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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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에서 궁중음악으로 즐기는 창덕궁의 밤!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는 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과 오는 4월 3일부터 4월 6일까지 4일간 창덕궁 내 일부 전각을 깊이 있는 심화 해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창덕궁 깊이보기, 희정당’야간관람과 국립국악원 정악단과 무용단의 공연을 연계한 '오얏꽃등 밝힌 창덕궁의 밤'을 운영한다.대조전과 더불어 조선 시대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창덕궁의 내전 영역에 속하는 희정당(熙政堂)은‘밝은 정사를 펼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전각이다. 조선 후기 편전(便殿)인 선정전(宣政殿)을 대신하여 업무보고, 국가정책 토론 등 왕의 집무실로도 활용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0년 재건한 것으로 전통건축 방식과 당시 근대문물의 양식이 혼재되어 있고, 조선 후기와 근대 왕실의 생활환경도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평상시에는 문화유산 관리를 위해 내부 관람이 제한되지만, 2019년부터 내부공간을 당시 모습으로 되살리는 사업을 추진해 천장과 마루, 창호, 벽지, 카펫, 전등 등의 재현과 보수·정비를 하여 일부 권역이 우선 공개된 바 있다.먼저, 희정당 외현관과 동행각, 중앙홀을 따라 50분간 진행되는 희정당 야간관람에서는 장식등(샹들리에)을 비롯하여 근대시대의 다양한 전등으로 중앙 접견실과 귀빈실, 복도 등 권역 전체에 불을 밝힌 모습을 볼 수 있어 불 켜진 창덕궁의 아름다운 야경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이어서 대조전 월대 권역에서 30분간 진행되는 공연에서는 조선 왕실에서 향유하던 궁중음악을 중심으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난 ‘효명세자’가 남긴 시를 노래한 시조와 궁중무용까지 함께 즐길 수 있어 창덕궁의 역사적 가치와 우리 음악의 멋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품격 있는 무대가 될 것이다.중학생(만 13세) 이상의 국민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3월 26일 오후 2시부터 인터파크티켓 누리집을 통해 선착순으로 예매할 수 있다. 1회당 입장인원은 문화유산 보호와 쾌적한 관람환경을 위해 15명으로 한정하며, 관람료는 유료(인당 2만 원)로 진행된다. 더 자세한 사항은 창덕궁관리소 누리집을 방문하거나 전화(02-3668-2300 / 02-580-3300)로 문의하면 된다.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는 이번 프로그램이 우리 궁궐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되살리고 향유하는 특별한 시간이 되길 바라며, 앞으로도 유관기관과의 협업을 통한 프로그램 개발과 운영으로 궁궐이 지닌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꾸준히 제공할 수 있는 적극행정을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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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4) <BR>巫世衆- 그의 명인(嗚咽)과 몸부림 통일을 위한 <br> '反 그리고 통·막·살'(2편)무세중씨는 그의 예술적 입장이 쉬르리얼리스트임을 자처하고 있다. 일찌기 쉬르리얼리즘을 무대에서 확인한 사람은 詩人 기욤 아폴리네르였다. 1917년에 공연된 장 꼭도의 '빠라드'와 아 폴리네르의 타이레시아스의 젖가슴 공연에서 超現實主義 演劇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쉬르리얼리즘 演劇이 처음으로 공연되기 1년 전인 1916년 4월, 취리히에서는 트리 스탄츠아라, 한스 아르프, 리챠드 홀젠벡크 등 세 사람이 詩人, 그리고 畵家들과 超現實主義藝 術運動의 母胎가 되는 dada演劇을 공연한 적이 있다. 이 일이 있은 후 1918년 츠아라는 그의 유명한 Dada宣言文을 발표하게 된다. 그 宣言文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무세중 연극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Dada는 사회적 계급의 타파이다. Dada는 충돌의 美學이다. Dada 는 未來의 추방이다. Dada는 본능적이며 자연발생적인 모든 점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이들은 이같이 宣言하고 反藝術,反理性,反思想의 깃발을 내걸었다. 다다이스트들(The Dadaists)은 한스 아르프가 주장한대로 '미쳐버린 時代'의 소산이다. 그래서 藝術家들은 근원적인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같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전략으로 '人類의 苦惱를 슬퍼하고 憤怒하는 일'에 헌신하게 된다. 다다이스트들은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그로테스크 심볼리즘 (grotesque symbolism)의 美學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앙드레 브루통, 루이 아라공, 필립 스포가 새로운 超現實主義運動을 전개해 나갔다는데 아라공이 한 말은 무세중씨와의 관련에서 중요하다. '우리들은 여러분들에게 친근한 이 매우 편리해야 하고 어리브드의 이 무며 소에 마치 혈암(頁巖) 속에 갇힌 화석마냥 사로잡혀 있다. 서구世界 속에서 여러분들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우리들은 서구의 맞춤들인 것이다... 여러분들의 공포의 대상인 東洋이 우리들의 목소리에 답할 것이다. 여러분들의 공부르타일리스트와 다다이스트들이 하고자 했던 알파한 것이고통 마살에서 실천해 보였다. 반의 빛을 내 건것이 그러했고 쏘의 타부를 타파한 것이 그러했고, 이 時代 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그러했고, 歷史의 비극과 인간의 무력함을 슬퍼하고 분노하며 크로테스크 심볼리즘에 의지하는 일이 그러했으며, 혼란과 불안의 충격적인 조성이 그러했고, 각성의식의 商가 그러했다. 이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歷史습들이 투철했기 때문이며 社會的反抗性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그의 소해 레퍼터리였던 '역사의 후회', '말하는 벙어리', '종이전쟁', '왜 삽니까' 등에서 이같은 特性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무세중씨는 아르또의 해학을 올바르게 수용하고 있다. 그는 肉體言語의 효과적인 創造를 통해 꿈들로 얼룩진 시의 內面的 어둠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아르또의 행은 강렬성을 의 미한다. 그는 동작, 음악, 고함소리, 신음소리, 울음소리, 웃음소리, 음향효과, 그리고 스펙타클 을 통해 드라마의 강렬성을 관객으로 하여금 체험케 했다. 아르또는 그의 宣言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들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없애 고 배우와 관객의 공통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연극적 액션의 중심에 관객들을 참여케 함으로써 관객과 공연사이의 장벽을 철폐한다. 무세중씨는 이번 소회을 통해 드라마를 쓰는 사람과 드라 마를 행하는 사람의 구분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하는 측면의 實驗을 시도했다. 관객 모두가 쌀부대를 뒤집어 쓴다든가, 극장 무대에 들어서면 입구에 누워있는 배우의 몸을 건너가게 한다 든가, 관객들이 무대 위에서 배우들과 공존하면서 관객들이 무대 속으로 뛰어들게 한다든가, 공연현장을 돌아다니며 본다든가 하는 시도를 통해 관객은 연극적 액션의 중심에 어느 정도까지 접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실험해 보였다. '곡의 소리'에서 배우들이 관객들 한 사람 한 사람 면 전에 접근해서 관객들의 손을 잡으며 이들의 슬픔에 동참해 줄것을 종용한다든가, '종이 전쟁'에 서 관객이 종이 인간을 향해 종이 뭉치를 던지면서 야유를 퍼붓게 하고, 종이인간을 찢고, 종이 에 불을 당기도록 하는 일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공연 중간 중간 인터밋션 때 관객들의 合唱을 선도하는 노래도 이 일에 기여하는 책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또는 1933년 4월 6일 소르본느에서 演劇 강연을 했을 때 "나는 관객들에게 가혹한 질병 의 체험을 주고 싶다. 그래야만 그들은 공포 속에서 각성하고 깨어날 수 있다. 나는 그들을 각성 시키고 싶다. 그들은 그들이 죽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은 귀가 멀고 눈이 먼 것처럼 완벽하다. 이것이 내가 표현하려는 꿈인 것이다. 나는 탄생의 투쟁을 그리고 싶다." 무세중씨의 작품 '아편', '나는 개가 되고 싶다'는 육체와 인간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 체 힘의 극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죽는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동물이 된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느정도 병들고 있는 것인가. 이같은 죽음 속에서 탄생을 위한 투쟁은 어떻게 가능한 것 인가 하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추구하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아르또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비웃고 헐뜯고, 헐뜯고 비웃는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해방되어, 정신의 淨化을 성취할 수 있도록 만든 이 공연은 演劇의 이론을 탁월하게 무대에 실천한 공연이 되게 만들었다. 쫓는 그가 살아가는 일에 대해 어떤 해답을 지니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죠셉 체이킨은 말한 적이 있다. 배는 그가 체험한 일에 말없이 의문을 던지면서 무대에 서고, 그가 하는 작업 과정을 통해서 그 자신을 재창조한다. 무세중씨가 이번 공연을 통해서 이룩한 빛나는 성과는 그가 쉬르리얼리즘의 演劇을 시도했다. 거나, 아르또의 殘酷演劇論을 무대에 실천했다는 데에도 있지만, 더욱더 큰 수확은 군대 현대연 극의 理論的 모태가 된 이 두 演劇潮流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우리나라의 과 의 연회 전통을 의식하고 그 표현수단에 크게 의지했다는 데 있다. '한의 소리', '곡의 소리', '통·막· 살 등은 이 점을 명확히 해준 공연이었다. 특히 南北의 장벽이 힐리는 감동적인 순간을 한 통·막 살은 그 祭儀性이나, 空間構成이나, 권인 음악과 소리에 있어서는 소도구 및 대 도구면이나, 동작과 춤에 있어서나, 그리고 액션에 있어서 序幕 부분에서 발휘된 쉬르리얼리즘 과 아르또가 우리의 巫俗과 民俗 속에서 하나로 융화되는 강렬한 무대를 창출해 내었다. 무대 한복판에 흰 광목이 팽팽하게 우뚝 쳐져 南北을 가로막고 있는 '통·막·살' 무대에서 무 세중씨는 거의 알몸이 되어 막걸리 통속에 들어가 몸을 씻고, 황토 진흙과 시래기로 온 몸을 바른 후, 광목벽을 향해 몸을 부딪히고, 머리로 박고, 이로 물어뜯고, 손톱으로 후비며 몸부림친 다. 광목벽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화가 金丘林씨는 붓으로 그의 몸이 닿는 곳에 색을 칠한다. 무세중씨가 광목벽에서 몸을 때면 그의 몸이 닿았던 흰 광목벽에는 그의 苦惱가 피빛이 되어 찍혀 있다. 이 동작을 여러번 반복하고 난 다음 그가 흰 광목벽을 찢는 순간, 그는 찢어진 틈새에 몸을 걸치고 오열한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북으로 건너가 북쪽에 서있는 金丘林씨를 끌어안는다. 두 사람은 얼싸안고 운다. 다시 돌아서서 흰 광목벽을 완전히 제거하는 순간 朴倫初씨는 분단의 비극 때문에 희생당한 원혼을 달래는 진혼가를 판소리로 애달프게 부른다. 북소리, 징소리, 배우들의 통곡소리, 관객들의 뜨거운 눈물 속에서 統一을 위한 이 살풀이는 끝난다. 무세중씨는 한 사람의 배우로서 이 나라의 歷史 社會와 그리고 分斷의 비극에 대해서 깊은 의문을 던지며 이 무대에 발을 붙이고 섰다. 그는 무대행위 속에서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어떤 변용이 이룩되었다. 이 변용 속에서 그는 자의 재창조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의 재창조 과정은 무대 전체에 파급되었다. 배우들을 변용시키고, 관객들을 변용시킨 것이다. 그의 '反, 그리고 통·막·살은 우리 모두가 체험한 歷史 속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었고, 죽음의 恨을 달래는 鎮魂曲이었고, 새로운 탄생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로토흐스키의 명언은 이런 공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俳優는 자기의 全存在를 기증한다. 그것은 '황홀(恍惚)'의 기술이다. 이 때 俳優의 肉體와 本質의 深部에서 일종의 '透視光線'이 분출한다." 우리는 俳優의 빛이 歷史의 빛이 되는 이 무대에서 우리 자신이 무자비하게 폭로되는 공포를 느꼈다. 1982년 이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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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e 담은 K-AI 영화 ‘AI 수로부인’ 상영나라지식정보 산하 나라AI필름은 시나리오부터 제작, 편집까지 인공지능(AI)이 만든 영화 ‘AI 수로부인’의 제작을 완료하고, ‘제5회 창원국제민주영화제’에서 상영한다고 밝혔다.‘AI 수로부인’은 현대미술과 한국고전을 엮은 세계 첫 ‘AI 영화’ 중 하나다. 여기서 ‘AI 영화’는 AI를 주제로 한 영화라는 의미가 아니며, 온라인 상에 종종 소개되는 본 영화 없이 트레일러만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AI 수로부인’은 AI가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의 모든 캐릭터들을 생성하고, 영상을 만들고, 대사를 쓰고, 배경음악과 주제가를 생성하고, 수정까지 했다. 엄밀한 의미 그대로 AI가 생성한 영화다. 나라AI필름은 이번 영화를 통해 최소한 한 번은 현 생성형 AI의 민낯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최대한 수작업을 자제했다.‘AI 수로부인’은 고대가요 ‘구지가’(삼국유사 기이편, 가락국기)와 향가의 ‘해가사’(op.cit., 수로부인조), ‘헌화가’(Ibid.)의 내용에서 영감을 받았다. 동시에 AI 수로부인의 하늘과 바다 여행을 통해 현 시대 가장 시급한 환경문제도 제기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를 담은 K-Culture 콘텐츠 결과물을 생성해내려고 한 이 영화는 한국 AI 영화, 즉 ‘K-AI 영화’ 시대의 역사적인 출발점을 찍고 있다.‘AI 수로부인’은 제5회 창원국제민주영화제(https://cidff.imweb.me/513)에 출품, 10월 20일(금) 창원시 3.15해양누리공원에서 첫 상영된데 이어 26일(목) 씨네아트리좀에서 관객과 만난다.2022년~2023년은 생성형 AI라는 시대적 변곡점을 맞아 AI 거대언어모델(LLM)과 AI 아트 생성기(AI Art Generator)들을 통해 놀라운 발전과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AI 수로부인’의 심은록 감독은 ‘백남준이라면 이러한 AI 대전환의 시대를 어떻게 맞이했을까’라는 질문으로 이 영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더욱이 2024년 1월 1월은 백남준이 세계 최초 인공위성 생중계로 퍼포먼스를 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40주년이다. 예술을 통해 그는 글로벌 소통을 추구했다.AI의 급격한 성장과 사회 전반에 퍼지는 현상을 보면서 현대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조지 오웰처럼 AI가 인간을 지배하는 어두운 미래를 저항하고 준비하거나, 아니면 백남준처럼 어차피 맞부딪힐 미래라면 적극적인 소통으로 이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AI 수로부인’에서 수로부인은 하늘, 그리고 바다와 소통하는 매개자로서의 존재다.AI 영화의 주제로 ‘수로부인 이야기’를 설정한 것에 대해 심 감독은 "순수한 감성적 이유였다”며 "해룡이 수로부인을 납치해서 바다로 데려가자 사람들은 부인을 구하기 위해 ‘해가’를 지어 불러 구한다. 제의적인 의미가 있었겠지만 전쟁, 힘, 권력, 자본이 아니라 노래를 불러서, 즉 예술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AI가 모든 것을 생성한다면 거기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일까. 심 감독은 이렇게 설명한다. "1917년 현대미술의 고정관념을 백지화한 마르셀 뒤샹은 한 상점에서 산 남성용 변기를 방향만 바꿔 작품 ‘샘’(1917)을 출품하며 예술은 ‘선택’이라고 했다. 이를 AI 영화에 적용했다. ‘AI 수로부인’은 0.8초부터 8초까지의 생성 영상 수천 장에서 선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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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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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서양식 영빈관 '덕수궁 돈덕전' 100년 만에 개관대한제국 영빈관 '덕수궁 돈덕전'이 100년 만에 다시 손님을 맞는다. 프랑스풍으로 설계된 이국적인 건물과 수려하게 정비된 내부 전시실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을 전망이다.돈덕전은 고종 즉위 40주년 칭경예식에 맞춰 서양열강과 대등한 근대국가로서의 면모와 주권 수호 의지를 세계에 보여주고자 1902~1903년 황궁에 지은 서양식 영빈관이다. 돈덕전은 대한제국 외교사절을 접견하고, 해외 공사를 대상으로 연회를 베풀고, 국빈급 외국인의 숙소로 제공되고 전통공연을 여는 등의 ‘문화교류’ 역할을 수행했다. 칭경예식은 1902년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경축하려고 전통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대규모 국제행사로 기획한 예식이다.대한제국은 이 행사를 통해 황제 위상을 높이고, 나아가 냉엄한 국제 사회에서 중립국으로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하려 했다.콜레라 창궐로 국제행사는 무산됐다. 같은 해 11월 국내행사로 축소돼 전통방식 예식만 덕수궁 경운궁에서 거행됐다. 돈덕전은 1921~1926년 철거됐다. 문화재청은 2015년부터 덕수궁 복원정비사업을 추진해왔다. 돈덕전 복원은 2017년 발굴조사, 2018년 설계를 마친 뒤 2019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지난해 12월 준공했다. 전시를 위한 자료조사와 공간설계는 건축공사 중인 지난해 7월부터 시작했다. 전시물 제작·설치와 인테리어를 올해 오는 24일까지 마무리했다.문화재청은 25일 오후 덕수궁 돈덕전 1층 기획전시실에서 돈덕전 개관기념식을 열고 오는 26일부터 정식으로 개관한다.새롭게 문을 연 돈덕전은 대한제국 외교사 중심 전시, 기록보관, 도서 열람, 국내외 문화교류와 예술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개관 첫날인 26일에만 볼 수 있는 진관사 태극기 ‘원본’도 주목할 만하다.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를 먹으로 덧칠한 것으로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하던 이들이 진관사에 숨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27일부터는 원본을 진관사로 돌려보내고 복사본을 전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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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고려인마을, ‘항일무장투쟁의 별’ 김경천 장군 연보 국내 최초 정리광주고려인마을은 국내외 최초로 ‘항일무장투쟁의 별’ 김경천 장군의 연보를 정리해 발간했다고 27일 밝혔다. 고려인마을에 따르면, 이번 정리된 김경천 장군의 연보는 김병학 고려인문화관장의 수년간 노력으로 이루어졌다.현재 고려인문화관은 일제강점기 독립전쟁에 헌신한 고려인선조들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 한글문학, 고려일보 신문자료, 고려극장 사진첩 등 1만2천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이에 고려인마을은 지난 2020년 10월 관광객 천만시대를 꿈꾸며 ‘역사마을1번지’ 선포식을 갖고 관광객을 맞이하자 매년 고려인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김병학 관장은 "고려인 선조들의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작업 중 하나로 김경천 장군의 연보를 정리해 발간했다” 며 "국내 귀환 독립투사 후손 고려인동포들의 자긍심 고취를 위한 작업을 계속 이어나가겠다" 고 밝혔다. 아울러 고려인마을은 오는 30일 오후 2시 일제 강점기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여 수많은 전과를 올렸던 김경천 장군의 항일애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특별전 및 기념세미나’ 를 개최할 예정이다.이번에 국내 최초로 정리된 김경천 장군의 연보는 다음과 같다.김경천(金擎天) 연보 1888년 6월 5일 : 함경남도 북청군 서문 밖에서 부친 김정우와 모친 윤옥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5년 가을 (8세) : 부친 김정우가 조상 대대로 살던 고향을 떠나 가솔을 데리고 서울로 이주했다. 그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학현리에 농장을 매입하여 거주지를 정하고 맏아들 성은(成殷)을 데리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899년 가을 (11세) : 모친 윤옥련(尹玉聯)이 사망했다. 경천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낫게 할 약을 구하고자 어른도 건너기 힘든 강을 건넜고 이에 동네 어른들이 북청에서 온 아이가 강하다고 칭찬하였다. 1900년 여름 (12세) : 부친 김정우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대한제국 육군군기창장으로 재임했다. 아버지와 함께 유학하고 돌아온 형 성은은 대한제국의 유일한 공병장교가 되어 공병대를 설립하고 육군공병부령으로 재임했다. 1903년 (15세) : 경성학당을 졸업했다. 1904년 (16세) :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육군중앙유년학교에 입학했다. 1907년 (19세) : 형 성은이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08년 2월 6일 (20세) : 부친 김정우가 53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사망했다.1908년 6월 8일 (20세) : 여동생 옥진(玉振)이 유복녀로 태어났다. 옥진은 1930년에 경성고등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남광준(南&#36811;駿)에게 출가했다.1910년 6월 (22세) :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동경 목흑기병 제일연대부에서 재직했다. 이 시기에 오랜만에 환국하여 유정화(柳貞和)와 혼인을 치렀다.1913년 1월 (25세) : 가족을 데리고 일본 동경으로 이주하였다. 1915년 (27세) : 6월에 장녀 지리(智理)가 태어났다. 9월에 기병 소위에서 기병 중위로 승진했다. 1917년 2월 (29세) : 차녀 지혜(智慧)가 태어났다. 1919년 (31세) : 유럽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국내와 해외에서 혁명의 분위기가 점차 증가되는 것을 보고 동경연대에서 휴가를 얻어 1919년 1월 서울 사저로 돌아와 삼일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4월에 삼녀 지란(智蘭)이 태어났다. 1919년 6월 6일 (31세) : 3.1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한 뒤 해외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후배 지청천과 함께 비밀리에 서울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망명했다. 1919년 6~9월 (31세) : 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일본육군사관학교 후배 지청천, 대한제국 경성무관학교 2회 출신 신팔균(신동천)과 함께 독립군을 양성했다. 사람들은 김경천, 지청천, 신동천 이 세 사람을 ‘남만삼천’이라고 일컬었다.1919년 9월 (31세) : 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구입 문제로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무력투쟁을 준비했다. 1920년 (32세) : 수청지역에 수시로 출몰하여 우리 유민들을 괴롭히는 마적들을 잇따라 소탕했다. 그해 5월 18일에는 부족한 인원과 빈약한 무기로,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잘 무장한 채 한인마을을 약탈하고 방화하던 마적 300여 명을 일거에 소탕하였다. 이를 계기로 김경천의 이름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1920년 9~10월 (32세) : 간도에 있는 무관학교 교관으로 초청받아 가던 중 일본군이 간도로 들어가 도처에서 한인과 독립군들을 학살하고 추격해오므로 부득불 연해주로 되돌아갔다. 1920년 후반(또는 1921년 초) (32(33)세) : 마적토벌 후 수청지역에 군정을 단행하고 군정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인은 물론 중국인과 러시아인까지도 김경천의 증명서를 받아야 수비구역 바깥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러시아식 교육제도를 전폐하고 아동을 모국어로 교육하게 하는 등 여러 제도를 개혁하였다. 1921년 4월 (33세) : 수청고려의병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한창걸의 고려로농군회와 강국모의 혈성단이 연합하여 수청고려의병대를 만들고 김경천을 초청해 사관 양성과 군무를 맡겼기 때문이다. 연해주에서 사관 양성 교육은 오직 김경천만이 할 수 있었다. 이로써 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어 실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21년 10월~1922년 6월 (33~34세) : 러시아 적백내전에 참가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고 쳐들어오는 백군과 무수한 전투를 벌였다. 1921년 12월 (33세) : 러시아 적군 부대와 연합하여 도병하에서 백군과 전쟁을 치렀으나 적군 부대 대대장이 부대원들과 함께 백군에 항복하여 부득불 전세가 밀리게 되었다. 그때 항복하지 않은 적군 부대원 중 100여 명이 김경천 부대로 들어옴으로써 김경천은 고려인-러시아인 연합부대 총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지휘했다. 1922년 1월 (34세) : 인원이 채 50명도 안 되는 부대원으로 야간에 이만시를 습격하여 백군 300여 명을 물리쳤다. 그러나 날이 밝자 백군 수백 명이 총공격해오므로 퇴각하였다. 1922년 6월 (34세) : 연해주에서 철병하는 일본군과 이를 따라 퇴각하는 백군 사이의 허리를 끊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1922년 여름 (34세) : 연해주 빨치산부대 혁명군사위원회로부터 뽀시예트 및 훈춘 구역 빨치산부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받았다. 1922년 가을 (34세) : 수청으로 돌아가 군사학 서적 번역에 착수하였다. 1923년 (35세) :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왔다. 1925년 봄 (37세) : 서울에서 아내 유정화가 세 딸을 데리고 연해주로 들어왔다. 1926년 봄 (38세) : 수청 서개척리로 이주해 2년 가까이 거주했다. 1926년 9월에 장자 수범(秀凡)이 태어났다. 1927년 12월 (39세) : 영주할 목적으로 수청 해안 난채시로 이사 가서 한적하게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내전이 끝난 1922년 말부터 이 시기 사이에 김경천은 ‘나제즈다(희망)’라는 이름의 협동농장을 건설하고 조합원들을 지도했다. 1929년 1월 (41세) : 사녀 지희(智姬)가 태어났다. 1932년 3월 (44세) : 하바롭스크시 합동국가보안국으로 들어가 일을 시작함으로써 다시 사회의 중심부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소수민족부서에서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통역으로 일했다. 7월에 차자 기범(奇凡)이 태어났다.1934년경 (46세) :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고려사범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사하였다. 그는 거기서 일본어와 군사학을 가르쳤다. 김경천의 가족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강제이주 직전까지 살았다. 1936년 가을 (48세) : 소비에트 당국에 전격 체포되어 같은 해 9월 29일 연해주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3년 금고형(자유박탈형)을 선고받았다. 김경천 가정에 시작된 비극의 서곡이었다. 1937년 여름 (49세) : 둘째 딸 지혜가 식중독으로 갑자기 사망했다.1937년 늦가을 (49세) : 가족들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까라간다로 강제이주를 당했다.1939년 2월 4일 (51세) : 2년 반을 복역하고 석방되었다. 그는 강제이주를 당한 가족을 찾아 3월에 카자흐스탄 까라간다 집으로 들어갔다. 가족과 재회하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까라간다 주 뗄만 구역 독일인 농장 코민테른 꼴호즈에서 농장작업부로 일을 시작했다.1939년 4월 5일 (51세) : 한 달 만에 다시 체포되어 까라간다 정치범수용소에 갇혔다. 여름 더위가 시작되던 6월 25일에 그는 모스크바 부띄르스꼬이(Бутырской) 감옥으로 이감되었고 그해 12월 17일에 재판을 받았다. 재판부는 그에게 간첩죄를 적용하여 강제노동수용소 수감 8년을 언도했다. 재판이 끝나자 당국은 그를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꼬틀라스(Котласс) 시 감옥분소로 옮겼다가 1940년 1월 17일에 러시아의 북부에 있는 꼬미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회 세브젤도를라그(Севжелдорлаг. 북부철도수용소)로 이송했다. 수용소 명칭이 말해주듯이 거기에 수감된 죄수들은 매일 철도건설공사장에 동원되었다. 1942년 1월 14일 (54세) : 러시아 북부 꼬미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회 북부철도수용소 부설 병원에서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수용소에서 800m 떨어진 지점에 묻혔다. 그의 사망 일자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관계당국에서 내준 증명서마다 달리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한국에는 1월 2일로 알려져 있고 카자흐스탄 측에서 2008년에 내준 자료에는 1월 26일로 적혀있으나 김경천이 마지막 숨을 거둔 수용소가 있었던 꼬미 자치공화국에서 내준 증명서에는 1월 14일로 나와 있다. 꼬미 자치공화국 측 증명서가 사실에 가장 근접할 것으로 보인다. 1971년 6월 13일 : 김경천의 아내 유정화(1892년 5월생)가 79세로 사망했다.-------------------------------1956년 : 1936년에 김경천이 체포되어 3년 금고형을 선고받은 사건이 재심되어 무죄선고가 내려졌다. 1959년 2월 16일 :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재판소는 김경천이 1939년에 체포되어 그해 12월 17일에 간첩죄로 8년 형을 선고받은 사건을 재심하여 무죄를 선고하고 다음날 17일에 사후복권 시켰다.1993년 4월 14일 : 카자흐스탄은 1993년 4월 14일에 선포한 ‘정치적 탄압에 의한 희생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김경천의 명예를 회복시켰다.1998년 8월 15일 : 대한민국 정부는 김경천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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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집무실' 창덕궁 희정당, 야간관람 내달 5일부터창덕궁 희정당의 야간관람이 오는 4월5일부터 8일까지 하루 두 차례 운영한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는 창덕궁 내 일부 전각을깊이 있는 심화 해설로 즐길 수 있는 관람 행사인‘창덕궁 깊이보기, 희정당’의 야간관람 창덕궁의 밤, 희정당과 오얏꽃등을 오는 4월 5일부터 4월 8일까지 4일간 하루 2회씩 운영한다고 밝혔다. 대조전과 더불어 조선 시대 왕과왕비가 생활하던 창덕궁의 내전 영역에 속하는 희정당(熙政堂)은‘밝은 정사를 펼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전각이다. 조선후기 편전(便殿)인 선정전(宣政殿)을 대신하여업무보고, 국가정책 토론 등 왕의 집무실로도 활용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0년 재건한 것으로 전통건축 방식과 당시 근대문물의 양식이 혼재되어 있고, 조선 후기와 근대 왕실의 생활환경도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평상시에는 문화유산 관리를 위해 내부 관람이 제한되지만, 2019년부터 내부공간을 당시 모습으로 되살리는 사업을 추진해 지붕과 마루, 창호, 벽지, 카펫, 내부 집기, 전등 등의 복원과 정비를 마치고 일부 권역이 우선공개된 바 있다. 지난해에 이어 이번 희정당 야간관람에서는 장식등(샹들리에) 6점을 비롯하여 근대시대의 다양한 전등으로 중앙 접견실과 귀빈실, 복도 등 권역 전체에 불을 밝힌모습을 볼 수 있어 불 켜진 창덕궁의 아름다운 야경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중학생(만 13세) 이상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오는 31일 오후 2시부터 티켓 11번가 누리집(http://ticket.11st.co.kr)을 통해 선착순으로예매할 수 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창덕궁관리소 누리집(www.cdg.go.kr)을 방문하거나 전화(☎02-3668-2300)로 문의하면 된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는 "이번 관람이 우리 궁궐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되살리고 향유하는 특별한 시간이 되길 바라며, 앞으로도 희정당·대조전 권역의 커튼 복원, 욕실과 화장실 보수 등 단계적인 내부 정비를 거친 뒤 점차적으로 확대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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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릉원, 동고분군에서 백제 왕릉급 고분 추가 확인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부여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부여 왕릉원 동고분군 발굴조사’에서 백제 고분의 축조 방법을 파악할 수 있는 고분 2기가 확인되어 오는 4일 오후 2시 발굴현장을 공개한다. 부여 왕릉원은 일제강점기에 3차례(1915년, 1917년, 1938년) 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으며, 조사구역인 동고분군에서도 5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번 조사에서는 새로운 고분 1기(6호분)를 추가로 발견하였고, 일제강점기에 확인되었던 고분 1기(1호분)의 실체를 재확인하였다. 조사된 고분은 모두 원형의 봉분과 지하에 매장주체부를 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 橫穴式石室墳)이다. 새롭게 발견된 6호분은 동쪽 능선 남사면에 입지하며, 고분 축조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어 백제 사비기 왕릉급 고분의 조성과정과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봉분은 지름 20m 정도로, 외부에는 경계석렬(호석, 護石)이 확인되었고, 고분 외곽의 사면부 하단에는 2단의 축대도 설치하여 묘역을 조성하였다. 또한, 돌방무덤 앞의 무덤길은 두 차례에 걸쳐 조성되어 추가 매장의 흔적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봉분 내 추가 매장 흔적은 부여 왕릉원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으로 왕릉급 고분의 매장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확보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바 있는 1호분은 재조사를 통해 고분의 위치와 규모를 명확히 확인하였는데, 고분 조성 전에 땅을 반반하게 고른 후 쌓아올린 봉분과 돌방무덤 앞에 매장을 위해 길게 조성된 무덤길(묘도, 墓道)을 새롭게 확인하였다. 4일 발굴현장 공개 후에도 국민과 적극적인 소통을 위해 조사기간 중 상시로 현장을 개방하여 백제문화에 대한 국민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높여 나갈 계획이다. 문화재청 백제왕도핵심유적보존관리사업추진단과 부여군은 이번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부여 왕릉원 동고분군의 정비와 관리방안을 수립할 예정이며, 세계유산이자 백제왕도 핵심유적인 부여 왕릉원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지원하여 백제 사비기 장례문화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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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마주하는 창덕궁의 밤, 「창덕궁 달빛기행」 개최창덕궁 달빛기행’이 새로운 관람구간과 함께 돌아온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한국문화재재단과 함께 오는 21일부터 6월 12일까지 매주 목~일요일에 ‘창덕궁 달빛기행’을 진행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창덕궁에서 13년째 펼치는 야간 관람 행사다. 올해는 그동안 야간에 개방하지 않았던 희정당 권역을 포함해 새로운 관람 구간을 선보인다.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됐다가 1920년 재건됐다. 대조전과 더불어 조선 시대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창덕궁의 내전에 속하며 '밝은 정사를 펼치다(熙政)'는 의미를 담고 있는 전각이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인 창덕궁 희정당은 국가정책 토론 등 왕의 집무실로도 활용됐다. 문화재청은 2년 여에 걸쳐 창덕궁 희정당·대조전 영역의 전등과 전기시설을 현재 안전기준에 맞게 보수⋅재현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물로 야간에 불을 밝힌 희정당의 모습을 이번 창덕궁 달빛기행에서 만날 수 있다. 1920년대 당시 희정당을 밝혔던 각종 근대식 조명과 중앙 홀에 자리 잡은 샹들리에, 재정비된 근대식 응접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낙선재 후원 내 상량정에서는 대금 연주를 도심 야경과 함께 즐길 수 있고 부용지와 주합루의 풍경을 배경으로 후원을 찾은 국왕과 왕비의 산책 모습도 볼 수 있다. 애련정과 애련지 권역의 가곡 공연에 이어 연경당에서는 효명세자를 주제로 한 전통예술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관람 후 창덕궁의 아름다움을 담은 변온 머그잔과 궁중약차를 기념품으로 제공한다. 올해 달빛기행은 참여자의 안전한 관람과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참여인원을 1일 100명으로 제한하고, 25명씩 소규모 인원이 조별 이동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입장권은 14일 오후 2시부터 인터파크 티켓을 통해 판매한다. 단, 궁중문화축전 기간인 5월10일부터 22일까지 입장권은 별도 예매를 시행할 예정이다. <안내 홍보물>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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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이은관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배뱅이굿의 대가 이은관(97)옹이 12일 오전 9시20분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1917년 강원도 이천에서 태어난 이옹은 16세 때 황덕렬에게 서도소리를 배웠다. 19세에는 황해도 황주권번 소리선생 이인수에게 배뱅이굿을 사사했다. 광복 후 대한국악원 민요부에서 활동했다. 이후 장소팔(1922~2002), 고춘자(1922~1994)와 함께 유랑 극단을 꾸려 서민들과 함께했다. 1960년대 '태평가' '아리랑' '노래가락' 등의 경기민요를 취입하고 라디오, 영화, TV 등에서 활약했다. 1968년 한국국악협회 감사, 1975년 한국국악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민속예술학원을 설립, 제자 양성에 힘을 쏟기도 했다. 198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중 배뱅이굿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1990년 보관문화훈장, 2002년 제9회 방일영국악상을 받았다. 지난 2월 건강한 모습으로 SBS TV 예능프로그램 '스타킹'에 출연하기도 했다. 4녀1남을 남겼다. 한양대병원 장례식장 10호실, 발인 14일 오전, 장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02-2290-9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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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적 걸작 '말레비치 추상화' 서울 온다‘절대주의’ 창시자인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1878~1935)의 1916년 작 '절대주의 구성 회화'는 2008년 뉴욕 소더비에서 6000만 달러(현재환율 706억2294만2500원)에 팔렸다. 러시아 미술 작품 경매 역사상 가장 비싼 가격을 기록했다. 이 그림은 다시 2018년 크리스티 경매장에 나와 8580만 달러(현재환율 1015억140만원)에 낙찰됐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순위 30위안에 들어있는 작품이다.말레비치는 1915년 정사각형의 캔버스에 검은 사각형만을 하나 그려놓고 새로운 예술, 절대주의의 탄생을 선언했다. 당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의 등장은 뒤샹의 변기에 버금가는 충격이었다.20세기 초 러시아를 뒤흔든 혁명적 걸작이 올 연말 서울에 온다. 한국일보사와 코리아타임스는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 니즈니 노브고로드 국립미술관, 크라스노야르스크 수리코프 미술관, 연해주 국립미술관 협력으로 오는 31일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2관 전관에서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 혁명의 예술'展을 개막한다고 밝혔다.바실리 칸딘스키, 카지미르 말레비치, 알렉산드르 로드첸코,엘 리시츠키, 미하일 라리오노프, 나탈리야 곤차로바 등 49인의 75점을 전시한다. 모두 러시아 연방 문화부에 문화재로 등록 관리되고 있는 국보급 작품들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품들 중에서도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미술 혁명’을 주도했던 대표 작품들을 소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품들 중에서도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미술 혁명’을 주도했던 대표 작품들을 소개한다.전시 예술감독을 맡은 중앙대학교 김영호 교수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소비에트 혁명 초기 퇴폐 예술로 낙인이 찍혔으나, 50년 뒤에 미니멀아트로 부활한 ‘역설적 창조의 예술’”이라고 소개했다. "1910~20년대 러시아의 전위적 예술운동은 한국의 추상미술과 단색화의 탄생에도 영향을 끼쳤다. 21세기 ‘문명사적 전환기’에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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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반] 정창관의 신보유람 & 명반유람 62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만정 김소희 명창(순옥:1917~1995년)은 박초월, 박록주 명창과 더불어 20세기 후반 최고의 판소리를 풍미했던 여류 판소리꾼이다. 1917년 10월 17일 전북 고창군 흥덕면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풍류스런 분위기에서 자랐다. 전북 고창 지역은 여류 명창 중에서 손꼽는 진채선, 허금파, 김여란 명창 등을 배출한 예향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명창은 타고난 재질, 빼어난 미모와 맑은 음색으로 한 시대를 화려하게 꽃피웠다. 13세에 당시 최고의 여류명창인 이화중선이 가설극장에서 부르는 심청가의 ‘추월만정’ 소리에 매료되어 소리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1930년대에 명창 송만갑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정정렬, 박동실 명창에게 소리를 배워,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신이 내린 목소리’로 평가 받으며, 판소리뿐만 아니라 정가, 가야금, 거문고, 춤과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최고의 여류 명인이다. 서예는 1966년부터 3년을 국전에 입선하였을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1991년에 출반된 음반, 첫 곡인 ‘구음’은 일품이다. 김덕수패 사물놀이의 반주로 시작된 ‘구음’은 기악반주가 더해져 절정을 이룬다. 안숙선 명창이 후렴자로 참여한 ‘뱃노래’는 시원하게 쭉쭉 뻗는 김소희 명창의 소리에 어깨춤이 절로 나는 최고의 뱃노래이다. 메나리제 ‘상주아리랑’은 상주아리랑의 처음으로 명창이 짠 아리랑이다. ‘방아타령’은 소리와 기악반주, 후렴자의 합창이 어우러져 멋들어진다. 김소희 명창이 길을 열어주면 후렴 자들이 이끌어 가는 ‘새타령’을 듣다보면 이 이상의 ‘새타령’은 없을 것 같다. 이 음반은 김소희 명창의 소리와 기량이 출중한 반주자(거문고: 김무길, 아쟁: 최종관, 대금: 이생강, 가야금: 안옥선 등)와 후렴자(박윤조, 이명희, 안숙선 등)가 참여한 명반 중의 명반이다. 해설서에는 가사만 있지만, 머리를 만지고 있는 김소희 명창의 음반표지 흑백사진도 눈여겨봐야 할 즐거움이다. 1991년에 출반된 성음의 음반은 1989년 3월 성음스튜디오 녹음으로 지금은 중고시장에서 제일 비싸게 거래되는 국악CD음반이다. 이 음반은 2009년에 김소희 명창의 후손들과 전출반사인 ㈜성음의 양해로 로엔엔터테인먼트(주)에서 김소희 <온고지신>이라는 이름으로 재 출반되었다. 해설서 내용은 동일하다. 이 음반도 지금은 구하기가 쉽지 않다. 고창 출신 미당 서정주 시인은 "만정 그대의 노래 소리는 고창 흥덕의 옛날 못물에, 몇 만 년 이어 핀 연꽃이 들어 있도다. 학같이 훤출하고 거북이처럼 질기던 이 겨레의 바른 숨결이 잠겨 있도다....” 라고 명창의 기념비 뒤에 설파하였다. * 성음 음반의 사인은 필자가 무더위가 한창인 1992년 8월 1일 종로구 소격동 김소희 명창의 집에서 인터뷰 후 받은 것으로 보물같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관련 음반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DS-019(CDS)*&page=1 관련 음반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L-100003772&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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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외길 60여 년, 국악계 마지막 자존심, 김소희1979년 5월 전북 고창 청년회의소는 이 고장 출신 여류 명창 ‘만정(晚汀) 김소희 여사 명창 기념비’를 그의 고향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에 세웠다. 김소희 씨는 인물 많기로 유명한 고창에서 이곳 사람들이 선뜻 내세우는 ‘자존심’ 중의 하나. 고창 출신 미당 서정주 시인은 명창 기념비 뒷면에 다음과 같이 읊어 새겼다. 만정 그대의 노래 소리에는 고창 흥덕의 옛날 못물에 몇 만 년 이어 핀 연꽃이 들어 있도다. 학같이 훤출하고 거북이처럼 질기던 이 겨레의 바른 숨결이 잠겨 있도다······. 만정은 김소희(金素姬 1917년 10월 17일생) 씨의 아호. 국악계에선 ‘만정 선생’으로 통한다. 5척 단구의 여자 몸이지만 그만큼 처신이 당당하고 매사를 맺고 끊는 맛이 분명하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소리꾼으로 인간문화재(제5호, 1964년 1월)로 지정되었다. 유명세도 높아 그녀의 일생에 관한 부분도 웬만한 사람은 알 만큼 알고 있다. 그러나 국악계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통하는 만정의 가슴 속 쇳덩이 같은 응어리는 아직도 녹을 줄 모르고 오히려 커 가고 있다. 소리를 한답시고 배움을 뒤로 미뤄 놓은 평생의 철부지 회한, 여자의 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대중 인기인의 길, 창은 ‘상것’들이나 하는 소리 정도로 알며 하시당하고 살아 온 세월······. 이 모든 것들이 예인의 길에 새로 입문하려는 후학들에겐 금과옥조 같은 스승의 가르침으로 남는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평범한 아낙으로 요조숙녀의 길을 가지, 가시밭길 같은 국악인의 길은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있는 50여 평 대지의 2층 한옥이 김씨의 집이다. 평생 모은 재산을 국악계에 희사한다는 ‘낭보’에 접할 때마다 김씨의 가슴은 뜨끔하다고 했다. 재복이 안 따라서인지 자신은 60여 년의 국악 일생에 남은 거라곤 집 한 채 뿐이기 때문이다. 광주고등보통학교 시절(13세) 당대 여류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의 소리를 가설 무대서 듣고 공부를 작파해 버린 김씨는 광주에 내려와 소리를 가르치던 동편제 소리 대가 송만갑(宋萬甲) 선생 문하에 들어가 심청가를 전수받으며 평생 명창의 길에 들어선다. 고창은 창악계 여류 명창의 비조(鼻祖)로 꼽히는 진채선(陳彩仙, 동리 신재효 제자) 허금파(許錦波, 1920년 원각사 시절 월매 역)를 배출시킨 곳이다. 김씨 또한 전라도 풍류 대가였던 부친(피리ㆍ단소의 대가)의 ‘끼’를 받아 언뜻 듣기만 해도 훌륭히 모창해 냈다. 6개월 학습 결과는 남원명창대회(14세) 1등으로 나타났다. 그 때 특상은 군산의 나이 많은 손채옥(孫菜玉), 2등은 이름도 낯익은 신숙 씨였다. 이후 전주의 정성린(鄭成麟) 씨를 찾아가 승무 살풀이를 배운 뒤(14세) 이듬해 겨울 ‘영신환’ 가방 하나 들고 상경 길에 오른다. 당시 연극 배우였던 복혜숙(卜惠淑, 작고) 씨와 친구였던 이모 김남수(金南洙) 씨가 명고수ㆍ명무 한성준(韓誠俊) 씨를 소개해 주며 ‘오늘의 김소희’로 일어서게 된다. 김소희(동편제) 창은 ‘상것들이나 하는 소리’라는 삐뚤어진 시각 때문에 천대받고 살면서도 국악을 위해 평생 헌신했던 예인이었다. 김씨 눈을 보며 "사목(뱀눈)이라 재주 있겠구먼.” 하던 감격과 충격을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 이 때부터 조선성악연구회를 드나들며 창악계를 주름 잡던 송만갑, 정정렬(丁貞烈, 춘향가) 선생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만난 인연치고 스승 복이 많다고 지금껏 자랑하고 있다. 이 때 이모는 아명 옥희(玉姬), 호적명 순옥(順玉)을 버리고 ‘소희’라 지어 주며 "기왕 들어선 길, 오기로 버려 내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22세에는 명창 박동실(朴東實, 납북) 씨를 화순 동복으로 찾아가 수궁가와 적벽가를 보탠 이후 김계문(金桂文, 향제 가곡), 유순석(양금), 이승환(거문고), 강태홍(姜太弘)ㆍ김윤덕(金允德) 씨(가야금) 등 그야말로 스승 복이 줄줄이 이어진다. 김씨가 아껴 사용하는 아호 만정(晚汀)은 19세 때 김종일(金鍾益, 우석대 설립자) 선생이 즐겨 찾던 ‘관상장이’한테 부탁해 지어 준 것이다. 그 때 관상장이는 "싫으나 좋으나 80까지는 소리를 해야 되겠다.”고 ‘악담’을 했다며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한다. 15세의 어린 나이로 일본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의 춘향가 취입, 빅터ㆍ오케이 레코드 양사의 김소희 쟁탈전, 쌀 한 가마 3원 50전 할 때 2백 원씩 받던 월급, 창극단 조선창극좌에서 민족 의식 고취시킨다며 왜경에게 쫓기고 유치장에서 밤새우던 일 등이 해방 전 교차된 만정의 영욕이다. 여성국악동호회(이사장 박녹주) 햇님달님의 인기, 혈육보다 더 애정이 진한 박귀희(朴貴姬, 가야금 병창)와 피난 시절 부산에서 하던 식당, 국악예술 고등학교 전신인 민속예술학원 설립, 대만과 공산권만 빼놓고 거의 다닌 세계 순회 공연, 그의 후반의 일생은 이렇게 요약된다. 심청가 5장 전집ㆍ춘향가 6장 전집 취입, 국민훈장 동백장(1973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음악 부문 상(1984년) 수상 등의 행적이 빛나건만 사는 게 고달프고 여인의 길이 서러워 수 차례 죽을 결심도 굳혔었다고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우전 신호열(雨田 辛鎬烈) 선생한테 배운 안진경(顔眞卿) 체로 1967~70년 내리 3년을 국전 서예에 입선했다. 병든 어머니를 입원시키고 아들 교복 사줄 돈이 없어 가락지 빼어 팔 때 만정은 붓을 들어 고약한 팔자에 대한 분노를 삭였다고 했다. 붓끝에 떨어지는 묵정(墨精)의 흔적 속에 ‘정신일도 하사불성’을 체휼하고 삼계(三界)잡념을 떨쳐 버린단다. 최근엔 월하(月荷, 여창 가곡)의 권유로 3년 전 입교했던 원불교에 새삼 애착을 갖고 있다. 이렇게 살아 온 만정의 예술속은 장영찬(張永瓚, 명창, 장판개의 아들)ㆍ안향연ㆍ김동애(이상 작고) 씨와 딸 박윤초(朴倫初, 판소리ㆍ기악ㆍ춤) 씨를 비롯 성창순(成昌順, 인간문화재 5호)ㆍ남해성(南海星, 준문화재)ㆍ박양덕(朴良德, 국악인 김무길 씨 부인)ㆍ신영희(申英姬, 조교)ㆍ유수정(劉秀正, 국립창극단)ㆍ한정하(韓正廈, 전수생)ㆍ이명희(李明姬, 1990년 전주대사습 대통령상) 씨 등이 잇고 있다. 주부로는 박정숙(朴貞淑)ㆍ한인환(韓仁煥)ㆍ김경애(金敬愛) 씨 등이 마음이 가고, 민속예술학원ㆍ국악고 등을 통해 그녀의 창맥을 잇는 제자는 1000명도 족히 넘는다. 가성을 안쓰며 상ㆍ중ㆍ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아직도 정동편(正東便) 소리를 한배 채워 부르는 김소희 여사. 그런 그녀가 살풀이 덧뵈기춤(즉흥춤)을 출 때는 소리꾼인지 춤꾼인지 구별 못 한다는 전문가들의 탄성이다. 서울올림픽 개ㆍ폐회식 때 ‘떠나가는 배’의 뒤풀이 소리로 세계를 숙연케 하고 전율시켰던 김소희. 그에게 첫결혼은 언제 했느냐고 물으니 "그런 건 왜 묻느냐.”고 정색을 했다. • 김소희 동편제 명창 계보(번호는 배운 순서)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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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뱅이 화신으로 살아 온 외곬 50년, 이은관50여 년간 이은관(李殷官, 1917년 11월 27일생) 옹이 찢어 버린 배뱅이 아버지 갓은 모두 3000여 개가 넘는다. ······ 이 갓을 들고 보니이 갓은 우리 아버지 갓이 아니로구나(갈기갈기 갓을 찢고) ······또다시 이 갓을 들고 보니이것도 우리 아버지 갓이 아니로구나 ······(이번엔 울상을 지으며 쫘악쫘악 갓을 찢어 버린다). 이렇듯 신명 나기에 따라 배뱅이굿 한 판(약 1시간)에 서너 개씩 찢어 온 세월. 언뜻 한 판에 찢는 갓을 세 개씩만 어림잡아도 지금까지 이옹이 불러온 배뱅이굿은 1000번이 넘는다. 그것도 한 가지 소리로만 1000번 이상. 이젠 그쯤하고 지칠 때도 됐으련만 앞으로도 1000개 이상은 더 찢고 싶다고 욕심을 낸다.이옹의 연세를 알면 모두가 깜작 놀란다(이은관 옹은 2014년 3월 12일 향년 97세로 별세하셨다). "이은관 씨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되었느냐.”고 되묻는다. 1950년대 라디오 시절부터 들어 온 높고 청아한 목소리만 기억할 뿐, 그를 좇아다닌 세월은 뒷전에 미뤄 놓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서도소리 기능 보유자(29호, 1984년)로 지정된 이씨는 물론 ‘관산융마(關山戎馬)’, ‘수심가(愁心歌)’, ‘난봉가타령’ 등 온갖 서도소리를 간드러지게 잘 부른다. 그러나 이씨가 배뱅이굿을 안 하고 ‘딴짓’을 하면 모여든 사람들은 예외없이 투덜댄다. 역시 배뱅이굿은 이은관 씨가 질러대야 제맛이 나고 이은관 하면 무조건 배뱅이굿이다. 이토록 이씨는 ‘이은관 = 배뱅이굿’이란 등식 속에 평생 동안 살아오고 있다.지금은 오갈 수 없게 된 강원도 이천군 이천면 회산리 에서 태어난 이씨는 부친의 ‘산 높고 골 깊으니 여기가 청산마루로구나’라는 농요(農謠) 작대기 장단 속에 꿈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그 아버지에 그 아들일런가. 아무튼 이씨는 천부적인 목구성을 타고 났다. 안방에서 악을 쓰면 부엌 살강의 ‘놋대접이 움직일 정도’로 목통이 컸다며 단전고성(丹田高聲)을 자랑한다. 이천공립보통학교 졸업과 함께 이천읍으로 이사한 이씨는 한때 백수건달 노릇을 했다. "은관이 너는 목청 좋으니 소리나 해 보라.”는 친구들의 부추김에 이천 명월관, 화산관 등을 드나들며 ‘객쩍은 소리’하고 공술이나 얻어먹는 신세였다. 아버지가 양자였던 탓에 할아버지 성화로 장가까지 일찍 가 놓았다(16세). ‘시골 건달’ 이씨는 우연찮게 황해도 건달 황덕열(黃德烈)을 만나면서 전연 뜻밖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황해도 황주 권번 소리 선생인 이인수(李仁洙) 씨를 소개받은 것. 이씨의 그 때 나이 열 아홉이었다. 이렇게 해서 일생을 통해 울고 웃는 사이가 되어버린 배뱅이와의 첫인연이 맺어지게 된다. 이씨는 "얼굴도 모르는 최정승의 딸 배뱅이가 평생 나를 먹여 살리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며 천연덕스럽게 웃는다. 그렇다면 이은관 씨와 부부지간보다 더 자별해진 배뱅이는 도대체 누구인가.한 옛날 서울에 김정승, 이정승, 최정승 셋이 있었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지성으로 명산대찰에 빌어 난 딸들이 세월네(이정승), 네월네(김정승), 배뱅이(최정승). 이들이 자라 세월네와 네월네는 시집 가 잘사는데 배뱅이는 시주 나온 상좌중과 사연(邪戀)에 빠진다. 몰래 정을 통한 상좌중이 훌쩍 떠나 버리자 배뱅이는 그를 못 잊어 상사병으로 죽고 만다.한이 맺힌 최정승과 마누라는 죽은 딸의 넋이나마 만나 보겠다고 팔도의 유명 무당 모두를 불러 모은다. 이 때 평양의 가짜 박수무당이 이 동네 주막집에서 배뱅이집 내력을 미리 듣고 능청스런 넋두리와 울음으로 배뱅이 부모를 속여 많은 재물을 빼앗아 간다는 줄거리다. 어떻게 보면 딸 죽고 재산까지 날리는 분통 터지는 서민들의 한이 포개지지만 이은관 씨의 해학과 넉살좋은 재담으로 듣는 사람은 희비가 엇갈린다.이은관 씨 스승인 이인수 선생은 구한말 평안남도 용강의 유명 소리꾼이었던 김관준(金寬俊) 씨의 수제자. 김관준은 이인수 외에도 최순애(獨順愛), 김칠성(金七星), 김주호(金周鎬), 김밀화주(金密花珠) 등의 소리꾼을 제자로 두었으며 배뱅이굿, 안중근가, 까투리타령 등을 지었다고 전해진다.이렇게 배운 이은관 씨는 21세에 장연 권번 선생을 지내고 23세에는 ‘나도 한번 유명인이 되어 보자’고 무작정 상경한다. 황명선(黃明善, 건달 소리꾼) 씨 소개로 종로 권번에 가 배뱅이굿을 해대니 동기들은 평평 울어댔다. 이 때 최경식(崔景植) 씨를 만나 경기민요와 시조를 배워 두었다.이 때부터 이씨는 바빠졌다. 국일관 놀음청에 나가 장안에서 유명했던 신해중월(申海中月), 백목단(白牧丹) 앞에서 소리를 선보였고 김봉업(어름광대) 씨 단체에 들어가 가설 무대에도 섰다. 박진(朴珍, 작고, 연출가) 씨 소개로 신불출(申不出, 민요 재담가) 씨를 만나서는 국민복 입고 다니며 해방될 때까지 전국 곳곳을 유랑 극단으로 누볐다. 그 당시 군수 월급이 45원일 때 엿새 공연 나가 60원을 받았다고 한다. 어딜가나 ‘이은관의 배뱅이굿’은 3~4창의 열광이 보통이었다. 해방 뒤엔 대한국악원 민요부에 속해 세월을 보내다 장소팔, 고춘자(高春子) 씨와 유랑 극단을 만들어 서민들과 울고 웃으며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음반 취입, 영화 ‘배뱅이굿’ 주연, 라디오ㆍTV 출연 등으로 돈도 벌고 인기도 누릴 만큼 누려온 그다. 미국, 일본, 베트남 등 명성만큼이나 해외 공연을 많이 다녔고 KBS 국악대상(1982년), 보관문화훈장(1990년)도 탔지만 그의 남은 꿈은 ‘제2의 이은관’을 길러 내는 일이다. 20년 전부터 차린 민속예술학원(서울 종로구 장사동 130의 1 삼성빌딩 4층)을 통해 배출된 제자들이 꽤 많지만 현역에서 뛰는 소리꾼이 많지 않다며 밝은 표정만은 아니다. 쓸 만한 제자가 불러도 이씨만큼 알아 주지 않아 힘이 빠진다는 하소연을 자주 듣는다는 것. 박준영(朴準英ㆍ35, 민요 학원), 박경옥(朴京玉ㆍ32, 부천), 인정임(印貞姙ㆍ34, 서울), 김경열ㆍ김경선(33, 쌍둥이, 재일), 최병문(28, 회사원), 박기옥(33, 재일) 씨 등이 이씨 소리제를 이어갈 동량(棟梁)들이다.1남6녀를 두어 모두 출가시키고 노부부가 ‘괜찮은 말년’을 보낸다고 했다. 젊은 시절 백수 건달, 권번 선생 등의 생활을 거쳐 오면서도 ‘가정만은 성역으로 꼭 지켜 내야 된다’는 생각을 가져 온 것이 지금도 대견스럽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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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2편 “레지스탕스 항전” (2014.08.28 방송)KBS 다큐 [KBS Documentary] 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2편 "레지스탕스 항전” (2014.08.28 방송) 최초 발굴-100년 전 연해주 청소년 공연단 상트 페체르부르크 공연 동영상! -취재진은 러시아국립영상사진 아카이브에서 연해주 고려인 지도자이자 최재형 선생이 사비를 털어 조직한 80여 명의 한인 청소년 공연단이 매스게임을 하는 동영상을 특종 발굴하였다. -이 필름은 상트 페체르부르크에서 1913년 열렸던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탄생 300주년 축하행사에 참가한 고려인 청소년들의 공연 영상이었다. 고려인들이 러시아에 이주한지 50여 년이 되던 이 때 최재형은 고려인의 역량을 러시아 황제 앞에서 선보인 것이다. -고려인 청소년 공연단이 흰색 한복바지, 저고리를 입고 신식 모자를 쓴 채 집단율동을 씩씩하게 선보이는 장면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체코 현지 취재-체코군단과 연해주 고려인 독립군과의 무기 거래 -오스트리아는 1차세계대전 중에 식민지 체코인들을 징집하여 전선으로 보낸다. 이들 체코인들이 러시아로 도망쳐 만든 군대가 체코군단인데 그 수가 무려 7만 명이었다. 이들은 태평양을 건너 프랑스로 가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온다. 이때 경비가 필요했던 체코군단과 무기가 필요했던 고려인 독립군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무기구매가 은밀하게 이뤄졌다. -체코군단의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의 은행을 털었던 15만원(현재가치 75억 원)사건은 영화 '나쁜 놈 참한 놈 이상한 놈'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15만원 사건의 주역이었던 애국지사의 후손들을 통해 15만원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짚어본다 -체코 프라하에서 취재진은 체코군단의 지도자였던 가이다 장군이 상해임시정부를 방문해서 받았던 선물의 목록을 발굴하였는데 이는 상해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체코군단과 연해주 독립투쟁의 연관성을 인정하는 주요한 자료다. 상해임시정부가 가이다 장군에게 선물한 화병은 막대한 분량의 무기를 우리 독립군들에게 헐값으로 넘겨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청산리 전투의 주역 이범석 장군이 생전에 체코군단과 북로군정서가 은밀하게 대량의 무기를 구매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증언하였다. 특히 체코군으로부터 구매한 무기를 은밀하고 신속하게 운반하기 위해서 동포들로 구성된 운반대가 수백 명 규모로 조직되어 연인원 수천 명이 이어받기로 운송한 사실들을 확인했다. 연해주 고려인 독립군 부대 일본군 7만 대군과 싸우다. -1910년 후반 10만이 넘는 연해주 고려인 사회는 한반도와 잇닿아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연해주를 기반으로 독립투쟁을 벌인다. 특히 1918년 일본군이 러시아혁명에 간섭하며 연해주와 시베리아에 7만 대군을 파병하자 연해주 고려인들은 소비에트 혁명군과 손잡고 일본군과 전면전을 선포한다. -일본군에 맞서 연해주 곳곳에서 고려인 무장독립군부대가 생겨나는데 한창걸 부대 최호림 부대, 혈성단, 독립단 부대, 솔밭관 부대, 우리 동무군, 대한의용군, 군비단 등 최대 36개 부대 4천여 명의 고려인 독립군이 연해주와 하바롭스크 주 곳곳에서 5년 동안 일본군과 치열한 무장 투쟁을 벌인다. -올가항 전투, 달레테첸스크 전투, 파르티잔스크 전투, 볼로차예프 전투 등에서 소비에트 혁명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러시아 반혁명군에게 강력한 타격을 준다. 이처럼 지속적이고 강력한 독립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요인은 연해주의 10만 고려인 사회의 적극적인 군자금모집과 각종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연해주 고려인 항일무장투쟁의 장엄한 역사는 해방 이후 남북이 나눠지면서 남쪽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에 가려서 지워졌고 북에서는 김일성 중심의 무장투쟁이 강조되면서 사라졌다. 연해주 고려인 독립투쟁의 역사를 재조명하여 이들의 숭고한 투쟁을 선양해야 할 때다. 러시아 혁명의 주역이 된 고려인 -취재진은 러시아 정치사회역사 도서관에서 1921년 11월 28일 크렘린 궁에서 러시아 혁명의 최고 지도자 레닌과 이동휘 선생을 단장으로 한 고려인 대표단이 조선독립에 관해 깊이 논의한 역사적 자료를 취재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고려인들은 전폭적으로 혁명을 지지한다. 고려인들이 혁명을 열렬히 지지한 이유는 계급타파와 민족차별철폐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일본군과 싸우는 소비에트 정부의 정책이 조선독립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고려인의 입장을 생생히 표현하고 있는 보리스 쿠스토디예프의 그림 '제2차 코민테른 대회 기념축제'라는 그림 속의 태극기를 통해 혁명의 열기와 고려인의 기대를 확인해본다. 또한 고려인 독립군 부대의 깃발과 레닌의 연설장에 태극기를 들고 참석한 고려인 대표단의 필름도 취재했다 ※"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관련 영상 보기 1편 "디아스포라 이산” https://youtu.be/n4iPCVjLR2c 2편 "레지스탕스 항전”https://youtu.be/d8Yy9iSer5w 3편 "오딧세이-기나긴 여정”https://youtu.be/WNCzzVizAMc#카레이스키#고려인#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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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4: 반듯한 기개 꼿꼿한 자존심, 김소희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명창 김소희가 순옥順玉이라는 아명의 길이 아니고 그의 이모가 지어 주었다는 소희素姬라는 명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숙명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혜성과 같이 군림하던 여류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의 소리에 매료될 기회가 있었다든가, 광주로 취학을 한 덕분에 송만갑宋萬甲의 문하에 쉽게 들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었다든가 하는, 긴 인생 여로에서 만남의 우연성도 손꼽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보다도 김소희는 날 때부터 명창으로 대성할 남다른 소질을 타고난 게 사실인 것 같으니, 이는 곧 ‘팔자소관’으로 돌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정 김소희는 1917년 12월 1일 전북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미 어려서부터 풍류스런 분위기를 흠뻑 마시며 자라난 셈이다. 전라도 하면 자타가 인정하는 예향인데다 고창 지방은 특히 명창의 고을이랄 만큼 수다한 소리꾼을 배출했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라도 우선 이 나라 여류 명창 중에서 내로라하던 인물인 채선彩仙, 허금파許錦波, 김여란金如蘭 등이 모두 이 고을의 정기를 타고난 낯익은 이름들인 것이다. 어디 그뿐이던가. 한학에 조예가 깊어 판소리 음악의 사설을 정립하고 스스로 많은 단가를 지어낸 판소리계의 은인 동리桐里 신재효 선생 역시 이 고장에서 평생을 보낸 분이 아니던가. 게다가 만정 김소희의 부친은 단소였든가 피리였든가를 잘 불며 꽤나 풍류를 즐기던 분이었다고 한다. 김소희의 어린 감정은 자연히 이 같은 풍류스런 색깔로 물들어가게 마련이었고, 바로 이 같은 감성의 색깔은 그녀의 타고난 재분才分을 한결 실하게 자랄 수 있도록 작용했을 것이다. 여기에 타고난 재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김소희는 확실히 남다른 예술적 재질을 타고났음이 분명한데, 이 같은 심증은 그녀의 몇몇 삽화적인 이력을 일별해 보더라도 이내 알아차릴 수 있다. 거문고에 달통한 사람은 세사世事에도 달통할 수 있다는 말처럼, 하나의 예능에 능통하면 자연히 그 방계의 예능에 수완을 보이는 수가 많다. 김소희의 경우에도 그 폭과 깊이가 남다른 데가 있었다. 국악을 아는 사람은 이해하는 얘기지만, 판소리를 익히면서 정악 거문고를 배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형세가 아니었는데도 김소희는 소리 외에 거문고도 익혔다. 그의 판소리 음악에 깊이 있는 품도를 싣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주의 정성린鄭成麟에게는 고전무용을 전수받아 수준급의 정통성을 보여 주고도 있다. 특히 그가 서화에도 능해서 붓글씨로는 국전에 세 번이나 입선했다는 사실은 꽤 알려진 일이다. 또한 이와 같은 예능적 특기 외에도 김소희는 문학에 꽤나 미련을 두기도 했다고 한다. 언젠가 만정과의 대담에서도 미당未堂 서정주 씨의 시를 즐겨 읽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영화는 아주 광이었고, 어떤 때는 앉은 자리에서 세 번까지 본 적도 있다고 했다. 소리로 입신해서 이것저것 공연을 하러 다니면서도 늘 공부 타령을 하니까, 한번은 어떤 선배 어른이 통신 강의록을 보라고 해서 그 강의록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글공부에 대한 김소희의 집념도 대단한 것 같았다. 다시 태어난다면 소리보다는 뭣 좀 써 보는 글공부를 택하겠다고도 했다. 이 같은 만정 김소희고 보면 확실히 그에게는 음악적 재분 외에 문학적 기질도 많았던 것 같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만정은 타고난 재질에다 열성과 집념 또한 남다른 데가 있었다. 흥덕리 구석의 단발머리 순옥이가 당대의 여류 명창 김소희로 대성할 수 있었던 숨은 내력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하겠다. 흔히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예인의 길이란 노력에 앞서 천부적 재능도 필수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양자를 겸비한 김소희도 이 사실은 강조한다. 숱한 제자들을 가르쳐 봤지만 소질이 없으면 영 늘지를 않고 또 소질 있는 아이치고 열심히 하는 놈 드물다고 한다. 이래저래 특출난 예술가란 백에 하나 나기도 어렵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김소희 예술의 비결은 노력과 소질이 함께 조화를 이룬 데 있었음이 틀림없다. 영롱한 불빛 속에도 슬픈 전설이 서려 있듯이 뭇사람이 환호하는 예인의 길이라고 해서 한결같이 낭만적일 수만은 없다. 더욱이 파란만장한 역정을 걸어와야 했던 명창의 길에 있어서랴. 만정 김소희는 그 숱한 공연 과정에서의 우여곡절과 희로애락의 장면들을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64년 동경 올림픽 때였는데 나는 그곳 교포들 앞에서 노래를 했는데 공연이 끝난 후 늙수그레한 할아버지가 다가오더니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잖겠어요. 참으로 오랜만에 폐부를 찌르는 소리를 듣는다며 이화중선 이후 처음으로 긴소리다운 긴소리를 들어본다고 그럽디다. 그때 그 일이 감명 깊었던 것은 뭐 우쭐한 칭찬을 들어서가 아니라, 과연 한 인간의 마음을 그렇게 속속들이 감격시킬 수 있을까 하는 노래의 고마움에서였지요. 소리하는 보람을 새삼 느낄 것 같더군요. 물론 무대 공연을 치르다 보면 별의별 감격도 많았습니다. 창극단을 따라서 전국을 누비던 때의 일, 62년 파리 공연 이래 구주와 미주 순회 공연 등. 그런데 참 이상합디다. 우리나라에선 괄시받던 판소리가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 가니까 그렇게 인기가 있습디다. 72년 봄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할 때 도중에 기립박수까지 받고는 얼마나 어리둥절했는지 몰라요.” 이런 얘기들만 듣다 보면 명창의 길이란 화려한 동경의 대상일 것만 같으나 역시 영고榮枯가 반반임은 누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에 만정은 10여 년 넘게 전국을 누비며 창극을 하다 보니 어찌나 소리하기가 지겹던지 북만 봐도 소름이 끼치더라고 했고, 그밖의 갖가지 설움과 역겨운 사연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고 했다. 책이 돼도 몇 권은 된다고 했다. 한편 김소희의 인간적인 측면을 더듬어 보면 한마디로 깔끔하고 정갈한 성품의 예인藝人이다. 그녀 스스로 "성격이 차지요. 내성적이구.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니까 성격이 변하데요”라고 실토할 만큼 그녀의 성격은 깔끔한 데가 있다. 그녀의 외모 역시 본인의 평대로 차분하고 단정하며 개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인상이다. 본인은 극구 못생겼다고 하지만 결코 미운 얼굴은 아니다. 곱다는 말보다는 인상적이라는 말이 걸맞으며, 무언가 이성 간에 느낌직한 매력이 연상되기도 하는 독특한 분위기도 풍긴다. 바로 이와 같은 김소희의 인상이 그대로 소리로 연결되어, 그토록 우리를 사로잡고 마는 그의 예술로 승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히 잘못된 판단은 아닐 것이다. 확실히 그의 음악 속에는 그녀의 개성과 숱한 감성의 경륜이 배어난다. 옹골차고도 세련된 그의 성음 하나하나에는 눈꼴신 것을 못 참는 만정의 꼿꼿한 성품이 그대로 묻어나고 찰떡같이 끈끈한 서정으로 청중의 혼을 사로잡고 마는 그녀의 윤기 있는 소리결 속에는 굴곡 있는 인생 역정과 기구한 역사적 시대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이 분명타고 하겠다. 옥색 모시 치마저고리와 옥비녀에 붉은 댕기로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단장으로 차분히 무대에 나와 그가 좋아하는 ‘범파중류’나 ‘옥중가’를 부를 때의 그 기막힌 감동과 여운을 되새겨 보라. 그러면 이내 우리는 그 이지적이면서도 촉촉한 감성이 봇물처럼 흐르는 그의 예술세계를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확실히 김소희는 뛰어난 명창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녀의 개성이 그렇고 그녀의 음색이 그러하며 호소력 있는 악상의 표출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그녀의 소리 앞에서는 누구나 단번에 하나가 된다. 시름을 잊고 걱정을 잊고 현실을 잊으며, 망아忘我의 세계, 피안彼岸의 세계, 몽환夢幻의 세계로 몰입되어 너와 내가 금세 하나가 된다. 모두가 하나 되어 마음껏 예술의 법열경法悅境을 유영遊泳하다가 문득 우리는 현실로 되돌아와서, 다시금 김소희 소리의 위대함을 확신하게 된다. 풍부한 감성과 음악성이 본질적으로 우수적인 성색과 어우러지며, 천변만화의 예술미는 물론 우리 시대의 서민적 애환을 대변해 온 만정 김소희는 분명 ‘일세기에 한 번쯤 나옴직한 명창’이자 우리 모두가 자랑스럽게 가슴속에 심어 둘 동시대의 보배이자 판소리 음악의 정화精華가 아닐 수 없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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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산리 백제 왕릉원 발굴조사 고유제 개최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황인호)와 국립부여박물관(관장 윤형원)은 23일 오후 2시 백제 사비기 왕릉원인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고유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발굴조사에 들어간다. 발굴현장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5-5임 일원이다.부여 능산리 고분군(사적 제14호)은 1915년, 1917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6기의 고분을 조사한 뒤 정식보고 없이 정비한 바 있으며, 1966년 보수공사 중 발견된 7호분과 함께 현재는 총 7기의 고분이 있다. 지난 2016년 6월부터 2018년 7월까지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능산리 서고분군 4기를 조사하여 무덤군 입지와 조성과정, 초석건물지 등의 자료를 확보한 적이 있으며, 이번에 시행하는 조사는 능산리 중앙 고분군의 본격적인 정밀 학술발굴조사로 중앙에 자리한 왕릉군에 대한 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본격적인 조사에 앞서,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 대한 중장기 학술조사의 첫 단계로 묘역 중앙부와 남쪽 진입부를 대상으로 지하물리탐사를 하여, 2기씩 모여 있는 고분의 배치모습과 봉분의 규모가 현재 복원정비된 20m 내외의 규모보다 훨씬 크게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특히, 이번 조사는 백제지역을 대표하는 국가연구기관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국립부여박물관이 ‘부여 능산리 고분군 학술발굴조사 및 심화연구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2020.10.19.)하여 진행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는 발굴조사와 연구를, 국립부여박물관에서는 전시와 홍보를 담당하여 유물의 출토부터 보존, 전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함께 협력하여 진행할 계획이다. 이번 고유제는 백제왕들과 주변에 발굴조사의 시작을 알리고, 조사단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행사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하여 문화재청, 국립박물관, 부여군, 학계 등 관련자 50여 명만 참석하며, 부여군 유림회에서 집례(執禮)를 진행한다. 행사는 식전행사인 백제제례악단의 정읍사 공연을 시작으로 하여 유적조사의 경과보고, 고유제 봉행, 인사말씀, 시삽과 기념촬영의 순서로 진행된다. 이번 발굴조사는 중앙 고분군에 대한 전체적인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체계적인 중장기 학술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문화재청은 앞으로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백제 능원의 모습과 백제 왕릉의 원형을 찾아 복원·정비를 진행할 계획이다. 올해는 중앙 고분군 전체 시굴조사와 더불어 지금까지 조사된 적이 없는 백제 왕릉급 고분(1호분)의 관대(棺臺) 조사도 계획하고 있다. 관대(棺臺)는 무덤 안에 시신을 넣은 관을 얹어놓던 평상이나 낮은 대(널받침)를 말한다.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018년에는 익산 쌍릉(사적 제87호)에서 출토된 인골을 연구하여 백제 무왕과의 연관성을 확인하였으며, 2019년에는 공주 송산리 고분군(사적 제13호)에 대한 정밀 현황조사와 지하물리탐사를 통해 무령왕릉 주변에 백제 고분이 다수 분포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앞으로도 백제 후기 능원의 종합학술연구를 통해 수준 높은 백제의 고분문화를 밝혀나가기 위해 앞장 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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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희정당 내부 특별관람 21일부터 시작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소장 최재혁)는 그동안 코로나19로 미루었던 창덕궁 희정당 내부 특별관람을 오는 10월 21일부터 실시한다. * 매주 수·토요일 / 1일 2회(오전 10시 30분, 오후 2시) 운영 이번 내부관람은 중학생(만 13세) 이상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오는 16일 오후 2시부터 인터파크 누리집(http://ticket.interpark.com) 혹은 인터파크 고객센터(☎1544-1555)를 통해 선착순으로 예매할 수 있다. 1회당 입장인원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15명으로 한정하며, 관람료는 유료(회당 1만 원)로 진행된다. 더 자세한 사항은 창덕궁관리소 누리집(www.cdg.go.kr)을 방문하거나 전화(☎02-3668-2300)로 문의하면 된다. 희정당(보물 제815호)은 대조전과 더불어 조선 시대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창덕궁의 내전 영역에 속하며, ‘밝은 정사를 펼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전각이다. 편전(便殿)인 선정전(보물 제814호)이 종종 국장(國葬)을 치르는 공간으로 사용되면서 희정당은 업무보고, 국가정책 토론 등 왕의 집무실로도 활용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0년 재건한 것으로 전통건축 방식과 당시 근대문물의 양식이 혼재되어 있고, 조선 후기와 근대 왕실의 생활환경도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재건 당시 전체적인 외부 모습은 조선의 건축방식을 따랐으나 앞쪽에 자동차 승하차를 위한 현관이 마련된 점이 특징이다. 또한, 내부는 유리창과 전등, 서양식 화장실을 설치하고 유럽풍의 가구를 갖추는 등 근대적 요소가 가미된 전환기 시점의 궁궐 모습을 담고 있어서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희정당 내부는 문화재관리를 위해 평상시에는 관람이 제한되어 있으며, 현재 문화재청에서는 창덕궁 내전 권역인 대조전과 희정당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전각 내부공간을 당시의 모습으로 되살리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민관협력사업의 하나로 (주)효성, (재)아름지기와 함께 복원한 ‘희정당 중앙 접견실 샹들리에’ 6점에 불을 밝힌 모습을 볼 수 있어 관람객들의 호응도가 아주 높았다. 올해 특별관람에서는 근대에 변형되거나 퇴락한 마루바닥을 보수하고, 벽지 보존 처리, 카펫 재현, 가구 수리 등 내부시설을 복원하거나 정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는 앞으로도 희정당의 대조전 권역의 커튼 복원, 욕실과 화장실 보수 등 단계적인 내부 정비를 통하여 대조전 권역까지 관람객에게 점차적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특히, 희정당은 올해로 새로 지어진지 100년째를 맞게 되어 이 공간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되살리는 의미에서 더욱 이채로운 관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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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문화재연구소, 지하물리탐사를 통해 백제 사비기 왕릉의 본 모습 확인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백제 사비도읍기의 왕실묘역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부여 능산리 고분군(사적 제14호)에 대한 지하물리탐사 끝에 백제 사비기 왕릉의 배치와 규모를 확인하였다. * 지하물리탐사: 땅의 물리적 성질 변화를 측정하여(전기나 진동 등 사용) 땅 속의 구조물이나 매장문화재의 분포를 판단하는 고고과학 기술의 일종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백제 후기 능원의 종합적인 학술연구를 진행하고자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 대한 중장기 학술조사의 첫 단계로 2014년부터 지난해인 2019년까지 묘역 중앙부와 진입부를 대상으로 지하물리탐사를 실시했다.그 결과, 각 봉분의 외곽에는 호석(護石)으로 판단되는 이상체 반응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통해 사비기 백제 왕릉의 봉분은 현재 복원·정비되어있는 지름 20m 규모보다 훨씬 크게 조성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 호석(護石): 무덤의 봉분 외곽에 두르는 돌로 고분의 경계를 나타내고 봉토가 유실되지 않도록 함 탐사결과 왕릉의 배치는 동하총과 중하총, 서상총과 서하총, 중상총과 동상총이 각각 두 기씩 모여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두 기씩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왕과 왕비의 무덤이 함께 조성되었거나 가족단위로 무덤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사비기 왕릉군으로 백제 능원제도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 주목되어 왔다. 특히, 고분군의 서쪽에 있는 능산리 사지(능사)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이 출토된 바 있다. * 능사(陵寺): 능침사찰의 줄임말로 왕릉 주위에 세운 절로 죽은 왕과 왕족의 명복(冥福)을 비는 역할을 함 이 지역에 백제 고분들이 있다는 사실은 1757년 제작된『여지도서』에도 능산(陵山)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에도 이미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는 1915년 일본인인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와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917년 야쓰이 세이이치(谷井齊一)가 처음 실시했었으나 정식보고서도 없이 간단한 설명과 사진 몇 장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현재는 1966년 보수공사 중 조사된 7호분과 함께 총 7기의 고분이 정비되어 있다. 또한, 올해 하반기에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국립부여박물관과 업무협약을 하여 능산리 고분군중 동하총(1호분) 내부 관대(棺臺) 조사를 시행할 계획이다. 이어서 능산리 중앙고분군의 전체 시굴조사도 계획하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러한 조사를 통해 고분간의 선후관계가 확인된다면,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사비기 왕릉의 주인과 백제 후기 능원의 모습을 밝혀내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편, 백제 주요 고분들에 대한 조사를 꾸준히 하고 있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018년에는 익산 쌍릉(사적 제87호)에서 출토된 인골을 연구하여 백제 무왕과의 개연성을 확인하였으며, 2019년에는 공주 송산리 고분군(사적 제13호)에 대한 정밀 현황조사와 지하물리탐사를 통해 무령왕릉 주변에 백제 고분이 다수 분포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올해 10월 발간하는『考古(고고) 물리탐사 Ⅵ』에서는 그동안 수행한 이들 백제 주요 고분들의 지하물리탐사 결과를 중점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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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주한독일문화원 공동주최 '베를린에 남겨진 20세기 초 한인의 소리' 학술회의- 국립국악원, 음반 『그리움의 노래』 제작 및 공개 행사로 학술회의 개최 - ○ 개최일시: 2014.12.13.(토) 10:00 ○ 장 소: 주한 독일문화원(용산구 소월로 132) 강당 ○ 공동주최: 국립국악원, 주한 독일문화원 ○ 참 가 비: 무료 (문의 02-580-3376) 국립국악원(원장 김해숙) 국악연구실은 오는 12월 13일(토) 오전 10시, 주한독일문화원에서 학술회의 ‘베를린에 남겨진 20세기 초 한인의 소리’를 개최한다. 이번 학술회의는 베를린 민족학박물관 포노그람 아카이브와 훔볼트대학교 라우트 아카이브에 소장되어 있는 1910년대 한인들의 음원을 바탕으로, 실린더 음원 청취, 특별 공연 및 논문발표 순으로 진행된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다뤄질 음원들의 주인공은 러시아 군인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된 한인들이다. 당시 독일은 세계 각지의 포로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문화권의 전통 음악과 언어 등을 에디슨 원통형 유성기 음반에 녹음했고, 이 기록물은 199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날 행사의 시작은 원통형 음반의 감상회로 시작한다. 1910년대 당시의 음원을 원통형 유성기 음반에 그대로 복제해 재생하여, 당시의 역사적 기록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 이어서 김광숙 명창(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예능보유자)의 공연도 진행된다. 당시의 음원을 재현한 민요 ‘아리랑’과 ‘수심가’를 부르고 현재 전승되는 해당 민요를 연창해 100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소리를 들려줄 예정이다. 본격적인 학술회의에서는 송지원 국악연구실장이 논문 “베를린 음원의 의미와 가치”를 발표하고, 라스-크리스티안 코흐 박사(베를린 민족학박물관 포노그람 아카이브 대표)와 요헨 헨니히 박사(훔볼트대학교 라우트 아카이브 수집위원)는 해당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역사적 자료를 소개한다. 이어서 이경분 박사(서울대 일본연구소 연구교수)와 김보희 박사(한양대 지역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는 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1910년대 러시아 이주 한인의 음악과 문화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발표한다. 1910년대 이주 한인들의 소리, 음반「그리움의 노래」로 담아내다 아울러 국립국악원이 이번 학술회의에서 다루는 1910년대 이주 한인들의 음원들은, 음반 로 제작해 이날 학술회의 참석자들에게 무료로 증정한다. 이번에 제작한 음반은 국립국악원이 러시아 이주 한인들의 음악문화를 밝히고자 2012년 베를린 민족학박물관 포노그람 아카이브가 소장중인 11개 에디슨 실린더 음반의 14종의 음원을, 2014년 훔볼트대학교 라우트 아카이브가 소장하고 있는 17개 원반형 유성기 음반의 31종의 음원을 디지털 변환하고 이용 협약을 체결해 음반으로 제작했다. 음반에는 당시 한인들이 부른 민요와 독립운동가 등이 수록돼 있다. 수록 음원 중 가브리엘 강(강홍식)이 1917년 독일의 뮌스터 포로수용소에서 부른 노래는 정든 고향을 그리며 탄식에 가까운 노랫말로 암울하고 참담했던 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와 왔든고 와 왔든고 타도타관 월사동이 산도 설코 물도 설코 금수초목 생소한 곳에 뉘길 믿고서야 나 울고 돌아갈 길 나 여기 왜 왔단 말이요” 강홍식 외에도 5명의 러시아 이주 한인 포로가 그 곳에 있었다. 그리고리 김, 스테판 안, 니콜라이 유, 니키포르 유, 카리톤 김, 이들 모두 모병 또는 징집에 의해 러시아 군인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이들이 부른 ‘아리랑’, ‘수심가’, ‘애원성’ 등의 민요와 ‘대한사람의’, ‘조국강산’, ‘만났도다’ 등의 독립운동가요가 자세한 기록과 함께 남겨져 당시 이주 한인들의 노래를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송지원 국악연구실장은 “앞서 독립운동가요와 아리랑 등 일부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으나, 이번에 국악원이 제작한 음반에는 지금까지 확인된 총 28개 음반에 담긴 45종의 음원을 모두 수록하여 관련 연구자와 학계의 환영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학술회의는 관심 있는 자면 누구나 무료로 참가가 가능하다. 음반은 향후 공공도서관 및 국내외 문화원 등에 배포할 예정이다. (문의 02-580-3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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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립연정국악원 초대원장 임윤수 옹 별세평생을 전통 음악의 전승과 발전에 헌신해온 거목 연정(燕亭) 임윤수(林允洙.87) 옹이 11일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故) 연정 선생은 1917년 9월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고, 최윤 신은휴 선생에게 거문고 와 소리를 사사했다. 지난 1981년에는 평생을 수집해 온 국악기 및 국악 관련 자료 2만 여점을 대전시에 기증했고, 대전시립연정국악원을 설립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어 1998년에는 공주에 고인의 별호를 딴 공주시립연정국악원을 개원하여, 국악연주자들에게 사회진출의 폭을 넓혀 주었다. 연정선생이 대전시에 기증한 자료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악학궤범'과 국내 유일본인 '졸장만 록', 500년 이상 된 거문고 등이 포함돼 있어 국악 관계자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또한 생전에 국악의 조기교육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초등학교에 국악기를 제공하며 국악발전에 힘썼다. 또한 대학에 국악과 설립을 적극 추진하는 등 국악 저변 확대에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선생은 초대 대전시립연정국악원장(1981 1988)을 역임하였고, 대전시와 충남도 문화상을 비롯해 대한민국 문화훈장(95년) 수여 받았다. 2001년 대전시민대상 개척장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김순이(79)여사와의 사이에 1남 2녀가 있다. 장지는 충남 공주시 장기면 금암리 대전공원묘원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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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안내]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배뱅이굿〉예능보유자 이은관씨 별세"신명나는 소리, 100살까지는 해야죠" 소리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선생 최근에도 자신을 찾는 무대가 있으면 어디든 달려갔다. 한 공연장 무대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어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있다. "왔구나! 왔소이다. 불쌍히 죽어 황천 갔던 배뱅이 혼신이 왔소이다, 오마니!" 그 주인공. 80년간 '배뱅이굿'의 대가로 살아온 98세 명창 이은관 선생이 3월 12일 오전 9시 30분 황학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슬하에 6남매를 두었으며 서울 황학동에서 아들(이승주)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빈소는 서울 성동구 한양대병원 영안실 2층 10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14일 오전 9시, 장지는 경기도 용미리 시립묘지이다. 이은관 선생은 1917년 11월 27일 강원도 이천에서 8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나온 뒤 철원고등학교 시절 마을 콩쿠르대회에 나가 ‘창부타령’과 ‘사설난봉가’를 불러 1등을 차지했다. 21세 때 철원에서 열린 국악 콩쿠르에서 민요부분에 1등으로 당선된 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해도 황주로 가서 서도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서도소리 가운데 특히〈배뱅이굿〉에 흥미를 느껴 즐겨 불렀다.〈배뱅이굿〉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50년대말 그가 영화〈배뱅이굿〉과 각종 연예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음반활동을 활발히 하면서부터였다.〈배뱅이굿〉은 1900년경 용강군 출신의 김관준이 처음 불렀고, 그의 아들 김종조에게 전해졌으며 최순경· 이인수 등이 부르게 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은관은 이인수에게 사사받았다. 해방 뒤엔 대한국악원 민요부에 속해 세월을 보내다 장소팔, 고춘자(高春子) 씨와 유랑 극단을 만들어 서민들과 울고 웃으며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음반 취입, 영화 ‘배뱅이굿’ 주연, 라디오ㆍTV 출연 등으로 돈도 벌고 인기도 누릴 만큼 누렸던 그다. 미국, 일본, 베트남 등 명성만큼이나 해외 공연을 많이 다녔고 KBS 국악대상(1982년), 보관문화훈장(1990년), 2002년 제9회 방일영국악상도 탔다. 1975년부터 국악협회 이사로, 고문으로 활동했다. 〈배뱅이굿〉은 무가조(巫歌調)와 구슬프고 처량한 성조(聲調)가 많았는데, 그의〈배뱅이굿〉은 무대예술화되면서 무가조가 거의 빠지고 민요조(民謠調)가 강하며 재미를 더하기 위해 사설과 창법도 새롭게 도입되었다. 또한 음탕한 내용이나 욕지거리 부분은 일부 수정하기도 했다. 선생님의 소리제를 이어갈 제자들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배뱅이굿 예능보유자 김경배,전수조교 박준영, 박성현, 전옥희, 이상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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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唱 故 임방울선생 탄신 100주년 추모공연 "추억"일 시 : 2005년 5월 14일 ( 토 ) 오후 4시 장 소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주 최 : 사단법인 국창 임방울 국악진흥재단 주 관 : 사단법인 판소리고법보존회 후 원 : 문화관광부, 조선일보, 국악방송, 국악신문 협 찬 : 삼성출판사 출연진 정철호, 박송희, 성창순, 정명숙, 이생강, 안숙선, 최종민, 박종선, 임이조, 이옥천 채향순, 임경주, 김덕숙, 임향림, 문명자, 정명자, 황승옥, 김향순, 김청만, 정화영, 정정임, 김원령, 조용수, 이일규, 박태오, 박정철, 김창규, 박정아, 한혜선, 표윤미, 신설희, 박미선, 이현정, 박현진, 한아름, 고주리, 이보람, 김희경, 노보라, 윤세림, 노을, 채향순, 중앙가무단 작품구성 ( 사회 - 최종민 ) 1부 임방울 선생님 전상서 선생님 전상서 낭독 최종민 추억(임방울 작창, 작사) 정철호 제자일동 (정정임, 김원령, 이일규, 박태오, 박정철, 김창규, 박정아, 한혜선, 표윤미,신설희, 박미선, 이현정, 박현진, 한아름, 김희경) 제 천 무 채향순 중앙가무단 (정정임, 김원령, 이일규, 박태오, 박정철, 김창규, 박정아, 한혜선, 표윤미,신설희, 박미선, 이현정, 박현진, 한아름, 김희경) 아쟁산조 박종선 임방울제 정철호류 적벽가 정철호 제자일동 (정정임, 김원령, 이일규, 박태오, 박정철, 김창규, 박정아, 표윤미, 박현진,이현정, 한아름, 김희경) 허 튼 춤 김덕숙 2부. 우리국악 세계로 - 명인명창들이 임방울 선생님을 기리며.. 심 청 가 성창순 살 풀 이 정명숙 쑥대머리 안숙선 대금독주 이생강 한 량 무 임이조 흥 부 가 박송희 승 무 채향순 태 평 무 강윤나 3부. 10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창무악 황진이 이옥천, 정명자 외 가야금 병창 안숙선, 문명자, 황승옥, 표윤미, 고주리, 이보람 춘 향 가 장문희 남도 민요 이옥천, 임향림, 김향순, 박정아 한혜선, 표윤미, 고주리, 이보람 사물 놀이 채향순 중앙가무단 (· 꽹과리 : 박세호, 박헌용 · 징 : 신인규 - 장구 : 임효권, 전균영 · 북 : 박승규, 이기철 · 소고 : 신지용, 김지원, 이명모, 박두현) 國唱 故 임방울 선생 탄신 100주년 추모공연 “추 억” 「추억」은 임방울 선생을 사랑하다가 결국은 요절했다고 하는 김산호주라는 기생의 죽음에 당하여 지었다는 노래로 참으로 아름다운 소리다. 국창 故 임방울 선생 탄신 1 00주년을 맞이하여 선생의 숭고한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연이 5월 14일(토) 오후 4시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에서 가진다. (사)국창임방울국악진흥재단과 현재 유일한 제자 정철호 선생이 스승에게 바치는 이번 헌정공연은 故 임방울 선생의 우수한 예술세계를 기리고 국악발전을 향한 국악인들 모두가 다짐하는 공연으로 꾸민다고 한다. 임방울 선생은 광주 광산(光山) 출생으로 1917년 14세 때 이재현(李在賢)에게 《춘향가》 《홍보가》를, 유성준(劉成俊)에게 《수궁가(水宮歌)》 《적벽가(赤壁歌)》를 배웠다. 1928년 상경하여 김창환(金昌煥)의 소개로(혹자는 국창 송만갑의 권유) 동양극장 무대에 올랐으며 자신의 대명사 처럼 유명해진《쑥대머리》를 불렸다. 이 쑥대머리를 처음으로 드어보는 청중은 그 소리에 완전히 도취되었다. 소리가 끝나자 환성과 박수갈채로 장내는 온통 떠나갈듯 하였다. 그 후로 전국 방방곡고에 쑥대머리 열풍을 명성을 크게 떨쳤다. 특히 선생은 일제치하의 암담한 민족현실 가난에 대한 한스러움을 춘향의 신세에 대비해 울분의 소리를 토해냈으며, 민중들에게 큰 위안과 힘이 되어 민족이 하나되는 공감대를 만들어 내고 민족의 결속을 다져주었다. 1961년 3월 10일 아깝게도 56세를 일기로 짭은 생애를 마쳤다. 그때 선생을 아끼던 팬들은 모두 ‘한국의 소리'를 잃었다고들 슬퍼하였다. 거리마다 망우리 장지로 향하는 조문객들로 거리는 인사인해를 이뤄 이와 같은 장의 행렬은 국악사상 처음이었다. 세상은 선생을 잃고서 비로서 국창이라고 떠받들었다. 이번 국창 故 임방울 선생 추모공연은 준비한 정철호 선생은 임방울 선생님에게 바치는 헌시를 통해 “선생님이 남긴 예술의 아름답고 영원과 아무도 흉내낼 수 없은 예술를, 이번 공연을 통해 뒤돌아보며 후세 사람들이 선생의 예술을 통해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고 말한다. “무작정 선생님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가 소리를 배우겠다고 떼를 썼지요. 마지못해 한 가락 뽑아보라더니 ‘공력보다는 목청이 좋다'며 그 길로 제자를 삼아주었다”는 정철호 선생 임방울 선생을 회상하면서 눈가를 적힌다. 14세가 된던 1938년, 이렇게 국창 故 임방울 선생의 제자가 된 정철호 선생은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도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지금 현존하는 유일한 제자로 선생이 남긴소리를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함이 자신의 죄로 인식한다. 임방울 선생의 제자답게 한국 최고의 국악인으로서 수 천 곡을 넘게 작창했다. 또한 판소리, 고법 뿐 아니라 「아쟁산조」를 정립하여 대중과 함께하는 민속음악 반전에 큰 공헌을 세웠지만 정작 선생의 소리에 대한 아쉬움을 말한다. ▶ (사)판소리고법보존회 ▶ 02) 725-9939, 02) 725-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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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창 만정 김소희의 삶과 예술'전무제 문서 전시기간 : 2005년 4월 15일 - 7월 31일(106일간) 전시장소 : 고창판소리박물관 다목적실 '명창 만정 김소희의 삶과 예술'전을 열며 “소리만 잘 하려고 허지 마 . 우선 사람이, 인간이 돼야지 올바른 국악인이여.” 예술에서나 일상에서나 조금도 흐트러짐없이 단아하고 향기있는 삶과 예술로 귀감이 됐던 만정 김소희 . 한평생 소리꾼으로서의 외길을 걸어 무소불통 빛나는 예술혼을 불태웠던 만정 김소희선생이 우리곁을 떠난지 올해로 10년째가 됐다. 그리고, 10주기를 맞이하여 기획소전을 열게 되었다. ‘고려청자의 쑥물 든 하늘빛과 조선조 백자의 희다겨운 옥빛이 어려있고 가을밤 기러기 소리며 청전의 학울음 소리와 낙목한천의 찬바람 소리를 느끼게 했던 목소리 . 평평한 목소리로 나가다 한량없이 높은 소리로 냅다 휘잡아 올려가지고 거기에서 애절비절하게 쥐어짜다가 톱질로 비벼 차근차근 말아들이는 애원성으로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던 명창'(중앙일보 95년4월19일 분수대)이라는 평을 듣는 그는 애기명창으로 어릴 때부터 일찌기 이름을 날렸다. 하늘이 내린 목을 타고 났다 . ‘천구성'인 것이다. 만정선생은 처신이 당당하고 매사에 맺고 끊음이 분명했다 . 김소희 명창의 소리를 들으면 여러 명창의 소리가 들어있다 한다 .춘향가에는 송만갑명창의 소리가 있고, 정정렬명창과 김소희명창 자신의 소리가 들어있다. 만정은 동·서편의 소리를 두루 섭렵하고 자기 소리로 승화시켜 김소희제를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누가 들어보아도 가성이나 꾀목을 쓰지 않고 담담하게 소리를 냈다. 군산대 최동현교수는 19세기말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던 전채선 이래 우리의 여창 판소리가 이룩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만정을 꼽으면서, 윤곽은 크고 바르게 그리면서도 세부는 아기자기하고 부드럽게 엮어가는 것이 그의 소리였다고 평한다. 1917년 고창에서 본명을 순옥으로 하고 농부의 둘째딸로 태어난 그는 가세가 기울면서 9살때 부모의 곁을 떠나 광주 언니집 신세를 졌다. 광주여고보 시절인 13세때 당대의 명창 이화중선의 공연을 보고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울리고 웃기는 가락이며 가사 , 부채를 꼬나쥔채 관객을 온통 탄성의 도가니로 몰고가는 발림, 오금을 못쓰고 빨려들게 하는 아니리 등에 완전히 도취되고 말았다. 열병에 걸린 것처럼 공연이 계속되는 10여일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설극장의 포장문을 들추고 맨 앞자리에 앉았던 그녀가 소리공부를 위해 처음 찾은 이는 동편제의 대가 송만갑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정정렬에게서 춘향가, 전남 화순의 박동실에게서 수궁가 적벽가 등을 배웠다. 김소희는 100년에 한번 나기 힘든 천구성의 타고난 목에다 노력을 더하여 3-4년의 짧은 기간에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정악, 한학, 서예등을 익혀 그의 예술에 품격을 더하였으며, 판소리 춘향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를 비롯, 만정 김소희제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였다. 선생은 전통적인 구전심수 , 이심전심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국악의 제도권 전문교육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해외공연을 통하여 우리 전통음악의 진면목을 세계에 떨쳤다. 2004. 4. 15. 고 만정 김소희명창 10주기에 찾아온 따스한 봄날에 고창판소리박물관 만정 김소희 선생 약력 (서기 1917. 12. 1. ~ 서기 1995. 4. 17.) 성명 : 김순옥(金順玉) 예명 : 김소희(金素姬) 아호 : 만정(晩汀) 유자녀 : 2남 1녀(여식 : 박윤초[朴倫初] 국악인, 교수) ● 학력 / 사사 1917. 12. 1 전라북도 고창(흥덕) 출생 1932. 전남여자고등보통학교 2년 수료 1930. 송만갑 선생 판소리 등 창악사사 1932. 전계문 선생 가곡, 시조 사사 김용건 선생 무용 사사 1933. 정성린 선생 무용 사사 1934. 정정열 선생 판소리 등 창악사사 김종기 선생 가야금 사사 1965. 우전 신호열 선생 서예, 한학 사사 ● 예술활동 1934. 판소리 춘향가 취입(콜롬비아 레코드사) 1936. 판소리 춘향가 완창 취입(빅타 레코드사) (정정열, 임방울, 이화중선, 박록주, 김소희, 고수 한성준) 조선 성악연구회 회원 1948. 여성국악동호회 설립 초대이사 창극 옥중화, 햇님달님 공연 1949. 여성국악동호회 이사장 1954. 민속예술원(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설립, 초대원장 1957. 대한국악원 이사 1962. 국립국극단 부단장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파리국제민속예술제(제9회)참가, 유럽순회공연(파리, 로마, 아테네, 이스탄불) 1963.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판소리) 지정 (문화공보부) 1964. 삼천리 가무단 미국순회공연 민속예술단 동경올림픽 공연, 일본순회공연 1969. 제일동포 순회공연 일본) 1971. 김소희 창악 전수소 설립 1972. 판소리 공연단 미국 순회공연 1973. 오사카 민단초청 8.15 기념공연 (일본) 1976.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 순회공연 (미국) 1979. 국악생활 50년 기념 대공연 세종문화회관) 1980. 한국미술 5000년전 기념공연 (미국 보스톤) 1981. 아사히신문 후원 판소리 순회공연 (도쿄, 오사카, 교토 등) 1983. 한국 전통예술단 일본순회공연 (일본문화재단 초청) 1988. 서울올림픽 폐막공연 「떠나가는 배」 녹음 1994. 한국 국악협회 이사장 역임 서울 국악예술고등학교 이사장 1995. 4. 17. 별세 1995. 4. 21. 한국 국악협회장 (전북고창 선영) ● 교육 단체 활동 1948. 여성국악동호회 설립?초대이사 1949. 여성국악동호회 이사장 1954. 민속예술원 (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설립 초대원장 1957. 대한 국악원 이사 1962. 국립 국극단 부단장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1963.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판소리) 지정 1971. 김소희 창악 전수소 설립 1994. 한국 국악협회 이사장 서울 국악예술고등학교 이사장 ● 수상 1931. 남원 춘향제 민속예술경연 1등상 1959. 국악상 (제4회) (국악진흥회) 1962. 세계 방송대상 1966. - 1968. 서예 입선 3회, 신인예술상 (문교부) 1971. 아시아 음악제 (제2회) 방송적합성 부문 우수상 (유네스코) 1972. 문화예술진흥 공로상 (문화공보부) 1973. 국민훈장 동백장 (대통령) 1979. 국창기념비 건립 헌수 (고창 흥덕 청년회의소) 1982. 초대 한국국악대상 (한국국악협회) 1991. 춘향문화대상 (남원시) 서울시 문화상 (서울시) 초대 동리 대상 (동리기념회) 1994.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문화체육부) 제1회 방일영 국악상 (조선일보 방일영 문화재단) 1995. 작고하신 후 제1호 금관 문화훈장 추서 (정부) 광복 50주년기념 - 역사를 만든 한반도의 주역들 50인중 1인으로 선정 (중앙일보부설 현대사 연구소) 1996. 만정 김소희선생 1주기 추모 논문집헌정 (동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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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보유자 정경태(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창 보유자)옹 별세 (향년 86세)▷ 인간문화재 정경태(鄭坰兌.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창 보유자) 옹이 2003년 12월 31일 오전 4시 50분 서울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1917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고인은 시조·가사·가곡 등 모든 정가(正歌)에 능했던 예인으로, 평생을 시조교육 대중화, 시조창 전승에 평생을 받친 국악계 거장이다. 1931년에 시조창에 입문하여 지방의 임재희 선생으로부터 주부가사, 전계문 선생으로부터 가곡여창을 익혔다. 1939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이병성 선생으로부터 가곡남창과 12가사를 모두 전수받았다. 전주 명륜대 전임강사(1948-53)·김제고·김제여고 교사(1951-53), 전주고 교사(1953-58) 등으로 교단에서 활동하다 1975년 중요무형문화제 제41호 가사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대한시우회와 대한정악회를 창립하고 타계 직전까지 사단법인 한국가악진흥회명예회장을 역임하는 등 정가 보급에 힘썼다. 가곡보·가사보 등 각종 국악보를 간행해 국악이론 체계화에도 공헌했다. 이러한 공로로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제8회 방일영 국악상· KBS국악대상 등을수상한 바 있다. 유족으로는 장남 동식 씨를 비롯해 6남 2녀가 있으며 장지는 전북 부안군 주산면 사산리선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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