위세를 부리던 김연창 선생도 위작 자료를 거래하다 전과자로 생을 마쳐 거론하기를 꺼리는 지금, 불현듯 복사본을 넘겨주던 때 한 말이 다시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40여 년이 지나서야 늦게 공개를 하고, 전문 공개를 꺼리는 이유가 뭐요.” 혹시, 김연창 선생은 이미 이 자료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았을까? 이 말로 내게 암시를 준 것은 아닐까? "가짜를 판별하는 능력은 가짜를 만드는 능력을 동반한다”는 말처럼, 김 선생이 선수이기 때문에 이미 알만했을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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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 논단, '산유화 단상(斷想) 3題'국중성(익산 향토사학자) 산유화 노래는 옛 백제시절 농민들이 불러온 농부가였다. 원래 백제의 풍토에서 발상한 국민적 얼이 담긴 민중의 소리요 그것은 그들만의 속성에서 나온 농민의 소리가 원형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 산유화였다 할 것이다. 오늘날 민속음악에서 ‘산유화’니 ‘메나리’니 하는 용어에 이론(異論)이 있기도 했으나 이에 대한 어원적 본의(本義)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산유화가는 백제의 농부가였다 산유화에 대하여는 가람 이 병기 선생이 제기한 한산세고 흡제고서(韓山世稿翕齊稿序)를 소개한 내용에 의하면 산유화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었다. "산유화라는 노래가 농가에서 불러져 세전(世傳)하였는데 이는 백제시절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부여에 그 내력을 아는 노인이 말하기를 의자왕 때 까지 산유화와 고란(皐蘭)의 두 노래가 있었는데 나라가 망한 후 산유화는 남고 고란은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이 같이 전하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부여의 고적 보존회에 백제의 산유화 노래가 보전되어 전한다 하는데 그 가사는 이러하다. 가람 이병기 선생의 문집에 소개된 내용이다. 산유화야 산유화야 저 꽃피어 농사일 시작하고 저 꽃 지더락 필역(畢役)하세 얼럴럴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또 민속학자 임동권 박사는 「한국민요사」에서 "부여지방에는 세전된 백제유가(遺歌)산유화가 있으며. 그 노래는 이양 할 때나 수확 시에 남녀 농가인 들이 모두 부른다.” 하였다. 이와 같이 산유화가는 농사철에 농부들이 농사일을 내용으로 부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양주동 박사의 ‘고가연구’에서는 "산유화가는 옛 백제 유민(遺民)의 노래”라 하였는데. 백제 유민이라면 나라가 멸망한 후의 유이민들을 말함인데. 앞의 흡제고 서문에 의하면 산유화는 의자왕 이전에도 있었다. 함을 보아서는 백제가 멸망 이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산유화는 ‘여지승람’에도 옛 백제 시절에 불러온 노래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백제가 멸망한 이후의 전승여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영조 때 학자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 1712~1775)선생이 답사차 호남 지방에 들어서니 온 들판의 푸른 논에서 산유화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더라는 것이다. 그가 평소 그 지방의 수령과 교유관계가 있어 당도한 곳은 금마(익산)였다 한다. 그 날은 수령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날인지라 백성들이 전별의 정을 못 잊어 떠나는 행차를 둘러싸고 눈물바다를 이루는 정경을 보고 신 광수 선생은 ‘금마별가’라 하는 32수의 연작시를 남겼는데 그 중의 열여섯 번째가 ‘산유화가’였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處處 山有花 곳곳에 산유화 가락 齊發翠和中 푸른 논에 일제히 퍼진다네 欣然謂農夫 흔연히 농부에 이르는 말 善哉勤用功 좋구나 부지런히 지었구나(국역 금마별가에서 인용) 이에서 미루어 볼 때 호남지방 에서는 산유화의 노래가 조선 후기까지도 이어 왔다는 실증적 사례라 보아진다. 그리고 앞에 부여의 보전 산유화에서 보듯이 산유화는 농부들이 농사일을 내용으로 부르는 노래였고. 신 광수 선생이 채록한 산유화 내용에서도 푸른 논에서 일하면서 산유화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은 벼가 푸르게 자란 물 논에서 논매기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일면에서 보아도 산유화가는 모심고 논매는 일을 노래한 것이 산유화가라는 것임을 확인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일반 사전에서도 정의하기를 논에서 모심고 김매기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를 농요 또는 농부가라 하였으니 산유화가는 곧 농요요 농부가임을 알 수 가있다. 이에 산유화에 관심을 두어 채록한 석북 선생의 학문과 위상을 참고하여 둔다. 이가원 박사는 그의 ‘한문학연구’에서 석북 신광수(1712~1775)는 성호 이익(1681 ~ 1763)보다 31년의 후배요 연암 박지원(1737~1805)보다는 25년의 선배로서 행시(行詩). 악부(樂府). 염체(艶體-詩體의 하나). 전기(傳記)등의 모든 학문적 방면에서 걸출한 대가였다고 한다. 석북의 작품은 앞서 개척하지 못한 영역에서 개척한 것은 악부였으며. 악부는 당시 사회상을 가장 잘 표현한 문학이라 하였는데. 이에서 그의 악부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한벽당 십이곡(寒碧當 十二曲)과 금마별가(金馬別歌)와 관서별곡(關西別曲)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관서별곡이 가장 이름 높은 대표작 이었다고 한다. 내용은 우리나라 승경지가 중국인의 호평과 국내 사대부들의 풍류가 이곳에 집중하면서도 중국과 같이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중국은 이름 높은 시가(詩歌)로 강산을 빛내지만 우리는 그럴만한 시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북은 지난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지어진 것이 관서 별곡이라 한다. 이 관서 악부가운데 제15절에 일반시조 배장단(一般時調排長短)이라 하여 때 시자를 쓴 ‘시조’라는 용어가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의미에서 이를 시조(時調)라는 용례의 효시로 삼기도 한다. 또한 석북의 명성은 당대를 풍미하여 그를 만나기를 원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라 하였다 한다. 석북의 행력은 60세에 연천 현감 기로과(耆老科) 장원 당상에 오르고. 우승지의 명을 제수 하였고. 그 뒤 영월부사를 거쳐 우승지로 여생을 마쳤다. 2. 농부가의 유래와 산유화가 앞장에서 산유화 노래는 농요 또는 농부가라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농요가 언제부터 어떻게 부르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전하는 기록으로는 저 중국의 고 사서인 삼국지위서 동이열전 또는 진서 등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마한의 풍습은 해마다 5월이면 하종(夏種)을 마치고 제사를 지내고는 무리를 지어 술 먹고 노래와 춤을 추는데 밤낮없이 즐긴다. 그들의 춤은 수십명이 뒤를 따라 땅을 밟으며 몸을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이 중국의 탁무(鐸舞)와 흡사하다. 10월에 추수를 마치고도 그와 같이 한다.”(국사편찬위 중국정사 조선전 참조) 이에서 마한 이라면 백제의 전신이니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는 이전부터 농요를 즐기며 농사일을 해 왔던 것 같다. 그리고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보다도 일찍이 일본 땅에 노래와 춤을 전수한 나라였다 하며 그에 따른 악기도 중국 것이 아닌 백제의 악기로 가르쳤다 하며. 그 음악도 백제의 풍속무(風俗舞) 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우리 문헌에는 없고 전해줘서 받았다는 일본의 기록에서 찾았다. 하니 한편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서 주목이 되는 것은 일본에 전했다는 가무는 백제 지방의 풍속무(風俗舞)였다 하니 그것은 곧 전통적으로 이어온 농요풍임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옛 백제의 풍속요가 후대로 이어 왔기에 근래에 까지도 시골 농촌에서는 동네마다 모심고 논매기 때가되면 두레를 지어 집단으로 풍장을 치며 농사일을 해 왔던 것을 우리는 보아 왔다. 원래 민요와 농악은 그 유래가 전문 소리꾼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일하면서 그 일을 흥겨롭게 노래로 표현한 것을 일러 농요라 하였고. 또한 민간에서 불렀다 해서 민요라 하기도 한다 하였다. 다시 말하면 농요란 농사꾼들이 농사일을 가사로 표현한 노래가 농요요, 민요란 농사일과 관계없는 것 까지 민간에서 불렀다 하여 총칭한 표현으로 구분된다. 원래부터 농요라 할 때 요(謠)란 무리를 지어 노래를 부른다 하여 무리 도(徒)자를 써서 도가(徒歌)라 하였고. 또한 도가의 원뜻은 진흙 논 에서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라 하여 진흙도(塗)자를 써서 도가(塗歌)라 하기도 한다 하였다 (謠. 徒歌曰 塗歌-대동 운부군옥) 그리고 도가(塗歌)라 함은 옛날부터 농민들이 무리를 지어 곡조도 문서도 없이 부르는 노래라 하여 도가 무장곡(塗歌 無章曲 자전)이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농요의 본의는 농부들이 물 논의 진흙 속 에서 모심고 김매는 일을 노래지어 부르는 소리를 농요 라하고, 이는 농부들의 노래라 하여 농부가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遙)의 본의는 농요이며 산유화요 ‘산유화’의 원형이라 보고자 한다. 3. 산유화는 산나리 꽃이었다 산유화(山有花)라는 말은 옛날부터 백제의 농부들이 불러온 노랫말 이었다 하는데. 그러면 산유화라는 말의 어원이 궁금하다. ‘부여고적보존회에서 전한다는 산유화 노래의 가사를 다시 보자. 산유화에 산유화야 저 꽃피어 농사일 시작하여 저 꽃 지더락 필역(畢役)하세 얼럴럴 상사뒤 어여 뒤여 상사뒤 또 충청도 예산 지방에서 전하는 산유화 노래도 있다. 메나리 꽃아 메나리 꽃아 저 꽃 피어 농사일 시작하여 저 꽃 져서 농사일 필역하세 이 상의 두 편 가사에서 보면 산유화는 메나리꽃 이라는 답이 나와있다. 산(山)을 뫼(메)라 함은 백제시절부터 학습교제로 가르쳐온 천자문(千字文)에 산(山)은 뫼(메)로 해석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와서도 어린이 학습교재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도 같은 내용으로 해석이 되어 있음을 보면 산을 메(뫼)로 불러진 것은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와서도 메산(山)자로 읽혀오고 있다. 그래서 산에 있는 나리를 메나리로 불러진 것은 당시부터 일상 그렇게 전승되어온 명칭이 ‘메나리’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앞의 두 산유화 노래가 나온 부여와 예산은 같은 옛 백제의 연고지라는 의미에서도 신빙성이 있다할 것이다. 그 산유화 가사에서 볼 때 옛 백제인들은 산(메) 나리꽃이 피고 지는 시기를 보아가며 농사일을 해 왔다는 것을 알게 한다. 옛날부터 농사일중에 가장 중요한 농사는 논농사 였으므로 모심고 논매는 시기에 맞게 피고 지는 꽃이 산에서 피는 나리꽃(메나리)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두 노래가사를 조합하여 보면 이런 해석이 된다. 메나리 꽃이 필 때 모를 심고 메나리 꽃이 질 때 김을 매세 그래서 옛날부터 시골 농촌에서는 모심고 논매는 일이 끝나면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큰 행사가 끝나는(필역) 셈이었다. 나라에서도 논농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농사교본인 「농사직설」에서도 5월에 모를 심고 6월에 김매기를 세 번해야 마감(필역)된다고 명시 하고 있다. 저와 같이 식물의 생태를 보고 농사시기를 삼아 온 것은 조선 후기에 나온 ‘산림경제’나 ‘임원십육지’ 에서도 동 지후 새 싹이 돋는 시기에 밭갈이를 하고, 찔레꽃이 피면 목화를 심고. 복사꽃이 질 때면 콩과 팥을 심으라는 등의 기록이 있다. 그와 같이 산야에는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지는데 그 중에는 농사에 해당한 시기에 어떤 꽃이 필 때는 무슨 일을 하고 어떤 꽃이 질 때는 무슨 일을 해 왔던 그 같이 자연의 생태를 보고 농사의 시기를 가늠해 왔던 관습을 농민들은 더 믿어 왔던 것이다. 그 같이 눈으로 보이는 식물력(曆)이라 할가 거기에 인습이 되어온 데에는 그럴만한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난 관습이라 보고자 한다. 농사란 인간이 먹어야 사는 생명업 임에도 농사는 무식하고 천한 백성들이나 하는 것이 농사였다. 그러다 보니 농사에 밝은 백성들은 글을 몰랐고. 글줄이나 아는 양반네들은 농사일 같은 것은 아예 모르는 것이 당연한 사회적 풍조요 관행이었다. 그러한 사회적 풍습은 중세기 유럽에서도 있었던 지라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유행한 노랫말이 있었다고 한다. 아담은 밭갈이를 하고 하와는 길 삼을 하던 시절 도대체 그 누가 양반이었다 하더냐 이는 극히 원론적인 논리다. 너나없이 편한 데로 빠지면 식량 농사는 누가 할 것인가 누가해도 해야 할 농사인 것을. 조선시대 초기까지도 나라에서는 권농정책은 있어왔어도 농민을 위한 농서는 없었다. 세종 연간에 와서야 우리 농서인 농사직설(1429)이 처음 나왔고. 이어서 농가집성이니 ‘세시찬요’(1655). ‘산림경제’(1715). ‘임원십육지’(1827)등 여러 농서가 나왔으나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한문체로 되어 있어서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중국에서 전래한 24절기력이 있었으나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자연에서 눈으로 보이는 식물력(曆)을 더 믿어왔던 것이다. 그것은 전국 어느 지방이던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백제지방에서는 산에서 피고 지는 메(산)나리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논농사를 지어 왔기에 산(山)에 있는(有) 그 꽃(花)을 가리켜 산유화라 했던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우리네 조상들은 산야에서 피고 지는 자연 현상을 본 받아 농사일을 해온 것은 아마도 먼 조상 때부터 이어왔던 생활방식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 농민들은 모심고 논매는 때를 기하여 피고 지는 메(山)나리 꽃에서 농사의 절기를 삼아 왔고 그 또한 산에 있는 꽃이라는 순박한 뜻에서 산유화라 하였으니 산유화는 곧 메나리였고. 메나리는 ‘산나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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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경기여고 경기인 민속학자 이소라‘농요(農謠)’ 연구로 알려진 민속학자 이소라 박사(79·사진)가 ‘자랑스러운 경기인’으로 뽑혔다.경기여고 총동창회인 경운회(회장 김영란)는 "15일 열린 개교 114주년 기념식에서 이박사를 제29회 자랑스러운 경기인으로 선정해 시상했다”고 17일 밝혔다.창원에서 태어나 부산여중과 경기여고를 거쳐 서울대 법학과와 서울음대 작곡과(2년)에 학사 편입후, 국악대학원을 졸업한 이박사는 1983년 ‘논매기 소리’를 수집하는 등 전국에서 약 40년 동안 사라져가는 농요를 채집하고 연구 및 보존하는 데 힘썼다. 1985년 농요보존회를 결성하고 국내외에서 공연과 학술발표 및 답사를 수행하면서 한국 농요를 알려왔다. 2003년에는 민족음악연구소를 설립해 한국 농요와 해외 농요의 비교 연구 등 저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09년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주관 '아메리칸 인디언 구전 연구와 CD제작'에 참여한 업적은 한국의 음악학 수준을 세계에 알린 연구라고 평가를 받았다. 저서로는 ‘북미 인디언의 민요를 찾아서’(2013년), ‘전남 지방 논매기 소리 총서’(2020년), ‘경기도 논매기 소리 음원집’(2022년) 등이 있다. 문화재청 전문위원과 공주대 지역개발연구소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월산 학술상 (2014년) 옥관문화훈장 옥관장 (2017년)과 KBS국악대상 출판상(1992년)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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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익산삼기 농요 전국국악경연대회<br>(농요&민요,가야금병창) (10월1일) 비대면 동영상 심사코로나19 재확산으로, 감염 방지와 안전한 대회를 위하여 부득이 모든 경연은(단심제,예선,본선,종합경연) 비대면 동영상 심사로 진행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 대회명 :제4회익산삼기농요 전국국악경연대회 ■ 목 적 :익산삼기농요보존회는 전통문화 공연을 통하여 향토문화 증진을 실현하고 시민 참여와 화합을 유도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의 기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전국 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하여 지역문화 발전과 농요민요, 가야금병창 등을 널리 알리고자 함 ■주최,주관 :(사)익산삼기농요보존회 ■후 원 :전라북도, 전라북도의회, 전라북도교육청,, 익산시, 익산시의회, 전라북도익산 교육지원청, 익산문화원 ■운영방침 :연례행사로 개최하고 전국 제1의 대회로 발전케 운영함 ■대 회 장 :이삼성 ■대회일자 : 2022년 10월 1일(토)→모든 경연은 비대면 동영상 심사로 진행 ■본선장소 :익산 삼기중학교 도서관 ■경연순서 :예선, 본선 모두 접수순으로 진행함(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심사규정 :본 대회 규정에 의함 ■접수방법 ★필수사항: 참가신청서(선명한 정면사진 부착)/신분증(학생증)사본/경연 동영상 ★접수일자 : 2022년 9월 13일(수) ~ 9월 29일(목) 오후 5시까지⇢접수일 이후 신청 불가 ★접 수 처 : (사)익산삼기농요보존회 사무국으로 접수 E-Mail 접수 : aud2071@hanmail.net(전화, 팩스, 우편접수 불가) 메일 접수 시→메일 제목과 동영상 제목은 아래 예시의 양식대로 접수 예시1) 일반부 가야금병창 성춘향 / 예시2) 민요 단체 이몽룡외 7명 ★전화문의 :010-7673-2071(메일 접수 후, 회신드립니다. 회신이 없을 시 확인전화 필수) ★참가신청서 다운 :㈜국악신문 http://www.kukak21.com(경연대회 게시판) 삼기농요보존회 카페 http://cafe.daum.net/Nongyo ★동영상 제출 안내사항 (동영상은 오직, 본 대회용으로 촬영해야 하며 타 대회 경연영상은 불가합니다) ★화질 및 음질 - 촬영 해상도 - 1920x1080(FHD) / 촬영 파일형식 - mp4 / ※원본동영상 제출※ ★카메라 위치 - 정면에 고정해서 촬영하고, 참가자만 영상에 나와야 함 / 핸드폰 가로 상태로 촬영 ★촬 영 방 법 - 한 컷으로 촬영해야 하고, 마이크. 편집. 자막. 자기소개. 멘트. 사운드조절 불가 ★촬 영 시 간 - 학생부, 신인부(3분이내) . 일반부(7분이내) ★촬 영 장 소 - 소음이 적고 심사가 가능한 장소에서 촬영 ★촬 영 복 장 - 경연복장으로 촬영 / 마스크를 벗고 정면얼굴과 전신모습이 나오도록 촬영 ★단 체 촬 영 - 참가자 전원이 영상에 나올 수 있도록 촬영 ★반 주 자 - 반주자를 대동하고 촬영해야 하며, 반주자 모습은 영상에 나오지 않게 촬영 ★학원에서 다수 신청시 - 참가자별로(개인, 팀) 각각의 동영상 파일로 촬영하고 접수해야 함 ★주 의 사 항 - 제출한 동영상은 반환하지 않음/ ■참가자격 :전국 초, 중, 고, 일반(대학부 포함) ※ 단, 타 대회 국회의장상(장관상) 수상자 및 문화재 기능보유자, 본 대회에서 동일부문 대상수상자는 불가 ㅇ일반부(농요&민요, 가야금병창) / 일반부 단체(농요&민요-10인 이상) ㅇ신인부(농요&민요, 가야금병창) / 비전공자 ㅇ학생부(농요&민요, 가야금병창) ■경연일정 및 시상식 : 별도의 시상식 없음 ★비대면 동영상 심사로 진행되며, 결과는 익산 삼기농요보존회 다음카페에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http://cafe.daum.net/Nongyo (수상자 확인은, 개인정보로 인하여 가입하셔야 가능합니다) ★경연 후, 수상자는 등기우편으로 보내드립니다. ★해당 시상금은 통장으로 입금해드립니다.(참가자 본인통장만 가능) ■본선 경연종목, 경연시간, 참가금 ※ 참가비 없음 ■참고사항 * 학생부, 신인부, 단체는 단심제로 심사를 진행합니다. * 일반부는 예선을 통해 본선 각 1등이 종합경연을 통해 순위가 결정됩니다. ■코로나19 관련 안전수칙 (심사위원, 관계자) ㅇ 발열 확인 : 1차 측정결과 37.5℃ 이상일 경우 2차 비접촉식 체온계로 확인. (2회 이상 37.5℃ 이상일 경우 대회장 입장 불가) ㅇ호흡기 등 기타 바이러스 유증상자 입장 불가. ㅇ14일 이내에 해외 방문사항이 있을 시 입장 불가. ㅇ대회장 입장 시 방역지침 의무사항 (발열체크, 명단작성, 마스크착용 등) ㅇ발열체크 후 이상 없는 사람들에게 마스크 한쪽에 작은 스티커를 붙여 구별. ㅇ대회는 무관중으로 진행합니다. ㅇ 사회적 거리두기 적용, 관객석 라벨지 미부착 의자에만 착석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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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무형문화재 “문경 모전들소리보존회” 초청 순회공연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46호 문경모전들소리보존회(회장 김제수)가 지난 16일 오전 12시 구미시 발갱이들소리전수관 야외공연장에서 초청공연을 하였다. 구미발갱이들소리보존회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이날 행사는 충남 무형문화재 제20호 홍성결성농요와 경북무형문화재 제40호 구미무을농악과 더불어 전통민속공연단이 다수 참여하여 즐거운 전통예술의 한마당이 펼쳐졌으며 문경모전들소리는 특유의 그 신명과 흥겨움으로 이날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금명효 기획국장의 지도하에 출연진 50명은 지난달 18일 경북 청도공연에 이어 이번달 구미공연, 다음달 예천초청공연까지 연이은 강행군의 공연속에도 지친모습 없이 신명과 화합된 모습을 연출 시켰으며 한여름 더위도 잊고 모전들소리 전 과정을 선보이며 출연진 전체가 함께 춤을 추며 공연에 동참하는 등 더욱더 큰 호평을 받았다. 이수일 구미발갱이들소리보존회 이사장은 "더운 날씨에 열정적인 공연을 보여주셔서 감사하다. 앞으로도 민속문화를 잘 지켜가며 함께 나아가자”라고 인사를 전했고 김제수 문경모전들소리보존회장은 "오늘 여러 무형문화재 단체들이 함께 모여 서로 호흡하고 공연하니 즐겁다. 앞으로도 서로 협조하며 소중한 문화유산을 잘 전승하자”라고 말했다. 한편 모전들소리는 지난 5월 1일 정기발표회를 시작으로 매월 1회 대외 초청공연을 다니며 문경시의 문화유산을 알리고 있으며 문경지역의 농요와 들소리는 물론 전통농악과 상여소리 기능을 보유한 단체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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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매지농악 새 보유자, 강영구강원도가 원주매지농악 보존회 강성태 회장을 명예보유자, 강영구 전수관장을 보유자, 강주석·성남진을 전승교육사로 지정했다.강성태 명예보유자는 1976년부터 농악의 상쇠(꽹과리)를 맡았다.2006년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5-2호 원주매지농악 기능보유자로 지정돼 영서지역을 대표하는 농악으로 보존 가치를 인정받았다.고령으로 정상적인 전승 활동은 어렵지만 원주매지농악 보전을 위해 기여한 공적을 인정해 명예보유자가 됐다.강영구 보유자는 부친 강성태로부터 농악을 전수 받았다.2008년 전승교육사로 지정돼 원주매지농악전수관장으로 매년 정월대보름 달맞이 행사, 단오제, 문화재청 문화재활용사업을 추진하는 등 전통민속 보존을 위해 노력했다.보유 예능인 태평소, 농요뿐 아니라 상쇠로서의 기량도 뛰어나 원주매지농악을 이끌며 활기를 더할 수 있게 됐다.전승교육사로 지정된 강주석과 성남진은 강성태 명예보유자로부터 매지농악을 사사, 2006년 이수자로 선정됐다.각종 공연에 참가하는 등 원주시민을 대상으로 농악교육활동에 매진한 공로를 인정받아 전승교육사로 인정됐다.원주시 역사박물관 관계자는 "전승에 헌신해 온 보유자들을 예우하고 무형문화재 전승자들이 전승 활동에 전념해 자랑스러운 전통문화를 보존할 수 있도록 환경을 꾸준히 개선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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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군, 제4회 ‘보은장안농요’ 축제 18일보은군은 올해로 네번째를 맞이하는 보은장안농요 축제가 오는 18일 장안면 개안리 일대에서 열린다고 10일 밝혔다.'보은장안농요'는 150여년 전부터 보은군 장안면 일대에서 전승돼 온 노동요이다. 논농사는 집단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에 마을주민들이 협력해 농사를 짓던 농경문화 시절에는 고달픔을 잠시 잊고 신명나게 일하고자 불렀던 농요다.장안면전통민속보존회(회장 남기영)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에서 마을 주민들이 '들나가기-모찌기-모심기-점심참-초듬아시매기-이듬논뜯기-신명풀이' 과정을 재현해 참석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예정이다.한편, 보은군 장안면전통민속보존회는 2017년 보은군 대표로 출전한 제23회 충북민속예술축제에서 장안농요를 시연해 개인부분과 단체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2018년에는 제59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충북대표로 참가해 금상을 차지해 장안농요의 문화적 가치를 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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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무형문화재 공연 2년 만에 대면 개최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비대면으로 진행됐던 부산시 지정 무형문화재 행사가 오는 주말부터 대면 공연을 통해 시민에게 선보여진다.시는 7일부터 부산, 구덕, 다대포, 수영 민속예술관 등지에서 무형문화재 공개행사를 차례로 개최한다고 6일 밝혔다.첫 합동 공개행사가 진행되는 7일 오후 1시 부산민속예술관 놀이마당에서 '동래민속예술축제'가 열린다. 동래민속예술축제는 역사와 충절의 고장으로 알려진 동래지역에서 전통예술을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 55년간 개최돼 왔다.이번 공연에서 시민들은 동래지역의 우수한 무형문화재인 ▲동래학춤(제3호) ▲동래지신밟기(제4호) ▲동래고무(제10호) ▲동래한량춤(제14호) 등을 직접 관람할 수 있다.아울러 오는 21일 오후 1시 구덕민속예술관 놀이마당에서는 '2022년 구덕골 전통민속예술축제'가 열린다. 이번 공연에서는 ▲부산농악(제6호) ▲구덕망깨소리(제11호) ▲부산고분도리걸립(제18호) 등이 펼쳐진다.같은 날 오후 2시에는 다대포해변공원에서 멸치잡이 후리질의 작업 순서에 따라 부르는 어로노동요인 다대포후리소리(제7호) 공연이 시민들에게 공개된다.이어 오는 9월 24일 수영민속예술관 놀이마당에서는 힘들고 고된 농사일에 힘을 북돋아 주는 농요한마당인 ▲수영농청놀이(제2호)와 잡귀잡신을 물리치고 마을의 안녕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수영지신밟기(제22호) 등 수영지방 향토문화가 담긴 공연이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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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나는 경북 무형문화재 제46호 ‘모전 들소리’ 정기발표회모전들소리보존회(회장:김제수)는 지난 24일 문경시 영순면 구(舊)영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제7회 모전들소리 정기발표회를 개최했다. 문경 모전들소리는 문경시 모전동 일대에서 전승해온 노동요와 의식요 및 유희요를 뜻한다. 모전들소리보존회의 모태는 '모전중신기농악대'로 1900년경부터 빈농들이 이 지역에 모이면서 연희되어 오다가 1940년대에 농악대가 정식으로 형성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농악대는 양수봉이라는 3대 상쇠를 통해 전승되어 현재 소리꾼 중심인물 5명 중 4명에게 전수하는 등 명확한 전승계보의 역사성이 입증되었다. 연행 확인 결과 음악적 측면에서 선율은 대부분 경상도 지역의 메나리토리로 구성되었으나, 인접한 상주, 예천지역의 소리와 다르고 강원도 소리와도 다른 문경 지역만의 독특한 소리가 있어 고유한 지역적 특색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모전들소리보존회는 매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많은 관광객들과 출연진이 함께 진행해 왔으나 올해에도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외부 지역 사람들은 초청하지 않고 소수의 마을사람들과 비대면으로 진행됐다. 초청공연으로 가은 '불우리풍물단'과 문경 전통 연희단 '하늘재'가 함께 공연을 펼쳐 문경의 풍물과 멋이 지역인들의 가슴에 신명과 흥을 하늘 높이 띄워 주었다. 김제수, 금명효, 안후준 선소리꾼 등에 의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문경지역 현존하는 유일한 농요인 ‘모전 들소리’는 전체 12마당 과장을 모두 선보였다. 이날 모전들소리보존회는 마을에서 전래되어 내려오는 전통 상여소리 재현도 전 7과장으로 구성되어 특별공연으로 시연을 했다. 특히 상여소리 재현을 위해 완장 1리와 적성 2리 주민들이 마을의 공동재산인 상여와 소품을 기증해주었다고 한다. 한편 모전들소리보존회는 5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2017년 한국 민속예술축제 경상북도 대표로 출전해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2020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다. 전통문화를 계승·발전과 마을공동체문화에 기여를 하고 있는 문경인이 자랑하는 민속단체로 평가를 받고 있다. 문경 지역 무전동에서 전래되는 전통농악인 모전농악과 지역의 농요, 노동요들로 이루어진 모전들소리를 보유하고 있는 민속단체로써, 이번 상여소리 재현이 완성되면 농악, 들소리, 상여소리 총 3가지의 전통예술을 공연할 수 있는 문화예술 단체가 된다. 이날 문경 고윤환 시장, 경상북도 도의회 고우현 의장, 경상북도 박영서 의원, 문경시 김창기 의회의장, 문경시 탁대학 시의원, 진후진 시의원, 서정식 시의원, 남기호 시의원, 이정걸 시의원이 참석하여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김제수 모전들소리보존회장은 "전 세계를 멈추게 하는 코로나로 전 국민이 힘들어 한다, 오늘 신명나는 이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아프고 멍든 마음이 정화가 되어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촬영한 영상은 11월 중 모전들소리 유튜브 채널(시골 전통 이야기)을 통해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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