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0 (금)

[막소설 '아름아리'] 제3화 最古 아리랑(?), ‘만천유고 아로롱’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막소설 '아름아리'] 제3화 最古 아리랑(?), ‘만천유고 아로롱’

  • 삼목
  • 등록 2023.01.19 07:30
  • 조회수 6,966

   삼목 作

    

[국악신문]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에 사시는 김철기 옹과 삼목. 1979년 겨울 어느날

 

청계천 8가 ‘수蒐’ 다방 계단을 오르는 삼목의 발걸음은 기대에 차서 유쾌하기까지 했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소위 나까마’(무허가 중간 매개자)로 최고의 명성을 갖고 있는 김연창 선생으로 부터 1년간이나 벼르던 자료를 전달받기로 했기 때문이다. 외부인 연람을 규제한 데다 이미 등록 당시부터 특수 귀중자료로 지정한 것을 복사한 것이다. 김연창 선생은 연박사로도 불린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써 오세요”라는 낭랑한 유마담의 인사와 함께 특유의 검은색 가방을 멘 김선생 미소를 띠며 들어왔다. 앉기도 전에 X자로 맨 가방을 벗으며 생색을 냈다.


"에이 세상에 도둑질하기보다 더 어려우니, 원 참. 매산梅山(김양선) 목사님만 계섰어도 이렇게 고생을 안해도 됐을 텐데, 그래도 김형이 끈질기게 매달려서 1년 만에 복사를 했우다. 자~” 


제목 農夫詞농부사와 중간중간에 啞魯聾아로롱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온다A4 용지 3쪽 분량. 가는 붓글씨로 달필임이 느껴진다말로만 듣던 ‘최고의 아리랑 (아로롱) 기록’이다. 삼목에게는 많은 생각들이 밀려왔다. 우선 낼 아리랑 사설집에 수록할 수 있다는 충족감은 물론, 이의 해석이 곱씹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연박사는 삼목을 어지럽히는 얘기를 이어갔다.


"김형이야 잘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선수들이 보기에는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이상한 점도 있어. 뭐냐 하면 다산 정약용이 이승훈이란 천주교사 개척 인물의 저작을 정리한 ‘만천유고蔓川遺稿’ 같은 깜짝 놀랠 자료 12종을 왜 40여 년이 지나서야 늦게 공개했고, 또 왜 전문공개를 꺼리느냐는 의문이야. 1967년 가톨릭신문인가 하는 신문에 공개했을 때 본 이들이 알음알음으로 전한 내용이거든. 아리랑이 있다는 것도 그렇게 알려진 거 일 뿐야.”


삼목에게는 김 선생의 이어지는 얘기가 잘 들리지 않았다. 김양선 목사에게 좋은 자료를 많이 양도했다는 등등의 얘기가 이어졌지만. 그러나 삼목의 머리속에서는 우선 ‘경자춘庚子春’이란 간지干支를 계산하여 만천 이승훈蔓川 李昇薰(1756~1801)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기 4년 전부터 지은 시를 연대순으로 배열한 것이고, 25세이던 1780년에서 27세인 1782년까지 3년간 지은 것이란 해석. ‘아로롱啞魯聾’이란 어휘가 후렴으로 있는 이 시편으로 가치가 엄청나다는 생각이 휩쓸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를 아리랑 역사에 어떻게 자리매김시킬지. 이런저런 생각뿐이었다. 필사본이긴 하지만 분명 아리랑 기록 중 최고最古의 자료이기 때문이다.


KakaoTalk_20230119_104545349.jpg
[국악신문] '아로롱' 원문 첫면, 삼목 소장 자료.

 

이 ‘농부사’는 2년여의 탈초 작업과 번역을 거처 1986년 발간한 ‘민족의 숨결, 그리고 발자국 소리 아리랑’(현대문예사 간)에 수록했다. 책머리의 첫 사진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그리고 번역문은 261~262쪽에 수록했다. 삼목이 가장 힘들게, 그러면서도 가장 뜻깊은 자료로 수록한 것 중의 하나다. 이 책은 고은, 박재삼, 나운영, 김연길 같은 아리랑 이해가 깊은 이들과의 간담회도 수록하는 등 성의 있는 편집을 한 아리랑 사설을 조사, 수집한 단행본으로는 첫 책이다.


원문의 일부를 사진판으로 수록하고 번역 전문을 게재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곡명에 대한주註는 ‘庚戌年里農請書農旗故作경술년이농청서농기고작’이라고 병기하여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고 와 경술년(1790년) 평택현감 재직 시 농부들의 농사 현장에 감화를 받아 지은 작품임을 밝혔다.


원문 대조를 하고 시인 박재삼 선생 등에게 자문을 받아 완성하여 수록한 번역문은 이렇다.


농부사農夫詞-아로롱 아로롱 어히야啞魯聾 啞魯聾 於戲也


신농후직(神農后稷)이 처음 밭을 갈고 김을 매니

민생(民生)을 그 근본으로 삼았네

징과 북을 울여라 징과 북을 울여라

잠깐 말하노니 우리의 모든 짝을 부르세

啞魯籠 啞魯籠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생을 힘써 길러 수고로워도 개탄하지 않을세

이윤같은 성인도 유신 땅에서 밭을 갈았고

도연명같은 처사도 전원으로 돌아 갔다네

旗들어라 旗들어라

북과 징소리가 행하는 마을 동문으로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태평만사가 농부의 마음이로다

밭을 갈고 풀을 뽑는 것은 공이 이루어지는 것일세

호미 드러라 호미 드러라

한결같이 앞을 향하여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아침에 윗 뜰에서 김을 매고

저녁에 들에서 떠나 온다

들북과 삿갓이 하늘에 가득하니 비바람도 홀로

근심이 없도다

징과 북을 울여라 징과 북을 울여라

슬픈 노래를 그대는 하지 마소

어히야 세상 일이 어느 곳을 연유하였던가

한낮이 되니 안주인은 밥을 가져오는도다

아 아 농사를 권하는 벼슬아치는 언제 돌아왔을까


旗세워라 旗세워라

그대에게 돌아와 술 삼배를 드리노라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배를 두드리며 흥겹게 노래 불러 즐겨보세

녹두잎 바람에 날리니 일기는 상쾌하고

벼꽃이 물에 젖으니 들녘이 풍요롭다

호미 씻어라 호미 씻어라

옥같은 산이 스스로 조수에 비치어 붉도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옛 곡조로 새로운 소리 섞어 부를 때

곡식 낱알 하나하나 천신만고 끝에 얻으니

가색의 어려움을 아는 사람 적을세

징과 북을 울려라 징과 북을 울려라

들밭 긴 이랑 날은 더디고 더디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이해가 다하도록 경영함이 이 한때로다

농사짓기 어려운 땅이라도 때때로 이용하여 내 직분을 다하고

비탈밭 밭갈이는 천옹의 책임이라

旗 내려라 旗 내려라

가을의 결실이 나의 가색과 동일하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군자를 크게 기른 것은 누구의 공인고

소떼와 풀꽃에 청산이 저물고

오리와 따오기 있는 모래밭에 이슬이 차구나

호미 너어라 호미 너어라

황혼에 달빛이 깃대에 가득하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석양에 농사 이야기 술 싣고 돌아오네

 

아리랑 001.jpg
[국악신문] 아리랑, 김연갑 편저, 현대문예사, 1986년 10월 25일 발행.

 

악기를 치며 김을 매는 두레풍장 모습이다. 기세배나 호미씻이 같은 농사 유풍이 그려졌다. 유학자적 입장에서 권농勸農 의식이 지배적이며 농사 과정을 낭만적으로 그렸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가 각련 끝에 반복 배치된 것으로 보아 후렴구임이 분명하다. ‘아리랑 아리랑 얼싸’의 음차音借인 것으로 尹善道의 ‘漁父四時詞’에 쓰인 ‘至菊棇 至菊棇 於思臥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같은 형태다.


이 작품이 1790년 작임을 전제한다면, 유명인사의 ‘아리랑’ 관련 한시 最古작이며, ‘아로롱’에서 ‘아리랑’까지의 어휘 음전音傳 현상을 보여주는 중요 자료이다. 경기도 평택일대의 농요에서 아리랑계 노래가 불렸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후 이 기록은 삼목의 다른 저서에서는 물론, 여러 글에서 재인용되었고, 다른 연구자들의 글에서 재해석되기도 했다. 이런 탓인지 2010년대 들어 경기도 천주교 성지에는 ‘아리랑노래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천주교와 아리랑 관계, 토착화 과정의 사례로도 해석되기도 한다. 이는 대종교와 아리랑과 같은 관계이다.


그런데 2014년 여름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삼목으로서는 너무나 뜻밖의 소식이었다.


"선생님 저서에 이승훈의 만천유고 소재 아리랑 자료가 가짜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참고하세요. 제 학위 논문도 수정을 할 수밖에 없네요. 참 어이가 없네요.”


"예? 가짜라니요? 만천유고가요? 농부사 아리랑도요?”


"예, 농부사도 그렇다는 거지요. 가짜인지 위작인지 아직은 분명하지 않으나 어떻든 문제가 제기 됐네요. 저도 좋은 자료라고 생각하여 전문을 분석하여 논문에 반영했는데, 삭제해야 할 형편이네요.”


청천벽력이었다. 전화를 한 분이 누군지도 묻지도 못하고 끊었다. 낙담했다. 그날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급한 김에 두 정거장을 걸어가 가판대에서 주요 일간지를 샀다. 그런데 산 신문에서는 관련 기사가 없었다. 궁금증은 여전했다. 그래서 교계 학술부분에 도움을 받는 기독교문사 이덕주 교수에게 문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또 의외의 말을 들었다.


"예, 어제인가요? 아니면 며칠 전에 윤민구 신부 그분이 발표한다고 한 것이 있어요. 이승훈의 ‘성교요지’는 사기다 뭐 이런 것이지요. 그러니 김 선생이 끔찍이 애지중지하던 그 아리랑 기록도 문제가 되지요. 하긴 이 뿐입니까? 박사학위 논문이 6편이나 나왔잖아요. 그게 더 심각하지요. 정확한 일자는 다시 확인하고 알려드릴게요. 그런데 김선생이 아직 모르고 있었을 텐데 사실은요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어요. 2003년에 이미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김양선 목사가 1930년대 수집해서 보관하고 있는 관련 자료는 모두 위작이란 판정을 내렸던 거예요. 다만 공론화하지는 않았을 뿐이지요.”


삼목으로서는 자괴감이 들었다. 나름으로는 학계 모임에 그래도 쌀쌀 거리고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10여년 전에 가짜 판정이 났다는 사실을 이제야 듣다니. 이튿날 이덕주 목사의 주선으로 윤민구 신부가 발간한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 쟁점 연구’를 받았다. 부리나케 해당 부분을 읽었다. 기가 막혔다. 요지는 ‘사학징의邪學懲義’(1801년 천주교 박해에 관한 정부 측 기록을 수집하여 정리한 천주교서)에 ‘만천유고’가 없다는 문제제기 정도가 아니라 이승훈의 저작으로 알려진 자료들이 모두 타인의 작이며, 교묘하게 관련 인물들과 지명 등을 바꿔 넣어 꾸민 것들로 특히, 가장 중요한 ‘성교요지聖敎要旨’는 이렇게 단정하고 있었다.


"성교 요지는 중국에서 활동한 미국 개신교 선교사 윌리엄 마틴이 1897년에 쓴 쌍천자문(雙千字文)’의 일부를 베낀 위작이다. 문건의 전체 용어 등으로 보아 1930년대 전후 시점에서 위작한 것이다.”


!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만찬유고의 발문을 정양용이 쓴 것으로 믿고 인용한 이런 구절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강과 산은 옛 그대로이고 푸른 하늘과 흰 구름도 그림자 하나 변하지 않았으나 옛 선현과 벗은 어디로 갔는고. 나무와 돌의 신세가 되어 세상에 붙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흘러 다니던 중, 슬프다! 모두 뜻밖에 세상을 떠났구료! 만천공(蔓川公)의 행적과 아름다운 글이 결코 적지 않으나, 불행히도 불에 타 버리어 한 편의 글도 얻어 보기가 어렵더니 천만 뜻밖에도 시고(詩稿)와 잡록(雜錄)과 몇 조각의 글이 남아 있기에 내 비록 졸렬하게나마 초(抄)하여 기록하고 만천유고(蔓川遺稿)라 이름하였다.”


정약용이 강진 유배지에서 쓴 발문이란 믿음이 깨진 것은 엄청난 충격이다. 그러나 이 충격은 이어졌다. 한양대 정민 교수도 이에 확대된 논지를 내놓았다. 한시 70수가 수록된 ‘만천유고’를 양헌수梁憲洙 장군의 문집 ‘하거집(荷居集)’에서 베낀 "악마의 편집”이라고 한 것이다. 이어 서강대 서종태 교수도 또 다른 시편은 홍석기洪錫箕의 ‘만주유집(晩洲遺集)’ 등에서 옮긴 시들이라고 밝혀냈다.


연구자들은 이를 위작한 이는 단순히 이승훈과 정양용이란 이름을 팔아 돈을 벌려고 지난한 작업을 할리가 없었다고 보았다. 그 배경은 1930년대 유난히 기승을 부렸던 유사종교 집단과 무관치 않다고 보았다. 토착 신앙뿐 아니라 메시아니즘의 치장을 두른 ‘정감록鄭鑑錄’ 계통 신앙 전파 세력과도 모종의 관련이 있으리라고 분석했다. 그 사례로 1930년대 대종교 계통의 ‘규원사화(葵園史話)’와 ‘환단고기(桓檀古記)’, 유교 쪽의 ‘화해사전(華海師傳)’같은 위서들의 출현을 든 것이다. 이들은 이제껏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있어 심각성을 경고하였다. 당연히 ‘농부사 아로롱’도 이승훈의 소작일 수가 없고, 그 해악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입론과 논거가 타당한 연구결과이니. 그렇다면 ‘농부사 아로롱’에 대한 해석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삼목은 오랜 시간 이 자료의 처리를 놓고 고심해야 했다. 그리고 새로 발행할 ‘우리 아리랑 문화’에 새로운 해석으로 정리를 하기로 했다.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작품의 작자를 이승훈이 아닌 ‘미상未詳’으로, 시기를 경술년 1790년이 아닌 20세기 초로 한다. 둘째, 작품성을 인정하여 두레풍장 유습이 연행되던 20세기 초 농부와 농사를 그린 작품으로 본다. 셋째, ‘아로롱’이란 어휘는 ‘아리랑’의 음차가 아니라 ‘아리랑’이란 어휘로 정리되는 한 과정의 하나로 본다.


아리랑에 심취하여 고은선생, 박희준 형 등과 ‘아리랑기행단’을 꾸려 전국을 답사하고, 직원 4명과 함께 ‘한국방송출판정보센타’의 문을 열고 문헌 수집과 조사에 매달렸던 시기, 삼목의 열정의 일부는 ‘만천유고’ 수록 ‘농부사 아로롱’에 닿아있다. 의외의 사연과 충격을 담고....


그런데 세월이 지나 수다방 유마담의 얼굴도 흐릿하고, 최고의 나까마로 위세를 부리던 김연창 선생도 위작 자료를 거래하다 전과자로 생을 마쳐 거론하기를 꺼리는 지금, 불현듯 복사본을 넘겨주던 때 한 말이 다시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40여 년이 지나서야 늦게 공개를 하고, 전문 공개를 꺼리는 이유가 뭐요.”


혹시, 김연창 선생은 이미 이 자료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았을까? 이 말로 내게 암시를 준 것은 아닐까? "가짜를 판별하는 능력은 가짜를 만드는 능력을 동반한다”는 말처럼, 김 선생이 선수이기 때문에 이미 알만했을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