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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해외춤기행 동아프리카, 탄자니아 역사문화와 동아프리카 부족춤마사이족에 밀려 산속 땅굴에 사는 차가족 마을과 킬리만자로 동아프리카 여행 6일째(1월10일) 6시 기상하여 조식하고 7시 반에 중형버스로 짐은 지붕 위에 싣고 케냐를 떠나 탄자니아로 가는 대장정에 올랐다. 12시에 탄자니아 국경에 도착하여 비자 발급(50불)을 마치는데 2시간이나 걸려 2시에 출발하였다. 4시간 만에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MT.Kilimanjaro, 5896m) 등정을 준비하는 거점도시 모시(Moahi)의 YMCA호텔에 도착하였다. 장장 11시간이나 걸린 장시간 버스여행이라 모두들 지쳤다. 1월 11일 7일째 아침 6시 반에 호텔조식으로 가볍게 해결하고 킬리만자로 등정팀(140달라)과 수영 및 휴식팀, 씨티투어팀(50달라)에서 선택하는데 나는 씨티투어팀, 4명이 합류하였다. 킬리만자로 등정 입구인 마랑구(marangu, 1970m) 게이트에 가까이 올라가니 바나나나무숲을 이루고 있는 밀림지대가 나타났다. 협곡에 폭포가 있어 절벽 같은 흙 계단을 한참동안 꼬불꼬불 내려가니 폭포가 보였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협곡밀림 속의 진풍경이었다. 다시 올라오는 길에 차가족들이 가내농업으로 바나나와 커피를 경작하는 곳을 들러 잠깐 살피고 차가족(Chagga족-농업, 커피, 사이잘삼(麻), 사탕, 옥수수, 바나나) 동굴 속 생활을 볼 수 있었다. 200년 전 마사이족들이 쳐들어와 소와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가기 때문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 숨어살게 되었는데, 방과 부엌, 곡식 창고와 외양간 등과 죽은 가족들을 조상신으로 모시고 목각 모습으로 세워 놓고 영원히 함께 사는 것처럼 살고 있었다. 그 길이가 몇 km씩 연결되어 있고 중간 중간에 지상으로 통풍구를 뚫어 공기와 햇빛을 받고 살았다고 한다. 또한 지상에는 차가 하우스라는 삼각형 움집에 나무에 바나나잎과 풀잎을 얹어놓고 살고 있었다. 이어서 킬리만자로(아프리카 대륙에서 최고 높이, 세계 다섯 번째 높이. 뜻은 ‘빛나는 산’ 혹은 ‘하얀 산’) 등정의 관문인 1800m 위치에 있는 마랑구 게이트에 다다라 소풍처럼 도시락을 먹고 기념촬영을 하고 오후 4시경에 숙소로 돌아왔다. 옛 수도 다르에스살람에서 환상의 잔지바르섬으로 1월 12일(8일째) 7시30분 모시(Moahi) YMCA호텔에서 탄자니아 옛 수도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 평화의 땅. 현 수도: 도도마Dodoma)으로 12시간을 버스로 달려왔다. 터미널 공용버스임에도 비용을 더 주니 다른 아프리카 승객이 있음에도 호텔까지 와서 짐까지 실어주었고 다르에스살람 터미널에서도 승객을 내려주고 팁의 위력으로 우리의 숙소 이코놀로지(Econolodge)호텔까지 데려다주고 갔다. 리무진 장거리 대형버스로 아래층 짐칸이 커서 승객들은 2층 버스를 탄 기분이었고 아프리카에 와서 처음 에어컨 혜택을 맛보았고 승차감도 좋았다. 그런데 이코놀로지호텔은 우리 예전 여인숙 수준으로 5층은 옥상층이라 밤12시가 되어도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열대야가 심했다. 하는 수 없이 일층 로비로 내려오니 모두들 쇼파에 앉아 카톡을 하고 있었다. 1월13일(9일째) 7시30분에 식사하고 짐정리를 다시 하면서 배낭여행은 배낭은 큰 것으로 하고 여행가방은 대형 아닌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사이마라 국립공원 갈 때도 첫날 나이로비 썬라이즈(Sunrise) 호텔에 큰 가방은 맡기고 배낭에 3일 동안 외출분을 나눠 들고 가야해서 공간이 부족했는데 역시 다르에스살람에서도 큰 가방 맡기고 작은 배낭으로는 한계가 있어 먹거리와 옷 종류를 별도로 비닐 백에 담아 물 끓일 포트까지 담아들고 나섰다. 페리호를 타고 잔지바르(Zanzibar: 검은 해안)로 떠나기 전에 환전하는데 40도가 넘는 폭염으로 육수가 줄줄 흘렀다. 페리호 승선 11시30분까지 1시간이 남아 일행 몇몇이 해변 씨푸드 시장으로 택시타고 나가 오징어를 사서 데쳐 아주 맛있게 먹고 승선했다. 엄청 더워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생전에 이렇게 맛있는 데친 오징어 별미가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윽고 잔지바르에 도착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에 햇볕에 나갈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숙소배정을 마치자 바닷가로 나갔다. 여기저기에 씨푸드 노점상들이 눈에 띄었다. 문어, 갑오징어, 소라, 게 등을 즉석에서 구워 팔고 있어 문어를 주문하고 사탕수수를 즉석에서 수동기계로 짜내는 주스를 사먹었다. 그리고 즉석에서 구워 만든 문어피자를 먹으니 고소한 버터 맛에 한 끼 밥이 되었다. 잔지바르 노예무역전시장과 잔지바르 전통춤 공연 1월14일 10일째를 맞았다. 오늘은 잔지바르의 식민지시절 노예감옥소와 노예로 팔려나가던 슬픈 역사를 간직한 프리즌섬(Prison island)에 배를 타고 나갔다. 인도양의 쪽빛바다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석양에 해떨어질 때까지 시원함과 씨푸드를 만끽했지만 오늘도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바다 속을 쳐다보며 일행은 작은 섬 모래사장에 내렸다. 먼저 바다거북과 공작새가 서식하는 곳에 가니 백오십년 이상 된 대거북(Giant Tortoise)부터 어린 거북까지 수많은 거북이들을 사육하고 있었다. 짝짓기를 하면서 내는 소리가 공룡소리 같았다. 노예감옥소와 쇠사슬 고문장과 경매장, 곧바로 바닷가로 승선시켜 팔려나가던 부둣가가 슬픈 아프리카인들의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잔지바르로 배를 타고 돌아와 바오밥나무 그늘아래 식당이 사람들이 많아 찾아와 먹는 차이니스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식후 프리즌 박물관에 가서 노예의 역사와 생활, 문화 등 사진과 그림을 곁들인 전시관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역경 속에서도 꿋꿋이 생존하며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지켜온 내력이 전시되어 아이러니한 그들만의 자존감마저 느꼈다. 다시 스톤타운(Stone Town)이라는 미로의 집들과 상점들을 둘러보다가 예전 성곽 안에서 공연이 있다하여 5 달러를 내고 공연을 관람하였다. 〈zanzibar school of acrobatic sports〉단의 주최로 잔지바르 음악과 전통춤, 그리고 아크로바틱 조립체조와 텀블링, 무술대련체조 등이었다. 1월15일(11일째) 조식 후 9시 셔틀버스로 능귀(Nunggui)로 출발하였다. 해안도로를 따라 1시간 30분 달려온 능귀는 유명한 휴양지로 에메랄드빛 바다와 백사장과 별장들이 즐비하였다. 드디어 일행들은 수영복차림으로 백사장에서 돛배를 타고 처음엔 엔진으로 출발했다. 한참 해안선 따라 절경을 감상하고 물안경, 구명조끼, 오리발을 착용하고 바다 속으로 풍덩풍덩 빠져 물고기들을 관찰하며 수영을 즐겼다. 돌아오는 길에는 돛을 내려 낙조에 낭만이 깃들어 모두 숙연해지고 있었다. 올드 팀들만 모여 유명한 씨푸드 맛집을 찾아나서 랍스타와 킹피쉬 등과 맥주와 와인을 곁들여 늦은 저녁을 즐겼다. 오늘은 아프리카 여행 중 가장 여유있고 낭만적인 하루를 즐겼다. 탄자니아 국립박물관과 부락박물관의 부족춤 1월16일(12일째) 10시에 다시 잔지바르로 셔틀버스를 타고 떠나 중간쯤에 스파이스 농장에 들러 여름과일, 향신료 재배농장 견학과 향내체험을 하고 과일시식에 이어 식사에서도 다양한 과일을 나눠줘 먹고 식사도 맛있게 먹었다. 다시 출발하여 2시 잔지바르 선착장에 도착하여 고속페리 티켓을 받아 입국사증을 받고 기다렸다가 승선하였다. 같은 국내에서 입국사증을 받는 것은 현재의 탄자니아로 탄생하게 된 1964년 이전에 탕가니카(수도 다르에스살람)와 잔지바르가 각기 독립국가에서 통합한 역사의 잔재로 남아있는 것이다. 다르에스살람에 도착하자마자 몇 명만이 탄자니아 국립 박물관으로 향했다. 역시 탄자니아 동물화석과 인류진화를 밝혀주는 인류화석, 그리고 수많은 암각화와 노예매매로 끌려가고 핍박받던 시기의 자료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었다. 1월17일(13일째) 30도가 넘어 찌는 듯한 여름 날씨는 일행들의 행동반경을 위축시켜 휴식이나 가볍게 재래시장을 다녀오는 정도로 오전 일정을 마치고 시내근처에 부족춤도 보여주는 부락박물관이 있다하여 주소를 가지고 몇몇이 택시를 타고 나섰다. 하지만 주소지에는 부락박물관(Village museum)이 없어진지 오래고 외곽 멀리 옮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되돌아왔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동아프리카 마지막 여정을 그냥 끝낼 수 없는 아쉬움이 뇌리 속에 맴돌고 있어 다시 용기를 내어 혼자서 새로 찾은 주소를 가지고 입장료보다 열배나 많은 택시비를 지불하면서 부락박물관을 찾아갔다. 허름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박물관이지만 별도공연비까지 지불했다. 박물관 내부와 소수부족 가옥을 민속촌처럼 전시한 마당 한구석에는 가족팀 같은 공연자들이 반주악기를 설치하고 이동식 플라스틱 간이의자를 원으로 배치한 가운데 앉았다. 관객은 나 혼자지만 캠코더와 사진촬영 준비를 마치니 드럼과 실로폰 반주에 맞춰 광란의 요동춤을 추기 시작한다. 한참을 보고 있을 때 서양인 관객들이 10여명이 입장하여 함께 감상을 하였다. 한 가족들이 다양한 춤을 선보이기는 하는 것 같지만 여러 부족의 특성을 찾아볼 수 없는 춤들이어서 아쉬웠다. 1월18일 23명중 30일간 여행팀 18명은 기차로 서아프리카와 빅토리아폭포와 남아공 희망봉을 거쳐 귀국하는데 중간 귀국자 5명은 다르에스살람 공항에서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국제공항에서 환승하여 19일(15일째) 저녁7시25분에 인천공항으로 귀국하였다. 동아프리카 춤의 특성 동아프리카 춤은 다른 지역 춤보다 동작이 폭발적이고 격렬함이 특징이다. 그들의 외향적 문화기질을 잘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남성들의 뜀뛰기춤, 발차기춤, 여성들의 전신요동춤, 엉덩이춤 등이 동아프리카의 춤 패턴에 속한다. 또한 동아프리카춤의 반주악기는 아주 다양하지만 그중 타악기 종류가 가장 많으며 복잡한 리듬과 2박자와 3박자의 중복되는 리듬도 많아 아프리카 춤의 리듬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아프리카 춤의 일반적인 특징은 빠른 비트의 타악반주와 광란에 가까운 몸짓으로 흥미진진하며 원초적인 무형식으로 표현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춤의 근원적 특성도 활력과 삶을 고양시키는 수단과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는 부족 간의 적대적인 환경과 맹수와 수렵의 위험 속에서 삶을 보호하고 삶을 증대시키는데 주로 관여한 부족민들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원래 춤이란 사회적 문화적 연관뿐만 아니라 신앙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춤은 한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동시에 그 집단의 사회구조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연결고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아프리카 춤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축제에는 사냥, 수확, 출생, 성인식, 결혼, 질병과 치유, 죽음 등이 포함된다. 중요한 축제나 의식 때 아프리카 부족들의 춤에는 트랜스(trance) 또는 심할 경우 엑스터시(ecstasy) 지경의 열광적인 주술적 샤머니즘적 춤에서부터 장례식 때의 차분한 춤까지 다양하다. 그리하여 중앙아프리카 수도 방기지방의 반다족 가자(gaza)춤은 소녀들의 성인식 때 한데 어울려 격렬한 동작으로 트랜스에 이르기까지 장시간 계속 춘다. 또한 베냉 솜바(somba)족의 풍년제 ‘쿠브워티(kubwoti)’는 마을의 청년들이 농사와 관련한 여러 가지 형태의 상징물을 머리와 등에 걸치고 나무껍질에 붉은 칠한 옷으로 치장하여 흥겹게 춤을 춘다. 또한 다산, 성공적인 사냥, 비, 풍작 등 희망적인 춤들은 기우제의 레인 댄스(rain dance)에서처럼 일반적으로 상징적 주제와 부합되는 모방적인 춤 패턴을 포함하고 있다. 춤들의 일부 혹은 전부에 나오는 기본적 패턴(pattern)은 추상적(abstract)이거나 모방적(mimetic)인 것이다. 많은 춤들은 단순히 사회적 표현 충동과 움직이고 리드미컬하게 운동하고 스스로 즐겁게 하려는 집단적인 욕구로부터 기인한다. 그래서 저녁에 중부 아프리카의 음부티(Mbuti) 피그미족은 북을 치고 동시에 한발 한발 뛰며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밤새껏 춤을 춘다. 동아프리카 마사이족 문화와 춤 마사이족이란 좁게는 케냐와 탄자니아에 걸쳐 있는 그레이트 리프트밸리 지역에 사는 유목 마사이족을 말하나, 넓게는 케냐의 삼부루족, 탄자니아에서 반유목생활을 하는 아루샤족과 바라구유족도 포함해서 나타내기도 한다. 이들은 남자 중심의 사회이며 모든 씨족은 남자들이 우선권, 결정권을 가지고 움직인다. 또한 일부다처제로서 씨족외혼이 이루어지며 같은 연령집단에 속한 남자들끼리 아내를 빌려주는 풍습(Swapping)이 있다.마사이족과 가축과의 관계는 탄생신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은가이(Ngai, Enkai)와 킨동오이(Kindongoi)라는 신이 하늘나라에서 마사이족을 지상으로 내려 보낼 때 소와 양, 염소를 같이 내려 보냈다는 것이다. 소를 중시하는 마사이 전사는 소를 약탈하고 다른 종족으로부터 이를 지키는 것이 임무로 긴 창으로 상대를 위험하며 용맹함을 과시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마사이족은 타고난 전사로서 호전적이고 용맹해서 노예상인들에 끝까지 저항하여 죽거나 죽이거나 하자 마사이족 노예사냥을 포기했기 때문에 마사이족이 노예로 끌려간 경우도 거의 없었다. 보통 마사이족의 남자들은 열두 살에 이르면 할례와 성인식을 치른다. 그리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병사촌에 들어가 일정 기간 창과 칼로 야생동물을 잡는 방법, 소를 기르는 방법 등을 배우며 부족을 지키는 전사로 태어난다. 오늘날 마사이족이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 남자의 성인식이나 여성의 할례, 다른 부족의 가축 약탈 등의 전통은 많이 사라져 가고 있다. 마사이족의 전사들을 '모란(Moran)'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에게는 가사를 면제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지만, 마을에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즉시 모여야 할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도 나가야 한다.케냐나 탄자니아 마사이족 남성들은 막대기를 들고 차례로 돌아가며 하늘 높이 뛰면서 춤을 추고, 여자들은 무릎만 살짝 구부린 채 춤과 노래를 부른다. 남자들이 껑충껑충 하늘로 뛰는 춤을 추는 데에는 용맹을 과시하면서 하늘과 가까워지려는 염원이 깃들어 있다. 남성미를 과시하여 여자를 유혹하기 위한 몸짓이라고도 한다. 젊은 전사들의 점핑춤(adumu, 또는 aigus)은 일렬로 투스텝으로 전진하며 원무로 돌다가 멈추고 한두 명이 점프를 시작하기 위해 중앙으로 들어가 점핑춤을 추는데 발뒤꿈치가 땅바닥에 닿지 않게 춘다.은노토(Eunoto)는 10살 또는 그 이상에서 전사의 성인식에서 행하는 노래와 의식춤이다. 이때는 젊은 여자들도 가장 화려한 의상을 입고 함께 추며, 전사(moran)의 어머니들도 아들의 용기와 대담성을 찬양하며 노래하고 춤을 춘다. 젊은 남녀들의 집단춤은 서로 줄을 서서 부드러운 저음으로 "하 우아"라고 내뱉으며 하체를 밀어냈다 당긴다. 여자들은 남자들 앞에서 서서 골반을 튀게 하고, 남자들과 대등하게 "오이 요요”라고 화음으로 맞춘다. 노래를 부르며 숨을 내쉴 때 머리를 앞으로 기울였다 들이쉴 때 뒤로 살짝 젖히며 가벼운 목춤을 춘다. 동아프리카 춤기행 후기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내내 인류역사 700만년의 여정을 겪으면서 생사의 갈림길을 넘고 넘어 포식자인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한 요람의 땅이었는데 오늘날 궁핍한 원시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인지 아프리카의 춤과 음악은 원시시대처럼 생존의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사냥 나가기 전에 사냥성공을 기원하면서 절실하게 수렵춤을 추었고, 사냥성공 후에는 배고픔을 해결한 기쁨의 춤을 추고 노래 부른 것도 알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미래는 어두운 것만은 아니었다. 광활한 대자연과 자연 그대로의 동물들, 원시춤과 음악, 무궁한 가능성을 지닌 젊은 대륙 같은 긍정적인 요소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해주었던 마력의 힘을 지닌 그들만의 다양한 춤과 음악이 있었기에 아프리카에 대한 동경과 친근함을 느꼈다.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인 미지의 세계는 한층 더 새롭게 다가왔으며 기회만 된다면 또다시 문화탐사를 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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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촛불 켜는 밤 / 이해인12월 밤에 조용히 커튼을 드리우고 촛불을 켠다. 촛불 속으로 흐르는 음악 나는 눈을 감고 내가 걸어온 길, 가고 있는 길, 그 길에서 만난 이들의 수없는 얼굴들을 그려본다. 내가 사랑하는 마루나무를, 민들레 씨를, 강, 호수, 바다, 구름, 별, 그 밖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본다. 촛불을 켜고 기도하는 밤, 시를 쓰는 겨울밤은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인가 추천인: 김경순(KBS방송작가) "오늘 국내외 동포대상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 시상식이 있었다. 디아스포라에 대한 가족사, 동포들의 눈물에 대한 이야기를 서사시로 승화시켰다.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인가. 내가 걸어온 길, 가고 있는 길, 그 길에서 만난 이들의 수없는 얼굴들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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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2)<br>분청양산명접시편흘러가는 구름이 손짓이라도 하듯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우리가 고미술을 아끼고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옛것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자는데 그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미술이라는 것이 재화와 관련이 있다 보니 생각보다 불미스러운 일이 흔치 않게 생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름다움을 통해 만나고자 하는 고미술 때문에 오히려 심성이 망가지고 생활이 어지러워 질수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일이겠는가. 고미술을 좋아는 하대 끊임없이 조심하고 경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이로 고미술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았던 선배가 있었다. 그런데 평생을 모았던 고미술품으로 인해 끝내는 송사까지 벌려야 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하지만 법이라는 것이 그렇게 녹녹한 것이 아니어서 결국은 결론 없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 일 때문에 크게 실망을 했는지 선배는 그 후 고미술계와는 완전히 발을 끊고 산과 들로 사진을 찍으로 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오더니 그마저 끝내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그 선배에게서 오래 전 선물로 받았던 것이 분청양산명접시편이다.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에는 분청사기 가마터가 두 곳 있다. 상리마을 뒤편 계곡과 호포부락 뒤편에 위치한 분청사기 가마터가 바로 그 것이다. 두 곳 중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호포가마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서는 다양한 종류의 분청사기는 물론이거니와 명문도 발견이 되는데 양산장흥고(梁山長興庫)와 장흥고 등이 그 것이다. 이로 보아 가산리 호포가마터는 양산에서 중앙 관서에 상품을 납품하던 중요한 공납용 자기 제작소였음을 알 수 있다. 분청양산명접시편은 훼손이 심해 작은 조각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선배가 호포가마터를 찾아 직접 습득한 것인 듯 95.2.9라는 날자와 양산이라는 글자가 명기되어 있어 출토지가 분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접시편은 굽부터 몸체로 거칠게 인화분청이 시문되어 있다. 접시 내저에는 국화문이 상감되어 있는데 이 또한 거칠어 문양은 뚜렷하지가 않다. 그러나 이 접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내저 중앙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양산(梁山)명이다. 비록 삼수변은 훼손되고 없으나 선배가 남긴 기록으로 보아 양산명을 의심할 여지는 조금도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선배와 소식이 끊긴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선배는 지금도 카메라를 메고 산과 들을 누비며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을까. 그러나 나보다 손 위인 선배의 나이를 생각하면 장담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실 양산 가산리 호포가마터는 선배보다도 내가 더 일찍 답사를 했던 곳이다. 그러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고, 그런 내 이야기를 듣고 선배가 건네 준 것이 바로 이 분청양산명접시편이다. 따라서 훼손이 심해 아주 작은 도편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저런 추억들이 흘러가는 구름이 손짓이라도 하듯이 가슴을 스쳐지나가고 또 지나가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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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관의 ‘국악-신반’ <16>이필기의 대금 – 국가무형문화재 <강백천류 대금산조> 지난 달에 소개한 이필기 연주자의 첫 음반 <김동진류 대금산조>는 판매용으로, 이 음반은 비매품으로 출반한 음반이다. 사실은 이 음반이 먼저 나온 것이다. 이필기 대금 연주자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한양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악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으로 현재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부수석으로 재직하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강백천류 대금산조 이수자이다. 음반에는 강백천류 ‘긴산조’ 2곡이 수록되어 있다. 한 곡은 ‘강백천류 대금산조’, 한 곡은 김동표 가락의 ‘강백천류 대금산조’이다. 장구는 이영섭 교수(영남대학교 음악대학 국악전공)가 맡았다. 강백천 명인은 전북 남원 출신이다. 17세부터 박준필에게 대금과 정악풍류를, 전용선에게 단소, 가야금, 시조를 배웠다.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대금산조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으며 그 후 부산에 정착하면서 많은 후학들을 길러내었다. 김동진과 김동표 명인이 그의 제자이다. 그의 산조는 남도민요에서 터득한 시나위풍의 새가락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2 곡의 ‘강백천류 산조’는 많은 연구의 산물로 강백천류를 공부하는 연주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음반도 PC에서 제작되었다. 해설서에는 ‘강백천류 대금산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수록되어 있다. 국악재즈소사이어티 <사물놀이 판타지 : 계절> 이 음반은 9인조 앙상블 국악재즈소사이어티(The Gugak Jazz Society)의 두 번째 음반이다. 국악재즈소사이어티는 한국, 그리스, 미국 출신의 음악가들로 구성된 다국적 앙상블로 2019년 보스턴에서 조미나의 작품, 재즈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판소리 칸타타 프로젝트 ‘길령전’의 초연을 준비하며 모이게 된 그룹이다. 이 음반 <사물놀이 판타지 : 계절>은 2022년 미국 보스턴에서 국악재즈소사이어티에 의해 초연된 조미나의 창작음악극이다. 한국 전통 연희에서 영감을 받아 사물놀이와 판소리를 중심으로 선보이는 현대적인 음악극으로써, 재즈와 블랙 가스펠 등 다양한 장르를 접목하여 세계인과 소통하는 연희를 구현하고 있다. 이 음반에는 조미나 작곡으로 ‘달빛기도’ 등 음악극의 이야기와 음악전개에 핵심이 되는 11곡을 담았다. 이색적인 음반이지만 너무 비싸게 출반되었다. 해설서는 보통으로 우리말과 영어로 된 해설서가 따로 들어 있다. 그레이스비트퀄텟 <Beat Mirage>-환상비트- 그레이스비트퀄텟(Grace Beat Quartet)는 위 음반에서 소개한 국악재즈소사이어티 조미나의 프로젝트그룹이다. 국악재즈소사이어티는 지난 몇 년간의 음악적 여정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친 그들의 프로젝트에서 한국 전통음악과 재즈를 결합한 리듬 형태를 주로 창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통 음악가와 재즈 음악가들이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교류하며 작품을 창조적으로 조율하는 연주를 추구하게 되었고 여기에 4명의 뮤지션이 뭉친 것이다. 피아노 조미나, 국악타악 김인수, 드럼 김영진, 더블베이스 맥스 리들리이다. 작곡은 모두 조미나 피아노 연주자이지만, 4명의 연주자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낙송’(우리의 무속장단이 낙궁에서 영감을 받은 곡) 등 7곡을 담았다. 곡들은 악보에는 표시되지 않지만 문화적 전통적 영향을 받는 유연한 리듬으로 표현되고 있다. 연주자들의 다양하고 흥미로운 ‘비트에 대한 순간적인 해석’이 마치 음악적 미라주(Mirage)처럼 느껴져 이 앨범을 ‘환상비트 (Beat Mirage)’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한국의 전통과 재즈의 자유로움으로 채워진 음반이다. 해설서는 우리말과 영어로 수록되어 있으며 음반 가격은 좀 높게 책정되어 있다. Coree <Kim Hae-Sook Gayageum Sanjo>-김해숙- 이 음반은 2012년 프랑스에서 출반한 음반으로 최근에야 수입되어 현재 구할 수 있는 음반이다. 2011년 국내 녹음으로 김해숙 교수가 연주하는 <최옥삼(최옥산)류 가야금산조> 한바탕이 수록되어 있다. 장구는 윤호세 고수가 맡았다. Ocora Radio France는 세계적인 민족음악 레이블이다. 김해숙 연주자는 부산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성장하였으며 국립국악중학교 입학을 계기로 가야금을 시작했다.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70년대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40여 년간 가야금 명인으로서 높은 명성을 지켜오고 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악과에서 수학하였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4년부터 최옥삼류 가야금산조의 유일한 계승자였던 함동정월 명인을 사사하였다. 뛰어난 음악해석을 바탕으로 논리정연한 연주력을 갖추었고 매력적으로 선율을 표현한다는 평가와 더불어 절제된 감정으로 품격 있는 연주를 펼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립국악원 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퇴임 후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 음반에 담긴 '최옥삼류 가야금 산조'는 ‘최옥삼-함동정월-김해숙’으로 이어져 내려왔으며, 정교한 짜임새와 논리적 진행을 가진 작곡자의 산조로서 잘 알려져 있는 곡이다. 최옥삼 명인은 전라남도 장흥 출신이며, 가야금, 대금, 단소, 아쟁 등 여러 악기에 능통했으며, 최승희 무용음악 등 작곡도 다수 남겼다. 그의 산조는 또한 성애순, 김일륜, 윤미용, 정회천 명인 등 여러 제자들을 통해 전승되고 있다. 해설서는 우리말, 영어, 불어로 설명되어 있으며 DVD케이스 크기로 고급스럽게 제작된 음반이다. 반가에 한 장 세워놓기에 좋은 가야금산조 음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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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윤치호 역술 ‘찬미가’의 가치‘찬미가’는 1908년 6월 광학서포의 활자본으로 발행한 찬송가집이다. 윤치호는 12편을 번역하고, 3편을 창작하여 번역과 편찬까지 하여 발행하였다. 평신도로서 활동하는 윤치호의 신념대로 실용성을 중시하여 소박하게 서문도, 목차도 없이, 소규모 책자로 만들어 2전5리 염가로 판매하였다.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가장 아름답고 선한 길 중의 하나다.”라고 하여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윤치호는 신앙고백에서 확인이 되듯이 충실한 기독교인이다. 깊은 신앙심과 애국심에 의해 역술하여 발행한 찬송가집이다. "상오 10시에 삼가 세례를 받다. 이날 하늘은 맑고 날씨는 따뜻한데 바람도 잔잔하고 구름도 걷히어 근일에 제일 좋은 날씨이다. 이날부터 나는 삼가 교(敎)를 받들고 주(主) 믿을 것을 맹세하였으니 가히 일생에 있어 제일 큰 날이라 하겠다.” 1887년 4월 3일 보낼 목사로부터 세례(洗禮)를 받았다. 이날 일기에 남긴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절실함에서 최초의 한국인 편찬 찬송가집을 발행할 수 있고, 애국적 찬송가 3편을 작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윤치호 역술 ‘찬미가’의 가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첫 째 가치는 현 애국가를 제14장에 수록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1980년대부터 2000대에 이르는 기간 서지학자이며 순흥안씨 후손인 안춘근 교수에 의해 ‘애국가류’ 필사 자료 3종 공개를 통해 1907년 이전에 유사한 ‘애국가’가 존재하여 ‘자필 가사지’의 "1907년 윤치호 작”이란 기록은 문제가 있다고 논의된 바 있다. 이 세 가지 자료를 근거로 SBS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이 제작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세 가지 자료를 객관적으로 검증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오히려 조작된 자료임이 확인되었다. 결국 1907년 이전에 현 애국가 가사와 유사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로서 윤치호가 1907년 작사한 것이 사실이며, 이를 최초로 ‘찬미가’에 수록하였다는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다음 두 번째 가치는 윤치호의 충군애국적 신앙이 그대로 담긴 출판물이란 점이다. 당시 기독교의 신앙 목표가 구국과 독립임을 입증하는 것인데, 3편의 창작 ‘애국적 찬송가’의 각 명명(命名)에서 확인된다. 이는 한국 찬송가 연구사에서 3편의 곡명을 명명한 것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이에 대한 첫 연구 결과는 민경배의 ‘한국교회 찬송가사’(韓國敎會 讚頌歌史)에서는 제1장을 ‘皇帝頌’, 제10장을 愛國頌, 제14장은 ‘愛國歌’라고 규정한 것이다. 제1장은 1897년 고종황제의 칭제건원(稱帝建元)을 기점으로 대한제국의 발전을 기원하는 내용을 근거로 하였다. 제10장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조국의 독립부강을 기원한 내용에 근거한 명명이다. 제14장은 1919년 3. 1운동까지 수많은 애국적 노래 중에 대표적인 애국가로 민중의 지지를 받은 사실에 따른 것이다. 세 번째 가치는 한국 찬송가 역사에서 갖는 것으로, ‘찬미가’가 한국인에 의해 편찬된 최초의 찬송가집이라는 점이다. 개신교 선교사의 한국선교 13년만의 일이다. 이 기간에 3종의 찬송가집이 발행되어 사용되었다. ① 1892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존스(G. A Jones)가 27편의 무곡(無曲) 가사를 수록하여 펀찬 한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찬미가’ ② 1894년 117편의 찬송가를 4성부 악보로 표기한 언더우드(H. G. Underwood) 편찬의 장로 교 복음찬송 ‘찬양가’ ③ 1895년 북장로교 선교사 그레한 리(G. Lee)가 편찬하여 58편의 악보 찬송을 발행한 장로 교 번역 ‘찬셩시’ 이상의 세 가지가 모두 외국 선교사에 의해 편찬, 발행되었다. 여기에는 한국인에 의해 작사된 찬송가는 ‘찬성시’에 단 1편이 수록되었을 뿐이다. 이런 사실에서 윤치호 역술 ‘찬미가’는 을사늑약으로 기독교가 항일성향으로 가는 것을 우려하여 공식적인 찬송가집으로 채택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한국 찬송가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첬다. 당연히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 내의 서정시인(敍情詩人)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듯이 윤치호 같은 "계관 시인”이 등장함으로서 가능한 것이었다. 윤치호는 기독교가 가진 현실적인 힘, 일을 해 낼 수 있는 기독교, 현실을 변혁시킬 수 있는 기독교, 살아있는 기독교로 인식하였다. 애국과 충군의 열기로 충만한 시기에 교회와 민족의식을 구조적으로 동일시한 세례 교인으로서, 가사를 짖고, 보편적인 곡을 붙여 출판물로 보급할 수 있는 인물이 윤치호를 제하고 없었다는 것이 된다. 네 번째는 세 작품에 부곡된 두 곡조를 역사성과 민중성을 담보한 것으로 채택하였다는 점이다. 제1장 의 곡명(Tune Name) ‘AMERICA’는 세계 찬송가나 영미의 음악상황을 고려하여 택했다는 것이 된다. 이 곡은 영국의 국가(國歌) 곡조이다. 1740년에 발행된 ‘Saurus Musicus’에 수록되었는데, 이를 채택하여 ‘God savr our glrious King(Queen)의 곡조로 썼다. 또한 미국의 사무엘 스미스(S. Smith)가 지은 애국시 ’My country, tis of thee’(‘나의 조국, 주님의 나라’)에 붙여져 미국인들이 가장 애창하는 애국가요가 되게 했다. 이와 함께 덴마크, 러시아, 독일 등에서도 애국적인 가사에 부곡되어 널리 불렸다. 바로 이 곡의 세계성과 애국적 성격을 인식하고 대한제국 황제의 만세와 국가의 독립 부강을 기원하는 가사의 곡조로 택한 것이다. 동시에 대한제국의 위상을 의미상 영국과 미국에 견준 것이기도 하다. 다음 제10장과 14장의 곡조 ‘AULD LANG SYNE’도 특징이 있다. 즉 단순하면서도 호소력이 있는 멜로디 진행으로 4.5도 도약진행과 동음을 반복하여 민중들에게 쉽게 받아드릴 수 있는 곡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이 곡이 처음 알려진 것은 영국의 음악가 쉴드(W. Shield, 1748~1829)가 스코틀랜드 구전민요인 이 곡을 오페라 ‘Rosina’에 서곡으로 사용하여 널리 알려지게 했다. 그런데 이 곡은 5음 음계를 사용한 선율로 우리 국악 체계(오음선율임)와 맞는다. 곧 민중성과 보편성을 갖는 곡으로, 이를 윤치호가 채택하여 두 노래를 널리 보급시킬 수 있었다. 윤치호의 높은 식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섯 번째는 12편 번역이 뛰어나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이미 발행한 세 가지 찬송가집에 수록된 것들로서, 윤치호는 이를 모두 새로 번역하여 수록하였다. 그런데 이 영미 양국 고전시와 낭만시 계열 12편의 번역이 기존 번역과 비교할 때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다. 1897년 5월 3일자 일기에서 이 시기 불리는 찬송가의 번역에 대해 불만을 표현한 바 있다. 작사자의 뜻에서 멀게, 또는 지나치게 의역을 한 경우를 들았다. "지금 사용되고 있는 한국말 찬송가들은 이로 말할 수 없이 그 번역이 미약해 부끄럽다” 찬송가학계에서 비교 분석한 결과로는 ‘찬미가 12편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고 세련되게 번역하여 시적(詩的)이게 했다”고 밝혔다. 이런 탁월한 번역으로 ’절대의존 고백찬송‘ 4편, 애국적 찬미가’ 3편, ‘선교에 대한 사명찬송’ 3편, 행군적 찬송 2편, ‘찬양과 예배의 찬송’ 2편, ‘성도의 교제 찬송’ 1편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찬미가’는 민족교회로서의 틀을 갖춘 반일과 충군애국의 교회 시대에 윤치호의 애국적 신앙을 반영한 찬송가집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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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69)동학란노래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 수많은 군사를 어데 두고 전주야 숲에는 유시했노 봉준아 봉준아 전봉준아 양에야 양철을 짊어지고 놀미 갱갱이 패진했네 동학란노래를 쓰다. 계묘년가을 한얼이종선 감상 *진개남: 김개남(金開南)이다. 전봉준과 더불어 동학란을 이끌었다. *유시(遺屍): 시체가 되다. *패진(敗陣): 패전. 전투에서 지다. *놀미: 논산, 갱갱이: 강경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며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나라는 혼란하였다.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항거하여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으로 무장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움직임은 곧 중앙정부의 탐관오리들에 대한 분노로 증폭되어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1894년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동학란, 동비의 난, 갑오농민운동으로 불린다. 동학농민운동은 교조 신원운동에서 시작되어 고부 봉기, 그리고 제2차 전주성 봉기에 이어 서울로 쳐들어가 부패한 정치가들과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는 데 있었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12월 패배함으로서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결국 실패하였다. 이 노래는 동학란 실패에 대한 백성들의 회한을 담고 있다. 고체로 가로쓰기 하였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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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1)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말라카 황징항(皇京港)에서 마조해협까지 오래전 중국 복건성 천주시에 갔을 때 깜짝 놀랐던 것이 있다. 신라여관, 신라 주유소, 신라 다리 등 신라라는 수식을 건 간판이나 이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적화원이라는 절을 복원하여 관광지가 된 산둥반도 석도진을 포함해 신라관, 신라방, 신라소, 신라원의 거점이 천주시를 위시한 복건성 지역이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3년여 오가며 현장조사를 했던 절강성 주산군도의 보타도 앞에는 심지어 '신라초'라는 이름의 암초가 있다. 얼마나 많은 신라의 배들이 이곳에 부딪혔으면 신라초(新羅礁)라는 이름을 붙였겠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신라 사공(선장)들이 배를 몰고 이곳을 지나다녔으면 이같은 이름을 붙였겠는가. 물론 신라초에는 신라로 싣고 오려던 관음불과 관련된 몇 가지 설화들이 있다. 보타도의 조음동(潮音洞)은 낙산사 홍련암과 설화 맥락이 거의 동일하다. 아쉽게도 일본에서 먼저 이곳에 사찰을 세우기는 했지만, 관음보살을 넘어서는 고대로부터의 아시아적 네트워크 흔적임에는 틀림없다. 이곳 복건성과 절강성을 횡단하는 마조(媽祖)해협으로부터 말레이시아 말라카해협은 단순한 물길이 아니다. 시진핑이 정화(鄭)의 원정 내력을 들어 일로(一路)의 비전을 세운 것도 이 해양실크로드가 가진 중요성 때문이다. 심지어 주산군도에서 시작한 어민화(어민들이 그리는 민화)도 실크로드의 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이 투자해 짓고 있는 말레이시아 말라카 황징항(皇京港)도 맥락이 같다. 나는 오래전 말라카해협의 정화박물관에 들러 이곳을 오고 갔을 고대의 한반도인들을 떠올리곤 했다. 신라초니 신라방이니 하는 거점의 신라인들이 필경 정화 못지않은 선박운영을 하였을 것이고 종교적인 맥락으로만 말하더라도 불교의 관음 네트워크를 넘어 이슬람교와 힌두교 혹은 더 이전의 브라만교나 시바교에까지 닿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 가야 방면의 여러 사찰에서 산견되는 요니와 링가 등의 힌두교 흔적들은 가야국 수로왕과 허황옥 전설을 넘어서는 상상들을 가능하게 해준다. 변산반도 죽막동 출토 유적들이 오키노시마와 양자강 하류의 유적과 동일하다는 점을 비롯해 해남 등 서남해에 출토되는 중국발 유물들을 통해 이를 충분히 확인해볼 수 있다. 신라인이라는 호명은 백제로 마한으로 아니 더 이전의 한반도인들로 거슬러 오른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다. 중국의 해양실크로드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해양과 관련된 지정학적, 철학적 아젠다를 내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아니 중국에 비해 너무 늦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해경표(海經表)의 새로운 구상 해경표란 무엇인가? 내가 오랫동안 제안해온 갱번론(gengbone theory)의 하나다. 해항도시니 강항도시니 하는 사람 중심의 지정학을 넘어선 생태학적 포지셔닝이기도 하다. 지난주 이미 갯벌이 'Getbol'이라는 우리 고유명칭으로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바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Gengbone'(본 칼럼에서 수차례 제안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피한다)이라는 명칭이 가지는 의미에 관해서다. 신경준(1712~1781)이 썼던 <산수고(山水攷)>와 <강계고(疆界考)> 등을 토대로 우리 국토를 산맥 중심으로 해석한 것이 이른바 <산경표(山經表)>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지리산에 이르는 산맥을 대간(大幹)으로 읽고 거기에 12지류를 정맥과 정간으로 읽으며 그 안의 도시와 강과 섬들을 배치하는 국토 인식론이다. 설정해둔 산이나 도시들을 보면 중앙중심, 수도 중심의 사고와 12지라는 철학적 사고가 직조해낸 철학 체계임을 알 수 있다. 중심으로 설정한 한양이나 개성 등은 백두산에 이르고 심지어 마고산에 이른다. 실증을 중시하는 주류사학계든, 일종의 관념을 투사하여 인식의 범주를 넓히려는 비주류 사학계든 이 산맥 중심의 사고는 서로 대립적이지 않다. 이들의 관념에는 단군신화의 동굴도 백두산에 있고 환웅이 천부인을 갖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단수와 신시도 백두산에 있다. 고구려와 발해를 전제하는 이 지정학적 지향임에도, 급기야 백두산을 넘어 히말리야에 이르고 마고여신과 마고산이라는 정점으로 치닫는다. 산경표의 인식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다. 나는 거꾸로 해경표(海經表)를 제안한다. 지면상 짧게만 언급하면, 적도 상간의 흑조(黑潮, 크로시오해류)로부터 한반도를 향해 거슬러 올라오는 물골(해류와 조류 포함)론이다. 흑조의 본류는 일본의 동쪽을 거슬러 올라 태평양을 횡단한다. 여러 개의 지류 중 황해난류(한국연난류)가 한해륙 서해로 올라오는데 그 정점 혹은 기점에 흑산도(黑山島)가 있다. 흑조의 끝이어서 흑산도다. 이 지류는 내륙으로부터 내려오는 물길 좇아 큰골과 작은골들을 만들고 갯벌 먼 끝에서 내륙 깊은 곳에 이르러 회합한다. 갱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점, 시대가 어려울 때마다 향나무 묻어 천년 후 오실 메시아를 기원하던 바로 그 지점이다. 이 권역을 통칭해 조간대(潮間帶) 이른바 갯벌이라고 한다. 불교의 관음과 미륵이 그렇고 기독교의 메시아가 그러하며 1900년 어간 900여 개에 달하던 신종교의 몸부림들이 그러하다. 근자에 일어나고 있는 코로나의 범람은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보다 더한 시대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 생활 태도의 변화, 마음의 변화, 아니 모든 것을 통째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처럼 일대일로의 욕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섬과 바다와 해양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거기에 시대적 비전도 있고 희망도 있으며 심지어 먹거리도 있다. 해경표에 주목하기를 권유한다. 한해륙 4대 물골론(中灣, Middle Bay)과 6대 작은물골론(小灣, Small Bay) 갯벌의 철학적 인유(引喩)이자 해정학(海政學)적 포지셔닝이다. 남도인들의 인식 범주, 바다를 강으로 생각하고 강을 바다로 생각하는 대대적(對待的) 사고의 형상화다. 출처는 강변(江邊, reverside)이되 조하대의 보이지 않은 물길까지 포괄하는 갱번이다. 강항(江港)이나 해항(海港)보다 강포(江浦)라는 용어를 채용하는 것은 개(갱번)의 어귀라는 생태적 입지 때문이다. 한해륙을 4대 물골로 설정하고 6대 작은물골로 구성한다. 첫째는 무안만(務安灣)이다. 지금의 영산강이 본래 바다였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삼면의 바다, 삼대 중사(中祀)였던 영암 남포로, 광주와 담양으로 오르는 물골과 법성포 고창으로 오르는 물골을 포괄하는 만(灣)이다. 기점에는 흑산도가 있고 정점에는 마한 문화권이 있다. 둘째는 금강만이다. 부여, 공주, 논산으로 오르는 금강, 백강 물골과 김제, 전주 물골을 포괄한다. 기점에는 위도와 고군산군도가 있고 정점에는 부여, 공주 백제 등이 있다셋째는 경기만이다. 예성강, 임진강으로 북한강, 남한강으로 흐르는 한해륙 가장 중요한 물골이다. 기점에는 덕적군도가 있고 정점에는 고구려, 신라를 포괄하는 개성 고려, 한양 조선 등이 있다. 넷째는 발해만이다. 범주가 너무 넓어 황하만(베이징, 톈진), 요하만(다렌, 창다오), 압록만(단둥, 신의주), 남포만(대동강, 평양), 해삼위만(블라디보스토크)으로 다시 나눈다. 이외 6대 작은물골(small bay)로 강진만, 여자만, 김해만, 울산만 외 발해만의 중만(middle bay)으로 설정했던 남포만, 압록만을 포함시킨다. 김해만은 가야의 네트워크, 울산만은 경주 신라의 네트워크 물골이다. 6대 작은물골은 다시 작은 강과 하천으로 올라 백두산 천지연과 삼지연에 이른다. 거꾸로 보면 보인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불에서 물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지난 1~2세기 동안 현자들이 이구동성 외쳐왔던 후천개벽, 새로운 시대의 기점을 마련하는 방안이다. 그 시작에 적도(赤道)를 둔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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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해외춤기행 스리랑카의 불교문화와 전통춤(2)불치(佛齒) 수호의 문화유산과 캔디안 댄스 스리랑카가 우리나라에서 가깝지 않고 외모도 사뭇 다른데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양국이 고대부터 불교문화를 꽃피웠다는 공통점 때문인 것 같다. 스리랑카는 기원전 6세기쯤 북인도의 신할리족(Sinhalese)이 이주해 처음으로 왕조를 세운 나라로서 일찍이 인도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곳곳에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사원 담불라(Golden Temple of Dambulla, 黃金寺院) 중세시대의 두 번째 수도 폴론나루와(Polonnaruwa) 기행을 오전에 마친 일행들은 전용버스로 3시간을 이동하여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사원과 황금사원이 있는 담불라로 갔다. ‘담불라(Dambulla)’는 ‘바위(Damba)’와 ‘샘(Ulla)’이 합쳐진 말로 기원전 1세기에 180m 높이의 바위산 중턱의 자연동굴에 승려들이 기거하며 조금씩 다듬어 만든 사원이다. 바위를 파낸 5개의 석굴 안에는 불상과 신상(神像) 157개가 안치되어 있고, 천장과 벽에는 화려한 빛깔의 벽화가 빽빽이 그려져 있다. 석굴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제2굴인 마하라자 비하라(위대한 왕의 사원)이다. 제1굴에는 열반에 드는 불타, 제3굴에는 바위를 깎아서 만든 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제4굴에는 2,000년 전에 보석을 넣었다는 불탑이 보관되어 있고 제5굴에는 조각상과 20세기 초에 그린 벽화가 있다. 1991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시기리아(Sigiriya) 바위산 궁전에 얽힌 왕위 계승에 관한 전설과 압사라 댄스 시기리아(Sigiriya) 고대 도시는 카사파 1세(Kassapa I, 477~495)의 치세 동안 실론(Ceylon) 문명을 보여 주는 유일한 유적이다. 특히 바위산 정상에 건설한 시기리아(Sigiriya) 궁전은 현지어로 Sigiri(Lion사자)와 Ya(Rock 바위)라는 두 낱말이 합해진 ‘사자 바위(Lion's Rock)’란 뜻이다. 이 유적은 가파른 경사면과 사방을 에워싼 정글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높이 370m의 화강암 봉우리 정상에 있는 왕궁터에 요새화된 궁전, 폐허가 된 건물들, 저수조들, 암각 조각들이 있다. BC 5세기에 요새왕궁으로 건축된 이 성채는 198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있는 보물이지만 명성만큼이나 슬픈 사랑과 사연을 품고 있다.5세기 스리랑카의 다투세나 왕(Dhatusena King)은 왕위를 계승하기 전 한 여인을 사랑했다. 그 여인은 왕족이 아닌 천민이었기에 슬픈 사랑의 얘기는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서부터다. 그러나 다투세나왕은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족은 천민과의 결혼이 용납되지 않는 나라의 율법 때문에 다른 왕족의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다투세나왕에겐 천민 여인이 낳은 맏아들 카샤파 왕자와 왕족출신의 왕비가 낳은 둘째 아들 목갈라나(Moggallana)왕자가 있었는데 천민출신 큰아들이 후일 카샤파 1세 왕자가 된다. 그러나 천민출신 성분 때문에 왕족 혈통인 이복동생 목갈라나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봐 늘 우려 하다가 절대권력자인 왕이 되기를 결심하고 아버지인 다투세나 왕을 감옥에 가두고 왕위를 찬탈했다. 이에 분노한 동생 목갈라나는 형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몇 명의 신하들과 함께 인도로 망명한다. 왕좌에 오른 카샤파 왕은 이들 후환이 두려워 부하를 시켜 아버지 부왕까지 살해하고 만다. 카샤파 왕은 아버지를 살해한 죄의식과 인도로 망명한 동생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난공불락인 시기리아 정상인 해발 370m 바위산 꼭대기에 7년의 긴 세월을 들여 철통같은 요새 시기리아 궁전을 지었다. 그러나 망명 11년 후 복수를 위해 세력을 키워 돌아 온 이복동생 목갈라나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하자 카샤파 왕은 쓸쓸하고 비참한 자결을 택한다. 이 궁전을 짓는데 걸린 기간이 7년, 입궁하여 꾸미는데 4년, 도합 11년의 긴 세월을 공들였으나 그가 완성된 궁전에서 기거했던 기간은 고작 반년이었다.결국은 비극으로 끝난 한 왕가의 운명적인 몰락의 역사가 서려있는 시기리야 바위산 왕궁 폐허를 답사하고 내려오면서 신분, 권력, 사랑, 영화에 대한 애달프고 인생무상한 이야기는 인도 무굴 제국의 황제였던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이 끔찍이 사랑했던 왕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을 추모하여 만든 타지마할 역사 이야기보다 더 서글프고 안타까워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내려오는 서쪽 암벽 중간쯤에 알려지지 않은 18명의 여인들 모습이 그려진 ‘시기리아의 여인(Sigiriya Lady)’, ‘천상의 여인들(Maidens of the Clouds)’ 또는 ‘천상의 무희(Apsara)’로 불리는 바위그림이 있었다. 아잔타(Ajanta)의 가장 아름다운 벽화와 비교할 만한 이 바위그림으로 인해 시기리야 고대 도시는 세계 고고학 미술계에 찬사를 받게 되었다. 본래는 시기리아 바위산에 500명의 여인 벽화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18명의 벽화만 겨우 남아있다. 여기서 귀가 쫑긋해지는 이야기는 정상 왕궁터 대리석 옥좌(Throne)에 카샤파왕이 앉아서 무희(Apsara)들의 춤을 감상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옥좌 등받이 뒤로 물이 흘러가도록 만든 수로를 두어 왕의 더위를 식혀주었다고 한다. 압사라(舞姬, 妖精, 飛天, 仙女, 天使)의 범아시아적 특징 시기리야 벽화 속의 수많은 여인들의 체형은 건강하게 살이 오른 풍만한 관능미를 가진 예사롭지 않은 미인들이다. 그리고 허리 아래가 구름 속에 떠 있는 듯한 모습과 상반신을 벗은 채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은 힌두교와 불교의 천상세계의 여인, 즉 압사라(천상의 요정)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압사라는 일단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벽화의 춤추는 요정을 떠올리는 크메르족의 전통춤을 뜻한다. 그러나 인도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왕실무희들이며 힌두의례와 관련한 천상의 요정이다. 역시 불교국가에서도 이를 비천(飛天, 樂天 : apsara)이라 하여 항상 음악을 연주하고 꽃을 뿌리며 하늘을 떠도는 천인(天人)으로 1세기 전후부터 널리 조형화하고 있다. 인도 전래의 한국불교 사찰 벽화나 범종 부조에 나타난 비천상(飛天像, 주악비천, 공양비천, 무용비천) 역시 압사라의 맥을 같이하고 있다. 상의를 벗고 있는 모습은 열대지방의 보편적인 고대사회의 풍습이다. 이러한 탈의(脫衣) 모습은 한중일 등 온대지방마저도 불상이나 비천상의 대부분이 상체는 벗거나 가사를 걸친 정도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시기리야 압사라 벽화에는 대체로 꽃을 받치는 형상은 불교 비천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또한 압사라들은 팔과 손과 손가락의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불상마다 손과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불교 수인법(佛敎 手印法)과 같은 모습들이라고 볼 수 있다. 힌두교 창세신화 〈우유바다 휘젓기〉와 압사라 탄생과 춤 압사라(Apsara)는 원래 인도의 탄생 신화에 나오는 요정으로, 그 어원은 '물 위(apsu)에서 태어났다(sara)'는 뜻이다. 이는 힌두교의 천지창조신화 ‘우유의 바다 휘젓기(Sagara Manthan, The churning of the sea of milk)’에서 비롯한 것으로 신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항상 힘이 약한 데바(Devas, 善神)들은 아수라(asuras, 惡神)들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하여 모두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에 데바들은 우주와 질서의 신 비슈누(Visnu)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비슈누는 우유의 바다 깊은 곳에 암리타(Amrita, 영생의 약)를 먹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을 조언한다. 그러나 데바들의 힘만으로 우유의 바다 깊은 곳에 있는 암리타를 꺼내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비슈뉴가 꾀를 내어 아수라들에게 암리타를 나누어 줄 테니 함께 우유의 바다를 휘젓자고 제안한다. 아수라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마침내 선신과 악신들이 우유의 바다를 천 년 동안 함께 휘젓는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조각과 그림들은 세상의 중심인 만다라산(Mount Mandarachala)을 중심으로 비슈누가 가운데 있으며 양쪽으로 데바와 아수라들이 나누어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거대한 뱀의 왕(Vasuki)의 몸통을 함께 휘젓는 모습이다. 이렇게 우유의 바다를 휘젓는 과정에서 발생한 거품 속에서 약 6억 명의 압사라(apsara, 선녀)가 탄생하였다.특히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제3회랑 동쪽 벽의 거대한 천지창조 장면에는 우유바다를 휘젓는 물결 속에서 수많은 압사라가 태어나 하늘을 나는 신비로운 장관을 볼 수 있다. 크메르 정권 때 파괴되었다가 복원한 압사라 댄스(Apsara dance)는 우리의 궁중춤처럼 정적이며 지루하다 할 정도로 움직임이 느리고 행동반경도 제한적이며 절도가 있고 엄숙한 춤이다. 우아한 전통음악에 맞추어 진행되는 유연하고 섬세하게 움직이는 다양한 손가락춤과 손목춤이나 발목 꺾음과 뒤로 들기 같은 말초부위 춤사위는 남방춤의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 부처의 진신 치아를 모신 불치사(佛齒寺) 1월 8일 아침 두 번째 수도 담불라 답사를 마친 일행들은 다시 세 번째 수도 캔디로 출발하였다. 이번 춤기행에서의 핵심이 캔디안 댄스를 관람하고 스리랑카 전통춤의 종류와 춤사위를 살피는 것이 주목적이었기에 가장 기대가 컸다. 캔디에서 부처의 진신 치아 사리(佛齒)를 모신 ‘불치사(佛齒寺, Temple of the Tooth. Dalada Malgawa)’는 반드시 들러야 하는 관광요지이다. 치아 사리는 기원전 543년 인도에서 석가모니 다비식(화장)때 입수한 것으로 서기 362년 인도 남부의 작은 나라 칼링가(Kalinga)왕국의 왕자가 머리카락 속에 숨겨온 사리를 스리랑카 왕에게 바쳤고, 이후 불치는 독실한 불교국가이기에 왕권의 상징이 되었다. 개방되는 불치사 참배는 자유롭지만 치아사리가 있는 방이 열리는 것은 하루 세 번(오전 6시, 11시 30분, 오후 6시 30분) 공양을 올리는 푸자(Puja)의식 때이다. 이때 참배객들은 꽃을 들고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불치사 참배는 스리랑카인들의 평생소원으로 스리랑카 사람 마음속에 불치사가 간직되어 있다. 캔디 불치사를 중심으로 펼치는 에살라 페라헤라 축제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규모인 캔디의 에살라 페라헤라(Esala Perahera)는 불치사에 있는 성스러운 불치사리를 옮기는 의식을 재현하는 축제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에살라’는 ‘음력 7월’을 뜻하며 그래서 이 축제는 음력 7월 중에 약 11일간 매일 밤 열린다. 이 축제는 부처님의 치아 사리가 스리랑카에 도착한 것을 기념해 그 당시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축제이다. 캔디안 댄스 극장에서 선보인 전통춤들 불치사 근처에 있는 캔디안 댄스극장(Oak-Ray Kandynn Dance)은 빌딩 공간을 개조한 간이 소극장으로 옹색하였고 이미 외국인들로 만원이었다. 할 수 없이 가운데 통로 맨 앞자리에 허락과 양해를 구하며 의자를 옮겨 자리 잡았다.마굴 베라(Magul Bera, Ceremonial Drums): 시작을 알리는 나각(螺角, 소라나팔)을 불면 격렬한 드럼(BERA)연주 의식을 하는데 이는 고대 토지의 수호신에 알리는 의례 관습에서 비롯되었고 전통적인 환영 연주이다.푸자의식춤(Puja Naturna, Pooja Dance): 오일 램프를 들고 있는 여인들이 부처에게 제물로 바치며 기도하는 의식을 표현하며 우아한 춤을 춘다. 락샤춤(Raksha Natuma, Devil Dance): 락샤(Raksha)는 축귀(逐鬼), 치유(治癒), 악령(惡靈), 악마(惡魔) 등을 뜻하며, 18개의 남쪽 스리랑카 가면을 쓴 춤은 악한 기운을 물러가게 하고 환자들을 치유할 목적으로 춘다. 이 춤은 귀신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사용되며 여전히 스리랑카에서 효과적인 정신과 치료로 여겨지고 있다. 뱀춤(Naga Raksha, Cobra Snake)은 잡신의 위협과 퇴치의 뜻이며, 새춤(Gurulu Raksha, Mythical Bird Dance)은 신화 속의 독수리로 이를 상징하는 탈을 쓰고 공연하는 춤이다.판테루 나투마(Pantheru Natuma, 出征舞): 판테루는 탬버린과 유사한 악기를 들고 드럼반주에 맞춰 흔들며 활발한 곡예기술(공중돌기, 회전무)과 손재주를 보이며 춤을 춘다. 이 춤은 전장에 나가는 전사들을 표현한 것으로 출정무(出征舞)라 할 수 있으며, 캔디안 댄스 중에서 가장 박력 있는 남성춤이다. 마유라 나투마(Mayura Natuma, Peacock Dance): 화려한 공작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유라 나투마는 신화에 따르면 스리랑카 전쟁의 신으로 불교와 힌두교가 경배하는 ‘스칸다(Skanda)’를 운반하는 공작새로 고맙게 묘사하는 여성춤이다. 또한 공작새는 보편적으로 평화와 조화를 가져 오는 상징성으로 밝은 흰색과 파란색 의상을 입는다.라반 나투마(Raban Naturma): 라반춤은 손북(Ath-Rabana, Hand Tambourine)을 들고 추기도 하고, 한국의 버나(남사당 접시돌리기)처럼 손가락이나 막대를 받쳐 회전시키는 다양한 곡예무로 발전한 전통 민속춤이다. 살루 팔리야(Salu paliya): 살루 팔리야(Salu Paliya)는 악령에 사로잡힌 환자에게 여신(Pattini)의 축복과 치유를 가져다주기 위에 흰목도리를 걸치고 등장한다. 여신 파티니(Pattini)는 스리랑카의 힌두교와 불교 공동체 모두에게 경배를 받는 신이다. ‘살루 팔리야(Salu Paliya)’가 광대처럼 행동하여 환자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두려움을 없애주는 제 2단계의 치유의식으로 우스꽝스런 가면춤을 춘다.베스 나투마(Ves Natuma): 베스춤(ves Natuma)은 캔디안 댄스 형식에서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춤이다. 이 춤의 기원은 고대 퇴마의식춤인 ‘코호모 칸카리야(Kohomba Yakuma, Kohomba Kankariya)’에서 유래 된 것으로 가장 인기가 있는 춤이다. 춤은 저주의 악령을 달래는 의식으로 남성에 의해서만 수행되었다. 〈전설 내용은 1편 캔디안 댄스 참고〉 이들은 태양의 광선을 상징하는 반짝이는 60개의 장식품으로 된 전통적인 베스(ves)복장을 입고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헤드기어(head gear)모자를 쓰고 게타베라야(Getanderaya,Kandyan Drum)라는 북소리에 맞춰 역동적이고 정교한 춤을 춘다. 이 춤의 댄서가 되려면 몇 년간의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인정받고 춤을 출 수 있다. 특이한 춤사위로 한국농악의 채상모놀이처럼 헤드기어의 긴 띠를 휘돌리기, 점핑춤, 공중돌기, 치맛자락 잡고 춤추기, 한국 강신무처럼 왼쪽으로 빠르게 돌기 등이 있었다. 쿨루브 나투마(Kulub Natuma, Harvest Dance): 쿨루브춤(Kulub Natuma, Harvest Dance)은 농부들이 곡식이나 실론 차잎을 수확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부녀자들이 행한 민속춤으로 키춤, 차잎 뜯기춤(Tea Plucking Dance) 등이 있다. 반주는 가벼운 드럼 비트와 플루트 연주이다.드럼 오케스트라(The Drum Orchestra): 드럼은 캔디안 댄스에 ‘게타 베라(Geta Bera)’, 저지대춤에 ‘야크 베라(Yak Bera), 사바라가무와춤에 ’다불라(Davula)‘ 반주로 춤을 춘다. 드럼 오케스트라(The Drum Orchestra)에서는 주로 게타 베라야(Geta Beraya), 야크 베라야(yak Beraya), 탐마타마(Thammattama)로 리듬 연주했으며 그밖에 시작할 때 소라연주가 있었고, 연주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밖에 스리랑카 악기에는 우데키야(Udakkiya), 타빌(tavil), 플루트(floot), 라바나(rabana) 등이 있다. 지니 시칠라 불춤(Gini Sisila, Fire Dance): 지니 시칠라(Gini Sisila, Fire Dance)는 불을 뛰어 넘는 마력과 인간에 해를 끼칠 수 있는 27개의 악령과 불에 대항하는 신성한 퇴마의 힘을 보여주는 남부지방 불춤이다. 불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으로 화염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며, 이 댄스에는 불을 먹는 아찔한 묘기춤(Fire Eating Dance)도 춘다.불판걷기(Fire walking): 맨발로 불판걷기의 근원은 라마(Rama) & 시따(Seetha)의 서사적인 사랑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론의 왕 라와나(Rawana)는 인도의 공주인 시따(Seetha)를 인도에서 납치했다. 시따는 자신의 순결을 입증키 위해 화장의례에 사용되는 장작을 쌓아 불을 붙이고 불속에 들어가자 불의 신 아그니(Agni)신이 나타나 시따를 들어 올려 라마에게 시따의 순결을 입증해주었다. 그 후 라마는 왕이 되어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보냈다는 이야기에서 불판걷기가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스리랑카 마지막 여정들(핀나왈라, 콜롬보, 갈레포트) 1월 9일 아침 핀나왈라 코끼리 고아원(Pinnawala Elephant's Orphanage)을 방문했다. 이곳은 정글에서 부모를 잃어버렸거나 또는 다치거나 병든 코끼리들을 보호하는 시설로 건강을 회복한 코끼리들은 사찰이나 코끼리 사육사(조련사)들에게 넘겨진다고 한다. 코끼리들을 아침 10시와 오후 2시에 반씩 나누어서 목욕을 시키기 위하여 40-50마리를 데리고 강으로 나온다. 1월 10일 드디어 스리랑카 여정의 마지막 날이 왔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오전 호텔에서 전통 혼례식을 볼 수 있었다. 캔디안 댄스에서 봤던 베스댄스를 혼례 의식춤으로 축하를 하며 전통 결혼식을 오전부터 오후까지 진행하였다. 그리고 스리랑카의 옛 수도 콜롬보(Colombo)에 도착하여 해양박물관과 갈레포트(Galle Fort)와 전통낚시(stilt fishing)을 보는 것으로 일정을 마치고 콜롬보의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Bandaranaike International Airport)으로 향하여 밤 비행기로 귀국하였다. 스리랑카를 떠나면서 스리랑카 왕조 유적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부처의 진신(眞身) 치아(齒牙)를 모셔온 1800년 동안은 불치 수호의 역사였으며, 불치(佛齒)는 왕조의 존재 가치를 담을 만큼 소중한 왕권의 상징인 ‘국새(國璽)’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동아시아 지배계층에서 불교를 널리 받아들인 것은 ‘왕즉불(王卽佛) 사상’, ‘호국불교’를 이용한 것이긴 해도 스리랑카 국민들(70%)이나 왕들은 지나치리만큼 지극한 불심(佛心)으로 현재까지 살아온 것 같았다. 또한 스리랑카의 전통춤은 3개 문화권으로 전승되고 있었으며, 그중 캔디지역이 가장 대표적인 춤문화권이며 세부적으로 여러 종목의 춤들이 전승되고 있었다. 그중에서 스리랑카의 고전춤이라고 할 수 있는 베스댄스(ves Natuma)는 여러 타악반주와 채상돌리기, 땅재주 등 다양한 기법이 한국의 농악과 유사성이 많았고, 오랜 동안 불치를 지켜온 페라헤라축제는 스리랑카의 전통문화의 전승의 요람이었고 민족의 자존심이었다. 이병옥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8.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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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첫눈/이해인함박눈 내리는 오늘 눈길을 걸어 나의 첫사랑이신 당신께 첫 마음으로 가겠습니다. 언 손 비비며 가끔은 미끄러지며 힘들어도 기쁘게 가겠습니다. 하늘만 보아도 배고프지 않은 당신의 눈사람으로 눈을 맞으며 가겠습니다. 추천인:박정곤(전통문화 연출가) "아직 맞아보지는 않았지만 하얀 첫눈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마음속에도 첫눈이 내린다.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렌다. 나는 어느새 하얀 눈사람이 된다. 수많은 '첫눈'에 관한 시 중에서 이해인 수녀님의 '첫눈'이 생각이 난다. 이 시를 읇조리면 영혼이 맑아지기 때문이다. 언제나 마음 설레이게 하는 첫눈처럼....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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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1)<br> 청자사자형문진편귀중한 청자 자료중의 하나 이규진(편고재 주인) 청자에서 백수의 왕으로 불리는 사자는 아주 보기 드문 동물은 아니다. 주로 향로나 베개 등에서 볼 수 있는데 가장 유명하다고나 할까 널리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국보 제60호인 청자사자형뚜껑향로(靑磁獅子形蓋香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밖의 것으로는 근래 들어 눈길을 끌고 있는 청자사자형뚜껑향로 2점이다. 2007~2008년 충남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수중발굴을 통해 출수된 것으로 지금은 보물로 지정이 되어 있다. 보물 청자사자형뚜껑향로는 몸에 비해 머리가 크다. 목에는 방울이 달려 있고 앞발은 두 개의 보주를 밟고 있다. 몸에는 소용돌이 털이 새겨져 있고 벌린 입 사이로는 날카로운 송곳니와 내민 혀가 보이고 있다. 다소 파격적이고 거칠게 표현된 형상은 세련된 조형성으로 널리 알려진 고려청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따라서 이질적이며 해학적인 자태는 고려인들의 또 다른 미감을 엿볼 수 있는 것이어서 여간 흥미로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자사자형뚜껑향로가 보물로 지정된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죽간 등을 통해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출수된 도자기들이 강진에서 만들어져 개경으로 가다 난파된 것이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제작 시기와 출토지 및 사용처를 분명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이유로는 해학적이고 독특한 조형미, <선화봉사고려도경>의 산예출향을 연상시키고 있다는 점, 고려청자의 다양성과 우수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보 제60호나 보물로 지정된 청자사자형뚜껑향로의 사자가 모두 향로의 뚜껑이고 여타의 사자들이 베개와 같은 유물들에서 장식용으로 몸체에 붙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반해 청자사자형문진편(靑磁獅子形文鎭片)은 이런 것들과는 유형을 달리 하고 있어 주목된다. 청자사자형문진편은 현재 몸체의 앞부분만 살아 있고 뒷부분은 망실되고 없다. 말하자면 뒷다리와 엉덩이와 꼬리 부분이 훼손되고 없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남은 형체만으로도 어떤 기물에 부착시켜 장식되었던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한 마리의 사자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기존의 청자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케이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자사자형문진편의 세부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몸체를 지탱하고 있는 두 개의 다리가 무척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크게 벌린 입으로는 가지런한 이빨이 보이고 들창코 같은 코에 튀어나온 두 눈알에는 검은 점을 찍고 있다. 옆으로는 소용돌이 모양의 갈기 흔적이 보이고 머리 위로는 없어진 뒷부분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꼬리 일부분이 붙어 있다. 거기에 온몸에는 비색의 유약이 두텁게 입혀져 있다. 반 토막이 나 앞부분만 살아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어떤 기물에 장식용으로 붙어 있던 것이 아닌 독립된 한 마리 사자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편리한대로 청자사자형문진편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면 보기 좋게 청자로 만들어진 장식용 사자였을까.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특수한 형태의 것이어서 주목을 요하는 귀중한 청자 자료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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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74)<br>박관용 명인의 '진도북춤'진도북춤 북춤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며 크게 경상도 북놀이와 전라도 북놀이로 나눌 수 있다. 전라도의 경우는 다시 외북치기와 양북치기로 나뉘는데, 외북은 전라도 지역 북놀이의 보편적 형식으로 북을 어깨에 매고 한 손으로 북채를 들고 치기 때문에 원박(原拍) 가락에 충실하고 소리가 웅장하다. 양북치기는 진도에 한해서 전승되고 있는데, 양손에 북채를 쥐고 장구를 치듯 하기 때문에 잔가락이 많이 활용되면서 멈춤과 이어짐이 민첩하고 가락이 다양하다. 외북과는 달리 장고가락과 같은 굿거리, 자진모리, 휘모리가락을 구사하여 감정을 풀어나간다는 점과 풍물의 흥겨움과 신명성에 더불어 아름다운 춤사위가 큰 몫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 역시 진도북춤만의 특징이다. 진도 북춤은 원래 두레굿에서 풍물로 발전되고 다시 춤으로 발전하였다. 진도북춤은 김행원(판소리 명고수 김득수의 부친)이 명인이었는데, 이 분에게서 사사 받은 임장수, 박태주, 김성남(金成南) 등이 그 계보를 이어오다가 박관용(朴寬用), 양태옥(梁太玉), 곽덕환(郭德煥), 박병천(朴秉千) 등이 그 뒤를 잇고, 현재는 전승해오고 있다. 박관용 농화 박관용 선생은 1921년 진도에서 태어나 13세가 되던 해 진도 소포걸군농악으로 처음 국악을 접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걸궁패농악으로 가장해 적진을 탐색하고 작전을 펼친 것에서 유래된 소포걸군농악은 양손으로 북을치는 북놀이가 특징이다. 예능보유자인 박관용이 추는 춤의 춤사위를 보면 그의 북춤은 북으로 추는 살풀이라고 할 수 있다. 까치새로 엮어가는 발사위나 게걸음 같은 옆걸음뛰기, 무섭게 휘돌아가다가 한 장단 슬쩍 먹어버리는 발림 등이 상쾌하고 순수하며 소박하다. 그는 스승에게 배운 북춤 위에 풍류 살풀이의 멋을 얹어 자신만의 북춤을 추고 있다. 박관용은 진도의 부유한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난 탓에 그의 집안에는 시조의 대가였던 큰할아버지와 퉁소를 잘 하던 작은아버지 등 풍류객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17세부터 본격적으로 춤과 장단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박태주와 김행원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는 특히 농사철에 들노래와 함께 치는 상사북소리가 장기였다. 북춤 말고도 살풀이, 상사소리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장구나 쇠도 잘 다룰 줄 알 정도로 가무 전반에 관심이 많았다. 호남농악경연대회에서 북춤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고, 1987년에 시도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을 받았다. 북춤 명인으로 그의 명성은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2008년 별세하기 전까지 길러낸 1500명 제자가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박관용류 진도북놀이'는 이희춘 보유자가 이어나가고 있다. 박관용(朴寬用, 1921-2008) 이력 진도북놀이보존회 3대 회장 1921년 진도 출생 1978년 전주대사습 경연대회 북춤 1980년 광주 금호 예술국악원 경영 1983~4년 국립극장 명무전 출연 1984년 광주 전국 예술제 무용부 장려상 1985년 제14회 남도예술제 북춤 개인 연기상 1987년 시도무형문화재 '진도북춤' 보유자 인정 1987-1988년 전국 순회공연 및 발표회 1987년 진설리 '북놀이전수원' 설립 북춤 후진양성. 1988년 88올림픽기념 공연(서울). 북놀이 1987년 제1회 개인북춤발표회 1990년 신라예술무용학원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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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68)할미성 꼭대기 진을 치고 왜병정 오기만 기다린다. 임진왜란노래 오라베 상투가 왜 그런가 병자년 지내고 안 그런가 병자호란노래 조선시대 두 전란을 겪으며 부른 아리랑을 계묘년 황화지절에 쓰다. 오거서루주인 한얼이종선 감상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년)에 일본이 침략한 전쟁으로 7년간 이어졌다. 일본은 보름 만에 파죽지세로 한양을 점령했고,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신했다. 병자호란은 1637년에 청나라가 일으킨 채 두 달도 안 걸린 전란이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항복 의식을 치렀다. 전쟁은 백성의 목숨뿐만 아니라 삶을 피폐시킨다. 백성은 이유 없이 고단하고 알 수 없는 채로 간난을 겪는다. 통치자의 무능은 백성을 슬프게 하고 도탄으로 밀어 넣는다. 백성은 잠결에 이를 맞아 대책 없이 허둥댔고 치욕은 오롯이 백성의 몫이 된다. 이순신이 영웅이 된 것마저도 백성은 서글픈 것이다. 두 전란의 노래를 한 자리에 모았다. *할미봉: 경상남도 함양에 있는 바위산 봉우리로서 할미봉은 백제와 신라의 국경으로 전쟁의 격전지였다. 전쟁 통에 병사들이 먹을 쌀을 쌓아놓은 합미성(合米城) 이란 말이 할미성으로 변했다고 한다. 할미성은 문경, 남원, 용인, 성주, 철원, 포천, 거창 등 여러 곳에 있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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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창작 3편 작사 배경으로서의 충군애국 정신‘찬미가’ 수록 3편의 창작 작품은 윤치호 사고(思考)의 결정체이다. 10년에 걸친 공직자로서의 경력과 개인적인 성향이 반영되었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 편린들은 그가 남긴 일기, 강연, 글들에서 찾을 수가 있다. 이들은 창작 3편 주제의 지향성과 작품상의 응결성을 형성한 것이다. 작사자로서의 윤치호의 이해와 창작 3편의 이해, 그리고 창작 3편의 이해를 위해 충군애국정신을 살피기로 한다. 제14장이 작사 되는 1907년 이전의 기록들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시간이 지나면 조선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문명한 나라가 될 것이다. 2천만 겨레들도 어느 날엔가는 자유에 대해서 말하고 자유를 누릴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세대가 당했던 예속의 아픔을 웃음으로 회고할 날이 올 것이다. 고을마다 대학교가 세워지고 아름다운 반도 구석마다 궁전과 같은 집들과 깨끗한 거리, 그리고 기념탑들을 자랑할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 이 모든 꿈은 꼭 실현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1888년 9월 미국으로 건너가 그해 11월 테네시주 밴더빌트(Vanderbilt)대학 신학과정에 입학하여 1890년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조지아(Georgia)주에 있는 에모리(Emory)대학에 입학하여 1893년 9월에 졸업하였다. 위의 기록은 그해 졸업을 앞둔 4월 8일자 일기의 일부이다. 이를 통해 윤치호는 조국에 대한 미래상을 꿈꾸고 있었다. 이 희망은 제1장 3절에서 "아세아 낙토(樂土)가 이 아닌가”나 제14장의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길히 보존하세”에 담은 것이다. 민권관과 국가관 윤치호는 독립신문 같은 매체에 많은 글을 썼다. 이를 통해 민권관과 국가관을 살필 수 있다. "나라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두고 이름이니라”나 "나라라 하는 것은 일정한 토지를 두고 거느려 다스리는 주권(主權)에 복종하는 인민이 많이 모인 바이다.”라고 하여 국가는 영토, 인민, 주권이란 3요소로 구성된 통치조직임을 말하였다. 조선이 국가를 토지에 중점을 두고 군주의 사유물로 보는 시각과 다른 개념인 것이다. ① "나라는 백성으로서 근본을 삼고 일백관원을 백성을 위하여 배푸렀은 즉····.” ② "정부가 백성을 말미암아 된 것이요 백성이 정부를 위하여 난 것이 아니라···.” ③ "인민은 국왕과 양반을 위해 부림당하는 우마(牛馬)가 아니다.” 국가 발생의 연원을 말했다. 국가는 인민의 권리로 인민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창출된 것이란 주장이다. 바로 국민 주권론이다. 충군·애국관 윤치호는 일본이 명치유신으로부터 불과 30년만에 큰 발전을 한 것을 국민의 애국심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애국에 대해 많은 생각을 피력했다. 애국심이란 개인이 국가에 대해 갖는 애정 또는 헌신의 태도로서 전제주의 국가에서 국민에게 부과된 의무이며 덕목(德目)이다. 일기에서 당시 애국심을 표현한 대목이 다양하게 확인 된다. "최선의 애국심은 조선의 관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학자들 간에 국왕에의 충성은 효성과 함께 한 쌍의 덕목이다. 그런데 대부분 조선의 관료들이 가진 최고의 충성 개념은 국왕이 커다란 위기를 맞았을 때 자기들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알고있다.” 군주에 의해 강요된 절대적 충성은 애국심과 다르다. 일정한 토지 내에서 역사 전통을 공유하는 국민의 일체감에서 발생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독립신문 논설 <나라 사랑하는 논>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애국심은 언어 풍속 종교가 동일하고 하해(河海) 산악(山嶽) 지계(地界)가 분리되어 있어 자연히 동일한 감정이 흥기하는 것(중략). 애국이란 국가의 공익(共益)과 동포(同胞)의 권리를 추구 한다····” 국민국가를 전제로 국왕에 대한 충성(忠誠)을 곧 애국(愛國)으로 동일시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충군애국’의 개념이다. 결국 윤치호의 충군애국은 선정(善政)을 전제로 한 충성은 존왕적(尊王的) 전통의식 속에서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강조한 것이 된다. 이는 당시 독립협회가 내세운 ‘수단으로서의 충군, 목표로서의 애국’과 일치하는 현실적 방략이기도 하였다. 독립관 윤치호의 기독교관은 유교의 인식과 대비된다. 이는 국가 독립관(獨立觀)에 반영된 듯하다. 유교는 윤리가 지배하는 동양 전통사회로 인간관계와 국제관계까지도 종속적 차등 관계로 보기 때문에 국가의 독립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바로 중국의 종속을 유교적 전통사회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고, 이로 하여 조선이 강국(强國)에 종속을 타성화 하여 독립정신을 약화시켰다고 인식했다. 청일전쟁으로 중국과의 종속관계가 해체된 것이지만 이는 우리 힘으로 된 것이 아니기에 일제의 또 다른 종속을 우려한 것이라고 본다. 일기, 독립신문, 서한에서 그의 독립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독립이라 하는 것은 스스로 믿고 남에게 기대지 아니하는 말이다.” ② "우리나라와 우리 주권이 만국과 동등해야 하며 어느 나라에도 열등해서는 안 된다.” ③ "나에게 조선의 독립 문제는 관심이 없다. 현재와 같은 정부라면 독립은 국가에 구원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한편 더 좋은 정부 즉 인민의 복지에 애국적이고 공감이 가는 이익을 가져다 줄 정부를 가진다면 종속도 진정한 불행은 아니다. 더욱이 건실하고 번영한 국가는 어느 땐가는 독립을 회복할 것이다. 그런데 빈약하고 무지하며 잔인할 정도로 이기적인 정부에 의하여 가난하고 무지하며 연약하게 된 인민, 그러한 인민에게 독립이 뭐 나을 것이 있겠는가?” ④ "국가의 국가 됨은 자립하여 타국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자수하여 일국에 정법을 시행하는 것” ⑤ "일본이 단독으로 그(러시아) 마력을 깬 것은 그 착상 자체가 당당한 것이다.(중략) 나는 황인종의 일원으로 일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 독립까지도 앗아가고 있는 일본을 증오한다.” ⑥ "일본의 괴로운 노예제 하에서 한국인들은 동족지배자에 의한 폭정이 이민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의 디딤돌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⑦ "누구든지 (을사)조약에 서명하는 자는 일본의 쓸데없는 약속에 나라를 팔게 될 뿐이다.” 을사늑약 체결이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조선 내부의 문제로 결과한 것이라고 보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독립상실을 황인종의 명예회복으로 상쇄하려는 일종의 보상심리의 발로로 볼 수 있는데, 침략세력에 대한 비판은 일본에 집중 되었다. 그러면서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독립의 상실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윤치호는 늑약이 체결 된 날 외무협판직을 사퇴했다. 외무대신 서리를 제안 받았지만 자신에게 "굴욕감과 동포에게 증오감을 준 것 외에 외부 본연의 임무는 사라졌다”며 거부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수중에 있는 내각(內閣)에서 보다 개인 자격으로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을사조약에 상소운동·외교운동·자결행위·의병전쟁 등의 방식으로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비판적 자세를 취하면서 개화파 인사들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국민사상계몽에 노력했다. 같은 해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신민회의 회원으로 평양의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또한 안태국(安泰國)과 더불어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청년운동을 적극 지도하는 한편, 신사상·신사업의 개발 등 실력양성을 주장하는 계몽강연 연사로도 활약했다. 이 시기 무엇보다 관심을 기울인 사업은 남감리교 선교부가 1906년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韓英書院/The Korean-Anglo Schoo)을 통한 교육사업이었다. 조국을 돕는 것, 이는 교육 문화 분야의 계몽운동에 전념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독립은 훌륭한 정부를 가져야 가능하며, 훌륭한 정부 없는 외교는 무용하다고 확신하며 실력 부족으로 상실된 국권의 회복은 실력양성만으로 가능하다고 믿었다. 계몽운동관 윤치호는 1905년 11월, 박제순이 을사늑약에 서명한 것을 놀라워하고 한규설의 서명 거부에 대해 찬사를 표했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은 오늘(을사조약) 오전 1시 또는 2시 경에 조용히 사라졌다.”라고 한탄하고, 국권회복운동 방략을 설정하였다. 그것은 ‘나’와 ‘적’의 힘의 격차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실력양성만이 국권회복을 가능하게 한다는 확신에서 이를 운동 핵심으로 삼아 전개하였다. 1905년 YMCA 운동에 이사로 참여하고, 1906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회장을 맡고, 1907년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 설립, 출판사 광학서포(廣學書鋪) 인수, 대성학교 명예교장 활동 등을 통한 민족실역양성 운동에 전념한 것은 주목해야 한다. ① "분노와 격정은 우리를 돕지 못할 것이다. 먼저 강대하게 되기를 힘쓰라 그리하면 다른 타국의 정의와 공정과 재산이 우리에게 더해질 것이다.” ② "미·불에 독립청원, 웨싱톤과 파리 거리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으려 한다.” ③ "어느 열강도 일본에 먼저 돌을 던질만큼 정의롭지 않다. 한국은 열강과 독립적 외교관계를 가진 과거 20년 동안에 세계의 동정을 살만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나라도 부패한 한국을 위하여 세계적인 강대국이 된 일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④ "獨立之道 在於自强 自强之道 在於內治修而外交信.” ⑤ "경제적 자립능력으로 개인적인 독립정신을 국가적인 독립사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⑥ "기독교적 분위기가 넘치는 마을, 근대적 지식이 교류되는 마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마을을 건설하여 건실한 지역사회 표본으로 제시하려 한다. 굶주린 민중의 피난처(a city of refuge)가 되게 할 것이다.” ⑦ "벼슬은 더할 생각도 나지 않았소. 이제는 도저히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근본적으로 국가를 개조할 뜻을 둠이 오히려 나으리라 하여 송도로 내려가 한영서원을 설립하였소.” 이상은 같은 이념의 실천이 한영서원 개교 등을 통해 국가 개조의 방책으로 교육 사업, 즉 애국계몽운동의 방략으로 삼은 것이다. 당연히 윤치호는 일제로부터 한영서원 운영이나 계몽운동 활동을 제약받았다. 그래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강하게 표현했다. 일제의 우민화(愚民化) 정책을 비판하고, 한영서원 선교사업 규제를 비판했다. 이는 일본이 개혁보다는 부패조장을, 독립대신 병합을 추진할 것임을 우려한 것이다. 스승 알렌(Dr.Young. J. Allen) 선교사에게 보낸 서한(1906년 12월 25일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소위 보호하에서 한국을 이전보다 열 배는 더 나쁘게 만들고 있는 일본인들은 진정으로 한국인들을 돕는 남녀들의 유일한 단체이기 때문에 선교부를 싫어한다. 일본은 한국인들이 뭔가 배우는 것을 원치 않는다.(중략) 일본인들은 그들의 나라와 영국 그리고 미국에서는 기모노를 입은 천사들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에서는 독사들이다.” 흔히 윤치호를 경계인(境界人)이라고도 한다. 이는 윤치호의 양면성에서 비롯된 것이데, 거칠게 정리하면 이런 경우다. 윤치호는 초기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고 관련 인사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내용을 알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사실을 일체 누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임시정부 측에 협조도 하지도 않았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윤치호는 충군애국 사상을 ‘찬미가’ 14장을 작사하는 1907년 까지 견지하였다. 그의 평생 꿈이었던 기독교 학교 설립으로 민중을 계몽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앞에서 정리한 윤치호의 생애사와 함께 충군애국관을 살핀 것은 창작 찬미가 3편을 이해하는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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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70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前 서울시국악관현악단 단장) ‘국악진흥법’은 제9조 ‘국악 향유 문화 활성화 부분’의 ②항에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국민에게 국악 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국악 교육프로그램을 개발 · 보급하는데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제5조의 ‘기본계획 및 시행계획의 수립’ 등 ②항 기본계획의 3.호에 국악 교육 및 국악향유 증진에 필요한 사항이 포함되어야 한다 라고 되어 있다. 위의 ‘국악진흥법’의 사항을 뒷받침하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최근 발언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11월 1일 오후 서울 성동구 에스팩토리에서 '2023 대한민국 문화예술교육 축제'가 개최되었다. 이 행사는 다음달 12월 1일까지 에스펙토리와 국립중앙박물관 등 전국 곳곳에서 열린다. 문화예술교육의 성과를 공유하고 확대하기 위해 열리는 전국 단위 축제로서는 처음이라고 한다. 이번 행사의 주제는 '국민 누구나 문화예술교육을 더 가까이, 더 깊게'이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이날 개막식 환영사에서 "아이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사회에서의 역할이 뭔지 눈 뜨고 서로의 관계를 알아가도록 하는데 예술교육의 가장 큰 의미가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예술 교육을 하는 건 아이들을 연극배우, 음악가, 무용가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며 문화예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연합뉴스 기사 참조) 유 장관은 "예술적 상상력과 창의성을 통해 자아를 깨닫도록 하는 예술 교육을 굉장히 하고 싶었다"며 서울문화재단 대표이던 2006년 '서울형 지역예술 교육 TA'(Teaching Artist·교육예술가) 사업을 시작하고, 2008년 문체부 장관으로 재임해 예술강사 지원 사업을 도입한 기억을 떠올렸다. 유 장관은 "처음 예술강사를 파견했을 때 선생님과 부모님이 반대했다"라고 말하며 "대학 가는 게 훨씬 중요하니 쓸데없는 짓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분위기가 굉장히 컸다."며, ”지금은 많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지지만, 아직도 우린 입시의 문턱에 딱 걸려서 중고등학교 예술 · 체육 교육은 손을 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결국 초등학교에서라도 집중해보자고 시작해 예술강사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쭉 이어졌다고 생각한다"며 "많이 좋아졌지만 선생님들에 대한 재교육, 예술 교육에 대한 방법론적인 교육과 연구가 더 필요하다. 정부의 긴축 재정으로 예술교육 부분도 예산이 삭감됐을 텐데, 뒷바라지를 잘해보겠다"고 말했다. 유인촌 장관의 말에 적극 공감을 표한다. 그런데 필자가 유 장관의 말에 공감을 표하는 이유는 행사의 주제 표어인 '국민 누구나 문화예술교육을 더 가까이, 더 깊게'라는 말과 유인촌 장관의 말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행사 주제 표어의 의미는 교육을 통해서 문화예술을 활성화하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 장관의 말은 창조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창의성을 통해서 자아를 깨닫도록 하는 예술교육이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전자(前者)인 행사 주제의 내용과 후자(後者)인 유장관의 말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180도 다른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국민 누구나 문화예술교육을 더 가까이, 더 깊게'라는 말이 무슨 말을 의미하는지 선뜻 와 닿지 않는다. 그동안 국민들에게 골고루 문화예술교육을 실시했다는 것인지, 그래서 앞으로 더 활성화시키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주제 자체가 어불성설이요 보여주기식 표어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활체육’과 혼돈하는 것은 아닌가. 논리가 맞지 않는다. 차라리 ‘교육’자를 떼어버리고 ‘국민 누구나 문화예술을 더 가까이, 더 깊게’라는 표현은 그래도 두리뭉실 넘어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교육’이라는 단어를 쉽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누가 누구를 교육한다는 말인가. 더구나 ‘문화예술’ 분야를 말이다. K컬처에 해당되는 분야가 세계화되는데 있어서 누가 교육해서 이루어진 성과라고 생각하는가. 특히 K컬처의 대표인 K팝은 어떤 특별한 공교육을 통해서 세계를 들썩이게 한 것이 아니다. 우리 국민들의 국민성(國民性)인 ‘흥과 끼’로 무장한 창조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유 장관의 "많이 좋아졌지만 선생님들에 대한 재교육, 예술 교육에 대한 방법론적인 교육과 연구가 더 필요하다."라는 말은 그래서 공감할 수 있고 신뢰감이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장을 모르면 나올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국악 예술강사들이 교육하는 초등학교 현장을 3개월 동안 모니터링해본 적이 있다.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모습과 학생들의 반응은 매우 뜨겁고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교과과정과 교과목의 내용 등 용어조차도 통일되어 있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원과 감독 기관인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세심하고 적극적인 예술교육에 대한 관심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유소년 시기부터 예술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시작하여 대학까지 연계된 체계적인 교육프로그램의 개발은 ‘인성교육’ 차원에서도 필요하다라는 것을 유인촌 장관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은 커리큘럼이 가장 핵심이다. 가르칠 수 있는 전문가들은 많이 양성했으나 일관되고 대중화할 수 있는 커리큘럼의 부재는 새로운 방법론적 교육과 연구를 요구받고 있다고 하겠다. 특히, 국악의 경우는 위와 같은 문제들을 ‘국악진흥법’ 제5조의 ‘기본계획 및 시행계획의 수립’을 통해서 실현되도록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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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국악관 설립 계획서(國樂館 設立 計劃書)1957년 국악박물관 건립을 계회한 기획서이다. 주체는 국악예술학교 박헌봉 교장이다. 매우 이른 시기 국악박물관 설립을 계획한 것은 당시 국악 진흥과 발전을 위한 의욕의 증거이다. 결국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국악의 대계를 설계한 이는 박헌봉 교장이 유일했다는 것이다. 모두 급급하고 앞가림에 내일을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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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0)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대나무 장구 소리가 유려하다. 몇 년 전이든가 담양에 들렀다가 들은 소리다. 날렵한 자세로 장구를 두드리는 춤사위가 곰삭았다. 무릎을 구부려 질겅질겅 스탭을 밟으니 소가 무논에서 쟁기질하는 모양이다. 굿거리다. 참새가 마당을 쪼르르 달리는 모양도 나온다. 휘모리다. 오금을 구부렸다가 폈다가 하는 동작들이 그침이 없다. 대삼 소삼이 어울리고 궁편 채편이 어울린다. 굵은 음이 잔 음을 에워싸며 교융(交融)한다. 왼쪽과 오른쪽이 혼융하고 큰것과 작은 것이 교섭하며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견준다. 결이 다른 음들을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라 스스로 낸 음마저도 다시 끌어안는다. 대나무로 만든 장구여서 그럴까? 그렇지 않다. 우리 음악 전반이 그렇다. 음악만 그러할까? 예컨대 활도 굽은 모양에 따라 밭은오금이 있고 한오금이 있으며 먼오금이 있다. 줌통(손잡이)으로 끌어 당긴 짧은 곡선을 밭은오금이라 하고 양무릎을 굽힌 듯 내민 부분을 한오금이라 하며 정강이로 내리는 부분을 먼오금이라 한다. 활의 줌피를 떠난 화살의 향방은 활대의 곡선이 지어내는 춤사위로부터 결정된다. 무릎의 춤사위와 연통하는 용어들이다. 대나무를 자기 땅의 터-무늬로 상정하는 담양이어서 그랬을까. 웅비하는 가락들이 병풍산을 에워싸고 추월산을 넘나든다. 필시 이 가락들이 용소를 지나고 수많은 용자(龍字) 돌림 영산강을 내달려 광활한 남도의 갯벌에 이르렀을 것이다. 궁금해진다. 죽장고의 출처. 요고(腰鼓)에서 청자장구(靑瓷鼓)까지 대나무로 만든 장구(長鼓)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그것을 추적하기는 어렵다. 요고나 청자 장구처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확인한 적이 없다. 근자에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도 확답하기 어렵다. 광주시 지정 인간문화재 이복수 명인에 의하면, 오래전 담양에 들렀더니 일부 어르신들이 대나무로 장구를 만들어 사용하더라고 했다. 죽장고의 내력이 근자의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장구뿐 아니라 대나무로 만든 악기의 출처는 다양하다. 젓대(大笒)의 기원으로 삼을 만한 기록은 삼국유사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이다. 신라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짓고 용이 출입할 굴을 뚫어 바닷가에 이견대를 지었더니 하루는 거북이 머리 같은 돌덩이가 동해로 떠밀려 왔다. 그 돌배에는,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대나무가 있었다. 이를 취해 피리를 만들어 불었더니 천하가 태평해졌다. 그래서 세상의 시끄러움(萬波)을 잠재우는(息) 악기라 해서 만파식적이라 이름 붙였다. 효소왕 때까지 이 이적이 거듭 일어나니 만만파파식적이라 고쳐 불렀다. 대나무로 만든 피리만 그러할까?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는 대나무의 은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타악기로 말하면 장구가 대표적이다. 장구의 가장 오래된 형태는 요고(腰鼓)다. 여러 연구자에 의하면 <고려기>, <서량기>, <구차기>등에 요고가 등장한다. 고구려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집안 17호분 등 다양한 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이나 평창의 화엄사나 상원사 범종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모래시계를 연상하면 쉽다. 허리처럼(腰) 잘록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실제 허리에 차고 연주를 한다. 음양의 철학을 담은 악기 장구 칠머리당굿을 포함한 제주도의 무속음악이나 별신굿을 주축 삼는 동해안 무속음악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요고를 떠올리게 하는 작은 사이즈의 장구를 사용한다. 사이즈가 길고 통이 넓은 교방(敎坊) 장구의 음악과는 차이가 있다. 고고학적 유물 유적에서 요고를 확인할 수 있다. 진도 등지에서 출토된 청자 장구는 요고보다 사이즈가 크다. 고려 이후의 일일 것이니 적어도 그 이전 시대의 음악과 차이가 난다는 점 알 수 있다. 크고 긴 장구를 바리톤에 비유한다면 요고류의 악기들은 소프라노에 비유할 수 있다. 신창동 출토 두 개의 고깔북도 나는 장구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중이다. 울림과 공명의 혼융, 세상의 시끄러움을 잠재우는 중용의 소리, 그 조화의 철학을 체화시킨 이들이 이 땅 마한인들이고 한반도 사람들이라는 전제에서 그렇다. 그렇지않고서야 어찌 남도땅에서 판소리나 산조음악을 시작할 수 있었겠는가. 지난 2014년 진도 명량해협에서 건져 올린 '이형도기', 허리가 잘록한 아령 모양이어서 그릇 받침 정도로 추정하던 유물이다. 이를 이복수 명인이 요고로 해석했다. 근거는 울림통, 울림턱, 자웅성 등 세 가지다. 울림통의 가운데가 잘록한 것이 요고다. 양 주둥이 안쪽에 돌출된 부분은 소리를 넘기는 공명턱이다. 예컨대 궁손에서 출발한 공기의 파장이 채손에 닿고 돌아와 이 턱에 부딪힌다. 반대로 챗손에서 출발한 공기의 파장은 궁손의 공명 턱에 부딪혀 화음을 만든다. 양쪽 주둥이의 크기 또한 다르다. 큰 편이 굵고 낮은 소리를 내며 작은 편이 가늘고 높은 소리를 낸다. 이 자웅(雌雄)의 소리가 혼융하여 장구의 음색과 음악을 만들어낸다. 조화로움이며 균형이며 중용이다. 부부나 연인의 밀접함을 비유할 때 늘 금슬(琴瑟)에 비유한다. 금(琴)은 거문고의 하나이고 슬(瑟)은 기타와 비슷한 비파의 하나다. 두 악기가 서로 음률을 간섭하고 교직하여 천상의 음악을 만들어낸다. 장구 또한 음양의 조화를 꾀해 그 미학을 완성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음악의 요체다. 담양의 터-무늬가 대나무라는 점에서 죽장구의 연원을 올려잡아 추정할 수 있다. 얼멍치(어레미)의 대나무 테를 버리지 않고 이른바 법고(벅구, 버꾸라고도 한다)로 만들어 활용했던 조상들의 생활 음악을 전제하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만파식적처럼 장구의 울림은 세상을 다스리는 기운, 세상과 공명하는 에너지를 가졌다. 장구의 리듬, 대삼소삼과 오끔조끔의 미학 엿타령을 잘 부르는 조오환 명인은 '오끔조끔'이라 한다. 오금에서 온 말일텐데 춤사위의 크고 작은 것, 울리는 소리의 크고 작은 것들이 서로 융기하고 침강하는 조화를 말하는 것이다. 국악계에서는 대삼소삼이라 한다. 대삼은 양(陽)적인 것, 소삼은 음(陰)적인 것이다. <주역>의 계사전에는 남성을 이루는 것이 건도(乾道)요, 여성을 이루는 것이 곤도(坤道)라 한다.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불과 물, 낮과 밤 등 모두 대대성(對待性)의 역리를 주창한 이론들이다. 주의할 것이 있다. 남자를 하늘에 비유하고 여자를 땅에 비유한 것이 지위의 우월함이나 격의 고저나 상하를 말함이 아니다. 대칭은 대등한 것을 넘어 비로소 하나가 되는 이치를 말한다. 낮에 둘이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는 만파식적과도 같다.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고 내가 있음으로 네가 있다는 상보의 원리다. 여기에 중용이 있고 조화가 있으며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우리 음악의 철학이 있다. 하지만 음악은 변한다. 마치 지금의 가요가 100여 년 전의 판소리나 민요와 다른 것과 같다. 예컨대 6~70년대를 횡단하던 기타(quitar)는 어떠한가. 악기도 바뀌고 음악도 바뀌고 기호 또한 바뀐다. N세대 Z세대가 부모 세대와 향유하는 음악이 다르듯, 이전 시대라고 해서 동일한 기호가 유지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시대를 횡단하는 음악의 근간은 균형의 도모, 장단과 화음의 지향에 있다. 그래서다. 담양의 대나무장구, 그 출처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 만들어지고 향유된다는 점을 오히려 주목한다. 올곧고 청정한 기운 실어 어떤 시대적 공명을 이루어 낼지. 담양 사람들의 지혜가 기대된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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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해외춤기행. 스리랑카의 불교문화와 전통춤(1)의식적이며 가면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 2018년 1월3일 9시35분. 스라랑카의 불교문화유산을 탐사하고 대표적인 캔디안댄스(Kandyan Dance)와 전통춤들을 살피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이번 배낭여행도 만만치 않아 하루를 넘기는 여정으로 6시간 만에 도착한 태국 방콕에서 환승하기 위해 9시간을 더 지체했다. 다시 스리랑카 콜롬보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Bandaranaike International Airport)에 3시간 후 한 밤중(00:10, 한국시간 03:40)에 도착하여 1박을 하고 다음날 전용버스로 6시간에 걸쳐 아누라다푸라에 도착(19:30)하였다. 스리랑카의 첫 왕국, 아누라다푸라의 이수루무니아 사원 불교유적과 춤유산 1월5일 아침 일정대로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불교유적답사에 나섰다. 신성도시(神聖, Sacred City)인 아누라다푸라는 BC 5세기~AD 8세기 신할리족(Sinhalese族, 인도 아리안계) 왕국의 수도로 ‘깨달음의 나무(tree of enlightenment)’인 보리수(Sri Ma Bodhi) 주변에 건설되었다. 1,300년 간 실론(Ceylon, 지금의 스리랑카)의 정치적·종교적 수도였으나, 933년경에 인도로부터 타밀족(Tamil族, 인도 드라비다계)이 침입함으로써 황폐해졌다. 그 후 많은 탑(Dagoba, stupa, 파고다, 塔婆)과 사원(寺院)터, 석조 연못 등 유적들은 한동안 정글 숲에 묻혀 있었으나 19세기에 복구되어 1982년 UNESCO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세계의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첫 탐방 유적은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 이수루무니아 바위사원(Isurumuniya rock temple)이었다. 연못 뒤의 바위 앞뒤에 건립한 사원과 코끼리와 불상의 부조상과 보기 드문 와불(臥佛)과 스님상들이 있다. 와불상(臥佛像)과 열반상(涅槃像)의 차이는 발가락을 모은 모습으로 구분하는데 오른쪽 발가락이 약간 위로 올라간 것은 열반상이고 나란히 된 것은 와불상이다. 이곳 이수루무니아 박물관(Isurumuniya museum)사원박물관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화강암 조각 솜씨가 뛰어난 ‘연인상(Lovers)'이다. ‘춤추는 난쟁이’ 바마나(Vamana) 신화와 스리랑카 부조상의 특징 항상 춤추는 조각상이나 벽화가 있는지를 눈여겨 찾던 중 반갑게도 ‘춤추는 난장이(Dancing Dwarfs)’ 조각상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으로 봐서는 파괴 또는 폐허화된 힌두사원의 잔해인 것 같았다. 비록 난장이 모습으로 보이지만 힌두신 비슈누(Vishnu)의 다섯 번째 화신(avata)이었다. 무릎을 굽힌 스리랑카의 전통춤 자세에다 양팔을 들고 어깨를 치켜든 기본춤사위와 눈을 크게 뜬 모습까지도 캔디안댄스(Kandyan Dance)와 유사하다. 또한 압사라(Apsara)는 ’춤추는 여신‘ 또는 ’천상의 무희‘라는 뜻으로,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회랑 벽면에 새겨진 군상인데 스리랑카에서도 엿보인다. 다만 탑면의 높이 제한에 따라 한쪽으로 쪼그려 앉은 조각상이자만 상하체를 편 자세로 살펴보면 압사라의 춤사위를 알 수 있다. 춤추는 난장이 남녀상은 하반신이 동물하체처럼도 생겨 반인반수상과 같기도 하다. 난쟁이 바마나(Vamana)에 대한 힌두경 리랑카전 바마나 푸라나(Purana)의 기록에 의하면 비슈누(Vishnu)의 다섯 번째 아바타(avata)로 최초로 인간으로 육화(肉化)한 화신(化身)이라 한다. 그리고 난쟁이 바라마는 늘 나무 우산을 들고 다니는데, 자비로운 발리 왕의 궁전을 찾아가 세 걸음만큼의 땅을 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마하발리는 왕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낙한다. 그러자 곧바로 바라마는 자신의 본 모습(비슈누)을 내보이며 거대한 발걸음으로 첫 걸음으로 천상 세계에서 지상 세계까지 건너고, 두 번째 걸음으로 지상 세계에서 지하 세계를 성큼 넘어섰다. 그러자 약속을 거둘 수 없게 된 마하발리는 세 번째 걸음 자리에 자신의 머리를 내밀었다. 바마라는 마하발리에게 겸손함에 대한 대가로 영생불사의 권능을 주었으며 해마다 마하발리가 왕국을 찾아오는 걸 허락하였다고 한다. 다음 그림들과 조각상은 난쟁이 바마나(Vamana) 힌두신화의 내용이다. 그림들은 대체로 마하발리왕에게 세 걸음 땅을 요청하는 형상, 수락 후 비슈누 신으로 현신(現身)하여 천상에서 지상과 지하세계로 한걸음 하는 형상과 발리 왕이 머리 조아리는 형상 등으로 나타난다. 도상무용학적으로 볼 때 동양춤에서는 볼 수 없는 발레나 현대무용의 쳐든 특이한 발춤사위로 보인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불교사찰에서 보이는 난쟁이들은 사원이나 탑의 기단석(基壇石) 등에 주로 보이는데, 본체를 받쳐주는 역할이거나 억눌린 모습이나 귀여운 난쟁이들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악마들로 가둬놓거나 짓누른 모습(Kelaniya 사원, 콜롬보)으로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인도의 힌두교와 신화가 스리랑카에 전래되었다가 불교문화가 정착하여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힌두신의 존재는 미약해지고 악마신이나 단순한 난쟁이로 변화되어 춤추는 난쟁이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천상의 무희’ 압사라춤의 의미와 지역 특징 박물관에 전시된 부조상 압사라(apsara)는 ‘천상의 무희’라는 뜻으로 인도신화에는 젊고 우아한 초자연적인 여성으로 특히 춤 예술이 뛰어나 신들의 궁전에서 간다바스(Gandharvas)가 만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신들과 남자들을 즐겁게 하는 천사로 알려져 있다. 압사라춤으로 꽃을 피운 나라는 캄보디아이다. 사원에는 수많은 압사라 부조상이 있으며 황실 발레라고도 하며 천상의 춤을 추는 신성한 사람들로 여겨져 왕궁에서 살았다고 한다. 압사라 춤은 손동작이 다양하고 화려하여 습득하기 어려운 춤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스리랑카의 압사라는 힌두문화의 쇠락과 함께 미미할 수밖에 없었고 불교문화에 융해되어 버렸다. 따라서 스리랑카의 압사라 유물 역시 아누라다푸라의 이수루무니아 박물관(Isurumuniya museum)의 전시품에서나 겨우 흔적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반인반수(半人半獸)춤 킨나라(kinnaras)의 의미 춤과 관련한 또 하나의 부조상 유물은 킨나라(kinnaras)로 불교 신화와 힌두교 신화에는 전형적인 연인, 천상의 음악가, 반인반마(半人半馬)이며, 동남아시아(특히 태국)에서 자비로운 반인반조(半人半鳥)로 인간의 안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특히 여성은 춤, 노래 및 시로 유명하며 여성의 아름다움, 은혜 및 성취를 상징한다. 하지만 힌두문화의 전래보다 불교문화가 꽃피운 스리랑카에서의 힌두신화와 종교적 색채는 엷어지고 미약한 흔적만이 박물관에 소장된 모습이었다. 아누라다푸라의 다양한 사원(Temple, Vihara)과 탑(Dagoba)들 이어서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새하얀 루반벨리사야 다고바(Ruvanvelisaya Dagoba)였다. 눈부시고 거대한 '위대한 탑(Great Stupa)'이라 일컫는 탑으로 높이가 무려 91m에 달하는 이 탑은 반원 모양의 탑신 위에 우리 석탑의 상륜에 해당하는 부분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탑 주변은 불교에서 평화와 정의를 상징하는 코끼리 1900마리를 조각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세 번째로 아바야기리 비하라(Abhayagiri Vihara) 및 다고바(Dagoba)를 찾았다. 아누라다푸라에서 가장 큰 사원이고 대규모 사원으로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사원이다. 승원의 교육기관으로 한때는 5천 명 이상이 거주했다고 한다. 비하라(vihara)란 승려들의 수련을 하는 참선공간으로 돌침대와 대중들에게 설법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뜻한다. 스리랑카 국민 70%가 불교를 믿는데 사원이나 불탑이나 보리수에는 흰옷 입은 이들이 꽃을 올리고 기도하는 것이 일상처럼 보였다. 끝으로 찾아간 곳은 제타바나 다고바(Jetavana Dagoba)였다. 마하비라하(Maha vihara)의 명에 따라 120m 높이로 건축되어졌다. 그 규모는 그 당시 세계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 2개 다음으로 높은 건축물이었으나 지금은 83m 정도로 낮아졌다. 두 번째 수도 폴론나루와(Polonnaruwa)의 불교문화유산 첫 번째 수도 불교사원 답사를 마친 일행들은 전용차량으로 두 번째 수도 폴론나루와(Polonnaruwa)로 이동하였다. 스리랑카 싱할라 왕조는 기원전 377년부터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서 약 1,400년간 풍요를 누렸다. 그러나 9세기에 인도 타밀에 촐라 왕조(Chola Dynasty)가 들어서면서부터 힌두세력의 침략이 잦아지고 11세기에 접어들어 동쪽으로 약 80km 떨어진 폴론나루와(Polonnaruwa,1153~1186)로 두 번째 수도를 옮겨 180년간을 유지했다. 12세기에 파라크라마바후(Parakramabahu) 1세가 만든 전원도시(garden-city)의 놀라운 고대도시는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파라크라마바후 1세는 3중벽으로 된 성곽 안에 굉장한 전원도시를 건설하여 궁전과 성지들을 그의 치세 기간에 만들었다. 스리랑카의 전통춤 유형 스리랑카의 전통춤(Natum)을 개괄적으로 분류해보면 오랜 세월 왕실에서 춤과 음악으로 사랑을 받으며 전승해온 고전춤(classic dance), 민간에서 수확과 생활을 표현하는 민속춤(folk dance), 주로 가면을 쓰고 치병의식으로 추어왔던 의식춤(ritual dance)으로 장르를 구별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고전춤은 크게 3가지 주요 지역 스타일이 있다. ① 캔디안 댄스(Kandyan dance, Uda Rata Natum), ② 파하타 라타 댄스(Pahatha Rata Natum, Low Country Dance), ③ 사바라가무와 댄스(Sabaragamuwa Natum)가 전승되고 있다. ① 캔디안 댄스(Kandyan dance, Uda Rata Natum)캔디안 댄스가 스리랑카춤의 대표적인 춤으로 알려진 것은 세 번째 왕국이었던 캔디지방에서 오랜 동안 왕실을 중심으로 현재까지 오롯이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리랑카의 중부 고원지대(hill Country)인 캔디지역에 고유하고 다양한 춤 형식들을 포괄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까지 널리 전파되어 있기도 하다. 캔디안 댄스의 기원은 캔디안 지역에서 여전히 행해지는 스리랑카 ‘악마의 춤(Devil Dance, Kohomba-kankariya)’라고 불리는 의식춤 형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악귀의 저주병(Divi Dosa, 표범의 저주)에 괴로워 병약해진 판두바사디바(Panduvasadeva) 왕을 치료하기 위해 샨크라(Śakra, 帝釋天) 신의 요청으로 세 명의 샤먼이 인도에서 스리랑카 섬에 왔다. 왕이 악귀가 몸에 실려 매일같이 악몽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말하자, 샤먼들이 코홈바 카나리야(Kohomba kankariya)를 연행하자 악령이 사라졌다. 그 후 많은 원주민들이 이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의식춤 형식의 세련미를 갖추고 체계화되어 나중에 ‘우다라타 나툼(Udarata natum)’ 즉 Kandyan dance’ 형식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나 주로 남성들만이 참여하였다. 오늘날 Kandyan dance는 종교적인 화려한 행렬과 사원의식 및 모든 축제 행사에서 연행되고 있다. ② 파하타 라타 댄스(Pahatha Rata Natum, Low Country Dance, Ruhunu Natum)파하타 라타 댄스(Pahatha Rata Natum)은 지역을 구별하는 명칭으로 신할리족(Sinhalese)의 남부 평원의 저지대(Low Country)춤이다. 이는 ‘악마의 춤(devol madu, devil dance)’이라고도 불리며 악마나 신비한 존재의 퇴마의식(exorcism ritual)과 관련이 깊다. 춤의 내용은 조류, 악마, 파충류 등 다양한 18개의 가면을 착용하고 인체에서 여러 질병을 쫓아내기 위해 연행하기에 ‘다하 아타 사니야(Daha Ata Sanniya) 또는 ’사니 야쿠마(Sanni yakuma, 질병 퇴치, 영적 구제의 뜻)’로 부른다. 이 의식은 환자에게 질병을 옮길 것으로 생각되는 악마를 부르며, 인간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악귀를 몰아내는 내용으로 밤새도록 연행하는 것으로 마을에서 가장 즐거운 행사 중 하나이다. 흔들리는 손놀림, 넓고 각진 발놀림, 독특한 드럼 리듬과 의상은 루후누(Ruhunu) 댄스의 특징 중 일부이다. ③ 사바라가무와 댄스(Sabaragamuwa Natum)사바라가무와(Sabaragamuwa)춤은 라트나푸라(Ratnapura)와 켈라리(Kegalle)지역에서 전승되며, 초기에는 초기에 캔디안 왕국에 속한 지방이었다. 캔디안 댄스 형식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저지대(Low Country)춤 양식도 흡수하게 되어 캔디안 댄스와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사바라가무와 전통에는 현지 사람들이 존경하는 샤먼(Saman)신의 숭배와 관련이 있으며, 독특한 의상, 노래, 드럼 비트 및 드럼 스타일이 있다. 춤사위도 손이 머리 위로 결코 들어올려지지 않지만 대신 팔이 몸에 비스듬히 뒤로 젖혀지는 특징이 있다. 또한 반주악기인 다우라(daula)도 양쪽에서 같은 소리를 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전통춤은 대체로 무릎이 반쯤 구부러져 바깥쪽으로 벌려진 포즈이며, 팔은 가슴과 나란히 팔꿈치에서 구부러진 모양으로 매우 의식적이며 가면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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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설장고 명인 김병섭 선생 사진 및 기사자료김병섭 선생은 5, 60년대 설장고로 활동한 명인이다. 특히 70년대 초 까지 대학가와 외국인에게 풍물을 전수하고 풍물패를 육성한 인물이다. 국악신문 창간자 김호규 사장의 부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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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첫눈처럼 내가 가겠다/이미나널 품기 전 알지 못했다 내 머문 세상 이토록 찬란한 것을 작은 숨결로 닿은 사람 겁 없이 나를 불러준 사랑 몹시도 좋았다 너를 지켜보고 설레고 우습게 질투도 했던 평범한 모든 순간들이 캄캄한 영원 그 오랜 기다림 속으로 햇살처럼 너가 내렸다 널 놓기 전 알지 못했다 내 머문 세상 이토록 쓸쓸한 것을 고운 꽃이 피고 진 이곳 다시는 없을 너라는 계절 욕심이 생겼다 너와 함께 살고 늙어가 주름진 손을 맞잡고 내 삶은 따뜻했었다고 단 한 번 축복 그 짧은 마주침이 지나 빗물처럼 너는 울었다 한 번쯤은 행복하고 싶었던 바람 너까지 울게 만들었을까 모두 잊고 살아가라 내가 널 찾을 테니 니 숨결 다시 나를 부를 때 잊지 않겠다 너를 지켜보고 설레고 우습게 질투도 했던 니가 준 모든 순간들을 언젠가 만날 우리 가장 행복할 그날 첫눈처럼 내가 가겠다 너에게 내가 가겠다 추천인:기찬숙(칼럼니스트) "가끔은 애절한 노래를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첫눈을 기다리는 오늘 같은 날이 그렇다. 영화의 OST인데, 절절하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막연하지만 마지막 절 ‘첫눈처럼 내가 가겠다/ 너에게 내가 가겠다’가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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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영화‘아리랑’ 제3편 ‘말문 연 아리랑’ 기사 자료일제강점기 나운규 감독/출연 영화‘아리랑’이 1926년 10월 1일 개봉 제1편 아리랑 말고도 2편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제1편은 ‘아리랑’, 제2편은 ‘아리랑, 그 후 이야기’, 제3편은 ‘말 문 연 아리랑’이다. 이 기사 자료를 통해 3편이 있다는 사실과 그 제명이 ‘말 문 연 아리랑’이란 사실을 알려 준다. 2026년은 영화‘아리랑’ 개봉 100년이 된다. 한국영화의 역사를 빛낸 영화‘아리랑’ 개봉 백년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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