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1 (화)

[특별기고] 서울시무형문화재 제22호 '마들농요'를 찾아서(이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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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서울시무형문화재 제22호 '마들농요'를 찾아서(이소라)

  • 특집부
  • 등록 2004.07.20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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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동요는 경기도 지역의 농요를 본바탕으로 하고 강원도 지역 농요의 영향을 일부 받으면서 형성된 소리이며 농사를 지을 때 힘든 일을 잊고 흥을 도우기 위해 부른 민요이다. 

 

전승되는 농요에는 아침소리, 모심기 소리(하나, 둘...열소리), 상사소리(넬넬넬 상사도야), 애벌맬 때 소리(에 두루차 하...에헤에와), 점심소리, 방아타령, 두벌맬적 소리(미나리), 새쪽는 소리(우이여라 훨훨), 저녁소리(둥기야 당실-꺽음조)가 있다. 미나리는 본시 논보다 밭이 많은 강원도에서 모심을 때 또는 밭을 매면서 부르던 소리인 것이 경기도 포천으로 들어가면서 논의 김(잡초)을 맬 때의 소리로 전환되고 그것이 의정부의 길을 따라 전파되면서 가락이나 가사, 가창방법 등에 이 지방의 정서가 가미되어 색다른 풍의 민요가 형성되었다. 

 

이 중 두루차 소리와 꺽음조는 마들농요의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 곡들이다. 마들농요가 불리우는 노원구 지역은 고려 현종이래 양주관할이었으나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마들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상계동에 역참기지가 있어 말들을 들에 놓아 키웠기 때문에 생겼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상계동 일대가 삼밭이 많아 삼밭의 순 우리말인 마들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비록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예전에는 볍씨만 800석을 넘게 뿌렸던 대 평야였다. 그 마들 대평야에서 모를 심고 김을 매고 수확을 하며 농사일의 어려움을 잊기 위해 흥얼거렸던 노래가 바로 마들농요이다.

 

 그러나 노원의 급속한 도시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은 모두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농요 또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더욱이 시간이 흐를수록 당시 농요를 부르며 일을 했던 어르신들이 고령화되고 한 분씩 돌아가시면서 농요의 보존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렇게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전승의 맥이 끊겨가던 농요를 되살려 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분이 있다. 마들농요보존회장인 김완수(만 56세)씨다. 마들농요 보유자이자 보존회장인 김완수씨는 45년 흥덕면 오태마을에서 김이중씨와 이종임씨의 6남매중 5째로 태어났다. 흥덕초등학교(33회)를 졸업하고 흥덕중학교에 다닐 때 인간문화재 이은관 선생이 초청한'배뱅이굿'을 보고 소리공부가 하고 싶어 무작정 서울 보따리를 쌌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상계동 지금자리에 40년전에 자리를 잡게됐다. 

 

그때는 서울이 아니었고 양주군 노회면으로 호박밭과 미루나무가 많은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만원버스를 타고 서울의 이은관 선생이 운영하는 경기민요학원에 나가 전수장학생이 되었다. 민요를 처음 접했던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가 정식으로 입문하기 위해 처음으로 문을 두드렸던 곳이 바로 이은관 선생이 운영하던 민요학원이었다면, 또 이것만큼 자연스러운 세상사도 없지 않을까! 

 

그 때가 1970년, 조금 늦깍이로 민요를 시작한 감이 없지 않지만, 이미 천성적으로 타고 난 끼와 열정은 그 늦은 시간을 만회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1978년에는 우리국악 순회 공연단 대표 자격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국악을 보급하는 활동을 시작했던 

 

그는 그 외에도 경기산타령 개인 발표공연, 한국 민속 예술제 3회 출연, 국립 민속 박물관, 덕수궁 중화문, 남산골 한옥마을, 서울시청 본관 마들농요 발표공연 등 얼핏 헤아려도 수 백회가 넘는 공연을 해왔다. 이것이 바로 더도 덜도 없는 그의 인생이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뒤에는 바로 수더분한 아내와 1남 2녀의 자녀가 있다. 하지만 가족들의 고통스러웠던 인내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늘상 가슴이 무거워진다고 한다. 

 

지금도 집에서 소리를 하면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는 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목이 잠기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 그러나 이젠 당당하게 자식에게 자신의 일이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것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마들농요 복원을 위한 10년 고생이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22호라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경기민요를 줄곧 해왔던 그가 서울시의 유일한 농요인 마들농요를 처음 접한 시기는 1990년 이소라 문화재 전문위원의 채보를 통해서이다.

 

그는 노원구에 근근히 마들농요가 전승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앞이 아뜩해졌다고 한다. 지금까지 계속 눈앞을 맴돌며 뚜렷하게 잡히지 않았던 삶의 방향타를 확실하게 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그 말로만 간신히 전해 내려오는 농요를 제대로 복원하는 것이 도서관에 앉아서 자료 몇 줄 찾는 것으로 끝나는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그는 경기도 양주군 일대와 노원구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는 본토 노인네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장애물은 늘 예기치 못했던 곳에 숨겨져 있는 법. 마들 벌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던 노인 분들은 막상 자신의 입으로 농요를 재현해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열망이 그분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일까.

 

사람들은 그에게 기억나는 노래 몇 소절씩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분들이 상계1동에 있는 갈월 경로당분들이다. 고 윤충보, 서은남, 박우석, 한동식, 박준형, 이면우, 문사용, 이영흠, 장영태씨 등 그가 얼핏 말하는 분들도 10여명에 가까운 것을 보면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수많은 어르신들의 얼굴이 스쳐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1990년 故 윤선보 옹에게서 받은 사사는 마들농요의 전체적인 윤곽을 세우는 문제 뿐만 아니라 당시 농요를 부르며 일을 했던 사람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수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배움의 시간이었다. 

 

그리하여 7년에 걸친 멀고도 지난했던 복원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마들농요는 1996년 완성이 되고 그해 제37회 한국 민속예술제 서울시 대표로 출연해서 공로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복원한 마들농요를 꾸준히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 1996년 7월 정회원 50명, 준회원 평화노인대학 100명으로 보존회를 구성했다. 문제는 회원들의 고령화로 마들농요의 맥을 이어나가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보존회의 입장에서는 젊은 회원의 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젊은 회원이 들어와도 반갑지만 못하다. 넉넉치 못한 재정 형편은 언제나 고민거리! 하지만 어려운 조건속서도 요즘 마들농요보존회에 활기가 넘친다. 농요가 지정된후 전수장학생, 전수자, 이수자 배출에 이어 전소조교로 지난 5월에 신진성, 박운종 씨가 지정됐다. 

 

또한 이분들 외에도 안향단(이수자), 양재순(이수자), 이순경(전수생), 장선녀(전수생), 안영숙(전수생), 이정님(전수생), 조정선(전수생) 씨 등이 마들농요보존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의 순회공연도 하고 정기적으로 발표회도 갖는 등 왕성한 활동을 통해 농요의 보급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어렵사리 복원한 마들농요이긴 하지만, 지금 자라나는 학생들에겐 상당히 생소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이제 남은 일은 노원의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인 농요를 쉽게 부를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농요 테이프를 제작 배포하고 꾸준한 공연활동을 통해 보급에 힘써 왔지만 아직도 대중적인 인지도는 부족한 편이다. 

 

실제 농사를 지으며 노래를 불렀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 영상자료로 만들어 내거나 또는 단지 농요의 재현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내기를 하는 현장에서 온 가족이 참여하는 "모내기 이벤트"와 같은 행사를 기획해 나간다면 그 교육적 효과는 배가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김완수씨에게는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 그것은 회원들이 마음놓고 연습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강습도 할 수 있는 "마들농요 보존회관"을 건립하는 것이다. 전통문화에 관심있는 사람들의 의지가 하나 둘씩 모인다면 그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듯 싶다. 마들농요보존회 : 02) 936-3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