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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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6)김종욱 무성영화로서 단성사는 흥행적으로 또는 경리적으로 얼마만큼 성공은 하였으나 그러나 점차로 떨어져가려는 ‘팬’을 잡기 위해서는 언제까지나 무성, 혹은 연속영화만을 계속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서 흥행적 타산에 영민한 고 박승필씨는 마침내 신파극단을 조직하였으니 이것이 곧 ‘김도산일행(金陶山一行)’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배경은 물론 ‘단성사’였으나 ‘김도산일행’은 내용에 있어서 혹은 형식에 있어서 완전한 자치제(自治制)였고 직접 박승필씨로부터는 간섭을 받지 않았다. 이상과 같이 ‘김도산일행’이 결성된 것은 대정 8년(1919년) 전후였고 중요한 멤버로서는 단장 김도산씨를 비롯하여 이경환(李景煥), 송해천(宋海天), 나효진(羅孝鎭) 등 제군이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키노드라마’가 시험된 것도 이 김도산일행이었고 또한 이것을 일반 ‘팬’에게 소개한 곳도 ‘단성사’의 무대라는 것을 돌이켜 생각하여 볼 때 다시금 흘러간 이름 ‘단성사’가 스스로 그리워짐을 어찌할 수 없다. 무성영화로서 단성사는 흥행적으로 또는 경리적으로 얼마만큼 성공은 하였으나 그러나 점차로 떨어져가려는 ‘팬’을 잡기 위해서는 언제까지나 무성 혹은 연속영화만을 계속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서 흥행적 타산에 영민한 김도산일행의 결성(結成)을 하나의 계기로 해서 이로부터 단성사의 무대에는 그야말로 우후죽순(雨後竹筍)의 기세로서 신파극단의 새로운 깃빨이 펄럭이게 되었던 것이니 즉 ‘취성좌(聚星座)’가 그것이었고 ‘연극사(硏劇舍)’가 그것이었고 ‘신무대(新舞臺)’가 그것이었다. 이같이 신파극단이 맹렬한 기세로 일어났음에는 물론 이론적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당시에 일반사회에 미증유(未曾有)의 호 경기를 가져온 공진회(共進會)의 영향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영화 상설관시대로부터 신파 상설관시대로 머리를 돌이킨 단성사는 결코 경리 상 손해를 모르고 꾸준히 유지하여 내려왔던 것이나 소화(昭和) 5년(1930년) 경에 이르러 드디어 박승필씨는 경제적 곤경에 빠지게 되었고 따라서 단성사의 무대로 하여금 경제적 대파탄의 구렁텅이로 휩쓸어 넣고 말았던 것이니 그것은 오로지 흥행주 고 박승필씨의 극장을 떠나서의 개인의 사사로운 실패로부터 원인된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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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4)김종욱 흘러간 이름 『團成社』, 劇壇 四十年史 無言의 主人公 = 歷史 오랜 ‘團成社’ 終焉! ‘大陸劇場’으로 遂 改名, 새 主人맞아서 不遠에 開舘豫定= 40여년이란 오랜 역사를 기진 북촌(北村)의 유수한 영화와 연극의 전당(殿堂) 단성사가 드디어 경영곤란으로 명치좌(明治座) 관주(舘主) 석교(石橋)씨에게로 넘어가서 지난 7월 1일부터 10일까지 열흘 동안 일반으로부터 단성사의 새 이름을 현상을 내걸고 모집하였던바 드디어 지난 18일 정오에 추첨으로 새 이름을 결정하고 이제부터는 오로지 개관 날짜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한다. 전 조선 각지로부터 들어온 투표 총수는 2만 4천여표로서 ‘종로좌(鍾路座)’ 혹은 ‘제이 명치좌(第二 明治座)’ 등의 각색각양의 명칭이 많았으나 결국 ‘대륙극장(大陸劇場}’이라 결정하고 경관 입회하에 추첨하여 당선자를 정하였는데 주소와 씨명은 아래와 같으며 심금은 50원이라 한다. ᅀ 경원선(京元線) 연천역(蓮川驛) 전(前) 박용신(朴龍信) (사진은 단성사) = 布張두른 ‘바락크 속 豪然! 舊派의 總本營 再轉하여 映畵常設舘으로 = 단성사! 단성사! 이제는 다시 두 번 부를 바이없는 "단성사”는 과연 여직껏 어떠한 굽이굽이의 고개를 넘어 왔는고? 북촌(北村)의 영화상설관으로 사십여 년이란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내려온 말 없는 "단성사”의 흘러간 과거의 슬프고도 그리운 역사를 ‘워너‘ 영화배급소 아구영(李龜永)씨에게 듣기로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14년 전 당시의 서울에는 원각사(圓覺社)니 장안사(長安社)니 연흥사(演興社)니 하는 등의 극장이 있었다. 이러한 극장들이 있을 때 역시 지금 자리에 "단성사”기 있었던 것이디. 단성사가 처음 탄생하게 된 것은 역시 그것은 우리들의 손이어서 단 두 사람의 합동 경영이었다. 이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들 최초의 경영자는 극장을 경영하여 나아감에 우선 영리보다도 무엇보다도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하기에 급급하였던 사실이다. 물론 당시의 "단성사”는 오늘과 같은 위풍당당한 집이 아니라 ‘바라크’식의 집이었다. 창립 당시에 있어서는 소위 구파(舊派)라고 하여서 입창(立唱)이며 좌창(坐唱)이며를 하였고 줄 타고 재주를 넘는 광대(廣大)들을 위하여 무대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단성사가 불이 붙고 또한 고 황금좌(黃金座)의 관주(舘主) 전촌(田村)씨의 손으로 넘어와서 비로소 영화상설관(映畵常設館)으로 면목을 일신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이나 된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단성사는 이 전촌(田村)씨의 소유가 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실제 경영을 모르는 전촌 씨는 불붙은 단성사를 단 3천원에 사기는 샀으나 앞으로의 운영방침이 애매하자 그 경영권을 고(故) 박승필(朴承弼)씨에게로 넘긴 것이다. 박승필씨와 전촌씨와는 광무대(光武臺)를 중심으로 본시부터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매월 650원씩의 집세를 내기로 하고 박승필씨는 흥행권을 맡고 전촌씨는 다만 자본주로써 한 걸음 물러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대정(大正) 7년(1918년) 경이었다. 말하자면 ‘전촌’ ‘박’ 두 사람의 합자(合資)로 단성사는 유지되어 나가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3천원이란 너무나 싼 값으로 전촌씨에게로 넘어와서 비로소 상설관으로 변한 단성사는 다시금 고 박승필씨에게로 넘어가서 비로소 상설관으로서 본격적 활동을 개시한 것이었다. 당시의 영화란 물론 전부 무성(無聲)영화이었고 그 중에서도 단성사가 즐겨 상영한 것은 ‘유니버설’ 회사와 ‘파라마운트’ 회사의 작품이었다. 지금도 우리 기억에 새로운 ‘명금(名金)’은 아마 단성사가 상영한 수입 ‘명금’은 연속 영화 증에서도 너무나 유명한 영화일 것이다. 당시에는 영화가 거의 무성이고 하였으니까 거기에 따라서 유명한 변사(辯士)도 많이 나왔다. 더구나 박승필씨가 단성사를 맡게 되자 그때까지 우미관(優美舘)에 있던 유명한 변사는 모두 이곳으로 쏠리고 말았던 것이다. 즉 이병조(李丙祚), 최병룡(崔炳龍), 김덕경(金悳經), 고 서상호(徐相昊) 등 제씨였다. 그러나 극장의 펜이란 흡사히 유행을 따르는 아가씨의 마음 같아서 그들은 차차로이 연속영화 등속에서 싫증을 느끼고 차차로이 새로운 무엇을 찾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단성사가 스스로 적지 않은 지본을 던지어 신파극단을 조직한 것은 바야흐로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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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3)김종욱 대조선 개국 오백 오회 기원절 축사를 팔월 십삼밀 오후 세시에 독립관에서 행하는데 국기를 높이 달고 그 아래 화초로 단장하였는데 정부 대소 관인과 여러 학도와 인민이 많이 모였으며 각국 공 령사와 신사와 부인들이 각기 예복을 갖추으고 대대이 앉았는지라 그 축사하는 절차를 보니 처음에는 배재학당 학원들이 축수가를 불러 가로대 오백여 년 우리 왕실 만세 무궁 도으소서 찬송하니 외국 부인이 악기로 율에 맞추어 병창하더라 둘째는 회장 안경수 씨가 개회하는 뜻을 연설하고 셋째는 한성판윤 이채연 씨가 학부대신 이완용씨를 대신하여 국민의 당연히 할 직무를 연설하고 넷째는 배재학당 학원들이 뮤국화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나라 우리 임금 황천이 도우샤 임금과 백성이 한 가지로 만만세를 즐겨하여 태평 독립하여 보세 하니 외국 부인이 또 악기로 율에 맞추어 병창하더라 다섯째는 미국 교사 아펜셀러씨가 영어로 조선에 거류하는 외국 사람들을 대하여 각기 당연히 할 직무를 연설하며 여섯째는 의사 제이슨 씨가 조선 관민들을 대하여 진보하는 것을 연설하고 일곱째는 배재학당 학원들이 나라 사랑하는 노래를 부르니 외국 부인이 또 악기로 율에 맞추어 병창 하더라 여덟째는 전 협판 윤치호 씨가 기원절일 문제를 연설한 후에 탁지대신 심상훈 씨가 제이슨 씨와 아펜셀러 씨의 연설한 것을 감사하다고 말하더라. 다음에 다과례를 행하고 날이 저문고로 다 헤어져 돌아가더라. 무궁화 노래 一.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후렴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애국하는 열심 의기 북악같이 높고 충군하는 일편단심 동해같이 깊어 三 천만인 오직 한 마음 나라 사랑하야 사농공상 귀천 없이 직분만 다하세 四 우리나라 우리 황제 황천이 도우샤 군민공락 만만세에 태평 독립하세 現代에 無窮花 木槿花라고도 하였으니 목근화를 그 당시 무궁화 비슷이 발음하여오던 모양이랍니다. 이는 지금 일본에서 무궁화 즉 槿花를 ㅇㅇㅇ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도 그 당시 발음이 ‘무궁화’ 비슷이 혹은 와전되어 ‘무궁화’라고 俗鄕에서 불려 내려왔는지도 모른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槿花 즉 무궁화를 지금과 같이 無窮花라고 쓰게 되기는 극히 젊은 근대의 일이라 합니다. 아마 지금부터 이십 오륙년 전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게 되어 양인의 출입이 빈번하게 되자 그때의 선진이라고 하던 尹致昊씨등의 발의로 "우리 대한에도 國歌가 있어야 된다”고 한편으로 洋樂隊도 세우고 한편으로 국가도 창작(?)할 때 태어난 "上帝가 우리 皇上 도우사 海屋주를 山같이 쌓으소서 ㅇ이 寶ㅇ에 떨치사 億千萬歲에 永遠無窮하소서" 라는 노래의 부속되어 있었다고 하는(?) "東海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닳도록 ”이라는 愛國歌의 후렴인 "無窮花三千里 華麗江山” 이라는 구절이 끼일 때에 비로소 槿花 즉 무궁화를 ‘無窮花’라고 쓰기 시작한 듯 하답니다. 國歌짓고 國花 그리고 이와 전후하여 島山 安昌浩선생들이 맹렬히 민족운동 國粹運動을 일으킬 때에 조선을 무궁화에 비겨 청산 같은 웅변을 현하같이 토할 때마다 ‘우리 무궁화동산은...’ 하고는 주먹이 깨어질 듯이 책상을 두드리고 연단이 부서질 듯 벌을 굴렸습니다. 아마 이러한 자극과 동기가 근화가 무궁화로 변하여 그때에 국민이라고 하던 사람의 귀에 익어지고 입에 오른 듯합니다. 어쨌든 이때를 전후하여 근화를 무궁화라고 뚜렷이 쓰기 시작하고 또한 이것으로써 조선의 國花를 만든 듯합니다. 그러나 ‘無窮花’라는 字를 쓴 동기는 순전히 보기 좋고 뜻 깊게 하노라고 쓴 것이지요. 一時는 ‘李花’로 槿花 즉 무궁화가 위에 기록한 바와 같이 그때에 비로소 국화가 되었다 하여 국민의 숭상을 벋았다는 것은 아니외다. 먼저 쓴 바와 같이 이전 오백년 전 옛날부터 조선 나라에는 槿花가 많아 저 중국 사람의 눈에도 "君子之國은 多 木槿之擧”로 보였고 또한 그보다도 좀 늦어서 ‘海東繹史’에 고려시대에 중국에 글을 보낼 때에 고려를 槿花鄕이라고 自稱하였으니 근화가 古來로 개전에 많았던 것은 사실이 증명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근화에 대한 기록이 조금도 남지를 않았으니 이는 李 太祖가 조선을 얻은 후에 李花를 숭상하는 뜻으로 나라의 자랑거리요 백성이 다 같이 숭상하던 근화를 배척한 듯 하외다. 그래서 그간 근화가 사람의 눈에서 멀어졌던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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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2)김종욱 조선영화로 제1회 작품 "春香傳”이 나온지가 벌써 12년 전이다. 이것을 조선영화의 제1 페이지로 친다면 조선영화는 벌써 열두 살 먹은 소년이 된 세음이다. 열두 살이면 보통학교 5학년생이다. 젖 먹을 시간은 벌써 지냈 건만은 우리는(조선영화계) 아직까지 어린애 對接을 받는다. 어린애에도 不具兒로 세상에서는 對해 준다. 曰 補償없는 事業, 이것이 우리들이 듣는 別名이요 세상이 우리들에게 주는 評價다. 이렇게까지 된 根本原因을 세상에서는 거의 우리들의 當事者들에게 돌리는 것 같다. 물론 그 책임의 일부를 우리 영화 제작자가지지 아니하려는 것은 아니다마는 책임 전부가 우리에게 있지는 않다, 이렇게까지 된 제일 중대한 원인이 商品市場이 極히 작았기 때문이다. 조선 내 常設舘이 16處요 三流 四流劇場까지 치면 舘 數가 68舘, 여기서 볼 영화는 1편이다. 돌아오는 時日이 12個月, 보통 작품으로 總收入이 3천원, 特作品으로 5, 6천원, 이것이 無聲時代에 우리들이 제작한 物件이 가지고 있던 市場이다. 이 작은 시장에서 出資主는 受入이 2, 3倍되는 利益을 얻으려는 小 興行師가 아니면 興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映畵館(돈 있고 일을 모르는)이 아니면 장난꾼들이었다. 그러므로 2, 3배에 이익을 목적하는 소 흥행사들은 3分之 1以上의 出資를 아니해줬던 것이요, 장난꾼들은 受入을 無視한 倍額이 제작비로 2回를 編成하지 못하고 亡해버렸다. 이런 出資主를 상대로 하는 사업이 사업답게 될 배도 없고 달리 外國市場으로 보낼 물건이나 있을 리도 없다. 더구나 외국영화로나 남이 高級해지는 觀客을 상대로 하는 조선영화가 必然的으로 닥쳐올 큰 문제가 오고야 말았다. 조선영화면 또 그렇겠지. ‘렛쭈’ 몇 장으로 太陽光線을 빌려서 겨우 보일 락 말락 한 畵面을 보기에 싫증이 났다. 더구나 무성영화도 아작 水準까지 끌고 가려면 千里길이나 남았는데 외국영화는 發聲이 완전히 되었다. 이 커다란 문제 잎에서 조선영화인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우리도 한 개의 저선영화인으로서 이에 應戰할 準備가 具備하게 되었으니 다만 勝敗는 技藝의 문제다. 外國物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물건을 만들면 외국의 시장도 우리의 시장이다. 今後에 조선영화는 ‘레푸’ 쪽으로 만들면 장난깜이 아니다. 영화로써 이 모든 形式을 具備한 물건만을 내놓을 것이다. 새 活氣를 띈 36年度의 조선영화계는 커다란 收穫이 있을 것이다. 絶望의 無抵抗에서 再生을 얻은 조선영화를 등에 지고 나갈 동무들에게 건강을 빌면서 擱筆한다. =朝鮮中央日報 1936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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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1)김종욱 연극단, 악단을 울리는 신판 사기사건= 어떤 극단이나 악극단이 경영곤란에 빠졌을 시 이것을 에워싸고 대금학貸金學 모리배 또는 전후자 사이에 한 목 끼는 소위 중개자라는 것이 있어 앞뒤를 사기 횡착橫着하여 진지한 무대인들을 울리고 있는 사실은 지금에 비롯한 일이 아니거니와 여기에 편촉騙促되는 사건은 개중에서 가장 교묘한 방법이며 지적 악질 이것이라 할 것이다. 일작 22일 시내 영락정 모 악단에는 바야흐로 이 악질단이 원숙화 되려다가 다행히 기선機先 예민한 동 악단 대표의 돌격으로 드디어 그 수단은 미연에 발각되어 묵과할 희비극 일막을 빚어내고 말았지만 이제 그 사건의 내막을 들어보면 이러하다. 악단에는 서건 발생의 수일 전부터 "자기는 모 요로에 있는 사람인데 이번에 유동자금이 삼백만원 가량 수중에 있으니 이것은 건국을 위한 예술사업에 쓰고 싶다. 위선 귀 악단에도 50만을 투자하고 싶으니 어떤가?” 하고 찾아온 중년신사 전자영全구榮(가명)이라는 자(?)가 있었다. 이 문자그대로의 청천벽력적 예술이해 자본가의 내방을 본 동 악단에는 마침 현재 자기들 악단의 유지가 곤경에 빠지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그들은 이 감언이설에 귀를 기울여 이래 수일간 출자 수속하는데 필요타는 없는 주머니를 털어가며 응하였을 뿐 아니라 금액까지 솔선 꾸어주면서 교섭을 진행하여 왔다 한다. 이리하여 급기야 금일은 현금과 구식계약을 체결하는 22일 날 정오 악단측에서는 그제야 대표자까지 대동하여 장본인을 면대綿代하였던 바 역시 꿈같은 변설辯說을 늘어놓아 일동을 연기속에 두루 말았었는데 아무리 궐자厥者의 인상을 살펴보아도 틀림없이 이것은 사기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각한 대표자는 즉석에서 이 불한당의 이면피二面皮를 보기 좋게 벗겨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벌써 이 악단뿐이 아니라 다른 극단에 까지 이런 수단으로 공짜 향응, 또는 여우를 농락하는 등으로 유유히 무대인들을 속여 온 사실이 있었다 한다. 더욱 현금 우리 무대예술계의 운영유지가 혼미에 빠지고 있는 이즈음을 틈타서 이 같은 극히 지능적인 악덕 사기배들이 또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 출현할지 예상할 수 없으므로 모름지기 여러 단체들은 특히 조심이 필요하리라는 동단 대표의 체험 권고. (藝術通信 271호. 1946년 8월 24일) =극장= 이번엔 흥행주의 수입을 내사, ‘재산관리처’ 주목되는 움직임-적산극장 문제: 국립극장 문제를 에워싸고 합동통신사의 공동 경영설의 대두로 바야흐로 적산극장 문제의 귀추가 자못 주목되는 이 즈음 23일 오전 경기도 재산관리처에서는 돌연 시내 각 영화배급업자를 역방하고 각 극장으로부터 수입한 보율금액(단가를 포함한)의 내사를 시작하였다 한다. 이것은 혹 이즈음 항간 풍설에 떠도는 적산 관리극장의 경리부정에 대처한 확증수집인 듯이도 보이며 또는 앞으로의 낙찰 시과 그 운영에 수지가 맞을 것인가 아닌가의 기본적 수자의 산출을 보려고 하는 것인지 좌우간 현금 미묘한 예계에 적지 않은 쇼크를 던지고 있다.(藝術通信 271호. 1946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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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0)김종욱 [3만인의 벗!-‘벙어리 극단 공연을 보고-] 벙어리가 연극을 하다니- 온! 참 , 장님이 극장 구경 간다는 것과 꼭 같군! 하고ㅠ농아극장 ’남 모르는 사상‘ 상연된다고 하자 이렇게 수군거렸었다. 외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성황에 있던 것이지만 조선에서는 처음의 일이라 하기는 반신반의. 막이ㅡ올려지는 동안을 안타까웁게 기대리었다. 그리고 꼭 ’어색‘하리리 했던 것인데, 막이 열려 극을 보자 그런 기우杞憂는 전혀 부당하였던 것이다. 아니 기우가 부당했다는 것을 의식했다기보다 보통 연극과 같이 관람할 수 있엇다. 한 막이 끝나자 ‘어색’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생각하고 그런 점을 잡아 내리려 하였지만 좀처럼 잡혀ㅐ이지를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구태어 찾아내자니 그 손짓이 좀 기이했다던가 변사의 어조가 유난히 귀에 거실리워서 토키 전 시대의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은 감은 나왔으나 그 동작에는 조금도 어색이란 느낌을 갖지 않고 볼 수가 있었다. 극평가가 보는 눈으로는 전문적 여러 점의 견해가 있으리오마는 단순한 관객으로서의 인상은 이러하리라고 생각된다. 벙어리가 하니까 일종의 동정이 의식 전면에 나타나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확실히 벙어리도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게 되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전연 소인素人들로서 거의가 다 취직하고 있는 사람들로 없는 여가를 틈타서 만 3개월이란 일자를 꾸준히 노력해왔다는 것을 들을 때 노력과 단결이란 어떤 장벽도 넘을 수 있다는 것 같이 여겨졌다. 이 극의 작자요 연출가요 총자휘자인 정동섭鄭東燮(이도 벙어리)씨가 연습 중 때로는 몽둥이로 통솔하였다는 이야기는 그 열성을 충분히 보여주게 한다. 그래도 그 통솔을 달게 받으며 연기자는 몇 일 밤을 새워가면서도 연마를 했다고 한다. 그들의 심정을 살펴봄에 연극으로 하여금 말 못하고 말 못 듣는다는 그만한 제약을 받는 그들의 자신을 위로함은 물론 조선에 있는 3만의 농아자를 위하여 그들을 계몽하고 그들을 지도하려는 순일한 비통의 결심이 단결과 노력이란 것으로 뭉쳐진 소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농아극은 연기로서는 소인극의 역域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조작자가 없는 인형극같은 특수한 연극이나마 이런 점이 아니라 그들이 무언으로 제시한 그들의 단결과 노력과 규율은 일반 연극인의 좋은 거울이 아닐까. 이 시사가 헛되지 않기와 이들이 자신을 자위하고 자기들 봉어리들 광명의 길로 끌려고 하는 그들의 힘찬 움직임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藝術通信 271호. 1946년 8월 24일) ['국전國專‘ 연극 공연, 9월 초순 국도서]: 기보한 바와 같이 국학전문 연극부에서는 동교 창립기념으로 동 연극부 각본계 구성인 '세기의 개가’ 3막 5장을 가지고 제1회 연극발표회를 개최코자 만반의 준비를 거듭해오던 바 드디어 9월 초순부터 열기로 되었다 한다. (藝術通信 271호. 1946년 8월 24일) [연극학도의 수기-연극이전 (2)] 무대예술연구회 제공 혁명가의 정신 진실에 대한 철저한 노력과 자기 희생 진실을 위해서는 일체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無라고 생각하는 정신! 혁명을 도웁는 연극의 정신이 또한 이런 혁명가적 정신과 質이 틀림이 없다. 또한 철학적 정신과도! 소시민적 근성에서 근본적 동요를 거쳐 진부하고 앍고 보수적인 모든 것에서 일체 탈각하여 새롭고 우리들의 독립한 진실에 향한 마음일 것이다. 이것이 즉 연극정신이 아닌가? 근본적 동요란 사색과 자기 반성의 노력한 결과이며 비판적 정신에서 나오며 이 독립을 방색防塞하는 모든 박해에 대하여 지지 않고 용감히 반항하여 싸우는 실천의 용기라고 한다. 이럼으로써 완전히 진보적 입장에 서게 되며 태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연극이란 무엇이냐?’의 해결은 타인의 설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연극을 하는 정신에 있어 나올 것이다. 따라서 연극을 하는 정신에는 겸손, 정직, 진실 등 말로서는 여러 가지 있겠으나 일언이폐지하면 의식과 자기 충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하므로 연극은 유행상품도 아니고 사교적 장식도 아닌 것이 명백하나 정신 없이 논설만을 일삼는 향락주의자가 사랑이 없이 색만 구하는 불량청년과도 같이 연극정신이 없이 연극을 구하려는 도락자道樂者와 위선자가 일하지 않고 놀고 먹자는 해충의 존재와도 같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대상에 화장을 하고나서 빨갛고 푸른 조명에 맞으며 웃는 게 연극이 아니다. 연극을 통하여 정신적 육체적 행동을 근본으로부터 반성하여 낡은 것을 알고 새로운 것을 탐구하여 낡은 것은 낡은 것으로 새로운 것은 새로운 것으로 취사선택하는 영원의 성실을 의미하는 이러한 연극정신이 오래지 않아 혁명적 연극을 낳을 수 있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우선 낡은 것의 탈피작용과 새로운 술을 새로운 부대負袋속에라는 이 새로운 부대의 체득에 있다. 위대한 사상가는 결국 자기에 돌아가서 밑으로부터 근본으로부터 무엇이냐? 왜냐? 누구를 위하여? 의 근본원칙을 추구한 사람들이라 말한다. 이것이 없이는 연극정신도 운운할 수 없다. 즉 사상누각砂上樓閣이다. 이것이 연극이전의 것이며 아울러 연극생활 그것일 것이다. 나는 우리들의 요구에 응하여 어떠한 동기라도 자기의 내부에 돌입하여 감득하여 알고 뉘우쳐서 실제에 움직이지 않으면 싸우는 의지를 정말로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사모하는 진실에 연극정신에 도달하는 수단 그것의 방법으로서 연극을 생활하는 태도를 일상생활에 있어서 똑바로 선도하고 싶다. 과연 될 수 있을까? 또 꾸준히 반성하여가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藝術通信 271호. 1946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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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9)김종욱 극장 대여 입찰 심사단에서는 작금 별항 야기되고 있는 국립극장 문제에 대하여 작일 심사단 일동은 ‘앤더슨’ 지사를 방문하고 양자 간에 벌어지고 있는 분규에 대하여 질의를 한 바 있었다 한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시내 극장 동원표] 극장 제명 입장인원 국제 영화 ‘자유를 우리에게’(7일) 2067 극단 황금좌 공연(1일) 2060 국도 극단 낙랑극회(6일) 677 (7일) 840 수도 영화 ‘아부라함 링컨’ (6일) 3404 (7일) 840 중앙 극단 청춘극장 (7일) 366 악극단 새별(1일) 1712 서울 영화 ‘진주의 목걸이’ (2일) 979 (3일) 7352 단성 영화 ‘밀림의 砲兒’ (1일) 1459 (2일) 2592 장안 극단 농아극장 (2일) 680 (3일) 891 제일 백민, 백조, 태평양 공연 (6일) 600 (7일) 726(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인사] # 정흥섭鄭興燮(농아극장聾啞劇場 총무) 농아극 ‘남 모르는 사상’ 공연 인사차 래사 # 현학수玄鶴洙(동 극장 사업부) 동상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음악= [문교부에서 현상 작곡 모집]: 문교부장 유억겸兪億兼씨가 작일 발표에 의하면 문교부에서는 전조선인의 작곡을 장려하기 위하여 남조선주민의 현상작곡 모집을 주최하고 있다고 한다. 중등학교 합창 중 우수작품 3점의 작곡가에게는 상을 수여하고 또 이 작품을 중등학교 음악교과서에 편입할 것이다. 제재題材는 조선인의 생활을 상징하는 것이어야 되는데 그 작품은 전연 창작이고 소박한 제재이고 또 중등학교 합창용에 적당한 점 등을 참작하여 심사할 것이다. 곡의 길이는 10분 이내이어야 되며 조선민요, 고담, 고곡요古曲謠 기타 고전요古典謠 기타 조선 역사적 사실 등에서 취재하기 바란다고 한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강화유학생회 ‘연예의 밤’ 성황]: 강화유학생회江華留學生會에서는 귀향을 기회로 지난 16, 7 양일 읍내 잠두예배당蠶頭禮拜堂에서 ‘연예의 밤’을 개최하고 지방민에게 적지 않은 감명을 주었다는데 당일 프로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남성 독창: 권평환權平煥(세대世大), 송윤석宋允錫(경농京農), 김정원金鼎遠(배재培材), 고명선高明善(인중仁中), 금식琴植(경대經大) 2. 여성 독창: 김인배金仁培(이고녀二高女), 박덕순朴德順, 이윤화李允華(여의전女醫專) 3. 남성 4중창: 권평환, 강우철康宇哲, 오대식吳大植, 양현문梁顯文 4.'민족의 투쟁‘ 전 3막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예술= [예술대학 발기인대회 래 28일 중앙애육원中央愛育園서 개최]: 영화동맹과 연극동맹 그리고 미술 기타 각 단체 공동으로 예술대학 건립을 목표로 동 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한 다음 이래 준비 중이라 함은 누보한 바 있거니와 드디어 이에 관한 모든 구체안이 성립되었으므로 오는 28일 오후 1시부터 시내 명치정 중앙애육원에서 문화 각계 인사를 총망라한 종합예술대학 발기인대회를 개최키로 되었다 한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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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8)김종욱 벙어리들의 연극= 남모르는 사상 조선에서 처음으로 22일부터 3일 동안 장안극장에서 상연되어 서울의 인기를 한데 뫃았는데 이를 널리 소개코자 조영의 ‘해방뉴스’는 22일 오후 4시 반부터 공연장인 장안극장 무대에서 이 연극 4막 5장 중 일부 장면을 수록하였다고 한다.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그 여자의 ‘사랑 니[치齒]’- 낙수첩]: 연극여우 모 여사를 모두 아직 어린아이라고 부른다. 여보 농담일망정 그런 말은 좀 사양하시오. 남편 있는 어린 아이가 어디 있단 말이오(모 여사는 예술인 모 씨와 동서하고 있음. 순직한 모 씨 정색으로 편을 드니 장본인인 모 여사 "엄마!”하고 입을 커다랗게 열었다. 보니까 아닌 게 아니라 어른이면 누구나 물론 나 있어야 할 ‘사랑 니[치齒]’가 아직도 날려면 까마득- "쨋! 이[치]도 제대로 나기 전에 시집을 가다니! ”하고 편 들은 순직한 친구 다시 한번 실망적 분개- 따는 "엄마”하고 고함치는 것으로나 시비의 ‘사랑 니[치]’ 안 날 것쯤으로는 이 시절 여성의 생리조건은 달라진 것 본인은 편들어주는 이를 오히려 원망하더라고?.(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미술= [해방 미전 출품목록] #조형= ‘수목樹木’ (이봉상李鳳商), 자기‘磁器와 소녀’ (유영무柳榮茂), ‘빨간 찬장과 아기’ (서강헌徐康軒), ‘시위示威’ (이병효李炳孝), ‘황폐’ (이규로李圭魯), ‘꽃’ (박상동朴商東), ‘풍경’ (엄도만嚴道晩), ‘말’ (조병덕趙炳悳), ‘자유상自由像’ (유석연柳錫淵), ‘ 들’ (김선재金載善), ‘일하는 청년’ (염봉진廉奉鎭), ‘정물靜物’ (윤자선尹子善), ‘한구풍경漢口風景’ (임군홍林群鴻), ‘풍경’ (이규호李圭皓), ‘풍경’ (박성규朴性圭) #건축= 조선주택개량안‘ (오영섭吳英燮), 선렬위령탑’ (손중모孫中模), ‘해방기념탑’ (안일수安日洙) #포스터= ‘신문화건설’ (한홍택), ‘포스터’ (이완석李完錫) (끝)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사진= [오대산 기록사진, ‘사예寫藝’서 일반공개]: 조선사진예술협회에서는 과반 조선산악회 주최의 오대산학술조사대에 참가하여 시종 기록촬영에 위대한 성과를 걷우고 귀환하였다는 바 금번 그 전 작품을 모아가지고 오는 10월 2일부터 1주일 간 서울 시내 동화백화점 갤러리에서 열리는 산악회 주최의 보고전에 일부로 사진부전으로서 일반 공개키로 되었다 한다.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극장= [국립극장 문제는 어디로? - 돌연한 합동통신과의 공동 경영설 대두로 이것을 거부하는 국극위원측의 귀추와 당국의 해결책 나하奈何? ] : 조선에 국립극장의 설립과 극장은 문화인에게라는 소리가 비등하여 그간 당국에서는 시내 16 적산 극장을 문화인 혹은 적당한 후보자 대여 입찰제를 채용 g하여 이를 실시키로 하여 일반이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간 문화인들로 조직된 심사단이 이미 입찰의 심사를 종료한지 수개월이 지나도록 당국에서는 이 심사결과에 대하여 하등의 구체적인 해결발표가 없어 매우 사계에서 주목을 끌고 있던 차 드디어 거 19일에야 비로소 국제극장만에 대한 해결을 지키기 위하여 경기도 재산관리처에서는 군정청 교화국 관계자와 국립극장 위원과 또한 의외로 등장된 동업 합동통신 경영자들을 초청하여 현 국제극장을 국립극장 위원측과 합동통신사측과 공동경영을 하여 달라는 제시가 있었다. 그런데 국립극장에 한 목 끼게 된 합동통신사에 대하여 국립극장측 관계자들은 즉시 이를 반대하는 한 편 이 합동통신사의 출현에 관한 경위를 규명하여본 결과 합동통신사는 최근 동사의 운영 관계 상 국제극장을 동사 배양기관培養機關으로 삼기 위하여 4분지 3의 운영권을 ‘앤더슨’ 경기도지사로부터 양해를 받았다고 주장하는데서 나오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현재 도 당국에서는 국립극장 측과 합동통시 측과 합의하여 공동경영을 하여달라는 데 대하여 합동 측은 시초의 주장대로 ‘앤더슨’ 지사로부터 우리는 전기의 권리를 받았다고 고집하며 한 편 국립극장의 주장은 프로 편성 중 50% 상영은 ‘앤더슨’씨가 요구하여 왔기에 우리는 그것만을 합동통신과의 공동운영 이야기는 모른다는 주장인데 이리 되고 보면 국제극장만을 가지고서는 이 문제의 해결은 어려울 듯이 보인다. 이리하여 작 22일까지의 추세를 보면 국립, 합동 양측에서는 도 당국에 딴 의미의 의견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기로 되었다는데 이에 대한 당국의 제2목표는 과연 무엇일까? 그런데 작 22일 극장대여 입찰심사원 이서향씨와 국립극장 설립위원회 채정근 사무국장을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극장대여 입찰심사원 담: 극장 관계의 전 예술분야를 망라해서 성립된 극장대책위원회의 대표로 우리들 3인이 극장 입찰자 심사에 참가한 바이 있으나 우리들의 심사결과대로 낙찰이 되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일반의 희망만으로서는 해결 안 되는 군정 당국의 처리여하에 있는 것인 줄 안다. 최근 국제극장을 놓고 국립극장 위원과 합동통신 양자 간에 마찰이 발생하고 있는 듯한데 여기에 대해서는 상식으로 생각해도 국제극장이 국립극장 위원회에 낙찰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점에는 다른 심사원들도 동일한 의견이다. 이러한 심사원 각자의 의견이 저번 종료한 입찰자 심사에 반영되었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긴다. =국립극장 설립위원회 사무장 담 : 예술가들이 같은 이념에서 자기와 관계없는 통신사를 접수한다면 도 당국에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우리들도 이와 같은 견지에서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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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7)김종욱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보다 제일 즐거운 일은 없다. 사실 상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확실한 대답도 못 얻고 이렇게 ‘헛개비’에 씌운 것 같이 남이 볼 적에는 그야말로 들떴다고까지 보겠지만 하여튼 즐거운 것은 틀림없다. 연극의 매력이란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을 보는 즐거움- 연극을 만드는 기쁨- ‘무대예연舞臺藝硏’에 입회한 나는 정말 생활을(생존이다)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요사이 이런 신흥연극의 집단을 통하여 작으나마 연극 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 연극에 대한 사랑이 통일하고 절대적이라고 자부하던 마음이 점점 의심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유희본능에서만 고치려는 타성惰性이 싫어진 것이다. 이것은 축지소극장 내 화장실에서 본 바의 이야기인데 자기의 모든 생활을 극장에 바치고 사상의 전부 감정의 전부를 연극에다 쓰고 과거의 신극의 길에 봉사하던 사람이 그때 우리들(연극학도)과 같이 조연하고 있는 것을 보고 특히 자기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또 자기의 자식까지도 데리고 와서 화장을 하고 있지를 않았나. 父子 동반의 조연 연극을 하였기 때문에 생활에 짓눌리고 생활의 고통을 받아도 또 연극을 한다는 이런 연극을 아니 하고는 못 배기는 마음 얼마나 존귀하고 거룩한 심정일까? 이러한 자각이 각오가 나에게 있는가 묻는다면 아무 말도 못할 것 같다. 그저 나는 그런 힘이 끊임없도록 원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연극의 길은 가시덤불의 길이라 성공이 없는 길이라 가진 곤란과 또 대폭풍을 예상할 때 연극의 연구를 그만두는 것이 어떠냐고 유혹을 받았다고 해서라는 곧 단념을 하고 방향전환을 할 것인가. 아니다. 연극의 길이 아닌 곳에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오. 연극보다 더 매력 있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연극도 혁명에의 일이다. 고연 이런 예술에 봉사하며 이런 예술을 위하여 희생이 되겠는가? 그저 덮어놓고 연극은 예술이다라는 관념만으로 지금껏 자기의 입장 태도 및 회의적인 사고가 적었음은 솔직히 고백한다. 이것이 과거 선배 제형의 말씀이 진의미를 못 일아 들은 원인의 하나인 것이다. 새로운 사회를 위하여 새로운 연극의 창조를 염원하는 연극학도들의 동지가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새로이 돌진하여가려는 이때에 이러한 연극 이전의 것이지만 이것이 곧 연극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성한다는 것이 적었음을 후회한다. 더욱 앞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으나 정작 목표를 어디 다 둬야 하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연극이란? 라고 나는 곧 누구한테든지 묻고 싶다. 그러나 먼저 나 자신이 그 답을 이해할만큼 자라났나가 의문이다. 나는 깊은 연극학자는 알아도 무대의 실천가가 되고 싶다. 인민 대중앞에 아니 속에 들어가는 무대의 투사가 되고 싶다. 그것을 위한 연구이다. 혹인은 너는 연극이전의 것을 많이 깊이 생각함이 좋다라고 말하였다. 연극 이전의 것이란 또 무엇인가? 나에게는 크나 큰 문제였다. 그것이 이즈음의 ‘무대예술’의 연극생활에서 감득하고 이해(자기 정도로)할 수 있게 되었다. 우라들의 ‘모토’- 진실 탐구가 말하고 있지 않나. 진실의 탐구- 이것은 비판을 의미하며 진실을 사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연극이전의 것이 아닌가? 연극정신의 원천이 아닌가? 나는 곧 또 ‘연극정신이란 무엇인가?’ 라고 수박 겉핥기로 정의를 내리고 싶다. 이런 것이 정의를 내림으로써 체득할 문제인가? 요사이에 나는 이것은 여하히 넓게 책을 읽었다 치더라도 양으로서 도저히 알 수 없는 질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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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6)김종욱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보다 제일 즐거운 일은 없다. 사실 상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확실한 대답도 못 얻고 이렇게 ‘헛개비’에 씌운 것 같이 남이 볼 적에는 그야말로 들떴다고까지 보겠지만 하여튼 즐거운 것은 틀림없다. 연극의 매력이란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을 보는 즐거움- 연극을 만드는 기쁨- ‘무대예연舞臺藝硏’에 입회한 나는 정말 생활을(생존이다)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요사이 이런 신흥연극의 집단을 통하여 작으나마 연극 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 연극에 대한 사랑이 통일하고 절대적이라고 자부하던 마음이 점점 의심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유희본능에서만 고치려는 타성惰性이 싫어진 것이다. 이것은 축지소극장 내 화장실에서 본 바의 이야기인데 자기의 모든 생활을 극장에 바치고 사상의 전부 감정의 전부를 연극에다 쓰고 과거의 신극의 길에 봉사하던 사람이 그때 우리들(연극학도)과 같이 조연하고 있는 것을 보고 특히 자기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또 자기의 자식까지도 데리고 와서 화장을 하고 있지를 않았나. 父子 동반의 조연 연극을 하였기 때문에 생활에 짓눌리고 생활의 고통을 받아도 또 연극을 한다는 이런 연극을 아니 하고는 못 배기는 마음 얼마나 존귀하고 거룩한 심정일까? 이러한 자각이 각오가 나에게 있는가 묻는다면 아무 말도 못할 것 같다. 그저 나는 그런 힘이 끊임없도록 원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연극의 길은 가시덤불의 길이라 성공이 없는 길이라 가진 곤란과 또 대폭풍을 예상할 때 연극의 연구를 그만두는 것이 어떠냐고 유혹을 받았다고 해서라는 곧 단념을 하고 방향전환을 할 것인가. 아니다. 연극의 길이 아닌 곳에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오. 연극보다 더 매력 있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연극도 혁명에의 일이다. 고연 이런 예술에 봉사하며 이런 예술을 위하여 희생이 되겠는가? 그저 덮어놓고 연극은 예술이다라는 관념만으로 지금껏 자기의 입장 태도 및 회의적인 사고가 적었음은 솔직히 고백한다. 이것이 과거 선배 제형의 말씀이 진의미를 못 일아 들은 원인의 하나인 것이다. 새로운 사회를 위하여 새로운 연극의 창조를 염원하는 연극학도들의 동지가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새로이 돌진하여가려는 이때에 이러한 연극 이전의 것이지만 이것이 곧 연극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성한다는 것이 적었음을 후회한다. 더욱 앞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으나 정작 목표를 어디 다 둬야 하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연극이란? 라고 나는 곧 누구한테든지 묻고 싶다. 그러나 먼저 나 자신이 그 답을 이해할만큼 자라났나가 의문이다. 나는 깊은 연극학자는 알아도 무대의 실천가가 되고 싶다. 인민 대중앞에 아니 속에 들어가는 무대의 투사가 되고 싶다. 그것을 위한 연구이다. 혹인은 너는 연극이전의 것을 많이 깊이 생각함이 좋다라고 말하였다. 연극 이전의 것이란 또 무엇인가? 나에게는 크나 큰 문제였다. 그것이 이즈음의 ‘무대예술’의 연극생활에서 감득하고 이해(자기 정도로)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들의 ‘모토’- 진실 탐구가 말하고 있지 않나. 진실의 탐구- 이것은 비판을 의미하며 진실을 사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연극이전의 것이 아닌가? 연극정신의 원천이 아닌가? 나는 곧 또 ‘연극정신이란 무엇인가?’ 라고 수박 겉핥기로 정의를 내리고 싶다. 이런 것이 정의를 내림으로써 체득할 문제인가? 요사이에 나는 이것은 여하히 넓게 책을 읽었다 치더라도 양으로서 도저히 알 수 없는 질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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