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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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산동애가’는 누가 지었을까? 여수MBC 다큐에서는 구례산동마을 사람들도 잘 모르거나 회피하던 노래를 홍순례의 구연을 통해 녹음할 수 있었고 이후 작곡가 이호섭이 편곡하여 복원하게 되었다 한다. 열아홉 백부전이 끌려가면서 지어 불렀다는 뉘앙스다. 하지만 주철희의 연구에 의하면 여순 당시 경찰신분이던 정성수가 퇴임 후 1961년에 백씨의 애달픈 사연을 담아 작사를 하고 김부해가 곡을 붙인 노래임을 알 수 있다. 지화자가 부른 마디마디가 간장을 도려낸다. 이후 금지곡이 되었기 때문일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가 홍순례의 구연을 통해 다시 소환된 셈이다. 노래의 소재이자 배경이었던 백순례가 지어 불렀다고 와전된 것은 망각의 간극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전형적인 트로트 계열의 곡인 까닭에 <부용산>처럼 가곡(歌曲)의 풍류가 보이지도 않고 한자 조어를 남발하는 가사(歌詞)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가슴에 쌓인 울분이나 한을 어찌어찌 풀어내는 우리네 민중들의 정서를 올곧이 담아냈기 때문이리라. 트로트를 얕잡아보거나 애써 전통음악과 변별하는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노래일수 있다. 하지만 노래 속에 담긴 내력을 훑어가다보면 창자가 끊어지는 단장(斷腸)을 넘어 숨이 끊어지는 절명(絶命)의 노래라는 점을 알게 된다. 어찌 선율의 유장과 리듬의 견고만을 들어 노래의 경중을 토로하겠는가. 국민가수가 된 송가인의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포섭하는 실상을 보라. 마디마디 포개진 혹은 다 말하지 못하는 굴절된 역사가, 사람들이 전율하는 선율과 장단의 행간에 겹겹이 쌓여 있지 않은가. 산동애가는 바로 그런 노래다. 작사하고 작곡한 사람이 있지만 민중의 역사를 올곧이 담아냈다는 점에서 민요라 할 수 있다. 동양의 가장 오래된 시경 이래의 전통을 추적해 그 의미를 읽어내는 지혜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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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여수MBC 다큐를 리뷰해 본다. 2001년 당시 62세였던 홍순례의 구술이다. "시집와서 들으니까 아가씨(백순례)가 모략에 의해서 죽었는데, 이쁘고 똑똑해서 (군인들이) 죽이기가 아깝다고 했다더라. 끌려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또 한 할머니가 덧붙인다. "잡혀갈 때 노래가 나왔을 거시. 죽은 무덤가서 노래가 나왔다고." 여순사건으로 오빠를 잃었다는 구연자 홍순례씨는 이 노래를 다 부르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고 만다. 백순례의 조카 백정규의 구술은 노래보다 더 애절하다. "백부님이 끌려가서 죽게 되었는데, 고모님(백순례)이 말하기를, 그래도 집안을 이을 아들 하나는 있어야 할 거 아니냐. 나까지는 죽어도 좋으니까 막내오빠만은 살려달라 애원을 해가지고, 사실은 우리가(백정규 등) 여기 있습니다." 진압군에 의해 끌려가 죽을 막내오빠를 살려내고 대신 잡혀가 죽은 백순례에 대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조카가 보관하고 있는 (백순례의) 큰오빠 결혼 기념사진에 찍힌 가족들의 시선이 아리다. 그저 무심히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는 시선들이 맞닿아 있는 곳은 어디일까? 가운데 어머니를 중심으로, 일본유학을 마치고 징용 나가 사망한 큰오빠,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에 의해 처형당한 둘째 오빠, 6.25때 행방불명된 언니, 자기 대신 죽은 동생에 대한 트라우마와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시달린 막내오빠 등이다. 사진의 맨 왼쪽이 백순례인데, 노리개처럼 이쁘다 하여 아예 백부전으로 불렸다. 부전은 색 헝겊을 둥근 모양이나 병 모양으로 만들어서 두 쪽을 맞대고 수를 놓기도 하고 다른 헝겊으로 알록달록하게 대기도 하여 끈을 매 차고 다니던 여자 아이들의 노리개를 말한다. 조카며느리 박씨의 진술에 의하면 1987년 사망한 어머니 고씨가 치매를 앓을 때 증손녀를 '부전아, 부전아!'하고 부르시곤 했다더라. 치매에 들어서야 막내딸의 환영을 소환한 어머니의 무의식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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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노래 '부용산'이다. 박기동이 노랫말을 쓰고 안성현이 지었다. 안치환과 윤선애가 불러 세간에 알려졌지만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 지난해 본 지면을 통해 '산동애가'를 다루면서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다. 부용산 가사를 빼닮은 절명(絶命)의 노래라는 카피를 붙였던 이유가 있다. 마디마디 포개진 혹은 다 말하지 못했던 굴절의 역사, 사람들이 전율하는 선율과 장단 행간에 겹겹이 쌓인 질곡을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그 중심에 월북이란 오명을 달고 있는 안성현이 있고 좌익이라는 딱지를 달고 평생 감시 속에서 살았던 박기동이 있다. 박기동은 천재 문학소녀를 위해 초빙될 만큼 출중한 문학인이었다. 안성현은 가야금산조의 중흥조라고 하는 안기옥의 아들이기도 하다. 훗날 박기동은 '부용산'이라는 책을 냈다. 나주문화원에서는 '안성현 백서'를 출간했다. '백서'에 의하면, 김 종 시인 등 숱한 연구자들에 의해 광폭의 추적과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가 이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해방 직후 1948년, 지금의 목포여자고등학교 전신인 항도여중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있었다. 천부적인 문학소녀였던 모양인데 당시 교장이던 조희관이 이 학생을 위해 박기동을 교사로 초빙한다. 당시 목포는 수많은 문학인, 예술인들의 에너지가 폭발되는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근대문학의 시작을 목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만큼 다종의 문학인들이 배출되었고 각종 문예대회가 열렸으며 예술공연이 펼쳐졌다. 박기동의 '부용산'(삶과꿈, 2002)에 의하면, 미네르바 다방 등지에서 박화성, 조희관 등 문학인들, 시인들, 평론가들, 음악가, 미술가 등 예술인들이 날이면 날마다 문학을 논하고 시대를 말하며 노래를 불렀다. 각종 다방이며 술집이며 공적 공간들이 르네상스기의 살롱 역할을 한 셈이다. 여기에 '항도여중 예술제'가 큰 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박기동과 함께 안성현도 채용되었다. 가야금의 중흥조 안기옥의 아들이어서인지 천부적인 작곡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부임한지 8개월여 뒤 김정희가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이팔방년 열여섯 나이였다. 안성현은 박기동의 습작노트에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발견하고 곧바로 곡을 붙인다. 아끼는 제자의 죽음을 육자배기 선율에 얹어 절절한 심중을 담아낸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래 '부용산'이다. 물론 이 시는 박기동이 항도여중에 부임하기 전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썼던 습작이다. 여수 돌산이 고향인데, 큰누이 박영애가 어린 나이에 벌교로 시집갔다가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방년 스물 넷 꽃다운 나이였다. 안성현이 곡을 붙이자 박기동은 마지막 구절을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 노래를 제망매가에 견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배금순이라는 상급학생에 의해 초연된 이 노래는 항도여중 학생들의 입에서 입을 통하여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애틋한 사연들이 날개를 달고 스토리텔링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빨치산, 월북, 좌익감시 등 파란만장한 분단의 시절들이 눈물과 핏물 속에서 구겨지고 찢겨지며 오늘에 이른 것,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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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남도가 낳은 당대 최고의 명창 임방울의 생애를 '사단법인 임방울국악진흥회' 자료를 인용해두고 공부자료로 삼는다. 1905년 4월 20일(호적 자료) 광산군 송정읍 도산리 679번지(현 광주 광산구)에서 아버지 임경학과 어머니 김나주 사이에서 4남매 중 셋째로 출생했다. 연구자에 따라 출생년도가 조금씩 다르거나 5남매, 8남매, 9남매 등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본명은 임승근(林承根)이다. 어머니가 50이 넘어 낳았다고 해서 '쉰둥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방울방울 잘 논다 해서 '방울'이라 했다거나 임방울의 소리를 들은 어느 선생이 '너야말로 은방울이다'라고 해서 예명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 김종수와 혼인했다가 이혼했고 박오례와 혼인하여 임오희, 임순희, 임만택을 낳았으며 한애순과의 사이에 임달희, 전상순과의 사이에 임별희 등을 두었다. 협률사와 원각사의 감독이었던 김창환이 외삼촌이다. 1916년 박재실 창극단에 들어가 흥보가를, 1918년에는 공창식에게 소리를 배운다. 1921년 유성준에게 성원목, 조몽실, 오수암 등과 함께 적벽가와 수궁가를 배운다. 1922년에 지리산에서 독공을 하고 1929년 매일신보사 주최 조선명창연주회에서 쑥대머리를 불러 일약 명창의 반열에 오른다. 1933년 콜롬비아에서 음반을 취입하는 등 1941년 오케이까지 많은 음반을 낸다.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활동했다. 동일극단 참여, 수궁가 완창, 적벽가 완창 등을 했고 노래를 하다가 무대에서 쓰러져 투병 중 1961년 8일 서울 자택에서 운명했다. 국악예술인장으로 치룬 장례 풍경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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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2)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판소리 단가(短歌)가 중모리장단으로 구성된 것에 비하면 ‘추억’은 진양조장단으로 되어 있으며 마지막 소절만 중모리로 되어 있다. 일반적인 단가가 아니라는 뜻이다. 1929년 매일신보사 강당 내청각에서 열린 '조선명창대연주회'에 참석하여 ‘쑥대머리’를 부른 이후 임방울의 소리는 나라를 울리는 소리로 부상한다. 당시 120만 장의 음반이 팔렸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임방울의 목구성 자체가 남도의 계면조(서양음악으로 말하면 단조의 슬픈 소리)에 특화되어 있어서일까?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으로 해석되었던 이 정서는 그리움 혹은 기다림의 정서라 말할 수 있다. 문학으로 말하면 고려가요 가시리에서 김소월의 시적 정조까지, 음악으로 말하면 남도의 대표곡 육자백이에서 연정을 노래한 각양의 트로트들까지 이어진다고나 할까. 비판받고 있기는 하지만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가 우리네 정서 자체를 '한(恨)'으로 표방했던 한 시기의 컨텍스트, 쑥대머리와 추억은 이러한 시대적 정서를 강하게 대변해주는 노래였다. 이보형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이 이를 주목한 바 있다. 임방울의 ‘추억’은 사실 판소리 단가라기보다 어쩌면 육자백이에 가까운 노래일 수 있다. 망처의 정서가 그렇고 단조로우면서도 시김새를 강조하는 선율이 그러하며 진양조라는 장단이 또한 그러하다. 그렇기에 나는 임방울의 추억을 상실, 애환과 후회 혹은 기다림과 그리움 등의 정서를 대변하는 매우 오래된 서사라 해석하며 노래의 구성 또한 육자백이로부터 판소리로 이어지는 가장 오래된 장치라고 말해왔다. 영원한 라이벌이라고 했던 동초 김연수와 비교해보면 이 점이 더 명료해진다. 일제강점기 이후 가장 뚜렷한 판소리 창자로 존립한 두 거목의 소리세계가 이성과 감성, 이론과 예술 등 대칭구조를 비교적 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김혜정의 연구에 의하면 김연수는 분명한 악조의 선택과 성음의 표현, 분명한 가사전달과 너름새의 사용 등 판소리 이론에 강한 면모를 보여준다. 반면 임방울은 당대의 대중들이 애호하는 계면조와 빠르고 흥겨운 속도감, 감성을 자극하는 소리 구성 등 대중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비교의 가부, 선악, 혹은 우위가 아니라 시대적 정서와 문화적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유성기 음반으로 대표되었던 오디오라는 기술이다. 1920년 7월 경성 라디오방송국의 개국과 1928년 이후 유성음반기의 발매가 판소리와 우리 노래역사에 끼쳤던 영향을 새삼 환기해본다. 사실 추억이나 쑥대머리는 이 기술에 기반한 대중음악의 큰 흐름이었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했던 임방울의 추억으로부터 반세기를 훨씬 지난 오늘 유트브와 SNS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도도한 흐름들을 주목한다. 1세기 전의 오디오가 신기술이었듯 제4차산업혁명기의 흐름 또한 신기술에 기반해 있을 터인데, BTS(방탄소년단)의 부상이나 송가인의 트로트가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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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1)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사단법인 임방울국악진흥회에서는 산호주와의 러브스토리를 임방울의 생애사로 공식화하고 있다. 임방울이 일약 스타로 등장하자 고향인 광주의 송학원에서 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었고 여기서 소년시절의 연인 김산호주를 다시 만나게 된다는 내용이다. 요릿집 송학원은 결혼생활을 청산한 산호주가 운영하고 있었다나.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연정이 불타올라 두문불출 2년여를 함께 지내게 된다. 전속계약을 한 레코드사에서 난리가 났겠다. 이내 선천적인 목조차 상하게 되자 낙심한 방울은 지리산 토굴로 독공에 들어간다. 그리움에 사무친 산호주가 수소문하여 찾아가지만 방울은 만나주지 않는다. 결국 깊은 병에 든 산호주가 죽게 되어서야 만나게 되었고, 애달픈 마음으로 '추억'을 지어 불렀다는 것 아닌가. 천이두의 주장대로라면 이 사건 이후부터 추억은 쑥대머리와 거의 유사한 빈도의 레퍼토리가 된다. 진흥회에서 공식화한 '추억'의 녹음은 1930년 콜롬비아 레코드이고, 1933년 오케 레코드에서는 추억(亡妻를 생각함)이라는 제목으로 김종기가 장고 반주를 한다. 최동현의 연구에 의하면 '추억'의 첫 음반은 단가 '편시춘'과 함께 1932년 10월 콜롬비아에서 발매된다(Columbia 40370). 1934년 1월 시에론(Chieron 151)에서는 '사망처(죽은 아내를 생각함)'로 발매되었고 1934년 2월 오케에서 발매한 '추억'에는 '작사 임방울'이라는 표기가 있다. 문제는 최동현의 지적처럼 '사망친난 단가'가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부인의 죽음을 애달파한 이 노래가 추억과 유사하다는 것이 쟁점이다. 한편 문순태의 '팔도명인전'(전남매일신문, 1975. 12월)에 의하면 임방울이 유성준 문하에서 공부하던 시절 화순의 여섯 살 연상 월향이라는 기생과 사랑을 하게 된다. 눈치 챈 유성준에게 야단을 맞고 지리산 토굴로 들어가 독공을 하여 본인 스타일의 소리를 완성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임방울이 열네 살 무렵 스승으로 모시는 공창식의 스토리 또한 유사하다는 점이다. 박유전, 이날치, 김채만 등의 서편제 소리를 계승한 공창식이 인기를 독점할 무렵, 어느 재상의 첩이던 보영이라는 여자와 불타는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사랑의 농도가 너무 심하였던지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다. 이후 능주로 내려오게 되었고, 보영으로부터 맨발로 도망쳐 나왔다 해서 '맨발의 공선생'으로 불려졌다 한다. 모두 김산호주 스토리와 같은 구성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송학원 주인이었다는 김산호주가 어린 시절 연인이었는지 장성하여 맺은 인연인지, 본명이 아닌 기명(妓名)인지, 월향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등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유명한 소리꾼들은 모두 망처가의 정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임방울의 여성편력을 일정한 서사에 얹어 스토리텔링한 것일까? 임방울이 유명해지자 후대의 누군가가 각색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정서가 사실은 대표곡 쑥대머리와 상통한다는 점만큼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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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0)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천이두의 '명창 임방울'(위대한 한국인7, 한길사, 1998)에 나오는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광산 김씨네 농가로 거슬러 오른다. 임방울이 고용살이를 했던 것일까? 주인집 딸 산호가 등장한다. 방울과는 동갑내기, 소리꾼으로 성공하지 못한 채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아버지 임경학이 아들을 농사꾼으로 만들려고 고용살이를 보낸 풍경이 묘사된다. 여차여차하여 방울은 산호네 집을 떠나게 되고 박재실 문하에서 소리공부를 시작한다. 박재실은 김창환, 이동백, 송만갑 등 당대의 최고 소리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선생이다. 시대의 요청이었을까. 임방울은 공창식 등 선생들에게 사사받으며, 타고난 천구성과 수리성으로 톱스타 반열에 오르게 된다. 각종 레코드 취입은 물론 전국 순회공연을 도맡아 하던 때의 대표곡이 쑥대머리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웅얼거렸을 노래 쑥대머리의 유행을 일제강점기의 나라 잃은 풍경에 대입해 설명하는 이들이 많다. 이몽룡을 기다리던 옥중 춘향이의 심정이, 광복을 기다리던 조선 사람들 마음의 투사라는 뜻이다. 이 상실감의 정서는 해방이 되고나서도 이어진다. 어쨌든 대성공을 거둔 방울이 고향으로 돌아와 연인 산호주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순애보의 레퍼토리가 작동된다. 각기 혼인한 사이지만 사랑했던 연인, 송학원이라는 요릿집을 운영하던 산호는 이미 병들어 있다. 문순태 등이 채집한 정보를 보태면, 임방울은 산호주와의 사랑을 뿌리치고 동굴에서 소리를 연마해 성공한다. 판소리 예술을 위해 산호주를 거부한 셈이다. 이러저러한 에피소드들 속에 러브스토리의 결말이 애처롭다. 결국 산호가 임방울을 연모하며 죽었다는 것 아닌가. 천이두가 쓴 임방울 전기는 사실일까 소설일까. 내용 전반이 산호와의 사랑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측면을 보면 소설에 더 가깝다. 김산호주와의 러브스토리는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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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임방울의 추억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디 혼은 어데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데라고 그리 쉽게 가럇던가 그리 쉽게 가럇거든 당초에 나오지나 말았거나 왔다 가면 그저나 가지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 가며 동무들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임은 하직코 가셨지만 이승에 있난 동무들은 백년을 통곡한들 보러올 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보리오 무정하고 야속한 사람아 전생에 무슨 혐의로 이 세상에 알게 되야서 각도 각읍 방방곡곡 다니던 일을 곽속에 들어도 나는 못잊겠네 원명이 그뿐이던가 이리 급작시리 황천객이 되얏는가 무정하고 야속한 사람아 어데로 가고 못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저 유명한 임방울의 단가 '추억'이다. 임방울의 평생 히트곡을 두 곡만 들라면 첫째가 '쑥대머리'요. 둘째가 '추억'일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노래다. 세월이 무심해서일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애창되었던 이 노래는 오랫동안 잊혀진 노래가 되었다. 하지만 다행이랄까, 근자에 이런 저런 판소리꾼들이 다시 부르는 풍경들을 접하게 되어 고무적이다. 쑥대머리는 춘향가 중 옥중 장면을 노래한 것이니 누구나 아는 이야기인데 '추억'은 어떤 노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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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진도지역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죽으면 '오쟁이쌈'을 했다. 졸저 '산자와 죽은자의 축제'(민속원, 2018. 03)에 소개했던 풍장(風葬)의 한 내용이다. 2017년 본지를 통해서도 언급하였으나 보완해두고 공부자료로 삼는다. 초분(草墳, 二次葬制의 하나)과 관련지어 해석하고자 했다. 오쟁이는 짚으로 엮어 만든 작은 '섬'을 말한다. 아이의 주검을 오쟁이 안에 담아 해안의 장송가지에 매달아두는 장례법이다. 일종의 풍장(風葬)이다. 이를 진도지역에서는 '오쟁이쌈'이라고 했다. 왜 오쟁이에 담아서 육중한 해송의 가지에 걸어두었던 것일까? 이것은 왜 초분을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여태껏 사람들에게 물어왔다. 하지만 속 시원하게 답변을 해주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는 망자가 초분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다. 그것뿐일까? 그렇다면 망자는 왜 초분해주기를 원했을까? 나는 오랫동안 주검 처리하는 예법과 방식들에 대해 특히 아이들의 주검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 주목해왔다. 아이들의 경우 항아리 등에 넣어 돌로 묻어두는 형태가 보편적이다. 남도말로 '독장' 혹은 '독담'이라 한다. 이 논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 마한지역의 옹관(甕棺)으로도 이어진다. 한자문화권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에 널리 연행되었던 방식, 큰 항아리에 시신을 안장하는 고대로부터의 장례법들이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 장례법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도대체 무엇일까? 죽은 아이들에게 지상의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매미가 탈바꿈을 하고 죽는 찰나의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다시 부화한 알들은 애벌레가 되어 지하로 들고, 어떤 이들은 천사의 날개옷을 빌려 하늘에 오른다. 어쩌면 백년일지도 아니 천년일지도 모른 길고 긴 잠을 청한다. 하지만 영원히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병을 깨고 오르는 아프락사스의 새처럼 한 생애의 풍경을 깨트리기만 하면 된다. 이전의 자신을 온전하게 벗어버리는 매미처럼 말이다. 지상의 날들이 닷새면 어떻고 하루면 어떤가.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를 오쟁이에 매단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본다. 단 하루가 아니라 단 한순간만이라도 죽은 아이가 다시 태어나거나 거듭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애틋한 마음들이 해송 숲의 오쟁이 장례 풍경을 만들어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종교와 문화와 문명 아니 시공을 넘고 상상을 넘어 그 어떤 수식으로 설명한다 해도 상통할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인류의 소망이지 않겠는가. 여름이 가기 전에 얼마나 많은 지하의 매미들이 지상으로 올라올지, 그래서 내 귀청을 뜯으며 울어댈지 이제 그 많은 탈바꿈과 거듭남과 재생과 부활의 사건들을 묵상할 시간이다. 이제 장마 끝나 여름 깊을 것이니 오랜 세월 기다렸던 매미들 지상으로 올라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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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7)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매미의 우화(羽化)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이다. 번데기가 날개 있는 성충이 되는 것을 우화라 한다. 사람의 몸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는 일을 우화등선이라 한다. 진서(晉書)의 ‘허매전(許邁傳’에 나오는 말이다. 벌레에 날개가 돋으니 날개돋이요 껍질을 온전히 벗어놓으니 탈바꿈이다. 허물을 벗고 나오는 것이 갱생이고 거듭남이며 재생이고 부활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비유해 말하면 번데기의 성충은 물론이요, 하늘로 올라가는 신선이 다르지 않다. 본디 먼지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니 말이다. 날개를 가졌으니 창공을 나는 새요, 하늘로 날아오르니 솟대 위의 인신가교(人神架橋) 곧 신조(神鳥)다. 매미가 껍질을 벗고 날개를 달기 위해서 많게는 17년을 기다려야하지만 온전히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자신을 죽여야 한다. 매미가 벗어던진 옷, 매미의 허물이 온전한 그의 형상 그대로임을 주목하는 이유다. 수년 전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문구가 있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전해준 쪽지 말이다. "새는 알에서 빠져나오려 한다. 그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 곁으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헤르만헤세의 소설을 통해 익숙해진 신의 이름, 아프락사스의 새를 진도 관매도 해송숲의 오쟁이에 덧입혀 소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껍데기, 그 병을 깨고 날아오르는 선의(蟬衣), 선녀의 날개옷을 주목했을 사람들을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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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오래된 기다림의 끝, 찰나 같은 지상의 삶 매미의 일생에 대해서는 수많은 정보들이 넘친다.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간추리기 힘들만큼 다양한 정보들을 갖고 있기도 하다. 대개 3년에서 17년까지 땅 속에서 준비를 했다가 땅위로 올라와 고작 보름에서 한 달을 살고 죽는다는 설명이 주류다. 정보의 출처에 따라 달리 나타나지만 지구에는 대략 3,000여 종에서 4만 여종이 넘는 매미가 산다. 우리나라에는 940여 종의 매미가 알려져 있다. 참매미와 유자매미는 약 5년을 주기로 땅에서 나온다. 미국의 남부 매미는 7년에서 13년, 미국 중서부의 매미는 17년을 주기로 땅에서 나온다. 땅으로 나온 수컷 매미는 암컷과 짝짓기를 하고나서 죽고 암컷은 알을 낳고 죽는다. 그 기간이 열흘 혹은 보름에서 한 달이다. 우리나라 말매미의 경우 6년여를 땅속에서 기다리다 지상에 오르면 고작 10여일을 살다가 죽는다는 보고가 있다. 적게는 3년, 많게는 17년을 캄캄한 땅 속에서 이른바 다시 태어날 날을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과학자들은 종족 보존을 위한 전술이 이들의 진화를 결정하였을 것으로 설명한다. 천적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하는 패턴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3대에 걸쳐 대륙과 바다를 여행하는 나비는 물론 7년여를 인내하고 준비했다가 비로소 지상에 오르는 죽순과도 다를 바 없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 그리 울고 여름 내내 천둥장마의 비바람을 견뎌야 하는 문학적 수사가 달리 회자되었겠나. 매미의 일생, 탈바꿈이라는 낱말의 시작 어미 매미가 나뭇가지 구멍에 알을 낳는다. 알들은 몇 주 후 애벌레로 부화하여 땅으로 내려간다. 땅 속 40㎝ 정도에 구멍을 파고 자리를 잡으면 나무뿌리의 액을 빨아먹으며 길고 긴 기다림의 잠을 잔다. 매미들은 인고의 시간 동안 지상의 날들에 대해 어떤 꿈들을 꾸는 것일까? 어미와 아비 매미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인고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흙 속에서 애벌레가 되어 지상의 나무로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지상의 시간이 길지 않음을 수억 년의 기억 속에 상속해왔을 것이니 한순간이라도 허투루 보내지 않을 것이다. 말매미의 경우 나무로 기어 올라가면 3시간 만에 탈바꿈을 한다. 먼저 머리와 가슴이 빠져나오고 다리를 빼낸다. 이어 굳은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날개가 커지고 몸에서 검은 빛이 나타난다. 벗어놓은 허물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알맹이 벌레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옛 사람들이 매미의 탈바꿈한 허물을 보고 무엇을 상상하였을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거의 온전하고 완벽하게 자신을 벗어던지는 형국이랄까. 그래서다. 나는 매미의 탈바꿈을 비로소 죽어 다시 태어나는 의례라고 풀이해왔다. 초분과 진도지역의 '오쟁이쌈'에 매미를 비유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온전히 자신을 죽이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 완벽하게 자신의 형상을 벗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매미 허물을 뜻하는 다양한 이름들, 선태, 조갑, 선각, 고선, 조료퇴피, 선퇴각, 금우아, 즐즐피, 최미충각, 즐즐후피, 즐즐피, 지료피, 열피, 마아조피 등을 주목한다. 성질이 차서 두드러기, 경풍 따위의 한약재로 쓴다. 일반적으로는 매미허물, 매미껍질 등으로 부른다. 이 중 선퇴(蟬退)나 선의(蟬衣)라는 이름이 흥미롭다. 모두 우화(羽化)한 껍질을 설명하는 방식인데, 매미가 탈바꿈할 때 벗은 허물, 매미가 벗어놓은 옷이라는 뜻이니 우화(寓話)이고 은유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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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진도지역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죽으면 '오쟁이쌈'을 했다. 졸저 ??산자와 죽은자의 축제??(민속원, 2018. 3)에 소개했던 풍장(風葬)의 한 내용이다. 2017년 본지를 통해서도 언급하였으나 보완해두고 공부자료로 삼는다. 초분(草墳, 二次葬制의 하나)과 관련지어 해석하고자 했다. 오쟁이는 짚으로 엮어 만든 작은 '섬'을 말한다. 아이의 주검을 오쟁이 안에 담아 해안의 장송가지에 매달아두는 장례법이다. 일종의 풍장(風葬)이다. 이를 진도지역에서는 '오쟁이쌈'이라고 했다. 왜 오쟁이에 담아서 육중한 해송의 가지에 걸어두었던 것일까? 이것은 왜 초분을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여태껏 사람들에게 물어왔다. 하지만 속 시원하게 답변을 해주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는 망자가 초분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다. 그것뿐일까? 그렇다면 망자는 왜 초분해주기를 원했을까? 나는 오랫동안 주검 처리하는 예법과 방식들에 대해 특히 아이들의 주검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 주목해왔다. 아이들의 경우 항아리 등에 넣어 돌로 묻어두는 형태가 보편적이다. 남도말로 '독장' 혹은 '독담'이라 한다. 이 논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 마한지역의 옹관(甕棺)으로도 이어진다. 한자문화권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에 널리 연행되었던 방식, 큰 항아리에 시신을 안장하는 고대로부터의 장례법들이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 장례법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도대체 무엇일까? 죽은 아이들에게 지상의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매미가 탈바꿈을 하고 죽는 찰나의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다시 부화한 알들은 애벌레가 되어 지하로 들고, 어떤 이들은 천사의 날개옷을 빌려 하늘에 오른다. 어쩌면 백년일지도 아니 천년일지도 모른 길고 긴 잠을 청한다. 하지만 영원히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병을 깨고 오르는 아프락사스의 새처럼 한 생애의 풍경을 깨트리기만 하면 된다. 이전의 자신을 온전하게 벗어버리는 매미처럼 말이다. 지상의 날들이 닷새면 어떻고 하루면 어떤가.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를 오쟁이에 매단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본다. 단 하루가 아니라 단 한순간만이라도 죽은 아이가 다시 태어나거나 거듭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애틋한 마음들이 해송숲의 오쟁이 장례 풍경을 만들어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종교와 문화와 문명 아니 시공을 넘고 상상을 넘어 그 어떤 수식으로 설명한다 해도 상통할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인류의 소망이지 않겠는가. 여름이 가기 전에 얼마나 많은 지하의 매미들이 지상으로 올라올지, 그래서 내 귀청을 뜯으며 울어댈지 이제 그 많은 탈바꿈과 거듭남과 재생과 부활의 사건들을 묵상할 시간이다. 이제 장마 끝나 여름 깊을 것이니 오랜 세월 기다렸던 매미들 지상으로 올라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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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밭 한가운데 농막이 있고 밭두둑에는 오이가 열렸네 껍질 벗기고 절여서 조상님께 바치네 자손들이 오래오래 살았으니 하늘의 보살핌을 받았음이라" 오이를 거론할 때마다 인용하는 시경(詩經)의 소아(小雅) 구절이다. 시경이 기원전 600년경에 쓰여 졌으니 이미 3천여 년 전에도 오이를 재배했다는 얘기 아닌가? 더군다나 껍질 벗긴 오이를 절여서 제사 음식으로 사용했으니 그 기원을 아무리 올려 잡아도 과하지 않을 듯하다. 음식연구가들은 여기서의 오이절임을 김치류의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삼아왔다. 제나라 위왕의 고사로부터 파생된 '오이 밭에서는 신발끈을 매지 말며 오얏밭에서는 갓끈을 매지 말라'는 속담을 통해서도 오이의 광범위한 재배 혹은 역사를 알 수 있다.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의 옛 기록에도 호과(胡瓜)에 대한 정보들이 많다. 김치 전문가인 박채린의 연구에는, 서민음식으로 '오잇국'이, 궁중음식으로 '과제탕'이 등장한다. 과제탕은 각 재료를 길게 썰어 기름에 지지다가 장국을 붓고 양념을 첨가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600년대까지는 절인 오이김치를 이용하다가 1700년대 이후에는 생오이를 활용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오늘날도 시큼한 식초를 넣은 오이냉국이 여름철 음식으로 대세인 것을 보면 오이야말로 고대로부터 이어온 원형질의 채소 아닐까싶다. 더군다나 설화 등 광범위한 장르에서 남근의 은유 혹은 잉태와 다산의 상징으로 기능해왔으니 그 맥락을 허투루 살필 수 있겠나.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는 탓인지 소금에 절인 오이에 식초 듬뿍 넣고, 파, 설탕, 고춧가루 가미한 오이냉국을 마시고 싶은 마음, 어쩌면 가난한 내 뜨락을 오이정자(瓜亭) 삼아 상고하는 오래된 기다림의 정조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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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내 님 그리워 울고 있으니 산접동새와 내신세가 비슷하외다 아니며 거짓인줄 잔월효성만이 아시리다 넋이라도 임과 함께 하고 싶어요 아~ 우기는 이 누구입니까 과실도 허물도 전혀 없습니다 모함에 지나지 않는 것을 서럽구나 아~ 임께서 저를 벌써 잊으셨나요 아소 임아, 다시 들으시어 사랑해주소서" 저 유명한 '정과정곡'이다. 우리말로 전하는 고려가요 가운데 작자가 가장 확실한 노래, '고려사'와 '악학궤범'에 전하는 노래로 고려 후기 정서(鄭敍)가 지은 가요다. 참소를 받고 고향 동래로 유배되었는데, 오이정자를 짓고 오이를 재배하면서 부른 노래라 한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오이정자(瓜亭)다. 가요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오이는 임금의 부름에 대한 기다림의 정서를 대변한다. 왜 기다림이 오이일까? 벼슬아치의 임기로 상징되었던 중국의 고사로 거슬러 올라가면 궁금증이 풀린다. 중국 춘추시대에 제나라 양공이 관리를 임지로 보내면서 다음해 오이가 익을 무렵에 돌아오게 하겠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여자가 혼인할 나이가 되는 열대여섯 살 혹은 기한이 다 된 시기를 뜻하기도 한다. 오이 과(瓜)자를 쓴 과기(瓜期), 과한(瓜限) 혹은 과만(瓜滿) 등이 벼슬아치의 임기를 나타내는 말이 된 이유다. 수묵화나 민화의 초충도(草蟲圖)에도 여타의 소재들과 함께 오이가 즐겨 다루어진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8폭 자수병풍 중 오이와 개구리 그림이 가장 대표적이다. 길쭉하고도 탐스럽게 수직으로 그려진 오이를 남성성과 아들로 해석하는 것은 불문가지다. 길게 뻗은 오이덩굴은 자손이 끊이지 않고 번창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해석한다. 개구리는 올챙이에서 변태하는 상징동물로 다산을 의미하며 고개 숙인 조(粟)는 겸손과 겸양을 나타낸다. 함의들이 이러해서인지 가지와 오이, 수박 등이 초충도의 배경으로 즐겨 다루어진다. 각각의 민화 상징과 함의들에 대해서는 면을 달리하여 다루어나가겠다. 의문이 든다. 초충도의 오이를 남근의 은유로만 해석해야 할까? 보다 근원적인 투사, 시경 이래 담론화된 오이의 궁극적인 함의는 어쩌면 기다림일지도 모른다. 다산과 다복을 기원했던 길상화(吉祥畵)의 원초적 욕망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후대로 올수록 초충도의 의미는 강하고 부귀한 것들에 대응하는 저항기제로 인식되기도 한다. 풀과 벌레들의 그림을 비단 여자들만 그렸던 것은 아니지만 이름도 빛도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여겨졌던 풀벌레들을 주목했던 여성들의 심성 혹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심상 얘기다. 현대민화에서도 여러 가지 풀벌레 그림들이 즐겨 창작되곤 한다. 현상에는 뜻이 숨어있다. 고려가요 정과정에서 강강술래의 외쌈놀이 등을 바라보는 내 시선의 향방이라고나 할까. 차첨지라는 캐릭터를 읽어내는 시대정신이라고나 할까. 남근의 은유를 다산이나 길상으로만 해독해서는 안 될 이유들을 상고해본다. 기울어진 남근 혹은 당치않은 남성 우위의 성희롱을 비판하는 것, 부귀공명의 화훼가 아닌 하찮은 풀벌레들 속에 자신들을 투사해내는 민화의 심상을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쩌면 이것은 남성들의 지배에 억눌려 온 여성들, 가진자들에 억눌려 온 못가진자들의 매우 오래된 기다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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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2)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대표적인 것이 영암 도갑사의 도선국사 설화다. 최씨 처녀가 오이를 먹고 잉태를 한다. 아이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내다버린다. 하지만 비둘기 등 동물들이 보호하여 양육한다. 다시 집으로 데려다 키웠더니 승려가 된다. 중국에 들어가 풍수를 배워온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비보사탑을 세운다. 고려건국을 예언하고 조력한다. 천년 후에 내려온다고 예언한 후 입적한다. 이 설화는 고구려 주몽탄생과 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다. 부여 하백의 딸 유화부인이 햇빛에 의해 임신이 된다. 알에서 태어난 주몽을 버린다. 하지만 개, 돼지, 새 등 동물들이 보호한다. 다시 거두어 기른다. 활을 잘 쏴서 주몽이라 한다. 이후 고구려를 건국한다. 두 개의 이야기 중, 도선국사는 최씨 처녀는 오이(구슬을 먹는 버전도 있다)를 먹어서 잉태를 하고 주몽은 유화부인이 방안에 들어온 햇살을 받아 임신하는 풍경이 다를 뿐 거의 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의 오이와 한 줄기 햇살이 남성성이다. 고려 전기 최응(898~932)의 탄생도 유사하다.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그 집 오이 줄기에 갑자기 참외가 맺혔다. 이웃 사람이 궁예에게 고했다. 궁예가 점을 쳤다. 아들을 낳으면 나라에 불리하니 기르지 말라했다. 부모가 숨겨서 길렀다. 장성하여 왕건의 고려 건국을 도와 각종 벼슬을 역임했다. 참외가 열리지 않고 본래대로 오이가 열렸으면 고려건국이 되지 않았을까? 여기서의 오이와 참외도 남성성 혹은 잉태를 함의한다. '외쪼기'라는 동화도 있다. 본래 반쪽 사람이라는 설화를 토대로 한 이야기다. 할머니가 태몽을 꾸었는데 빨래터에서 오이 세 개를 건져먹다가 쥐가 반쪽을 먹어버린다. 할머니는 아들 둘을 낳고 이듬해에 눈, 코, 귀, 다리, 손이 하나인 반쪽 아들을 낳게 된다. 쥐가 먹어버린 반쪽 오이와 반쪽 아이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후 스토리를 다 다룰 필요는 없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할머니의 태몽과 오이다. 이외에도 오이와 관련된 출생설화는 전국에 분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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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1)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전 진도문화원장 박병훈이 1991년 '예향진도 22호'에 소개하여 남도문화제 등에 출연했던 놀이 이름은 '차첨지놀이'다. 무정이 은파유필에서 기록한 차첨지라는 캐릭터와 '외쌈놀이'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각색하거나 새로 연출한 부분도 많기 때문에, 세세한 내용을 여기 다 소개할 필요는 없다. 다만 오이에 대한 상징, 풍자와 해학 등으로 코믹하게 꾸민 놀이라는 점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오이밭의 주인공은 차첨지다. 차첨지 마누라가 소매(소변)동이를 이고 나와 강강술래 하는 사람들 머리위에 붓는 장면이 연출된다. 차첨지의 대사는 노골적이다. 몸집 큰 여인네 엉덩이를 감싸보며 '할멈, 이 수박 좀 보게, 꼭 윤부자집 며느리 소쿠리만 하네, 또가리(또아리) 좀 받치세'한다. 차첨지 마누라는 여인들 젖가슴을 주무르는 시늉을 하면서 '그놈만 크요? 이 수박 좀 보시오, 주렁주렁 셀 수도 없이 열렸소'라고 응수한다. 한 발 더 나아가 여인들의 어깨를 들어 보이며 '워매 이 물외는 꼭 영감 그것만치나 하요, 안 그라요 영감'하며 희롱한다. 이후 심술보 영감과의 놀이, 구렁이나 뱀을 상징하는 밧줄 토막을 던지며 놀이를 끝낸다. 무정이 기록했던 시기만으로도 지금으로부터 120년 이전의 장면들이다. 내가 이 놀이에서 주목했던 것은 오이에 대한 상징이다. 성희롱 혹은 성폭력적 풍경들은 탈춤이나 다시래기 등 민속놀이에서 일반적으로 채택되었던 방식들이다. 여기서의 오이는 남근(男根)이다. 순화하면 남성성(男性性)이다. 은파유필을 역해한 박명희는 이 시의 파과(破瓜)를 '나이 64세'로 풀이했다. 백낙천의 시 '나이 예순넷이니 어찌 노쇠하지 않을 수 있겠나'라는 대목과 조선후기 윤기의 문집 ]무명자집]을 인용해두었다. 외따기놀이를 노쇠한 차첨지의 남성성에 대한 희화화로 풀이했다. 남도지역 대개의 마을 앞에 서있는 입석(立石)으로부터 종교적, 문화적 혹은 예술적으로 포장된 남근의 은유들은 거론하기 힘들만큼 광범위하다. 기자(祈子,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기원), 기풍(祈豊, 풍요에 대한 기원)의례의 원초적인 형국으로 해석한다. 물론 오이가 모두 남근 메타포에 포획된 것만은 아니다. 문화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포장되고 각색되며 변화해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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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0)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오이 따기 "금침 같은 손가락과 실 같은 머리카락 머리 나란히 하고 손잡으니 한껏 기뻐 바늘과 실을 가지고 회문금을 짜듯이 밤새 내내 끊일 때 없이 돌고 도는구나 파과할 때가 되어 오이 따는 것 희롱하니 어지럽게 꼭지 떨어짐에 꽃잎 떨어진 듯해 그 어떤 사람이 풍류의 모범을 허여했던가 벼슬은 첨지라 하고 성은 차씨라 한다네"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그림들, 나란한 머리, 서로 잡은 손, 밤새 끊일 때 없이 돌고 도는 놀이, 그렇다, 강강술래의 한 장면이다. 정만조의 <은파유필>(1896~1999년 기록) 중 '추석잡절'이라는 제목의 시인데, 소개한 대목은 현행 강강술래 놀이의 '바늘귀 뀌기'와 '꼬리 따기'놀이에 해당한다. 후자를 '쥔쥐새끼놀이' 혹은 '외따기놀이' 등으로도 부른다. 졸고, '강강술래의 역사와 놀이구성에 관한 고찰'(한국민속학, 2004)에서 이들 부대놀이를 분석해두었으니 참고 가능하다. 텃밭에서 오이를 딸 때마다 이 놀이를 떠올렸던 것은 오이의 상징과 기원에 대한 상고(詳考)의 열망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고향에서는 오이(胡瓜)를 '물외'라 한다. '참외'에 대응하여 생긴 이름일까? 조선시대에는 황과, 월과, 첨과, 왕과, 사과(수세미), 적전과, 적과 등 부르는 이름이 다양했다. 강강술래 놀이에 오이따기 놀이가 들어가 있는 것도 오이가 가진 깊은 역사와 광범위한 이미지 때문 아닐까? ‘은파유필’에는 지금의 기와밟기놀이를 유장희(踰墻戱) 즉 담넘기놀이로, 청어엮기놀이를 침사희(針絲戱)로, 꼬리따기 놀이를 '적과희(摘瓜戱)'로 소개하고 있다. 후자를 '외따기놀이', '왜때기놀이', '외쌈놀이', '외땀놀이' 등으로 부르는 것은 모두 외(오이)를 따는 놀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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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4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수교 직후부터 다니기 시작한 중국과 베트남에서 매우 흥미로웠던 점 하나가 있다. 남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북쪽에서 산견되는 청동북이 그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 북의 표면에 다수의 개구리 모양을 장식한다는 점이다. 중국 신화전문가 김선자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중국 좡족(壯族) 사람들은 개구리를 비를 관장하는 천둥신의 딸 혹은 아들로 여겼다.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천둥신에게 보내는 음성 메지지라는 뜻이다. 논의 개구리를 몽땅 잡아먹어버리는 바람에 몇 년 동안 병충해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다고 뜨거운 물을 뿌렸다가 개구리가 몽땅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흉년이 들어 고통당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좡족 북부지역에서는 매해 설마다 청개구리(마과이, 拐)축제를 연다." 흥미로운 점은 청개구리 장례 풍습을 재현하면서 한 해 동안 풍작이 들고 마을이 평안하기를 기원한다는 점이다. 한 해의 시작인 설날에 왠 장례를, 그것도 개구리의 장례란 말인가? 개구리의 겨울잠 현상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베트남의 중부 이북이나 동남아시아 또한 이 문화권과 궤를 같이 한다. 이집트의 개구리 여신 헤(Heh)나 헤게트(Heqet)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헤케트는 고대 이집트에서 개구리 모습으로 묘사되는 생명과 다산의 여신이다. 나일강의 신 크눔의 부인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고대 헤르모폴리스에서 숭배되던 여덟 신 중 하나이며 여신은 뱀과 융합되고 남신은 개구리와 융합되었다고 설명된다. 의미 독해야 연구자들에 따라 다르겠지만 비와 강, 여성과 생식, 생산과 다산, 시작과 풍요를 상징한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동양 최고의 신화 복희와 여와를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와(女媧)는 복희와 남매로 나타나지만 성경의 아담과 하와와 유사한 캐릭터다. 여와는 여와(女娃)로 표기하기도 한다. 와(娃)는 와(蛙)와 상통한다. 개구리의 화신이라는 뜻이다. 달 속의 여신 항아(姮娥)의 원음 섬여(蟾蜍)와 유사하다. 달 속의 두꺼비와 개구리의 출처가 같다는 뜻이다. 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섬진강 이름의 내력 곧 두꺼비를 말해왔다. 사실 여성성 토대로서의 두꺼비는 개구리와 큰 차이가 없다. 곧 여와를 개구리신, 음(陰)의 신, 달의 신으로 풀어도 무리가 없다. 남성성으로서의 삼족오나 태양, 별 등에 대칭하여 여성성으로서의 개구리 혹은 두꺼비와 달, 물고기 등을 주목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구리타령의 이면을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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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4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우리 민화의 초충도(草蟲圖)에서 즐겨 그리는 것 중 하나가 개구리다. 다른 초목 및 야생화와 함께 그려 그 의미를 스토리텔링 해왔다. 나는 오이를 사례 삼아, 강하고 부귀한 것들에 대응하는 저항 기제로써의 민화, 그 중의 초충도를 거론한 바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여겨졌던 풀벌레들을 주목했던 여성들의 심성 혹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심성에 대해서였다. 하지만 풀벌레 그림은 그보다 훨씬 방대하고 융숭 깊은 이야기들을 행간과 여백에 가득 채워왔다. 오늘 사례 삼은 개구리만 해도 그렇다. 개구리는 겨울잠을 잔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는 거듭남과 재생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추운 겨울 내내 땅속에서 잠을 자다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가져오는 전령사이기 때문이다. 올챙이에서 개구리로 변신하는 형상은 매미의 탈바꿈만큼이나 경이롭다. 올챙이에서 비롯된 다산과 풍요의 특질은 단순한 기표일 뿐이다. 올챙에서 개구리로의 변신, 기다렸다가 일시에 튀어 오르는 도약, 다산, 여성의 임신한 배, 셀 수도 없는 올챙이 알들, 비의 전령사, 이들 변신의 기의(記意)를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혁명이고 갱생이며 거듭남이고 부활이다. 그러기에 남중국과 동아시아 아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비와 여성성의 근원으로 그려졌던 것 아닌가. 금와왕 설화는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복희와 여와, 혹은 아담과 하와를 관통하는 생식의 찬미가 개구리를 둘러싼 노래와 신화와 그림과 그리고 이야기들에 녹아들어 있다. 수많은 개구리들이 음양의 교합 상징으로 묘사되었다. 흙으로 만든 신라의 토우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이 흙인형을 만들었던 신라사람들은 틀림없이 남중국과 동남아시아 혹은 이집트를 거쳐 전 세계를 유영했던 노마디스트들임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전 세계 보편으로서의 개구리 신화를 공유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인류 보편의 달의 철학을 공유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묵화 혹은 민화만 해도, 신사임당을 비롯해 정선의 개구리와 오이 그림을 관통해온 세계관이 있다. 현대 민화작가들 중에서도 이를 즐겨 그리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한 장의 그림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도 저 융숭 깊은 신화의 심연에 닿아있을까? 정인수 외 교사들의 한 연구(초등 한국화 교육에서 초충도의 도입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현대사회가 상실한 자연관을 성찰하는 의미를 내세운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초충도의 일원론적 자연관이 학교폭력이 난무하는 오늘날의 학교에 조화와 가치를 심어줄 수 있다는 주장이다. 공감 가는 분석이다. 그들 분석에 보태고 싶은 것들이 있다. 예컨대 개구리 노래와 개구리 신화와 개구리 그림들을 한 통속으로 꿰어 통합적으로 접근하는 교수법, 학습모형 말이다. 이것이야 말로 시공을 함께 보고 듣는 종합적인 이해의 태도이지 않을까? '개구리타령'이며 개구리 노래, 그림과 신화들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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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47)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금와왕 신화다.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동부여를 세운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제사를 지내려고 가던 중, 마침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 하나를 보고 자꾸 눈물을 흘렸다. 돌을 치우게 하니 거기에 금빛 개구리 모습을 한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를 금와(金蛙, 금빛 개구리)라 하고 태자를 삼았다.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이후 스토리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왕이 된 금와가 태백산 남쪽 유발수에서 사냥을 하다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방에 가두었더니 창문으로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 알을 낳았는데 여기서 주몽 곧 동명성왕이 나왔고 고구려를 건국한다. 알의 유기, 고난의 극복 등 영웅 신화의 서사는 변화무쌍의 드라마다. 비유해본다. <장자>의 첫 구절부터 등장하는 곤(鯤)이 몇 천리가 되는지도 모를 큰 물고기이며 이것이 붕(鵬)이라는 새로 변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동부여 신화의 곤연이라는 의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곤연에서 나온 금개구리이니 달의 정기 혹은 원초적 생명으로서의 상징성이 얼마나 클 것인가. 개구리 신화는 더욱 다채롭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의하면,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울었다. 이 사실을 알리니 선덕여왕은 정병을 여근곡에 보내어 적을 섬멸하도록 하였다. 군사가 서교에 가보니 과연 여근곡이 있고 적군(백제군) 5백여 명이 매복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섬멸했다. 여기서의 개구리 울음은 곧 백제군을 상징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면 유리왕 29년 6월에 모천에서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가 무리지어 싸우다가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는다. 이를 북부여가 패망할 징조로 읽었다. 오방색 중의 북쪽이 검은색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개구리 또한 서로의 군사들을 상징한다. 경남 양산 하북 자장암 연기설화도 흥미롭다. 자장율사가 법당 뒤 큰 암벽에 구멍을 뚫어 금개구리를 살게 했다는 스토리다. 자장암 개구리는 몸은 청색이고 입은 금색인데 벌, 나비, 거미 등으로 변하며 바위를 자유로이 뛰어 다닌다. 동명성왕이 된 금와 개구리와는 결이 좀 다른 이야기들이지만 개구리가 신화 속에 매우 깊숙하게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우리나라의 건국신화나 사찰의 연기설화 뿐일까? 개구리 서사는 동아시아 전반, 아니 세계의 신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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