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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폭 비단에 담긴 조선왕실의 잔치국립국악원은 주스페인한국문화원(원장 신재광)과 주오스트리아한국문화원(원장 임진홍)과 함께 ‘임인진연도병(壬寅進宴圖屛)’을 주제로 하는 한국음악특별전시 '조선왕실의 춤과 음악'을 4월 18일(목)과 4월 19일(금)에 개최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립국악원이 소장하고 있는 ‘임인진연도병’,(서울특별시유형문화유산) 이외에도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와 같은 대표적인 국악기를 비롯하여 태평소, 자바라, 나발, 나각 등의 대취타 악기, 춘앵전 복식, 대취타 복식과 같은 전통공연 의상과 <대악후보>와 <악학궤범> 등의 고문헌도 함께 전시한다. 또한 도병에 담겨 있는 궁중무용의 실제 공연 영상을 송출해 전시 이해를 돕는다. ‘임인진연도병’은 1902년 4월 고종황제가 51세의 나이로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하는 의식절차와 이를 기념하는 궁중잔치를 기록한 병풍으로,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1폭~5폭에는 기로소 입소 장면이, 6폭~9폭에는 진연(進宴, 궁중잔치)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궁중무용 춘앵전, 헌선도, 향령무, 쌍무고, 선유락 등과 궁중음악을 연주하는 악대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겨져 있어 조선 후기 궁중 잔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국립국악원은 한국음악의 저변확대를 위해 국악체험상자를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다. 2023년 주헝가리, 주폴란드한국문화원에 국악체험상자를 기증한 것에 이어 올해는 주스페인, 주오스트리아한국문화원에 국악체험상자를 기증했다. 국악체험상자는 전통풍류음악의 국악기 편성을 체험하는 <나만의 풍류>, 국악기의 형태과 소리를 살펴볼 수 있는 <한국의 악기>, 그리고 전통공연을 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한국의 음악과 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 개막식에는 궁중무용 춘앵전과 피리독주 공연이 펼쳐져, 전시와 국악에 대한 관람객의 이해를 도왔다. 개막식을 찾은 많은 관람객들은 화려한 궁중무용 춘앵전의 춤사위와 복식,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민요인 아리랑의 선율을 함께 부르며 큰 호응을 보냈다. 국립국악원 김명석 국악연구실장은 "국립국악원은 작년 폴란드, 헝가리에 이어 올해 스페인, 오스트리아에 국악 유물 전시와 함께 국악체험상자를 보급하여 K-culture 확산에 기여하고 있으며, 하반기에도 벨기에, 스웨덴문화원까지 한국음악특별 전시를 진행할 계획으로, 이를 통해 한국의 전통춤과 음악을 널리 알리는데 이바지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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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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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한국의 지역춤, 전북지역춤이병옥/전통예술 연구가, 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부산·경남지역춤과 광주·전남지역춤에서는 기후와 지리 등 생태환경적 차이로 형성된 춤 전승과 특징에 비중을 두어 연재하였다. 그러나 대구·경북과 전북 등 북도지역은 남도지역보다 인구·경제·사회환경면에서 현재는 약세지만, 조선시대에는 영호남의 거점지역으로 정치·문화면에서는 중심지였다. 경상감영(대구)과 전라감영(전주)에는 관찰사(觀察使, 監司)를 비롯한 벼슬아치(官員)와 관속(官屬, 아전과 하인), 그리고 지방 호족(豪族)들이 많아 매우 보수적이지만 이들은 문화예술의 향유층이었기에 자연히 문화예술 종사자도 많아져 교방(敎坊)의 관기(官妓)와 사기(私妓), 장악청(掌樂廳)의 악공(樂工)과 재인(才人), 광대(廣大)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북도지역은 저명한 춤꾼과 소리꾼들도 많았으며 전승 뿌리도 깊었다. 그래서 지난 대구·경북지역춤에서는 경상감영의 춤 전승배경을 바탕으로 배출한 많은 근현대 춤 인물에 비중을 두어 연재하였던 것이다. 전북지역춤 역시 전라감영의 역사문화적 인프라와 예술환경의 영향으로 배출하게 된 많은 춤 인물에 비중을 두어 연재하고자 한다. 전북출신으로 중앙(서울)무대에서도 유명한 한국발레의 대부 임성남, 한국 현대무용의 대모 육완순, 한국춤극의 대가 국수호, 승무의 명무 채상묵 등 장르별 대가들이 많은 배경도 살펴본다. 또한 전북지역 전통춤의 계통별 특성과 전승자들의 계보와 전승내용을 살피고, 전북 전통춤의 대부 최선(최정철)이 국내에서 가장 많은 5명의 인간문화재 춤 제자를 배출한 전승배경도 관심있게 살펴본다. 아울러 민간춤에서 농악분야는 많이 지정된 반면, 탈춤분야는 한 종목도 지정되지 못한 연유도 알아본다. 조선시대 전라감영과 교방춤 전승 전북지역은 마한시대와 백제를 거쳐 통일신라기 견훤이 전주에 후백제를 도읍하였다. 조선왕조 500년을 꽃피운 이성계(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의 21세손)의 어진(御眞)과 조선왕조실록이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봉안되어 있다. 그래서 전주를 ‘천년의 고도’, ‘조선왕조의 발상지’라 부른다. 조선 초기 전주에 설치된 전라감영(全羅監營, 전북기념물 제107호)은 1896년까지 전라남·북도를 포함하여 제주도까지 통할하는 관청으로 성곽에 둘러싸인 전주부 내에 있었으며, 전주 관아(官衙)가 반대편에 있었다. 전주부(全州府)·광주목(光州牧)·순창군(淳昌郡)·순천좌수영(順天左水營)·무주부(茂朱府)·제주목(濟州牧)에 각각 교방(敎坊)이 설치되었었다.<『호남읍지』(1895)> 전주부는 교방과 장악청(掌樂廳), 광주목은 교방과 교방청, 순창군은 교방, 순천 좌수영은 기생청, 무주부는 교방청, 제주목은 장춘원으로 명칭을 달리 지칭하였다. 무주부 교방에서는 <포구락>·<고무>·<선유락>·<검무>·<승무>·<헌선도>등 6종의 춤과 이에 수반된 반주, 그리고 소품목록이 보존되어 상당히 큰 규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궁중무였던 <포구락>·<선유락> 등이 지방 교방에서도 연희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궁중무용과 지역 간의 교섭양상을 뚜렷하게 살필 수 있었다.<『호남읍지』(1895년), 『茂朱府邑誌』> 일제 강점기 권번조직과 전승춤 전북지역에 조선후기까지 전주·무주·순창·남원(남원은 기생 기록만 있음)에 설치하였던 ‘교방’(敎坊: 조선시대 여기(女妓)를 관장한 기관)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전주와 남원에만 ‘권번’(券番: 일제강점기 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남원지역에 교방설치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기생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교방이 존재하지 않았던 군산·정읍·이리(익산)·부안지역에 권번과 예기조합이 새롭게 설립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근대시기 경제력 약화와 교통망 부족으로 말미암아 무주·순창에서 교방이 사라지게 되었고, 반면에 일제강점기 경제 중심지로 급부상한 군산, 그리고 호남선과 전라선의 역이 개설되면서 은행이 설립되는 등 경제형 도시로 탈바꿈한 익산과 정읍에 예기조합 내지 권번이 설치되었다. 1916년의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령 제3호<요리옥·음식점 영업취체규칙>(식품위생법)에서 예기(藝妓:가무, 서화, 시문 등 예능을 익혀 손님을 접대하는 기생)·작부(酌婦: 술접대부)·예기치옥(藝妓置屋: 예기들의 거처사옥) 등 요릿집 위생관련 법안규칙에서 기녀들을 명시한 법령이 나타난다. 당시 전주에는 1915년에 예기조합(藝妓組合), 1923년에 전주권번이 설립되었고, 군산에서는 1923년에 군산 예기치옥(藝妓置屋), 남원은 1926년 예기조합과 권번(券番)이란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정읍은 1928년 예기조합, 이리(익산)는 1929년 기생조합, 1939년 예기조합이란 명칭으로 각각 설립되어 활동하였다. 『조선미인보감』 기록을 보면 1923년 당시 전주권번의 기생 규모는 최소 50명은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북 출신으로 서울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녀들은 한성권번에 조추월(曹秋月)과 조산월(曹山月), 신취옥(申翠玉) 등이 있었으며, 한남권번에는 장옥주(張玉珠), 송경주(宋瓊珠), 조산옥(趙珊玉)이 활동하였다. 전북 출신의 기생들은 고향에서 기예능을 익힌 후 경성에 진출한 것이다. 이들은 궁중춤(呈才)보다 <승무>·<살풀이춤>·<입춤>·<검무>·<화관무> 등의 민속춤을 주로 추었다. 교방(권번)계통춤의 전승과 무형문화재 지정 현황 전북지역의 전통춤은 교방계통춤과 재인계통춤, 두 계통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전승되고 있다. 교방계통춤이란 교방·권번·기방 등에 소속되어 추던 기녀들의 춤으로 곱고 섬세하고 아름답게 추는 여성 성향의 춤을 말하며, 반면에 재인계통춤이란 재인·광대들에 의해 추던 춤으로 투박하고 담백하지만 고고하고 품격있는 남성 성향의 춤을 말한다. 하지만 남성이라 할지라도 교방계춤을 전승한 춤꾼들은 곱게 추는 경향이 있고, 여성일지라도 재인계춤을 전승한 춤꾼들은 담백하게 춤을 춘다. 예를 들면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였던 이매방(27호 승무· 97호 살풀이춤)은 어린 시절 목포권번장 함국향으로부터 권번춤을 체득하였기에 곱디 고운 교방계통춤으로 전승하였으나, 반대로 한영숙(국가 27호 승무 보유자)은 처음부터 재인 한성준으로부터 춤을 배웠기에 담백한 재인계통춤의 성향을 보였다. 전북지역의 교방계춤은 여러 지역 권번의 명무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신분적 차별대우로 대를 잇지 못했으나 전주 전동권번의 이추월, 남원 권번의 조갑녀, 군산권번의 장금도만이 어렵게 춤맥을 잇고 있다. 전주전동권번의 이추월의 춤을 최선(호남살풀이춤, 전북15호)이 오롯이 이어받아 전북 교방계춤의 중심축을 이루게 되었으며, 최선(본명 최정철, 1935~)의 문하생으로 성장한 제자들이 각기 다른 종목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분화 발전하였다. 최선의 제자들로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된 이들은 김광숙(예기무, 전북48호), 이길주(호남산조춤, 전북47호), 고선아(한량무, 서울45호), 김나연(화관무, 황해 4호), 문정근(전라삼현승무 전북52호) 등 5명이나 되며, 채상묵(전통춤협회이사장)을 비롯하여 장인숙(호남살풀이춤보존회장), 허순선(광주대 교수), 정은혜(충남대 교수), 김희숙(영남대 교수)들이 있다. 이처럼 국내에서 많은 제자 보유자, 대학교수, 명무들을 양성한 최선은 금년(2018)에 전주와 서울에서 제자들과 함께하는 자랑스런 <사제일심(師弟一心)>춤판을 가졌다. 원광대 명예교수인 이길주(전북47호, 호남산조춤)는 어린 시절 최선의 문하에 입문하여 전북최초로 대학 무용학과를 개설하여 전북지역 대학무용발전에도 공로가 크며, 호남산조춤은 이추월-최선-이길주로 이어지는 교방계춤으로 산조연주에 맞춰 멋진 춤사위를 발휘하는 한국 전통춤의 대표적 특성인 한과 신명을 한층 더 자유롭게 승화시켰다. 김광숙의 예기무(전북 48호)는 부채춤-수건춤-접시춤이 복합된 교방춤으로 어린 시절 최선의 문하생을 거처 정형인, 박금슬에게서도 춤을 사사받았다. 고선아 역시 최선의 문하생으로 상경하여 강선영 태평무을 이수하고 경기지역 4인 군무인 한량무 보유자(색시춤, 서울 45호)가 되었다. 김나연도 최선류 호남살풀이춤 이수자로 화관무 보유자(황해 4호)가 되었다. 그밖에도 남원권번의 조갑녀의 춤은 딸 정명희로 이어지고 있으며, 군산권번 장금도의 춤은 송미숙(진주교대)과 신명숙(대진대)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재인계통춤의 전승과 무형문화재 지정 현황 한편 전북지역 재인계춤의 대부는 정읍출신 정자선(1872~1949)을 꼽게 되는데, 소리와 기악은 물론 춤도 뛰어났으며, 그의 전주 제자로는 김소란·정형인·박금슬·김유앵·장월중선 등이 뒤를 이었다. 그 중에서도 수제자이며 장남인 정형인(1896~1973)의 뒤를 이은 제자들은 금파 김조균(1940~1998, 한량무, 전북 17호)과 서울에서 활동하는 국수호(전 국립무용단장)와 농악명인 정인삼(소고춤, 경기56호)도 있다. 금파(김조균)를 중심으로 대를 이은 국수호·고선아·김숙·김무철(한량무, 전북44호)를 비롯한 노현택(무용협회 전주지부장)·문정근(전라삼현승무, 전북52호)·심가영와 심가희(삼례문화예술촌 대표)·김애미·이정노·정길만(국립무용단원 훈련장) 등이 있다. 전북지역의 재인계춤은 정자선-정형인-김조균(금파)으로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김조균(금파)는 한량무로 보유자 인정을 받았으나 일찍 작고(1940~1998)하는 바람에 전승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아들 김무철이 부친의 춤 불씨를 살려 다시 한량춤(전북 44호)으로 인정받았다. 정자선-정형인-박금슬-문정근으로 이어지는 전라삼현승무(전북52호, 문정근)도 전북의 재인계춤의 또 다른 큰 줄기를 계승하고 있다. 정읍의 전계문(全桂文,1872~1940, 정읍예기조합)은 춤 분야도 뛰어났던 것으로 전한다. "전계문은 당숙인 전도성(全道成,1864~?)의 수행 고수로 활동한 인물이다. 전계문은 북뿐만 아니라, 춤과 정악·양금·가야금·거문고에 이르기까지 두루 능통했는데 특히 <한량무>가 일품이었다. 한성준(1874~1941)이 일 년에 한두 번씩 정읍에 내려가 보름 정도 머물며 전계문에게 북가락과 춤사위를 배웠다.”는 사실은 이보형(음악민속학자)이 송영주(유명 고수였던 태인 출신)를 대담한 결과 근대 전통춤의 대가 한성준이 전계문에게 태인(泰仁)으로 내려와 배운 사실을 직접 확인하였다.<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판소리유파』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16)(서울: 문화재관리국, 1992), 119쪽> 또 하나의 특별한 재인계춤은 정읍의 전계문으로부터 한성준을 거치고 멀리 서울의 김보남을 거쳐 다시 정읍으로 돌아온 신관철로 계승한 수건춤(전북59호, 보유자 신관철)이다. 오늘날 살풀이춤은 1930년대 초 한성준이 정읍의 전계문을 찾아가 춤을 배울 때 수건춤을 살풀이장단에 추는 것을 보고 제1회 한성준 춤발표회에서 처음으로 ‘살풀이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부터 보편화된 명칭이었다. 이후 수건춤이란 명칭이 사리지는 듯하다가 최근 원래 명칭인 ‘수건춤’을 찾아 쓰는 경향으로 지정된 것이다. 익산시의 한국춤 분야는 원광대 무용학과 이길주 교수의 제자로 고명구(무용협회 익산시 지부장), 김명신(전통춤협회 익산시 지부장), 이한녀, 장태연, 장미나(국악원 무용단) 등이 활동 중이며, 익산의 최태열(마한백제무용단 단장, 전북 고부출신 은방초 사사)은 무용교육자 겸 무용가로 ‘길거리 캐스팅’처럼 어린 유망주들을 발굴 육성한 중견남성무용가들로는 이강룡(전 대전시립 지도위원), 박종필(익신시립 무용단 예술감독), 노수은(전 김포예총 회장), 조남규(상명대 교수, 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김진원(서울시립 무용단), 홍기태(부산시립 수석안무자), 박근식(무용학원운영), 소병구(행안부 지방자치 인재개발원 교수, 전통문화), 김지립(무용학원운영) 등이 있으며, 여제자 이미숙(의정부시무용단 예술감독)도 의정부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군산시에는 육정림의 제자 김덕림, 송미숙(진주교대 교수), 김정숙(군산시 지부장), 이한녀( 전국립국악원 무용단) 등이 있으며, 이운태 군산여고 교사로부터 최은정(태평무 호남 지부장)이 사사받아 군산에서 활동하면서 강선영 태평무를 이수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인물로 본 한국무용사』(예론사, 1992)를 출간한 전주출신 오화진은 아시아 무용협회를 운영했다. 전북의 창작춤과 발레 전승 전북의 현대춤과 발레는 이시이바쿠(石井漠, 1887~1962)와 최승희(1911~1967)의 제자인 김미화(본명 김옥순, 1922~1984)가 전라북도의 ‘창작춤의 효시’라고 본다. 최선(호남살풀이춤 보유자)도 어린 시절 김미화로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최승희와 김미화에게 사사받은 육정림(1928~1986)이 군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마찬가지로 최상철(중앙대 교수)도 군산출신 현대춤 교육자이다. 한국발레계의 대부 임성남(1929∼2002, 초대 국립발레단 단장)은 전주사범학교 시절 한동인 발레단 공연을 보고 제자가 되어 발레를 시작하여 일본유학에서 핫도리 시마다(전북 익산출신 제일교포)에게서 발레를 배워 서울에서 활동하였고, 군산출신 김긍수(중앙대 교수, 전 국립발레단장)도 발레 전공자이다. 전주출신 김양곤(서울교대 교수)은 1956년 한국교육무용가협회를 결성하여 파조, 박외선, 정혜옥 등과 함께 활동(1957년 대표최고위원)하면서 서울교대 무용교수로 교육(초등무용)에 공헌하였으며, 제자에는 육완순(전 이화여대 교수, 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 이병옥(용인대 명예교수, 춤비평, 이론은 정병호 교수 사사)이 있다. 미국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아온 조원경(전북김제 출신, 1929~2005)도 발레와 창작춤 전공으로 『무용예술』(해문사, 1967) 저서를 발간했었다. 한국현대춤의 거목인 육완순(1933~)도 김미화에게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무용의 꿈을 키워 이화여대 교수로 현대춤계에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전주성심여고 무용교사였던 박순자(부산대)로부터 이혜희(전북대, 발레), 손정자(우석대, 발레)가 대를 잇고 있다. 그밖에도 권오희에서 양정수(수원대)로 현대춤이 이어지고 있다. 무형문화재 연희춤-탈춤은 없고 농악만 발달 춤과 관련한 연희종목은 탈춤과 농악춤이다. 그런데 영남지역에 비해 호남지역은 탈춤종목은 한 종목도 전승하지 못해 지정된 종목도 없다. 이유는 풍농기원의 마을축제가 농악과 탈춤이 함께 발원하여 전승하는 과정에서 분화발전하게 되었는데, 호남지역은 농악이 발달하다보니 탈춤은 농악의 잡색놀이(양반, 중, 포수, 창부 등)로 예속되어 전승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농악은 전라북도 내륙과 산악지대의 호남 좌도농악(필봉, 남원)과 해안과 평야지대의 우도농악(정읍, 부안, 김제, 고창)으로 각기 다른 특성을 보이며 분화 발전하였다. 호남좌도농악은 고깔보다 전립을 쓴 채상소고춤이 눈에 띄며, 우도농악보다 가락이 빠르고 윗놀이(채상모, 부포상모)가 발달하였으며 판굿중심의 진풀이가 발달하였다. 호남우도농악은 외관상 고깔소고춤이 눈에 띄며, 악기별 개인놀이(쇠춤, 장고춤, 소고춤)가 발달하였다. 내용에서도 장구가락과 설장고춤이 발달하였고, 윗놀이(상모춤)보다 밑놀이(악기가락춤) 발달하였다. 전북 좌도농악의 대표인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임실필봉농악(국가11-5호, 보유자 양진성)은 쇠잡이(꽹과리, 징)만 상모(털이나 줄이 달린 모자)를 쓰며 나머지는 고깔을 쓴다. 농악의 종류에는 섣달 그믐의 매굿, 정초의 마당밟기, 당산제굿, 보름굿과 징검다리에서 치는 노디굿, 걸궁굿, 문굿, 농사철의 두레굿, 기굿과 판굿이 있다. 남원농악(전북7-4호, 상쇠보유자 류명철)은 전북 남동부의 좌도농악을 대표하며 가락이 다채롭고 놀이동작이 세련되고 섬세하며, 농악대원들은 꼭지에 흰 새털이나 종이 오리를 꾸며 돌리는 상모가 특징이다. 전북우도의 부안농악(7-1호, 상쇠보유자 라모녀(금추), 며칠 전에 작고)은 음악·춤사위·놀이가 완벽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으며, 생동감 넘치는 가락이 많다. 정읍농악(전북7-2호, 소고보유자 김종수, 유지화)은 세습무 집단의 뛰어난 예능과 접합되어 예술적 수준이 높다. 김제농악(전북7-3호, 상쇠 이준용, 박판열)은 평야지역의 두레굿과 마을 대동굿의 형태로 농악을 전승해 오다가 좀더 전문적인 예인집단에 의해 발달되어 있다. 고창농악(전북7-6호, 설장고 정기환, 소고 정창환)은 예로부터 고창, 무장, 영광 등지의 해변을 끼고 형성된 농악으로 잡색놀음과 고깔소고춤이 발달하였다. 전북 지역에 춤 명인들이 많이 배출된 연유 전북지역은 현재 국내에서 대도시(광역시)도 없고 인구도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춤, 현대춤, 발레 등 여러 장르에 걸쳐 굴지의 춤 명인들이 많이 배출된 배경을 짚어본다. 첫째, 조선시대 전주교방을 비롯하여 무주교방, 순창교방, 남원에는 수많은 관기와 악공들과 풍류객들이 존재했던 곳으로 지역춤과 소리문화의 인프라가 오랜 역사 속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호남과 제주를 아우르는 정치·문화·예술의 중심지인 전라감영(全羅監營)과 전주부(全州府)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전주시내 초입에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이라는 일주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둘째, 전북지역은 ‘전주대사습(全州大私習)놀이’로 조선시대 국내 최고의 예술가들이 운집하던 고장이었다. 조선봉건사회에서는 예능인들을 천시했지만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받은 명창명인들은 어전명창의 명예를 얻었고, 벼슬을 제수 받는 경우도 있었기에 예술가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신분상승의 명예로운 삶으로 생각하는 문화적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조선시대 전주 지방에서 거행된 예능경연대회(藝能競演大會)로 본래는 숙종(1674~1720) 때 전주에서 거행된 궁술대회(弓術大會), 영조(1724~1776) 때 전주 특유의 통인물(通引物)놀이, 그리고 철종(1849~1863) 이후 국내 최초로 경창(競唱)된 판소리 백일장 등 민속무예(民俗武藝)놀이의 총칭이었다. 순조(1800~1834) 때에는 대사습놀이에서 장원한 우수 광대에게 가자(嘉資)와 명창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한 동안 이 놀이는 중단되었다가, 1975년에 다시 복원되어 판소리·농악·무용·시조·궁도 등 5개 부문의 경연으로 시작하였고 오늘날에는 판소리·기악·민요·시조·전통무용·농악부문으로 경연이 정착되었다.<한겨레음악대사전, 2012. 11. 2., 도서출판 보고사> 셋째, 농악의 발달은 남성춤 전공자 확산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우도농악은 설장고춤, 상쇠춤, 소고춤 등 개인놀이가 발달하여 농악전공자들이 춤전공자로 전향하는 사례가 많았다. 전주농고 농악단 출신의 국수호, 손병우(우석대 교수)를 비롯하여 정인삼(전 민속촌 농악단장, 소고춤보유자) 등 많은 남성무용가들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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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기록문화의 정수 ‘의궤’ 실감콘텐츠로 체험한다문화재청은 오는 23일부터 6월25일까지 창경궁 통명전에서 실감 체험전시 '무신년, 만세의 술잔을 올리다'를 운영한다.이번 전시에서는 의궤에 첨단 기술을 접목한 실감콘텐츠로 실감의궤 제작 사업의 첫 번째 콘텐츠 '실감의궤 : 연향'이 공개된다.이 콘텐츠는 궁중연향을 주제로 '헌종무신진찬의궤'를 증강현실(AR)과 컴퓨터그래픽(CG) 영상으로 재현했다.헌종무신진찬의궤에는 헌종이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육순과 신정왕후 망오(쉰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나이 41세를 이르는 말)를 축하하려고 1848년 3월 창경궁 통명전에서 베푼 연향인 '무신진찬연'에 대한 기록이다. 무신진찬연은 헌종 재위기간에 치러진 유일한 연향으로 왕실 여인이 참여한 연향인 '내진찬'과 야간에 거행된 궁중연향인 '야진찬'으로 이뤄진다.이번 전시에서는 두 가지 연향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 전시장에는 무신진찬연이 행해졌던 창경궁 통명전을 34분의 1 크기로 줄인 실사모형이 배치된다.실사모형을 배경으로 순원왕후의 육순을 축하하는 하례 절차와 순원왕후에게 올렸던 정재무 중 향령무, 무고, 선유락 공연을 증강현실(AR)로 감상할 수 있다.컴퓨터그래픽 영상으로 진찬연 공간, 헌종과 순원왕후의 연향 참여 모습과 야진찬 때 왕실 조명도 볼 수 있다.체험전시 관람 후 현장에서 문제의 정답을 맞힌 관람객 총 1000명(1일 30명씩)에게 선착순으로 소포장된 쌀을 선물로 증정하는 행사도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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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전 '임인진연', 미래에도 이어질 수 있도록120년 전에 있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잔치. '임인진연'을 관람하는 내내, 나라 안팎의 상황이 혼란스러운 가운데에서도 독립국이자 문명국임을 전 세계에 인정받고자 했던, 간절히 우리나라의 문화와 꿈을 보여주고자 했던 마음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국립국악원은 12월 16일(금)부터 21일(수)까지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송년공연 '임인진연'을 선보였다. 이번 공연은 올해 임인년을 맞이해 자주 국가를 염원했던 1902년 대한제국의 임인진연을 중심으로 찬란한 궁중예술의 가치와 의미를 소개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특히 당시 국가를 상징하는 황실의 진연(進宴, 궁중에서 베푸는 잔치)이 기록된 의궤와 도병(圖屏, 그림 병풍) 등 당대의 기록 유산에 근거해 궁중예술을 전통 방식으로 무대에 되살렸기에 더 깊은 의의와 가치가 있는 무대였다. 연일 매진을 기록한 '임인진연' 공연 첫 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국립국악원은 발 디딜 틈 없이 관객들로 들어 차 있었고, 모두 상기된 표정으로 무대를 기대하고 있었다. 임인진연 잔치의 배경을 알리는 글로 가득 채워진 영상과 함께 막이 올랐다. 황제의 탄일과 등극을 기념하는 진연이었기에 황태자는 계속하여 잔치를 윤허 해 달라 상소를 올렸고, 고종은 나라 안팎의 사정을 이유로 잔치를 윤허하지 않았으나 결국 윤허하였다. 그 때의 그 상황과 장면을 영상을 통해, 그리고 전문 성우의 목소리를 통해 감상하니 마치 한 편의 사극 드라마를 보는 듯 해 흥미로웠다. 영상이 끝나고 왕의 입장과 함께 공연진의 무대가 열렸다. 조명이 들어옴과 동시에 관객석에서는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오방색으로 가득 찬 무대는 우리 전통의 멋을 확연하게 드러냈다. 고종이 입장하는 동안 연주된 '보허자'는 위엄 있고 기품 있으며, 이후 붉은 빛의 무대 조명과 함께 단잡이(한 사람씩 하나의 악기를 다룸)로 연주된 여민락 연주에 맞추어 함께 불려진 창사 구음은 음악에 더 깊이 빠져들게 하였다. 한삼을 흩날리며 부드럽게 군무를 추는 무용수들의 몸짓은 부드러우면서도 각지고 힘이 있었다. 여유롭고 위엄있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잔치가 시작되었다. 치사(경사가 있을 때에 황제에게 올리던 송덕의 글)와 음악, 정재가 번갈아가며 진행되는 순서로 잔치는 진행되었다. 제1작은 황태자의 치사, 2작은 황태자비의 치사, 제3작은 영친왕의 치사, 제4작은 군부인, 제5작과 6작은 각 좌명부와 우명부, 제7작은 종친/척신의 치사로 진행된 후 예식이 끝났다. 각 순서에 맞게 서로 다른 음악이 연주되었다. 정악과 정재를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치사를 올리는 과정과 황제에게 술을 올리는 순서, 국궁산무도(발을 세 번 구르며 춤을 춘다) 등의 관례 등을 볼 수 있는 것도 이 공연에서 흥미롭게 볼 수 있는 문화적 요소였다. 반복하여 예를 갖추고 천천히 순서를 지켜나가는 여유로움은 500년 역사를 지닌 조선 왕조의 사상이나 문화와 참 잘 어울렸고, 그 위엄이 굉장히 높게 느껴졌다. 제1작부터 예필(예식을 마침)까지.(수제천, 해령, 여민락만, 수룡음, 여민락, 세령산, 계면가락도드리, 보허자) 총 아홉 악곡이 번갈아가며 연주되었다. 당피리가 중심이 되어 연주하는 해령, 여민락만, 보허자는 치사를 치사봉치 안에 가져다 놓는 치사봉치 때 연주되었고, 향악 계통의 수룡음과 세령산, 여민락, 계면가락 도드리는 황제에게 술을 올리는 진작 때 연주되었다. 치사봉치 때 사용되는 악곡 ‘해령’은 연음(連音)의 연주방식이 들어 있는 대표적인 악곡으로 꼽힌다. 연음형식이란 관악 중심의 합주곡에서 피리·대금·해금·장구·북을 함께 연주하다가 피리·장구·북이 쉬는 동안에 대금과 해금만을 연주하고, 이 연음의 끝음을 받아서 다시 피리를 연주하는 식으로 계속 반복되는 형식을 취한다. 이는 ‘해령’이 ‘본령’과 함께 연악이나 행악에 주로 사용되는 음악의 기능과 밀접히 관련되는데, 의식 진행에서 음악의 길이를 연장 또는 축소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관악기군의 연음방식을 이용하여 반복과 생략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해령을 연주하며 연음 형식을 적절히 활용하니 행사의 순서에 따라 늘이고 줄이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 그 멋이 돋보였다. 장엄하고 유려하게 연주되는 해령은 우리 궁중의 위엄을 보여주면서도 부드럽고 유한 멋을 동시에 나타내었다. 진작 때 연주된 수룡음은 생황의 오묘하고 아름다운 음색이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수룡음은 가곡 중 계면조 평롱·계락·편수대엽까지의 반주선율을 기악곡으로 변주하거나 한곡씩 독립하여 독주·병주 혹은 관악합주로 연주한 곡으로, 단소와 생황의 생소병주 형태로도 많이 연주된다. 이번 무대에서는 단잡이의 작은 규모로 연주되었는데, 국악기 중 유일하게 화음을 낼 수 있는 생황의 음색은 아름답고 자유로웠다. 세령산이 연주될 때에도 생황이 사용되었는데, 왕에게 술을 올리는 잔잔하면서도 위엄 있고, 우아한 느낌이 생황과 참 잘 어울렸다. 공연의 시작과 끝은 수제천이 장식했다. 장중하고 화려하면서도 우직하고 유려한 힘이 있는 향악의 대표곡 수제천이 연례 순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느껴질 정도로 그 힘이 컸다. 왕세자 등의 거동에도 많이 활용되었던 의식음악인만큼 앞서 말한 해령의 연음형식이 사용되고, 갈라 치는 장단을 활용하는 등 박에도 신축성이 있지만, 그러한 자유로운 불균형 안에서 모든 악기들이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며 완성도 있는 예술성을 선보였다. 예식의 끝, ‘수제천’ 연주 이후 대표적인 정재의 하나인 ‘선유락’ 무대가 펼쳐졌다. ‘선유락’은 군례(軍禮)의 형식을 띠며, 정재로서는 가장 거대한 규모의 군무인데, 어부사를 노래하며 밧줄을 끌고 배를 둘러서 춤을 춘다. 무용수들의 기품 있는 몸짓이 하나 되어 마치 꽃이 흩날리는 듯하였고, 힘 있는 취타의 반주와 조화롭게 어우러져 우리 예술의 깊이감이 크게 드러났다. 오랜 역사와 예술을 자랑하는 500년 왕조의 행사 ‘임인진연’은, 혼란했던 그 당시를 꿋꿋이 이겨내려는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 크게 느껴지는 무대였다. 특히 당시 임인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황실이나 종친 등 최상류층만 향유했던 궁중 가무를 국내외 귀빈에게 공개하려 했다고 하니, 그만큼 우리 문화를 지켜내고 나라를 지켜내는 데에 절실했던 것이 아닐까. ‘임인진연의궤’에는 행사 준비에 필요한 모든 내용들이 글과 그림으로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고, 우리는 그 기록을 이어받아 120년 후 2022년의 현대인들에게 선보였다. 우리 문화와 전통은 그렇게 오랜 기간 꾸준한 노력이 담긴 기록과 보존으로 명맥을 지속 해 온 것이다. 과거를 현재로 가져 온 이번 무대를 넘어서, 현재 우리가 지켜내고 발전시켜 내고 있는 전통예술 또한 계속해서 미래로 이어져 나가게 할 수 있도록, 우리는 집중하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랑하며 지켜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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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고종의 시간에서, ‘임인진연’을 만나다지난 12월 16-21일, ‘국립국악원 2022년 송년공연, 임인진연’이 큰 호응을 받고 막을 내렸다. 22년 국립국악원 기획 공연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공연은 조선왕조 500년 궁중예술의 맥을 잇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궁중잔치 ‘임인진연’을 120년 만에 무대 공연으로 재현한 것이다. ‘임인진연(임인년의 왕실잔치)’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칭경예식)과 51세(기로소 입소)를 기념하는 것은 물론, 자주국으로서 ‘대한제국’을 대외에 알리는 정치적 의미를 갖기도 했다. 이번 공연은 왕실 가족들이 주로 참여하며, 예술적 측면이 더욱 돋보이는 ‘내진연’을 재현했다. 공연은 인위적인 연출보다는 기록유산(‘임인진연의궤’, ‘임인진연도병’ 등)에 근거한 재현에 중점을 두었고, 객석을 임금의 시선으로 설정하여 관객이 고종의 시선에서 진연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는 특징을 갖는다. 또한 지금까지 국립국악원에서 선보인 궁중행사(고종황제 즉위, 혜경궁 홍씨 회갑연, 야진연 등) 중, 최대 규모를 재현한 것이며, 섬세한 고증과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그 역사적, 예술적 고증의 완성도가 높다. 이러한 특징은 일반 대중에게도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전회 매진’이라는 높은 객석 점유율을 보이기도 했다. 국립국악원 장악과 통계 자료에 의하면, 유료 객석 점유율은 88.4%(2,460명)을 차지했다. 이것은 현재 대중문화 안에서 국악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고려한다면, 상대적으로 높은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국립국악원 장악과 이승재 관객개발팀장은 이번 공연의 관객 분포에 대해 다음과 같은 특징들도 전했다. "기존 연주단 중심의 공연에는 무용, 음악 등 각각의 개별 장르를 선호하는 관객들이 극장을 찾은 반면, 이번 공연에는 음악과 무용이 어우러지는 종합 공연의 특성상 음악과 무용을 선호하는 관객들이 골고루 분포했습니다. 또한 한국의 전통 기록물을 바탕으로 재현한 공연 특성에 따라 전통 문화에 관심이 많은 애호가와 미술, 전시 관련 종사자의 방문도 눈에 띄었으며, 연말 송년모임을 국악 공연으로 즐기려는 관객들도 상당 수 있어 관객의 구성이 매우 다채로웠습니다.” 마지막 공연 전, 관객을 만나다 공연 시작 한 시간 전 오후 6시30분, 이미 하늘은 어두워졌고, 바람도 제법 쌀쌀하다. 예악당 주변을 비추는 밝은 조명이 공연을 알리고 있었다. 건물 입구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태극기가 보인다. 당시 진연이 있던 관명전 건원문을 대신하여 배치된 것으로, 관객들이 시대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관객들도 보였다. 예악당 로비에 이미 많은 관객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한쪽에 커다란 ‘임인진연’ 포스터를 배경으로 서 있는 수문장 2명이 당시 시대적 분위기를 한껏 느끼게 해주었다. 역시 관객들은 입구에서부터 기념촬영을 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특별한 공연의 기록을 남겼다. 공연 전, 관객들은 어떤 이유로 공연을 찾았을까? 예악당 태극기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남성 2인을 만났다. 조 모씨 / 30대. 남 친구 소개로 왔어요. 국악을 접할 기회가 많지는 않잖아요. 영화 배경음악 정도. 그리고 국악공연은 비싸다는 선입견도 있는데, 생각보다 비싸지도 않더라고요. 조선 최후의 잔치를 재현한 것이고, 국악을 듣고 볼 수 있는 기회라고 해서 기대가 됩니다. 한국 사람이 국악을 잘 모르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익숙한 소리를 들어도 무슨 악기로 어떻게 연주되는지 잘 몰라서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효 모씨 / 30대. 남 광화문이 직장인데, 우연히 광고를 봤어요. 평소 못 보는 공연이고, 당대 문화의 최고봉이라고 해서 흥미 있을 것 같아서 오게 됐습니다. 이전에 여행상품 중, 남도소리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때도 인상적이었어요. 그 이후로 두 번째 국악공연을 보는데요, 기대됩니다. 공연은 국악분야 전문가에게도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 최 모씨 / 40대. 여 이곳(국립국악원) 무용단 단원이었어요. 오래 몸담고 있어서 이번 공연에 대해 큰 기대를 했는데, 코로나, 홍수 등으로 연기되면서, 올해 할 수 있을까 걱정도 했어요. 드디어 송년 공연으로 볼 수 있어서 큰 기대 안고 왔습니다. 대학에서 학생들 강의를 하고 있는데요, ‘몽금척’이라는 작품은 가르쳐서 공연도 해서 제게 좀 특별하기도 해요. 공연도 감상하고, 학생들 지도하는데 도움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국악 애호가’ 만날 수 있었다. 김 모씨 / 60대. 남 여기 공연 보러 자주 옵니다. '토요명품' 공연 보러 매주 오고, 이 공연만은 오늘 두 번째로 봅니다. 첫 번째 공연은 좋은 자리가 아니어서, 좀 나은 자리에서 제대로 보고 싶어서 다시 왔어요. 120년 전 실제 상황이므로 역사에 대해 과거로 거슬러 그 당시 시대상이나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서요. 공연장을 찾은 부부는 다음과 같은 사연을 밝히기도 했다. 이 모씨 / 70대. 남 책에서 진연에 관한 책을 선물 받은 것이 있는데, 꽂아 놓고만 있다가 이번에 진연을 공연으로 한다고 해서, 그 책을 다시 보게 됐어요. 특히, 아내와 함께 미리 공부하는 마음으로 책에 있는 진연도(진연 그림)를 좀 보고 왔습니다. 이런 공연은 자주 볼 수 없잖아요. 옛날 잔치는 어떻게 했을까? 의상이나 분위기 같은 것들도 궁금했고요. 이런 공연 자주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것을 계발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게요. 책에서 보는 것이랑 눈으로 보는 것은 확실히 다르거든요. 김 모씨 / 70대 여 남편이 공연 오기 전에 집에 있던 책 속에 있는 ‘진연도’를 보여주더라고요. ‘미리 알고 가면 더 재미있다.’ 고요. 이런 공연은 흔치 않으니까 한 번쯤은 보고 싶었어요. 이미 국악을 배우고 있는 두 명의 외국인들도 만났다. 실방 몽쇼세(Sylvain monchocé) / 30대. 남. 프랑스. 연주가 원래 플룻, 섹스폰 연주가인데요, 지금 가야금, 대금을 배우고 있어요. 28일 게토얼라이브(서울시 성수동)에서 공연 예정이에요.(그는 이 공연에서 가야금, 대금을 연주할 예정이기도 하다.) 1달 전에 왔고요, 충남 공주에 계신 선생님으로부터 한국 악기를 배우고 있어요. 이번 공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왕실 공연이라 ‘특별해’ 보여서 오게 됐어요. 다른 한국 공연과 다를 것 같다는 기대가 있습니다. 엠마누엘(emanuel) / 40대. 남. 스위스. 시티플래너 저는 지금 풍물을 해요.(그는 한국말로 ‘풍물을 해요’라고 말했다.) 필봉농악에서 소고춤도 배우고 있어요. 국악, 농악을 너무 좋아해요. 특히 태평소, 소고춤을 배우고 있는데요, 궁중음악을 본 적이 없어서 오게 됐어요. 어떤 공연일지 너무 기대 되요. 복식사(服籂史, 옷과 장신구 대한 역사)를 전공한 남녀 관객도 만날 수 있었다. 진 모씨 / 30대. 남 복식사를 전공했는데요, 책으로 봤던 것들이 무대에서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순서로 보여지는지 궁금해요. 그 당시에는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마지막 잔치였잖아요. 그런 의미도 생각하게 되고요. 국악공연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박 모씨 / 20대. 여 복식사를 전공했고, 지금도 관련 일을 하고 있는데요, 책으로만 공부했던 것들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라서 오게 됐어요. 당시 상황을 무대로 옮긴 공연이고, 실제상황이 무대 공연으로 연출되었다고 해서,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되요. 1시간 30분의 공연 중, 대부분의 관객들은 집중해서 공연을 관람했고, 공연이 끝난 후, 우레와 같은 박수를 쏟아냈다. 커튼콜 때, 관객들은 무대를 향해 분주하게 사진을 찍으며, 공연을 추억을 남겼다. 공연장을 나오는 관객들의 소감을 물었다. 다음날(12.22) 한국에서 공연이 있다는 한 외국인 작곡가는 다음과 같은 소감을 말했다. 파비안 스벤손(Fabian Sevensson) / 남. 스웨덴 작곡가 함께 공연하는 어떤 분이 추천해서 이 공연을 보게 됐어요. 공연은 제게 엄청난 경험이었어요. 무용수들이 상당히 아름답고, 실력도 좋지만, 재능도 뛰어난 듯해요. 5년 전, 미국에서 한국 전통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오늘 공연은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공연을 보고 한국음악을 배우고 싶어졌어요. 공연 전 만났던 관객을 우연히 다시 만나 다음과 같은 소감을 듣기도 했다. 조 모씨 / 30대. 남 재미있었어요. 악기연주가 공연 끝까지 연주되어서요. 생각보다 무대도 가깝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소리도 잘 들렸어요. 그리고 무용수 분들 군무가 절도 있고 질서정연하면서도 선이 우아했어요. 특히 ‘향령무’ 부분이 맘에 들었어요. 기대보다 더 만족스러운 공연이었어요. 성인 가족들이 함께 온 관객들도 만날 수 있었다. 박 모씨 / 50대. 여 ‘매진’이라고 해서 상당히 경쾌하고 화려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조용하고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더라고요. 왕실의 엄숙한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고, 무용수들이 동작을 천천히 하지만, 기품 있었어요. TV에서 보던 복장이나 음악이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보고 들으니까 당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공연을 보기 위해 전남 진도에서 찾아온 전통공연 전문가도 만날 수 있었다. 오지예 / 30대. 여. 남도국립국악원 소품감독 정재를 길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데, 제대로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제가 남도국립국악원 소품감독을 맡고 있어서 소품들에 눈이 많이 갔어요. 책에서 봤던 것보다 자세하게 볼 수 있었고, 세트물 안의 의물(儀物, 정재를 공연할 때 손에 들거나 배치되는 도구)들이 세트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도 볼 수 있었고요. 배우는 재미도 있었고,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개인적으로 다시 보고 싶은 공연이에요. 공연을 담당했던 박동우 연출가와 국립국악원 김영운 원장은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박동우 연출가 공연이 전 회 매진이었거든요. 더 보고 싶어 하시는 관객들이 많이 계신데, 그 분들이 볼 기회가 없는 것이 상당히 아쉽고요. 그래서 혹시 기회가 된다면,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방법들, 예를 들면, 여기서 재공연을 한다든가, 혹은 덕수궁에 함녕전에서 옛날 모습 그대로 재현을 해서, 많은 시민들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100분짜리 공연이라 국악 공연으로는 짧지 않은데, 처음 막이 올라가서 끝날 때까지 정말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중해서 보시더라고요. 국악 사랑하시는 마음이 너무 고맙고 아름다웠습니다. 김영운 국립국악원 원장 코로나로 인해 3월로 예정된 공연이 8월로, 급작스런 수해로 다시 12월로 연기돼 공연진행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다행히 모든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섯 번의 요청 끝에 어렵게 성사된 120년 전 ‘임인진연’의 준비 과정마저 닮았던 이번 공연은 궁중음악과 무용을 계승하고 있는 국립국악원이 원형의 모습을 최대한 살려 무대에 올리고자 했습니다. 120년 전 황실에서 즐겼던 진연을 이제는 국민 모두가 즐기고 나눌 수 있게 되어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국립국악원은 궁중예술 뿐만 아니라 선조들의 삶이 녹아 있는 다양한 국악의 멋과 매력을 전할 계획입니다. 공연을 찾은 일반 관객은 두 가지 이유에서 공연을 찾았다. 첫째, ‘당시의 궁중잔치는 과연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에 대한 궁금함. 둘째, ‘당대 최고의 음악은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한 궁금함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를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20대에서 이상의 관객들이 대부분이었고, 기자가 만난 관객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20-30대의 관객의 경우, 전통문화 분야 종사자들도 눈에 띄었지만, 일반 대중의 경우, ‘마지막 왕실잔치’와 ‘전통예술의 정수’를 경험하고자 하는 역사와 전통예술에 대한 궁금증에서 공연을 찾은 것으로 보였다. 관객 중에는 외국인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기자가 만난 외국인들의 경우, 모두 서양 음악 전문가들이었으며, 한국 초청공연을 위해 체류 중, 본인이 선택하거나, 한국인 지인의 추천으로 이 무대를 찾기도 했다. 50대 이상의 관객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으며, 이들은 주로 당대의 시대상을 경험하거나, 자신의 민족적, 역사적 뿌리에 대한 탐색 등의 이유로 오기도 했다. 또한 엄마와 자녀가 동반하여 관람하는 경우도 눈에 띄었다. 국악을 향유하는 관객의 감상과 소감은 특별한 공연을 더욱 풍성하고 의미있게 하며, 작품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즉, 공연이 존재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궁중의례의 엄숙함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당대 최고 예인들의 공연을 경험하며, 우리의 아픈 시대와 아름다운 예술이 공존하는 시간을 맞이했다. 예술은 역사와 늘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활발하고 다양한 고증을 통해, 좀 더 많은 대중이 이러한 공연을 쉽고도 가깝게 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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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 찬란한 궁중예술로 자주국가 염원한 ‘임인진연’ 재현무대에 들어서자 맨 앞에 황제자리를 암시하는 황금색 용평상(어좌)이, 정면 안쪽 벽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태극기가 있다. 그 사이로 실내외를 암시하는 꽃살문, 의례와 정재(呈才, 궁중무용)공간을 나누는 2조의 주렴(朱簾, 붉은 대나무발)이, 그 사이에 왕족과 신하들이 자리하고, 마지막 주렴 너머로 악단이 보인다. 그리고 상공에 드리운 차일(遮日, 햇빛 가림막)같은 겹겹의 경계는 실외 잔치의 느낌을 관객에게 전한다. 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은 500년 조선왕조 진연(進宴, 궁중의 잔치)의 맥을 잇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궁중잔치 ‘임인진연’(壬寅進宴, 1902, 임인년에 있던 궁중잔치)을 복원하여, 그 첫 모습을 지난 15일 언론에 공개했다. 120년 만에 최초로 재현되는 이번 공연은 ‘임인진연의궤’(임인년 궁중 잔치를 기록한 책), ‘임인진연도병’(임인진연을 묘사한 그림 병풍) 등의 기록유산에 근거했고, 박동우 무대연출가를 중심으로 재현되어, 12월 16일(금)~21(수)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대중에게 선보인다.(예약은 국립국악원 누리집 참조) 1902년 음력 11월 거행된 ‘임인진연’은 고종 즉위 40주년과 51세를 기념하기 위한 궁중잔치로, 어수선한 국내외 정세에도 불구하고 황태자가 5차례 걸쳐 간청한 끝에 성사된 행사이다. 급변하는 개화기 열강속에서 국제적으로는 황실의 위엄을 세우고, 내부적으로는 군신간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보이는 국가적 의례 행사는 자주국가 ‘대한제국’을 대외적으로 표명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기도 했다. 당시의 진연은 남성 신하들과 함께 공식적인 행사를 올리는 ‘외진연’과 황태자, 황태자비, 군부인, 좌·우명부, 종친 등과 함께 한 ‘내진연’ 등이 있었으며, 이번 공연은 예술적 측면이 강한 ‘내진연’(당시 음력 11월 8일, 덕수궁(당시 경운궁)에서 개최)을 무대화하여 재현한 것이다. 객석을 황제의 시선으로 설정하여 연출했고, 음식을 올리는 절차 등을 생략하여 관객이 궁중무용과 궁중음악(아악, 雅樂)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국립국악원 김영운 원장은 공연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궁중예술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정제된 작품으로 황제에게 선보이는 무대입니다. 이제, 이 작품들을 현재의 국민들에게 무대공연 작품으로 공연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120년 전, 자주 국가를 염원했던 대한제국의 찬란한 궁중 문화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소중한 문화유산의 가치와 문화를 통한 화합과 통합의 정신이 널리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이제, ‘임인진연’ 속으로 들어 가보자. 공연은 왕실의 가족 구성원들이 차례로 황제에게 잔을 올리고 축하의 말씀을 전하는 치사(致詞) 과정이 주요 뼈대가 되고, 그 사이 음악과 춤(정재,궁중무용)이 이어지는 과정이다. 절차가 끝나고, 본격적인 악·가·무(樂·歌·舞)가 펼쳐지고, 예필(禮畢, 예식을 마침)의식으로 마무리 된다. 각 순서마다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무대 옆 대형 모니터를 통해 용어나 절차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조선시대 왕실, 주요 행사 내용을 정리한 기록인 '의궤'(儀軌)와 '도병'(圖屛, 그림 병풍) 등의 자세한 1차 문헌자료 기록 덕택에 ‘태극기, 깃발 등의 배치, 공간의 구분, 왕실 가족들의 위치’ 등 실외 잔치는 실내 무대에서 상당히 정밀하게 재현되었다. 절차는 크게 ‘예소(황태자가 고종황제에게 진연개최를 상소)’, ‘황제입장(왕실가족들 입장, 황제 입장은 공연에서 생략)’, 황태자(순종)가 고종황제에게 잔을 올리는 ‘제1작’부터 황태자비, 영친왕, 군부인(의친왕의 부인, 당시 의친왕은 미국유학 중), 좌명부, 우명부, 종친 반수 등이 잔을 올리는(진작) ‘제7작’, 그리고 ‘예필(禮畢, 예식을 마침)’의 과정을 거친다. 각 구성에서는 당대 최고의 궁중음악과 궁중무용을 경험할 수 있다. 역시 의궤와 도병 등에서 언급된 춤과 음악, 예인들에 대한 세부 묘사를 통해 자세한 재현이 가능했다. ‘황제입장’ 순서에서, ‘보허자’, ‘낙양춘’ 등의 음악이, 정재 ‘봉래의’가, 제1작에서 음악 ‘수제천’, ‘해령’, ‘여민락만’과 정재 ‘헌선도’가 선보여졌다. ‘제2작’에서 음악 ‘수룡음’, ‘해령’과 정재 ‘몽금척’이, 제3작에서는 ‘여민락’, ‘해령’, 제4작에서는 ‘세령산’ 등의 음악이 무대를 가득 채웠다. 제6작에서 음악 ‘계면가락도드리’, 정재 ‘향령무’가, 제7작에서 음악 ‘여민락’, 예필에서는 음악 ‘수제천’과 정재 ‘선유락’, 이후 음악 ‘보허자’ 등이 선보여졌다. 이러한 음악과 춤은 궁중무용, 궁중음악으로 우리에게 익숙했지만, 왕실의 위엄과 엄숙함 앞에서 이루어지는 예인들의 선율과 춤사위는 당대 최고의 예술임을 느끼게 했다. 동작은 기품 있고 우아했으며, 춤사위에 생명을 불어넣는 음악은 웅장하고 풍성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숭고한 아름다움에, 예인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화려한 듯 보이지만, 완벽성을 위한 인고의 과정을 감내했음을 추측할 수도 있었다. 또한 잔을 옮기는 신하들의 엄숙한 걸음과 동작은 시종일관 느리지만, 일정한 박자를 가지는 듯 조심스러워, 한 걸음걸음이 예를 갖추는 과정임을 잊지 않게 했다. 웅장한 공간 속에 배치된 소소한 무대 장치들도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왕실 가족들이 앉는 자리를 방석 대신 조명으로 처리하여 관객이 가족들의 자리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고, 공연이 수월하게 진행되도록 했다. 주요 절차에서 전해지는 황제의 잔은 조명장치를 장착하여 진행 흐름의 이해를 도왔다. 투명한 붉은색 천이 사용되는 주렴은 의례와 공연 때마다 내리고 올려지며 무대의 공간 활용을 극대화했다. 당시 진연에서 진행됐던 ‘태극기 앞에서 만세 삼창’에 착안하여, 행사가 열렸던 관명전 건원문을 대신하여 극장(국립국악원 예악당) 정문에 대한제국 태극기를 걸고 그 아래 수문장을 배치하여 입석 전부터 근대라는 시대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선보인 ‘선유락(여성 무용수들이 배를 끌고 배 떠나는 정경을 묘사하는 궁중무용)’은 잔치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모든 주렴이 걷히고, 멀리 있던 악단의 모습도 선명하게 보인다. 엄숙한 분위기는 조금 더 흥이 더해진다. 아마도 이 순간, 왕실 가족들은 조금 더 긴장을 풀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바다와 인간을 이어주는 배, 그리고 그 안과 밖의 인간을 형상화하여 어민의 삶을 노래한 무용이다. 그 화려함과 웅장함은 잔치의 휘날레를 내리기에 충분했다. 왕실의 잔치는 단순한 잔치를 넘어서, 국가적 기원을 담은 음악, 춤과 함께 군신간 서로의 예를 갖추고 유대를 다지며 가족의 안녕은 물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120년 만에 재현된 무대는 원 공연과 우연한 유사성을 갖기도 한다. 1902년의 진연은 역병(콜레라)과 시설문제 등으로 2차례 연기되어 음력 11월로 연기되었다. 올해 공연 역시 같은 임인년 3월 예정이었으나, 코로나와 홍수 등으로 인한 시설문제로 2차례 연기되어 비슷한 시기인 양력 12월에 재현이 이루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연출과 무대미술을 맡은 박동우 연출은 이번 공연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를 겪는 등 어수선한 시기에, 1897년 고종은 ‘광무개혁’을 통해 일본 침략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켜내고자 했습니다. 1902년,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칭경예식(경사를 치르는 의식)으로 근대 국가로서 대한제국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으며, 대외적으로 국가의 단결된 모습과 힘을 과시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며, 공연은 대한제국이라는 시대적 정서와 궁중의식에서 연주된 찬란한 궁중예술의 아름다움을 무대에 재현하고자 했습니다. 전통방식으로 재현된 이번 공연을 통해 많은 관객들이 궁중예술의 멋을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명성황후 시해(1895), 아관파천(1896,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김), 광무개혁(1897) 등 격동의 시기를 거치고 난 몇년 후인 1902년, 황태자의 5번에 걸친 간청 끝에 이루어졌던 ‘임인진연’. 왕족과 당대 최고의 예인들이 수놓았던 그날의 찬란했던 춤, 노래, 연주는 역설적이게도 격동의 시대를 이겨내고 국격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대한제국의 간절함을 담았다. 하지만, 진연에 담은 염원은 냉엄한 국제적 현실을 극복할 수 없었고,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한일합병조약(경술국치)이라는 아픈 역사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묻혔다. 120년이 흐른 지금, 국가의 주인은 황제(왕)이 아닌 국민이 되었고, 우리는 이 땅 한반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으며, 문화와 국력은 성장하고 있다. 2022년 현재에 재현되는 그날의 진연은 단순한 시간여행을 넘어서, 시대를 읽는 거울이자 교훈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날의 진연을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고, 어떤 의미로 재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할지는 현재 우리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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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최고의 공연, '임인진연' 알고보기15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프레스 리허설에서 '임인진연' 모습이 120년 만에 드러났다. 코로나19와 홍수 피해로 두 번이나 연기되었다. 그래서 연말 특집공연으로 더욱 기대가 컸다. 15시에 시작되어 100여 분에 걸친 완벽한 시연이 있었다. 고종 황제 당시 진연(進宴, 궁중잔치)은 공식적 행사를 올린 ‘외진연’과 ‘내진연’으로 나뉘어 행해졌다. 이번 공연에서는 예술성이 강한 ‘내진연’을 축소하여 무대 공연으로 재구성했다. 1902년 내진연을 재현하는 것은 이번이 최초다. 막이 내린 후에는 김영운 원장과 박동우 총연출과 기자들의 질의 시간도 있었다. 이번 공연은 재현에 따른 학술적 접근이나 무대의 정밀함이나 출연자들의 전문성에서 국립국악원만이 해낼 수 있는 공연이란 점에서 최고의 공연으로 평가 받을만하다. 시연과 질의를 통해 드러난 이해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 몇 가지가 있다. Q. 왜 오늘날 '임인진연' 행사를 공연무대로 재현했나? A. 대한제국의 1902년은 120년 전 ‘임인년’이다. 120년이란 정주년을 맞은 것에 주목하여 재현의 당위성에 무게를 실었다. 500년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기를 포함한 마지막 궁중의례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궁중잔치'라는 점에서 학술적으로나 국악사나 공연사 측면에서 재현(Representation)의 의미가 있다. Q.1902년 임인년 당시 내세운 주제의식 또는 목적은 무엇이었나? A. 황태자의 다섯 차례에 걸친 간청은 고종황제의 즉위 40주년과 나이 60을 바라보는 망륙(望六)인 51세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제1명분이다. 제2명분은 급변하는 개화기에 국제적으로 황실의 위엄을 세우고 내부적으로는 군신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확립하려는 목적의 대외적 과시이다. 무대 중앙에는 대한제국 태극기가 게시된 점이 이를 시사한다. Q. 당시 어좌(御座)에 앉아서 임인진연을 바라보는 고종황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A.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일본에 박탈당한 '을사늑약'을 3년 앞둔 시점이었다. 고종은 나라를 지키기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전신·전화·전등·전차 4대 근대시설을 일본보다 3년 먼저 도입했다. 아시아에서는 첫번째로 4대 근대시설을 받아들인 셈이다. 그리고 해외열강 11개국을 초청, 즉위 40주년 기념칭경예식'을 준비했다. 자주국가 대한제국의 위상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콜레라 유행, 행사 개최장소인 중화전 완공 지연으로 잔치가 2차례 연기됐다. 그 여파로 국제행사는 치르지 못하고, 국내 행사인 '진연'만 행해졌다. 망국의 시기가 엄습하는 가운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절치부심에 고심한 고종황제의 절절함이 느껴진다. Q. 당시의 실제 궁중잔치와 이번 재창조 된 무대화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A. 당시의 진연은 크게 남성 신하들과 함께 공식적인 행사를 올린 ‘외진연’과 황태자와 황태자비, 군부인, 좌․우명부, 종친 등과 함께한 ‘내진연’으로 나뉘어 행해졌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예술적인 측면이 강한 ‘내진연’을 무대 공연으로 재구성하였다. 주목되는 변화는 황제의 어좌로 설정해 관객이 황제의 시선에서 진연을 마주할 수 있도록 시야를 설정, 진행한다는 점이다. Q. 임인진연은 어떤 사료를 근거로 삼아 재현했나? A.당시 국가를 상징하는 황실의 진연이 기록된 ‘진연의궤’와 ‘임인진연도병’(圖屏, 덕수궁 관명전 그린 병풍)’ 등 당대의 기록 유산에 근거해 전통 방식으로 되살렸다. 박연출은 "공연을 준비하면서 놀란 점은 당시의 기록이다. '임인진연의궤'행사 준비에 필요한 모든 내용들이 글과 그림으로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의 어떠한 공연팀도 이 정도로 완벽한 기록을 남기지는 못한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록화 ‘임인진연도병’에는 당시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고 전했다. Q.당시 야외 행사인 덕수궁 광면전을 어떻게 무대화 했나? A.주렴(朱簾, 붉은 대나무발)과 사방으로 둘러쳐진 황색 휘장막 등을 활용한 무대장치는 황제의 공간과 무용, 음악의 공간을 구분하여 실제 진연의 사실감과 생생함을 높였다. Q. 당시 임인진연 의례에서 연희되었던 음악과 무용에 대해서는? 몇명의 악공이 어떤 악기로 연주했나? 연주의 규모는? A. 첫곡 강락지곡에서 마지막 곡 '태평춘지곡'까지 총 65곡이 연주되고 불려졌다. 악공(악사)는 총 113명이고, 악기는 편종,편경 등 30종이다. 277명의 무용수가 20개 종목 무용을 선보였다. 봉래의, 헌선도, 몽금척, 연백복지무, 수연장, 제수창, 무고, 가인전목단,경풍도, 사선무, 춘앵전, 학무, 연화대무, 향령무, 육화대, 만수무, 장생보연지무, 포구락, 선유락, 검기무이다. 아침부터 해가 질때까지 음식을 올렸던 절차까지 합하면 9시간 이상 연희가 이어졌을 것이다. Q. 재현의 중심, 공연화한 순서와 구체적 공연 상황은 무엇인가? A. 중심적인 의례는 예법대로 황제에게 일곱 차례 술잔을 올린다. 이 과정에 국립국악원 정악단과 무용단이 궁중무용 29종목 중 5개 종목 봉래의, 헌선도, 몽금척, 향령무, 선유락이 선보이고, 궁중음악으로는 보허자, 낙양춘, 해령, 본령,수제천, 헌천수 등을 감상할 수 있다. 황제의 장수와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무대를 꾸민다. Q. 당시 행사에서 이번에 전적으로 생략된 부분은? A. 김영운 원장은 "당시 실제 행사는 오전 9시 쯤 시작하여 일몰까지였다. 또한 잔치임으로 음식을 올리는 절차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연 예술로 접할 수 있는 작품성에 주목하여 재현을 목적으로 과감하게 생략하였다."라고 말했다. 박 연출은 "이번 공연은 1902년 의례와 비교했을 때 규모를 6분지 1로 축소했다.당시 상차림 음식을 담은 총 그릇수는 18,132개다. 음식을 올리는 절차를 생략했고, 등장하는 춤은 29개 종목에서 5종목을 선정해서 선보였다. 공연 시간은 100분이 소요된다. 진연의궤와 임인진연도병 등 당대 기록유산을 기본 텍스트로 하여 재현하는 데 중점을 뒀다. 당시 행사 진행요원이 493명, 무용수가 277명이나 됐던 규모에는 못 미치지만 최대한 그때 분위기와 정서를 살리려고 했다"고 답했다. Q. 특히 이번 무대와 객석의 시선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객석을 황제의 어좌로 설정해서 관객이 황제의 시선에서 진연을 본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이에 대한 연출가의 의도는? A. 박동우 연출은 "대한제국이 황제의 국가였다면 대한민국은 국민의 국가다. 그래서 관객의 시선이 황제의 자리에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고 말했다. 객석을 황제가 앉는 ‘어좌’로 설정한 것이다. 황제의 시선에서 진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무대를 꾸몄다. Q. 마지작 휘날레를 장식한 정재 '선유락'은 어떤 작품인가? A. 채선(彩船)을 설치하고 여령들이 나눠 서서 화려하게 장식한 배를 띄우라는 영이 들리면 어부의 심정을 담은 어부사를 노래하며 밧줄을 끌며 배를 둘러서서 춤을 춘다. 신라의 뱃놀이에 기원한 조선시대 정재이다. 지방 교방의 춤이 정조대에 궁중예술로 유입된 것으로, 궁중 큰잔치에 빠질 수 없는 레파토리로 군무의 화려한 춤사위가 원을 그리며 돈다. 도입부분에서 취타대가 나와서 시작을 알린다. 반주음악은 취타이며 악기는 징·북·호적·자바라·나발로 편성되고 어부사 사설은 다음과 같다. 머리 센 어부가 갯가에 살면서 물가에 사는 게 산에 사는 것보다 낫다 하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아침에 빠진 물이 저녁 되니 밀려오네 Q.기자 간담회,답변의 결론은? A.김영운 원장은 "120년 전 자주국가를 염원했던 대한제국의 찬란한 궁중의례의 진면목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소중한 문화유산의 가치와 문화를 통한 화합의 정신이 널리 전해지길 바란다.”고 했다. 박동우 연출은 "대한제국이라는 시대적 정서와 궁중예술의 아름다움을 전통 방식으로 무대에 재현하고자 했다.”고 밝히며 "황제의 시선으로 구성한 이번 공연을 통해 많은 관객들이 궁중예술의 멋을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춤과 노래, 의례가 삼위일체 되는 공연이다라"고 밝혔다. Q. 이번 공연 티켓은 거의 매진된 상태이다. 국립국악원에서나 할 수 있는 있는 이 작품을 다시 한번 더 볼 수 있나? A. 김영운 원장은 "가능한 한 내년에도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려서 더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덧붙인다면 임인진연 무대에서 궁중의례과 함께 연희자들의 화려한 한복 의상의 선과 색깔이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잠시 정지되어 있는 그 모습도 찬란한 빛이 발했다. 오늘 우리는 자랑스런 '위대한 유산'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내년에도 다시 한번 만나기를 고대한다. 국립국악원 송년공연 ‘임인진연’은 8세 이상 관람 가능하며,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12월 16일(금)부터 21일(수)까지 주중에는 오후 7시 30분, 주말에는 오후 3시에 진행한다. 공연 예매는 국립국악원 홈페이지(www.gugak.go.kr)와 전화(02-580-3300)로 가능하다. R석 5만원, S석 3만원, A석 2만원, B석 1만원 (문의 02-580-3300, 19일(월)은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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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로 연기된 국립국악원 '임인진연', 16일 개막1902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잔치가 120년 만에 최초로 무대에 오른다.국립국악원은 오는 12월16일부터 21일까지 예악당에서 송년공연으로 '임인진연'을 공연한다. 당초 이 공연은 지난 8월 선보일 예정이었으나 폭우로 인해 공연장 일부가 침수되며 연말로 연기했다.국립국악원은 올해 임인년을 맞아 당시 국가를 상징하는 황실의 진연이 기록된 '의궤'와 '도병(그림 병풍)' 등 당대의 기록 유산에 근거해 궁중예술을 무대에 되살린다.1902년 음력 11월8일에 거행된 '임인진연'은 고종의 즉위 40주년과 나이 60세를 바라보는 망륙(望六)인 51세를 기념하기 위한 잔치다. 황태자가 다섯 차례에 걸쳐 간청한 끝에 성사된 행사였다. 500년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기를 포함한 마지막 궁중잔치로 기록돼 있다. '임인진연'은 급변하는 개화기에 황실의 위엄을 세우고, 군신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보여 자주 국가 '대한제국'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당시 진연은 남성 신하들과 함께 공식적인 행사를 올린 '외진연'과 황태자와 황태자비, 군부인, 좌·우명부, 종친 등과 함께한 '내진연'으로 나뉘어 행해졌다. 이번 공연에선 예술적인 측면이 강한 '내진연'을 되살린다.전통 방식으로 꾸며진 공간에서 국립국악원 정악단과 무용단은 황제에게 일곱 차례 술잔을 올린 예법에 맞춰 공연을 선보인다. 궁중무용으로는 봉래의, 헌선도, 몽금척, 향령무, 선유락, 궁중음악으로는 보허자, 낙양춘, 해령, 본령, 수제천, 헌천수 등으로 황제의 장수와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화려한 궁중예술을 펼친다. 특히 이번 무대는 객석을 황제의 어좌로 설정했다. 관객이 황제의 시선에서 진연을 마주할 수 있게 했고, 음악과 무용에 집중하도록 지나치게 복잡하고 긴 의례와 음식을 올리는 절차 등은 생략했다.공연은 8세 이상 관람할 수 있고, 예매는 국립국악원 홈페이지와 전화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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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마지막 궁중잔치...120년 만에 '임인진연' 공연대한제국의 마지막 궁중 잔치가 120년 만에 처음으로 공연으로 재현된다. 국립국악원은 1902년 거행된 ‘임인진연’을 오는 8월 12∼14일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올린다고 12일 밝혔다.1902년 임인년. 대한제국 황실에서 고종의 즉위 40주년과 나이 60을 바라보는 망륙(望六)인 51세를 기념하기 위한 잔치가 열렸다.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을 불과 3년 앞둔 시점이었다. 500년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기를 포함한 마지막 궁중잔치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잔치가 120년 만에 최초로 공연 무대에 오른다. 국립국악원은 다음달 12~14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임인진연'을 선보인다. 자주 국가를 염원했던 1902년 대한제국의 '임인진연'을 중심으로 찬란한 궁중 예술의 가치와 의미를 소개하기 위한 공연이다.'임인진연'은 급변하는 개화기에 국제적으로는 황실의 위엄을 세우고 내부적으로는 군신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보이는 국가적 의례를 선보임으로써 자주 국가 '대한제국'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당시의 진연은 크게 남성 신하들과 함께 공식적인 행사를 올린 '외진연'과 황태자와 황태자비, 군부인, 좌·우명부, 종친 등과 함께한 '내진연'으로 나뉘어 행해졌다. 이번 공연에서는 예술적인 측면이 강한 '내진연'을 120년 만에 무대 공연으로 되살린다.김영운 국립국악원장은 12일 덕수궁 정관헌에서 열린 임인진연 제작발표회에서 "임인진연이 있던 1902년은 열강들이 다툼이 치열했던 시기였다"며 "왕가의 위엄을 일으켜세우고 문화를 대내·외에 알리기 위한 의도가 담긴 연회"라고 설명했다. 김 원장은 "당시 세자가 5차례 진연을 간청했는데 황제는 문무백관이 5번째 주청을 올렸을 때 마지못해 허락했다"며 "국내외적 어려운 상황이 이유였다"고 했다. 그는 "궁중연회는 그 시대의 음악·무용 등 가장 세련된 작품들이 모이는 곳"이라며 "두 갑자가 지나 임인진연을 되살릴 최적의 기관이 국립국악원이고,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했다.당시 진연은 크게 남성 신하들과 함께 공식적 행사를 올린 ‘외진연’과 황태자, 황태자비, 좌우명부, 종친 등이 함께한 일종의 궁중 내부 행사인 ‘내진연’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이번 공연은 예술적 측면이 강한 내진연을 80분짜리 무대 공연으로 되살린다.무대 미술계를 대표하는 박동우 디자이너가 연출을 맡아 황실의 진연(궁중에서 베푸는 잔치)이 기록된 '의궤'와 '도병(그림 병풍)' 등 당대의 기록 유산에 근거해 당시의 진연을 최대한 사실과 가깝게 재현했다. 특히 주렴(붉은 대나무발)과 사방으로 둘러쳐진 황색 휘장막 등을 활용해 황제의 공간과 무용, 음악의 공간을 구분해 실제 진연의 사실감과 생생함을 높일 예정이다.박 연출은 "평소 무대미술가로 활동했는데 이번에는 무대미술 및 연출로 참여하게 됐다"며 "공간적으로, 미술적으로 공연 취지에 맞게 잘 진행해달라는 의도로 저에게 맡겨주신 것 같다"고 했다. 이어 "극장에 들어오면 황제의 시선으로 공연을 보게 된다. 기존 공연들의 시선을 반대로 바꿔 황제의 용상이 객석에 있는 것처럼 공간을 배치했다"고 설명했다. 박 연출은 "120년만에 하는 공연이기 때문에 가급적 재현에 중점을 뒀다"며 "창작요소를 가미할 수도 있겠지만 가급적 도병, 의궤 등 나오는 기록 잘 살펴서 재현했다"고 설명했다. 또 "1904년 덕수궁에 큰 불이 났고 임인진연이 있던 관명전도 불탔다"며 "그런데 의궤와 도병이 살아남았다. 진연 의궤에 상에 올린 떡의 개수와 높이, 종류까지 정리돼 완벽하게 남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의궤와 도병을 바탕으로 공연을 재연할 수 있었다. 기록원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보낸다"고 했다.그는 "나라가 망하기 직전인데 연회나 즐겼느냐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며 "하지만 이 시기는 국가 뿐 아니라 고종의 목숨도 위험한 시기였고, 실제로 고종의 커피에 독약을 탄 사건도 있었다"고 했다. 이어 "장차 순종이 될 황태자는 그런 위기 상황을 정면돌파해 대한제국의 건재를 알리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전통 방식으로 꾸며진 공간에서 선보이는 국립국악원 정악단과 무용단의 공연 구성은 황제에게 일곱 차례 술잔을 올린 예법에 맞춰 선보인다. 궁중무용으로는 봉래의, 헌선도, 몽금척, 가인전목단, 향령무, 선유락을 선보인다.국립국악원 정악단은 궁중음악으로는 보허자, 낙양춘, 해령, 본령, 수제천, 헌천수 등 황제의 장수와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한 화려하고도 품격 있는 궁중 예술의 정수로 무대를 꾸민다.이상원 정악단 예술감독은 "음악은 진연 진행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진연을 이끌어가는 과정이 음악이기 때문"이라며 "백성과 함께 나라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이 오롯이 관객에게 전달되길 바란다"고 했다. 유정숙 무용단 예술감독은 "모든 작품들이 이 나라의 태평성대와 황제의 무병장수 기원하는 내용"이라며 "당시의 모습을 원형 그대로 보여주는 뜻 깊은 공연이 될 것"이라고 했다.국립국악원 대표공연 '임인진연'은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다음달 12~14일 공연된다. 주중에는 오후 7시 30분, 주말에는 오후 3시에 공연이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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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마지막 궁중잔치 120년 만에 '임인진연' 공연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잔치가 120년 만에 최초로 공연 무대에 오른다. 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은 오는 8월 12일(금)부터 14일(일)까지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대표공연 ‘임인진연’(연출 박동우, 출연 국립국악원 정악단‧무용단)을 선보인다. 국립국악원은 올해 임인년을 맞이해 자주 국가를 염원했던 1902년 대한제국의 ‘임인진연’을 중심으로 찬란한 궁중예술의 가치와 의미를 소개하기 위해 이번 공연을 마련했다. 1902년 임인년. 대한제국 황실에서 고종의 즉위 40주년과 나이 60을 바라보는 망륙(望六)인 51세를 기념하기 위한 잔치가 열렸다.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을 불과 3년 앞둔 시점이었다. 500년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기를 포함한 마지막 궁중잔치였다. 당시 국가를 상징하는 황실의 진연(進宴, 궁중에서 베푸는 잔치)이 기록된 ‘의궤’와 ‘도병(圖屏, 그림 병풍)’ 등 당대의 기록 유산에 근거해 국립국악원은 궁중예술을 전통 방식으로 무대에 되살린다. 1902년 음력 11월 8일의 궁중잔치 ‘임인진연’은 대한제국과 조선왕조 500년의 시간이 응축된 궁중예술의 결정판이다. 1902년 음력 11월 8일에 거행된 ‘임인진연’은 고종의 즉위 40주년과 나이 60을 바라보는 망륙(望六)인 51세를 기념하기 위한 잔치로, 황태자가 다섯 차례에 걸쳐 간청한 끝에 성사된 행사였으며, 500년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기를 포함한 마지막 궁중잔치로 기록돼 있다. ‘임인진연’은 급변하는 개화기에 국제적으로는 황실의 위엄을 세우고 내부적으로는 군신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보이는 국가적 의례를 선보임으로써 자주 국가 ‘대한제국’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당시의 진연은 크게 남성 신하들과 함께 공식적인 행사를 올린 ‘외진연’과 황태자와 황태자비, 군부인, 좌․우명부, 종친 등과 함께한 ‘내진연’으로 나뉘어 행해졌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예술적인 측면이 강한 ‘내진연’을 120년 만에 무대 공연으로 되살린다. 1902년의 내진연을 재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의궤와 도병에 기록된 전통 방식 그대로 120년 만에 되살리는 ‘임인진연’ 국립국악원은 이번 공연을 위해 당시 진연의 상세 내역이 기록된 ‘진연의궤’와 ‘임인진연도병’ 등 기록 유산을 바탕으로 되살린다. 연출과 무대 디자인은 홍익대학교 박동우 교수가 참여해 내진연이 거행되었던 덕수궁 관명전을 도병에 남겨진 모습으로 무대 위에 재현한다. 특히 주렴(朱簾, 붉은 대나무발)과 사방으로 둘러쳐진 황색 휘장막 등을 활용해 황제의 공간과 무용, 음악의 공간을 구분해 실제 진연의 사실감과 생생함을 높일 예정이다. 전통 방식으로 꾸며진 공간에서 선보이는 국립국악원 정악단과 무용단의 공연 구성은 황제에게 일곱 차례 술잔을 올린 예법에 맞춰 선보인다. 궁중무용으로는 봉래의, 헌선도, 몽금척, 가인전목단, 향령무, 선유락이, 궁중음악으로는 보허자, 낙양춘, 해령, 본령, 수제천, 헌천수 등 황제의 장수와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한 화려하고도 품격 있는 궁중예술의 정수로 무대를 꾸민다. 황제의 시선에서 진연을 마주하는 특별한 순간 궁중예술을 바탕으로 한 소중한 문화유산을 통해 국민과 화합 기원해 특별히 이번 무대는 극장에서 공연으로 선보이는 만큼 객석을 황제의 어좌로 설정해 관객이 황제의 시선에서 진연을 마주할 수 있도록 시야를 설정했다. 극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궁에서는 볼 수 없는 시선이다. 또한 음악과 무용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나치게 복잡하고 긴 의례와 음식을 올리는 절차 등은 과감히 생략해 진연을 공연 예술로 접할 수 있도록 꾸몄다. 박동우 연출은 "대한제국이라는 시대적 정서와 궁중예술의 아름다움을 전통 방식으로 무대에 재현하고자 했다.”고 밝히며 "황제의 시선으로 구성한 이번 공연을 통해 많은 관객들이 궁중예술의 멋을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김영운 국립국악원장은 "120년 전 자주 국가를 염원했던 대한제국의 찬란한 궁중문화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소중한 문화유산의 가치와 문화를 통한 화합의 정신이 널리 전해지길 바란다.”고 언급했다. 국립국악원 대표공연 ‘임인진연’은 8세 이상 관람 가능하며,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8월 12일(금)부터 14일(일)까지 주중에는 오후 7시 30분, 주말에는 오후 3시에 진행한다. 공연 예매는 국립국악원 홈페이지(www.gugak.go.kr)과 전화(02-580-3300)로 가능하다. S석 5만원, A석 3만원, B석 2만원 (문의 02-58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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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더 보인다, ‘특별한 이야기’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은 10월 9일(토)부터 11월 13일(토)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30분 국악박물관 국악뜰에서 특별전시와 연계한 특강을 개최한다. 이번 특별전시 연계특강은 지난 9월 11일(토)에 개막한 국악박물관 ‘미공개 소장품전: 21인의 기증 컬렉션’과 몰입형 영상체험 콘텐츠 ‘진연(進宴)_120년의 시간을 잇다’를 보다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마련됐다. 10월 9일(토)에는 국립국악원 서인화 국악연구실장이 ‘전시로 만나는 국립국악원 70년, 국악 70년’이라는 주제로 개원 70주년을 맞이해 국립국악원에 기증한 기증품을 중심으로 국악의 역사와 흐름을 소개하고, 몰입형 영상체험 콘텐츠에 등장하는 궁중무용 ‘선유락’의 창사(唱詞, 궁중무용을 선보일 때 부르는 가사)인 ‘어부사’를 배워보는 시간도 가질 계획이다. 이후 10월 한 달간은 특별전시 ‘미공개 소장품전: 21인의 기증 컬렉션’에 대한 주제별 강의가 이어진다. 16일(토)에는 경기도무형문화재 제31호 ‘경기소리’ 예능보유자인 임정란 명창의 ‘임정란의 삶과 경기민요의 전승’, 23일(토)에는 전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예능보유자인 조재선 명인의 ‘녹성 김성진과 근현대궁중음악’을, 30일(토)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보유자인 조순자 명인의 ‘만당 이혜구의 낙양춘과 이수대엽’을 주제로 전시에 얽힌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11월 6일(토)에는 국립국악원 무용단 김혜자 안무자가 몰입형 영상체험 콘텐츠 ‘진연(進宴)_120년의 시간을 잇다’의 소재가 된 ‘임인진연도병(壬寅進宴圖屛) 속 정재(呈才)’라는 주제로 국악박물관 대표 소장품과 연계한 특강을 하며 체험 시간을 갖는다. 마지막 11월 13일(토)에는 국악박물관 특별전 ‘미공개 소장품전: 21인의 기증자 컬렉션’의 전시기획자인 노예리 학예연구사가 ‘미공개 소장품전, 그 이면(裏面)의 이야기’로 마무리할 예정이다. 국립국악원 서인화 국악연구실장은 "이번 전시 연계특강을 통해 관람객들이 전시 중인 ‘미공개 소장품전: 21인의 기증자 컬렉션’과 상영 중인 몰입형 영상체험 콘텐츠 ‘진연(진연)_120년의 시간을 잇다’를 더욱 재미있고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보였다. 이번 전시 연계특강은 2021년 10월 9일(토)~11월 13일(토)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30분 국악박물관 국악뜰에서 진행하며, 국립국악원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을 신청하면 누구나 무료로 참여가 가능하다. 월요일은 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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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 맞이 ‘동궁-세자의 하루’국립국악원이 여름방학을 맞이해 가족 모두 쉽고 재미있게 궁중무용을 즐길 수 있는기획공연을 선보인다. 오는 7월 30일(금)부터 8월 1일(일)까지 기획공연 ‘동궁-세자의 하루’를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올린다. ‘동궁-세자의 하루’는 국립국악원이 아니면 접하기 어려운 궁중무용을 관객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소개하기 위해 기획한 공연이다. 작년 5월 초연 당시 전석 매진되는 등 많은 호응을 얻어 올해 여름방학을 맞이해 재공연으로 선보인다. ‘애민’의 따듯한 마음 담아 뛰어난 예술적 재능으로 궁중무용의 뿌리 내린 ‘효명세자’ 조선시대 궁중무용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효명세자’는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효명세자는 짧은 대리청정 기간 동안 크고 작은 궁중 연향을 주최하며 새로운 궁중무용과 시를 만들어 선보였는데, 이를 통해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고 백성과 함께예술을 나누고자 했던 ‘애민(愛民)’의 마음을 드러냈다. 대본을 구성한 한아름 작가는 ‘효명세자’를중심에 세워 세자 시절 머물던 ‘동궁’에서 일어난 일상의 이야기 안에 9가지의 궁중무용과 이를 바탕으로 한 창작 무용 등 10가지 춤을 배치했다. 세자로서 마주할 수밖에 없던 고단한 일상 속 예술과 함께하는 효명의 모습을 통해 예술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를 극적으로 표현했다. 이번 공연에서는 봄날의 꾀꼬리가 노는 것을 보고 만든 ‘춘앵전’, 나비의 날갯짓을 표현한 ‘박접무’ 등 효명의 작품을 비롯해 ‘처용무’, ‘포구락’, ‘학무’, ‘영지무’, ‘무고’, ‘선유락’, ‘향발무’ 등 9가지 궁중무용과 이를 토대로백성과 후손들이 잇고 만들어 갈 창작무용을 추가해 총 10개의 무용작품이 무대를수놓는다. 연극, 발레, 창극,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 무대 넘나드는 서재형 연출 ․ 한아름 작가와 국립국악원 소속 4개 예술단이 함께해 국악의 깊이와 매력 전해 이번 공연을 펼쳐낼 주요 제작진도 화려하다. 연극 ‘리차드 3세’, ‘오이디푸스’,국립발레단 ‘호이랑’의 연출을 맡은 서재형 연출가와 뮤지컬 ‘영웅’, 창극 ‘메디아’의 대본을 맡은 한아름 작가가 협력해 완성도를 높였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국립국악원 4개 예술단이 모두 참여해 무대를 꾸민다.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4개 예술단체의 합동 무대다. 궁중무용은 국립국악원 무용단이 맡아 궁중무용 고유의 멋을 깊이 있게 전하고, 창작악단의 완성도 높은 연주는 공연의 전개를 더욱 극적으로 표현한다. 극의 진행에 중심이 되는 ‘효명세자’ 역에는 정악단의 가객 박진희가 참여해 정가 창법으로 노래하고 ‘도창’ 역에는 객원 소리꾼 류가양이 맡아 남도소리 창법을 들려준다. 궁녀 역에는 민속악단의 경기민요 소리꾼 채수현과 김세윤이 함께해 한 무대에서 정가와 판소리, 민요 등 다채로운 전통 성악을 들려줄 예정이다. 서재형 연출은 "효명세자는 아마도 그 시절 궁중무용이라는 씨앗을 심으면서 이 시대의 후손들이 꽃으로 피우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예술을 통해 뜻을 펼치고자 했던 효명의 정신처럼, 우리 시대의 예술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또 하나의 씨앗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국립국악원 기획공연 ‘동궁-세자의 하루’는 오는 7월 30일(금)부터 8월 1일(일)까지 주중 오후 7시 30분, 주말 오후 3시,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선보이며 국립국악원 홈페이지(www.gugak.go.kr)를 통해 예매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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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진연(夜進宴)’, 119년 전 궁중잔치로 떠나다국립국악원이 개원 70주년을 기념해 대표 공연으로 119년 전 궁중잔치로 벌어진 ‘야진연(夜進宴)’을 재현한다. 국립국악원은 1902년 4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기로소(耆老所)' 입소를 축하했던 진연(進宴,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궁에서 베푸는 잔치) 중 밤에 열었던 잔치 ‘야진연(夜進宴)’을 재해석하여 오는 4월 9일부터 14일까지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올린다. '기로소'란 조선시대 조정 원로들의 예우를 위해 설치한 기구로서 1902년 4월, 고종의 입소를 축하하기 위해 '진연'이 벌어졌다. 황태자와 백관들이 황제에게 ‘외진연’을 올리고, 다음날엔 왕실 가족과 친인척 및 명부가 참여해 ‘내진연’을, 그리고 그날 밤에는 황태자가 황제에게 ‘야진연’을 올렸다. 8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린 프레스 리허설에서 조수현 감독은 "이번 공연이 태자가 고종을 기로소에 올려보내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아버지가 올라간 계단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나는 수미상관 구조로 진행된다."라며 ”관객의 눈높이에 맞게 고종과 황태자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재해석하여 드라마틱하게 풀어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통의 원형은 최대한 살리면서 무대 위 표현 기법은 첨단기술을 접목시켰다.”라며 "LED 스크린으로 무대를 둘러싸 ‘기로소’를 무릉도원의 세계로 표현하고, 진연의 현장을 환상적인 이미지로 펼쳐내 공연에 생동감을 주려했다.”고 강조했다. 이번 공연을 재현하는 데 바탕이 된 것은 국립국악원이 소장한 ‘임인진연도병(壬寅進宴圖屛)’으로 조선 왕실 잔치에 어떤 종목의 궁중무용과 음악들이 연행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도병(圖屛)은 국가 행사의 경과를 그림으로 기록한 병풍으로 ‘임인진연도병’은 전체 10폭으로 구성돼 있으며 이중 8폭에 ‘야진연’의 모습이 담겨있다. 제작지원을 담당한 서인화 국악연구실장은 "개원 70주년을 맞아 국립국악원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소장 유물인 ‘임인진연도병’을 활용한 공연을 선보이고자 했다. ”라며 "이번 공연에는 1951년 4월 10일,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위기 속에서 피난지 부산에서 개원한 국립국악원이 지켜온 역사적 가치가 담겨 있다.”고 강조하였다. 공연은 임금의 덕이 높아 상제께서 장수로 보답하여 창성하게 한다는 내용의 구호(口號)를 가진 ‘제수창’을 시작으로 백성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고자 했던 ‘여민락’과 하늘처럼 영원한 생명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수제천’, 새롭고 힘찬 발걸음의 시작을 알리는 ‘대취타’ 에 이어 윤선도의 ‘어부사’를 부르며 배 주위를 둘러서서 춤을 추는 ‘선유락’으로 이어져 궁중예술의 백미를 관객들에게 전할 예정이다. 국립국악원 관계자는 "어둠을 밝히며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120여 년 전의 ‘야진연’을 통해 2021년 관객들의 마음속에 온화한 기운의 희망과 위로가 전해졌으면 한다.”고 밝히며 "어려운 역사 속에서도 묵묵히 버텨온 찬란한 전통 예술이 전하는 깊은 울림과 감동을 관객과 함께 나누길 바란다.”고 언급했다. 국립국악원 개원 70주년 기념 공연 ‘야진연’은 오는 4월 9일(금)부터 14일(목)까지 주중 저녁 7시 30분, 주말 오후 3시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선보이며 국립국악원 누리집(www.gugak.go.kr)을 통해 예매할 수 있다. S석 5만원, A석 3만원, B석 2만원. 12일(월)은 휴관. (문의 02-58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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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개원 70주년 기념하는 대표공연 ‘야진연’국립국악원이 개원 70주년을 기념해 대표공연으로 119년 전 왕실의 잔치를 무대에 올린다. 국립국악원은 1902년 4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기로소(耆老所, 조선시대 조정 원로들의 예우를 위해 설치한 기구) 입소를 축하했던 진연(進宴,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궁에서 베푸는 잔치)중 밤에 열었던 잔치 ‘야진연(夜進宴)’을 재해석하여 오는 4월 9일부터 14일까지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올린다. 1902년 고종의 기로소 입소를 축하하기 위해 밤에 올린 궁중 잔치 ‘야진연’ 희망과 위로를 담은 판타지로 풀어내다 1902년 기소로 입소의 축하 진연으로는 황태자와 백관들이 황제에게 ‘외진연’을 올리고, 다음날엔 왕실 가족과 친인척 및 명부가 참여해 ‘내진연’을, 그리고 그날 밤에는 황태자가 황제에게 ‘야진연’을 올렸다. 당시의 진연은 국립국악원이 소장한 ‘임인진연도병’ 에 담겨 조선 왕실 잔치에 어떤 종목의 궁중무용과 음악들이 연행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 이번 공연의 재현에 바탕이 되었다. 전체 10폭의 그림 중 8폭에는 밤에 올려진 잔치였던 ‘야진연’의 모습이 담겨있다.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 아래 아름다운 궁 안에서 달빛과 별빛으로 물든 왕실의 잔치를 12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판타지로 풀어냈다. 어둠 속 궁중 예술로 환히 밝히며 새로운 시작 알렸던 ‘야진연’ 개원 70주년 맞이해 새출발을 알리는 국립국악원의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 국립국악원이 개원 70주년을 맞이해 선보이는 이번 공연은 신라시대 음성서 이후 1,400여 년의 맥을 이어온 국립 음악기관으로서 흔들림 없이 지켜온 찬란한 궁중 예술을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위기 속에서 1951년 4월 10일, 피난지 부산에서 전통 음악의 전승을 이어가고자 했던 국립국악원 개원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살아 숨쉬는 역사이기도 하다. 이번 ‘야진연’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함녕전에서 저녁 잔치로 거행되었던 진연 중 의례를 제외하고 음악과 춤을 중심으로 하는 무대공연으로 재창작 되었다. 본래 의례를 중심으로 연주와 궁중무용이 진행되었으나, 12종목의 궁중무용은 제수창, 장생보연지무, 쌍춘앵전, 헌선도, 학연화대무, 선유락 등 6종목으로 축소하고 여기에 정동방곡을 시작으로 여민락, 수제천, 해령 등 궁중음악의 정수를 담았다. 임금의 덕이 높아 상제께서 장수로 보답하여 창성하게 한다는 내용의 구호(口號)를 가진 ‘제수창’을 시작으로 백성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고자 했던 ‘여민락’과 하늘처럼 영원한 생명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수제천’, 새롭고 힘찬 발걸음의 시작을 알리는 ‘대취타’ 에 이어 윤선도의 ‘어부사’를 부르며 배 주위를 둘러서서 춤을 추는 ‘선유락’으로 이어져 궁중예술의 백미를 관객들에게 전할 예정이다. 또한, 이번 공연은 무대미술과 무대 영상디자인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조수현 감독이 맡은 첫 연출작으로 전통의 원형은 최대한 살리면서 무대 위 표현 기법은 첨단기술을 접목시켰다. 조수현 연출은 LED 스크린으로 무대를 둘러싸 ‘기로소’를 무릉도원의 세계로 표현하고, 진연의 현장을 환상적인 이미지로 펼쳐내 공연에 생동감을 더할 예정이다. 국립국악원 관계자는 "어둠을 밝히며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120여 년 전의 ‘야진연’을 통해 2021년 관객들의 마음속에 온화한 기운의 희망과 위로가 전해졌으면 한다.”고 밝히며 "어려운 역사 속에서도 묵묵히 버텨온 찬란한 전통 예술이 전하는 깊은 울림과 감동을 관객과 함께 나누길 바란다.”고 언급했다. 국립국악원은 부대 이벤트로 칠순을 맞이한 1952년생 관객을 대상으로 1인 2매 70% 할인 혜택과 S석 예매자에게 전통 등 DIY 키트 기념품을 증정한다. 국립국악원 개원 70주년 기념 공연 ‘야진연’은 오는 4월 9일(금)부터 14일(목)까지 주중 저녁 7시 30분, 주말 오후 3시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선보이며 국립국악원 누리집(www.gugak.go.kr)을 통해 예매할 수 있다. S석 5만원, A석 3만원, B석 2만원. 12일(월)은 휴관. (문의 02-58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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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용어 영문 표준 번역 시안국악용어 영문 표준 번역 시안 목록 순번 범주 국악용어 영문 표준 번역 시안 1 악기 가야금 Gayageum Zither 2 악기 거문고 Geomungo Zither 3 악기 건고 Geongo Drum 4 악기 교방고 Gyobanggo Drum 5 악기 꽹과리 Kkwaenggwari Gong 6 악기 노고 Nogo Drum 7 악기 노도 Nodo Drum 8 악기 뇌고 Noego Drum 9 악기 단소 Danso Flute 10 악기 당적 Dangjeok Flute 11 악기 대금 Daegeum Flute 12 악기 바라 Bara Cymbals 13 악기 법고 Beopgo Drum 14 악기 북 Buk Drum 15 악기 비파 Bipa Lute 16 악기 삭고 Sakgo Drum 17 악기 소 So Flute 18 악기 소고 Sogo Drum 19 악기 소금 Sogeum Flute 20 악기 아쟁 Ajaeng Zither 21 악기 약 Yak Flute 22 악기 양금 Yanggeum Zither 23 악기 영고 Yeonggo Drum 24 악기 용고 Yonggo Drum 25 악기 응고 Eunggo Drum 26 악기 장구 Janggu Drum 27 악기 적 Jeok Flute 28 악기 절고 Jeolgo Drum 29 악기 좌고 Jwago Drum 30 악기 지 Ji Flute 31 악기 진고 Jingo Drum 32 악기 징 Jing Gong 33 악기 퉁소 Tungso Flute 34 악기 피리 Piri Oboe 35 악기 해금 Haegeum Fiddle 36 장르 가곡 Gagok 37 장르 가사 Gasa Vocal Music 38 장르 경기민요 Gyeonggiminyo Folk Song 39 장르 동부민요 Dongbuminyo Folk Song 40 장르 민요 Minyo Folk Song 41 장르 범패 Beompae Buddhist Ritual Chant 42 장르 사물놀이 Samullori Instrumental Music 43 장르 산조 Sanjo Instrumental Solo 44 장르 서도민요 Seodominyo Folk Song 45 장르 서도소리 Seodosori Folk Song 46 장르 시나위 Sinawi Instrumental Music 47 장르 시조 Sijo 48 장르 신민요 Sinminyo Folk Song 49 장르 줄풍류 Julpungnyu Instrumental Music 50 장르 창극 Changgeuk Opera 51 장르 판소리 Pansori 52 기악곡 가락더리 Garakdeori Instrumental Music 53 기악곡 가야금산조 Gayageumsanjo Instrumental Solo 54 기악곡 거문고산조 Geomungosanjo Instrumental Solo 55 기악곡 경풍년 Gyeongpungnyeon Instrumental Music 56 기악곡 계면가락도드리 Gyemyeongarakdodeuri Instrumental Music 57 기악곡 관악영산회상 Gwanagyeongsanhoesang Instrumental Music 58 기악곡 군악 Gunak Instrumental Music 59 기악곡 긴염불 Ginnyeombul Instrumental Music 60 기악곡 길군악 Gilgunak Instrumental Music 61 기악곡 길타령 Giltaryeong Instrumental Music 62 기악곡 낙양춘 Nagyangchun Instrumental Music 63 기악곡 농악 Nongak 64 기악곡 대금산조 Daegeumsanjo Instrumental Solo 65 기악곡 대취타 Daechwita 66 기악곡 밑도드리 Mitdodeuri Instrumental Music 67 기악곡 별우조타령 Byeorujotaryeong Instrumental Music 68 기악곡 보태평 Botaepyeong Confucian Ritual Music 69 기악곡 보허사 Boheosa Instrumental Music 70 기악곡 보허자 Boheoja Instrumental Music 71 기악곡 상령산 Sangnyeongsan Instrumental Music 72 기악곡 세령산 Seryeongsan Instrumental Music 73 기악곡 수룡음 Suryongeum Instrumental Music 74 기악곡 수제천 Sujecheon Instrumental Music 75 기악곡 아쟁산조 Ajaengsanjo Instrumental Solo 76 기악곡 양청도드리 Yangcheongdodeuri Instrumental Music 77 기악곡 여민락 Yeomillak Instrumental Music 78 기악곡 염불도드리 Yeombuldodeuri Instrumental Music 79 기악곡 염양춘 Yeomyangchun Instrumental Music 80 기악곡 영남농악 Yeongnam Nongak 81 기악곡 영산회상 Yeongsanhoesang Instrumental Music 82 기악곡 우도농악 Udo Nongak 83 기악곡 우조가락도드리 Ujogarakdodeuri Instrumental Music 84 기악곡 웃다리농악 Utdari Nongak 85 기악곡 웃도드리 Utdodeuri Instrumental Music 86 기악곡 자진한잎 Jajinhannip Instrumental Music 87 기악곡 정대업 Jeongdaeeop Confucian Ritual Music 88 기악곡 좌도농악 Jwado Nongak 89 기악곡 중광지곡 Junggwangjigok Instrumental Music 90 기악곡 중령산 Jungnyeongsan Instrumental Music 91 기악곡 천년만세 Cheonnyeonmanse Instrumental Music 92 기악곡 청성자진한잎 Cheongseongjajinhannip Instrumental Music 93 기악곡 취타 Chwita Instrumental Music 94 기악곡 취타풍류 Chwitapungnyu Instrumental Music 95 기악곡 타령 Taryeong Instrumental Music 96 기악곡 태평소산조 Taepyeongsosanjo Instrumental Solo 97 기악곡 평조회상 Pyeongjohoesang Instrumental Music 98 기악곡 피리산조 Pirisanjo Instrumental Solo 99 기악곡 하현도드리 Hahyeondodeuri Instrumental Music 100 기악곡 함녕지곡 Hamnyeongjigok Instrumental Music 101 기악곡 해금산조 Haegeumsanjo Instrumental Solo 102 기악곡 해령 Haeryeong Instrumental Music 103 기악곡 현악영산회상 Hyeonagyeongsanhoesang Instrumental Music 104 무용 가인전목단 Gainjeonmokdan Court Dance 105 무용 강강술래 Ganggangsullae 106 무용 강령탈춤 Gangnyeongtalchum Mask Dance Drama 107 무용 검무 Geommu Sword Dance 108 무용 고성오광대 Goseongogwangdae Mask Dance Drama 109 무용 나비춤 Nabichum Buddhist Ritual Dance 110 무용 동래야류 Dongnaeyaryu Mask Dance Drama 111 무용 동래학춤 Dongnaehakchum Folk Dance 112 무용 무고 Mugo Court Dance 113 무용 무무 Mumu Confucian Ritual Dance 114 무용 문무 Munmu Confucian Ritual Dance 115 무용 밀양북춤 Miryangbukchum Drum Dance 116 무용 바라춤 Barachum Buddhist Ritual Dance 117 무용 봉산탈춤 Bongsantalchum Mask Dance Drama 118 무용 북춤 Bukchum Drum Dance 119 무용 살풀이 Salpuri Folk Dance 120 무용 선유락 Seonyurak Court Dance 121 무용 설장구춤 Seoljangguchum Drum Dance 122 무용 소고춤 Sogochum Drum Dance 123 무용 송파산대놀이 Songpasandaenori Mask Dance Drama 124 무용 수영야류 Suyeongyaryu Mask Dance Drama 125 무용 아박무 Abangmu Court Dance 126 무용 양주별산대놀이 Yangjubyeolsandaenori Mask Dance Drama 127 무용 연화대 Yeonhwadae Court Dance 128 무용 은율탈춤 Eunyultalchum Mask Dance Drama 129 무용 일무 Ilmu Confucian Ritual Dance 130 무용 입춤 Ipchum Folk Dance 131 무용 작법 Jakbeop Buddhist Ritual Dance 132 무용 장구춤 Jangguchum Drum Dance 133 무용 정재 Jeongjae Court Dance 134 무용 죽간자 Jukganja Court Dance Prop 135 무용 진도북춤 Jindobukchum Drum Dance 136 무용 진주검무 Jinjugeommu Sword Dance 137 무용 처용무 Cheoyongmu 138 무용 춘앵전 Chunaengjeon Court Dance 139 무용 통영오광대 Tongyeongogwangdae Mask Dance Drama 140 무용 포구락 Pogurak Court Dance 141 무용 하회별신굿 Hahoebyeolsingut Mask Dance Drama 142 무용 학무 Hangmu Court Dance 143 무용 학연화대처용무합설 Hagyeonhwadaecheoyongmuhapseol Court Dance 144 무용 한량무 Hallyangmu Folk Dance 145 무용 향발무 Hyangbalmu Court Dance 146 무용 헌선도 Heonseondo Court Dance 147 성악곡 강강술래 Ganggangsullae 148 성악곡 강원도아리랑 Gangwondo Arirang 149 성악곡 개성난봉가 Gaeseongnanbongga Folk Song 150 성악곡 개타령 Gaetaryeong Folk Song 151 성악곡 경복궁타령 Gyeongbokgungtaryeong Folk Song 152 성악곡 계락 Gyerak Gagok 153 성악곡 군밤타령 Gunbamtaryeong Folk Song 154 성악곡 궁초댕기 Gungchodaenggi Folk Song 155 성악곡 까투리타령 Kkaturitaryeong Folk Song 156 성악곡 꽃타령 Kkottaryeong Folk Song 157 성악곡 난봉가 Nanbongga Folk Song 158 성악곡 남도들노래 Namdodeullorae Folk Song 159 성악곡 남원산성 Namwonsanseong Folk Song 160 성악곡 너영나영 Neoyeongnayeong Folk Song 161 성악곡 노들강변 Nodeulgangbyeon Folk Song 162 성악곡 노랫가락 Noraetgarak Folk Song 163 성악곡 농부가 Nongbuga Folk Song 164 성악곡 는실타령 Neunsiltaryeong Folk Song 165 성악곡 늴리리야 Nuilliriya Folk Song 166 성악곡 달강달강 Dalgangdalgang Folk Song 167 성악곡 도라지타령 Dorajitaryeong Folk Song 168 성악곡 도화타령 Dohwataryeong Folk Song 169 성악곡 두거 Dugeo Gagok 170 성악곡 매화타령 Maehwataryeong Folk Song 171 성악곡 메나리 Menari Folk Song 172 성악곡 몽금포타령 Monggeumpotaryeong Folk Song 173 성악곡 물레타령 Mulletaryeong Folk Song 174 성악곡 밀양아리랑 Miryang Arirang 175 성악곡 반엽 Banyeop Gagok 176 성악곡 방아타령 Bangataryeong Folk Song 177 성악곡 배치기소리 Baechigisori Folk Song 178 성악곡 뱃노래 Baennorae Folk Song 179 성악곡 베틀가 Beteulga Folk Song 180 성악곡 병신난봉가 Byeongsinnanbongga Folk Song 181 성악곡 보리타작소리 Boritajaksori Folk Song 182 성악곡 사발가 Sabalga Folk Song 183 성악곡 사설난봉가 Saseollanbongga Folk Song 184 성악곡 사설시조 Saseol Sijo 185 성악곡 사설지름시조 Saseoljireum Sijo 186 성악곡 삼수대엽 Samsudaeyeop Gagok 187 성악곡 상여소리 Sangyeosori Folk Song 188 성악곡 상주모심기소리 Sangjumosimgisori Folk Song 189 성악곡 상주아리랑 Sangju Arirang 190 성악곡 서우젯소리 Seoujetsori Folk Song 191 성악곡 소용 Soyong Gagok 192 성악곡 수궁가 Sugungga Pansori 193 성악곡 수심가 Susimga Folk Song 194 성악곡 술비소리 Sulbisori Folk Song 195 성악곡 신고산타령 Singosantaryeong Folk Song 196 성악곡 심청가 Simcheongga Pansori 197 성악곡 아리랑 Arirang 198 성악곡 애원성 Aewonseong Folk Song 199 성악곡 양류가 Yangnyuga Folk Song 200 성악곡 양산도 Yangsando Folk Song 201 성악곡 어랑타령 Eorangtaryeong Folk Song 202 성악곡 언락 Eollak Gagok 203 성악곡 언롱 Eollong Gagok 204 성악곡 언편 Eonpyeon Gagok 205 성악곡 엮음수심가 Yeokkeumsusimga Folk Song 206 성악곡 연평도난봉가 Yeonpyeongdonanbongga Folk Song 207 성악곡 오돌또기 Odolttogi Folk Song 208 성악곡 오봉산타령 Obongsantaryeong Folk Song 209 성악곡 우락 Urak Gagok 210 성악곡 우롱 Urong Gagok 211 성악곡 우조시조 Ujo Sijo 212 성악곡 우조지름시조 Ujojireum Sijo 213 성악곡 우편 Upyeon Gagok 214 성악곡 울산아가씨 Ulsanagassi Folk Song 215 성악곡 이별가 Ibyeolga Folk Song 216 성악곡 이수대엽 Isudaeyeop Gagok 217 성악곡 이야홍타령 Iyahongtaryeong Folk Song 218 성악곡 이어도사나 Ieodosana Folk Song 219 성악곡 자진난봉가 Jajinnanbongga Folk Song 220 성악곡 자진농부가 Jajinnongbuga Folk Song 221 성악곡 자진방아타령 Jajinbangataryeong Folk Song 222 성악곡 적벽가 Jeokbyeokga Pansori 223 성악곡 정선아리랑 Jeongseon Arirang 224 성악곡 중거 Junggeo Gagok 225 성악곡 중허리시조 Jungheori Sijo 226 성악곡 지름시조 Jireum Sijo 227 성악곡 진도아리랑 Jindo Arirang 228 성악곡 진주난봉가 Jinjunanbongga Folk Song 229 성악곡 짓소리 Jitsori Buddhist Ritual Chant 230 성악곡 창부타령 Changbutaryeong Folk Song 231 성악곡 천안삼거리 Cheonansamgeori Folk Song 232 성악곡 청춘가 Cheongchunga Folk Song 233 성악곡 초수대엽 Chosudaeyeop Gagok 234 성악곡 춘향가 Chunhyangga Pansori 235 성악곡 쾌지나칭칭나네 KwaejinachingchingnaneFolk Song 236 성악곡 태평가 *민요 Taepyeongga Folk Song 237 성악곡 태평가 *가곡 Taepyeongga Gagok 238 성악곡 편락 Pyeollak Gagok 239 성악곡 편수대엽 Pyeonsudaeyeop Gagok 240 성악곡 평거 Pyeonggeo Gagok 241 성악곡 평롱 Pyeongnong Gagok 242 성악곡 평시조 Pyeong Sijo 243 성악곡 풍구타령 Punggutaryeong Folk Song 244 성악곡 풍년가 Pungnyeonga Folk Song 245 성악곡 한강수타령 Hangangsutaryeong Folk Song 246 성악곡 한오백년 Hanobaengnyeon Folk Song 247 성악곡 함양양잠가 Hamyangyangjamga Folk Song 248 성악곡 해주아리랑 Haeju Arirang 249 성악곡 홋소리 Hotsori Buddhist Ritual Chant 250 성악곡 화청 Hwacheong Buddhist Ritual Chant 251 성악곡 화편 Hwapyeon Gagok 252 성악곡 환계락 Hwangyerak Gagok 253 성악곡 흥보가 Heungboga Pansori 254 성악곡 흥타령 Heungtaryeong Folk Song 255 음악사 가곡원류 Gagogwollyu Song Collection 256 음악사 구라철사금자보 Guracheolsageumjabo Musical Score 257 음악사 금보 Geumbo Musical Score 258 음악사 금합자보 Geumhapjabo Musical Score 259 음악사 기사진표리진찬의궤 Gisajinpyorijinchan Uigwe 260 음악사 남훈유보 Namhunnyubo Musical Score 261 음악사 낭옹신보 Nangongsinbo Musical Score 262 음악사 대악후보 Daeakhubo Musical Score 263 음악사 삼죽금보 Samjukgeumbo Musical Score 264 음악사 세조실록악보 Sejosillogakbo Musical Score 265 음악사 세종실록악보 Sejongsillogakbo Musical Score 266 음악사 시용향악보 Siyonghyangakbo Musical Score 267 음악사 신작금보 Sinjakgeumbo Musical Score 268 음악사 어은보 Eoeunbo Musical Score 269 음악사 우헌금보 Uheongeumbo Musical Score 270 음악사 원행을묘정리의궤 Wonhaengeulmyojeongni Uigwe 271 음악사 유예지 Yuyeji Musical Score 272 음악사 의궤 Uigwe 273 음악사 정간보 Jeongganbo Musical Notation 274 음악사 청구영언 Cheongguyeongeon Song Collection 275 음악사 초입문금보 Choimmungeumbo Musical Score 276 음악사 한금신보 Hangeumsinbo Musical Score 277 음악사 해동가요 Haedonggayo Song Collection 278 음악사 현금오음통론 Hyeongeumoeumtongnon Musical Score 279 음악사 현학금보 Hyeonhakgeumbo Musical Score 280 음악이론 강산제 Gangsanje Pansori School 281 음악이론 계면조 Gyemyeonjo Mode 282 음악이론 대풍류 Daepungnyu Instrumental Music 283 음악이론 동편제 Dongpyeonje Pansori School 284 음악이론 서편제 Seopyeonje Pansori School 285 음악이론 장단 Jangdan Rhythmic Cycle 286 음악이론 중고제 Junggoje Pansori School 287 음악이론 향당교주 Hyangdanggyoju Instrumental Music 288 장단 굿거리장단 Gutgeorijangdan Rhythmic Cycle 289 장단 단모리장단 Danmorijangdan Rhythmic Cycle 290 장단 도드리장단 Dodeurijangdan Rhythmic Cycle 291 장단 동살풀이장단 Dongsalpurijangdan Rhythmic Cycle 292 장단 세마치장단 Semachijangdan Rhythmic Cycle 293 장단 엇모리장단 Eonmorijangdan Rhythmic Cycle 294 장단 엇중모리장단 Eotjungmorijangdan Rhythmic Cycle 295 장단 자진모리장단 Jajinmorijangdan Rhythmic Cycle 296 장단 중모리장단 Jungmorijangdan Rhythmic Cycle 297 장단 중중모리장단 Jungjungmorijangdan Rhythmic Cycle 298 장단 진양조장단 Jinyangjojangdan Rhythmic Cycle 299 장단 타령장단 Taryeongjangdan Rhythmic Cycle 300 장단 휘모리장단 Hwimorijangdan Rhythmic Cy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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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안내2003. 5. 23. 金 신의순행 일시 : 5. 23 오후 3시 30분 ~5시 장소 : 순의단(헌다례), 진주성일대 및 시내일원 / 진행단체 : 집행위원회 의암별제 일시 : 5. 23 오후 5시 30분 ~ 7시 30분 장소 : 의기사 ~ 행사장 (진주성 야외공연장) / 진행단체: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은율탈춤 일시: 5. 23 오후 7시 30분 ~ 8시 30분 뮤지컬 "논개" 일시 : 5. 23 ~ 24 오후 8시 장소 : 경남문화예술회관대공연장 / 공연단체 : 극단 현장 2003. 5. 24. 土 진주ㆍ삼천포 농악 / 일시 : 5. 24 오후 3시 ~ 4시 줄타기 / 일시 : 5. 24 오후 4시 ~ 4시 40분 진주검무 /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 12호 일시 : 5. 24 오후 4시 40분 ~ 5시 / 공연단체 : 진주검무보존회 신관용류 가야금산조 / 일시 : 5. 24 오후 5시 10분 ~5시 30분 진주포구락무 / 경상남도 지정 무형문화재 제 12호 일시 : 5. 24 오후 7시 10분 ~7시 30분 / 공연단체 : 진주포구락무보존회 진주시립전통예술단공연 / 일시 : 5. 24 오후 6시 10분 ~ 7시 논개 투신재현 일시 : 5. 24 오후 7시 ~ 7시 30분 장소 : 의암일원 / 진행단체 : 진주국제대학교 관광상품개발센터 혼건기지와 혼달래기굿 일시 : 5. 24 오후 7시 30분 ~ 8시 창작탈춤 "백정" / 일시 : 5. 24 오후 8시 ~ 9시 국립무용단 초청공연 [한국의 춤, 세계의 춤] / 일시 : 5. 24 오후 9시 ~ 10시 30분 2003. 5. 25. 日 진주ㆍ삼척포 농악 / 일시 : 5. 25 오후 3시 ~ 4시 하회별신굿 탈놀이 / 일시 : 5. 25 오후 4시 10분 ~ 5시 20분 한량무 / 경상남도지정 무형문화재 제3호 일시 : 5. 25 오후 5시 40분 ~ 6시 / 공연단체 : 진주한량무보존회 김현철의 저글링 / 일시 : 5. 25 오후 5시 30분 ~ 6시 선유락 일시 : 5. 25 오후 6시 10분 ~ 6시 40분 / 장소 : 진주성 야외공연장 공연단체 : 진주민속예술보존회 및 심운회 (안무지도 김희경) 진주교방굿거리 춤 / 일시 : 5. 25 오후 6시 50분 ~ 7시 의암별무 일시 : 5. 25 오후 7시 40분 ~ 8시 / 공연단체 : 진주민속예술보존회 마당극 "흥부네 박 터졌네" / 일시 : 5. 25 오후 8시 ~ 9시 20분 대동놀이 [석전놀이] / 일시 : 5. 25 오후 9시 20분 ~ 장소 : 진주성 야외공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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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영ㆍ김광섭, <한국의 정악과 민속악 장단> 출간❚ 책소개 이 책은 타악 연주자뿐만 아니라 장단에 많은 관심과 흥미를 지닌 국악 애호가들에게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전통음악에는 무수히 많은 장단들이 존재한다. 판소리에서는 소리북을 활용하거나, 수제천이나, 가곡 등의 정악과 각 악기의 산조를 비롯한 기악곡이나 민요·병창 등에서는 장구를 활용하여 장단을 연주함으로써, 악곡의 장단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정악을 비롯하여 민속악의 모든 장단, 궁중정재에 사용되는 장단까지를 악보로 기록하였으며, 특히 현장에서의 연주를 악보로 담아내었다. 각 장단의 기본형은 물론 변화형을 제시하였으며, 장단을 활용하는 악곡 및 정재의 간략한 해설도 함께 수록하였다 우리의 전통음악에 사용하는 악기는 무수히 많은 종류가 존재하며, 이 중 타악기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타악기 가운데 매우 중요한 악기로 취급되는 악기는 장구와 북일 것이다. 장구와 북은 정악 및 민속악을 비롯하여 모든 음악의 중심이며, 음악의 속도 조절 및 긴장과 이완의 음악적인 멋과 맛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 목차 추천사 머리말   총론 1. 장단이란 2. 한국 전통음악의 장르 3. 장구란 제1부 정악 1장 장구 1. 역사 2. 구조와 명칭 3. 제도 4. 주법 5. 기보법 6. 장단의 유형 2장 정악 3장 정가 1. 가곡 2. 가사 3. 시조 4장 정재무 1. 처용무 2. 춘앵전 3. 가인전목단 4. 학무 5. 연화대무 6. 무고 7. 궁중검무 8. 박접무 9. 영지무 10. 춘광호 11. 포구락 12. 무애무 13. 무산향 14. 승전무 15. 농발무 16. 진주검무 17. 만수무 18. 헌천화 19. 장생보연지무 20. 아박무 21. 고구려무 22. 선유락 23. 봉래의 제2부 민속악 1장 소리북 1. 소리북이란? 2. 북의 생김새와 각 부분의 명칭 3. 소리북의 연주법 4. 고법 5. 고수의 역할 2장 소리북의 실제 1. 북장단의 종류 2. 기보법 3. 기초연습 4. 판소리 5. 단가 3장 장구장단 1. 산조 2. 대풍류 3. 대영산 4. 취타풍류 5. 시나위(살풀이) 6. 어랑타령 부록 사철가 이몽룡의 내력 흥보 쫓겨남 제비 노정기 놀부심술 참고문헌 ❚ 저자소개 정화영鄭和泳 Jung hwa young 경기도 화성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불교예술문화학과 한국음악전공 석사 수료 KBS 국악대상 수상 1987 경주신라문화제 국악부문 대상 (대통령상) 1994 ‘국악의 해’ 국악보급 공로상 (문화체육부 장관상) 2003 국립국악원장 공로상 2008 서울 전통예술인상 2011 문화포장 수훈 2014 실연자협회상 수상 국립창극단 악장 역임 국립국악관현악단 악장 역임 국립국악관현악단 지도위원 역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지도위원 역임 부여군 충남국악단 예술감독 역임 국립국악원 원로사범 역임 현재  서울시무형문화재 제25호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 김광섭金光燮 Kim kwang sup 경기도 포천 출생 국립국악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 한양대학교 교육대학원 음악교육과 졸업 일본 오사카 EL business 專門學校 일본어교육과 졸업 일본 오사카예술대학 대학원 예술문화연구과 박사과정 수료 제3회 동아국악콩쿠르 정가부문 금상 국립국악원주최 제8회 전국국악경연대회 성악부문 1등 KBS/삼성그룹주최 서울국악대경연 정가부문 금상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이수자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이수자 경기도립국악단 총무단원 역임 국립국악원 정악연주단 타악수석 역임 용인대학교 예술대학 국악과 강사 역임 전주예술고등학교 강사 역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강사 역임 추계예술대학교 국악과 강사 역임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겸임교수 역임 문화체육관광부 관현맹인예술단 예술감독 역임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한국음악과 외래교수, 정농악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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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꿈, 태평서곡> 10.30-311. 일시: 2015. 10. 30.(금) 오후 3시, 31.(토) 오전 11시, 오후 3시 2. 장소: 창경궁 명정전 앞 3. 주최: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4. 주관: 국립국악원,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창경궁, 국악방송 5. 티켓 : 전석무료 6. 문의 : 02-580-3300) 7 공연소개 오는 10월 30일(금) 오후3시,31일(토) 오전11시,오후3시 창경궁 명정전 앞에서 을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재청 주최로 연주한다. 공연이 펼쳐지는 창경궁은 최근 다시 조명되고 있는 ‘사도세자’의 출생부터 슬픈 죽음을 마주하기까지의 배경이 된 곳으로, 아들 정조가 태어나기도 했고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스스로 제례악의 악장을 짓거나 악서를 편찬하는 등 역대 조선의 왕들 중 악학에 조예가 깊었던 정조가 마련한 회갑연은 단순한 잔치나 연회의 수준을 넘어 궁중 예술을 망라한 수준 높은 당대 문화의 결정체였다. 이번 공연 역시 당대의 찬란했던 궁중 예술의 품격을 살려 그 감동을 고스란히 전할 예정이다. 당시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바탕으로 수제천과 여민락 등 대표적인 궁중 음악과 함께 무고와 선유락 등 화려한 궁중 무용을 선보인다. 특히 뱃놀이를 기원으로 한 ‘선유락’은 이번 공연에서 가장 큰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하는 궁중 무용으로 우렁찬 대취타와 함께 무용수들이 대거 등장해 최고의 볼거리를 선사한다. 또한 음악과 무용 외에도 진연에 올랐던 궁중 음식과 평소 접하기 어려운 궁중 복식과 의물 역시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일제 강점기인 1927년 이전 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접할 수 없었던 궁중 예술을 직접 고궁에서 가까이 즐길 수 있는 것 역시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동시대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장치도 마련했다. 무대 좌우에는 전광판을 통해 자막으로 공연 내용을 안내하고, 공연 초반 정조와 혜경궁 홍씨의 대사와 연기를 추가해 이번 공연의 배경과 내용 및 의미 등을 극적인 요소로 표현한다. 정조 역에는 다수의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조선시대 왕을 연기한 탤런트 ‘이민우’가 맡았고, 혜경궁 홍씨 역에는 대한민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배우 ‘박정자’가 맡아 관객들의 재미와 이해를 높일 예정이다. 2001년 국립국악원 개원 50주년을 기념해 첫 선을 보인 은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2010년 파리 일드 프랑스 페스티벌 등에 초청되면서 작품성 역시 인정받은 바 있다. 이번 공연은 고궁 자원의 활성화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 예술의 대중화를 위한 시도로 향후 전통 문화의 현대화를 위한 대표 콘텐츠 발굴의 의미가 있다. 중국 자금성을 배경으로 한 ‘투란도트’나 일본 궁내청의 대표 음악인 ‘가가쿠’, 고성(古城)과 대성당, 극장 등에서 100년 가까이 이어온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등 이미 다른 국가들은 각국의 전통 자원과 공연 예술을 결합해 그 나라를 대표하는 고유의 문화 브랜드를 구축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해숙 국립국악원장은 “전통 예술 자원들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동 시대 다양한 계층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삶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이번 공연을 계기로 국격과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전통 문화콘텐츠가 차세대 한류 확산에 앞장서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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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2월의 ‘문화가 있는 날’ 기획공연 「국악으로 아름다운 세상」무료 공연* ‘문화가 있는 날’ 이란 전국 문화시설의 문턱을 낮추고 국민 생활 속 문화 향유를 확산하기 위해 문화융성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올해 처음 실시하는 제도로 매월 마지막 수요일은 전국의 주요 문화시설(공연장ㆍ영화관ㆍ박물관ㆍ 미술관ㆍ체육관ㆍ고궁 등)을 할인 또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 ‘국악으로 아름다운 세상’은 청소년, 가족, 국악 초심자를 위한 전문가의 해설이 있는 공연으로 궁중음악과 궁중무용을 비롯해 민속악, 민속춤, 창작국악을 한데 모은 풍성한 무대로 마련된다. □ 이번 공연에서는 궁중음악의 대표곡 ‘수제천(壽齊天)’을 통해 ‘하늘처럼 영원한 생명’을 깃들기를 기원하고, 곱게 채색한 호화로운 배를 중심으로 장중한 규모와 화려한 의상이 어우러진 궁중무용 ‘선유락(船遊樂)’으로 관객들에게 조선 궁중의 찬란했던 전통 예술의 정수를 전할 예정이다. □ 또한 곡조와 리듬의 변화가 재밌게 짜여진 경기잡가 ‘제비가’와 황해도 장산곶 어부들의 생활과 정경을 묘사한 서도민요 ‘몽금포타령’을 통해 우리민족의 생활상이 반영된 노래를 들려준다. 이외에도 창작국악 거문고 중주 ‘출강’과 민속악 ‘아쟁산조’, 민속무용 ‘소고춤’을 더해 전통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악이 선사하는 감동과 신명을 통해 ‘국악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접할 수 있는 무대로 꾸며진다. □ 공연 관람 신청은 2월 13일(목) 부터 오는 21일(금)까지 국립국악원 누리집(www.gugak.go.kr)과 전화(02-580-3300)로 가능하며 선착순 750명까지 모집한다. □ 아울러 국립국악원은 ‘문화가 있는 날’을 기념하는 무료 기획공연을 올해 14회 마련했다. 지난 1월 설 기획공연 ‘청마의 울림’을 시작으로 이달에 마련한 ‘국악으로 아름다운 세상’ 공연은 7, 8, 12월에도 막을 올린다. 3월~6월, 9월~11월에는 국악 연주와 함께 사회 명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차와 이야기가 있는 국악콘서트’가, 6월, 11월에는 국립국악원 및 지방 3개 국악원 우수 연주자들이 꾸미는 ‘국립국악원 예술가의 무대’를 마련해, 올해 총 5,240명을 ‘문화가 있는 날’의 관객으로 모을 예정이다. □ 국립국악원 김해숙 원장은 “올해 처음 시행하는 ‘문화가 있는 날’에 많은 분들이 국립국악원에서 가족과 함께 ‘문화가 있는 삶’을 누리길 바란다.”며, “국악장르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넘어 국악으로 행복한 국민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전했다. □ 관람 신청은 매달 국립국악원 누리집(www.gugak.go.kr)또는 전화 02-580-3300으로 접수 하면 되고, 관람 신청 기간과 결과 공지는 국립국악원 누리집을 참고하면 된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 공 연 명 장소 1월29일 설날 기획공연 ‘청마의 울림’ 예악당 2월26일 국악으로 아름다운 세상1 예악당 3월26일 차와 이야기가 있는 국악콘서트 우면당 4월30일 차와 이야기가 있는 국악콘서트 우면당 5월28일 차와 이야기가 있는 국악콘서트 우면당 6월25일 차와 이야기가 있는 국악콘서트 우면당 국립국악원 예술가의 무대 풍류사랑방 7월30일 국악으로 아름다운 세상2 우면당 8월27일 국악으로 아름다운 세상3 우면당 9월24일 차와 이야기가 있는 국악콘서트 우면당 10월29일 차와 이야기가 있는 국악콘서트 우면당 11월26일 차와 이야기가 있는 국악콘서트 우면당 국립국악원 예술가의 무대 풍류사랑방 12월31일 국악으로 아름다운 세상4 우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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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왕조의 꿈, 태평서곡> 7. 13 ~141. 일시 : 2012년 7월13일(금) 오후 8시/ 14일(토) 오후 4시 2. 장소 : 창원 성산아트홀 대극장 3. 주최: 국립국악원, 가곡전수관 4. 주관: 사단법인 아름다운우리가곡 5. 문의: 055-221-0109 조선중기 최고의 문화 르네상스를 이루어낸 정조의 예혼과 효심! 화려한 궁중연희의 정수를 의정부 무대에서 만난다! 국립국악원 대표브랜드, 궁중연례악 무대를 기대하며 “잊혀진 왕조의 의례에 새 숨결을 불어넣는 공연미학” 의 공연과 무대 은 1795년 화성 봉수당에서 진행된 혜경궁홍씨의 회갑연 을 모티브로 한 궁중연례악이다.일반적인 의례의 재연과 달리 전 의례를 90여분의 공연물로 압축한 이 공연은 궁중음악과 춤이 현대 무대공간에서 의례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에 초점을 두고 기획되었다. 이 공연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원전의 재연(再演)이 아니라 과거의 기록과 현대까지 전승된 공연 전통을 창조적으로 재결합한 무대라는 뜻에서 공연 명칭도 이 아닌 이 되었다. 공연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를 참조하여 10곡의 연주곡과 6종의 정재를 공연하도록 구성하되 의례와 주악의 어울림, 음악과 춤의 균형, 악기편성의 음색과 빠르기 등을 고려하여 의례 진행에 따른 연주곡과 춤의 종류, 무대를 변형시켰다. 연례악 무대는 악무의 종류가 많고 의례 참여자와 소품 등이 많아 무대의 배치와 동선확보가 복잡하다. 또 모든 행례자가 행사의 주빈을 향하기 때문에 현대 무대에서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 큰 문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에서는 행사의 주빈석을 관객이 앉은 방향과 같게 하여, 주객이 함께 향연을 누리도록 하였다. 무대의 중심에 행례와 정재의 공간을 확보하고, 연주자석은 높이를 조정하여 무대 후면에 배치하였다. 그 결과 연주의 음향은 극장 무대 공간을 통해 웅장하게 울리고, 춤과 의례는 관객석 가까이에서 진행되어 청중과의 교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자아낼 수 있었다. 또 당악정재에만 사용되는 의장들을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 양 옆에 배치하고, 덩치 큰 무구들을 중앙에 배치하여 화려하고 장엄한 연례악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영상이야기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혜경궁 홍씨 이야기 취위 (取位) 자궁저하와 정조가 연회장에 착석함 음악 | 낙양춘 (기수영창지곡) 배례 (拜禮) 왕 이하 배석자들이 자궁에게 첫인사를 올리는 절차로 존경을 표하고자 몸을 굽혀 절함 의식음악 | 수제천 음악 | 경풍년 (풍년을 기뻐하는 의미를 담은 곡) 진휘건·진화·산화 (進揮巾·進花·散花) 자궁(왕의 어머니)께 휘건과 꽃을 올리는 의례 음악 | 낙양춘 진작 (進爵) 왕이 술을 받아 자궁께 술잔을 올리는 의례 음악 | 해령 (서일화지곡: 상서로운 햇빛이 비치고 온화한 바람이 분다는 의미) 치사 (致詞) 낭독자궁의 덕을 칭송하고 축수를 기원하는 글 “국왕 모는 감사 건륭 60년 윤 월13일의 경사를 맞게 되었사옵니다.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 저하께서는 우리 왕실의 아름다운 덕을 계승하시어 장수하는 복을 받으셨으니, 복록은 자손에게 흘러 넘치고 경사로움이 어머님께 미쳤사옵니다. 삼가 축하하는 자리에 모시고서 경건히 술잔을 따라 올리오니 어머님의 연세를 아는 이 기쁜 날 칭송하는 소리 높이 높이 울려 퍼지옵니다....”(이하 생략) 음악 | 수제천 (수명이 하늘처럼 영원하길 기원하는 의미) 거작 (擧爵) 왕이 선사하는 치사에 대해 자궁이 “오늘의 이 경사를 전하와 더불어 만백성과 함께 하겠노라” 는 선지를 내림 음악 | 여민락 (세종대왕이 작곡한 궁중음악,백성과 더불어 동고동락한다는 의미) 산호 (山呼) 왕이 절을 마치면 모든 연회 참석자들이 축복하는 뜻으로 영원토록 번성하기를 바라며 ‘천세’ 를 외침 음악 | 수제천 첫째 잔 (第一爵) 왕이 첫 번째 술잔을 올림 음악 | 보허자 (장춘불로지곡) 춤 | 헌선도 (불로장생의 상징인 선도를 바치는 궁중무용) 둘째 잔 (第二爵) 내빈 대표가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음악 | 여민락 춤 | 쌍무고 (고려시대부터 전하는 궁중 북춤) 셋째 잔 (第三爵) 외빈 대표가 세 번째 술잔을 올림 음악 | 수룡음 춤 | 학연화대무 (학이 등장하고 연꽃속 동녀가 나와 춤추는 환상적인 분위기의 궁중무용) 파연 (罷宴) 모든 연회의 마지막 순서로 마무리하는 춤을 춤 음악 | 대취타 (무령지곡) 춤 | 선유락 (뱃놀이를 형상화 한 궁중무용) 후례 (後禮) 마지막 술잔을 올린 후 예를 마치는 순서 음악 | 수제천, 해령 예필 (禮畢) 전찬이 자궁께 모든 예를 마쳤음을 고함 퇴위 (退位) 자궁이 걸어나가면 뒤를 따라 내빈이 전하를 따라 외빈이 물러남 음악 | 군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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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악원 무용단 <효명세자의 꿈> 6. 22■공연명 :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제4회 정기공연-순조기축진찬의궤의 정재 “효명세자의 꿈” ■일시 : 2012. 6. 22.(금) 오후7시30분 ■장소 : 국립부산국악원 대극장(연악당) ■ 50% : 만22세이하 청소년, 만65세이상 경로우대(동반1인), 장애인(동반2인), 유공자(동반1인), 생활보호대상자, 병역명문가 및 다자녀가정 ■ 20% : 국내거주 외국인, 20인 이상 단체관람 □ 무동정재 역사의 맥을 잇는 춤의 향연! 정재는 ‘재예(才藝)를 바친다’는 뜻으로 궁중무용을 말한다. 궁중잔치에서 추었던 춤으로, 고상하고 우아하면서 무게감이 있다. 예를 갖춘 동작과 절도 있으면서도 화려한 춤사위가 특징이다. 궁중에서 추던 춤인 만큼 옷차림, 치장, 의물(의장) 또한 화려하다. 오는 6월 22일(금) 오후 7시30분 국립부산국악원 대극장(연악당)에서『순조기축진찬의궤(己丑進饌儀軌)의 정재』“효명세자의 꿈”으로 부산시민과의 첫 만남을 기다린다.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제4회 정기공연으로 마련하는 본 공연은 부산 초연 정재 레퍼토리 공연으로『순조기축진찬의궤』에 수록된 진찬을 중심으로 여령(여자)정재와 무동(남자)정재의 옛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순조기축진찬의궤』는 1829년(순조29) 효명세자가 순조 40세와 즉위 30년을 경축하여 왕에게 연향을 올린 것에 대한 기록으로 외연(무동정재)과 내연(여령정재)이 아울러 실린 몇 안되는 의궤 중의 하나이다. 특히, 춤을 사랑했고 효심이 지극했던 효명세자는 정재와 궁중연향을 자신의 예악정치의 수단으로 삼아 조선조 가장 풍부한 레퍼토리의 수준 높은 정재를 지니도록 하였으며, 한층 격조 있고 장대한 연향으로 양식화하였다. 그리하여 조선말까지 전해지는 50여종의 정재 중 20여종이 넘는 정재를 직접 창작하는 등 자주적인 조선 궁중연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룬 인물이다. 이번 무대는 예(藝)를 통해 국정을 펴고자 했던 왕세자 ‘효명’의 무용사적 의의를 새롭게 재조명하고, 효명세자의 창작성이 고스란히 숨 쉬는 미적이고 예술적이며 장엄한 정재를 확인할 수 있다. 무동정재에는 고려시대부터 전승되었으며 큰 북을 가운데 두고 원형으로 둘러서서 북을 치거나 주변을 돌면서 춤추는 ‘무고’, 처용의 탈을 쓰고 악귀를 쫓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한 ‘처용무’, 꽃 중의 왕이라고 하는 모란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모습을 표현한 ‘가인전목단’이 추어지고, 여령정재에는 이름 그대로 다섯 마리의 양을 타고 내려온 신선이 군왕을 송축하는 노래를 부르고 춤추는 ‘오양선’, 봄날 버드나무 가지위에 앉아 노래하는 작고 귀여운 꾀꼬리를 표현한 ‘춘앵전’, 신라시대 민중속에서 발생되어 다듬어지고 성장하여 궁중으로 전해진 ‘검기무’, 궁중 큰 잔치가 있을 때마다 연행되었으며 군무로서의 화려함이 돋보이는 정재 중 가장 화려한 ‘선유락’ 등 총 7작품을 선보인다. 장중한 음악과 화려한 춤이 어우러진 조선시대 궁중예술의 격조와 감동이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연주단,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무용학과 학생, 객원 등 총 80여명 출연진의 연주와 몸짓으로 펼쳐진다. 악․가․무 일체에 화려한 궁중복식과 국립부산국악원만의 스펙터클한 회전무대, 슬라이드무대 전환까지 보고 듣고 느끼는 공감각의 화려한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 격식을 갖춘 화려한 작품들을 통해 정재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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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연향> 3. 28 ~ 301. 일시 : 3. 28 ~ 30 저녁 8시 2. 장소 : 경복궁 경회루 3. 주최 : 문화재청, 한국문화재 보호재단 4. 출연 : 안숙선, 김혜란, 김나리, 정재연구회 5. 문의 : 인터파크 1544-1555 경회루 건립 600주년! 왕의 잔치가 돌아온다 ‘경회루 연향’은 경회루와 주변 경관을 무대로 활용한 실경(實景) 공연으로 지난해에 처음으로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경회루의 건축미와 아름다운 야경을 무대화하고 한국 전통의 가(歌), 무(舞), 악(樂)을 결합하여 환상적 분위기와 감동을 자아내는 공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에는 특별히 경회루의 건립 600주년을 맞이하여(태종 12, 1412년 건립) 경복궁과 경회루의 역사적 의미를 담은 이야기 형식의 표현을 공연에 더하고, 미디어 예술 기법을 활용하여 공연의 독창성을 더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번 공연은 조선의 건국과 경복궁 창건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경회루 창건과 외국 사신들을 위한 사신연(使臣宴)으로 이어져 궁중의 음악인 ‘정악’과 궁중무용으로 공연이 꾸며지며, 이어서 경복궁 재건과 낙성연(落成宴)으로 고종 임금 당시 낙성연에서 출중한 기예를 발휘하여 청중을 놀라게 했던 국창(國唱) ‘진채선의 판소리’(안숙선 명창), 고종 때 경복궁 재건과 역사적 의미가 깊은 경기민요 ‘경복궁 타령’(김혜란 명창)과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의 이야기를 되살린 ‘줄타기’로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프롤로그 “조선의 개국과 경복궁 창건” - 나각, 나발, 대고삼타 - 미디어아트쇼(조명쇼) 1부 “경회루의 중건과 사신연” - 일무 중 무무 - 국왕, 왕비 입장 - 정가(치사문 낭독) - 대금독주 - 가인전목단 - 선유락 2부 “경복궁의 재건과 낙성연” - 판소리(안숙선 명창) - 무고 - 경기민요(김혜란 명창) - 줄타기(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에필로그 “경회루 야경에 물들다” - 커튼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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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짓으로 춤의 날개를 펴다 10. 28국립부산국악원 개원첫돌 기념공연 몸짓으로 춤의 날개를 펴다 ● 일시 : 2009. 10. 28.(수) 오후7:30 ● 장소 : 국립부산국악원 대극장(연악당) ● 주최 : 국립부산국악원 ● 관람료 : S,A석 8,000원/B석 6,000원 ● 문 의 : (051)811-0040 ~ 41 ● 공연내용 국립국악원과 국립부산국악원 예술단들이 함께 꾸미는 전통춤 한마당 - 처용무 - 춘앵전 - 선유락 - 승전무 - 동래학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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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문화의전당 도립무용단 제30회 정기공연 ‘천년의 유산(千年遺産)’ 6. 12~13● 기 간 : 2009년 6월 12일~2009년 6월 13일 ● 시 간 : (금) 19:30 / (토) 17:00 ● 장 소 :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공연장 ● 출 연 : 도립무용단 ● 장 르 : 무용 ● 관람연령 : 만 7세이상 ● 주 최 : 경기도문화의전당 ● 주 관 : 경기도문화의전당 ● 문 의 : 인포샵(031-230-3440~2) 수 천년을 이어오고, 미래의 새 천년을 이어갈 우리 춤의 대서사 - 제1부 궁중정재 편 - 왕의 부활, 이 땅의 아름다운 부흥을 꿈꾸다 국내 최고 실력과 권위를 지닌 경기도립무용단이 궁중정대를 재현하였다. 궁중정재는 조선 초기 새로운 왕저의 비전을 제시하는 소통의 장으로써, 그리고 예와 악으로 세상의 해악을 다스리고자 했던 왕조의 의지로써 정성스럽게 편찬된 작품들이다. 무엇보다 궁중정재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져온 전통춤을 재구성하여 종합무대예술로 아름답게 재구성된 작품들로, 우리 문화의 뛰어난 예술성을 잘 보여준다. ● 공연내용 1. 학원화대처용무합설 2. 무고 : 세상을 두드리는 북소리, 진리로 기뻐하며 춤추리라 3. 선유락 : 국태민안의 염원 - 제2부 창작무 편 - 천년을 잇는 꿈, 새 시대를 도약하는 우리 춤의 비상 1. 조흥동의 2. 최승희의 3. 무사도 4. 김백봉의 5. 모듬북과 소고춤 6. 사랑가 7. 비상 8. 오고무(승무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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