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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아리랑의 연원(淵源) 소고 -격암유록을 중심으로-국중성/익산 향토사학자 우리가 불러온 ‘아리랑’의 뜻이 무엇인지 그 근원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학자들로 하여금 많은 연구가 있어 왔으나 아직까지 정설이라는 결론은 없었던 것 같다. 그 발생설에 대한 제설의 몇 가지 예를 보면 대략 여섯 가지가 있다. 이외에도 관련설이 많으나 생략하고 필자도 여기에 제시하는 의견 또한 하나 더 보탠다는 의미라 하겠다.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불러온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이토록 오랫동안 전 민족 구성원이 불러왔겠는가? 필자는 이에 대해 격암유록 갑을가 중 아리령(아리랑) 기록을 주목하여 왔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아리랑은 ‘후천개벽 천기도가(後天開闢 天機道歌)’이다. 이를 풀이하면 아리랑고개는 ‘아리령’(亞里嶺)이며 ‘아리(亞里)’는 십승의 마을이나 궁을촌으로 가는 고개(嶺)다. 십승촌(十勝村)은 다른 표현으로 ‘천파(千坡) 즉 하늘고개’이다. 그 고개 위에는 정거장이 있는데, 넘어가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이를 전제로 아리랑 대표사설을 풀이하면 이렇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는 아리(亞里)’로, ‘버금 아(亞)’자에 담긴 십(十)의 형상 그대로 ‘마을 리(里)’는 십승촌=궁을촌=신선 세계를 뜻한다. 곧 아리랑고개 (亞里嶺)는 모든 사람들이 예부터 그렇게 고대하던 극락의 신선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넘어야만 하는 고개(위험한 고비)인 것이다. 바로 하늘 고개(天坡)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사랑이라는 우주 원리를 저버린 자를 말한다. 사랑을 망각하고 그 영혼이 저급하게 타락한 사람들을 말하며, 십리(십승촌)도 못 가고 발병난다(멸망한다)는 것이다. 이러함에서 아리랑은 천기를 감춘 노래로서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 본래 천손(天孫) 민족이요 신선족이던 한민족의 집단무의식에서 발현한 노래이다. 먼 고대의 도인(道人)들이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부르기 시작한 노래인 것이다. 이를 입증한 하나의 단서가 ‘격암유록(格菴遺錄)’ 갑을가(甲乙歌)에 7언의 아리령(아리랑)을 담아 둔 것으로 본다. 격암유록은 시대적 변화에 묻혀있는 우리 고유한 정신문화를 담은 기록으로 ‘아(亞)’를 주목하였다. 이는 하도(하도)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 선현들의 정신문화 요체로소 조선시대 학문적 이념이 되었다. 퇴계 이이선생의 이기론(理氣論) 형성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에 필자는 아리령 대목에 대한 다양한 풀이를 정리하고자 한다. 甲乙歌 아리령(1) 亞裡嶺有停車場 苦待苦待多情任 아리령유정거장 고대고대다정임 亞亞裡嶺何何嶺 極難極難去難嶺 아아리령하하령 극난극난거난령 亞裡亞裡亞裡嶺 亞裡嶺閣停車場 아리아리아리령 아리령각정거장 험난한 산에 수레가 머무는 곳 괴로움이 많으나 뜻에 맡기고 험난해 오르기 힘든 산 어려움을 겪으며 가는 산 아주 험난하고 험난한 산 험난한 산위 수레 머문 곳 甲乙歌 아리령(2) 亞裡嶺有停車場(아리령유정거장) 苦待苦待多情任(고대고대다정임) 亞亞裡嶺何何嶺(아아리령하하령) 極難極難去難嶺(극난극난거난령) 亞裡亞裡亞裡嶺(아리아리아리령) 亞裡嶺閣停車場(아리령각정거장) 아리령에 정거장이 있네 몹시 고대 고대하던 다정한 님 아아리령은 무슨 고개인가 고되고 넘기 어려운 고개일세 아리아리 아리고개 아리령누각이 정거장이로다 甲乙歌 아리령(3) 亞裡嶺有停車場 苦待苦待多情任 아리령유정거장 고대고대다정임 亞亞裡嶺何何嶺 極難極難去難嶺 아아리령하하령 극난극난거난령 亞裡亞裡亞裡嶺 亞裡嶺閣停車場 아리아리아리령 아리령각정거장 乙矢口耶所望所望 人間生死甲乙耶 生死決定龍蛇知 을시구야소망소망 인간생사갑을야 생사결정용사지 아리랑 고개 위에 정차장이 있다 고대하던 다정한 임 부르며 아리랑 고개는 어떤 고개인가 고개 넘어가기 어려운 고개로다 아리 아리 아리랑고개 아리랑고개 전각에 정거장있네 을시구야 아리랑고개 넘기가 소망이로다 인간의 살고 죽음이 갑을 새 질서다 생사가 용과 뱀의 해 결정됨을 알지어라 甲乙歌 아리령(2)는 아리랑 박사 제1호인 박민일 교수(강원대)의 학위논문에서의 해석이다. 甲乙歌 아리령(3)은 4행에 ‘乙矢口耶~ ’를 첨가했다. 3편 모두 같으면서도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모두 ‘亞’를 주목하고 강조한 사실이다. 이는 필자의 소견이기도 하다. 이를 기본으로 격암유록과 아리랑에 대한 맺음말을 하고자 한다. 아리랑의 ‘아(亞)’는 역(易)의 구도(構圖)에서 나왔으며 그 의미는 천체 우주관적인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원리가 담겨있다. 그 뜻이 아리령(亞裏嶺) 이었다. ‘하도’가 중국 땅에서 건너온 낮선 학문이었으나 우리대로의 생활풍토에서 여과의 세월을 거쳐 우리 모습으로 나타난 ‘亞’자 속의 ‘十’자의 과정은 저 멀리 원시 선민적부터 고난의 고개와 고개를 넘고 넘어 이어져온 행로가 한반도에 이르러 아리령(亞裏嶺)의 고개를 넘어 아리랑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이 글은 2020년 12월 ‘익산향토문화’에 수록한 논고를 중심으로 새로 작성한 글이다. 그리고 김득황 ‘한국사상사’, 조남현 외 ‘조정래 아리랑연구’ 등을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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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잡상 - 모기, 복숭아 그리고 국악협회 -갑작스레 규모를 줄여 이사하다 보니 모든 공간을 책으로 채우게 되었다. 에어컨 설치도 선풍기 놓을 자리조차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빌라 맨 위층 끝이라 모든 문을 열고 살아도 되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모기에 시달리게 되었다. 오늘 밤도 겨우 잠들려는 즈음에 웨~이~잉 하는 모깃소리에 잠자리를 털고 말았다. 불을 켜고 소리 낸 놈을 추적하려다 보니 아예 잠은 멀리 보내야 했다. 내친 김에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어 불면의 ‘한여름 밤의 잡상(雜想)’을 끄적이게 되었다. 60년대 전깃불이 없던 시골 벽촌에서 산 이들이라면 ‘7월의 공포’(?)란 말에 공감을 표할 것이다. 중복(中伏)을 전후한 7월 한여름 밤의 모기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 흔히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나게 되면 ‘학(瘧)을 뗐다’라고 하는데, 이는 무서운 질병 말라리아를 ‘학질(瘧疾)’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병의 감염원이 모기라는 사실에서 그 위험성을 알게 한다. 대개 외양간 같은 가축우리와 화장실 문을 개방하고, 논이나 개울 같은 물을 가까이하는 주택 구조 때문에 모기의 극성을 함께 하게 된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유일한 대처법은 기껏 등잔불을 끄고 모깃불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린 나이로서는 모기에 대해 증오와 공포를 느낄 만도 한 것이다. 모기에 대해서는 조상들도 극히 증오를 표하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이 시 ‘모기를 증오함(憎蚊)’에서 "몸통도 그리 작고 종자도 천한 놈이/어째서 사람을 보면 침을 그리 흘리느냐”라고 투정하고 "부리 박아 피를 빨면 족함을 알아야지/어찌하여 뼈에까지 독기를 주고 가냐”라며 공포를 드러낸 데서 알 수가 있다. 이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생태에 대한 연구가 매우 깊다는 데서 알 수가 있는데, 그 결과를 인용하면 이렇다. 모기는 1억 7천만 년 전에 출현하여 3천 5백여 종으로 진화했고, 암컷은 한 번에 100~200개씩, 한 달에 3~7번 알을 낳는데 매일 수십억 마리를 탄생시킨다. 암컷은 수컷과 단 한 번 짝짓기 하여 일생에 필요한 모든 정자를 받아 몸속에 저장했다가 조금씩 꺼내 수정해 알을 낳는다. 흡혈하는 종은 200여 종으로 이들은 보통 초속 0.5m로 나르며 소리를 낸다. 부리는 톱날침과 바늘침 1쌍씩과 흡혈관 1개로 자기 몸무게의 2~3배나 되는 6~9㎎을 흡혈하며 이때 내뿜는 액(液)으로 발병을 시킨다. 이 액의 독성(毒性)으로 학질을 일으켜 매년 72만 명을 사망하게 한다. 이는 광견병으로 죽는 사람은 2만 5천 명, 뱀에게 물려 죽는 사람은 5만 명, 전쟁이나 테러 등에 의해 죽는 사람은 47만 명이니 ‘지구상 가장 치명적인 동물’일 수 있다. 극히 작은 액의 독성이 치명적이라니 그저 귀찮은 존재를 넘어 공포의 대상이 될 만도 한 대상이다. 잠 못 들게 한 모기를 미워하다 보니 자정을 막 넘기는 순간이다. 이때 나와 같이 잠 못 드는 이가 또 있었다. 경쾌한 이메일 도착 벨이 울려 열어 보니 조치원에 사는 지인 Y가 먹고 남는 복숭아를 보내려 하니 새 주소를 알려 달라는 내용이다. Y는 10여 년 전 ‘복숭아 축제’를 기획했던 지역문화 운영에 탁견을 가진 분이다. 매년 맛있는 복숭아를 보내주는 분인데, 큰 모자를 쓰고 땀을 흘리며 복숭아를 따는 환한 모습을 떠올리니 미소가 머금어진다. 그리고 나를 40여 년 전의 한 기억으로 내달리게 한다. 기억 속의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1975년 12월 24일, 훈련소 입소를 위해 친구와 함께 논산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이때 여인숙 근처의 작은 식품점에서 복숭아 한 무더기를 보고 호기심에서 모두 샀다. 안주를 겸해 샀는데 매우 특별한 맛을 보았다. 말랑하면서 향이 매우 강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이 복숭아는 10월 숙기(熟期)를 거쳐 11월 첫눈을 맞고서 수확하는 ‘설(雪)아’라는 백도 종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한겨울까지도 보관이 된다는 데, 당도와 향이 일반 복숭아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이다. 이때의 경험 이후 나는 복숭아에 대한 암묵지(暗默知)를 갖게 되었고, 여름 과일로 참외나 수박보다는 복숭아를 꼽게 되었다. 오래 전의 경험이지만 회상하면 크리스마스 이브의 쓸쓸함과 삭발의 허전함을 채워준 그 친구가 그립고, 향과 맛으로 가장 좋아하는 과일로 만든 그 겨울의 복숭아가 떠올라 입맛을 다시게 된다. ‘복숭아’는 원래 이름이 '복셔ᇰ(화)'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복사꽃을 뜻하는 ‘복셔ᇰᇰ+花’를 열매까지 뜻하게 되어 ‘복셔ᇰᇰ화-> 복숭아’로 변화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복숭아는 전 세계에 약 3천여 품종이 있는데, 원산지는 중국이고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양으로 전해졌고 17세기에는 아메리카 대륙까지 퍼지게 하였다. 중국 명대(明代)의 소설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9천 년이 걸려 익는 과일을 먹고 달아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과일이 복숭아인 판타오(蟠桃)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야생의 돌복숭아가 있는데, 천식, 기침, 기관지염 등의 약재로 쓰인다. 이 야생 돌봉숭아의 약성(藥性)과 강한 향으로 하여 민속적 대상으로 활용되어 오기도 한다. 그러다 오늘과 같은 품종을 갖게 된 것은 1906년 황실(皇室) 시설인 ‘원예모범장(園藝模範場)’에서 백도·천홍·대구보·백봉 같은 개량 품종 20여 종을 재배, 보급한 것으로부터라 한다. 복숭아의 주성분은 수분과 당분이며 유기산이 1%가량이다. 비타민A가 풍부한데 과육은 씨 주변이 분홍색이냐 흰색이냐로 나뉘는데 모두 아스파라진산이 많다. 발그스레한 색깔과 탐스러운 모양을 꽃으로 착각한 벌레나 벌이 많이 꼬이는 편이라 일반적으로 제맛을 볼 수 있는 기간이 초여름에서 초가을로 짧은 편이어서 제철이 아니면 맛보기가 힘든 과일이다. 식감은 익은 정도나 종류나 품종에 따라 묘하게도 다른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 복숭아에도 미워해야 할 약점이 있다. 모기의 액 못지않은 독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과육과 털에 의한 알레르기이다. 이 증세는 유전적인 경우가 많은데, 항원-항체 반응의 결과로 연속되는 재채기에서부터 심한 생리적 기능까지 마비시킨다고 한다. 이런 독성을 범죄에 이용하기도 하는데, 몇 년 전 개봉한 영화 ‘기생충’에서 털 알레르기를 이용한 위계(僞計) 장면 같은 것이 그 예가 된다. 세상 이치가 참 묘하다. 그토록 향과 맛이 매혹적인 복숭아가 이런 독성을 지니고 있다니. 아마 맛과 향의 지나침에 대한 절제라는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싶다. 모기에서 복숭아로 이어진 잡상을 갖다 보니 잠은 점점 멀리 가버린다. 동틀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와있는 메일 하나를 열었다. 그런데 이 메일 내용이 나를 오늘의 현실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것은 국악계의 현안인 국악협회 사태에 대한 것이다. 현 제27대 임웅수 이사장이 선거와 관련하여 문제가 있어 차점 후보가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이 때문에 이사장이 결위(缺位) 되는 사태를 맞았다. 국악계의 큰 잔치인 창립 60주년 사업도 추진하지 못하고, 코로나로 어려움에 부닥친 국악계에 전승 의욕을 추동시키지도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사실 이 협회는 명실상부한 민속악계의 최고 협의체로 국립국악원과 함께 우리 국악을 이끌고 온 주체이다. 이런 단체가 법원 결정에 따라서는 수장(首長) 없이 관선이사(변호사)로 대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관선 이사가 현 사태를 알고 관리할 수 있는 국악인이 아니고 법률가일 뿐인 일개 변호사가 선임된다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이러니 비판은 당연할 듯하다. 메일을 꼼꼼히 읽어 보니 국악협회에 대한 이 비판의 속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근래 20여 년간 시행된 이사장 선출 선거 방식에 독소조항(毒素條項)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투표권을 갖는 회원 자격을 매우 허술하게 규정한 조항이다. 이 때문에 후보가 회원 자격이 없는, 또는 상실된 회원들을 확보하여 회비를 일시에 대납시키는 등의 편법으로 이들의 표를 매수하여 당선되는 부당행위를 해 온 것이다. 이의 부작용으로 많은 이사장들이 당선 후 후유증을 앓거나 이번처럼 발목이 잡혀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협회 정관상의 회원 자격 부여와 회원 자격 회복에 관한 규정이 완비되지 못하였고, 규정을 무시할 만큼 무질서한 상태에서 선거가 치러졌다는 것이 된다. 당연히 관례(慣例)라는 이름으로 묵과(黙過)해 온 적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행 정관 제3장 임원선출 조항에서 "후보 등록 6개월 이전 가입한 회원만이 선거권을 갖는다.”는 등으로 자격을 강화해야 한다. 또한 선거인단은 반드시 후보자의 기본적인 도덕성 검증 절차를 도입하여 시행할 것을 규정해야 한다. 이와 함께 회원들의 자세도 일신되어야 한다. 국악인으로서 예술 분야에 종사한다는 자존심을 갖고 공동체 정신으로 운영에 참여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동안 독소조항을 관례라고 안고 왔던 적폐를 단연코 단절해야 할 것이다. 뜬금없는 잡상으로 한여름 밤을 뒤척였다. 그러고 보니 독성은 증오하는 모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맛과 향으로 매료시키는 복숭아에도 있고, 전문 예능인들의 모임에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에는 나름의 독성이 있다는 것이고, 그 독성은 화(禍)나 병(病)을 유발하는 것이니 피하거나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먼저 독성의 여부와 정도를 가려내는 눈을 가져야 함은 당연할 것이다. 아, 혹시 나는 누군가에게 독성을 지닌 사람은 아닌가? 잠이 확 깬다.(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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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용의 史事是非] 부끄러운 이천시, 애련정(愛蓮亭) 해설문 오류투성이서수용/한국고문헌연구소장 몇 해 전 고향에서 추석을 쇤 뒤 서울로 올라오다가 차도 막히고 해서 고속도로에서 내려 ‘산 좋고 물도 좋다’는 이천(利川)을 찾았다. 물이 좋다는 것은 이천시 도처에 자리 잡고 있는 온천(溫泉)에서 체험할 수 있었고 산천경개(山川景槪)는 길을 오가면서 저절로 느낄 수 있었다. 더욱이 필자는 달성 서씨이긴 하지만 이천 서씨가 큰집이라서 이천시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어 온 터다. 대문호(大文豪) 이문열(李文烈) 선생님과의 편안한 만남, 이천 쌀밥으로 대표되는 우리 반상 문화에 대한 체험 그리고 이천 도자기의 그 높은 격조까지 느낄 수 있으니 금상(錦上)에 첨화(添花)가 먼 곳에 있지 않다. 온천장에서 일행보다 조금 일찍 나온 터라 시간도 있고 해서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애련정(愛蓮亭)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로만 들었던 바이지만 아름다운 애련정이 이렇게 지척에 있는 줄은 몰랐다. 필자에게 애련정은 퇴계 이황 선생이 어릴 적 공부했던 안동부(安東府) 관아(官衙)의 부속 건물로 익숙하다. 물론 가장 유명한 애련정은 주렴계(周濂溪)의 정자일 것이고, 창덕궁 비원(祕苑)의 어수문(魚水門) 동쪽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정자도 빠질 순 없다. 정조(正祖) 3년 기해(1779) 8월 6일(정사)일, 양력으로는 1779년 9월 15일이었다. 정조대왕이 이천 행궁으로 납시었던 날이다. 필자처럼 온천을 한 뒤 애련정을 찾았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필자와 240년을 뛰어넘어 묘하게 날짜까지 겹쳐졌다. 『조선왕조실록』을 펼쳐서 보니, "주상이 여주(驪州) 행궁에 나아갔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좌의정 서명선(徐命善), 호조 참판 송덕상(宋德相), 행 부사직(行副司直) 김양행(金亮行)은 입시하라고 명하였다.”와 "다시 이천 행궁(利川行宮)에 이르러서는 경기감사(京畿監司) 정창성(鄭昌聖). 이천현감(利川縣監) 이단회(李端會)에게 명하여 백성을 거느리고 앞으로 나오게 하고 승지(承旨) 서유방(徐有防)에게 명하여 하유(下諭)하게 했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날 주상이, "행궁(行宮)의 뜰 가에 연정(蓮亭)이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애련정(愛蓮亭)’인가? 언제 건립되었는가?”라고 묻자 경기감사 정창성(鄭昌聖, 溫陽 鄭氏)은 애련정의 의미를 설명한 뒤 "고을의 고로(故老)에게 물으니, 고(故) 읍쉬(邑倅) 이세보(李世珤)가 처음으로 이 정자를 세웠고, 상신(相臣) 신숙주(申叔舟)가 ‘애련’이란 편액(扁額)을 걸었다고 합니다.”라 하였다. 대화는 이어져서 주상이 다시, "풍월정집(風月亭集, 月山大君 李婷)에 ‘새 못을 파고 또 연을 심으니(鑿得新塘又種蓮), 풍류 사랑스럽고 주인 어질다(風流可愛主人賢)’라고 한 것이 있는데, 이 정자를 이르는가?”하였고, 정창성은 이를 확인한 뒤 "그렇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실록 기사는 마치 어제인 듯 이 정자의 역사와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정조 대왕이 박람강기(博覽强記)하다지만 세조의 장손이요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아들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애련정을 노래한 시를 단번에 외웠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유서 깊은 애련정은 마치 중국 소주(蘇州)에 있는 서호(西湖)의 한 곳을 옮겨온 듯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안흥지(安興池) 중간으로 아치교가 나 있고 그 중심의 작은 섬 위에 단청으로 곱게 장식된 팔작지붕 정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정자는 유서 깊은 연못 위에 조성된 아름다운 정자다. 그런데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정자가 하루아침에 일제의 만행(蠻行)으로 소실(燒失)되었을 때 이천 시민들이 가졌을 분함과 상실감은 어떠했을까? 그러한 한과 염원을 담아 민선 시대의 시장과 시민들은 다시 정자를 짓고 주변을 정화해 오늘날과 같은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름 모를 많은 분의 노고에 존경을 표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역대 관찰사와 수령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선정비군(善政碑群)을 구경했다. 낯익은 인물이 보였다. 학봉 김성일의 후손으로 이천부사를 지냈던 탄와(坦窩) 김진화(金鎭華, 1793~1850)의 선정비다. 이제 좀 미안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렇게 의미 있고 좋은 일을 한 뒤 금상첨화(錦上添花)나 화룡점점(畵龍點睛)은 아닐지라도 이렇게 오래도록 ‘오점(汚點)’을 남길 수 있을까 싶어서 쓰는 것이다. 전제해 둘 것은, 필자 또한 글을 쓰다 보니 오자나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오금이 저릴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보는 안내 표지판이나 금석문의 경우는 일반적인 글과는 차원이 다르다. 보고 또 보아 오류를 없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한 뒤라도 잘못이 발견되면 즉시 이를 따져서 겸허하게 고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애련정 앞에 정자를 복원하면서 아름답게 금속물로 조성된 애련정 표지판의 경우다. 안내판에 간혹 오자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렇게 많은 오자와 오류가 뒤섞여 있는 경우는 처음 본 바라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대략 손꼽아보더라도 이런 현상을 유지한 채 지나온 세월이 글을 쓰는 현재로 23년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더 문제가 아니겠는가. 안내판 하나를 조성할 때의 과정을 생각해 보자. 기안을 올려 업자에게 넘기기까지 길게 이어졌을 ‘결재 과정’이다. ‘담당자-계장-과장-국장-부시장-시장의 결재를 얻어서 다시 담장자-해당 제작업체-제작 완료-시공업자-시공-담당자 확인-제막식-일반에 공개’라는 긴 과정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꼴이다. 따지자면 누구를 탓할 일도 못 된다. 『논어(論語)』에 보면 ‘子曰 不在其位하야는 不謀其政이니라.’라 했다.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일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함에도 이런 글을 쓴 것은 이러한 현상이 비단 이천시의 애련정 안내판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합리화를 하자면 요즈음은 ‘민주시민 사회’요 그런 사회에서는 ‘시민 참여’가 중요하다고들 하지 않는가? 이제 문제의 애련정 현판의 현상과 이를 필자가 바로잡아 보았다. 붉은 글자는 오류 또는 탈자이다. 이를 바로잡은 것이 수정안(修正案)이다. 현 애련정 안내판 애련정(愛蓮亭) 이천시 향토유적 제15호, 경기도 이천시 안흥동 404호 이천읍지(利川邑識)에 의하면 객사(客舍) 남쪽에 정자(亭子)가 언제 창건(創建)되었는지는 모르나 세종10년(1428)에 중건하고 세조 12년(1456) 이천부사(利川府使) 이세보(李笹珤)가 다시 중건(重健)하였으며 정자 옆 습지에 안흥지(安興沚)를 파서 그 한가운데 연꽃을 심고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孰舟)에게 애련정(愛蓮亭)이란 명칭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월산대군(月山大君):이정(李婷)(조선9대 성종의 형), 서거정(徐居正), 조위(曺偉)등 많은 시인들은 애련정의 경치를 읊은 시를 남겼고 임원준(任元濬)과 김안국(金安國)의 애련정기(愛蓮亭記)와 애련루기(愛蓮樓記)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중종 23년(1528), 숙종 14년(1688), 정조3년(1779)의 기록에는 역대 임금님들이 영릉(英寧陵) 행차길에 이천행궁(李川行宮)에 머무르며 으레 붉은 연꽃이 어우러진 애련정(愛蓮亭)을 돌아보았다고 전한다. 순종황제 원년(1907) 벌떼같이 일어났던 정미의병(丁未義兵)때 일본군(日本軍)이 이를 진압하고자 이천읍내 483가구를 불태운 충화사건(衝火事件)이 있었으니 이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본다. 이천시에서는 지방자치 시대를 맞이하여 18만 시민의 의견을 모아 1998년 애련정을 복원하였다. 필자 수정안(修正案) "애련정(愛蓮亭) 이천시 향토유적 제15호 경기도 이천시 안흥동 404 번지 이천도호부(利川都護府)의 객사(客舍) 남쪽에 있었던 이 정자(亭子)가 언제 창건(創建)되었는지는 미상(未詳)이다. 이천읍지(利川邑誌)에 의하면 세종 10년(1428)에 중건하고 세조12년(1466)에 이천부사(利川府使) 이세보(李世珤)가 중건(重建)하였으며, 정자 옆 습지에 안흥지(安興池)를 파서 그 한가운데 연꽃을 심은 뒤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叔舟)에게 애련정(愛蓮亭)이란 편액(扁額)을 걸게 했다 한다. 그 뒤 월산대군(月山大君:李婷, 조선9대 成宗의 兄)과 서거정(徐居正), 조위(曺偉) 등 많은 시인 묵객들이 애련정을 찾아 시를 지었고, 임원준(任元濬)과 김안국(金安國)은 애련정기(愛蓮亭記)와 애련루기(愛蓮樓記)를 남겼다. 중종 23년(1528), 숙종 14년(1688), 정조 3년(1779)에 국왕들은 영릉(英陵) 행차(行次)에 이천행궁(利川行宮)에 머물며 애련정(愛蓮亭)의 아름다운 연꽃을 구경했다고 전해진다. 정미의병(丁未義兵, 1907) 봉기(蜂起) 당시 일본군(日本軍)이 이들을 강제로 진압하고자 이천 읍내 483가구를 불태운 만행(蠻行)이 있었는데 유서 깊었던 이 정자는 이때 불타 사라졌다. 이천시에서는 지방자치 시대를 맞이하여 18만 시민의 의견을 모아 1998년 애련정을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역사성을 갖고 있는 애련정, 이천시는 빨리 바로잡아야 한다. ‘애련정(愛蓮亭) 해설문 바로잡기’를 위해 자문단을 꾸려 수정, 교체해야 한다. 무지와 무관심의 결과이다. 후손에 부끄럽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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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아리랑읍’으로 개명(改名), 어떻습니까이동식/ 前 KBS 해설실장 前부산총국장 2002년 해외 근무를 마치고 잠깐 시간을 내어 고향 문경을 방문하는 길에 초등학교 3년 반을 다닌 충북 진천의 광혜원을 찾았다. 그때 승용차로 이동하면서 물어물어 만승초등학교를 찾았는데, 교정으로 가는 길이 조금씩 바뀌고 학교 건물도 새로 지어 옛날 추억을 되살리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학생 때 타고 오르던 느티나무가 그대로 있어서 그걸 보는 것으로 추억의 아쉬움을 메울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학교가 있는 곳은 원래 진천군 만승면 광혜원리였고, 만승면에 있다고 만승국민학교(초등학교로 바뀜)였는데, 이 만승면의 이름이 언젠가부터 광혜원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게 궁금했지만,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지내다가 최근에 보니 2000년에 이름이 바뀌었단다. 만승면이란 이름은 한자로 ‘萬升’(만승)이어서, 어릴 때는 뜻을 알기 어려웠는데, 升이란 글자는 곡식의 양을 재는 되, 말이라는 계량 단위 중의 되에 해당하니 이곳이 됫박으로 만 개 이상의 소출이 나는, 너른 옥토가 있는 땅이란 뜻이 되어 굳이 나쁜 뜻은 아니라 하겠다. 그런데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인 1910년 우리나라 전 행정구역을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광혜원이란 오래된 이름을 제쳐놓고 자의적으로 갖다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광혜원은 사통팔달의 교통 요로였기에 조선시대 나라에서 공무 출장이나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관원들의 숙식과 갈아탈 말을 제공하던 원(院)이 있던 곳으로, 충주 감영에 근무하던 충청 관찰사들도 이곳에서 업무 인수인계하였고 그 터가 지금도 남아있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유서 깊은 동네였다. 또 널리 베풀다는 뜻도 담겨 있어 만승보다는 뜻이 더 좋다. 그러기에 지방의 읍면 이름을 주민들의 뜻에 따라 바꿀 수 있게 된 이후인 1999년 상반기에 주민들이 ‘만승’이라는 이름 대신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광혜원’으로 이름을 바꿔 달라는 청원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주민 1천57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97.2%의 주민이 찬성함으로써 진천군에서 주민들의 의사를 확인하고 충청북도에 행정구역 조정계획을 올려 승인을 받음으로써 2000년 초에 드디어 이름이 광혜원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행정구역에서 읍면의 이름을 바꾸는 것은 주민 90% 이상이 찬성한다고 하더라도 해당 도의 타당성 분석과 도의회 승인, 행정자치부 승인 등의 복잡한 절차가 있지만 최근 우리나라는 자신이 사는 행정구역의 이름을 기왕이면 일제시대에 멋대로 책정된 이름보다는 그 땅의 역사와 유래, 지정학적인 인연, 인물과 풍속, 특산물 등을 고려해서 많은 곳이 새 이름을 얻고 있는데,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못한 것 같다. 충북 영동군의 황금면은 이미 1991년에 추풍령면으로 바뀌었고,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은 2007년에 대관령면으로 바뀌었다. 내가 충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듣던 이름인 상모면이 2005년에 온천 이름을 딴 수안보면으로, 이류면이 2012년에 대소원면으로 바뀌었다. 눈에 띄는 것으로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이 2009년에 김삿갓면으로 바뀐 것과 동강에 있는 유명한 한반도 지형의 이점을 살라기 위해 2015년에 영월군 서면을 영월군 한반도면으로 바꾼 것, 또 영월의 수주면을 2016년에 무릉도원면으로 바꾼 것 등 전국에서 나름대로 지명의 특색과 이점(利點)을 살리기 위해 그동안 참으로 많은 변경이 있었음을 김윤승 지리산 문학관장의 조사 결과를 보고 알게 되었다. 전남 담양의 남면은 2019년에 가사문학면으로 고쳤다. 이 일대에 역대 문인들이 부른 멋진 가사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 것에 착안한 것이리라.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은 2015년에 남한산성면으로 고쳤다. 훨씬 알기가 쉽다. 그 전의 지명을 보면 일제가 한 군(郡)의 경우 읍을 기점으로 동서남북의 방위를 표시하는 명칭을 많이 갖다 붙였는데, 이런 것들이 어느새 각 지자체와 주민들에 의해 자기 고을, 마을을 자랑하고 알리는 지명으로 바뀐 것이다. 자 그러면 문경이 고향인 필자에게도 욕심이 생긴다. 문경이라는 이름은 옛날 경상도 쪽에서 과거시험을 보러 올라갔다가 급제했다는 경사스러운 소식(慶)을 제일 먼저 듣고(聞) 접하는 것이란 뜻이어서 그 유래와 역사가 찬연하다. 따라서 그 문경이라는 이름 자체를 굳이 피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이제 문경이 그동안 군(郡)에서 시(市)로 바뀌면서 예전 군청 소재지인 점촌이 문경시로 바뀌는 바람에 그전에 그냥 문경이라고 부르던 문경읍(邑)의 명칭이 애매해지고 혼란이 오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문경읍에 대해서는 더 나은 이름을 찾아가는 것이 어떤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김윤승 지리산 문학관장은 문경에서 나온 국연문집(國硏文集)창간호에서 문경을 ‘문경아리랑읍’으로 부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고 나섰다. 알다시피 문경은 문경아리랑의 본고장이다. 문경아리랑은 2012년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리랑의 원조라고 한다. 문헌상 처음으로 ‘아리랑’에 ‘문경새재’가 등장하는 것은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1896년 오선악보로 남긴 ‘아리랑’에서이다.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오 / 아르랑 얼사 배띄어라 // 문경새재 박달나무 / 홍두깨 방맹이 다나간다" 이 노래는 경북에 있는 ‘문경새재’를 거론하였지만 동부민요의 메나리 토리가 아닌 서울·경기를 중심으로 하는 경(京)토리 선율구조로 되어있어서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아리랑을 부르는데 거기에 문경새재 박달나무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리랑 연구가 김연갑에 따르면 '문경새재'는 이어 조선조 말 음악교육자인 이상준(李尙俊, 1884~1948)이 1914년 펴낸 朝鮮俗曲集(조선속곡집)에 오선악보로 소개된 아르랑타령에도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 / 아리령 아리령 아라리오 아리령 띄여라 노다가게 ...."라고 등장한다. 이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는 전국적으로 당시 대중들 사이의 야한 유행어로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문경새재’는 경남 밀양시 지명이 달린 <밀양아리랑>에도 등장한다. 1926년 대구 달성 권번 출신 김금화(金錦花)가 유성기 음반으로 취입한 초기의 밀양아리랑타령에는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얼시고 날 넴겨줄까 / 문경아 새자는 웬 고개드나 구부야 구부로 눈물이 난다 /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얼시고 날 넴겨줄까" 이다. 물론 문경지방에서 부르는 문경아리랑에도 ‘문경새재’가 등장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 문경새재에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가네 /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 애기 손길로 놀아나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 문경새재를 넘어갈 제 구비야 구비 구비가 눈물이 나네" 아리랑 고개라는 것은, 어느 특정 지역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들이 대체로 수긍하는 것이지만 이처럼 전국의 아리랑에 문경새재와 박달나무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문경’이야말로 아리랑 음악과 문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문경에서는 <문경새재아리랑>을 이어받은 송옥자 씨가 신문 방송을 통해 문경의 아리랑 전통을 전국에 활발히 알리고 있다. 2008년부터 문경시는 ‘문경새재아리랑제’와 아리랑 관련 행사들을 매년 성대하게 펼쳐오고 있다. 문경새재 입구에는 각 지역 아리랑 노래비를 세워 놓았다. 바로 앞 ‘옛길박물관’ 내에는 음반, 영화 아리랑 대본, 아리랑에 관련된 서적 등이 모여 전시되고 있다. 전국 방방곡곡 전해오는 아리랑 가사 10,068수가 책으로 집대성됐다. 국내 유명 서예가 122명이 2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아리랑 가사를 붓으로 쓴 것이 50권의 책으로 완성되어 문경시 옛길박물관에 영구히 보존되고 있다. 문경읍 관음리에는 시조시인 권갑하 님이 세운 '문경아리랑시조문학관'이 시조 속에 녹은 아리랑 문화를 모아 보여준다. 문경시 문경읍 하초리는 2014년 8월 14일에 '문경새재아리랑 마을'로 선포됐다. 이 마을에서 1917년부터 2001년까지 84년 동안 살았던 송영철 옹은 <문경새재아리랑>을 문경새재아리랑답게 부른 마지막 가객(歌客)으로, 그가 부른 소리는 다른 아리랑과 확연히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아리랑에 관한 한 역사적으로나 민속적으로나 정선아리랑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곳이 문경읍이기에 차제에 이 읍의 이름을 ‘문경아리랑읍’으로 하자는 것이 그 제안의 취지이고, 필자도 이에 적극 공감하고 있다. 문경시가 아리랑의 본향이라는 정체성을 극대화하고 브랜드 효과를 선점하려면 문경읍을 ‘문경아리랑읍’이란 이름으로 먼저 개칭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계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름을 처음 쓰는 지역이 된다. 이미 경상북도에서는 지난 2007년 이후 최근까지 10개 시·군이 13개 행정구역의 이름을 변경했거나 변경을 추진 중이다. ‘문경아리랑읍’이란 이름을 선점하는 것은 절대 빠르지 않고 오히려 늦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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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대한국인 안중근-최태선과 안용희’ 출시"대한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소”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한복을 입은 안중근 의사의 형장 유언(遺言)이다. "송죽절개 남아일도 굽힘없이 나는 가리 대한국인 안중근” 2021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기념일 출시된 가요 '대한국인 안중근'의 가사 일절이다. 111년 오늘, 32세로 조국독립과 동양평화를 염원하며 순국하셨다. 그 영웅적 삶은 세월이 흐름에도 찬란함을 더하고 있다. 이를 기념하여 가요 <대한국인 안중근>을 수록한 특별음반 ‘대한국인 안중근-최태선과 안용희’가 출시되었다. 늦깎이 여가수 최태선 서원대 휴머니티 교양대학 교수(1965년생)의 절절한 가족사를 투영(投影)하고 작곡, 작사, 편곡, 연주, 구성, 제작, 1인6역의 열정을 투여한 색소폰이스트 안용희의 합작이다. 타이틀곡은 안의사의 정신을 담은 '대한국인 안중근'이다. 이어 수록한 곡은 '대한의군 최부길', '강제징용 최방발', '보고싶은 아버지'가 수록되었다. 최무길, 최방발은 노래한 최태선의 조부와 부친, 두 분의 영웅은 안중근의사, 최태선의 영웅은 조부와 부친이다. 그리고 노래를 듣는 우리들의 또 하나의 영웅은 가수 최태선이다. 모두 노래는 최태선, 작사, 작곡은 안용희이다. 최씨 3대의 가족사는 곧 민족사이다. 조부 최무길(1889~1965)은 안의사의 정신을 따라 3.1 김천시장 만세운동으로부터 만주 항일투쟁에 참여하였고, 부친 최방발(1914~1992)은 가난을 유산으로 받아 북해도 탄광 강제징용 후 귀국하여 머슴살이, 그 가난 속에서도 주위에 학문하기를 권하며 안의사 전기를 머리맡에 두고 사신 부친, 두 분의 정신을 따라 고학으로 고난을 이겨낸 최태선(1965)이다. 최태선, 우리시대 영웅적 삶을 살았다. 버스안내와 보험외판 등으로 이룬 성취를 2009년 저서 '최태선의 아름다운 변화'에 담아 출간했다. 눈물겨운 부친의 ‘머슴살이와 꽃신’ 사연, 3살 위 언니의 ‘2만3천원과 김천성의여중 졸업’ 등의 회고와 청주대학 경영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같은 벅찬 순간들이 담겼다. 부친의 유언, 조부의 독립유공 공적 추서를 실현하였다. 2018년 부친의 유언을 따라 조부의 독립유공 공적 증빙을 보훈처에 상달, 드디어 인정 받았다. 대전 현충원 5묘역에 ‘독립운동 애국지사 최무길’로 모셨다. 우리시대 작은 영웅 최태선의 이 같은 삶에 영감을 받은 안용희는 기록과 현장 답사를 통해 가사를 짓고, 곡을 새겨 음반으로 기록했다. 타이틀 곡 <대한국인 안중근>은 2절 가사에 구국의지의 웅장함을 전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산화한 넋을 기렸다. 후렴에서 이를 강조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의거 당시 하루빈 역두의 정황을 효과음과 나레이션으로 처리하여 실감을 준다. 후렴이 호쾌하다. "만민평화 너를 위해 비호같이 초개같이 이 한 목숨 다 바쳤노라 만민자유 만민통일 만민행복 만민사랑 나의 조국아 영원하라" '대한의군 최무길 '은 안의사 정신을 따라 독립운동을 한 최 교수의 조부의 가려진 삶을 애통해 하였다. 김천 장날 시위에 참여하고 안의사의 정신을 따라 만주로 가 이름 없이 독립운동을 한 사적을 그렸다. 손녀 딸의 눈물어린 모습이 그려진다. "아-어찌할꼬 아-어찌할꼬 온 천지 강토가 짓 밟혀져 추풍 낙엽이로다/선량한 만백성 바람 앞에 등불이로다." 선량한 만백성 바람 앞에 등불이로다." '강제징용 최방발'은 부친의 수난사를 그리고 있다. 일제강점기 질곡의 상징인 강제징용의 한 가운데를 산 부친의 고난에 눈물어려 부르짖고 있다. 탄광 갱 속의 암울이 분노로 변하게 한다. 후렴은 고난의 서사를 그리고 있다. "영문도 모르고 도라꾸에 실려 이름모를 배에 실려 망망대해 파도를 넘으니 외적 땅이 아니던가." 마지막 곡 '보고싶은 아버지'는 최교수의 사부곡이다. 동시에 이 시대 모두의 사부곡이기도 하다. 2절 가사를 전재한다. 십원짜리 동전 쥐어 주시고 가슴깊이 안아 주시며 어디 좀 다녀오마 말씀만 남기시고 떠나신 그 길이 머슴살이라는 걸 철부지소녀 알 수가 없었어요 2년 후 어느 여름 밤 모기 불 연기 속 대문 열리니 아하 아버지 꿈속에서 그리던 아버지 캄캄한 밤 무섭고 두려워 소리죽여 불렀던 아버지 노란나비 꽃무늬 고무신 막내딸 주시려고 사오셨어요 너무 너무 이쁘고 갖고 싶던 꽃신이지만 어찌 아버지 품속만 하오리까 어찌 아버지 숨결만 하오리까 아버지 아버지 보고 싶어요 2년 후 어느 여름 밤 모기 불 연기 속 대문 열리니 아하 아버지 꿈속에서 그리던 아버지 캄캄한 밤 무섭고 두려워 소리 죽여 불렀던 아버지 노란나비 꽃무늬고무신 막내딸 주시려고 사오셨어요 너무 너무 이쁘고 갖고 싶던 꽃신이지만 어찌 아버지 품속만 하오리까 최태선 교수의 가족사이자 곧 우리 근대사이다. 4가지 가요가 기록한 소중한 기록이다. ‘특별음반’이란 수식어가 자랑스럽다. 음반 제작을 마친 작곡가 안용희는 1996년 작곡하여 널리 연주된 '대한국인 안중근'이 최태선 교수의 가족사와 인연을 맺어준 것을 뜻 깊다고 하였다. "부끄럽게도 안중근 의사님 의거일(10월 27일) 및 순국일(3월 26일) 국가 공식 행사시 숭의여고 합창단, 대한민국 군가 보존회 합창단, 서울대 음대, 동아대 음대 등 교수 및 음대 학생들의 합창 및 중창으로 매년 정성어린 공연을 해주셔서 감복 할 따름입니다. 이 인연으로 최태선와의 소중한 인연으로 연결되어 가족 3대를 소재로 이번 음반을 낳았습니다. 이 인연을 소중히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최태선 교수는 소감을 묻는 통화에서 "할아버지와 아버님의 수난사는 나의 고난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안의사의 정신을 따른 할아버지, 머슴살이 중에도 이웃에 한문을 가르치신 계몽 정신, 이는 제가 받들어 계승해야 할 가풍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모든 고난은 두 분의 빛나는 삶으로 하여 반사된 일부로 생각합니다. 이 번 음반을 통해 할아버지의 만주 독립운동 사적이 인후보증 등을 통해 복원되리라 믿습니다. 이 음반을 안의사와 할아버지와 아버님께 바칩니다.”라고 당당함을 보였다. 한편 최태선 교수와 안용희 작곡가는 오늘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숭모회 행사에 참석하여 음반 기증을 한다고 밝혔다.(金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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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시대적 어려움을 극복하다김 세 종 (다산연구소 소장) 연말연시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희망찬 새해맞이에 들뜬 때이지만, 코로나19 전염병으로 인하여 전 세계가 어둡고 불안에 떨고 있다. 2020년 3월 18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 범유행 사태의 지시사항과 몇 가지의 사회적 고려사항을 다루어 정신건강 및 정신사회적 문제와 관련된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코로나시대는 "격리 및 사회적 활동의 제한, 공포, 실업 및 재정적인 요인으로 인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고, 자살율의 잠재적 상승에 대한 우려로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하였다. 상식적으로 불안과 공포, 우울이 지나치면 몸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또 다른 코로나19 전염병 증후군이 되고 있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불안과 공포, 우울을 떨쳐내는 생활 속 지혜로 음악을 추천해 보고 싶다. 음악은 마음이 움직여서 소리로 표현된 예술이다. 따라서 음악은 기분이 다운됐을 때, 바로 기분을 전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음악의 3요소인 선율[멜로디], 화음, 리듬[장단] 중에서 선율에서 주는 긴장 완화나 화성에서 주는 편안함, 포근함, 리듬에서 주는 역동성 등이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음악은 쉽게 동화하고 조화롭게 어울리는 효용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은 음악을 가까이하였는데, 이유로, 첫째, 음악은 바름[正]과 그름[邪]을 분별한다. 둘째, 음악은 서로 다른 소리를 하나로 만든다. 셋째, 음악은 몸을 닦고 성품을 다스려 본래의 참마음으로 되돌린다. 넷째, 음악은 혈맥을 뛰게 하고 정신을 유통시킨다. 다섯째, 음악은 마음을 즐겁게 한다. 등을 들고 있다. 이는 코로나시대에 사람들의 심리성향이 점점 내향적으로 변하는 변곡점에서, 음악 활용은 불안과 공포, 우울을 다스리는 힐링의 대안이 된다. 곧, K-Music이 침체한 국민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달래주며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K-Music이 K-방역으로 자리매김 요즘 TV만 틀면 트롯트가 흘러나온다. 그야 말로 트롯트 전성시대이다. 트롯트는 한 때 일본의 ‘엔카’와 닮았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기도 하고, 특별한 이름 없이 ‘유행가’, ‘유행소곡’ 또는 ‘뽕짝’이라고 불리며 쇠퇴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할아버지 할머니, 중·장년층이 즐겨듣던 음악이라는 인식을 넘어 2030세대는 물론 10대까지 열광적으로 향유층에 합류하면서 새로운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국민의 생활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일단 트롯트는 멜로디가 따라 부르기 쉽고, 노랫말이 직설적이고 솔직하며, ‘꺾기’식 창법(바이브레이션)에서는 우리나라 민요의 어법을 수용한 신민요 양식을 변별적으로 응용하고 있다. 또한 박자에서는 한 박자를 3박으로 나누기 보다는 한 박자를 2박, '쿵짝 쿵짝' 하는 4분의 2나 4분의 4박자 리듬으로 구분하고 있다. 3박으로 나누어 느릿느릿한 3박 보다는 2박을 둘로 나누어 듣는 사람에게는 역동적이고 신나게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트롯트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누가 뭐래도 토롯트 가수의 목소리에 흐르는 감정이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있기 때문일 게다. 가령 우리가 어떤 감정을 슬프다고 말할 때 사실은 그 안에 슬픔이라는 말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있다. 그 슬픈 감정 속에는 서러움, 애절함, 절박함, 상실감, 원망, 쓸쓸함 등이 담겨 있는 것처럼 음악에서 표현되는 소리의 짙음과 옅음을 나타내는 농담(濃淡)이 아닐 수 없다. 분명 트롯트는 사람의 저 깊은 마음에서 길러낸 감정 표현과 다양한 음색이 창의성으로 어우러져 만들어낸 소리 예술이요, 시간 예술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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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송별회, 그러나 따뜻한 안녕!종로3가 국악로, 거기서 ‘~형’이나 ‘형수’ 소리가 들리면 그건 열에 아홉은 그의 목소리다. 김호규, 국악신문 사장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지 1년이 지났다.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누구나 기억되지 않는다. 누구나 기록되지도 않는다. 김호규는 기억되고, 기록으로 남는다. 국악인으로, 언론인으로, 문화운동가로. 풍류의 태토 정읍에서 태어났다. 설장고 명인 김병섭의 아들로 자랐다. 국악예술고등학교를 나와 장고를 멨다. 그러다 돌연 독보적인 길을 걸었다. 국악신문 편집 겸 발행인 ‘김호규의 길’이다. 오늘 그를 회고하고, 추모하는 모임이 있었다. ‘국악신문 창간자 故 김호규 1주기 추모 소상씻김’이다. 진행자 진옥섭이 눈물지어 회상했다. 장남 김하늘이 꿋꿋하게 해적이를 풀었다. 마지막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발행한 293호 1면 기사 주인공 임웅수가 후배로서 추모했다. 여건상 모임은 조촐했다. 참석한 지인들은 잔 올려 재배하며 영 이별을 고했다. 가까운 예인들은 악가무로 위로했다. 씻김 과장은 넘치도록 충분했다. 쑥물 향물 청계수로 씻겨서 넋풀어 넋올리고 길닦음으로 배송했다. 여보게 호규, 지난 해 황망히 보낸 서운함을 오늘에서야 풀게 되었네. 우리의 따뜻한 마음 잘 받았겠지. 그랬다면 마음 놓고 가게나. 자네가 남긴 ‘국악신문’, ‘국악 사랑’ 잊지 않고 기리겠네. 내내 내일은 국악로에 가서 내가 먼저 "김호규 사장~”하고 불러 보겠네. 아, 대답하지 않아도 되네. 그대 어디 있는지 아니까! "김호규 사장~”(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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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대한민국국악제’ 첫 런칭 매치 공주시백제문화의 고도 공주시에서 ‘2020 제39회 대한민국국악제’가 펼쳐진다. 공주시(김정섭 시장)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임웅수 이사장)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39년 역사상 첫 지방 개최이다. 이는 국악협회가 전국 17개 지회와의 새로운 관계설정의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1981년 ‘제1회 대한민국국악제’를 시작으로 39회를 맞는 이번 국악제는 한국 대표 국악축제라는 위치를 갖고 있다. 이번 행사는 코로나19의 여파로 각종 국악 공연이 취소되는 상황에서 지방과의 런칭 공연으로 활로를 튼 것으로 판단된다. 더불어 국악 공연에 관심 많은 국악 애호가들에게는 규모나 출연진으로 볼 때 큰 선물이 될 듯하다. 대한민국국악제의 첫 런칭 매치를 공주시와 함께 한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우선 중고제 판소리의 중심지이자 박동진 명창의 고향인 공주라는 사실이다. 이는 공주시가 내세우는 ‘중부권 문화중심 도시 공주’의 큰 배경이기도 하다. 다음은 ‘충청권 국립 충청국악원’ 유치를 위해 노력하는 지자체 격려차원이란 명분이다. 공주시는 충청권 국립국악원 설립이 우리나라 지역 국악 발전 기여와 향수권 확보라는 큰 뜻을 갖고 유치위원회를 운영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번 국악협회 지방 공연은 위와 같은 당위성과 명분을 제시하면 런칭 매치가 가능하다는 전범이 될 것으로 본다. 국악제는 두 분야로 진행된다. 학술 세미나와 공연이다. 학술 세미나는 30일 공주문화원에서 2시부터 ‘국립 충청국악원의 시대적 요구’라는 주제로 박일훈(전 국립국악원장) 원장을 비롯한 국악계 저명인사들이 국립충청국악원의 가치와 전망을 논의한다. 공주시는 강릉, 문경 등 지자체의 유치사업 중 가장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지역이고, 발표자 박일훈 원장은 공주유치위원회 주역으로 지역 국악원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해 왔다. 31일에는 ‘영혼으로 빚어내는 역사의 소리’라는 슬로건으로 공주시 아트센터 고마 야외특설무대에서 4시 개막식을 시작으로‘전통 연희 한마당’과 ‘본 공연’이 개최된다. ‘전통 연희 한마당’에서는 공주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광명농악’ ‘진도북춤’ 등 7개의 전통 연희팀들이 전통 연희 모꼬지 공연을 벌일 예정이다. 이어서 열리는 본 공연은 박성환 명창의 중고제 판소리를 시작으로 이광수(비나리), 안숙선 명창, 이호연·유지숙·김차경(민요) 명창, 경기도당굿시나위춤보존회, 왕기철·왕윤정 부녀(심청가), 송선원·박준규(매나리), 박종필(덧배기 춤), 사물놀이 진쇠, 모선미(해금),가수 마야 등이 공연을 펼쳐지며 안산시립국악관현악단(임상규 지휘자)이 연주로 참여하는 다채로운 공연이 진행될 예정이다.(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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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담소리 최영숙재담소리는 고종 때에 가무별감을 지낸 박춘재(1881-1948, 또는 1883년생)가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초에 적립한 재담과 소리를 결합한 독특한 형태의 서사적 음악극이다. 1910-1920년대에 축음기 판이 남아 당시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백영춘(1946년생)은 이창배(1916-1983)로부터 경서도 소리를 배우고, 소리꾼 정득만(1909-1992)으로부터 박춘재의 재담소리를 배웠다. 따라서 이를 복원하여 1999년에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처음 선을 보였다. 특히 백영춘은 박춘재의 제자이며 발탈 보유자였던 박해일(1923-2007)로부터 발탈과 재담소리를 아울러 전수받았다. 따라서 재담소리는 2008년에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았으며 보유자로는 백영춘이 인정받았다. 2014년 백영춘이 명예보유자로 인정된 이후 2017년에 최영숙이 보유자로 인정받아 전수활동에 전념해 오고 있다. 재담소리는 각종 재담과 경서도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등장인물의 연기력과 춤이 가미되어 가무악극이 결합된 종합예술이다. 재담이란 즉흥성이 강한 해학적이고 재치있는 말을 지칭하는데, 전통연희에 광범위하게 전승된다. 따라서 가면극, 인형극, 발탈, 줄타기, 진도 다시래기, 굿놀이, 각종 놀이 등에 재담이 두루 나타난다. 그런데 백영춘이 전승하는 서울 지역 장대장타령, 장님타령 등의 재담소리는 고유한 재담에 경서도 소리를 삽입하고, 일정한 서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한양의 장대장이 가산을 탕진하고 만포첨사로 부임하는 과정과 무당과 눈이 맞아 살림을 차리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등이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다. 재담과 소리가 결합되어 서사적으로 전개되는 연희 중에서, 발탈은 발탈이란 독특한 도구와 검은 막을 이용하며, 인형극은 인형과 검은 막, 다시래기는 장례도구와 장례의식이 첨가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에 비해 재담소리는 재담극의 성격에 소리가 가미되어 있으며, 두 인물이 직접 등장해서 소리와 함께 연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징이다. 따라서 다른 도구 없이 오직 재담, 연기력, 경서도 소리, 춤 등의 다양한 예술적 능력을 보여주는 종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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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영화] 춘향뎐 (2000년)판소리 춘향가 구구절절 애처롭다. 춘향전 스토리를 살피면, 조선조 숙종 시대. 남원부사 자제 이몽룡(조승우 분)은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남원고을에 내려온 지 수삭이 지났으나 오로지 책방에 갇혀 공부만 하자니 짜증이 나던 차에 방탕한 마음이 생겨 관아의 하인 방자를 앞세우고 광한루 구경을 나선다. 날나리 흥겨운 가락과 함께 농악놀이가 펼쳐지는 단오날. 씨름판도 벌어지고 녹림속 그네터엔 처녀들의 그네놀이가 신명나는데 그 무리속에서 해도 같고 달도 같은 뛰어난 미인을 발견한 몽룡은 그만 넋을 잃는다. 퇴기 월매(김성령 분)의 딸 춘향(이효정 분)이라고 방자가 넌지시 이르자 몽룡은 당장 불러오라고 재촉한다. 몽룡의 성화에 못이긴 방자는 춘향에게 몽룡의 뜻을 전하지만 춘향은 "안수해, 접수화, 해수혈"이라는 아리송한 말을 남기고 향단(이혜은 분)과 함께 그네터를 떠나버린다. 기러기는 바다를 따르고, 나비는 꽃을 따르고, 게는 굴을 따른다는 뜻인 즉, 직접 자신을 찾아로라는 춘향의 뜻을 알아챈 몽룡은 야심한 밤을 틈타 춘향집을 방문한다. 묭룡은 춘향 어미 월매에게 춘향과의 백년가약을 원한다는 뜻을 밝히고 불망기를 써서 자신의 마음이 영원히 변치않을 것임을 맹세한다. 전날 밤, 연못에 잠긴 청룡의 꿈을 꾸었던 월매는 이 일을 길조로 믿고 쾌히 수락한다. 그 밤으로 이루어진 몽룡과 춘향의 사랑은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인 격이어서 16세 아직 어린 것들이 서먹함도 부끄러움도 없이 놀아나는데 순식간에 정신도 육체도 깊이 함몰되어 꿈결같은 세월을 보낸다. 하지만 몽룡의 아버지 이사또가 동부승지로 승진 내직으로 가게되니 몽룡인들 별 수 없이 부모따라 한양으로 가게 된다. 여러 고을을 두루 거치며 호색한으로 소문난 변학도는 남원골 춘향이 절색이란 소문을 듣고 밀양, 서흥 좋은 자리 마다하고 굳이 남원부사 임명받아 서둘러 부임한다. 부임 삼일만에 부랴부랴 치뤄진 기생점고에 춘향이 빠져있자 동헌으로 불러들인 변사또는 어미가 기생이면 종모법에 따라 딸인 너 또한 기생이라며 수청 들기를 강요한다. 비록 기생의 자식이나 명부에 올리지 않았음으로 기생일 수 없고 구관댁 도련님과 백년가약 받들기로 하였으니 이부종사는 할 수 없다고 버틴다. 화가 난 변사또는 춘향에게 거역관장 죄를 물어 동틀에 매달고 모진 고문을 가하지만 춘향은 절개를 굽히지 않는다. 한편, 몽룡은 부지런히 공부해 장원급제 벼슬길에 오르고 암행어사로 임병받아 전라도로 내려온다. 남원 근방에 이르러 여러모로 탐문하던 중에 변학도의 폭정과 춘향의 높은 절개에 칭찬이 자자함을 알게 된다. 걸인 차림으로 몽룡은 옥방의 춘향을 만나고 춘향은 몽룡을 향해 변함없이 뜨거운 사랑을 보낸다. 몽룡은 천기를 누설할 까,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돌아서며 분노를 삭힌다. 다음날 광한루, 각읍수령들의 참석하에 변학도의 생일잔치가 장대히 벌어진다. 잔치가 무르익을 무렵, 암행어사 출두가 붙여지고 몽룡은 변학도를 응징한다. 몽룡과 춘향은 재회하고 동헌은 축제 분위기로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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