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무대에 들어서자 맨 앞에 황제자리를 암시하는 황금색 용평상(어좌)이, 정면 안쪽 벽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태극기가 있다. 그 사이로 실내외를 암시하는 꽃살문, 의례와 정재(呈才, 궁중무용)공간을 나누는 2조의 주렴(朱簾, 붉은 대나무발)이, 그 사이에 왕족과 신하들이 자리하고, 마지막 주렴 너머로 악단이 보인다. 그리고 상공에 드리운 차일(遮日, 햇빛 가림막)같은 겹겹의 경계는 실외 잔치의 느낌을 관객에게 전한다.
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은 500년 조선왕조 진연(進宴, 궁중의 잔치)의 맥을 잇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궁중잔치 ‘임인진연’(壬寅進宴, 1902, 임인년에 있던 궁중잔치)을 복원하여, 그 첫 모습을 지난 15일 언론에 공개했다. 120년 만에 최초로 재현되는 이번 공연은 ‘임인진연의궤’(임인년 궁중 잔치를 기록한 책), ‘임인진연도병’(임인진연을 묘사한 그림 병풍) 등의 기록유산에 근거했고, 박동우 무대연출가를 중심으로 재현되어, 12월 16일(금)~21(수)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대중에게 선보인다.(예약은 국립국악원 누리집 참조)
1902년 음력 11월 거행된 ‘임인진연’은 고종 즉위 40주년과 51세를 기념하기 위한 궁중잔치로, 어수선한 국내외 정세에도 불구하고 황태자가 5차례 걸쳐 간청한 끝에 성사된 행사이다. 급변하는 개화기 열강속에서 국제적으로는 황실의 위엄을 세우고, 내부적으로는 군신간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보이는 국가적 의례 행사는 자주국가 ‘대한제국’을 대외적으로 표명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기도 했다.
당시의 진연은 남성 신하들과 함께 공식적인 행사를 올리는 ‘외진연’과 황태자, 황태자비, 군부인, 좌·우명부, 종친 등과 함께 한 ‘내진연’ 등이 있었으며, 이번 공연은 예술적 측면이 강한 ‘내진연’(당시 음력 11월 8일, 덕수궁(당시 경운궁)에서 개최)을 무대화하여 재현한 것이다.
객석을 황제의 시선으로 설정하여 연출했고, 음식을 올리는 절차 등을 생략하여 관객이 궁중무용과 궁중음악(아악, 雅樂)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국립국악원 김영운 원장은 공연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궁중예술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정제된 작품으로 황제에게 선보이는 무대입니다. 이제, 이 작품들을 현재의 국민들에게 무대공연 작품으로 공연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120년 전, 자주 국가를 염원했던 대한제국의 찬란한 궁중 문화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소중한 문화유산의 가치와 문화를 통한 화합과 통합의 정신이 널리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이제, ‘임인진연’ 속으로 들어 가보자.
공연은 왕실의 가족 구성원들이 차례로 황제에게 잔을 올리고 축하의 말씀을 전하는 치사(致詞) 과정이 주요 뼈대가 되고, 그 사이 음악과 춤(정재,궁중무용)이 이어지는 과정이다. 절차가 끝나고, 본격적인 악·가·무(樂·歌·舞)가 펼쳐지고, 예필(禮畢, 예식을 마침)의식으로 마무리 된다. 각 순서마다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무대 옆 대형 모니터를 통해 용어나 절차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조선시대 왕실, 주요 행사 내용을 정리한 기록인 '의궤'(儀軌)와 '도병'(圖屛, 그림 병풍) 등의 자세한 1차 문헌자료 기록 덕택에 ‘태극기, 깃발 등의 배치, 공간의 구분, 왕실 가족들의 위치’ 등 실외 잔치는 실내 무대에서 상당히 정밀하게 재현되었다.
절차는 크게 ‘예소(황태자가 고종황제에게 진연개최를 상소)’, ‘황제입장(왕실가족들 입장, 황제 입장은 공연에서 생략)’, 황태자(순종)가 고종황제에게 잔을 올리는 ‘제1작’부터 황태자비, 영친왕, 군부인(의친왕의 부인, 당시 의친왕은 미국유학 중), 좌명부, 우명부, 종친 반수 등이 잔을 올리는(진작) ‘제7작’, 그리고 ‘예필(禮畢, 예식을 마침)’의 과정을 거친다.
각 구성에서는 당대 최고의 궁중음악과 궁중무용을 경험할 수 있다. 역시 의궤와 도병 등에서 언급된 춤과 음악, 예인들에 대한 세부 묘사를 통해 자세한 재현이 가능했다. ‘황제입장’ 순서에서, ‘보허자’, ‘낙양춘’ 등의 음악이, 정재 ‘봉래의’가, 제1작에서 음악 ‘수제천’, ‘해령’, ‘여민락만’과 정재 ‘헌선도’가 선보여졌다. ‘제2작’에서 음악 ‘수룡음’, ‘해령’과 정재 ‘몽금척’이, 제3작에서는 ‘여민락’, ‘해령’, 제4작에서는 ‘세령산’ 등의 음악이 무대를 가득 채웠다.
제6작에서 음악 ‘계면가락도드리’, 정재 ‘향령무’가, 제7작에서 음악 ‘여민락’, 예필에서는 음악 ‘수제천’과 정재 ‘선유락’, 이후 음악 ‘보허자’ 등이 선보여졌다.
이러한 음악과 춤은 궁중무용, 궁중음악으로 우리에게 익숙했지만, 왕실의 위엄과 엄숙함 앞에서 이루어지는 예인들의 선율과 춤사위는 당대 최고의 예술임을 느끼게 했다. 동작은 기품 있고 우아했으며, 춤사위에 생명을 불어넣는 음악은 웅장하고 풍성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숭고한 아름다움에, 예인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화려한 듯 보이지만, 완벽성을 위한 인고의 과정을 감내했음을 추측할 수도 있었다.
또한 잔을 옮기는 신하들의 엄숙한 걸음과 동작은 시종일관 느리지만, 일정한 박자를 가지는 듯 조심스러워, 한 걸음걸음이 예를 갖추는 과정임을 잊지 않게 했다.
웅장한 공간 속에 배치된 소소한 무대 장치들도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왕실 가족들이 앉는 자리를 방석 대신 조명으로 처리하여 관객이 가족들의 자리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고, 공연이 수월하게 진행되도록 했다. 주요 절차에서 전해지는 황제의 잔은 조명장치를 장착하여 진행 흐름의 이해를 도왔다. 투명한 붉은색 천이 사용되는 주렴은 의례와 공연 때마다 내리고 올려지며 무대의 공간 활용을 극대화했다.
당시 진연에서 진행됐던 ‘태극기 앞에서 만세 삼창’에 착안하여, 행사가 열렸던 관명전 건원문을 대신하여 극장(국립국악원 예악당) 정문에 대한제국 태극기를 걸고 그 아래 수문장을 배치하여 입석 전부터 근대라는 시대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선보인 ‘선유락(여성 무용수들이 배를 끌고 배 떠나는 정경을 묘사하는 궁중무용)’은 잔치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모든 주렴이 걷히고, 멀리 있던 악단의 모습도 선명하게 보인다. 엄숙한 분위기는 조금 더 흥이 더해진다. 아마도 이 순간, 왕실 가족들은 조금 더 긴장을 풀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바다와 인간을 이어주는 배, 그리고 그 안과 밖의 인간을 형상화하여 어민의 삶을 노래한 무용이다. 그 화려함과 웅장함은 잔치의 휘날레를 내리기에 충분했다.
왕실의 잔치는 단순한 잔치를 넘어서, 국가적 기원을 담은 음악, 춤과 함께 군신간 서로의 예를 갖추고 유대를 다지며 가족의 안녕은 물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120년 만에 재현된 무대는 원 공연과 우연한 유사성을 갖기도 한다. 1902년의 진연은 역병(콜레라)과 시설문제 등으로 2차례 연기되어 음력 11월로 연기되었다. 올해 공연 역시 같은 임인년 3월 예정이었으나, 코로나와 홍수 등으로 인한 시설문제로 2차례 연기되어 비슷한 시기인 양력 12월에 재현이 이루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연출과 무대미술을 맡은 박동우 연출은 이번 공연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를 겪는 등 어수선한 시기에, 1897년 고종은 ‘광무개혁’을 통해 일본 침략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켜내고자 했습니다. 1902년,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칭경예식(경사를 치르는 의식)으로 근대 국가로서 대한제국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으며, 대외적으로 국가의 단결된 모습과 힘을 과시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며, 공연은 대한제국이라는 시대적 정서와 궁중의식에서 연주된 찬란한 궁중예술의 아름다움을 무대에 재현하고자 했습니다. 전통방식으로 재현된 이번 공연을 통해 많은 관객들이 궁중예술의 멋을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명성황후 시해(1895), 아관파천(1896,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김), 광무개혁(1897) 등 격동의 시기를 거치고 난 몇년 후인 1902년, 황태자의 5번에 걸친 간청 끝에 이루어졌던 ‘임인진연’. 왕족과 당대 최고의 예인들이 수놓았던 그날의 찬란했던 춤, 노래, 연주는 역설적이게도 격동의 시대를 이겨내고 국격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대한제국의 간절함을 담았다. 하지만, 진연에 담은 염원은 냉엄한 국제적 현실을 극복할 수 없었고,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한일합병조약(경술국치)이라는 아픈 역사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묻혔다.
120년이 흐른 지금, 국가의 주인은 황제(왕)이 아닌 국민이 되었고, 우리는 이 땅 한반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으며, 문화와 국력은 성장하고 있다. 2022년 현재에 재현되는 그날의 진연은 단순한 시간여행을 넘어서, 시대를 읽는 거울이자 교훈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날의 진연을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고, 어떤 의미로 재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할지는 현재 우리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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