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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행방불명 희생자 위령제 '제주큰굿 붓시왕맞이'국가무형문화재인 제주큰굿의 맥을 잇는 제주큰굿보존회는 제4회 제주4·3 행방불명 희생자 위령제 '제주큰굿 붓시왕맞이'를 한다고 1일 밝혔다. 제주큰굿 붓시왕맞이는 초감제와 시왕맞이를 붙여서 하는 굿이다. 염라대왕과 대명왕 차사를 청해서 망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곱게 데려가 극락왕생하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위령제는 제주항 인근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에서 2일 오전 9시부터 진행된다. 일본에서 제주4·3을 기리는 시민단체인 제주4·3한라산회의 대마도아리랑 공연이 올려질 예졍이다. 대마도는 주정공장에서 학살된 4·3희생자들의 시신이 떠밀려간 곳이다. 4·3 당시 주정공장은 주민들을 수용하며 고문하거나 불법 재판을 했던 곳이다. 이곳에 잡혀갔던 주민 일부는 육지부 형무소로 보내졌고, 일부는 정뜨르비행장 등지에서 총살당하거나 제주항 앞바다에서 수장됐다. 목격자 다수에 따르면 이 시기 일본 쓰시마 해안에 수백구의 시신이 떠올랐다고 한다. 시신을 거둬 정성껏 묻어준 일본인이 있었으며, 그의 아들인 에도 유키하루 씨가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 2007년 5월에 공양탑을 세우고 매년 위령제를 봉행해왔다. 제주에선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추모제가 봉행됐다. 2018∼2019년 제주4·3한라산회와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가 공동으로 제주에서는 4월 2일에, 대마도에서는 9월 16일에 각각 추모제를 봉행했다. 2020년 코로나19로 한일 공동 위령제는 중단됐다가 지난해 3월 주장공장수용소 4·3역사관 개관 후 제주4·3행방불명희생자유족협의회,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제주큰굿보존회 등이 힘을 모아 위령제를 재개했다. 제주큰굿보존회와 제주4·3한라산회는 10년간 위령제를 하기로 약속했다. 제주4·3한라산회가 주최하는 올해 대마도 위령제는 9월 22일로 예정됐다. 한편 한라산회 회원들은 고령의 나이에도 연금을 모아 대마도에서 10년간 위령제를 이어나가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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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선, 212년만에 한일 문화교류 위해 대한해협 건넌다조선통신사선이 212년만에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로 향한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재)부산문화재단과 조선시대 사신들을 태우고 일본을 오가던 조선통신사선을 재현해 만든 재현선으로 쓰시마섬에서 오는 8월 5~6일에 열리는 이즈하라항 축제에 참가한다고 27일 밝혔다. 7월 28일 해신제와 29일 출항식을 시작으로 한 10일간의 여정에 돌입한다. 조선통신사선은 8월 1일에서 4일 기간 사이에 기상 여건에 맞추어 부산항을 출항해 2일간 항해한다. 1일 5시간씩 동력과 전통 돛으로 항해하며, 첫날 쓰시마 히타카츠 국제항에 입항하여 입국 심사 후 다음 날 이즈하라항에 입항한다.조선통신사선은 임진왜란 이후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여 년간 12차례에 걸쳐 한일 양국 간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해 500여 명의 사절단을 태우고 대한해협과 쓰시마 해협을 건너 오사카항에 입항한 ‘국제교류선’이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018년 '조선통신사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1주년에 맞춰 2018년에 조선통신사선을 재현했다.이후 한일 양국을 잇는 국제문화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2019년부터 관계 기관과 논의해 왔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지난달에는 4개 기관이 모여 ‘이즈하라항 축제’ 참가를 위한 협력을 약속하는 업무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1811년 이후 212년 만에 대한해협을 건너 쓰시마에 입항하는 조선통신사선은 안전기원 해신제(조선통신사역사관 영가대)와 출항식(부산 용호별빛공원)을 시작으로 재현된 조선통신사선 뱃길을 따라 대한해협을 건너 쓰시마섬에 입항할 예정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조선통신사선의 안정성을 확인하기 위해 2019년부터 올해 5월까지 목포-부산(7회 왕복, 6,160㎞)과 목포-가거도-태안(3회 왕복, 1,440㎞)을 시험 항해했으며, 해마다 조선통신사선을 활용해 관람객들을 태우고 삼학도와 목포항구, 달리도 수중발굴 현장, 이순신 유적지인 고하도 등 목포 바다 일대의 해양문화유적지를 답사하고 선상에서의 문화공연을 펼치는 등 다양한 체험형 프로그램도 운영해왔다.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이번 기회를 통해 역사문화자원으로 재현한 조선통신사선이 한일 양국의 문화교류를 확대하는 매개체가 되기를 기대하며, 앞으로도 조선통신사선을 활용한 국제적 문화체험 프로그램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국내외 관련 기관과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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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선, ‘대마도 통신사 축제’ 출항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조선시대 사신들을 태우고 일본을 오가던 조선통신사선을 재현해 만든 재현선으로 대한해협을 건너 8월 일본 쓰시마섬에서 열리는 이즈하라항 축제에 참여한다. 이를 위해 17일 오후 3시 쓰시마시청 회의실에서 부산문화재단, 일본 쓰시마 시(시장 히타카츠 나오키), 이즈하라항 축제 진흥회(회장 하리마 타카노리)와 ‘쓰시마 이즈하라항 축제에 조선통신사선 뱃길 탐방과 참여’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쓰시마 이즈하라항 축제는 1964년에 시작해 60여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일본의 축제로, 1980년부터는 조선통신사행렬진흥회를 발족시켜 축제에서 조선통신사행렬을 재현해오고 있다. 8월 5일과 6일(매년 8월 첫째 주말에 개최) 이틀간 펼쳐지는 올해 축제에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재현한 조선통신사선이 2018년 제작된 이후 처음으로 대한해협을 직접 건너가 참가하며, 축제에서 재현되는 조선통신사행렬을 통해 쓰시마 시민을 비롯한 국내외 관람객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한·일 문화교류에 활용하기 위해 1607년부터 약 200여 년간 사신 행차를 위해 운영된 조선통신사선을 역사문화자원으로 재현했으며, 매년 누리집을 통해 모집한 신청객들을 태우고 해양문화유적지를 답사하는 ‘선상박물관 문화기행’ 등 체험형 문화유산 프로그램에 적극 활용해오고 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등 이번 협약에 참가한 네 기관은 17일 열린 협약식에서 1811년 12차 사행(사신 행차) 이후 212년 만에 조선통신사선이 대한해협을 건너는 뜻깊은 순간을 기념하며 ‘성신교린’의 발자취를 찾고, 일본 쓰시마 시의 대표축제인 ‘이즈하라항 축제’ 참여를 위한 상호간 협력체계를 구축하기로 약속했다.세부적으로 협약한 내용은 ▲ 조선통신사선을 활용한 상호교류, ▲ 이즈하라항 축제 참가를 위한 조선통신사선의 쓰시마 입·출항 허가 및 협조, ▲ 한·일 문화교류를 위한 조선통신사선의 활용 방안 마련 등이다.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앞으로도 조선통신사선을 활용해 한국과 일본 양국의 문화교류와 방문 프로그램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국내외 관련 기관과 긴밀히 협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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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한국과 더 가까운 섬 대마도에 ‘한국어가?’우리에겐 대마도(쓰시마/對馬島)란 이름으로 익숙한 이 섬에 ‘특별한 일’이 매년 봄 벌어진다. 20년째 이어지고 있는 ‘쓰시마고 한국어 유학’이다. 인구 2만 8천여 명에 불과한 이 섬에 있는 공립학교에 일본 전역에서 15살 어린 학생들이 집을 떠나 3년간 유학을 오고 있다.이유는 한국어를 정식으로 배우고 싶어서란다. 1905년에 세워진 역사 깊은 현립 쓰시마고는 ‘욘사마’ 배용준 씨가 출연한 ‘겨울연가’ 붐이 일던 지난 2003년부터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것. 그 이유는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서. 일본 공립고교 중 별도 학과를 신설해 20여년 동안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은 일본에서 유일하다고. 현재 7년째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 김경아 씨. 전교생 400여 명 가운데, 77명이 매일 1시간씩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능력시험(TOPIK) 성적도 가장 높은 급수(6급)를 따는 학생들이 많다고. 매년 10여 명이 한국 대학에 진학할 정도로 한국 유학생도 많다니 너무 반갑다. 그러면 김경아 선생님께 훈장 서훈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또한 우리 국악인들이 국악교재도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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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23)<br>분청덤벙상준편신기하기만 했던 기억 이규진(편고재 주인) 초식동물의 왕인 코끼리는 우리나라에서 사는 동물이 아니다. 따라서 동물원이 없던 시절 조선에서 코끼리를 본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없다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본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 것도 서민뿐 아니라 왕까지 본 적이 있다고 하면 이 얼마나 엉뚱한 생각이랴.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이다. 코끼리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 것은 '태종실록'이다. 대마도주가 조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코끼리를 보내 온 것이다. 그런데 이 코끼리가 말썽이었다. 우선 엄청난 곡식을 먹어 치워 고민인데다 구경을 나왔던 전 관리가 밟혀 죽는 사건까지 발생한 것이다. 이에 섬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육지로 다시 나오는 등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던 이야기들이 전한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조선 시대에도 코끼리를 본 사람이 분명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코끼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다. 기원 전 3세기경 코끼리를 이끌고 험준한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격한다. 막강한 로마를 상대로 16년간이나 전쟁을 하며 괴롭히다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으나 그 용기와 과감성과 결단력 등은 오늘날에도 무인의 대명사로 회자되고는 한다. 코끼리는 불교와도 관련이 깊다. 부처님의 자비를 상징하는 보현보살도 코끼리를 타고 있다. 덕망 있고 존귀한 사람이 타는 가마를 불교에서는 상가(象駕)라고 하는데 코끼리가 경전을 싣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유교의 전통 속에서도 코끼리는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제기의 일종인 상준이다. 희준과 더불어 제사를 지낼 때 물이나 술을 담아 놓던 그릇의 일종이다. '세종실록'의 제기도설(祭器圖說)에는 35종의 제기를 정리해 놓고 있다. 소와 관련 있는 희준이나 코끼리와 연관이 있는 상준도 이에 포함이 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사기로 된 희준과 상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사발 같이 생긴 그릇의 몸체에 소나 코끼리를 그려 넣은 것과 아예 소나 코끼리의 형상을 본떠 만든 것이 그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속을 비게 만들고 등에 구멍을 뚫어 물이나 술을 담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내게는 전부터 구입해 둔 도자기 상준편이 몇 점 있다. 백자편도 있고 분청편도 있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이 분청덤벙상준편이다. 머리 부분만 남아 있는 것인데 귀도 한쪽은 떨어져 나가고 없지만 긴 코는 완전한 편이다. 그런데 분청상준의 경우 대개는 귀얄이고 여기에 더러 음각을 한 것이 보인다. 말하자면 덤벙분청은 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귀한 분청덤벙상준편은 어디서 만든 것일까. 덤벙분청을 만든 곳으로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보성이 널리 알려져 왔다. 그후 고흥 운대리가 등장하면서 덤벙분청하면 두 곳이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덤벙분청이 이 두 곳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서천 신검리에서도 덤벙분청이 발견된 자료가 있고 보면 아직 알려지지가 않아서 그렇지 더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여하튼 분청덤벙상준편의 경우 백토 분장이 두터우면서도 거칠어 보이는 것이 고흥 운대리 보다는 보성의 도촌리 쪽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보게 되고는 한다. 내가 코끼리 실물을 처음 본 것은 언제일까. 서울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20대 초에 창경원으로 벚꽃놀이 구경을 갔다가 동물원에서 본 것이 처음일 것이다. 팔뚝만큼이나 큰 코가 달린 코끼리를 보면서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이 어제 일 같은데 이제는 동물원도 없어지고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제 이름을 다시 찾은 지도 오래 되었다. 큰 코에 큰 귀. 실물은 아니지만 사실적으로 만들어진 분청덤벙상준편을 보고 있노라면 처음 보는 너무도 생경한 코끼리의 이질적인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 졌었을 조선 사람들의 표정이 손에 잡힐 것만 같은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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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가야유적의 역사적 성격' 토론회, 찬반논쟁 후끈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앞두고 전북 남원의 옛 지명을 '일본서기'에 근거한 '기문(己汶)'으로등재하는 것에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남원시가 전문가들을 초청해 공론의 장을 마련했다.5일 오후 남원시립도서관 소극장에서 전북사학회와 전라문화연구소가 '남원 가야유적의 역사적 성격'을 주제로 ’2021 남원시 가야역사 학술토론회‘를 열었다.'기문'의 사용이 무방하다는 입장에서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와 군산대학교 곽장근 교수, '기문'의 사용을 반대하는 입장으로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과 ㈔대한사랑 박찬화 연구위원이 나왔다,상호토론 전 이도학 교수는 '임나와 기문국에 대한 몇 가지 의문: 최근 제기된 견해에 대한 검토', 곽장근 교수는 '고고자료로 본 전북 동부 가야문화'를 주제발표했다. 이덕일 소장은 '가야와 임나일본부: 임나=가야설과 호남가야(임나)', 대한사랑 박찬화 연구위원은 '기문가야 학문적으로 성립 가능한 개념인가?'를 발표했다.이어진 토론에서는 찬반 양 진영의 입장이 극명한 차이를 보이며 논쟁에 가까운 토론이 이어졌다.기문 사용을 찬성하는 이도학·곽장근 교수는 '일본서기'상의 '기문'이 포함된 '임나'가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문'이나 '삼국사기'의 '강수전'에도 등장하는 등 이전부터 일반화돼 있던 지명이라고 주장했다.따라서 '일본서기'상의 '임나'에 속한 '기문'이란 지명의 어원이 '일본서기'와는 무관하므로 유네스코 등재에 사용된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반면 이덕일 소장과 박찬화 연구위원은 가야문화가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것은 적극 찬성하나 '기문'이란 지명의 반영이 과도한 역사 왜곡의 산물인 '일본서기'에 바탕을 뒀다는 점에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광개토왕릉비문'에 등장하는 '임나가라'라는 지명도 고구려군이 왜를 쫓아갔던 곳이라고 부연돼 있는데, 이는 대마도를 지칭했을 가능성이 더 높고 이마저도 비문상 해석이 불가한 빈 곳이 많이 이를 근거로 삼는 것 자체가 억지라는 입장이다.우석대 조법종 교수를 좌장으로 한 토론회에서는 열띤 공방이 펼쳐졌고, 토론회 도중 방청객들이 "기문 반영을 반대한다"며 언성을 높이는 등 지역사회의 높은 관심도가 그대로 투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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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역사관에서 만나는 ‘마지막 조선통신사’죽리 김이교(1764~1832)는 충청감사로서 공산성의 만하루(晩河樓)를 건립한 김시찬의 손자로, 1810년 10월 통신사 정사로 임명되어 1811년(辛未年) 2월 대마도로 향했는데, 이는 조선의 마지막 통신사였다. 부산문화재단(대표이사 강동수)은 9월 8일(수)부터 9월 26일(일)까지 조선통신사 역사관에서 마지막 조선통신사인 죽리 김이교 유물 특별전시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에서는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죽리 김이교의 진품 유물 15건 17점을 선보인다. 김이교는 귀환 후 통신사의 활동을 신미통신일록(辛未通信日錄)에 고스란히 정리하였다. 이는 에 관한 기록 중 한국 등재 대상 목록 여정의 기록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실물 관람이 가능하다. 이 외에도 김이교 초상, 김이교 간찰, 호패, 인장 등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222호로 지정된 다양한 김이교의 유물을 만날 수 있다. 전시 관람 후기 추첨 이벤트를 통해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서 2021년 세계유산 활용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작한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필사집을 10명에게 증정한다. 부산문화재단 강동수 대표이사는 "이번 전시를 통해 마지막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되짚어 보고, 조선통신사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가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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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8흙의 소리 이 동 희 길 <4> 광풍과 고뇌 그리고 그에 따른 혼란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양녕대군의 폐세자위 충녕대군의 세자책봉은 동시에 행해졌으며 두 달 뒤 왕은 세자에게 선위禪位를 하였기 때문이다. 6월과 8월의 일이었다. 8월 10일 왕세자 충녕대군은 왕으로 즉위를 하였다. 훗날 유일하게 대왕으로 호칭하게 된 제4대 세종대왕이다. 태종은 상왕으로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에 이종무李從茂 임명, 대마도 정벌, 각도 거주 왜인倭人을 노비로 하는 등 군권을 놓지 않고 행사하였다. 22세의 나이로 아직은 나라를 이끌고 다스릴 재목으로서 또는 역량이 부족하다거나 미흡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전날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고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도전鄭道傳을 살해한 후 왕위에 올라 의정부議政府 의금부義禁府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 등을 설치하는 등 18년 동안 강한 왕권통치를 하던 태종으로서 총명하고 충직하기만 한 신왕 세종을 도와준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어떻든 그로 인해 세종은 편안한 마음으로 문화정책을 펼치는 결과가 되었다. 달리 말하면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과 정치적 안정 기반을 이어받아 적극적으로 청책을 펼쳤던 것이다. 태종은 상왕으로 4년간 생존해 있었다.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변계량卞季良 윤회尹淮 등에게 고려사 개수改修 지지地志 편술을 하도록 하였으며 주자소鑄字所를 두어 새 활자를 만들고 인쇄법을 개량하여 인쇄 능율을 올리었다. 집현전集賢殿 개설은 무엇보다 빛나는 업적이었다. 학문을 연구하고 예술을 꽃피우는 문화 용광로에 불을 당긴 것이다. 궁중의 학문연구 기관으로 조선 초기에 고려의 제도를 도습蹈襲한 보문각寶文閣 수문전修文殿과 집현전이 있었는데 세종이 즉위하면서 유명무실한 집현전을 확충하여 명망 있는 학사學士들을 편전便殿에 집합시키었다. 집현전 직제로 정1품(領殿事) 2명 정2품(大提學) 2명 종2품(提學) 2명과 정3품(副提學) 종3품(直提學) 정4품(直殿) 종4품(應敎) 정5품(校理) 정5품(副校理) 정6품(修撰) 종6품(副修撰) 정7품(博士) 정8품(著作) 정9품(正字) 각 1명을 두었는데 제학 이상은 겸직이었고 부제학 이하가 전임관 전임 학사였다. 인원은 몇 차례 늘렸고 1436년(세종 18)에는 20명으로 운영되었다. 수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하여 배출되었고 불철주야 학자 양성과 학문연구에 온 힘을 쏟아 세종대왕은 찬란한 문화의 시대를 열고 세계 제일의 글자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결과를 잉태하였던 것이다. 집현전의 가장 획기적인 운영은 경연經筵이었다. 왕과 유신儒臣이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자리였다. 국왕이 유교적 교양을 쌓도록 하여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왕은 밤 늦도록 경연을 떠나지 않았다. 서연書筵은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것이었다. 겸관兼官인 집현전 학사들은 외교문서 작성도 하고 과거의 시험관으로도 참여하였다. 사관史官의 일을 맡기도 하고 중국 고제古制를 연구하고 편찬사업도 하였다. 세종은 전적典籍을 구입하거나 인쇄하여 집현전에 보관시키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는 특전도 베풀었다. 그렇게 하여 집현전은 조선의 학문적 기초를 닦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많은 학자적 관료를 배출하여 이후의 정치 문화 예술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편찬사업으로 고려사高麗史 농사직설農事直說 오례의五禮儀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삼강행실三綱行實 치평요람治平要覽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의방유취醫方類聚 그리고 훈민정음의 창제와 관련하여서는 운회언역韻會諺譯 용비어천가주해註解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동국정운東國正韻 사서언해四書諺解 그 밖의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하였다. 한국문화사상 황금기를 이루는 내용들이었다. 이 시기는 한국음악에 있어서 또한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때였다. 세종은 박연으로 하여금 음악의 정리를 하게 하였던 것이고, 유교정치에 있어서 중요시되는 것이 의례이며 국가의 유교적 의례인 오례五禮(吉禮 嘉禮 賓禮 軍禮 凶禮)에는 그에 합당한 음악이 따라야 했다. 세종의 음악적 업적을 아악의 부흥, 악기의 제작, 향악鄕樂의 창작, 정간보井間譜의 창안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데 이것은 박연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간보는 동양 최초의 악보로 1행 32간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 놓고 한 칸을 1박으로 쳐서 음가音價를 표시한 세계적 발명이다. 이는 서양의 오선보五線譜와 함께 유량악보有量樂譜이다. 우리 아악의 연총淵叢인 세종악보世宗樂譜의 압권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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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코로나'를 무대화 한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대표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이메일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첫 인터뷰 인물은 이혜솔 국악인이다. 사할린 동포들로 구성된 사할린아리랑합창단(단장:최나타샤)에게 사할린아리랑을 가르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에서 '은상'을 수상하게 한 국악인이면서 아리랑 전승자이다. 이후 전국 아리랑 전승단체들도 이회장의 활발한 전승활동에 주목하게 된다. 코로나로 세계가 멈추었을 때 지난 3월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서 '독도에서 제주까지' 전국 아리랑전승단체를 찾아가서 아리랑코로나를 알리고 현지 답사를 해왔기 때문이다. 지난 9월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에서 처음으로 ‘아리랑코로나’를 무대화 한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1952년생) 대표를 객원기자 기미양 선생이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Q. 올해 코로나로 인해 많은 단체와 공연자들이 무대에 서지를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를 잘 마치셨습니다. 처음 만나는 무관중 언택트 공연에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A.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엄수하는 가운데 지난 10월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금년의 국악계는 어느 분야보다도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모두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습니다. 공연의 제1조건이 관객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관객 없이 해야 하는 공연을 위해 극히 제한된 출연자와 스탭과 관객으로 치룰 수 밖에 없는 실정에도 불구하고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무대에 20명만 올라와야 하는 조건에서 극장밖에 있다가 다른 공연팀과 계속 교체를 해야했습니다. 어려운 시국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원들이 일사분란하게 협조를 해주어서 잘 마치었습니다. 우리 회원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내년에는 코로나가 끝나서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날을 기원해 봅니다. Q. 매년 정례화 되고 있는 아리랑축제를 올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와 함께 무사히 치루었는데, 올해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 행사 주제는 무엇입니까? A. 전 세계가 멈춰어져 있는 이 어려운 "코로나19 고개를 넘어가보자”라는 의미에서 어서어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라는 대주제를 가지고 준비를 했습니다. 코로나라는 힘든 고개를 아리랑 고개 넘어가자라는 의지를 가지고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서 보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온 국민과 힘을 합쳐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라는 의지를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 공연에 담아보았습니다. Q. 이번 행사에서는 전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인류가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코로나 19사태를 넘고 가야 할 '고개'로 인식하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고 주제를 정하셨네요. 회원들 반응은 어떠했는지요? 난생 처음 실시된 무관중 공연에서 어려운 점이 었었지만, 이런 새로운 형식의 실험적 무대에서 얻은 게 있다면 무엇인지요? A. 우리는 코로나를 넘고 가야 할 '고개'로 인식하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고 주제는 바로 통했습니다. 올해부터 모든 공연은 코로나 전후로 나누어진다고 봅니다. 그동안 모든 공연은 절대적 관객 대상 공연이었지만 이번에는 관객이 아닌 우리 출연자 스스로를 향한 공연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무대에 나섰습니다. 처음으로 우리가 우리를 바라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Q. 전체 프로그램은 2부로 나누어져서, 제1부는 대동의 노래, 제2부는 상생의 노래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어떠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나요? A. 전국 지역에서는 아리랑의 힘으로 대동단결하여 코로나를 막아내고 우리 모두가 다시 안정되어 함께 잘 살아보자는 상생의 노래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지역은 '왕십리에서 제주까지' 불리는 지역 아리랑으로 구성했습니다. 왕십리아리랑을 시작으로 서울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상주아리랑, 밀양아리랑, 제주아리랑 등이 불려졌습니다. 서울에서 활동을 하지만 강원도 평창이 고향인 사람은 아라리를 부르고. 경상도 사람은 밀양아리랑, 제주에서 올라온 이는 제주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제주아리랑은 유재희(서귀포아리랑보존회장) 명창이 불렀습니다. Q. 코로나로 처음으로 개최된 무관중 공연이었지만 제10회를 맞이하는 소감은? A.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이다." 이 두 유산의 해설문에는 아리랑의 수를 ‘50여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안에 우리 경기 아리랑 선율인 왕십리아리랑도 포함된다고 믿습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왕십리아리랑을 부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소리극 ‘김소월이 사랑한 왕십리’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시놉시스와 시나리오는 준비 중에 있습니다. Q. 왕십리아리랑은 이혜솔 회장이 작사하고, 통일앙상블 대표 윤은화가 작곡한 새로운 아리랑인데, 어떤 내용이 담긴 사설인지 궁금합니다. 국내외 무대에서 왕십리아리랑 반응은 어떤가요? A. 첫 소절은 처음에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라고 시작합니다. 본조아리랑을 선율로 해서인지 일단 경쾌하고 따라서 부르기 쉽다는 것입니다. 사할린아리랑제에서는 왕십리아리랑을 작편곡 한 윤은화 작곡가와 통일앙상블 밴드(9명의 연주자)가 함께 가서 연주 반주에 맞추어서 불러서 더욱 좋았습니다. 이미 음반 작업을 하면서 함께 연습을 한 팀들이 그대로 갔기 때문에,,,,..그래서인지 현지 동포들이 후렴을 따라서 부르고 음악가들이 악보를 달라고 해서 부고 왔습니다. 2019년 봄에 왕십리아리랑제에 관객으로 참가한 사할린동포들에게서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 아리랑고개를 서로 함께 넘어요 서울의 왕십리 우리 사는 곳 개나리 화창한 꽃동산이래요. 사랑과 희망이 넘쳐 흐르는 서울의 서울은 우리 왕십리래요 우리 서로 벅찬 가슴 마주하면서 손잡아요 어깨동무 함께할래요. 이 아리랑을 만들게 된 연유는 제가 청년기부터 몸담고 살았던 서울 동부의 중심지인 왕십리 시민들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알고 부를 수 있는 아리랑 가락에 성동구 지역 역사를 담아 보았습니다. 아리랑의 대동정신으로 지역공동체 결속에 이바지 하려고 합니다. 이 아리랑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반응이 좋은 편입니다. 미국 순회공연. 일본, 사할린 공연에서 동포들에게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본조아리랑의 위상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동포들을 만나면서 아리랑은 결속력을 속성으로 하는 노래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러시아 사할린과 하바롭스크 동포들이 와달라고 했는데 올해 못갔죠. 코로나로......코로나만 종식되면 바로 갈려고, 트렁크 짐은 싸놓은 채 그대로입니다. 작년 2월 초 가려고 비행기표 예약을 했다가 이대로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Q. 지난 해 2월초 러시아 사할린과 하바로 바로 가려고 준비를 했다가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심각해지자 아리랑코로나를 지어서 코로나를 막아내자고 우리들에게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카다로그 앞에 나와있는 이 가사가 아리랑코로나인가요? 어떤 계기로 해서 만든 아리랑인가요? A. 지난 5월에 새로 만든 ‘아리랑코로나’가 무대에서 초연되었습니다. 국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세는 한풀 꺾였지만,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 감염이 이어지면서 신규 확진자가 늘어면서 전국 축제와 예술활동이 거의 중단된 현실에서 이번 무대에서 회원들과 함께 불렀습니다. Q. '아리랑코로나'는 어떤 의미를 담아내려고 했나요? A. 일제강점기 1930년대 종두선전가라는 종두아리랑. 마마아리랑이라는 방역아리랑이 불려졌습니다. 아리랑으로 천연두 전염병을 이겨보자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리랑의 힘으로 전세계를 멈추게 하는 이 무서운 코로나 바이러스를 막아보자는 뜻에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몸은 멀어도 마음은 가까이, 뭉치면 죽고 헤어지면 산다네”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입니다. 90년만에 나온 방역아리랑, 특별한 아리랑이지요. 이회장은 주먹을 높이 쳐들면서 이번 코로나19를 막아내자는 방역아리랑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9월부터 독도 울릉도에서부터 제주까지 찾아가는 작은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가장 추운 나라 러시아 동포들에게 녹음을 해서 전해주고 국내 이주하고 있는 동포들과 공유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 고려인 청소년과 하바롭스크 사할린 동포들에게 음원과 동영상을 전해주고 있다. 아리랑코로나 노래가 알려지자 (재)아리랑선풍재단 아리랑체조단도 이 음원을 보내주면 집단체조를 해보이겠다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아리랑코로나 작사.작창:이혜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코로나 택시는 탈만큼 탔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무섭어 도망간다 코로나 마마님은 언제 가시려나 구경일랑 그만하고 가시게나 바다 건너 님 보고싶지만 가고 싶어도 갈수없네 원수로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원수로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지만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네 Q. 2년동안 아주 특별한 아리랑 전승활동을 하시느라 애쓰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데, 부모님 고향은 어디인이신가요? 부모님 중 누가 소리를 잘하신 분이 계셨나요? 소리를 하시면서 영향을 주신 분이 계시나요? A. 아버님 고향은 청주이시고, 어머니는 경기도 평택이시지만 어릴때 서울로 이사를 하고 줄곧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니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신 아버지는 공부보다도 소리를 좋아하셔서 판소리 춘향전은 다 외우셔서 사랑방에 손님들 모이면 걸죽하게 뽑아 내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평생 풍류객이라는 소리를 듣고 서울을 오가며 사셨습니다. 우리 형제들 모두 아버지 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모두 다 소리를 잘합니다. 저의 목소리는 아버지를 쏙 닮아서 통성입니다. 나의 인생의 반은 어머니 것입니다. 풍류를 찾아서 서울을 오가는 멋쟁이 아버지는 살림을 나 몰라라 하셨습니다. 갈수록 식구들 입은 늘고 살길이 막막해지지만 청주 사람들이면 다 아는 양반집 친정에서 곱게 자란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친정에서 곡식을 얻어서 우리 식구들 먹이다가.....나중에는 나어린 막내에게 젖을 물리다가 몇번이나 달리는 트럭에 뛰어 들었다가 모진 목숨 건지게 되자, 장남만큼은 반드시 공부를 시키겠다고 7남매를 끌고 생면부지 서울로 상경을 하셨습니다. 간신히 아버지를 찾아 용두동에 하꼬방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젖먹이를 업고 어머니는 묵을 쑤어서 머리에 이고 행상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큰언니가 촛불을 키고 바느질을 하다가 집에 불이 나서 이불이고 신발이고 몽땅 다 타버렸습니다. 다시 빈털털이가 되어 창신동으로 이사를 가서 임시 천막을 치고 맨 땅에서 추우나 더우나 어렵게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장사를 마치면 이고 나간 함지박에 매일 벽돌을 한 두개씩 사서 이고 들어오셨습니다. 매일 천막안에 사방에 벽돌이 하나씩 하나씩 쌓아서 벽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사방을 두를만큼 벽돌이 모아져서 그 자리에 판자집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묵장사로 목돈을 모우신 어머니는 동대문 시장에 나가서 비단을 받아서 이고 지고 나가서 비단 보따리 장사로 우리 7남매 자식들을 힘들게 키우셨습니다. 어머니의 눈물과 땀으로 우리 형제는 하루 하루 커가는데, 판소리와 경기소리에 미친 아버지는 풍류를 즐기면서 사시느라 어머니는 평생 외롭게 독수공방을 하시면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긴긴 세월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가장 노릇 하시느라 여린 여자의 몸으로 사내 대장부처럼 우리 7남매를 굳건히 키워주셨습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세딸 중 막내딸로 태어난 저는 어머니 품속에서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밑으로 남동생이 3명이나 있었지만,........ 아버지 때문에 흘린 어머니의 눈물을 제가 가장 많이 닦아 드렸습니다. 두 언니들은 바로 사회에 진출을 하고 집에 남아있는 저는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기에....어머니는 늘 저에게 "곱게 자라야 시집가서 고운 대접 받는다"고 막내딸만큼은 손에 찬물 안 묻히게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의 가이없는 정성을 자식을 낳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철없는 막내딸이지요. 이렇게 우리 7남매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눈물을 먹고 자랐습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희생하신 어머니를 매일 바라보며, 우리 7남매는 "중용을 지키고 불손한 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자식이 되어야 한다"라고 다짐을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살아야만 했습니다. 평생 5시가 되면 일어나서 달이 뜰때까지 열심히 일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졌습니다. 그 덕에 모두 일찌기 자수성가해서 서울에서 부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쁜 작은댁을 데리고 사시던 아버지는 칠순을 넘기시고 중풍에 쓰러져서야 집에 돌아와 안주하시게 되었지만..... 몇해 동안 앓다가 결국 조강지처 품에서 돌아가셨습니다.(이때 우리 형제는 불같이 일어나서 반대를 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받아 들이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수족이 되어 지극정성으로 모셨습니다. 손주들에게 할아버지를 찾아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저의 노래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고생하신 슬픈 어머니의 한을 담아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힘들때나 기쁠때 양평에 있는 어머니 무덤을 찾아가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노래를 불러 드리고 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지인들의 어머니만 뵈도 가슴이 떨립니다. 어머니, 어머니 불러도 대답없는 나의 엄니.....그래서 저의 인생의 반은 어머니 것입니다. 국악 입문경위 Q. 풍류를 즐기시는 아버지 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미워하는 아버지의 목을 빼닮아서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네요. 유년기에서부터 들어온 사랑방에서 장구 장단에 부르는 노래 소리가 서울에 이사와서도 낯설지는 않았겠죠. 유년기에 무대같은 데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나요? A. 어릴 때부터 고향 청주에서는 노래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소풍을 갈때나 학예발표회 무대에서 늘 일등으로 불려나와서 노래를 불러서 박수를 많이 받았습니다. 저도 소리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스승을 모시고 소리 공부를 하는 사람이 부러웠습니다. 서울에 이주하게 되자 저축을 하여 돈이 생겨서 제일 먼저 산 것이 녹음기입니다. 길을 지날 때마다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민요를 들으면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음반을 사서 녹음기를 틀어놓고 일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민요 가락을 따라 부르는 저를 보고 피는 못속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10대는 소리 공부에 대한 목마름으로 잠 못이루는 밤을 지세웠습니다. Q. 늦은 나이에 국악에 입문을 하게 된 경위를 듣고 싶습니다. A. 언젠가는 반드시 소리를 배워야지 하다가 일찍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정이 안정되고 어린 자식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자, 비로소 마흔살이 훌쩍 넘은 늦은 나이에 꿈에도 그리운 소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수업 중에도 녹음을 해가지고 와서 일하면서 반복해서 혼자 연습을 하면서 열심히 따라 불렀습니다. 당시 단순노동에 불과한 자영업을 하면서 소리는 나에게 많은 위안과 꿈을 주었습니다. 테이프를 틀고 들어보니 이 소리들은 자라면서 아버지가 신명나게 불렀던 노래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몸서리치게 그리 좋아하시던 그 노래를 이제는 제가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가 더욱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가 미워서 아버지가 늘 부르시던 노래(민요)를 녹음을 안해 놓은 것이 후회가 됩니다. 지금도 비오는 날 눈을 감으면 정가, 민요에서 판소리까지 즐기시던 아버지의 소리가 들립니다. 드디어 경기민요를 배우게 되고 무대에 서게 되자 집안(남편)에서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연습 공간을 따로 얻어서 소리 도반들과 같이 매일 모여서 공부를 하는 바람에 점점 소리에 깊게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내 안의 나 자신이 얼마나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지 심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경기민요 전수자들에게 지도하는 정도의 인정을 받고 내공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스승을 찾아서 경기민요부터 서도민요를 지금도 배우고 있습니다. 이은관 선생에게서 서도민요 이수를 받았지만 배움의 길은 끝이 없나봅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 샌줄 모른다고..... Q. 늦게 배운 소리에 불구하고 서도민요 이수자까지 했으니 원은 푸셨네요. 경기민요 서도민요는 어떤 스승에게 배우셨나요? 소리 공부를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스승이 계시나요? A. 서도소리 예능보유자 김순자 선생님, 김경배선생님, 이은관 선생님,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묵계월선생님, 전숙희선생님, 김혜란선생님께 사사했습니다. 그 중 이은관 선생님이 무대에 많이 세워주셨습니다. 전숙희 선생님과 김혜란 선생에게 혹독한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이제는 자산이 되어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제자들이 전국경연대회에서 많은 상을 타가지고 옵니다. 늘 스승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Q. 경기민요, 서도소리를 이수하고, 강원도 '아라리'도 배우시고, 최근에는 ‘제주민요’도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데 어떤 계기가 되어서 제주의 소리도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지요? A. 오랫동안 같이 공부를 했던 제주도 소리 친구 유재희 선생이 제주민요축제에 초청공연으로 자주 가게 되면서 신비로운 서우제소리에 반했습니다. 경기민요와 서도민요를 수십년간 불렀지만, 제주민요는 또 다른 맛이 납니다. 서우제소리를 들으면 배를 타고 신비로운 섬으로 끌려가는 듯한 선율에 넋이 나가더라구요. 이어도 소리는 여자들만이 산다는 섬으로 떠나간다는 내용입니다. 고난의 속세를 떠나서 유토피아로 떠나가는 거지요. 한번 간 사람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전설의 섬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도 하라. 이어도 하라. 이엿말 하면 나 눈물 난다. 이엿말은 말앙은 가라. 강남을 가건 해남을 보라. 이어도가 반이엥 한다." 어느새 둥둥 배를 타고 상상속의 섬으로 떠나가는 환타지가 느껴지면서 온 마음이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거기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계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주민요를 들으면 어머니가 더욱 생각납니다. 오랜만에 아주 특별한 외식을 하는 기분으로 제주민요도 조금씩 부르고 있습니다. 나의 레파토리는 사할린아리랑 이회장은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출범 이후 첫번째 지도자로, 국내외 사할린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하바롭스크 아리랑지부 회원들이 와서 아리랑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때, 바로 출국 준비를 했다가 코로나로 미루어진 상태이다. Q. 지난 해 3월부터 10월까지 지도를 해주신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러시아 동포들에게 지도하시면서 어려웠던 점은? 수상 소감은? 어떤 감동이 들으셨습니까? A. 아리랑학교에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를 구하는데 1년동안 책임을 지고 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기도에서 양주까지 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2번 이상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공주나 문경 같은 지방에서는 1번만 와주겠다는 겁니다. 지도하는 사람이 바뀌면 일정한 곡을 따라 부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리랑학회 위촉을 받고 3월부터 시작했습니다. 섹스폰 연주하는 친구들과 제자들까지 데리고 와서 수업시간 중 쉬는 시간 10분 동안 선율을 익히게 하기 위해 섹스폰 연주까지 들려주며 지도를 하였습니다. 드디어 10월 14일 전국아리랑경연대회를 위해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원들이 성금을 모아서 단원들 12명의 의상을 새로 마추고 소품을 준비해서 무대에 올렸습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사할린 동포들은 난생 처음 입어보는 한복 무대복을 입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무대에서 심사위원들도 관객들도 모두 함께 구구절절한 서러운 사할린아리랑을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할린에는 왜 왔나 왜왔나 일본놈 무섭어 따라왔지” 강제동원으로 끌려 간 4만명 조선인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억류된 70년의 한을 가슴에 묵혀두고 있다가 터진 것이지요. 심사위원들이 20여 단체의 경연자 중 2등상인 은상까지 주셔서 그분들의 깊은 한이 그날만큼은 치유가 되셨을겁니다. 왕복 7시간이나 되는 왕십리에서 양주를 다니면서 한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힘들었지만, 사할린 동포 어른들이 아리랑을 배우려고 하시는 열망 때문에 더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더욱이 수상까지 해서 개인적으로는 환갑 이후 저의 생애 가장 기쁜 날입니다. 부르시면 언제든지 달려 갈겁니다. Q. 전국아리랑전승단체가 지역적으로 55단체가 존재합니다. 경기도에만해도 10여 단체가 있습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김포, 인천. 가평. 포천, 수원 등등에서 양주끼지 오기는 너무 멀지요. 길이 막혀서 약 왕복 7시간 이상 걸립니다. 드디어 10월 중순 작년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에 이어 올해 사할린 동포들과 아리랑코로나를 함께 불렀습니다. 두드러진 아리랑 전승활동이라는 평가를 받을만합니다. 올해 계획은? A. "사할린동포분들께 내가 해드릴수 있는 것은 다 해드리고 싶어요” 사할린 동포분들께 아리랑을 가르치며 보람이 있었습니다. 추운 나라에서 고생하시다가 이제는 그리운 조국 한국 나와서 아리랑을 배우시고 싶다는데. 아무리 멀어도 최선을 다해서 해드리고 싶어요. 우선 사할린아리랑과 아리랑코로나 2곡을 가르쳐드릴겁니다. 양주와 인전 지역 사할린 동포들과 다문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코로나가 끝나면 러시아 동포을의 요청을 받아서 하바롭스크와 사할린 동포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치러 갈겁니다. 지금은 동영상을 보냈습니다. Q. 사할린 동포들에게 직접 아리랑을 가르친 첫번째 사례입니다. 아리랑 소리꾼으로써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A. 제가 사할린 동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83년 KBS특별생방송 '누가 이사람을 아시나요'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형제 찾는 방송을 보고 울지 않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국내에 영주귀국 해서 사신다는 것은 사할린아리랑축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벌써 조국에 오신지가 15년이나 되셨다는데..... 4천명이 오셔서 전국 25지역에서 살고 계신다는데,,,,,,,,,작년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에서 함께 행진을 했던 100여 분의 사할린 동포들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양주에 영주귀국하신 김세르게이 음악가가 살고 계시는 곳에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있고, 인천에 영주 귀국하신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공노원 부회장님이 다문화 어린이들에게 한국어와 아리랑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년 3월 아리랑학교에서 위촉을 받고 망서림 없이 수락을 하고 사할린아리랑에 이어 올해는 아리랑코로나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아리랑학교 수업을 통해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국외로 강제이주한 동포들이 조국을 그리는 노래로 불리게 되면서부터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아리랑 전승자라는 이름을 걸고 동포들을 찾아가면서 가르치고 싶습니다. 제가 남은 시간 동안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Q. 사할린 동포 중 이번에 제자로 삼은 어린이가 있으시다는데 소개를 해주세요. A. 제가 신아리나를 처음 본 것은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축제 ‘디아스포라 아리랑’ 무대에서 무반주로 사할린아리랑‘을 독창으로 부른 당시 5살 먹은 당차고 씩씩한 신아리나(8세)입니다. 이번에 아리랑코로나를 함께 불렀습니다. 영주 귀국한 사할린 4세로서 할머니를 따라서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직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부모 밑에서 언니(14세)와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아리랑코로나를 가르치면서 영민한 신아리나 어린이를 제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홍보대사로 위촉하고 회원들과 함께 장학금도 보내 줄려고 합니다. Q. 전국55단체 아리랑전승단체 중 왕십리아리랑보존회는 후발주자이지만, 작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55개 지역 아리랑워크샾, 경복궁아리랑고,사할린아리랑제 등 국가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느낀점은? A.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에서 각 지역 아리랑보존단체 50여개 지역단체가 깃발을 들고 입장하는 현장에서 국악인으로서 아리랑을 선택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특히 수많은 노래가 있지만 각각의 지명을 달고 창출된 **아리랑은 충격이었습니다. 학술적으로도 60여종 아리랑이 전국에서 불려진다는 것. 전국 아리랑 전승단체가 연대한다는 것은 전세계에 없다고 봅니다. 아리랑을 부른다는 것에 자부심이 앞섭니다. 거기에는 책임같은 의무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A. 일년 전에 일본 땅에서 개최된 안중근의사추모제에서 가슴이 벅찼어요. 처음에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 연락을 받고 출발을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간거지요. 추모제를 준비하는 주관단체가 일본 사람들이라는 것. 구름같이 모여든 마을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자발적으로 준비를 했다는 사실에 놀라웠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일본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어려웠던 시절 일본 농촌이나 오지로 시집을 간 한국 여성들이 우리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고 도라지타령과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인사를 하면서 서로 손 잡자마자 바로 눈물이 앞섰습니다. 저는 안중근의사의 의병활동을 추모하는 '아무르아리랑'을 헌사했습니다. 다시 한번 아리랑은 동포사회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민족의 노래‘라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아리랑의 세계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Q. 국악인으로 살면서 ’노래의 힘‘을 느끼신 적 있으신가요. A. 아리랑을 통해 노래의 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과 북은 물론 한민족 동포사회에서 아리랑은 ’애국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폭압에 대한 저항의 노래를 불렸고, 강제이주한 사할린 동포들이 부른 디아스포라 아리랑인 사할린아리랑은 고난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다고 봅니다. 사할린아리랑제에서 만난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통해 절절히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말을 모르는 러시아 동포 3세 4세들도 아리랑을 부르고 알더군요. Q. 그렇다면 가장 자극을 받은 아리랑축제는? A. 2018년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서 '디아스포라 아리랑'이라는 주제로 펼쳐진 무대에서 러일남북중 5개국에서 향유하는 아리랑이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르게 부른 양상을 보고, 아리랑의 다양성에 대해 감동과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포사회에서 아리랑은 흥얼거리는 민요가 아닌 바로 애국가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나만의 아리랑을 만들어야겠다. 나의 소리길를 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후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 결성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 간 것입니다. Q. 30여 년 국악인생을 살면서 오롯이 담아낸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 음반은 녹음을 마친 걸로 아는데 언제 발매가 됩니까? A. 처음에는 왕십리아리랑(작편곡:윤은화)을 중심으로 4년전 서울경기 지역 아리랑을 녹음을 완료했습니다. 그런데 2019년 사할린을 다녀오고 나서 사할린아리랑을 편곡하여서 넣으려고 합니다, 추가로 아리랑코로나도 넣고 싶고, 그래서 4년이나 끌었습니다. 이제는 아리랑에 욕심이 납니다. 내년에는 나올겁니다. Q. 최근 3박 4일 동안 서귀포아리랑보존회 유재희 회장과 함께 제주도아리랑답사에서 얻은 성과는 무엇인가요? A. 서귀포아리랑보존회 회원들과 서귀포 역사 유적지를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습니다. 제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아리랑 역사에서 사할린과 제주도는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 본조아리랑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1930년대 본조아리랑이 대유행을 했습니다. 1940년 전후 제주에서도 사할린이나 일본, 오키나와에 강제동원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본조아리랑을 불렀지요. 문헌에 있는 제주아리랑 선율은 본조아리랑입니다. 어업에 종사하거나 강제동원된 사람들이 가지고 간 아리랑이라고 봅니다. 출가 해녀들이 대마도나 홋가이도로 동원되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부른 아리랑도 본조아리랑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부쳐준 아리랑고개가 존재한다는 것, 이번 답사에서 민족 고난이 있는 곳에 아리랑이 불려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리랑은 역사의 노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Q. 앞으로 계획은? A. 내년에는 왕십리아리랑전국경연대회를 개최하려고 합니다. 올해 준비를 했다가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사회적 거리가 강화되는 바람에 부득불 취소를 했습니다. 국내외 이주한 다문화 어린이들과 러시아 동포들에게도 아리랑을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올해에도 아리랑학교 아리랑 지도자로 위촉을 받았습니다.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로 알려지게 되면서 하바롭스크와 사할린 동포사회에서 수업 요청을 받았습니다. 내년에는 코로나가 종식되어 러시아 아리랑학교가 성사되어 아리랑배우기 수업이 완수되기를 기원합니다. 연혁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 2016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결성 2018년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설립/이혜솔 이사장 취임 안중근의사추모제(주관:일본 미야기현 대림사) 초청명창 위촉 제8회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발표회(주최:성동구청) 2019년 아리랑학교 지도자 위촉(아리랑학회)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 위촉 (공동주관:아리랑학회) <찾아가는 사할린아리랑> 공연 (양주사할린동포협회, 율정마을) 제9회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발표회(주최:성동구청) 제7회서울아리랑페스티발 초청공연 및 아리랑퍼레이드 참가 전국아리랑전승단체(55개 지역단체) 워크샾 참가(주관:문화재청) 경복궁 아리랑고유제(45지역 아리랑전승단체) 참가 제3회사할린아리랑제 아리랑명창 초청공연(이혜솔의 아리랑) 2020년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 주관(주최:성동구청) 전국아리랑전승단체협의회 가입단체 아리랑코로나 발표회 독도에서 제주까지 ‘아리랑코로나 부르기’성료 (공동주관:아리랑학회) www.arirang129.com 아리랑은 인류무형문화유산이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이다. 이 두 유산의 해설문에는 아리랑의 수를 ‘50여종’이다. 기관과 학계에서는 50여 종의 아리랑 곡명을 누구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함의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제시한 수는 명목상의 수이지 자체의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셀 수가 없다’는 의미다. 사실 최근의 한 연구논문에는 음반에서 정리한 곡명 수를 192종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사 기관과 목적에 따라 그 수가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리랑은 자기 복제라는 속성을 갖고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다음 세 번째는 이 수는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여지를 표현한 것이란 점이다. 어쩌면 이 세 번째를 함의한 것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그 가치 향유를 목적으로 한 아리랑 전승단체가 더 형성될 것이고, 그 범위가 세계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의 결성과 창작 활동은 이 세 번째의 함의를 실증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래되는 전통민요만 알고 있는 ‘밀양아리랑’은 1926년 9월 창작되었고, 그해 10월엔 영화 나운규의 아리랑에 등장한 ‘본조아리랑’이 탄생되었으며, 1934년엔 ‘진도아리랑’, 1936년에는 대구아리랑, 1972년엔 ‘상주아리랑’이 새롭게 세상에 나왔다. 아리랑은 댓구 형식이라서 기억하기 쉬운 구조를 가지고 2줄의 사설, 2줄의 후렴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서, 외국인들도 한번 들으면 누구나 기억하기 쉬어서 각인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누구나 지어 부르기도 쉬운 노래다. 이는 아리랑이 가진 창작과 개사의 속성을 지닌 '노가바' 형식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랑의 속성에 맞게 ‘왕십리아리랑’도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정은하 회장은 아리랑코로나 가사를 받고서 "코로나 시대에 코로나를 이기자는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서 알리고, 사할린 동포들에게 사할린아리랑을 가르치는 아리랑동지! 다시 한번 우리는 이혜솔 회장의 자발적 전승활동에 박수를 보낸다"라고 반겼다.(기미양:국악신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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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탕’을 아십니까?최근에 자리를 옮긴 회사 동료들과 가본 식당이 있습니다. 간판에는 "70년 전통의 갈비와 냉면의 명가”라고 돼있는 을지로 3가 노포(老鋪) ‘조선옥’입니다. 들어서면 중앙에 서예가 장전 하남호(長田 河南鎬/1926~2007)의 휘호가 기둥을 꾸며 연조를 내세우고, 방마다 고화(古畵)가 걸려 분위기를 내는 집입니니다. 두리번 거리다 뭘 시켜 볼까하고 후면 벽의 메뉴판을 봅니다. 그런데 ‘대구탕’이란 것이 눈에 뜁니다. 갈비탕과 가격이 같아 제법 고급 음식인듯합니다. 그런데, 고기집에 왠 대구탕이? 칼 친 무우에 고추장으로 간하고, 토막 낸 두 덩이에 눈 하나 반쯤 뜬 머리가 국물 위로 나온 대구탕을 그리며 침을 삼킴니다. 입이 큰 생선이라 한자로는 ‘大口’ 또는 ‘夻’(대구 화)로 쓴답니다. ‘夻’자는 우리식 한자라네요. 메뉴판에 한자를 병기하지 않아 다시 봅니다. 그랬더니 괄호 안에 작은 글씨가 보입니다. "한우+국내산 육우” ‘국내산 소고기로 만든 탕’이란 말인 듯하여 다시 고개를 갸우뚱해 봅니다. 그래서 밑반찬을 놓는 아주머니께 물었습니다. "대구탕이 생선 대구가 아니네요?” "예, 그게 아니고 육개장요” 그러면 그렇지. 육개장, 반갑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날씨도 으스스하고, 요즘 어지간한 식당에서는 육개장 맛을 보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 육개장, 그거로 주세요.” 연상을 합니다. 빨간 국물에 잘게 찢은 소고기와 토란대, 고사리, 숙주가 주재료인 탕이지요. 당연히 따끈하겠지요? 군침을 삼킵니다. 아, 그 순간 양은 냄비에 대구탕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받는 순간, 바로 육개장이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수저를 넣고 국물을 뜨며 보니 뿌연 국물에 너댓 덩이 고기에 무른 대파 중심의 탕이 아닙니까? 육개장이라고 했는데~! 아 그렇다면, 이 ‘대구탕’이란 이름에는 곡절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한자 표기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생각으로 빠집니다. 30여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kbs에서 특집으로 <조선통신사>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였습니다. 18세기 초 조선통신사 기록을 찾기 위해 ‘조선실록(朝鮮實錄)’ 번역본과 ‘매천야록’ 같은 자료를 뒤지게 되었는데, ‘승기악(勝妓樂)’이란 말을 보고 의아해 한 적이 있었습니다. ‘승기악’, 이길 勝, 기생 妓, 풍류 樂, 분명 실록의 기록이니 우리식 번역어가 아닌가라는 생각은 하였습니다. 1748년 2월의 조선통신사 종사관 기록에 나옵니다. 일본에 도착한 조명채(1700∼1764)가 이키시마(壹岐島)에서 음식을 대접받습니다. 영접관이 와서 역관에게 말하기를, "도주(島主)가 사신단에게 승기악(勝妓樂)을 보낼 터이니, 점심은 잠시 천천히 드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어 기술하기를 "승기악은 저들의 가장 맛 좋은 음식이라고 하며 손수 만들어 냈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의 열구자탕(悅口資湯)과 같은 것이며, 그 빛이 희고 탁하며 장맛이 몹시 달지만 그리 별미인지도 모르겠다.”라고 썼습니다. ‘승기악’을 우리 궁중음식 ‘열구자탕’과 비유했으니 분명 일본 대표음식의 우리식 표현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또 다른 자료도 보았습니다. 위의 기록보다 15년 후인 1763년 조선통신사 정사 조엄(1719∼1777)의 기록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하였습니다. 11월 29일 기록에 "도주가 승기악을 바쳤다. 승기악이란 생선과 나물을 뒤섞어 끓인 것으로 저들의 일미라 하여 이름 붙인 것이나 그 맛이 어찌 우리의 열구자탕을 당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역시 여기에서도 열구자탕과 비교를 했습니다. ‘悅口’란 입을 기쁘게 한다는 말이니 맛있다는 표현이지요. 실제 열구자탕은 신선로(神仙爐)에 여러 어육(魚肉)과 채소를 색스럽게 넣어 끓인 것으로 궁중음식을 대표하는 고급 음식이지요. 두 번째 기록에서는 ‘생선과 나물을 뒤섞어 끓인 것’이라고 해서 주재료와 조리법을 언급하여 비교했는데, 이것으로 보면 일본 음식 중 짐작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 것이 조선말기 일본인들이 부산이나 경남 남부에 집거하면서 우리가 기록한 자료에서 확인됩니다. 19세기 초반 김해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던 낙하생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문집 ‘낙하생집(洛下生集)’의 기록입니다. "승가기(勝歌妓)는 맛있는 고기 국물의 이름이다. 만드는 법은 대마도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승기악’이 아닌 ‘승가기’로 표기 됩니다. ‘악’이 ‘가로’ 바뀌고 ‘기’가 앞으로 왔습니다. 이를 주목하면 ‘승기악’이나 ‘승가기’에서 ‘악’과 ‘가’의 뜻과 음가를 차음(次音)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스키야기(すき焼き)’입니다. 뜻을 표현하였다면 "음악과 기생의 기예를 이길 만큼 맛이 뛰어난 음식”이 되고, 차음의 결과라면 ‘스키야키’의 ‘승기악’ 또는 ‘승가기’로 표현한 것입니다. ‘대구탕’, 반쯤 먹도록 머리를 굴려 봅니다. 뜻을 표현한 것일까? 아니면 음가를 음차한 것인가? 나온 탕은 나름의 맛을 갖고 있습니다. 국물도 진하고, 육질도 연하고, 파도 잘 물러 은근한 맛을 냅니다. 그런데 수저와 양은이 닿는 소리가 나도록 까지 머리를 굴리며 ‘한우(쇠고기/肉/大牛)’, ‘파(派/대파)’, ‘푹 고은 국물(탕)’과 ‘대구’를 조합해도 영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에라, 주인장에게 물어봐야겠습니다. "저 대구탕이 무슨 말예요” 아마. 이 질문을 수 없이 들었나 봅니다. 대수롭지 않게 카드를 꼽으며 지나기듯 말합니다. "개고기 보신탕을 대신한다는 말이예요. 대신 대, 개구, 국물 탕입니다.” "아! ‘代-狗-湯’, 말 되네, 말이 되네요!” '스키야기'가 '승기악'(승가기)으로 음가와 의미가 결합한 우리식 조어이고, 이 '대구탕'은 오직 대안 의미만을 담은 조어이네요. "와 누가 작명한 것일까? 대~박!" 아마도 1988년이후가 되겠지요? ‘보신탕’은 88올림픽을 계기로 ‘영양탕’으로 개명, 잠시 일반화 되다 2002년 월드컵 경기를 계기로 영양탕 업소가 줄어들어 지금은 서울 시내에서는 찾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補身湯+營養湯’으로 영양 보충을 하려면 대구탕이 대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말 점심은 동료들과 또 한번 대구탕을 먹어야겠습니다. 코로나로 지친 올 겨울 몸보신을 위해!(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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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문화고국 회복」을 기대한다. - 해상도시 지구촌의 당진고을을 보며 -본지 고문 하 정효 조국(祖國)과 국가(國家)가 상존하는 우리에게 상해임정 100년의 역사를 찾는 것도 중하지만, 단군성조 이전 오천 년, 이후 오천 년의 문화고국(文化古國)을 찾는 것은 더 소중하다. 한국의 국악에는 ‘고국’들이 많다. 현재의 국악은 대개 근세조선과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 기에 발생한 것인데 반해, 거슬러 올라 고조선을 비롯한 기자조선 또는 전삼국 후삼국에 걸친 옛 나라들에는 국악의 사료가 거의 없는 지경이다. 시간여행을 하여 고조선과 마한 진한 변한 땅을 가 보자. 그 시절의 군왕과 백성, 선조와 후손들에게는 희로애락이 없었을까. 또 동래설(東來說)에 시달리고 있는 기자조선의 홍범구주(洪範九疇)나 팔조법금(八條法禁)은 국악의 가사가 될 수 없을까. 고대 페르시아의 사산왕조에 못지않았던 발해문화에는 국악의 소재가 없을까. 악랄한 “동북공정”으로 소실된 ‘대조영의 황금문화’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시아의 종조(宗祖)였던 단군왕검! 이 시절 “단군의 땅”은 아시아와 태평양을 아울렀는데, 그때는 춤과 노래, 악기와 풍물이 없었을까. 실오라기만한 몇 줄의 근거라도 찾아 국악의 유구역사와 전통을 이어보면 아니 될까. 정부의 정책 인력 예산이 따른다면 가능하다. 국악은 수많은 고국을 가졌다. 궁예의 태봉국, 이사부 시절 우산국, 김수로왕의 6대 가야, 그리고 탐라국과 제1대에서 제18대까지 옛 선조가 통치했던 49.5Km거리의 대마도 등 국악의 고국이 아닌 곳이 없다. 전쟁의 무화(武化)와 평화의 문화(文化)는 병진하는 법, 이들 무예와 문예의 사이에 어찌 그 시절의 무가기풍(舞歌器風)이 없었겠는가. 이들은 국악의 고국이다. 우리들 언제 ‘고국의 국악’을 접할 수 있을까. 생사의 기로와 흥망성쇠를 이겨왔던 옛 선조의 소리 몸짓 울림 외침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경복궁 교태전 뒤에는 인조(人造)로 만든 아미산(峨眉山)이 있다. 그런데 실물 아미산의 소재지는 당진이다. 일찍이 신라의 삼국통일에 훈수를 들었던 나당연합군 시절, 불야성을 이루었던 지구촌의 중심지 당진고을은 바다의 물기둥이 지어낸 지구촌의 궁전이다. 당진은 바닷물이 내륙을 드나들면서 9강10천(九江十川)을 이루고 있는 “해상도시”이다. 여기에 “중전마마의 아미산”이 있고, 성자영걸의 “다불산(多佛山)”이 있다. 북으로 오산, 남으로 예산, 동으로 아산, 서쪽으로 서산이라는 4대도시가 산(山)이 되어 병풍처럼 둘러 있고, 567m의 가야 산맥이 성화봉의 기둥처럼 당진을 떠받치고 있다. 가히 “지구촌의 당진”이다. 이곳에 임란의 이충무공 못지않은 고려의 한 장군이 계신다. 이 장군은 왕건이 신의주에서 원산까지 천리장성을 쌓고 안주하는 것이 안타까워, ‘단군의 땅’을 찾겠다는 웅지가 물거품이 되자 고향으로 낙향, 득병 사경에 이른다. 그가 복지겸이시다. 그에게는 백일 정성, 현몽대로 “아미산의 두견화로 술을 빚어” 아버지를 살려 낸 ‘영랑’이라는 효녀가 있었다. 영랑이 심은 은행나무 두 그루는 1,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당진시 면천면의 상록수가 되어 살아있다. 안타깝게도 노래는 없다. 그뿐이 아니다. 일제 치하 동아일보 연재소설 상록수의 저자 항일지사 심훈 선생도 마찬가지이다. 노래 한마디가 없는 것이 공통적이다. 누가 국악의 고국을 찾을 것인가. 임정100년을 찾는 이 마당에, 국악 만 년의 역사를 현창하는 것은 어떨까. 세계문화의 뿌리가 고국강산에 넘치는데도, 조국의 역사, 고국의 문화를 어떻게 찾을까. 오늘날 우주시대 세계시대를 말하지만, 고조선 저쪽 옛 선조는 세기를 앞질러 오늘의 지구촌이 가야 할 홍익세계를 말하지 않았던가. 이 정부에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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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2월의 문화인물-이예충숙공 이 예(忠肅公 李 藝):1373-1445 조선 전기의 외교관으로 40여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어 667명의 조선포로를 찾아오고 계해조약의 체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세종임금의 명을 받아 대장경을 일본 국왕에게 전달하고 일본의 자전(自轉) 물레방아를 도입하고 사탕수수 재배를 건의하는 등 조선-일본 문화교류에 큰 업적을 남겼다. 고귀한 장인정신, 지극한 효성, 불굴의 의지, 애국심은 현대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 충숙공의 본관은 학성(鶴城), 아호는 학파(鶴坡),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공은 1373년에 울산에서 출생, 1445년(세종27) 2월에 향년 73세로 별세하셨다. 대일 외교의 일선에서 조선 전기의 한일 문화교류에 크게 기여한 독보적 인물이며, 중인 계급인 아전에서 출발하여 종2품인 동지중추원사의 벼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하다. 1396년(태조5; 24세) 12월에 3천명의 일본 해적이 울산에 침입하여 군수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울산의 여러 관리들은 모두 도망하여 숨었다. 그러나 공은 해적의 배를 바다 가운데까지 뒤쫓아 가서 군수와 같은 배에 타기를 청하였다. 해적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대마도에 이르러서 해적은 군수의 일행을 죽이려고 의논하였다. 그런데 공이 군수에게 여전히 아전의 예절을 지키기를 더욱 깍듯이 하는 것을 보고는 이에 감동하여 마음을 바꾸었다. 이들은 죽음을 면하고 대마도의 화전포(和田浦)에 유치되었다. 나라에서 통신사 박인귀(朴仁貴)를 보내어 화해하게 되어, 이듬해 2월에 공은 군수와 함께 돌아왔다. 나라에서 공의 충절을 가상히 여기어 아전의 역(役)을 면제시키고 벼슬을 주었다. 일찍이 공이 8세(우왕 6년; 1380년)때 모친이 해적에게 포로가 되었었다. 공은 어머니를 찾기 위해 조정에 청해 1400년(태종 즉위년; 28세)에 회례사(回禮使) 윤명(尹銘)의 수행원으로 대마도에 갔다. 집집마다 수색하며 어머니를 찾았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1401년(태종1년; 29세)에 보빙사로 일기도(壹岐島)에 파견되었으니 이것이 공의 처음 공식 사행(使行)이었다. 1443년(세종25; 71세) 체찰사로 대마도에 파견되었으니 이것이 공의 마지막 사행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공은 1401-43년의 43년간 40여회 일본(대마도-일기도-유구 포함)에 정사 혹은 부사로 파견되었다. 그 중 왕조실록에 사행의 활동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만 해도 13회에 달한다(일본 국왕에 6회, 대마도-일기도-유구국에 7회). 왕조실록에는 44년간의 사행에서 공이 일본으로부터 쇄환해 온 조선인 포로는 모두 66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은 조선의 대일외교에서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조선 전ㆍ후기에 걸쳐 일본 국왕에게 파견된 사행은 모두 30회였는데 공은 이 중 6회의 사행에 참여하여 가장 파견빈도가 높다. 공은 또한 통신사란 명칭이 최초로 사용된 사행에 참여하였다. 조선 전기 200년간 대마도-일기도-유구국에 대한 사행은 40회(대마도33+일기도4+유구국3)였는데 공은 이 중 7회의 사행에 참여하여 가장 파견빈도가 높다. 왕조실록에는 세종8년에 통신사로 일본으로 떠나는 공에게 임금께서 갓과 신을 하사하며 이렇게 당부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서, 이에 그대를 명하여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하지 말라.”참으로 아름다운 군신간의 사랑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왕조실록에는 또 조선을 방문하는 대마도인의 체류기한을 제한하는 문제에 대해 세종께서 하문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모두 말하기를 ‘충숙공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다시 숙의하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공은 71세의 노구로 대마도 체찰사를 자청하며 세종께 이렇게 말한다. “신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이 섬에 출입하여 이 섬의 사람과 사정을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신이 가면 저 섬의 사람들이 기꺼이 만나볼 것이며, 누가 감히 사실을 숨기겠습니까.” 위의 두 예화는 조정 중신들의 공에 대한 평가와 공 스스로의 자신감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공은 한일 문화교류와 관련하여 다양한 방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근세 이전 한일 관계에 있어 민간의 국제교류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임금이 파견하는 공식 사행은 일차적으로 정치. 외교적 기능을 수행하는 한편으로, 문화의 국제교류에 있어 거의 유일한 창구로서 기능하였던 것이다. 시문, 필담, 회화, 음악, 무용 뿐 아니라 농업기술, 광업기술, 무기, 음식 등에 있어서도 광범위한 문화교류가 사행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특히 대장경 및 불경의 사급(賜給)을 통한 불교문화와 인쇄문화의 전파, 일본식 자전 물레방아의 도입, 화폐의 광범위한 사용, 사탕수수의 재배와 보급에 대한 건의가 눈에 띈다. 사행은 또한 민간에 의한 광물채취자유화와 이에 대한 과세(課稅), 화통 및 완구의 재료를 동철에서 무쇠로 변경, 외국 조선기술의 도입 등을 건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행에서 예물의 교환과 물자의 교역을 통해 문물 및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사행의 접대를 통해 음식문화와 일상 생활문화의 교류도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