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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3김덕명의 전통춤은 양산지역의 사찰(寺刹)과 권번(券番)에서 전승하던 독특한 춤들을 전수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며 후학들에게 전수시켰다. 더구나 사찰과 권번은 수행도장과 세속이라는 서로 상반된 환경이기에 어울릴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김덕명의 춤은 그런 상반된 춤 세계를 모두 포용하면서 조화를 이루면서도 남성적이고 영남적이고 사찰적인 춤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 김덕명의 춤의 장점이라고 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부산·경남지방의 민속을 발굴하고 복원하고 전수하는 탁월한 악가무의 재능까지 겸비한 예인이며 재인이며 기인이었다. 이제 그가 남긴 춤과 민속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사찰계춤(4종), 기방계춤(11종), 민간계춤(13종) 3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1. 사찰계춤김덕명의 사찰계춤을 전승한 통도사는 경남양산시 하북면 영축산에 자리한 사찰로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하지만 전승계보는 조선말기 철종시대까지의 무수(舞手)승려(魚山僧)는 알 수 없으며 계보가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고종시대의 이월호(李月浩, 1880~ ?)로부터 김설암(金雪岩, 1885~ ?)→신경수(新京壽, 1893~ 1965)→양대응(梁大應, 1897~ 1972), 그리고 김덕명에게 까지 이어진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1) 양산사찰학춤양산학춤은 1880년대 통도사의 이월호스님으로부터 사찰계에서 민간재인계로 4갈래로 전승되었다. ①김설암-신경수-양대응으로 사찰계 전승에서 민간재인 김덕명으로, ②사찰관련 민간예인계의 김두식(金斗植)-안화주(安化周, 1894- 1965)-황종열(黃鐘烈, 1897-1957)에서 김덕명으로, ③이주서-서상근에게 전승은 단절되었고. ④이주서–김동원 전승은 동래학춤으로 전승되었다.이렇게 양산에서 유일하게 통합전승된 김덕명 양산학춤은 그 사찰계 원형성과 민간재인계의 독특한 덧배기 춤사위와 교방계의 섬세한 바디(성향)가 깃들여져 예술성이 높은 춤으로 전승되었다. 학춤의 유래는 신라 선덕여왕 15년(AD646) 통도사가 창건된 이래 수륙재, 영산재, 종무대재 때 의례행사무로 승려들을 중심으로 전승되어왔다고 전한다. 김덕명의 양산사찰학춤은 24가지 춤사위를 4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단계별 의미로 학을 표현하면서 춤사위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1단계> 자연의 새가 하늘을 날고 땅으로 내려앉는다. 먹이를 찾기 위해 동료를 위협하며 존재감을 알린다. <2단계> 먹이를 찾기 위해 사방을 살피며 걷는다. 날개 짓하며 돌고 먹이를 고르며 으쓱인다. <3단계> 학은 먹이를 집고 죽이고 먹는다. 배부른 학은 쉴 터를 찾아 걸으며 따뜻한 햇살에 몸을 맡기니 졸음이 온다. 주위 소음으로 깜짝 놀란 학은 일어서면서 기지개 편다. <4단계> 동료 학과 짝을 이루고 끌어 주며 동료에게 먹이를 찍어 먹여주고 노닐다 날아간다. 양산사찰학춤은 사대부차림의 모습에서 학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갓과 도포자락에서 나타나는 우아한 학의 날개 짓, 몸짓 등에서 학의 동태가 사실적으로 전달된다. 하체중심에서 이루어지는 도약과 집중, 배김새 등 굵직한 남성의 멋이 내재된 춤사위는 학춤에서만이 볼 수 있다.(박계현의 박사학위 논문발췌) 2) 지성승무지성승무는 일반적으로 성행하는 승무와 다른 의미를 지닌 독특한 춤이다. 춤의 근원은 인간중심적 구도, 순도한 도승과 상좌간의 기구한 운명적 사연으로 소산한 전통 불교 춤이다. 검정 승복에 붉은 가사(袈裟)의 강렬한 구도(求道)의 여한(餘恨)으로 중생구제의 부처님이 수행한 수많은 선행과 공덕, 정진 수행을 찬미하는 불교의 정통춤 지성승무는 장엄하면서도 신성한 몸놀림으로 재현되고 있다. 수도승이 수행 길목에서 부모를 잃은 동자를 구해 등에 업고 토굴로 돌아와 불도성상 십여년에 열반하신 스님의 액운을 풀어 소생케 하고 상좌는 스님과의 운명적인 이별을 해야 하는 슬픈 숙명을 적(赤)과 흑(黑)의 대비로 보여주는 춤사위가 전율스럽기까지 하며, 절정에 다달아 검은 허울, 붉은 허울 벗어 던지고 미친듯이 북을 두드리며 흰 적삼이 꿈결처럼 너울거리는 정서가 강렬한 춤이다. 춤의 순서는 <염불장단춤>꿈에서 깨어나서 스님을 살리고 떠나야하는 슬픔으로 흐느끼며 슬픔을 억제하는 춤사위다. <도드리장단춤> 상좌가 스님의 움직임을 엿보며 눈물 닦는 춤사위이다. 움직이는 스님에게 다가설 수 없는 괴로움이 묻어나온다. <타령장단춤>꿈속에 나타난 도승이 가르친 소생의 춤이다. 타령 춤을 출 때 스님이 좌정하기 시작하며 상좌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자진타령장단춤> 차츰 깨어나는 스님의 모습을 장삼자락 사이로 엿보며 눈물 닦는 춤사위다. <굿거리장단춤> 스님이 좌정하니 희비가 엇갈리며 떠날 준비를 하고 북을 울린다. 장삼–가사–홍띠–염주-고깔 등을 차례로 북에 걸은 후 스님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울면서 떠난다. 이 춤에서 상좌가 떠나는 의미는 스님과 상좌가 서로 상극이라 소생하는 스님의 모습에게 다가설 수 없는 상좌의 아픔이 춤사위를 통해 나타난다. 이렇게 짜인 승무는 경기도 재인청승무와 강태홍류 승무 등 재인계통의 승무의 공통적인 성향이다. 지성승무의 복식은 스님의 평상복으로 우아한 자태를 나타내기 위해 고급소재에 의존하는 일반 승무와 상반되며, 승모와 소 가사, 염주, 홍 가사 등으로 구성된 소품에서 사찰의 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홍가사에는 원과 학, 토끼를 수놓았는데, 원은 우주를 나타내며 학은 태양, 토끼는 달을 의미하며 지구의 음양조화를 일컫는 것이다. 홍띠는 안태(安胎)의 의미가 내재된 것으로 김덕명의 춤에서만이 볼 수 있다. 북은 죽음을 의미하며 스님을 살린 상좌가 남으로 떠나며 생사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연등나례살풀이춤연등나례 살풀이춤은 고려대전 연등회 때 국태민안을 위한 고려 초부터 행해졌던 축귀의례(逐鬼儀禮)로서 잡귀잡신을 달래고 쫒아 단지 안에 가두어 땅에 묻는 신앙적 성격이 강한 춤이다. 중국에서 들어 온 나례는 고려 정종 6년(1040)에 나례의 기사가 보여 정종 대부터 계동대나례가 시행된 것으로 기술되었다.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잡귀와 사신(邪神)을 내쫒는 뜻으로 행해진 의식이었다. 연등나례살풀이는 푸닥거리를 시작으로 살풀이장단에 맞추어 액을 풀고 자진모리를 통해 푸닥거리를 한다. 연등나례살풀이에서 액을 푸는 춤사위에서는 사신을 수건위에 올려서 어르고 달래는 춤사위와 거부하는 사신을 잡아서 푸닥거리로 정신을 잃게 한 후 단지에 가두어 땅에 묻으러 가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춤 순서는 <푸닥거리춤> 대나무와 살풀이 수건을 활용해서 축귀형식으로 뛰고 때리며 사신의 정신을 잃게 한다. <살풀이춤> 사신을 달랜다. 수건위에 사신을 올려놓고 어르고 달랜다. 고리 푸는 사위에서 사신과 무언의 대화로 달래지만 사신은 더욱 거센 반응을 보인다. 수건 하나에 사신을 달래며 위협하던 무당은 감춰둔 수건을 꺼낸다. <타령춤> 사신을 단지에 가두기 위해 두 개의 수건으로 사신을 유혹한다. 수건위에 앉은 사신을 진정시킨다. <자진모리춤> 두 개의 수건 위에 올려진 사신을 때리고 돌리며 푸닥거리로 정신을 잃게 한 후 수건을 던진다. 이때 무당은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기절한 사신이 깨어나기 전 단지에 가두고 땅에 묻는다. 연등나례살풀이춤은 살풀이춤과 무속춤이 조화된 춤으로 춤사위의 전반적인 호흡은 푸닥거리에서 기를 돋우고 살풀이장단에서 깊은 호흡과 함께 몸을 느슨하게 풀어주며 무속의식을 엿볼 수 있는 특이함이 내재되었다. 무당의 복식과 소품으로 흰 치마저고리에 홍띠를 두르며 얹은 머리에 수건을 두른다. 한 개의 수건으로 춤을 추다 푸닥거리에서 두 개의 수건을 사용하는 것도 이 춤에서 만이 볼 수 있는 특이함이지만 경기지역 등 무속계 살풀이춤은 대체로 두 개를 사용한다. 대나무가지와 단지가 소품으로 활용된다. 4) 연등바라춤붉은 장삼을 휘날리며 원을 따라 도는 보살들의 양손에 갈라 쥔 동발을 부딪칠 때마다 장엄하면서도 저린 속을 시원하게 쓸어내리는 바라춤이 탑돌이의 의미를 더해 가면 태평성대를 희망하는 구국불교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김덕명선생이 생전에 들려주는 염불소리와 함께 탑을 돌아간다. 동발이 짝을 찾아 울어댄다. 노구에도 좌중을 휘어잡는 선생의 염불 소리, 목탁 소리에 맞춰 탑돌이로 추는 바라군무는 불교의례춤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2. 교방계춤 김덕명이 기녀 김농주에게 전승받은 춤은 그녀가 개성권번 제1기생으로 기예를 익히고 30세 되면서 평양권번을 그만두고 양산권번에 정착한 후 유일하게 남긴 작품들이다. 해방 후 사회분위기에서 기녀가 생활 일선에 나설 수 있는 무대는 요릿집으로 한정되었고 재능이 뛰어난 기녀들은 연구소를 차려 후학들을 지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에 김덕명과 함께 김농주의 춤을 배운 기녀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예술생활을 접으면서 김덕명만이 유일하게 김농주의 춤을 전승하게 되었다. 양산지역에서 권번의 춤은 세가지로 전승되는데, ①이주서-고수길의 계보로 이어지는 교방양반춤과 한량무가 전승되고 있었고, ②고수길이 김설암 스님에게 배운 신라장검무, ③고수길-김농주의 다양한 춤이 펼쳐진 것이다. 그녀가 보유한 전통춤은 교방타령무를 기본으로 하여 교방양반춤, 교방진연무, 교방살풀이, 소고춤, 한량무, 장기춤, 잉어춤, 신선무, 부마도의 등 다양한 작품이 있었다. 1) 교방타령(敎坊打令)춤교방타령은 교방의 전문 예기들의 기초 교양과목 증 하나로 양반들과 어울려 여흥으로 추던 춤이다. 춤사위는 남성적이며 부드러운 멋이 조화로우며 절도 있고 흥겨운 속멋이 내재된 품격 있는 춤이다. 타령이란 우리 고유 전통음악의 곡조로서 판소리, 민요, 잡가 등에 많이 쓰이는 순수 전통 고전의 음률이다. 이 타령장단에 맞춰 춤을 추며 춤 선은 전, 후를 오가고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춤은 한량과 기녀가 마주보고 추는 형식으로 한량과 기녀가 서로 추파를 던지고 공감형성 되는 춤사위가 조화롭게 나타난다. 교방타령에서 연결되는 굿거리 춤사위는 1983년 이후 제자들에게 전승되지 않았다. 교방타령은 양반과 기녀가 어울리며 추는 춤으로 무게감이 있다면 굿거리 춤은 기녀가 화답하는 춤이다. 여성의 춤이면서 남성적인 멋이 묻어 나오며 발 디딤새에서 사뿐거리는 멋이 이 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춤사위 순서는 마주보고 서는 사위→팔 감는 사위→우, 좌 향 감는 사위→감아올리는 사위 →상 하 평행 반원사위→평 솟대사위→흥 돋우며 올리는 사위→상, 하 눌려서 젖히는 사위→손목 돌리며 활개 펴는 사위→양팔 상하 움직이는 사위→상하 팔 감는 사위→흥 올리며 전후 감는 사위→앞뒤 감고 교차하는 사위→평사위→사선 끌어올리는 사위→열림 사위→외발 서고 팔 감는 사위→사선 회전사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춤의 복식은, 남성은 흰 바지저고리, 검정조끼, 상투에 흰 수건을 묶고, 여성은 얹은 머리 또는 명주수건을 두루며, 자주색 호장저고리, 검정치마를 입고 소품으로 귀주머니를 단 자주색 허리끈을 맨다. 2) 교방양반춤(호걸양반춤)교방양반춤은 양반이 관기들과 여흥(餘興)으로 즐겨 추던 춤으로 단아하며 사대부(士大夫) 양반들의 의젓한 귀품과 천하를 눈 아래로 보며 남성의 기백과 근엄함, 청초하고 담백함이 돋보이며 해학(諧謔)이 있는 양반의 기세와 품격(品格)을 느낄 수 있다. 춤사위에서 표출되는 무언의 속삭임은 사실적으로 전달되며 이춤은 교방의 전문예인들에 의해 창안되었다. 장죽과 부채를 활용한 춤사위에는 추파 던지는 사위, 햇볕가리는 사위, 공감형성사위, 위엄사위, 엿보는 사위 등 표현이 다양하다. 춤의 특징은 남성의 모습이 강하며 다양한 춤사위에 꾸밈이 없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팔의 움직임은 자유로우나 절제된 멋이 나타난다. 좁은 보폭과 굴신걸음으로 연결되며 기를 모우고 풀면서 안정된 걸음걸이로 중심을 잡는다. 부채와 장죽을 활용하고 도포자락의 움직임이 조화롭게 나타나는 춤사위는 동적이며 우아한 선학을 연상하게 한다. 도약과 디딤의 폭이 넓고 깊으며 하체의 강한 힘을 필요로 한다. 춤사위 순서는 장죽물고 바라보는 사위→양팔 펴서 감아올리는 사위→추파 던지는 사위→상 하 반원 평행사위→양 팔 들고 걷는 사위→햇볕가리며 엿보는 사위→활개 펴는 사위→으쓱이는 사위→상하 휘젓는 사위→위엄 주는 사위→부채 펴서 엿보는 사위→뒤축 굴림 사위→팔 돌림사위→선별하는 사위→옆걸음 사위로 이어진다. 춤의 복식과 소품은 흰 바지저고리에 대님, 행전, 속 두루마기, 황금색 또는 옥색도포를 입고, 소품으로 상투, 검정 갓, 장죽, 부채 등으로 구성된다. 3) 한량무(閑良舞)한량무에서는 한량과 색시, 승려의 만남은 삼각구도의 갈등으로 희비가 엇갈린다. 이는 알력이 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해학적이며 흥미진진함과 문란한 단면을 도출한 풍자예술로 인식된다. 한량무는 조선후기 관기에 의해 창안되고 기방춤으로 성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한량무에서 비중이 큰 인물은 승려의 출현이다. 승려는 한량과 색시와 함께 삼각관계의 중심에 선 인물이며 탈춤의 노장과장에서도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승려는 등장 후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파계하는 과정에서 종교인으로서의 품위와 가치를 잃게 된다. 이 춤에서 승려는 수도승의 참모습이 아닌 파계승(破戒僧)으로서의 모습은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배불(排佛)정책 내지 억불(抑佛)정책의 일환에서 승려의 인격을 실추(失墜)시키며. 탈춤이 나 각종 민속춤에서 파계승(破戒僧)으로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 의하여 승려들은 환속하여 민간의 재인이나 광대와 어울리게 되면서 승광대(僧廣大)가 되어 사당패(祠堂牌)가 성립되었다. 불교에서 형성된 춤의 대부분은 승광대에 의해 창안된 것이며, 19세기 말에는 사찰에서 춤을 금지하였으며 오늘날 전승되는 각종 민속춤이나 탈춤, 광대놀음에서 승려는 파계승으로 등장시키며 삼각관계로 인해 타락하며 품위를 잃게 된다. 한량무의 배역은 한량, 승려, 색시, 별감, 주모, 마당쇠, 상좌 등 7인이 등장하여 각 배역의 춤에서는 욕망-허망함-깨달음-화합하는 단계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김덕명은 1924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 양산 통도사에 입사하면서 춤의 인생이 시작되었고, 1934년 평양기생 김농주와의 만남으로부터 권번춤의 진수를 전수받았다. 그리하여 김덕명춤의 세계는 사찰춤과 권번춤으로 크게 대별된다. 그는 일반인으로 사찰춤을 계승한 사람이며 남성으로서 기생들의 춤인 권번춤을 전승받았다는 점이 일반 춤꾼들과는 다른 특이점이다. 그의 사찰춤은 ‘양산사찰학춤’, ‘지성승무’, ‘연등나례살풀이춤’, ‘신라장검무’, ‘연등바라춤’ 등이 있으며, 그의 권번춤으로는 ‘교방타령’, ‘교방양반춤’, ‘한량무’, ‘교방진연무’ 등 다양한 춤을 보유하고 있다.그리고 김덕명의 춤인생 경로는 출생지인 양산 동면에서 시작되어 장년기의 진주, 노년기의 김해를 거쳐 다시 양산으로 이어진다. 그의 독특한 춤사위는 춤 인생이 시작된 통도사에서 스님에게 남성의 활기찬 춤사위를 익힌 후 평양명기 김농주로부터 부드럽고 우아한 춤사위를 학습하면서 그에게서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춤사위가 생성된 것이다. 대처승인 양대응·신경수스님은 상좌들에게 춤을 지도하며 각종 재를 도맡아서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다. 그러나 활성화 되어야 할 사찰예술이 단절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재의식을 통제하는 조선총독부의 사찰령(1911년)과 그 이듬해 제정된 본말사법(本末寺法)에 따라 범패가 금지되었고, 해방 후 6.25전란 등 시대 변화와 불교정화운동에 의해 대처승을 정리함으로서 양대응과 신경수 스님도 통도사를 떠나게 되면서 차츰 사찰예술은 종적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통도사의 춤을 보유한 김덕명은 불교중앙문화원 예술원장의 신분에서 사찰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는 일이 잦았고 그와 함께하는 행각스님(魚山僧)의 범패와 바라춤, 승무, 학춤, 연등나례살풀이춤 등은 신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통도사에서 전승된 춤은 통상적 사찰의 춤으로 알려진 작법이나 나비춤과 달리 독창적인 춤이 전승되었다는 것이 특이하며, 전승자 신분이 승려에서 민간예인으로 전이됨으로서 전승단절을 막고 계승할 수 있었다는 것이 변환기인 근대무용사에서 중요한 점이며, 그 전환점에 김덕명이 서있다는 것이 무용사의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어야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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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 명인의 '문둥북춤'문둥북춤은 경남과 부산지역의 고성오광대 탈춤에서 나오는 탈춤으로 즉흥성이 강조된 춤이다. 문둥이 과장은 야류·오광대에만 보이는 독특한 과장으로, 수영야류를 제외하고 현전하는 모든 야류·오광대에서 연행된다. 동래야류는 제1과장 문둥이과장, 통영오광대는 제1과장 문둥탈, 고성오광대는 제1과장 문둥북춤, 가산오광대는 제3과장 문둥이과장, 진주오광대는 제2과장 오탈놀음으로 연행된다. 고성오광대 제1과장 문둥북춤 과장은 양반의 자손으로 태어나 조상들의 누적된 죄업으로 인해 천형인 문둥병에 걸려서 고통을 받는 문둥이가 삶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다가 신명을 통해 이를 승화, 극복하는 내용이다. 문둥북춤 과장은 대사 없이 춤으로만 연행되는데, 문둥이는 놀이가 시작되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며 등장한다. 전위예술가 무세중의 문둥탈춤은 평생 회복할 수 없는 고름 가득한 상처를 가지고 시련을 견디는 모습을 형상화 한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경상도에 들어와서 조선인에게 저지른 코베기 전략으로 인해 코가 없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민초들의 아픔을 보여주고 그것을 몸굿으로 풀어낸다. 무세중은 봉산탈춤(이근성), 양주별산대놀이(김성대), 동래 들놀음(박덕업), 남사당 덧뵈기춤(남형우) 춤사위를 스승에게서 전수 받은 후 1969년 '한국 민속 가면무극 춤사위 종합 전수 발표회'를 가졌다. 민속악회 시나위 정기연주회(1973), 마당극제(1975년), 노비 문서 전시회(1975), 한국 전통 택견 발표회(1977), 무세중 창작 발표회 <전통과의 충돌>(1975)을 공연했다. 1977년 독일로 건너간 후, 자신의 이름을 따서 극단을 설립하고 유럽의 젊은 연기자들과 함께 탈춤과 실험 연극으로 서방 세계를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1982년 잠시 귀국하여 反 이데올로기, 反 테크놀로지, 反 연극을 통한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푸리,(통.막. 살)>를 전위적 표현으로 시도 하였고 초현실주의 그림 작품들을 고통과 잔혹을 표현 하여 이 나라에 신선한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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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53)<br> 김천흥 명인의 '춘앵무' 춤사위춘앵무 19세기 초 조선 순조(純祖) 창작된 궁중정재의 하나로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순원왕후의 탄신 40주년을 기념해 지은 춤이다. 버드나무 가지에서 맑게 지저귀는 꾀꼬리의 모습을 보고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궁중 대잔치 때 화문석 하나만 깔고 한 사람의 무기(舞妓)가 그 위에서 주악에 맞춰 추는 춤으로 무산향과 더불어 궁중무용의 유일한 독무다. 춘앵무는 지극히 절제된 춤을 추기 때문에 그 움직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심소 김천흥은 1909년 한성부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정동보통학교를 졸업 후 1922년에 이왕직 아악부 아악사양성소 2기생으로 입소했다. 1923년 순종황제 오순탄신연에 무동으로 참가하여 '조선의 마지막 무동'으로 불렸다. 해금을 전공, 양금을 부전공으로 하여 1926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1940년까지 이왕직 아악부에 근무하며 아악수, 아악수장을 역임했다. 궁중정재의 대가로 통했으며, 국립국악원 무용단에서 평생 후학을 양성했다. 민속무용에도 일가를 이루어 살풀이춤, 승무로 무대에 서기도 했으며, 2007년 99세로 타계하기까지 국악계의 대원로로 활동했다. 만년까지 국립국악원 무용단에서 이애주, 인남순 등 제자들을 지도했고, 중요한 사승 인맥 중 한 사람이 한성준이다. 궁중무용은 정악 거문고의 대가였던 이수경에게서 배웠으며, 권번 재직시절에는 탈춤과 같은 민속무용을 배우는데에도 주력하여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을 겸전했던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 때문에 살풀이춤이나 승무로도 제법 많이 무대에 섰다.장기는 '처용무'와 궁중 정재 가운데 독무인 '춘앵전'이다. 춤에만 능했을 뿐 아니라 정재 전반의 구성에도 탁월한 면모를 보였는데, 특히 창사(唱詞)도 잘했다. 담백한 창법으로 부르는 그의 창사는 일품으로 꼽힌다. 김천흥(1909~2007) 2006.03~2007.08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명예보유자 2006.03~2007.08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명예보유자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이왕직 아악부 아악수장(1922년~1940년)대한국악원 이사(1945년~1950년)국립국악원 원로사범(1951년~2007년)대악회 이사장(1973년~1993년)대한민국 예술원 회원(1978년~2007년)무형문화재예술단 단장(1983년~1993년)심재 정악단 창단 고문(2004년)문교부 문화보존위원회 위원국립국악원 예술사국립국악원 국악사서울특별시 문화위원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강사경희대학교 강사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수상2001년 금관문화훈장 1997년 방일영 국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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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 221세기 밀레니엄시대(2000년)를 맞이한 김덕명(1924~2015)옹은 어느덧 고희(古稀)도 훨씬 지난 76세였지만 노년기의 공연활동과 지역민속발굴과 지도에는 장년 못지않게 원숙함과 열정이 넘쳐있었다. 2000년 4월19일 <국립극장 50주년 국립무용단 제79회 정기공연> 양산학춤 특별초청공연으로 영남춤 명인 ‘서울 나들이’에 초청되어 갈채를 받았다. 한국경제신문(4.12) 예고기사와 국제신문 디지털뉴스부(4.19)에 네 사람이 펼치는 네 가지 색깔의 춤판에 대한 소개에서 "소리는 호남, 춤은 영남이라는 말은 예로부터 풍류의 정설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영남춤이 한국춤의 주류에서 밀려난 것은 사실이다. 춤이 중앙집중 되었고, 무형문화재 지정과정에서 호남쪽 춤이 주요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4人4色 나흘간의 춤 이야기'를 통해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영남춤이 처음으로 서울의 국립극장 무대에 선다. 이번 공연의 4색이 영남춤판의 주인공은 영남춤의 명인들인 김덕명, 김온경, 이윤석, 하용부이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씨는 양산 사찰학춤을 들고 나온다. 외로이 양산학춤을 지켜온 김씨는 이번 무대에서 이 춤의 원형을 선보였다”라고 알렸다. 이어서 5월 16·17일 호암아트홀무대에 오르게 되자 각종 매스콤에 대서특필하였다. 서울신문(5.2)기사 ‘인간문화재 3人의 전통춤 진수’와 조선일보(5.11) ‘인간문화재 한 무대에’ 기사에는 ‘사상 유례 없을 대원로들의 합동공연이 마련된 무대는 오는 16·17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리는 <제18회 명무명인전>, 세 노옹은 첫날 잇따라 무대에 선다’라고 하였고,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보유자인 김덕명옹은 ‘양산사찰학춤’을 춘다. 신라 선덕여왕때 창건된 통도사에서 대대로 계승되었다는 이 춤은 지난 87년 일본 NHK의 세계춤 종합평가에서 ‘춤의 황제’라는 극찬을 들었다"라고 알렸다. 2002년 9월 6~7일, 공연기획사 이일공과 호암아트홀이 주최하고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 세계민족무용연구소가 후원하는 행사로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공연이 있었는데, 각종 매스콤에 예고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덩실 덩실 얼쑤! 8인 男舞 한마당,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남자들이 추는 정통 민속춤이 한자리에 모인다. 남무(男舞)부재 현상 속에 민속무용은 그나마 궁중무용에 비하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해 왔다는 점에서 더욱 화제다. 특히 문장원·황재기·김덕명은 80대로 민속춤의 산증인이다’ , ‘<남무(男舞), 춤추는 처용 아비들>에서 멋과 흥으로 대변되던 우리 춤의 진수를 선보인다.’라고 했으며, ‘양산사찰학춤의 김덕명(80)은 일본 기생의 잉어춤 등에 능하고 학춤은 국내 최고라는 평이다. 학이 땅에 내려앉아 먹이를 먹고 암놈을 희롱하는 행동을 표현한 춤으로 도포와 갓을 쓰고 춘다.’(서울신문, 8. 29) 그밖에도 연합뉴스(8.29), 한국경제(8,29), 현대불교(8.20), 조선일보(9.5) 등에 예고기사로 크게 보도되었다. 춤판에서 남자춤꾼들의 모습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한국전통무용은 현대무용이나 발레에 비해 '남무부재 현상'이 더욱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춤에 한 평생을 걸어온 8명의 남성춤꾼들이 모처럼 한데 모여 신명나는 놀이판을 벌인다. 오는 9월6일, 7일 이틀간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펼쳐지는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이 화제의 공연이다. 무대에 오르는 8명의 춤꾼중 셋은 이미 80대의 고령으로 이번이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리만 만들어지면 어디에서든 어깨를 들썩이며 일품 춤사위를 뽑아내는 '끼'와 '열정'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옹(80)은 고고한 학의 자태를 빼어나게 형상화한 양산학춤을 선사한다. 훨훨 날다가 내려앉아 두루두루 살피고 먹이를 휙 낚아채는 학의 모습을 선비의 차림으로 유장하게 표현해 낸다.’(한국경제, 8.29) ‘제도권 무계의 변방에 머물러 있는 다양한 한국 전통춤을 만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다. 농악판, 탈춤판, 사랑방 등 선조들의 삶 주변에서 흥겨운 '놀이'로 추었던 춤의 원형질을 맛볼 수 있는 자리다. 아울러 호방한 남성춤을 만나기 어려운 무용계 현실에 비춰볼 때도 분명 이색적인 무대다.(현대불교, 8.29) ‘공연 제목은 설화 속 춤꾼 '처용'에서 따왔다. 출연자들은 공연장이나 학교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전통춤을 지켜온 명인들이다. '무용가'로 불린 적이 없지만 자신의 춤세계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남다른 사람들로, 생활터전의 주변에서 명맥을 이어온 춤의 자유로운 멋과 흥을 느낄 수 있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인 김덕명(80)씨가 선보이는 양산사찰학춤은 양산 통도사에서 전승돼 왔다는 학춤이다. 선비의 평상복인 도포에 갓을 쓴 채로 먹이를 살피다 휙 낚아채는 학을 재현한다. 김씨는 한량을 넘어선 직업 춤꾼으로 양반춤. 지성승무. 한량무. 나례무 등 다양한 춤사위를 보유하고 있다.(연합뉴스, 5.29) ‘무대에 오르는 춤을 보자. 승무, 살풀이, 태평무 등에 비해서는 대접이 형편없는 춤들이다. 그러나 명인들은 이에 연연하지 않고 너울너울 춤추며 한 세상을 보내고 있다. 당대 최고 즉흥춤이라는 문장원의 동래입춤, 맵시있는 자태가 빛나는 황재기의 고깔 소고춤, 한 마리 고고한 학을 연상시키는 김덕명의 양산 사찰학춤, 다양한 디딤의 묘미가 살아있는 정인삼의 진쇠춤, 굵고 시원한 마당춤…. 김덕명(78)옹은 어릴 적 부모가 보낸 절에서 도망쳐 나와 농악패를 따라 나섰다가 춤과 인연을 맺었다.’(조선일보, 9. 5) 2003년 11월 22일에는 <팔십인생의 춤> 학산 김덕명 80인생 정통고전춤 발표회(양산)가 양산문예회관에서 있었다. ‘양산문화원이 주최하고 양산학춤보존회가 주관하는 이번 공연에서는 통도사의 학춤, 승무, 바라춤과 전통 고전춤을 습득하여 올바르게 전승하고 한량무를 발굴하여 경남도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학산의 열정과 그 공을 기리기 위한 무대로 그 문화생들이 자리를 마련했다. 순수 정통 학산 김덕명류의 팔십 인생의 춤이 선보이는 이번 무대에는 ‘지성승무’와 ‘양산학춤’, ‘한량무 극무’등 주위에서 쉽게 감상하기 힘든 10개의 작품이 공연되며 학산 김덕명도 직접 무대에 선다. 학산 김덕명은 양산시 동면출신으로 양산학춤을 오늘의 수준으로 이끌어 올린 장본인이며 불교 중앙문화예술원 원장과 김해시립전통무용단 단장, 국악협회 경남도지부장 등을 역임하며 다양한 춤사위를 선보여 왔는가 하면 후진양성에도 평생을 몸 바쳐 온 예인이다.(경남일보, 11.21) '지난 94년부터 양산학춤과 연등바라춤을 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양산시와 경남도에 여러번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거절당했다'며 '내가 죽기 전에 학춤과 연등바라춤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을 꼭 보고싶다'고 말했다. 또 '전국에 걸쳐 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내가(김옹) 가진 28가지의 춤을 표현하는 제자는 아직 없어 죽기 전에 다 전수할 수 있을지 항상 불안하다'고 걱정한다.‘ (부산일보, 11.28) ‘양산문화원이 주최하고 양산학춤보존회가 주관한 이번 공연은 통도사의 학춤, 승무, 바라춤과 전통 고전춤을 전승하고 한량무를 발굴하여 도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학산의 열정과 그 공을 기리기 위해 문하생들이 마련했다. 이번 무대에는 '지성승무'와 '양산학춤', '한량무 극무'등 주위에서 쉽게 감상하기 힘든 10개의 작품이 공연되며 학산 김덕명 선생도 직접 무대에 올랐다. 불교 중앙문화예술원 원장과 김해시립전통무용단 단장, 국악협회경남도지부장 등을 역임한 학산 김덕명 선생은 양산사찰학춤, 연등바라춤, 지성승무 등의 맥을 잇기 위한 노력으로 문화재 지정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후진양성에 매진하고 있다.(현대불교, 12.1) 2005년 제8회 세계무용축제에서 다시 <전무후무(全舞珝舞)> 국보급 춤의 명인 6명이 무대에 올렸을 때에도 김덕명은 빠지지 않고 양산학춤을 추었다. ‘<전무후무(全舞珝舞, 珝는 옥이름 후)>. 춤의 명인 6명이 한 무대에 오른다. 강선영의 태평무, 김덕명의 양산학춤, 김수악의 교방굿거리춤, 문장원의 입춤, 이매방의 승무, 장금도의 민살풀이춤. 가장 젊은 장금도(77)부터 최고령 문장원(88)까지, 이들의 평균 연령은 82세다. 김덕명 양산학춤은 너울너울 학을 닮아가는 한량을 그린다.’(조선일보, 9.22) ‘김덕명의 인터뷰 중 "학춤 출 땐 정신부터 학이 돼요. 요즘 춤추는 사람들은 장식에 치중하느라 뿌리를 놓치는 것 같아. 우리끼리야 누가 잘 하나 따져 뭘 해. 다들 춤에 미쳤지. 그렇지 않고서야 80 넘어 90이 다 될 때까지 고생고생 하며 춤출 수 있나. 앞으로 열흘 몸 건사 잘 해서 무대에서 구부러지지만 마시소들!(웃음)”(조선일보, 9.28) ‘걷는 것은 두려우나 춤은 두렵지 않다…. 지난 8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오늘 하루를 위해서 일생을 장만해온 것처럼, 몸이 아니라 춤만 남았다….” 어느 이의 말처럼 전무후무한 공연이었다. 젊은날의 그것만 했으련만, 80년 묵은 육신에서 곰삭은 춤 맛은 감히 평할 것이 아니었다. 이날 노무현 대통령 내외 관람하면서 "아주 신명이 났다”며 관람 소감을 밝혔다.’(경향신문, 10.10)(양산신문, 10, 5) 2008년 12월 5일 영남명무전 <무림평전(舞林平定)>이 통영시민회관 대극장에 있었다. 경남도의 전통 춤판을 지켜가는 남성 5인방이 한자리에 모인다. 김덕명, 이윤석, 하용부, 김선옥, 김홍종 선생이 영남명무전 ‘무림평정’(舞林評定)으로 다음달 5일 통영시민회관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경남도 전통춤계의 큰 어른들인 다섯 선생은 전국전통예술계에서도 반열에 올라있는 춤꾼들이자 광대들이다. 이들 다섯 춤꾼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지난달 람사르 총회 기념 인간문화재 명무전에서 한 무대 오른 후 이번에 통영을 찾게 됐다. 우리나라 대표 춤꾼이자 큰 선생인 김덕명 선생은 이번 공연에서 조선시대 양반들의 곧음과 부드러움, 세심함과 단아함을 표현하는 호걸 양반춤으로 통영시민들과 만난다.<경남매일, 11월 24일> 호걸양반춤의 김덕명, 채상소고춤의 김선옥, 통영문둥북춤의 김홍종, 덧뵈기춤의 이윤석, 밀양북춤의 하용부. 경남 전통 춤판을 굳건히 지켜가고 있는 명인들의 춤사위가 통영에서 펼쳐진다. 하지만 이번 공연제목 ‘무림평정(舞林評定)’에는 다른 깊은 속뜻이 있다고 한다. 연출을 맡은 김홍종 선생은 "춤판을 평정한다는 제 잘난 멋의 과시가 아니라, 한 가지 분야에서 올곧게 정도를 지키며 살다보면 누구나 존경을 받아야 하는 세상의 이치를 춤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 속에는 김덕명 선생과 같은 선배를 아울러 모시고 싶은 후배의 마음도 함께 들어 있다고 한다.<양산신문, 12. 21> 구순의 나이에도 정정한 목소리와 자태는 제자들을 사로잡았다. 학산 선생은 공연이 아닌 발표회라는 것도 강조했다. "공연은 돈 받고 보여주는 거야. 발표회는 연습 결과를 보여주고, 관객들이 춤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거지." 양산학춤보존회는 구시대, 장악원 등 전문 예술인에 의해 생성돼, 1930년대에 평양 명기 김농주에 의해 양산권번에 정착됐다. 학산 선생에 의해 이어지고 있는 호걸양반춤의 호탕하고 의기 넘치는 춤도 선보였다. 구운몽을 바탕으로 만든 무언 무용극인 한량무의 해학은 웃음 을 연발하게 했다.<양산신문, 12.4> 2014년 3월20일 진주전통예술회관에서 학산 김덕명선생의 제2회 한량무발표회를 가졌다.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한량무’ 공연은 학산 김덕명선생의 가르침으로 우리나라에 하니밖에 없는 일곱배역이 있는 극으로 된 무용이다. 한량, 색시, 상좌, 주모, 승려, 별감, 마당쇠로 총 9마당으로 구성돼 있다.<진주인터넷신문, 2014. 3.20> 이상에 소개한 신문기사 외에도 많은 공연활동과 전수활동이 있었으나 지면관계로 다 소개하지는 못했지만 구십대에 이르기까지 중앙무대와 향토무대를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무대를 장식하며 남성다운 춤, 영남덧뵈기춤, 사찰계춤의 진수를 보여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김덕명은 양산 통도사와 양산 권번에서 전승된 독특한 춤사위를 지닌 독보적인 춤꾼이다. 그런데 양산학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보류된 안타까움 속에 있을 때 진주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가 진주와 연을 맺게 된 것은 마지막 기녀출신들의 노력으로부터였다. 당시 김덕명은 그가 소원하던 학춤이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에서 보류된 후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이었을 때 연로한 진주의 보유자들이 김덕명을 찾아 지속적인 부탁을 했고 또한 진주는 전국 제일의 종합예술행사인 개천예술제가 개최되는 예향이라는 것과 그의 학춤발굴자였던 서국영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리게 된 것이다. 진주의 예술이 기녀들에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교방이 해체된 후 1913년 기녀들은 스스로 살길을 찾아서 진주기생조합을 결성하였다. 이어 1928년 4월, 김창윤에 의해 진주권번이 운영되었으나 부실하였다가 1938년‘최치환’에 의해 진주예기권번이 창립되었다. 진주권번의 춤 선생인 최완자(崔完子)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주로 감영에 선발되어 궁중연희에 참가했다. 그녀의 제자 김수악(金壽岳), 강귀례(姜貴禮), 강순금(姜順今)등이 1967년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의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김덕명을 모셔와 1976년부터 예향 진주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1979년 5월2일자로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로 한량무가 지정되면서 보유자 김덕명 외 7명으로 등재되었다. 김덕명의 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뜻 깊고 빛나는 업적은 진주와 양산(梁山)지역에서 무형문화재를 전승시켰으며, 민속놀이 발굴과 전승에도 큰 공로를 김해지역에서 문화예술의 밑거름으로 남긴 가락오광대와 석전놀이, 김해농요 등을 발굴 전수시킨 흔적을 볼 때 그를 다재다능한 예술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1990년 후반, 양산시 덕계리에서 망시곱배기놀이 발굴하여 경남무형문화재 제23호 웅상장원놀이로 지정되는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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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수영야류'의 세시적 연희 시기와 장소한국민속 가면극의 세시적 연희 시기는 지역에 따라서 다르나 음력 정초(正初), 상원(上元-음력 정월보름), 단오, 추석, 4월 초파일 등으로 나눈다. 수영, 동래의 야류군(群)과 경남의 오광대군, 경북의 별신굿군에서는 상원이 태반임에 비해서, 해서(海西)지방의 탈춤군에서는 단오절이 많고, 중부지방의 산대놀이 군에는 단오와 추석에 연희해 왔었다. 이 연희시기는 정초와 상원, 단오, 추석이 명절이라는 세시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서 각각 지역적 특성을 나타낸다. 상원에 연희하는 남부지방은 1년의 풍요를 연초(年初)에 기원함이며 단오에 행함은 파종을 마치고 기원하며, 추석연희는 아직 추수전이지만 수확의 기쁨을 표현한다. 수영야류는 고래로 상원날(음력 정월보름) 아침에 당제를 지내고 그날밤에 들놀음을 현행 했으니 수영 들놀음은 동제와 밀착되어 마을 사람들의 단합을 위한 구실을 했던 것이다. 부산, 경남 동제일는 정월 대보름이 약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더라도 야류, 오광대의 연희일시가 상원임은 납득이 될 것이다. 수영야류가 동제와 직결되었음은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집안제사는 씨족적 조상숭배에 의한 결합이라 한다면, 동제는 초씨족적 제례이므로 마을 사람 모두가 참례하는 공동체적 제의로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그리고 각자의 소원성취를 비는 행사이다. 이 동제에 이어서 그날 밤에 연희하는 들놀음도 주인은 동민들이니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수영야류가 1935년 중단되었던 것을 1946년과 1953년에 복원하여 연희할 때에는 음력 12월에 하였으며 그 이후로는 수시로 놀고 있으니 부락공동의 신앙적 사회적 행사가 아닌 오락적 예능의 경향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보존회나 연희자는 마을 사람들과 유리되고 하나의 공연 예능이 되고 만 실정이다. 이 문제는 연희시기가 상원이 아닐지라도 동민과의 유대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연희장소 수영야류의 놀이판은 마을 한 가운데에 있던 시장터였으나 지금은 번화한 상가로 변했고, 길놀이의 시발점이었던 먼물샘(遠水井)도 변하여 사용하지 않고 주로 수영민속예술관 놀이마당에서 연희하고 있다. 1953년에는 경상좌수영성지 내에 있던 구(舊) 수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1971년에는 경상좌수영성지 밖에 있는 현 수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놀았었고, 길놀이의 출발점도 1953년까지는 먼물샘이었으나 1971년에는 마을 북쪽에 있는 서답바위였는데 그 이후는 길놀이를 본래대로 하지 않고 간략하게 축약하였다. 이 판놀이나 길놀이의 장소가 바뀐 이유는 수영의 도시화이다. 놀이판의 장치에 있어서도 1971년 연희 때까지는 마당 한 가운데 장간(長竿)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는 깃발을 달고 그 직하(直下)에 크고 화려한 용등, 봉황등, 거북등, 연꽃등 등을 달고 거기서부터 사방으로 새끼줄을 거미줄처럼 많이 치고 그 새끼줄에는 길놀이패의 소등대(小燈隊)가 가지고 온 2~3백개의 등을 달아야 하기 때문에 장간을 축으로 하여 상하로 승강이동이 가능하도록 장치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보존회에서 연희할 때에는 낮은 지붕으로 인하여 큰 등인 용등, 봉등, 거북등, 같은 것을 공중에 달거나 청사초롱을 달아서 옛 모습의 자주 볼수은 없으나 년1회 실시하는 공개행사에는 지붕을 이용하여 이러한 등을 달고 공연을 하고 있어 잔형을 볼수 있다. 탈놀음은 원래 밤에 연희하기 때문에 조명은 보름 달 빛 아래서 모닥불, 횃불, 촛불을 켰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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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아트센터 목요예술무대, 천하제일탈공작소의 '천하제일탈'공연강동아트센터 목요예술무대에서 천하제일탈공작소와 함께하는 '천하제일탈'을 개최한다 무용, 음악, 연극의 요소가 모두 들어간 종합예술형태인 탈춤은 관객과 함께 판을 만든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우리 전통탈춤을 이북권, 경기권, 경상권 등의 권역으로 나워 선보인다. 연잎, 미얄, 문둥, 이매 등 이름 없는 구낭들이 풀어내는 삶의 희노애락을 탈춤과 라이브 연주로 감상한다. 천하제일탈공작소는 지난해 금천뮤직컬센터 등에서 황해도 강령·봉산·은율, 함경남도 북청, 서울 송파, 경기도 양주, 강원도 강릉, 경상북도 안동, 부산 동래·수영, 경상남도 가산·고성·통영에서 전승되어온 탈춤과 이를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젊은 탈춤꾼들을 3일에 걸쳐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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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 1양산학춤은 2014년과 2016년, 2017년 등 지금까지 네 차례 무형문화재 지정 시도가 있었지만 심사 단계에서 신청자에 대한 관련 단체 전체의 동의를 받지 못해 제대로 심사도 받지 못하고 지정이 무산된 것이다. 양산문화원은 양산학춤 전수회관 건립도 추진하는 등 양산학춤을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 문화자산으로 적극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양산학춤은 통도사에서 전래해 지역에서 동면 출신의 학산 김덕명 옹이 전수해 민간 계보로 전승된 지역 고유 춤으로써 선비 사상을 강조한다. 이병옥 교수가 김덕명의 중후반의 행적을 살피고 예술성과 학술적 가치를 고찰하기로 한다.(편집자 주) 중반의 시련을 딛고 일어선 영남 명무 1975년 11월 5일 제6회 김덕명 전통고전(춤)전수자 발표공연을 부산대학교 대극장에서 마치고 한량무 강습을 할 때 진주팔검무회가 찾아와 진주시립국악원 및 진주 팔검무회의 상임사범을 부탁하여 승낙하게 되었다. 이듬해 1976년부터 1981까지 5년간 진주에서 전통춤을 가르치게 되었다. 1975년 제6회 발표회를 마친 후 그는 모처럼 동래야류 공연이 있어 전수관을 찾아갔다. 그동안 그들과 친분이 있어 공연 후 뒤풀이로 학춤을 선보였던 것인데 때마침 동래야류 공연을 참관하려 방문한 문화재 전문위원 서국영(徐國英)은 그의 학춤을 보고 탄복했다. 그는 즉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는 김천흥(金千興, 1909~2007, 처용무 보유자)에게 발굴할 가치기 있는 학춤을 찾았다고 부산에 올 것을 알리자 소식을 듣고 증인확보를 위해 수제자 이흥구(李興九, 1940~ , 학연화대무 보유자)와 함께 부산에 왔다. 그리하여 1975년 김덕명은 김천흥 일행과 부산 동래별장에서 춤판을 벌였다. 3일 동안 이어진 그의 춤은 독특한 멋이 담긴 춤사위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절로 흥이 났다. 김천흥도 흥이나 직접 궁중정재 춘앵무와 학춤을 추었으며, 이흥구는 김덕명의 남성적이며 호방한 학춤에 반하여 기록수첩을 잃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부산·경남지방에서 전승되는 학춤에는 양산지역 학춤과 이미 1972년 9월 19일 부산시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된 동래학춤 등 두 종류가 있었다. 서국영, 김천흥 조사자들의 공동작업(1975.7.25.~8.25까지 조사활동)으로 이듬해인 1976년 12월 7일 『(양산)사찰학춤』(중요무형문화재 보고 제122호, 1976년5월 보고서 제출)의 무보를 수록한 조사보고서를 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여기서 양산사찰학춤의 유래(寺刹鶴춤의 由來)에 대해 수록내용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사찰학춤에 관한 문헌은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조사할 수 있는 무수(舞手)들을 알아내어 그 계보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양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창건된 이래 그 어느 때부터 인지는 모르나 대재(大齋)행사 때나 종무(宗務)총회 시에 의례(儀禮)행사로서 승무와 학춤을 대대로 계승해 왔다는 말을 명무승려인 신경수(辛景壽, 1893~1965)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보광(寶光)중학교 교장 및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김말복(金末福)의 증언을 얻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조말엽 청종 시대까지의 무수(舞手)승려는 미상(未詳)이나 고종시대인 1980년부터는 이월호(李月浩, 당시 어산종장(魚山宗長)), 1980년대부터는 김설암(金雪岩), 그리고 1920년 이후에는 전술한 신경수와 양대응(梁大應, 1897~1972)등으로 승무와 학춤이 계승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통도사에서는 특히 사찰학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 김말복은 신경수, 양대응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寺下) 부락인 신평리(新坪里)에 나와서 남소석(南小錫, 1904~1960)의 꽹과리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대로 신경수의 사찰학춤이 사하부락에 흘러나오기 이전에 이미 양산군(梁山郡) 동면(東面) 내송리(內訟里)에 학춤이 계승되어 왔는바 향토무용에 관심이 있었던 안화주(安化周, 당시 83세)의 증언에 의하면 동(同) 내송리 거주 김두식(金斗熄, 1843~1930)은 당시 곡수(穀收)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 출입을 한 분으로서 향토무에 자질이 있어 사찰에서 학춤을 즐겨 전수받아 추었으며, 이 춤을 다시 동(同) 부락거주 황종렬(黃鐘烈, 1897~1957)에게 전수했고, 이어 김덕명(52세, 김두식씨의 손자)에게 전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앞에서 언급한 신경수의 사찰학춤의 춤사위를 기억할 수 있다고 하는 김말복은 현재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의 학춤사위를 보고 통도사의 사찰학춤사위와 흡사하다고 인정하므로 김덕명의 학춤은 분명히 통도사 사찰학춤의 계열임을 결정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양산군 동면 내송리에서 전해 온 이 학춤은 정월 대보름이나 팔월추석은 물론 이 이외에도 부락 경사가 있을 때마다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통도사에서는 1935년경부터 이 학춤의 자취가 없어지고 내송리(內訟里)의 민간계(民間系) 학춤만이 겨우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그러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 그에게는 평생의 숙원이었지만 1976년 김덕명의 학춤이 문화재지정에서 보류되었다. 그의 학춤이 보류된 이유로는 사찰학춤의 사찰계의 단절과 민간(재인)계로의 명맥 전승, 명칭의 불확실성(양산사찰학춤, 사찰학춤, 양산학춤 등) 과거 친구의 권유로 동래야류의 이수자에 등록된 것이 사적인 민원으로 영향을 미친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물론 그의 학춤은 조사과정에서 통도사 주지승을 지낸 김말복(金末福)을 중심으로 월하(月下)스님, 성파(盛波)스님, 김동만(金動萬)등 증언자들을 통해 전승경로가 이미 확인되었던 것이며, 양산사찰학춤이란 명칭도 학춤이 양산 통도사에서 전승된 춤이라는 이유에서 발굴조사자들이 정한 것이었다. 전문위원들이 그의 학춤조사를 위해 생존한 증언자들을 찾아다니며 채록할 때 통도사에서 비중이 큰 스님(경봉스님)의 증언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번복된 증언이 반대 세력을 통해 제출되었고, 경봉스님의 고백으로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시키는 대로 번복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김덕명에게 유리한 일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전문위원들이 조사 보고한 학춤은 지정 심의에서 보류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덕명은 1977년 12월 8일에 문화계의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양산사찰학춤’의 특별 강습회 및 실연을 선보이게 되었다.여기에 참가하였던 무용평론가 박용구는 "묻혀있는 우리춤이 제대로 발굴만 되면 훌륭하고 좋은 점이 이와 같이 다양하다”고 감탄했으며, 역시 무용평론가인 조동화도 "어찌 인간으로서 그토록 잘 출 수 있는가?”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예능보유자 김천흥도 흥에 겨운 나머지 그가 춤을 출 때는 손수 장고를 잡으셨다고 하며 덩실덩실 같이 춤을 추실 때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때까지는 동래야류에도 친분을 유지하고 하고 있었지만 지역적인 대립으로 인하여 중도에서 인연을 아주 끊고 말았다.그리고 비록 무형문화재 지정은 보류되었지만 양산사찰학춤 발굴조사로 인하여 김덕명은 중앙의 원로예술인들의 관심을 더욱 받게 되었고, 동연배의 예술인들과 교제하며 입지를 넓혀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김천흥과 성경린(成慶麟, 1911~2008, 이왕직 아악양성소 수료, 국악원장 역임)은 그의 학춤에 매료되어 영남지방의 독특한 덧배기춤을 보급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를 중앙무대의 예술인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던 직접적인 도화선은 1976년 4월 16일 서울YMCA에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특별 초청으로 시연(양산학춤)을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1976년 6월 3일 주위의 권유로 제2회 전주대사습대회에 52세의 나이로 경남 춤꾼으로 출전했고, 심사위원인 김천흥, 최현, 김숙자 등은 이미 서울 시연회에서 그의 춤을 보고 탄복한 바 있다. 양반춤에 내재된 남성의 멋이 담긴 춤사위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서 장내가 떠들썩할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 심사위원들이 그를 찾아와서 격려할 정도였고 그의 춤이 경연대회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한 것이었다. 그 후, 1976년 12월 8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초청으로 2차 시연회를 갖게 되면서 그의 춤은 전승보급에 발돋움하였다. 그가 ‘교방춤’(교방타령굿거리, 교방 살풀이, 교방양반춤)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면서 오늘날 무용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교방’ 명칭을 유행시킨 춤꾼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77년 4월 13일 서울 YMCA 제3회 전통무용 발표회에서 춤을 추었을 때는 400여명의 관객이 모두 찬탄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때 춘 춤은 양산사찰학춤을 비롯한 지성승무, 한량무 등이었다. 그 뒤 한양대학과 이화여대에서 10여 일 간의 강습회를 갖기도 했고, 같은 해 6월6일에는 양산에 있는 양산극장에서 방위성금 모으기를 위한 고전무용 발표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의 호의적인 반응과 함께 호평을 듣기도 했다. 그의 춤에 대한 평으로는 1976년 11월11일자 국제신문에 "양산사찰학춤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1977년 6월 6일자 부산일보에 "20사위에 깃든 庶民들의 애환”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고, 1978년 『산업한국』 3월호에서는 "양산학춤에 대한 역사적 고찰 및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소개된 바 있었다. 1977년 7월에는 진주무용인들의 청을 받아 진주 민속예술보존협회의 전통무용부문 선생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78년 4월에는 진주시립국악원에서도 전통무용을 담당하여 가르쳤다. 11월9일에는 개천예술제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 최우수상을 받음으로써 그의 한량무가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로 지정되고 예능보유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본인뿐만 아니라 같이 한량무를 춘 8명의 무용가들도 모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도록 노력했는데 그 출연자들은 김덕명(한량), 성계옥(승려), 정행금(각시), 정필순(마당쇠), 서정남(별감), 김연이(주모), 최금순(상좌), 김정애(장고)등이었다. 이밖에도 그에게 춤을 사사받은 제자로는 조을주, 박계현 등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본인의 평생 목표인 양산사찰학춤만이 뇌리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양산사찰학춤의 지정보류는 기쁨보다는 아쉬움만 더했다. 이어 1979년 11월 26일에는 서울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전통무용 발표회를 가졌는데 레퍼토리는 양산학춤을 비롯한 한량무, 양반춤, 타령, 굿거리, 지성승무, 나래무(살풀이), 잉어춤 등이었다. 이때에도 그의 춤을 본 김기수(국립국악원 원로사범, 보유자)는 "이것이 춤의 오리지날”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의 활동은 무용에 대한 그의 의지와 욕망에 비례해서 점점 발표회나 전수에 열정을 쏟게 되어 1980년 5월에는 80불교 봉축제의 공연을 가졌고, 8월에는 진주에 "교방청 김덕명 전통무용 연구소”를 냈다. 또한 올바른 전통무용을 후세에 전수하고자 1981년 1월 9일 부산에도 전통무용 연구소를 내기에 이르렀다. 부산과 진주의 연구소를 오가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해 11월 23일은 일본 제총산(帝塚山) 대학의 초청으로 우리의 전통무용을 공연하여 그곳의 유일한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에 "한국의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김덕명!”이라는 제목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1982년 1월 10일에 발간된 계보(季報) 제총산(帝塚山) 대학에는 청초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춤이라고 특집으로 다루었고 그 학교의 교과서에까지 그의 춤에 관한 부문을 서술하고 있다고 한다. 그 후 1982년 3월부터는 부산전문대학 무용과 민속무용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렇듯 그의 무용에 대한 평가가 퍼져나가게 되자 부산지구 J.C신문은 1982년 6월 30일자에 "양반춤에 대한 소고”라는 제목으로 일면 전체를 그의 기사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의 춤이 사찰무용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불교 관계의 제반 공연에도 참가했던 바 1982년 11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불교협회 주최 자선공연에도 참여하여 양산사찰학춤과 양반춤을 추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는 늘 학춤을 출 때면 그 스스로가 학처럼 추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사람이 학이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1996년에도 구희서, 김옥진 조사자에 의해 ‘양산학춤’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하여 명칭을 변경하여 다시 제출하여 학춤이 문화체육부 관보에서 지정을 위한 예고까지 나왔으나 동래학춤과 병행해서 전승과정을 탐문 조사를 하던 중 계보에서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로 부각되어 나타나게 되어 학춤 전승이 부산 동래와 양산으로 분류되었지만 다 같이 이주서(李周瑞, 1865~1930)로부터 전승된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으로 나중에 지정 여부에 논란의 단서가 되었고, 또 다시 주위의 방해(동래 M씨가 문화재청에 찾아가 민원 제기)로 인하여 역시 철회 부결되고 말았다. 이렇게 김덕명은 문화재 지정에 있어서 두 번의 실패를 겪게 되면서 좌절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김덕명 전승춤의 전승계보 김덕명(金德明,1924~2015)은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8살(1932)에 범어사에 들어가 불가(佛歌)를 부르거나 불교(佛敎)의식무를 흉내 내었다. 김덕명이 전문적으로 전수받은 춤 계보는 4가지로 정리되며 그중 민간춤놀이는 마을전승이기에 계보로 말할 수 없다. 첫째, 사찰에서 전승하던 학춤은 고종 때부터는 이월호(李月浩, 1825년생, 당시 어산종장)―김설암(金雪岩, 1885년생)―신경수(辛景壽, 1893~1965)―양대응(梁大應, 1897~1972, 통도사 주지) 스님으로 계맥이 이어져 김덕명 씨가 보유하고 있다. 그때 양대응스님은 조부 김두식(金斗熄)과 절친한 사이로서 양산학춤, 지성승무, 바라춤의 명인이었는데, 1940년 16세에 이 춤들을 전수받았다. 또 당시 해인사에 있다가 통도사에 온 신경수스님으로부터 승무와 학춤을 전수받았다. 즉 두 분(신경수, 양대응)의 스님으로부터 사찰춤을 전수받았다. 둘째, 민간인으로부터 전수받은 재인춤은 통도사 소속의 민간인 김두식(金斗熄, 1843~1929, 김덕명 조부)이 곡수(穀數, 수사찰 재산 관리자)로 있으면서 학춤을 전수했는데 민간인 안화주(安化周, 1894~1965), 황종렬(黃鍾烈, 1897~1957)이 전수받아 다시 김덕명이 이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셋째, 기방춤으로 이주서(李周瑞, 1882년생)―고수길(高壽吉, 1888~1965, 당시 양상 권번 원장)으로 이어지는 춤맥을 전수받게 된다. 양산권번의 권번장(춤사범)인 고수길(高壽吉, 1888~1965, 동래권번에서 양산권번이적)로부터 그의 딸 고채봉(高綵峰)과 고채숙(高綵淑, 기명은 山月)과 함께 한량무, 교방양반춤, 교방타령무, 신라장검무, 교방진연무, 태극무 등을 배웠으나 사찰춤과 춤바디가 달라 애를 먹었다. 이어서 개성권번에서 양산권번으로 이적해온 김농주(金農宙, 1905~1955)와 오누이를 맺으며 기생소고무, 타령춤, 굿거리춤 등을 배웠고, 군무(群舞)로는 장원급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40~50여명의 인원이 함께 추는 부마도위춤도 배웠다. 넷째, 그가 복원한 민간춤놀이들은 딱히 전승자를 밝힐 수 없는 지역민들이며 김덕명은 탈춤과 토속민요 등 향토민속적인 기예능도 뛰어나 지역민속을 발굴하는데 참여하여 발굴한 것들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종목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사찰춤과 권번춤과 민간춤으로 크게 3계통으로 대별된다. 그는 일반인으로 사찰춤을 계승한 사람이며, 남성으로서 기생들의 춤인 권번춤을 전승받았다는 점이 다른 춤꾼들과는 다른 특이점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27종은 크게 3계통으로 기방계(10종), 사찰계(4종), 민간계(13종)이 있다. 1. 기방계춤으로는 한량무(한량, 기생, 승려, 주모, 별감, 상좌, 사환 등), 교방타령춤, 교방양반춤(호걸양반춤), 교방진연무, 기생소고춤, 굿거리춤, 신라장검무, 태극무, 부마도위춤(군무), 장기춤. 2. 사찰계춤(재인계와 혼합)으로는 사찰학춤, 지성승무, 연등바라춤(탑돌이춤), 연등나례살풀이춤. 3. 민간계춤으로는 성주풀이춤, 쾌재나 청청춤, 각설이타령춤, 신노심불노춤, 농사요놀이춤, 장원급제놀이춤, 기우제놀이춤, 망시꼽배기놀이춤, 가락오광대놀이춤, 석전놀이춤, 망부석사록놀이춤. 회심곡춤, 떳배기춤(得排鬼춤). 김덕명의 춤사위 특징은 첫째, 특별한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정신 집중과 무게, 관절조절을 통해 안정적인 자세로 이루어지는 동작이라는 점이다. 단전을 이용한 깊은 호흡과 기가 조화를 이루며, 발을 디디고 누르는 굴신동작의 걸음걸이에서 관절의 유연함이 나타난다. 남성의 투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춤사위는 사찰춤과 권번춤에 두루 정통하여 지극히 예술적으로 승화된 춤이다. 쌍벽을 이루는 동래학춤은 이주서로부터 김귀조, 김문수, 김필상, 최순백, 김태현, 유봉오가 학춤을 사사 받았고 김귀조는 아들인 김희영에게, 김문수는 아들인 김동원에게 각각 전수하였으며 작고 이전에 김희영이 외조카 이현경에게 전수하였으나 중단되었고 김동원이 유일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현재 구음보유자로 유금선이 지정되었으며 김태형, 이성훈이 기능보유자 후보로, 김정양 이광호가 전수조교로 꾸준히 전승하고 있다. 이에 비해 양산사찰학춤은 1976년 당시 무형문화재보고서 조사자 서국영의 기록에 의하면 김말복이 증언하기를 1880년대 이후 이월호(1852~?), 1983년대부터는 김설암(1885~1970), 1920년 이후에는 신경수(1893~1965)와 양대응(1897~1972)스님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부락인 신평리에 나와서 남소석(1904~1960)의 꽹쇠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양산사찰학춤」이 통도사에서 전승되었음은 민간인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윤장우씨는 1938년부터 통도사 광원에 있으면서, 1945년까지 절에 있었는데 스님들 중에서 끼가 있는 스님들이 사하부락인 평산리 주막에서 춤과 소리를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태어나 하북면의 면장이 된 지명구씨는 어릴 적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양대응(1897~1972)스님이 장구장단에 맞추어서 학춤을 추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통도사에 있었던 신경수(1893~1965) 스님은 당시 명무 승려로서 학춤을 잘 추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사찰에서는 대제(영산재 등)를 지낸 후 신도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사찰경내 마당에서 사찰의식 외에 여흥을 펼치는 사례가 많았다. 이때 외부에서 놀이꾼을 초빙하기도 하고 또는 장기가 있는 승려가 직접 춤을 추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김덕명(1924~2015)은 통도사에서 신경수, 양대응 스님에게 「양산사찰학춤」을 배웠다. 남사당의 북소리에 이끌려 동네잔치에서 춤을 추는 김덕명을 부모는 아들이 혹여 광대라도 될까 통도사로 보냈으나 오히려 통도사에서 「바라춤」, 「지성승무」, 「장검무」, 「학춤」 등을 배웠다. ‘학산’ 이라는 호는 절에서 나올 때 통도사 보화스님이 지어 주었다고 한다. 학춤공부를 많이 한 덕명이 나무 위에서 학이 날듯, 학춤을 잘 춘다는 뜻이었다. 위의 계보 외에 「양산사찰학춤」을 추었던 스님들은 더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점차 사찰계에서 학춤의 자취가 사라지고 현재는 추어지지 않고 있다. 둘째, 민간(재인)춤의 형성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무형문화재 보고서 제 122호에 따르면, 처음 민간으로 전승되어진 과정은 김두식(金斗熄1843-1930)에 의해서였다. 김두식은 당시 곡수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를 출입했으며, 사찰에서 학춤을 전수받아 추었다. 이 춤을 다시 동부락 거주 황종렬(黃鐘烈,1897-1957)이 전수받았고 이어 김덕명(金德明)에게 전해졌다. 동면의 황종렬은 춤에 대한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동면 내송리 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주도적으로 춤을 통해 흥을 도왔다고 하며 양산 출입도 매우 빈번했다. 특히 내송리에 있는 주점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의 전승계보 외에 양산에는 학춤을 즐겨 추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양산에서 명무수로 이름난 이주서(1869-1944)란 사람이 학춤을 잘 추었으며 당시 이 춤이 서상건(1982-1967)에게 전승되었다며 1976년 당시 조사자인 서국영에게 증언하였다. 서상건씨는 양산에서 가장 큰 포목점(일신상회)을 경영하면서 매우 부유하게 생활하였고, 풍류를 즐겼던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춤을 즐겨 추었다. 그래서 양산에서는 그의 별호가 "춤 잘 추는 서상건”이란 소문이 생겨났고 주로 동래온천장에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우성렬(1930- :서상건의 먼 친척)씨가 증언하였다. 이렇듯 양산에는 여유로운 풍류객들이 많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김두식, 황종렬에 이어 김덕명은 통도사에서 학춤을 배웠으며 민간에서 또한 전수받아 꾸준한 활동과 「양산사찰학춤」의 보존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감덕명이 증언(2015. 5.16, 김덕명자택에서)한 지성승무에 대한 배경설화는 다음과 같았다. 지성승무는 두 가지가 있는데 군무와 독무로 춘다. 김덕명 선생님이 중언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어느 사찰의 스님이 불도를 닦다가 탁발하려 동네에 내려갔는데, 동네 어구의 밭두렁에서 어린아이가 풀을 뜯어먹고 있어 의아하게 생각하여 아이를 업고 동네를 들어가니 마을사람들이 돌림병으로 모두 죽고 아이만 살아서 먹을 것이 없어 밭두렁에서 풀을 뜯어먹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스님이 아이를 데리고 사찰로 돌아와 상좌승으로 키우게 되었다. 그 후 상좌가 두 명(악기다루는 어산상좌, 수발과 교육하는 상좌)이 있었다. 그 후 노승은 불법해탈을 위해 토굴에서 여러 해를 불법을 깨닫기 위해 참선을 하며 불공을 드리고 마치고 돌아서 나오던 중 연유도 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뒤에서 함께 불공을 드리던 상좌가 심히 놀라 동분서주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고 상좌의 보살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승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노승의 시신을 끌어 앉고 통곡을 하던 상좌도 너무 슬픈 나머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어려서 데려다 키운 상좌는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노승이 쓰러지니까 슬픔이 깊어 기절해 같이 쓰러진 것이다. 상좌가 기절하여 비몽사몽간에 백발도승이 검은 지팡이를 짚고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지팡이를 쿵쿵 두드리며 "네 이놈 상좌야! 노스님은 너의 불거지운명(不居之運命)로 너의 살기(殺氣)에 스님이 죽어가고 있는데 너마저 누워 있으니 한심하구나! 빨리 일어나 스님을 구해라!” 하고 도승이 지팽이로 "꽝!”하고 땅을 치는 호통소리에 놀라 상좌가 벌떡 일어나 "소승의 스님을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을 하며 세세사정을 말하니 "허허, 너의 갸륵한 마음이 기특하니 노스님을 살리는 비법과 방도를 가르쳐 줄 테니 그대로 이행하거라” 그러자 순간 몇 명의 악단이 좌우로 둘러앉아 장단이 울려 퍼지고 도승은 가락에 맞춰 춤을 추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추는 춤을 잘 보아라. 이 춤을 너의 노스님 앞에서 정성껏 추게 되면 분명코 살아날 것이다.” 이어 말하기를 "그러나 너는 나와 몇 가지 약조를 꼭 지켜야 한다. 노스님이 살아나시거든 내가 전해준 그 승복을 벗어 북에 걸어 두고 소생하신 노스님을 부축도, 말도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곳에 잠시도 지체 말고 노스님과 바로 하직하고 남으로 계속 내려가면 깊은 산골짜기에 암자가 있을 것이니, 그 암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필경 성불할 것이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있는 상좌에게 도승은 다시 "노스님과 너는 숙명적으로 액과 악이 맺혀 영원히 동거생활이 불가능하리라. 만약 나의 명(命)을 어기면 너와 노스님은 변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놀라 깨어난 상좌는 선몽이 분명하며 옆에 도승이 준 승복과 염주가 있어 착용하고 노스님을 살려야한다는 일념으로 어려워 잘 생각나지 않는 춤이지만 정성껏 춤을 이어 추었다. 그러자 노스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몸을 돌리며 긴 숨을 내어 쉬며 깨어났다. 환희에 차 기쁨의 춤을 추며 노스님을 부축해 일으키고 싶었지만 도승의 명을 염두에 두니 앞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노스님을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상좌의 마음은 오죽했겠지만 등지고 떠나 일러준 남으로 가서 암자에서 노스승을 살린 고귀한 이 춤의 연유를 고이 간직하여 후세에 물려주며 이르기를 "이 춤을 지성껏 전수시켜 만대에 전하라” 이르렀고, 이름 하여 '지성승무'라고 전했다.” "나(김덕명)는 춤이라면 좋아서 승무든 학춤이든 열심히 배웠다. 하루는 내가 잘 아는 통도사 스님(당시 대처승, 단청제작)이 내려와 보시고 승무 내용이나 아나? 하시면서 한 시간에 걸쳐 승무설화를 이야기를 해주셨고, 스님 급수에 따른 가사장삼에 대한 복색이야기도 해주셨다. 당시 금강암(지금은 비구니들이 기거하는 암자)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부인이 기거하였다. 그때 이동안(수원화성재인청 소속, 발탈보유자)이 부산에 내려와 활동할 때인데 내 스승이라 하면서 암자 작은방을 소개하여 공짜로 기거할 수 있게 해주고 살림과 음식장만을 내가 다해주었다. 광대줄타기를 했는데 기능이 약해 그 후 다시 서울로 갔다.”한편 향토민속예술의 발굴활동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하여 ‘진주의 한량무’, ‘김해의 석전놀이’, ‘가락오광대’, ‘양산의 웅상망시곱배기놀이’등이 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김덕명이 결코 춤을 떠날 수 없었던 춤 인생은 세속적인 고초를 겪으면서도 단념하지 않은 운명이었다. 그렇게 걸어온 그는 남성의 멋을 잃지 않았고, 굵은 선과 힘, 부드러움이 조화된 그만의 특출한 춤사위를 지켜왔다. 오늘날 남성춤이 중성화 또는 여성의 모습이 강하게 묻어나온다면 그의 한량무와 학춤은 남성의 장점을 표출시킨 것으로 남성춤의 지존을 지킨 마지막 사찰춤과 영남춤꾼이었다. 김덕명 춤사위 성향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크게 두 가지 계통을 잇고 있다. 우선 사찰계통춤의 춤이며, 다음은 기방계춤이다. 그렇다면 그이 춤은 어떤 계통의 성향일까? 전수내용적으로는 사찰계와 기방계의 혼합성향이지만 그의 인생 후반에 나타난 춤 성향은 기방계통보다는 사찰계(재인계)적 성향이 월등이 높게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에 김농주로부터 엄격한 기방춤 기법을 몸에 익혔지만 성장하면서 기방춤의 교태미는 사리지고 남성성향이 큰 재인계적 성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게다가 거구의 체격에다 탈춤에서 나타난 영남춤의 덧배기춤적 특성을 강렬하게 품고 있어 국내 전통무용가 중에서 가장 영남성향과 재인성향을 간직한 춤꾼이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기방계적 섬세함이 덧씌워져 있어 거친 남성성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올곧은 전통춤 즉 기방춤의 섬세한 기법이 몸에 배어나 춤집이 크고 활기가 넘쳐도 투박한 마당춤이 따를 수 없는 표현력을 지녔다. 비교의 예를 들자면 동시대 같은 남성무용가라도 이매방은 어린 시절 처음 입문한 춤이 기방춤(권번 함국향의 첫 가르침)으로 형성된 춤바탕이었다. 그 후 재인춤인 이대조, 박용구의 춤들을 익혔지만 이미 몸과 마음의 성향이 기방계로 고착된 춤성향이 평생춤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래서 이매방춤은 기방계통성을 지켜온 ‘춤속’과 ‘춤바디’를 평생 지켜 전승한 것이다. 반대로 김덕명은 맨 먼저 체득한 춤이 사찰계춤이다. 사찰계의 특성은 재인계적 성향과 불교의례적 성향이 혼합된 것이지만 김덕명은 범패작법을 주로 행하는 어산승(魚山僧)이 아닌 민간인이었기에 춤성향에서 불교의례적인 성향은 약화되고 재인계적 성향만이 남게 된 춤성향이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김농주라는 개성권번에서 활동한 명기의 가르침도 어린 시절에는 기초로서 가능했지만 성인이 되면서는 춤의 본성이 나타난 것이다. 마치 궁중의 무동들처럼 어린 시절에는 중성적인 성향으로 여성적인 고운 춤을 익혔어도 사춘기를 넘어서면 남성성향이 나타나 악사로 전향하거나 퇴출한 것과 같은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하나 그간 문제가 되었던 동래학춤과 양산사찰학춤의 전승계보에서 윗대에 같은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라는 점으로 양쪽 학춤의 실존성은 함께 증명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전승과정에서 성향이 아주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즉 현전하는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을 비교해볼 때 동래학춤은 동래권번을 중심으로 전승되다보니 기방계적 성향이 강해졌고, 동래는 부산이라 춤추는 인적자원이 풍부해 군무형태로 전승되었다. 이에 비해 양산은 시골이라 춤추는 인적 자원도 부족하고 통도사를 중심으로 전승한 사찰춤으로 재인계적 성향이 강화된 춤이다. 따라서 두 지역 학춤을 보면 동래학춤은 기방계적 성향에다 동래기생 유금선(1931~2014)보유자의 구음소리가 흥을 돋우어 곱고 부드러운 날개춤사위로 여러 마리 학이 어우러지는 ‘기방계적 군무학춤’으로 발전하였고, 양산학춤은 사찰중심으로 춤집도 크고 활기 넘치는 춤사위로 전승한 ‘사찰(재인)계적 독무 또는 쌍무 학춤’으로 차이가 있다. 학춤사위의 구체적인 표현에서도 동래학춤은 학의 형상을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데 비해 양산학춤은 학의 생태성과 겉모습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춤사위가 많다는 점이다. 즉 동래학춤은 동래야류의 양반춤사위 중에 학춤과 유사한 배김사위, 옆걸음사위, 활갯짓 뜀사위 등과 모이 줍는 사위, 외발사위 정도이고 양팔을 어깨 위로 들고 추는 날개사위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발사위도 한쪽다리를 구부려들고 다른 쪽 다리는 길게 뻗어 학의 긴 자태를 나타내는 발사위 특징을 보이며 주무수와 조무수가 윤무형태의 군무로 대형변화가 많은 점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양산학춤의 팔사위는 학날개, 학머리로도 표현하고 땅에 내려앉는 사위, 위엄을 보이는 사위, 좋아서 으쓱이는 사위, 먹이 쪼는 사위, 놀라 펄쩍뛰는 사위, 짝을 어르는 사위, 동사위, 비상하는 사위 등 24가지 학의 습성을 나타내는 학춤사위가 다양하며 발사위는 양다리를 균등하게 구부리며, 독무나 군무로 출 때도 앞으로만 진행하거나 시계반대방향으로만 진행하는 등 대형보다는 학춤사위에 치중하여 동래학춤과는 사뭇 다르고 다양하며 예술성이 높고 활기가 넘친다. 또한 양산권번 고문인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권번으로 가서 학춤을 전승시켰다고 하는 것은 학춤의 본류가 양산(통도사)이고 지류가 동래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며, 양산과 동래의 춤전승 환경이 달라 서로 달라진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지역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동래는 이주서의 학춤 영향력이 절대적이고 단일적 계보(이주서>김귀조, 김문수>김희영, 김동원>유금선, 김태형, 이성훈)였다면, 양산은 이주서 외에도 동시대 전승자(김설암, 김두식, 고수길)도 많았고, 계통 계보도 사찰계(김설암>신경수>양대수>김덕명), 재인계(이월호>김두식>안화주>황종열>김덕명), 기방계(이주서>고수길>김농주>김덕명) 등 다양하였기에 학춤의 풍부한 내용과 전승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은 같은 영남지역춤이라 할지라도 춤성향과 춤사위 특징이 많이 달라 무형문화재로 양산학춤을 지정하는데 동래학춤이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산사찰학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보까지 올랐으나, 동래 측의 반발로 무산된 것은 한국전통춤 중에서 가장 남성다운 학춤(한량무 계열)이 지정되지 못하게 되어 여성성이 강한 살풀이춤, 태평무, 승무 등만이 편중되는 역사적 오류를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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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별산대놀이·영산줄다리기…온 가족 즐기는 '무형문화재'가정의 달 5월에는 온가족이 함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직접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와 '전승자 주관 기획행사'를 전국 각지에서 개최한다.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는 무형유산의 대중화와 보전·전승 활성화를 위해 국가무형문화재의 원형을 실연하는 형식으로 매년 개최된다. 어린이날부터 시작되는 3일간의 연휴에는 ▲'양주별산대놀이'(5.6.)를 만나볼 수 있다. 중부지방의 탈춤을 대표하는 양주별산대놀이의 춤과 무언극(無言劇), 덕담과 익살은 온가족이 다함께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줄 것이다. ▲'연등회'(5.20.~5.21.)는 종교행사이자 민속행사로서 통일신라 때에도 실시 기록이 남아있는 가장 큰 전통 문화 행사 중 하나이다. 흥인지문부터 시작해서 조계사까지 이어지는 웅장하면서도 다채로운 매력의 연등행렬은 연등회 유튜브로도 만나볼 수 있다. 전승자 주관 기획행사는 국민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전승자가 자유롭게 기획한 공연과 전시로, 5월에만 총 25건의 공연과 전시가 전국에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다. 특히, 경상남도 창녕에서 전승되고 있는 '영산줄다리기'(5.10.)가 올해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운동장에서 기획행사로 진행된다. 이번 행사는 무형문화재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자 특별히 기획되었으며, 줄 만들기부터 줄다리기까지의 전 과정을 서울에서 이색적으로 볼 수 있어 관람객에게 잊지 못할 5월의 추억을 선사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의 상세일정은 국립무형유산원 누리집을 방문하거나, 한국문화재재단으로 문의하면 일정, 장소 등을 자세히 안내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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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인정하는 송파산대놀이, 보러가자29일 토요일, 오후 3시 제58회 송파산대놀이 정기공연이 개최되는 서울놀이전수관을 찾았다. 반가운 봄비가 소슬소슬 내리는 가운데 둥근 돔 모양의 천막으로 친 마당에서 신명나는 탈춤판이 벌어졌다. 많은 사진작가들이 앞 줄에 자리를 잡고 박경래 송파구청장, 김웅 국회의원, 정창래 송파구의회의장을 비롯한 김광철, 장종례, 이강무, 전 정 의원이 참석해서 2시간이 넘는 공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켜 주었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탈과 탈춤의 기원은 원시 수렵과 어로생활에서 동물탈을 쓰고 위장하여 사냥의 성과를 올리는 한편, 사냥 성공을 기원하며 탈춤을 추거나 그 염원을 표현한 데서 비롯되었다. 서울경기에서는 '산대놀이' 혹은 별산대놀이, 황해도 지역에서는 '탈춤' 도는 '놀탈', 강원도 지역에서는 '탈놀이'로 경상도에서는 '들놀음', '오광대', '탈놀이', '별신굿놀이'라는 명칭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약 250여 년 전부터 송파진, 현재 잠실 석촌호수 남쪽 주변,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한강 줄기 주변에 서던 송파장을 중심으로 연희되어 온 산대탈놀음이다. 1973년 11월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산대놀이는 구파발, 애오개(阿峴), 사직, 녹번, 노들(露梁津) 등지에 전승 되었으나 모두 소멸되었다. 현재는 경기도 양주와 서울의 송파지역만이 전승되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퇴계원산대놀이가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22년 ‘한국의 탈춤’ 18종이 유네스코 인류뮤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병옥 교수에 의하면 "송파산대놀이는 오늘 보여주는 탈놀음 12마당이 온전히 전승되고 있으며, 탈 32개가 되는 산대도감 탈들이 거의 보존되어 있어 비교적 고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전한다. 연희 순서는 먼저 산대놀이 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며 탈춤을 추면서 길놀이로 마을과 장터를 돌아와 탈을 벗어 고사상 앞에 놓고 탈고사를 지낸 다음 12마당을 진행한다. 기미양 객원기자가 당일 행사장에서 이병옥 명예보유자에게 송파산대놀이의 전승주체 및 연행과 예술성에 대해 살펴보았다.(편집자 주) Q. 송파산대놀이 유래 및 역사는 A. 조선시대에는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국가적 행사를 담당하여 산대도감놀이가 성행하였다. 산대도감 폐지 후 산대놀이패들이 처음에는 애오개(현재 서대문구 아현동 일대)에 본거지를 두고 민간인들을 상대로 탈춤을 추었기 때문에 이것을 ‘본산대(本山臺)’라고 하였으나, 점차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가 사직골, 녹번, 구파발, 노들(노량진)에서 전승되다가 소멸되었고, 지금은 그 맥을 이은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 퇴계원산대놀이만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송파진은 전국 15대 향시(鄕市) 중의 으뜸인 상역지로 강원도의 뗏목상인과 삼남지역의 마행상과 보부상들이 몰려들어 270여개의 객주집이 성행한 장터였다. 연희형태는 춤이 주가 되고 시대상을 풍자하는 재담과 창 등 여러 가지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송파장은 270호의 객주가 성업을 이루어 산대놀이가 성행하였으나 을축년(1925) 한강 대홍수로 송파장과 마을 전체가 유실되어 신송파로 물러나면서 자연히 산대놀이도 시들해졌다. 그 후 송파산대놀이는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신송파 옛 장터에서 전수하다가, 1985년 잠실 석촌호수 공원 안에 송파산대놀이 전수관과 서울놀이마당을 건립하여 전승되고 있습니다. Q. 송파산대놀이라는 명칭에서 '산대'라는 명칭은 A. 서울, 경기지방에서 전승되는 탈춤을 산대(山臺)놀이라고 부르며, 현재는 양주와 송파 두 지역의 '산대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산대(山臺)라는 명칭은 일명 채산(彩山), 채붕(綵棚)이라는 가설무대로서 주로 궁중에 설치하였습니다. 송파산대놀이처럼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 성행한 ‘가면극’에 ‘산대놀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산대놀이의 ‘산대’가 뫼 산(山) 자에 무대 대(臺)자로 이뤄진 것과 같이 ‘산과 같이 큰 무대’, ‘비단으로 장식된 무대’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놀이가 열린다’라는 깃발을 들고 돌지만 예전에는 산대놀이를 앞두고 조금 큼직하게 만든 우마차 위에 얇은 판을 깎아 산 형상을 층층으로 올려 만든 ‘산대’를 끌고 다니며 연희 구경을 오라고 알렸다고 합니다. ‘산대’라는 이름도 그래서 붙여졌습니다. Q. 양주별산대놀이에서 '별'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A. 양주별산대놀이의 경우 이름에 ‘별’ 자가 추가된 것은 기존 놀이패들의 맥을 이은 것이 아니라, 양주읍에서 ‘별도’로 만들었다고 해 붙여진 글자이고, 노들산대, 구파발산대 등을 이은 송파산대놀이야말로 조선 시대 산대놀이의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고 봅니다. Q. 한반도 지역 탈춤 중에서 한양과 가까운 송파산대놀이와 양주산대놀이는 주로 궁중에서 많이 연희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나요. A. 특히 송파산대놀이는 궁중 연회에 가장 많이 불려갔습니다. Q. 그렇다면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의 전승 주체를 담당했던 계층은 다른가요. A. 양주는 관원들에 의해 전승되었고, 송파는 장터의 장꾼들과 마을주민에 의해 전승되었으며, 주로 사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에 송파 장터에서 상업적 흥행을 목적으로 펼치던 놀이입니다. Q.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와 비교한다면 기원과 등장 인물이 다른가요? A. 기원과 유래를 보면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는 차이점이 분명히 있다. 송파는 나루터여서 장꾼의 속성을 반영, 타령장단의 신명 나는 놀이춤으로 발전했고, 양주는 관에 대한 예속성 때문인지 염불장단에 의식춤이 발달했고,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초라니·당녀(唐女)·해산어멈·신할멈·무당탈 등이 남아 있습니다. Q. 탈춤의 매력은 무엇인지요. 예술성에 대해서 정의한다면 A. 춤(무용)과 음악·연극의 요소가 융합된 탈춤은 전통 공연예술과 무형문화유산을 상징하는 종합예술입니다. 내용과 형식의 자유로움이야말로 표현의 자유이고 바로 예술성의 조건이지요. 특히 사회비판적 주제는 현대의 다양한 예술창작에 영감을 제공하면서 재창조되고 있습니다. Q. 반주음악은 A. 반주음악은 삼현육각(三絃六角/ 장구, 북, 피리2, 대금, 해금)의 악기구성으로 염불 12박, 타령, 굿거리장단이 주가 되며, 당악, 자진타령, 자진모리, 휘모리장단 등이 쓰인다. 춤사위로는 염불 거드름춤, 타령 깨끼춤, 굿거리 건드렁춤 유형으로 나뉘며, 40여종의 춤사위로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Q. 그래서 탈춤을 보다 보면 이 세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서나 대치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갈등이 핵심이라는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A. 그래서 일년 중 하루쯤은 지배자 집단이 억압 받는 피지배자들에게 그날은 욕도 먹고 너희들 목소리도 한번 질러보라고 풀어줍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변혁성을 가지고 있죠. 탈춤의 마무리는 갈등과 대립의 화해, 나아가 상호존중을 통해 사회 전반의 조화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연희 종목 중 탈춤만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탈춤이 우리 무형문화유산을 넘어 인류가 함께 즐기고 향유하는 무형유산이 되었다고 봅니다. Q. 송파산대놀이의 열두 마당순서는 다음과 같다. A. 첫째 마당은 상좌춤놀이, 둘째 마당은 옴중, 먹중놀이, 셋째 마당은 연잎, 눈끔적이놀이, 넷째 마당은 애사당 북놀이, 다섯째 마당은 팔먹중 곤장놀이, 여섯째 마당은 신주부 침놀이, 일곱째 마당은 노장놀이, 여덟째 마당은 신장수놀이, 아홉째 마당은 취발이놀이, 열 번째 마당은 샌님말뚝이놀이, 열한 번째 마당은 샌님, 미얄할미, 포도부장놀이, 열두 번째 마당은 신할애비, 신할미놀이이죠. Q. 보다보니 등장인물마다 여러 춤사위가 나와서 웃음이 나옵니다. 장단에 따라서도 다르면서 유사한 춤사위가 궁금합니다. A. 춤사위는 염불장단의 거드름춤, 굿거리장단의 건드렁춤, 타령장단의 깨끼춤으로 상위개념으로 불린다. 염불장단의 거드름춤은 특수 배역만이 추는 춤으로, 첫 상좌의 합장재배와 사방재배, 옴중의 용트림, 노장의 복무(伏舞)와 함께 부채춤, 팔뚝잡이, 활개펴기, 활개접기, 장삼치기, 복무, 삼진삼퇴 등이 있습니다. Q. 송파산대놀이 춤의 기본이 되며 흥과 신을 풀어내는 춤, 여러 탈춤 중 송파산대놀이 춤사위 중 깨끼춤이 백미 중 백미라고 하는데, 과장마다 등장 인물마다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네요. 가장 인기있는 깨끼춤은 A. 탈춤 중 송파가 가장 많은 춤사위를 보여주고 있고, 40여 종이나 넘네요. 집단적이며 민중들의 순수한 감정에서 생성된 춤이기 때문에 주로 팔먹중, 취발이, 말뚝이와 같은 민중성을 띤 인물들이 춤을 춘다. 깨끼춤 종류로는 화장무, 반화장, 자진화장, 곱사위, 여닫이, 긴여닫이, 배치기, 어깨치기, 깨끼리, 염풍댕이, 돌단이, 거울보기, 팔뚝잡이, 멍석말이, 덜미잡이, 자라춤, 장단먹기, 궁둥치기, 배춤, 갈지자춤, 몰아치기, 장삼치기, 한삼치기, 몰아치기, 장삼치기,한삼치기, 맞춤[對舞]과 더불어 양반까치걸음, 취발이까치걸음, 빗사위, 갈지자걸음, 뒷짐걸음, 원숭이재롱춤, 활개걸음, 건드렁, 껑충걸음 등의 걸음걸이가 있다. 그 중 가장 인기있는 춤은 기본적인 화장무가 가장 섹시하고 화려한 춤새를 보여주죠. Q. 굿거리장단에 맞추어서 추는 건드렁춤은 주로 다음 막이 오르때,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건들건들 거리면서 나오니까 관중들이 와 하면서 흥을내는 데요. 등장인물마다 추는 춤새가 정해져 있고, 다양한 것 같아요. A. 건들걸음의 춤사위 종류는 뒷짐사위, 들사위, 쳐들사위, 흔들사위, 돌사위, 멜사위 등이 있다. 그밖에 배역에 따라 연닢·눈끔쩍이는 한손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손은 뒷짐이나 들사위로 등장하고, 말뚝이는 채찍을 휘돌리며 채찍춤을 추면서 샌님 가족을 이끌면서 뒷걸음, 돌걸음으로 등장한 다음 깡총걸음으로 장내를 뛰어 돌며 채찍을 휘돌린다. 이때 샌님·서방님·도련님의 걸음걸이는 한발 까치걸음으로 부채를 내렸다 들었다 하다가 건들걸음으로 들어와 나란히 자리 잡는다. 신할아비·신할미는 허리가 굽은 상태로 지팡이를 짚고 나머지 손은 뒷짐을 지고 어기적 걸음으로 등장하면 박수가 나오지요. Q. 탈춤을 출때, 복장과 탈은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나요. A. 탈춤 종목 중 송파가 가장 많은 탈을 보유하고 있죠. 가장 관객이 많은 한양이라는 지역성과 궁중에 불려간만큼 자본이 달리지 않았죠. 외국 사절이 오면 요즘으로 말하면 카퍼레이드 환영인사 같은 거죠. 사직동 모화관가지 거리 공연을 하면서 외국사절을 모시고...매일 공연도 보여주고, 지방에 있는 탈춤과는 관객의 눈높이가 높았죠. 한양으로 몰려드는 전국소리패들, 광대패들과 경쟁을 해야하니...자연히 분장도구가 화려해지죠. 탈은 바가지로 만든 탈인데, 소나무 껍질을 깎아 눈썹, 코, 볼, 입을 붙이고 한지(韓紙) 조각으로 여러 겹 덧붙여 말린 다음 단청(丹靑)으로 채색하여 보자기를 붙여 머리에 쓰고 묶는다. 복식은 팔먹중들은 반장[赤·靑·黃·綠色]에 옷깃과 허리 띠는 주로 붉은 색이나 대비색이며, 각 배역마다 신분적 특징을 보여 주는 의상을 입는다. 의물과 무구도 배역에 따른 것으로 양반들은 합죽선, 취발이 녹음채, 말뚝이 채찍, 먹중갑(완보)은 곤장, 무당은 방울·부채, 샌님·미얄은 지팡이 등을 사용합니다. Q. 민족문화예술 '탈춤'의 예술성에 대해서 강조하신다면 A. 탈춤은 재담과 노래, 가무극적 총체성을 띠고 있죠. 재담이나 노래에 비하여 춤을 위주로 하고, 거기에 연극성까지 구비해야 박수를 받죠. 풍자성이 강한만큼 탈을 쓴 등장인물과 주인공의 캐릭터를 잘 나타내 주어야 하고,..가무에 능해야 하고. Q.인류무형문화유산 '탈춤'의 보편적 가치는 A.부조리와 갈등을 풍자하는데 머물지 않고, 해원상생을 위한 전통유산이며, 공동체 결속에 기여한다는 거지요. Q. 오월에는 축제의 달인데, 초청공연 가는 지역 축제는 어디인가요. A.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6일, 안동민속축제 7일,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지역사회 복지관에서 8일 공연합니다. Q. 전승교육 부분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A. 10여년 동안 송파구 중대초등학교에서 송파산대놀이를 가르쳐왔다. 그런데 교장이 바뀌면서 올해부터는 수업이 사라졌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우링 자랑스런 민속예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탈춤은 등장 인물의 성격을 과장·유형화한 탈을 쓰고 권력과 사회의 부조리·인간의 이중성 등을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풍자·비판하면서 나아가 사회변화에 대한 변혁성을 담보하고 있다. 관객의 동조·야유 같은 능동적인 참여까지 이끌어내 완성하는 적극적 소통 방식의 예술이기도 하다. 세계 유네스코 신사위원단은 탈춤이 문화적 전통으로 공동체에 정체성과 연속성을 부여한다는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도 주목했고,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했다. 이러한 탈춤의 보편적 가치를 널리 공유하는 기회와 장이 확대되기를 바란다. 첫째마당: 상좌춤놀이 첫째상좌가 맨 처음 등장하여 중앙에서 염불장단에 합장배를 하면서 천신께 탈춤의 시작을 알리고, 사방재배를 하며 놀이판을 정화하고 성황을 이루기를 기원하며 춤판이 무사히 끝나도록 기원하는 의식무이다. 이어서 타령장단에 깨끼춤을 추면 둘째상좌가 등장하여 서로 대무하고 첫째상좌가 퇴장한다. 둘째마당: 옴중·먹중놀이 옴중이 제금을 치며 요란하게 등장하여 장내의 잡귀를 몰아내고 둘째상좌도 내쫓고 염불장단에 용이 승천하는 용틀임춤을 추고 놀 때 먹중이 등장하여 서로의 얼굴을 못생겼다고 흠 잡으며 곰보타령 사설을 늘어놓는 것이 흥미롭고, 비위생적 생활에서의 옴(전염병, 악귀) 발생을 예방의 중요성을 알린다. 셋째마당: 연닢·눈끔재기놀이 양반인 연닢과 눈끔재기가 얼굴에 흠이 있어 과거도 못보고 양반사회에서 소외당하지만 서민들인 먹중들은 이들을 받아들여 어울려 놀면서 서민들의 포용력을 부각하고 양반사회의 폐쇄성을 풍자한다. 넷째마당: 북놀이 먹중들이 북을 가지고 장난치며 노는데 왜장녀가 등장하여 예쁜 색시(애사당)가 벗고(법고)를 칠테니 돈을 달라고 하자 돈을 건네준다. 애사당이 옷을 벗지도 않고 법고를 치니 속았다고 북채를 빼앗지만 허세를 부리면 돈만 날린다는 것을 풍자한다. 다섯째마당: 곤장놀이 팔먹중들이 불도에 정진하지 않고 술만 먹고 노는 것을 곤장으로 호되게 다스려 공부를 게을리 하지마라고 훈육한다. 여섯째마당: 침놀이 가난한 서민이 잔치에서 과식 급체하여 쓰러지자 신주부(의원)와 먹중들 사이의 치료방법에 대한 내용을 표현하여 의원들의 의술을 풍자하고 굶주린 서민생활을 폭로한다. 일곱째마당: 노장놀이 팔먹중이 노장을 끌고 등장하여 색을 탐하면 무서운 질병(흑달)에 감염된다는 경고하고 조롱하지만 노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색을 탐하여 파계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여덟째마당: 신장수놀이 신장수가 원숭이를 업고 등장하여 노장에게 신을 팔면서 불도에 정진하지 않고 여색에만 빠진 수도자에게 원숭이를 보내 조롱한다. 아홉째마당: 취발이놀이 사찰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취발이가 노장이 파계했다는 말을 듣고 홧김에 술을 마시고 취한 채 등장하여 노장을 내쫓고 소무와 합방하며 아들을 낳자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고 공부시키며 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열째마당: 말뚝이놀이 양반집 하인 말뚝이가 양반인 샌님가족을 모시고 나들이 나갔다가 숙소를 돼지우리로 정해주며 놀리면서 서민들을 개돼지처럼 하찮게 여기는 양반들을 역으로 풍자한다. 열한째마당: 샌님·미얄·포도부장놀이 샌님이 본처인 미얄할미를 내치고 젊은 마누라와 놀아나지만 결국은 젊은 포도부장에게 빼앗기는 애정의 삼각관계를 표현하며 부도덕한 생활을 풍자하고 조강지처를 버리면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 열두째마당: 신할애비·신할미놀이 노부부의 갈등으로 신할미가 죽자 자식인 도끼와 도끼누이가 애통해 하며 무당을 불러 죽은 신할미의 넋을 위로하는 넋두리와 지노귀굿을 하여 극락왕생을 빌며 살아있는 자를 위로하는 무속적인 의식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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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외국인 유학생, 민간 문화대사 '아우르기' 단원 모집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 유학생이 한국 문화를 체험하며 '민간 문화대사'로 활동하는 문화기획단 '아우르기' 단원을 모집한다.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국내 거주 중인 외국인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2023 글로벌 문화기획단 아우르기' 단원을 모집한다.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참여 의지가 높고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국내 거주 외국인 대학(원)생이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SNS를 활발하게 운영하는 지원자는 우대 대상이며, 오는 5월7일 자정까지 접수 받는다.올해는 주한 외국인 유학생 80명을 선정해 약 6개월간 한국 고유의 문화를 체험하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지난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탈춤이 교육과정에 포함돼 한국문화유산의 가치와 매력을 이해하는 시간이 될 전망이다.단원들은 5월20일에 열리는 발대식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5개 분야의 멘토링(탈춤·사물놀이·케이팝·태권무·한국창작뮤지컬)과 5개 분과의 기획 세미나(교육체험·축제기획·공연기획·전시기획·놀이체험)를 통해 글로벌 문화기획단으로서 역량을 강화한다. 나아가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문화탐방도 진행된다. 단원들이 한국 문화를 알리기 위해 직접 기획하는 '2023 아우르기 페스티벌'은 9월에 개최될 예정이다. 10월에는 역대 아우르기 단원들이 모여 우정을 다지는 동창회와 해단식을 끝으로 활동이 마무리된다.지난해 최우수단원인 우즈베키스탄 출신 아흐마드조노브 오모놀로는 "아우르기는 문화교류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라며 "한국에 사는 유학생이라면 참여해 볼 가치가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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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전국대학생마당놀이축제 참가자 모집국립무형유산원이 주최하고 한국문화재재단이 주관하는 ‘전국대학생마당놀이축제’는 농악이나 탈춤 등 대학의 마당놀이 동아리들을 대상으로 개최되는 행사이다. 특유의 열정과 끼로 무장한 대학생들이 벌이는 경연은 매년 젊음의 열기로 뜨겁다. 우리 전통예술을 순수하게 대학생들이 즐길 수 있는 자리이자 전통과 젊은 세대가 소통하는 생생한 현장으로 우리 문화유산의 살아있는 전승을 실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행사이다. 1988년 시작된 이래 올해로 26회를 맞이하며 대학생들의 대표 마당놀이 축제로 그 인기를 이어오고 있다. ‘제26회 전국대학생마당놀이축제’는 국가 및 시도지정 무형문화재 탈춤과 농악 종목의 경연으로 진행된다. 참가대상은 전국의 대학(원)에 속한 동아리 및 단체이며, 접수는 7월 3일(월)부터 7월 14일(금)까지이다. ‘전국 대학생 마당놀이 축제’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무형문화재 마당종목 경연대회로, 우리 전통예술을 보급하고 국가 및 지역 무형문화재의 전승기반을 넓힐 목적으로 꾸준히 개최되고 있는 대회이다. 1988년부터 시작한 이 대회는 전국 대학생들이 탈춤, 놀이, 농악 등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마당놀이 종목을 전수받아 그 기량을 겨루는 대회이다.각 지역의 무형문화재 전승단체에서 의상과 소품 등을 지원받고, 해당 전수회관에 입소하여 연습함으로써 젊은 계층이 전통예술의 전승 현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지역 특유의 마당놀이 공연을 선보임으로써 고유한 지역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국립무형유산원이 주최하고 한국문화재재단이 주관하는 ‘전국대학생 마당놀이축제’는 농악과 탈춤, 놀이로 모인 전국의 대학생들이 모이는 교류의장이자 축제로써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문화재재단 누리집(www.chf.or.kr)을 참조하거나, 한국문화재재단 공연기획팀으로 문의하면 된다. 대학생마당놀이축제(02-3011-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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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송파산대놀이 유래와 역사정의- 서울 송파 지역에서 전승하는 탈놀이 요약-서울·경기지방에서 전승되는 탈놀이를 ‘산대(山臺)놀이’라고 부르며, 애오개(아현)·녹번•사직•홍제동•구파발•노량진 등지에서 전승하다 소멸되었고, 현재는 양주·송파·퇴계원 산대놀이만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송파나루와 장터에서 상업적 배경으로 펼치던 탈놀이이다. 유래 및 역사-조선시대에는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국가적 행사를 담당하여 산대도감놀이가 성행하였다. 산대도감 폐지 후 산대놀이패들이 처음에는 애오개(현재 서대문구 아현동 일대)에 본거지를 두고 민간인들을 상대로 탈춤을 추었기 때문에 이것을 ‘본산대(本山臺)’라고 하였으나, 점차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가 사직골, 녹번, 구파발, 노들(노량진)에서 전승되다가 소멸되었고, 지금은 그 맥을 이은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 퇴계원산대놀이만이 전승되고 있다. 송파장은 270호의 객주가 성업을 이루어 산대놀이가 성행하였으나 을축년(1925) 한강 대홍수로 송파장과 마을 전체가 유실되어 신송파로 물러나면서 자연히 산대놀이도 시들해졌다. 그 후 송파산대놀이는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신송파 옛 장터에서 전수하다가, 1985년 잠실 석촌호수 공원 안에 송파산대놀이 전수관과 서울놀이마당을 건립하여 전승되고 있다. 내용-송파산대놀이의 열두 마당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마당은 상좌춤놀이, 둘째 마당은 옴중, 먹중놀이, 셋째 마당은 연잎, 눈끔적이놀이, 넷째 마당은 애사당 북놀이, 다섯째 마당은 팔먹중 곤장놀이, 여섯째 마당은 신주부 침놀이, 일곱째 마당은 노장놀이, 여덟째 마당은 신장수놀이, 아홉째 마당은 취발이놀이, 열 번째 마당은 샌님말뚝이놀이, 열한 번째 마당은 샌님, 미얄할미, 포도부장놀이, 열두 번째 마당은 신할애비, 신할미놀이이다. 춤사위는 염불장단의 거드름춤, 굿거리장단의 건드렁춤, 타령장단의 깨끼춤으로 상위개념으로 불린다. 염불장단의 거드름춤은 특수배역만이 추는 춤으로, 첫 상좌의 합장재배와 사방재배, 옴중의 용트림, 노장의 복무(伏舞)와 함께 부채춤, 팔뚝잡이, 활개펴기, 활개접기, 장삼치기, 복무, 삼진삼퇴 등이 있다. 타령장단의 깨끼춤은 송파산대놀이 춤의 기본이 되며 흥과 신을 풀어내는 춤이다. 집단적이며 민중들의 순수한 감정에서 생성된 춤이기 때문에 주로 팔먹중, 취발이, 말뚝이와 같은 민중성을 띤 인물들이 춤을 춘다. 깨끼춤 종류로는 화장무, 반화장, 자진화장, 곱사위, 여닫이, 긴여닫이, 배치기, 어깨치기, 깨끼리, 염풍댕이, 돌단이, 거울보기, 팔뚝잡이, 멍석말이, 덜미잡이, 자라춤, 장단먹기, 궁둥치기, 배춤, 갈지자춤, 몰아치기, 장삼치기, 한삼치기, 몰아치기, 장삼치기,한삼치기, 맞춤[對舞]과 더불어 양반까치걸음, 취발이까치걸음, 빗사위, 갈지자걸음, 뒷짐걸음, 원숭이재롱춤, 활개걸음, 건드렁, 껑충걸음 등의 걸음걸이가 있다. 굿거리장단의 건드렁춤은 주로 등장사위에서 건들걸음으로 추는 춤이다. 건들걸음의 춤사위 종류는 뒷짐사위, 들사위, 쳐들사위, 흔들사위, 돌사위, 멜사위 등이 있다. 그밖에 배역에 따라 연닢·눈끔쩍이는 한손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손은 뒷짐이나 들사위로 등장하고, 말뚝이는 채찍을 휘돌리며 채찍춤을 추면서 샌님 가족을 이끌면서 뒷걸음, 돌걸음으로 등장한 다음 깡총걸음으로 장내를 뛰어 돌며 채찍을 휘돌린다. 이때 샌님·서방님·도련님의 걸음걸이는 한발 까치걸음으로 부채를 내렸다 들었다 하다가 건들걸음으로 들어와 나란히 자리 잡는다. 신할아비·신할미는 허리가 굽은 상태로 지팡이를 짚고 나머지 손은 뒷짐을 지고 어기적걸음으로 등장한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 알려진 전승자들은 조영완(1865∼1949, 왜장녀•소무•가면 제작), 윤종현(1880∼1953, 옴중•가면 제작), 김도환(1889∼1951, 첫째 상좌•노장), 유천식(소매•애사당), 김동현(취발이) 등이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종현을 지도자로 하여 돌말이 놀이꾼들에 의해 계승된 1930년대에는 김순길(소매•팔목), 엄준근(옴중•신할아비), 이범만, 여태산 등이 활약했다. 지정 당시 예능 보유자는 이충선(李忠善, 1910∼1989, 장고•대금•피리), 김윤택(金澗澤, 1904∼1979, 첫째 상좌•취발이•초라니), 이범만(李範萬, 1907∼1984, 옴중•샌님), 한유성(韓有星, 1908∼1994, 포도부장•샌님), 문육지(文陸地, 1913∼1992, 둘째상좌), 허호영(許浩永, 1915∼1990, 말뚝이•가면 제작) 등 여섯 명과 후임 보유자 김학석金學錫(1940∼2014, 무당)도 작고하였다. 현재는 명예보유자 이병옥(李炳玉, 1947∼, 상좌·취발이)과 보유자 함완식(咸完植, 1956∼, 옴중•먹중)과 전승교육사로 안병인(安浦仁, 1954∼, 먹중), 이수환(李修煥, 1958∼, 노장), 김명하(金明河, 1955∼, 말뚝이), 이영식(李榮植, 1954∼, 팔먹), 강차욱姜次郁, 1964∼, 악사) 등을 비롯하여 활동 이수자인 전철규, 서병무, 전경희, 이한복, 김영숙, 탄종원, 김대현, 임채현, 장규식, 양흥기, 함승헌 등과 전수자인 강춘선, 어원석, 이준녕, 김태현, 김갑수, 이효녕 등과 악사 전수자에 김문조(피리), 엄태양(대금), 김희경(해금) 등이 전승활동을 하고 있다. 반주 음악-길놀이에서 연주하는 행진음악과 놀이판에서 연주하는 반주음악을 나눌 수 있다. 길놀이에는 호적 한쌍·북·장고·바라로 편성되며, 행진에는 길군악으로 ‘능계’라는 음악을 연주하고, 길놀이과정에서 넓은 공터나 사람들이 몰려있는 장소에서는 멈추고 춤판을 벌리면 타령을 연주한다. 놀이판에서 춤의 반주에는 북·장고· 피리 한쌍·젓대·해금으로 편성된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쓴다. 길놀이 때 굿거리 장단의 선율은 창부타령과 비슷한 경토리로 되어 있다. 탈 마당에서는 배역에 따라 긴염불 장단과 허튼 타령과 굿거리 장단과 당악 장단을 쓴다. 복식ㆍ의물ㆍ무구-탈은 바가지탈로 소나무 껍질을 깎아 눈썹, 코, 볼, 입을 붙이고 한지(韓紙) 조각으로 여러 겹 덧붙여 말린 다음 단청(丹靑)으로 채색하여 보자기를 붙여 머리에 쓰고 묶는다. 복식은 팔먹중들은 반장[赤·靑·黃·綠色]에 옷깃과 허리 띠는 주로 붉은 색이나 대비색이며, 각 배역마다 신분적 특징을 보여 주는 의상이다. 의물과 무구도 배역에 따른 것으로 양반들은 합죽선, 취발이 녹음채, 말뚝이 채찍, 먹중갑(완보)은 곤장, 무당은 방울·부채, 샌님·미얄은 지팡이 등을 사용한다. 특징 및 의의-송파산대놀이는 상역지의 거부 거상들의 경제적 뒷받침으로 연희 규모도 컸으며 줄타기, 씨름대회, 풍물, 민요등 성대한 놀이판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상인들의 이해타산도 작용하고 있었기에 놀이판의 성격이 달라진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연희의 실제적인 주도권은 추렴한 상인들이었다. 둘째, 연희 시기는 장꾼을 끌 수 있게 비교적 농한기인 오월단오, 칠월백중을 택했다. 셋째, 전문성을 띤 유명한 연희자들을 초청하여 놀이판을 성대히 만들었다. 넷째, 외부 장꾼과 별로 관계없는 길놀이는 약화되었다. 다섯째, 연희 장소도 마을 공터, 산기슭, 강가 등지에서 하던 것을 장터로 설정하였다. 여섯째, 놀이판의 규모도 커지고 관람 질서를 유지하고자 탈판에 금줄(새끼줄)을 치고 차일(遮日)도 쳤으며, 등•퇴장로도 만들었다. 그리고 춤사위의 형식적인 면에서 해서 탈춤(봉산•강령•은율)과 비교하여 산대놀이 춤사위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섬세하고 다양한 춤사위를 지니고 있다. 둘째, 동적인 춤사위보다 정중동靜中動의 춤사위가 발달하였다. 셋째, 염불장단의 춤이 발달하였다. 넷째, 팔사위에서 뿌리는 ‘한삼춤’보다 감치고 조이는 ‘손춤’이 많다. 다섯째, 도약무跳躍舞보다 답지무踏地舞가 발달하였다. 정사항-국가 무형문화재(1973) 송파산대놀이 기타-송파산대놀이는 극적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는 양주별산대놀이와 거의 유사하게 열두 마당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으나 마당구성의 짜임이 약간 다르다. 또한 다 같이 바가지탈을 사용하지만 탈의 수가 서른두 개로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사라진 해산어멈•신할미•무당 등 산대도감 가면들이 배역과 함께 대부분 보존되어 있어, 양주별산대놀이보다 비교적 더 고형(古型)을 지니고 있다. 송파산대놀이의 춤은 중부 지역의 무용적 전통을 전형적으로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춤사위가 40여 종 이상으로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 주제어-산대, 산대도감, 본산대놀이, 송파나루, 송파장, 상역지, 양주별산대놀이 참고문헌-이병옥, "송파산대놀이", 피아, 2006, 허호영, 「송파산대놀이 대사」,"서낭당" 3호, 한국민속극연구소, 1972, 이병옥, "송파산대놀이 연구", 집문당, 1981, 이두현, 「송파산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90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1, 이두현,"한국의 가면극", 일지사, 1979,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전", 민속원, 2014. 필자-이병옥(李炳玉) 복합매체(multi-media) 사용 목록표] 사용 목록표 원고의 내용 이해를 도울 복합매체(이미지, 영상, 음원 등) 자료 정보 총 3건 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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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아리랑 등 인류무형문화유산 활용 공연 작품 공모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의 다양성과 예술적 가치를 대중과 함께 나누기 위해 ‘인류무형문화유산 활용 공연 - 우수 공연 작품 공모’를 진행한다. 이번 공모는 기존에 제작·발표됐던 종묘제례악, 판소리, 가곡, 농악, 남사당놀이, 아리랑 등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종목을 활용한 작품 중 총 4개 작품을 선정해 지원한다. 선정된 작품은 공연 규모에 따라 최대 1천5백만 원의 지원금과 공연을 위한 추가 지원을 받게 되며, 오는 10월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열리는 ‘위대한 유산, 오늘과 만나다’ 무대를 통해 재공연으로 대중에게 선보이게 된다. ‘위대한 유산, 오늘과 만나다’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종목들을 유형 유산의 보고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다채롭게 경험하는 축제로 전통예술의 정수인 원형 공연부터 시대상이 반영된 창작공연까지 여러 무형문화유산을 즐길 수 있다. 2018년 첫선을 보인 이래 5년간 6만 5천여 명의 관객이 찾았으며, 유·무형 유산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행사로 대중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문체부 정책 담당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종목을 활용한 공연을 통해 전통공연예술을 활성화하고, K-컬처의 뿌리이자 한국의 정체성을 담은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김삼진 이사장은 "지난해 11월 탈춤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우리나라는 총 22건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됐다.”라며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종목의 멋을 전할 역량 있는 전통공연예술 단체들의 많은 관심과 지원을 바란다.”라고 전했다. 공모 접수는 4월 10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되며 공모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누리집(www.kotpa.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문의 02-580-3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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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문화유산 '송파산대놀이' 전승활동과 과제 (3)지난 달 29일 송파산대놀이 공개 행사에서 전 12과장이 모두 연행되었다. 송파산대놀이는 서울시 송파구 송파동과 가락동 일대에서 전승되어온 가면극으로서,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서울놀이마당에 전수회관을 두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송파산대놀이 예능보유자로 이충선(李忠善, 1901-1989/ 장고·대금·피리), 김윤택(金潤澤, 1904-1979/ 첫째상좌·취발이·초랭이), 이범만(李範萬, 1907-1984/ 팔먹중·샌님), 한유성(韓有星, 1908-1994/ 포도부장·샌님), 문육지(文陸地, 1913-1992/ 둘째상좌), 허호영(許浩永, 1914-1990/ 말뚝이·가면 제작)의 6명이 인정되었으며 모두 작고했다. 현재는 보유자 김학석(金學鉐, 1940- / 연희(무당)), 함완식(咸完植, 1956- / 옴중·먹중)과 전수교육조교 김성운(金聖運, 1945- / 피리), 안병인(安炳仁, 1954- / 먹중), 이병옥(李炳玉, 1947- /취발이), 이수환(李修煥, 1958- / 노장), 김명하(金明河, 1955- / 말뚝이) 등이 송파산대놀이의 전승에 힘쓰고 있다. Q. 현재 송파산대놀이보존회에서 전하고 있는 연희본의 존재가 궁금합니다. A. 이두현본(1971년), 허호영본(1972년), 이병옥본(1982년)이 있는데, 현재 송파산대놀이 연희 교재로 쓰이고 있는 것은 1980년까지 제가 당시 예능보유자 이범만, 한유성, 문육지, 김윤택, 이충선의 구술을 토대로 채록하여 정리한 연희본 이병옥본으로 전수를 하고 있습니다. Q.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의 가면극 구성과 배역, 내용이 12과장이 어떻게 다른가요 A. 송파산대놀이는 가면극의 구성이나 내용면에서는 양주별산대놀이 12과장과 거의 유사하나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사라진 해산어멈·신할미·무당 등 산대도감가면들이 배역과 함께 대부분 보존되어 있어, 학계에서는 양주별산대놀이보다 비교적 고형(古型)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Q. 송파산대놀이라는 명칭에서 '산대'라는 명칭은 A.서울, 경기지방에서 전승되는 탈춤을 산대(山臺)놀이라고 부르며, 현재는 양주와 송파 두 지역의 '산대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산대(山臺)라는 명칭은 일명 채산(彩山), 채붕(綵棚)이라는 가설무대로서 주로 궁중에 설치하였습니다. 송파산대놀이처럼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 성행한 ‘가면극’에 ‘산대놀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산대놀이의 ‘산대’가 뫼 산(山) 자에 무대 대(臺)자로 이뤄진 것과 같이 ‘산과 같이 큰 무대’, ‘비단으로 장식된 무대’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놀이가 열린다’라는 깃발을 들고 돌지만 예전에는 산대놀이를 앞두고 조금 큼직하게 만든 우마차 위에 얇은 판을 깎아 산 형상을 층층으로 올려 만든 ‘산대’를 끌고 다니며 연희 구경을 오라고 알렸다고 합니다. ‘산대’라는 이름도 그래서 붙여졌습니다. Q. 양주별산대놀이에서 '별'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A. 양주별산대놀이의 경우 이름에 ‘별’ 자가 추가된 것은 기존 놀이패들의 맥을 이은 것이 아니라, 양주읍에서 ‘별도’로 만들었다고 해 붙여진 글자이고, 노들산대, 구파발산대 등을 이은 송파산대놀이야말로 조선 시대 산대놀이의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고 봅니다. Q. 한반도 지역 탈춤 중에서 한양과 가까운 송파산대놀이와 양주산대놀이는 주로 궁중에서 많이 연희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나요. A. 특히 송파산대놀이는 궁중 연회에 가장 많이 불려갔습니다. Q. 그렇다면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의 전승 주체를 담당했던 계층은 다른가요. A. 양주는 관원들에 의해 전승되었고, 송파는 장터의 장꾼들과 마을주민에 의해 전승되었으며, 주로 사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에 송파 장터에서 상업적 흥행을 목적으로 펼치던 놀이입니다. Q.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와 비교한다면 기원과 등장 인물이 다른가요? A. 기원과 유래를 보면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는 차이점이 분명히 있다. 송파는 나루터여서 장꾼의 속성을 반영, 타령장단의 신명 나는 놀이춤으로 발전했고, 양주는 관에 대한 예속성 때문인지 염불장단에 의식춤이 발달했고,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초라니·당녀(唐女)·해산어멈·신할멈·무당탈 등이 남아 있습니다. Q.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의 대표적 춤사위 특징은? A.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염불장단의 거드름춤이 발달한 반면, 송파산대놀이에서는 타령장단의 깨끼춤이 발달한 것이 특징입니다. Q.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여러 배역의 탈을 쓰고 연희를 벌리는 탈춤의 매력은 무엇인지요. 예술성에 대해서 정의한다면 A. 춤(무용)과 음악·연극의 요소가 융합된 탈춤은 전통 공연예술과 무형문화유산을 상징하는 종합예술입니다. 내용과 형식의 자유로움이야말로 표현의 자유이고 바로 예술성의 조건이지요. 특히 사회비판적 주제는 현대의 다양한 예술창작에 영감을 제공하면서 재창조되고 있습니다. 탈춤은 등장 인물의 성격을 과장·유형화한 탈을 쓰고 권력과 사회의 부조리·인간의 이중성 등을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풍자·비판하면서 관객의 동조·야유 같은 능동적인 참여까지 이끌어내 완성하는 적극적 소통 방식의 예술이기도 하다. 탈춤이 문화적 전통으로 공동체에 정체성과 연속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Q. 그래서 탈춤을 보다 보면 이 세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A. 그래서 일년 중 하루쯤은 지배자 집단이 억압 받는 피지배자들에게 그날은 욕도 먹고 너희들 목소리도 한번 질러보라고 풀어줍니다. 그래서 탈춤의 마무리는 갈등과 대립의 화해, 나아가 상호존중을 통해 사회 전반의 조화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연희 종목 중 탈춤만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탈춤이 우리 무형문화유산을 넘어 인류가 함께 즐기고 향유하는 무형유산이 되었다고 봅니다. Q. 올해 무형문화유산 공개 행사에서 여러 지역 탈춤을 볼 수 있는데, 기대가 됩니다. A. 5월에는 2일 북청사자놀음, 19일 은율탈춤, 21일 고성오광대, 29일 송파산대놀이가 공개행사를 했습니다. Q.서울놀이마당에서 불편하신 부분을 호소하신 적이 있는데 개선이 되었나요 A.서울놀이마당은 송파산대놀이 전승을 위한 공간인 동시에 전국에 있는 무형문화재의 발표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서울놀이마당에서 전통 공연 외 다른 공연을 많이 한다고 했다. 그럴 때면 송파산대놀이 연습장인 전수관을 분장실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송파산대놀이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불편을 호소했습니다. 분장실을 따로 만들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고 요청했지만 아직도 변한 것은 없습니다. 송파산대놀이보존회와 각 지역 탈춤 보존단체들은 국가무형문화재·시도무형문화재 지정 등 체계적·지속적인 무형문화유산 보존·전승, 특히나 코로나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연과 체험·교육프로그램 등을 통한 활발한 전승 노력이 결실을 맺어서 유네스코 인유무형문화유산 '한국의 탈춤' 등재에 큰 역할을 했다.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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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문화유산 '송파산대놀이' 전승활동과 과제 (2)인류무형문화유산 '탈춤'이 문화적 전통으로 공동체에 정체성과 연속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탈춤'은 등장 인물의 성격을 과장·유형화한 탈을 쓰고 권력과 사회의 부조리·인간의 이중성 등을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풍자·비판하면서 관객의 동조·야유 같은 능동적인 참여까지 이끌어내 완성하는 적극적 소통 방식의 예술이기도 하다. 송파산대놀이는 서울시 송파구 송파동과 가락동 일대에서 전승되어온 가면극으로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서울놀이마당에 전수회관을 두고 있다. 놀이판은 주로 송파장 마당이었으며, 놀이마당은 장마당의 넓은 터에 둥글게 말뚝을 박고 새끼줄을 쳐서 원형의 야외무대를 만들고, 악사석에는 멍석을 깔고 광목 천막을 쳐 악사와 동네어른들의 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1925년 7월 대홍수로 인해 송파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모래사장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현재 가락동 일대로 이주해 살면서 한두 번 산대놀이를 거행했으나, 이내 전승이 단절되었다. 연희자 허호영(許浩永, 1914-1990)의 증언에 의하면, 송파에 거주하고 있던 허윤(許鈗, 1867-1935)이, 1900년부터 구파발 본산대놀이의 연희자 윤희중(尹熙重, 1840-1923)을 초빙하여 쇠진한 송파산대놀이를 재건했다고 한다. 그리고 1930년대 초부터 돌말이(석촌리)에서 한유성과 이범만 등이 송파의 윤종현에게 가면극을 전수받아 재건에 성공했다. 그 후 일제강점기 말에 단절되었던 돌말이의 산대놀이는 광복 이후 몇 차례 공연되었으나, 다시 전승이 끊겼다가 1960년대에 복원되었으며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서울놀이마당 전수회관에서 전승되고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오래 전에 채록된 대본이 없고, 1970년대에 들어와 복원되었기 때문에 대사에 현대적인 표현이 많다. 현재 연희 교재로 쓰이고 있는 송파산대놀이의 '이병옥본'연희본은 1975년에서 1980년까지 이병옥이 당시의 예능보유자인 이범만, 한유성, 문육지, 김윤택, 이충선의 구술을 토대로 채록한 연희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송파산대놀이』(2006)에 수록되어 있다. Q. 인류무형문화유산 ‘한국의 탈춤’으로 등재된 ‘송파산대놀이보존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어떤 부분을 중점으로 가치를 평가했는지요. A. 세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위원회는 ‘한국의 탈춤’이 강조하는 보편적 평등의 가치와 사회 신분제에 대한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주제이며, 각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에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특히, 안건으로 올라간 총 46건의 등재신청서 중에서 ‘한국의 탈춤’ 등재신청서를 무형유산의 사회적 기능과 문화적 의미를 명확하게 기술한 모범사례로 평가하였습니다. Q. ‘한국의 탈춤’ 등재를 위해 언제부터, 어느 단체와 기관이 협력했나요. A. ‘한국의 탈춤’ 의 유네스코 등재는 10여년전 국가무형문화재 13개 탈춤단체인 대한민국탈춤단체 총연합회 출범 때부터 등재를 추진했던 것이지만 이번에 등재된 것은 민·관이 협력하여 국제사회에 우리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쾌거를 거둔 좋은 사례입니다. 특히 문화재청과 외교부, 경북 안동시, 탈춤과 관련한 13곳의 국가무형문화재보존회와 5곳의 시도무형문화재 보존단체 및 세계탈문화예술연맹(IMACO)이 준비 과정에서부터 협력하여 이루어낸 성과입니다. Q 현재 인류무형문화유산 ‘한국의 탈춤’ 어떤 종목의 탈춤이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나요. A. '한국의 탈춤'은 모두 18개 종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양주별산대놀이·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강릉관노가면극(강릉단오제)·북청사자놀음·봉산탈춤·동래야류·강령탈춤·수영야류·송파산대놀이·은율탈춤·하회별신굿탈놀이·가산오광대 등 13개의 국가무형문화재와 속초사자놀이(강원)·퇴계원산대놀이(경기)·진주오광대(경남)·김해오광대(경남)·예천청단놀음(경북) 등 5개 시도무형문화재입니다. Q. 현재 송파산대놀이 전승활동을 하는 회원의 구성원은 몇 분이신가요. A. 1973년 지정당시 6명이던 보유자가 1995년 이후 1명뿐입니다. 보유자를 늘리고 국가지원 확대가 필요합니다. 송파산대놀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지만, 전승자가 줄어 위기를 겪는 현실은 여전하고, 현재 송파산대놀이에는 2006년 보유자가 된 함완식, 지난 7월 명예보유자가 된 이병옥을 비롯해 전승교육사(안병인, 김명하, 이수환, 이영식, 강차욱) 5명, 이수자(전수교육을 마친 자)20명, 전수자(전수교육을 받는 자) 26명이 있다. 이 중 현재 활동 이수자는 11명, 전수자는 23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보유자가 하나 둘 사망하면서 1994년 이후 송파산대놀이 초기 보유자는 한명도 남지 않았다가 1995년 5월 김학석(1940~2014)이 보유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작고하여 현재 송파산대놀이 보유자는 함완식 1명에 불과합니다. Q. 왜 보유자를 늘리지 못하나요. A. 문화재청이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단체 몇몇 사람을 보유자로 인정하는 데 따라 전승자 간에 불화를 조성할 수 있고 예산 관계상 다수의 보유자 인정이 어려워 단체 성격별로 주된 기능을 보유한 자를 1~2명 이내에서 두기로 내부적인 방침이 정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보존단체의 시각은 다릅니다. 보유자를 1명 이내로 두게 되면서부터 내부갈등은 더 첨예해졌고 인정되지 못한 전승교육사들은 자괴감에 빠져있고 이수자나 전수자들은 미래희망을 잃고 전승활동을 중지하고 떠나는 사례가 더 많아져 회원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리하여 몇 개의 인기있는 개인종목을 제외한 단체종목 대부분이 전수자가 많이 줄어들고 있으며 송파산대놀이도 언제까지 존속할지 걱정이 크죠. 전수자뿐만 아니라 보유자가 돼도 탈춤으로 생계유지가 안 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거리입니다. 국가 지원이 열악할 뿐만 아니라 공연으로 먹고 살기도 힘들다고 하는 제자들을 볼 때가 가슴 아프죠. 겨우 1년에 한번 정기 공연하는 것과 운영비 정도 받는 게 전부죠. 더구나 요즘에는 젊은이들은 살기 어렵다고 잘 오지 않는 현실이고, 초등학생 때부터 가르쳐도 중학교 2학년을 마치는 순간 안 나와요. 대학 입시에 도움이 안 되니 부모들이 아무도 자기 자식을 보내지 않는 거죠. 예능을 가장 감수성 있게 받아들이기 쉬운 때를 놓쳐버리고 마는 거죠. Q. 명예보유자는 공식적으로 받는 어떤 혜택이 있나요. A. 또 하나의 문제는 명예보유자에 대한 시각과 대우입니다. 명예보유자는 전수활동에서 은퇴하는 것으로 전수의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양성이나 전수자 교육을 인정받지 못해 해당종목 이수자 추천이나 신청을 할 수 없는 직함입니다. 평생을 몸 받쳐 전승활동을 했는데 명예보유자가 되는 순간 뒷방노인으로 전락하는 구조입니다. 따라서 보유자가 건강이 악화되어 전수활동을 못해도 명예보유자로 가지 않으려 하는게 현실입니다. 그 이유 중에 중요한 것은 보유자가 10년전에 120만원을 받았으나 조금씩 인상되어 현재 150만원이 되었고 전승교육사는 50만원에서 현재 90만원으로 인상되었지만, 명예보유자는 전승비도 특별지원금이라하여 10여년 전에 지급하던 100만원이 10년이 지나도 한푼도 인상하지 않고 그대로 현재도 100만원입니다. 대를 이어 면면이 이어 온 전통문화는 본연의 가치가 있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 평생 동안 천착 해 온 원로(보유자)들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인간문화재입니다. 그런데도 존재 이상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전수활동 의무만 강조하는 시각은 속히 바로 잡아야할 대목입니다. 일부 원로들은 지병과 노환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서 명예를 지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가족과 제자들의 짐만 안겨주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이수자들이 살기위해 생업을 택하고 떠나가는 추세입니다. 계승하는 제자들이 없어서 일년에 소멸되는 문화유산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국가에 평생 봉직하고 퇴임한 분들에게 지급하는 연금도 물가상승에 따라 매년 조금씩이나마 인상지급하는 형평성에도 위배되는 것입니다. Q. 해방이후 탈춤이 가장 활발하게 전승활동이 이루어진 때는 언제인가요 A. 1970~80년대는 대학 탈춤패가 성행하던 때였습니다. 대학마다 문전성시를 이뤄 전수관에도 엄청 나게 몰려왔어요.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강사를 초청하여 이수자들을 여러 대학에 파견하여 산대놀이 탈춤강습을 집중시켜 탈춤발표회를 가졌고 지방대학까지 전수활동을 펼쳤습니다. 그 당시는 정신없었죠. 20여년 동안 활발한 전승이 이뤄졌다고 봅니다. 1975년부터 1983년까지 전수장학생 25명 중 5년간의 교육을 마친 18명이 이수자가 됐고, 1986년에는 전수교육 대상이 전수장학생뿐만 아니라 전수장학생 연령을 초과한 일반전수생까지 확대됐습니다. Q. 전승활동 기간 중 외부의 원인으로 전환기나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나요. A. 대학 탈춤패가 일부 운동권 학생이 중심이다 보니 탈춤 추는 사람들을 모두가 색안경을 끼고 봤죠. 당시 탈춤 배우러 가면 경찰에서 조사가 나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1990년대 이후 점차 배우러 오는 사람이 줄었습니다. 대학가에서도 탈춤외에 풍물, 민요 등 다른 전통문화를 배우려는 풍토가 생겨나면서 전수자가 줄어들었고, 다양한 문화향수와 개인취향의 대중문화와 현대문화에 관심이 높아지는 2000년 밀레니엄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젊은이들이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가 점차 약해져 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IMF 이후 경제적인 문제가 더욱 현실적으로 두드러지는 시대를 맞이하자 젊은 전승자들은 생계를 위해 더욱 줄어들고 있는 현실입니다. 일부 종목이나 보존 단체에서는 기예능 보유자가 세상을 떠나고 전승하는 제자가 없어서 소멸되어가고 있는 것이 무형문화재의 실정입니다. 우리 고유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한편,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에 따라 문화다양성과 인류 창의성 증진에 기여하기 위해 지속적 관심과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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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병옥의 연구노트첫째마당: 상좌춤놀이 첫째상좌가 맨 처음 등장하여 중앙에서 염불장단에 합장배를 하면서 천신께 탈춤의 시작을 알리고, 사방재배를 하며 놀이판을 정화하고 성황을 이루기를 기원하며 춤판이 무사히 끝나도록 기원하는 의식무이다. 이어서 타령장단에 깨끼춤을 추면 둘째상좌가 등장하여 서로 대무하고 첫째상좌가 퇴장한다. 둘째마당: 옴중·먹중놀이 옴중이 제금을 치며 요란하게 등장하여 장내의 잡귀를 몰아내고 둘째상좌도 내쫓고 염불장단에 용이 승천하는 용틀임춤을 추고 놀 때 먹중이 등장하여 서로의 얼굴을 못생겼다고 흠 잡으며 곰보타령 사설을 늘어놓는 것이 흥미롭고, 비위생적 생활에서의 옴(전염병, 악귀) 발생을 예방의 중요성을 알린다. 셋째마당: 연닢·눈끔재기놀이 양반인 연닢과 눈끔재기가 얼굴에 흠이 있어 과거도 못보고 양반사회에서 소외당하지만 서민들인 먹중들은 이들을 받아들여 어울려 놀면서 서민들의 포용력을 부각하고 양반사회의 폐쇄성을 풍자한다. 넷째마당: 북놀이 먹중들이 북을 가지고 장난치며 노는데 왜장녀가 등장하여 예쁜 색시(애사당)가 벗고(법고)를 칠테니 돈을 달라고 하자 돈을 건네준다. 애사당이 옷을 벗지도 않고 법고를 치니 속았다고 북채를 빼앗지만 허세를 부리면 돈만 날린다는 것을 풍자한다. 다섯째마당: 곤장놀이 팔먹중들이 불도에 정진하지 않고 술만 먹고 노는 것을 곤장으로 호되게 다스려 공부를 게을리 하지마라고 훈육한다. 여섯째마당: 침놀이 가난한 서민이 잔치에서 과식 급체하여 쓰러지자 신주부(의원)와 먹중들 사이의 치료방법에 대한 내용을 표현하여 의원들의 의술을 풍자하고 굶주린 서민생활을 폭로한다. 일곱째마당: 노장놀이 팔먹중이 노장을 끌고 등장하여 색을 탐하면 무서운 질병(흑달)에 감염된다는 경고하고 조롱하지만 노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색을 탐하여 파계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여덟째마당: 신장수놀이 신장수가 원숭이를 업고 등장하여 노장에게 신을 팔면서 불도에 정진하지 않고 여색에만 빠진 수도자에게 원숭이를 보내 조롱한다. 아홉째마당: 취발이놀이 사찰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취발이가 노장이 파계했다는 말을 듣고 홧김에 술을 마시고 취한 채 등장하여 노장을 내쫓고 소무와 합방하며 아들을 낳자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고 공부시키며 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열째마당: 말뚝이놀이 양반집 하인 말뚝이가 양반인 샌님가족을 모시고 나들이 나갔다가 숙소를 돼지우리로 정해주며 놀리면서 서민들을 개돼지처럼 하찮게 여기는 양반들을 역으로 풍자한다. 열한째마당: 샌님·미얄·포도부장놀이 샌님이 본처인 미얄할미를 내치고 젊은 마누라와 놀아나지만 결국은 젊은 포도부장에게 빼앗기는 애정의 삼각관계를 표현하며 부도덕한 생활을 풍자하고 조강지처를 버리면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 열두째마당: 신할애비·신할미놀이 노부부의 갈등으로 신할미가 죽자 자식인 도끼와 도끼누이가 애통해 하며 무당을 불러 죽은 신할미의 넋을 위로하는 넋두리와 지노귀굿을 하여 극락왕생을 빌며 살아있는 자를 위로하는 무속적인 의식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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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문화유산 '송파산대놀이' 전승활동과 과제 (1)지난해 11월 모로코에서 개최 한 제17차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무형문화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탈춤(Talchum,Mask Dance Drama in the Republic of Korea)’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 유산대표목록(Representative List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으로의 등재가 되었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 '한국의 탈춤'은 대일항쟁기 기간에는 일제의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법제적 금압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확산과 농민층의 분해로 잠시 농촌공동제의 전승력과 활동이 희박하게 되어 점차 탈춤의 존재양상도 변화하게 되었다. 한민족 고유 정서를 표출하는 민속이 일제의 외압으로 침체기를 맞이하게 된다. 해방후 1950년대 후반 다시 복원되기 시작한 송파산대놀이는 1973년 11월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됐다. 탈놀음 12마당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고 32개 탈 중 신할미, 신할애비, 포도부장, 무당 등 송파산대놀이에만 쓰이는 탈이 4개나 있다. 당시 연희자 5명과 악사 1명 등 6명이 보유자(인간문화재)로인정받았다. 202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한국의 탈춤'이 등재된다. 이번 등재로 우리나라는 총 22건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송파산대놀이보존회'는 매년 국내외에서 지속적으로 공연을 해 오고 있다. 또한 청소년, 지역주민, 소외계층을 위한 교육, 체험 활동도 펼치고 있다. 작년까지 보존회 살림을 해온 이병옥 회장에게 그동안 전승활동에 대해 들어본다. Q. 인류무형문화유산 '한국의 탈춤'으로 등재된 '송파산대놀이보존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어떤 부분을 중점으로 가치를 평가했는지요. A. 세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위원회는 "'한국의 탈춤'이 강조하는 보편적 평등의 가치와 사회 신분제에 대한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주제이며, 각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에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특히, 안건으로 올라간 총 46건의 등재신청서 중에서 '한국의 탈춤' 등재신청서를 무형유산의 사회적 기능과 문화적 의미를 명확하게 기술한 모범사례로 평가하였습니다. Q. '한국의 탈춤' 등재를 위해 언제부터, 어느 단체와 기관이 협력했나요. A. '한국의 탈춤'의 유네스코 등재는 민·관이 협력하여 국제사회에 우리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쾌거를 거둔 좋은 사례입니다.문화재청과 외교부, 경북 안동시, 탈춤과 관련한 13곳의 국가무형문화재와 5곳의 시도무형문화재 보존단체 및 세계탈문화예술연맹이 준비 과정에서부터 협력하여 이루어낸 성과입니다. Q. 현재 인류무형문화유산 ‘한국의 탈춤’은 어떤 종목의 탈춤이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나요. A. ‘한국의 탈춤’은 모두 18개 종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양주별산대놀이·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강릉관노가면극(강릉단오제)·북청사자놀음·봉산탈춤·동래야류·강령탈춤·수영야류·송파산대놀이·은율탈춤·하회별신굿탈놀이·가산오광대 등 13개의 국가무형문화재와 속초사자놀이(강원)·퇴계원산대놀이(경기)·진주오광대(경남)·김해오광대(경남)·예천청단놀음(경북) 등 5개 시도무형문화재입니다. Q. 현재 송파산대놀이 전승활동을 하는 회원의 구성원은 몇 분이신가요. A. 6명이던 보유자가 1995년 이후 1명뿐이다. 보유자 늘리고 국가 지원 확대 필요합니다. 송파산대놀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지만, 전승자가 줄어 위기를 겪는 현실은 여전하고. 현재 송파산대놀이에는 2006년 보유자가 된 함완식, 지난 7월 명예보유자가 된 이 회장을 비롯해 전승교육사(전수교육을 하는 자) 5명, 이수자(전수교육을 마친 자) 20명, 전수자(전수교육을 받는 자) 26명이 있다. 이 중 이수자는 11명, 전수자는 23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보유자가 하나둘 사망하면서 1994년 이후 송파산대놀이 보유자는 한명도 남지 않았습다. 이후 1995년 5월 김학석(1940~2014)이 보유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송파산대놀이 보유자는 1명에 불과합니다. Q. 왜 보유자를 늘리지 못하나요. A. 단체 몇몇 사람을 보유자로 인정하는 데 따라 전승자 간에 불화를 조성할 수 있고 예산 관계상 다수의 보유자 인정이 어려워 단체 성격별로 주된 기능을 보유한 자를 1~2명 이내에서 두기로 국가 방침이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전수자가 많이 줄어 송파산대놀이가 언제까지 존속할지 걱정이 크죠. 전수자뿐만 아니라 보유자가 돼도 탈춤으로 생계유지가 안 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거리입니다. 국가 지원이 열악할 뿐만 아니라 공연으로 먹고 살기도 힘들다고 하는 제자들을 볼 때가 가슴 아프죠. 겨우 1년에 한번 정기 공연하는 것과 운영비 정도 받는 게 전부죠. 인간문화재가 매달 국가에서 받는 150만원으로는 생계유지도 힘들어요. 더구나 요즘에는 젊은이들도 잘 오지 않는 현실이고.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 때부터 가르쳐도 중학교 2학년을 마치는 순간 안 나와요. 대학 가는 데 도움이 안 되니 부모들이 아무도 자기 자식을 보내지 않는 거죠. 예능을 가장 감수성 있게 받아들이기 쉬운 때를 놓쳐버리고 마는 거죠. Q. 해방이후 탈춤이 가장 활발하게 전승활동이 이루어진 때는 언제인가요 A. 1970~80년대는 대학 탈춤패가 성행하던 때였습니다. 대학마다 문전성시를 이뤄 전수관에도 엄청나게 몰려왔어요. 그 당시 정신없었죠. 20여년 동안 활발한 전승이 이뤄졌다고 봅니다. 1975년부터 1983년까지 전수장학생 25명 중 5년간의 교육을 마친 18명이 이수자가 됐고. 1986년에는 전수교육 대상이 전수장학생뿐만 아니라 전수장학생 연령을 초과한 일반전수생까지 확대됐습니다. Q. 전승활동 기간 중 외부의 원인으로 전환기나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나요. A. 대학 탈춤패가 대부분 운동권 중심이다보니 탈춤 추는 사람들을 모두가 색안경을 끼고 봤죠. 당시 탈춤 배우러 가면 경찰에서 조사가 나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1990년대 이후 점차 배우러 오는 사람이 줄었습니다.(계속) 한국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현황은 종묘 제례악(2001), 판소리(2003), 강릉 단오제(2005),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처용무(2009), 가곡, 대목장, 매사냥(2010), 택견, 줄타기, 한산모시짜기(2011), 아리랑(2012), 김장문화(2013), 농악(2014), 줄다리기(2015), 제주해녀문화(2016), 씨름(남북공동, 2018), 연등회(2020), 한국의 탈춤(2022)이다. 그러나 전승활동을 위한 현실은 많은 과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이 중 가장 안타까운 것은 젊은 계승자가 생계를 위해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다. 일부 보존 단체에서는 기예능 보유자가 세상을 떠나고 전승하는 제자가 없어서 소멸되어가고 있다. 우리 고유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한편,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에 따라 문화다양성과 인류 창의성 증진에 기여하기 위해 지속적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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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 '송파산대놀이'‘송파산대놀이’ 명예보유자 이병옥 교수는 서울대학교 무용교육학을 전공했으며, 용인대학교 예술대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교육부장관상과 무용문화재예술단 공로상 등을 수상한 바 있는 그는 ‘한국 무용민속학’ ‘무용인류학 탐구’ ‘한국고대무용사 연구’ 등 저서 30여 권을 출간했고, 지난 40년간 500여회의 송파민속공연을 기획·출연했다. 현재 한국춤비평가협회 공동대표이자 춤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약250여 년 전부터 송파진(현재 잠실 석촌호수 남쪽 주변,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한강줄기)에 서던 송파장을 중심으로 연희되어온 산대탈놀음이다. 1973년 11월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산대놀이(山臺戱)는 구파발, 애오개(阿峴), 사직, 녹번, 노들(露梁津) 등지에 전승되었으나 모두 소멸되었다. 현재는 경기도 양주와 서울의 송파지역만이 전승되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퇴계원산대놀이가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22년 ‘한국의 탈춤’ 18종이 유네스코 인류뮤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송파진은 전국 15대 향시(鄕市) 중의 으뜸인 상역지로 강원도의 뗏목상인과 삼남지역의 마행상과 보부상들이 몰려들어 270여개의 객주집이 성행한 장터였다. 연희 시기는 정월대보름, 단오, 백중, 한가위 등의 명절에 세시놀이로 행해졌는데, 특히 백중 명절에는 각 지방의 명연희자들을 초청하여 1주일씩 탈놀음을 하면서 매일장이 서다보니 5일장의 풍습을 해친다는 상소(영조~순조대, 18~19세기)를 수차례 올렸지만 백성들의 생업(生業)이라 하여 윤허(允許)되었다. 부자상인들이 추렴하여 풍물로 시작하여 씨름 붙이고(씨름대회), 민요 부르고, 줄 걸고(줄타기), 저녁에 횃불을 밝혀 산대놀이를 벌이면서 장이 어우러지게 했다고도 전한다. 연희형태는 춤이 주가 되고 시대상을 풍자하는 재담과 창 등 여러 가지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주음악은 삼현육각(三絃六角/ 장구, 북, 피리2, 대금, 해금)의 악기구성으로 염불 12박, 타령, 굿거리장단이 주가 되며, 당악, 자진타령, 자진모리, 휘모리장단 등이 쓰인다. 춤사위로는 염불 거드름춤, 타령 깨끼춤, 굿거리 건드렁춤 유형으로 나뉘며, 40여종의 춤사위로 세분화되어 있다. 마당구성은 탈놀음 12마당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으며, 탈의 수도 32개로 산대도감 탈들이 거의 보존되어 있어 비교적 고형을 보존하고 있다. 연희 순서는 먼저 산대놀이 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며 탈춤을 추면서 길놀이로 마을과 장터를 돌아와 탈을 벗어 고사상 앞에 놓고 탈고사를 지낸 다음 12마당을 진행한다. 첫째마당: 상좌춤놀이/ 둘째마당: 옴중놀이/ 셋째마당: 연닢·눈끔재기놀이, 넷째마당: 애사당북놀이/ 다섯째마당: 곤장놀이/ 여섯째마당: 침놀이/ 일곱째마당: 노장놀이/ 여덟째마당: 신장수놀이/ 아홉째마당: 취발이놀이/ 열째마당: 말뚝이놀이/ 열한째마당: 샌님·미얄·포도부장놀이/ 열두째마당: 신할애비·신할미놀이(이병옥, 해설 자료에서) 이병옥 (용인대학교 명예교수) * 1979~1981 :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 석사 * 1981~1983 :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무용교육학과 석사 * 1989~1993 : 경기대학교 대학원 이학박사 학위 취득 송파산대놀이보존회 전승활동 연보 * 1973. 8- : 송파산대놀이 교사강습으로 입문 * 1974. 4 - : 송파산대놀이 회원 입회 * 1976. 8 - 80.12.30 : 송파산대놀이 전수장학생 * 1978.2 - : 송파산대놀이 보존회 총무 * 1980.12.30- : 송파산대놀이 이수자 * 1981.4.1 - 89.12 : 송파산대놀이 전수교육조교 선정 * 1978. 10 - :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송파산대놀이 연출지도 * 1978. - : 「송파산대놀이 연희본 1집」 완성 * 1980. 8 - : 「송파산대놀이 연희본 2집」 완성 * 1980. 9 - : 「산대놀이 춤사위 연구」, 민속학회, 한국민속학 13집 * 1981. 9 - : 「송파산대놀이의 옛 놀이판과 배경」.민속학회, 한국민속학 14 * 1981. 10 - : 제22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 서울특별시 출품작 ‘송파산대놀이’ 연출지도(문공부 장관상 수상) * 1982. 10 - : 저서 "송파산대놀이 연구" 출간(집문당) * 1986. 3 - 87. 2 : 송파산대놀이 보존회 상무이사 * 1993. 9 - : 「송파와 양주 산대놀이 춤사위 비교연구」, 용인대 논문집 9집 * 1994.12 - 96.12. : 서울시무형문화재3호 송파다리밟기 보유자후보역임 * 1995. 1 - : 「송파백중놀이」 발굴조사보고서, 한국예총 서울시지회 * 1994. 3 – 10.2 : 사단법인 송파민속 보존회 부이사장(부회장) * !997. 12 - : 「송파산대탈춤 중 "깨끼춤” 에 함유된 동작미 분석」, * 2000. 8.22- 22.6 : 송파산대놀이 전수교육보조자 재선정 * 2006. 1 - : 『송파산대놀이』집필, 국립문화재연구소, 도서출판 피아 * 2010. 3 – 2016.4 : (사) '국가무형문화재 49호 송파산대놀이보존회 회장 * 2016. 3 – 2023.3 : (사) '국가무형문화재 송파산대놀이보존회' 회장(문화재청 등록) * 2023. 7 – 종 신 : 국가무형문화재 '송파산대놀이' 명예보유자 * 2010 – 2022 : 사) 송파민속보존회 이사장 <대표저서>( 29권, 공동집필 35권) 1982. 송파산대놀이 연구, 집문당. 1991. 북한의 공연예술 Ⅱ<무용. 음악 편>, 고려원(3인 공저). 1996. 한국무용사 연구Ⅰ<고대편>, 도서출판 노리. 1998. 승무,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살풀이춤,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중요무형문화재Ⅰ<무용과 음악>, 대원사(2인 공저). 2002. 안성향당무, 용인대학교 전통문화연구소. 2004. 무용인류학 탐구, 도서출판 노리. 2006.『송파산대놀이』, 국립문화재연구소편, 도서출판 피아. 2006. 이병옥 무용평론집{춤따라 세월따라}」, 도서출판 노리. 2006.『승무의 기원전승과 지역유파 연구』, 도서출판 노리. 2008.『살풀이춤 류파와 계통연구』, 도서출판 노리. 2008. Korean Folk Dance", 한국국제교류재단. 2011.『국무 우봉 이매방』, 금풍문화사(2인 공저). 2013.『한국무용통사』고대편, 민속원. 2014.『Dance of Korean』(영문판), 국립국악원 한국음악학 씨리즈 6(9인 공저). 2014.『진주교방과 민간전승의 예술 연구』, 진주문화연구소(6인 공저). 2015. 전통춤의 흐름과 전승현황, 한국전통춤협회(3인 공저) 2019.『전통춤 4대 명무』(한영숙, 강선영, 김숙자, 이매방), 한국전통춤협회(5인 공저), 민속원. 2019, 이동안 선생의 예술세계, 화성문화원(5인공저) 2020. 송파산대놀이 연행과 기원, 송파산대놀이보존회(단독 집필) 2020. 경기재인청 복원과 활용을 위한 연구, 오산문화원(6인 공저) 2021. 자유로운 영혼의 춤꾼, 송화영", 도서출판 지식나무(2인 공저) 2021. 제주 제8호 제주해녀춤·물허벅춤 예능보유자 이연심", 제주원로예술인 구술채록, 제주문화예술재단 기타 연구논문 80여 편, 학술발표 50여 편, 비평논단30여 편, 비평리뷰 170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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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문화유산 농악!....사암리어린이농악단을 꿈꾼다지난달 춘천사암리농악회에서 주관한 '제4회 사암리공지어샘굿'이 지역 주민의 참여와 성원으로 성공적으로 마치었다. 공지어 전설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와 마을 곳곳에 공지어를 줄에 걸어두는 설치미술이 주목을 받았다. 지난달 국악신문에서 '춘천 사암리 샘굿' 행사 기사를 내보내고 나서 이 행사를 주관한 춘천사암리농악단 오선주 단장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되었다. 왜냐하면 잊혀져 가는 마을제의 복원과 샘굿의 주제를 전설의 물고기 '공지어'라는 신성한 대상을 구현해 내었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을 담보한 공지어는 샘에서 사는 주인장이고, 물의 신을 상징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공지어에게 소원도 빌어본다. 특히 샘굿에서 세계적 마임이스트 유진규가 공지어를 표상하는 퍼포먼스까지 더한 콜라보는 마치 한장의 그림처럼 각인이 되어버렸다. 마을제 샘굿의 전승주체는 마을사람들과 사암리농악보존회이다. 특히 여성이 상쇠라는 농악단이라서 더욱 오선주 단장을 만나보고 싶었다. Q. 안녕하세요. 오선주 단장님, 서울 출생이신 분이 어떤 계기로 전통을 만나서 '농악'을 택하고 오늘까지 춘천사암리농악보존회를 이끌어 오셨는지요. A.광화문에 있던 경기여자고등학교 학예회 무대에서 '소고춤'을 추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교때 활동하던 동아리에서 봉산탈춤 김선봉선생님께 탈춤을 배우면서 즐겁고 낭만에 젖었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고, 1996년 대학로에서 풍물 동아리 '굿누리'를 결성해 활동하다보니, 서울에서 소도예술단 상쇠로 활동하고, 2006년 정철기 선생의 '부포놀음' 장르까지 욕심이 나서 찾아가서 부포 돌리기까지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 2000년부터 마임이스트인 유진규씨와 함께 해마다 프랑스 미모스축제.영국 런던마임축제.독일 하노버엑스포,벨기에 하멜축제 등에 참가하여 상술놀이반주와 상포판굿 공연을 하면서 문화교류 민간외교사절단의 역할도 톡톡히 했습니다. 이후 남편을 따라서 춘천에 정착하게 되면서, 2005년부터는 춘천문화원에서 사물놀이와 농악을 지도하게 되었으며, 2009년 중국에서, 우리 한반도에서 발생한 농악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시키는 것을 보고 크게 자극을 받았습니다. 이후 2011년 문화원에서 사암리농악학술조사를 위해 사암리에 파견되면서, 나중에는 사암리에 이주하게 되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되고, '사암리 농악'과 반평생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Q. 본업인 농악보다도 '남사당놀이'를 먼저 배우게된 계기는, 남사당놀이 전수는 누구에게 받으셨나요? A. 풍물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욕구가 있던 차에 이화여대 다니던 20대 초 시절,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돌아가신 심우성 선생님이 기획하신 '발탈' 공연을 너무도 재미있게 본 기억이 생생해서 가슴에 담고 있다가....풍물과 인형극이 어우러지는 공부를 하게 되었지요. '남사당놀이' 보유자이신 고 박용태(1944년) 선생님을 찾아가 '꼭두각시놀음'에 접하게 되었고, 거기서 남사당놀이를 배우려다가 욕심이 나서 다른 장르의 농악도 함께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Q. '꼭뚜각시놀음'은 누구에게 전수받으셨나요. A. 고 박용택 선생님께 '꼭뚜각시놀음'을 전수받았습니다 아쉽게도 인형극 연습은 많이 못하고 풍물 반주에 관심이 더 있어서, 남사당놀이 중 농악 풍물공부를 더 많이 받았습니다 Q. '대전웃다리농악'도 사사했는데 스승의 계보를 밝히신다면? A.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호 '대전웃다리농악'을 인간문화재이신 송덕수'선생님을 찾아가 공부하여 전수자가 되었습니다. 전수조교 김은빈 선생님과 김경수 사무장님께서 보조 강사로 많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해마다 '농악전수 여름캠프'에 참여해 공부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Q. '사물놀이'를 언제부터 배웠는지요. A.사물놀이 공연은 1978년 공간사랑에서 김덕수 사물놀이 공연을 보고 매료되었으며, 직접 배우게 된건 1992년 춘천 사회문화연구회 강습을 통해서이고, 1993년에는 ‘우리소리' 풍물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96년 여성풍물패 '굿누리'를 결성하여 본격적으로 공연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소리에서 활동하던 분들과의 인연은 사암리농악단까지 어어지고 있습니다. 오단장은 여고시절 소고춤을 접하고 대학시절 발탈을 보고 영감을 받고나서, 고 김용택 선생님을 찾아가 '꼭두각시놀음'에 접하게 되었고, 거기서 남사당놀이를 배우려다가 농악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된다. Q. 농악을 하시는 분들이 탈춤. 회심곡, 비나리 같은 장르도 배우시는데. 오단장님은 민속문화, 즉 전통예술 장르 중 더 배우고 싶은 장르는 무엇인가요? A. 저희 동네에 강원도 도청 신청사가 신축되는데, 전통방식으로 부르는 토속소리 '지경다지기'를 배워서 농악단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올해 마을 공동체사업중 하나인 '농요배우기' 시간에는 마을 어르신들에게 '지경다지기소리'를 전수받을 계획입니다. 마을제 '샘굿'과 사암리농악보존회 Q. 사암리농악보존회를 결성하게된 계기 A. 2013년 춘천문화원학술대회에서 중국에서 2009년 유네스코에 등재돼 중국 조선 동포들이 향유하는 '농악무'의 뿌리가 "1927년 춘천 사암리 주민들이 가난을 피해 중국으로 이주해 영벽에 자리잡게 되었고, 낮선 이국땅에서 배고품과 추위를 달래기 위해 영벽바위 밑에서 풍물을 치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랬다"는 길림신문에 난 기사를 바탕으로 자료 수집을 위해 사암리농악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게 되었고 그 당시 생존해 계시던 97세 상쇠 최정하 옹을 만나 많은 고증을 통해 최상쇠님이 중국으로 이주해 간 선조들이 춘천에서 농악할 때, 무등을 타셨다는 사실, 또한 송봉규, 송학규, 김봉렬, 신현수님, 등 1950년대에 농악을 하셨던 어르신들의 고증도 수집하게 되었습니다. 파도파도 끝이 없는 인류무형문화유산 보물지도가 사임리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어 인류문화유산을 발굴해 가는 체계적인 과정을 이어 나가고자 2015년 보존회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Q. 농악대를 이끄는 여성 상쇠로서의 자부심이 어떤가요? A. 딱히 괭과리 소리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닌데, 1992년 취미생활로 참가한 '춘천사회문화연구회'에서 그나마 빨리 장단의 구조를 이해하다 보니 상쇠를 맡게된 후로는 계속 제 역할이 꽹과리를 맡게 되어 자연스럽게 꽹과리 인생이 풍물인생이 된듯 합니다. Q. 1999년 제1회 강원도 사물놀이 경연대회 '대상'을 수상하신 감동? A. 대상을 타기는 했는데 1회로 끝난 의미없는 대회였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제 이력에서 삭제하겠습니다. 수상해서 기뻤던 것은 2010년 강원도 문화원 사물놀이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탄 것으로 그 당시만해도 일반인이 상모돌리면서 연주하는팀이 거의 없었던 시기인데. 제가 지도하는 춘주농악팀 전원이 상모를 돌리며 연주하여 관객들이 깜짝 놀라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2017년 전국웃다리경연대회에서도 제가 지도하는 춘주농악팀이 차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Q. 2010년 전국농어민 풍물경연대회 강원도 대표 참가하셨는데, A. 춘천문화원에서 농악을 지도하다보니 전국대회에 까지 자연스럽게 참가하게 되었고 하도 긴장을 해서 우리가 어떻게 했냐보다는 전국의 다양한 민속놀이를 보며 흥미로웠고 남산한옥마을 구경하며 즐거워 했던 기억이 많이 남습니다. Q. 평창올림픽 때 어찌해서 참가하게 되었는지요? A. 평창문화올림픽 연출하시는 백형민 선생님과의 인연이 있어 문화버스킹 공연 총3회 참가하는, 저에게는 너무나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Q. 작년 예술의 전당 유진규 마임 50주년 기념 헌정공연으로 농악을 선보였는데, 궁금합니다. A. 유진규씨와는 춘천마임축제 총감독을 맡았던 2002년부터 프랑스 페리그 미모스마임축제, 영국 런던마임축제, 독일하노버엑스포, 네덜란드 하멜축제, 벨기에 마임축제,일본 도야마 마임축제, 홍콩 프린지 초청공연, 중국 상하이국제연극제 등에 참가했던 작품 "빈손”의 사물놀이 반주자로 오랜기간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임인생 50주년기념 헌정공연을 서울 예술의 전당과 대전 예술의 전당에서 기획하여 초청공연을 하게 되었고, 그런 뜻깊은 공연을 마치고 커텐콜을 할 때, 남편이 뜬금없이 관객을 향해 그동안 내조를 해 준 저를 언급해 쑥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한평생 예술가라는 외길 인생을 걸어온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난관들이 이상하게도 한번에 다 보상받는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Q. 2007년 풍물부 장원을 받으셨는데, 사진이 있나요? A.아쉽게도 그 당시 찍은 사진은 없고, 그 다음해 포스터에는 전해년도 장원 수상하는 사진이 들어가는 관습이 있어서, 제가 들어간 팜플렛 사진을 찾아서 보내드리겠습니다. Q. 해외공연 중 기억에 남는 장소는 A. 해외공연중에는 그저 비행기 타고 가서 공연장 주변에 숙소를 구하고 공연장 리허설, 그리고 공연후 귀국 등 바쁜 여행일정이었는데, 딱 한번 프랑스미모스축제 참가 후에는 공연을 마친 후 거의 한달간 벨기에, 스페인, 스위스, 이탈리아 등 주변,국가를 자유롭게 여행 다닌 기억이 제일 추억에 남습니다. 마침 축제기간과 겹쳐서 민속공연도 볼 수 있었는데,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국적불문하고 모두 통한다는 거죠. 외국어를 서로 몰라서 말이 안 통해도 예술은 통한다는거죠. 전통문화를 소중하게 지키려는 국민들이 선진국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고 돌아왔습니다. Q. 존경하는 국악인은 누구신가요? A. 농악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안성바우덕이' 상쇠입니다. 19세기 대원군이 경복궁 중수시 전국에서 강제동원된 젊은이들이 고향이 그리워서 밤마다 궁에 불을 지르자. 대원군이 이들을 위로하게 위해 전국 소리패 광대패들을 서울로 올려서 전국 단위 콘서트를 벌렸죠. 거기서 최고상으로 옥관자를 받은 바우덕이입니다. A. 전통이란 무게를 30여 년 동안 가지고 오시면서 가볍지는 않은 시절을 보내셨는데.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은 언제이셨는지요. Q. 의무기록을 보니 2010년에 뇌수막종 수술 받았네요. 너무 어지러워서 하던 농악 전수 공부를 더 이상 못한 게 가장 아쉽습니다. 이후에 이 전통놀이 농악대가 저를 살려낸 거지요. 우울하다가도 벽에 걸린 상모를 보면 농악이 생각나고. 그러면 몸을 추수려서 밖에 나가게 되지요. 그래서 지금은 완치해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있어요. 전환점이 된거지요. 다행인건 그 덕분에 우리 마을에 더 애정을 갖고 집중할 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마을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살아야 인간이 산다" Q. 세계적 마임이스트 유진규 선생과 이번 공지어축제를 같이 해보시고, 유진규 선생과 앞으로 '농악+퍼포먼스' 콜라보 작품 구상을 하시는지요. A. 올해 처음으로 개최한 동내면 '대룡산 공지어놀이'에서 유진규씨가 총연출, 제가 기획을 맡았습니다. 사암리 대룡산과 공지천 공지어를 잇는 스토리텔링으로 첫번째는 사암리 약물샘에서 샘굿으로 제의적 축제를 벌였고, 두번째는 동내면민이 함께하는 마을축제와 소리꾼을 찾는 경연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몸짓으로 제의적 행위를 할 때에 원초적 소리도 있어야지요. 반주가 곁드려져야 더욱 효과적이기에 마임과 풍물은 계속 함께 공동작업을 할겁니다. Q. 내년 제5회 샘굿에는 올해와는 좀 더 확장된 새로운 장르를 기대해도 될까요. A. 내년에는 퇴계선생이 공지천에 볏짚을 뿌리자 물고기로 변했다는 전설을 근간으로 공지어 제작에 좀 더 신비한 비주얼을 가미하고 싶습니다. 내년에는 '공지어 설화'를 소재로 한 마술도 축제 마당에 끌어오려 합니다. Q. 올해 샘굿은 언제 개최되었나요. 공지어 샘굿할 때 부르던 노래 가사는 기억나시나요 A. 첫번째 놀이 대보름맞이 ‘대룡산 샘굿’은 지난달 4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사암리 약물샘 (원창고개길 96-1)과 사암2리 마을회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신비한 물고기 ’공지어‘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공지천 곰짓내는 사암리 대룡산에서 발원합니다. 가사는 뚫으세 뚫으세 뻥뻥 뚫으세 수정같이 맑은 샘물 뻥뻥 뚫으세 대룡산 하늘기운 맑은물로 콸콸 솟아 곰짓내로 흘러흘러 공지어가 춤을 추니 올해도 풍년이요 내년에도 대풍일세 Q. 올해 제3회 샘굿에서 택한 주제는 '전설의 물고기 공지어'인데 어떤 역사적/지역적 배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신건가요. A. 춘천엔 퇴계 이황선생의 공지어 설화가 있고, 공지어가 살고 있는 곳이 공지천이며 공지천의 원류중 한곳으로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암리 약물샘에서 깨끗한 물과 대기순환을 기원하는 '생명굿'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Q. 내년 사암리 샘굿의 주제나 슬로건에 대해, 기획의도에 대해 구상해 놓으신 것이 있나요. A.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살아야 인간도 산다" 즉,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석유보다도 물이 더 비싼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다행히 평소 늘 생각한 이 말이 사암리 공지어전설과 맞아지고, 실제 전해지는 전설의 장소가 있습니다. 사암리 주민들이 지켜나갈 책임이고 과제라고 봅니다. Q. 이번 제3회 샘굿 개최에서 성과는 A.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마을사람들과 하루종일 얼굴 맞대고 볏집으로 공지어를 999마리 만들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정겨운 시간들을 공유했습니다. 이쁜 공지어에게 마을의 안녕을 빌면서 마을 곳곳에 매달면서 서로 인사하고 악수하는 모습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마을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Q. 언제나 마을제 샘굿을 함께 하시는 남편, 동반자를 떠나서 객관적으로 예술가 유진규 소개하신다면? A. 1981년 국악 관련 행사에서 만나 결혼을 해서 40년이 넘게 같이 살고 있습니다. 일상에서는 누구에게나 두절 두절 말이 없는 편이시고, 공부를 많이 하십니다. 시사, 철학, 다큐 등...늘 그냥 지나치는 것이 없습니다. 하늘 땅, 물... 등 발밑에 있는 개미까지.....최근에는 청개구리 집을 만들어서 같이 살고 있습니다. 특히 자기가 말한 것(작품)은 책임을 집니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 믿고 따르는 국내외 예술가들이 곳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진규 하면 '신뢰' 그 자체입니다. 춘천마임축제가 런던 마임축제, 프랑스 미모스축제와 함께 세계 3대 마임축제 중 하나로 정착하는 데는 유진규 선생의 신뢰가 모든 사람들을 집결하게 했습니다. Q. 단장님, 춘천사암리농악보존회의 미래를 위한 계획은 A. 사암리 마을에 다시 사람들이 살러 들어오고, 젊은 사람들이 귀촌을 하고, 어린이들이 태어나고, 학교종이 울리는 것입니다. 마을사람들과 함께하는 사암리농악보존회입니다. 그러면 힘이 나서 더 북을 치고, 어린 계승자들도 이어질거고, 욕심을 낸다면 향토문화재가 되어서 다음 세대에도 이어지는 지속가능성을 확고히 하는 겁니다. Q. 단장님, 사암리농악보존회 리더로서 꿈이 있으시다면? A. 어린이농악단을 결성하여 사암리농악을 전승하려는게 제 목표입니다 올해부터 어린이농악단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춘천을 대표하는 어린이농악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전통을 계승하는 꿈나무들을 육성하는 것이 꿈입니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제가 할 일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중국 조선족의 농악무'를 전승하고 있는 '왕청현농악단'과의 교류를 계속 진행할 겁니다. 3년간 코로나로 서로 오고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 김명춘 단장과 오늘도 통화해서 서로 교류하길 원한다고 확인했습니다. 올해 9.9절 조선자치족 행사에도 참가할 계획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술가는 두 부부 중 한 분은 안정된 직장이나 사업장을 운영할법도 한데, 모두 예술가의 길을 가신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오선주 단장이 자식들을 키워서 사회로 내보내는 20년 동안만 레스토랑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평생 예술의 길을 선택한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은 그냥 웃음뿐이다. 내년 제5회 사암리 공지어 샘굿이 기대된다. 전설 속의 공지어가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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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별신굿탈놀이, 베네치아 카니발 초청 공연세계 3대 축제인, ‘베네치아 카니발’이 인류무형문화유산 '한국 탈춤'의 신명과 흥으로 들썩였다. 첫날 현지 오후 3시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 한마당 공연이 펼쳐졌다. 전 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흥겨운 사물놀이 장단에 맞춰 어깨춤을 추고 풍자와 해학의 몸짓에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이날 공연단은 태평소 소리와 함께 신내림을 받은 각시광대가 등장하는 무동마당을 시작으로 주지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파계승마당, 양반선비마당을 선보였다. 공연 뒤풀이 마당에서는 관객들에게 하회탈 목걸이를 걸어주고 안동 홍보 책자를 나눠주면서 세계유산의 도시 안동 방문을 홍보하기도 했다. 이날 공연에 앞서 에르멜린다 다미아노 베네치아 시의회 의장과 강형식 주밀라노 총영사관 총영사, 김태우 부영사, 전예진 한국문화원장, 임태섭·김순중 안동시의원이 무대에 올라 인사를 하고 관광객들에게 하회별신굿탈놀이 공연을 소개했다. 또한, 공연 후에는 베네치아와 안동의 지속적인 문화교류를 위한 면담도 진행했다. 이번 공연은 작년 11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하회별신굿탈놀이의 멋과 흥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림과 동시에, 유네스코 지정 유산 3대 카테고리를 석권한 안동의 우수한 문화적 위상까지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한편, 안동시 관계자는 "한국의 탈춤을 대표해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세계 3대 카니발 중 하나인 '베네치아 카니발'에 참여해 자랑스럽다”면서 "세계유산의 가치를 세계인과 함께 공감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홍보 활동을 이어가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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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섬, 사할린을 떠나며판데믹 함께 눈물의 섬, 사할린에 들다 판데믹이 고개를 들던 3년 전, 나는 용케 국내 판데믹을 피하듯 한국을 떠나 눈보라를 헤치며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에 내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거센 풍설에 비행기가 착륙이나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은 '눈의 나라' 러시아 사할린 조종사들에겐 모욕적일 수 있겠다는 걸 알았다. 도착하자마자 사할린한인문화센터 앞뜰의 '일제강제동원희생자추모비'와 '이중징용희생자추모비'에 묵념하고 동포들과의 문화교류를 위한 희망을 품고 교육원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단 열흘만에 판데믹으로 인해 한국어·문화강좌를 원격수업으로 전환했고, 기존의 활발한 국내 교류사업들은 모두 취소되었다. 일제 강제동원과 냉전 역사에 연유한 이산과 슬픔의 섬은 4, 5월까지 산을 하얗게 덮었던 얼음눈이 녹으면서 차가운 물이 도시 전체를 돌아 흘러 차갑고 고립된 눈물섬이 되었다. 새로운 사업이 보다 많이 필요했던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깊이 정들며 사랑에 빠지다 정신 차린 3년을 되돌아 보고자 한다. 재미와 의미를 충족할 교육원(장) 역할 찾기 교류 단절의 시대 문화의 메신저가 되어야 했다. 극동 3개 교육원장은 공무비자 90일이 만료될 즈음 국내(대한민국) 출장을 통해 비자를 새로 발급받아 복귀해야 한다. 판데믹 기간과 경제 제재 시기에 국경을 넘는 일은 PCR 음성증명, 2주간 격리, 멀고 먼 항로의 힘겨움과 모험이 늘 함께 했다. 그럼에도 여행가방엔 한국어 및 문화체험·교육에 필요한 물품, 동포예술단체나 한국어채택교 선생님이 부탁한 물품(한복, 문화지도, 한지, 단어카드, 민속놀이도구, 공연도구 등)으로 채워졌다. 이런 것들은 교류가 원만할 때엔 방문하는 당사자나 단체가 사할린에 오면서 가져오거나 외교파우치를 통해 운송하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아내가 준비해준 내 자취 삶의 반찬꾸러미들은 포기하거나 최소화 해야했다. 한국과 사할린 사이 한국어교육․문화 물품을 나르는 메신저의 역할은, 힘들지만 독보적인 보람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 정부의 한 교육공무원이 거의 고립된 사할린 동포들을 망각하지 않았구나 하는 인식을 드리지 않았을까 하는.....자족적으로 나름 생각해 본다. 한국의 한국어와 한글, 그리고 전통문화에 대한 재미와 의미를 결합하는 어떤 새로운 사업들을 찾고 실행했다. 사할린 동포와 러시아 현지인들이 잘 어울려 사는 것, 한국, 한국어·문화에 대한 호감과 친밀감을 유지․증진하는 것은 서로 관련이 깊다. 교육원의 역할은 문화적 스며듬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다소 썰렁한 문화센터 로비에 이동식 TV를 배치하고 사할린우리말방송과 KPOP, 세계문화유산, 전통과 현대의 한국문화, 경제적 성취에 대한 영상을 거의 매일 상영했다. 영상을 안보는 것 같아도 센터에 출입하는 어른, 어린 학생들이 자주 시청하는 것을 확인했다. 러시아 유일한 한글신문 새고려신문도 놓아두면 금방 없어졌다. 또 학기초 가끔 학교의 교문맞이처럼 한국어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파티안경을 쓰고 어른, 청소년 수강생들과 하이파이브를 했고 연말이 되면 한국노래 버스킹(대중 앞에서 노래하기)을 했다. 사할린에서 원장의 이런 모습은 낯설 것이다. 어색하지만 서로 웃음이 나오고 잘 통하지 않는 언어의 장벽을 넘는 바디랭귀지라고 할까... 재미있으며 쉽게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원장이 품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조금 망설이긴 했으나, 품위, 권위로 살아 온 삶이 아니었으니 오히려 그것을 의식하며 사는 것은 무덤과 같은 홀로 생활을 더 힘들게 할 뿐이라 생각하여 그냥 시도했고 즐겼다. 또한 평생교육 강좌 ‘세계의 민속춤’ 클래스를 열어 2세 동포 어르신과 현지인 함께 센터 강당과 도시 공원, 스키장 리조트 위에서 춤추고 어울리는 기회를 가졌다. 1세 어르신이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사할린 할머니들이 춤추며 즐거워하는 것을 처음 본다. 사할린 할머니들은 너무 힘들게 살아와서 춤추며 밝게 웃는 모습을 도통 보기 어려웠다”고 하셔서 큰 보람을 느꼈다. 평생교육 강좌 ‘글쓰는 사할린’도 인상적이다. 사할린 동포 2세 ‘빅토리아 최’ 작가님을 강사로 모시고 동포 2세분들의 부모와 성장 시절에 대한 기억을 글로 써 역사와 유산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탄생한 강좌였다. 한국어가 서툴다면 러시아어로 써도 좋으니 제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부모들의 아픔과 그 아픔을 보며 자란 기억을 되살려 생명을 주자는 취지였다. 우리말방송과 새고려신문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였고 나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살려 글을 썼고,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새고려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동포 단체들의 행사나 잔치 등에 초대되면 꼭 한국탈과 한삼, 소고, 블루투스 노래방 마이크를 지참했다. 언제라도 민속춤클래스에서 함께한 밀양아리랑을 같이 추고, 소고춤과 탈춤, 사할린동포 애창곡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정체성(идентичность)의 실마리와 함께 카레이츠(корейцы)의 신명나는 문화를 보여드리고자 하는 의미였지만, 실제로는 내 적성에 너무 맞기 때문이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모국)과의 문화교류 단절을 보완하는 업무 찾기 교육원의 본연 업무는 한국어와 한국문화교육이다. 판데믹 전까지 방학에 활발히 오고 가던 사업이 중단되자 한국어 학습의 동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외국어학습은 익숙한 접촉과 소통이 핵심인데,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교육원장 과제 수행 대회”였다. 한국의 시낭송, 자신의 꿈 말하기, 한식만들기나 KPOP 춤·노래 영상, 한국영화 감상 말하기 영상 등을 제출하면 한국음식 체험권이나 한국 기념품 등을 상품으로 주었다. 주말에는 한지공예와 매듭공예, 김밥만들기 등의 특별수업을 가끔 운영했다. 교육원 공간을 십분 활용해야 하고 말하기 기회를 자꾸 주는 것이 언어학습에 중요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2022년 여름방학에는 처음으로 사할린 초·중등학생을 위한 한국어·문화캠프를 열었다. 한글학교와 한국어채택교 선생님·학생, 아리랑무용단이 리더가 되어 한식만들기, 한글쓰기, 민속춤, 민속놀이 코너를 운영하여 한국어와 문화에 대한 친밀감을 갖도록 했다. 학교에서 제2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과 채택 가능성이나 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지방도시 10개교 학생 900여명이 참여했고 전세버스를 빌려 포로나이스크와 마카로프 도시를 향해 새벽에 출발하기도 했다. 캠프가 끝나고 많은 학생들이 다가와 사진을 찍자고 했고 자신들의 작품을 자랑했다. 한글학교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시작했지만, 단절의 시대에 참 괜찮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이 지면을 빌어 선생님과 학생들, 아리랑 어르신들게 감사드린다. 단절을 보완하는 또 하나의 시도는 하바로브스크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 동포의 만남이다. 하바로브스크한국교육원이 개최한 "한국어말하기 큰잔치”에 초대를 받아 사할린 아리랑무용단원을 모시고 참석했다. 무용단은 대회 축하의 의미로 무대에서 ‘도라지’ 춤을, 나는 개량된 ‘봉산탈춤’을 선보였다. 하바로브스크 고려인 아리랑예술단의 환대를 받았고 공연의 반응은 뜨거웠다. 무엇보다도 하바로브스크 아리랑센터에서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의 뜨거운 포옹, ‘도라지’ 민요와 춤을 화합하여 공연하는 장면, 밀양아리랑 민속춤을 함께 추는 흥겨운 수업 장면은 마치 다큐멘타리의 한 장면 안에 들어간것 같았다. 문득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가르치는 블라디보스톡 24학교 교장 선생님의 제안, 즉 "지금 한국과 교류가 어려우니, 블라디보스톡·사할린·하바로브스크의 한국어 채택교끼리 공동수업이나 대면 교류 같은 것을 해보자.”는 말씀이 생각났다. 연해주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 동포의 교류가 우선 현실화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내가 이런 역사적인 자리에서 밀양아리랑을 가르쳐 드리다니, 참 믿을 수 없는 장면이고 보람된 시간이었다. 사실 교사연수에서 배운 봉산탈춤 기억을 살려 처음 체부라슈카 유치원 행사에서 모험적으로 초연한 적이 있다. 이 영상을 본 사할린국립대 엘비라 교수님의 제안으로, 한국 탈 색칠하기 행사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공연하고, 행사 참가자들에게 가르쳐 함께 탈춤을 추게 되었다. 사할린에 처음으로 탈춤을 소개한 격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2022년 11월 30일, 한국의 탈춤이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재에 등재 결정되어 남달리 보람이 컸다. 사할린 우리말방송 <한국의 상징> 코너에 ‘한국의 탈춤’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상징> 코너에는 3년간 ‘한글’, ‘추석’, ‘아리랑’, ‘설’, ‘정월대보름’, ‘한식(절기)’, ‘한식(KFOOD)’, ‘온돌’, ‘직지·금속활자·한지’, ‘이순신·난중일기·거북선’, ‘독도’ 등 한국의 상징을 소개했고, ‘한국의 무술’, ‘청자와 백자’의 촬영을 마쳤다. 한국의 공무원으로서 사할린 동포들께 드리는 기억의 노래 선물을 녹음했다. 국내출장 중에 KBS라디오 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에 나가 사할린 동포 소식을 전하는 자리에서 교육원 수강생 사할린 동포 2세 김경순님의 개사곡 두곡을 무반주로 불렀다. 부모와 어린 큰오빠의 이별과 50년 만의 만남 또 이별과 사별의 한맺힌 사연을 담은 가사였다. KBS한민족방송을 진행하는 박해상 MC가 당신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사할린에 의미있는 노래들을 녹음하여 사할린 동포들께 선물로 드리라는 제안을 하셔서 녹음한 후 음악 CD를 만들어 주셨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분이 지으신 가사가 그 분의 부탁으로 불러준 나의 목소리로 녹음이 되었다. 디아스포라의 가족사 사연을 개사하신 김경순님이 2022년 제24회 KBS세계한민족체험수기대회 성인 부모님과 큰오빠의 한맺힌 사연을 수기로 제출하여 대상을 받은 것이다. 사할린 동포를 대표해서 받았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글쓰기를 통해 이산의 아픔을 치유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십여년만에 교육원 수강생 두분의 사연이 KBS한민족 방송에 사연이 소개되어 녹음하여 보내드리고 드리고 소정의 원고료도 받아 전해드렸다. 자주 글쓰시고 방송에 보내셔서 기록으로 남기시길 간곡히 소망한다. 3년 동안 맞이한 3번째 봄날, 헤아릴 수 없는 신명과 의미의 기억들이 사계절의 천연색으로 바뀌며 지나간다. ① 가을의 김치축제에서는 한국에서 가져 온 24시간 막걸리를 담가 현지인들과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막걸리 더 없냐고 묻는 현지 공무원이 계셔서 한번 더 담가 드렸다. ② 공무출장에서 복귀하며 가져 온 팽이, 제기, 딱지, 국궁, 비석치기 등 민속놀이 도구들을 배치하여 추석맞이 민속놀이체험 코너를 운영했다. 교육원과 문화센타로서 당연히 보여야 할 모습이어서 보람이 컸다. ③ 이 행사를 목격한 모스크바 고등경제대학의 연구진이 한국교육원 활동에 대한 인터뷰를 요청하여 난데없이 영어 인터뷰에 뛰어 들었다. 끝내고 난 보람과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던 기억이 있다. ④ 한인회 여성회 초대로 야유회를 가서 6시간 동안 춤을 추었다. 러시아인 한 남성이 몇시간을 지켜보던 모습은, 마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3일 낮과 밤’ 동안 춤추던 동이족을 묘사하던 이웃 민족의 모습이 저러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⑤ 코르사코프 한인회에서 여름날 주최한 ‘한국의 맛’ 행사에서 원없이 노래하고 춤추었고 땀 흘렸다. 여름 한복이 없어 땀으로 고생했지만 그것은 고생이 아니라 사랑이고 신명이었다. 고스란히 인생의 끝까지 가져갈 장면들이 너무 많아 이렇게 이임한 후 떠나, 다시 돌아오기 쉽지 않은 이 시대가 야속하다. 떠나는 이의 소망과 감사 지난 3년은 비록 판데믹과 제재로 인해 고립과 긴 우회로 값비싼 왕래의 비용을 치루었지만, 그 상황을 살아내기 위한 가치있는 역할 찾기와 재미와 신명을 주는 모험적 사업의 시도는 스릴과 보람을 준 시간이었다. 이제 떠나는 즈음에 동포분들께 소망하는 것은, 한국어든 러시아어든 글쓰기를 계속해 주십사 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한인사회에서 그런 기록들이 대대로 전달되어야 고통의 역사가 치유되고 생명과 힘을 얻을 것이라 본다. 사할린 동포들이 글을 쓰고 번역하여 다듬어 KBS 한민족 방송에 자주 보내시면 좋겠다. 그러면 다음세대들이 역사를 기억하고 모국과의 연결을 쉽게 하여 자부심을 갖고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1세대 부모님이 영주귀국을 못하고 돌아가신, 2세대 어르신들은 부모의 고난과 갈망, 자신의 성장기를 더듬어 소중한 감성과 기원, 소망과 원망 등을 글에 마땅이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해자와 모국의 정부는 무한의 책임을 져야 한다. 끝으로 고립과 고독, 환율의 공격과 온갖 제한들 속에서도 잊을 수 없는 보람으로 엮여진 교육·문화 여행과 모험을 보람있게 해주신 사랑하는 부모님, 가족, 형제자매, 첫날부터 끝까지 반갑게 응대해 주신 사할린 동포 어르신들게 마음을 다해 감사드린다. 특히 교육원생 중 작년 KBS한민족방송체험수기에서 대상을 차지한 김경순 여사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또 사할린의 한인 언론방송·대학 및 교육계·문화예술계 지도자와 구성원 단원 여러분들, 또 다른 민족 이웃들, 늘 정성 가득한 한글학교와 교육원·한국어채택교의 한국어․문화 학습자 여러분·선생님들, 또한 성실한 우리 공관과 재외국민 이웃들, 사할린을 사랑하고 기억하는 한국의 국악신문, 아리랑연합회에도 감사드린다. 3개년 교육원장 임기 시절 사할린에서 맞이한 열두 계절동안 하루하루가 저에겐 빛나는 선물이었다. 어떻게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지 정리하고자 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스파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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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국악그룹 비단, , 역사왜곡 문화유산 콘텐츠 세계 전파동북공정(東北工程) 등 주변국들의 역사 왜곡에 대항하는 국악 그룹이 세계인들에게 목소리를 냈다. 지난 6일 걸그룹 뉴진스(NEWJEANS)가 한지의 우수성을 홍보하는 영상에 출연했다가 ‘제지술은 중국의 것’ 이라는 중국 네티즌들의 악플이 달렸고, 김치를 중국 쓰촨성의 절임 채소 ‘한궈파오차이’ 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2022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한복을 등장시켜 한복이 ‘한푸’에서 유래된 중국의 의복이라 주장하는 한편, 한 중국 게임사가 모바일 게임 광고에서 이순신 장군을 자국 문명으로 표기한 사실이 드러나는 등 한국의 역사를 자국의 것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최근 더 활발해지고 있다. 일본 또한 최근 개정한 국가안보전략에서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독도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일부 극우 누리꾼들은 최근 개봉한 뮤지컬 영화 ‘영웅’ 의 주인공인 독립투사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는 등, 주변국들의 역사 왜곡이 최근 날로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10년간 30종이 넘는 한국 문화유산 주제가를 발표하며 올바른 역사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힘쓰는 문화예술 단체가 있다. 바로 퓨전국악그룹 ‘비단’ 이다. 여성 5인조로 구성된 비단은 훈민정음, 한복, 이순신 장군, 독립운동 등의 문화유산을 주제로 창작국악 곡을 만들고 각 곡 마다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 9개 언어별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전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역사를 전파하고 있으며, 청와대 초청 공연 및 국무총리 표창 수상과 넷플릭스와의 음원 공급 계약 등으로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지난 2021년 한복을 주제로 발표한 ‘하늬 아리랑’ 뮤직비디오와 한복 다큐멘터리는 주 러시아한국문화원을 비롯한 다수의 외교 공관에서 해당 국가의 언어로 소개되는 등, 진정한 K-콘텐츠를 활용한 문화 주권 회복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최근 비단은 중국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는 탈춤과 윷놀이 등의 세시 풍속이 담긴 설날 주제가 ‘새날, 새아침’을 발표했는데, 함께 발표한 설날 다큐멘터리에는 지난해 11월 세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탈춤을 비롯해서 올해 9월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예정인 차례·성묘 등 한민족 고유의 설 풍습에 대한 유래와 역사가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 9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인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되고 있다. 이처럼 전 세계에 한국의 전통 문화를 홍보하고 있는 비단은 "지속적인 문화유산 콘텐츠 제작과 공연활동을 통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문화 주권을 회복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비단의 모든 콘텐츠는 유튜브 공식채널 ‘퓨전국악 비단’에서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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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국악 비단, 설날 주제곡 '새날, 새아침'발표퓨전국악그룹 비단(보컬 김수민, 타악 김지원, 대금 김가윤, 해금 서재원, 가야금 손예)이 2023년 흑토끼의 해 ‘계묘년’을 맞아 신곡 ‘새날, 새아침’ 을 발표했다. 이번 신곡은 훈민정음, 한복, 경복궁 등 다양한 한국의 문화유산 주제가를 제작해 온 비단이 지난 9월에 발표한 추석 주제가 ‘희락가’에 이어 한국의 명절 시리즈 2탄으로 발표한 설날 주제곡으로, 밝고 신나는 분위기의 퓨전국악 곡이다. 특히 붉게 타오르는 새해 일출을 표현하듯 신나게 연주되는 꽹과리와 모듬북의 다이내믹한 리듬과 가야금, 해금, 대금이 결합된 경쾌한 편곡에 산뜻한 보컬 멜로디가 어우러져, 코로나와 이태원 참사 등의 고난을 딛고 힘차게 새해를 시작하려는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공식 유튜브 채널 ‘퓨전국악 비단’을 통해 공개된 ‘새날, 새아침’ 뮤직비디오에서비단 멤버들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등장한 ‘달고나’, ‘구슬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를 비롯한 ‘윷놀이’ 와 ‘고무줄넘기’ 등 어린 시절 추억의 놀이를 재현하며 밝은 미소와 함께 새해를 맞는 설렘을 담았다. 또한 기존 곡들과 마찬가지로, 9개 언어로 제작된 설날 다큐멘터리에는 최근 세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탈춤의 유래와 역사를 비롯해서 차례·성묘 등 한민족 고유의 설 풍습을 전파할 예정으로, 과도한 게임 및 스마트폰 사용으로 인해 친구들과 함께 뛰어 놀 기회가 줄어든 요즘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대면놀이가 담긴 뮤직비디오는 새롭고 신기한 간접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청와대 초청 공연 및 국무총리 표창 수상 등으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온 비단은 지난 9년간 도깨비, 한복, 한식 등 35종의 문화유산 주제곡과 다큐멘터리 영상을 만들어 왔으며 각곡마다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 총 9개 언어로 제작된 문화유산 다큐멘터리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전 세계에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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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학술지 '민속학연구' 발간국립민속박물관은 민속학 학술지 '민속학연구' 제51호를 발간했다고 14일 밝혔다.연희예술·생업·세시풍속·민간신앙 등을 다룬 7편의 연구논문이 실렸다. 조선민속학회 창립 9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조선민속 발굴과 보존에 노력한 송석하의 학문적 의의를 재평가하는 기획논문도 함께 수록됐다.특히 올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탈춤과 관련된 '일제강점기 하회별신굿탈놀이 조사 사진의 표면과 이면', '시베리아 가면에 나타난 샤머니즘적 영혼 표현과 조형성'에 관한 논문이 담겼다. 논문은 국립민속박물관 누리집에서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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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탈춤’ 포함 47건…인류무형유산에 새 등재지난 3일(현지시간) 종료된 제17차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는 '한국의 탈춤' 등 인류무형문화유산 47건이 새로 등재됐다.4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유네스코는 지난달 23일부터 지난 3일까지 아프리카 모로코 왕국 라바트에서 열린 이번 회의에서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39건, 긴급보호목록 4건, 모범사례 4건 등 47건을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새로 등재했다.문화재청에 따르면 2008년 등재 시작 이래 총 678건의 유산이 목록에 올랐다.한국의 탈춤 외에도 중국의 '전통 차 가공기법 및 관련 사회적 관행'과 프랑스의 '바게트빵 문화와 장인의 노하우', 북한의 '평양랭면 풍습', 일본은 41개 종목을 묶은 '후류 오도리((風流踊), 사람들의 희망과 기원이 담긴 의식 무용' 등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새롭게 등재됐다.당초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 산하 평가기구로부터 '정보보완' 판정을 받았던 독일의 '현대무용'은 협약 제2조에 정의된 무형문화유산 정의에 부합하는 지에 대해 찬반이 팽팽했지만 이번 위원회에서 다수 위원국의 지지를 받아 등재에 성공했다. 위원회 산하 평가기구는 등재 신청서가 제출된 각 나라의 유산을 심사한 뒤 그 결과를 '등재'(inscribe), '정보 보완(등재 보류)'(refer), '등재 불가'(not to inscribe) 등으로 구분한다. 독일이 신청한 내용을 두고 각 위원국은 협약 제2조에 명시된 '무형문화유산' 정의에 부합하는지 찬반 의견이 갈렸다. 협약 2조는 무형문화유산을 '공동체·집단과 때로는 개인이 자신의 문화유산의 일부로 보는 관습·표상·표현·지식·기능 및 이와 관련한 도구·물품·공예품 및 문화 공간'이라고 규정한다. 다음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는 내년 12월4~9일 남아프리카 보츠와나의 수도 가보로네에서 열린다. 우리나라는 국가무형문화재인 '장(醬) 담그기'를 바탕으로 한 '한국의 전통 장 문화'를 차기 대표목록 등재 신청대상으로 선정한 바 있다. 등재 여부는 2024년에 결정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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