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
문경 ‘2023찾아가는 아리랑학교’ 통산5회 성료전 국민이 애창하는 ‘문경새재아리랑’를 꿈꾸며 지난 4일 가은읍 소재 ‘문경에코월드’에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이만유)’가 주관한 금년도 마지막 다섯 번째 ‘찾아가는 아리랑학교’가 대미를 장식했다. 아리랑은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애창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정민요이다.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은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같으면서 다르고,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며, 나의 노래이면서 너의 노래라고 말하며, 우리 삶 속 희로애락에 따라 때로는 신명풀이로 또는 한풀이로 부르는 노래다.”라고 했다. 그리고 김영임 국악인은"아리랑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담고 있다. 아리랑 첫 소절만 불러도, 절절한 선율이 가슴을 툭 치고, 대한민국 네 글자가 떠오른다.”라고 했다. 이렇듯 아리랑은 우리 한민족(韓民族) 가슴과 DNA에 스며있는 우리의 노래다. 이런 아리랑이 ‘2012년 아리랑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신청할 때 ‘50여 종’이었지만, 그 이후 새로 찾고 생겨 지금은 100여 종에 이른다. 그중에 ‘문경새재아리랑’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면서 정선, 진도, 밀양 등 유명 아리랑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왜? 무엇 때문에?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문경새재아리랑’의 보급과 확산이 미흡했다. 늦었지만, 우리 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부르게 하도록 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가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이고, 추진사업이 4년 차 이어온 ‘찾아가는 아리랑학교’이다. 문경새재에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가네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애기 손길로 놀아나네 문경새재를 넘어갈제/ 굽이야 굽이굽이가 눈물이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문경새재아리랑의 유래가 ‘나이 사십이 되도록 장가 못 간 노총각이 불렀던 한탄의 노래’이든, ‘문경새재 물박달나무가 대 베어져 나가는 반감과 상실감에서 부르는 노래’이든, 아니면 ‘160여 년 전 경복궁을 중수할 때 부역 나온 장정들이 부모 처자와 이별하고 그리움에 불렀던 아리랑(我離娘)’이든, ‘원납전(願納錢) 내라는 소리에 차라리 귀가 먹기를 바라는 아이롱설(我耳聾說)’이든 조선 사람들은 모이면 아리랑을 불렀다. 그것도 ‘문경새재’와 ‘물박달’이란 말이 들어있는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은 가사나 박자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부르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처지가 곧 아리랑이 된다. 그래서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는 조선인은‘즉흥곡의 명수'라며 놀라워했고 "아리랑은 한국인들에게 쌀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세종대왕께서도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요, 밥(쌀)이 곧 백성의 하늘이다.” 이라 했었다. 이렇듯 쌀이 한국인의 육신을 지켜주었듯이 아리랑(정신적 쌀)을 통해 역사 속에서 고난과 애환을 버텨왔고 얼을 이어온 것이 곧 아리랑인 것이다. 올해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는 총 5회, 921명이 참석하였다. 이분들은 단순 관광객을 넘어 문경새재아리랑을 전파 확산하는 전도사이면서 홍보대사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 것은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아오신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사할린동포회’를 찾아가 함께 아리랑을 부른 것이다. 그때 모두 가슴 벅찼고 먼 길이었지만,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2024년 내년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가서 ‘독도는 한국 땅’이란 깃발 아래 아리랑을 부르기 위해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개최하기로 기획하였는데 아도위 40여 명의 회원은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벌써 가슴 부푼 나날을 보내고 있다.
-
난계 주제 ‘흙의 소리’ 출판기념회 축하합니다.국악신문 연재를 시작하신지 3년여 만에 출판기념회를 갖게 되신 작가 이동희 선생님, 그리고 삽화를 맡으신 이무성 화백님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장편소설 ‘흙의 소리’ 연재는 2020년 9월 17일 시작하여 2022년 10월 20일까지 총111회로 마친 작품입니다. 국악신문 27년간의 종이신문에서 인터넷 매체로의 대 전환, 재창간 기념하여 기획한 코너로 모신 작품입니다. 2004년 소설 ‘노근리아리랑’으로 ‘제4회아리랑상’을 수상하셨던 인연으로 교류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작가 이동희 선생님의 품격과 작품 성향을 잘 아는 것은 물론, 단국대 문과대학장을 마치시고 고향 영동군에 농민문학관을 설립하고 운영하시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청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동군이 배출한 악성 난계 박연 선생의 삶을 주제로 한 작품을 연재한다면, 여기에 이무성 화백의 삽화를 함께 한다면 문학과 미술과 국악의 만남이라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기획을 수립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작가 화백 두 분 모두 쾌히 수락을 해 주셔서 연재가 이뤄지게 된 것입니다. 작가 이동희 선생님은 앞에서 언급한 ‘아리랑상’ 심사 과정에서 일관된 우리 정서의 흙을 주제로 20여편의 작편 소설을 발표하신 저력을 보고, 심사위원 한 분이 ”와 노벨상 후보감이네"라고 하여 크게 동의한 바도 있었습니다. 삽화를 맡아 주신 이무성 회백님은 우리나라 6. 70년대 LP 국악음반 전성시대의 표지화를 장식해 주신 인연으로 국악계의 원로 이시기도 하고, 증언자이시기도 합니다. 이 조합은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지금 영동군은 ‘난계국악제’의 명성을 통해 ‘2025 영동세계국악엑스포’를 확정하고 준비 중이 있습니다. 난계 박연선생의 삶과 꿈을 담은 장편 소설 ‘흙의 소리’ 작품은 이 행사의 성공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난계 선생의 존재를 영동군이 널리 알리는 계기일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이 작품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영동세계국악엑스포가 성공하기를 기원 합니다. 이동희 이무성 두분과 함께하신 모든 분들의 건강을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3. 11. 09. (주)국악신문사 대표이사 기미양
-
(53) 한일회담 60주년 기념, “아리랑으로 한일관계 재정립하자”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체결. 이는 일본이 한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한 것으로써 법적지위, 청구권, 경제협력, 어업문제에 대한 협정 체결이다. 1910년으로부터의 긴 한일관계의 정치적 매듭으로, 전후 격심한 혼란을 겪었지만 한일국교정상화라는 새로운 시대의 출발임은 분명하다. 이로부터 60년을 보낸 오늘, 새로운 개념의 진정한 한일관계 정상화를 문화의 저력으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문화 저력에 의한 한일관계 재정립, 이 시대적 과제의 단서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에 의탁할 수가 있다. 다음의 다섯 가지에 근거한다. 하나는 아리랑 역사상 첫 활자 기록을 일본인에 의해 존재한다. 바로 1894년(明治27년) 5월 31일자 『郵便報知新聞』(유우빈호우치신문) 기사 <朝鮮의 流行謠 아리랑>이다. 이는 조선 민중의 정서를 청취하기 윈한 목적으로 조선의 유행요 아리랑에 관심을 둔 결과이다. 이는 1896년 미국 선교사 H.B 헐버트의 <Korean vocal music> 보다 2년 앞선 기록이다. 둘은 한일회담 과정에서 아리랑은 양국 국가를 대신한 사실이다. 한일회담 최고 난제였던 대일청구권 문제 해결로 한일회담의 실질적인 타결이라는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오히라(金鍾泌大平) 메모’ 서명 순간, 일본 외무성이 아리랑을 연주해 주었다. 한일 국가 연주를 대체한 것으로 매우 의미가 크다. 이는 1993년 11월 6일 일본 수상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가 김해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리랑으로 환영한 것과 같은 것이다. 셋은 "앞당긴 통일”로 평가되는 남북단일팀 ‘단가 아리랑’ 합의에 따른 단일팀 출전에 공동 국가 아리랑을 처음으로 시행된 곳이 일본이란 사실이다. 1990년 남북단일팀 결성 후 첫 국제경기가 일본 고베에서 개최된 세계탁구경기였다. 이때 분단 46년만에 처음으로 ‘코리아KOREA’란 이름으로 한팀이 되어 ‘한반도기’를 들고 아리랑 연주 속에 출전하여 세계의 장벽 중국을 꺾고 우승을 하였다. 당연히 수상식에서 우승 메달을 받는 순간 아리랑이 국가(國歌)로 연주되었다. 명실공히 아리랑이 한민족의 노래임을 세계에 입증한 것이다. 넷은 1930년대부터 1965년까지 일본에서 유통된 ‘일본아리랑’이 48종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일본아리랑’이란 일본에서, 일본 작곡가에 의해 작곡/편곡 되고, 일본 작사가에 의해 작사 되고, 일본 가수가 일본어로 부른 ‘아리랑’ 표제 작품을 말한다. 그런데 이 ‘일본아리랑’이 1931년 ビクター文藝部 編曲, 西條八十八 작사, 小林千代子 노래 ‘アリラン’이 첫 작품이다. 이어 하세가와 이치노(長谷一郞)로 알려진 채규엽이 일본말로 부른 ‘アリランの唄’이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널리 유행했는데, 1932년 일본 최고의 작곡가 古賀政男 編曲, 佐藤惣之助 作詞, 淡谷のり子와 長谷川一郎(蔡奎燁)의 노래이다. 이로부터 ‘아리랑 야곡(’アリラン夜曲), ‘아리랑 추억(アリランの思ひ出)’, ‘도도이야쓰 아리랑(都々逸アリラン)’, ‘아리랑 부시(アリラン節), ’아리랑고우타(アリラン小唄), ‘아리랑이야기(アリラン物語) 등 ‘아리랑’ 표제의 총 48종이나 된다.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어느 나라도 이런 노래의 사연을 갖는 경우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다섯은 아리랑에 얼킨 숙제 하나가 일본에 있다는 사실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그것은 우리 영화 최고의 작품이지만 필름이 없어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영화 아리랑’ 필름이 일본에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대동아전쟁기 폭약 제조용으로 관리하고 있던 일본 한국 대만의 영화필름 속에 나운규 감독 영화‘아리랑’이 포함되어 있다”는 아베 요시시게(阿部善重)씨의 생전 주장에 근거한다. 아베씨는 군속(軍屬)으로 폭약 제조를 하다 1945년 패전이 되자 3인이 불하(拂下)를 받아 소장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조총련 영화제작소장 여운각에 의해 남북한에 알려진 것이다. 2005년 사망하여 유품이 일본영상센터에 이관되어 "영화‘아리랑’ 필름이 없음이 확인되었다”고 하지만, 생전 증언에는 "영화‘아리랑’ 필름은 불하를 받은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소장했는데, 고베에 보관하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여지가 있는 것이다. 특히 아베씨를 나봉한(나운규 선생 차남) 선생과 세 차레나 만난 바 있는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이 조사한 보고서 ‘아리랑이 보고 싶다’에 의하면 3인이 합동으로 작성한 소장 영화필름 목록은 일본영상센타에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 여지는 있다고 본다. 이 문제는 다시 접근할 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상의 ‘일본아리랑’과 일본 속의 아리랑을 통해 한국과 일본 간에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특히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써 국가 간의 대화 주제임은 분명하다. 이로서 한일회담 60주년을 앞에 둔 시점에서 일본아리랑 주제 학술모임, 양국 공동 타큐멘타리 제작, 한일 교차 공연 등으로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국가무형문화재 아리랑, 그리고 일본아리랑을 새로운 한일관계의 중요한 문화 자산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아리랑 정신은 대동 상생에 있다는 사실에서 주목해야 한다. 이제 공동의 실행 위원회 구성으로부터 아리랑을 통한 한일관계 교류의 힘찬 걸음을 내딛자.
-
"중도전체를 사적지로 지정하라!"레고랜드 사업 실패를 인정하고 중도를 시민에게 돌려줘라! 2018년 10월 24일 문화예술인·시민단체 대표 50명이 중도선사유적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한 중도문화연대를 창립하였습니다. 창립과 함께 매월 네 번째 토요일 오전 10시~12시까지 중도 선사유적 파괴현장을 찾아 현대인의 과오를 고백하고 수천년간 중도를 지켜온 선사인, 우리는 이를 중도리안으로 부르며 선사인을 추모하는 문화행사를 진행해 왔습니다. 2019년 8월 중도문화연대와 춘천시민·사회단체 제정당들이 통합된 《혈세낭비레고랜드중단촉구 범시민대책위》로 확대되며 수천억원의 혈세가 낭비되는 현실을 고발하고 전 세계 으뜸인 중도선사유적을 보존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계속된 중도걷기는 2023년 10월 28일. 5년이 되어 횟수로 60회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진행되었던 중도걷기 현수막 전시를 통해 8천억원의 혈세를 탕진하고도 아직도 허허벌판인 레고랜드 사업의 실상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아직 희망이 남은 중도 선사유적이 미래세대에게 온전히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을 시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중도걷기 5주년 포스터 전시와 제60차 중도걷기를 아래와 같이 진행합니다. 시민들께서 손잡고 함께 해주시길 기대합니다. 일시 : 2023. 10.28 (토) 10:00 전시기간 : 2023년 10월 24일~2023년 10월 31일 장소 : 춘천대교 입구 출발->중도선사유적파괴현장 내용 : 1. 중도걷기 2. 레고랜드 앞 광장 퍼포먼스 3. 선사유적 제의와 문화행사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21회 섬진강국제실험예술제 ‘글로컬 아트 웨이브',이혁발/ 예술연구소 '육감도' 곡성의 들판을 살찌우는 실험예술제의 힘 2002년부터 시작된 '한국실험예술제'가 제주도를 거쳐 '섬진강 국제실험예술제'로 펼쳐진 지 3회째가 되었다. '실험예술제'는 세계미술사에 기록될만한 업적을 가진 국제적 명성의 예술제이고 일반적 시각으로 볼 때는 파격적이거나 생경한 부분도 있어 3만 명이 안 되는 작은 군에서 잘 품어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예술제를 품은 혜안의 결과물들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조금씩 여물어져 가는 듯하며, 더 나은 미래의 삶에 대한 긍정적 에너지, 기운의 꿈틀거림이 서서히 파동, 물결을 만들고 있음이 느껴져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얼핏 쓸모없어 보이는 실험예술의 쓸모에 대하여 실험예술, 전위예술은 "모든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전적인 자유”이고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 있어서의 창조의 의지”이다. 이때 "전위의 ‘정신’은 순수한 정신상태로 머무르며 ‘창조된 것’”, 완결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창조하는 그 자체에 방점이 찍힌다. 즉 전위는 ‘가능성’, 가능태로서 어떤 결과물로도 나올 수 있는 물렁물렁하고 유동적인 것이다. 창작의 마무리, 완결은 또 하나의 관습, 틀, 전통 등의 제약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실험예술, 전위예술은 언제나 ‘모색 중’, ‘실험 중’인 것이다. 모든 틀을 거부하고 순수한 정신상태로 자유로운 창작을 하는 것이 실험예술이다. 그래서 실험예술제는 무경계, 혼용과 융합성, 즉흥성, 우연성, 일시성, 현장성의 특성을 갖는다. 실험예술제의 실험예술은 첫해, 출발부터 행위미술을 기반으로 하였기에 기존 전통적 미술작품이 아니고 실연 후 사진과 영상만 남는 탈물질의 예술제였다. 물질에서 벗어난 탈물질, 그 무소유의 자유로움은 정신의 고양과 몸의 감각을 더욱 일깨우게 된다. 이로써 행위자나 관람자는 인간 본능이 갈구하는 몸과 마음의 자유, 해방감, 감각의 절정(쾌감)을 맛보게 된다. 또한, 행위미술은 개념미술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것이므로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이 예술을 통한 사유는 ‘세상을 보는 눈’을 확장시켜 준다. 예술작품은 우리가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하는 ‘새로운 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보는 시각’은 다른 말로 ‘철학’이다. 즉 이 실험예술과 함께 하는 것은 철학적 인간의 삶으로 인도하게 한다는 것이다. 행위미술의 실연이나 타 장르의 공연이든 한번 하고 사라지는 이 시간예술의 ‘탈 물질’은 무소유와 무위자연사상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실험예술제가 자연에서 이뤄지면 자연스럽게 ‘생명 존중, 환경 보존’ 의지가 드러나고 ‘생명’과 ‘평화’를 말하게 된다. 그래서 올해 주제인 ‘물결’은 ‘예술 물결’인 동시에 ‘생명 평화의 물결’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를 담은 예술 물결은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자연을 훼손하는 이들을 초라하게 만들어 그들을 변화시키는 자극제가 되는 것이다.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은 관습, 규범, 틀을 벗어나는 것이며, 그 벗어남은 항시 ‘새로움’을 낳는다. 그 새로움은 무한한 열림을 의미한다. 실험예술의 운명은 언제나 새로움이다. 새로운 것을 생각하는 창의적인 발상은 좀 더 나은 미래로 나가는 지름길을 연다. 그리하여 그 예술이 우리의 정신과 삶을 대하는 자세에 영향을 미쳐 항시 지금보다는 보다 나은 삶으로의 이행을 북돋는 비료 같은 것이 된다. 이렇듯 실험예술은 우리 미래의 더 풍성한 삶을 위해서는 매우 쓸모있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루이 아라공은 벌써 100년 전에 전위예술(실험예술)의 ‘쓸모’를 강조했다. "실험적인 성격을 보존해야 하며 –중략- 예술은 항상 주어진 것의 청산이다. 그것은 움직임이요, 미래이다. 그리하여 예술은 생활의 변화, 정신과 과학의 발견에 직접 참가하는 것이다.” 넘나들고 스며들며 ‘대동세상’ 꿈꾸는 이타적 예술제 실험예술제는 무경계, 혼용, 융합 예술제이다. 예술 장르 간 경계가 없다. 무용가, 시인, 행위미술가가 하나의 작품을 발표하고, 즉흥 음악이 펼쳐지는 가운데, 무용수가 춤을 추고, 행위미술가가 행위를 한다. 구음과 악기 연주가 만나고, 전통 악기와 전자 악기가 만나고, 동서양의 예술이 한 무대에 있다. 이번 실험예술제에는 헤어아티스트(미용사)의 공연과 행위미술가의 실연이 한 공간에서 이뤄졌다. 코믹한 저글링 공연의 다음 공연은 실험음악가와 보이스 퍼포먼서(소리 행위미술가)가 함께 하는 공연이 이어졌다. 플라멩코 기타와 우리의 민요 소리가 함께하는 무대도 있었다. 장르의 구분, 경계 없는 공연이 이뤄졌다. 각각의 공연 서너 개가 무대와 무대 주변에서 동시에 진행되기도 하였고, 그날그날의 마지막 공연은 참여 예술가들이 대거 자진 참여하여 함께 하는 대동 공연 형식이 되었다. 공연 중간중간에도 리듬이나 흥에 받쳐 공연 무대에 올라 신명 나게 동화되었다. 이렇게 장르 간의 경계가 없이 서로 조화롭게 넘나들었으며 스며들었다.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예술의 조화로운 호흡이었다. 이런 융합, 혼용의 자유로운 형식은 ‘열린 마음’에서 가능한 이 예술제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늘 그래왔지만, 이번 실험예술제에도 관객석이 고정된 무대보다 마당형, 또는 마당조차 없는 현장 그 자체에서 공연하였다. 서울에서는 도로의 건널목에서부터 락카페, 카페, 극장, 전시장 등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예술을 펼쳤다. 이번에도 백일홍이 심어진 공원(동화정원)에서, 소가 염소가 있는 축사에서, 곡성 기차마을 전통시장에서 공연이 이뤄졌다. ‘폐농기구 조형 작품 만들기’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이뤄졌다. 이렇듯 협업 공연이든, 각기 공연이든 서로가 함께 어울려 실험예술제라는 커다란 한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고, 그 예술이 펼쳐지는 것이 주민과 격리된 실내 무대가 아닌 공원, 축사, 시장, 마을 등 주민들 바로 곁에서 그들의 삶에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예술 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예술제는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하는 홍익인간의 이타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인간 존재의 본성을 회복하고, 만물일체 되어, 차별 없고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모두 어울려 노니는 이상사회, 즉 대동세계를 현실화 시키고자 하는 지향점을 향해 가고자 하고 있다. ‘공공예술’,‘사회예술’로의 모색 "사회예술은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는 예술이며, 과정의 문제에 있어서도 사회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예술이다. 나아가 사회예술은 사회적 실천과 예술적 실천을 통합의 관점에서 창조적으로 융합하는 예술이다.” 이러한 사회예술의 테두리 안에는 건축물에 설치된 회화 조각의 공공미술, 시장 안에 작가들이 거주하며 작품을 만들고 시장 활성화를 시도하는 프로그램, 예술을 활용한 사회운동, 벽화 사업, 9.11 기념관 같은 추모 설치작품들도 포함된다. 또한, 축제나 예술행사도 넓은 의미의 사회예술이라 할 수 있다. 상품 가치와 사용가치의 경제적 교환만이 숭상받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용가치가 없는 예술작품은 경제적 가치를 넘어서는, 정신과 감성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가치의 교환, 즉 감성의 교환가치를 주기에 의미 있는 것이다. 지역 예술인의 참가, 지역민의 삶의 현장에서 펼치는 프로그램이 들어있는 이번 실험예술제도 지역사회와 연계하고, 함께하며,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점에서 사회예술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폐농기구를 활용한 조형작품 만들기 프로그램에서는 사회예술적 성격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 지역사회에 밀착되며 지역사회의 공공 이익에 더 도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실험예술이라는 큰 밭에 ‘공공예술’, ‘사회예술’ 성격을 더 강조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개인적으로 사회예술 하면 먼저 ‘소 퍼포먼스’의 사진이 떠오른다. 1998년 정주영이 소 떼 1,0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북하는 장관은 커다란 사회적 사건임과 동시에 ‘사회적 퍼포먼스’이고 기억할만한 ‘사회예술’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기록할만한 예술사적 사회예술은 요셉 보이스의 <7천 그루의 참나무>라는 작품(프로젝트)이다. 카셀시에 나무 7천 그루를 심는 사회 운동적 성격의 개념미술이고, 환경예술, 행위미술이며 ‘사회 조각’이라 칭할 수 있다. 첫 나무 외의 나무는 기부한 시민들이 공동참여자로 이식을 진행했다. 이때 나무를 심으면서 나무 옆에 일정 크기의 현무암 바위를 세우도록 했는데, 지금 이 장소들은 관광자원이 되었다. 이 작품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엄청난 긍정적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예술가와 사회가 더불어 만들어나가는 사회, 개인의 이익을 떠나 공동의 선(이익)을 위해 서로 어깨를 두르며(소통) 아름다운 세상으로 함께 걸어 나가는 모범적인 사례로 보인다. 이런 것이 진정한 ‘공공예술’이고 ‘사회예술’이다. 사회예술의 관점에서 보면 죽곡면 상한마을에서 실시한 [폐농기구 활용 조형작품 만들기] 워크숍은 참신한 기획이었다. 삽, 괭이, 낫, 호미 등 쓰임을 다한 온갖 농기구들을 이용하여 작가 3인이 주민들과 함께 만들어낸 조각, 설치작품은 미적 요소와 의미요소가 풍성히 담긴 아주 우수한 공공미술, 사회예술작품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의 보관과 지속성, 관광자원화 등도 고려해보아야 하고, 탈물질과 무소유의 철학을 가진 실험예술제가 이런 물질(설치조각)작품을 어느 만큼 수용하며 나아갈지도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다. 한편, 무소유와 자유로운 해방감, 정신의 고양을 중시하는 실험예술제, 즉 무형의 가치가 더 크고 위대함을 보여주는 이 실험예술제의 가치를 그대로 유지해 가져가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또한, 일상에 지쳐있는 지역민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어 삶에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이 예술제의 소명을 다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
'함안농요'를 남기신 나의 아버지 김 종술아버지께서는 1929년 10월, 물 맑고 공기 좋은 진양군 사봉면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유난히 유교적인 풍습이 많이 남아있던 마을에서 그리 풍족하지는 않지만 인내와 성실을 몸소 실천하시며 유년시절을 보내셨습니다. 6.25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해병대에 입대하여 참전용사로 7년간이나 군대생활을 하셨습니다. 군복무 중이던 스물여덟살에 결혼을 했지만 신혼의 단꿈은 고사하고 어무이(홍 복남)를 몇 년간이나 독수공방 시키셨다고 합니다. 군제대와 함께 보금자리를 찾아 자리 잡은 이곳 함안이 제2의 고향이 되었고, 이때부터 아버지께서는 농요에 애착을 가지시고 매우 즐겨 부르셨습니다. 함안지역 읍,면 곳곳에 전해오던 대부분의 보리타작. 모심기, 논매기 농요들을 모두 섭렵하게 되셨습니다. 슬하에 6형제를 두고 자식들에게는 어른을 공경하라 가르치시고, 예의바름을 강조하시며 언제나 성실하고 부지런한 자세로 저희를 키우셨습니다. 자식에게만큼은 엄했던 아버지는, 가끔은 저에게 자립심을 길러주시려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고질병인 위궤양 때문에 술을 일찍 끊으셨지만 한때는 술 도매상 일을 하시면서 약주를 즐겨 하셨는데, 어린 시절 저는 주전자에 막걸리를 사오면서 한모금씩 먹어보기도 하여 술심부름이 싫지만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평소에 아버지께서는 건축 감독일과 농사일을 함께 하셨는데, 새마을 운동이 시작될 때 올바른 국가관으로 지붕개량과 통일벼 재배를 마을에서 제일 먼저 시작하시면서 좋아하시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이외에도 여러 일들을 도맡아 하셨는데, 김해김씨 문중의 어른으로서 종친회장을, 2005년부터는 가야읍 본동 노인회장을 지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마을에서 전래되어온 우리선조들의 땀과 애환이 서린 소중한 농사 일소리와 농사일 모습을 살려야 한다는 신념으로 만들어진 함안농요보존회에서 함께 활동을 하시고, 2008년 4월 담도암으로 투병중이면서도 아라제 함안농요발표회에 어무이와 함께 참가하셨습니다. 항상 성실하고 바르게 살 것을 당부하시며,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은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시고 2008년 6월, 80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날 수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주셨고 애통해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떠나시고 4년 후.2012년 10월, 제53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함안군 함안농요보존회의 '함안농요'가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는데, 더불어 개인부문 연기상인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도 어무이께서 수상하시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함안 향토민속문화의 우수성, 함안지역만의 독특한 메나리조로 선조들의 삶을 마당놀음 형태로 구현한 ‘함안농요’를 전국으로 알렸습니다. 2016년 함안농요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9호 지정되는 영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이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노래는 아버지의 삶의 일부가 되셨습니다. 함안농요 속에 아버지는 살아계십니다.
-
이동희 소설집 ‘박연의 삶과 꿈 흙의 소리’[내 책을 말한다=이동희] 시골 옛집으로 내려온 지 꽤 오래 되었다. 나가던 데서 정년을 하고 늘 노래를 하던 고향으로 온 것이다. 한국전쟁 통에 고향 마을을 떠났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형편이 안 되니 1년만 쉬라고 하여 아버지가 운영하던 방앗간에서 멀건히 놀고 있다가 피란을 갔고 낙동강이 끊어져 되돌아 왔다가 다시 나가 동서남북을 떠돌며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때 6. 25 한국전쟁으로 불탄 터에 향과 앉음새를 비슷하게 하여 흙집을 짓고 거창하게 옥호를 귀경재歸耕齋라 하였는데 논밭은 한 뙈기도 없다. 옛날에 다 팔아 남의 것이 된 지 오래고 푸성귀를 심은 텃밭이 조금 있을 뿐이다. 글밭을 간다는 문경文耕을 생각한 것이지만 생각 뿐 말 뿐 잘 안 되고 있다. 흙집이라고 하였는데 짚을 섞어 찍은 흙벽돌로 벽을 쌓은 것이다. 도배도 하지 않고 방바닥도 장판 대신 돗자리를 깔았다. 흙이 숨을 쉬게 하고 흙내를 맡기 위해서이다. 농촌 마을은 온천지가 다 흙이지만 흙냄새를 차단하는 구조에 대하여 거부하는 것이다. 오랜 동안 콘크리트 숲 속에 살며 찌든 때문이다. 흔히 하는 얘기로 마늘을 한 접 사서 다용도실에 걸어놨는데 얼마 안 가서 다 썩었더라는 것이다. 시멘트의 독성을 다 마시며 살고 있는 단적인 예이지만 어디 마늘뿐이고 사람뿐이겠는가. 그동안 흙에 대한 얘기를 많이 썼다. 땅에 대한 얘기도 쓰고 농촌 농민 시골 얘기를 많이 썼다. 땅과 흙이니 흙바람 속으로이니 서러운 땅 서러운 혼이니…… 농촌에서 나고 자랐다고 해서 다 흙타령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쩌다보니 그런 얘기를 많이 쓰게 되었고 이제 마감을 해야 되는 시기에 생각해 보면 왜 그런가, 그게 뭔가 싶다. 은사인 무영無影선생이 1946년에 소설집 '흙의 노예'를 내고 3년 후 민중서관에서 '산가山家', '향가鄕歌'를 출간하면서 무영농민문학선집 1권 2권이라고 붙였다. 그때 이만하면 농민소설가가 된 것이 아니냐며 농민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대단히 흐뭇하게 토로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농촌 농민에 대하여 얘기를 하고 글을 쓰고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하여 무척 보람을 느낀다고 하였다. 선생을 찾아가 배우고 썼지만 나에게 그런 보람이 있는 것일까. 일찍도 생각해 본다. 그동안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쓴 것 같다. 거기에다 무슨 얘기를 한 것일까. 땅은 소유의 욕망이고 흙은 땀의 의지라는 둥 개념만 늘어놓은 것 같다. 보릿고개 얘기만 하면 눈물이 나듯이 아리랑 가락을 들으면 웬지 눈물이 나고 그리워지듯이 진정한 의미의 흙은 눈물의 테마이고 아픔과 그리움의 테마이다. 흙의 소리는 어린 시절 보리피리 곡조처럼 흙으로 빚은 오카리나 소리처럼 아련한 그리움이다. 악성 난계蘭溪 박연朴堧 선생의 고을에 살며 도리천 선법당에나 있다는 세계에서 제일 큰 천고天鼓의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 선비의 삶과 일과 꿈, 영동 아리랑고개 기억의 저편 흔적들을 톺아보며 역사에 되묻고자 한다. 그 때 왜 그랬는가. 시골 농촌 마을 사람들 얘기로 쓰려는 것이다. 내레이터는 전지적 3인칭 시점, 필자를 닮은 기자, 무명 시인이다. 이야기도 들어보지 않고 청탁한 (주)국악신문사에 감사드리며, 마지막 열정을 쏟아 보답하려 한다. 전국의 독자 여러분, 세계 여러 네티즌들의 질정을 바란다. 이동희의 연재소설 '흙의 소리' http://http://www.kukak21.com/bbs/board.php?bo_table=news&me_id=90&me_code=d0
-
제25회 남도민요경창대회 총평연이틀에 걸친 경연, 첫날에 딸막딸막 심중이 진동하더니 둘째날 마침내 속울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공명하게 하였을까? 남도민요가 가진 힘이 바로 그것이다.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무형유산이 이야기와 노래다. 대략 삼천 년 전 시경(詩經)으로부터 신라시대의 향가, 고려가요를 거쳐 지금의 민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수천년 수만년 사람들의 흉중을 움직인 동력이다. 내뱉는 것도 탄(歎)이요 들이마시는 것도 탄(呑)이다. 감당치 못할 시련을 들이마셔 내뱉는 기술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시김새와 장단이다. 지난 1세기 남도민요는 이른바 국악판의 쟁패를 거듭하다가 판소리, 산조, 병창 등과 더불어 마침내 한국의 국악계를 장악하였다. 불과 1세기 전만 하더라도 서울(한양,경성)에서는 경기소리가 바탕이었지 남도소리는 끼지도 못했다. 무엇이 이리 만들었을까? 남도소리의 기술과 내력을 빼고 이를 설명하기 어렵다. 갱번으로 대표되는 생태적 요인, 삼남 곡창지대라는 경제적 요인, 무계의 목숨 건 연마 등이 밤송이처럼 내외면에 포진해있다. 내가 기왕에 주장하던 ‘남도음악의 쟁패, 시김새의 정초’를 참고하기 바란다. 판소리와 민요는 같고 다르다. 판소리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서'사라면, 민요는 '마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서정'이다.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기술과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기술은 서로 같으면서 다르다. 고 조공례 어머니는 내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도아리랑을 부를 때 마치 판소리처럼 '에헤에헤'하고 너무 음정을 세우지 말아라." 어느 대회보다 이번 대회 경연자들의 격조가 높았다. 명창부의 상위권에 든 서너 경연자는 모두 대통령상을 주고도 남음 직했다. 거듭 주문하고 싶은 것은, 지난 1세기 우리가 확인했듯이, 어떻게 사람의 흉중을 후벼팔 수 있는가, 어떻게 타자의 마음을 진동할 수 있는가, 그 공명의 기술에 대해 더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다. 횡격막의 다른 이름이 계면(界面)이고 이를 소리기술로 구성한 것이 계면조다. 천구성보다는 수리성을 높이 치는 이유가, 판소리든 민요든 이면(裏面)의 소리라는 데 있다. 특히 서정의 소리는 ‘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는’ 것, 곧 공명하는 것이다. 미처 큰 상을 받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말고, 또 상을 먼저 받았다고 자만하지 말고 모두 남도민요의 대의를 실천하는 주인공이라는 점 상기하자. 남도민요경창대회는 본래 진도문화원에서 시작하여 현재는 진도국악협회에서 진행하고 있다. 내가 문화원 근무하던 시절에 그 씨앗이 뿌려지고 발아하였는데 벌써 25회째가 되었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내 개인적으로는 김수연 선생 이하 명인들과 더불어 남도민요에 대한 갈무리를 할수 있는 기회여서 기뻤다. 내 평생의 명예가 시나브로 열매를 맺은 셈이기도 하지만, 이름도 빛도 없이 남도땅 전역에서 서로 마음 열고 노래하던 조상들께, 장차 지친 마음 위로하며 공명의 소리 이어갈 미래의 주역들에게 무한한 영광을 돌려 드린다. 본인은 이론과 실기를 두루 겸비한 연구자이기에 내 제자들 후진들에게 도움이 되라는 뜻에서 심사평을 하였고, 그 대략을 몇 자 남겨둔다. 특별히 다섯 살 어린아이들부터 연로한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흉중을 털어내 경연에 참여해주신 점 거듭 감사드린다. 수천 년 수만 년 인류의 중요한 유산으로 전승되온 민요가 앞으로도 수천 년 수만 년 이어갈 것을 생각한다. 여러분들이 그 책임자이고 주인공이다. 2023년 10월 8일 제25회 대한민국남도민요경창대회 심사위원장 이윤선
-
제11회 ‘아리랑의 날’ 축시10월 1일은 아리랑연합회가 정한 아리랑의 날이다. 2013년 제1회 선포일에 35개 관련 단체가 합의하여 확정하였다. 1926년 10월 1일, 나운규 감독 영화'아리랑' 개봉일을 기념한 것이다. 2019년 아리랑연합회,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아리랑학회가 재확정하여 '아리랑의 날'을 기념하고 있다. 아리랑에 대한 脚註 김보성 아리랑은요 이별·애수 정서인 한(恨)의 收斂體예요 그래서 오해들을 해요 아리랑은 恨의 노래라구요 그런데요 그 건 오해예요 정말 오해예요 왜 그런지 더 들어 보실래요? 내외적 모순에 대한 저항의 發現體이고요 고난과 역경에 대한 극복 의지의 推動體이고요 좌우상하 이념적 극단의 遮斷體이지요 이거 맞는 말이잖아요? 여기에 이것도 있지요 뛰어난 共感力 말예요 슬픈 마음으로 부르면 슬프게 기쁜 마음으로 부르면 기쁘게 들리는 그 신비함 말예요? 그래서요 듣는 이들은 어느 결에 나의 아리랑으로 삼고 지역공동체이고 민족공동체 노래이가 되고 지금은 인류공동체 노래가 되었지요 맞지요?
-
중국 길림성 강덕이 할머니가 부른 '밀양아리랑'2023년 9월 11일부터 13일 사이, 한국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김연갑(金練甲) 이사장과 대종교 원로 리창구(李昌九)께서 연변에 와서 나(리광평)를 찾았다. 김연갑께서는 이미 몇해 전에 두번이나 연변에 다녀와 연변음악가협회의 도움과 나의 도움으로 조선족의 유명한 음악가들이고 음악교육자들인 전화자(全花子), 안계린(安继麟), 김봉관(金凤官)등을 만나 중국조선족음악, 특히는 연변에서의 아리랑에 관한 연구성과에 대한 자료들을 많이 수집하였었다. 특히는 2013년 7월 21-22일에 오셨을 때는 1급 작곡가 안계린의 '장백산아리랑'에 관한 자료와 김봉관이 수집정리한 연변에서 불려졌던 '아리랑', '밀양아리랑' 등 자료들을 수집한 후 한국에 돌아가 여러가지 도경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중국에서의 아리랑 음악에 대한 성과들을 전세계에 널리 홍보를 하였던 것이다. 그때 영화 ‘아리랑’ 연구가 기미양과 함께 오셨을 때도 나의 안내로 이곳 룡정시 지신진 명동학교의 졸업생이고 1926년 한국에서 처녀작 "아리랑” 을 발표하고 그후 한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소문난 라운규(罗云奎) 예술가의 발자취를 따라 유서 깊은 룡정의 몇 곳을 답사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라운규가 조선 회령의 기차역 로동자들이 아리랑을 부르면서 일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아리랑' 창작에 몸을 바쳤다고 하던 저 두만강 건너 회령 기차역을 룡정시 삽합진 망강각에 올라 바라보았고, 또 명동학교 전시관에서 라운규를 소개한 전시품들을 살펴보았으며, 라운규네가 올랐던 선바위, 그리고 지난 세기 3,40년대에 아리랑극과 노래가 공연되였다던 룡정 성세극장 옛터도 답사하였던 것이다. 이번에 그는 10년만에 다시 연변에 왔다. 그런데 그때 만났던 안계린과 감봉호 음악가들이 이미 저 세상사람이 되였고 전화자 선생님도 외출한 상황이라 이전에 련락하였던 분들을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였단다.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아직 건강하게 활약하고 있기에 이번 걸음은 전부 나에 의거한다는 것이였다. 세월의 흐름은 그 누구도 어쩔수 없으니깐 오직 하루 하루를 의미있게 보내는 것만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봐야 하겠다. 나는 김연갑선생님과의 전화통화에 의해 연길시 연서가 35호에 자리잡은 한정호텔(汉庭酒店) 403실에 그들의 숙박을 잡아주었고, 11일 오후 2시에 공항에 도착하여 4시 반에야 입국수속을 마치고 출구로 나온 김연갑과 리창구를 반갑게 맞을 수 있었다. 호텔 수속을 마치자 김연갑은 전화자 선생님이 출국하였기에 만날 수 없고 안계린과 김봉관도 사망하셨기에 만날수 없어 몹시 서글프고 마음이 아프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번 걸음에 연변조선족음악 더욱히는 아리랑 노래에 대한 연변의 연구성과들을 료해하고 이전에 연변에서 밀양아리랑이 불러졌다는 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나한테 무슨 수가 없겠는가고 따지고 물었다. 그러자 나는 저녁 식사 시간에 연변문련원 부주석이였고 조선족음악가이며 중국조선족명인관 관장인 류영근(柳永根)한테 전화를 걸어 김연갑이 왔다고 알려주면서 중국조선족명인관을 참관시킬 수 없겠는가고 청을 하였다. 언녕부터 김연갑에 대해 알고 있는 류영근은 이는 우리 중국조선족음악을 세계에 홍보하는 좋은 기회라면서 래일 오전 10시에 연변대학 맞은켠 대학성1호 건물 8층 연변미술관 옆에 있는 중국조선족명인관을 찾아오라는 것이였다. 내가 이 기쁜 소식을 김연갑한테 전하자 그들은 너무 흥분되여 어쩔바를 몰라 하였다. 그러자 나는 지금의 안도현 명월진에 1938년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집단이민을 오셨던 강덕이란 할머니가 계신데 그를 만나면 밀양아리랑을 부르는 걸 기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김연갑은 래일 오전에 중국조선족명인관을 참관한 다음 즉각 안도현 명월구로 가서 강덕이할머님을 만나보자고 하였다. 김연갑은 그렇게 되면 이번 걸음의 목적을 이룰수 있을 것 같다며 나한테 감사하다는 인사를 거듭 올렸다. 나는 밤이 깊어 택시를 타고 룡정으로 돌아왔다. 9월 12일 내가 택시를 타고 오전 9시 10분에 한정호텔에 도착하니 그들은 언녕 1층 홀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시 안도현 명월진의 강덕이할머니에게 저들이 오늘 오후에 찾아가겠다고 전화를 하였다. 그러자 강덕이는 지금 자기는 허리가 아프면서 걷기가 힘들어 안도현중의병원에 입원하였다고 하였다. 내가 그러면 병원으로 직접 찾아가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오면 자기한테 전화를 하라는 것이였다. 9시 40분이 되자 우리는 걸어서 중국조선족명인관에 도착하였다. 중국조선족명인관 녀성관장이 저들을 반기면서 류관장께서 손님을 접대하다보니 약 반 시간 후에 오실거라면서 김연갑과 리창구한테 전시품들을 까근히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 명인관에는 현재 연변조선족음악의 선구자로 불리는 허세록, 그리고 김성민, 정진옥, 박우, 동희철, 김남호, 허원식, 방룡철, 안계린, 안국민, 최연숙, 최삼명, 김봉호, 최창규, 김봉관, 박서성 등 16명의 연변조선족음악가의 사적들과 음악작품들, 그들을 소개하는 책들과 CD, 메달과 증서, 그들이 사용하던 악기, 실물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류영근께서 오시더니 김연갑 등과 뜨거운 악수를 나누시고 오신 것을 환영한다면서 16명 연변음악가들의 사적을 상세히 소개하여 주었다. 김연갑 선생은 이전에 자기는 여러 차례 연변에 다녀와 조선족음악에 대한 조사를 하였었는데, 그때는 이런 전시관이 없어 모진 애를 먹었단다. 그런데 오늘 이런 현대적인 전시관을 보니 몹시 격동된다면서 연변문화의 발전 성과를 만끽하게 되고 조선족 음악에 대한 깊이와 수준을 형상적이고도 예술적으로 실감하게 된다고 탄복을 금할줄 몰랐다. 특히 이 명인관에서 듣는 조선족음악은 이전에 자기들이 들어보지 못했던 내용들이 풍부하고 다채로워 중국조선족음악에 대한 애착심이 더 생기고 또 리해를 더 깊이있게 하였다고 말하였다. 관람과 소개가 끝내자 류관장은 우리 일행를 데리고 동영상실에서 중국조선족명인관소개, 연변음악가소개에 관한 동영상들을 관람시켰다. 그러면서 류영근은 앞으로 여러 가지 도경을 거쳐 김연갑 선생에게 이런 자료들을 제공하여 주고 여러 면으로 교류를 하며 중국조선족음악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기에 힘쓰겠다고 말씀드렸다. 김연갑 선생은 류영근관장의 접대와 소개에 진심으로 되는 감사와 경의를 표하면서 이런 자료들을 잘 활용하여 전세계에 중국조선족음악을 잘 홍보하기에 최선을 다 하며 앞으로 많은 교류와 협작을 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하였다. 류영근 관장은 우리들에게 오찬을 마련하여 주었으며, 자신의 승용차로 우리들을 연길기차역 광장 장거리 뻐스역까지 모셔가서 안도로 갈수 있도록 편리를 마련하여 주었다. 나는 김연갑 선생, 리창구 선생과 함께 연길에서 안도로 달리는 버스를 타고 떠나 오후 2시 10분에 안도현 명월진에 도착한 후 택시를 잡아타고 안도현중의병원 409호 병실로 찾아가 강덕이 할머님을 만나게 되였다. 허리 통증으로 인하여 걷기가 힘들어 입원치료를 받는다는 강덕이 할머님은 몹시 허약해 보였다. 아래에 아리랑연구가 김연갑 선생이 강덕이 할머니와의 인터뷰 내용을 록음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김연갑: 할머님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고향엔 다녀가셨어요? 강덕이:우리 부모네는 한국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1938년도에 이곳 연길현 명월촌 도안구(오늘의 안도현 명월진 신툰촌)에 집단이주를 왔댔어요. 나는 그 이듬해인 1939년에 도안구 집단이주민 부락에서 태여났지요. 약 10년전에 우리 부부는 한국의 고향에 한번 놀러갔댔어요. 고향집이 있는 데로 가니까 우리 옛 집터에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옛집은 이미 허물어졌더군요. 그래서 왜 집을 허물었는가고 물으니 새로운 주인이 이사를 오면서 그 집에 사람들이 들지 않으니 허물고 그 자리에 콩크리트 바닥을 하여 마당으로 쓰고 있다고 합데다. 그리고 바닥 옆에 창고를 짓고 거기에 우리 부모네가 쓰던 디딜방아랑 가대기랑과 낡은 가구들도 진렬하고 있었다. 김연갑: 그러면 할머니는 어릴 때 사셨던 집터 기억이 나세요? 강덕이: 나는 중국에서 태여났으니 나의 엄마의 말을 자꾸 들어 조끔 알고 있었지요. 나의 엄마는 우리집 대문앞에 대추나무 한 그루 심어 놓았는데 아이들이 채 익지 않은 대추를 따 먹는다고 야단을 쳤댔다고 말하셨지요. 그래 가보니 정말 그 대추나무 한그루가 그냥 있더군요. 나의 할아버와 할머니께서 일찍 사망하시다보니, 고모는 우리 아버지와 단둘이 서로 의지하면서 고달프게 살았대요. 우리 고모가 아버지를 키우셨대요. 그때는 장가를 가려면 밑며느리를 집에다 데려다 놓고 키워서 결혼을 시켰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15살인 우리 엄마를 집으로 데려왔대요. 그래서 고모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키워서 나이가 되니까 결혼을 시켰답니다. 그런데 당시 우리 고모네가 중국에 이주를 가게 되였대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두고는 갈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우리 고모는 아버지네를 데리고 중국에 집단이주를 오게 되었대요. 그때 고모는 중국으로 가려면 꼭 된장과 간장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더러 도가지에 된장과 간장을 각각 담아서 중국에 가져오게 했대요. 지금 그 도가지를 내가 보존하고있어요. 그것이 우리가 집단이주를 왔단 증거물이 아니겠어요? 우리 어머니는 고향에 있으면서 삼을 심어서 실을 내여 삼베를 짜서 집식구들의 옷을 해 입혔대요. 중국에 와서도 삼베를 짜야 옷을 지어입을 수 밖에 없으니 계속 삼을 심고 그걸 실로 내여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짰어요. 나도 어릴 때부터 엄마가 베를 짜는걸 도와서 실을 비비기도 하고 감기도 하였지요. 리광평: 이 분은 그때 부모님들이 가지고 왔던 독을 보관하고 있을뿐아니라 어머니께서 짜셨던 베천 쪼각들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외 여러 가지 물건들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강덕이: 그때 두부를 만들려면 콩물을 천으로 짜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엄마가 짠 베천으로 콩물을 짜는 주머니를 만들었지요. 지금 그 주머니를 보관하고 있어요. 김연갑: 참, 그 베천쪼각이라도 가지고 갔으면 좋겠는데요. 리광평: 그때 저 할머니께서 그 베천쪼각을 저한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저는 저도 가지고 싶지만은 이 천을 고이 잘 간직하였다가 이 마을 신툰촌력사전시관을 꾸릴때 전시하여야 제일 값이 있을거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김연갑: 그리고 할머니, 이전에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찾아와서 이런저런 조사도 하고 물어보기도 하지 않았어요? 강덕이: 그때 많이 왔지요. 한국에서도 오고 중국의 북경, 장춘,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왔댔어요. 그때 우리 마을은 전 연변에서 제일 처음 명명된 조선족민속마을이였거든요. 한번은 북경에서 온 도연(导演)이 우리 민속촌에 대한 촬영을 아주 상세하게 하였어요. 그러면서 아주 훌륭한 동영상을 만들겠다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도연이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그만 차에서 중풍을 맞아 사망하였대요. 하여 그 좋은 자료들이 몽땅 없어지고 동영상도 만들지 못했거든요. 얼마나 아쉽던지! 지금은 년세 많은 분들이 다 사망되고 집단이주력사 이야기를 할만한 사람들이 없어요. 이젠 나 혼자만 남았어요. 김연갑: 그러면 할머니도 그때에 노래랑 많이 불렀댔습니까? 강덕이: 아이고 정말 많이 불렀댔어요. 김연갑: 그러면 아리랑도 불렀고 밀양아리랑도 불렀댔습니까? 강덕이: 아리랑이야 제일 많이 불렀댔지요. 밀양아리랑도 그렇고. 밀양군과 합천군이 서로 있대여 있고 또 집단이주도 함께 왔으니 고향에서 있을 때도 그렇고 또 이곳에 와서도 그렇고 밀양아리랑을 많이 불렀댔어요. 리광평: 할머니, 그럼 저하고 함께 밀양아리랑을 불러 봅시다. 강덕이와 리광평이 밀양아리랑을 부릅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 정든님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아리아리랑 스리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 강덕이: 야, 이 노래를 많이 불렀댔어요. 그런데 내가 부르는 밀양아리랑은 방금 부른 것보다 가사 틀려요. 이 가사는 고모님과 어머니가 많이 부르던 가사래요. 그래서 내가 그걸 기억하고 있지요. 김연갑: 그러면 이곳에서 해방이 나기전부터 밀양아리랑을 불렀단 말씀이군요. 강덕이: 그거야 당연하지요. 해방전부터 불렀다니깐요. 김연갑: 그러면 할머님의 부모님들이 부르던 노래가사대로 불러 보세요. 강덕이: 그러면 부를게요. "이것 보소, 저것 보소 뭘 보란 말이요 신작로 복판의 대갈보 보소. 아리아리랑 스리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 김연갑: 이 가사는 제가 한국에서나 밀양에서 들어본적이 없는 독특한 가사입니다. 이건 이곳에서만 불러진 가사입니다. 리광평: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 별미입니다. 김연갑: 할머니께서 노래도 잘 부르시고 기억력도 대단하십니다. 젊었을 때는 명창이였겠습니다. 이전에 이 노래를 록음한 적이 있어요? 강덕이: 그때 어디에 록음기가 있었겠어요? 김연갑: 아니 이 마을로 취재를 왔던 사람들이 록음하셨는가 하는 말입니다. 강덕이: 이 노래가사로 된건 록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처음입니다. 리광평: 2018년 한국 대구의 EBS방속국의 국장 김영봉이란 PD가 강덕이와 권유세가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을 비디오촬영을 하였댔습니다. 김연갑: 아이참, 정말로 소중한 이야기를 하셨고 뜻 깊은 밀양아리랑을 불렀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밀양아리랑은 집단이주민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불러졌다는 유력한 증거로 됩니다. 밀양아리랑을 이곳에서 불렀다는 생동한 증거물을 찾게되였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는 우리 예상밖의 성과입니다. 정말로 소중한 증거를 얻었습니다. 리광평: 저는 이 할머니를 1988년부터 기록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줄곧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 할머님은 제가 만나서부터 농악대에 들어서 북을 치거나 장고를 치는걸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래도 잘 불렀답니다. 김연갑: 할아버지도 이 밀양아리랑을 불렀습니까? 강덕이: 나의 령감은 춤을 추거나 악기를 다루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생산대에서 늘 회계사업을 하니깐 그런 일을 할 여가가 없었어요. 하지만 노래는 참 잘 불렀어요. 정말로 아까운 분이였어요. 십여년간 생산대 회계를 하였지요. 회계를 잘하여 상장도 탄 것이 있었는데 어디에 들어갔는지 찾을 방법이 없습니다. 리광평: 제가 이들 부부한테 여러번 권고를 하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자기나 자기집에서 겪어왔던 실제적인 일들을, 가정에 생겼던 일들을 글로 적어서 이 세상에 남겨놓으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2018년에 이분의 남편 권유세께서 친히 반년동안의 정력을 들여 1만2천여 글자나 되는 《안도현 명월진 신툰촌 력사재료 참고서》를 친히 썼댔습니다. 그리고는 나의 손을 꼭 잡고서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였습니다. "리관장, 내가 리관장의 부탁대로 없는 재간이지만 이 신툰촌력사재료 참고서를 썼소. 그러니 리관장께서 보시고 다시 수개도 하고 보충도 하여 앞으로 책에 실리도록 하여주오. 이것이 나의 최후의 소망이요. 꼭 부탁드리요.”라고 하셨댔습니다. 하여 나는 그 글을 본 다음 수개도 하였고 원본을 돌려준 다음 더 내용들을 보충하라고 맡겼댔습니다. 그러자 권로인은 다시 다른 책에 옮겨 뻬끼면서 또 다른 내용도 보충하였습니다. 나는 그걸 다시 수정하고 타자를 하여 로인님들께 드렸습니다. 지금 그 내용과 원본들을 제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으며 앞으로 책이 출판될 때 꼭 이 글을 넣으려고 합니다. 김연갑: 그 원본과 글들을 다 보관하고 있다구요? 참 의미있는 큰일을 하셨습니다. 앞으로 훌륭한 력사증거물로 될 겁니다. 정말로 소중한 기록들입니다. 할머니께서 글을 쓸수 있어요? 강덕이: 쓸수 있어요. 한자든 조선글이든 다 쓸수 있습니다. 김연갑: 이 노트에 할머님의 이름과 주소, 방금 부른 밀양아리랑노래의 가사를 적어주세요. 강덕이: (글을 쓰신다.) 아이고, 이젠 손도 말을 잘 안들어요! 김연갑: 그 정도면 대단한거지요. 년세가 85세인데요. 확실히 이곳에서 밀양아리랑을 불렀댔군요. 그리고 할머님 신분증도 촬영합시다. (강덕이께서 신분증을 내놓자 내가 사진기로 복사하였고 할머니께서 쓴 글도 사진기로 복사하였다.) 김연갑: 할머님의 기억력도 대단하십니다. 대갈보, 대갈보란 무슨 뜻인가요? 강덕이: 대갈보? 우리는 뚱뚱한 사람들을 대갈보라고 합니다. 김연갑: 그러면 할머니께서 병원에 얼마 동안 계셔야 된대요? 강덕이: 지금은 한 단락치료기간이랍니다. 치료를 해보고 만약 났지 않으면 다음 치료계단으로 넘어간답니다. 오늘까지 사흘간 치료를 하였는데 좀 나은것 같기도 합니다. 김연갑: 건강하시여서 리광평선생님한테 이야기를 다 하시십시요. 그러면 그걸 연변이나 한국 합천군과 밀양군에도 다 알려지게 될겁니다. 기억을 더듬어서 생각이 나면 전화를 통해서라도 수시로 이야기해 주세요. 강덕이: 리선생님이 물어보면 제가 대답할수 있어요. 김연갑: 리선생님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리광평: 최근에 제가 연변텔레비죤방송국 PD와 합작하여 이들 부부가 2018년 8월에 결혼 60주년 기념행사인 회혼례를 치르던 장면들로 조선족민속전문프로를 만들고 있습니다. 김연갑: 참 좋은 일들을 많이 하시고 있네요. 할머니께서 건강하셔서 리선생님한테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 주세요. 강덕이: 내가 집에 있었더라면 반가운 귀빈들에게 때시걱이라도 끓여줄 텐데 참 미안합니다. 더욱이 병원까지 찾아와 주시니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네, 부탁대로 할게요. 김연갑: 건강하십시요. 다음 기회가 되면 다시 찾아올게요. 치료를 잘 받으세요. 뜨거운 악수를 나누면서 우리들은 아쉬운대로 석별의 인사를 올렸다. 병원에서 나오니 오후 세시 반이 가까워졌다. 하여 우리는 택시를 타고 명원구 시내의 길가에 펼쳐져 있는 장마당으로 다녀갔다. 거기서 송이버섯 3송이와 땅콩, 해바라기씨, 수박 등을 샀다. 그리고 명월구 공공버스역에 다녀가 공공버스를 타고 연길에 돌아왔다. 연길기차역에 다녀가 물어보니 이젠 이곳에선 려객기차를 탈수 없으니 연길서역 고속철도역에 가야 한단다. 하여 우리는 16선 공공버스를 타고 직접 연길서역에 이르러 13일 오전 8시 19분 연길—단동 고속렬차 표를 샀다. 호텔부근 부산돌솥밥집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니 저녁 8시 반이 되였다. 나는 래일 아침 7시에 연길서역에서 그들을 만나 이틀간에 찍은 사진과 비디오를 메모리에 담아 드리고 또 나의 선물로 참깨를 드리기로 약속하였다. 나는 택시를 타고 룡정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6시 반에 연길서역에 도착하였다. 김연갑선생측도 7시 10분이 되자 연길서역에 도착하였다. 나는 약속대로 그동안 답사 사진을 찍은 메모리와 참깨를 드렸다. 단동행 고속렬차 출발시간이 오라지 않기에 그들은 다투어 검표를 마치고 대합실로 들어갔다. 나는 16선 버스를 타고 아리랑축구공원 북측역에서 내려 '연길아리랑축구공원' 간판들과 공원 모습들, 신체단련을 하는 사람들을 명심하여 기록하였다. 이 사진은 메일로 김연갑선생님한테 보내드릴 준비를 마치였다. 나는 다시 16선 버스를 타고 연길 모아산에 도착하였다가 룡정버스를 타고 룡정집으로 돌아왔다.
-
남한강 江祭, ‘정선 뗏목 제례’ 확장 필요한강은 양평 팔당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남북한강이 합수, 경기도를 관통하여 바다에 이른다. 북한강은 금강산 단발령에서, 남한강은 강원도 태백시 금대산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합수한다. 길이는 북한강이 317,5km, 남한강은 375km임으로 공식적으로는 남한강의 길이가 북한강보다 길어 발원지를 한강의 발원지로 꼽고 있다. 한강은 우한 한문화(韓文化)의 형성지이다. 강은 물길이다. 하천과 내도 물길이다. 이 중 큰 물길을 강이라고 한다. 강은 단순히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침식 · 운반 · 퇴적 작용을 하여 강 유역에 여러 지형을 이루게 한다. 또 사람들에게 농업용수와 공업용수, 식수 등을 공급할뿐만 아니라 발전과 교통에도 많은 혜택을 준다. 그러나 때로는 홍수 등으로 많은 피해를 주기도 하므로 우리 생활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강은 역사적으로 인간의 생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세계 4대 문명이 모두 강을 끼고 있는 지역에서 발달한 까닭이다. 이런 연유로 세계 모든 강에는 강제(江祭)가 존재한다. 한강에도 갖가지 강제가 절기와 상황에 따른 의례가 있어왔다. 그 한 실증이 남한강 상류 아우라지와 조양강에서, 북한강 강원도 인제 합강에서 이뤄지는 뗏목 의례이다. 제48회 정선아리랑제 3일차 행사일인 16일 오후 4시, 여량면 문화체육위원회가 주관하여 조양강 제2교 아래에서 뗏목의례가 개최되었다. 서울 뚝섬나루와 마포나루까지의 목재를 운송하는 뗏목의 안전 수송을 기원하는 강제이다. 천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목재 운송의 유습과 함께 한 의례이다. 정선아리랑제 다양한 행사 중 주목 받는 행사이다. 풍물단의 땅밟기에 이어 알자가 호선되어 제물을 점검한 하는 것으로부터 진행되었다. 첫 순서인 제문낭독에서 "계묘년, 정선아리랑제의 성공과 조양강을 통과하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 주십사”라고 고한 후, 최승준 정선군수가 초헌관으로 안전을 기원하였다. 정선 떼목 제례는 정선아리랑의 역사와 함께한 민속행위이다. 좀 더 풍성하고 다양한 내용 구성으로 확장시킬 필요가 있는 행사이다. 어떤 행사도 근원이 분명한 영사를 소재로 한 이벤트는 행사 의의를 확인시켜 주는 요소라는 점에서 필요한 것이다.
-
Understanding Korean History and Culture한국은 50여년 만에 산업화,민주화,정보화를 성공시켜 정치 군사 경제강국으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2010년대부터 세계에 '한류'란 이름으로 알려졌고, 최근에는 문화선진국으로 알려지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역사와 한민족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우리 또한 이 것을 알리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따라서 외국인들이 꼭 알아야할 우리 역사와 문화를 선정한 후에 이해하기쉽게 서술했다. 또한 보다 많은 전파를 목적으로 전자책으로 제작했고, 외국인과 해외동포들에게는 무료로 배포하고있다. 이 책은 외국인들을 위해 영어로 쓴 한국역사책이다. 우리 역사를 기존의 견해와 다르게 쓴 부분이 많다. 첫째, 문헌자료와 고고학적인 자료, 민속 등을 토대로 우리역사를 해석하는 틀과 연구방법론을 만들어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고, 새롭게 해석했다. 동아지중해 모델과 해륙사관, 터이론 ,동방문명권 등이다. 둘째, 거시적인 관점으로 우리 역사활동과 연동된 공간을 한반도와 만주는 물론 동아시아, 나아가 유라시아까지 확장했다. 따라서 외교, 문화 무역,산업 등 실제적인 측면에서 서술했다. 셋째, 한민족의 해외활동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여 우리문화의 역동성을 나타냈다. 이러한 관점과 연구방식으로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서술했다. 한민족의 해양활동, 고구려와 수 당나라 사이에 벌어진 동아시아 국제대전. 고대 한민족의 일본열도 진출, 남북국 시대의 해양활동, 한민족의 디아스포라 등이다. 이 책을 통해서 외국인들은 한민족의 역사가 오래됐으며 고대에는 한반도와 만주일대, 그리고 넓은 해양에서 활동했을 알수 있다. 또한 중국과는 다른 문화를 창조 발전시켰으며, 독자적인 민족임을 확인할수 있다. 그리고 주변지역, 특히 일본열도로는 bc4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진출해서 일본열도에 벼농사문화를 전파하고, 금속기를 전달하면서 일본고대문화의 주민으로서 문화를 창조했음을 알수 있다.
-
제24회 청강 정철호 국악제, 대통령상 수상한 춤꾼 이현희입니다.일곱 남매를 키우신 우리 엄마는 무지하게 엄하셨습니다. 어릴 적 조금이라도 예의가 벗어나는 행동을 할 때는 가차 없이 집을 나가라고 쫒아 내셨지요. 그것도 입고 있던 옷도 다 벗겨서요. 언젠가 제가 속을 썩여서 입고 있던 옷을 벗긴채 쫒겨난 적이 있었는데. 밤이 되어도 집에 안들어오니 엄마가 걱정되어 나가봤더니 달빛 아래 가로등 밑에 춤을추고 있었다는겁니다. 그길로 엄마는 저를 목포 박옥주무용학원에서 춤을 배우게 해주셨지요. 이후 목포시립국악원에서 무용을 배우던 중 방에서 들리는 춘향가 소리가 너무 좋아 배우고 싶었으나 형편이 어려워 춤만 배우게 되었고, 이후 조선대학교 무용과 동대학원 석사학위까지 취득하여 광주시립창극단 무용부에 2000년부터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인간문화재 '심청가' 보유자이신 김영자 선생님께 심청가를 배우고 있으며 담양에 계신 문화재 김동언 선생님께 설장구 이수도 받았으며 춤의 맛과 깊이를 더하기위해 여러 쟝르의 국악분야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서인지 광주시립창극단에서 여러 역할을 맡으며 활동하고 있으며 돌아오는 2023년 9월9일-10일 에는 광주시립창극단 정기공연 "수궁가"에 여우역할을 맡아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춤을 춘지 어언 4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선생님들께 좋은 춤과 좋은 말씀들을 떠올리며 많이 배우고 갈고 닦았습니다. 목포에서 첫 발디딤을 하게 해주신 박옥주선생님, 대학들어가기 전까지 전통과 창작 현대무용 등 다양한 춤을 접하게 해주시고 유난히도 무서우셨던 박수경선생님, 이매방류 승무, 살풀이를 처음 접하며 저의 구새를 잡아주시고 전통춤의 깊이를 알게 해주신 김덕숙선생님, 직장에서 살풀이춤 연수 받으며 또 다른 춤 맛을 느끼게 해주시고 유난히 저를 예뻐해 주신 인간문화재 정명숙 선생님, 전주대사습 출전당시 이매방류의 맛과 장단흐름을 알게 해주신 최창덕 선생님, 직장에서 정기공연 및 갈라작품 워크샵하며 20년동안 여러번의 작품을 받고 가르침을 주신 채향순 선생님, 한영숙류 태평무의 매력에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릴 때 가르쳐 주셨던 인간문화재 박재희 교수님, 언니의 춤을 보고 반해서 찾아가게 된 지금의 진유림 선생님 도대체 이매방류의 진맛이 무엇일까 궁금하여 직접 목포, 부산등을 찾아가서 공부했던 이매방 선생님 당시에는 건강이 안좋으셔 주옥같은 말씀만으로도 공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게는 이 모든 선생님들이 스승이십니다. 춤의 맛과 깊이를 더 알고 싶어. 설장구도 이수를 받고 판소리도 벌써 두 바탕째 끝나갑니다. 전주대사습도 4번 도전해서 장원을 했는데. 하늘이 내려주신다는 대통령상도 4번 도전해서 드디어 수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더 열심히 정진하는 춤꾼 이현희가 되겠습니다. 모두 모두 감사드립니다.
-
관동대지진 100년, "백년 동안의 증언"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를 맞아 '백년 동안의 증언'(책읽는고양이)이 출간됐다. 2023년 9월 1일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다.'백년 동안의 증언'은 1923년 간토대지진 이후 일본의 혐오사회와 국가폭력에 맞서온 한·일 작가와 일반 시민들의 기록이다. 이 책은 와세다대학 객원교수를 지낸 김응교 저자가 지난 20년 동안 간토대지진 관련 장소를 답사하고 여러 증인을 만나며 문헌을 연구 정리한 책으로, 반일(反日)을 넘어 집단폭력에 맞서는 두 나라 시민의 연대를 제안한다.일본 정부는 지난 백년 동안 조선인 학살로 이어진 간토대지진을 끊임없이 삭제하려 했지만, '백년 동안의 증언'은 의도적인 ‘삭제의 죄악’에 맞서 ‘기억의 복원’을 말한다. 이것만이 같은 비극을 막는 길이며, 한일 양국의 새로운 백년을 위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 ‘사건’에서는 지진이 어떻게 인재로 전개되는지를 정리하여 보여준다. 2장 ‘15엔 50전’은 쓰보이 시게지의 장시 '15엔 50전'을 국내 초역으로 수록했다. 3장 ‘증언’에서는 이기영, 김동환, 구로사와 아키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드라마 ‘파친코’ 등 여러 작품을 통해 간토대진재를 다룬 작가와 감독의 증언을 전한다. 4장 ‘진실’에서는 진실을 드러내고 피해자의 치유와 가해자의 책임을 촉구하는 일본의 개인과 모임을 소개한다. 5장 ‘치유’에서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와 삭제와 왜곡으로 시달리는 가해자 모두의 치유를 위한 방안을 살펴본다.관동대지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속에 결국 중요한 건 '치유'다. 일본 정부는 지난 백년 동안 조선인 학살로 이어진 간토대지진을 끊임없이 삭제하려 했지만 저자는 "의도적인 ‘삭제의 죄악’에 맞서 ‘기억의 복원’"을 말한다. 그는 이것만이 같은 비극을 막는 길이며, 한일 양국의 새로운 백년을 위한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김 교수가 2005년 학술지를 통해 번역 발표했던 이 시는 100년 전 역사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 불이 꺼지지 않는 중에 / 벌써 유언비어가 시중에 문란하게 떠다녔다 / 요코하마(橫浜) 방면에서 센징(鮮人·조선인에 대한 차별어)이 떼를 지어 밀려오고 있다!' 사실 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은 소문이 퍼져갔고, 많은 조선인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은 1923년 12월 5일 자 신문에서 지진 이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로 인한 피해자가 6천661명이라고 보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반일은 위험하다 백년의 갈등, 그 해법은 무엇인가2008년 호주 노동당 총리 케빈 러드는 원주민 애버리지니(Aborigine)들을 모시고 ‘도둑맞은 세대’에 사과했다. 호주는 매년 5월 26일을 ‘국립 사과의 날’로 지키며 혐오 문제를 극복하려 애쓴다. 1970년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샤바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했다. 백년 이상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지배했던 흑인 차별은 1994년 넬슨 만델라에 의해 멈추었다. 이들은 진실을 밝히고 보복 대신 사면하고 화해의 공동체를 이루어나갔다. '십오엔 오십전(十五円 五十錢)이라고 해봐!' 15와 50이 앞뒤로 있는 간단한 문구. 누군가는 말장난 아니냐고 하겠지만, 100년 전 일본에서는 생사를 가를 정도로 무서운 말이었다. 자신 있게 '쥬우고엔 고쥬센'라고 발음하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츄우코엔 코츄센'이라고 발음하거나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무자비한 창칼이 날아들었다. 저자는 발음 하나를 듣고 사람의 목숨을 따진다는 것은 광기라고 폭로한다. 일본 시인 쓰보이 시게지(壺井繁治·1898∼1975)는 '그저 그것 때문에' 1923년 9월 일본 간토(關東) 지방에서 조선인들이 무참히 살해됐다고 증언한다. 일본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일본에도 아시아에 저지른 백년의 과거를 괴로워하는 일본 시민, 작가, 학생 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이 어느 정도 사죄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은 큰 범죄를 한국에 범했다. 게다가 아직 한국인에게 일본은 충분히 사죄하지 않고 있다.” 라고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과거 일본의 침략 사실을 인정하고 상대국이 됐다고 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 라고 했다. 소수이긴 해도 일본 내에도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는 지식인들이 있기에 단순한 반일은 위험하다.우리는 집단적 광기라는 것이 망상(妄想)에 불과하다는 뚜렷한 기억(記憶)을 새겨야 한다. 따라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반대하고 군인 위안부 문제나 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시정하려는 일본 시민 단체와 연대하고, 한국과 일본의 양심 세력·연구자·작가들이 ‘우리’가 될 때, 장시 '15엔 50전'의 숙제는 그 만남의 자리에서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저자는 일본 정부가 변할 수 있을까 묻는다. 그 가능성이 0%라고 해도 일본 정치인들의 변화를 기대하고 모든 매체를 통해 바른 말을 하는 정치인을 격려하고, 잘못된 판단을 세뇌시키려는 정치인에 대한 비판을 멈추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
광주고려인마을, 김경천 장군 일기 ‘경천아일록’ 영인본 출간오는 30일 오후 2시 일제 강점기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여 수많은 전과를 올렸던 김경천 장군의 항일애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특별전 및 기념세미나’를 개최하기에 앞서 고려인마을은 김 장군이 직접 쓴 일기를 영인본으로 엮어 출간했다. 26일 고려인마을에 따르면, 고려인마을출판사가 발행한 김 장군이 쓴 ‘경천아일록’ 은 망명길에 들어선 1919년 6월부터 1925년까지, 연해주 일대에서 전개된 숨가쁜 전투 가운데, 또 전투 전후의 잠시 평온한 일상 속에서, 조국과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며 장군이 걸어온 행적과 그가 품은 원대한 뜻을 틈틈이 기록한 일기다. 김경천 장군은 노령 연해주에서 영웅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전설적인 항일의병장이다. 그는 청년 시절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제국주의 일본에 복무한 바 있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일에 헌신 종사할 기회만 엿보다가 마침내 1919년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관되게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았다. 그는 연해주에서 항일전투에 임할 때마다 늘 부하들에게 참군인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뛰어난 지략과 통솔력으로 혁혁한 승리를 거두어 연해주 일대에서 ‘백마 탄 김장군’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때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해 전설적인 김 장군으로 연해주 일대에 널리 알려지자 김일성이 그의 명성을 이용함에 따라 ‘김일성 가짜설’의 증거로 인용되고 있다. 더욱 감사하게도 김경천 장군은 우리에게 더없이 값지고 소중한 기록물을 남겼다. 국권을 상실한 당시 조국의 상황이 때로는 불리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에 실망하기도 했지만, 장군은 조국 독립에 대한 희망의 끈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조국독립의 간절한 마음을 담은 글을 기록해 남겨둠으로써 오늘날 후손들이 읽을 수 있는 ‘경천아일록’ 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김경천 장군의 일기 ‘경천아일록’은 뜻밖의 수난을 겪었다. 이 일기는 1936년 김 장군이 스탈린 정권의 탄압을 받아 수감될 때 소련 당국에 압수되었다가 2005년에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김 장군의 일기가 오래전에 종적을 감춰버렸던 탓에 2005년 이전까지는 가족들조차도 ‘경천아일록’ 의 존재 그 자체조차 모르고 있었다. 근 70년 만에 김경천 장군의 일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냄에 따라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김 장군의 생애와 그분이 품은 이상과 헌신의 삶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됐다. 김 장군의 고귀한 민족정신과 조국애를 후손들에게 더 많이 알리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 김순흥 교수가 나서 출판비를 지원함에 따라 김 장군의 ‘경천아일록’이 마침내 영인본으로 출판되어 독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기록물은 조국의 자주와 통일을 염원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늘 깨어있게 만들고 동시에 아직도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마냥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2019년 김 장군의 일기를 국내 최초로 현대한국어와 러시아어로 번역 출판했던 김병학 고려인문화관장은 "‘경천아일록’은 누구에게는 준엄한 꾸짖음이 될 것이고, 누구에게는 등짝을 후려치는 죽비가 될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삶의 지침서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조상들이 피로 새긴 역사를 잊지 않게 해줄 소중한 정신이 될 것이다.”고 책 서문에서 밝혔다.
-
해방된 날, '사할린, 기록되지 않은 역사'전을 보다광복절날 오후 4시 대일항쟁기 강제징용을 당하여 사할린 섬으로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한 동포들의 생활상을 기록한 '사할린, 기록되지 않은 역사'전이 열리는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를 찾아갔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위해 1938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약 6만 명의 한인들을 사할린으로 강제동원으로 보내 탄광촌과 벌목장에서 강제노역시켰다.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러시아의 강제노역에 시달렸으니,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고향이 그리워, 두고 온 자식이 보고 싶어 밤마다 저 언덕에 올라 바다를 향해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고 통곡을 하니 그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온 동네에 퍼져 이불 안에서 다들 울었다우.” 라고 증언한 코르사코프 바자르 할머니의 증언이 떠올라서 가슴이 미어졌다. 이젠 대부분 강제동원을 당한 사할린 동포 1세가 세상을 떠나, 많은 역사적 사실이 묻혀가는 안타까운 실정에 있다. 뒤늦게 알려진 사할린 한인 학살사건도 역시 그 실체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지 않았던가? 전시를 보기 위해 힘겹게 전시장을 올라가니, 이미 ‘작가와의 만남’은 진행되고 있었다. 막 들어서니 사할린동포후원회장인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가 축사를 하고, 경상도에서 온 지역 소리꾼이 부를 사할린아리랑을 소개하고 있었다. 사할린으로 끌려간 한인 중 68퍼센트가 경상도 사람이라서 구미와 대구에서 참석했다는 것이다. 경산아리랑보존회 배경숙 회장과 홍희연,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 임규익 회장과 배부근이었다. 사할린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내가 여기 왜 왔나. 왜 왔나 우리 님 따라서 내 여기 왔지 사할린이 좋다고 내 여기 왔나. 일본놈들 무서워 따라왔지 따뜻한 조선을 놔두고, 사할린에는 왜 왔나, 왜 왔던가 우리집 영감님은 왜 가셨나 나만 혼자두고 어데를 가셨나” 전시장에는 소련 시절부터 한민족 풍습을 지켜 온 사할린 동포들의 생활상과 영주귀국 모습 등 여러 가지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예식 기자를 비롯하여 전시를 준비한 ‘Kin지구촌동포연대’ 최상구 대표와 사진가 김지연씨,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할린동포후원회장'인 기미양 (주) 국악신문 대표이사, 경산아리랑보존회 배경숙 회장과 홍희연,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 임규익 회장과 배부근, 새롬출판 송남숙 대표가 자리를 채워주었다. 특히나 인천, 서천, 안산, 파주에 영주귀국한 사할린동포들이 함께 해주었다. 이규상 ‘눈빛출판사’대표, 사진가 김문호, 안해룡, 정영신, 곽명우씨 등 70여 명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전시작가 이예식씨는 1949년 사할린 마카롭시에서 출생하여, 1998년부터 지금까지 ‘새고려신문’ 사진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사할린1세였던 부친의 애환을 바라보며 성장한 2세로서 꾸준히 사할린동포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이예식 작가는 인사말에서 "두 시간이면 오는 거리를 먼 길로 우회하여 왔다”는 말로 한국과 러시아 교류의 어려운 현실을 표현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사진작가 김지연씨는 "시대를 증언하는 이미지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며 "광복절을 맞았지반 사할린 동포는 진정 해방이 되었는지 묻기 위해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사할린의 그 날을 기억하는 전시는 오는 21일까지 이어진다.
-
정영신 작가의 ‘혼자 가 본 장항선 장터길’ 사진집사진가 정영신씨는 37년 동안 전국 장터만 돌아다닌 미친 여자입니다. 그녀를 만난 지가 어언 20여 년이 가까운데, 두 미친 인간이 하는 일이란, 늙은이 말처럼 밥 팔아 똥 사 먹는 일이었습니다. 돈 한푼 없는 거지가 장에만 가면 신나고 카메라만 잡으면 신이 납니다. 긴 세월 장돌뱅이로 살았으면 장삿 속도 밝을만한데, 돈 쓸줄만 알지 벌 줄은 모릅니다. 먹고 사는 것보다 찍는 대상이 먼저다 보니, 거지로 사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지요. 사진을 위해서라면 결혼하자면 결혼하고, 이혼하자면 이혼하는 바보입니다.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는 바보가 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요즘 그만한 여자 보기 힘듭니다. 작업을 위해서라면 부부면 어떻고 동지면 어떻습니까? 세상이 만든 굴레 같은 것은 이미 벗어 던진지 오래입니다. 위태로운 삶을 살지만, 서로 찍는 대상(사람)에 대한 존중감은 최고로 칩니다. 그런데, 장돌뱅이 정동지가 또 사고를 쳤습니다. 팬데믹으로 사람을 피해 다닌 2년 동안, 나를 따 돌리고 천안 입장장에서 서천 장항장까지 장터를 떠돌아다니며 바람을 피운 것입니다. ‘혼자 가 본 장항선 장터길’이란 책을 내려고 기차 타고 혼자 돌아다닌 것은 좋으나, 그 고생길은 보나마나 뻔합니다.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메고 장꾼들처럼 버스 기다려가며 장터를 돌아다닌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늦은 밤 용산역으로 마중 나가면 항상 곤죽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매번 위로는 커녕 ‘사서 고생 한다’는 핀잔을 주었지만, 타고난 업이라 여겼습니다. 드디어 장항선 주변의 충청도 장 21곳의 장터 순례를 끝내고, 책을 만들어 전시회를 열게 되었지만, 책은 누가 그냥 만들어주며, 전시는 그냥 열어 준답디까? 그렇다고 돈 잘 버는 서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려받은 유산 한푼 없는 거지가 말입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단 벌리고 보는 뱃심 하나는 존경하지만, 빚 갚을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래서 쪽팔리지만 책 팔려고 매주알 고주알 약을 파는 것입니다 어제 출판사에서 보내온 200권의 책을 보니, 책더미에 깔려 죽더라도 기분은 좋습디다. 일단 한 권을 꺼내 살펴보니, 헛고생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충청도 장꾼들이 푸는 느릿느릿한 사투리의 글도 정겹지만, 사람이나 사물을 찍은 사진들이 너무 따뜻하게 다가왔습니다. 여태 흑백 장터 사진에 익숙했지만, 이번에 만든 컬러사진집은 또 다른 맛이 있었습니다. 장터 분위기가 마치 펄떡이는 생선처럼 살아 꿈틀거렸습니다. 역시 사진의 리얼리티는 컬러가 강합디다. 무엇보다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장꾼을 대하는 사진가의 시선입니다. 이만하면 책을 권해도 손해 볼 일은 없다는 확신이 들어 감히 추천합니다. 가난한 작가에게는 백 마디 인사나 술보다 한 권의 책을 사 주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정영신 장돌뱅이 사진작가가 ‘눈빛출판사’에서 사진집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길'을 펴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오는 8월 23일부터 9월 4일까지 갤러리 인덱스(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5 인덕빌딩 3층)에서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길 정영신 출판기념전'을 갖습니다.
-
(52) 한국전쟁과 아리랑(下) <br>지구상 마지막 분단국가 코리아# "UN참전 군인들은 애환이 담긴 애조의 아리랑을 전쟁 참상의 현장에서 가슴에 담았다. 일부는 아름다운 한국처녀의 아리랑으로, 일부는 처참한 어린 고아의 아리랑으로, 또 어떤 군인은 승전가 아리랑으로 담았다. 이들에게 아리랑은 영원한 한국 참전 인식표(認識票)이다.” # "유엔군은 한국군 전우에게 아리랑을 배웠고, 나라마다 다른 군가 대신 아리랑으로 연대하였다. 아리랑이 행진가와 진혼곡으로도 연주되기도 하여 한국의 국가로 아는 군인들도 많았다.” # "참전 유엔 정보 담당 군인들은 오끼나와 기지에서 기초적인 생활어와 아리랑을 배웠다. 한국전 포로 식별을 위한 정보교육이었다. 포로 중 아리랑을 부르지 못하면 중공군이고, 아리랑을 잘 부르면 북한군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또한 전투 중 고립되었을 때 아리랑을 부르면 한국인들이 공포심이나 거부감을 갖지 않고 보호해 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유명한 재즈 뮤지션 오스카 페티포드는 우연히 들은 아리랑에 영감을 받아 귀국하여 째즈 ‘아디동 부르스’을 취입해 인기를 얻었다. 오스카 페티포드는 40년대와 50년대 초 미국 재즈계에서 베이스와 피아노 연주자로 유명하였다. 그는 1953년 초 일본 오끼나와 미군기지에 위문공연을 왔다 한국 위문공연을 하고 있는 미국 뮤직션들과 합류하여 귀국하기 위해 인천의 야전 부대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야전 화장실에서 일을 볼 때 밖에 있던 한국 통역병이 휘파람으로 부는 노래를 듣었다. 일을 본 뒤 통역병에게 휘파람 연주에 대해 물었다. 이 때 ‘아-리-랑’을 ‘A-DEE-DONG’으로 듣게 된 것이다. 그가 취입한 SP음반에는 연습곡(take) 2곡까지 수록하여 처음 들었던 당시의 영감을 표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 "지난 4월 24일 90세로 별세한 룩셈부르크 레미히 성당의 질베르 호펠스(Gilbert Hauffels)씨의 장례식에는 아리랑이 연주되었다. 인구 20만의 나라에서 100명이 파병된 군인 중 19세의 청년으로 1952년 3월 참전하였다. 최후까지 휴전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또한 철원평야를 확보하기 위해 격전을 벌인 ‘철의 삼각지’ 백마고지 전투에서 생존한 이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의 전투에서 고지 주인이 12번이나 바뀐 전투로 포탄 27만발로 ‘395 고지가 무너져 내려 마치 누워 있는 흰말’(白馬高地)로 보일 정도로 되었다는 최고, 최후의 전투였다. 그는 조카에게 남긴 유언장에 ‘아리랑을 들려 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아리랑은 룩셈부르크 한인회 박미희 회장이 불렀고, 반주는 참전 후 재직한 세관의 관현악단이 맡았다. 이 나라도 독일에 점령되었다가 미국 등의 우방국 참전으로 해방이 된 역사를 갖고 있다. 그의 한국전 참정 일기는 룩셈부르크 전쟁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 "전우들을 위해 아리랑을 부르겠다.- 6·25 당시 미 해병대 병장이던 영국 참전 용사 콜린 새커리(93)옹이 부산에서 열린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서 아리랑을 불렀다. 1950년 9월 19세의 청년으로 영국군 제30야전포병대 소속 포병으로 참전했다. 같은 소대 전우 4명을 잃고 327고지 전투에서 생환했다. 4명의 전우가 잠든 부산 UN공원에서의 기념식에 그들을 위해 아리랑을 부르겠다는 의사에 따른 것이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배로 부산에 도착했을 때 뜻은 모르지만 선율이 너무나 애잔하고 아름다워 금방 기억하였다고 한다. 그 오랜 세월 한국전을 생각할 때마다 아리랑을 흥얼거렸다고 한다. 이제 혼자의 흥얼거림이 아닌 세계를 향해 평화를 기원하며, 전우의 죽음을 영예롭게 하기 위해 부른 아리랑이다.” # "70년 전,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협정 서명식을 마친 후 유엔군 군악대가 연주한 곡이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한국전쟁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빛을 발하는 노래이다. 지루하고 적군의 전략으로 오르내린 휴전 회담은 유엔군을 지치고 격분시켰다. 가장 길고도 이목을 끈 국제적인 정전 협정 조인식임에도 악수도 없고, 박수도 없고, 웃음기도 없는 조인식이었다. 그리고 동서 문을 통해 갈라졌다. 그런데 문을 나서는 순간 양측의 군악대가 연주한 곡이 아리랑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한민족이며, 전쟁의 최후 종결 주도자도 남과 북은 한민족이라는 것을 적과 동지가 공감한 결과이다. 아리랑이 남북간의 만남에서 연주되는 이유이다. 이제 아리랑 연주는 종전의 순간일 것이다. 그때는 악수하고 박수치고 웃으며 맺는 조인식이며 부등켜 함께 합창하는 아리랑일 것이다. 그 아리랑을 염원한다.” 룩셈부르크 아리랑 *유언장에 '아리랑을 불러달라'고 할 정도로 아리랑을 좋아했던 호펠스 씨는 아리랑을 들으며 떠나셨다. 인구 2o만의 룩셈부르크가 6.25 전투에 100명을 파병했다니, 그동안 몰랐는데 놀랍고 감동스럽다. 여러 나라의 넘치는 도움을 받고 선진국으로 우뚝선 대한민국이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데 결코 인색해선 안될 것이다. 호펠스씨의 명복을 기원한다 아리랑의 국제화가 이뤄진 게 6·25 전쟁부터다. 한민족의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미 7사단은 아리랑을 사단 공식 행진곡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1951년 위문공연 차 방한한 유명 재즈 가수 오스카 페티포드는 우연히 아리랑을 듣고 이를 바탕으로 이듬해 앨범을 발매해 인기를 모았다. ‘아디동 블루스’란 이름인데 아리랑을 아디동으로 오인한 것이다. 수많은 용사들이 종전 후에도 아리랑을 잊지 못했다. 지난 4월 24일 별세한 룩셈부르크의 질베르 호펠스씨는 "장례식 때 꼭 아리랑을 불러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6·25 당시 미 해병대 병장이던 이는 지난해 한국 정부로부터 ‘평화의 사도 메달’을 받으며 아리랑을 불렀다. 오늘 부산에서 열리는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서 직접 아리랑을 부를 예정이다. 참전 용사 60여명이 참석한다. 70년 후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남한에서 울려퍼질 아리랑을 듣는 노병들의 감회가 남다를 듯하다.
-
전통예술의 전승에 대한 제언조철현(국가무형문화재 대금산조 전승교육사) 오랜 세월을 우리나라 전통음악에 신경을 쏟아온 필자가 국가무형문화재인 대금산조 전승교육사가 된 지 벌써 2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한창 피가 끓던 20대 초반, 스승이신 김동표 선생을 따라서 당시 와병 중이던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강백천 선생을 찾아뵈었으니 그때가 1970년대 말이었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더니, 어느새 머리도 희끗희끗해지고 때때로 기력이 처지는 것이 느껴져, 예전과는 달리 대금산조의 후학 양성에 더욱 신경이 쓰이는 요즈음이다. 필자가 40년이 넘도록 줄곧 연주하며 내면을 추구해 온 음악은 강백천류대금산조 하나밖에 없다. 대금을 공부하기 시작한 젊은 시절에 다른 유파의 대금산조들을 엿들어 보고 자습하기도 해 보았지만 딱히 마음이 끌리지도 않았었다. 어쩌면 음악을 통하여 깊은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필자의 마음이 고독하게 살면서 고집스럽게 대금산조 하나만을 추구해 왔던 월담 강백천 선생의 정신세계와 잇닿아 있어서 그런 건 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1989년도에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이수증을 받았다. 당시는 이수심사도 엄격했었고 이수평가 대상자도 몇 명 없었다. 그 당시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는 ‘강백천류’뿐이었기 때문이다. 1982년 4월 30일 강백천 선생이 타계하실 때까지 배출되었던 이수자는 문화재관리국 서류상으로 김동표, 송복쇠, 이엽 이렇게 세 사람 밖에 없었다. 1983년도에 김동표 선생이 예능보유자 후보가 된 후부터 김동표 문하에서 이수자가 배출되기 시작했는데, 필자는 그 초창기 멤버였다. 1982년도에 전국의 5개 국립대학에 국악학과가 생겼고 88올림픽 이후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사람들도 점차 문화생활을 향유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말에 문화재관리국은 문화재청으로 격상되었으며 사람들의 국악에 대한 인식도 많이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필자는 1996년도 7월 1일 강백천류대금산조의‘전수교육조교’로 선정되었고 그해 12월에 소리더늠 대금산조의 맥을 잇고 있던 이생강 선생이 추가로 대금산조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문화재관리국 시절인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수자를 배출하는 것이 비교적 쉽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 문민정부(?)시절 이후 이수자 배출 권한을 문화재 보유단체와 보유자에게 넘긴 후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보유자나 보유단체들은 재량권을 이용하여 이수증을 남발하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여러 부작용들이 생겼으며 이수자들의 수준은 현격하게 떨어졌다. 이러한 여러 가지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문화재청에서는 이수자 배출권한을 다시 회수하고 전산화를 통한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엄격하게 관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박수를 치면서 격려하고 싶은 마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사가 다 그러하듯이 어떠한 사안이나 현상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방임했다가 다시 고삐를 죄게 되면 그 반사충격은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이수자 배출 양산(量産)을 막기 위하여 문화재청 산하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취하고 있는 현재의 이수 평가 방법에 있어서 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수자가 된다는 것은 무형문화재의 해당 분야를 최소한 3년 이상 전수를 받았음이 입증되어야 하고 그 분야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검증되어 해당 분야의 보유단체나 보유자 및 관리 감독하는 행정부처로부터 그 능력을 인증받은 사람을 말하며 따라서 그의 문화 예술 활동은 국가무형문화재의 전승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수자 배출에 있어서는 보유자나 감독기관에서 많은 노력과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데 그 이수자 배출 평가 기준에 있어서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가 있다. 우선 해당 분야를 3년 이상 전수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은 무형문화재를 전수 받고받고 있는 이수 대상자의 기량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이다. 말할 것도 없이 무형문화재의 기·예능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는 해당 무형문화재의 보유자 또는 전승교육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 시절에 문화재 보유자나 보유단체에게 이수증 수여 권한이 주어지자 이수증을 무분별하게 남발했기 때문에 그러한 시행착오와 오류를 벗어나기 위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을 회수하고 이수평가 심사자리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하여 오히려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보유자들의 평가 권한마저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고 만다면 이것은 분명히 커다란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이수 대상자를 평가하는 자리에는 해당 문화재의 보유자는 참석할 수 없고 감독기관(국립무형유산원)에서 임명한 심사위원들이 흔히 있는 국악경연대회 심사하듯이 평가하다 보니 전문성이나 해당 문화재의 특성을 가려낼 수가 없다. 쥐 잡으려다 장독 깬다는 속담처럼 무척 잘못된 처사이다. 이에 필자는 보다 효율적이고 올바르게 전승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로 다음과 같이 제언을 하고자 한다. 1. 이수 평가자(심사위원)를 5명으로 하되 무형문화재 해당 분야의 보유자 (또는 전승교육사) 1명을 반드시 참여시킨다. 2. (예를 들면) 보유자에게 28%의 점수 부여 권한을 주고 나머지 심사위원 4명이 각각 18%의 점수 부여 권한을 가진다. 어디까지나 가정(假定)이지만, 60% 점수 이상을 받아야 이수자로 인정된다고 할 때, 보유자가 아무리 인정하고 싶어도(28% 다 주어도) 4명의 심사위원들이 반대한다면 해당자는 이수를 할 수가 없게 된다. 만약 이렇게 하면 보유자의 독선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유자를 제외한 심사위원들이 실력을 인정하게 될 때에는 그 전문성도 사회적으로 보증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 어디에나 완벽한 제도가 있을 수는 없겠지만 잘못된 부분이 발견되면 개선책을 도입하여 수정하고 거기서 또 문제가 있으면 보완해 가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제도라고 생각한다. 부디 우리의 소중한 전통예술이 제대로 올바르게 전승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외부 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 50년"콱 뒈져라. 먹고 싶어 죽겠다. 에라 죽으면 편하지. 너하고는 죽은 인연이야. 너 죽어볼래. 죽어도 못다하는 사랑아.서양 사람들은 위의 모든 죽음의 말들에 죽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구체적인 죽음의 형태를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죽음의 의미를 갖는 행동 관념을 다 운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죽음을 죽음 이상도 이하도 아닌 죽음 그 자체로서 생(生)의 반대되는 현상으로 삶으로부터 이잘화시켜 놓는다. 즉 죽음은 삶의 적이며, 공포이며, 부정이며, 파괴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며 문지방 하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늘 함께하는 친구이며 언제나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계기이며 매일 죽어가는 것을 인식하는 죽음이며 생노병사(生老病死) 중의 하나로서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듯이 자연순회의 그것처럼 밥 먹듯이 죽음과도 같이 사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 생사(生死)의 관념은 생(生)과 사(死)의 유기적 관계 속에 인식되어지는 것이다.... 통ㆍ피ㆍ살은 '통일을 위한 피의 살풀이'의 줄인 말이다. 귀국 후 첫 작품으로 '통ㆍ막ㆍ살'을 했던 것이우리 민족의 간절한 염원인 통일에 대한 한 민족인으로서의 몸부림이었다면, 피의 살풀이는 민족 본능에 충동하여 통일을 막으려는 외세와 공포의 핵 공해에 대처하려는 투쟁의 일환으로 죽어있는 통일에 민주의 '곡(哭)'을 바치는 행위이다." (본문 118~119쪽, '통ㆍ피ㆍ살(TongㆍPiㆍSal) 때 : 1987년 8월 3일, 곳 : 바탕골 소극장' 중에서) 이 책에는 1959년부터 2007년까지 전위예술가 무세중의 평생 예술작업이 담겨있다.무세중은 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이며 이처럼 한 전위예술가의 50년동안의 전위예술행위가 한 권의 책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나오기는 국내에서 처음이다.무세중의 전위예술은 저자의 20대 시절부터 시대에 대한 회의와 대안을 향한 끊임없는 사고의 결과들이다. 따라서 ‘충돌50년’이라는 의미는 저자가 한평생을 바쳐 현실과 역사와 끊임없이 대면하고 저항하고 대안을 찾아 부단히 행위를 해 온 고독하고 힘겨운 예술작업의 과정들을 함축하고 있다.'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50년'은 한국전위예술을 실제적인 공연과 이를 뒷받침하는 저자의 예술적 자세, 공연의 목적과 행위의 이론적 근거들이 일일이 제시되고 있어 전위예술에 대한 실제와 이론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또 공연을 한 연도와 날짜 출연자와 더불어 사진들을 함께 수록해 명실공히 한국 전위예술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노예술가의 평생예술업적을 기록하고 있다.특히 전위예술은 서구적 예술행위로 인식되어 왔으나 무세중은 이 책에서 전위예술의 전위성이야말로 우리민족 특유의 민족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무세중은 이 근거로 우리의 탈춤이나 고대 및 중근대사에서 민중들의 행동방식이나 놀이 등 그리고 민중들이 역사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켜나가는지를 고찰함으로써 한국 전위예술술의 이론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무세중은 독일 체류 기간 동안인 1977년부터 1989년 동안의 전위예술 행위를 통해 한국 전위예술의 실험을 무수히 시도하고 유럽에 한국의 탈춤이 갖는 전위성과 한국전통예술과 서구적 행위예술의 접목을 무수히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저자의 전위예술의 기본 맥은 전통과 현대이다. 즉 한국의 전통적 미학이 어떻게 하면 세계적 미학과 결합하여 보편적 미학의 세계로 다가가느냐가 저자가 탐색하고 있는 전위예술의 본질이다.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민족성이다. 즉 한국인이라는 하나의 민족이 갖는 특징적 요소들이 무세중 전위예술의 근거들이 되며, 저자는 민족성을 민중들의 삶에서 찾고 있다. 민중들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켜나가기 위해 낙관적 자세와 역경이 닥칠수록 뭉치는 끈질긴 생명력에서 찾고 있다. 이것은 한국사의 고대 중근대의 민중들의 삶의 방식과 형태들 그리고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민중의 생활 속 예술행위들에서 찾고 있다.'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50년'은 전위예술이라는 이름만 난무하는 한국의 전위예술에 이론적 근거와 한국적 전위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한 역사적인 전위예술서라고 할 수 있다. 무세중 (지은이) 무세중(巫世衆)의 본명은 김세중(金世中)이다. 상식 밖으로 ‘무(巫)’라는 성으로 바꾼 이유는 김(金)씨 문중의 자손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자손(天孫)’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사람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간 역할을 해야 함을 깨닫고, 민족의 근원과 얼이 깃들어 있는 예술의 시원을 찾아 젊은 시절부터 전국 방방곡곡 8천 리를 걸어서 순례하며 연구하고, 깨달음을 작품 속에 진일보하여 승화시키려 했던 전위 예술가이자 굿 예술가이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연극학 석사를 마치고 독일, 일본,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활동해 왔으며 50년간 500여 편의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주로 통일과 아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제1회 '김법국국악상' 후보 3인, 심사
- 2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3)<br>강원도아리랑
- 3‘2024 광무대 전통상설공연’
- 4국립남도국악원, 불교 의례의 극치 '영산재', 특별공연
- 5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5)<br>한국 최초 '도깨비 학회', 아·태 도깨비 초대하다
- 6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부 대상에 이소영씨
- 7국립민속국악원, '제6회 2024 판놀음 별별창극'
- 8서울문화재단, 클래식부터 재즈까지 '서울스테이지 2024' 5월 공연
- 9제3회 대구풍물큰잔치 ,19일 디아크문화관광장
- 10국립극장 마당놀이 10주년…“새로운 얼굴 찾아요”
- 11이무성 화백의 춤새(91)<br> 춤꾼 한지윤의 '전통굿거리춤' 춤사위
- 12(43) 조선민요합창곡집 제1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