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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나는 소리, 100살까지는 해야죠"
소리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선생 최근에도 자신을 찾는 무대가 있으면 어디든 달려갔다.
한 공연장 무대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어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있다. "왔구나! 왔소이다. 불쌍히 죽어 황천 갔던 배뱅이 혼신이 왔소이다, 오마니!" 그 주인공.
80년간 '배뱅이굿'의 대가로 살아온 98세 명창 이은관 선생이 3월 12일 오전 9시 30분 황학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슬하에 6남매를 두었으며 서울 황학동에서 아들(이승주)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빈소는 서울 성동구 한양대병원 영안실 2층 10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14일 오전 9시, 장지는 경기도 용미리 시립묘지이다.
이은관 선생은 1917년 11월 27일 강원도 이천에서 8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나온 뒤 철원고등학교 시절 마을 콩쿠르대회에 나가 ‘창부타령’과 ‘사설난봉가’를 불러 1등을 차지했다. 21세 때 철원에서 열린 국악 콩쿠르에서 민요부분에 1등으로 당선된 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해도 황주로 가서 서도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서도소리 가운데 특히〈배뱅이굿〉에 흥미를 느껴 즐겨 불렀다.〈배뱅이굿〉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50년대말 그가 영화〈배뱅이굿〉과 각종 연예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음반활동을 활발히 하면서부터였다.〈배뱅이굿〉은 1900년경 용강군 출신의 김관준이 처음 불렀고, 그의 아들 김종조에게 전해졌으며 최순경· 이인수 등이 부르게 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은관은 이인수에게 사사받았다.
해방 뒤엔 대한국악원 민요부에 속해 세월을 보내다 장소팔, 고춘자(高春子) 씨와 유랑 극단을 만들어 서민들과 울고 웃으며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음반 취입, 영화 ‘배뱅이굿’ 주연, 라디오ㆍTV 출연 등으로 돈도 벌고 인기도 누릴 만큼 누렸던 그다. 미국, 일본, 베트남 등 명성만큼이나 해외 공연을 많이 다녔고 KBS 국악대상(1982년), 보관문화훈장(1990년), 2002년 제9회 방일영국악상도 탔다. 1975년부터 국악협회 이사로, 고문으로 활동했다.
〈배뱅이굿〉은 무가조(巫歌調)와 구슬프고 처량한 성조(聲調)가 많았는데, 그의〈배뱅이굿〉은 무대예술화되면서 무가조가 거의 빠지고 민요조(民謠調)가 강하며 재미를 더하기 위해 사설과 창법도 새롭게 도입되었다. 또한 음탕한 내용이나 욕지거리 부분은 일부 수정하기도 했다. 선생님의 소리제를 이어갈 제자들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배뱅이굿 예능보유자 김경배,전수조교 박준영, 박성현, 전옥희, 이상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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