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5 (일)

[국악신문] 판소리를 기록한 통역관이자 서화가, 청운 강진희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악신문] 판소리를 기록한 통역관이자 서화가, 청운 강진희

현지에서 찍은 강진희의 초상 사진 (1).jpg
[국악신문] 청운(菁雲) 강진희(姜璡熙, 1851~1919) ,현지에서 찍은 강진희의 초상 사진

 

청운菁雲 강진희姜璡熙라는 이름은 생소했다. 1851년에서 1919년까지 살다 가셨으니 일면식이 있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와 조우하게 된 것은 2022529일 서울 강남의 가로수길에 위치한 예화랑에서였다. ‘, 이어지다라는 제목으로 사후 백여 년만에 처음 열린 기념전이었다. 예화랑 김방은 대표가 청운 선생의 피를 이어받은 혈연관계이고, 이혜신 큐레이터가 관련 자료들을 수집했으며,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대표이사가 소장하고 있던 청운의 저서 '악부합영樂府合英'을 전시회에 내놓은 연유로 인연이 강조됐다. 예화랑 측은 한자로 쓰여진 악부합영을 고전번역원에 맡겨 번역해 소개하고, 관직에 있으면서 서화와 판소리 분야에서도 활동했던 강진희 선생의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그를 조명했다.

 

악부합영1.jpg
[국악신문] 악부합영(樂府合英)

 

청운은 제대로 부각된 적이 없지만,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어학 실력도 뛰어나 한문 지식을 바탕으로 중국어사전을 펴냈으며,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일어와 영어를 구사해 1886년 일본공사접응관차를 거쳐, 1887년 통역원으로 박정양1841~1904 주미공사의 미국 수행을 맡았다. 주로 일어로 미국측과 소통했고, 그 내용을 우리측에 통역했다. 어떤 생김새였을까?


궁금해하던 기자에게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1888426일 조지 워싱턴1732~99의 생가 버지니아 주 마운트 버넌Mount Vernon을 찾았을 때의 모습이다. 박정양 공사, 이종하 무관, 이하영 서기관과 나란히 섰는데, 그들보다 훨씬 큰 체격이다. 머리 하나는 차이가 날 정도로 키 차이를 보인다.

 

초대주미공사관원 마운트 버넌의 워싱턴 생가 방문 1888.4 가운데 키 큰 이가 강진희.jpg
[국악신문] 초대주미공사관원 마운트 버넌의 워싱턴 생가 방문 1888.4 가운데 키 큰 이가 강진희

 

서화에 능했던 통역관은 처음 마주하는 서구의 문명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카메라가 없던 나라의 주재원이었던 까닭이다. 당시 서구의 과학문명은 당시 조선인들에겐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박정양보다 5년 앞서 미국을 방문했던 조선보빙사가 겪은 일화는 웃음짓게 만든다. 1년 뒤 갑신정변의 주범으로 멸문지화를 당하는 홍영식을 단장으로 민영익, 서광범, 유길준 등 20대의 조선 엘리트들이었다. 서구 문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춘 인물들이었음에도 그들이 받은 문화 충격은 컸다


에디슨이 발명한 전기는 이해불가였고, X-RAY"귀신의 소행이었으며, 엘리베이터는 경악 그 자체였다. 사절단은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를 만나자 넙죽 큰 절을 해 미국 신문에 그 모습이 실리기도 했다. 식탁에 흉기인 포크와 나이프가 오르는 건 "상스럽다고 느꼈고, Y-shirts에 대해서는 "편리하겠다며 호감을 표했다.


청운은 큰 문화 간극 속에서 1년간 미국에 체류하며 목격한 풍경을 머릿속에 각인했다가 조선에 돌아와 화선지에 붓으로 옮겨 소개했다. '미사묵연-화초청운잡화합벽'이다.


청운은 1911년부터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1853~1920 등과 서화미술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청운은 금석학에 밝아 위창 오세창1864~1953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덕분에 위창은 전서와 예서를 익혀 당대 최고의 서예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악부합영 표지.jpg
[국악신문] 악부합영(樂府合英) 표지

 

청운의 인물됨과 생애에 대해서는 남겨진 자료가 많지 않다. 이혜신 큐레이터가 찾은 김영욱의 2017년 논문 '청운 강진희의 생애와 서화 연구'에 서화가로서의 청운이 소개돼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청운의 저서 악부합영은 판소리 애호가로서의 청운의 면모를 보여준다. 두 자료를 근거로 그를 형상화해본다.


강진희는 35세에 관직에 진출해 60세까지 법부와 학부의 요직에서 관원으로 일했다. 지금으로 치면 법무부와 교육부에 근무한 셈이다. 61세부터는 서화에 전념해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진주 강씨姜氏인 그의 가문은 누대로 의관醫官 집안이었다. 모친 역시 의관 집안이었다. 조모는 역관 집안 출신이었다. 청운은 의관 대신 역관을 선택했다. 조모인 천녕 현씨玄氏 가문의 영향이 컸다


왜학倭學을 전공해 잡과에 합격해 사역원 종 9품직인 참봉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현재의 일어 통역관이었다. 당시 주미 공사관에는 참찬관 이완용1858~1926, 서기관 이상재1850~1927, 번역관 이채연1861~1900 10인이 근무했다. 이 당시 청운은 이미 전서에 조예가 있었던 모양이다. 강민기의 논문 '근대 전환기 한국 화가의 일본화 유입과 수용'에 한 일화가 소개된다. 청운이 미국행 배를 타기 위해 요코하마에 들렀을 때 일본 화가 야스다 베이사이安田米齌1845~88를 만나 '추경산수도' 1점을 선물 받고 자신의 전서 글씨를 선물한 까닭이다.


주제에 대한 접근의식도 집요했던 모양이다.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배에 19일간 동승했던 훗날의 주한미국대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의 목격담에 따르면, 청운은 가벼운 옷 차림으로 여객선의 홀에 나가 누구에게나 말을 걸고 다녔다. 알렌은 그런 청운을 "the snoop”으로 표현했다. 꼬치꼬치 캐묻고 다니며 탐색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청운은 그만큼 호기심이 많았으며 알고자하는 열망이 컸던 인물로 이해된다.


청운은 미국 체재 시절 박정양을 수행해 28개 공사관을 방문하며 외교 활동을 벌였고, 이상재, 이채연 등과 볼티모어 등 여러 지역을 유람하며 서양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1889년 귀국해 1910년 한성고등여학교 서기에서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법부와 학부에서 활동했다.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국한회어國韓會語' 편찬을 돕고, 역사와 지리 서적 간행에도 관여했다.


61세이던 해부터 1919년 타계하기까지 9년간은 서화가의 길을 걸었다. 앞서 워싱턴 주재 시절에도 장승업 풍의 '묵매도墨梅圖', '괴석국란도怪石菊蘭圖' 등의 수묵화를 그렸다. 1888년에는 훗날 순종이 되는 동궁 이척1874~192615번째 탄강일을 축원하는 '승일반송도昇日蟠松圖'도 그렸다. 오세창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강진희는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잘 썼고, 그림은 매화를 잘 했다고 평했다. 강진희의 생애를 연구한 김영욱은 "강진희 30대의 회화는 화면의 구성과 소재에서는 19세기 화단의 경향을 수용하고, 맑은 담묵을 즐겨 사용해 담담한 느낌의 남종문인화풍을 구사했다. 제작 목적에 맞는 소재를 포착하고 간략한 필치로 묘사하여 그림의 이야기를 잘 전달했다. 또한 전각의 인장을 회화와 연계시켜 시···四全을 지향한 작화 방식은 서화가 시기까지 지속되었다.”라고 평했다.


귀국한 후 머리 속의 풍경들을 화첩으로 남겼다.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 '종남귀래도終南歸來圖' 등이다. 이 화첩은 1983최초의 미국견문화美國見聞畵라는 제하로 동아일보에 보도됨으로써 처음 알려졌다. 화차분별도는 워싱턴 공관에서 멀리 두 열차가 오고 가는 풍경을 보고 그린 것이다. 조선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가는 여정 중에 함선과 기차를 경험했으나 두 열차가 교행하는 모습은 겁이 날 정도로 신기했던 모양이다. 제목 옆에 웃음이 나왔다라는 뜻의 부지일소付之一笑를 날인했다. 철도와 기차를 중심으로 많은 배경은 생략하고 간략한 필치로 스케치했다. 이국적 풍경의 핵심만 포착하여 묘사함으로써 그림의 주제를 뚜렷하게 전달했다.

 

e74d1518_2.jpg
[국악신문] 강진희 ‘화차분열도’. 간송미술관 소장

 

청운 강진희는 서화가 외에 판소리 연구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이 부분이 의외이다. 당시 선비들이 남종화의 영향을 받아 그림 속에 시를 쓰던 화중유시畵中有詩의 인문화人文畵에 몰두하는 게 트렌드였던 만큼, 와 화에 관심과 재능을 보인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있지만, 판소리에 관심을 가진 건 매우 이례적인 경우인 까닭이다. 그냥 즐기기만 한 수준이 아니라 전문 서적을 펴냈을 정도였으니 놀랄만 하다. 입으로만 전해져 오던 속요들의 가사를 채록하고 수록한 악부합영樂府合英이 그 업적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대목이다. ‘악부는 노래가사를 한시 형태로 옮긴 것이다. 고려 때 이제현李齊賢1287~1367 이래로 몇몇 학자들이 이 작업을 해왔다. 한시漢詩의 기본 형식은 한 구5자나 7자로 이루어지지만, 악부 한 편이 몇 구로 구성되는지, 한 구는 몇 자로 이루어지는지 등에 대해 정형定型은 없었다. 노래가사의 길고 짧음에 따라 시가형태도 들쭉날쭉이었다.


청운의 악부합영은 모두 5부로 구성돼 있다. 각 부마다 자신의 필명인 일소헌一笑의 이름으로 제사題詞를 지었다. 신헌申櫶과 신위申緯가 채집한 곡들을 정리하며 푸른 갈대 수풀을 배로 헤치고 다니며 소악부小樂府를 읊조리다碧蘆吟舫小樂府라고 표현하고, 자기가 기록한 곡들에는 푸른 갈대서리를 배를 타고 다니며 소악부를 읊고 후기를 짓다題碧蘆吟舫小樂府後라고 썼다


벼슬아치로서 판소리를 연구했던 송만재1788~1851가 광대놀이를 보고 지은 시, 관우시觀優詩를 옮기며 감상평을 덧붙이고,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세상에 떠도는 유행가 아홉 수九歌는 스스로 채록했다. ‘합영合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여러 영걸들의 합작품이라는 점을 나타낸 것이라 풀이된다.


청운은 악부합영의 서문에서 "일소헌一笑軒이 소악부小樂府를 모방하다.”라고 스스로 소악부의 형식을 따랐음을 밝히고 있다. 소악부는 한시의 절구체絶句體를 고수하는 악부이다. , 시처럼 절구 형태를 따른 작은 시小詩의 형식이다.


악부합영은 구전으로 전해오던 우리 노래를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당시 소리하던 사람들이 한자를 몰라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청운의 작업은 의미가 크다. 선대인 신위, 신헌과 후대로서 천재 소리를 듣던 육당 최남선1890~1957 등도 같은 작업을 한 바 있다. 청운은 그들이 빠트려 국문가사만 전해져오던 곡들의 가사를 한자로 옮겨 기록했다


그의 한문 실력이 작용했다. 일소헌一笑軒이 기록한 속요 46수에 벽로운방소악부碧蘆韻舫小樂府 40수 그리고 여산노초(礪山老樵, 송만재)의 관우시觀優詩 50수를 묶었다. 청운은 기록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자하紫霞 신위申緯 선생이 소요(小謠 : 우리나라 민요)를 채집하여 <벽로운방 소악부>라 명명한 칠언절구 40 수는 가사가 오묘하고 가락이 뛰어났기 때문에 세상에 전해졌다.”라고 선대의 업적을 칭송하고, 자신이 기록한 속요 46수는"무더위에 비까지 와서 후텁지근한 날, 풍등風燈을 앞에 두고 우연히 남악주인(南岳主人, 최남선, 1890~1957)이 찬정撰証(골라서 정한) 가곡(歌曲, 원 제목은 歌曲選)을 읽고, 그 가운데서 무명씨無名氏가 지은 것만을 찾아내어 국문(한글)은 버리고 한자로 문장을 짓고 압운(押韻, 시가에 규칙적으로 운을 다는 일)까지 해서 뜻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자세히 서술하고자 하였다.”


청운은비록 칠언절구의 형식을 빌려서 쓰기는 했지만, 노래의 원 맛을 제대로 낼 수 있을 것인지, 걱정하고 있다. 다만 변변치 않은布鼓雷門작품이지만, "꽃그늘 아래 술동이를 앞에 두고 혹시라도 지음자知音者가 한번 목청껏 뽑아주기를 기다리노라.”라며 겸손을 보였다.


서언의 말미에는 중국 강소성의 "난정蘭亭에서 왕희지가 수계修契한 지 26번째 계축년(1913)에 고송유수관 주인古松流水館 主人이 홍두紅荳 꽃 아래서 글제를 쓰다.”라며 한껏 고양된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악부합영의 모두에 밝힌 서언緖言에도 그런 감정이 드러난다.


"음악은 울적함을 풀어주고 노래는 마음을 드러내는데, 모두 감정에서 나온 것이다.에 읊고 감흥하는 것에 의한 비유가 있다면에는 고음과 저음 및 맑은 소리와 탁한 소리의 구분이 있다. 이것은 시대에 따라 기풍氣風이 변하는데, 예로부터 변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성운聲韻이다. 광대가 다른 사람을 흉내내고,상말로 대사를 하고 거리에서 노래하는 것은, 자기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입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광대가 소리를 길게 빼서 노래하고 악기를 두드려서 연주하여 권선징악을 표현하는 데서 비분悲憤한 감정을 일으키니, 즐거운 데서 즐거워하고 슬픈 데서 슬퍼하게 된다.그러므로 음악을 듣고 정치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니, 어찌 음악을 얕잡아 볼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음악은 국문이 아니면 가락을 만들 수 없어서 곡조를 맞추기 어려우니, 시로 번역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이번에 국문을 버리고 압운押韻한 것은 비속함에서 벗어나서 우아함을 얻으려는 것이다. 시경詩經의 작자가 민요를 채집했던 이유도 어찌 이와 비슷하지 않았겠는가.

 

구전되던 노랫말을 한문으로 기록한 것은 "비속함에서 벗어나 우아함을 얻으려는취지라고 언급했다. 문자가 권력이던 시절의 인식이다. 이제 청운의 작업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자.


'임의 자취 사라진 꿈夢無跡'은 어쩐지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라는 가곡을 연상시킨다.


夢爲我請遠方君 꿈이 날 위하여 먼 데 임을 데려왔건만

不勝欣起影無存 기쁨에 겨워 일어나니 그 모습 사라졌네

君或怒而飄然去 임이 혹시 노해서 홀연히 가셨는가

如何覺來不見痕 잠에서 깨니 자취가 보이지 않네.


'문밖에 나와서 기다리다出門望'는 친구를 그리며 기다리는 정을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夜雨花開酒初熟 밤비에 꽃은 피고 빚은 술도 막 익었네

琴朋留約帶月回 벗이 거문고 가지고 달이 뜰 때 온다 하니

分付兒童仔細看 아희야, 자세히 보아라

茅檐月與故人來 초가집 처마에 달이 뜰 때 벗도 함께 오는지


'당신이 직접 오세요宜身至前'는 당시 여인으로서는 당찬 모습을 담았다.


莫倩他人尺素馳 남에게 편지 전하지 마시고

當身曷若自來宜 당신이 직접 오시면 좋겠어요

縱眞原是憑傳札 아무리 진심을 편지로 전해도

成否從遠未可知 참인지 아닌지 알 수 없거든요


'백마는 울고 아가씨는 옷을 잡고白馬靑娥'"백마는 가자 울고 해는 기울어라는 유행가 가사를 떠올리게 한다.

 

欲去長嘶郎馬白 낭군의 백마는 가자고 길게 울고

挽衫惜別小娥靑 어여쁜 아가씨는 옷을 잡고 이별을 아쉬워하네

夕陽冉冉銜西嶺 석양은 뉘엿뉘엿 서산에 기울고

去路長亭復短亭 갈 길은 멀고도 머네


'나비야 청산 가자胡蝶靑山去'는 노랫말이 일품이다


白胡蝶汝靑山去 흰 나비야 너도 청산 가자

黑蝶團飛共入山 호랑나비야 떼지어 함께 청산으로 날아가자.

行行日暮花堪宿 가다가 날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花薄情時葉宿還 꽃이 푸대접하면 잎에서라도 자고 가자


황진이의 '벽계수碧溪水'는 청운 덕에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진 가사이다. 마지막 연만 "명월明月이 만건곤滿乾坤하니 쉬어감이 어떠하리로 바뀌었다. 대중성을 의식한 소이일 것이다.


靑山影裏碧溪水 청산 그림자 속의 벽계수야

容易東去爾莫誇 동쪽으로 쉬이 흘러감을 자랑마라

一到滄海難復回 푸른 바다로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데

滿空明月古今是 온산 가득 밝은 달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네


'동짓달 긴긴 밤冬至永夜'은 황진이黃眞伊가 지은 애절한 연시戀詩이다. 국문으로 전해져오던 가사를 청운이 한자로 옮겨 적었다.


截取冬之夜半强 동짓달 기나긴 밤 절반을 애써 잘라서

春風被裏屈蟠藏 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말아 두었다가

燈明酒煖郞來夕 등 밝히고 술 데워 놓고 임이 오신 날 저녁에

曲曲鋪成折折長 굽이굽이 길게 펴리라


청운은 채록곡마다 직접 제목을 지어 붙이고 작사가의 이름을 명기했다. 없는 경우에는 무명씨로 표기했다. 신위 등 선대 기록자들에게는 헌사의 의미로 직접 절구를 지어 올렸다. 청운은 악부합영의 의미를 기록전승으로 보았다. "문장의 인연을 살리려는 또 다른 예술의 장르가 아닐 수 없다.


"인간 세상의 백년은 천상의 하루에 불과할 뿐인데, 더구나 그 하루 동안의 영고성쇠와 희로애락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요를 노래로 전할 경우에도 흥망성쇠에 따라 존속되거나 사라지는 안타까움이 있다.시구詩句는 오랜 시일을 세상에 남아 있으니, 사람에게 문장의 인연은 참으로 귀중하지 않겠는가.”


송만재가 광대놀이를 보고 쓴 '관우희오십수觀優戱五十首'는 광대패의 소리와 재담, 재주를 보고 느낀 저자의 감상문 형식이다. 줄여서 '觀優詩'라고 부르는 그 글에는 영산(靈山, 혹은 단가短歌)에 대한 디테일한 평이 들어있어 후대의 판소리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영산은 놀이판에서 목을 풀 때의례적으로 하는 몇몇 재담과 타령打令을 포함하는 여러 곡의 혼칭混稱이다.요령要令은 광대가 재주를 부릴 때 하는 재담과 발림이다. 觀優詩는 광대패의 놀이를 눈 앞에서 직접 보듯 하게끔 묘사했다.


"거문고 타고 피리불며 촛불 밝히고 밤새 노는데, 서늘한 정자와 높은 누대에 바람에 꽃이 떨어진다. 정신은 북과 함께 움직이고소리는 몸동작과 함께 표현한다. 방자한 웃음에서 해학이 물결처럼 나오고 입에서 말이 샘솟듯이 흘러나온다.”


청운은 송만재의 '관우시' 뒤에 서둘러 기록으로 남겨야 했던 사정을 밝혔다.


"우리나라의 정악正樂은 모두 여항(閭巷, 시중)에서 전습된 것과 장악원梨院의 고악古樂과는 차이가 있다.최근에 창을 부르는 기생이 요모조모 뒤섞어서 두서가 없어지니 억지로 기억하기는 어렵다.”


버지니아 주 마운트 버넌 조지 워싱턴 초대 미국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한 박정양 등 주미조선공사관 일행.jpg
[국악신문] 버지니아 주 마운트 버넌 조지 워싱턴 초대 미국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한 박정양 등 주미조선공사관 일행

 

청운이 언급한 정악들은 조선 시대 중기에 널리 불리던 12가곡으로, <백구사白鷗詞>, <죽지사竹枝詞>, <어부사漁父詞>, <행군악行軍樂>, <황계사黃鷄詞>, <처사가處士歌>, <춘면곡春眠>, <상사별곡相思別曲>, <권주가勸酒歌>, <양양가襄陽歌>, <매화타령梅花打令>, <수양산가首陽山歌> 등이다. 고려시대 시조작가 이현보李賢輔<어부사漁夫詞>만 빼고는 모두 작자가 미상이다. 12가곡은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가사歌辭보단 길이가 짧지만 풍류적인 서정을 담고 있다. 바뀌고 사라지는 추세여서 회자되는 노래들을 기록해 소개하며 당부했다.


"널리 한 번쯤 전해주시라.”


광한루 위로 아른거리는 봄빛, 오작교가의 긴 그넷줄.

염문설(艶說)을 뿌리는 이는 지금 이 어사(李御使)

아름다운 인연으로 옥중에서 향기를 쌓네. (서춘향(徐春香)과 이몽룡(李夢龍)


누가 알았으랴, 심청이 천상(天上) 선녀의 몸으로

잘못을 저질러 맹인 집안에 떨어질 줄을

해신(海神)의 아내가 되려고 공양미 300석과 몸을 바꾸었는데

궁궐 잔치에서 맹인들의 눈을 뜨게 했구나. (심청(沈淸) 낭자)


()는 악행으로 인해서 쌓이고 복()은 인덕(仁德)으로 말미암는다.

부귀는 쓰디쓴 가난에서 나온다. (연흥보(延興甫))


가소로운 인간이여, 어리석고 한심한 자여,

이제 제비가를 부르며 서로 친하게 지내려무나. (연자가(燕子歌))


도시락과 표주박, 대지팡이와 짚신으로

천리강산에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네. (유산가(游山歌))


세상엔 갖가지 즐거운 일이 많으니,

사람들이 이별가를 부르게 하지 마라. (이별가(離別歌))


시중에 떠돌아 다니던 작자 미상의 노래 아홉 곡을 채록해 한자로 옮겨 적으며 청운이 밝힌 후기에는 노래에 반영된 인간의 어리석음을 적시하고 있다.


"하루는 친구의 책상에서 고시古詩를 보고 빌려서 소맷자락 속에 넣고 와서구가九歌만 베끼고 돌려주었다. 그리고 향을 피우고 등불을 켜고 저녁에그 맛을 세밀하게 완미하였다. ! 인생은 꿈이니 좋은 꿈도 있고 나쁜 꿈도 있다. 하지만 깨어나면 조만간에 또다시 즐거움을 좋아하여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잊어버리는데, 사람의 마음이 본래 그러한 것이다.어떤 사람은 악몽을 만나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왜 그러한가.대체로 어진 사람은 꿈을 꾸지 않으니, 꿈조차 사람의 선악을 따르는 것인가.항심恒心이 있는 사람은 망상妄想을 하지 않고항심이 없는 사람은대부분 이치에 어긋나게 행동한다.잠꼬대 역시 정상적인 꿈과 배치되는 것이다.깨어나는 것에도 도가 있으니,배우지 않으면 깨어나기 어렵다. 물며 꿈은 흔적이 없으므로 먼저 마음에서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푸른 하늘에 항상 뜬구름이 있어서 하늘을 가리고 있는 것과 같으니, 그 구름을 쓸어내고 하늘을 본다면 어찌 상쾌하지 않겠는가. 구름이 항상 무심하게 굴에서 나와서 하늘을 가리는 것은 이 시끄러운 세상의 업장業障과 같아서,올 때에는 빠르게 오지만 갈 때는 아주 더디게 간다. 그러므로 한 구절을 베낀 것이다.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상심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어찌 크게 탄식하지 않으리오., 부질없는 인생이 꿈인 줄 알지만 깨어나기도 어렵고 또 이해하기도 어렵다.


청운은 게송 '성미가醒迷歌'를 좋아했다. 이런 노랫말을 담고 있다. 그의 삶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라 할 만하다.


미혹을 벗어난 사람은 담백함을 즐기니

초가집에 살며 베옷을 입어도 마음이 편하다


영예를 구하지 않으니 치욕이 가까이 오지 않고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분수대로 살면서 시속을 따르네


사물은 언제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면 만사에 만족하고

수행을 하면 자신의 복록을 만들게 되네


참고문헌: 김영욱,"청운 강진희의 생애와 서화 연구, 미술사 연구, 2017

 

             강진희'악부합영', 1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