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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1)<br>원주아리랑아침에 만나면 오라버니요 밤중에 만나면 정든 님 일세 술집에 아주머닐 친하고 보니 냉수만 달래도 청주만 주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감상 눈이 맞아버린 이웃사촌 남녀의 사랑과 정분난 주모와 떠꺼머리총각의 행각이 외설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슬그머니 입가에 웃음이 이는 것은 일탈이 주는 스릴에 마음이 끌린 때문일까. 사랑에 빠진 남녀의 가슴 쿵쾅거리는 감정을 글씨에 담았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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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43) <BR> 백자철화편병편과 수물(受物)편같은 백자가마터 출토품이라는 것도 이규진(편고재 주인) 편병은 병을 만든 후 앞과 뒤를 누르거나 두드려 면을 만든 그릇이다.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만든 기종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전기 것은 마치 몸통이 접시 두 개를 붙여 놓은 듯 옆면이 좁은 편이며 후기 것은 분청사기에서 보이는 형태처럼 둥글고 편평한 모습이다. 후기 쪽으로 가면서는 크기 또한 커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기도 광주시 송정리 백자가마터는 꽤 여러 곳이 알려져 있다. 그 중 두 곳이 발굴이 되었는데 한적했던 이곳에 시청이 들어서면서 긴급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간지를 통해 송정리 백자가마터는 1649년에서 1653년경에 도자기를 제작했던 관요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는 선동리를 이은데 이어 유사리로 연결시키는 17세기 중간 시기의 것임도 아울러 알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마터가 시청이 들어서면서 뭍혀 버린데 반해 1호 가마터는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마차길과 무덤 사이 단애에 퇴적층이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 그대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시청 뒤편 주차장을 나서면 바로 문밖에 위치하게 되어버려 옛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당황스럽기조차 하다. 백자철화편병편과 철화수물편은 모두 송정리 1호 백자가마터에서 오래 전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80년대 무렵으로 기억이 되니 벌써 40여 년 전 일이다. 이처럼 오래 간직해 오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 특징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선 백자철화편병편은 고운 태토에 기벽은 얇은 편이며 굽다리가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백자철화편병편의 가장 큰 특징은 아무래도 철화로 그려진 대나무 문양이 아닐까 생각된다. 무심하게 툭툭 친 듯한 대나무 그림은 농담을 주어 선명하면서도 산뜻한 느낌을 주고 있다. 전체가 살아있었더라면 대단히 아름답고도 우아한 편병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백자철화수물편은 남아 있는 부분이 작아 어떤 기형이었는지는 알수가 없다. 유약도 없는 초벌구이인 것도 아쉬운 점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도편에서 주목되는 것은 철화로 씌어진 두 글자다. 하지만 수물(受物)이라는 글자가 어떤 물건을 받거나 어떤 물건을 받고자 한다는 뜻인지 전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어 답답하다보니 아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두 글자만이라도 이처럼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에 오히려 감사라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도자기를 통틀어 나는 아직까지 수물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 것을 어디서고 한 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나름으로는 귀중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연재를 하면서 한 점이 아니라 이처럼 이질적인 두 점을 함께 소개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따로따로 소개하기에는 무언가 미진해 보이는 점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점 모두 같은 송정리 백자가마터 출토품이라는 것도 한 몫을 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같은 시기 백자철화편병편은 미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철화수물편은 자료적인 측면에서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힌다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생각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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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89)<br>원주어리랑, 산은 멀고 골은 깊어어리랑 어리랑 어러리요 어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산도나 멀고요 골은 깊은데 누구를 보려고 나 여기 왔나. 감상 문양지에 작품을 할 경우는 바탕의 문양을 살려가며 글자를 포치한다. 글씨가 주가 되고 문양은 배경이 되기 때문에 배경은 옅어서 이미지만을 드러내야 한다. 도드라지거나 진한 그림은 부적합하다. 산수가 그려진 풍경에 소가 내를 건너는 그림 위에, 노랫말에서 ‘산은 멀고 골은 깊어’를 뽑아 돋보이게 썼다. 두메산골로 시집온 여인의 적막감을 표현하고, 오른쪽 아래에 사각의 유인(‘일어나 빛을 발하라’)을 찍어 전체 화면의 균형을 잡았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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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87)춘천아 봉의산아 너 잘 있거라 신연강 뱃머리가 하직일세 싸리재 아흔 아홉구비 우리 복병 삼악산아 우리 군대를 보호해다오 동녘에 비친 달아 우리 군대 명랑하게 비추어 다오 잊지 말라 명예도 지위도 버리고 이 강산 굳게 지켜 싸워다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춘천의병아리랑을 쓰니 때는 갑진춘사월이라 한얼이종선 감상 의병(義兵)이란 나라가 외세의 침입으로 위험에 처하고 관군이 무력할 때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적과 싸운 민병(民兵)을 말한다. 당연히 국가의 군대가 강건하면 의병은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의병은 삼국시대 이후부터 있었지만, 특히 조선조 말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수많은 외침을 겪으며 의병이 일어났다. 농사를 짓던 백성들이 의병에 참여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눈물 나는 역사는 국가가 얼마나 허술하게 운영되었느냐는 반증이기도 하다. 남이 나를 칠 때는 그만한 빌미를 스스로 제공했기 때문이다. 만만하니까 쳐들어 온 것 아닌가. ‘맹자’에 이런 구절이 있다. 人必自侮然後 人侮之 (인필자모연후 인모지) 家必自毁以後 人毁之 (가필자훼이후 인훼지) 國必自伐以後 人伐之 (국필자벌이후 인벌지) 스스로를 업신여긴 뒤에 남이 그를 업신여기고 집안도 스스로 헐뜯은 뒤에 남이 그 집을 훼손하며 나라는 안에서 무너진 후에 다른 나라가 그 나라를 치는 것이다. 국가의 허술한 경영이 백성들의 부질없는 피와 눈물을 부른다. 개인이나 국가나 자강불식(自强不息)할 일이다. 의병 나가는 자식의 안전을 삼악산과 밝은 달에 하염없이 빈다. 끝내 나라를 지켜내고 부디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어미의 간절한 심정을 처연한 마음으로 옮겼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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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한글서예가전에서 만난 사할린아리랑사할린아리랑 따뜻한 조선땅을 놔 두고 가라후토엔 내 여기 왜 왔나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 한많은 南樺太 징용왔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즘한글서예협회 이종선 회장의 초청을 받고 13일 인사동 한국미술관에 도착했다. 개막식을 마치고 30명의 작가가 내놓은 100점이나 되는 한국 전통문화 서예작품들을 감상했다. 이종선 회장님이 축사를 부탁하셔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은 바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으로 끌려가서 해방이 되었지만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70년을 러시아 국민으로 살아야 했지만 우리는 독자적인 한글이 있어서 당당하게 디아스포라와 고난을 넘길 수 있었다."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왔다. 그래서 러시아 전국에서 사할린에서만 한글판 새고려신문이 존재한다. 전국에서 불리는 아리랑이 다양한 작가들의 다양한 서체로 표현 된 아름다운 서예작품이 되어 걸려 있다. 한국 전통문화 '서예'라는 예술분야인데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한글이 예술작품으로 탄생한 전시회이다. 아름다운 서체로 쓰여진 한글이 눈에 들어왔다. 서예로 탄생한 다양한 한글 서체는 꽃이 되고 나비가 되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전통문화를 지키는 이즘협회 작가들에게 존경심을 보낸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계승이 안되는 분야이다. 북한에는 서예전시회 같은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작품들이 국악신문사에 기증이 되어 국내외에서 전시가 될 예정이라고 한다. 한얼 이종선 회장님이 직접 '사할린아리랑' 작품 앞으로 안내를 해주셨다. 그동안 국악신문 수요 연재 한글서예로만 받아 보았던 예술작품을 직접 보니 감동이 밀려왔다. 특히 이 작품은 사할린 한국어 교육의 리더 공노원(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 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뜨기 5일 전 (2022년 9월 25일자) 수요 연재로 나와서 더욱 스토리를 더하는 작품이다. 당시 9월 28일 양구 두타연에서 개최 되는 PLZ축제에 인천과 양주에 사는 사할린동포들이 초청 되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안에서 이종선 선생의 사할린아리랑 작품을 공노원 선생이 인쇄해서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공선생은 한얼 선생의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 사설' 수요 연재 내용을 자라나는 고려인 학생들에게 한글 수업에서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우리 부모들이 사할린에서 가장 많이 부른 노래는 아리랑이다. 당시 일하면서 힘들때, 고향이 그리울 때, 결혼식 같은 날에 마을 사람들이 모이면 모두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아리랑이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아리랑이 유일하다. 그래서 누구나 모이면 작대기로 장단을 두드리며 아리랑을 흥얼거렸다. 러시아나 유럽 어느 민족에게도 하나의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곡은 없다. 우리 민족은 언제 어디서든 아리랑으로 하나가 된다. 올해는 파주에 정주한 150명 사할린 동포들이 귀국 15주년기념 행사로 오는 23일 '파주아리랑 콘서트'를 개최한다. 그날 휘날레에서 사할린 가수들과 이혜솔 명창이 관객들과 '사할린아리랑'을 함께 부르기로 했다. 2017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사할린아리랑축제를 통해 사할린에는 아리랑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2020년 사할린 정부는 우리에게 사할린한인문화센터 앞에 아리랑공원과 아리랑누각을 선사해 주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이 불리는 전국 지역에는 아리랑노래비가 세워져있다. 정선, 진도, 밀양, 문경, 상주, 영천 등. 사할린 아리랑공원에도 사할린 한인의 역사가 담긴 이 사할린아리랑이 새겨진 사할린아리랑노래비가 세워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오늘 이 아리랑 작품들이 사할린 전시장에서 걸리기만을 고대해 본다. 우리 동포들에게 큰 자긍심이 될 것이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한류 열풍으로 한글학과도 생겨나고 한국어와 한글을 배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사할린 동포들을 대표해서 이 행사를 개최한 (사)이즘한글서예협회 이종선 회장과 지원을 해주신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에게 감사를 드린다. 다시 한번 이즘전을 축하한다. 사할린아리랑 무정한세월 야속하다 청춘시절 날 데려와 팔십삼이 먹도록 여기서 다 늙어 영혼이 되네. 아이구 원통하고도 참말루 싫어 누구게다 한을 다 풀까요. 서른다섯에 남편을 잃고 혼저 자탄 애탄하며 팔십 서이를 살어 나와 누구게다 이런 한을 풀겠나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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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이즘한글서예가전시회... '아리랑 특별전'을 축하하며오늘 네번째 맞는 '이즘한글서예가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난 2002년 제2회 이즘한글서예가전을 참관하고, 아름다운 한글서예 매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우리나라 대표하는 서예단체 작품답게 다양하고 웅장한 작품을 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 자긍심을 지켜가는 이즘회 회원 작가들의 면모를 보면서 존경심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우리 문화의 정체성은 전통을 지키며 민족적 가치를 발현시켜 나가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면에서 국악과 함께하는 서예는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주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글서예는 서예문화권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우월성을 나타내는 독보적 분야입니다. 저희 국악신문에서는 국악과 한글서예를 연계시키기 위해 매주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을 주간으로 연재하여 현재 200회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시조 가사. 가곡 종목의 사설로 시작하여 지금은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사설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앞으로 신민요 시설은 물론, 창가와 가요 사설까지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코너는 주간 접속 수가 가장 높은 연재물입니다. 이는 서예술이 국악신문 독자들을 감동시킨 것이며, 우리 전통예술 서예술과 국악의 융합'이라는 성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동안 연재를 맡아주신 한얼 이종선 선생님의 서체의 기운은 물론, 깊고 풍부한 해설의 격조를 국악계가 받아 들이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국악신문 독자들이 한글서예에 다가갈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특히 오늘 이번 전시에는 '아리랑특별전'이 함께 열렸습니다. 남과 북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불리는 아리랑이 아름다운 한글서예와 만나 어떤 꽃을 피워낼까? 기대가 큽니다. 오늘 3월 꽃향기를 찾는 셀레임으로 '2004 이즘전' 그리고 그 속에 '아리랑특별전'을 우리 독자들과 전국 아리랑 식구들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아리랑 작품들은 전국 아리랑 전승지역과 국내외 동포사회에 널리 알리는 기회를 마련하는데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다시 한번 이즘전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4년 3월 13일 (주)국악신문사 대표이사 기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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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이즘 한글서예가전 '아리랑특별전'.13일 개막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남과 북이 유네스코에 공동등재 된 '아리랑'이 한글 서예작품으로 출품되어 소개된다. 다시 ‘이즘한글서예가전’이 펼쳐진다. 이즘한글서예가회(회장 이종선)는 한글서예계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미래지향적 발전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네번 째 전시를 개최한다. 오는 13일부터 1주일간 인사동 한국미술관(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12)에서 개최한다. 개막 행사는 오후 4시부터 시작된다. 우리나라 한글 서예계를 대표하는 중진 및 신진작가로 구성되어 있는 이즘한글서예가회는 2021년 처음 전시를 열어 중량감 있는 전시라는 평과 함께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며 한글서예의 진면목을 보였다는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후 매년 연 이은 전시회를 열면서 한글서예의 정체성을 구축하며 변화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 있어 서단의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이번 '이즘한글서예가전'에는 총 30명의 작가가 개성이 돋보이는 독창적인 작품 90여 점이 출품된다. 특히 이번 전시는 (주)국악신문사(대표이사:기미양)의 지원을 받아 '아리랑 특별전'을 병행하여 진행하게 된다. 본조아리랑,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문경새재아리랑, 대구아리랑, 예천아리랑, 경산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춘천아리랑, 북한아리랑, 서도아리랑, 등 한반도 각 지역 아리랑과 동포사회가 향유하는 디아스포라 아리랑, 사할린아리랑 사설이 담긴 한글 서예작품이 전시된다. 출품된 아리랑 작품은 전시회를 마치고 (주)국악신문사에 기증되어 국내외 지역에서 열리는 아리랑 행사에 순환 전시될 예정이다. 한편 국악신문은 2022년 ‘이즘한글서예가전’에서 한글서예의 매력과 감동을 국악신문 독자들과 함께하고자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사설’을 주간 연재를 강권하게 되었다. 한얼 이종선 회장의 글감 선정에서 해설까지, 직접 맡아 현재 200회 연재를 앞두기에 이르렀다. 이는 우리 국악계의 큰 성과로 평가 받고 있다. 시작할 당시 시조·가사·가곡·사설 중심에서 민요 아리랑 사설에 이르렀다. 주간 접속 수가 가장 높은 연재물이다. 독자들은 앞으로 신민요 사설은 물론, 창가와 가요 사설까지 기대한다는 요청이 들어 오고 있다. 이는 한얼 선생이 구사하시는 서체의 기운은 물론, 깊고 풍부한 해설의 격조를 받아 드리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일부 독자들은 한글서예에 다가갈 수 있게 해주신 것에 큰 감사를 드립다고 전했다. (주)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참가 작가 모두가 아리랑 작품을 내신다는 소식에 기대가 매우 큽니다. 3월의 꽃 향기를 찾아가는 설레임으로 ‘2024 이즘한글서예가전’, 그리고 그 속의 ‘아리랑특별전’을 보러 가겠습니다" 이어서 "그리고 독자들은 물론 전국 아리랑 식구들과도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나아가 국내외 동포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전시회를 만들겠습니다"라고 전했다. 출품작가는 다음과 같다. 구자송 김광희 김도임 김두경 김문희 김선숙 김진태 문재평 문영희 박경희 박병옥 박정숙 서복희 서혜경 신명숙 유혜선 은성옥 이광호 이병도 이성숙 이종선 장용남 정복동 정영필 조용연 조현판 최미연 최민렬 한소윤 홍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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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살 수 있게 해달라" 성읍민속마을 주민들의 호소편집자 주=제주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생성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문화와 함께 제주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후진적이고 변방의 문화에 불과하다며 천대받았던 제주문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고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주문화가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라는 우리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란 뜻 외에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또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해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제주문화를 돌아보고 새롭게 계승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해 제주문화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계승해 나갈 방법을 고민합니다. 제주 성읍민속마을은 조선시대 약 500년간 정의현청이 있던 정의현성의 중심마을이다. 과거 제주의 행정구역인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하나다. 성읍민속마을은 제주 전통 초가 등 제주의 옛 모습과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지난 1984년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된 이후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주민들이 초가집에 거주하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지만, 보전과 정주여건 개선이라는 오랜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전통문화 원형 보전이라는 가치와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겪는 불편이 오랜 기간 쌓이고 쌓여 문화재이자 관광지로서의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제주의 가옥과 마을,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난 2차례 연재에 이어 살펴본다. ◇ 문화재 보전, 정주여건 개선 놓고 갈등 지난 2월 23일 오후 찾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1리 제주성읍마을의 한 초가집. 10평(33.05㎡)이 조금 넘는 작은 초가에 90세 넘은 할머니가 홀로 생활하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상방(마루)엔 각종 살림도구가 가득해 손님이 오더라도 함께 앉을 만한 공간이 여의찮아 할머니는 구들방에서 동네 주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100년이 채 안 된 초가집은 겉으로 보기에도 너무나 위태로웠다. 천정과 외벽은 바름흙이 벗겨져 떨어져 나가 서까래와 벽체가 훤히 드러났고, 다 낡아빠진 외마디 나무기둥이 위태롭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 전선이 지붕을 따라 그대로 노출돼 있어 단락(합선) 등으로 인한 화재 위험에도 매우 취약해 보였다. 초가집 안으로 수도가 연결되지 않아 내부에 목욕탕과 화장실을 만든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고,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길게 연결해 입구 근처에 대야를 받아 생활용수로 쓰고 있었다. 가까스로 가스레인지를 상방에 두고 음식을 내부에서 해 먹을 수 있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 2024년도에 이렇게 산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요?" 주인 할머니의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인근의 또 다른 초가집은 일주일 넘게 비가 이어지자 방안으로 비가 새고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지붕에 방수용도의 비닐을 씌우고 그 위로 다시 새(억새의 일종인 '띠'를 뜻하는 제주어)를 덮었지만 그런데도 비가 새는 걸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예전엔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그냥 막 줄줄 떨어져서 방에 물이 벙벙해졌다"는 집주인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지붕에 비닐을 씌울 땐 초가지붕에서 굼벵이 수십마리가 떨어져 나왔다고 했다. 볏짚이나 썩은 나무, 톱밥, 부엽토 등 식물질을 먹고 자라는 굼벵이의 특성상 초가지붕은 굼벵이가 살기에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읍민속마을 주민들이 불편을 겪는 이유는 한 가지다. 자기 소유의 주택임에도 마음대로 증·개축을 할 수 없는 등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성읍민속마을이 지난 1984년 6월 12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마을 내 초가집 외관을 변경하거나 수리하려면 문화재보호법 시행령에 따라 현상변경 허가받아야 하는데 그 절차가 다소 복잡하고 까다롭다. 예를 들어 주민이 화장실이나 욕실 용도로 초가집을 증축하려고 하면 우선 관할 지자체인 서귀포시에 신청해야 한다. 그러면 시는 다시 제주 세계유산본부에 요청하고, 세계유산본부는 재차 문화재청에 요구해 허가받는다. 원칙적으로 30일 안에 허가가 나와야 하지만 현장실사 등 추가 절차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더 오래 걸린다. 또한 싱크대 또는 냉난방 시설 등 경미한 현상변경도 지자체 차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주민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고윤식 성읍1리장은 "부엌을 늘리려고 해도, 화장실을 만들려고 해도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한다. 내 집인데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며 "얼마나 답답했으면 초가집을 2천만원에 팔고 인근 문화재 지정 구역 밖에 집을 새로 지어 이사했겠느냐"고 말했다. 김명호 전 표선면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장은 "현상변경 내용에 따라 허가가 나오는 데 1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불편하고 까다로워 주민들이 일일이 허가받으려고 하지도 않고 결국 행정 몰래 불법 증·개축 등 악순환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문화재 보수, 건축은 일반 건축업자가 할 수 없고 허가받은 업체만 할 수 있어 평당(3.3㎡) 1천만원의 비용이 소요되는데 일일이 허가를 받고 진행하는 건 어렵다"고 말했다. 이러한 탓에 지역 주민들은 초가집을 불법으로 증·개축해서라도 화장실과 욕실, 보일러실 등을 암암리에 만들어 생활하고 있다. 상당수 주민들은 더는 초가집에 못 살겠다며 집을 제주도에 팔고 이주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 주민은 집을 팔고 받은 돈으로 다른 곳에 주택을 마련할 수 없자 마을 인근의 천미천 공원 부지에 컨테이너 가건물 등을 지어 생활하기도 한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에 따르면 현재 제주성읍민속마을 지정구역 79만4천213㎡ 내 등록가옥은 306가구 1천305동이다. 이 중 초가는 정의현성 안에 있는 일명 '성내'(城內) 77가구 260동, '성외'(城外) 158가구 674동이다. 주민이 떠나가면서 제주도가 매입한 초가는 44가옥 109동이다. 제주도는 증·개축 등으로 인한 마을 내 불법 건축물이 870여동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상 90% 넘는 대부분의 초가가 원형을 잃고, 외형·구조·내부 변형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오랜 기간 생활 불편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주민을 탓할 수도 없다. 제주도는 해마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환경개선을 하고, 지난 2022년부터 소유주의 신청을 받아 불법 무허가 건축물에 대한 철거 등 정비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는 게 지역 주민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지난 40년간 주민 편의는 고려하지 않은 채 초가 원형 보존이라는 원칙만을 강조한 나머지 과거의 옛 정취와 전통경관도 잃고 주민도 떠나가는 특색없는 민속마을로 전락해가는 셈이다. 김철홍 전 성읍1리장은 "성읍마을 내 초가집 평수가 12∼15평(39.7∼49.6㎡) 정도다. 일반적인 국민주택 수준은 25평(82.6㎡)이다. 사람이 사는 민속마을로 지정했으면, 적어도 사람이 가족을 이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초가는 사람이 살면서 손때를 타야 수십년, 100년이 지나도 끄떡없이 보전되는 것"이라며 "훼손 가옥을 정비하는데 수많은 돈을 들이며 낭비하기 보다 주민이 마을을 지키며 예쁘게 가꾸며 살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윤식 현 성읍1리장은 "사람들이 떠나간다. 젊은 사람은 다 떠나고 늙은 사람들만 남게 됐다. 옛날 학교 다닐 적 한 반에 50∼60명 했던 성읍초등학교 전체 학생 수가 이제 60명이 안 된다. 이러다 학교가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해마다 이주자로 인해 발생하는 빈집이 3∼4채씩 꼴로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관계자는 "현재 복잡한 문화재 현상변경허가를 받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 자문단을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며 "최대한 마을 주민 입장에서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문화재청과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3월부터 성읍마을의 체계적인 보전·정비사업 추진방향을 재정립하고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성읍마을 제3차 종합정비계획 수립 용역'을 진행중이다. 주민들의 의견을 최대한 담아 진행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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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뽀이' 담긴 첫 국어사전…86년 만에 재현한 '조선어사전'소설가 현진건(1900∼1943)이 연재한 단편소설 '타락자'(墮落者)에서는 '새모록하게'라는 단어가 나온다. 1938년 발간된 '조선어사전'은 '새무릇하다'는 표제어로 이 단어를 설명한다. 마음에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뜻에는 자신을 두고 떠나려는 남자를 향한 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현진건은 평소 조선어사전을 수십 차례 읽으며 어휘를 연구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으로 잘 알려진 조선어사전이 삼일절(3·1절)을 맞아 86년 만에 복간(復刊·간행을 중지하거나 폐지했던 출판물을 다시 간행함)된다. 출판사 지식공작소는 "3·1운동 105주년을 맞아 우리말로 된 최초의 국어사전인 조선어사전을 영인본(影印本·원본을 사진 등의 방법으로 복제한 것)으로 복간한다"고 29일 밝혔다. 조선어사전은 국어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꼽힌다. 교육학자 문세영(1895∼?)이 편찬한 이 사전은 '우리말본'(1937), '조선문자급어학사'(1938)와 함께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말과 관련해 발간된 3대 저술로 여겨진다. 조선어학회가 1933년에 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준수한 첫 사전이기도 하다. 이번에 복간하는 사전은 발간 당시 모습을 최대한 살린 점이 특징이다. 조선어사전은 학술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지만, 온전한 실물이 남아 있는 사례는 많지 않다. 출판사 측은 '우리말 큰사전'의 수석 편찬원을 지낸 국어학자 조재수 씨가 소장한 초판본을 바탕으로 국립한글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가 소장한 자료와 비교해 옛 모습을 재현했다. 지식공작소 관계자는 "활자체와 4단 세로쓰기 양식은 물론, 인쇄 기술의 한계로 발생한 오류를 인위적으로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살려 출간 당시의 시대성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전에 담긴 어휘 8만여 개 역시 주목할 만하다. 조선어사전은 표준말 외에 방언, 옛말, 학술어, 속담 등 다양한 우리말을 수록하고 있어 당대의 언어생활과 사고방식, 문화를 두루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특히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모던껄', '모던뽀이'는 오늘날 사전에는 없는 단어다.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표제어 '러버'(Lover), 도량이 좁은 사람을 비웃는 말인 '쥐코졸임' 등의 단어도 눈길을 끈다. 지식공작소 측은 "연구자는 당시의 생생한 풍경을, 문학 독자는 작가가 의도한 의미를, 창작자는 현대 국어사전에서는 맛볼 수 없는 풍부한 언어의 바다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문세영 지음. 1천696쪽.(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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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제주 전통초가…장인들 "이제 은퇴 할 때"편집자 주=제주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생성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문화와 함께 제주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후진적이고 변방의 문화에 불과하다며 천대받았던 제주문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고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주문화가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라는 우리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란 뜻 외에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또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해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제주문화를 돌아보고 새롭게 계승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해 제주문화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계승해 나갈 방법을 고민합니다. 제주의 전통가옥인 초가가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4·3과 6·25 전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도 그 명맥을 이어왔지만, 새롭고 편리한 문물이 쏟아져 들어온 근현대를 거치며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오랜 세월 전통을 이어온 장인(匠人)들이 있지만, 그들 역시 늙고 병들어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제주의 가옥과 마을,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3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4·3에도 멀쩡하던 초가…근현대화에 사라져 40대 중반인 기자가 제주 전통 초가에서 생활한 적은 없다. 다만 어렸을 적 친할아버지·할머니가 살던 초가집에 대한 추억은 간직하고 있다. 친할아버지·할머니댁은 제주시내에서 자동차로 1시간 남짓 떨어진 한림읍 동명리에 위치에 있었다. 마당을 중심으로 안거리('안채'를 뜻하는 제주어)와 밖거리(바깥채), 모커리(안거리와 밖거리 사이에 가로 높인 부속건물)가 'ㄷ'자 모양으로 된 세거리집이었다. 1938년생으로 올해 90세 가까이 된 아버지는 옛날 초가집에서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자매와 살던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고조부 이전부터 대를 이어 살았던 오래된 집이었다. 하지만 가족은 4·3 당시 군경과 무장대를 피해 세차례나 옮겨다녀야 했기 때문에 한동안 집을 비워둘 수 밖에 없었다. 그 오랜 난리통에도 이 집은 멀쩡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4·3 이후 다시 고향 동네로 돌아온 아버지 가족을 반갑게 맞아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를 비롯한 9남매(이 중 3명 일찍 사망)는 안거리에서 살았고, 밖거리에는 할아버지의 어머니인 증조할머니가 홀로 생활했다. 안거리와 밖거리에 모두 정지(부엌)가 있었기 때문에 증조할머니는 직접 음식을 해드시며 독립적인 생활을 했다. 제주에선 자식이 혼인해 아이를 낳으면 부모는 안거리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밖거리로 들어가 살았다. 장남이 부모를 모시며 대가족을 이루는 다른 지역과 달리 제주는 부모와 결혼한 자식이 한 울담 안에 거주하면서도 별채에 따로 생활하며 세대별로 독립된 경제생활을 하는 독특한 가족제도를 이룬다. 부모는 자신의 손으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한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고, 가급적 간섭도 하지 않는다. 안거리와 밖거리 사이 손바닥 만한 마당은 부모와 자식 세대가 '따로' 또는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만들어 준다. 초가가 대부분이었던 제주 전통가옥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공간이 많다. 일종의 텃밭이라 할 수 있는 '우영',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인 '고팡', 집의 출입문에 해당하는 '정낭', 소의 먹이인 꼴을 저장해 두는 '눌왓' 등이다. 또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면 동시에 방바닥을 달구도록 설계해 취사와 난방을 일체식으로 만들었던 한반도 다른 지역과 달리 제주는 취사와 난방을 분리해 '굴묵'이라는 난방 시설이 따로 존재했다. 이외에도 제주를 찾은 관광객이 가장 신기해 하는 '돗통시'가 있다. '돗'은 돼지를, '통시'는 뒷간을 뜻하는 말로 돗통시는 돼지우리와 화장실을 겸한 공간이다. 제주 사람들은 돗통시에서 볼일을 보고 그 인분을 먹여 돼지를 키웠는데, 이러한 옛 풍습으로 인해 제주 돼지에 '똥돼지'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기자가 어렸을 적 할아버지댁에 갔을 때는 돗통시에 돼지를 키우진 않았지만, 형·누나들만 해도 볼일을 보다가 돼지가 뒤(?)를 핥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는 말을 듣곤 했다. 제주의 초가는 1970년대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새마을운동 일환인 '농촌주택개량사업', '지붕개량사업' 등으로 인해 점차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다. 또 인분을 위생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수거식 또는 수세식 화장실로 바꾸는 변소개량 사업도 추진됐다. 제주도심에서는 돗통시가 자취를 거의 감췄지만, 나머지 농어촌 지역에서는 돗통시와 같은 재래식 화장실이 오랜 기간 여전히 남아있었다. 행정기관은 1980년대 들어 반강제적인 개량 사업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제주에서의 1984년 전국소년체전 뿐만 아니라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등 굵직한 행사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됨에 따라 제주 관광객 유치에 '돗통시'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과거 변소개량, 지붕개량 사업을 했던 옛 기억을 떠올리며 "제주에선 집 곳곳에 신이 있었다고 믿었고 함부로 뜯어 고치면 동티(신의 노여움으로 인한 재앙)가 난다고 믿었다"며 "변소·지붕개량 사업을 할 때 공무원도, 철거인력도 동티가 날까 무서워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서 '관명'(官命, 조정 또는 정부에서 내리는 명령)이라고 쓰고 군수 직인이 찍힌 종이를 변소 등에 붙여서 초가를 뜯어고쳤다"고 말했다. ◇ "전통초가 새로 짓고 있지만 옛 제주 방식 아냐" 제주 초가를 짓는 방법은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초가의 재료다. 다른 지역에서는 가을 추수 후 생긴 볏집을 지붕 덮는 재료로 쓰지만 제주의 경우 논이 드물어 억새풀의 일종인 새('띠'를 뜻하는 제주어)를 사용한다. 또 화산섬 제주에 지천으로 널린 현무암을 많이 사용하고, 제주의 흙을 사용해 붉으스름한 색감을 띠는 타지역 초가와 달리 제주 초가는 거무스름한 색감이 나는 등 차이가 있다. 제주 초가 공사는 토공사, 석공사, 목공사, 지붕공사로 이뤄진다. 세부 공정을 살펴보면 초가가 세워질 터에 바위와 큰 돌을 골라내고 바닥을 견고하고 평평하게 다지는 '기반 다지기', 기둥이 세워질 곳을 약간 판 뒤 그 자리에 주춧돌을 놓는 '주춧돌 놓기', 잘 건조된 둥근 목재를 다듬어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는 '기둥 세우기' 작업을 차례로 진행한다. 이어 '지붕 서까래 엮기', 자연석을 차곡차곡 쌓아 외벽과 내벽을 만드는 '벽체 돌 쌓기', '구들(방)에 돌 쌓기', 지붕을 올리기 전에 서까래 위에 전체적으로 대발을 까는 '대나무 살대 깔기', 흙과 새풀을 섞어 만든 바름흙을 대발과 벽체 안팎, 구들바닥, 천정 안팎 등에 꼼꼼히 바르는 '바름흙 바르기', '마루널 깔기', '문·창호 만들기', '초가지붕 잇기', 화덕·정낭 등 만들기, 돌담 쌓기 등 순서로 공사가 이뤄진다. 제주 서귀포시 성읍리 성읍민속마을에는 실제로 제주 초가를 지을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장인(匠人)들이 있다. 토공(土工) 김권엽(84) 선생, 석공(石工) 강창석(83) 선생, 모공(茅工, 지붕잇기 장인) 강임용(76) 선생, 목공(木工) 홍원표(66) 선생 등 4명이다. 제주도는 지난 2008년 4월 18일 초가를 짓기 위한 각 공정의 전문가를 도 무형문화재 '초가장'으로 지정하고, 기술 보유단체로 성읍민속마을 보존회를 지정해 전승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을 잇는 데는 애로사항이 많다. 네명의 초가 장인들 중 한 명인 지붕잇기 장인 강임용(76) 선생은 "현재 초가장 석공 부문에는 전승교육사(옛 명칭 '전수교육조교')가 있다. 하지만 나머지 3개 부문에는 보유자를 이어갈 전승교육사가 없는 상태"라며 "20~30년간 같이 일을 한 이수자들이 아직도 전승교육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답답할 노릇"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른 무형문화재와 달리 초가장은 몸을 많이 쓰기 때문에 일이 매우 고되다. 나이가 80세 가까이 됐고, 다른 보유자들도 나이가 많아 움직이기도 쉽지 않다. 이제 은퇴해 명예퇴직하고 그 자리를 물려줘야 할 때"라고 얘기했다. 8년 전인 지난 2016년 목공 장인이었던 현남인 선생이 89세의 나이로 작고한 바 있다. 무형문화재 전승체계는 인간문화재로 불리는 '기·예능 보유자'와 보유자의 전수교육을 보조하는 '전승교육사', 보유자 등이 실시하는 전수교육과정(3년 이상)을 수료하고 이수심사를 통과한 '이수자', 전수교육을 6개월 이상 받은 사람 중 심사를 거쳐 장학생 자격을 얻은 '전수장학생' 등이 있다. 강 선생은 제주만의 특성이 없는 육지식 초가가 새로 지어지는 현 실태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그는 "해마다 성읍민속마을 내 오래된 초가를 고치거나 못쓰게 된 집을 헐어 새로 짓는다. 하지만 이때 초가장을 활용하지 않고 입찰을 통해 들어온 외지 업체들에 일을 맡기기 때문에 우리들이 전수 활동할 수도 없고, 옛날 제주 전통방식의 초가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육지식 초가가 새로 지어지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강 선생은 "축담을 쌓는 것부터 옛날 제주방식으로 하지 않고 전부 기계로 다 깎아 매끈하게 만든다. 또 거무스름한 제주 화산회토를 발라야 하는데 업체들은 제주에 없는 황토를 가져다 발라 초가가 빨간집이 돼 버렸다. 초가 자체가 옛날 제주 것이 아니다"라고 아쉬워했다. 이에 대해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관계자는 "법률과 실제 현장과 괴리가 있는 부분"이라며 "현재 법률상 문화재 수리 자격을 갖춘 업체, 기술자들이 문화재 보수를 할 수 있는데 이때 장인분들이 소외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문화재청장이 인정해 주는 일부 무형문화재에 대해 장인들이 문화재 수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가 있다. 그래서 우리 세계유산본부에서도 문화재청에 초가장을 인정해 달라고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는데 현재 수용되지 않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또 이수자들이 전승교육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수자가 된 후 전승교육사가 되려면 5년 이상 경력이 돼야 인정받는다. 20∼30년 함께 일하셨지만, 그분들이 지난해 이수자 신청을 해서 같은 해 9월에야 인정받아 현재로서는 규정상 자격을 갖출 때까지 기다려야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제주=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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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79)문전에 옥답은 어찌 되고 쪽박에 신세가 웬일인고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상주아리랑 한얼이종선 감상 인생살이의 흥망성쇠는 가늠키가 어렵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수도 있고, 금송아지의 추억을 부여안고 옛날을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경우도 있다. ‘세상만사 새옹지마’라 하였으니 길흉화복의 변천은 이토록 무상한 것이다. 문 앞에 금전옥답을 두고 떵떵 거렸는데, 가세가 기울어 밥을 빌어먹게 될 줄을 그 누가 알았으리. 지난날을 그릴수록 가슴은 아리고 쓰리다. 우측에 세 방의 유인을 찍어 작품의 균형을 잡았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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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1)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왜 남도트로트인가 이제 트로트나 발라드가 아니라 새 장르의 음악을 직조할 것이고 시대를 공명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저마다 횡경막을 울리는 공명의 방식이 그것이다 한국공연문화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손재오 극단갯돌 예술감독이 몇 가지 질의한 게 있어 답한다. 논문 한 편당 독자가 세 명뿐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논문의 심사를 대개 세 명이 맡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심사자 아니면 아예 읽는 이가 없다는 슬픈 고백이라고나 할까. 이를 총괄하는 학술재단의 무능력을 조롱하는 시선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으되 내 전공 혹은 인접 분야들의 경우, 철 지난 강령과 이념에 사로잡혀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의 차원에서 단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니 어떤 족쇄들을 만들어 전통이니 문화재니 따위의 항목에 채워두고, 자연스레 일어날 창발을 막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어디 세 명만 읽는다는 논문의 문제뿐이며 철 지난 강령에 머물러 있는 학술단체의 일뿐이겠는가. 장차 문화재청을 문화창의청(文化創意廳)으로 바꾸고 기왕의 문화재들을 문화유산이라는 맥락으로 톺아내며 그간의 전통이니 콘텐츠니 하는 담론들을 미래지향적으로 발현시킬 필요가 여기에 있다. 적어도 전통(傳統)과 인습(因習)은 구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미스트롯에서 풍류대장, 조선판스타까지남도트로트는 수년 전 내가 만들어 쓴 용어다. 이유가 있다. 이즈음 화두가 되었던 미스트롯이니 풍류대장이니 조선판스타니 하는 노래시합 프로그램을 보면 이 행간을 읽을 수 있다. 미스트롯의 송가인을 필두로 김태연이나 이날치밴드가 승승장구한 이유 말이다. 여기에 풍류대장과 조선판스타라는 프로그램이 또 다른 팬덤을 형성하는 중이다. 모두 국악 혹은 판소리라는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하거나 적어도 매개물로 삼고 있는 현상들이다. 나는 이를 '송가인의 시김새, 남도트로트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본 지면에 소개한 바 있다. 송가인 신드롬의 출처를 베이비부머세대의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분석한 바도 있다. 묻지마라 갑자생에서 오팔년 개띠, 베이비부머세대의 은퇴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회사적 맥락을 송가인이라는 창을 통해 추적해본 것이다. 풍류대장에서는 판소리뿐만 아니라 민요, 정가 등 다양한 국악 장르 전공자들이 참여했다. 하지만 이것을 국악 전반의 부상이나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 따위의 감상으로 접근하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이것은 '시경'의 「풍요」로부터 계승되는 노래(詩)의 본원, 남도의 흥그레타령과 육자배기를 거쳐 국악풍 발라드 김정호와 남도트로트 송가인에 이르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읽을 수 있다. 판소리 창법을 가지고 가요계에 진출했던 이들은 한농선, 안향련 등이다. 김정호나 송가인이 가요계에서 판소리를 응용한 사례라면 판소리꾼이 가요계로 뛰어든 1세대라고나 할까. 지금의 풍류대장과 조선판스타에 선행하는 국악계 스타들이다. 하지만 거듭 상고해보면 트로트의 시조라고도 하는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조차 본래는 민요가수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보인다. 미세한 분석을 시도해보면 훨씬 다양한 층위의 장르교섭과 창발을 읽어낼 수 있다. 내가 '민요라는 이데올로기'라고 비평한 것도, 엔카와 트로트논쟁 북한민요의 정체라는 이름으로 쓴 글도 이런 일환이다.왜 남도트로트이고 남도발라드인가김정호의 노래 전반이 그렇지만 예컨대 '님'이라는 곡을 들어보면 완전4도 아래로 하강해 떠는 남도선율 특유의 창법이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노래 자체가 사실은 육자배기 선율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일 것이다. 김정호의 노래를 범박하게 평할 때 남도 삼음(三音)을 토대로 만든 노래라고들 한다. 나주시립국악단 윤종호 감독은 이것이 남도선율이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늘 주장한다. 나는 이 육자배기의 선율을 남도 전통의 흥그레타령으로 끌어올렸고 「향가」의 맥락으로, 다시 '시경'의 「풍요」까지 끌어올렸다. 노래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손재오 감독은 '남도트로트'를 계속해서 추적하고 분석하며 체계화시킬 특별한 방법론이 무엇인가를 질문했다. 내가 다 알 수도 없는 일이지만 남도라는 로컬을 주목하는 시선과 트로트 창법을 분석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해둘 필요가 있겠다. 보다 디테일한 방법론은 후학들이 승계해나가지 않겠는가. 기본적인 내 시각은 전통이라는 이름의 어떤 대상이 아니라, 가 행하는 예술과 연행의 틀 속에서 이전과 지금 나아가 미래를 찾는 방식이다. 판소리나 민요가 어떻게 승계되고 발화되었는지보다 예컨대 지금의 트로트나 랩 속에 전통적인 것들이 어떻게 스며들어있는지를 추적하는 셈이랄까. 주지하듯이 판소리는 동편제니 중고제니 따위의 전국적인 지평 속에서 남도의 선율 및 어법으로 정착되었다. 시대사적 수요와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나라 잃고 가족 잃고 죽을 지경에 이른 백성들의 심중을 힐링시켜준 처방전이었다고나 할까. 그것이 계면조(界面調)라고 하는 즉 횡경막을 울리는 공명의 방식이었다고 나는 읽었다. 시대는 변한다. 시대정신도 변한다. 베이비부머 세대까지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나면 새로운 세대가 또 주인으로 등장한다. 이제 트로트나 발라드가 아니라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직조할 것이고 그 음악이 시대를 공명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저마다의 횡경막을 울리는 공명의 방식이 그것이다. 이름이 바뀌고 장르가 바뀌어도 흉중의 경계를 넘나드는 계면(界面) 울림의 방식은 영원하다. 나는 남도트로트와 남도발라드라는 이름으로 접근했지만, 미래의 팬덤은 누군가 또 다른 이름으로 작명하지 않겠는가.로컬(Local)로의 전회(轉回)남도트로트는 '남도'로 지칭되는 로컬 미의식을 담아낸 명칭이다. 왜 로컬인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들이 있으니 참고 바란다. 지방, 지역, 골목 등의 공간적 범주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문제는 지방분권의 시대, 문화분권의 시대로 호명되는 이 시대를 어떻게 정의하고 대응하느냐는 것이다. 분권자치와는 거꾸로 가는 서울 중심 정책이나 수도권 집중 현상들을 호도하기 위한 레토릭일 뿐인가? 지방이 죽어가고 마을이 없어져 간다고 징징대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온갖 기회요인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데 말이다. 근본적인 변화는 생각의 혁신에서 온다. 내가 로컬로의 전회를 주장하는 이유다. 여기서 말하는 로컬은 중앙 혹은 수도권에 대응하거나 복속되는 개념이 아니다. 중심 심장과 변방 모세혈관이 대등하게 대칭하는 글로뮈론을 주창해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이를 낱개의 사례로 풀어 이라 명명하고 본 지면에 연재해왔다. 그 일부를 모아 '남도를 품은 이야기'(다할미디어, 2022)를 펴냈다. 향후 남도트로트에 대해서도 갈무리작업을 할 예정이다. 오랜 세월 행간과 여백에 내뱉은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 가신 이들의 푸념이 펄펄 살아 시가 되고 소설이고, 문학이 되고 철학이 되어 사람들에 의해 불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다시 송가인과 김태연의 절절한 수리성, 남도트로트를 듣는다. 미래세대로 올 또 다른 주인공들 그리고 또 다른 장르를 상상한다. 그곳에는 변함없이 배와 가슴 사이를 교섭하며 발끝에서 두성까지 온몸을 전율시키는 공명의 방식이 있다.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 인간과 비인간, 서울과 지방을 정직하게 직면하는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가 필요한 시대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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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1) <BR>"전통과의 충돌"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 무세중은 한국의 전위예술가로, 1937년 김세중(金世中)의 몸을 빌려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통과 충돌하고, 서구 공간과 충돌하고, 분단과 충돌하고, 체제와 충돌하고, 마침내 문명과 충돌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부질없는 씨족의 성, 광산 김씨를 떼어버리고, 인민 ‘중(衆)’자로 바꾸어 무세중(巫世衆)이 되었다. 1960년대는 민족의 넋과 얼이 깃들어져 있는 민족예술의 시원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었다. 그곳에서 민속극의 원천과 우리들의 몸짓과 춤사위를 발견하고 기록하며 봉산탈춤 (이근성), 양주 별산대 놀이(김성대 선생), 동래 들놀음 (박덕업), 남사당 덧뵈기 춤(남형우), 고성 오광대(장재봉) 춤을 익히고 전수 받아 한국 탈춤을 연마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1969년 10월 14일 YWCA에서 춤을 가르쳐 주신 네 분의 스승님을 모시고 '韓國 民俗 假面舞劇 춤사위 종합 전수 발표회'를 열었으며 스승과 제자가 한 무대에서 함께 공연하는 감동의 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민속의 새로운 재창조를 위한 민예 부흥 운동가로서 1971년 '東亞 民俗 藝術院'을 설립하고 '극단 民族'을 창립하였다. 민속극의 본질 규명을 위한 '마당으로의 환원 작업', ' 민속극 창조 기능의 재활'의 마당극 운동에 앞장섰고 민족극의 미학을 정립하고자 힘썼다. 서울 한복판 덕수궁 뒤뜰에서 풍물놀이, 꼭두각시놀음, 북청사자 놀음, 송파 산대놀이, 산신굿, 마당극제, 판소리 마당굿을 기획 공연하였고, 서울대 고대 연대 등 30여 개 대학에서 마당굿 놀이를 순회 공연하고 탈춤반을 만들어 지도하며 축제 무대 공연을 시도하게 하였다. 또한 '남사당'을 사단법인체로 승격시켜 유랑 예인 집단의 체계적 발전과 정착을 위한 창립 작업에 몰두하였고, 1972년에 민속극회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을 최초로 무대에 올리는 '남사당제'를 기획 연출하였으며, 한편으로는 3백여 가지의 한국 춤사위를 연구 정리하고 이론적으로 체계화 시켜 '한국 민속극 춤사위 연구'라는 탁월하고 선구자적 학술 논문을 발표하였다. 무세중 선생의 첫 출판 '무세중과 전위예술'에 담긴 '전위예술'을 연재하기로 한다. 다음은 이 책의 서문이다. (편집자 주) 어느 젊은 날 여름, 한밤 중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잠결에선가 끄적대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종이 위에 쓴것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이렇게 자고 먹고 싸고 살다가 언제 어디서 내가 왜 자고 먹고 사는지 모른채 살고 먹고 싸다 죽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나는 마치 살고 있는 것이 죽기위한 연습같이 느껴져 몸서리 친적이있다. 나라는 고기덩어리 몸둥아리는 그저 편안한것만 좋아해서 그냥 놔두면 채울것 다 채우고나서 가라 앉으려들고, 마음일랑 속절없이 내팽개쳐 놓을량이면 한없이 달아나 밑도 끝도 없는 황당무개한 곳으로 날아가 까불어대고....... 생겨나길 내 의지대로가 아니어서 인지 운명, 팔자에 몸을 실어 사랑에 속고 돈에우는 가련한 인생에 목을 매고 자폭 자살하는 삶을 살거냐, 어쩌다 지은 德이 있어 있을것 없을것 다 차려놓고 홍이야 청이야 세월가는 줄 모르고 제속을 파먹어가니 제껍데기에 파묻혀 스스로 숨이 막혀 떠나는거냐. 내가 태어난건 내 뜻대로가 아니드라도 돌아가는 길의 선택은 내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사는 길을 道, 그것을 엮고 묶고 펼치고 행하는 것을 劇이라하여 道劇이라고 칭하고 삶을 깨 고 삶을 깨닫고 삶을 깨우치는 분골쇄신의 道劇작업을 실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意識하기 까지에는 몇가지 단계가 있었던 것 같다. 1962년 연극아카데미(드라마센터)에 들어간 이후 1977년 내 개인 창작발표회를 갖기까지 15년간은 자기 발견을 위한 民族本質追求로서의 民俗劇研究와 民藝復興을 제창하여 民衆精神을 모색하고 그것의 회복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傳統을 克服하기 위하여서도 '傳統과의 衝突'를 시도하였고, 새로운 進步 的自我와 전통의 파괴를 통한 전통의 再創造라는 입장을 확고히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1977년 독일로 건너간 후 서구 문명과의 만남에서 나는 자연 서구 '空間과의 衝突'을 작품으로 끌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밤'이라는 어둡고 차고 잔인한 이중인격적인 白人文明社會에서 충격을 받고 그들 幕 위의 際媒와 횡포를 고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1982년에 돌아와 反이데올로기 · 反테크놀로지 · 反연극을 통한 '통일을 위한 막걸리살풀이'(통·막·살)를 전위적 표현으로 시도하였고 超現實主義 그림작품들을 고통과 잔혹의 내면 세력으로 유도시켰던 것이다. 이른바 새로운 얼빛(눈빛, 얼굴빛, 몸빛 등 육체로 발산되는 빛), 새로운 넋소리(목소리, 뼈소리, 살소리, 피소리 등 육체 속에서 부딪쳐 나오는 소리) 새로운 몸짓(손짓, 발짓 등 精氣를 몸으로부터 나오는 온갖 움직임)들을 일깨워 인간 내면에 잠재하는 신비함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작업의 道劇을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항상 이 움추려드는 자기의 벽을 깨고, 항상 生存하는 까닭을 깨닫고, 항상 마음을 비우고 새로움으로 진작하기 위하여 깨우치는道劇思想이 민족의 차원에서 이해 될때는 마치 人道 의 회복에 도극사상의 근본이 있듯이 새로운 민족의 빛, 새로운 민족의 소리, 새로운 민족의 짓을 깨우쳐 나오게하여 우리 민족의 가장 절실한 과제인 統一과 民主에 이바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테러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以小事大 즉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치룰때 우리 씨름의 원칙처럼 상대방의 힘을 빌려 상대가 스스로 넘어가게 하는 것과 같이 外勢에 침을 놓고 맥을 끊는(Hit and Run) 충격요법으로 자신을 유지해야 하는 것과 같은 논리가 되는 것이다. 공연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온갖 이야기로 뒤집어 씌워 눈물을 안고 쓸어지는 리얼리즘이나 철저하게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니라 번갯불처럼 氣와 氣가 교류되고 以心傳心으로 통하고 그리고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퍼포 밍 아트(Performing Art)의 퍼포먼스(공연예술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음), 무엇을 보여주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고 이야기 없는 상황전개에서 느껴지는 암시와 이해되는 상징. 또한 즉흥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의 순간적인 눈빛, 몸짓, 목소리의 교합 그리고 그것들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서 생을 풍요롭게 자극시켜 주게 되는 것이다. 1982년 이후의 창작활동은 내가 봐도 왕성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8년 간의 독일 체류기 간동안 직·간접으로 의식해온 합리주의 사고와 나의 다혈질 정열이 묘하게 어울려 창작 충동을 일으키게 하였고, 또 정치사회 상황인식에 철저하게 가졌던 나는 내 작품들을 고통, 잔혹의 상황극작품으로 이끌게 된것이다. 어느새 내 나이 쉰셋. 나이 먹으니 헛배도 나오는 몸둥아리로만 추나. 다만 몸을 빌릴뿐인데 머리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제부터 나 자신에게 정직하게 내 道劇의 세계를 펼쳐 나갈 것이다. 내 모든 바램은 이 나라를 수호하시며 나를 지켜주는 단군 산신령 할아버님과 바다를 지키시는 용신령님의 끝없는 배려 하에 그 염원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1988년 12월 무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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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선의 "한글 서예로 읽는 우리음악사설"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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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75)만주나 벌판에 솥 때우는 저 영감 우리 내우야 정 떨어진 것은 때울 수가 없느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게 인제아리랑 한얼거사 감상 사뭇 설레고 가슴 달뜨던 사랑도 세월이 가면서 무뎌지고 서먹해진다. 세월의 흐름에 감정의 모서리가 닳아 긴장감이 사라지고 바람도 색이 바랬다. 친한 관계일수록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니, 매사 익숙함은 타성을 부르기 때문이다. 없으면 죽고 못 살 것 같던 부부도 그 가까움으로 해서 관계가 뜨악해지는 것이다. 우리 내외의 정도 떨어진지 오래. 늙어 가면서 젊어서의 사랑이 더욱 그립다. 땜장이 할아버지의 손을 빌려서라도 소원해진 사랑을 잇고 싶다. *거사(居士):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여 한가하게 지내는 사람을 말하며, 같은 의미로 처사(處士), 초부(樵夫), 어부(漁夫), 산인(散人) 등이 있다. 출가하지 않았으면서 법명을 가진 재가불자를 일컫기도 한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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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의 날은 1월 21일(양력), "아악이 처음 연재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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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더스] 당신의 말하기 실력이 늘지 않는 이유우리는 늘 말을 하고 있다. 만 1세 전후로 말문이 터진 이후 지금까지도 회사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늘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냥 말만 한다. 말을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은 말을 일하게 만든다. 상대방의 귓속으로 흘러 들어간 말이 그의 마음을 열게 만들고, 때론 지갑도 열게 만든다. 법정에 불려 나온 용의자가 억울한 혐의를 벗는가 하면, 범죄가 드러나 심판도 받는다. 그뿐인가. 말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와 함께 말의 중요성이 강조됐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누군가를 설득하고 마음을 울리며 의견을 명료히 전할 수 있는가? 유튜브 등 SNS를 보면 스피치(말하기) 관련 영상들이 꽤 된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봐도 말하기 학원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영상을 보고 따라 하거나 학원에 다녔다고 말하기 실력이 향상됐을지는 의문이다. 늘어난 실력이 지속됐는지도 마찬가지다. 전부는 아니어도 고개를 젓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대표적인 이유는 강사가 말을 잘한다고 말 가르치기도 능숙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발음, 발성 등 음성 훈련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스피치 커뮤니케이션(소통)의 일부분일 뿐이다. 검증되지 않는 정보와 파편화된 훈련을 해 봐야 효과를 장담할 수 없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전달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는 '소통'의 문제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말하는 상황을 접하면서 말하기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필자가 수많은 기업에서 스피치 코칭을 하면서 느낀 것은 '셀프 코칭'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다. 말을 하면서 스스로 코치해 발전하는 선순환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스피치의 셀프 코칭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할까? 바로 방향성과 의지다. 방향성이란 스피치의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 나의 말하기를 향상시킬 수 있을지 학문적, 이론적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다. 무턱대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로 연습해봐야 소용이 없다. 나의 말하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정확히 판단해 그에 맞는 훈련 방법을 적용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비로소 말하기를 하면서 스피치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두 번째는 의지다. 의지도 사실 방향성과 연관이 깊다. 스피치에 돈이 걸려 있거나, 승진과 관련이 있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기회로 여겨지면 열심히 연습한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장기적, 선순환적 구조를 갖기 위해서는 방향성에 맞는 훈련이 중요하다. 그러면 성취 경험이 생기고, 그것을 바탕으로 의지를 갖추고 생활에서 훈련할 수 있다. 말하기는 자전거 타는 것과도 유사하다. 무조건 연습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어느 정도의 타기는 가능하겠지만 우리가 바라는 고급 수준까지는 오르기 어렵다. 또 이론을 아무리 안다고 해도 실제로 타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제대로 습득한 이론을 바탕으로 연습했을 때 성과가 있다. 필자는 2006년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국내 1호 박사 학위를 받았고 27년간 아나운서로 일하며 17년 동안 스피치 코칭을 해왔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실질적으로 스피치를 잘할 수 있는 노하우를 공유하고자 한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스피치, 말하기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통상 스피치라고 하면 나의 주장을 얼마나 논리적이고 막힘없이 말하는가에 집중해 있다. 즉 다변(多辯)과 달변(達辯)이 말 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스피치는 단순히 말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다. 가장 좋은 말하기는 상황과 때에 맞게 적절히 말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때로는 침묵하는 것이 최고의 말하기일 수도 있다. 그걸 증명한 사람은 바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다. 2011년 애리조나 총기 난사 사건 추도식 현장에서 현직 대통으로서 오바마는 스토리텔링(이야기)을 통해 사람들을 위로하며 미국이 나아갈 방향을 얘기했다. 그 사건으로 죽은 가장 어린 사람은 9살 크리스티나였다. 그녀에 대해 언급하며 스피치를 이어가던 오바마는 유가족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돌연 침묵에 빠졌다. 무려 51초 동안. 다음날 미국 언론들은 '21세기 공감의 스피치'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 장소, 그 상황에서 어떤 미사여구로도 유가족을 위로하지 못한다. 같이 아파해 주는 게 최선이다. 종종 우리는 말을 잘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 무언가를 많이,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걸로 여긴다. 하지만 100% 옳은 방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최고의 스피치는 상황과 때에 맞는 내용으로 적절히 말하되, 때로는 침묵도 필요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결국 말을 잘하기 전에 '소통'이 우선해야 한다는 뜻이다. 앞으로 연재할 스피치 나침반은 바로 '소통력 5단계'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1단계는 '공감력'이다. 공감의 힘을 키워 상대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스피치의 기획, 구성, 전달 모든 과정에서 공감이 내재돼야 한다. 2단계는 '지식력'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못하면 상대가 이해할 확률이 떨어진다. 나의 메시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연습해야 한다. 3단계는 '언어구사력'이다. 막힘없이 말할 수 있는 힘을 체계적으로 길러야 한다. 4단계는 '표현력'으로 언어와 비언어에 해당한다.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그 비중이 작아지고 있다. 좋은 말하기는 단순히 아나운서처럼 부드럽고 전달력 있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5단계는 '상황 통제력'(메타인지)이다. 말하는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해 대처하는 능력이다. 이 5단계는 여러분이 스피치를 연습할 때 방향성이자 스피치 이후 모니터하는 기준점이다. 아무쪼록 소통력 5단계를 통해 여러분의 답답한 스피치가 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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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선 왜 '제야의 종'이 울리지 않나?(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매년 12월 31일 자정을 맞아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리는 '제야(除夜)의 종' 타종 행사. 1953년부터 이어온 한국을 대표하는 새해맞이 행사다. 조선 태조 때 도성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걸 알리기 위해 종을 쳤던 것과 한 해의 마지막 날 각 사찰에서 108번 종을 치던 불교행사 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제야'(除夜)는 말 그대로 '섣달그믐날 밤'을 뜻한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밤 어둠을 걷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서울을 비롯해 경기·강원·전북·경남·부산 등 전국 주요 지방자치단체는 새해를 맞이할 때 타종 행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제주에선 타종행사를 하지 않는다. 제주목관아에 '종'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제주시청 한얼의 집에서 대형 북인 용고(龍鼓)를 치며 새해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제야의 용고 타고' 행사를 연다. 과거에도 제주에 종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최해산(崔海山)이 1434(세종 16년)년 제주안무사로 부임한 당시 불에 탄 제주목관아를 수리하고 다시 지은 경위를 새겨 넣은 '홍화각기'(1435년, 弘化閣記)에 목관아 외대문 2층 누각에 종과 북을 달았다는 기록이 있다. 최해산은 고려말 우리나라에서 화약을 최초로 만든 최무선(崔茂宣)의 아들이다. 당시 외대문은 일종의 '종루'(鐘樓, 종을 달아둔 누각) 역할을 했으며, 새벽과 저녁에 종을 쳐서 통행 시간을 알리고 성문을 여닫았다. 종은 제주성 서남쪽 20리 밖에 있다 허물어진 절간 묘련사에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실제로 탐라순력도의 여러 그림에는 외대문에 종과 북이 그려진 걸 볼 수 있다. 하지만 1847년(헌종 13년) 이의식 목사가 종에 금이 생기자 이를 녹여 화로와 무기로 만들었는데, 그 이듬해 부임한 장인식 목사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전라남도 영암 미황사에 있는 큰 종을 사들여 다시 매달았다고 한다. 외대문과 종은 1916년 일제에 의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일제가 헐어버린 제주목관아를 복원한 지 20년이 넘도록 '종'이 복원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곤 한다. 서울 보신각 타종 행사처럼 제주에서도 타종 행사를 하며 새해를 맞이하는 등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제주목관아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주 역사문화를 연구해 온 강문규 전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은 "제주목관아를 복원하고도 정작 관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종 복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송구영신의 시기가 되면 제주와 세종시를 제외한 전국 15개 시·도에서 타종행사가 열리고 있다"며 "탐라의 종이 다시 울리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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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73)서방인지 남방인지 어서 잠들어라. 보리밭에 섰는 총각 찬이슬 맞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 주게. 감상 사랑이 떠나면 마음에 찬바람이 쌩쌩 분다. 세상 가장 높은 담이 돌아누운 여인의 등이란다. 이미 서방이랄 것도 없다. 동방이든 남방이든 알 바 아닌 것. 눈이 맞아 정분 난 옆집 총각만이 절박하다. 바람난 여인네의 달뜬 숨소리가 물씬 느껴지는 아리랑을 민체로 가로쓰기 하였다. 가로쓰기에 대하여 서예는 통상 오른쪽에서 부터 세로로 써 내려간다. 한글, 한문서예가 모두 같은데, 글자의 흐림이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쓰기에 무리가 없고 전체적인 조화도 자연스러워 오래 전부터 그리 써온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가로로 쓰고 읽기 때문에 서예적 필사는 낯이 설다. 그래서 어떤 이는 가로쓰기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서예는 읽기에 편한 것보다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이라서 보편적으로 세로쓰기의 오른쪽에서 시작하는 전통의 방식을 따라 작품을 한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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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예술협회 창립전 기념식 성황 이뤄, 150점 작품전(사)한국서예술협회(회장 이종선)가 20일 오후 4시 창립기념 회원전 기념식을 열었다. 이 전시는 중국의 난정서회와 국내에서 국악신문, 월간길벗, 월간서예, 월간서예문인화 등이 후원했다. 20일부터 26일까지 1주일간 한국미술관(인사동 대일빌딩 2층) 전관에서 창립 회원전을 개최한다. 국한문 전 서체에 걸쳐 한국서예의 전모를 볼 수 있는 150여 점의 작품이 다양하게 전시가 되어 서예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7월 10일 서울시로부터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은 한국서예술협회의 목적사업의 일환으로 열리는 첫 번째 행사이다. 한얼 이종선 회장은 인사말에서 "한국서예술협회는 우리서예의 전통계승과 서예 발전을 통해 국민문화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고자 창립하였다. 서예의 본연을 지켜 전통을 계승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서예의 발전을 선도해 나가고자 한다. 본 협회는 이를 위해 서예인재의 발굴과 회원들의 창작활동을 돕는 실질적인 방법을 모색해 나갈 것이다. 기존 서예단체와는 다른 선명한 길을 가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서예술협회는 오거서루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하였다. 서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전기가 필요하다는데, 뜻을 모아 결성되었다. 회원들도 이들의 문하로 구성되어 있다. 협회 측은 "오늘 창립전을 첫 걸음으로 앞으로 뜻을 같이 하는 역량이 있는 서예가들의 참여를 기대하며, 회원의 구성도 폭을 넓혀 나가고, 참신하고 진취적인 협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특히 회원의 권익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사)국제서예가협회 회장 정도준 회장은 축사에서 "12월의 끝자락, '한국서예술협회'가 서예 법인단체 창립을 공식 선언하는 창립전을 연다는 소식에 서예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반가운 벗을 만난 듯 기쁩니다. 한국 서단은 광복 이후 혼란과 정체기, 성장과 다양화를 거치며 수많은 협회와 학회가 생겨나고 또 사라졌다."며"본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서단발전과 인재육성에 기여하지 못하여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이런 때에 '한국서예술협회'의 창립은 차세대 한국서예를 이끌 대안으로서 기대가 크다. 창립 주체의 면면을 볼 때 기존의 단체와는 다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전했다. 특히 정회장은 "노자에 '合抱之木 生於毫末 九層之臺 起於累土 千里之行 始於足下'라 하여 아름드리 큰 나무도 아주 작은 씨앗에서 싹이 트고, 9층의 누각도 한 무더기 흙을 쌓는 데에서 시작하며, 천 리의 길도 발밑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시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이사는 축사에서 "특히 ㈜국악신문에 '우리 노래 사설(辭說)의 서예화'로 국악계에 큰 자극을 주시더니, 금년부터는 아리랑 사설을 소재로 하여 국악인들의 자긍심을 돋궈 주시는 한얼 이종선님이 앞장 서신다니 더욱 기대가 큽니다. 국악신문 매주 수요일마다 연재를 통해 서체의 다양함에서 맛보는 미학적 감동은 물론이고, 그 탁월한 사설의 인문학적 풀이에서 큰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며 "우리 국악신문 독자들은 이번 창립전 출품작품에서 서예의 세계와 아름다움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함께하겠습니다"라고 전했다. 한국서예술협회 강은영 회원은 "붓을 잡은지 햇수로 5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수업을 제대로 다 채우고 나가지 못했다. 이번 창립전을 위해 뜨거운 여름날부터 열심히 작품을 완수했다."며 "선생님께서는 수업을 시작하기 전, 당일 수업에서 한시나 한글 시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국문학적 내용과 감상에 대해 충분히 강의를 해주신 다음에서야 붓을 잡게 하신다." 며 "그런데 그 많은 시 작품을 줄줄 외우신다. 얼마나 읽고 숙지를 하셨는지 놀랍다. 한얼 선생님 서체는 그래서 운율이 살아서 움직인다. 한참 바라보면 제 각각의 서체가 소리를 내면서 나에게 말을 건낸다. 서체는 시가 되고, 이어 노래가 되어 들리기 시작한다."라고 전했다. 가족과 함께 온 회원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서예작품을 설명하면서 자랑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면서 요새 사라져가는 학교앞 서예학원 실태에 대해 아쉬워했다. "손주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데, 요즈음 애들에게는 인기가 그리 많지는 않다"라고 아쉬워했다. 한 관람객은 "한국을 방문한 외국 관광객들에게 인사동에 오면 한번 들려야 할 코스로 소개하고 싶다. 한글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서예를 배우고 싶다"라고 전했다. 이번 회원전은 서예를 시작한지 5년 정도 되는 회원들로부터 원로 작가까지 함께한 전국 단위 회원전으로 서예계에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작가의 시각과 해석에 따라 표현되는 다양한 한글의 조형미에 대한 인기는 해외 한국문화 홍보원(한국문화원) 서예교실 프로그램 운영에서 입증이 되고 있다. 유럽 국가에 주재하고 있는 몇몇 한국문화원에서 한류 프로그램 인기와 함께 서예교실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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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예술협회 創立, 설레임, 함께 하겠습니다創立 설레임, 함께 하겠습니다 한 해를 결산하여 마무리 하는 달 12월, 다가와 새롭게 하여 설레게 하는 말 ‘創立’! 한국서예술협회가 지난 7월에 창립하여 펼치는 ‘창립회원전’을 연다니 설레입니다. 국한문 전 서체 150여 점이 전시되니, 분명 한국서예의 전모를 감상하는 기회일터. 축하에 앞서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국악신문에 우리 노래 사설(辭說)의 서예화로 국악계에 큰 자극을 주시더니, 금년부터는 아리랑 사설을 소재로 하여 국악인들의 자긍심을 돋궈 주시는 한얼 이종선님이 앞장 서신다니 더욱 기대가 큽니다. 주간 연재를 통해 서체의 다양함에서 맛보는 미학적 감동은 물론이고, 그 탁월한 사설의 인문학적 풀이에서 큰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국악신문 독자들은 이번 창립전 출품작들에서 서예의 세계와 아름다움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함께하겠습니다. 참가하시는 작가 모든 분들께 축하와 감사를 전합니다. 1주일간의 전시가 서예계와 작가와 관람객 모두에게 설레이는 시간이 될 것임을 기대하며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국악신문 대표이사 기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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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 '홍길동' 블루레이 출시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과 <호피와 차돌바위> <홍길동>과 <호피와 차돌바위>는 신동헌 감독의 동생인 신동우 화백이 «소년조선일보»에 연재하던 <풍운아 홍길동>을 원안으로 한 셀(cel)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홍길동>은 1967년 1월 개봉, 흥행에 크게 성공하여 한국영화계에 애니메이션 제작 붐을 일으켰으며, 제6회 대종상 비(非) 극영화•문화영화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홍길동> 제작 후 신동헌 감독은 세기상사와의 갈등으로 ‘홍길동’ 캐릭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차기작으로 <홍길동>에 등장했던 ‘차돌바위’와 새로운 캐릭터 ‘호피’를 주인공으로 한 속편 <호피와 차돌바위>를 같은 해 선보였다. <호피와 차돌바위>는 전작과 달리 호피, 차돌바위, 곰쇠 캐릭터간의 개성과 조화를 강조한 작품으로 특히 전통적 영웅에서 비켜나간 호피의 반(反)영웅적 면모는 작품에 현대성을 더해준다. 한국영상자료원은 2016년 필름을 디지털화하여 동명의 DVD를 출시한 바 있으나, 이번 블루레이는 2021년 심화 복원을 거쳐 한층 원본에 가깝게 재현된 영상을 담았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영화의 제작여건은 열악했고, 특히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은 쉽지 않았다. 마땅한 스승이 없었던 신동헌 감독은 외화와 외서를 보며 제작기법을 익혔다. 필름은 미군이 쓰고 남긴 정찰용 항공필름을 양잿물에 씻어 사용하였고, 제대로 된 물감이 없어 포스트 칼라로 색을 칠한 뒤 박리되기 전 빠르게 찍어냈다는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전해진다. <호피와 차돌바위>는 <홍길동>을 통해 습득한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의 완성도를 한껏 끌어올렸으며, 내용적으로도 각 캐릭터의 성격에 맞는 개성 있는 움직임을 구현하였다. <홍길동>과 <호피와 차돌바위>는 숙달된 인력도 부족하고 제작기반도 열악한 시절, 오직 노력으로 일궈낸 한국영화의 소중한 유산임이 틀림없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선구자 신동헌 신동헌은 1927년생으로 서울대 재학 중 ‘코주부’ 캐릭터로 유명한 김용환을 만나 만화계에 입문한다. 이후 여러 신문사의 전속작가를 거치다 1959년 ‘신동헌 프로덕션’을 설립해 광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 1962년 광고 <진로소주> 파라다이스 편의 성공으로 세기상사에서 신동헌 감독에게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을 의뢰한다. 그는 동생 신동우 화백의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으로 한 <홍길동>을 제작해 1967년 1월 개봉, 흥행에 성공한다. 하지만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은 애석하게도 사라진다. 필름이 유실되어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게 되자, 신동헌 감독이 열악한 제작 여건을 딛고 작품을 완성했으며 그 속에 그가 추구했던 한국적인 애니메이션이 담겨 있다는 말들만 전해졌다. 사라졌던 필름이 제작 후 40년이 지난 2007년 일본에서 극적으로 발굴되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수집하였다. 2008년 디지털화 과정을 거쳐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개관 1주년 ‘발굴, 복원 그리고 초기영화로의 초대’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에 공개되었다. 공개된 <홍길동>은 인물의 상황과 감정을 그림자를 활용해 표현주의적으로 연출하였고, 해골들이 굿거리장단, 트위스트 리듬으로 편곡된 아리랑에 맞춰 춤을 추는 실험 등으로 동시대 작품에서 느끼기 힘든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 내는 작품임이 확인되었다. 감독들은 후대의 애니메이터로서 50여 년 전 제작된 작품이 지니고 있는 현대성에 관해 설명하였다. 또한 나호원 평론가는 영화의 주요 장면들을 중심으로 영화가 이룩한 미학적 성취를 해설하고 있으며, 김기호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은 셀 애니메이션 복원에 담긴 지난한 과정과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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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만든 웹툰 '환수왕' 호평, 을사오적 골프채로 내려져문화재청이 12일 자정 네이버웹툰에 공개한 웹툰 '환수왕'이 호평 속에 신고식을 치렀다.매주 화요일 연재되는 '환수왕'(50부작)은 대한민국 최고 고미술품 경매사 이준섭이 유물의 신비스러운 힘에 이끌려 대한제국에 떨어지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에 무분별하게 반출되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한 문화재를 외세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주인공의 고군분투기가 펼쳐진다.이날 공개된 1화부터 3화의 평점은 9점에 웃돈다. 첫화부터 강렬하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이완용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 이완웅을 저격하는 장면이 1화부터 시작돼 통쾌함을 선사한다.최근 복원을 마친 덕수궁 돈덕전이 등장하고, 이곳에서 이완웅과 마주한 주인공이 서양에서 가져온 물건이라며 골프채를 보여준다. 골프채에 관심을 보이는 이완웅에 주인공은 "이렇게 벌레 잡을 때 쓰는 것"이라고 가격한 후 "5년 전 네놈이 천황을 비난한 글이다. 이게 알려져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네놈이 빼돌린 왕실의 보물들 모두 어디 있는 지 불어"라고 요구한다. 당황한 이완웅이 "너 누구냐"라고 하자 '환수왕' 로고가 떠오른다. 그리고 2024년 이준섭의 일상이 시작된다.문화재 환수라는 무거운 소재의 웹툰임에도 적절한 웃음 요소가 곳곳에 배치돼 눈길을 끈다. MZ세대를 겨냥한 좌승훈 작가표 웃음 모드가 독자들과 통했다. 젊은 세대에서 쓰는 단어, 속도감 있는 전개도 매력적이다. "재미있는 구성이다" "관종교장 다시 보고 있었는데 이런 개념 넘치는 내용으로 돌아와 반갑다" "진심 재밌다마라탕 탕후루 같은 네이버웹툰에 나타난 초당 순두부 느낌"이라며 긍정적 반응이 이어졌다. 대체적으로 신선하다는 평가다. 이와 함께 한국의 역사적 아픔에 대해 곱씹어보는 기회가 됐다는 의견이 다수의 공감을 샀다. "일본의 침략으로 없어지거나 뺏긴 우리 문화재를 제자리에 돌려놓는 환수를 소재로 한 점에서 힘이 없으면 외세에 무기력하게 당하고 우리 것은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도 남기는 명작이 되길 바라며, 이런 뜻깊은 작품을 연재해준 네이버 웹툰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댓글에 53명(12일 오후12시15분 기준)이 추천 버튼을 눌렀다. 이번 '환수왕'은 국가유산과 관련한 이야기 자원을 발굴하는 문화재청의 스토리텔링 사업 중 하나로 기획됐다. 젊은 세대를 타겟으로 문화재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리고자 웹툰으로 제작됐다. 50부작 연재에 예산은 6억원이다. 웹툰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50부작은 1년치 연재물 수준이며, 회당 250만~300만원(90컷 기준)으로 고려하면 '환수왕' 프로젝트는 금액대가 높은 작업이다.문화재청은 올해 초 관련 사업을 발주했고, 6월 콘텐츠 기획사 제이지비퍼블릭(JGVIPUBLIC)가 선정됐다. 웹툰 '관종교장'을 통해 코미디 분야에 특화된 역량을 보여준 바 있는 좌승훈 작가와 손잡고 약 6개월간의 제작 기간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문화재청이 후원하는 작품이 맞느냐"며 기대 이상의 작품이라는 호평도 있지만, 전체 웹툰 시장에서의 경쟁력은 미비한 수준이다. 정부 기획 사업의 한계일 수 있지만, 먼저 예단하긴 이르다.문화재청 관계자는 "앞서 '물상객주' '바리데기 별자국' 등 문화재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웹툰 콘텐츠를 제작한 바 있다. 그중 '환수왕'은 일반 학습만화는 다르다"며 "스토리 전문가의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환수왕'을 통해 정부가 만든 작품은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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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한민족체험수기 공모전' 사할린 동포 우수상 공동수상KBS한민족방송이 주최하는 '2023 제25회 KBS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사할린 동포 3분이 우수상을 수상했다.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인무학 씨의 <내가 아는 고려극장 맹동욱>,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박승의 씨의 <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 러시아 사할린 코르사코프시 발레리 오석만 씨의 <사할린 한인 2세, 오래된 희망>의 체험수기가 영예의 우수상을 수상했다. KBS한민족방송은 중국 동북 3성을 비롯해 CIS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과 사할린 동포들에게 한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우리말과 우리글을 보존하기 위해 지난 1998년부터 매년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전’을 실시하고 있다. 주최측은 "그동안 책으로만 엮어서 기록으로만 남겼지만 올해부터는 수상된 체험수기는 다큐로 제작되어 방영될 예정입니다. 어떻게 제작이 되고 방영이 될지 가슴이 떨립니다"라고 전했다. 한편 사할린 동포 3분의 수상작은 국악신문에서 연재가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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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69)동학란노래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 수많은 군사를 어데 두고 전주야 숲에는 유시했노 봉준아 봉준아 전봉준아 양에야 양철을 짊어지고 놀미 갱갱이 패진했네 동학란노래를 쓰다. 계묘년가을 한얼이종선 감상 *진개남: 김개남(金開南)이다. 전봉준과 더불어 동학란을 이끌었다. *유시(遺屍): 시체가 되다. *패진(敗陣): 패전. 전투에서 지다. *놀미: 논산, 갱갱이: 강경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며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나라는 혼란하였다.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항거하여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으로 무장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움직임은 곧 중앙정부의 탐관오리들에 대한 분노로 증폭되어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1894년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동학란, 동비의 난, 갑오농민운동으로 불린다. 동학농민운동은 교조 신원운동에서 시작되어 고부 봉기, 그리고 제2차 전주성 봉기에 이어 서울로 쳐들어가 부패한 정치가들과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는 데 있었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12월 패배함으로서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결국 실패하였다. 이 노래는 동학란 실패에 대한 백성들의 회한을 담고 있다. 고체로 가로쓰기 하였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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