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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 연구] (27) 창작 3편 작사 배경으로서의 충군애국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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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 연구] (27) 창작 3편 작사 배경으로서의 충군애국 정신

  • 특집부
  • 등록 2023.11.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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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찬미가’ 수록 3편의 창작 작품은 윤치호 사고(思考)의 결정체이다. 10년에 걸친 공직자로서의 경력과 개인적인 성향이 반영되었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 편린들은 그가 남긴 일기, 강연, 글들에서 찾을 수가 있다. 이들은 창작 3편 주제의 지향성과 작품상의 응결성을 형성한 것이다. 작사자로서의 윤치호의 이해와 창작 3편의 이해, 그리고 창작 3편의 이해를 위해 충군애국정신을 살피기로 한다. 제14장이 작사 되는 1907년 이전의 기록들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시간이 지나면 조선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문명한 나라가 될 것이다. 2천만 겨레들도 어느 날엔가는 자유에 대해서 말하고 자유를 누릴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세대가 당했던 예속의 아픔을 웃음으로 회고할 날이 올 것이다. 고을마다 대학교가 세워지고 아름다운 반도 구석마다 궁전과 같은 집들과 깨끗한 거리, 그리고 기념탑들을 자랑할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 이 모든 꿈은 꼭 실현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1888년 9월 미국으로 건너가 그해 11월 테네시주 밴더빌트(Vanderbilt)대학 신학과정에 입학하여 1890년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조지아(Georgia)주에 있는 에모리(Emory)대학에 입학하여 1893년 9월에 졸업하였다. 위의 기록은 그해 졸업을 앞둔 4월 8일자 일기의 일부이다. 이를 통해 윤치호는 조국에 대한 미래상을 꿈꾸고 있었다. 이 희망은 제1장 3절에서 "아세아 낙토(樂土)가 이 아닌가”나 제14장의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길히 보존하세”에 담은 것이다.

 

민권관과 국가관

윤치호는 독립신문 같은 매체에 많은 글을 썼다. 이를 통해 민권관과 국가관을 살필 수 있다. "나라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두고 이름이니라”나 "나라라 하는 것은 일정한 토지를 두고 거느려 다스리는 주권(主權)에 복종하는 인민이 많이 모인 바이다.”라고 하여 국가는 영토, 인민, 주권이란 3요소로 구성된 통치조직임을 말하였다. 조선이 국가를 토지에 중점을 두고 군주의 사유물로 보는 시각과 다른 개념인 것이다.


① "나라는 백성으로서 근본을 삼고 일백관원을 백성을 위하여 배푸렀은 즉····.”

② "정부가 백성을 말미암아 된 것이요 백성이 정부를 위하여 난 것이 아니라···.”

③ "인민은 국왕과 양반을 위해 부림당하는 우마(牛馬)가 아니다.”

 

국가 발생의 연원을 말했다. 국가는 인민의 권리로 인민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창출된 것이란 주장이다. 바로 국민 주권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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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영문일기 육필 자료.

 

충군·애국관

 

윤치호는 일본이 명치유신으로부터 불과 30년만에 큰 발전을 한 것을 국민의 애국심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애국에 대해 많은 생각을 피력했다. 애국심이란 개인이 국가에 대해 갖는 애정 또는 헌신의 태도로서 전제주의 국가에서 국민에게 부과된 의무이며 덕목(德目)이다. 일기에서 당시 애국심을 표현한 대목이 다양하게 확인 된다.

 

"최선의 애국심은 조선의 관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학자들 간에 국왕에의 충성은 효성과 함께 한 쌍의 덕목이다. 그런데 대부분 조선의 관료들이 가진 최고의 충성 개념은 국왕이 커다란 위기를 맞았을 때 자기들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알고있다.”

 

군주에 의해 강요된 절대적 충성은 애국심과 다르다. 일정한 토지 내에서 역사 전통을 공유하는 국민의 일체감에서 발생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독립신문 논설 <나라 사랑하는 논>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애국심은 언어 풍속 종교가 동일하고 하해(河海) 산악(山嶽) 지계(地界)가 분리되어 있어 자연히 동일한 감정이 흥기하는 것(중략). 애국이란 국가의 공익(共益)과 동포(同胞)의 권리를 추구 한다····”

 

국민국가를 전제로 국왕에 대한 충성(忠誠)을 곧 애국(愛國)으로 동일시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충군애국’의 개념이다. 결국 윤치호의 충군애국은 선정(善政)을 전제로 한 충성은 존왕적(尊王的) 전통의식 속에서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강조한 것이 된다. 이는 당시 독립협회가 내세운 ‘수단으로서의 충군, 목표로서의 애국’과 일치하는 현실적 방략이기도 하였다.

 

독립관

 

윤치호의 기독교관은 유교의 인식과 대비된다. 이는 국가 독립관(獨立觀)에 반영된 듯하다. 유교는 윤리가 지배하는 동양 전통사회로 인간관계와 국제관계까지도 종속적 차등 관계로 보기 때문에 국가의 독립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바로 중국의 종속을 유교적 전통사회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고, 이로 하여 조선이 강국(强國)에 종속을 타성화 하여 독립정신을 약화시켰다고 인식했다. 청일전쟁으로 중국과의 종속관계가 해체된 것이지만 이는 우리 힘으로 된 것이 아니기에 일제의 또 다른 종속을 우려한 것이라고 본다. 일기, 독립신문, 서한에서 그의 독립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독립이라 하는 것은 스스로 믿고 남에게 기대지 아니하는 말이다.”

② "우리나라와 우리 주권이 만국과 동등해야 하며 어느 나라에도 열등해서는 안 된다.”

③ "나에게 조선의 독립 문제는 관심이 없다. 현재와 같은 정부라면 독립은 국가에 구원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한편 더 좋은 정부 즉 인민의 복지에 애국적이고 공감이 가는 이익을 가져다 줄 정부를 가진다면 종속도 진정한 불행은 아니다. 더욱이 건실하고 번영한 국가는 어느 땐가는 독립을 회복할 것이다. 그런데 빈약하고 무지하며 잔인할 정도로 이기적인 정부에 의하여 가난하고 무지하며 연약하게 된 인민, 그러한 인민에게 독립이 뭐 나을 것이 있겠는가?”

④ "국가의 국가 됨은 자립하여 타국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자수하여 일국에 정법을 시행하는 것”

⑤ "일본이 단독으로 그(러시아) 마력을 깬 것은 그 착상 자체가 당당한 것이다.(중략) 나는 황인종의 일원으로 일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 독립까지도 앗아가고 있는 일본을 증오한다.”

⑥ "일본의 괴로운 노예제 하에서 한국인들은 동족지배자에 의한 폭정이 이민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의 디딤돌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⑦ "누구든지 (을사)조약에 서명하는 자는 일본의 쓸데없는 약속에 나라를 팔게 될 뿐이다.”

 

을사늑약 체결이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조선 내부의 문제로 결과한 것이라고 보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독립상실을 황인종의 명예회복으로 상쇄하려는 일종의 보상심리의 발로로 볼 수 있는데, 침략세력에 대한 비판은 일본에 집중 되었다. 그러면서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독립의 상실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윤치호는 늑약이 체결 된 날 외무협판직을 사퇴했다. 외무대신 서리를 제안 받았지만 자신에게 "굴욕감과 동포에게 증오감을 준 것 외에 외부 본연의 임무는 사라졌다”며 거부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수중에 있는 내각(內閣)에서 보다 개인 자격으로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을사조약에 상소운동·외교운동·자결행위·의병전쟁 등의 방식으로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비판적 자세를 취하면서 개화파 인사들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국민사상계몽에 노력했다.

 

같은 해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신민회의 회원으로 평양의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또한 안태국(安泰國)과 더불어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청년운동을 적극 지도하는 한편, 신사상·신사업의 개발 등 실력양성을 주장하는 계몽강연 연사로도 활약했다. 이 시기 무엇보다 관심을 기울인 사업은 남감리교 선교부가 1906년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韓英書院/The Korean-Anglo Schoo)을 통한 교육사업이었다.

 

조국을 돕는 것, 이는 교육 문화 분야의 계몽운동에 전념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독립은 훌륭한 정부를 가져야 가능하며, 훌륭한 정부 없는 외교는 무용하다고 확신하며 실력 부족으로 상실된 국권의 회복은 실력양성만으로 가능하다고 믿었다.


계몽운동관

 

윤치호는 1905년 11월, 박제순이 을사늑약에 서명한 것을 놀라워하고 한규설의 서명 거부에 대해 찬사를 표했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은 오늘(을사조약) 오전 1시 또는 2시 경에 조용히 사라졌다.”라고 한탄하고, 국권회복운동 방략을 설정하였다. 그것은 ‘나’와 ‘적’의 힘의 격차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실력양성만이 국권회복을 가능하게 한다는 확신에서 이를 운동 핵심으로 삼아 전개하였다. 1905년 YMCA 운동에 이사로 참여하고, 1906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회장을 맡고, 1907년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 설립, 출판사 광학서포(廣學書鋪) 인수, 대성학교 명예교장 활동 등을 통한 민족실역양성 운동에 전념한 것은 주목해야 한다.

 

① "분노와 격정은 우리를 돕지 못할 것이다. 먼저 강대하게 되기를 힘쓰라 그리하면 다른 타국의 정의와 공정과 재산이 우리에게 더해질 것이다.”

② "미·불에 독립청원, 웨싱톤과 파리 거리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으려 한다.”

③ "어느 열강도 일본에 먼저 돌을 던질만큼 정의롭지 않다. 한국은 열강과 독립적 외교관계를 가진 과거 20년 동안에 세계의 동정을 살만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나라도 부패한 한국을 위하여 세계적인 강대국이 된 일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④ "獨立之道 在於自强 自强之道 在於內治修而外交信.”

⑤ "경제적 자립능력으로 개인적인 독립정신을 국가적인 독립사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⑥ "기독교적 분위기가 넘치는 마을, 근대적 지식이 교류되는 마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마을을 건설하여 건실한 지역사회 표본으로 제시하려 한다. 굶주린 민중의 피난처(a city of refuge)가 되게 할 것이다.”

⑦ "벼슬은 더할 생각도 나지 않았소. 이제는 도저히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근본적으로 국가를 개조할 뜻을 둠이 오히려 나으리라 하여 송도로 내려가 한영서원을 설립하였소.”

 

이상은 같은 이념의 실천이 한영서원 개교 등을 통해 국가 개조의 방책으로 교육 사업, 즉 애국계몽운동의 방략으로 삼은 것이다. 당연히 윤치호는 일제로부터 한영서원 운영이나 계몽운동 활동을 제약받았다. 그래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강하게 표현했다. 일제의 우민화(愚民化) 정책을 비판하고, 한영서원 선교사업 규제를 비판했다. 이는 일본이 개혁보다는 부패조장을, 독립대신 병합을 추진할 것임을 우려한 것이다. 스승 알렌(Dr.Young. J. Allen) 선교사에게 보낸 서한(1906년 12월 25일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소위 보호하에서 한국을 이전보다 열 배는 더 나쁘게 만들고 있는 일본인들은 진정으로 한국인들을 돕는 남녀들의 유일한 단체이기 때문에 선교부를 싫어한다. 일본은 한국인들이 뭔가 배우는 것을 원치 않는다.(중략) 일본인들은 그들의 나라와 영국 그리고 미국에서는 기모노를 입은 천사들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에서는 독사들이다.”

 

흔히 윤치호를 경계인(境界人)이라고도 한다. 이는 윤치호의 양면성에서 비롯된 것이데, 거칠게 정리하면 이런 경우다. 윤치호는 초기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고 관련 인사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내용을 알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사실을 일체 누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임시정부 측에 협조도 하지도 않았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윤치호는 충군애국 사상을 ‘찬미가’ 14장을 작사하는 1907년 까지 견지하였다. 그의 평생 꿈이었던 기독교 학교 설립으로 민중을 계몽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앞에서 정리한 윤치호의 생애사와 함께 충군애국관을 살핀 것은 창작 찬미가 3편을 이해하는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