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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김예진, ‘동초제 흥보가’ 연구집 2권 펴내”우리 동초제는 오자가 없고, 이면에 맞는 소리여!" 판소리의 이면(裏面), 새롭게 구조화시킨 판소리 이면 분석 방법론을 통해 동초제 흥보가를 심층분석한 연구서와 음반이 발매되었다. 故 이일주 명창의 제자이자, 교육자로도 활동 중인 김예진이 ‘동초제 흥보가’에 대한 연구 저서를 펴냈다. 앞서 3월 초에 발간된 <판소리 이면으로 보는 동초제 흥보가>에 이어 '김예진 판소리 악보집 – 동초제 흥보가'까지 총 2권의 발간 소식을 전한다. 저자인 김예진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였던 故 이일주 명창의 제자로,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졸업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전문사(M.A), 중앙대학교 한국음악이론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제20회 전주대사습놀이 학생 전국대회 판소리 장원, 제22회 동아국악콩쿠르 판소리 일반부 금상, 제49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 차상 등, 故 이일주 명창 문하에서 동초제 소리를 수학, 다수의 독창회와 협연 무대를 통해 실력을 입증하였다. 현재 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국립전통예술중학교에 출강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전통음악의 체계적인 전승과 동시대의 음악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방법을 모색, 폭넓은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젊은 명창이다. 동초제는 동초(東初) 김연수(1907-1974) 명창이 재정립한 유파로 판소리 다섯 바탕을 전승하며 故 오정숙(1935-2008) - 故 이일주(1935-2023) 명창의 후학을 주축으로 지금도 활발히 전승되고 있다. 동초제 흥보가는 여러 흥보가를 바탕으로 하여 재구성 되었으며 놀보 제비 노정기와 놀보 박 타는 대목의 전승으로 민속자료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동초제는 확실한 소리의 이면을 담아낸다고 평가받기도 하는데, 이면의 중요성은 저자가 소리 공부 시, 스승에게 매번 듣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판소리 이면으로 보는 동초제 흥보가'는 판소리 이면(裏面)의 학문적 구조화를 통해 좀 더 일반화된 지식으로 판소리 연구의 지평을 넓히고자 진행한 작업물이다. 판소리 이면에 대한 다양한 측면의 선학 연구와 의견을 정리하여 판소리 이면을 정의하고 부합성을 도출할 수 있는 연구 분석틀을 구조화하고, 동초제 흥보가의 전반적 검토를 통해 앞서 구조화한 이면 연구 분석틀을 동초제 흥보가에 적용 및 분석하여 이면의 부합성을 규명하였다. 이면(裏面)이라는 예술적 용어가 가진 추상적인 개념들로 인해 실제적 측면에서 학문적 준거틀 마련이 어려워 미흡했던 연구에 새롭게 구조화시킨 판소리 이면 분석 방법론을 적용하여 동초제 흥보가를 분석하였다는 측면에서 학문적 기여도가 매우 큰 가치 있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예술적 용어인 ‘이면’을 다루고 있기에 기존의 크고 두꺼운 이미지의 학술서가 아닌 독자가 펼치기 두렵지 않도록 적당한 두께감의 판형으로 함축적으로 정리하였다. 저자 김예진은 본 연구가 이면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과 판소리계 후학들에게 많이 공유가 되어 이를 통해 이면에 대한 접근성의 벽이 낮아지고, 관심을 높여 또 다른 측면에서의 이면 연구들이 활성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우리 흥보가는 놀보가도 있고 구성이 참 좋아!" 이어 발간된 '김예진 판소리 악보집 – 동초제 흥보가'는 동초제 흥보가 전곡을 채보 정리한 악보집이다. 본 악보집은 2003년 신나라뮤직에서 발매된 '이일주 명청 흥보가'의 전체 악곡을 실음 채보한 것으로, 동초제 흥보가에 대한 연구를 비롯하여 난석(蘭石) 이일주 명창의 음악과 그의 전승 활동에 대한 존경을 담아낸 결과물이다. 따라서, 동초제 흥보가의 후반부인 놀보 제비노정기와 놀보 박타령을 놀보가로 구분하는 것도 스승의 구분에 따른 것으로 홍보 중심의 흥보가와 놀보 중심의 놀보가로 정리되었다. 판소리를 공부하는 전공자뿐만 아니라 판소리 애호가들이 실제 학습 시의 활용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을 고안, 부피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로형으로 제작하였다. 특히 주요 사설에 대한 해설을 제공하여 동초제 흥보가의 선율적 흐름과 사설의 상관관계를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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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오세창 선생 희귀 서예 작품, 공개3.1운동 당시 33인의 민족대표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 오세창(1864~1953)선생의 유품인 서예 작품이 백석대 박물관에서 일반에 공개된다. 백석대는 28일 교내 진리관 대학혁신위원장실에서 몽골후레정보통신대 이재복 부총장으로부터 오 선생의 서예 작품 등을 기증받았다. 이 부총장의 기증품 중 관심을 끄는 것은 오 선생이 한자 '화목할 화'(和) 자를 쓴 서예 작품이다. 전문가들은 이 작품에는 '국민 모두가 화합된 힘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의미와 '부부는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는 뜻이 함께 담겨 있는 것으로 분석한다. 이 부총장은 "최근 백석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대학이 여러 박물관을 만들어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켜가고 있는 데 감동받았다"며 "특히 박물관 안에 유관순 열사 전시관을 조성한 것을 보고 같은 독립운동가인 오 선생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증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백석대는 오 선생의 작품을 박물관에 전시해 일반에 공개하기로 했다. 이 부총장은 오 선생의 서예 작품 외에 소장하고 있던 김소월의 '못잊어'(1962), 노천명의 '사슴의노래'(1958), 김윤식의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1960) 등 지금은 구하기가 쉽지 않은 시집도 함께 기증했다. 백석대는 이들 시집을 시 전문 문학관인 '산사(山史) 현대시100년관'에 전시할 예정이다. 기증자인 이 부총장은 단국대·세종대 대학원에서 고전문학으로 석·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배재대에서 일을 하다 2021년 몽골 후레정보통신대학으로 가 교육자로서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장택현 백석대 대학혁신위원장은 "기증자의 뜻을 받들어 모든 작품을 우리 국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전시해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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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 창작춤 100년사 담은 50개 작품 선보인다한국 창작춤을 이끌어 온 근현대 춤꾼들의 여정을 50개 작품으로 선보인다. 국립정동극장이 '세실풍류 : 법고창신, 근현대춤 100년의 여정'을 개최한다. 4월 한 달간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총 8회에 걸쳐 열리는 이번 공연의 주제는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옛것을 바탕으로 늘 새로움을 창조해온 근현대춤 100년의 여정을 다룬다. 1920년대 근대 신무용의 등장부터 전후 무용학원 시대와 국립무용단 창단기의 춤 그리고 1970년대 춤의 새로운 도화선이 되었던 한국창작춤을 거쳐 현재의 컨템퍼러리 작품들까지 근현대 100년을 관통하는 우리춤의 변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주 4일(목)과 9일(화)에는 1920년대 서양 문화의 도입과 함께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를 바탕으로 새롭게 탄생했던 신무용을 다룬다. 근대 신무용기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 새로운 개념으로 한국창작춤의 태동을 알리는 시기였다. 신민요 ‘아리랑’을 우리나라 최초로 무대화하며 신무용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배구자와 신무용의 성행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함으로써 신무용 시대를 연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 조택원의 작품을 김선정, 노해진, 안나경, 최신아, 국수호, 김형남·김호은이 무대에 올린다. 그 뒤를 이어 한국전쟁 후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위 창작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신무용의 외형적 변화를 이뤄내며 한국 무용계의 단단한 토대를 다진 신무용 2세대 김진걸, 김백봉, 최현, 황무봉, 최희선, 송범의 작품을 정민근, 안귀호, 정혜진, 김혜윤, 윤미라, 손병우, 김장우·최영숙이 선보인다. 둘째 주와 셋째 주에는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새로운 한국춤을 모색했던 1970년대 이후의 한국창작춤을 만나볼 수 있다. 여러 국제 행사를 통해 해외 무용 단체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무용 전문 조직체와 교육기관이 설립되며 더욱 다채롭고 창조적인 춤이 등장한 시기로, 당대를 대표하는 안무가 김매자, 배정혜, 국수호, 문일지의 작품이 무대 위 펼쳐진다. 그들의 뒤를 이어 한국창작춤을 이끌어온 교육자, 시·도립 무용단의 수장, 탁월한 안무력의 남성춤꾼들의 작품 등 한국 창작춤 작품 24편이 4회차에 걸쳐 공연된다. 마무리를 장식할 25일과 30일에는 2010년대 이후 장르 간 경계를 넘나들며 한국 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가장 활발하게 동시대의 창작 동향을 이끌고 있는 컨템퍼러리 춤꾼들의 작품 12편이 무대에 오른다. 시대의 변화에 맞게 폭넓어진 한국춤의 언어를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낸 작품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다. 국립정동극장 정성숙 대표이사는 "근현대의 급변하던 격동의 세월 속에서 시대에 따라 우리만의 독창적인 색깔로 새로움을 추구했던 한국 창작춤의 흐름을 담아낼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귀한 자리에 춤을 사랑하시는 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라고 공연을 올리는 소감을 전했다. 4월 4일부터 매주 화·목 19시 30분에 공연된다. 3월 7일부터 국립정동극장 공식 홈페이지 및 인터파크를 통해 예매할 수 있다. 공연일 테마 출연자 작품명 4/4(목) <조선의 마음에서 태어난 춤> 1920년대 이후: 신무용의 등장 김선정 배구자의 에여라 노아라 노해진 배구자의 타령춤 안나경 최승희의 초립동 최승희의 검무_격(格) 최신아 최승희의 쟁강춤 국수호 조택원의 가사호접(袈娑胡蝶) 김형남·김호은 조택원의 만종 4/9(화) <꺼지지 않는 창작의 불씨> 1950년대 이후: 신무용 2세대 정민근 김진걸의 내 마음의 흐름 안귀호 김백봉의 청명심수 정혜진 최현의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 김혜윤 황무봉의 연연(連緣) 윤미라 최희선의 달구벌입춤(達句伐立舞) 손병우 송범의 참회 김장우·최영숙 송범의 은하수 4/11(목) <춤의 새로운 도화선> 197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의 등장 최지연 김매자의 광(Shining Light) 김성의 김매자의 日舞 <하늘의 눈(目)> 이고운 배정혜의 유리도시 김세령 배정혜의 떠도는 혼 계현순 문일지의 멀리 있는 무덤 이윤경 국수호의 비천(飛天) 4/16(화) <타오르는 창작의 혼> 197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 2 윤덕경 해를 마시다 정은혜 언제나... 그리고, 그러나 백현순 다시 꽃밭으로 이애현 봄날의 기억 태혜신 사르다 남수정 락무(樂舞) 4/18(목) <미래를 밝히는 정열의 횃불> 197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 3 손인영 유유유(有.柳.流) 박시종 달빛아래, 농(弄) 김수현 홀연춘풍 만목개화(忽然春風 蔓木開花) 윤명화 메타포 3 홍경희 흰 바람 소리 윤성주 담청 4/23(화) <거침없는 창작의 불길> 200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 4 이정윤 백송(白松) 황재섭 금시(琴詩) 조재혁 현 一. 안덕기 허튼가락춤 김평호 정글-봉우리 김용철 붉디 붉은 4/25(목) <새로 피어나는 춤> 2010년대 이후: 컨템퍼러리 한국춤 이이슬 HOME(solo ver) 황서영 버티- 송윤주 MUSE 이지현 한몫 보연 율곡(汩曲) 유선후 우아한 우주(Elegant Universe) 4/30(화) <청춘의 춤, 작열하는 푸른 불꽃> 2010년대 이후: 컨템퍼러리 한국춤 조인호 BIRTH 박기환 香그이 김주빈 새다림 SeDarim 박철순 동화(홀로 서기) 기무간 비로소:걷는 사람 정명훈 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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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완창판소리 3월 '채수정의 흥보가-박록주제'국립극장은 '완창판소리-채수정의 흥보가'를 3월 16일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한다.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보가’ 이수자이자, 교육자·판소리 연구가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채수정 명창이 시원하고 묵직한 소리로 박록주제 박송희류 ‘흥보가’를 들려준다. 채수정은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전정민 명창에게 ‘수궁가’, 성우향 명창에게 ‘심청가’, 오정숙 명창에게 ‘춘향가’를 배웠고, ‘흥보가’ 예능보유자였던 박송희 명창(1927-2017)을 30여 년간 스승으로 모시며 ‘흥보가’와 ‘적벽가’ ‘숙영낭자가’ 등을 튼실하게 익혔다. 여러 명창으로부터 ‘목이 좋다’는 평가를 받은 채수정은 2011년 임방울국악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며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미국·일본·영국·프랑스·브라질 등 국내외에서 ‘흥보가’와 ‘적벽가’를 여러 차례 완창하며 공력을 다졌고,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로 후학을 가르치는 동시에 국악 연구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2022년에는 (사)세계판소리협회를 출범한 후 <판소리 20시간 릴레이 프로젝트> 등 신선한 판소리 공연과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해 주목 받고 있다. 채수정 명창이 부를 박록주제 ‘흥보가’는 섬진강 동쪽 지역에서 발달한 동편제의 명맥을 잇는 소리다. 송만갑-김정문으로 계승되어온 동편제 소리를 박록주 명창이 새로 다듬었다. 사설을 간결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장단의 변화를 통해 골계적 대목의 재미를 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중에서도 채수정 명창이 스승에게 배운 박송희류 ‘흥보가’는 기존 박록주제 사설에 ‘놀보 박타는 대목’을 덧붙이고 수정하는 등의 작업을 거쳐 만들어졌다. 재담과 잡가가 많다는 이유로 여성 소리꾼에게는 잘 전승되지 않았던 ‘놀보 박 타는 대목’이 담긴 것이 특징이다. 돈과 쌀, 온갖 비단과 은금보화가 나온 흥보 박과 달리, 놀보가 타는 박에서는 남사당패·초란이패 등 익살스러운 군상이 등장해 재물을 빼앗고 그를 혼낸다. 흥보가 받는 ‘상’과 놀보가 받는 ‘벌’을 대비해 골계미를 살리고 권선징악의 교훈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했다. 채수정 명창 특유의 힘 있고 시원한 통성으로, 해학미와 비장미를 두루 갖춘 박록주제 박송희류 ‘흥보가’의 진면목을 느껴볼 기회다. 소리판을 쥐락펴락하는 능력이 탁월한 채수정은 판소리 고유의 즉흥성을 살려 관객을 무대로 끌어들이는 데에도 능통해 활력 넘치는 소리판을 만들어낸다. 국립극장에서 3년 만에 ‘흥보가’를 다시 완창하는 채 명창은 "스승이 남긴 소리를 반복해 들으며 스스로의 소리를 점검해보고 있다”라며 "나만의 소리 스타일을 구현하기보다는 스승이 표현하고자 했던 소리 어법과 본래 색을 최대한 살려 그 가치를 전하고 싶다”라고 각오를 밝혔다. 고수로는 명고 김청만과 박근영이 함께하고, 송지원 음악인문연구소장이 해설과 사회를 맡아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채 명창은 판소리를 연구하는 학자이기도 하다. 이화여대 한국음악과에서 최초의 판소리 음악학 박사가 되었고, 고전문학인 판소리 사설을 연구해 경희대 국문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서사문학인 판소리를 문학으로 접근하여 판소리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그는 2015년 한예종 전통예술원 교수로 임용돼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2022년 사단법인 세계판소리협회를 만들어 판소리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어서 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11월에는 판소리 축제인 제1회 월드판소리페스티벌을 개최하고, 판소리의 유네스코 등재 20주년을 기념해 서울 남산국악당에서 20시간 동안 60명의 소리꾼이 판소리를 연창하는 '판소리 20시간 릴레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채교수는 " 월드판소리페스티벌이 인류무형문화유산 '판소리'의 셰계화의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다짐했다. 이번 박록주제 박송희류 '흥보가' 완창판소리는 지난 1월 13일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박송희제 적벽가 완창발표회 이후 두 달 만에 선보이는 판소리 완창이다. 소리꾼 한 명이 판소리 완창을 두 달 간격으로 하는 것은 체력적으로 크게 부담이 되는 일정이다. 그는 "판소리는 배우는 게 20년, 혼자 공부하는 독공이 10년이고 이후에는 (수련한) 소리를 써먹어야 한다"며 "평생 불러왔던 것이고, 기회가 있을 때 한 번이라도 (완창을) 더 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고 밝혔다.1984년 시작된 국립극장 완창판소리는 당대 최고 명창들의 판소리 한바탕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권위 있는 무대다. 상반기에는 김금미(4월·박봉술제 적벽가), 조주선(5월·강산제 심청가), 남상일(6월·정광수제 수궁가)의 무대가 예정돼 있다. 국립극장 '완창판소리'는 1984년 시작된 이래 당대 최고의 명창들이 올랐던 꿈의 무대이자, 판소리 한바탕 전체를 감상하며 그 가치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최장수 완창 무대다. 39년간 공연되며 소리꾼에게는 최고 권위의 판소리 무대를, 관객에게는 명창의 소리를 가깝게 접할 기회를 제공해왔다. 2024년에도 전통의 정체성을 지키며 소리 내공을 쌓고 있는 소리꾼이 매달 이 무대를 통해 소리의 멋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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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 윤치호 인정애국가에 대한 접근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기원 또는 명칭일 수도 있고, 형태나 내용에 대한 접근이 있을 수 있다. 특히 노래라는 점에서 전통성이나 전수 현상이 중요한 과제일 수 있다. 그런데 애국가에는 이런 과제와는 달리 의외적으로 우리 현대사와 관련하여 배태된 작사자 문제가 걸려있다. 이는 역경의 근대사를 함께한 애국가의 숙명이기도 하다. 보편적인 노래의 유통과 전승이 아닌 익명성과 의례성으로 전승된 특성으로 하여 작사자 여하(如何)는 중요한 과제로 오른 것이다. 이 때문에 국가 기관인 문교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가 이를 규명하기 위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1년 반이란 기간을 갖고 조사를 한 바 있다. 그 결과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런데 한국전쟁 복구 중이 1956년 ‘국론분열을 우려하여’라는 정치적 이유로 이를 국가에서 공식화 하지도, 법제화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잠복되었던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문제는 90년대 들어 재론이 되었다. 1998년 정부수립 50주년, 국가상징연구회 창립5주년을 기념한 세미나 ‘國歌 愛國歌에 대한 再檢討’이다. 그리고 2017년 6월 한국 프레스센타에서 개최한 흥사단 주최 ‘애국가 작사자 규명 학술심포지엄’에서 김연갑이 발표한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이다’에서 학술적으로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확정받았다. 그동안 반대론자들이 제기한 ‘譯述’의 해석 문제, 가사지의 ‘1907年 윤치호作’에 대한 오해, 이광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오류 등을 해결하였음은 물론, 다음 세 가지 핵심 문제를 해결하였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독립신문 서재필 기록을 통한 ‘무궁화노래’의 윤치호 작사 확인 ②중앙대학교 안춘근(순흥 안씨)교수 발표 1904, 5년 필사 자료 3편의 위작 판명 ③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 3차 회의 결과 ‘윤치호 작사 확인’ 등의 성과를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함에도 일부 흥산단과 좌파계열의 진영논리로 윤치호 자사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를 온전하게 인정하게 하는 데는 우선 윤치호 작사 사실에 대한 더 면밀하고 자료와 해설로 설득을 기울여야 한다. 이 글 역시 이런 의도에서 그동안 작사자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자료임에도 전체적인 조명이 도외시된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조사위원회가 결성되기까지 얼마나 혼란이 격심했고, 그것의 해소가 얼마나 난문제였는가를 확인할 수가 있다.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잃은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되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조사자료집’이지 ‘조사결과보고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부연하면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사를 위하여 사전에 기본 자료를 취합하여 위원회 위원들에게 제공한 것이지, 조사 결과를 수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사자료 중에 "내용이 현행 애국가와 동일한 者의 有無如何는 未詳임”(1쪽)이란 표현 등을 오해하여 "조사자료에 작사자 미상이라고 하였다”는 등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는 제1쪽의 서문격의 글, ‘애국가화창 사례’, ‘애국가의 종류’, ‘작사설의 종류’, ‘부록’으로 구성되었다. 총 54쪽의 프린트본(가리방)이다. 목차는 없고 1쪽부터 본 내용이다. 서문에서는 작사자 거론 5인을 적시하고 세 가지 설(說)을 제시하였다. 내용의 첫 문장은 "現行愛國歌作詞者로 論義 되고 있는 인물로는 尹致昊 安昌浩 崔炳憲 金仁湜 및 閔泳渙의 五人이고 또한 單獨作詞說, 合作說 및 改作說이 있다.”고 하였다. 합작설은 최병헌과 윤치호의 합작설이고, 개작설은 민영환의 작사를 김인식이 개작하였고, 그 후 안창호가 또다시 개작했다는 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개작설을 제기했데, 주요한과 이광수의 주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시기에 안창호가 개작하였다는 설이다. 이때 거론된 인물은 5인이고, 이들 대상의 단독작사설, 합작설, 개작설 세 가지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애국가 화창(和唱) 사례 문헌과 신문 소재 애국가 기록을 3쪽에 걸쳐 인용하였다. 증보문헌비고 ‘악고’편에 광무4년 군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했다고 한 기록을 인용하였다. 한국법전 제2장 ‘의식’편에 1908년 애국가를 연주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다. 신문으로는 대한매일신보와 그리스도신문(2회 인용)에 애국가와 황실가를 화창 또는 제창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다. 전자는 8회, 후자는 2회 인용하였다. 문헌과 증언이 뒤석여 있다. 애국가의 종류 "애국가의 종류가 많았던 모양으로”라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서북학회보를 인용하고, 김양선 목사와 장지영과 최남선의 증언을 수록했다. 애국가와 무궁화가와 국가 세 종류를 제시했다. 특히 1902년 학부(學部) 제정 에케르트 작곡 ‘대한제국애국가’와 관련한 기록과 위의 세 분의 증언을 통해 그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가사 일부도 제시했다. 시선을 모으는 것은 이를 ‘애국가’가 아닌 ‘國歌’로 명기했다는 점이다. 이는 문제의 현행 애국가를 ‘국가’는 이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있었음을 알게 한다. 작사설 서론에서 밝힌 5인에 관련한 작사설을 1955년 5월 13일 이전까지의 신문 기사와 증언 등을 분류하여 제시하였다. 민영환(2/1쪽), 안창호작사설(3쪽), 김인식작사설(1쪽), 최병헌작사설(1쪽), 윤치호작사설(6쪽) 순으로 관련설을 취합하였다. 윤치호 항목은 가장 많은 내용을 담았다. 이 윤치호설은 앞의 4인에서 제기한 설과 교차 검증을 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이 항목에 대해서는 다시 집중 분석을 하기로 한다. 부록 증보문헌비고와 한국법전 수록 애국가 기록과 독립신문 투고로 게재된 애국가 18편, 대한메일신보 잡보란 수록 무궁화가 2편과 애국가 수록되었다. 그리고 황성신문 ‘國歌調音’ 기사와 ‘대한제국애국가’ 가사를 수록했다, 단행본으로는 ‘한영서원 발행 프린트본 창가책 인용 애국가를 수록하고 백종섭씨 소장 창가책에서 애국가(찬미가 제1장), 현 애국가 가사를 인용하였다. 한편 서북학회보 ‘西友’에서 "학부에서는 애국가 통일 위원을 선정하였는데 위원 중에는 학부협판 윤치호의 이름도 있다.”를 인용하였다. 참고문헌 목록 21종의 참고문헌을 기록했다. 완조실록(王朝實錄-고종·순종 실기와 승정원 비서원, 규장각일기), 관보, 공사관기록, 독립신문 외 4종, 한국통사, 대한자강회보 외 2종 유년필독(幼年必讀 왜정시대 압수 책) 그리고 조선고가요집(朝鮮古歌謠集 손진태 편)이다. 의외인 것은 무가(巫歌)를 모은 ‘조선고가요집’이다. 이 시기 애국가를 수록한 해방 직후 발행의 노래책이 10여 종에 이르는데도, 이 같은 관계가 없는 무가집을 참고자료로 포함시켰다는 것은 위원회의 무성의함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는 5인에 대한 설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수집된 자료들을 5개 항목으로 정리했다. 이 중에 작사설 항목은 이 자료집의 핵심 주제로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민영환부터 윤치호 작사설까지 살피기로 한다. 1. 민영환 작사설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작사설은 두 사람의 증언에서 제기되었다. 장도빈(1888~1963)과 김동욱의 증언인데, 전자는 역사학자로 서울신문 1955년 4월 16일 자에 밝힌 내용이다. "거금 47, 8년 전 학생시대에 이미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를 불렀다. 민영환 작이라고 들었다.”고 하였다. 1908년에 들었다고 하였다. 이 증언은 부정확하다. 현 애국가가 1907년에 작사되었기에 들었던 시기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민영환 작사로 거론된 것은 1902년 학부에서 제정한 ‘대한제국애국가’이다. 그러므로 장도빈은 현 애국가와 ‘대한제국애국가’를 혼동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증언도 하였다. "당시에 안창호작 애국가를 여러 번 들은 일이 있는데 현행 애국가는 아니었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안창호작’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아 ‘거국가’인지 아니면 1908년 2월호 태극학보 ‘愛國生’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찬 愛國歌’인지, 또 아니면 신한민보 1910년 10월 12일 자 기사 ‘大韓魂’에 포함된 ‘애국가’인지 불분명하다. 다만 안창호 작사 애국가가 있을 수 있음을 유념하게 하는 동시에 현 애국가는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해 준 것이다. 김동욱의 증언은 출전이 없다. 조사자료를 꾸미는 과정에서 취합한 증언인듯하다. 당시 86세로 "기미년에 윤치호씨와 더불어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나 애국가 작사자는 민영환에 틀림없다”(8쪽)라고 하였다. 이 증언 역시 1902년 작곡된 ‘대한제국애국가’와 혼동한 듯하다. 이런 오해의 배경은 이 애국가 악보 서문에 "大師府會計局總長陸軍副將 正一品勳一等 閔泳煥”으로 되어있기 때문인 듯하다. 2. 안창호 작사설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작사설은 매우 관심을 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사자 조사를 하게 한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이다. 먼저 두 가지 출전이 제시되었다. ‘도산안창호’(1947. 5 30 刊)와 ‘도산안창호웅변전집’(1950 5 20 刊)으로, 여기에서 네 단락을 인용하였다. ①"도산이 상해 임정시대에 현행 애국가 가사 중 ‘임금을 섬기며’ 부분을 ‘충성을 다하야’로 修正하였다.” ②"원래 이 노래는 도산의 作이어니와 이 노래가 넓리 불려져서 국가를 代身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自己의 作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云云” ③"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고 하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對答이 없었다. 그러나 否認도 하지 않았다. 云云” ④"도산이 지은 노래는 여러 十篇이 있거니와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가 가장 잘 된 作品이라 云云” 이상의 네 가지 주장은 모두 1947년 중반에 발행된 이광수가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에 배경을 두고 있다. 이것이 안창호설의 한계이기도 한데, 관련 자료들 간의 교차 검증을 하면 다음과 같다. ①은 ‘신한청년’ 창간호에 게재된 애국가 4절에 ‘충성을 다하여’로 수정되어 나오니, 이를 안창호가 수정했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 단 수정 시점이 창간호 발행 시점인 1919년 12월 이전이라는 단서가 충족되어야 한다. ②와 ③은 같은 맥락의 증언이다. 이 문제는 안창호가 언제 작사했는가와 왜 자신이 작사했으면서 이 사실을 숨겨야 하느냐 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기된 안창호 작사 시기는 1908년 9월 26일 대성학교 개교 이후 윤치호 교장에게 안창호가 지은 것을 보여주고 후렴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얻어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은 윤치호가 애국가(찬미가 제14장)를 1908년 6월 25일 발행한 역술 <찬미가>에 수록한 이후라는 문제가 확인된다. 여기에다 "왜 자신이 작사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명료하게 답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안창호의 겸양 때문이다” 또는 "윤치호의 명성을 이용하여 널리 전파시키려는 의도에서다”라는 등의 말이 있기도 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반론이 있는 상태이다. 그 하나가 조사보고서가 나오기 직전인 1955년 4월호 ‘신앙생활’에 밝힌 김인서(金麟瑞, 1894~1964) 목사의 강력한 반론이다. "만일 안 선생이 창작했다면 직언했을 것이다. 성일관(誠一貫)의 안 선생이 역사의 대(大) 문자(文字)에 대해 겸양의 침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왜 원작자를 밝히지 아니했을까? 일제 압박 하에서 윤선생(윤치호)을 애국가 작자라고 밝히지 못한 것은 그의 신변을 염려한 것이요, 일제 위력 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애국가 작자를 밝히면 애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도산 안창호>의 내용에 대해서는 조사자료에서도 제기되었다. 그것은 이광수의 두 번째 부인 허연숙(許英肅, 1897~1975)이 1955년 4월 20일 자 자유신문에 증언한 것으로, 윤치호의 딸이 이에 대해 問議해와 이광수가 설명하여 해득시켜 보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와는 상반된 증언이 있다. 윤치호 작사설 자료에 수록된 주영환(朱榮煥)의 서면 증언이다. "이광수의 도산전기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 씨라 한 것은 이광수의 실책이다. 출판 후 춘원은 안영자 씨를 통하야 訂正할 기회를 만들기로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광수는 반민족행위특별법에 의한 처벌을 받는 등 수난을 당하다 6,25 전쟁 혼란 와중에 납북을 당했다. 이런 상황임으로 ‘도산안창호’의 내용을 수정할 수 없는 처지를 말한 것이다. 이로서 안창호의 가장 중요한 증언은 윤치호 딸의 오류에 대한 항의가 있었다는 사실로 증거력이 상쇄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가족이나 친지의 증언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이어서 반드시 교차 검증을 거쳐야 한다. 안창호 측은 허영숙의 증언만을 거론하나 이 같은 대비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전기소설과 관련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아주 근원적인 문제인데, 앞장 ‘도산 안창호’의 해악(害惡)‘에서 밝혔듯이 이 ‘도산 안창호’는 애국가와 관련해서는 이미 문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상태라는 점이다. 되풀이하지만 이광수의 글이라면 이렇게 파편적이고 탈맥락적일 수가 없는 데다 ‘살아있는 태극기와 애국가’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이 내용이 생략된 사실에서와 같이 편집과정에서 가필과 삭제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어서 주요한(朱曜翰, 1900~1979)의 중장이 있다. 조사자료에는 두 가지 증언을 수록했다.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 자 기고문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에서 제기한 것을 인용한 것인데, 하나는 상해에서 안창호가 ‘임금을 섬기세’를 ‘충성을 다하여’로 改作을 하였을 때 자신에게 問議(9쪽)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 대해 같은 조사자료 같은 항목에서 최남선이 "만약 안창호가 문의를 하였다면 그 직위로 보면 이광수에게 하였을 것”(11쪽)이라고 지적을 하였다. 이는 주요한의 나이가 20세라는 점으로 보아 최남선의 지적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대성학교 교원이었던 김동원(金東元)으로부터 들었다는 말이다. 그 내용은 대성학교 시절 안창호가 윤치호의 ‘성자신손’(무궁화노래)을 ‘동해물과 백두산이’(애국가)로 개작하였다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선 여러 편의 글에서 밝혔듯이 대성학교가 개교하기 이전에 윤치호는 역술 <찬미가>에 수록,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함에서 이런 주장은 원천적으로 무시될 수밖에 없는 낭설인 것이다. 다음은 최일봉(崔日鳳)이 서면(書面)으로 제출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의주 강연에서 안창호가 자기가 지었다는 "애국가를 배워주었다 云云”이라고 한 부분이다. 또 하나는 같은 맥락의 주장으로 안창호가 임정시절 내무총장 비서실에서 "이유필(李裕弼) 입회하에 안창호 선생은 애국가는 내가 창작자야 하고 언명하였다. 云云”한 것이다. 전자는 자신의 경험이나 이의 진정성은 의문이 된다. 그리고 후자는 안창호설의 상투적인 주장이라 위의 김인서 목사 주장으로 답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허영숙 씨의 증언을 살핀다. 두 가지를 인용했다. 하나는 ‘도산안창호’의 내용에 대해 윤치호 측에서 이광수에게 문제를 제기했으나 해득하고 돌아갔다는 것과 자신이 진명학교 시절 김인식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고 하며 "도산이 作詞하야 愛蘭 민요곡을 부쳐서 부르다가 김인식 씨가 음악가로서 名聲이 있었으므로 作曲을 부탁했던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전자는 앞에서 교차 검증을 통해 살핀 바와 같고, 후자는 문맥상 애매하여 논의 할 필요를 갖지 못하나 김인식설의 배경 정도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 김인식 작사설 음악교육가 김인식(金仁湜, 1885~1963)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사자를 조사하게 되었을 때 크게 관심을 둔 인물이다. 직접 직원이 방문하여 증언을 청취하기도 했고, 음악평론가 이상만(李相萬, 1935~)이 방문하여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이런 관심을 끌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점에서 인데, 하나는 1907년을 전후한 시기 여러 학교와 기관에서 지도한 음악가이고, 둘은 1955년 당시 작사설 거론자 중 유일한 생존자라는 점에서다. 그의 활동은 우리나라 근대음악사의 초기 상황에서 종횡한 음악가이다. 김인식은 1896년 감리교에서 경영하던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 입학하고, 그 뒤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선교사 부인인 헌트(Hunt)와 정의여학교(正義女學校) 교장 스눅(Snook)에게서 성악·오르간·악전을 배웠다. 이후 바이올린과 코넷까지 배웠는데, 오르간 연주는 뛰어나 숭실중학 3학년 때 1학년 음악수업을 맡을 정도였다. 1907년 미국 유학 준비차 상경하였다. 그런데 서울의 여러 사립학교에서 음악지도를 요청받고 교사로 활약하게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부설 상동청년학원 중학부에서 서양음악을 지도하는 한편, 진명(進明)·오성(五星)·경신(儆新)·배재(培材) 등 여러 사립학교에서도 서양음악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합창단인 경성합창단(京城合唱團)을 종교교회(宗橋敎會)에 적을 두고 활동하였다. 이런 활동상에서 애국가 작사설의 인물로 시선을 끌만 하였다. 조사자료에는 1908년에 진명여학교 창립기념에 쓰기 위해 ‘애국가’란 제목으로 작사를 하였다는 주장을 하였고, 이에 대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세브란스의전에 다니던 박서양(경성합창단 단원)이란 학생이 부르는 ‘성자신손~ 운운’하는 "皇室歌(作者不明)를 듣고 이것에서 힌트를 얻어 작사·작곡을 하여 기념식에서 불렀고, 그 후 기호학교에서도 가리쳤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7년 후에 작고하였음에도 작사자로 제외가 되었다. 이에 대한 사정과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1998년 발간한 <애국가 작사자 연구>에서 상술하였지만,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1907년을 전후한 당시 윤치호와는 YMCA 활동과 한영서원 하기 음악강습 교사 활동, 그리고 종교교회와의 관련에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4장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는 점. 둘째, 1910년 경신학교 교사 재직 시 <보중친목회회보> 창간호에 발표한 <애국가>가 무궁화가 가사에 자신이 작사한 것을 더하여 ‘올드랭 사인’곡으로 발표하며 ‘김인식 작사’로 한 바가 있다. 이것이 현 애국가가 아니라는 점. 셋째, 이 같은 사실을 생존 시에 밝히지 않았다는 점. 넷째, 작사자조사위원회의 출석 증언 요청을 거부하였다는 점. 마지막은 남긴 일기에 "찬송가에 손을 얹고 작사하였다”라고 하였지만, 그 일기를 쓴 일자가 작사자 조사 직후라는 점 등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외 김인식설에는 김한규 고유상 홍만유, 그리고 당시 진명여학교 학생 3인의 증언도 있다. 이는 모두 ‘김인식 작사’에 대한 오해의 결과이고, 김인식 작사의 다른 작품들과의 혼동에서 결과한 것이다. 한편 증언자 중 출판인 회동서관(淮東書館) 사장 고유상(高裕相)이 관심을 끌지만, "김인식 작 창가책 소형이 있었다”는 단순한 증언일 뿐이었다. 실제 김인식 명의의 악보집과 창가책과 악전(樂典)이 있지만 거기에 애국가는 들어있지 않았다. 여기서 김인식 작사로 발표된 애국가(KOREA)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애국가>(KOREA)는 8·6조 시형에 곡조는 ‘올드 랭 사인’이다. 이는 현 애국가와 같은데, 노랫말을 의외로 두 부분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一 華麗江山東半島는 우리本國이오 稟質됴흔檀君子孫 우리國民일셰 無窮花三千里 華麗江 大韓사람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셰(후렴) 二 愛國하는 義氣熱誠 白頭山과 갓고 忠君하는 一片丹心 東海갓치깁다 三 二千萬人오직한마암 나라사랑하야 士農工商貴賤업시 職分을다하셰 四 우리나라우리皇上 皇天이도으샤 萬民同樂萬萬歲에 泰平獨立하셰 총 4절에서 1, 2절은 김인식 작사이고, 3, 4절은 윤치호 작사 ‘무궁화가’의 3, 4절이다. 이 1, 2절을 언제 작사하여 재구성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는지는 모르지만 윤치호가 ‘찬미가 제14장’(현 애국가)을 작사한 1907년 중반 이전이라고 보게 된다. 이는 다시 밝히겠지만 화가 김은호의 회고록 ‘書畫百年’에 윤치호 작사 증언 부분에서 김인식이 등장하는 대목이 있어 추정이 된다. 그런데 이 <애국가>는 일제강점기를 거처 해방에 이르기까지 전승된 것이 확인된다. ‘예술통신’ 1947년 2월 10일 자 ‘愛國歌 其二’로 나오는 것은 물론 몇몇 필사본에도 수록되어 전해지는 것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정황에서 확인하듯이 김인식은 당시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 인물이었다. 분명하게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궁화가’에다 가사를 더해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우를 범하는 바람에 이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증언을 거부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음악가로서, 생존 인물로서 역사적 소명을 다하지 못하였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기도 하다. 4. 최병헌 작사설 최병헌(崔炳憲, 1858~1927)은 애국가의 본문은 최병헌의 ‘불변가’에서, 후렴구는 윤치호의 '황실가'(무궁화가)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소위 ‘윤치호·최병헌 공동작사설’의 인물이다.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 최병헌 항목에는 최황(崔晃) 등 가족 2인의 명의로 제출한 자료가 요약되어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1905, 6년 경 정동 자택에서 남산을 바라보고 작사했다. ②윤치호와는 독립협회 때부터 친교, ‘황실가’ 후렴을 빌려 ‘하나님이 보호하사’ 애국가를 작사했다. ③윤치호는 기독교인이 아님으로 이런 표현을 쓸 수가 없다. ④윤치호는 최병헌의 권유(勸誘)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작고 28년 후의 후손들이 제출한 자료이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③과 ④같은 내용은 어불성설이다. 윤치호는 최초의 감리교 세례교인으로 최병헌 보다 입교가 12년이 앞선다. 최남선이 이를 교정시켜 주었다. 윤치호가 독립협회 회장 시기 최병헌은 주사직에 있었다. 가족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알 수 있다. 이를 견준다면 앞의 두 가지도 신뢰하기가 쉽지 않다. 신흥우(申興雨, 1883~1959)의 증언도 있다. 12세 때 배재학당(培材學堂)에 들어가 신학문을 익히면서 개화사상과 기독교와 서구 문물을 접했다. 1896년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등의 개화 청년들이 조직한 협성회(協成會) 청년부에 가담하여 계몽 운동을 벌였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도 소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이후 위의 인물들과 정치 토론을 벌이며 근대화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불량한 학생으로 오해를 받아 대한제국 정부의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영어 실력이 출중하여 1903년 선교사를 통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유학한 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법률학을 공부했다. 1911년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1년 만인 1912년 식민지 현실에 분개하여 다시 망명을 하려 했다. 이에 윤치호의 권고로 망명을 단념하고, YMCA 이사가 되고, 배재학당 교장을 맡았다. 이상과 같은 이력에서 작사자에 대한 코멘트를 할 만한 동시대 지식인임은 분명하다. 조사자료에는 자신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정초식에 14세로 참가하여 ‘독립가’와 ‘진보가’를 불렀다고 하였으며, 작사자에 대해 이런 증언을 하였다. "1903년부터 1911년까지 滯美 中에는 안창호작이라 들었고, 귀국 후에는 윤치호 작이라고 들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가 발행된 시기 직후 미국과 하와이에서는 신한민보 등에서 애국가 또는 ‘국민가’(동일 가사)의 작사자를 윤치호로 표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증언에 가치를 둔다면 1910년 전후 미국에서 안창호가 작사자라고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는 사실이다. 5. 윤치호 작사설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교육자·정치가·저술가·개신교 운동가·계몽 운동가·언론인·독립협회·만민공동회·신민회·청년학우회의 일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신자이자 초기 개신교의 세례교인이다. 개화파로 독립신문사의 창립 인사 중 한 명이자 제2대 사장이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계몽운동, 민권운동, 의회설립운동을 벌이고, 황제에게 불충(不忠)하는 역적으로 취급 받고 민중들의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민중을 경멸하였고 노선을 변경하여 실력 양성론에 매진하다가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청구구락부 사건, 일제경찰의 미행과 내사 등을 견디지 못해 친일로 전향하였다. 애국가 작사 문제는 문헌과 증언과 상황이 확정에 이르는 단계이지만, 친일 프레임에 발목을 잡혀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다. 윤치호작사설 항목은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네 개의 그룹인데, 하나는 한영서원 제자들의 증언, 둘은 가족의 주장, 셋은 지인들의 주장, 넷은 평론가 또는 제3자의 증언이다. 이제 각 측의 주장과 앞의 네 작사설을 교차검증하여 증거 자료의 가치를 확인하기로 한다. 한영서원 제자 신영순(申永淳) 외 3인의 증언이 비중 있게 수록되었다. 우선 ‘特別讚美歌集’ 즉, 초판 ‘찬미가’의 존재를 알려 준 것으로 의미가 크다. "제1장이 국가(영민요곡), 제2장이 황실가(영민요곡)이고, 그 다음이 독립가와 신병가 등이었는데, 곡조는 찬송가 곡이었다”라고 하여 재판과는 다른 편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첫째 제1장이 국가(KOREA), 제2장이 황실가로 편제된 점, 둘째 재판 ‘찬미가’에 없는 찬송가 곡조의 ‘독립가’와 ‘신병가’가 수록된 점, 셋째는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 이상의 세 가지를 들어 재판과 다른 초판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특히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아 작사 시점이 1907년이란 점을 보강해주기도 한다. ‘찬미가’ 초판은 1906년 10월 ‘한영서원(韓英書院)’ 개교 첫 입학생 14명에게 배포하기 위해 소규모로 출판을 했고, 1907년 작사한 현 애국가 외 2편의 ‘애국적 찬미가’와 12편의 번역 찬송가를 포함하여 재판을 1908년 6월에 발행하였다. 이의 존재를 바로 한영서원 학생들의 체험적인 직접증언으로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어서 1913년 "창가를 수집하여 비밀로 노래책을 출판하였다가 투옥되고 압수를 당했는데. 제1권 제1장 ‘애국가’에는 윤치호 작이라고 명기 되었다”라는 증언도 있다. 이 창가집의 실물이 없어 사실 여부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노래책에 대한 ‘창가책사건’ 관련 기록에는 ‘윤치호 작 애국가’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사실로 받아드일 수 있을 것이다. 제자 최규남의 증언 역시 매우 구체적이다. 9세로 한영서원 다닐 때의 경험을 진술한 것인데, "한영서원 벽장문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지금의 애국가를 붓으로 써 부치고 선생 朴嶼陽(강화출신)씨가 우리에게 가리켜주며 이것은 윤원장(윤치호)이 만드신 것이라고 수차 말한 것을 기억한다”고 하였다. 제자 김동성도 50년 전부터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며 "학생들은 매일 아침 윤선생(윤치호)이 만든 애국가를 불렀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였다. 두 명의 또 다른 제자는 ‘唱歌集’과 ‘讚美歌冊’을 언급하였는데, 이는 윤치호 역술 ‘찬미가’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혼동을 한 부분으로 판단된다. 다른 인물들의 작사설과는 다른 전문가의 증언이 있다. 박은용과 주영환이다. 평론가 박은용(朴殷用)은 동아일보 1948년 10월 6일 자 ‘愛國歌考’에서 윤치호가 1945년에 남긴 ‘자필 가사지’의 증거력을 통해 윤치호 작사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이 주장은 1947년 발행한 이광수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의 오류를 이미 7년 전에 지적한 것이다. "윤치호 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 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좌익계 음악평론가의 이 질타는 친일파 척결이라는 첨예한 시점에서 시류에 따라 안창호가 민족지도자라는 이유로 애국가 작사자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 것이다. 주영환(朱榮煥)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들어 윤치호 작사 사실을 주장했다. 하나는 기자협회보 3호에 서정주가 쓴 ‘청년 이승만’에 "이승만 박사로부터 친히 口傳을 받은 筆記”에 근거하여 윤치호를 작사자라고 한 사실, 둘은 1908년 재판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4장에 현 애국가가 수록되었다는 점, 셋은 윤치호 자손이 이광수에게 정정을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이 세 번째는 앞의 안창호설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의 증언을 상쇄시키는 것으로 의미가 큰 증언이다. 윤치호작사설에 특이한 두 인물의 주장도 있다. 백락준과 최남선으로, 백락준(白樂濬, 1895~1985)은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주관한 문교부 전임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증언은 서울신문에서 밝힌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자신이 윤치호로부터 직접 받은 ‘찬미가’를 통해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찬미가’를 6.25 때 분실했다고 하였다. 당시 조사위원회에서는 이 책을 찾는다는 기사를 낼 정도로 결정적인 증거력을 지닌 자료였다. 최남선의 증언은 간단명료했다. 그러나 매우 큰 효력을 발휘한 증언이다. 윤치호 가족 측에서 1945년 작성한 ‘자필 가사지’의 ‘一九0七年 尹致昊 作’ 표기 문제, 철자법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이에 대한 평가를 한 것이다. "<一九0七 尹致昊作>이 眞이라면 윤 씨 작이라 하여도 無妨할 것이다” ‘1907년 윤치호 작’이란 표기는 가사를 쓴 시점이 아니라 작사를 한 시점을 밝힌 것이기에 서법에 문제가 없다는 것, 그리고 윤치호가 이른 시기에 어문법에 관심을 보인 인물임으로 역시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 ‘자필 가사지’가 윤치호가 직접 쓴 진적(眞籍)이라면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주장이다. 이 최남선의 증언은 조사위원회가 결성되어 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유지된 기조이다. 첨언한다면 최남선은 조사자료 ‘애국가의 종류’에서 ‘대한제국애국가’와 현 애국가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밝혀 전문가적인 소견을 피력한 인물이다. 윤치호작사설 주장의 의미 있는 그룹은 윤치호 가족들이다. 사위 정광현, 이복 동생 윤치왕이 그들이다. 정광현(鄭光鉉, 1902~1980)은 윤치호의 셋째 사위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작사자 조사 기간 두 번에 걸쳐 의견서를 제출할 만큼 적극적인 활동을 한 가족 일원이다. 조사자료에는 ‘찬미가’ 재판의 존재를 제시하고, 1945년 작성된 윤치호의 ‘자필 가사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佐翁 筆跡의 애국가는 1945년 作故하기 전에 가족들의 請으로 讚美歌集에서 베낀 것이다. 謄寫할 때 綴字法도 多少 고치고 또한 ‘임금을 섬기며’의 句는 이미 改作한 것이라 하야 現 歌詞로 고쳐 썼다.” 윤치호 작사 사실을 입증하는 가장 증거력이 큰 사료인 ‘자필 가사지’의 작성 배경으로 의도적으로 남긴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청에 의해 기념으로 남긴 것이란 사실을 밝힌 것이다. 더불어 ‘찬미가’ 제14장 4절 가사 중 "님금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야”로 바뀐 이유에 대해 가족들이 바뀐 부분 대로 쓸 것을 청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이로서 <찬미가> 제14장과 차이나는 문제를 해소한 것이다. 윤치왕은 1907년 "애국가 ‘백두산이’(영국민요)를 지어 학교에서 부르고 소책자로 박어서 분배”했다고 ‘찬미가’의 존재를 증언했다. 이상에서 살핀 5인에 대한 작사설을 조사하기 위해 작성한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를 분석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이 조사자료는 1955년 4월 2일 자 경향신문 기사로 촉발되어 5월 13일 자료집을 발간하고 조사가 시작되어 1956년 8월 31일 최종회의에서 윤치호를 작사자로 결론 내는데 활용하였다. ②작사자로 거론된 인물은 윤치호 안창호 최병헌 김인식 민영환 5인이며 단독작사설 합작설 개작설이 있었다. ③주요 내용은 애국가 화창(和唱) 사례, 애국가의 종류, 작사설, 부록, 참고문헌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④ 각 작사설을 요약하며 다음과 같다. 민영환 설은 1902년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 1916) 작곡 ‘대한제국애국가’ 악보집 서문에 이름이 올라있는 것에 대한 오해로 비롯되었다. 최병헌 설은 ‘불변가’라는 시에서 남산을 본 감상을 더해 작사했다고 하나 이 원작은 확인이 되지 않아 가족들이 제기한 설일 뿐이다. 음악가 김인식의 작사설은 윤치호의 ‘무궁화가’ 3,4절에 자신이 지은 1, 2절을 구성해 1910년 발표한 ‘愛國歌’(KOREA)를 오해한 제자들 유포한 설에이를 철회하지 못한 본인이 주장한 설이다. 안창호 설은 이광수가 지은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에서 비롯되었다. 1908년 9월 대성학교 개교로 윤치호가 교장으로 왔을 때 안창호가 지은 현 애국가를 보여주고 양해를 받아 발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창호가 윤치호에게 보여주고 후렴을 사용하는 것에 양해를 얻었다는 시점이 이미 윤치호가 작사하여 역술 ‘찬미가’에 수록, 발간한 이후여서 시점이 문제가 된다. ‘찬미가’가 발행된 것은 3개월 전이 1908년 6월이기 때문이다. 이는 에피소드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는데, 바로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애국가 관련 기사의 탈맥락상과 연동이 되는 것으로 안창호 설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 이 역시 대성학교 학생들과 임시정부 관련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설인 것이다. 윤치호 설은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만으로도 작사 사실을 확정할만하다. 홍색 표지의 초판과 재판 역술 ‘찬미가’가 제시되었고, 1945년 작성된 ‘자필 가사지’까지 제시되었다. 또한 한영서원 제자들의 구체적인 증언이 있고, 가족들의 확신으로 자료가 제시된으로서 작사 사실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거론한 이들은 상호 보완적인 역활을 하여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사실 한 두 가지의 자료만으로는 그 진실을 주장하기에 부족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증거자료와 증언의 부합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는 거의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사실을 전제로 작성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1년 6개월간의 3차에 걸친 조사위원회 회의는 이 자료집에서 제시한 윤치호 관련 자료와 증언의 교차검증 과정이기도 하였다.(물론 조사과정에서 1910년 신한민보 ‘국민가 윤치호 작’ 자료 등 확인) 이런 점에서 이 자료집은 윤치호 작사 사실을 확정하는데 결정적인 자료집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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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 평가원과 기초어휘 활용 위한 업무협약국립국어원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과 기초어휘를 활용하기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19일 밝혔다.이번 업무 협약은 국어원의 '국어 기초어휘 선정 및 등급화' 연구 사업(2017~2023년) 결과를 평가원의 '이독성 자동 측정 프로그램 개발' 사업(2022~2024년) 진행에 활용하게 됨에 따라 이뤄졌다.양 기관은 기초어휘 활용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향후 기초어휘와 글쓰기 평가, 글쓰기 자동 채점, 문해력 실태조사 및 연구 분야에서 구체적인 연구 협력을 도모할 예정이다.국어원은 이번 연구 결과를 국어교육계와 출판계에 제공해 다양한 교육자료 개발에 기초자료로 활용하게 할 계획이다.장소원 국립국어원장은 "'국어 기초어휘 목록 및 등급화' 연구 결과는 기초어휘의 개념을 정립해 어휘 평정과 등급화의 이론적 토대가 될 것"이라며 "양 기관이 진행하는 연구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 연구 결과가 활용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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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무용협회 예술대상에 미나유·조기숙·유정숙·남수정대한무용협회는 '2023 무용 분야 예술대상' 현대무용 부문에 미나유 서울탄츠스테이션 크리에이티브 어드바이저, 발레 부문에 조기숙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선정했다고 19일 밝혔다. 예술대상 한국 전통무용 부문은 유정숙 김진걸산조춤보존회 회장이, 한국 창작무용 부문은 남수정 용인대학교 교수가 받았다. 미나유는 현대무용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점이, 조기숙은 발레 대중화를 실현한 교육자라는 점이 인정됐다. 유정숙은 한국 전통무용의 명맥을 잇고 우리 춤의 우수성을 알린 점이, 남수정은 독창적인 안무 철학과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보여준 점이 높이 평가됐다. 시상식은 이달 26일 대한민국예술인센터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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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개국 한글학교 교사 206명 , '한국 발전상 알리기 네트워크'재외동포청(청장 이기철)은 서울 더케이호텔에서 열린 '한글학교 교사 초청 연수'에 참여한 16개국 206명의 참가자들이 한국 발전상을 현지 주류사회 알리는 데 동참하기로 다짐했다고 16일 밝혔다. 참가자들은 지난 8일부터 14일까지 열린 연수에서 한국어 교수법을 배우고 실습 및 역사 문화 체험 등을 통해 역량을 강화했다. 이기철 청장은 '한국은 왜 자랑스러운 나라인가'라는 강연에서 "한국의 정치·경제 발전상 알리기는 차세대 동포의 정체성 함양과 자긍심 제고에 기여할 수 있다"며 "이는 재외동포의 정체성 함양과 주류사회 진출이라는 재외동포정책의 핵심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연수 기간 '한국의 발전상을 거주국에서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주제로 지역별 소그룹 토론을 진행했다. 북미 분과에서는 ▲한인회·한글학교협의회 등 단체 간 협력을 통한 지역 교육 당국과의 소통 창구 마련 ▲학부모-교사 협의회(PTA) 등 현지 교육 커뮤니티 참여를 통한 한국어 및 한국의 발전상 관련 수업 개설 유도 등의 아이디어가 나왔다. 아시아, 유럽 등 분과에서는 ▲현지 교육 관계자 대상 한국 발전상 세미나 개최 ▲학부모 대상 수업 개설 ▲현지 교과서 등의 오류 발견 시 한글학교에서 재외동포청에 전달할 수 있는 소통 채널 마련 등을 제안했다. 한국 발전상을 알리기 위한 체계적이고 공신력 있는 교육자료 마련과 전문 집단 구성 등이 필요하다는 요청도 나왔다. 재외동포청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한국 발전상 알리기 네트워크'를 추진하기로 했고, 16개국 30명의 교사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강복원 재외동포청 교류협력국장은 14일 열린 수료식에서 "이번 연수를 통해 한국 발전상 알리기에 대한 한글학교 교사들의 높은 관심과 참여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한글학교의 역량 강화와 교사들의 전문성 제고 등을 위해 실질적인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이후 처음 대면으로 개최된 이번 연수에는 참가자의 99% 이상이 과정을 수료하는 등 큰 호응 속에서 마무리됐다. 한글학교 교사들은 "앞으로도 차세대 동포들에게 모국어와 한국의 역사·문화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바로 알려 이들이 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고 주류사회에 진출하는 데 기여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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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관의 ‘국악-신반’ <17>윤은화 정규 2집 <Fe> 윤은화 연주자의 2번째 정규음반이다. 윤은화는 양금연주자이며 양금제작자, 작곡가, 교육자로서 왕성한 대외 활동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개량하여 만든 양금으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또 국내 유일한 전자양금으로 루핑기법과 더불어 한국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의 균형 및 조화를 지향하고 양금을 국내는 물론 세계에 알리는 데에 계속 이바지하고 있다. 이번 음반은 <Fe>, 철이다. 철을 주재료로 사용한 악기를 소재로 만든 작품집이다. 비, 바람, 숲 등 자연에서 받은 다양한 영감을 토대로 곡을 창작하였으며 양금, 운라, 핸드팬, Udu드럼 악기를 사용하고 있다. 주로 연주자의 작곡.연주로 ‘갈색여름’, ‘족장들의 춤’ 등 모두 8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 ‘개량양금산조’도 있다.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단모리, 휘모리로 구성된 산조로 개량양금만이 보여줄 수 있는 넓은 음역을 이용하여 풍성한 산조를 들려주고 있다. 빠르고 리드미컬한 화려한 연주로 산조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 준다. 처음 선보이는 양금산조 음반이다. 일청을 권한다. 양금이 독주 악기로써 더 많이 활용될 수 있도록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는 작품들로 구성된 음반이다. 연주자의 포스를 느낄 수 있다. 포항공대 정재훈 교수 <포항 AI 풍류> 포항공대 정재훈 교수가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제작한 풍류음반이다. 그래서 음반명이 <포항 AI 풍류>이다. 부제는 ‘위상수학과 인공지능으로 만든 우리음악, 도드리’이다. 필자가 이해한 바로는 AI에게 ‘밑도드리’를 교육시켜 다양한 형태의 ‘밑도드리’를 생성하게 한다. Algorithm 2 Sequence 5, Scale 5, Scale 6 등으로 생성된 오선보 악보를 연주에 맞게 편곡을 한 후 연주하는 것이다. 음반의 첫곡으로 풍류 연구의 시점이 되는 ‘해금 밑도드리’ 원곡을 김정림 연주자가 연주한다. Algorithm 2 Sequence 5라는 ‘밑도드리’는 해금 김정림, 풍류가야금 송영숙, 양금 민혜인의 3중주이다. Scale 6라는 ‘밑도드리’는 해금 김정림, 기타 김중회의 2중주이다. 모두 6곡이 수록되어 있다. AI가 생성했지만, AI가 연주가 ‘밑도드리’가 아니고 사람이 연주한 것이다. 일반 연주에 비해 매우 정형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해설서를 열심히 읽고 감상하는 하는 것이 필요하다. 2023 국악창작곡 개발 <제17회 21C 한국음악프로젝트> 국악방송이 주관하는 2023 국악창작곡 개발 <제17회 21C 한국음악프로젝트>가 지난 9월 7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개최되었다. 매년 출반하는 그 결과물이다. 21C 한국음악프로젝트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재단법인 국악방송이 주관, 국립국악원이 후원하는 창작 국악곡 개발 경연대회로 많은 국악스타들을 배출해 왔다. 국내외에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는 신예 국악인들의 등용문이다. 2023년에는 77개 팀이 지원하여 10개 팀이 겨룬 경연대회이다. 음반에는 대상을 수상한 3인조 앙상블 공상명월이 연주한 ‘순라꼭질’이 차지하였다. 거문고와 다양한 타악기로 재즈와 국악의 다양한 시김새, 리드미컬한 전통장단의 대비를 통해 모던한 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금상은 4인조 앙상블 풍류공작소가 연주.노래한 ‘나리소서’가 받았다. 이 외에도 은상 2개, 동상 2개, 장려상 4개 등 모두 10개 부분의 수장 자를 배출하였다. 해설서에는 10개 팀의 설명과 곡 설명이 영어로도 수록되어 있다. 비매품이지만, 그 관련 영상은 Youtube에서 감상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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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립독립기념관 개관 기념 전시도록 발간양산시립독립기념관(관장 신용철)은 개관 기념 상설전시 도록을 발간했다고 밝혔다.이번 도록은 지난 8월 개관 이후 일제강점기 양산의 독립운동사를 다룬 상설전, 양산의 독립유공자를 주제로 한 개관기념 특별기획전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도록은 ▲항일의병활동 ▲양산의 독립만세운동 ▲윤현진과 윤현진 일가의 독립운동 ▲양산농민조합의 시위운동과 통도사의 항일독립운동 등 4가지 주제로 구분했으며, 기획전시는 ▲양산 출신 독립유공자들의 활약상을 국내·외로 나누어 소개했다.이번 도록은 초중고등학교, 도서관 등에서 학생들의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관내 유관기관과 전국의 관련 박물관 및 기념관에 배포해 양산의 독립운동사를 알리는 역할을 할 예정이다. 기념관 내 역사자료실 의춘당에서도 이번 도록을 볼 수 있고 곧 홈페이지를 통해 열람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신용철 관장은 "이번 도록의 발간으로 양산의 독립운동사를 정리할 수 있게 됐다”며 "많은 분들이 이 책을 통해 순국선열의 숭고한 나라사랑을 느끼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도록에 대한 문의사항은 양산시립박물관 독립기념관팀(055-392-4832)으로 연락하면 상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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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휩쓴 K-발레…韓무용수 활약에 '코리안마피아' 별명도(보스턴=연합뉴스) 고일환 특파원 = 미국의 명문 발레단인 보스턴 발레단에 재적 중인 한국인 무용수 5명이 한자리에 모여있으면 동료들이 '코리안 마피아'라며 농담을 건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마피아'라는 단어의 어감은 부정적이지만, '무서운 실력의 소유자들'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긍정적인 별명이라는 것이 지난 2012년부터 보스턴 발레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서혜의 설명이다. 한서혜는 10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동료들뿐 아니라 보스턴 발레단 임직원까지 한국 무용수들은 성실하고, 항상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보스턴 발레단은 각 공연 프로그램마다 한국 무용수 5명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고 있다. 수석 무용수인 한서혜와 채지영은 보스턴 발레단의 얼굴 역할을 하고 있다. 보스턴 발레단이 2023-2024 시즌에서 가장 신경을 쓰는 작품인 '호두까기 인형'포스터와 팜플렛이 표지 인물은 2013년 입단한 채지영이다. 또한 솔로이스트 이선우와 세컨드 솔로이스트 이상민, 코르드 발레 김석주 등 남자 무용수들도 발레단 내에서 비중이 커지고 있다. 한서혜는 후배들의 활약에 대해 "능력있고 책임감 있는 무용수에게 주요 역할을 맡기는 것은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각국에서 모인 무용수들의 치열한 경쟁과 신경전 속에서도 한국 무용수들의 실력에 대해서는 이론없이 인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보스턴 발레단은 최근 한국종합예술학교(한예종) 무용원장을 지낸 김선희(64) 교수를 '게스트 아티스트'로 초빙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의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에서 지도자 과정을 마친 뒤 한예종에 부임해 한국 무용수들을 세계적 수준으로 키워낸 주역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보스턴 발레단의 한국 무용수 5명도 모두 한예종 출신이다. 김 교수는 당초 보스턴 발레단 산하의 교육 책임자 3명에게 한예종의 발레 교육법을 전수할 예정이었지만, 막상 수업이 보스턴 발레단의 교육자 15명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제자들 덕을 많이 보는 것 같다"고 흐뭇해했다. 다만 김 교수의 제자들은 한국 발레의 교육법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도 당연하다고 입을 모았다. 보스턴 발레단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 각국의 메이저 발레단에서 주역으로 발탁되는 한국 무용수들이 늘어나면서 한국 발레 전반에 대한 평가도 높아졌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두 살배기 딸을 키우고 있는 한서혜는 "딸을 무용수로 키울 생각은 없지만, 만약 딸이 스스로 발레를 하겠다고 선택하면 한국으로 유학을 보낼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국보다 한국의 발레 교육이 더 체계적이고 효율적이라는 것이 한국에서 9세 때부터 발레 영재교육을 받은 한서혜의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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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유지숙, “서도소리는 나의 운명”알록달록한 색으로 갈아입고 있는 가을의 한복판,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유지숙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의 민속악단을 향한 마음, 소리 인생, 작업 방향과 염원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하게 나누어 보았다. 물들어 가는 가을의 풍경과 잘 어울리던 따뜻하고 유쾌한 그 이야기를 지금 만나보자. 정-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다시 한번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A. 감독으로 취임하자마자 바로 민속악단 정기연주회가 있었어요. "꽃신신고 훨훨”이라는 제목으로 삶과 끝에서 마주하는 평안이라는 주제의 공연을 준비하느라 바빴습니다. 또 그 후 지방공연, 기획공연, 상설공연 등의 모든 공연과 단의 살림을 살피느라 아주 바쁜 나날을 보냈어요. 정-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취임으로 인해 예술적으로든, 삶적으로든 변화된 부분이 있으신가요? A. 우선 감독직을 수행하다 보니 민속악단을 살펴야 할 일이 많아 외부 활동을 자제하게 되며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를 갖게 되었어요. 제자를 양성하는 일, 외부 개인 공연, 심사, 강의 등 여러 스케줄이 엉켜 처음엔 혼란스러웠어요. 하지만 이런 저런 일들을 정리하며, 오히려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모든 것을 다 떠안고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내려놓는 일이 자연스러워졌죠. 그리고 그런 일들은 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 이전 생활의 패턴과 달라진 것이 아쉽지는 않으세요? A. 아뇨. 생각을 해보니, 전 음악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끝도 없이 달려온 것 같아요. 소리를 하고, 새로운 걸 만들어 내거나, 공연하는 등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해내는 것이 늘 즐거웠어요. 그렇게 하는 일들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일은 점점 늘어났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체력적인 한계가 느껴지더군요. 그게 처음엔 속상하기도 하고 아쉬웠지만, 어느 순간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지금 이 시기에 내가 해야 할 일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죠. 저는 늘 제게 있어 삶과 행복은 소리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서 온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의무감과 사명감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제가 겪은 모든 삶과 경험을 다음 세대에게 나누어 주고, 소리의 길을 제시하며 안내, 독려해 주는 스승의 역할을 더욱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정- 개인적으로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을 어떤 방향으로 운영해 나갈 예정이신가요? 선생님께서 만들어 나가고 싶은, 그려내고 싶은 민속악단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요? A. 우리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은 각자의 기량이 굉장히 뛰어난 분들로 이루어진 단체입니다. 이분들이, 최고의 악단에서 개인의 기량을 최고로 뽐낼 수 있도록, 자부심을 갖고 음악을 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 주고 싶어요. 저도 민속악단에서 30여 년을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 내가 무언가를 해준다기보다는, 같이 고민하고, 같이 나누고, 같이 살피며 함께 동행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힘든 일이 오더라도 늘 편안할 수 있는 단체, 그리고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정- 사실 전 이 질문을 드리며 민속악단이 대중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면 좋을지 이야기해 주실 거로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는 단원들을 가장 먼저 마음 깊이 생각하시는 모습에 보이는 것만 생각했던 제가 조금 부끄러워집니다. 선생님의 민속악단을 향한 애정이 느껴지네요. 다음으로는 선생님께서 오랜 시간 해 오신 서도소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어요. 사실 ‘서도소리’ 하면 우리 갈 수 없는 지방의 민요이기에, 무언가 아득하고 애절한 느낌이 들다가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정겨움이 듭니다. ‘서도소리’하면 어떤 감정, 느낌이 드시나요? A. 그냥, 제 운명 같아요. 이런 표현이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너무 좋다. 눈물이 나도록 좋다는 표현밖에는 할 수가 없네요. 서도소리는 제 삶 그 자체에요. 정- 학부 시절, 서도풍류를 듣고 너무 좋아 연주하고 싶어 몇 없는 음원을 모으고, 악보를 직접 채보해 가며 공부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서도 음악은 남도나 경기제처럼 익숙하지 않고 공부하기 더 어려운 환경인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데요. 서도 소리의 길을 오래 걸어오신 선생님도 이런 부분에서 외로우셨으리라 감히 생각해 봅니다. 돌이켜 보았을 때 서도 소리를 하며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A. 기악의 경우 자료가 많지 않고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아 어려운 점이 아무래도 더 많았을 것 같네요. 서도소리는 황해도와 평안도의 노래인데, 여긴 그 지역이 아니고, 우리는 배운 대로, 익힌 대로 노래하고 전승해야 하므로 진짜 그 원형을 찾기 위해 더욱 고민해야 합니다. 소리의 경우 어려운 점은, 서도소리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소리가 일반적이지 않으며, 어렵다는 거예요. 특히 가장 어려운 게 ‘요성’입니다. 모든 국악의 기본 바탕은 ‘요성’인데, 서도소리의 요성은 잘게 떨면서도 깊어야 해요. 잘못 떨면 발발성 요성이 되고, 너무 깊이 들어가면 소리의 맛이 이상해지죠. 또 음을 곡선처럼 흘러내리는 특징이 있는데, 배우는 사람 입장에선 그게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걸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 특히 고민이 많이 되어요. 그런데 전 이렇게 생각해요. 구전심수라고 하죠. 배우는 사람이 선생님의 소리와 혼과 마음까지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그 방법으로 소리가 전승되고 있잖아요. 가장 원시적이지만 가장 정확한, 올곧은 교육, 그리고 마음이 있기에 이 소리가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정- 선생님께서는 제자 양성에도 꾸준히 힘을 쏟고 계시죠. 교육자로서 학생들이 어떤 소리꾼이 되었으면 하시나요? 또 무얼 가장 강조하시나요? A. 예전에는, 제자들이 많은 게 참 좋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서도소리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만큼 소리의 본연을 가지고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길인만큼, 진정한 소리꾼이 되기 위해 온 마음으로 노력하는 학생이 있다면, 내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아요. 가르칠 때 기술적으로는, 서도소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특징적인 떠는 요성, 흘러내리는 곡선의 맛, 시김새 등을 기본적으로 많이 가르치죠. 그리고 그 외에 제가 강조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음악을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안 돼요. 우리는 대중 앞에 서서 노래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인데, 거짓이 몸에 배어있다면, 그 음악이 과연 진실할 수 있을까요? 항상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음악을 대하고 삶을 대하길 바라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 선생님께서는 맥이 끊어졌던 토속민요를 발굴하여 다듬고, 전승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작업을 계속하고 계시는지, 또한 앞으로도 하실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A. 그럼요. 토속민요는 보물이에요. 토속민요 작업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기존에 모르던 소리를 들으면 참 신기하고, 좋고, 모르던 맛을 배우게 되어 너무나도 행복하죠. 토속민요는 같은 노래인데도 여러 형태로 나뉘어져 있는 경우가 있어요. 그중 가장 잘 부르신 분의 음악을 기준으로 하여 소리를 다듬고, 만들어 나가는 작업을 하죠.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이 정형화되어 사람들에게 불리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소리를 오래 하다 보니, 악보만 보아도 꺾거나 흘리는 구간이 어느 순간 바로 알아차려질 때가 있어요. 그걸 바탕으로 토속민요 작업을 했을 때 서도소리가 딱 만들어지면, 마치 죽어있는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어 꽃을 피운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정-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토속민요 작업은 어렵지만, 그만큼 참 가치 있고 귀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연주와 작곡을 통해 토속민요 작업을 늘 해 보고 싶었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의 길을 잘 알지 못해 어려웠던 경험이 있는데요, 이렇게 소리꾼들이 소리의 길과 결을 찾아내고, 음악가들이 힘을 모아 토속민요 발전을 도모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으로, 계획 중이신 개인 발표나 음반 계획이 따로 있으신가요? A. 네, 음반의 경우 이달 말에 발매될 예정입니다. 또 앞서 이야기했지만, 기존에 불리던 소리뿐 아닌 안 불리던 소리, 토속민요 작업을 계속 해 나갈 생각이에요. 이젠 제자들도 많이 이어받아서 해 주고 있어 참 기쁩니다. 그리고 무대에서 제 소리만 하기보다는, 자라나는 소리꾼들이 장을 펼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내년에는 ‘서도예인전’이라 하여 소리꾼들을 선발하고, 기량을 뽐낼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나갈 예정입니다. 정- 곧 있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연주회에 관해 이야기 해주세요. A. 이번에 있을 공연은 ‘생생풍류’라는 이름의 기획공연이에요. 100년이 지나도 한결같이 어렵고, 근본이 되는 민속악 ‘대풍류’, ‘시나위’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깊게 감상해 볼 수 있도록 무대를 기획해 보았습니다. 추가로 경기소리풍류, 서도소리풍류도 함께 연주하기에 다양한 우리의 민속음악을 들어볼 좋은 기회가 될 거로 생각합니다. 단원들이 아주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정- 선생님은 어떤 소리꾼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A. 늘 마음으로 염원해요. 소리를 참 잘하는 소리꾼이 되고 싶다고요. 사람들이 평가하는 제가 아닌, 저 자신이 평가하는 제가요. 내가 내 소리에 취하고, 자유자재로 소리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사실 그 생각도 해요. 내가 정말 소리를 잘하게 될 땐, 목이 안 나오겠구나. 그래도, 소리가 잘 안 나오더라도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소리꾼. 그런 소리꾼이 되고 싶어요. 서도소리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냐고 물었을 때 망설임 없이 대답하셨던 ‘운명’이라는 단어가 인터뷰 내내 마음을 휘감고 떠다녔다. 어쩜 이렇게 소리를 사랑하실 수 있을까. 계절을 맘껏 즐기고, 행복한 삶을 살며 가장 사랑하는 소리를 꾸준히 해 나가고 싶다는, 모든 일에 평안히 마음을 쏟고 싶다는 유지숙 선생님. 따뜻하게 채워진 그 마음과 열정은 앞으로도 우리 곁에 오래도록 아름다운 소리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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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원로 교육자 공노원 여사 1주기 추모제22일 인천 남동구 아소르트 레스토랑에서 사할린 원로 교육자 공노원(전 사할린주 한글교사협회장, 전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 여사 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아들(신철재)과 딸(신금선)이 어머니가 살아 생전 가까이 지냈던 사할린 동포들을 초청했다. 사할린 동포들을 후원하고 있는 삼정제빵소에서 베이커리 2박스를 보냈다. 며느리 신에바씨가 참석자와 사할린 동포들에게 추모제 기념으로 전달했다. 공선생에게 2년간 한국어를 배웠던 안드레이(15세)는 "한국에 오자마자 공노원 선생님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해 배웠습니다. 한국어말하기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서 선생님이 기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립습니다."라고 전했다. 손녀딸 신아리나(10세)와 신마이야(17세)는 "할머니에게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한국 역사도.... 할머니가 너무 보고싶어요"라고 전했다. 한러 동시통역을 밭은 사할린 동포 이경순 여사는 "사할린 동포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분이다. 사할린 1세 나이드신 분들은 강제징용 위로금을 신청하려고 해도 한글을 제대로 쓸 줄을 모르니, 공선생을 찾아와서 작성을 하고 구청에도 같이 가주시고 했다. 음악회나 아리랑 행사에 사할린 동포들을 100여 명 이상 모시고 다닌 분이다. 2022년 DMZ 양구패스티발에 인천에 사는 사할린 동포들을 모시고 행사에 참가하고 1주일 후에 돌아가셨다. 할일이 많으신 분인데 너무나 안타깝다."라고 전했다. KBS한민족방송 이소연 방송인은 "공노원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스튜디오에 각종 사할린 한인 활동 관련 자료를 캐리어에 가득 담아오셨던 생각이 나네요. 방송에서 우리말과 한국문화 교육에 열정을 바치시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사할린 한국어 교육에 앞장 섰던 훌륭한 분이셨습니다."라고 전했다. 지난 3월 가족들이 공노원 선생의 뜻을 받들어 서재에 있는 모든 책과 노트, 일기, 수첩, 가족사진 등을 (주)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에게 전달했다. (주)국악신문사는 공노원 선생이 살아생전 남겼던 인터뷰 내용과 남겨진 육필원도 등을 정리하여 사힐린한국어교육협회 임태식 회장과 함께 도서출판 국악신문에서 '사힐린한국어교육 80년사'에 관한 책을 출판할 예정이다. 이후에는 (사)아리랑연합회 국립아리랑박물관준비위에 전달할 것이라고 전했다. 사힐린한국어교육협회 임태식 회장은 "1996년 서울에서 창립한 본 협회는 사할린의 공노원 선생이 없으면 오늘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사할린 한국 교육의 산증인이다."라고 전했다. 기미양 대표는 "공노원 선생의 남다른 가족애, 특히 뜨거운 제자 사랑, 사할린 사랑에 눈시울이 뜨겁다. 공노원 선생의 안내로 사할린 한인들을 만나고, 2018년 불교방송 아리랑 다큐멘타리에서 사할린아리랑을 부각시켰다. 특히 공선생은 사할린 한글보급에 앞장 선 리더다. 3세 4세가 한국어를 알아야 자신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렇게나 가슴이 뜨거운 교육자 공노원 선생이 그립다. 제가 그분을 만나서 러시아 각 지역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사할린 한인을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라고 전했다. 다음 글은 작년 고인의 발인날 추도사 전문이다. 공노원 선생님을 보내며 제가 제 부모님을 선택하여 세상에 나오지 못하듯이 세상에 나와 만나는 사람 모두 내 뜻에 따라 인연을 맺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꼭, 반드시, 필요하고 이유가 있어서 내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세상 수많은 사람 중에서 인연을 맺어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는 공로원 선생님과의 인연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직업은 우리문화의 정수 '아리랑 연구'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할린 동포들이 부르는 아리랑은 중요한 관찰 대상입니다. 이러한 절실함 속에서 인천에 영주 귀국하여 사시던 공로원 선생님의 존재를 알게 되어 인연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이 인연으로 사할린의 슬픔과 눈물겨운 겹겹의 아픈 디아스포라와 가족사를 이해하게 되었고, 아리랑을 이해하고 아리랑 축제를 사할린에 가서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사할린과 한국의 아리랑연합회와의 교류, 이 양국의 교류는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는 교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소중한 교류는 바로 공노원 선생님의 존재와 역할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코로나가 물러가면, 다시 사할린에 가서 동포들을 부등켜 앉고 다시 사할린아리랑제를 하자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다 ‘사할린귀국동포후원회’를 결성하여 한국에 영주귀국하여 살고 계신 동포들과 사할린에 살고 있는 가족과의 법적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을 하자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가셨습니다. 선생님, 공노원 선생님 그러니 너무 너무 안타깝습니다. 저도 그렇고 아리랑 식구들 모두가 한탄을 하고 있습니다. 공로원 선생님 하늘에서, 선생님과 우리가 해오고, 또 해야 할 일이 앞으로 잘 되어가도록 도와 주십시요. 코로나로 인한 까다로운 입국심사로 사랑하는 아들 손도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가셨지만, 사랑하는 남편, 아끼고 자랑하던 며느리와 두 손녀딸들을 두고 가시지만, 누구나 가는길을 서둘러 가셨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더 그리워 하고 더 필요함을 알게 서둘러 가신 것이 아닙니까? 산생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고 가신 가족들 모두 아리랑 식구로 함께 살아갈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노원 선생님, 우리는 그동안 사할린 동포 교육자로서의 공로와 한국과의 교류에 대한 큰 공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은 사할린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운 교육자 이십니다. 선생님은 한국 영주귀국동포로서 훌륭하신 문화교류 공로자이십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인류문화유산 아리랑인(人)'이십니다. 이 공적을 영원히 잊지 않고 새기겠습니다. 선생님 편히, 편히, 영- 면- 하- 십- 시- 오. 공로원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2022년 10월 2일 아리랑 後人, 기미양. 눈물을 삼키며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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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연 탄생 100주년 기념 '소리길을 찾아서’공연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 성금연의 음악 세계를 계승, 발전을 해 온 성금연가락보존회가 성금연 탄생 100주년을 기념 '소리길을 찾아서’공연이 오는 28일 저녁 7시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개최한다. 성금연류 가야금산조로 친숙한 성금연은 가야금연주자뿐만 아니라 작곡가였고 국악기 개량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던 예술인이다. 또한 성금연은 최초의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이고, 해금의 명인이자 민속음악 연구자인 지영희와 부부였으며, 1972년 최초로 카네기 홀 무대에 선 국악인이기도 하다. 성금연은 음악가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많은 업적을 남겨 현 국립전통예술 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국악예술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에서도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날 공연의 첫 번째 무대는 가야금산조 중 화사하고 경쾌한 산조로 꼽히며, 가장 대중적이며 많이 연주되는 <성금연류가야금산조>가 성금연가락보존회의 23명의 합주로 연주된다. 두번째 무대는 새가락별곡의 음악과 한영숙류 태평무의 명백을 잇고 있는 벽사 정재만춤보존회의 무용이 함께 하는 <새가락별곡을 위한 큰태평무>가 선보인다. 음악은 성금연가락보존회 회원들과 장덕화민속반주단이 함께 한다. 이어서 성금연이 즐겨불렀던 단가 중 <소년가>를 복원하여 연주하며, 남도민요 중 대표적인 <새타령>,<신뱃노래>를 성금연가락보존회와 장덕화민속반주단이 함께 하며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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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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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관현악단 관현악시리즈Ⅰ, ‘디스커버리’국립국악관현악단의 관현악시리즈Ⅰ ‘디스커버리’가 9월 1일(금)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 올랐다. 이번 무대는 2023-2024 국립극장 레퍼토리 시즌 개막작으로, 지휘자 여자경이 발견한 국악관현악의 다채로운 매력을 만날 수 있었다. ‘디스커버리’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 지휘자의 시선으로 국악관현악 명곡을 새롭게 탐미하는 공연이다. 그 주인공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마에스트라 여자경이 지휘봉을 잡았다. 여자경은 빈 라디오심포니오케스트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등 국내외 유수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 현재 대전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정확한 해석과 연주자와의 호흡, 관객과의 뛰어난 소통 능력으로 탁월한 무대를 선보여 왔다고 평가받는 여자경은 이번 공연의 전 곡을 선곡하여 지휘자가 선택하여 만들어 내는 무대를 꾸려냈다. 이미 클래식계에서 명성을 크게 얻고 있는 여자경 지휘자의 지휘를 국악관현악으로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새롭고 신선한 기회였다. 서양음악 지휘자가 국악관현악단과 만나는 건 이전부터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최근 클래식 음악계의 화제가 되는 여성 지휘자 여자경이 국악관현악단과 만나는 것은 이번 무대가 최초였다. 여자경은 똑같지 않게 들리는 국악기의 음을 맞추어 보는 작업에 치중하고, 본인만의 음악적 색깔을 담아 국악관현악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겠다는 포부로 이번 무대를 준비했다고 한다. 연주된 관현악곡은 총 5곡으로, 국악을 잘 모르는 사람도 듣기 편하고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방향으로 곡이 선정되었다. 이 무대를 통해 무엇보다 지휘자가 끌어내는 음악의 색채감에 집중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만들어 내는 관현악곡은 무엇보다 하나 되는 화합이 중요하다. 각자의 연주를 잘하는 것을 넘어서, 서로의 소리를 듣고 조화롭게 음악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러기에 음악의 소리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곡을 해석하고 지시하는 데 지휘자의 역량이 굉장히 중요한데, 여자경 지휘자는 따뜻하면서 냉철한 카리스마로 무대를 압도하며 특유의 섬세하고 분명한 지휘법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기에 그의 지휘가 국악기의 소리와 울림, 관현악곡과 만나 어떤 표현을 보여줄지 기대하며 공연을 관람하였다. 첫 번째 무대는 이해식 작곡의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이었다. 전통춤·민속음악·무속음악 등 한국인에게 익숙한 전통적 요소를 잘 활용하여 대중적으로 사랑 받아온 곡으로, 춤과 바람을 주제로 자유로운 바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역동적인 선율이 특징인 곡이다. 경쾌한 가야금의 소리가 시작할 때부터 여자경의 깔끔하고 확실한 큐(cue) 사인이 도드라졌다. 특히 타악기가 반복적인 장단의 리듬꼴을 연주하는 부분, 피리와 대금이 점점 커지는 농음을 연주하는 부분, 해금이 고음에서 짧은 리듬 형태를 연주하는 부분 등 악기의 특수한 특성이 드러나는 연주를 할 때 정확한 타이밍에 손과 몸동작을 다양하게 사용한 큐 사인은 음악을 확실하고 섬세하게 끌어 나갔다. 이 곡은 도드라지는 리듬꼴로 이루어진 빠른 선율을 악기들이 유니즌으로 연주하기에 자칫 무너질 수 있는 어려운 곡으로도 느껴졌는데, 리듬 하나, 음정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깔끔하고 완전한 지휘에 매료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색 있는 국악기의 듣기 쉽고 귀에 맴도는 선율의 경쾌한 반복과 여자경 지휘자의 섬세한 지휘는 국악을 잘 모르는 사람도 쉽고 편하게 음악에 푹 빠져 감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두 번째 무대는 최지혜 작곡의 첼로 협주곡 ‘미소’. 우리 선조들의 삶을 바꿔 준 의료 선교사이자 교육자 ‘로제타 셔우드 홀’에게 감명받아 그녀의 삶을 담아낸 작품으로, 서울시립교향악단 첼로 수석을 지내고, 현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주연선이 첼로 협연자로 나섰다. 이 음악은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눈앞에 그 당시 조선의 배경이 그려지는 듯 직관적이고 아름다운 곡이었다. 대금과 해금, 피리가 얽히며 만들어 내는 단조와 반음계 선율은 제물포의 습한 새벽과 어울렸고, 사극 영화를 보는 듯한 서정적인 관현악과 첼로 솔로의 선율은 한국적이며 감성적이었다. 무엇보다 이 곡은 국악기로 연주하는 전통 어법을 첼로로 구현해 내고자 한 부분이 많아 흥미로웠다. 첼로는 메나리토리의 하행 진행을 연주하거나, 부드럽게 꺾어 내리는 퇴성, 쳐서 내는 표현, 농현 등을 다양하게 구사했다.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비슷하다는 첼로의 중후하고 우는 듯한 소리로 한국적인 색채를 감상하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이 시대의 새로운 전통적인 시도라고 느꼈고, 작곡가가 얼마나 많이 고민하며 곡을 만들어 냈을지 그 섬세함에 감탄했다. 더 나아가 시김새 등 전통 어법을 구현하기 위해 소리를 연구하고 훌륭하게 연주해 낸 첼리스트 주연선 첼리스트에게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휘 또한 훌륭했다. 국악기와 다른 원료, 특징을 갖고 있기에 합주로 묻어나기 어려울 수 있는 서양악기와의 협연이었음에도 관현악이 첼로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적재적소에 등장하고 빠지며, 받쳐주는 역할을 부드럽고 깔끔한 지휘로 만들어 냈다. 첼로의 카덴자(독주) 이후 첼로의 하모닉스 연주와 관현악단의 연주가 자연스럽게 하나 될 때는 희생과 섬김의 삶을 마친 선교사의 미소가 눈앞에 그려졌고, 관객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2부 무대의 첫 곡은 김백찬 작곡가의 ‘Knock’로 시작했다. 2021년 <리컴포즈>에서 위촉 초연된 이 곡은 한국 전통음악의 5음 음계(도·레·미·솔·라)를 기반으로 다양한 변주를 시도해 전통음악만이 가진 고유의 호흡과 리듬감을 효과적으로 구현한 음악이다. 여자경 지휘자는 이 곡이 표제음악처럼 어떤 형상을 소리로 만들어진 곡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만큼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색다른 시도가 곡에 많이 묻어났는데, 단3도 화음 형태의 선율 진행이나 자연스러운 전조 진행 가운데 반복되는 선율, 베이스의 반음계 빠르고 느린 반음계 진행 위에 얹어지는 악기들의 깔끔한 투티(tutti)(다 같이 합주함),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리듬꼴 등 다채로운 변화에 귀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너무 다양한 반복 때문인지 음악을 따라가느라 급급해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주제 선율이나 장단이 귀에 남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으나, 음악의 셈여림, 다이내믹을 깔끔하게 지시하고 다양한 몸짓과 방법을 통해 음악을 부드럽게 연결하는 지휘를 포함하여 색다르고 다양한 음악적 시도가 흥미로웠다. 네 번째 무대는 2021년 초연된 성찬경 작곡가의 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금희악기점’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경영했던 유일한 악기점인 금희악기점의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피아노 협주곡으로, 피아노 협연은 작곡가·피아니스트·음악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오은철이 함께했다. 앞서 첼로가 국악관현악과 자연스럽게 묻어 어우러진 것에 비해 피아노의 음색은 국악 관현악과 잘 맞지 않고 튀는 것 같아 아쉬웠지만, 곡이 진행될수록 작곡가가 의도한 ‘더 새로운 소리’와 잘 어울리는 곡이라고 느꼈다. 새로운 접근과 음색을 통해 오늘날의 음악, 더 새로운 소리에 대한 고민의 결과를 나누고자 한 작곡가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 음악은 오묘하면서도 현대적인 사운드가 잔뜩 묻어났으며, 특히 국악기로는 많이 시도되지 않던 선율 진행이 흥미로웠다. 어딘가 신비한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금희악기점’은 꿈속을 그려낸 이미혜의 소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생각나기도 하고,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의 ‘rhapsody in blue’가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 전통 음악, 창작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겸손하게 말하고자 하는 작곡가의 음악적 가치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무대였다. 마지막 무대는 북한 작곡가 최성환이 아리랑을 테마로 만든 국악관현악 ‘아리랑 환상곡’. 국내뿐 아니라 미국·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자주 연주되는 곡으로, 여자경 지휘자가 서양 오케스트라와도 꽤 자주 연주했던 곡이라고 한다. 이번 무대에서는 국악기를 가지고 서양악기의 앙상블을 만드는 쪽으로 접근했다고 하는데, 곡 전체를 관통하는 아리랑의 선율이 ‘국악기’가 만들어 내는 음색에만 치중되지 않아 그 해석의 의도가 다분히 드러났다. 이는 특히 해금 연주에서 잘 보였다. 해금은 바이올린 등 서양 현악기보다 상대적으로 거친 소리가 나고, 활을 바꿀 때 조금 더 세게 마찰하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곡에서 해금 연주자들은 일부러 활을 동일하게 나누어 균등한 소리를 연주하고, 끝까지 활을 마찰시켜 바꾸며 부드러운 ‘선율’을 만들어 나가는 데 치중했다. 악기의 색이 튀지 않게 ‘아리랑’ 선율을 만들어 나간 관현악단의 연주는 특히 여자경 지휘자의 지시를 믿고 집중하며 더 큰 빛을 발했다. 깔끔하고 화합된 합주에 하나의 통일된 톤은 흡입력 강한 여자경 지휘자의 지휘와 더불어 국악 관현악의 밝은 미래를 보여주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전통 음악의 현대적인 재해석, 한국의 정신과 정체성을 담은 사운드, 전 세계의 관객에게 감동을 전하는 현대적인 레퍼토리를 담은 차별화된 무대를 선보여 나간다. 그들의 연주는 해가 갈수록 더욱더 빛이 난다. 월등한 연주 실력과 더불어 지휘자를, 함께 연주하는 연주자들을 믿고 음악에 집중하여 하나 된 소리의 감동을 보여준 그들의 이번 무대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보여줄 앞으로의 행보를 더욱 기대하게 해 주었다. 여자경 지휘자는 ‘청중이 없으면 무대도 없다’는 신념으로 낯선 길을 마다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여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 그가 이번에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함께 보여준 무대는, 국악에 익숙한 관객도, 익숙지 않은 관객도, 또한 서양 음악 지휘에 익숙하거나 익숙지 않은 관객도 모두 음악 아래 하나가 될 수 있는 순간을 선사해 주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이 ‘발견’한 지휘자 여자경이 ‘발견’한 국악관현악 무대, ‘디스커버리’에서는 무엇보다 ‘화합’과 ‘상생’이 도드라졌다. 음악이라는 주체 아래 서로 다른 장르 사람들의 해석이 합쳐지는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통해, 우리 국악 관현악은 앞으로 더욱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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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산국악원, 전통예술인들의 무대 '수요공감'국립부산국악원에서 매주 수요일, 전통예술의 다양한 국악무대가 펼쳐진다! 국립부산국악원은 전통문화 예술인을 지원하고, 창의와 계승의 전통 예술가 정신이 담긴 가․무․악의 장 '수요공감'을 9월에도 이어 개최한다. 9월 '수요공감' 첫 무대는 제52회 최진의 가야금 독주회 '최옥삼류 가야금산조 전바탕'이다. ‘산조’는 연주자의 기량과 독창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음악이다. 그 중 ‘최옥삼류 가야금 산조’는 최옥삼(崔玉山, 1905~1956, 장흥)이 김창조(金昌祖, 1865~1919, 영암)에게 배워 함동정월(咸洞庭月, 1917~1994, 강진)에게 전한 가야금산조이다. 선율은 무겁고 절제된 농현으로 긴장과 이완의 대비가 뚜렷하고 음양과 문답의 구조가 돋보이며 판소리의 다양한 성음을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최진이 ‘최옥삼류 가야금산조’ 전바탕을 연주하며, 산조 음악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확립하고, 학문적으로도 기여하는 마음을 무대에 담아낸다. 13일은 홍정윤의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무용 공연이다. 홍정윤은 이번 무대를 통해 부산지역에서 한국무용을 일군 신무용 2세대이자 무용 교육자 고(故) 황무봉(黃舞峰, 1930~1995) 선생의 춤 맥을 이어가고 있는 선배, 후배 예인들과 화합의 바람이 되어, 한국 춤의 불꽃을 피어 올리고자 한다. 순서는 황무봉 선생님의 강강수월래 작품을 모티브로 재구성한 작품인 ‘달빛 따라 바람이...’작품으로 시작하여 ‘황무봉류 산조춤’, 즉흥무와 시나위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시나위의 멋’, ‘황무봉류 살풀이’, ‘장고춤’, ‘흥에 취하다.’로 이어지며, 황무봉 스승님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작품 ‘회상’으로 무대를 장식한다. 20일은 관객과 함께하는 토크 콘서트로 진행되는 '최병길의 장단 시리즈'이다. 감상만 하는 공연이 아니라 관객과 함께 소통하고 참여하여 진행되는 공연이다. 토크를 통해 한국 전통 음악에서 ‘장단’의 특징이 무엇이 있는지와 ‘추임새’가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배워보고 연주에 맞춰서 배워본 ‘추임새’를 관객이 적용해본다. 연주자와 관객이 함께 만들어가는 형식의 공연이며, 관객들이 전통음악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과정에서 한국전통음악을 이해하고 즐겁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무대를 꾸며낸다. 9월 마지막 공연은 박병천가무악보존회의 초청공연 '대를 잇는 혼'이다. 박병천가무악보존회는 전라남도 진도군을 대표하는 예술인 중 한 명인 고(故) 박병천(朴秉千, 1932~1986) 명인의 가무악을 보존하기 위한 단체이다. 이번 공연을 위해 보존회가 준비한 작품 ‘대를 잇는 혼’의 무대는, 부산대 국악과 교수를 역임한 대금의 박환영 명인과 박미옥 선생, 박성훈 선생 등 대를 잇고 있는 가족과 제자들이 함께 출연해 박병천 명인의 예술세계를 함께 돌아본다. 순서는 박병천 명인의 작품으로 진도씻김굿을 새롭게 구성한 ‘산자를 위한 축원 덕담’으로 시작하여, 신에게 술과 향을 올리며 연행하였던 의식 음악인 ‘헌수음악’, 제석님께 비는 춤인 ‘제소춤’과 나쁜 액과 살을 풀고하자 하는 ‘액풀이’로 이어진다. 또한 박병천 명인의 작은 할아버지인 고(故) 박종기(朴鐘基, 1880~1947) 명인의 대금 가락을 엮어 만든 ‘박종기제 대금산조’를 박환영 명인이 선보이며 마지막으로 진도북춤의 명인이었던 박병천의 춤세계를 담은 ‘박병천류 북춤’으로 공연을 마무리한다. 신진, 공모, 명인예술인들의 전통과 창작을 아우르는 폭 넓은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2023 '수요공감'은 3월, 6월, 9월, 12월 매주 수요일로 총 16회의 공연을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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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여자경, 국립국악관현악단 첫 만남, '디스커버리'국립극장(극장장 박인건) 전속단체 국립국악관현악단이 관현악시리즈Ⅰ'디스커버리'를 9월 1일(금)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 2023-2024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개막작으로, 지휘자 여자경이 발견한 국악관현악의 다채로운 매력을 만날 수 있다. '디스커버리'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 지휘자의 시선으로 국악관현악 명곡을 새롭게 탐미하는 공연이다. 그 주인공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마에스트라 여자경이 나서, 국악관현악 지휘에 첫 도전장을 내민다. 여자경은 빈 라디오심포니오케스트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등 국내외 유수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 현재 대전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정확한 해석과 연주자와의 호흡, 관객과의 뛰어난 소통 능력으로 탁월한 무대를 선보여 왔다 평가받는다. 여자경은 "주옥같은 국악관현악 명곡을 발견하고 탐구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다”라며 본인만의 음악적 색깔을 담아 국악관현악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겠다는 포부로 직접 전 곡을 선곡했다. 공연을 여는 첫 곡은 이해식 작곡의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이다. 전통춤·민속음악·무속음악 등 한국인에게 익숙한 전통적 요소를 잘 활용해 대중적으로 사랑 받아온 곡이다. 춤과 바람을 주제로 만든 창작 음악으로 자유로운 바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역동적인 선율이 특징이다. 선율의 흐름을 잘 살린다 평가받는 여 지휘자만의 지휘력으로 곡의 매력을 배가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최지혜 작곡의 첼로 협주곡 ‘미소’는 국악관현악 편성으로 새롭게 편곡되어 무대에 오른다. 우리 선조들의 삶을 바꿔 준 의료 선교사이자 교육자 ‘로제타 셔우드 홀’에게 감명받아 그녀의 삶을 담아낸 작품이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첼로 수석을 지내고, 현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주연선이 첼로 협연자로 나선다. 2부는 김백찬 작곡의 ‘Knock’으로 시작한다. 2021년 '리컴포즈'에서 위촉 초연했다. 한국 전통음악의 5음 음계(도·레·미·솔·라)를 기반으로 다양한 변주를 시도해 전통음악만이 가진 고유의 호흡과 리듬감을 효과적으로 구현한 곡이다. 2021년 초연한 성찬경 작곡의 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금희악기점’도 함께 선보인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경영했던 유일한 악기점인 금희악기점의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피아노 협주곡이다. 피아노 협연은 작곡가·피아니스트·음악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오은철이 함께한다. JTBC '슈퍼밴드2' 우승팀 크랙실버의 건반주자, 팬텀싱어1의 우승자 ‘포르테 디 콰트로’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했다. 마지막으로 북한 작곡가 최성환이 아리랑을 테마로 만든 국악관현악 ‘아리랑 환상곡’을 연주한다. 국내뿐 아니라 미국·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여자경 지휘자와 국악관현악단은 편견을 넘어선 도전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음악적 정체성과 개성을 공고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낯선 길을 마다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여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내온 여자경이 국립국악관현악단과 만들 시너지가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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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한국의 지역춤, 전북지역춤이병옥/전통예술 연구가, 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부산·경남지역춤과 광주·전남지역춤에서는 기후와 지리 등 생태환경적 차이로 형성된 춤 전승과 특징에 비중을 두어 연재하였다. 그러나 대구·경북과 전북 등 북도지역은 남도지역보다 인구·경제·사회환경면에서 현재는 약세지만, 조선시대에는 영호남의 거점지역으로 정치·문화면에서는 중심지였다. 경상감영(대구)과 전라감영(전주)에는 관찰사(觀察使, 監司)를 비롯한 벼슬아치(官員)와 관속(官屬, 아전과 하인), 그리고 지방 호족(豪族)들이 많아 매우 보수적이지만 이들은 문화예술의 향유층이었기에 자연히 문화예술 종사자도 많아져 교방(敎坊)의 관기(官妓)와 사기(私妓), 장악청(掌樂廳)의 악공(樂工)과 재인(才人), 광대(廣大)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북도지역은 저명한 춤꾼과 소리꾼들도 많았으며 전승 뿌리도 깊었다. 그래서 지난 대구·경북지역춤에서는 경상감영의 춤 전승배경을 바탕으로 배출한 많은 근현대 춤 인물에 비중을 두어 연재하였던 것이다. 전북지역춤 역시 전라감영의 역사문화적 인프라와 예술환경의 영향으로 배출하게 된 많은 춤 인물에 비중을 두어 연재하고자 한다. 전북출신으로 중앙(서울)무대에서도 유명한 한국발레의 대부 임성남, 한국 현대무용의 대모 육완순, 한국춤극의 대가 국수호, 승무의 명무 채상묵 등 장르별 대가들이 많은 배경도 살펴본다. 또한 전북지역 전통춤의 계통별 특성과 전승자들의 계보와 전승내용을 살피고, 전북 전통춤의 대부 최선(최정철)이 국내에서 가장 많은 5명의 인간문화재 춤 제자를 배출한 전승배경도 관심있게 살펴본다. 아울러 민간춤에서 농악분야는 많이 지정된 반면, 탈춤분야는 한 종목도 지정되지 못한 연유도 알아본다. 조선시대 전라감영과 교방춤 전승 전북지역은 마한시대와 백제를 거쳐 통일신라기 견훤이 전주에 후백제를 도읍하였다. 조선왕조 500년을 꽃피운 이성계(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의 21세손)의 어진(御眞)과 조선왕조실록이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봉안되어 있다. 그래서 전주를 ‘천년의 고도’, ‘조선왕조의 발상지’라 부른다. 조선 초기 전주에 설치된 전라감영(全羅監營, 전북기념물 제107호)은 1896년까지 전라남·북도를 포함하여 제주도까지 통할하는 관청으로 성곽에 둘러싸인 전주부 내에 있었으며, 전주 관아(官衙)가 반대편에 있었다. 전주부(全州府)·광주목(光州牧)·순창군(淳昌郡)·순천좌수영(順天左水營)·무주부(茂朱府)·제주목(濟州牧)에 각각 교방(敎坊)이 설치되었었다.<『호남읍지』(1895)> 전주부는 교방과 장악청(掌樂廳), 광주목은 교방과 교방청, 순창군은 교방, 순천 좌수영은 기생청, 무주부는 교방청, 제주목은 장춘원으로 명칭을 달리 지칭하였다. 무주부 교방에서는 <포구락>·<고무>·<선유락>·<검무>·<승무>·<헌선도>등 6종의 춤과 이에 수반된 반주, 그리고 소품목록이 보존되어 상당히 큰 규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궁중무였던 <포구락>·<선유락> 등이 지방 교방에서도 연희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궁중무용과 지역 간의 교섭양상을 뚜렷하게 살필 수 있었다.<『호남읍지』(1895년), 『茂朱府邑誌』> 일제 강점기 권번조직과 전승춤 전북지역에 조선후기까지 전주·무주·순창·남원(남원은 기생 기록만 있음)에 설치하였던 ‘교방’(敎坊: 조선시대 여기(女妓)를 관장한 기관)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전주와 남원에만 ‘권번’(券番: 일제강점기 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남원지역에 교방설치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기생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교방이 존재하지 않았던 군산·정읍·이리(익산)·부안지역에 권번과 예기조합이 새롭게 설립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근대시기 경제력 약화와 교통망 부족으로 말미암아 무주·순창에서 교방이 사라지게 되었고, 반면에 일제강점기 경제 중심지로 급부상한 군산, 그리고 호남선과 전라선의 역이 개설되면서 은행이 설립되는 등 경제형 도시로 탈바꿈한 익산과 정읍에 예기조합 내지 권번이 설치되었다. 1916년의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령 제3호<요리옥·음식점 영업취체규칙>(식품위생법)에서 예기(藝妓:가무, 서화, 시문 등 예능을 익혀 손님을 접대하는 기생)·작부(酌婦: 술접대부)·예기치옥(藝妓置屋: 예기들의 거처사옥) 등 요릿집 위생관련 법안규칙에서 기녀들을 명시한 법령이 나타난다. 당시 전주에는 1915년에 예기조합(藝妓組合), 1923년에 전주권번이 설립되었고, 군산에서는 1923년에 군산 예기치옥(藝妓置屋), 남원은 1926년 예기조합과 권번(券番)이란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정읍은 1928년 예기조합, 이리(익산)는 1929년 기생조합, 1939년 예기조합이란 명칭으로 각각 설립되어 활동하였다. 『조선미인보감』 기록을 보면 1923년 당시 전주권번의 기생 규모는 최소 50명은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북 출신으로 서울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녀들은 한성권번에 조추월(曹秋月)과 조산월(曹山月), 신취옥(申翠玉) 등이 있었으며, 한남권번에는 장옥주(張玉珠), 송경주(宋瓊珠), 조산옥(趙珊玉)이 활동하였다. 전북 출신의 기생들은 고향에서 기예능을 익힌 후 경성에 진출한 것이다. 이들은 궁중춤(呈才)보다 <승무>·<살풀이춤>·<입춤>·<검무>·<화관무> 등의 민속춤을 주로 추었다. 교방(권번)계통춤의 전승과 무형문화재 지정 현황 전북지역의 전통춤은 교방계통춤과 재인계통춤, 두 계통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전승되고 있다. 교방계통춤이란 교방·권번·기방 등에 소속되어 추던 기녀들의 춤으로 곱고 섬세하고 아름답게 추는 여성 성향의 춤을 말하며, 반면에 재인계통춤이란 재인·광대들에 의해 추던 춤으로 투박하고 담백하지만 고고하고 품격있는 남성 성향의 춤을 말한다. 하지만 남성이라 할지라도 교방계춤을 전승한 춤꾼들은 곱게 추는 경향이 있고, 여성일지라도 재인계춤을 전승한 춤꾼들은 담백하게 춤을 춘다. 예를 들면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였던 이매방(27호 승무· 97호 살풀이춤)은 어린 시절 목포권번장 함국향으로부터 권번춤을 체득하였기에 곱디 고운 교방계통춤으로 전승하였으나, 반대로 한영숙(국가 27호 승무 보유자)은 처음부터 재인 한성준으로부터 춤을 배웠기에 담백한 재인계통춤의 성향을 보였다. 전북지역의 교방계춤은 여러 지역 권번의 명무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신분적 차별대우로 대를 잇지 못했으나 전주 전동권번의 이추월, 남원 권번의 조갑녀, 군산권번의 장금도만이 어렵게 춤맥을 잇고 있다. 전주전동권번의 이추월의 춤을 최선(호남살풀이춤, 전북15호)이 오롯이 이어받아 전북 교방계춤의 중심축을 이루게 되었으며, 최선(본명 최정철, 1935~)의 문하생으로 성장한 제자들이 각기 다른 종목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분화 발전하였다. 최선의 제자들로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된 이들은 김광숙(예기무, 전북48호), 이길주(호남산조춤, 전북47호), 고선아(한량무, 서울45호), 김나연(화관무, 황해 4호), 문정근(전라삼현승무 전북52호) 등 5명이나 되며, 채상묵(전통춤협회이사장)을 비롯하여 장인숙(호남살풀이춤보존회장), 허순선(광주대 교수), 정은혜(충남대 교수), 김희숙(영남대 교수)들이 있다. 이처럼 국내에서 많은 제자 보유자, 대학교수, 명무들을 양성한 최선은 금년(2018)에 전주와 서울에서 제자들과 함께하는 자랑스런 <사제일심(師弟一心)>춤판을 가졌다. 원광대 명예교수인 이길주(전북47호, 호남산조춤)는 어린 시절 최선의 문하에 입문하여 전북최초로 대학 무용학과를 개설하여 전북지역 대학무용발전에도 공로가 크며, 호남산조춤은 이추월-최선-이길주로 이어지는 교방계춤으로 산조연주에 맞춰 멋진 춤사위를 발휘하는 한국 전통춤의 대표적 특성인 한과 신명을 한층 더 자유롭게 승화시켰다. 김광숙의 예기무(전북 48호)는 부채춤-수건춤-접시춤이 복합된 교방춤으로 어린 시절 최선의 문하생을 거처 정형인, 박금슬에게서도 춤을 사사받았다. 고선아 역시 최선의 문하생으로 상경하여 강선영 태평무을 이수하고 경기지역 4인 군무인 한량무 보유자(색시춤, 서울 45호)가 되었다. 김나연도 최선류 호남살풀이춤 이수자로 화관무 보유자(황해 4호)가 되었다. 그밖에도 남원권번의 조갑녀의 춤은 딸 정명희로 이어지고 있으며, 군산권번 장금도의 춤은 송미숙(진주교대)과 신명숙(대진대)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재인계통춤의 전승과 무형문화재 지정 현황 한편 전북지역 재인계춤의 대부는 정읍출신 정자선(1872~1949)을 꼽게 되는데, 소리와 기악은 물론 춤도 뛰어났으며, 그의 전주 제자로는 김소란·정형인·박금슬·김유앵·장월중선 등이 뒤를 이었다. 그 중에서도 수제자이며 장남인 정형인(1896~1973)의 뒤를 이은 제자들은 금파 김조균(1940~1998, 한량무, 전북 17호)과 서울에서 활동하는 국수호(전 국립무용단장)와 농악명인 정인삼(소고춤, 경기56호)도 있다. 금파(김조균)를 중심으로 대를 이은 국수호·고선아·김숙·김무철(한량무, 전북44호)를 비롯한 노현택(무용협회 전주지부장)·문정근(전라삼현승무, 전북52호)·심가영와 심가희(삼례문화예술촌 대표)·김애미·이정노·정길만(국립무용단원 훈련장) 등이 있다. 전북지역의 재인계춤은 정자선-정형인-김조균(금파)으로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김조균(금파)는 한량무로 보유자 인정을 받았으나 일찍 작고(1940~1998)하는 바람에 전승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아들 김무철이 부친의 춤 불씨를 살려 다시 한량춤(전북 44호)으로 인정받았다. 정자선-정형인-박금슬-문정근으로 이어지는 전라삼현승무(전북52호, 문정근)도 전북의 재인계춤의 또 다른 큰 줄기를 계승하고 있다. 정읍의 전계문(全桂文,1872~1940, 정읍예기조합)은 춤 분야도 뛰어났던 것으로 전한다. "전계문은 당숙인 전도성(全道成,1864~?)의 수행 고수로 활동한 인물이다. 전계문은 북뿐만 아니라, 춤과 정악·양금·가야금·거문고에 이르기까지 두루 능통했는데 특히 <한량무>가 일품이었다. 한성준(1874~1941)이 일 년에 한두 번씩 정읍에 내려가 보름 정도 머물며 전계문에게 북가락과 춤사위를 배웠다.”는 사실은 이보형(음악민속학자)이 송영주(유명 고수였던 태인 출신)를 대담한 결과 근대 전통춤의 대가 한성준이 전계문에게 태인(泰仁)으로 내려와 배운 사실을 직접 확인하였다.<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판소리유파』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16)(서울: 문화재관리국, 1992), 119쪽> 또 하나의 특별한 재인계춤은 정읍의 전계문으로부터 한성준을 거치고 멀리 서울의 김보남을 거쳐 다시 정읍으로 돌아온 신관철로 계승한 수건춤(전북59호, 보유자 신관철)이다. 오늘날 살풀이춤은 1930년대 초 한성준이 정읍의 전계문을 찾아가 춤을 배울 때 수건춤을 살풀이장단에 추는 것을 보고 제1회 한성준 춤발표회에서 처음으로 ‘살풀이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부터 보편화된 명칭이었다. 이후 수건춤이란 명칭이 사리지는 듯하다가 최근 원래 명칭인 ‘수건춤’을 찾아 쓰는 경향으로 지정된 것이다. 익산시의 한국춤 분야는 원광대 무용학과 이길주 교수의 제자로 고명구(무용협회 익산시 지부장), 김명신(전통춤협회 익산시 지부장), 이한녀, 장태연, 장미나(국악원 무용단) 등이 활동 중이며, 익산의 최태열(마한백제무용단 단장, 전북 고부출신 은방초 사사)은 무용교육자 겸 무용가로 ‘길거리 캐스팅’처럼 어린 유망주들을 발굴 육성한 중견남성무용가들로는 이강룡(전 대전시립 지도위원), 박종필(익신시립 무용단 예술감독), 노수은(전 김포예총 회장), 조남규(상명대 교수, 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김진원(서울시립 무용단), 홍기태(부산시립 수석안무자), 박근식(무용학원운영), 소병구(행안부 지방자치 인재개발원 교수, 전통문화), 김지립(무용학원운영) 등이 있으며, 여제자 이미숙(의정부시무용단 예술감독)도 의정부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군산시에는 육정림의 제자 김덕림, 송미숙(진주교대 교수), 김정숙(군산시 지부장), 이한녀( 전국립국악원 무용단) 등이 있으며, 이운태 군산여고 교사로부터 최은정(태평무 호남 지부장)이 사사받아 군산에서 활동하면서 강선영 태평무를 이수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인물로 본 한국무용사』(예론사, 1992)를 출간한 전주출신 오화진은 아시아 무용협회를 운영했다. 전북의 창작춤과 발레 전승 전북의 현대춤과 발레는 이시이바쿠(石井漠, 1887~1962)와 최승희(1911~1967)의 제자인 김미화(본명 김옥순, 1922~1984)가 전라북도의 ‘창작춤의 효시’라고 본다. 최선(호남살풀이춤 보유자)도 어린 시절 김미화로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최승희와 김미화에게 사사받은 육정림(1928~1986)이 군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마찬가지로 최상철(중앙대 교수)도 군산출신 현대춤 교육자이다. 한국발레계의 대부 임성남(1929∼2002, 초대 국립발레단 단장)은 전주사범학교 시절 한동인 발레단 공연을 보고 제자가 되어 발레를 시작하여 일본유학에서 핫도리 시마다(전북 익산출신 제일교포)에게서 발레를 배워 서울에서 활동하였고, 군산출신 김긍수(중앙대 교수, 전 국립발레단장)도 발레 전공자이다. 전주출신 김양곤(서울교대 교수)은 1956년 한국교육무용가협회를 결성하여 파조, 박외선, 정혜옥 등과 함께 활동(1957년 대표최고위원)하면서 서울교대 무용교수로 교육(초등무용)에 공헌하였으며, 제자에는 육완순(전 이화여대 교수, 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 이병옥(용인대 명예교수, 춤비평, 이론은 정병호 교수 사사)이 있다. 미국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아온 조원경(전북김제 출신, 1929~2005)도 발레와 창작춤 전공으로 『무용예술』(해문사, 1967) 저서를 발간했었다. 한국현대춤의 거목인 육완순(1933~)도 김미화에게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무용의 꿈을 키워 이화여대 교수로 현대춤계에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전주성심여고 무용교사였던 박순자(부산대)로부터 이혜희(전북대, 발레), 손정자(우석대, 발레)가 대를 잇고 있다. 그밖에도 권오희에서 양정수(수원대)로 현대춤이 이어지고 있다. 무형문화재 연희춤-탈춤은 없고 농악만 발달 춤과 관련한 연희종목은 탈춤과 농악춤이다. 그런데 영남지역에 비해 호남지역은 탈춤종목은 한 종목도 전승하지 못해 지정된 종목도 없다. 이유는 풍농기원의 마을축제가 농악과 탈춤이 함께 발원하여 전승하는 과정에서 분화발전하게 되었는데, 호남지역은 농악이 발달하다보니 탈춤은 농악의 잡색놀이(양반, 중, 포수, 창부 등)로 예속되어 전승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농악은 전라북도 내륙과 산악지대의 호남 좌도농악(필봉, 남원)과 해안과 평야지대의 우도농악(정읍, 부안, 김제, 고창)으로 각기 다른 특성을 보이며 분화 발전하였다. 호남좌도농악은 고깔보다 전립을 쓴 채상소고춤이 눈에 띄며, 우도농악보다 가락이 빠르고 윗놀이(채상모, 부포상모)가 발달하였으며 판굿중심의 진풀이가 발달하였다. 호남우도농악은 외관상 고깔소고춤이 눈에 띄며, 악기별 개인놀이(쇠춤, 장고춤, 소고춤)가 발달하였다. 내용에서도 장구가락과 설장고춤이 발달하였고, 윗놀이(상모춤)보다 밑놀이(악기가락춤) 발달하였다. 전북 좌도농악의 대표인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임실필봉농악(국가11-5호, 보유자 양진성)은 쇠잡이(꽹과리, 징)만 상모(털이나 줄이 달린 모자)를 쓰며 나머지는 고깔을 쓴다. 농악의 종류에는 섣달 그믐의 매굿, 정초의 마당밟기, 당산제굿, 보름굿과 징검다리에서 치는 노디굿, 걸궁굿, 문굿, 농사철의 두레굿, 기굿과 판굿이 있다. 남원농악(전북7-4호, 상쇠보유자 류명철)은 전북 남동부의 좌도농악을 대표하며 가락이 다채롭고 놀이동작이 세련되고 섬세하며, 농악대원들은 꼭지에 흰 새털이나 종이 오리를 꾸며 돌리는 상모가 특징이다. 전북우도의 부안농악(7-1호, 상쇠보유자 라모녀(금추), 며칠 전에 작고)은 음악·춤사위·놀이가 완벽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으며, 생동감 넘치는 가락이 많다. 정읍농악(전북7-2호, 소고보유자 김종수, 유지화)은 세습무 집단의 뛰어난 예능과 접합되어 예술적 수준이 높다. 김제농악(전북7-3호, 상쇠 이준용, 박판열)은 평야지역의 두레굿과 마을 대동굿의 형태로 농악을 전승해 오다가 좀더 전문적인 예인집단에 의해 발달되어 있다. 고창농악(전북7-6호, 설장고 정기환, 소고 정창환)은 예로부터 고창, 무장, 영광 등지의 해변을 끼고 형성된 농악으로 잡색놀음과 고깔소고춤이 발달하였다. 전북 지역에 춤 명인들이 많이 배출된 연유 전북지역은 현재 국내에서 대도시(광역시)도 없고 인구도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춤, 현대춤, 발레 등 여러 장르에 걸쳐 굴지의 춤 명인들이 많이 배출된 배경을 짚어본다. 첫째, 조선시대 전주교방을 비롯하여 무주교방, 순창교방, 남원에는 수많은 관기와 악공들과 풍류객들이 존재했던 곳으로 지역춤과 소리문화의 인프라가 오랜 역사 속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호남과 제주를 아우르는 정치·문화·예술의 중심지인 전라감영(全羅監營)과 전주부(全州府)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전주시내 초입에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이라는 일주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둘째, 전북지역은 ‘전주대사습(全州大私習)놀이’로 조선시대 국내 최고의 예술가들이 운집하던 고장이었다. 조선봉건사회에서는 예능인들을 천시했지만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받은 명창명인들은 어전명창의 명예를 얻었고, 벼슬을 제수 받는 경우도 있었기에 예술가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신분상승의 명예로운 삶으로 생각하는 문화적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조선시대 전주 지방에서 거행된 예능경연대회(藝能競演大會)로 본래는 숙종(1674~1720) 때 전주에서 거행된 궁술대회(弓術大會), 영조(1724~1776) 때 전주 특유의 통인물(通引物)놀이, 그리고 철종(1849~1863) 이후 국내 최초로 경창(競唱)된 판소리 백일장 등 민속무예(民俗武藝)놀이의 총칭이었다. 순조(1800~1834) 때에는 대사습놀이에서 장원한 우수 광대에게 가자(嘉資)와 명창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한 동안 이 놀이는 중단되었다가, 1975년에 다시 복원되어 판소리·농악·무용·시조·궁도 등 5개 부문의 경연으로 시작하였고 오늘날에는 판소리·기악·민요·시조·전통무용·농악부문으로 경연이 정착되었다.<한겨레음악대사전, 2012. 11. 2., 도서출판 보고사> 셋째, 농악의 발달은 남성춤 전공자 확산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우도농악은 설장고춤, 상쇠춤, 소고춤 등 개인놀이가 발달하여 농악전공자들이 춤전공자로 전향하는 사례가 많았다. 전주농고 농악단 출신의 국수호, 손병우(우석대 교수)를 비롯하여 정인삼(전 민속촌 농악단장, 소고춤보유자) 등 많은 남성무용가들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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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에 김혜란·이호연 명창 인정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로 김혜란(72) 명창과 이호연(67) 명창을 인정한다고 29일 고시했다. 경기민요 종목에서 새로운 보유자가 인정된 건 1997년 이춘희 보유자 이후 약 26년 만이다. 문화재청은 29일 관보를 통해 "김혜란, 이호연은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종목의 전승능력, 전승환경, 전수활동 기여도 등이 탁월하여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로 인정한다"고 밝혔다.'경기민요'는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주로 불리던 전문 예능인의 노래로 1975년 7월 12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경기민요 세부 기·예능인 '경기12잡가'는 사설이 긴 노래라고 해 '긴잡가', 혹은 앉아 부른다고 해 '좌창'이라고도 부른다. 대개 서경적 혹은 서정적인 이야기로 조용하고 은근하며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내용이 많다. 경기12잡가로는 유산가, 적벽가, 제비가, 소춘향가, 집장가, 형장가, 평양가, 선유가, 출인가, 십장가, 방물가, 달거리 등이 있다. 김혜란 명창는 1980년 이수자를 거쳐 1991년 전승교육사로, 이호연 명창은 1986년 이수자를 거쳐 1996년 전승교육사로 활동해 왔다. 이번 보유자 인정을 앞두고 묵계월·이은주 유파 후보 전승 교육자 등 1만여명은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최종 결과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경기민요 유파와 전승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1975년 경기민요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안비취(본명 안복식)·묵계월(본명 이경옥)·이은주(본명 이윤란) 명창이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2021~2023년 인정조사에서 최종 후보에 오른 4명 가운데 안비취 유파의 김혜란·이호연씨만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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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할린 동포와 함께 아리랑한마당이병일/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원장 (현 석관중학교장) 사할린한국교육원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지 4개월이 다 되어간다. 지금은 서울의 중학교에서 일하고 있지만, 나는 현지 사할린 동포들과 여전히 아침마다 여러 SNS에서 인사를 나눈다. 시시각각 소식들은 점심시간이나 오후 퇴근길에서 열어 보고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하트를 보낸다. 지난 11일 주말 아침 사할린 동포들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님의 초청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사할린에서 귀국하고 처음으로 사할린 동포들을 만난다는 설레임을 안고 영주귀국동포들이 사시는 경기도 양주 율정마을에 도착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주관하는 "사할린동포와 함께하는, 찾아가는 아리랑 학교"가 열린 것이다. 서울에서 양주까지 2시간 이상 운전을 하면서, 지난 3년 간 임기를 마친 사할린한국교육원 시간이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그 중 많은 추억들 중 '사할린아리랑'은 기미양 대표님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3년 전 7월 중순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님과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님을 처음 만났다. 사할린 비자 갱신차 일시 귀국했다가 제4회사할린아리랑축제 행사를 준비하는 문제로 종로에서 만난 것이다. 현재는 전쟁으로 잠시 중단 된 상태이지만 2016년부터 매년 아리랑연합회는 사할린주한인협회와 공동주최로 사할린에서 크고 작은 행사와 공연을 수 차례 지속적으로 주관해 오고 있는 아리랑공동체이다. 국내외 55개 아리랑전승단체와 연구단체로 구성된 순수 시민운동단체이다. 그후 일시 귀국 때마다 국악신문사에서 보내주는 한복과 태극선 부채, 태극상모(이담농악), 아리랑음반,국악음반 등을 사할린 한민족예술동포단체에 전달했고, 아리랑학회에서 주관하는 아리랑학교 프로그램에 수강하기도 했고, 돌아가서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아리랑 특강과 새해 첫날 우리말방송에서 아리랑의 역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기미양 대표와는 아리랑 관련 자료와 행사 소식을 이메일을 통해 주고 받고, 화상통화로 10월에 내린 사할린 첫눈 소식을 건내 주어서 국악신문 포토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특히 유즈노사할린스크 주에서 지어준 '아리랑누각'과 '아리랑공원' 건립 소식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여러 국제적 사정으로 매년 사할린아리랑축제 및 아리랑 예술공연 단체가 준비하는 사할린 방문은 무산되었다. 나는 사할린에서 탈춤과 소고춤, 사할린아리랑, 밀양아리랑, 어부놀이 등 민속춤과 아리랑배우기 등을 통해 사할린 동포 및 현지인과 교류를 하였다. 특히 2022년 3월 KBS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년' 행사에 사할린 동포들 50명과 함께 특별초청 되어 동포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후 2022년 KBS방송 한민족수기공모전 수상자 인터뷰, 한민족방송에 두 차례 출연해서 사할린 동포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특히 KBS한민족수기공모전 참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한글교육에 힘썼다. 미디어 매체를 통해 사할린 동포의 존재와 이산의 역사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니 지나가시는 어르신들의 러시아어 대화가 들려서 참으로 신기하고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자꾸 말 걸고 싶은 기분이랄까. 문경에서 도착한 대형버스에서 앰프와 악기, 다듬이, 박스 등이 리어카에 실려서 공연장으로 이동 중이었다. 사할린 어른들도 함께 손수 나르시고 계셨다. 떡과 수박 등 다과회까지 준비를 해오셨다. 공연 식전 행사에서 인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서 행사가 있게 되면, 1세대 어르신들께 큰절을 드리던 습관이 있어서 양주 율정마을 동포 1세대분들께 바닥에 엎드려서 큰절을 올렸다. 이어 "아직도 3년간 살다 온 사할린 기억이 생생해서 자다가도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 글을 쓰며 추억한다. 그리고 영주귀국 신청 전에 부모가 사망하시면 영주귀국 신청을 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2세대 어르신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잠시 가슴이 울컥해져서 머리 속이 먹먹해졌다. 코로나 팬데믹 동안 닫혀진 대강당 문이 오늘 3년만에 처음 열게 된 것이다. 한쪽 면은 대형 사이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비치는 공간이라서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무덥지는 않았지만,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은 관계로 관람객이 늘어나고 공연이 이어지면서 다소 습기가 올라가는 느낌이 있었다.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사할린에서 살다오신 어르신들께는 부담이 되는 기온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사할린에서 체질이 형성된 분들이라 한국의 무더운 여름은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늘 이맘때는 사할린에 돌아가서 그리운 가족들과 함께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9월 말 즈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시고 했는데....이제는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3년간이나 한국에서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계신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회장:이만유)가 준비한 공연 프로그램은 모두 아리랑판이다. 율정마을 어르신들로 구성된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의 '사할린아리랑' 합창으로 첫 막을 열었다. 이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의 '왕십리아리랑', 동두천아리랑보존회의 '동두천아리랑'이 불려졌다. 2부는 문경에서 오신 40여 명의 아도위 회원들이 준비했다. 아도위합창단과 아도위연주단이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 홀로아리랑 등 다양한 아리랑을 연곡으로 불러 주시고, 문경새재아리랑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하모니카 연주단이 트롯트를 선사했다. 동포들이 무대에 나와서 우리 전통 춤사위와 러시아 민속 춤사위로 춤을 추기 시작해서 신명을 높여 주었다. 트롯트에서 빠른 비엔나 왈츠, 불루스 등을 망라한 춤판이 이루어졌다. 러시아에서 태어나신 분들은 노래보다 춤을 더 즐긴다. 우리가 노래방을 좋아하는만큼 그들은 춤을 즐기는 민족이다. 휘날레 춤판에는 많은 어른들이 춤을 추시고 기뻐하셨다. 코로나가 때문에 너무나 오랜만에 모여서 추어보는 춤이라고 하시면서....이러한 자연스런 파티 풍경은 사할린에서 근무하는 동안 너무나 낯익은 어울림이어서 참으로 오랜만에 그리운 사할린 추억으로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문경시민들은 동포 분들께 드릴 정성이 담긴 선물도 듬뿍 가져 오셨다. 문경시장이 보낸 아리랑 책자, 문경특산물 오미자 와인, 오미자김 등을 뒷풀이에서 풀어 놓기도 하셨다. 직접 만든 생강조청을 준비하신 문은자 여사님의 정성이 대단하다. 기미양 대표님은 사할린아리랑축제추진단장으로서 '아리랑'을 매개로 현지 사할린 동포와 전국 여러 지역의 사할린 영주귀국동포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계신다. 영주귀국 사할린동포 분들의 성함과 얼굴, 모스크바에서부터 사할린에 사는 친인척 관계에서 겹사돈 관계까지 거의 알고 계신다. 그동안 사할린 원로 교육자 고 공노원 선생의 안내로 안간, 인천 등 에 사시는 많은 사할린 사람들을 만나서 강제동원과 가족사에 대한 기록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대표님과 공노원 선생의 안내로 2017년 사할린 이산의 역사가 다큐로 방영되고, 국내외 사할린 동포들에게 KBS한민족체험수기 공모전 참가를 널리 알려오고 계신다. 사할린 동포들의 디아스포라의 아픔이 공중파와 출판을 통해 소개되는 성과를 내고 있다. 매년 대상 수상작은 사할린 동포들의 이산의 고통이 담긴 가족사이다. 작년 대상 역시 사할린한국교육원 한글학교 수강생 김경순(77세) 어른이 수상했다. 2019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일간 개최된 '서울아리랑페스티발'에서 '사할린아리랑무용단과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대상과 금상을 받았다. 현재 사할린아리랑앙상블(단장:박영자), 오늘 만난 양주 율정마을 사할린 동포로 이루어진 사할린아리랑보존회 합창단이 수상한 것이다. 당시 하바롭스크아리랑보존회 게나김 단장도 초청되어 무대에서 '카레이스키아리랑'을 부녀가 같이 불러서 주목을 받았다. 우리는 흩어진 한민족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아리랑을 매개로 활발한 개방과 교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코로나 판데믹의 여파과 전쟁으로 인한 문화적 교류의 중단으로 인한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아리랑을 매개로 문경시민들과 사할린이 연결된 오늘 이 시간은 새로운 시작의 의욕을 신선하게 일으키는 날이다. 순수 시민운동단체로서 문경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있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의 활동이 놀랍다. 이만유 회장의 특강에서 정선아리랑.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처럼 온 국민이 문경새재아리랑을 부르게 될 것이라는 진정성이 가슴에서 느껴졌다. 먼 길을 와 주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동두천아리랑보존회, 한편 이혜솔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장님은 병원 입원 중에도 양주까지 오셔서 공연이 끝나고 바로 병원으로 재입원하셨다. 사할린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있는 사할린아리랑보존회 및 율정마을 어르신들, 오늘 사할린과 문경의 만남을 순조롭게 이어주신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 그리고 자리를 빛내주신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님과 부회장님의 동행 등, 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런 귀한 다음 만남의 시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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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관재국악상 수상자 김일륜 교수올해 ‘제8회 관재국악상 시상식’에서 김일륜 교수가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가야금 연주자이자 교육자로 외길을 걸어온 김일륜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국악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봤다. 국악의 가치를 높여 국민과 전 세계에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 온 김인륜 교수의 인생을 들어본다. Q. 올해 열린 ‘제8회 관재국악상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셨습니다. 수상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A.올해는 관재(寬齋) 성경린(成慶麟) 선생님의 서거 1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민족음악의 보존․전승․보급 및 발전을 위해 공적을 쌓은 자를 격려하여 국악의 무궁한 발전을 염원한 성경린 선생님의 큰 뜻이 담긴 상을 받아 매우 영광스럽고 기쁩니다. 이 상이 권위 있게 이어나갈 수 있도록 애써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겸허한 자세로 국악 진흥과 발전에 앞장서 나가야 한다는 뜻을 받아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Q. 살아 생전에 관재 성경린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A.저에게는 마치 국악의 부모님과도 같은 분이셨습니다. 행동으로 자식을 가르치는 부모처럼, 관재 성경린 선생님은 국악인으로 바른 몸가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반듯하고 정갈하고 옳은 생각과 옳은 인성을 가지고 국악을 대하고 오로지 정진하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검소하고 꼿꼿하며 강직한 관재 성경린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고 되새기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Q. 가야금을 배운 계기는 무엇인가요? A.아버지는 그림, 단소 등 예술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전주에 있는 본가 3층이 국악원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국악을 가까이했습니다. 춤과 소리를 먼저 시작했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예쁜 소리를 내는 가야금이 좋아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국악원은 어린 저에게 유치원이었고 학창시절인 저에게 놀이터였습니다. 저는 국악원에서 많은 국악을 배웠고 서울대학교 국악과에 진학하면서 평생 국악을 하고 있습니다. Q. 가야금 연주가로서 우리나라 국악 역사에 길이 남을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A. 가야금의 전통을 전승하기 위해 ‘가야금산조 여섯바탕 독주회’(최옥삼, 정남희제 황병기, 성금연, 김병호, 김죽파, 신관용류)를 했습니다. 민요, 병창의 레퍼토리 뿐만 아니라 판소리 '춘향가'를 입체창으로 구성해 아쟁과 장구반주를 곁들여 새롭게 선보였습니다. 가야금 연주의 전통성, 원형성을 깊이 있게 탐구했습니다. Q. 가야금 연주 창작에 앞서며 펼친 활동을 소개해 주세요. A. 1980년대 중반부터 독주 중심이었던 가야금의 중주곡 장르를 개척해 가야금 연주 양식 개발에 힘썼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22현 가야금 솔리스트며 1995년 25현 가야금 제작과 탄생을 주도해, 오늘날 전국에 모든 가야금 연주자가 개량한 25현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Q. 가야금 연주가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자로서 노력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A. 25현 가야금의 저변 확대를 이루면서, 저는 학생들이 가야금 연주가로서 활동기반을 넓게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1999년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특수대학원에 교수로 임용되면서 ‘33명의 가야금 연주자로 구성된 가야금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보자’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고, 동종 악기 앙상블의 활성화를 위해 앞장섰습니다. 학생들과 곡을 만들고 작곡자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작곡과 편곡을 부탁하며 보석 같은 곡을 받았고, ‘숙명가야금연주단’으로 함께 활동하며 연주했습니다. 이후 2005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전통예술학부 교수로 자리를 옮겨 ‘중앙가야스트라’를 창단해 차세대 가야금 연주가들의 꿈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현재 중앙가야금합주단 대표 및 중앙가야스트라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40년 가까이 제가 학습한 산조의 여러 유파 및 창작 레퍼토리, 앙상블 실습 등을 지도하며, 전통음악에 내재된 예술성과 정신성을 전수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국악 분야의 인재들이 재능 뿐 아니라 바른 인간으로 행복한 삶의 방향성을 찾을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Q. 아시아의 전통 음악에 깊은 조예를 갖고 가야금과 접목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아시아금교류협회 2대 회장에 이어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994년 창단된 아시아금교류회는 중국, 일본, 베트남, 몽고의 금 악기 연주자들과 교류하며 연주회 개최 등의 활동을 펼쳐 왔습니다. 신종 코로나19로 잠시 주춤했지만 곧 왕성한 활동을 기대합니다. 아시아금교류회 활동을 통해 저는 우리나라 가야금, 거문고, 아쟁의 최고 연주가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야금연주가협회의 이사로 활동하며 1년에 1회 열리는 큰 연주회 준비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황병기 작품보존회 부회장, 창작음악연구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Q. 가야금 연주가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A.지난해 그동안의 음악활동으로 12장의 기획음반으로 제작한 ‘김일륜 가야금전집 -길’을 출반했습니다. ‘가야금음악의 전 장르를 집대성한 최초의 12장 음반’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음반에 첨부한 소책자에 산조 및 병창, 창작곡에 대한 상세 해설을 집필해 자야금 작품에 대한 연주해석을 제시했다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 뿌듯합니다. Q. 마지막으로 가야금 연주와 교육의 현주소는 어떠하며 앞으로 발전해야 할 방향성은 무엇일까요? A. 전통을 기반으로 삼아야 미래가 밝습니다. 올해 동국대학교에 한국음악과가 새롭게 신설됐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종교음악을 떠나서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독창적으로 소개할 수 있는 음악이 국악입니다. 우리의 국악이 왜 소중한지 머리와 가슴으로 이해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의 전통을 완벽하게 꿰뚫을 때 타 장르와의 협업에서 최고의 효과가 발휘될 것입니다. 국민 모두가 국악을 사랑할 수 있도록 1인 1국악기를 다룰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악 능력검정시험’을 신설한다면 보다 효과적으로 국악인재를 육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소리는 우리가 제일 잘합니다. 온국민이 국악으로 자부심을 가지는 그날이 오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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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국의 지역춤, 대구·경북지역의 춤지리와 기후환경에 따른 대구·경북인의 기질 대구·경북지역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심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자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라는 신조어를 쓸 정도로 무더운 날이 많다. 그리하여 대구·경북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중시하며 이러한 생태환경적 배경으로 대구·경북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여 발전시켜왔다. 신라 천년의 문화적 배경과 춤전승 대구·경북지역은 역사적으로 서라벌(경주)을 도읍지로 시작해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1천 년 동안 행정, 산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행정의 중심이 송도(개성)와 한양(서울)로 옮겨진 고려와 조선시대까지도 영남호족의 세력이 여전히 핵심을 유지하면서 오늘날까지 ‘선비(양반)정신’이 깃들어 있는 독특한 지역춤의 특성을 전승하여왔다. 신라시대 악성(樂聖) 우륵이 가야금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는 가야지무(伽倻之舞), 한기무(韓岐舞), 미지무(美知舞), 대금무(?琴舞)가 있었고, 계고(階古)에게는 가야금을, 법지(法知)에게는 노래를, 만덕(萬德)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전한다. 뿐만 아니라 황창무(黃昌舞)와 처용무(處容舞), 상염무(霜髥舞), 무애무(無?舞), 오기(五伎) 등 남성춤도 많았다. 그밖에도 도솔가무(兜率歌舞), 회소곡(會蘇曲), 그리고 팔관회와 연등회에서 가무백희(歌舞百戱) 등 민간생활과 밀접한 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경상감영의 관기와 권번춤 전승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와 상주로 이어져 온 경상감영이 1601년(선조34년)에 대구로 이전하게 되면서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국가와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지금의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공원 일대)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년,영조 43년),『대구읍지大丘邑誌』(1768년 발간), 『경상도 읍지』(1832년경), 『영남읍지』(1871년경,1895년),『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1888) 등> 그러나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이 사회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모임이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등 4명이 대구기생조합이나 서울로 진출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 중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 김천조합 소속이 3명이나 기록되어 있고,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을 잘 추었다고 하였다.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927년 ‘달성권번’이 새로 설립되었다. 무형문화재 종목의 연희와 춤들 대구·경북지역이 고대부터 근대까지 영남지역의 중심지였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침탈의 거점인 부산·경남지역이 중심도시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유교와 양반문화를 비롯한 예술문화는 여전히 대구·경북지역에 뿌리 깊게 남아있었다.농악영남지역 농악이 다른 지역 농악과 가장 큰 차이는 시각적으로 엄청나게 큰 고깔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영남북부권이 남부권보다 더 큰 고깔을 쓰는 경향을 보이며, 판굿도 발달하여 7종목(고산, 욱수, 청도차산, 금릉, 비산(날뫼), 구미무을, 경산보인)이나 지정되어 있다. 그 특징은 원박적이고 아주 빠른 리듬과 웅장한 북춤과 화려한 고깔춤이 발달했으며, 천왕매기굿(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굿)이나 지신밟기에서 잡귀잡신을 쫓는 힘찬 덧배기가락과 덧배기춤이 발달했으며, 개인놀이보다 집단놀이와 뒤풀이춤이 발달했다. 고산농악(대구 1호)은 농기구를 앞세우고 태극무늬로 도는 덩덕궁이, 원을 돌며 각자 춤추는 춤굿, 손잡고 원을 돌면서 닭을 쫓는 닭쫓기, 나선형(螺旋形)으로 들어갔다 풀어 나오는 방석말이 등이 특징이다. 욱수농악(대구 3호)은 동제당 앞에서 신내림을 받는 천왕받이굿과 원형으로 춤을 추는 둥글데미, 세로 2줄로 마주보고 앉은 연주자들을 상쇠가 Z형으로 빠르게 돌면서 징·북·장구·법고 열로 끊어 일으켜 풀어나가는 외따기와 흥겨운 어깨춤을 추는 덧배기춤 등이 특징이다. 청도차산농악(경북 4호)은 천왕기(天王旗)싸움에서 발달한 농악으로 꿋꿋하고 향토적인 옛스러움과 질박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장단을 외가락으로 빨리 몰아가는 경우가 많아 소박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금릉빗내농악(경북 8호)은 마을의 성황제와 풍년을 기원하는 별신제(別神祭)가 섞여진 동제(洞祭)의 형태로 진풀이 농악과 무당굿과 줄다리기 등이 혼합되어 가락이 매우 강렬하고 종류도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날뫼북춤(대구 2호)은 대구비산농악에서 북을 연주악기로 추는 북춤만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특유의 덧배기가락(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덩덕궁이, 자반득이(반직굿), 엎어빼기, 다드래기, 허허굿, 모듬굿, 살풀이굿, 덧배기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미무을농악(경북 40호)은 쇠와 소고는 전원이 전립에 상모를 쓰고 이외에 배역들은 모두 백색의 큰 고깔을 쓰는데, 고깔의 꽃송이들은 춤사위에 따라 움직이게 한다. 길굿가락과 정적궁가락, 덧배기가락 등 경상도 특유의 쇠가락이 발달하였다. 경산보인농악(경북 41호)은 전형적인 모의농사굿 형식이면서도 다른 지역과 달리 글자놀이가 발달하였고, 섬세한 덩덕궁 가락과 삼채가락이 조화를 이루고, 특유의 별다드래기장단과 덧뵈기장단이 가락의 주를 이루어 화려하고 웅장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탈춤탈춤은 부산·경남지역 낙동강 하류에 7종목(야류·오광대)이나 국가 또는 지방무형문화재가 지정되었고 연희적인 면이 발달했으나, 대구·경북지역은 별신굿놀이 성격으로 재담이 적고 연희보다 의식성이 많은 하회별신굿탈놀음(국가 69호)과 예천청단놀음(경북 42호) 2종의 탈춤이 전승되고 있을 뿐이다. 별신굿이란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하며, 더불어 수호신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춤을 추었다. 하회별신굿탈놀음의 탈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1964년 하회탈 및 병산탈(10종11개)로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탈놀음의 반주는 꽹과리 중심의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지는데 우리나라 탈춤의 기원과 전승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천청단놀음은 대구·경북지역의 향토성을 보이면서 벽사진경을 추구하는 주술성과 상류층에 대한 풍자를 투박한 춤과 몸짓, 토속적인 가락에 실어서 전달하고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키로 만든 큰 탈이 쓰인다는 점, 신령스런 동물이 부정을 물리치는 듯이 하는 동작과 춤에 커다란 부채모양의 주지판이 사용된다는 점 등의 특징을 지닌다. 소리춤안동놋다리밟기(경북 7호)는 안동지방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여성들만의 민속놀이로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주를 데리고 안동으로 피난을 와 개울을 건널 때 마을의 부녀자들이 허리를 굽혀 다리를 놓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놋다리밟기는 맨 앞에 노년부터 젊은 부녀자 순으로 수십 명의 여자들이 모두 허리를 굽혀 앞사람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머리는 앞사람의 궁둥이 왼편에 대는데 마치 생선을 꿰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시녀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공주가 등(다리 역할) 위를 밟고 지나가면 밑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행렬 맨 앞에 구부려 다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안동놋다리밟기는 모든 여성이 한데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즐기는 규모가 큰 향토오락으로 승부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소리춤으로 호남의 진도 해남 등지에 강강술래가 있다면, 영덕지역에는 월월이청청(비지정)이 있다. 노래와 춤놀이에는 달람세, 절구세, 둥둥데미, 실감기 등의 소리춤이 전한다. 근대 춤 전승 인맥 1950년 6.25한국전쟁으로 부산·대구지역만 남게 된 정부는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현재 대구 CGV한일극장으로 재건축)을 지정하여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의 공연이 집중되는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정소산 → 백년욱(대구 18호)정소산(호 小山, 본명 鄭柳色, 1904~1978)은 1900년대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춤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교방춤의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정소산은 대구출생으로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하규일(1867-1937)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고,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조선미인보감』(1918)에 보면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을 묘사했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와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가르쳤다. 제자 백연욱은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타계할 때까지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 정소산류 수건춤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이 춤은 궁중춤과 민속춤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의 수건춤으로, 처음 등장하여 먼저 절을 올리고 춤을 추는 궁중춤의 예법과 춤사위가 장중하고 단아하며 절제미가 있는 점이며, 춤이 전개됨이 따라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흥을 돋우는 민속춤의 요소도 함께 담고 있다. 박지홍 → 권명화(대동권번, 대구 9호), 최희선(달성권번)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姜太弘,1893-1957)이 부산 등지로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958)이었다. 박귀희(朴貴姬), 박초향(朴初香),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등이 판소리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이때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에서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다. 1940년 전후로 설립된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1929~2010)은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웠고,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웠다. 한영숙에게 전통춤을 사사받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다시 배워 달구벌 입춤 명무로 유명하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1995년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9호 살풀이춤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권명화 살풀이춤의 특징은 수건으로 고(苦)매듭을 엮었다 푸는 살을 푸는 과정이 유일하게 담겨있고 영남교방춤과 덧배기 춤가락이 깃들여 있는 점이다. 그밖에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였다. 김상규 → 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박성실 등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인물은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다. 김상규는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로 판검사가 되겠다는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가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다. 이처럼 해마다 작품 발표회를 하다 보니 논밭을 팔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면서도 춤에 대한 열정은 더욱 높아졌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 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가로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정막(정순영)과 김기전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문교부 인가)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으며,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당시 대구)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50년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 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대구·경북지역의 춤 미래 대구·경북지역이 오랜 역사의 부침(浮沈)속에서도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 북부춤의 중심적 특징과 더불어 향토춤의 특징을 온전히 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유난히도 춤 신명이 많고 춤추기를 좋아하는 지역의 심성에서 비롯하였다고 본다. 20세기 초기에는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고, 뒤를 이어 20세기 후반에는 최희선, 권명화(대구 9호), 백년욱(대구 18호) 등이 그 명맥을 이어받았다. 현대춤과 발레 역시 끝까지 지역을 지켜 온 김상규(안동대 교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지역출신 무용교수가 많은 것도 근원적으로 춤의 고장이기 때문이지만 김상규가 대학교수로 무용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대학 무용학과를 개설하고 춤세계를 개척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울로 진출한 이숙재(한양대 명예교수), 김복희(한양대 명예교수), 박인숙(한성대 교수), 백현순(한체대 교수) 등이 ‘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지역에서도 구본숙(영남대 명예교수), 박연진(대구 가톨릭대 명예교수), 임혜자(계명대 명예교수), 김현옥(계명대 교수), 장유경(계명대 교수), 김희숙(무용가), 박현옥(대구가톨릭대 교수), 김소라(대구가톨릭대 교수), 이화석(대구예술대 교수), 강정선(대구무용협회장), 김죽엽(한국무용가), 최두혁(계명대 교수), 오레지나(대구가톨릭대 교수), 채명(무용평론가), 김용철(섶무용단), 손윤숙(발레) 등과 수많은 무용가들이 대를 이어 대구·경북춤의 정신을 고양하면서 세계를 향해 매진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춤의 인프라는 2015년 이래 매년 세계안무페스티벌(DICFe, Daegu International Choreography Festival)을 펼치며 세계적인 안무도시로 발전하는 초석을 다져 나가고 있다. 이병옥/전통예술 연구가, 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 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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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관재국악상 수상자 김일륜 교수전주 출신인 김일륜(63)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교수가 제8회 관재국악상을 수상했다. (사)한국국악학회 관재국악상 운영위원회는 14일 오전 10시 30분,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제8회 관재국악상 시상식’을 개최했다. 이 상은 고(故) 관재 성경린 선생이 생전에 검소한 생활로 모아 낸 사재와 유족들의 기금으로 2001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이 상은 개인이 기금을 출연한 국악계 최초의 상으로 더 큰 의미를 지니며, 민족음악의 보전·전승·보급에 공적을 쌓은 국악인에게 수여한다. 2001년부터 총 7명의 수상자를 선정하여 시상한 바 있으며, 2019년부터는 (사)한국국악학회에서 주최·주관하고, 시상식을 국립국악원과 공동으로 개최하고 있다. 성경린 선생(1911~2008)은 초대 국립국악원 악사장·제2대 국립국악원장·국악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과 국립국악원 원로사범을 지냈다. 특히 해방 이후 국립국악원 개원의 주역이자 민족음악의 보존과 활성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다수의 국악 논문과 저서를 집필하여 국악의 기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제8회 영예의 수상자 김일륜 교수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전통예술학부 학부장 및 국악교육대학원 원장, 숙명여자대학교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 및 숙명가야금연주단 단장, 국립국악원 및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 등을 역임한 바 있으며 한국창작음악연구회, 서울새울가야금삼중주단, 실내악단 어울림 동인으로도 활동하였다. 현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전통예술학부 교수이며, 아시아금교류회 및 한국가야금연주가협회 이사, 황병기 작품보존회 부회장, 중앙가야금합주단 대표 및 중앙가야스트라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상자는 "가야금 연주자로서, 또 교육자로서 쏟아왔던 노력이 뜻깊은 관재국악상의 결실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니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보다 높은 예술세계를 향해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이 새롭게 솟구친다. 미력하나마 저의 활동이 국악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한 길을 걷겠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관재국악상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함께 상금 1,000만원이 수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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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독일 한국문화원, 베를린에서 ‘봄 음악회’ 개최주독일 한국문화원은 3월29일(수) 문화원 공연장에서 해금과 콘트라베이스의 협연으로 한국민요 등을 선보이는 작은 음악회를 개최했다. ‘무대 2023 – 봄(Fruehlingserwachen)’으로 이름 붙여진 이번 공연은 긴 겨울을 보낸 현지인들에게 ‘한국의 선율과 함께 싱그러운 봄날을 선사한다’는 취지로 기획됐으며, 초청 인원 100명이 조기 마감될 정도로 높은 관심 속에 진행됐다. 이날 공연에서는 해금 연주자인 고수정씨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강한 씨가 듀엣 연주자로 출연하여 서로 다른 악기의 조화 속에 동서양 명곡을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했다. 특히, 애절한 선율의 해금이 서양 현악기와의 협연 속에 아일랜드 포크송 <대니 보이>, 멕시코 음악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 등을 연주할 때, 모든 청중들이 새로운 음악 장르에 탄성을 자아냈으며, 한국민요 <한오백년>을 연주할 때는 진한 감동에 흠뻑 매료되는 분위기가 연출됐다. 객석에 있던 한 독일인 관객은 2개의 현만 있는 해금이 어떻게 이처럼 다양한 정서를 표현해 낼 수 있는지 놀랍다며 한국 국악기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문화원은 이러한 분위기를 이어, 독일인들의 일상생활 속에 한국문화가 스며들 수 있도록 크고 작은 행사들을 연중 다양하게 선보인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먼저,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은 ‘한국문화가 있는 날’로 정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매번 색다르게 연출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한-독 수교 140주년을 맞는 금년은 어느 해 보다 풍성한 행사를 준비하여 한국문화가 집중 조명받도록 할 계획이다. 금년 3월초 새로 부임한 양상근 문화원장은 "독일에서 한국문화를 전파하는데 있어서는 순수 문학, 예술을 사랑하는 독일인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이와의 조화 속에 추진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앞으로 케이팝 뿐만 아니라, 우리의 순수 음악, 예술도 중점 소개하여 우리문화의 다양한 강점을 주재국에 심어줄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날 연주에 참여한 강한(콘트라베이스 연주)씨는 독일 바이마르 국립음대를 졸업하고 국내외에서 연주자 및 교육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고수정(해금 연주) 씨는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한국 전통음악 연주자 최초로 2022년 독일 뮌헨 국립음대 석사과정에 입학해 수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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