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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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통 국악신문국악신문(www.kukak21.com)은 1994년 5월 26일 ‘국악의 해’에 창간한 30년 역사의 전통문화 신문이다. "전통예술 보급에 앞서가는 신문”을 사시로, 설장고의 명인 김병섭의 차남 호규 명의로 창간하였다. 성악 · 기악 · 무용 · 연희 분야 및 한복 · 한식 등 분야를 대상으로 민족음악 · 민속학 · 한국학 · 문화학 범주에서 다루고 있다. 2020년 6월 21일 김지연을 발행인, 기미양을 편집인으로 ‘인터넷 국악신문’으로 재창간, 편집부 · 광고부 · 사업부 체제로 운영하였다. 2021년 8월 30일 기미양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변경, 경영 합리화를 위한 법인 체제로 전환하여 10월 1일 '주식회사 국악신문사'로 확장하였다. 현재 사업부 외 5개 부서와 대기자와 주필 직을 신설하여 30년 전통문화 전문신문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유튜브 '국악신문TV' 등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주식회사 국악신문사 대표이사 기미양 *인터넷 등에 검색되는 ‘국악신문사’와는 혼동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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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36세시풍속과 지역축제 분야 이론가 김명자교수 ‘국악신문’의 창간으로부터 100호를 맞는 기간은 가히 ‘한국은 축제의 나라’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전후하여 시작된 지역축제 붐은 1994년 ‘국악의 해’를 정점으로 관심을 고조시켰고, 새 세기를 맞는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국을 축제의 공간으로 확대시켰기 때문이다. 1958년 시작되어 서울에서만 개최하던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全國民俗藝術競演大會)가 20주년을 맞아 전국 중소도시 순회 개최로 확대되면서 지역축제의 열풍을 가속시켰고, 1996년 이의 실상을 기록한 ‘한국의 지역축제’가 발간되었고, 1999년에는 문화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공동주최하면서 이름도 ‘한국민속예술축제’로 안착되는 과정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판도를 '국악신문'도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바로 100호 기념 편집진용 구축에 지역축제 전문 자문위원으로 민속학자 김명자 안동대 국학부(당시 국립대학교 수칙으로 민속학과 교수가 아닌 국학부 민속학 전공교수였음) 교수의 위원 선임이다. ‘국악신문’ 제99호 <위촉 편집위원>에 ‘민속축제 부문 김명자(안동대 국학부 교수)’로 호명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필자로 참여하던 김연갑(아리랑연구가)선생에 의하면 "당시 초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상황을 서울신문 기자로서 취재하고, 민속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의 지역축제’ 공동 저자로 참여하여 추세를 파악하고 있고, 필드 워크가 강한 분으로 다양한 분야의 자문을 얻을 수 있는 안동대 김명자교수가 꼭 필요했다. 특히 지역축제의 바탕인 세시풍속 연구자여서 더욱 그랬다.”라는 증언에서 김교수의 선임 의미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김교수는 ‘한국문화의 원본사고’라는 공동 집필 연구서에서 한국의 민속, 특히 무속 현상을 분석하여 한국인의 존재에 대한 원질적 사고의 틀을 추출·정리한 ‘원본사고(原本思考= Arche-Pattern) 이론’을 세시풍속의 순환체계에 적용한 연구를 발표하였다. 이 연구는 스승인 경희대 김태곤 교수의 원본사고 이론을 적용, 세시풍속 연구로 확장시킨 것이다. 김명자(金明子/1945~ ) 교수는 이화여대에서 신문학(新聞學 공부하고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출발했다. 기자로 활동하며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하면서 임동권 교수의 지도로 세시풍속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민속학회에 가입하고 민속학자 남강(南剛) 김태곤(金泰坤, 1936〜1995)교수를 만나 다시 경희대학교로 옮겨 민속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안동대 인문대학장 및 박물관장, 민속학연구소장, 실천민속학회 회장, 한국민속학회 부회장, 한일종교연구포럼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현재 안동대 명예교수로 있으며, 문화재청·경상북도·인천광역시 문화재위원, 한국공연예술원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세시풍속’I·II(2005·2007), ‘연아 연아 올라라’(1995), ‘되는 집안은 장맛도 달다-전통의 멋과 슬기’(1994) 등이 있다. 공편저로는 ‘한국의 지역축제’(1996), ‘전통노들제굿연구’(2010), ‘민속문화의 조명과 새 지평’(2007), ‘한국의 가정신앙’ 상·하(2005), ‘한국민속학개론’(1998), ‘한국의 점복’(1995) 등 50여권에 있다. 또한 2003년부터 10여년을 두고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으로 무형문화재를 중심으로 한 민속 역사 관련 각종 학술활동과 함께 민속자료 보존, 평가와 감정 등의 분야에서 대표적인 전문가 겸 학자로 참여해 왔다. 또한 문화재청 규제개혁위원장도 역임하여 전통문화 분야 정책 개발과 운영에도 기여했다. 안동대학교에서 박물관장, 민속학연구소장, 인문대학장 등을 거쳐 정년을 한 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수집, 소장하고 있는 북한의 민속학 분야 연구자료를 분석하여 요약, 해제(解題)하는 활동을 했다. 이 연구는 공동 작업으로 북한 및 중국 동북지역 문화유산 종합학술연구”의 일환으로 북한 고고학 정기간행물인 ‘조선 고고연구’, ‘문화유물’, ‘문화유산’, ‘고고민속’ 등 폐간된 간행물에 수록되어 있는 민속학 분야의 자료와 논문을 요약하고 해제하는 작업이다. 이 결과로 2017년 ‘조선고고연구 해제집’ 1권(46배판, 976쪽)과 2권(46배판 1167쪽)으로, 2018~2019년 102편의 자료와 논문을 요약, 해제한 ‘력사제문제 · 문화유산· 문화유물·고고민속 해제집’ (46배판, 928쪽)를 출간했다. "이념을 떠난 순수한 학술적 의미와 가치가 인정되는가”라는 회의 속에서 시작한 지난한 작업이 우뚝한 실적을 낳은 것이다. 김교수는 동명이인이 많은 ‘김명자’라는 이름 대신 한 한학자로부터 받은 이호(雅號) ‘호정(昊亭)’을 즐겨 쓰며 "여름 하늘 아래 지은 정자에서 많은 사람과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바램으로 살고 있다.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부에서의 진술은 여운을 준다. "반만년이라는 긴 역사를 이끌어 온 우리 민족사에서 삶의 숨결인 전래 민속문화와 민속학의 학문적 연구는 결코 단순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사라진 것을 찾아내 기록으로 보존하고 현존하는 것을 현대문화에 맞게 계승발전시키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 한동안 보유자(속칭 인간문화재), 무형문화재 평가 심의에 참여해 많은 분들과 거북하기도 했지만 사실상 나는 그들과 업무 이외에는 개인적으로 만나지도 않고 대충 넘어가지도 않으니 원칙주의 고집이 환영 받을 리가 없다. 그러나 국가가 검증하고 인정하는 전수자라면 반듯하게 전통 기량을 갖추어야 당당한 것 아닌가. 민속문화는 시대에 맞게 변해도 타고난 골격의 품격은 유전인자처럼 제대로 이어져야 한다.” 김명자교수는 ‘국악신문’ 발전에 함께한 편집위원이다. ‘국악신문’ 역사의 증인이며 기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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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35전통춤, 이론과 실기 정통한 이병옥 교수 2000년 12월 10일, 국악신문은 100번째 기념호를 발행했다. 이를 맞이하며 편집위원회 위원을 확대 개편했다. 총 12인으로 구성한 것이다. 이 편집위원 대폭 확충은 기존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 것인데, 그것은 인물 중심에서 분야 또는 종목 중심의 이동이다. 이는 새 세기 들어 국악 개념의 확대에 따른 것이다. 기존의 국악은 ‘전통음악’ 중심이었다면 전통음악과 함께 연행되는 공연 분야와 복식 분야는 물론 관련 학술 분야까지를 포괄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국악신문도 이 경향을 수용하여야만 했고, 그래서 전문가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전문지로서의 위용을 갖추는 계기를 맞은 국악신문이 확보한 편집위원회 전문분야는 12개이다.민요(농요)/ 전통춤/ 민속축제/ 판소리/ 아리랑/ 민속극/ 기악 및 고법/ 무속/ 국악교육/ 고음반/ 시조/ 불교음악 분야이다. 이 중에서도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가 전통춤 분야였다. 정악에 따른 춤, 기악에 따른 춤, 무속에 따른 춤, 전통을 기반으로 한 창작춤, 다양한 종목과 분야에 이른 춤에 대한 기사화는 전문성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의 필요성은 전문성을 지닌 편집위원 위촉으로 가능했다. 또한 시대적인 필요성에서도 그랬다.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종목 대비 민속무용 부문(20종)이 상대적으로 높았고, 그만큼 논란이 많았다. 전통춤 전승이 맹목적인 무형문화재 보유자 양성이고, ‘보유자는 제왕’이란 비난이 일어나면서 지정 종목에서 문화유산 개념 전환의 필요성이 대두 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무형문화재 제도와 문화유산 개념 문제 등 복잡한 논리 적용이 요구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전통춤 분야의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이병옥(李炳玉) 용인대 교수의 편집위원 선정은 매우 적절하다. 1981년 송파산대놀이 전수조교가 되었고, 1985년에 무용평론가상을 수상했고, 1988년 유도대(용인대)학교 무용과 교수가 되었고 1993년 무용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니 명실상부한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전문가이다. 김양곤 서울교대 교수와 중앙대 정병호(鄭昞浩/1927~2011) 교수의 학맥을 잊는 이교수는 독보적인 권위와 이론으로 답습되어 오는 전통춤 분야의 문제점을 무겁게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전통성과 즉흥성, 창조성 없는 춤은 살아있는 춤이 아니다”라는 지론에 문화재법에서 원형이란 개념을 버리고 전형(典型)으로 시각을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전통춤 학계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며 해결 방안을 앞장서 모색하게 된 것이다. "춤의 인류학은 사실상 인류학자들이 없고, 그냥 인류학자들이 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인류학적으로 접근해보면 전통춤은 법칙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원리를 찾아내야 해요. 그런 개념으로 고대무용을 이번에도 정리했고. 비교하면서 전 세계적 시각으로 서양춤과 비교하면서 한국춤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병호 교수님의 학설을 더 발전시키고 세분화해서 기초를 마련해가지고 정병호-이병옥의 분류법으로 전통춤을 연구하고자 합니다. 분류법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니까.” 이 교수는 전북 전주 출생으로, 서울교대와 서경대를 졸업하고 고려대와 중앙대에서 석사학위를, 경기대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무용사학회 초대회장, 한국동양예술학회 회장,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 경기도·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을 역임했다. 용인대 무용학과 교수를 25년간 역임하고, 현재 용인대 무용학과 종신명예교수로 있다. 한국춤비평가협회 공동의장, 이북오도청 문화재 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 ‘송파산대놀이 연구’(1982), ‘춤따라 세월따라-이병옥무용평론집’(2006), ‘한국무용통사-고대편’(2013) 등 삼십여 권이 있고, 백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는 국악신문 편집위원 선정 당시 전수조교로 열정을 다하던 송파산대놀이의 보존회 회장직을 맏고있다. 전통예술 연구가로 용인대 무용학과 종신명예교수로 연구도 계속 중이다. 또한 무용평론가로도 각종 매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병옥 교수는 국악신문 발전에 많은 이론적 자문을 해준 인물이다. 소중한 ‘국악신문인’의 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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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34‘신국문학운동’의 개척자 설성경 교수 특집부 기자 ‘국악신문’은 100호를 기념하여 특별호를 발행했다. 2000년 12월 10일자 발행이다. 이 특별호에서 눈에 띄는 기사는 ‘국악신문의 새로운 지평 열기’라는 제하의 시론이다. 정주기 체계에 따른다면 100호는 의미가 매우 큰 계기이다. 그래서 이제까지의 경과에 대한 회고와 새로운 길에 대한 각오를 표명하게 된다. 이에 따라 ‘국악신문’으로서는 당연히 전문적인 소견을 피력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취지에서 쓰여진 것이 이 시론이다. 필자는 당시 연세대학교 교수로 ‘신국문학운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설성경(薛盛璟/1944~) 교수이다. 시론 ‘국악신문의 새로운 지평 열기’는 특집답게 제2면 톱에 게재되었다. ‘국악신문’을 ‘선구적 전문 언론기관’으로 전제하고, 그동안 특수성을 지닌 국악 전문지로서 ‘전통문화예술의 지킴이’ 역할을 해 왔다면, 이제는 언론으로서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는 세론(世論)이다. 21세기 문화시대, 세계화 시대,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 11명의 편집위원들을 위촉한 바탕에서 가능하고 필요한 방향 전환이라고 한 것이다. 언론의 비판적 기능과 전망적 기능을 수준 높게 이끌어 내야하기 때문에 ‘국악신문’은 다음의 다섯 기지를 해결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 첫째는 국악의 새로운 진로에 대한 진단을 언론 차원에서 수렴하고 실행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둘째는 국악인들의 자기 인식 계기 마련을 위해 주어야 한다. 셋째는 정부 유관기관과 기업 등과의 유기성 확보를 해야 한다. 넷째는 국민의 국악 인식도 제고와 해외 정보 입수 편의를 제공하는 시스탬 구축을 해야 한다. 다섯째는 국악 향수 대상 확대로 연령층 편차를 극복해야 한다. 합리적이고, 가치있고, 실현성 있는 주장이다. 이어 결론에서는 다음을 다시 당부하는 것으로 맺었다. 21세기에 대응하는 언론으로서의 기능을 강조한 것이다. "국악신문은 국악발전의 양대 축인 국악인과 국악 애호가가의 관심을 유도해내는 창의적인 기획과 실천적 활동을 담당해야 한다. 국악신문은 21세기라는 새로운 문화 상황의 변화 속에서 국악이 나아가야 할 기본 방향을 제시해 줌으로써 국악 활동의 보도 기능과 더불어 그 이상의 비판적 기능을 더욱 충실히 이행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설성경) 설 교수는 이 시기 판소리계 춘향전 등 고대소설에 대한 독보적인 연구 업적을 낳고 있던 시기이다. 1977년 '춘향전 비교연구'를 나손 김동욱 교수와 공저로 출간한 것을 계기로, 1세대 연구에서 2세대 연구를 맡게 되어 춘향전 연구의 학통을 물려받은 것이다. 춘향전은 17세기 광대들의 판소리에서 출발하여 약 3백여년 간 다양한 장르를 통해 작품의 생명력을 이어왔다. 그 결과로 민족의 한과 신바람이란 정서가 응축될 수 있었고, 민족의 보편적인 감성을 가장 적절히 담아 네게 되었다. 이로부터 춘향전 연구의 대가가 되었다. 대구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춘향전 연구의 최고 성과로 원작가가 산서 조경남임을 밝혀내었고, 이를 기점으로 순수학의 심화 위에서 응용학으로 확장하는 ‘신국문학운동’의 개척자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장, 국학연구원 원장, 강진다산실학연구원 원장, 남해유배문학관 명예관장을 역임하였다. 이 같은 순수학 연구 이론을 토대로 ‘춘향전 특별전’을 비롯한 다양한 응용학을 전개하여 학술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힘쓰고 있는 현장 지향적 연구자이다. 설성경 교수는 21세기에 들어 선 ‘국악신문’의 언론 기능 확대라는 도약에 큰 동력을 부여해준 편집위원이다. 전통문화 전문지로서의 ‘국악신문’ 편집진용 확립 과정에 크게 돋보이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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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33국악문화 정책 전문가 김승국 이사장 당시로서는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서울국악예고의 관계에 대해 우리나라 국악교육과 인재 양성의 양축으로 인정하지만 그 생태적 긴장관계에 대해서는 드러내 놓고 의견을 개진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 글은 "국악교육의 문제점들을 정확히 파악하여 시정하고 국악예술교육의 방향을 합리적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요지를 제시하였다. 두 학교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아악과 정악 대(對) 민속악의 전승 발전을 위해 설립 된 목적을 정체성으로 전제하였다. 이에 대해 그 배경을 이렇게 진단했다. "현재 양교는 교육 본연의 목적을 수행함은 물론 학생들을 대학으로 진학을 시켜야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안고 있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입시 실기 과제로 정악과 산조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민속악에 뿌리를 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는 정악을 가르치고 있으며 아악과 정악에 뿌리를 둔 국립국악고등학교도 균형있는 국악교육의 필요성과 대학진학이라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민속악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두 학교가 건학이념과 정체성에서도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하였다. 당시나 지금의 관점에서도 적확한 진단이다. 이는 해당 학교 현장에서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전문가로서 전문 매체에서는 당연히 반영해야 할 고견입이 부명하다. 김 이사장의 자문은 다양하게 반영되었다. 특히 제97호부터 연재된 ‘기산 박헌봉(岐山 朴憲鳳/1906~1977)의 <國樂運動 半生記> 연재도 김 이사장의 자문에 의한 기획물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문화정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대외 활동을 펼쳐나갔다. 2004년~2012년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2009년~2011년 경기도문화재위원, 2011년~2015년 서울시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을 거치면서 한국의 전통예술 및 무형문화유산 발굴, 보존, 전승 및 활용에 대한 전문가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더불어 정책분야 이론과 연구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동국대학교 겸임교수로서 ‘민속악연구’, ‘전통연희개론’, ‘예술행정’ 강좌의 강의를 맡았고, 문화예술현장의 전문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노원 지역의 문화 거점 기관으로서, 문화예술진흥과 지역주민의 문화 복지 구현을 위한 ‘Think Tank'이자 ’Do Tank'를 지향하며 세워진 노원문화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문화적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활동성이 큰 기관장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런데 김이사장의 세평은 학교법인 국악학원 소속의 사립학교 국악예술고등학교를 2008년 3월 1일부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로 개편시킨 공로자로 보고 있다. 우리 국악계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1999년 (사)전통공연예술연구소 개소 시기에는 국악신문 판형을 잡지형으로 개편하는데 편집에 자문을 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김이사장은 국악교육과 문화정책 전문가로서 국악신문 발전에 기여한 소중한 후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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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32무속음악 기층성 강조, 양종승 박사(下) ‘국악신문’ 100호 기념 기획물 <국악시론>의 첫 필자인 양종승 박사는 ‘국악은 다양한 장르를 아울러야 한다’는 제하로 신앙과 국악의 관계를 제시했다.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춤은 장단 속에서 추어지고 가락의 음률이 발림 속에서 맺어지는 국악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그 속에는 상징적 행위를 동반한 놀이성과 의례성이 대단히 강조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우리 삶 속의 신앙 그 자체였다. 신앙을 바탕으로 짜여진 소리와 행위는 떨어짐이 없고 놀이와 의례가 합일됨에, 결국 예술적으로 극대화 된 국악으로 꽃 피었던 그 것의 모태를 아우러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신앙을 바탕으로 짜여진 소리’는 ‘예술적으로 극대화 된 국악’이라는 논지이다. 전통음악의 기층에 무속음악이 자리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기에 애둘러 표현한 것이다. 기실은 무속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양 박사는 무속학의 권위자로서 무속 연행에서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것이 우리 전통음악의 기층을 이루었음을 제시한 것이다. 양박사의 무속에 대한 인식은 남다른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영적인(spritual) 민족'이라고 단언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위의 칼럼을 쓰던 시기의 한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인데, 이어서 "무속신앙은 한국의 역사ㆍ문화의 근저에 자리한 중요한 가치입니다. 무속 연구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업이죠.”라고 한 말도 같은 취지이다. 즉, 무속의 세계관이 한국인의 정체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한 것으로 양 박사의 무속론은 한국학 전반을 아우른 결과인 것이다. 1999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으로 재직하던 시기 「한국의 무속:서울.황해도편」 같은 조사 보고서류의 저술은 당연하다. 전공자답게 무당 개인에 따라 각기 다르게 전승되고 있는 무의식(巫儀式) 형태를 조사 기록하고 고찰한 것이다. 이런 결과로 "무교는 현실세계에서의 행복을 위한 종교이다. 기독교나 불교는 현세에서 교리를 믿고 따라야 죽어서도 좋은 세상으로 간다라고 하지만, 무교는 세상을 떠나는 그 누구에게도 행복을 빌어준다."라는 비교론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무속신앙에는 아이를 점지해 주는 신, 풍년을 빌어주는 신, 재물을 안겨주는 신 같은 여러 신들이 공존하여 자연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고 하며 "서로간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 신들은 싸우지 않는다. 평화를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뿐인가. 무속의 영(靈)발로 직감이나 예감을 따르는 신바람을 우리의 기질이라고 하는 ‘통밥론’ 까지 설파한다. ‘무속연희공연’이란 신조어를 창안했다. ‘서천꽃밭에 핀 살잽이 꽃’의 서사로 지화(紙花)의 세계를 펼치기도 했다. 제정일치 사회였던 고조선 시대부터 존엄과 보호의 의미로 산(山) 모양의 모자를 썼다는 ‘고깔론’도 펼첬다. 무속인들의 애환을 함께하는 것으로 작두까지 타는 진정성, 이 때문에 무속인들로 부터 ‘존경하는 후원자'로, 국제적인 학자들로부터 찬사까지 받는다. 유물과 이를 담은 건물이 이념과 실제에서 일치하는 진정한 박물관, 샤머니즘박물관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들의 아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2016년 5월 25일 세긴 양승종 관장의 인사말은 더 없이 소박하여 경건한 신앙고백으로 읽힌다. 온전한 무속인, 완전한 샤먼학자 양종승을 만나는 것이다. "민족 신앙에 몰두하여 전승현장을 찾아 나선 지 수 많은 星霜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이곳저곳에서 사라져 가고 짓밟혔던 神物들을 가지런히 보듬고 쓰다듬다 보니 어엿한 유물로 되살아나 큰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샤머니즘박물관으로 보람판을 걸었습니다. 우리 고유의 신앙사로 면면히 이어져 온 한민족 사상과 철학, 기술과 예술, 감성과 감각을 읽어내는 민족의 유무형유물로 승화되어 더없는 기쁨을 줄 뿐입니다. 부디 방문하시어 민족 신당으로 자리매김되어진 금성당 터전에 神氣서린 샤먼유물이 살아 숨쉬는 담론으로 꽃피어 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나가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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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31국악신문 지면 전문화 안착에 기여, 양종승 박사(中) 특집부 기자 제100호를 맞으며 부문별 전문가 12인의 편집위원 선임은 지면 전문화를 위한 것이다. 이들은 전문성과 나름의 명성으로 기획과 아이템(Item) 선정에 참여하고, 칼럼 및 기획기사 집필과 교열 업무는 물론, 광고 수주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를 통해 국악신문의 정체성 제고에 힘을 더했다. 양종승 박사는 무속분야 전문가로서 칼럼 집필 등을 통해 무속의 역사, 기능, 무속음악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높였다. 지난 회에서는 국악신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폈다. 어린 시절부터 춤과 음악을 체화하고, 무속 현장을 조사하고 유학하여 민속학과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세계적인 샤머니즘 전무가임을 전하였다. 이 번 회에서는 활동상의 성과 중 하나인 샤머니즘박물관과 관련하여 살피기로 한다. 1994년 ‘국악신문’이 창간되었다. 이 해에 당시 일반인들로서는 의외의 두 가지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하나는 개발로 철거 위기에 처한 은평구 소재 ‘신당 금성당(錦城堂) 보존을 위한 LH건설 상대 반대운동’ 기사이다. 신당을 철거하고 재건축을 한다는 데, 이를 결사 반대한다며 그 주인공이 양종승 박사라는 내용이다. 또 하나는 ‘샤머니즘박물관’ 건립이 본격화했다는 보도였다. 당시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인 양 박사가 ‘샤머니즘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양종승) 발족’시켰다는 내용이다.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모두 의외로 받아들인 기사였다. 그리고 3년 뒤인 2013년 드디어 성북구 정릉동에 전문 사립박물관인 ‘샤머니즘박물관’을 개관하였다. 무구, 무복, 문서 등 유물과 기록물 3만여점을 갖춘 전문박물관으로 당연히 양박사는 박물관의 설립자이면서 동시에 초대관장이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샤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그에 따라 다양한 행사와 학술적 접근이 이뤄지게 되었다. 민속기록학회 창립,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관광명소 세계화 연구사업’, ‘금성당·금성대군 충의제’ 학술대회, 금성당제보존회 발족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활동의 중심에는 ‘금성당(錦城堂)’이 위치한 것이다. 이 신당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58호로 지정 보호되는 곳으로 전라도 나주 금성산의 금성대왕(錦城大王)과 세종대왕의 여섯째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 그리고 여타의 신(神)을 모신 곳이다. 고려 왕실을 거처 조선왕실은 진관동, 망원동, 월계동 세 곳에 당(堂) 건립을 후원하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세종대왕 여섯째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도 영험한 신으로 모셔졌다. 그리고 1970년대 들어 도심개발로 지금은 은평구 진관동 금성당만 남게 되었다. 그동안 옛 전통을 이어받아 매년 봄가을 금성당제(錦城堂祭)를 개최하여 나라의 태평성대와 시화연풍 그리고 지역민의 대동단결을 축원해 왔다. 이 역사적인 신당 금성당으로 샤머니즘박물관을 이전, 개관하였다. 드러누워 개발을 저지하여 지킨 23년만의 금성당으로. 샤머니즘박물관 개관에 따른 찬사는 컸다. 양 박사에 대한 일부의 평가이기도 하다. 당연히 누구보다 앞서 반긴 전 제주민속박물관 관장 진성기 박사의 "빛나는 햇살처럼, 늘 푸른 솔처럼, 명예도 벼슬도 다 내려놓고 가시밭 험한 길을 택해 나선 참삶의 결과~”에 이은 각계의 축사는 다음과 같다. # "국립민속박물관에 재직하면서 샤머니즘 연구를 해오며 세계적 학자들과 교류하여 한국 무속의 위상을 더 높였습니다. 이제 선생이 평생 모은 샤머니즘 유물들을 정리하여 샤머니즘박물관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하였으니 진심으로 축하하며 환영의 박수를 보냅니다.”(인하대 명예교수 최인학 박사) # "한삼자락으로 탈춤사위를 뿌려내고 승무장삼으로 허공을 감싸던 양종승 박사의 옛 모습이 솔향기처럼 그윽하게 다가옵니다. 한민족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한국인 사상과 정서의 근간이 되는 무속학에 몰두하여 온 외길인생 양종승 박사는 샤머니즘 탯자리를 찾아가는 기나긴 구도의 여행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작은 마침표로 그토록 갈망하던 샤머니즘박물관을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문화 간 소통의 장으로써 그리고 현대인의 힐링터로써 역할 해 나갈 샤머니즘박물관 개관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전 국립민속박물관장 이종철 박사) # "평생 동안 열정적으로 샤머니즘 조사와 연구는 물론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전시함으로써 국내는 물론 국외적으로도 한국 샤먼문화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번 샤머니즘박물관에서 선보이게 될 양종승 박사의 샤먼유물들은 한국 및 아시아 샤머니즘을 표방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귀중한 유산들입니다. 이제 샤머니즘박물관 전시를 통해 앞으로 국내외 소장 및 중견학자와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 질 것이 분명합니다.”(한국무교학회 고문 엘렌 해의만) # "한국무속을 깊이 있게 연구해 온 양종승 박사는 샤먼 학자로써 그리고 샤먼들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대변자로써 이번 샤머니즘박물관을 개관하게 된 것입니다. 샤먼 유물의 깊이 있는 전시를 통해 한국 무속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될 것입니다.”(미국아시아학회 회장 로렐 켄달 박사) # "오늘날 서울의 많은 공공 굿당에서는 굿이 행해지고 있지만 현대 한국인들은 그러한 샤먼 유산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있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샤머니즘박물관 개관은 다양한 계층이 샤먼문화를 이해하고 공유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샤머니즘박물관 개관을 통해 한국의 귀중하고 훌륭한 샤먼유산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길 기대합니다.”(서강대 명예교수 다니엘 키스터 박사) # "한국샤머니즘 총체와 중대성을 담고 있는 무속유물을 한자리에 모아 샤머니즘박물관을 개관하니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가 회장으로 있는 ICME 에서 국제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양종승 박사의 샤머니즘박물관 개관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국제저널 무형유산 편집위원 아넷 프롬 박사) 이런 찬사 속에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곳’ 금성당, 세계적 샤머니즘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양종승 박사의 집념이 이뤄낸 인류의 문화유산 금성상 샤머니즘박물관인 것이다. *2021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제5회 전통문화학교 강좌 1회 발표자 양종승 관장을 5월 3일 만날 수 있습니다. 문의(02-351-6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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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30지면 전문화 안착에 기여, 양종승 박사(上) 신문과 방송은 소위 계기특집(契機特輯)을 중시한다. 역사적이거나 국가적인 기념일에 대비하는 특별 취재나 편성물이거나 , 자사 창립 또는 창립자 관련 기념일 특집이 대표적이다. 대개는 5 내지 10년 또는 회차(回次) 단위의 정주년(整週年,꺾어지는 해)에 하는 경우가 많다. 「국악신문」도 100호를 기념하여 지면 전문화를 단행하는 특집 기사를 내보냈다. 당연히 100호를 맞는 감회와 더불어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는 기념사는 물론 편집위원을 대폭 확충, 위촉하고 지면을 전문화하는 혁신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전문 편집위원 위촉은 국악 전문지로서의 안착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악신문」 역사에서 ‘안착기’로 획정하는 기점을 바로 제100호 발간으로 보는 이유이다. 이의 정황은 2000년 11월 20일자 제99호 <위촉 편집위원>이란 10면 기사에서 확인 된다. 이것이 100호 기념 특집기사의 시작인 셈이다. "국악신문사에서는 국악 및 전통문화 발전을 모색하고자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편집위원들을 위촉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이제까지 실어 오던 소식과 국악계 동정기사만이 아닌 국악과 학문, 국악계 비전을 제시하는 신문으로서 발돋음 하고자 합니다.” 이런 취지로 위촉한 전문분야 편집위원 면면은 다음과 같다. 기존의 편집위원에 소속과 직함만을 밝힌 것과는 다르게 전문 분야를 강조하였다. 민요(농요) 부문 이소라(문화재청 전문위원)/ 민속무용 부문 이병옥(용인대 무용학과 교수)/ 민속축제 부문 김명자(안동대 국학부 교수)/ 판소리 부문 설성경(연세대 국문과 교수)/ 아리랑 부문 김연갑(아리랑보존회 이사장)/ 민속극 부문 전경욱(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기악 및 고법 부문 정회천(전북대 한국음악과 교수)/ 무속 부문 양종승(국립민속박물관 전문위원)/ 국악교육 부문 김승국(국악예고 교감)/ 고음반 부문 김종철(고음반연구가)/ 시조 부문 박종순(대한시우회 이사)/ 불교음악 부문 김능화(영산재 전수조교), 이상과 같이 매우 세분화 된 12분과 12명이다. 일반적인 인지도로는 부족할 수는 있으나 해당 분야 전문성으로서는 이의가 없다고 평되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민속’의 강조와 무속, 불교음악, 고법, 아리랑과 같이 종목의 하위 장르를 포함시킨 점이다. 이는 2000년 들어 일기 시작한 문화예술계의 트랜드를 반영한 것이다. 이에 따라 위촉된 편집위원들은 100호부터 고정 코너 필진과 편집 자문역으로 참여하여 국악신문 전문화 안착에 기여했다. 이들의 전문성 발휘는 칼럼, 기획기사, 연재기사 집필, 자문역 등으로 참여했다. 100호를 기념하여 새롭게 마련된 기획물 중 대표적인 지면이 칼럼 <국악시론>이다. 이의 첫 집필은 양승종(1952년생) 박사가 맡았다. 필자인 양 박사는 ‘대체불가(代替不可) 무속학 박사’이다. 이 호칭은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대충의 전문가를 부르는 세속적인 호명이 아니다.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에서 리처드 바우만 교수와 로저 저넬리 교수의 지도를 받아 박사학위를 받은 실제의 민속학과 인류학 박사학위자이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무속춤을, 1970년대에는 황해도 출신 큰무당에게서 무속춤과 소놀이굿을, 이후 강령탈춤과 경기 무속춤 까지 속속들이 섭렵(涉獵)했다. 이렇게 실기를 체화하며 동시에 온나라 굿판을 다니며 보고서와 연구논문으로 학계에 기여했다. 이런 활동은 국내는 물론 해외 한국학계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이런 배경에서 ‘샤먼 학자로써 샤먼들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대변자’(미국아시아학회 로렐 켄달 회장)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이 ‘샤먼들의 대변자’로의 호명은 세계샤먼학계에서도 대체불가 한 인물임을 인정한 것이다. 양 박사는 100호 특집 신설 코너 <국악시론>은 ‘국악을 통해 한국적 문화의 틀을 만들자’라는 칼럼이다. ‘국악은 다양한 장르를 아울러야 한다’라는 지론과 함께 국악신문에 대한 제안을 했다. 칼럼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 국악은 우리의 소리, 행위, 놀이, 의례, 그리고 신앙 등 이른바 한민족 전통문화의 총 집결체에서 표출되어진 역사의 산물이며 애국의 음률이다. 오늘날 까지도 한민족의 세계관은 국악이 바탕이 되는 가무악(歌舞樂)으로 펼쳐져 왔으며 그것은 우리 삶을 통해 입증되어 왔다.(중략) 국악의 미래는 우리들의 새로운 각오와 사고전환을 통한 ‘우리문화의 틀’을 짜는 데서만 찾을 수 있다.(중략) 국악신문은 사회교육적 기능을 발휘하고 그 역할을 수행해 나가야 한다.” 양 박사가 첫 필자로 참여한 <국악시론> 칼럼란은 고정란으로 자리 잡아 이어졌다. 이후 양 박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여 「국악신문」의 전문화에 기여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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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9문화재청 이소라 위원 참여 2000년대 들어 「국악신문」 편집(자문) 위원의 수가 늘었다. 기존 4명 내외에서 6명 내외로 확대된 것이다. 이는 「국악신문」의 편집 방향의 변화를 의미한다. 예컨대 2003년 1월 20일 자 제126호 판권에는 이소라 김명자 양종승 김연갑 김승국 김종철 6인이 표기된다. 이 중에 이소라와 김연갑은 민요연구 전문가이고, 양승종은 무속연구 전문, 김명자 김승국 김종철은 국악정책 연구 분야 전문가이다. 이 중 주목되는 분야가 민요 분야이다. 이 시기는 ‘mbc민요대전’이란 프로그램이 자리를 잡아 대중들에게 토속민요의 가치를 알렸고, 아리랑이 국내외에서 조명을 받는 상황이기도 했다. 이 같은 국악으로서의 민요를 주목하게 하는데 자극을 주고 제도권에 관심을 갖게 한 데에는 이소라 위원(당시 문화재청 상임 전문위원)의 기여가 컸다. 이에 따라 이 위원의 참여는 「국악신문」이 전국 토속 민요판에 관심을 확대시켜 주었다. 이번 회에서는 이 위원에 대해 살피기로 한다. # "1980년대에 당시 70세 전후되는 전국 각 읍면의 도민들을 방문하여 사라져가는 농요 등 전래민요를 집중적으로 녹음하였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보충 녹음과 연구를 계속하여 50여권의 저서와 1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전래민요를 보존하고 한국학의 기초를 닦는 일에 기여하였음.” 이소라 위원에 대한 각주(脚註)이다. 간명하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민요학 연구자임을 입증한다. 현장 음원이 첨부한 50여권의 전문 서적과 관련 논문 발표, 이는 한국학의 기초를 닦은 것일 뿐 아니라 민요의 학술적 가치를 인식시킨 성과이다. 국악 전공자라는 내적 조건과 문화재청 상근 전문위원이란 외적조건이 뒷받침된 것이다. 이 위원에게는 두 가지 직함이 쓰인다. 하나는 ‘문화재청 상임 전문위원’이고 또 하나는 ‘민족음악연구소(민음연) 소장’이다. 전자는 1983년부터 근무한 문화재청(문화재관리국) 소속의 각종 조사 보고서 상의 ‘전문위원 이소라(李素羅)’라는 직함이고, 후자는 1985년부터 1992년까지 발간한 「韓國의 農謠」제1-5집(玄岩社/民俗苑 刊) 같은 저작활동과 <민요권의 의미>(2003. 제1회학술 세미나 발표) 같은 행사의 주관처로서의 ‘나요당(羅謠堂) 이소라 소장’이라는 직함이다. 청주대학 등의 교수나 Arizona State University 등의 교환교수는 물론, 이를 포괄하여 세계적인 민속음악 전문가라는 직함도 있다. 특히 해외에서의 한국 민속음악 전문가로서의 활동은 이 위원만의 활동상으로 국가적 보상이 따라야 할 업적이다. 예컨대 1994년 개최한 아태음악학회 주최의 <한국과 일본의 교창식 모노래에 관한 고찰>(The study about the rice-planting songs of Korea and Japan), 2002년 필리핀국립대학 주최 <A Sharing of Musical Parts as a Manifestation of Cooperation and Joint Work in Korea>(A Search in Asia for a new theory of music] 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Center for Ethnomusicology), 2009년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주관 <아메리칸 인디언 구전 연구와 CD제작>에 참여한 업적은 한국의 음악학 수준을 세계에 알린 연구이다. 이 같은 성가는 이 위원의 전문가로서의 공력이 뒷받침해 주었다. 경기여고 졸업, 서울 법대 법학과 졸업(법학사), 이후 다시 서울음대 작곡과에 편입하여 수학하고 서울음대 대학원에서 석사,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예술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에 병행하여 7개 국악기와 춤과 성악까지 사사했다. 해금(강사준), 해금(김흥교/김영재/최태현), 거문고(이오규), 가야금(홍원기), 장고(박병천), 춤(이동안), 봉산탈춤(김유경), 여창가곡(홍원기/이석재), 가곡(전효준) 등을 사사하며 수학했다. 또한 한국정악원 풍류단에서 연주자로도 참여하였다. 이는 앞에서 제시한 50여 권의 저술과 100여 편 논문의 질적 보장을 담보해 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보상은 값지다. 1992년 KBS국악대상 출판상을 수상했다. 1996년에는 경기여고 동창회가 수여한 ‘열매상’을 받았다. 그리고 2014년에는 민요분야 상으로 최고의 권위를 갖는 ‘월산 임동권 학술상’을 받았다. 이 같은 수상은 그간의 공적에 비하면 미약하기도 하다. 앞으로 국가와 학계의 보상이 따를 것으로 기대한다. 이소라 편집자문 위원은 2000년대 전반기 「국악신문」과 함께 했다. 국악 전문지로서의 전문성을 높이고, 정론지로서의 위상을 높이는 데 힘을 더해준 국악신문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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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8‘풍류방’ 동참, 영상작가 천승요 「국악신문」이 국악전문 매체로서 정립되는 시점은 제30호를 전후하면서 부터이다. 창간으로부터 2년 후이다. 이렇게 규정하는 근거는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편집진용을 갖추었다는 것을 주목한 것이다. 이는 고문과 편집국장과 편집위원이란 진용을 구성, 운용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정체성을 들어내는 편집 방향을 설정하여 사업화와 기사화 하였다는 점이다. 전자는 앞에서 고문 정범태, 편집국장 우실하, 그리고 편집위원 최치성 등에 대해 언급하였다. 후자는 ‘국악인 자료의 수집, 정리와 이의 교육자료화’ 사업이다. 국악인 자료 수집과 정리, 그리고 이의 교육자료화 사업은 국악신문이 내세운 사업으로 이를 대외 서비스하는 부서, 기획 기사로 집중하였다. 그 일환이 ‘풍류방 운영’과 ‘명인명창 선생님들의 사진 구합니다’이다. 독자를 위한 서비스와 독자로부터 자료를 수집하는 양방향 사업이다. 이 두 가지 사업은 3년 정도 지속하였다. 이 사업은 민속음악 자료를 구축하여 국악 사료화 하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 국악사의 중심이 바로 민속음악임을 정립하려 한 것이다. 이 점은 국악신문의 창간이념의 실천인 것이다. ‘풍류방’은 초기 고문 사진작가 정범태 선생의 자료를 활용하는 코너(사업)이다. 그러다 제48호에서 부터는 ‘비디오 천승요’가 참여하는 코너로 확대 되었다. 전자는 스틸 사진이고 후자는 동영상이다. 이는 ‘풍류방’의 활성화를 입증하는 것으로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풍류방은 전통예술과 문화의 자료가 있는 곳 입니다>라는 ‘풍류방’ 코너는 이렇다. "음악 소리 춤 인물 등의 자료들은 우리 문화를 아끼는 슬기로운 이들에게 값있는 양식이 될 것입니다. 보고 싶은 자료나 찾고 있는 자료가 있으면 풍류방으로 연락 주십시오. 사진 정범태/비디오 천승요”(「국악신문」 제40호, 1996. 11. 27, 1면 하단 5단통 박스) 천승요 선생은 이 시기 프리랜서 비디오 작가로 시작하면서 국악신문에 동참한 것이다. 1976년 서울대 국악과 자료실에서 국악자료 수집을 시작한 선생은 1979년 문예진흥원(현 문화예술위원회) 시청각 자료실에서 일하며 본격적인 국악인 기록작업에 들어갔다. 1996년 중반, 문예진흥원을 퇴직한 상태였다. 이때까지 선생이 기록한 공연은 모두 1만3000여 편, 테이프만 해도 4000여 개 분량이다. 여기에는 한영숙(무용) 김숙자(무용) 김월하(여창가곡) 씨 등 이미 작고한 명인들의 생애가 생생히 담겨 있다. 선생의 기록 방식은 일반 방송의 방식과는 다르게 객관적 시각에서 공연 현장을 기록하는 촬영 방식으로 민속학 자료와 예술계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었다. 2014년에는 <무용 토크 콘서트 30년, 순간을 영원히, 천승요>라는 토크 공연이 있었다. 30년간의 기록 작업에 대한 회고와 후진들에 대한 가이드까지 실제 자료를 통해 소통하는 기회였다. 이후 2018년 무용 기록에 대한 학술대회(서울문화재단, 우봉이매방춤보존회 비대위 주관으로 열린 '춤문화 유산, 저작권 타당한가 토론회) 등을 주도하며 영상기록의 활용 가치를 강조했다. 이상에서 제시된 천승요 선생의 영상기록 관련 어록을 통해 입문 동기와 그 가치를 확인 할 수 있다. # "전생에 화가인 인연으로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는 전통예술의 기록 지식과 기록 영상자료의 현실을 그려가고 있다.” # "1980년대 1세대 명인들은 본인들의 춤을 긍지 있게 공연했지만, 무형문화재 정책 때문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춤이 통일되면서 많은 춤꾼들의 춤들이 사라져 갔다.” # "자료에서 그 예술인들의 예술혼이 보여야 진정한 자료다. 자료란 나무(매니아)를 키우는 거름이요 새(예술가)는 나무숲에서 살아야한다” # "모든 영상물 가운데 예술성과 운동성을 함께 지닌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무용영상이다. 스포츠는 역동성과 속도감은 있지만 예술성을 기대하기 어렵고, 음악이나 연극을 영상으로 보는 것은 아무래도 역동성이 떨어진다.” # "통영에서 조각배를 타고 ‘통영 오구굿’을 찍다가 바다에 빠지는 바람에 화면이 끊겨 버린 웃지 못할 장면도 담겨 있다. 몸은 빠졌지만 목숨보다 소중한 카메라는 배 위로 던져 필름을 구했다” # "지금 저는 30년 만에 외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료는 공개돼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동안 기록한 자료들을 공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천승요 선생은 공연자체는 물론, 무용인의 근접촬영과 공연 전후의 분위기 등도 수록하는 것이 특징으로 일반인뿐 아니라 전수받고 연구해야 하는 사람들도 참고할 수 있도록 한 기록이다. 이런 작가 정신을 인정 받아 한국춤비평가협회가 수여하는 2003년 ‘춤비평가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전통 예술 촬영에 반평생 천승요 씨’ 등의 활동상이 국내외 방송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는 인터넷 방송국(http://artskorea.tv)을 운영하고 있다. 선생은 「국악신문」 초기 정체성 확립에 기여한 분이다. 지난 2020년 김호규 대표 1주기 추모공연 ‘씻김’에 귀한 영상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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