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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부터 문화재청→국가유산청지난 60여년간 이어져 온 '문화재' 명칭과 분류 체계가 올해 5월 중순부터 바뀐다. 1946년 이후 제작된 미술 작품은 별도 제한 없이 해외에서 전시·매매가 가능해질 전망이며, 유럽에 소재한 우리 문화유산 보존·환수를 위한 거점이 프랑스에 마련된다. 문화재청은 이런 내용을 포함해 올해 추진할 주요 정책 계획을 22일 발표했다. 문화재청은 올해 '국가유산' 체계로의 첫발을 내디딜 예정이다. 국가유산은 '과거 유물'이나 '재화'라는 느낌이 강했던 문화재 용어 대신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국제 기준인 '유산'(遺産·heritage) 개념을 적용한 체계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이날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주요 정책 추진 계획 브리핑에서 국가유산에 대해 "국가가 책임지고 모든 유산을 관리·총괄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문화재청은 관련 법 체계·제도를 정비해 기존의 문화재를 '문화유산', '자연유산', '무형유산'으로 나누고, 내부 조직을 개편해 5월 17일 '국가유산청'을 출범할 예정이다. 각 유산의 특성에 맞는 보존·전승 활동도 지원한다. 전통 재료 수급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올해 9월 경북 봉화에 '국가유산수리재료센터'(가칭)을 개관하고 기와, 한지 등의 품질과 제작 공정을 평가하는 인증제를 시행한다. 천연기념물, 명승, 지질 유산을 관리하기 위한 '국립자연유산원' 설립도 추진한다. 무형유산 분야에서는 전통의 맥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전승 기반을 확대한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현재 국가무형문화재(추후 '국가무형유산'으로 변경) 보유자 174명 가운데 70세 이상은 127명으로, 이들의 평균 연령은 74.6세에 달한다. 이에 문화재청은 관련법을 개정해 보유자 아래 단계인 전승교육사 인정을 위한 조사 대상을 보유자가 추천한 이수자뿐 아니라 일반 전승자까지 포함되도록 범위를 넓힐 계획이다. 그간 미술계의 지적이 잇달았던 해외 반출 제도도 손본다. 일반동산문화재(추후 '일반동산문화유산'으로 변경)에 포함된 일부 미술 작품은 국외로 반출하거나 매매가 제한돼 국내외 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나왔다. 일반동산문화재는 제작한 지 50년 이상 지났으며 상태가 양호하고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 중 희소성이나 명확성, 특이성, 시대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사례다. 문화재청은 올해 안에 법 절차를 개정해 1946년 이후 제작된 미술 작품 등은 어떠한 제한 없이 해외로 내보내거나 전시·매매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개정 내용과 범위는 추후 확정될 예정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연구 용역 결과, 해방 이후 (미술) 작품 수가 많이 늘어난 것으로 파악된다. 작품 수, 미술 시장 형성, 전업 작가 등장 등을 고려해 기준점을 1946년으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올해 하반기에는 제작되거나 형성된 지 50년이 지나지 않은 문화유산을 보존·관리할 수 있도록 한 '예비문화유산' 제도도 새롭게 시행된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굴렁쇠, 국내 최초의 스마트폰 등이 대상이 될 수 있다. 문화재청은 오는 5월 공모전을 거쳐 예비문화유산을 선정할 계획이다. 문화재청은 올 한해 세계 곳곳의 K-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데도 힘 쏟을 계획이다. 외교 선물이나 기증, 매매, 불법 유출 등 다양한 이유로 한국 땅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는 문화유산은 올해 1월 1일 기준 총 24만6천304점으로 집계된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과 손잡고 올해 3∼9월에 미술관이 소장한 '칠보산도(七寶山圖)를 디지털 영상으로 공동 전시한다. 겸재 정선(1676∼1759)의 화첩을 영구대여 방식으로 반환해 주목받았던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 소장한 한국 사진 1천800여 점은 데이터베이스(DB)로 구축할 예정이다. 아울러 국외 소재 문화유산의 약 20%가 모여 있는 유럽에서 현지 조사, 보존·활용 논의를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프랑스 파리에 현지 사무소 등 거점을 마련할 계획이다. 최응천 청장은 "국가유산의 새로운 가치 창출과 국민 편익을 위한 제도·정책을 확장해 국민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최 청장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한 '반구천의 암각화'와 관련, 하류에 있는 사연댐의 수위 문제 등 보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돼야 할 문제"라면서 "(등재 심사를 위한) 실사단이 한국을 방문하기 전까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지자체와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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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3) <br> 청자상감매병편저 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던 이규진(편고재 주인) 부안 유천리는 강진과 더불어 청자 가마터들이 대규모로 몰려 있는 곳이다. 그렇게 운집해 있는 유천리 청자 가마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은 12호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곳은 일찍부터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1938년 노모리 켄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명종 지릉의 청자여지넝쿨무늬발과 같은 도편이 출토되어 유천리 청자 가마터 성격에 대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적지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조금 못 미처 좌측 외딴 민가로 들어가는 소로가 있는데 전에는 이곳 일대가 과수원이었고 12호는 이곳에 위치해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화여대 박물관은 유천리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많은 양의 명품 청자편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곳 12호와 인근의 가마터 출토품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12호 인근의 외딴 민가에서 건너다보면 논과 밭을 오른쪽으로 휘돌아 흐르는 둔덕이 보이는데 큰길에서 유천리 마을로 들어가는 마차길이 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건너편 끝자락에 좌측으로 흘러내린 야산이 보이는데 여기에 면한 비탈진 밭이 하나 있다. 청자상감매병편은 아주 오래 전 이곳에서 만난 것이다. 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던 노곤했던 날로 기억이 되는데 농부가 밭갈이를 하고 있었고 뒤집힌 흙더미 속에서 발견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러나 그때 당시나 지금이나 이 청자상감매병편은 의문점이 많아 아직도 혼란스러운 점이 없지 않아 있다. 청자상감매병편은 안쪽을 보면 물레자국이 선명하다. 거기다 기물 자체가 휘어져 있어 매병의 일부였음을 그리 어렵지 않게 추론해 볼 수 있다. 문제는 강진보다도 더 큰 기물들을 제작했다고 전하는 곳이 유천리 청자 가마터인데 이 청자상감매병편 또한 그런 추세에 힘입어 대형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 증거로는 완만하게 휘어져 돌아간 곡선율을 들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도편의 두께라고 할 수 있는데 무려 1.5Cm가 넘는 것이다. 말하자면 휘어진 곡선의 비율이나 도편이 두께로 보아 전후좌우가 잘려나갔다고는 하지만 크기가 결코 작지 않은 대형의 기물이었음을 짐작하기에는 조금도 부복함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청자가 대형이라고 해서 무조건 명품 반열에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청자상감매병편의 무늬를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흑백상감으로 전체를 빼꼭하게 채우고 있는 문양은 무엇을 나타내고자 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잘려나간 부분에 비해 남은 것이 너무도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백상감의 국화문과 연판문에다 알 수 없는 무늬는 물론 능화창에 역상감의 흔적도 보이고 있어 그야말로 완전했더라면 화려하기가 짝이 없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궁금증을 해결키 위해 유천리 청자 가마터 도록과 책자는 물론이거니와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의 도편들도 꼼꼼이 챙겨 보았지만 이처럼 복잡하면서도 화려한 문양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청자상감매병편은 특이하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문양을 지닌 명품의 매병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자상감매병편은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상자나 박스에 넣어두는 등 내 시야에서 벗어나 본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지금도 거실에 있는 진열장 안에 고이 모셔져 있어 수시로 꺼내 보고는 한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문양의 실체도 알 수 없는 도편에 대해 이처럼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일까. 그 것은 보기만 해도 황홀해 지는 문양의 모습이 저 봄 햇살이 눈부시게 쏱아져 내리던 노곤했던 날의 유천리 청자 가마터의 추억 속으로 나를 늘 인도하며 상상의 나래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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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의 삶 담긴 음식 문화는…조선의 '요리 비법'을 찾아서"임금의 복통과 설사가 심하여 약방에서 입진(入診·궁중에 들어가 왕을 진찰함)하고 황금탕을 지어 올렸다." (경종실록 1724년 8월 22일 기사) 1724년 조선의 제20대 임금인 경종(재위 1720∼1724)은 여러 날 동안 아팠다. 병환이 낫지 않아 수라를 드는 것도 힘들어했고, 여러 의원이 번갈아가며 진찰하기도 했다. 복통으로 시달리던 경종이 끝내 숨을 거두게 된 원인으로 지목된 건 생감과 게장이었다. 조선 후기부터 전해지는 한글 요리서 '음식방문이라'는 과실을 먹을 때 주의해야 할 점으로 "감과 배와 게를 함께 먹지 말라"는 내용이 실려 있기도 하다.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기에 널리 쓰인 '요리책'에는 어떤 내용이 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최근 펴낸 '조선 요리 비법: 장서각 소장 주식방문·음식방문이라·언문후생록 역주'는 한글 요리서 고전 3종의 가치에 주목한 책이다. 음식을 문화·인문학·역사학의 관점에서 연구해 온 '음식인문학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중심으로 각 분야 학자 10명이 참여해 장서각 소장 자료를 분석하고 해석했다. '주식방문'과 '음식방문이라', '언문후생록'은 모두 붓으로 필사한 자료다. 주 교수는 책 앞부분에 쓴 해제에서 이들 한글 요리서 3종의 특징과 구성, 다른 기관이 소장한 자료와 차이점 등을 분석한다. 요리법 항목이 몇 가지인지도 설명한다. 예를 들어 장서각이 소장한 '주식방문'에 음식 이름이나 요리법 재료 등이 적힌 항목은 총 114가지이며, 이 중에는 병과(餠菓·떡과 과자)류가 35가지로 가장 많다.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보관 중인 '음식방문이라' 내용을 살펴보면 요리법과 음식을 먹을 때 조심해야 할 일 등 110가지, 의료와 가옥 관련 내용 12가지가 담겨 있다. '언문후생록'은 조선 후기 음식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요리법은 상세하지 않지만, 음식 이름과 재료 명칭을 한자와 한글로 함께 써놓아 조선 후기 음식 이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게 주 교수의 설명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측은 "19세기 이후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요리서는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의 음식문화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음식 문화에 담긴 선조들의 재치와 민간 신앙도 눈여겨볼 만하다. 밤을 구울 때 타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 '그중 하나를 남이 모르게 손에 쥐어 감추라'라거나 '밤마다 눈썹 위에 세 번씩 문질러 구워라'는 부분은 웃음을 자아낸다. 책은 원문 이미지와 판독 내용을 함께 볼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한글로 필사한 각 단어의 뜻, 비슷한 어휘 등을 주석으로 달았고, '현대어역' 부분에서는 요리서의 각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준다. 주영하 교수는 "조선시대 요리책을 연구할 때 필요한 것은 '책의 문화사'라는 시선"이라며 "역주서가 국어학, 음식학, 생활사 연구에 이바지하리라 확신한다"고 밝혔다. 640쪽.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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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미술 전시공간도 뚫은 K-문화…보스턴미술관서 '한류특별전'(종합)미국의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보스턴미술관이 한류에 대한 특별전시회를 개최한다. 보스턴미술관은 다음 달 24일부터 7월28일까지 '한류! 코리안 웨이브'(Hallyu! The Korean Wave)란 이름의 전시를 진행한다고 17일(현지시간) 밝혔다.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함경아 작가 등 현대미술 작품도 전시되지만, 전시회의 뼈대는 K팝과 K드라마 등 한국 대중문화다. 관객들은 한국 패션디자이너의 의상과 영화 소품, 포스터 등 250점의 물품을 접하게 된다. 최근 미국에서 실험미술 등 한국 순수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한국 대중문화를 전면에 내세운 전시회가 미국 주요 미술관에서 개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870년에 설립된 보스턴미술관은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시카고 미술관과 함께 수준 높은 전시물을 소장한 미국의 대표적인 미술관으로 꼽힌다. 보스턴미술관은 지난 2022년 영국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이 기획한 한류 전시회의 전시품을 중심으로 자체 소장품인 달항아리와 불교 경전함 등을 전시할 계획이다. 특히 보스턴미술관은 전시와는 별개로 5월 초까지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특별 강좌도 준비했다. 한국이 6·25 이후 70년 만에 문화강국이 됐다는 역사적 흐름을 소개하는 '잿더미에서 문화강국으로'를 시작으로 K팝과 한국 영화, 한국 패션, 한국 순수미술 등 6개의 유료 강좌가 3월부터 5월까지 진행된다. 이와 함께 보스턴미술관은 보스턴을 근거로 활동하는 한국 아쟁연주자 김유나와 미국의 블루스 기타 연주자 로만 바튼-셔먼의 '한국음악과 델타블루스'라는 특별공연도 미술관 내에서 개최키로 했다. 전시 외에도 강좌와 공연 등을 통해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관람자의 이해를 제고하겠다는 것이다. 관람객 유치를 위해 1년에 여러 차례 열리는 특별전시에 각종 부대행사를 준비하는 미국 미술관의 일반적인 운영 방식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이례적으로 입체적인 기획이라는 것이 미술계의 평가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의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을 공동 기획한 강수정 국립현대미술관 시니어 큐레이터는 "한국 문화가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니면서도 자체적으로 문화적 가치들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서구가 한국 문화에 열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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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아트센터, 이자람 판소리 ‘노인과 바다’ 개최제주아트센터는 소리꾼 이자람이 헤밍웨이의 고전을 판소리로 재창작한 ‘노인과 바다’를 다음 달 23일 선보인다고 16일 밝혔다.‘내 이름 (예솔아)’의 꼬마 가수에서 ‘춘향가’ 최연소 완창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국가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이수자 이자람은 밴드 보컬, 뮤지컬과 연극 배우, 작창가로 활동 중인 만능 엔터테이너이다.국악계 작은 거인으로 불리는 그녀는 ‘사천가’ ‘억척가’ ‘이방인의 노래’ 등 희곡이나 근현대 소설을 판소리로 변주하며 판소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이번에 선보이는 판소리 ‘노인과 바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원작을 재해석해 이자람이 직접 대본을 쓰고 작창한 작품으로 평생 바다 위 외줄낚시로 살아온 노인 산티아고와 거대한 청새치와의 일생일대 사투를 부채와 북, 오롯이 그녀의 목소리만으로 객석을 푸른 바다 한복판으로 휘몰아 간다.고수 이준형의 추임새와 양손프로젝트의 박지혜가 연출, 여신동이 시노그래퍼로 참여해 무대 위 홀로 선 이자람을 더욱 빛나게 한다.관람료는 1층 2만원, 2층 1만5000원으로 초등학생 이상 관람 가능하며, 티켓은 오늘 오후 2시부터 제주아트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예매할 수 있다. 또한 격차 없는 문화 향유를 위해 29일 오후 6시까지 문화소외계층 무료 관람 신청도 선착순 전화·이메일 접수한다.강중열 제주아트센터 소장은 "헤밍웨이의 방대한 원작을 이자람의 상상력과 목소리만으로 채운 재기발랄한 이번 공연에서 드넓은 바다 위에 있는 것 같은 쾌감을 만끽하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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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광주진료소 의료진, 개관 준비하는 문빅토르미술관 방문고려인광주진료소를 찾아 무료진료에 참여한 의료진들이 오는 3월1일 개관 예정인 문빅토르미술관을 찾았다. 13일 고려인마을에 따르면, 이날 문빅토르미술관을 찾은 의료진은 고려인광주진료소 김종선 소장을 비롯한 전남대 의대 이찬영 교수, 조선대 의대 최지윤 교수, 전남대병원 문정선, 김춘심 간호사와 그들 가족 등 10여명으로 문빅토르 화가를 만나 미술관 운영 방향과 미래 계획 등을 청취했다. 이어 문 빅토르 화가가 그린 그림들을 꼼꼼히 살펴보며 그의 건강상태도 체크했다. 문 화가는 지난 2021년 카자흐스탄 현지에서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수술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자 광주고려인마을 초청으로 국내 입국, 고려인광주진료소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빛고을전남대병원에서 재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했다. 이때 고려인광주진료소 무료진료에 참여해 온 이찬영 교수를 비롯한 의료진이 수술을 집도해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에 문 화가는 선진 의료기술로 자신의 일상회복에 도움 준 의료진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건강을 회복한 문 화가는 조상의 땅 광주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설립, 남은 생을 작품 활동에 전념하며 그의 화풍을 후손에게 전하는 것이 꿈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고려인마을이 단독주택을 매입해 미술관을 설립하려 모금운동을 진행했으나, 자금력이 부족하자 고려인종합지원센터 2층에 작은 미술관을 마련하기로 의견을 모은 후 오는 3월 1일 개관식을 가질 예정이다. 이날 개관식에는 의료비와 미술관 건립 성금 등 광주 정착에 큰 도움을 준 고려인마을가족카페 전올가 대표 초상화를 비롯한 그의 미공개 작품 50여점이 최초 공개된다.해당 작품은 카자흐스탄에서의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한국에 정착하면서 화가가 챙겨온 작품들이다. 일부 작품은 전시를 위한 액자 제작 등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문 화가는 고려인 3세이자 카자흐스탄을 대표하는 미술계의 거장이다. 1951년 고려인 최초의 정착지인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바스토베 구역(옛 레닌기치)에서 태어나 1975년 고골 알마티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1977년부터 20년간 국립 고려극장 주임미술가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의 작품은 카자흐스탄 대통령궁과 카자흐스탄 국립미술관을 비롯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이집트, 일본, 러시아 등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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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촌, 설날 세시행사 ‘새해가 왔어용’ 오는 9일 시작한국민속촌이 2024년 새해를 맞아 ‘甲辰(갑진) 새해가 왔어용’ 세시행사를 2월 9일(금)부터 25일(일)까지 진행한다. 이번 행사에는 청룡을 주제로 하는 특별 전시체험과 정월대보름의 전통 풍습을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마련했다. 청룡의해 맞이 특별 전시체험 ‘청룡도 세화찍기’는 청룡이 그려진 목판에 세화를 찍어 소장하는 특별한 체험이다. 청룡도 세화찍기를 체험한 관람객에게는 신년 사주풀이 1회권을 무료로 제공한다. 세시풍속 용알뜨기(우물 속 용의 그림자 뜨기)를 변형한 ‘용알뽑기’도 진행한다. 용알뽑기는 꽝 없는 뽑기 체험으로, 설날행사 체험권부터 한국민속촌 공예품까지 푸짐한 경품을 준비했다. 청룡도 세화찍기와 용알뽑기 체험 가격은 3000원이다. 설날, 정월, 대보름의 아름다움과 전통적인 풍습을 담은 ‘일월, 감성맞이’ 전시도 열린다. 민속마을 4호 앞에서는 정월대보름에 진행되는 지신밟기, 쥐불놀이 등 쉽게 볼 수 있는 세시풍속 현장을 영상으로 표현해 전시한다. 관람객들은 영상을 통해 우리 전통 풍습을 실감할 수 있다. 울릉도 공터에서는 대형 연 포토존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연날리기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준비됐다. 관람객은 소원을 담은 연을 만들고 넓은 공터에서 하늘 높이 날릴 수 있다. 공터 옆 조롱박터널에는 연 모양의 소망패에 올해의 소원을 작성해 걸어둘 수 있다. 설날 대표행사 ‘정초고사’는 설날 당일인 2월 10일(토) 오전 10시 한국민속촌 정문에서 열린다. 정문에서 시작하는 고사와 떡 나눔 행사로, 흥겨운 전통공연과 고사를 구경하고 떡을 나누며 설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가신 신앙에 따라 터주가리와 조왕신이 배치된 민속마을 19호에서는 지신밟기 특별행사를 2월 11일(일) 오전 11시 30분에 진행한다. ‘새해가 왔어용’ 행사의 피날레 이벤트인 ‘달집태우기’는 2월 25일(일) 오후 4시 30분 민속마을 19호 앞 큰 밭에서 진행한다. 약 5m 크기의 달집이 활활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며 액운을 날려버리고 힘찬 새해를 보낼 수 있다. 이외에도 △장승혼례식 △볏가릿대 세우기 △흥선생과 일곱가지 죽공예품 전시(대나무 썰매 등)가 진행되며, 자세한 일정과 전시 장소는 한국민속촌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국민속촌은 30만평 대지 위에 조성된 조선 시대 마을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테마파크이자 사극 촬영의 메카다. 최근에는 과거의 전통을 단순 계승·보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즐기며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매 계절 새롭고 이색적인 축제를 선보이면서 여러 소셜 미디어 채널로 소통하고 있어 중장년층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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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정유 전쟁 조선 장군 갑옷·투구, 일본이 약탈"일본이 임진·정유 전쟁 때 조선 장군의 갑옷과 투구를 다수 약탈해 간 것으로 확인됐다.8일 한일문화연구소 소장인 김문길 부산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벗겨 간 조선 장군의 갑옷과 투구를 연구해 내전 때 방탄복으로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조선 장군이 입은 갑옷은 일본엔 없었다. 김 명예교수는 "갑옷을 두정철갑찰(頭釘鐵甲札·두정갑)이라고 하는데, 장군 전투복 안으로 철을 붙인 미늘(비늘)을 말한다. 고구려·백제·신라·고려를 거처 조선 장군이 입은 두정갑은 계수나무 껍질로 만든 것이어서 상당히 가벼워 왜장들이 탐이 나 장군이 죽으면 벗겨 갔다"고 밝혔다.또 "두정갑은 오사카성과 교토대학의 수십 벌과 함께 일본 어느 박물관에도 쉽게 볼 수 있다. 임진·정유 전쟁 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죽은 자들은 갑옷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두정갑 갑옷은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물다"고 덧붙였다.일본은 임진·정유 전쟁 당시 투구도 다수 소장 중이다. 조선시대 것은 안팎이 철제인 것이 많지만 일본에 산재한 투구는 고려시대 것이 많다.구마모토 혼묘지(本妙寺) 보물관에 있는 고려시대 투구의 내면엔 계수나무 껍질로 된 미늘이 달려 있다. 우리나라에는 한 점도 없다. 김 명예교수는 "구마모토 혼묘지 보물관엔 수많은 우리 문화재가 보관돼 있다. 그래서 보물관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면서 "구마모토 보물관을 만든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성에서 싸웠던 인물이다. 경북 영천·경주·울산 사람을 20만명이나 죽이고 1800여명의 귀와 코를 잘라간 우두머리로서 왜장들은 도요토미에게 바치기 위해 벤 머리(首級)를 통째로 가지고 갔다"고 전했다.수급과 함께 갑옷·투구도 훔쳐가 조선 병사의 귀·코 무덤에 같이 묻고 일부 갑옷과 투구는 오늘날 역사 사료관에 소장하고 있다. 약탈해 간 전투복을 당대에도 깊이 연구했지만 오늘날에도 전쟁사를 연구하는 사료로 삼고 있다.한편 김 명예교수는 '임진·정유재란'이란 용어는 일제강점기 일본 역사가들이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기 위해 왜곡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단순 란(亂)이 아니라 일본막부가 많은 문화재와 도공 등 문화인을 포로로 잡아가서 '문화 부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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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미 의회도서관 서울사진: 네개의 시선' 발간서울역사박물관은 19번째 학술총서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서울 사진: 네 개의 시선'을 발간했다고 12일 밝혔다. 이번 학술총서는 2020년부터 진행된 미국 내 서울학 자료 조사의 세 번째 결과물로, 미 의회도서관 판화·사진 분과가 소장한 조선 말기부터 1960년대까지의 사진 163점을 선보인다. 총서는 미국 외교관과 여행 저널리스트, 조선총독부, 미국 언론사가 각기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서울의 모습을 분류해 소개한다. 제1장 '조지 C. 포크 컬렉션'은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에 외교 무관으로 파견된 미 해군 장교 포크가 촬영한 조선 말기 서울의 사진을 조명한다.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전경과 숭례문과 성벽 바깥 민가 사진은 현존하는 숭례문 사진 중 가장 이른 사진들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제2장 '프랭크 G. 카펜터 컬렉션'은 미국의 여행 저널리스트 카펜터의 사진으로 구성된다. 20세기 전반 미국인이 조선을 바라보는 시선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다. 제3장 '무라카미 텐코 컬렉션'은 의회도서관에서 아직 등록하지 않은 미공개 사진으로 해방 직후 미국이 일본에서 입수한 조선총독부 문건의 일부다. 일제강점기 경성을 비롯한 전국의 '생활상태(生活狀態)', '경제사정(經濟事情)' 등에 대한 방대한 양의 사진으로 다양한 지역과 분야를 망라하고 있어 조선총독부가 식민 지배를 위해 조사했던 다양한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연구 가치가 큰 사진이다. 마지막 제4장 '뉴욕 월드 텔레그램&선 컬렉션'에선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 초반 서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책은 서울책방(store.seoul.go.kr)과 서울역사박물관 내 기념품점에서 구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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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어지는 광주고려인마을 문빅토르미술관 후원 , 이부형·정춘단씨 부부 기부금 전달광주 고려인마을이 추진하고 있는 고려인 미술거장 문빅토르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고려인마을을 품고 있는 광주 광산구 월곡2동 선주민들의 성금 기탁이 이어지고 있다. 7일 고려인마을에 따르면, 광주고려인마을을 찾는 관광객을 맞아 해설을 담당하고 있는 이부형·정춘단씨가 5일 고려인마을에 정착한 문빅토르 화백을 찾아 소중한 성금 50만원을 전달했다. 이는 지난달 18일 고려인마을 관광해설사 안연수·박명희씨 부부에 이어 올해 두 번째다. 이부형씨는 " 성금 참여자들이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모금운동에 동참했다” 며 "고려인의 역사와 문화를 선도할 미술거장 문빅토르 화백이 마을에 정착해 살아가는 그 자체가 광주시와 광산구, 월곡2동과 고려인마을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기에 더 많은 분들이 모금운동에 동참하길 바란다” 고 전했다. 고려인마을은 지난해 6월 마을 숙원사업으로 미술관 건립계획을 세우고 건물매입비 4억5천만원을 위한 모금운동을 진행해 왔다.하지만 현재까지 모금된 성금은 2,700만 원에 불과하자 고려인마을은 지원센터 2층을 리모델링해 작은 전시실과 화실을 꾸민 후 문 화백과 함께하는 ‘문빅토르미술관’ 이라 칭하고 오는 3월 1일 지역사회 인사와 고려인마을 주민을 초청해 개관식을 가질 예정이다. 현재까지 모금에 동참한 마음이 따뜻한 기부자는 고려인마을가족카페 전올가 1000만원, 신협 광주두손모아봉사단 800만원, 고려인마을 김로만 외 203명 2,318,539원,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 100만원, 남광농원 최동혁 100만원, 안연수·박명희 부부 50만원, (주)동행투어 50만원, 고려인마을 이믿음 50만원, 고려인마을 최지은 50만원, 이부형·정춘단 50만원, 새날학교 교직원 33만원, (주)한별 30만원, 삼송세무법인 최재건 30만원, 박종연 세무사 30만원, 고려인마을 김경림 20만원, 고려인마을 장석진 20만원, 고려인마을해설사 20만원, 고려인마을 다닐첸코 마리아 10만원, 고려인마을 임주연 10만원, 고려인마을 신순숙 10만원, 고려인마을 김베라 10만원, 김동민 1,2000원 등으로 모금액은 총 27,060,539원이다.문빅토르 화백은 "기부자의 마음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미술관이 잘 운영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고려인마을에 정착할 수 있도록 정성어린 마음을 모아주신 고려인마을과 기부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고 말했다. 한편, 문빅토르 화백은 고려인 3세이자 카자흐스탄을 대표하는 미술계의 거장이다.1951년 고려인 최초의 정착지인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바스토베 구역(옛 레닌기치)에서 태어나 1975년 알마티 고골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1977년부터 20년간 국립 고려극장 주임미술가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의 작품은 카자흐스탄 대통령궁과 카자흐스탄 국립미술관을 비롯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이집트, 일본, 러시아 등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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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미공개 유묵…서울옥션 27일 경매지난해 12월 안중근의사의 유묵이 19억5000만원에 낙찰되며 화제를 모은 가운데 또다른 유묵을 일본인 소장가에게서 국내로 환수할 기회가 생겼다.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쓴 것으로 알려진 미공개 유묵 ‘인심조석변산색고금동(人心朝夕變山色古今同·33.8×137.2㎝)’이 6억~12억원에 경매에 나온다. 안중근 의사의 미공개 유묵 '인심조석변산색고금동'(人心朝夕變山色古今同)'은 '사람의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변하지만 산색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는 의미로, 안 의사의 나라를 위한 변함없는 마음을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1910년 3월 뤼순 감옥에서 썼다는 문구가 들어있다. 경매 추정가는 6억∼12억원이다. 앞서 안 의사의 유묵 '용호지웅세기작인묘지태'는 지난해 12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19억5천만원에 낙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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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청년작가들이 시도했던 전위예술…'AG그룹' 재조명1969년 미술비평가 이일(1932∼1997) 등 비평가와 미술가들이 주축이 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가 결성됐다. 작가로는 김구림, 박석원, 서승원, 심문섭, 이승조, 최명영, 하종현 등 12명이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전위 예술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전 빈곤의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모색 창조해 한국 미술 문화에 기여한다'고 선언하며 출범한 AG는 1975년 해체될 때까지 이러한 모토에 맞춰 4차례 전시를 열었고 'AG'라는 미술 전문 출판물도 4차례 발간했다. 1974년에는 '서울 비엔날레'를 기획하기도 했다. 이일의 큰딸인 이유진씨는 지난해 스페이스21 갤러리를 열면서 개관전으로 70년대 아방가르드 운동의 중요성과 이일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전시를 열었다. 전시에는 김구림, 박석원, 서승원, 심문섭, 이강소, 이승조, 이승택, 최명영, 하종현이 참여했다. 신간 '비평가 이일과 1970년대 AG그룹'은 스페이스21 개관전으로 열렸던 전시의 작품집이다. 지난해 전시 사진과 함께 1970년대 나온 AG 출간물과 도록, 전시 포스터, 작가들이 소장한 당시 전시 등의 아카이브 자료들을 실었다. 이일이 다양한 매체에 발표한 글과 육필 원고, 사진 기록, AG 그룹 작가들의 인터뷰, 정연심 홍익대 교수가 AG 그룹의 활동을 정리하고 예술사적 의의를 짚은 'AG 그룹의 실험미술 전시' 글도 함께 수록됐다. 안그라픽스. 246쪽(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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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촌, 설날 세시행사 ‘새해가 왔어용’ 9일부터한국민속촌이 2024년 새해를 맞아 ‘甲辰(갑진) 새해가 왔어용’ 세시행사를 9일부터 25일까지 진행한다고 6일 발표했다. 이번 행사에는 청룡을 주제로 하는 특별 전시체험과 정월대보름의 전통 풍습을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마련했다.청룡의해 맞이 특별 전시체험 ‘청룡도 세화찍기’는 청룡이 그려진 목판에 세화를 찍어 소장하는 특별한 체험이다. 청룡도 세화찍기를 체험한 관람객에게는 신년 사주풀이 1회권을 무료로 제공한다. 세시풍속 용알뜨기(우물 속 용의 그림자 뜨기)를 변형한 ‘용알뽑기’도 진행한다. 용알뽑기는 꽝 없는 뽑기 체험으로, 설날행사 체험권부터 한국민속촌 공예품까지 푸짐한 경품을 준비했다. 청룡도 세화찍기와 용알뽑기 체험 가격은 3000원이다.설날, 정월, 대보름의 아름다움과 전통적인 풍습을 담은 ‘일월, 감성맞이’ 전시도 열린다. 민속마을 4호 앞에서는 정월대보름에 진행되는 지신밟기, 쥐불놀이 등 쉽게 볼 수 있는 세시풍속 현장을 영상으로 표현해 전시한다. 관람객들은 영상을 통해 우리 전통 풍습을 실감할 수 있다.울릉도 공터에서는 대형 연 포토존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연날리기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준비됐다. 관람객은 소원을 담은 연을 만들고 넓은 공터에서 하늘 높이 날릴 수 있다. 공터 옆 조롱박터널에는 연 모양의 소망패에 올해의 소원을 작성해 걸어둘 수 있다.설날 대표행사 ‘정초고사’는 설날 당일인 2월 10일(토) 오전 10시 한국민속촌 정문에서 열린다. 정문에서 시작하는 고사와 떡 나눔 행사로, 흥겨운 전통공연과 고사를 구경하고 떡을 나누며 설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가신 신앙에 따라 터주가리와 조왕신이 배치된 민속마을 19호에서는 지신밟기 특별행사를 2월 11일(일) 오전 11시 30분에 진행한다. ‘새해가 왔어용’ 행사의 피날레 이벤트인 ‘달집태우기’는 2월 25일(일) 오후 4시 30분 민속마을 19호 앞 큰 밭에서 진행한다. 약 5m 크기의 달집이 활활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며 액운을 날려버리고 힘찬 새해를 보낼 수 있다.이외에도 △장승혼례식 △볏가릿대 세우기 △흥선생과 일곱가지 죽공예품 전시(대나무 썰매 등)가 진행되며, 자세한 일정과 전시 장소는 한국민속촌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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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씨알사상연구소 박제순의 과잉된 ‘안창호 숭배’일찍이 흥사단과 좌파 인물들에 의해 윤치호에 가한 프레임은 ‘친일파’로 금기와 제한을 강요당했다. "친일파는 어떤 것도 허용될 수 없다”거나 "애국가 작사자도 될 수 없다.”는 등이 그렇다. 이는 지나칠 대로 지나친 상태이다. 이 과잉의 진영논리에 가담한 이가 두 번째 비판 대상인 박재순이란 인물이다. ‘씨알사상연구소’ 소장이란 직함을 가진자로 유튜브 등을 통해 안창호설을 유포하고 있다. 이번 글 ‘도산안창호는 어떻게 애국가를 지었는가’의 필자이다.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도산안창호포럼 2021년 09월 30일 발표한 결과물로 도산안창호포럼 제3집 단행본 ‘애국가 작사와 도산안창호’ 두 번째 게재 글이다. 이 글의 논지는 애국가를 안창호의 철학과 사상에 대입하면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결론이다. 말로는 문헌자료와 증언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극복하기 위하여 현대문헌비평학의 방법으로 작사자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고는 하였으나 가사 4절의 주관적 해설로 결론을 내린 정도의 글이다. 논증 없이 억지 주장과 왜곡으로 읽기가 힘들 정도의 동어반복 구문이다. 하여튼 문면상에서는 나름대로 연구를 하였다고 하였으니 따라가 보기로 한다. 첫 문장은 이렇다. #1 "나는 도산 안창호의 정신과 철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도산이 애국가를 지었다는 확신을 얻고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24쪽) 사료 비판과 교차 검증, 그리고 선행연구와의 대비라는 기본 과정이 아니라 특정 인물의 정신과 철학에서 논쟁적 사안의 결론을 찾고자 한다니 자폐적 연구임을 자인한 것이다. ‘확신’은 연구 과정의 개인 감정이지 결과는 아니다. 연구의 결론은 확신 단계 그 이상의 사실 입증에 의한 진실 추구여야 한다. 이런 ‘확신’은 대개 확증편향일 수 있고, 어쩌면 흥사단의 주문 생산 아니면 진영논리에 의해 꿰어맞춘 글이기 십상이다. 다음과 같은 진단 자체도 모순이다. 윤치호 작사 사실은 간명하고 정연한데 반해, 안찬호설은 혼란스럽고 뒤얽힌 것인 데도 이를 뭉뚱그려 말했기 때문이다. 윤치호 작사 사실은 ‘찬미가’와 ‘자필 가사지’의 존재, 일제 감찰 기록과 각종 신문잡지의 기록, 그리고 가족과 동시대 지인들의 증언이 축차적이고 상호보완적이어서 뒤얽히지도 않고 혼란스럽지도 않다. 그래서 이런 문제 제기는 잘못된 것이다. #2 "안창호와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설에 관한 혼란스럽고 뒤얽힌 증언들과 문헌자료들을 바로 이해하고 극복해야 한다. 증언들은 안창호 작사설에 유리하고 문헌자료들은 윤치호 작서설에 유리하게 보인다. 문헌자료들을 중시하는 역사학자들과 일반 국민들의 관점에서 보면 윤치호 작서설이 유리하게 보이기도 했다. 이런 문헌자료들과 증언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대문헌 비평학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거듭 밝히지만 안창호설은 내세울 증거 자체가 없음은 물론, 증언 정도도 상호 모순 관계에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단적인 예로 가장 중요한 흥사단 역사 서술에서나 흥사단 노래 자료류에서 ‘애국가 안창호 작사’라는 기록은 찾을 수 없을뿐더러 해방 전까지의 많은 행사 기록에서 현 애국가 보다 ‘무궁화노래’가 주로 불렸다는 사실이 입증한다. 그런데 안창호설에서는 일종의 패턴이 확인된다. 그것은 작사설이 축적되는 과정에 순흥안씨(純興安氏)가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는 안익태→ 안춘근→ 안흥권→ 안민석→ 안용환에 이르는 흐름에서 가짜 사료 발표, 개작 주장, 합작설 생산, 그리고 조작 유도 등이 자행되어 왔다는 점이다. 또한 가지는 지인들의 증언과 주장에 번복과 유도성 증언을 생산했다는 사실이다. 주요한과 구익균 같은 이의 사례들이 그렇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상과 같은 현상이 주로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작사자 조사 이후 자행되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윤치호 작사 사실과 관련해서는 자연스런 자료 발굴 등으로 위와 같은 사례는 없다. 굳이 윤치호의 경우를 말한다면, 직접 기록 외에 1910년대부터 1940년대 말까지의 일제 탄압 기록과 국내외 신문 잡지 기사와 일본 유학생 자료, 특히 가족과 지인들의 증언이 동일방향을 갖는다. 특히 주목하는 것은 가족들의 주장이다. 사실이라면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모를리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1952년 미국에서 발행된 한국 주변 국가의 애국가(국가)를 수록한 E. R Griffith 편저 ‘National Anthems’에 윤치호 2녀 보희씨가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사실을 상술한 예와 ‘자필 가사지’ 등의 증거를 제시한 윤치호의 서랑(壻郞) 정광현 교수 같은 사례를 말한다. 이에 비해 안창호의 경우는 딸과 손주에 의해 2000년대 들어 떠밀려서 하는 듯한 방송 인터뷰가 있을 정도이다.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에 수록된 증언들에서도 같은 현상이다. 윤치호 작사 사실에 대한 부분에 비교하면 안창호 설의 증언은 극히 소략한 정도이다. 그것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도산 안창호’ 관련 부분에 대한 이광수 부인 허영숙의 증언도 윤치호 가족의 주장과 대치(代置)되에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3 "나는 현대문헌비평학의 관점에서 윤치호 작사설의 증언들과 문헌자료들을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은 근거가 없음을 확인하고 윤치호는 애국가 작사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적어도 이 글에서 현대문헌비평학의 관점이니 하지만 박재순이 내린 결론은 "작사자는 윤치호가 아닌 안창호”라는 한 마디다. 그런데 여기에는 큰 함의가 있다. 작사자를 확정하는 것은 증거와 증언의 합리적 분석에 의해서인데, 이 글은 굳이 윤치호의 성향을 앞에 깔고 안창호의 사상(?)을 내세우는 방식이다. 이는 사상 검증의 사감(私感)으로 결론을 내리고 합리적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다름없다. 답하기 바란다. 합리적으로 검토한 윤치호와 안창호의 관련 ‘문헌자료’와 ‘증언’은 어떤 것인가? 이 물음에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윤치호의 문헌자료와 증언뿐일 것이나 이마저도 제시하지 않았다. 이런 글은 ‘검토’ 수준도 미치지 못하는 개인적인 소감(所感) 정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윤치호 작사 사실은 이미 필자에 의해 문헌과 증언으로 결론을 내린 상태임으로 감당할 수 없어 거론하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이런 상황인데 글을 어떻게 끌고 갈까? 당연히 기존 안창호설 주장자들의 기본 레파토리를 내세우고 있다. 바로 -이승만, 친일파 사학자, 국사편찬위원회가 안창호에게서 애국가 작사자 지위를 빼앗았다-라는 대목에서 직감할 수 있다. #4 "나는 그 당시의 조사과정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이승만과 친일파 지식인 이병도 백낙준 서정주 윤치영 등이 국사편찬위원회를 앞세워 안창호에게서 애국가 작사자 지위를 빼앗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학의 대가 최남선, 서지학의 권위자 황의돈, 안창호와 함께 상해에서 일했던 주요한 등이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했으나 이승만의 지침에 따라 이병도와 국사편찬위원회가 백낙준 서정주 등과 함께 안창호 작사설을 페기하는데 주력했다. 본래 문교부는 안창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미국대사관에 통보하려 했다.”(29쪽) ‘면밀한 검토’ 대상인 증거나 증언, 그리고 교차 검증 등의 과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만의 주장을 과시하고 있다. 이승만과 친일파들이 국사편찬위원회를 앞세워 안창호의 작사자 지위를 ‘빼앗았다’ 또는 ‘폐기’하였다고 왜곡한 것이다. 이 말에는 어느 시점 이전, 즉 1955년 4월 13일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자조사위원회’ 구성 이전까지는 안창호가 작사자였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박재순이 이를 사실로 믿었거나 누군가에게 믿게 하려는 술수라고 본다. 전자든 후자든 문제인데, 후자인 듯하다. 왜냐하면 마지막 문장에서 문교부가 미대사관에 안창호가 작사자라고 통보하려 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배경을 상술하여 진의 파악해 보기로 한다. 1955년 4월초 공보처는 미국대사관으로부터 "귀국의 국가 작사자를 국내 백과사전 편집부에서 요청해 온 바 이의 필요상 문의합니다”라는 전문을 받는다. 이를 이첩 받은 문교부는 안창호 작사 안익태 작곡으로 통보할 것을 준비하였다. 이 상황은 정부 기관지 서울신문 4월 4일자 ‘우리나라의 애국가 美 백과사전에 삽입’이라는 제하에 보도를 하였다. "주한 미대사관에서는 우리나라 애국가를 美 백과사전에 삽입하여 세계에 널리 소개하고자 2일 문교부 당국에 애국가 연혁을 밝혀 회보하여 줄 것을 요청하여 왔다. 그런데 문교부에서는 도산안창호 선생이 애국가를 작사한 연월일과 방금 귀국 중에 있는 안익태씨가 당시에 작곡한 사실 등을 회보할 것이라 한다.” 이 기사가 애국가 작사자 논란의 발화점이 된다. 이 기사는 ‘~그런데 문교부에서는~’이란 주저함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도산안창호 선생이 애국가를 작사한 연월일’이라고 하였지만 애국가 역사에서 윤치호의 ‘자필 가사지 1907년작’이란 기년(紀年) 적시 외에 월일을 내 세울만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팩트 체크를 하지 못한 명백한 오보이다. 그렇다면 이 문교부의 실책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이 시기 근거로 삼을 만한 공식적인 정부 기록은 없다. 다만 두 가지 사적(私的) 기록이 있을 뿐인데, 하나는 1947년 5월 발행된 이광수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 애국가 관련 기록이고, 또 하나는 동아일보 1948년 10월 6~8일자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의‘愛國歌考’이다. 이 기사를 통해 문교부의 오류가 두 자료에서 편의적으로 선택된 결과임을 알 수가 있다. ‘애국가고’를 통해 사안을 확인해 본다. 박은용의 글 첫 회에서는 ‘도산안창호’의 애국가 관련 기록을 전제했다. ‘도산안창호’의 내용 일부이다. "원래 이 노래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져서 국가를 대신하게 됨에 도산은 그것을 자기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란 기록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윤치호 작사 증거인 ‘1907年 尹致昊作 자필 가사지’와 서정주의 이승만 전언(傳言) ‘기자협회보’ 기사, 그리고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 등을 제시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故 윤치호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만인이 애창하는 준엄한 애국가라는 점에서 더욱 그런 것이다.” 이렇게 1955년 이전에 작사자 문제를 거론한 기록은 이 두 가지 정도이다. 이 기사 7년이 지난 뒤에 ‘~그런데 문교부에서는~’이라며 안창호설을 대두 시킨 것이다. 이렇게 보는 데는 1948년 9월 제헌국회에서 애국가에 대해 논의를 할 때도 작사자 문제는 없었다는 사실에서 이다. 그러므로 문교부가 미국 대사관에 통보하려한 내용에는 안창호가 언제, 어떤 배경으로 작사를 했다는 등의 내용 적시가 아니라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의 애국가 언급 정도일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에서 박재순의 #4에서 안창호의 작사자 지위를 빼앗았다는 주장은 오판을 넘어 왜곡이 된다. 이런 결과는 다음과 같은 친일 프레임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지금이나 그때나 ‘친일’은 용납될 수 없는 사상 문제로 이를 거론하는 순간 확증편항적 결과가 나오게 된다. 국사편찬위원회를 앞세워 작사자 지위를 빼앗은 "친일파 지식인 이병도 백낙준 서정주 윤치영”을 나열하고, 이어 "국학의 대가 최남선 서지학자 황의돈 안창호와 함께 상해에서 일했던 주요한 등이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최남선을 ‘국학의 대가’라고 추켜세웠고, 흥사단 단우 주요한을 안창호 작사 주장자라고 하였다. 친일파로 치자면 누구 못지 않은 최남선을 예우한 것도 별나지만 증언을 번복한 주요한까지 포함하여 안창호 작사 주장자라고 제시한 것은 의외이다. 사실 최남선은 안창호설을 지지하지 않았다. 단지 윤치호 측이 제출한 매우 흐리게 현상된 ‘자필 가사지’ 사진을 접하고 문제를 제기하며 "1907 윤치호 작이 진(眞)이라면 윤씨작이라 하여도 무방(無妨)할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주요한은 1955년 4월19일자 경향신문 기고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에서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 주장은 하나의 신화”라고 못박았다가 1963년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에서 이를 번복한 바가 있다. 황의돈(黃義敦)은 윤치호 교장 시기 대성학교 교사로‘친필 가사지’ 원본이 제출되자 침을 묻혀 먹물이 묻어나자 오래 되지 않은 것이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1945년에 쓴 것임을 알고 수긍한 인물이다. 1년 동안 3차에 걸친 조사위원회 발 기사를 주목하면 이들은 모두 최종적으로 윤치호 작사를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인데 이들을 친일파 대(對) 안창호설 주장자로 나눠 거론한 방식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조사 과정 초기에 관심을 끌었던 안창호설은 2차 회의 부터는 거론되지 않았고,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 3차 최종회의 결과는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이다”였다. 다만 이를 확정 발표하는 것에 대해 거수 표결 결과 2인이 "만일의 경우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고 타 작사자가 출현하는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가정”하여 윤치호로 발표하는 것을 유보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를 문교부에 보고하였다. 약 30여차에 이르는 당시 보도를 순차화하고 맥락화하면 오류나 개인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중반부터의 보도 경향은 윤치호에 대한 증거자료가 국내외에서 답지하여 이를 다룬 기사가 주였고, ‘자필 가사지’에 대한 필적 감정까지 과학수사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함에서 친일파 운운하여 ‘지위를 빼앗았다’거나 ‘폐기’하였다는 주장은 왜곡인 것이다. #5 "-도산은 애국가를 어떻게 지었나?-윤치호가 지은 무궁화가가 애국가로서 널리 불리워졌다. 무궁화가는 황실찬미가였음으로 민을 새롭게 일깨우는 신민회의 교육운동에 적합하지 않았다. 안창호는 무궁화가를 대체하는 새로운 애국가를 지어야 했다. 안창호는 무궁화가의 후렴을 그대로 가져왔을 뿐 아니라 무궁화가 1-4절과 글자 수가 일치하는 애국가 1-4절을 지었다. 안창호와 신민회가 윤치호와 독립협회를 계승하듯이 애국가는 무궁화가를 계승하였다.” ‘무궁화가’를 윤치호 작으로 인정한 것은 다행이다. 사실 필자가 ‘독립신문’ 영문판에서 서재필이 "계관시인 유치호가 지었다”는 기록을 찾아 발표하기 전까지는 필자 외에는 이를 윤치호 작사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 기껏 찾아 정위 시켜 놓으니 이제는 이를 윤치호에 맥락화 하지 않고 엉뚱하게 안창호에 연결시키는 이들이 있는데 신용하이며 박재순이다. 사실을 맥락화 하지 못하고 안창호 작으로 변신시키는 일을 하는 이들로 안창호가 신민회에 적합하게 대체하였다는 주장이다. 그 실장이 지금 자행 되고 있는 것이다. 하여튼 박재순의 이 대목은 안창호는 윤치호와 황실찬미가인 ‘무궁화가’가 없었다면 애국가를 지을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은 이유이고 과정이라고 보는 것인데,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안창호와 신민회가 윤치호와 독립협회를 계승하였듯이 애국가는 ‘무궁화가’를 계승하였다.”고 했다. 이 논리에 -윤치호는 애국가를 어떻게 지었나?-라는 물음을 윤치호로 대입한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작사 과정과 동기 등이 맥락적임을 알 수 있다. 윤치호는 1897년 8월 대조선개국 505주년을 기념하여 ‘찬미가 제10장’(‘무궁화가’)을 지었고, 1897년 10월 대한제국 선포를 기념하여 ‘찬미가 제1장’을 지었고, 1907년 한영서원 개교를 기념하여 ‘찬미가 제14장’을 작사하였다. 이와 함께 번역 찬송가 12편을 포함하여 1908년 재판 ‘찬미가’를 발간하여 염가(廉價) 보급함으로서 제14장 애국가는 한영서원은 물론 호수돈여학교 같은 인근의 기독교계 학교로부터 널리 확산이 되었다. 이상을 이해한다면 더 이상의 논란을 벌일 이유가 없다. 이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고 진영 논리에 함몰되어 오류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도 매우 기묘한 논리를 전개하였는데, 유길준과 ‘독립경절회창가’를 끌어들였다. 임중빈의 안창호 전기 기록과 졸저 ‘애국가 작사자 연구’에서 착안한 듯한데, 안창호가 1907년 귀국 중 일본에서 만난 유길준에게 애국가의 작사를 요청하였다는 기록을 과도하게 해석한 결과이다. 박재순은 임중빈의 기록을 수용하여 자기식으로 재편하였다. 먼저 임중빈의 기록을 인용하고 박재순의 기술을 대비하여 본다. "도산은 유길준을 만나 자리에서 간청해 보았다. -우리나라에 국기는 있어도 아직 국가가 없으니, 선생님께서 지어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책은 좀 썼어도 노래를 지을 재능이 없소. 끝내 사양하였다.” 전후 맥락에서 안창호의 작사 요청이 담고 있는 진의(眞意)나 결과는 이렇다. 즉, 안창호는 귀국하며 미국처럼 국기와 애국가의 효용성을 국내 교육현장에서 실현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유길준 등을 만나고 귀국해 보니 관립기관과 기독교계에서는 이미 애국가를 부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애국가 작사가 아니라 그 보급에 힘을 쓰게 되었는 사실이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때문에 임중빈도 "작사자는 윤치호이나 널리 보급한 이는 안창호이다”라고 단언한 소이(所以)이다. 그런데 이를 박재순은 오독을 하였다. 다음, 유길준의 응답에 대한 문제다. 1895년에 ‘서유견문’ 집술과 ‘조선문전’을 저술했으니 책은 썼다고 한 말은 사실이다. 이어 노래를 지을 재능이 없어 거부했다고 했으니, 이 또한 사실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그래서 박재순은 이 거부 사유를 빼버렸다. 바로 유길준이 12년 전에 ‘독립경절회창가’를 짖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여지를 숨기기 위해서이다. 박재순이 끌어 온 ‘독립경절회창가’는 1895년 5월 8일 청일전쟁의 승리로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 결과에 의해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탄생하였다. ‘왕조실록’과 ‘속음청사’ 6월 14일자에는 간단하게 기록되었으나 18일자 일본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에는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었고, 이 창가도 전 8절 가사를 수록하고 작사자를 유길준이라고 하였다. 이 노래를 박재순은 어떻게 활용하였는지를 보기로 한다. 왜곡을 하였다. "안창호가 도쿄에서 유길준을 만나 애국가를 지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유길준은 애국가 짓는 것을 사양했지만 독립경절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을 것이다.”(36쪽) ‘독립경절회창가’를 안창호와 연결한 것은 대단한 상상력 발휘 결과이다. 윤치호의 허다한 문헌 증거와 증언 들을 무시하고 사실 여부가 입증되지 않는 한 줄의 문장을 단서로 안창호 작사로 전복(顚覆)시키려는 야심을 담았으니 가능하다. 바로 안창호가 유길준의 ‘독립경절회창가’에서 영향을 받아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한 것이다. 연구 자세의 엄정성보다는 진영논리에 함몰된 만용이다. 이렇게 막 나가는 형편이다. #6 "–유길준의 독립경절가, 흥사단-‘독립경절가와 애국가를 비교해보고 안창호와 유길준의 특별한 관계를 고려하면 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 문헌적 증거라고 생각한다. 1895년 조선정부의 독립선고식에서 부른 유길준의 독립경절가는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하는데 큰 자극과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경절가는 황재와 조선국가를 찬양하는 노래이지만 6~8절은 현행 애국가의 내용과 사상이 일치한다.” 일본에서 만나 작사를 요청한 사실과 ‘흥사단’이란 단체명을 벤치마킹한 것을 ‘특별한 관계’라고 한듯하다. 그런데 유길준이 1914년에 사망하였으니 안창호와의 교분은 특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윤치호와 유길준은 부친 윤응렬로부터는 물론이고 1881년 일본 유학 동기로서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1897~1898)운영과 1910년까지 많은 계몽 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함께한 사이이다. 더욱이 독립경절 원유회를 함께 주관한 관계는 주목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특별한 관계’로 윤치호를 꼽을 수는 없는가? 그리하여 같은 논리로 유길준의 독립경절회창가는 윤치호가 ‘찬미가 14장’을 작사하는데 자극과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불가능한가? 그러나 안창호이든 윤치호이든 이런 가설은 성립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윤치호는 이미 유길준에 못지 않은 동서양 문물을 체험하여 국가적 기념일에 기념가를 지어 축하하는 풍조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저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창호는 1907년 이전에 저술은 물론 노래를 지은 바가 없는데다 전통 율조의 가사체는 인식에 있었어도 후렴이 있는 서양식 시가는 인식이 부족했을 것이다. 첫 노래 ‘거국가’가 그 증거이다. 그래서 박재순은 독립경절회창가‘의 배경을 이해 못하고 현 애국가에 연결시켰다. 거기다 "애국가의 내용과 사상이 일치”한다고 이해한 6~8절만을 논거로 삼았다. 그런데 이 대목은 유길준만의 것이 아니다. 소위 상호텍스트성의 관계일 뿐이다. "6 장백산 높다해도 비교해 보라, 우리국민의 기염을, 도리어 낮구나. 저 산도 7 동해물 깊다해도, 비교해 보라, 우리국민의 진심을, 도리어 앝구나, 저 물도 8 이 기염, 이 진심, 두 개를 합치면 강한 힘, 저 힘을 가지고 우리 임금을 지키세.”(37쪽) 박재순은 이 3절의 용어, 내용, 정신이 유길준의 것으로 현 애국가 1~3절과 일치한다며 이를 안창호가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다. 사실 8절 전체를 보면 내용과 정신은 애국가와 연결 시킬 수가 없는 내용이다. 행사 자체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중국으로부터 빼앗았음을 중국과 조선에 경고하는 행사이고, 이에 따른 기념가이기 때문이다. 이를 간과한 박재순은 애국가 가사를 모독한 것이기도 하다. 나머지 ‘용어’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자료가 지상에 공개되자 노동은 교수 같은 윤치호 작사 부정론자들은 윤치호가 이를 표절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때도 필자는 같은 논리로 반박한 바 있는데, 즉 전통 시가작법에 용사(用事)가 있다. 한시를 지을 때 전고(典故)나 사실을 인용하는 시작법으로 경서(經書)나 사서(史書) 또는 여러 사람의 시문에서 특징적인 관념이나 사적(事迹)을 몇 개의 어휘에 집약시켜 시의(詩意)를 배가시키는 방법이다. 이는 시론에서는 상호텍스트성으로, 민요론에서는 공식어구(formula)로 말하기도 한다. 실례를 들기로 한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시계열상으로 살펴야 한다. ① ‘자차통감’과 ‘통감절요’의 서약문 "황하의 강물이 말라서 띠같이 가늘어지도록, 태산이 닳아서 숫돌같이/ 작아지도록, 봉해주 신 나라 영원하소서” ② 남이장군(南怡將軍1443년~1468)의 ‘북정가(北征歌)’ "백두산 높은 봉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라” ③ 유길준(1895)의 ‘독립기념경절회창가’ "장백산 높다해도 비교해 보라, 우리국민의 기염을, 도리어 낮구나/ 장백산 높다해도 비교해 보라, 우리국민의 기염을, 도리어 낮구나. ④ 윤치호(1907) ‘찬미가 14장(현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유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상을 통해 박재순이 말한 ‘용어’와 그 표현의 문제는 ‘독립경절회창가’가 기준이 아니라 더 이른 시기, 더 많은 작품들이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함에서 유길준과 ‘독립경절회창가’가 없더라도 이런 용어와 표현은 가능한 것이고, 애국가는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 된다. 작사자를 윤치호로 보든 안창호로 보든, 이런 방식은 논증이 아닌 상식의 영역이다. 이런 관점에서 ‘마르고 닳도록’이란 영원성을 표현한 것은 곧 ‘하나님이 보우하사’를 수식하여 기원의 간절함을 강화시켜 준 것이다. 결국 "안창호와 유길준의 정신 사상적 일치를 감안하면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한 단언은 본질을 놓치고 쌓은 모래성일 뿐인 것이다. 이제 박재순의 글에 대한 반론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애국가에 담긴 도산의 생각’, ‘애국가에 담긴 안창호의 사상과 정신’, ‘애국가에 담긴 안창호의 정신과 삶’이란 3개 항목에 대한 비판은 생략하기로 한다. 앞에서 살폈듯이 잘 못 된 논증으로 설정한 ‘안창호 애국가 작사’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기에, 이를 대상으로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도산안창호는 어떻게 애국가를 지었는가’의 마지막 네 문장은 주목하여 거론하고자 한다. 이를 졸고의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주목하는 네 문장은 이것이다. #7 "애국가는 안창호의 기도이고 노래이고 정신이고 철학이었다. 애국가는 그의 삶과 정신을 이끄는 깃발이고 지침이고 철학이었다. 애국가는 그의 삶과 정신을 이끄는 깃발이고 지침이고 고백이고 선언이었다. 그는 애국가를 살았고 애국가는 그를 살리고 지키고 이끌었다.” 안창호에 대한 과한 수식이다. 그런데 아무리 수식이라고 하지만 그냥 넘길 수가 없다. 바로 ‘기도’ 때문이다. 기도의 대상은 당연히 ‘하나님’이다. 안창호는 1895년 미국 북장로회 계통 선교사 H. G.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였으니 기독교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안창호는 하나님을 성호(聖號) 하며 신앙고백을 한 바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엄연한 사실에 의해 결론은 내리면 이렇다. "애국가는 안창호의 기도일 수 없다. ‘하나님’이라는 성호를 가사에 썼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창호는 명백하게 애국가의 작사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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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 고려인 화가 문 빅토르, 광주 고려인마을 정착카자흐스탄 출신 고려인 화가 문 빅토르(72)가 광주 고려인마을에 정착했다. 1일 광주 고려인마을에 따르면 카자흐스탄과 광주를 오가며 대한민국으로 이주를 준비해온 문 화백이 전날 고려인마을 안착을 마무리했다. 문 화백은 질환 치료를 위해 2022년 광주를 방문한 이후 재외동포(F-4) 비자 취득 등 고려인마을 영구 거주를 준비해왔다. 고려인마을도 조상의 땅 정착과 미술관 건립이라는 문 화백의 꿈을 돕고자 지난해 6월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마을 지원센터 2층에 작은 전시실과 화실, 주거 공간을 마련해줬다. 고려인 3세로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던 문 빅토르는 스탈린 강제 이주 명령에 따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했다. 문 화백은 "고려인 선조의 강인한 민족정신과 불굴의 개척정신을 이어가도록 그동안 체득한 화법을 후손들에게 전수하겠다"고 말했다. 문 화백은 1951년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바스토베에서 태어나 1975년 고골 알마티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1976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미술 활동을 시작한 그는 고려인의 역사, 문화, 인물을 화폭에 담아왔다. 대표작으로 '홍범도 장군', '우수리스크 나의 할아버지', '1937 고려인 강제 이주 열차'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카자흐스탄의 대통령궁과 국립미술관을 비롯해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이집트, 일본, 러시아 등 세계 각지에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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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규장각, '세계기록유산'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전시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원(원장 이창숙)은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기념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을 일반 대중에 공개하는 '우리의 기록, 인류의 기억' 특별전을 개최한다고 30일 밝혔다. 지난해 5월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기념하는 취지다. 서울대 규장각은 '전봉준공초' 등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185건 중 58건을 소장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과 함께 규장각이 소장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조선왕조 의궤, 조선통신사 기록물 등 다른 세계기록유산도 함께 공개한다. 한편, 이번 전시회 개최에 앞서 지난 1월 26일에 열린 개막식에는 서울대 김경아 교수(국악과)의 상령산 독주 및 ‘조선왕조 의궤’의 복장을 재현한 취타대의 취타 공연 등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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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 가지마다 자리한 대한제국의 꽃…돈덕전 밝히던 샹들리에최초의 근대 국가이자 황제 국가였던 대한제국에서는 자두나무꽃 즉, 이화(李花) 문양을 곳곳에서 활용했다. 근대식 공문서, 우표를 도입하면서 그 문양을 활용했고, 세계 여러 나라와 교류하던 궁궐 안팎과 그 안에서 쓰는 각종 황실 물품도 이화문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26일 국립고궁박물관의 소장품 도록 '조명기구'(照明器具)에 따르면 1900∼191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샹들리에도 그중 하나다.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에서 만든 이 조명기구는 가지 위아래로 긴 잎과 줄기가 덩굴처럼 감싼 형태로, 5장의 꽃잎과 꽃술로 이뤄진 이화문이 곳곳에 장식돼 있다. 가지 덩굴마다 대한제국 황제의 문장(文章·국가나 집안 등을 나타내기 위해 쓰는 상징적 표지)인 이화문이 장식된 점을 볼 때 주문 제작한 상품으로 보인다. 박물관 관계자는 "표면에 남은 금빛 흔적, 전구를 끼우는 기구에 새겨진 상표, 당대 발행된 신문 등을 고려할 때 1904년경 덕수궁 돈덕전 접견실 회랑에 설치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도록에서는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기에 쓰인 다양한 조명기구를 살펴볼 수 있다. 사방으로 창을 내고 내부에 초나 등을 넣어 쓰는 바닥용 조명기구인 좌등(座燈)을 비롯해 개항 이후 들어온 서양식 촛대와 석유등 등 95점의 사진과 설명이 담겼다. 조선 영조(재위 1724∼1776)의 딸 화유옹주(1740∼1777) 무덤에서 나온 등잔대, 고리를 달아 매달거나 손으로 들 수 있도록 한 초롱(燭籠)·등롱(燈籠) 등은 눈길을 끈다. 박물관은 조선시대 궁궐에 대한 정보를 기록한 자료인 '궁궐지'(宮闕志)를 우리말로 옮긴 총서도 최근 펴냈다. 숙종(재위 1674∼1720) 대에 편찬된 궁궐지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유물로, 1695년 6월에 숙종이 직접 쓴 어제 서문(御製序文)과 주요 궁궐 전각과 관련한 정보 등을 담고 있다. 이름은 같으나 고종(재위 1863∼1907) 대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궁궐지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전각 규모, 위치, 구조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연구 가치가 크다. 박물관 관계자는 "일제강점기 때 훼손돼 없어진 전각 위치와 형태 정보가 기록돼 있어 향후 궁궐의 옛 모습을 복원하거나 재현하는 자료로써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장품 도록과 총서 등 이번에 발간한 책자는 국립고궁박물관 누리집에서 볼 수 있다. 박물관 측은 책자를 국공립 도서관과 여러 연구기관에도 배포할 예정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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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한국문학관 해외수증 기념 학술대회 개최, 2일국립한국문학관(관장 문정희)은 해외수증 기념 학술대회 "한국문학과 오무라 마스오”를 2월 2일(금), 연세대학교(문과대학, 학장 김민식)에서 개최한다. 2023년 국립한국문학관에 평생 수집한 자료를 기증한 오무라 마스오 (大村益夫)의 1주기를 맞아 그를 추모하고, 아울러 국립한국문학관의 해외 수증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한국 문화콘텐츠가 세계무대에서 각광받는 시점에서 해외 한국문학 연구와 자료의 현황을 점검하고 그 가치를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본 행사에 앞서 오무라 마스오의 학문적 삶과 해외 자료이관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오무라 마스오의 서재:시간이 쌓아올린 빛”을 상영한다. 일본 치바현의 오무라 마스오 교수 자택에서 요코하마항-인천항-국립한국문학관까지 이관 과정이 기록영상으로 담겼다. 오무라 마스오 교수 본인의 생전 영상을 포함하여 유족과 연구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평생을 오롯이 자신의 길을 걸어온 한 학자의 삶이 전하는 특별한 감동을 맛볼 수 있다. 학술대회 1부 "윤동주-자료, 문화, 콘텐츠”에서는 오무라 마스오 교수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인 윤동주 연구를 문화 콘텐츠라는 관점으로 확대하여 논의한다. 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북간도 용정의 윤동주 묘소를 최초로 발견했고, 유족으로부터 시인의 원고를 전달받아 '〔사진판〕윤동주 자필시고전집'을 펴냈다. 이러한 업적을 통해 윤동주 문학의 실증적 연구가 한층 더 단단한 기반을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윤동주는 한국의 국민시인을 넘어 일본, 중국에서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일종의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오무라 교수가 뿌린 씨앗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동주 자필시고전집』을 오무라 교수와 함께 펴낸 심원섭 교수(전 일본독쿄대獨協大),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콘텐츠를 조성한 김성연 교수(연세대)의 발표를 통해 윤동주 문학 원전자료의 중요성과, 문화콘텐츠로서의 확대가능성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 ‘릿쿄대학 윤동주 문학회’ 야나기하라 야스코 대표가 일본 윤동주 문학 모임의 활동을 소개하고 서재길(국민대), 이영준(경희대) 교수가 토론자로 나선다. 2부 "한국문학과 오무라 마스오”에서는 일본 1세대 한국문학 연구자인 오무라 마스오 교수의 학문적 여정을 따라 번역, 문학사, 연구방법과 자료학, 작가론, 해외 한국학을 주제로 오무라 마스오 교수의 연구 성과를 짚어본다. 중국문학을 전공했던 청년 오무라 마스오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한국을 발견하고 평생 한국문학 연구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 그리고 그 학문적 여정에서"일본인 한국문학 연구자”라는 자의식을 놓지 않고 연구의 방향과 범위를 설정하면서 얻어낸 성과를 한국과 일본 학자들의 발표와 토론으로 만날 수 있다. 일본문학 연구자 곽형덕 교수(명지대), 일본의 한국문학 연구자 시라카와 유타카 교수(큐슈산업대학), 한국문학 연구자 정종현(인하대), 윤대석(서울대), 장문석(경희대) 교수가 발표를 맡았고, 권보드래(고려대), 조은애(동국대) 교수가 토론한다. 오무라 마스오 교수의 연구를 경유하여 한국문학을 더 넓고 풍부하게 바라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문정희 관장은 "오무라 마스오 교수의 연구는 식민지배, 분단, 냉전 등으로 불가피하게 금기와 제한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한국문학의 빈틈을 채우고 그 세계를 확장한다. 윤동주 묘소 확인은 그 단적인 예다.”라며 오무라 마스오 교수 자료 수증과 학술대회의 의의를 강조했다. "해외 수증을 계기로 한국문학을 안팎에서 바라볼 수 있는 국립한국문학관의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감당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공동개최자인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의 조강석 부학장은 "윤동주 문학의 정신이 새겨진 그의 모교 연세대에서 오무라 마스오 교수의 학문세계를 논하게 되어 매우 뜻깊다.”는 감회를 밝히며 학술대회가 윤동주 문학에 대한 활발한 논의의 장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국립한국문학관은 2016년 ‘문학진흥법’ 제정을 근거로 2019년 법인이 설립되었다. 2026년 개관을 목표로 고전과 근현대를 아우르는 한국문학 자료 수집, 대중적 문학 향유를 위한 전시, 연구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18년 하동호 교수의 소장자료 5만 여점 기증을 시작으로, 2023년 오무라 마스오 교수의 기증자료 1만 5천여점을 포함, 총 10만 여점의 한국문학 자료를 수집하였다. '삼국유사'부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까지, 한국문학의 대표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이 자료는 정리가 완료되는 대로 일반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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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0)<br>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내 일상을 보다 풍요롭게 해주는 이규진(편고재 주인) 전국에 걸쳐 유튜브 경매가 난리지만 나와는 관련이 없다. 아니, 유튜브 경매 자체를 할 줄 모르는 것이다. 유행을 따르지 못하는 팔불출이라고나 할까, 그런 문외한이 얼마 전 우연히 지방 경매를 들여다보게 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만난 것이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이다. 그러나 이 것은 팔기 위해 경매에 붙였던 것은 아니다. 경매사(사장)가 다른 물건을 진행하며 본인은 돈 안 되는 이런 것도 산다는 식의 에피소드로 잠시 보여 주기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것을 전화를 해 내 것으로 만들었으니 내가 나를 생각해 보아도 엉뚱한 점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을 듯싶다. 전화를 통해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에 대해 엉뚱한 일을 벌린 것은 아무래도 평소 도편 중에서도 물고기 문양이 들어간 것을 선호한 탓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나는 물고기 문양이 들어간 도편들을 꽤 많이 소장하고 있는 편이다. 젊은 시절 가마터에서 직접 습득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보이는 대로 욕심을 부린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소장품 중에서는 분청이 많고 청자는 비교적 적은 편인데 그런 아쉬움이 이번처럼 엉뚱한 일을 저지르게 된 원인인지도 모를 일이다.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의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굽 안은 유약을 훑어내고 있으며 굽에는 모래받침의 흔적이 있다. 외면은 담청색의 유약이 두껍게 입혀져 있으며 평평하게 벌어진 몸체 밑 부분은 전으로 꺽이는 부분부터 손상을 입어 없어지고 없다보니 흡사 둥근 연못 중앙에 굽이 섬처럼 동그마니 떠 있는 모습이다. 안쪽을 보면 전으로 돌아가며 꺽였던 부분들이 깨어져 달아난 흔적을 보이고 있다. 중앙에는 두 줄의 백상감 안에 물고기 두 마리를 대칭으로 배치하고 있는데 눈동자만은 흑상감으로 점을 찍어 액센트를 주고 있다, 바깥쪽으로도 두 줄의 백상감 원을 배치 중앙의 원과의 사이 여백에는 초화문을 넣고 있다. 초화문은 중앙에서 바깥쪽을 향해 방사선 형태로 줄기는 흑상감으로 꽃은 백상감으로 처리 흑백의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유약과 흑백상감의 배치 등으로 보아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 진다. 전국에 걸쳐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 유튜브 경매에 대해 나는 부정적인 생각이 많은 편이다. 고미술품은, 특히 도자기는 재화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그 것 못지않은 역사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문화적인 요소도 있기 마련인데 경매를 통해서는 현금 대상으로서의 즉물적인 가치만이 강조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에서 보이는 물고기는 눈을 뜨고 잔다고 해서 예로부터 무언가를 지키거나 방비하고자 하는 벽사의 의미가 강하며 많은 알을 낳는다고 해서 다산의 의미도 강조되고 있다. 새해 벽두에 만난 물고기 두 마리가 나를 건강으로부터 지켜주고 다산의 의미처럼 내 일상을 보다 풍요롭게 해주는 그런 인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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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한제국기 조명기구와 궁궐 이야기, 보고서로 발간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시대·대한제국기 조명기구의 조사 결과를 수록한 『조명기구(照明器具)』와 숙종과 고종 연간에 각각 편찬된 『궁궐지(宮闕志)』를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고문헌국역총서 『국역 궁궐지-숙종 연간』·『국역 궁궐지-고종 연간』(1건 2책)을 발간하였다.국립고궁박물관의 소장품 도록 제18책 『조명기구』는 조선시대 등잔대, 촛대, 좌등(座燈), 초롱(燭籠)·등롱(燈籠), 괘등(掛燈) 등 전통식 조명기구 43점과 개항 이후 유입되었던 서양식 촛대, 석유등, 전등기구 등 근대 조명기구 52점, 총 95점의 사진과 해설 등 기본 정보를 담았다. 이와 함께, 초·석유·전기 등 광원별로 유물을 구분하고 구조를 설명해 입체적으로 유물을 이해할 수 있으며, 조명기구가 그려진 의궤 등 문헌자료와 근대기 궁궐 사진에 나타난 조명기구의 모습을 함께 제시해 조명기구가 본래 사용되었던 장소와 용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특히, 샹들리에, 등갓, 조명 부속품 등 근대 조명기구 중에서 1900~1910년경에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창립한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Company)’에서 제조한 이화문 샹들리에가 주목되는데, 표면의 황금색 안료와 전구를 끼우는 기구(소켓)에 새겨진 상표(마크), 당대에 발행된 신문 자료 등을 토대로 유입 초기인 1904년경 덕수궁 돈덕전 접견실 회랑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샹들리에 가지 덩굴마다 대한제국 황제의 문장(文章)인 이화문(李花文)이 장식되어 있어 주문 제작된 상품으로 보인다.이외에도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기에 걸쳐 사용된 여러 조명기구에 대한 다양한 주제의 칼럼과 논고도 도록에 함께 수록하였다.한편, 고문헌국역총서 제12책 『국역 궁궐지-숙종 연간』 및 『국역 궁궐지?고종 연간』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숙종 연간(1674~1720년)의 『궁궐지』(1건 1책)와 고종 연간(1863~1907년)에 편찬되었다고 추정하는 『궁궐지』(1건 2책)를 각각 국역한 것이다.숙종 연간에 편찬된 『궁궐지』는 1695년(숙종 21) 6월에 숙종이 직접 쓴 어제 서문(御製序文), 경복궁·창경궁·창덕궁·경덕궁(현 경희궁)·어의동궁 등 다섯 궁궐의 전각과 관련된 간략한 정보와 이를 기록한 기문(記文)·시문(詩文), 그리고 1696년(숙종 22)부터 1707년(숙종 33)까지의 기록을 보완한 부분으로 크게 구분된다.고종 연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궁궐지』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 세 궁궐에 있는 전각의 규모, 위치, 칸수, 구조 등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훼철(毁撤)되어 없어진 궁궐 전각의 위치와 형태에 대한 정보를 기록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향후 궁궐의 옛 모습을 복원하거나 재현하는 고증 자료이자 궁궐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발간된 책자는 국공립 도서관과 관련 연구기관 등에 배포할 예정이며,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누리집(www.gogung.go.kr)에 공개되어 있다.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앞으로도 정부혁신과 적극행정의 하나로 왕실 문화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여 조선시대 왕실 문화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고, 이를 국내·외에 널리 공유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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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지식이음' 새 단장, 국가유산 가상현실로 체험 가능문화재청은 ‘국가유산 지식이음’ 웹사이트를 개편했다고 22일 밝혔다.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국가유산을 볼 수 있도록 다양한 주제별 콘텐츠가 추가됐다.검색기능과 편의성을 개선해 연구정보를 자유롭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됐다.'테마 콘텐츠' 메뉴가 새로 선보인다. 연구자에 초점을 맞춘 기존 학술정보 중심 서비스에서 일반인도 쉽고 편리하게 접근하고, 관련 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개편됐다. 국가유산 VR산책, 문화유산 돋보기(미술유산 갤러리), 교과서 속 국가유산, 기록관 온라인 전시, 연구원 소장유물, 부석사 조사당 벽화 디지털 복원, 문화유산 찾아-zoom, 일제강점기 고적조사 등 총 8개 서비스로 구성된다.국가유산 VR산책에서는 국내외 주요 발굴 현장이나 문화유산, 자연유산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드론과 360도 카메라로 촬영·편집한 가상현실(VR) 콘텐츠를 제공한다.고고유적 조사현장 콘텐츠 위주로 운영돼어 온 기존 ‘360VR로 보는 우리 문화재’를 국가유산 전 분야를 아우르는 콘텐츠로 통합·확대(69건→81건)하고 국가유산 VR산책으로 변경됐다. 문화유산 돋보기는 다양한 미술유산 자료를 감상할 수 있다. 4개 주제로 구성된다. 초상화 갤러리’에서는 개인과 문중, 사립기관 등이 소장한 국보·보물 초상화 36건 57점의 고화질 사진과 국·영문 해제 등 관련 정보를 함께 확인할 수 있다.석비비문 갤러리와 괘불 갤러리에서는 국보·보물로 지정된 석비 24건과 괘불54건의 고화질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탁본 갤러리에서는 한국 서화가 오세창(1864~1953)이 편찬한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근역서화징’에 수록된 조선시대 서예가들의 석비 글씨 50건을 볼 수 있다.보고서 등 첨부문서 자료도 내용 검색도 가능해졌다. 필요한 자료만 선별해 찾을 수 있도록 조건검색이나 검색필터 기능이 추가됐다.이 외에도, 고려 금속공예 삽화 등 연구성과물 7000여 건이 출처표시를 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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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국악원, 2024년도 주요 공연 사업계획 발표국립민속국악원(원장 김중현)은 새로운 전략과 비전을 바탕으로 한 2024 주요 공연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주요 사업 내용은 ▲창극 및 민속음악 특성화를 통한 기관 경쟁력 제고, ▲일상에서, 누구나 누리는 국악 환경조성 및 저변 확대, ▲민속악 진흥을 위한 연구 기반 조성, ▲관객 개발및 공연 서비스 품질 개선 등이다. 창극과 민속음악의 특성화를 통해 기관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대표 창극 작품을 제작하고, 공모를 통해 선발된 단체에 창극 공연의 기회를 제공해 민속악의 거점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예정이다. 2023년 대표작품 '산전수전 토별가'를 부산원과 남도원에서 각각 2월과 3월에 공연할 예정이며, 어린이 대상 창의력 증진 작품을 11월에 예원당에서 선보이고, 공모를 통해 선발된 단체에게는 5월부터 6월까지 예원당과 예음헌에서 창극 공연 기회를 제공한다. 어린이 명인 및 명창을 위한 '꿈나무무대'를 예음헌에서 2월에 4회 개최하고, 민속악 관련 예술인과 단체를 초청하는 '민속악 축제'를 예원당에서 9월에 2회 개최하며, 전통 민속춤을 선보이는 '무용단 정기공연'을 예원당에서 6월에 1회 개최한다. 공모를 통해 선발된 소리꾼들에게 판소리 완창 기회를 제공하는 '소리 판'을 예음헌에서 연중 5회 진행하고,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해설과 사설집을 제작한다. 일상에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국악 환경을 조성하고 저변을 확대하고자 다양한 상설 및 기획 공연을 추진한다. 더불어 K-문화관광 거점을 강화하기 위해 해외 및 국내 유관기관과의 교류 및 협력을 추진하며, 모든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국악치유 체험프로그램과 어린이 및 청소년을 위한 국악 체험교실을 운영한다. 기획 공연으로는 '고택, 고백Go Back', '달리는 국악무대', '토요국악나들이','어린이날 기념공연', '국악콘서트 다담' 등이 있고, 상설 공연으로는 '광한루원 음악회'가 있으며, 명절과 송년을 기념하는 공연으로는 '새해맞이 설공연', '추석 공연', '송년 공연'이 있다. 또한 취약계층을 위한 '무장애극 제작 및 공연'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덩덕쿵 국악놀이터'도 열린다. K-문화관광 거점 강화를 위해 해외 및 국내 유관기관과의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며, 이를 통해 전라권 지역 순회 공연, 지역축제와의 협력을 통한 지역사회 상생을 위한 전통예술 공연, 국제 교류 공연(일본, 프랑스, 호주, 필리핀,몽골 등), 그리고 소속원 간 대표작품 순회공연을 진행한다. 국악을 널리 퍼뜨리고 국악 향유층을 확대하기 위해 수요자 중심의 국악 교육과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 프로그램으로는 국악치유 체험프로그램 '국악 명상', 어린이를 위한 '틴틴창극' 교실, 청소년을 위한 '국악세상'과 '즐 거운 국악산책', 그리고 중장년층을 위한 '청출어람' 국악실기 강좌가 제공된다. 민속악 진흥을 위한 연구 기반 조성을 위해 전북지역의 민속예술을 조사하고 구술채록을 진행한다. 또한, 시조 명인 정경태의 저술 '국악보' 발간을 준비하고, 전시 해설을 통해 국악에 대한 이해를 제고하고자 한다. 지역 민속예술 연구와 관련하여 전북지역 민속예술 조사와 민속음악학술자료집 발간을 통해 기초 연구자료를 제작하고 있다. 전북무형문화재 전통공연예술종목(27건)에 대한 작고 보유자 및 보존회 소장자료를 수집하고, 민속음악 학술자료집으로는 시조 명인 정경태의 저서 '국악보'를 발간 준비 중이다. 국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교양을 심화하는데 기여하기 위해 무장애 전시를 위한 해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관람객이 국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언어의 장벽을 넘어갈 수 있는 전시 해설 영상을 제작하고 있다. 또한 관람객의 편의를 제공하고 국악 체험을 위한 공간을 조성하여 교육 및 체험 사업과 연계하여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전시 해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외에도 공연 품질을 제고하기 위한 평가위원회와 모니터링단 운영하고, 공연 관람 서비스 품질 개선을 위해 발권시스템과 티켓부스 환경을 개선하며, 안내원 운영을 통한 관람객 서비스를 강화할 계획이다. 국악 공연의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공연평가위원회와 민간 공연평가 모니터링단을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속단체의 예술역량을 향상시키고 다양한 관람객의 의견을 수렴하여 공연 만족도를 평가하고 개선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기관 및 사업 홍보를 강화하기 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뉴미디어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다양한 온라인 게시처와 공식 SNS 계정을 활용하여 공연 홍보를 다양화하고 새로운 관객을 유치하며, 오프라인에서는 지역 신문사 및 유관기관과 협조하여 보도자료를 제작하고 홍보물을 배포하고 있으며, 또한 기관, 국악연주단, 상설공연 등 사업을 홍보하기 위한 영상을 제작한다. 김중현 원장은 "2024년에도 국립민속국악원은 다양한 공연과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국악의 저변을 확대하고 국악의 가치를 더욱 널리 알리는 데 주력할 것"이라며 "이러한 노력은 전통의 계승과 혁신적인 접근을 통해 국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더 넓은 관객층에게 국악의 매력을 전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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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미만 현대문화유산 보호하는 '예비문화유산' 제도 시행 예정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올해 9월부터 '근현대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에 따라 50년 미만의 현대문화유산까지 보존·관리가 가능한 ‘예비문화유산’ 제도를 처음 시행한다. ‘예비문화유산’은 건설·제작·형성된 지 50년이 지나지 않은 문화유산 중에서 현대의 우리 삶과 문화를 대표하고, 장래 등록문화유산이 될 가능성이 높아 특별히 보존·활용할 필요가 있는 경우 선정할 수 있다. 그동안은 건설·제작·형성된 지 50년 이상 경과한 근현대문화유산만을 등록 대상으로 검토해 50년 미만의 경우 제대로 된 가치 평가가 이뤄지기도 전에 훼손되는 등 지속적인 관리가 어려웠다. 이에 ‘예비문화유산’ 제도를 통해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고, 향후 미래 세대에게 등록문화유산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예비문화유산’은 소유자의 신청을 받아 현지조사 검토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선정되며, 이후 보존과 활용을 위해 필요한 기술과 교육을 지원받을 수 있다. 또한, 건설·제작·형성 된 후 50년 이상이 지나면 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한 검토도 진행할 예정이다. 한편, 문화재청은 오는 5월 ‘예비문화유산’ 선정을 위한 대국민 공모전을 실시할 예정이다.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유물이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에서 상징적 또는 교육적 가치가 있거나, 기술 발전 등 그 시대를 반영하거나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경우 응모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5월 중 문화재청 누리집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문화재청은 ‘예비문화유산’ 제도의 시행으로 근대문화유산 뿐만 아니라 현대문화유산까지 보존·관리 범위를 확대하면서, 이에 기반한 적극적인 활용방안 역시 모색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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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끊기길"…폼페이에서 챙긴 화산암 반환한 여성1년 전 이탈리아 남부 고대 도시 폼페이를 찾은 기념으로 화산암 파편을 챙겼던 한 여성이 저주에 걸린 것 같다며 사과의 편지와 함께 돌을 돌려보냈다. 13일(현지시간) 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에 따르면 최근 한 여성이 가브리엘 추흐트리겔 폼페이 고고학공원 소장 앞으로 손으로 쓴 편지와 함께 화산암 파편을 소포로 보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여성은 편지에서 "저주에 대해 몰랐다. 어떤 돌이라도 가져가면 안 된다는 걸 몰랐다"며 "1년 만에 유방암에 걸렸다. 나는 젊고 건강한 여성이며 의사들은 단지 '불운'이라고 말했다. 제발 사과를 받아달라"고 적었다. 추흐트리겔 소장은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 이 사연을 소개한 뒤 "익명의 발신자에게 쾌유를 빈다"고 말했다. 서기 79년 이탈리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온 도시가 폐허가 된 폼페이는 18세기 중반부터 발굴이 본격화됐다. 이후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됐지만 유물을 훔쳐 가는 관광객들로 골머리를 앓아왔다. 다행히 훔친 유물을 스스로 반환하는 경우도 많아 이런 유물을 따로 전시하는 특별 전시 공간도 마련돼 있다. 3년 전에는 여성의 얼굴을 한 테라코타 조각이 담긴 소포가 도착했다. 소포 안에는 "50년 전에 건물에서 이 조각을 떼어냈다"며 "부끄러워서 돌려드린다. 죄송하다"는 사과 편지가 들어 있었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죄책감 때문에 슬쩍한 물건을 반환하지만, 미신적인 이유로 반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2020년 한 캐나다 관광객은 15년 전 폼페이에서 훔친 유물 때문에 저주에 걸린 것 같다며 모자이크 타일 2개와 암포라(항아리) 파편을 반환했다. 이 관광객은 그동안 유방암을 두 차례나 앓고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등 악운이 끊이지 않았다며 "파괴된 땅에서 온 이 유물들은 부정적 에너지가 가득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는 이 저주를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며 "이것을 회수해주길 바라며 신의 용서를 구한다"고 덧붙였다. 2015년에는 한 영국 여성이 부모님이 1970년대에 폼페이에서 훔친 모자이크 타일 조각을 사과의 편지와 함께 반환한 사례도 있었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몇 년 전 신혼여행 중 폼페이에서 조각상을 훔친 캐나다 여성의 사연이었다고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전했다. 이 여성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남편이 심장마비로 숨졌다. 훔친 조각상은 남편의 여행 가방에 있었다. (로마=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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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박물관서 원주민 유물·유해 사라져…새 시행령에 퇴거 '급급'(시카고=연합뉴스) 김현 통신원 = 미국 의회가 1990년 입법을 완료하고도 논란이 많아 시행이 더뎠던 '원주민 봉분 보호 및 유해 송환법'(NAGPRA) 시행령 개정안이 12일(현지시간) 발효했다. 이에 따라 원주민 유물과 유해를 소장하고 있는 미 전역의 박물관들이 자구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시카고 트리뷴과 미술전문지 '아트뉴스' 등에 따르면 미국의 대표적 자연사 박물관 중 하나인 '시카고 필드 뮤지엄'은 12일부터 '고대 아메리카 전시실'의 미국 원주민 관련 유물 진열장에 가림막을 친 채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박물관이 원주민의 문화 유산이나 유해·유골을 전시하려면 반드시 해당 부족의 사전 동의를 받고, 부족 측이 원할 경우 연구조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방법 시행령이 이날 발효된 데 따른 임시 조치다. 미국 내무부는 지난달 "9만6천여 구의 미국 원주민 유해가 크고 작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며 "원주민 유산과 유해 송환에 속도를 붙이기 위해 1990년 제정된 NAGPRA 관련 시행령을 전면 개정하고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만일 박물관이 규제에 따르지 않다가 적발되면 정부는 거액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트리뷴은 "미 전역의 박물관들은 새 시행령 발효를 앞두고 전문 법조인과 대책을 논의하는 한편, 향후 수년간 직원 채용·예산 집행 등에 영향을 미칠 관련 규정 파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새 시행령이 발효됨에 따라 각 박물관은 원주민 관련 전시물들을 그대로 두고 위법 가능성을 감내할 것인지, 우선 전시물들을 치우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 모르는 원주민 부족의 동의서를 받기 위한 절차 밟기에 나설 지 결정해야 했다고 부연했다. 필드뮤지엄은 금주 자체 웹사이트를 통해 "해당 부족들과 논의를 진행하는 동안 새 시행령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판단된 문화재 진열장을 모두 덮어놓겠다"며 "유해·유골은 전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뉴욕의 '미국 자연사 박물관'과 하버드대학의 피바디 고고학·민족학 박물관 등은 아직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아트뉴스는 "미국 원주민 부족 대표들과 송환 옹호론자들은 '박물관과 대학 연구기관들이 부족들과의 소통을 꺼리면서 송환 절차를 지연시켜 왔다'고 주장한다"며 이들 사이의 긴장이 수십년째 계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연방 정부가 수십개의 원주민 부족 대표들과 협의해 만든 새 시행규칙에는 박물관이 원주민 유물·유해를 연구·전시하는 대가를 원주민 부족에게 지불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돼있다"고 부연했다. 원주민 부족과 원주민들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미국 인디언 문제 협의회'(AAIA) 측은 "법을 적극적으로 지키도록 해야 한다"며 규제 강화를 지지했다. 하지만 박물관 측과 고고학계 일부 지도자들은 새 시행령에 대해 "규제가 지나치다. 각 박물관이 자율적으로 소장품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시카고 필드뮤지엄은 1894년, 시카고 만국박람회(1893) 전시 물품들을 보관하기 위해 처음 설립돼 2007년 고대 아메리카 전시실을 설치했다. 연간 방문객 수는 200만 명에 달한다. 작년 가을 공개된 연방정부 데이터에 따르면 필드뮤지엄은 원주민 유해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미국 박물관 중 하나로 현재 1천200구를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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