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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이병욱과 어울사랑’ 송년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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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관현악의 확장, ‘소리의 색채’-“빼어난 감각”12월 7일,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2023 믹스드 오케스트라 Ⅱ - 소리의 색채’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랐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믹스드 오케스트라 시리즈는 우리 음악의 확장성에 주목하며 새로운 실험을 지속하는 프로그램으로, 2022년 9월 ‘충돌과 조화’, 2023년 9월 ‘존재 그리고 연결’ 이라는 부제의 공연을 통해 전통과 현대를 잇는 빼어난 감각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박승원, 한웅원, 황호준 작곡가들에게 위촉 초연작을 받아 새로운 무대를 선보였으며, 모듈러신스(모듈러 신디사이저의 약칭. 각각의 모듈로 이루어진 전자음악 악기)를 활용한 실험적 전자음악으로 더 채도 높은 파격을 시도했다. 모듈러신스 연주는 모듈라서울(Modular Seoul)이 맡아 관현악단과 함께 모든 곡을 연주하여 더욱 풍성하고 밀도 높은 무대를 선보였다.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나는 따뜻한 겨울, 푸른빛의 분위기 있는 조명이 은은하게 무대를 비추고 있었다. 믹스드 오케스트라의 ‘mixed’라는 단어처럼 새롭고 다양한 시도가 어떻게 묻어날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관람하였다. 오프닝 곡으로 ‘수제천’이 연주되었다. 모듈라서울의 멤버 임용주가 구성한 음악으로, 시공의 강산을 넘어 다다른 그곳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암전 가운데 전자 사운드가 공간을 메워 나가기 시작했고, 관현악단의 수제천이 연주되었다. 웅장한 행진곡의 울림 위에는 모듈라서울이 만들어 내는 다채로운 사운드가 가미되었다. 특히 베이스 음역대를 풍성하게 채워주며 수제천의 단아한 웅장함을 배로 느껴볼 수 있었다. 번갈아가며 편종과 편경을 비추거나 음악의 진행에 맞추어 조명을 다양하게 활용한 연출도 흥미로웠다. 박승원이 작곡한 위촉 초연작 ‘네 개의 판(Four Fields)’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무대가 시작되었다. 이 곡은 반복되는 시간의 선상에서 이완과 긴장, 수렴과 확산이라는 키워드로 국악 관현악과 전자음악의 조화를 구현한 작품이다. 낮은 베이스 음역대의 신스 사운드가 무대를 감쌌고, 그 위에 해금과 아쟁, 가야금의 반복적인 효과음이 얹어지며 고요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피리의 슬픈 듯 구성진 선율이 연주되고, 마이너한 분위기로 흘러가던 음악은 독특한 전자 사운드와 악기의 고유한 음색이 어우러지다가, 신스 베이스가 점점 쿵쿵거리며 빠른 리듬으로 점철되어 클럽이나 라운지 음악이 연상되기도 했다. 또 국악기 소리에 과한 딜레이(delay)를 걸거나 음색을 비틀어 내 다양하게 활용하기도 하며 이질적이고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운드의 변화에 따라 조명과 미디어 아트도 함께 변화했고, 어떻게 진행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무대의 흐름이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국악 관현악과 전자 사운드가 각각 따로 노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국악 관현악의 연주에 패드(Pad) 성 배경으로만 활용되던 모듈러 신스는 관현악 연주가 빠질 땐 급작스럽게 클럽 음악 같은 장르로 전환하여 국악 관현악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주었다. 또 마이너한 분위기를 이끌어 가다 말고 갑자기 서정적인 선율을 연주한다거나, 곡을 급작스레 마무리하여 자연스럽지 못했던 흐름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다음으로 프렐류드, 고희안 트리오, 서영도 일렉트릭 앙상블 등 국내 최고 재즈 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는 한웅원의 위촉 초연작 ‘드럼과 국악 관현악을 위한 소릿바람’이 연주되었다. 작곡가가 직접 드럼 연주로 참여하며 국악 관현악 역사상 최초의 드럼 협주곡으로 기록된 이 무대는, 작곡가와 협연자가 동일하기에 그 누구보다 음악을 가장 잘 해석할 것이라고 느껴져 더욱 기대되었다. 하이햇(Hi-Hat)과 심벌(Cymbal)로 한국 전통 장단 리듬꼴을 연주하며 시작한 무대는 독특한 음계 구성의 묘한 선율을 연주하는 관현악과 함께 힘 있게 달려 나갔다. 웅장하고 강렬한 연주는 드럼이 아닌 것 같은 느낌도 받았는데, 이는 장단을 중심으로 연주했기 때문이다. 드럼으로 자주 듣던 서양음악 스타일의 연주가 아닌 새롭게 재해석된 드럼 연주는 익숙하면서도 색다른 느낌을 자아냈다. 음향적으로는 몽환적이고 축축한 사운드의 모듈러 신스 연주가 가미되거나, 관현악기의 음색을 비틀어 변화를 주기도 했고, 마림바와 태평소의 과한 농음을 통해 효과음적인 악기 사운드를 구현해 내기도 했다. 관현악과 드럼의 등장 타이밍이나 연주 효과적 분배가 적절했고, 유려한 드럼의 연주 또한 훌륭했다. 특히 드럼의 탐(Tom) 사운드를 활용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한웅원은 장단의 강세를 탐(Tom) 악기의 고저로 표현하였다. 장단과 드럼 악기를 확실하게 이해했기에 나올 수 있는 부분이었다. 가장 한국적인 이 시대의 새로운 국악 관현악, 드럼 협주곡이 아니었을까. 제1부의 마지막 무대는 황호준의 위촉 초연작 ‘디스토피아’가 장식했다. 불협화음 음향 효과를 극대화한 이 곡은, 인간의 욕망, 극단적 소비를 만들어낸 자본주의 시스템에 근원적 물음을 던지며 관객들이 디스토피아로 계속 끌려 들어가며 살 것인지 자문하도록 만들었다. 반음계와 5박 리듬의 진행으로 오묘하면서도 특이하게 시작된 음악은 어딘가 불편하고 마이너한 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디스토피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5박과 6박이 반복되며 변화하고, 모듈러 신스의 천둥 치는 듯한 전자 사운드를 듣고 있자니 인간의 욕망과 자본주의 시스템에 질문을 던지는 작곡가의 의도가 들리는 듯했다. 특히 서정적인 반음계 하행 클리셰 코드 진행 위에 어딘가 불편한 선율이 얹어진 부분은 황호준 작곡가의 고유한 음악적 특색이 드러나며 편안하면서도 독특한 감정을 선사해 주었다. 2악장이 시작되자, 아름다운 선율이 무대를 감쌌다. 1악장은 불완전한 디스토피아 같았다면, 2악장은 사랑과 행복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유토피아를 꿈꾸는 듯한 아름다움이 무대를 감쌌다. 하지만 국악기에 음향 효과로 딜레이(delay)와 리버브(reverb)가 너무 많이 걸려 음악의 진행에 방해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과한 음향 효과는 악기의 고유한 매력을 반감시킬 수 있기에 조금 더 적절한 어우러짐을 연구했더라면 더 풍성한 음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모듈러 신스는 음악에 억지스럽게 개입된 느낌을 받았다. 다이나믹하고 풍성한 느낌을 주는 건 좋았으나, 악기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조화를 이루는 연구가 더욱 필요해 보였다. 제 2부의 첫 무대는 한웅원이 작곡한 위촉 초연곡 ‘보이스와 국악 관현악을 위한 베틀가’가 장식했다. 가수 선우정아가 함께한 무대로, 재즈보컬의 즉흥 연주 방식인 스캣(scat)을 선보였다. 그는 구음처럼 목소리만을 통해 베틀가의 선율을 차용하거나,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베틀가를 통성으로 노래하기도 하며 재지(Jazzy)한 무대를 펼쳐내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을 선보였다. 이 무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보컬이 노래가 아닌 악기의 한 부분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선우정아는 관객들에게 짧은 노래 구를 제시하며 따라 부르도록 유도하기도 하고, 해금과 대금, 피리, 아쟁 등의 국악기가 제시하는 선율을 목소리로 따라 부르기도 했다. 각 악기의 특성이 녹아있는 선율을 받아 표현한 그의 목소리는 악기 그 자체였고, 악기 소리의 특성을 잡아 특색있게 노래하는 것이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국악 관현악과 스캣(scat)을 활용한 재즈보컬과의 만남은 흔치 않아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만큼 굉장히 독특하고 신선했으며, 국악기와 보컬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진정한 음악적 화합을 선사해 주었다. 휘날레를 장식한 무대는 김성국 작곡의 일렉트릭 기타 협주곡 <능게>가 장식했다. 전통음악 ‘능게’는 행진 음악을 뜻하며, 주로 태평소, 나발 등의 관악기와 북, 바라 등의 타악기로 연주하며 힘차고 경쾌한 음악적 특징을 지닌다. 이 작품은 주로 태평소로 연주되는 전통음악 ‘능게’의 주선율을 재료로 일렉트릭 기타와 믹스드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으로 작곡되었다. 기타리스트 KAY BROWN의 협연으로 연주된 이 곡은 화려한 기타 사운드와 퍼포먼스가 눈과 귀를 매료시켰다. 밝고 경쾌한 능게 선율이 일렉 기타의 깔끔하고 매력적인 음색과 관현악으로 함께 연주되니 한국적이고 벅찬 느낌을 받았고, 현대적이고 모던하면서도 전통의 색이 돋보여 한국 홍보영상 음악으로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음악은 능게 선율을 주제로 하여 자연스럽게 변화하며 발전해 나갔다. 2악장에서는 경기민요 태평가의 선율을 차용한 생황과 일렉 기타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이 편안함을 선사해 주었고, 일렉 기타의 화려한 솔로 부분은 넋을 놓고 감상하게 되었다. 아쉬웠던 것은 전반적으로 일렉 기타의 기교와 화려함에만 치중했다는 것이다. 협주곡이긴 하지만 국악 관현악곡이기에 조금 더 다양한 전통 음악적 요소가 등장했으면 했는데, 다분히 기타 연주자의 록(Rock) 콘서트 같았고 관현악은 단순하게 받쳐주기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일렉 기타의 연주를 돋보이기 위한 의도였을 수도 있지만, 국악 관현악과 기타가 전통을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면 더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무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믹스드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무대 뒤를 비롯한 천정에 수놓아지는 화려하고 다양한 색채의 조명 또한 공연 내내 시야의 흥미로움과 모던한 감각을 선사해 주었다. 국악 관현악이 새롭고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하고 확장되어 가는 모습은 긍정적이었지만, 국악이 아닌 타 음악과의 자연스러운 혼합을 위한 더 다양한 연구와 노력이 필요해 보였다. 인기 있는 아티스트나 장르를 통해 대중들의 흥미를 끄는 것도 좋으나, 전통의 본질을 더욱 중심에 두고 그 색채를 잃지 않은 채 음악적인 발전을 시켜 나가, 이 시대에 가장 걸맞은 국악 관현악의 꾸준한 발전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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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The林): ‘괴물이 없는 마을’지난 11월 29일부터 30일까지, 남산국악당에서 창작국악과 현대무용이 어우러진 '괴물이 없는 마을'이 무대에 올랐다. 이 공연은 서울문화재단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사업에 선정된 창작국악그룹 그림(The林)의 신작 움직임 음악극으로, 괴물을 단순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유쾌하고 친근한 존재로 변모시키며, 이를 통해 성장과 교훈을 담아낸 작품이다. 전통악기의 연주와 현대무용의 세밀한 움직임, 그리고 영상으로 한국 문화의 정서를 시청각적으로 풍부하게 담아냈다. 남산국악당의 아늑한 무대는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바닥에는 흰 종이 가루들이 뿌려져 있었고 보름달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원 모형이 무대의 중앙에 놓여있었다. 그림(The林)이 연주할 특수 타악기들과 음향 효과를 위한 다양한 장비를 보고 있자니 어떤 무대가 펼쳐질지 더욱 기대되었다. 그림(The林)은 전통을 기반으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창작과 각 예술 장르의 특성들이 효과적으로 반영된 융복합 형태의 각종 음악 콘텐츠를 완성도 있는 공연물로 제작 및 발전시키고 있는 예술단체이다. 특히 이들은 월드뮤직을 연상시키는 독특하고 신선한 음악적 시도를 통해 한국음악의 지평을 넓혀 나가는 팀이기에, 이번 무대에서 보여줄 그들만의 특별한 음악이 궁금했다. 이 공연은 또한 그림(The林)과 현대무용단 고블린파티가 함께 무대를 꾸려나갔다. 현대무용단 고블린파티는 현대와 전통을 아우르며 활동하고 있는 단체로, 특유의 유머와 진지함으로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 무대에서는 고블린파티의 이경구, 지경민 두 무용수가 함께했다. 그림(The林) 연주자들이 무대로 등장하고, 신비한 동화 속 세계 같은 음악이 시작됐다. 일렉 기타와 전자 사운드로 변화시킨 독특한 음색의 해금, 시타르(인도 북부에서 사용된 류트계의 발현악기) 느낌의 이국적인 악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졌고, 몽환적인 분위기 가운데 주인공 ‘소녀’를 맡은 고블린파티의 이경구가 나와 ‘난 이상한 아이다’라고 하며 무대가 시작되었다. 음악은 전자사운드의 반복적인 리프 위에 몽환적이고 민속적인 음색이 섞여 한데 어우러졌다. 주인공 소녀는 불행을 보는 사람이고, 얼굴에 흉터가 있어 모자로 항상 얼굴을 가린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소녀를 ‘불길한 아이, 이상한 아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마을에 역병이 돌고, 마을 사람들은 그 원인을 소녀에게서 찾으며 소녀를 마을에서 쫓아냈다. 도망친 소녀는 괴이한 소리가 들리는 우물 속을 들여다보다 우물 속으로 빠지게 되고, 우물 속에서 네 괴물을 차례대로 만나게 된다. 음악과 무용의 조화였기에 이야기의 흐름을 알기 어렵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주인공 소녀의 내레이션과 두 무용수의 대사, 연기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 소녀가 만나는 괴물들은 한국역사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괴물들이었기에, 더 한국적이고 친숙한 느낌을 받았다. 소녀가 처음으로 만난 괴물은 ‘해동고승전’에 기록되어 있는 ‘독흑리’로, 천 년 동안 자기 머리에 털이 없는 이유를 찾고 있는 지혜롭고 철학적인 괴물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소녀의 모자를 뺏어 쓰며 마치 비보잉(B-Boying) 같이 대중적이고 젊은 느낌의 춤을 추는 독흑리를 현대적이고 모던하게 표현함으로써 괴물을 친근하게 그려낸 연출이 돋보였다. 그림(The林)은 대금의 특수한 음색이 도드라지는 유쾌한 사운드로 흥을 돋우기도 하고, 대풍류를 신선한 방식으로 편곡해 연주하기도 하며 전통음악과 현대무용이 세밀하게 조합된 움직임을 흥미롭게 나타냈다. 여기에 화려하고 눈이 즐거운 미디어아트 영상이 더해져 볼거리와 들을 거리가 충만한 장면이 완성되었다. 괴물들은 불행한 아이라는 딱지가 붙어있던 소녀에게 항상 칭찬해 주고, 예쁘다고, 괜찮다고 말해준다. 그렇게 소녀는 점점 상처를 치유하며 자기 자신을 찾아가게 된다. ‘성호사설’에 기록된, 사람의 그림자 주변에 숨어있는 괴물 ‘망량’을 만났을 때의 무대 연출은 굉장히 신선하고 특이했다. 소녀는 무대에 삼각대를 활용하여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걸어 다녔는데, 소녀가 찍는 카메라는 셀프카메라 기능으로 소녀를 비추기도, 소녀가 보는 시야를 비추기도 했다. 그 연출법은 거울에 비추어 보면 그 모습이 보인다는 망량을 표현한 것이었다. 망량은 기묘한 음악에 맞추어 그림자처럼 소녀를 따라 똑같이 춤을 추었다. 두 무용수가 함께 한 동작을 조금의 시간차로 추어내는 춤은, 음악 선법(mode)을 다양하게 활용하여 흔치 않은 선율로 만들어 낸 음악과 어우러지며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번 공연에서 그림(The林)의 음악은 새롭고 색다른 색채를 물씬 드러냈다. 물론 오랜 기간 다양한 장르를 융복합하여 특색있는 음악을 자주 보여주었지만, 이번 신작에서 그들이 표현한 음악을 듣고 있자니 점점 한국을 넘어 아시아, 더 나아가 월드뮤직의 세계로 한걸음 성큼 다가간 느낌, 그리고 극음악에 점점 걸맞은 곡을 만들어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극음악’이란 극적인 내용에 음악을 결합한 예술 장르로, 연극상의 성격이나 효과를 높이는 데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그림(The林)의 음악 ‘바다숲’을 들어보면, 자유로운 악기들의 솔로 구간과 음악의 기승전결, 빌드업, 장단 등의 음악적 구성이 연주를 위해 탄탄하게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단독 연주곡이 아닌 극음악에서는 극의 흐름, 이야기,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모두 신경 써 그에 걸맞은 음악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번 무대에서 그림(The林)의 음악은 극의 주제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 장단이나 악기 구성, 코드 진행, 사운드 등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극의 특색있는 색을 음악으로 완성도 있게 만들어 냈다. 특히 공연을 보는 내내 영화 음악감독 토마스 뉴먼(Thomas Newman)의 음악이 떠오르는 신비스러운 음악적 요소가 많아 흥미로웠다. 또 퍼커션을 기반으로 하여 전통음악 장르인 정악 곡을 다양하게 변화시키거나, 전통답지 않은 서양 음악, 사운드 요소를 차용함으로 이 시대의 새로운 음악 장르를 만들어 냈다. 그림(The林)의 작곡가이자 음악감독인 신창렬은 ‘작품마다 가지고 있는 전통과 현대의 무게중심에서 어떻게 정확한 균형감 있는 지점을 찾아낼 것인가 하는 고민’을 가장 큰 숙제로 두고 작업을 한다고 전했다. 그의 고민처럼, 다양한 장르에서 그림(The林)만의 독자적인 색을 깊게 표현한 것이 도드라지는 무대였다. "상처는 눈이야.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걸 넌 볼 수 있지." "너는 나무야. 아무리 잘라내도 다시 자라고 꽃을 피워.” ‘괴물’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사람의 입장에서 다수의 사람이 기이하게 생겼다고 보는, 괴이한 외형의 생물체를 뜻한다.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받고 공포를 조장하는 의미를 갖는 ‘괴물’은, 이 작품에서 소녀에게 그 누구보다 힘이 되고 따뜻한 말을 해줌으로써 소녀가 자신의 상처를 받아들이고 온전히 ‘나’라는 사람에게 집중하며 용기를 얻을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또 소녀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동시에 각자의 고민과 상처로 움츠러든 관객 모두의 상처를 함께 어루만져 주었다. 우리는 모두 이상하고, 별난 아이다. 남들과는 다른,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모두 한 쪽에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이상하고 별난 모습 또한 나 자신의 아주 소중한 일부이기에, 우리는 이상하고 별나지만 귀한, 아주 소중한 아이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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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음악, 이 시대 ‘반도’의 음악11월 24일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한국 전통 음악의 기원을 알리는 팀 ‘반도(BANDO)’의 첫 정규 공연이 열렸다. ‘동시대 전통예술의 경계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의 ‘2023 Project contemporary 문밖의 사람들:門外漢’ 선정 기획공연으로, 무궁무진하게 뻗어나가는 전통예술의 동시대성을 그려냈다. 반도는 "우리 전통 음악은 어디에서 왔을까?”라는 물음에서 시작된 팀이다. 이 무대에서는 네 명의 연주자가 한반도라는 공간적 공통점에서 새로운 한국음악의 실마리를 찾아내 음악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선보이며 이 시대의 음악을 그려냈다.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는 동시대 예술가들의 창의적인 시도를 위해 설립된 곳으로, 갤러리, 라이브홀 등의 시설에서 전시와 퍼포먼스, 영상 등 다양한 장르와 매체의 작업을 담아내고 있는 공간이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은 연주자의 연주를 거의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 친근했고, 푸르스름한 조명을 받은 악기들이 무대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시회장을 방불케 하는 느낌 있고 아늑한 무대에는 모던하고 현대적인 음악이 잔잔히 흘러나왔고, 곧 네 명의 연주자들이 등장했다. 연주는 기타에 이시문, 거문고에 황진아, 색소폰에 김성완, 드럼에 강전호가 함께 했다. 한반도에서 태어나고 자라 자신만의 활동을 펼쳐 온 네 명의 연주자들은 바다, 강, 섬, 논, 길 등 한국의 지형적 특징을 소재로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첫 번째로 연주된 곡은 ‘동해’였다. 반도의 팀 이름과도 잘 어울리는 곡으로, 힘차고 강렬한 사운드로 연주를 시작함과 동시에 공연장 무대의 3면(무대 중앙, 좌측, 우측)이 파도치는 바다 영상으로 가득 찼다. 관객들은 현란한 미디어 아트 덕분에 무대에 더욱 빠져들 수 있었다. 음악은 색소폰이 주선율이 되어 자유롭게 연주하고, 그 뒤에 다른 악기들이 힘 있게 받쳐주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색소폰이 주가 된 강렬한 사운드와 함께 파도치는 영상 속을 헤엄치다 보니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애니메이션 영화 블루 자이언트(Blue Giant)가 떠올랐다. 그만큼 열정적이던 곡 ‘바다’는, 이리저리 휘몰아치며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바다의 풍경을 절로 그려냈다. 바로 이어 연주된 ‘안개’는 거문고와 색소폰의 여린 사운드가 반복되는 리프와 함께 몽환적으로 시작되었다. 앞이 흐릿한, 안개 낀 것 같은 미디어 아트 영상이 무대를 감쌌고, 휘모리장단을 연주하는 드럼, 독특한 사운드의 색소폰 솔로에 거문고와 일렉 기타가 리듬 형태로 얹히며 뿌옇고 몽환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이 공연에서는 중간중간 연주자들이 번갈아 가며 토크를 진행했다. 두 곡이 끝난 후 거문고 연주자 황진아가 마이크를 잡고 반도 팀을 소개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이 시대에, 이 땅에 비슷한 정서로 함께 사는 한국인의 ‘현재의 음악’을 추구한다는 설명을 들으니 더욱 편안하고 정겹게 느껴졌다. ‘뭐로 가도 서울만’이라는 곡은 자신의 만취 상태를 그리며 감상해 보라는 멘트와 함께 유쾌하게 시작되었다. 선명한 색감의 네모난 색종이 같은 조명이 연주자들을 하나하나 비추었고, 이는 마치 네이버 온스테이지(onstage) 무대를 보는 듯 모던하고 예술적이었다. 그들은 ‘4+3+3+2’의 리듬 소박을 반복하며 강세를 가지고 선율을 쪼개거나 이어 자유롭게 연주했다. 악기는 각자 솔로를 연주하다가도 다른 악기의 솔로에 맞추어 주고, 절뚝거리는 리듬 소박을 가져가다가도 하나 된 합을 맞추어 연주함으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한국적 리듬, 선율의 자유롭고 재미있는 상·하행 진행을 듣고 있자니 유쾌하고 여유로운 서울의 밤이 연상되며 더욱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네 번째 무대는 ‘남쪽 섬’으로, 수천 개의 섬이 있는 한반도 남쪽을 그리며 ‘열매 따는 소리’라는 노동요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곡이다. 경쾌한 리듬과 일렉 기타의 명랑한 코드 진행 위에 색소폰의 선율과 거문고의 현란한 솔로가 얹어졌다. 관객들은 저마다 리듬을 타며 그루비한 음악에 몸을 맡겼다. 이 곡에서 일렉 기타는 장조(major)를 주로 연주했고, 색소폰은 그와 반대로 단조(minor) 선법을 베이스로 연주하여 서로 다른 이질감 속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매력을 선보였다. 컬러풀한 패턴의 영상과 함께 음악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산을 따라 사는’은 거문고의 피치카토 연주로 시작됐다. 중후하고 자연 친화적인 낮은 거문고 소리가 무대를 잔뜩 감싸며 차분한 산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 무대는 특히 미디어 아트가 음악과 잘 어울렸는데, 흑백으로 된 많은 나무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하나의 산을 만들어 낸 것이 흥미로웠다. 색소폰의 공기 반 소리 반의 오묘하고 매력적인 사운드에 일렉 기타의 부드러운 소리가 섞이며 신비로운 산의 장관이 그려졌다. ‘강’은 관객들의 집중도를 최대로 끌어올린 곡이었다. 색소포니스트 김성완은 강을 생각하면 거리감이나 인생의 시간이 떠오른다며, 강의 깊고 고요함을 색소폰으로 표현하였다. ‘강’은 색소폰의 끊이지 않는 하나의 음정으로 시작했다. 지직거리며 균등하지 않은 사운드의 질감과 흔들림 가운데에도 굳건한 지속음이 아름답게 연주됐다. 고요하고 편안한 강물의 물결 영상 아트는 아주 조용한 어느 강변으로 데려다주었고, 그 앞에 앉아 시를 읽는 기분을 선사해 주었다. 다음으로 연주된 곡은 논밭을 가르는 초록빛 영상, 조명과 함께 태양이 작열하는 한여름날 부딪히는 농기구 소리와 농부의 노랫소리를 연상시키는 ‘여름 논’이었다. 드럼은 하이햇(hi-hat)으로 농기구 소리를 표현해 연주하며 흥미로운 리듬꼴을 들려주었다. 또 일렉 기타의 선법이 특히 독특했는데, 단조(minor) 기반의 몽환적인 색이 가미된 음을 추가하여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반도 팀은 이렇듯 곡마다 예상하지 못할 그들만의 음색과 코드, 리듬 형태 등을 자유롭게 구현해 냈다. 뻔하지 않고 독특하면서도 이질감이 들지 않는 그들의 음악은 대중적이고 현대적이며, 또 한국적이었다. 한반도를 돌아다니는 밴드 반도의 모습을 그려낸 마지막 곡 ‘길’을 끝으로 무대는 막을 내렸다. 반도는 그들만의 뚜렷한 색채와 자유로운 연주로 완성도 높은 음악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무대에서 음악보다 더욱 눈에 띄었던 건, 그들의 단합력이었다. 서로를 아끼고 보듬어 주며 존중하는 모습은 토크와 음악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솔로 악기에 자리를 내어주고 양보하며 연주로 뒷받침해 주고, 눈빛과 호흡, 미소로 완벽한 합을 만들어 냈다. 이번에 처음 관객에서 선보여진 밴드 반도의 무대는 다채로운 미디어 아트와 새로운 음악적 시도가 더해져 이 시대의 한국 음악이 나아갈 가치 있는 가능성을 끌어냈다. 그들이 앞으로 보여 줄 그들만의 예술, 한반도의 예술을 더욱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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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탈공작소, ‘탈 오셀로와 이아고’지난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금나래아트홀에서 젊은 탈꾼 예술단체 천하제일탈공작소가 창작한 ‘오셀로와 이아고(Othello and lago)’ 공연이 펼쳐졌다. 인간을 탐구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오셀로’를 흥과 넉살로 가득한 탈춤의 미학으로 재해석하여 흥미롭게 풀어나간 작품이다. 더 나아가 한국 전통 음악이 가진 예술성과 정신을 깊이 있게 체득하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어법을 받아들여 동시대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음악을 추구하는 음악그룹 나무가 음악을 맡아 더욱 풍성하고 깊이 있는 작품으로 탄생했다. 이 공연은 음성해설과 자막해설, 수어통역이 함께 존재하는 배리어 프리(Barrier-free)로 진행되었다. 누구나 수신기를 통해 음성해설을 들으며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고, 극 중 모든 대사는 수어 통역사들이 나와 수어로 통역해 주었으며, 무대 화면에는 대사의 자막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특히 문자에 감정과 상황을 넣는 이미지 작업이 포함되어 더욱 풍성한 상상력으로 무대를 즐길 수 있었다.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무장애 공연으로 진행되었기에 장애인의 문화 향유권이 확대되고, 인식개선에 긍정적 효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더불어 더 많은 관객과 함께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환경에 힘을 쓴 것이 긍정적으로 보였다. 천하제일탈공작소는 고전과 탈춤의 만남을 2017년부터 지속하고 있는 팀이다. 이들은 다양한 무대에서 수많은 작업을 해 왔기에 어느 정도의 정보는 알고 있었지만, ‘오셀로와 이아고’는 첫 관람이었고, 음악을 담당한 음악그룹 나무의 음악이 극에서 어떤 식으로 연출될지 매우 궁금했기에 기대를 갖고 관람하였다. 시작과 동시에 1980년대에 유행하던 질감의 전자음악 사운드가 무대를 감쌌다. 그 소리는 오래된 셰익스피어의 고전, 이 시대의 탈춤과 함께 어우러지며 강렬한 느낌을 내뿜었다. 신스(synth) 베이스의 전자 사운드에 맞추어 장구, 태평소가 더불어 연주했는데, 3+2를 활용한 소박의 전통 장단을 함께 연주함으로 리드미컬하고 한국적이며 현대적인 느낌을 주었다. 등장인물은 오셀로와 이아고, 데스데모나 세 명으로 이루어졌다. 극의 초입은 데스데모나가 오셀로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로 시작되었다. 앞뒤 내용을 모른 채 처음부터 이 극이 비극임을 알게 되어버려서일까, 극단적이고 신랄한 그 장면이 더욱 기묘하고 기괴하게 느껴졌다. 결말 부분이 지나간 후, 이탈리아 베니스의 장군 오셀로가 의원의 딸 데스데모나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시작됐다. 이 장면은 대사 하나 없이 두 남녀가 함께 오래도록 서로를 바라보다 결국 사랑하게 되는 것을 춤으로 표현했다. ‘스칠 듯 말 듯 서로를 스치는 단소 소리’라는 감정 자막이 나올 때는, 말 그대로 악기끼리 같은 음을 내는 유니즌(Unison)으로 연주하다, 각각 반음과 1도 간격의 선율 진행으로 부딪힘을 반복하며 만날 듯 만나지 않을 듯 유려한 연주로 서로 얽혀 들어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춤을 추던 데스데모나와 오셀로는 익살스러운 베이스 연주와 함께 장난치듯 춤을 추고, 결국 사랑을 이루어 냈다. 이 장면의 초반부는 음성해설 없이 무대를 관람했고, 후반부는 음성 해설을 통해 관람하며 차이를 느껴 보았다. 음성 해설이 있을 때는 어떤 동작으로 어떤 느낌을 표현하는지 모두 설명해 주기에 극을 이해하기에 수월했고, 해설 없이 춤을 추는 장면만 볼 때는 온전한 상상으로 춤을 해석할 수 있었다. 해설을 듣거나 듣지 않는 두 가지의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기에 더욱 흥미롭고 다양한 감정으로 무대를 즐길 수 있었으며, 음성 해설을 통해 무대를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는 관객도 공연을 즐길 수 있을 거로 생각하니 무대가 더욱 가치 있게 느껴졌다. 또 특별했던 건, 이 음성해설은 실제 탈꾼이 녹음한 해설로, 정보 전달만 하는 딱딱한 대사가 아닌 탈춤이 가진 맛깔스러운 재담과 추임새를 활용하여 전달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데스데모나와 오셀로와 사랑을 이루는 장면에서 나온 음성해설에서는, ‘사랑을 이룬 두 사람, 서로를 붙잡고 춤을 추어보는디!’ 하는 정겹고 구성진 말투가 사용되어 한국적인 매력이 돋보였으며, 더욱 흥미롭게 극을 감상할 수 있었다. 등장인물은 오셀로와 이아고, 데스데모나 세 명으로 이루어졌다. 극의 초입은 데스데모나가 오셀로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로 시작되었다. 앞뒤 내용을 모른 채 처음부터 이 극이 비극임을 알게 되어버려서일까, 극단적이고 신랄한 그 장면이 더욱 기묘하고 기괴하게 느껴졌다. 결말 부분이 지나간 후, 이탈리아 베니스의 장군 오셀로가 의원의 딸 데스데모나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시작됐다. 이 장면은 대사 하나 없이 두 남녀가 함께 오래도록 서로를 바라보다 결국 사랑하게 되는 것을 춤으로 표현했다. ‘스칠 듯 말 듯 서로를 스치는 단소 소리’라는 감정 자막이 나올 때는, 말 그대로 악기끼리 같은 음을 내는 유니즌(Unison)으로 연주하다, 각각 반음과 1도 간격의 선율 진행으로 부딪힘을 반복하며 만날 듯 만나지 않을 듯 유려한 연주로 서로 얽혀 들어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춤을 추던 데스데모나와 오셀로는 익살스러운 베이스 연주와 함께 장난치듯 춤을 추고, 결국 사랑을 이루어 냈다. 이 장면의 초반부는 음성해설 없이 무대를 관람했고, 후반부는 음성 해설을 통해 관람하며 차이를 느껴 보았다. 음성 해설이 있을 때는 어떤 동작으로 어떤 느낌을 표현하는지 모두 설명해 주기에 극을 이해하기에 수월했고, 해설 없이 춤을 추는 장면만 볼 때는 온전한 상상으로 춤을 해석할 수 있었다. 해설을 듣거나 듣지 않는 두 가지의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기에 더욱 흥미롭고 다양한 감정으로 무대를 즐길 수 있었으며, 음성 해설을 통해 무대를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는 관객도 공연을 즐길 수 있을 거로 생각하니 무대가 더욱 가치 있게 느껴졌다. 또 특별했던 건, 이 음성해설은 실제 탈꾼이 녹음한 해설로, 정보 전달만 하는 딱딱한 대사가 아닌 탈춤이 가진 맛깔스러운 재담과 추임새를 활용하여 전달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데스데모나와 오셀로와 사랑을 이루는 장면에서 나온 음성해설에서는, ‘사랑을 이룬 두 사람, 서로를 붙잡고 춤을 추어보는디!’ 하는 정겹고 구성진 말투가 사용되어 한국적인 매력이 돋보였으며, 더욱 흥미롭게 극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음악그룹 나무의 연주는 훌륭했다. 무엇보다 흥미롭고 와 닿았던 것은 모든 음악에 장단을 기본으로 가져가 온전히 전통에 기반을 둔 무대를 꾸려냈다는 것이다. 전자 음악 등 현대적인 사운드가 주를 이룰 때도, 장구가 아닌 드럼으로 연주할 때도 장단이 음악의 뼈대를 이루었고, 그에 맞추어 한국적인 선율이 연주됐다. 각 악기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감상 포인트 중 하나였다. 대금과 태평소의 화려한 혀치기 기법이나 빠른 패시지로 쪼개는 리듬꼴 연주, 피리의 아름답고 높고 낮은 음색의 변화 등을 통해 국악기의 음색과 특징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또 창작곡뿐 아닌 전통을 들어볼 기회도 많았는데, 장구와 대금, 피리로 연주한 서도대풍류는 시원시원하고 흥겨워 그 전통의 색에 푹 빠져들 수 있었다. 하지만 더불어 아쉬웠던 건, 서도대풍류가 흘러나올 때 자막으로 나온 글이 ‘우아하지만 답답하고 따분한 소리’였다는 것이다. 물론 기획의 의도였겠으나, 서도대풍류가 답답하고 따분하게 들리지 않았던 관객 입장으로선 그 자막의 설명과 들리는 음악에 괴리감이 느껴져 아쉬웠다. 오로지 자막에만 의존하여 무대를 상상해야 하는 관객이 그 자막을 보며 상상할 음악과 서도대풍류가 주는 감정이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음악을 느끼는 감각은 상대적이지만, 자막해설에 감정과 상황을 넣는 이미지 작업을 할 때는 지금보다 더욱 그 음악의 결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문구를 설정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연은 또한 ‘탈’을 통한 연출이 돋보였다. 오셀로는 처음 등장할 때 전쟁영웅으로 호전적인 면모를 돋보이기 위해 붉고 거친 탈을 착용했는데, 이아고의 계략에 넘어가 데스데모나를 의심하고 분노하며 광기 어린 하얀 탈로 바꾸어 착용했다. 이 장면의 음성 해설에서는 ‘마음을 숨기는 탈’을 쓴다고 전하고, 이아고는 ‘다들 겉과 속은 다른 거 아냐?’라며 이중성을 드러냈다. 탈을 통해 진실을 감추고 마음을 숨기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또 데스데모나는 오셀로를 만나고 탈에 빨간 립스틱으로 웃는 입을 그렸다가, 오셀로에게 죽임을 당한 후 그 입을 문지르고, 붉은색이 얼굴 전체에 번짐으로 죽음을 표현했다. 탈의 변화에 따라 감정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연출이 흥미로웠으며, 탈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색있는 무대라고 느꼈다. ‘오셀로와 이아고’는 천하제일탈공작소가 고전과 탈춤의 만남을 시도한 첫 번째 작품이다. 천하제일탈공작소의 목표는 보편적인 주제와 가치관을 담아낸 이야기를 가져오자는 것, 그리고 무대 예술과 조응하는 형태의 공연을 창작해 보자는 것이라고 한다. 그 두 가지 생각으로 고르게 된 것이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였고, ‘오셀로와 이아고’ 작품을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전통 탈춤을 이 시대와 함께 호흡할 수 있게끔 만들고 싶다는 목표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이 시대와 통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고전을 엮어 탈춤의 진면목을 보여주며 전통 기반의 창작 작품을 만들어 내겠다는 가치는 ‘오셀로와 이아고’에 그대로 묻어났다. 탈춤은 익명성이라는 특징으로 풍자의 요소를 지니는 게 특징이다. 이 무대는 탈을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하여 가장 한국적이면서 모두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를 연출해 냈다. 또 깔끔하고 직관적이며 한국적인 대사나 몸짓, 음악이 더해져 천하제일탈공작소의 색이 진하게 묻어나는 그들만의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진실을 감추고, 마음을 숨기지만 그만큼 수많은 것들을 담아낼 수 있는 ‘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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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대만, 풍성한 어우러짐 ‘화이부동’대만과 한국 전통 음악 연주자들이 모여 뜻깊고 아름다운 선율을 선보였다. 지난 11월 10일과 11일 양일간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국립국악원과 국립대만국악단의 교류 공연 ‘화이부동(和而不同)’이 펼쳐졌다. 공연의 첫날인 10일은 국립국악원 창작악단과 국립대만국악단의 합동 공연으로, 11일은 국립대만국악단의 단독 연주 무대로 꾸며졌다. 국립국악원과 국립대만국악단은 양국의 전통예술 발전을 위해 2018년 상호 교류 공연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2018년 대만과 2019년 한국에서 각각 초청공연을 진행한 바 있다. 지난 두 차례의 공연에서는 국립국악원이 대만의 음악을, 국립대만국악단이 한국의 음악을 연주하는 무대를 선보였다면, 올해는 두 단체가 하나의 관현악단이 되어 함께 무대에 올라 풍성한 음악을 선보였다. 추운 날씨였지만 예악당에는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로 북적였다. 대만 전통 음악은 익숙지 않았기에 과연 어떤 악기가, 어떤 소리를 낼지 큰 기대를 품고 관람하였다. 첫 곡은 최성환 작곡의 ‘아리랑 환상곡’이었다. ‘아리랑 환상곡’은 널리 연주되고 있는 대중적이고 유명한 곡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을 다양한 리듬과 박자로 변화 주어 환상곡 풍으로 작곡된 작품이다. ‘아리랑 환상곡’은 아주 여린 소리로 시작되어 부드럽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데, 이번 무대에서는 기존에 익숙하게 들어온 국악관현악 버전의 ‘아리랑 환상곡’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연한 사운드로 음악이 시작됐다. 작고 조심스러워 긴장되면서도 아름다운 관현악단의 연주가 평온하게 흘렀다. 대만 전통악기는 국악기보다 더 강한 베이스 음역과 울림이 특징적이었다. 그래서인지 각국의 악기가 함께 연주되니 더 풍성하고 다채로운 느낌이었다. 한국적이라거나 대중적이라기보다는, 신선하고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동양적 색채가 강했다. 또 음악 진행이 상당히 다이내믹했는데, 이는 지휘를 맡았던 국립대만국악단의 음악감독이자 지휘자인 치앙 칭포의 지휘를 통해 느껴볼 수 있었다. p(피아노)와 f(포르테) 등 악상의 구분이 명확하고 모든 악기군이 조화롭게 연주되며 자연스러움을 자아냈다. 상생과 화합을 가득 느껴볼 수 있는 아리랑이었다. 두 번째 곡은 공연 전부터 궁금증을 자아냈던 ‘강원도’. 관즈와 피리를 위한 이중 협주곡으로, 린신핀의 작품이었다. ‘관즈’는 대만 전통 관악기로, 피리에 기반을 두었지만 전승되는 과정에서 이름과 재질이 달라진 악기다. 피리 같기도, 태평소 같기도 한 이 악기에선 어떤 소리가 날지 궁금했는데, 피리는 나무와 같은 재질로 자연 친화적이고 따뜻한 소리라면, 관즈는 금관악기 소리에 조금 더 가까웠다. 약간 텁텁하고 우직하면서도 부드럽게 감싸주는 매력적인 음색이었다. 관즈를 연주한 추이저우순은 "피리는 노래하는 듯 편안한 느낌을 주는 반면 관즈는 강한 연주를 선보이는 데 적합하다.여기에 각국의 문화적 배경이 더해지니 두 악기가 다른 소리를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전했는데, 이처럼 관즈와 피리 음색은 상당히 다르면서도 조화로웠다. ‘강원도’는 강원도 민요 ‘한오백년’과 경기민요 ‘도라지’에서 유래된 창작곡이다. 1악장에서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이 무대를 감쌌다. 가야금을 비롯한 현악기들이 왈츠 느낌의 3박을 깔아주고, 관현악이 차분히 음악을 받쳐줄 때 피리와 관즈는 번갈아 가며 강원도 아리랑 선율을 연주했다. 그 선율과 관현악의 조화는 마치 꿈속에 있는 듯했다. 2악장 ‘도라지’는 관즈의 강한 솔로로 시작했는데, 색소폰의 재즈 솔로처럼 화려하고 멋스러웠다. 간드러지면서도 힘 있는 두 관악기의 서정적이면서도 정겨운 연주가 편안함을 선사해 주었다. 다음으로 연주된 곡은 계성원 작곡의 관악 중주곡 ‘바람의 향연’이었다. 대나무 관에 생기를 불어넣듯 바람을 불어넣어 오묘한 떨림을 만들어 내는 피리잽이들의 악기를 모아 그들만의 멋과 신명, 흥의 어우러짐을 만들었다는 이 곡은 한국의 피리, 생황, 태평소를 비롯하여 대만의 관악기와 함께 연주되었다. 악기들의 음색은 생각보다 더 잘 어우러졌고, 악기 군별로 그룹을 나누어 각 악기의 기량을 뽐내거나 강렬한 합주로 매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 장구와 대만 타악기의 리듬 꼴에 맞추어 관악기로 함께 리듬을 쪼개고, 늘리며 각 악기의 주법을 잘 표현하였다. 눈과 귀를 뗄 수 없던 이 무대에서는 마치 바람이 다양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불어오는 듯했다. 네 번째 무대는 최지혜 작곡의 해금과 얼후를 위한 협주곡 ‘이현’이었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두 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는 한국 전통 악기 해금과 대만 전통악기 얼후의 조화를 그린 곡이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다는 설정의 이 작품은 동양 음악에서 일반적으로 두루 쓰이는 5음 음계를 활용하여 마치 무릉도원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해금과 얼후는 음역대가 겹침에도 공명과 울림이 달라 사운드가 조화롭게 잘 어우러졌다. 얼후는 해금과 달리 손끝으로 연주하는 운지법을 사용하기에 끌어 올리거나 흘러내리는 표현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도드라져 해금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특징을 감상하는 재미가 더해졌다. 또 해금과 얼후는 공통으로 ‘활’을 이용하는 찰현악기인 만큼 활을 다양하게 활용한 연주를 선보였다. 두 악기가 하나의 악기처럼 활을 사용하다가 변화를 주고, 또다시 합쳐지는 부분은 각 악기의 음색을 맘껏 감상할 수 있어 특히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무대는 홍치엔후이 작곡의 ‘Vive les Percussions!’가 장식했다. 대만국립국악단이 한국공연을 위해 위촉한 곡으로 한국의 사물놀이와 대만의 전통 타악기가 어우러지며 다양한 박자와 리드미컬한 연주를 선보였다. 도입부부터 타악기의 강렬한 사운드로 압도당한 이 곡에서 특히 신선했던 것은 사물놀이 악기로 대만의 전통 음악 리듬을 연주하는 걸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보통 사물놀이 네 대의 악기로 연주할 땐 전통 장단을 연주하기 마련인데, 관현악 연주인 데다 타국의 악기와 함께하니 더 특별한 무대가 만들어졌다. 사물놀이와 대만 타악기는 ‘리듬’으로 얽히며 함께 어우러져 나갔는데, 끊임없이 변화하는 리듬과 다이내믹한 연주가 특히 인상적이었고 대만의 다양한 타악기 소리를 들을 수 있어 흥미로웠다. 이 곡의 첫 번째 부분은 4/4박자로 대만의 전통 사자 북 음악인 ‘징과 북’ 리듬 스타일이 주로 사용되었다. 익숙지 않은 리듬이었지만, 특수한 그 나라만의 문화가 잔뜩 녹여져 있던 리듬 꼴과 선율 진행을 통해 대만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고, 두 번째 부분에서 사용된 5/8박자는 2+3, 3+2가 번갈아 가며 사용되어 리듬의 다양한 변화구에 홀리는 듯했다. 관현악기는 타악이 주가 되는 만큼 함께 리듬을 다양하게 활용했는데, 헤미올라(2박으로 나뉘어 있던 박자를 3개로 쪼개서 쓰는 음악 기법)가 자주 사용되었고 리듬의 변화와 더불어 동양적이고 독특한 선율이 연주되었다. 3도 화음을 쌓아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며 신비로움을 나타내기도 하고, 변화하는 구간마다 느낌을 다르게 주어 지루할 틈이 없던 아름다운 선율과 풍부한 리듬은, 한국과 대만 전통 악기의 매력을 물씬 나타내며 관객들의 우렁찬 함성과 박수를 끌어냈다. 이 무대를 보는 내내, 그리고 본 후에도 계속해서 생각난 단어는 ‘화합’이었다.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대만 전통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없었을뿐더러 과연 우리 전통 음악과 잘 어우러질지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하지만 각국의 연주자들은 최고의 전통 음악 조합을 선사해 냈고, 그 음악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 같은 익숙한 하나의 장르처럼 느껴졌다. 김영운 국립국악원장은, 한국도, 그리고 대만도, 더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전통 음악에는 공통적인 과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전통적 요소의 특성을 살려 이 시대와 미래, 세계인이 공감할 좋은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오랜 시간 전해져 온 전통 음악이야말로 그 나라를 대표하는 살아있는 역사이다. 국립대만국악단과 함께 무대를 만듦으로 인해, 각 연주자는 각자가 경험해 온 음악을 공유하고 상대의 음악을 이해하며 각 나라의 음악에서 더 나아가 동북아권의 음악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모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국가 간 문화 예술 교류가 앞으로도 더 다양하게, 자주 이루어져 전통의 역사가 오래도록 깊게 남아 더욱 발전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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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유지숙, “서도소리는 나의 운명”알록달록한 색으로 갈아입고 있는 가을의 한복판,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유지숙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의 민속악단을 향한 마음, 소리 인생, 작업 방향과 염원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하게 나누어 보았다. 물들어 가는 가을의 풍경과 잘 어울리던 따뜻하고 유쾌한 그 이야기를 지금 만나보자. 정-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다시 한번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A. 감독으로 취임하자마자 바로 민속악단 정기연주회가 있었어요. "꽃신신고 훨훨”이라는 제목으로 삶과 끝에서 마주하는 평안이라는 주제의 공연을 준비하느라 바빴습니다. 또 그 후 지방공연, 기획공연, 상설공연 등의 모든 공연과 단의 살림을 살피느라 아주 바쁜 나날을 보냈어요. 정-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취임으로 인해 예술적으로든, 삶적으로든 변화된 부분이 있으신가요? A. 우선 감독직을 수행하다 보니 민속악단을 살펴야 할 일이 많아 외부 활동을 자제하게 되며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를 갖게 되었어요. 제자를 양성하는 일, 외부 개인 공연, 심사, 강의 등 여러 스케줄이 엉켜 처음엔 혼란스러웠어요. 하지만 이런 저런 일들을 정리하며, 오히려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모든 것을 다 떠안고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내려놓는 일이 자연스러워졌죠. 그리고 그런 일들은 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 이전 생활의 패턴과 달라진 것이 아쉽지는 않으세요? A. 아뇨. 생각을 해보니, 전 음악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끝도 없이 달려온 것 같아요. 소리를 하고, 새로운 걸 만들어 내거나, 공연하는 등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해내는 것이 늘 즐거웠어요. 그렇게 하는 일들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일은 점점 늘어났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체력적인 한계가 느껴지더군요. 그게 처음엔 속상하기도 하고 아쉬웠지만, 어느 순간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지금 이 시기에 내가 해야 할 일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죠. 저는 늘 제게 있어 삶과 행복은 소리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서 온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의무감과 사명감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제가 겪은 모든 삶과 경험을 다음 세대에게 나누어 주고, 소리의 길을 제시하며 안내, 독려해 주는 스승의 역할을 더욱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정- 개인적으로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을 어떤 방향으로 운영해 나갈 예정이신가요? 선생님께서 만들어 나가고 싶은, 그려내고 싶은 민속악단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요? A. 우리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은 각자의 기량이 굉장히 뛰어난 분들로 이루어진 단체입니다. 이분들이, 최고의 악단에서 개인의 기량을 최고로 뽐낼 수 있도록, 자부심을 갖고 음악을 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 주고 싶어요. 저도 민속악단에서 30여 년을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 내가 무언가를 해준다기보다는, 같이 고민하고, 같이 나누고, 같이 살피며 함께 동행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힘든 일이 오더라도 늘 편안할 수 있는 단체, 그리고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정- 사실 전 이 질문을 드리며 민속악단이 대중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면 좋을지 이야기해 주실 거로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는 단원들을 가장 먼저 마음 깊이 생각하시는 모습에 보이는 것만 생각했던 제가 조금 부끄러워집니다. 선생님의 민속악단을 향한 애정이 느껴지네요. 다음으로는 선생님께서 오랜 시간 해 오신 서도소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어요. 사실 ‘서도소리’ 하면 우리 갈 수 없는 지방의 민요이기에, 무언가 아득하고 애절한 느낌이 들다가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정겨움이 듭니다. ‘서도소리’하면 어떤 감정, 느낌이 드시나요? A. 그냥, 제 운명 같아요. 이런 표현이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너무 좋다. 눈물이 나도록 좋다는 표현밖에는 할 수가 없네요. 서도소리는 제 삶 그 자체에요. 정- 학부 시절, 서도풍류를 듣고 너무 좋아 연주하고 싶어 몇 없는 음원을 모으고, 악보를 직접 채보해 가며 공부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서도 음악은 남도나 경기제처럼 익숙하지 않고 공부하기 더 어려운 환경인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데요. 서도 소리의 길을 오래 걸어오신 선생님도 이런 부분에서 외로우셨으리라 감히 생각해 봅니다. 돌이켜 보았을 때 서도 소리를 하며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A. 기악의 경우 자료가 많지 않고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아 어려운 점이 아무래도 더 많았을 것 같네요. 서도소리는 황해도와 평안도의 노래인데, 여긴 그 지역이 아니고, 우리는 배운 대로, 익힌 대로 노래하고 전승해야 하므로 진짜 그 원형을 찾기 위해 더욱 고민해야 합니다. 소리의 경우 어려운 점은, 서도소리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소리가 일반적이지 않으며, 어렵다는 거예요. 특히 가장 어려운 게 ‘요성’입니다. 모든 국악의 기본 바탕은 ‘요성’인데, 서도소리의 요성은 잘게 떨면서도 깊어야 해요. 잘못 떨면 발발성 요성이 되고, 너무 깊이 들어가면 소리의 맛이 이상해지죠. 또 음을 곡선처럼 흘러내리는 특징이 있는데, 배우는 사람 입장에선 그게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걸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 특히 고민이 많이 되어요. 그런데 전 이렇게 생각해요. 구전심수라고 하죠. 배우는 사람이 선생님의 소리와 혼과 마음까지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그 방법으로 소리가 전승되고 있잖아요. 가장 원시적이지만 가장 정확한, 올곧은 교육, 그리고 마음이 있기에 이 소리가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정- 선생님께서는 제자 양성에도 꾸준히 힘을 쏟고 계시죠. 교육자로서 학생들이 어떤 소리꾼이 되었으면 하시나요? 또 무얼 가장 강조하시나요? A. 예전에는, 제자들이 많은 게 참 좋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서도소리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만큼 소리의 본연을 가지고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길인만큼, 진정한 소리꾼이 되기 위해 온 마음으로 노력하는 학생이 있다면, 내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아요. 가르칠 때 기술적으로는, 서도소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특징적인 떠는 요성, 흘러내리는 곡선의 맛, 시김새 등을 기본적으로 많이 가르치죠. 그리고 그 외에 제가 강조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음악을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안 돼요. 우리는 대중 앞에 서서 노래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인데, 거짓이 몸에 배어있다면, 그 음악이 과연 진실할 수 있을까요? 항상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음악을 대하고 삶을 대하길 바라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 선생님께서는 맥이 끊어졌던 토속민요를 발굴하여 다듬고, 전승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작업을 계속하고 계시는지, 또한 앞으로도 하실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A. 그럼요. 토속민요는 보물이에요. 토속민요 작업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기존에 모르던 소리를 들으면 참 신기하고, 좋고, 모르던 맛을 배우게 되어 너무나도 행복하죠. 토속민요는 같은 노래인데도 여러 형태로 나뉘어져 있는 경우가 있어요. 그중 가장 잘 부르신 분의 음악을 기준으로 하여 소리를 다듬고, 만들어 나가는 작업을 하죠.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이 정형화되어 사람들에게 불리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소리를 오래 하다 보니, 악보만 보아도 꺾거나 흘리는 구간이 어느 순간 바로 알아차려질 때가 있어요. 그걸 바탕으로 토속민요 작업을 했을 때 서도소리가 딱 만들어지면, 마치 죽어있는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어 꽃을 피운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정-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토속민요 작업은 어렵지만, 그만큼 참 가치 있고 귀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연주와 작곡을 통해 토속민요 작업을 늘 해 보고 싶었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의 길을 잘 알지 못해 어려웠던 경험이 있는데요, 이렇게 소리꾼들이 소리의 길과 결을 찾아내고, 음악가들이 힘을 모아 토속민요 발전을 도모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으로, 계획 중이신 개인 발표나 음반 계획이 따로 있으신가요? A. 네, 음반의 경우 이달 말에 발매될 예정입니다. 또 앞서 이야기했지만, 기존에 불리던 소리뿐 아닌 안 불리던 소리, 토속민요 작업을 계속 해 나갈 생각이에요. 이젠 제자들도 많이 이어받아서 해 주고 있어 참 기쁩니다. 그리고 무대에서 제 소리만 하기보다는, 자라나는 소리꾼들이 장을 펼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내년에는 ‘서도예인전’이라 하여 소리꾼들을 선발하고, 기량을 뽐낼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나갈 예정입니다. 정- 곧 있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연주회에 관해 이야기 해주세요. A. 이번에 있을 공연은 ‘생생풍류’라는 이름의 기획공연이에요. 100년이 지나도 한결같이 어렵고, 근본이 되는 민속악 ‘대풍류’, ‘시나위’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깊게 감상해 볼 수 있도록 무대를 기획해 보았습니다. 추가로 경기소리풍류, 서도소리풍류도 함께 연주하기에 다양한 우리의 민속음악을 들어볼 좋은 기회가 될 거로 생각합니다. 단원들이 아주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정- 선생님은 어떤 소리꾼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A. 늘 마음으로 염원해요. 소리를 참 잘하는 소리꾼이 되고 싶다고요. 사람들이 평가하는 제가 아닌, 저 자신이 평가하는 제가요. 내가 내 소리에 취하고, 자유자재로 소리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사실 그 생각도 해요. 내가 정말 소리를 잘하게 될 땐, 목이 안 나오겠구나. 그래도, 소리가 잘 안 나오더라도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소리꾼. 그런 소리꾼이 되고 싶어요. 서도소리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냐고 물었을 때 망설임 없이 대답하셨던 ‘운명’이라는 단어가 인터뷰 내내 마음을 휘감고 떠다녔다. 어쩜 이렇게 소리를 사랑하실 수 있을까. 계절을 맘껏 즐기고, 행복한 삶을 살며 가장 사랑하는 소리를 꾸준히 해 나가고 싶다는, 모든 일에 평안히 마음을 쏟고 싶다는 유지숙 선생님. 따뜻하게 채워진 그 마음과 열정은 앞으로도 우리 곁에 오래도록 아름다운 소리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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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 다시 피리를 마주하다: 박범훈 명인갑작스러운 찬 바람으로 계절이 바뀜을 실감하게 되던 11월의 어느 날, 곧 있을 ‘박범훈류 피리산조 연주회: 회향(回向)’ 연주회 준비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계신, 국악계의 원로 박범훈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를 만났다. 120명의 연주자와 함께 할 이번 공연부터, 피리산조, 배움과 가르침, 전통과 창작에 대한 가감 없는 이야기를 다양하게 들어보았다. Q.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만나 뵙고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A. 국악계에 남은 생을 기여하고자 노력하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작품도 열심히 쓰고, 지휘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요즘은 40여 년 전에 스승(지영희)의 가락을 바탕으로 만들었던 피리산조를 제자들과 함께 연주하며 전승, 보존하는 데에 힘쓰고 기여하고자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마 나에게 허락되는 데까지, 이렇게 계속 국악계에 보탬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일하며 지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선생님께선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석좌교수를 맡고 계시죠. 동국대 한국음악과는 2023년 서울캠퍼스에 개설되었고, 이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신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학과 운영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A. 예. 입학 정원은 15명이었지만 더 늘어날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제가 뭘 했다기보다는, 서울의 메이저 대학 안에 국악과를 설립해 주었다는 점에서 동국대 측에 참 고맙죠. 아직 설립한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학부 과정 외에도 대학원 석사, 박사, 석박 통합과정까지 모두 만들어져 있어 한국음악과의 앞날이 더욱 기대됩니다. 특히 문화재급 선생님들이 많이 도와주고 계세요. 직접 학생들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Q. 동국대 한국음악과는 불교음악과 맥을 같이 하며 포교를 위하여 설립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타 국악과와 비교했을 때 수업 과정 등에 차이가 있나요? A. 큰 차이라기보다는,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에서는 맞춤형 교육을 한다는 데에 분별력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공수업에서 학년별로 배워야 할 커리큘럼만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닌, 개개인 학생의 역량에 맞추어 가르칠 것을 정한다는 거죠. 선생님과 학생이 함께 상의하고, 흥미나 보완점 등을 찾아 그에 맞춘 전공 수업을 하는 겁니다. 또 가무악을 함께 가르치며 지휘, 무용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끔 합니다. 그러한 맞춤 수업이 이 시대의 전통음악을 하는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고, 그로 인해 국악계가 더욱 발전하는 큰 초석이 될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Q. 맞춤형 수업이라니, 개개인의 역량이 더욱 늘 수밖에 없는 좋은 수업이네요. 학생들의 미래가 함께 기대됩니다. 요즈음 준비 중이신 11월 25일 공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120명이 연주하는 피리의 향연이라는 부제목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이번 공연은 어떤 공연인가요? A.이번 공연은 박범훈류 피리산조를 연주하는 연주자들과 함께 무대에서 연주하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대학교수부터 연주자, 학생, 취미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주자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제게도 참 뜻깊은 공연이 될 것 같네요. 박범훈류 피리산조를 연주하는 문중들이 한데 마음을 모아 한 자리에서 연주하는 기회를 가졌다고 할 수 있겠죠. 떼 피리로 연주하는 겁니다. 프로그램 순서에도 신경을 많이 썼어요. 무대의 첫 막은 이 피리산조를 잉태한, 모태가 되는 경기시나위를 연주합니다. 특히 지영희 선생님의 첫 제자인 최경만 선생이 연주함으로 더욱 의미가 있죠. 그 외에도 제가 산조를 만들 때 많이 참고했던 지영희 선생님의 해금산조 연주도 있고, 박범훈류 피리산조에 관해 연주자들과 함께 공연 중 토크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Q. 공연 기획부터 함께함의 목적에 이르기까지 참 뜻깊은 무대가 아닐 수 없네요.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선생님께서 창시하신 박범훈류 피리산조는 지영희 경기시나위를 모체로 조와 다양한 전조 등을 활용하여 창시한 산조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영희 선생님의 경기시나위와는 차별을 둔 부분, 즉 작곡가, 창시자로서 선생님만의 특수한 주안점을 두고 만든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A. 산조를 만든다는 건 산조의 틀, 짜는 기법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거죠. 또 악기의 특징이 잘 드러나야 한다는 겁니다. 피리산조의 경우 피리로 불었을 때 특징이 드러나는 산조여야 합니다. 그 가락을 대금이 불어서 더 좋으면 과연 피리산조로써의 매력이 있을까요? 산조는 악기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연주자가 만들어야만 값어치가 있습니다. 전 산조를 만들며 피리의 특수 주법이나 특징, 그리고 독창성을 다르게 하기 위해 힘을 쏟았습니다. Q. 박범훈류 피리산조에는 경토리가 굉장히 많이 녹아있는 것이 특징이잖아요. 경토리를 산조에 녹여낼 때 어떤 식으로 작업을 하셨나요? A. 보통 산조에는 전라도의 남도제가 많이 들어가긴 합니다만, 지영희류 해금산조, 지영희제 경기시나위에는 경기제. 즉 경토리의 특징이 특히 강합니다. 경기 시나위에는 경토리와 계면조의 특징이 모두 녹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꺾는 음도 남도제와는 조금 다르고, 계면조라고 해도 너무 심각하거나 애절하지만도 않죠. 또 경토리와 계면조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피리의 특징으로 이야기하자면, 무속음악과의 관계도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무속음악에서 피리는 반주에 많이 쓰였습니다. 무녀가 노래할 때 조(key)가 때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 조에 맞추어 반주해야 하기에 관의 변화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기제에서 주법이 굉장히 많이 발전했어요. 목튀김, 혀치기 등 특수주법이 아주 다양해졌죠. 피리만의 특징이 생긴 겁니다. 저는 그런 경기제의 특징, 피리의 주법을 제 산조에 다양하게 적용했습니다. 그래서 박범훈류 피리산조를 들어보면 조성의 변화가 많고, 관을 올려잡고 내려 잡으며 주법이 많이 변화하는, 경토리가 도드라지죠. Q. 요즈음 많은 젊은 연주자들이 각자의 유파를 만들고 산조를 기본으로 삼아 음악 활동을 해 나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조를 어떻게 보시나요? 또 그들에게 해 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A. 젊은 연주자들이 산조에 관심을 두고 만들어 나가는 현상이 참 좋네요. 유파를 짜서 남기기 위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산조의 특징을 확실하게 담아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악기를 오랫동안 연주하고, 악기의 특징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게 중요하죠. 그 악기의 도사가 되어야 해요. 그리고 산조의 틀. 즉, 장단, 조성, 시김새 등의 조건을 확실하게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저 즉흥으로 짜서 연주하고 남기기엔 생명력이 없어요. 그렇게 꾸준히 연구하고, 연주하고, 기본적인 특징을 확실히 살린 후에 본인의 독창성이 입혀지면, 오래도록 남는, 인정받는 산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Q. 특히 선생님께선 수많은 창작곡을 오랜 세월 만들어 오신 작곡계의 원로시기에 더더욱 여쭙고 싶던 질문입니다. 전통이든 창작 음악이든, 창작하는 데 있어 어떤 것을 기본적으로 꼭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A. 창작이라는 것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게 아니에요. 유(有)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거지. 음악에 들어있는 게 하나도 없으면 뭐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건 소리로써 사람을 괴롭히는 거예요. 항상 작곡하는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게 있어요. ‘소리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라.’ 그러려면 인풋(input)이 정말 중요합니다. 공부도 하지 않고 좋은 곡이 나오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죠. 다양한 음악적 소양과 경험, 고민, 습득이 필요해요. 그렇게 내게 다양한 것들이 축적되면, 음악은 그때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예요. 내가 만들고자 하는 방향을 확실하게 잡고 음악을 만들고 나면, 결국 생명력을 가진 곡이 되어 오래도록 연주될 겁니다. Q. 마지막으로 질문드릴게요. 저도 그렇지만, 다양한 음악이 유입되고 수많은 장르가 뒤섞이며 어디서든 자유롭게 음악을 듣고 배울 수 있는 시대기에 더욱 이 시대의 전통을 하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과 생각이 듭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국악인들이 절대 놓치지 않아야 할 마음가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전통이든, 현대음악이든 간에, 예술을 전공한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에요. 미(美)를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저는 어느 자리에 있든 내 전공을, 음악을 놓쳐본 적이 없어요. 왜? 좋으니까요. 억지로 하는 사람들은 도중에 그만두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음악을 하며 어려운 일도, 힘든 일도 있겠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사람은 그 고비를 끝까지 넘습니다. 내가 좋아서 한다는 그 마음가짐, 예술에 대한 자긍심을 놓지 않고 전통을 해 나가길 바랍니다. 이 시대의 존경받을 원로로 통하는 박범훈 석좌교수가 전통 예술계에 오랜 시간 이바지하며 높은 평판을 이루어 온 데에는, 음악을, 창작을 전심으로 사랑해 온 꾸준한 세월이 있었다. 11월 25일 펼쳐질 그의 공연 제목은 ‘회향’. 긴 세월 쌓아온 음악을 돌아보며, 그 음악의 뿌리, 근원으로 돌아가 피리를 오롯이 마주한다는 의미다. 과거로부터 현재를 이어온, 그리고 미래를 이을 박범훈류 피리 산조가 들려 줄 우리 음악에 대한 강인함, 사랑, 그리고 굳건함이 벌써 귀에 울려 퍼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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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고도는 무엇인가요?”11월의 초입, 점점 깊어져 가는 가을의 주말, 금나래아트홀에서 ‘고고와 도도’ 공연이 펼쳐졌다. 부조리극의 대명사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2023년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사업 선정작으로, 국내외에서 다양한 작품 활동을 선보이며 예술단체로서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는 ‘상자루’(상자와 자루)의 신작이다. 발레, 음악극, 오페라, 총체극 등을 그만의 환상극으로 재탄생시키는 임선경 연출과 쉬운 언어로 여러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쓰는 조정일 작가가 함께 제작한 이 작품은, ‘새롭게 보고, 듣고, 느끼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주제로 우리의 삶과 그 이면의 모든 것을 다시금 조망해 볼 색다른 기회를 전해준다고 하여 더욱 기대를 모았다. 로비에는 ‘고고와 도도는 고도를 기다립니다.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나요?’라는 문구와 함께 각자가 기다리는 무언가를 적을 수 있게끔 포스트잇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관객들은 저마다 기다리는 것에 대해 소중하게 적어 내려갔고, 과연 고고와 도도가 기다리는 고도는 무엇일지, 궁금증을 안고 공연을 관람하였다. 무대 중앙엔 상자루가 연주할 악기들이 둥그렇게 배치되어 있었다. 장구와 아쟁, 거문고와 건반, 기타 등 공연에서 사용될 다양한 악기들이 푸른 조명을 받으며 관객들을 반겼다. 이윽고 시작된 무대.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영어로 된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왔다. 문장은 늘어나고 줄어드는 변화를 거듭하며 하나의 사운드가 되었고, 그 샘플링 음원을 토대로 장구의 장단이, 그리고 아쟁과 거문고의 빠른 패시지가 얹혀 연주되었다. 그리고 상자루의 매력이 특히 도드라지는 강렬한 주제 음악과 함께 두 명의 주연 배우가 등장했다. 중절모를 쓰고 정장을 입은 배우들은 각각 무대의 좌측과 우측에 서서 급박하게 뛰는 동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 명이 멈추면 한 명이 달리고, 그 한 명이 멈추면 또 다른 한 명이 달렸다.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달리던 그들은, 음악이 끝나자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고고와 도도였다. 고고와 도도는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는 ‘고도’를 함께 기다린다. 이전부터 그들은 쭉 고도를 기다려 왔다.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무얼 하지?” 두 사람은 재치 있고 유쾌하게 극을 끌어나갔다. 배고프다며 식사하자는 고고의 눈을 가리고, 도도는 당근을 주며 ‘당근을 곁들인 파스타’라든지 ‘당근을 곁들인’ 어떤 고급 음식을 먹여주는 양 행동했다. 해학적으로 표현된 장면이지만, 이 장면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착각과 희망을 넘겨볼 수 있었다. 분명 당근임이 분명한데, 당근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 당연히 당근이 아닐 거라 믿고 희망을 품는 것. 그들이 하염없이 기다리는 ‘고도’가 바로 당근 같은 존재임을 암시하는 장면이었고, 이는 앞으로의 극이 어떻게 흘러갈지 직관적으로 보여주었다. 고고와 도도는 고도를 기다렸다. 고고와 도도의 연기와 더불어 극과 잘 어울리는 상자루의 음악이 중간중간 장면과 걸맞게 흘러나왔다. 고도를 영원히 기다리겠다는 의미로 추측되는, ‘Forever’라는 대사가 끝나자마자 등장한 음악은 마치 꿈결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빛나는 음악은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고,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누군지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듯, 밝은 척 연기하며 현실에서 도피하지만, 실상은 불안에 휩싸여 있는 느낌. 밝음의 모순이었다. 고고는 하고 싶은 게 많다. 맛있는 걸 먹고 싶고, 좋은 집에 살며 편하게 자고도 싶다. 하지만 나무 밑에서 고도를 기다려야 하기에 그 모든 것은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 고고는 고도를 왜 기다려야 하는지 계속해서 의심을 품는다. 하지만 도도는 그렇지 않다. 의심을 품는 고고에게 화를 내기도, 그를 달래기도 하며 ‘고도를 기다려야지.’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들은 나무 앞에서 고도를 기다리는데, 이 나무가 고도가 오기로 한 나무 앞이 맞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저 맞을 거라 확신하며, 묵묵히 나무 앞을 함께 지켜낸다. 그러다 고고와 도도에게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도가 오늘이 아닌 내일 온다고 전하러 온 목소리다. 특이했던 건, 이 목소리는 밖에서 들린 것이 아닌, 고고와 도도의 목소리로 전한 말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고도가 올지 오지 않을지 결정하고 믿는 것은 고고와 도도 본인들이었고, 고도는 그들이 만들어 낸 존재이자 희망하는 그 무언가였다.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목소리를 들은 후, 고고와 도도의 마음을 대변하듯 음악이 흘러나왔다. 피치카토를 활용한 아쟁의 매력적인 선율이 루프스테이션을 통해 쌓이고, 점점 발전됐다. 고고와 도도의 아픔, 슬픔, 간절함과 그 모든 걸 덤덤하게 눌러내는 감정이 음악에 온전히 묻어났다. 50년 동안이나 함께 했다는 고고와 도도는, 고도를 기다리다 지쳐 ‘이제 그만 가자’고 반복해서 이야기하면서도 나무 밑을 떠나지 못한다. 특히 도도는 고도가 안 올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는 고고에게 ‘고도를 기다려야지.’하고 달래듯 말한다. 극을 보다 보니, 고고와 도도가 실은 같은 인물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고는 고도를 기다리는 걸 그만두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심’이고, 도도는 어떻게든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인내’, 그리고 ‘신념’이었던 것이다. 의심과 인내와 신념의 모순이 공존하는 한 사람은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상자루의 음악은 혼란스러운 고고와 도도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약음기를 끼고 연주하는 sordino 주법처럼, 거문고는 한 손으로는 현을 막고 한 손으로는 술대로 강하게 장단의 리듬을 연주하며 답답하면서도 강렬한 연주를 선보였다. 아쟁 또한 계면조 등 한국적 어법을 활용하면서도 그 표현에만 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대중적인 연주를 보여주었다. 고고가 ‘우리가 고도에게 꽁꽁 묶여있는 게 아닐까?’라고 한 장면에서는, 아쟁의 기묘하고 음산하면서도 강한 연주가 다양한 음정을 넘나들고 선이 농현이 되며 고음과 저음이 공존하는 음악을 연출해 냈다. 고도에게 묶여있는 고고와 도도를 그 어떤 것보다 잘 표현한, 그리고 다양하게 회오리치는 생각을 음악을 통해 정리해 준, 극과 가장 잘 어울리는 연주였다. 고도를 기다리며 점점 초조해지는 고고와 도도는 괴로움과 노여움이 폭발하여 앞에 서 있던 나무를 부러뜨린다. 수많은 풍선을 들고나와 행복하게 바라보다가 모두 짓밟아 터뜨리고, 소품을 내던지며 화를 분출한다. 이때 미니멀한 전자 사운드의 리프가 반복되고, 장구와 아쟁, 거문고가 저음 악기의 매력을 발산하며 강하게 이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고고와 도도가 화를 내는 동안, 연주자들은 한 명씩 각자 다른 연주자들의 악기 앞에 ‘거꾸로’ 앉아 ‘거꾸로’ 연주를 시작했다. 반대되고 모순되는 마음, 그리고 뒤집혀 버린 것 같은 세상을 거꾸로 연주하는 연출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특히 이 장면을 보며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2004)’이 떠올랐다. 반복적인 전자 사운드, 그리고 비디오 아트 예술가였던 백남준의 작품처럼 홀리듯 빨려 들어가는 현란한 영상 디자인이 특히 그 영화를 더욱 떠올리게 했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소중했던 추억을 붙잡으려 애쓰며 고군분투하던 두 주인공이 그려지며, 극을 통한 영화적 연출이 색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연기와 음악, 조명, 영상 모든 것이 하나로 합치된, 온전한 종합예술 무대였다. 그 난리를 치고도, 고고와 도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고도를 기다려야지’라는 말과 함께 다시 고도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통 ‘비나리’를 떠올리게 하는 음악과 함께 무대는 끝이 났다. 그들을 그렇게 기다리게 한 고도가 무엇인지 관객들은 알지 못한다. 심지어 이 작품의 원작인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 또한, 본인도 고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개개인의 사람이 다르듯, 개개인의 고도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무대를 보는 내내 내가 기다리고, 만나길 희망하는 고도가 무엇인지 계속해서 생각하며 의심했다는 것이다. 아마 많은 관객들도 고민하고, 생각했으리라. 놓고 싶으면서도 놓지 못하는 희망, 그리고 신념이라 불리는 무언가. 우리는 모두 우리의 고도를 기다리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극작가 욘 포세(Jon Fosse)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닌, 수수께끼 자체를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수수께끼 같은 이 길에서 어떤 고도를 어떻게 마주하며,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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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잇는 오늘의 제례악, 퓨전국악극 ‘러닝타임’ 리뷰"당신 인생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10월 27일 저녁, 김희수아트센터 SPACE1에서 퓨전국악극 '러닝타임'이 무대에 올랐다. 유튜브 구독자 약 57만 명을 보유한 클래시컬 크로스오버 그룹 '레이어스 클래식'의 피아니스트를 겸한 작곡가 강대명의 음악극으로 더욱 기대를 모은 이 작품은 공연이나 영화의 상영 길이를 뜻하는 ‘러닝타임’이라는 용어를 인생의 길이에 비유한 작품이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의문의 카운트다운’을 둘러싼 긴박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되며, 국악을 중심으로 현대 발레 무용수들의 군무와 연극적 요소들이 결합하였다. 본 공연은 수림문화재단의 창작지원 사업인 ‘수림아트랩 신작지원 2023’ 선정작으로, 기존 작업에서 탈피하거나 새로운 방향성을 찾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실험과 도전을 격려하기 위한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다. 공연 시간은 19시 30분이었지만, 특이하게도 하우스 오픈 시간이 늦어져 관객들은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19시 25분이 되자, 저 멀리서 피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되었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었기에 피리 소리는 공연장을 가득 메웠고, 맑고 아름다운 울림이 마음을 휘감았다. 슬픈 듯하면서도 자유로운 피리의 선율은 점점 가까워졌다. 피리 연주자는 피리를 불며 천천히 무대 입구로 걸어왔고, 그 뒤로 다섯 명의 무용수들이 걷는 건지 달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마치 슬로우 모션 같은 동작으로 따랐다. 이들은 모여있는 관객들을 뚫고 천천히 무대로 들어갔고, 관객들은 그들을 따라 입장했다. 무대에는 다양한 음높이의 종소리가 자유자재의 리듬, 음정으로 연주되고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그 소리가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대를 기획한 김서현 기획자는 2022 이태원 참사를 통해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죽음을 마주한 이후 하루하루 주어진 삶에 감사하고, 후회 없이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다짐하며 작품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공연은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이틀 앞두고 올려졌기에, 더욱 착잡하면서도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품고 무대를 바라보게 되었다. 무대에는 악사들이 둥그렇게 앉아있었고, 곧이어 강대명이 등장하여 피아노 앞에 앉아 ‘작은 제례악’을 연주함으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단조로 이루어진 감미로운 리프 선율이 반복되며 점점 발전되어 나갔다. 선율은 촘촘해지고, 리듬은 빨라지다가 결국 여유를 찾고 처음의 단순했던 선율만이 남아 조용히 공간을 울렸다. 그리고 본격적인 무대가 시작됐다. 이 국악극은 음악 반주와 무용수들의 춤, 그리고 몇몇 장면에서의 내레이션과 노래로 이루어졌을 뿐 따로 배우가 나와 연기를 하진 않았다. 하지만 프로그램 북을 통해 시놉시스를 알 수 있었기에,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가며 흘러가는 이야기를 상상해 볼 수 있었다. #1. 12시간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중, 인생의 남은 시간이 12시간이라는 걸 알게 되는 한 사람. 죽음을 맞이하게 될 시간을 알게 된다는 것은 무얼 의미할까?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혼란스러움은 음악에서 잘 드러났다. 반복적으로 연주된 피아노 선율의 이국적이며 몽환적인 음계는 마치 프랑스의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의 그노시엔느(Gnossiennes) 작품을 연상시킬 정도로 우울하면서도 오묘했다. 피아노 선율 위에 국악기들이 하나둘 자유롭게 쌓이기 시작하고, 무용수들은 로비 퍼포먼스 때처럼 뛰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닌 동작을 보여주며 죽음을 앞둔 혼란스러운 시간을 예술적으로 표현하였다. #2. 8시간 – 방랑자 무기력하고 공포가 커지는 일상, 정처 없이 방랑하며 희망과 기쁨이 희미해지고 절망으로 번지기 시작하는 시간. 피아노와 타악기는 장단을 통해 이러한 절망감을 잘 드러냈다. 일정한 3+2+2+2 소박으로 연주하다가도 어느 순간 리듬 하나를 튼다거나 첫 박을 바꾸어 버리는 등의 다양한 시도를 자유롭게 보여주며 혼란스럽고 두려운 감정을 표현하였다. 계속해서 바뀌는 리듬 형태는 통일성이 있다가도 사라졌고, 이는 마치 정리되지 않는 마음과는 다르게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 버리는 걸 나타내는 것 같았다. #3. 4시간 – 피난처 불안함과 두려움이 지나고 도착한 피난처에서 어두운 현실을 잊고 환상에 빠지며 달콤한 휴식을 취하게 되는 장면. 꿈결 같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찼던 이 장면에서는 사랑스러운 사극풍의 곡이 연주되었다. 피리와 해금, 소금이 마치 봄을 연상시키는 왈츠풍의 피아노 연주 위에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했고, 남녀 무용수가 나와 서로 사랑하며 춤을 추었다.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때, 따뜻하고 아름다운 음악과 춤은 역설적으로 슬픔을 자아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립고 아릿한 향수가 바로 이런 것일까?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 #4. 2시간 - 흘러간 시간으로 연결된 음악에서는 지난날을 추억하고 인생의 덧없는 허무함을 노래했다. ‘허무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는 가사로 불린 인생무상의 그 노래를 통해, 무대는 아름다우면서도 공허한 마음으로 가득 찼다. #5. 1시간 – 행복의 상대성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 마음이 급해지고 행동은 서두르게 된다. 마지막까지 행복을 찾아 나서는 장면, 급박한 피아노의 선율과 세 무용수의 힘 있는 몸짓이 합쳐지고, 그 위에 내레이션이 입혀졌다. 마치 잠언처럼 지혜로운 자와 우둔한 자를 비교하며 삶을 이야기하는 그 내레이션은 ‘행복한 날에는 행복하게 지내라.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인간은 알지 못한다.’며 마무리되었다. 삶은 결국 죽음을 향한 길을 걷는 일이고, 인생은 덧없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행복한 순간을 충분히 만끽하는 것이 바로 상대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특히 이 장면의 음악이 참 인상적이었다. 피아노의 반복적인 리프 선율에 얹어지는 국악기는, 대중적이면서도 악기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고유의 시김새나 표현을 다채롭게 연주함으로써 한국적인 이 시대의 창작 음악을 멋지게 연출해 냈다. 늘 죽음을, 슬픔을 생각하며 동시에 삶과 살아있는 기쁨을 누리는 것. 한없이 질러내는 악기들의 소리와 간절함이 담긴 구음이 이러한 삶을 온전히 대변해 냈다. #6. 30분 –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인생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때’에 대한 장면은 생황과 대금, 장구, 그리고 가야금의 아름다운 연주로 시작되었다. 전통 음악 ‘타령’ 선율을 연주하며 삶을 노래했는데, 해학적이면서도 유흥적이고 애상적인 내용으로 표상되는 타령이 삶의 때와 어우러지며 여유롭고 흥청대는 장단으로 새롭게 탄생한 연출이 흥미로웠다. 아련하면서도 덤덤한, 죽음의 ‘때’를 맞이하기 위한 여리면서도 단단한 마음이 음악으로 전해지며,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순간, 모든 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7. 5분 – 카운트다운 주인공은 절망을 희망으로, 불안을 평안으로 생각하며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있다. 피아노는 한 음을 반복해서 강하게 치고, 국악기는 다양한 주법을 활용한 연주로 두렵고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그 음악은 담대한 눈빛과 간절한 몸짓을 표현하는 무용수 다섯 명의 춤과 아름답게 어우러졌다. 음악, 무용, 그리고 인생을 담은 노래가 함께 무대를 끌어 나가며 처절하게 하나의 삶을 그려냈고,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있는 것은 이미 있었고, 있을 것도 이미 있었다.’는 노래의 마지막 가사와 함께, 무용수 네 명이 한 명을 높이 들어 땅에 내동댕이치며 끝이 났다. 죽음이 다가왔다. 인생의 마지막 시점에 펼쳐지는 파노라마,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 프롤로그에 나왔던 이 공연의 테마 음악이 시작되고, 지금까지 연주되었던 모든 음악이 짧게 축약되어 하나로 연주되었다. 인생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걸 지금까지 연주했던 곡을 압축하여 연주하는 것으로 신선하게 연출한 것이다. 순식간에 흘러가 버린 음악. 숨죽여 무대를 관람하던 관객들의 큰 박수로 무대는 막을 내렸다. 악기 연주와 노래, 내레이션, 무용이 하나 되어 악·가·무 일체 형태로 펼쳐진 이 무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제례악이었다고 한다. 제례악은 사람과 사람(조상)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음악이다. 세상을 먼저 살았던 이와 현재를 살고 있는 이, 나중을 살아갈 이가 모두 ‘죽음’과 ‘삶’으로 연결되었던 것 같은 이 공연에서는 인생에 대해,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할 수 있는 물음표와 느낌표를 던져 주었다. 젊음도, 청춘도 모두 허무일 뿐이지만 행복하고 또 행복한 날이 있기에 삶은 살아갈 가치가 충분하다. 후회 없이 빛날 마지막을 위하여 나아갈 우리의 러닝 타임은 아직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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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현신, 초망자 박강이 굿’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2023 프로젝트 컨템퍼러리 ‘문밖의 사람들 : 門外漢’ 공연을 개최했다. ‘문밖의 사람들 : 門外漢’은 전통예술의 경계를 오가며 활동하는 다양한 아티스트를 통해 새롭게 해석된 동시대 전통공연예술을 선보이는 공연이다. 그 첫 무대로 10월 20일(금) 저녁 7시 한국문화의집 KOUS에서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의 ‘현신, 초망자 박강이굿’이 열렸다. 창작탈춤패 지기금지는 전통탈춤의 미학양식을 기초로 오늘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과 시대상을 반영한 창작 탈춤 공연을 제작해 관객들과 소통하고 탈춤의 세계화를 꿈꾸는 창작탈춤 마당극 전문단체다. ‘현신, 초망자 박강이 굿’은 부산 기장 오구굿 중 초망자굿을 바탕으로 한 창작 탈춤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강주룡, 이화림과 제주 해녀 김옥련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잘 알려지지 않은 항일 여성 운동가들의 삶을 시와 노래, 춤, 그리고 그림으로써 환생시켜냈다. 무가, 무악, 무구, 탈 등을 활용해 신내림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줄 예정이라 하여 무대에서 보는 굿판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공연을 관람하였다. 무대의 우측에 악기 여러 대가 놓여있었고, 곧 7명의 악사가 나와 자리했다. 해금의 거칠고 덤덤한 경기제 선율과 함께, 부산의 섬을 배경으로 교복 입은 여학생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동래여중, 일본 조선학교, 일본여중 학생들로, 춤추는 걸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한자리에 모였다. 동래여중 학생이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고, 각자 춤을 선보인 후 박차정 선생의 동상 앞에서 함께 역사를 이야기하며 함께 공연을 보러 가는 것으로 본격적인 무대가 시작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학생들이 모여 일제강점기 시대를 이야기하고, 마음 아파하며 선조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내용의 흐름은 어떻게 보면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 위해 필요한 설정이었겠으나, 무언가 어색함이 묻어났다. 학생들이 모이게 된 경로와 소개, 춤을 추는 장면은 억지로 넣은 듯 자연스럽지 못해 아쉬웠다. 중간 중간 흘러나오는 대중음악과 배경 사진도 흐름이 끊겨 집중력을 분산시켰다. 무엇보다 이 세 명의 학생이 등장한 배경은 이후 나오는 굿판 후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아 무대의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연결했더라면 더욱 깔끔한 무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프로그램상 셋째 마당부터 각각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굿판 무대가 시작되었다. 첫째거리는 강주룡굿이었다. 오래된 테이프에서 나오는 듯한 지직거리는 해금 소리가 무대를 감싸며, 흑백의 바다 영상이 깔렸다. 바다는 파도와 소용돌이를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강주룡 선생을 연기한 무용수가 빨간 천을 들고 등장했고, 강주룡 선생에 대한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2,300명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해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다며 죽음을 각오하고 을밀대 지붕 위에 올랐다는 강주룡 선생. 해금의 러프한 선율과 타악 연주 위에 무용수는 감성적인 현대무용을 선보였다. 음악이 점점 고조되고, 태평소가 등장하면서부터 무용수는 빨간 천을 활용하여 더욱 힘 있는 몸짓으로 간절한 염원을 드러냈다. 강주룡 선생의 강인한 의지가 돋보이는 무대였다. 둘째거리는 제주 바다를 지키고 나라를 지킨 해녀, 김옥련 선생을 위한 김옥련굿이었다. 제주도에는 목숨을 걸고 억척같이 물질하는 해녀들이 있었다. 1932년 1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제주 해녀 항일투쟁이 그것이다. 수천 명의 제주 해녀들은 일제의 수탈과 압제에 맞서 3개월간 항쟁하였고, ‘제주 잠녀 항일운동’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중심에 김옥련이라는 해녀가 있었다. 김옥련 해녀를 표현한 무용수는 제주의 해녀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때 부르던 민요 ‘이어도사나’를 부르며 등장하였다. 악사들이 이어도사나 음악에 맞추어 추임새를 넣었고, 해금의 간드러지는 선율이 매력적으로 연주되었다. 그 후 제주 민요 ‘너영나영’에 이어 무용수는 바닷속을 헤엄치는 해녀를 형상화하는 춤을 추고, 비 내리는 바다를 배경으로 극단적이며 처절한 몸짓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감성적인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이때 특히 굿 반주 음악이 다양하게 활용되었는데,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조금의 오싹함을 자아내는 종소리와 쓰러지고도 계속 다시 일어나는 무용수의 모습이 가슴에 박히는 듯했다. 김옥련 해녀는, 일어나고 쓰러지고를 반복하다 우뚝 일어나 ‘이어도사나’를 부르며 당당히 퇴장했다. 셋째거리는 부녀자의 몸으로 투쟁의 일선행을 결행한 이화림 선생을 기리는 이화림굿이었다. 가족을 두고 어디 가냐며, 후회하지 않겠냐는 한 악사의 물음으로 시작한 이 무대는, ‘후퇴할 이유도 없고,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는 이화림 선생의 말로 열렸다. 강인한 눈빛을 가진 백호를 배경으로 반복적인 징 사운드와 함께 힘 있고 고상한 무용수의 춤이 시작됐다. 그의 춤은 마치 호랑이 같았고, 그 춤 위에는 실로 호랑이 같은 목소리의 중후한 남성 악사의 구음이 얹어졌다. 이 구음은 특히 평소에 무대에서 많이 듣지 못하던 느낌의 결이라 흥미로웠다. 시나위나 무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던 덤덤한 구음이라기보다는, 자극적이고 우는 듯 질러내고 소리치는 날것의 구음이었다. 조금의 물러섬도 없는, 뚝심 있고 강한 구음과 춤. 그들은 멋 부리지 않았고, 하나의 목적만을 가진 용맹하고 강인한 호랑이였다. 넷째거리 ‘박차정굿’은 광복군을 상징하는 행진곡과 함께 시작되었다. 네 명의 탈꾼이 천천히 한 사람을 들고 등장해 무대에 내려놓고, 피 묻은 흰 적삼을 둔 채 퇴장했다. 기묘했다. 무대에 덩그러니 놓인 사람은 죽은 자였다. 그를 위한 망자굿(죽은 사람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하는 굿)이 흘러나왔고, 곧이어 죽은 자는 관절을 꺾어가며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기괴하면서도 숨을 멈추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살아난 자는 박차정 선생의 탈을 쓰고 있었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무대를 보며 든 생각은, ‘무서울 정도로 민속적이다’는 것이었다. 적삼을 천천히 들어 입고 진짜 망자가 되살아나듯 춤을 추는 장면과 날것의 굿판 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조금의 두려움까지 들 정도로 강렬했고, ‘피가 말라붙은 적삼’을 선택하며 뜨겁게 최전선에서 싸운 박차정 선생을 나타낸 강한 표현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용수의 과잉된 감정 연기와 내레이션, 그리고 갑작스레 흘러나오는 신파 영화 스타일의 배경과 오케스트라 음악이 뜬금없게 느껴져 아쉬움을 자아냈다. 영화적 효과로 감성을 자극하려고 한 것 같았으나, 오히려 민속적인 색채감이 극단적으로 다르게 바뀌어 분위기가 붕 떠버린 느낌을 받았다. 네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위한 굿거리가 끝나고, 신받이꾼 다섯 명이 대나무를 들고 나와 신을 받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섯 신받이꾼의 몸짓은 간절하고 절도 있으며 또 한국적이어서, 그 아름다운 춤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후 김복동 할머니의 탈을 쓴 배우가 나와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소개하기 시작했다. 리플렛을 통해 이 전 춤이 신받이꾼들에게 점차 격렬한 집단 빙의가 일어나고, 여성 독립투사들을 청혼하는 장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무대만으로는 내용을 알기 어려워 갑작스러운 전개로 이어진 장면에 아쉬움이 남았다. 김복동 할머니는 한 악사와 말을 주고받으며 사과하지 않는 일본을 비판했다. 그의 몰입도 있는 연기에 관객들 모두 가슴 아파하고 참담한 마음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무대는 할머니의 노래와 함께 막을 내렸다. 이 공연은, 말 그대로 ‘예술’로 말하는 ‘역사’였다.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를 예술이 굿과 이야기를 통해 전해주었고, 관객들은 그를 통해 어떠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술의 힘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야기의 전개와 감정을 자극적으로 강요하는 듯한 표현, 과잉된 무대 배경 연출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여성 독립운동가들, 더 나아가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전통적인 색채로 기억하며, 기릴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공연은 훌륭했다. 예술가들의 더 많은 다양한 시도와 단단한 연출을 통해, 전통으로 역사를 표현할 힘이 펼쳐지기를, 그래서 전통과 예술의 힘이 이 나라에 오래 깃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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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지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쌀쌀한 가을의 공기가 몸을 휘감기 시작한 10월, 과천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내 이름은 사방지’ 공연이 펼쳐졌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중 최고의 문제작으로 꼽혀온 창극 ‘내 이름은 사방지’는 ‘양성구유 어지자지’라 모멸 받던 인간, 사내인 동시에 계집이었던 조선시대 실존 인물 사방지의 파란만장하고 처절했던 비극적 인생을 풀어낸 작품으로, 201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 산실 '올해의 신작'을 시작으로 2022∼2023년 방방곡곡 문화 공감 민간예술단체 우수프로그램 지원사업에 선정된 작품이다. 탄탄한 현장 연출 경력과 이론으로 한국 국악계를 이끌 재목으로 기대를 받았던 故주호종 연출가의 연출작으로, 이번 공연에서는 김영봉 연출자가 협력, 연출을 맡아 진행했다. 이 작품은 특히 국악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소리꾼들이 한데 모여 더욱 화제가 되었는데, 김수인이 사방지 역을, 유태평양이 화쟁선비 역을, 박애리가 남성적 아우라를 내뿜는 홍백가 역을, 전영랑이 관능적인 기생 매란 역을 맡아 각각의 에너지를 발산하였다. 또 소리꾼 한승석이 음악감독을 맡아 전체적인 음악과 작창을 담당했다. 그는 텍스트의 속뜻을 담되 말맛을 살리면서 새롭고 신선한 조합으로 작창 작업을 해 나가는 소리꾼이다. 평소 그의 소리에 관심이 많았기에 이번 무대의 음악적인 부분에 더욱 집중하며 감상해 볼 수 있었다. 푸르스름한 무대의 중앙에는 붉은 꽃 소품과 네모난 의자 세 개가, 우측엔 악사들의 국악기가 놓여있었다. 악사들이 먼저 나와 연주를 시작했다. 생황과 거문고의 높고 낮은 몽환적 조화 속에 단소의 바람 소리가 곁들여져 신비로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야기는 네 명의 소리꾼이 한 명씩 등장하여 사방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소개하는 대사로 시작되었다. 배경 음악으로 생황과 거문고가 사용된 조합이 특히 좋았는데, 중후하고 남성적이라 여겨지는 거문고와 고음의 날카롭고 아름다운 생황의 조화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물 사방지를 잘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무대는 ‘내 이름은 사방지. 나 사방지는 거기에 있었다고 이른다.’는 사방지의 대사로 열렸다. ‘있었다고 이른다.’라는 표현을 통해 사방지는 본인을 화자 겸 서술의 대상으로 삼다가도, 다른 소리꾼이 사방지와 이야기의 배경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사방지를 연기하며 표현하였다. 이렇게 사방지와 소리꾼들은 주인공과 화자를 넘나들며 함께 무대를 꾸려나갔다. 철학적이고 직관적인 시점의 변화는 빠른 전개를 끌어냈고, 강한 연극적 요소를 드러냈다. 이 공연의 또 다른 특징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일 수 있는 대사가 지속해서 나왔다는 것이다. 민망하고 부담스러울 수 있는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쓴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사방지를 향한 세상의 차별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 위해서였으리라. 관객들은 사방지가 들었던 말, 그가 겪는 조롱, 비난의 시선을 필터링 없이 들으며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불편함과 동시에 그가 겪는 마음을 더 들여다보게 되고, 나는 과연 사방지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사방지가 겪는 차별과 이 시대에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이 짝을 이루며 언짢지만 꼭 필요한 무언가의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불편한 대사들은, 어쩌면 이 공연의 주제를 생각할 때 필수 불가결한 연출이었다. 무대에는 소품이 많이 차 있지 않아 조금은 비어 보이기도 했지만, 중간중간 막이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동양적인 배경은 선과 글씨로 이루어져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이 작품의 주제와 잘 어울렸다. 특히 사방지가 본인을 투영해 내는 코끼리 고상이의 모습을 그려낸 러프한 선의 이미지가 참 아름다웠다. 사방지는 ‘기이한 물건/정상적이 아닌 다른 물질’을 뜻하는 이물(異物) 짐승이라 불린 병든 코끼리 고상이에게 본인을 투영한다. 사방지는 코끼리를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한다. 코끼리를 아껴주다가도 채찍으로 힘껏 때리기도 한다. 이는 본인을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하며 혼란스러워하는 사방지의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과연 이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방지를 만들어내고 있을까? 사방지처럼 몸이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물론이요, 생각과 행동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배척하고 힐난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개인이 아닌 단체, 다수의 힘, 그리고 권력이 차별을 조장한다. 사방지가 억울하게 잡혀 들어가 무릎 꿇고 판결받는 장면에서 사방지는 파란 조명으로, 세 명의 판결자는 붉은 조명으로 연출되었다. 그리고 이런 대사가 흘러나왔다. ‘이들은 사방지에게 죄를 묻고, 깔깔 웃었다 이른다.’ 사방지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오로지 보이는 것과 다수의 판단을 통해 사방지를 죄인으로 몰아가며, 소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저 웃어넘겼던 자들. 이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쉽게 변화하지 못하는 참담한 굴레를 반복하고 있다. 또 이 작품에서는 신념의 무서움을 경고한다. 여자라는 이유로 오랜 기간 차별을 겪어온 홍백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들이 왜 침을 뱉고 욕하는지 알아? 누군가를 그렇게 만들어야 본인들이 더 단단해지기 때문이야.” 그리고 모두를 평등하게 대한다는 종교에게서 버림받은 사방지에게 종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린 신념을 버릴 수 없어요.” 사방지를 차별하고 비난한 다수에게는 그들만의 강한 신념이 존재한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이전에, 깨뜨릴 수 없는 것. 가장 단단한 무언가다. 그것이 바로 차별이 횡행한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가장 큰 ‘신념’이다. 무대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 어떤 신념을 가져야 할까? 아쉬웠던 점은, 모호한 대사 설정과 늘어지던 극의 진행, 그리고 음악이다. 사방지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연출은 돋보였으나, 대놓고 주제를 강요하는 듯한 대사나 감성에 호소하는 듯한 몇몇 감정 과잉 장면은 아쉬웠다. 또 사방지가 겪은 일들을 늘어놓으며 흘러가는 스토리는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며 지루함을 자아내 자연스러운 기승전결을 담아내지 못했다. 음악은 대체로 자연스럽게 흘러갔지만, 특별할 것 없는 소리와 반주가 반복되었다. 소리꾼들이 대사를 하다가 판소리를 하는 부분은 90% 이상이 전통 계면조로 진행됐다. 악기 반주는 기존의 계면조 선법과 시김새를 활용한 특이점 없는 반주였고, 소리는 꺾고, 흘러내리고, 질러내는 세 가지의 창법만을 반복하며 그 안에 가사를 얹어낼 뿐이었다. 혹여 무대가 전환되며 다른 뉘앙스의 음악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무대가 끝날 때까지 거의 계면조로 이루어진 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 계면조는 단조로 이루어져 있고, 우는 듯한 느낌이 강하여 보통 슬픈 장면에 많이 활용되는데, 이 공연에서도 그러한 효과가 두드러지게 사용되어 웬만한 장면이 전부 슬프고 격한 감정으로만 가득 차 음악으로 감정을 강요받는 느낌을 받아 아쉬웠다. 또 거의 모든 소리와 연주가 비슷한 결로만 반복되어 무대의 흐름이 깨지고 지루함이 더해졌다. 더욱 다양한 창법, 음악적 효과와 뻔하지 않은 장르를 활용했다면 더 다채로운 무대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불편하다.’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느낀 감정이다. 자극적인 단어의 사용, 부담스러운 대사와 피하고 싶은 사회의 현실이 계속해서 마음을 두드려 착잡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됐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 사회의 차별을, 다수의 견고하고 단단한 신념을 떠올리며 내가 지금 해야 할 행동에 대해 떠올렸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한 건 바로 그게 아니었을까? 관객들로 하여금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하여 더 이상의 사방지를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게 하는 것. 그게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것. 사방지는 무대 끝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이름은 사방지. 나 사방지는,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 곁에, 바로 거기에 사방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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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만들어 나가는 곽동현, 서도소리 ‘지금’2023년 10월 6일 저녁 7시 한국문화의집 KOUS에서 ‘제4회 곽동현의 서도소리 지금 只今‘공연이 펼쳐졌다. 2019년을 시작으로 꾸준히 서도소리를 노래하는 소리꾼 곽동현의 네 번째 독창회로, ’노래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준다‘는 마음을 가지고 ‘지금’을 주제로 잡아 공연을 준비했다고 한다. 서도소리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 즉 서도지방에서 전승되는 민요·잡가 등 관서(關西) 지방의 소리를 가리키며, 그 가락은 흔히 수심가토리라고 하여 질러내고, 흘려 내리고 떨며 뻗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구슬프면서도 밝은 느낌을 동시에 내는 서도소리는 아련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이수자이자 국악아카펠라 그룹 ’토리스‘의 리더로 활동 중인 곽동현은 전통 서도소리를 꾸준히 노래할 뿐 아니라, 창작과 작곡 활동을 통해 민요를 국내외에 알리고 대중화하는 데에 힘 쏟고 있다. 아늑하고 작은 코우스 무대에는 방석과 함께 찻잔과 찻주전자가 함께 놓여있었다. 한국적인 소박함이 드러나는 이 무대의 첫 막은 서도송서 적벽부로 시작되었다. ‘적벽부’는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가 1082년 귀양을 가서 쓴 ‘적벽부’에서 유래한 송서로, 조조의 대군과 오나라의 대군이 일전을 겨룬 적벽대전을 회상하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한 곡이다. ‘적벽’이라 하면 판소리 ‘적벽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강하고 우직한 적벽가와 얼마나 다를지 그 느낌을 기대하며 감상하였다. ‘송서’는 책을 읽으며 내는 것을 소리로 표현한 것이다. 곽동현은 실제로 책을 읽고 넘기며 노래했고, 간드러지면서도 힘 있는 서도 소리를 표현하였다. 소리는 평조로 진행되며 본청을 중심으로 섬세한 시김새와 서도 표현이 잘 드러났다. 함께 한 가야금 반주는 노래를 그대로 따라가기보다는 가야금 독주로 또 다른 곡을 연주하는 듯하여 어딘가 노래와 다른 이질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소리가 쉬는 구간에 적절한 풍성함을 더해주었다. 조금은 슬픈 듯한 느낌과 함께 정갈하게 책을 읽어내는 덤덤한 소리에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무대는 ‘서도잡가 제전’이었다. ‘제전’은 북망산에 묻힌 임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며 인생의 무상함을 읊은 노래다. 인생무상을 노래한 전통 소리는 많지만 서도 소리로는 익숙지 않아, 어떻게 표현될지 그 감정선에 치중하여 감상해 보았다. 그리운 사람의 무덤에 찾아가 노래하는 소리여서인지, 첫 소절부터 울컥하는 울림이 있었다. 읊조리듯, 그리고 흐느끼듯 노래하는 이 곡은 남도 지방의 계면조처럼 진하게 내는 슬픔과는 또 다른, 덤덤한 슬픔을 자아냈다. 비슷한 음계를 계단처럼 오르내리며 떨고 흔들어 내는 서도소리만의 매력이 확실히 드러났다. 특이한 건 가사가 선율의 음절 수에 맞지 않을 때, 한 음에 빠른 속도로 가사를 붙여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레 말하고, 글을 읽는 느낌을 주어 듣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또한 사설을 읊조리는 듯하다. 중간 중간 크게 질러내며 감정을 토해내는 ‘제전’에서는 신선한 서도제만의 인생무상을 느껴볼 수 있었다. ‘서도잡가 관동팔경’은 목을 조금 눌러 내는 서도제의 지르는 소리가 특히 인상적인 곡이었다. 대체로 서도소리의 특징은 큰소리로 길게 뽑다가 갑자기 콧소리로 변해 조용히 떠는 소리 등의 장식음에 있다. ‘관동팔경’은 이런 서도소리의 특징이 잘 드러났는데, 시원하게 질러내다 간드러지는 속소리로 변화하는 구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유로운 장단과 함께 밝고 편안한 느낌으로 동해안 바닷가 경치를 바라보는 느낌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네 번째 무대 ‘서도잡가 배따라기’는 평안도 영유지방에서 뱃사람의 무사를 기원하는 굿에서 시작하여 변형, 계승되고 있는 곡이다. 뱃사람이 떠난 후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배의 난파와 가족들이 상봉하는 순간까지를 그려낸다. 경제 느낌이 나면서도 조금 더 우직했고, 이전 곡 ‘관동팔경’에서보다 조금 더 목을 조여 내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곡에 따라 음색을 다르게 표현하는 곽동현의 표현력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이 곡은 1도로 해결되지 않는 특이한 본청으로, 단조로 연주되어 서도 소리만의 독특함이 드러났다. 본청이 길게 끌어지는 중에 다른 음들이 가미되어 표현하는 기교가 많아 흔들림 없이 본청을 가져가는 게 중요했기에, 호흡을 적절히 유지하며 본청을 가져가는 게 쉽지 않아 보였지만, 곽동현은 큰 집중력을 발휘해 곡을 마무리했다. 반주의 음향적인 부분은 아쉬웠다. 피리와 해금의 고음 반주가 더해주는 후렴 구간은 음악에 더욱 집중하고 즐길 수 있었지만, 피리와 소리의 음 주파수가 겹쳐 서로 질러내며 반주가 아닌 음악으로 싸우는 느낌이 들어 양보하는 음향으로 서로 반주하고 체크했다면 더 좋은 무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서도소리 ‘축원경’은 집안이 잘되라고 덕담으로 축원하는 풍자적인 노래다. 축원굿의 형태를 띠고 사회를 맡았던 소리꾼 최윤영과 전병훈이 함께 나와 방울을 흔들고, 꽹과리와 바라를 연주하며 노래했다. 경제 선법과 함께 조금은 대중적인 느낌의 익숙한 선율로 함께 노는 듯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요즈음엔 굿판을 많이 찾아보기 어렵기에, 이렇게 서도소리나 굿 음악이 많이 무대화되어야 그 명맥을 꾸준히 이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특색있게 느껴진 부분은 꽹과리의 어울림이었다. 곽동현이 들고 친 꽹과리 외에도 장구 연주자가 꽹과리를 한 대 더 땅에 내려놓고 함께 치며 연주했는데, 두 꽹과리의 음색이 서로 달라 장2도 차이를 내며 오묘하고 동양적인 느낌을 물씬 내 더욱 굿의 느낌을 주었다. 전통적인 음색과 유쾌하고 흥취 있는 가사, 장단이 어우러져 즐거운 굿판을 연상시킨 이 무대는 특히 세 명 소리꾼의 음색이 하나 되는 게 돋보였다. 튀지 않고 어우러진 그들의 소리가 편안한 감상을 끌어냈다. 마지막 두 무대는 서도민요 ‘산염불’과 ‘잦은염불’, 그리고 ‘느리개타령’, ‘금드렁타령’, ‘어랑타령’, ‘궁초댕기’였다. 앞 전 무대에서는 계속 좌창(坐唱)으로 소리가 불리다가, 민요는 입창(立唱)으로 진행되었다. 강하고 여린 소리가 동시에 나는 서도민요의 특색 있는 매력이 잘 드러난 ‘산염불-잦은염불’을 지나 소리꾼 최윤영과 전병훈이 함께 부른 서도민요에서도 신명 나고 멋진 서도 소리를 감상할 수 있었다. 특히 이 무대에서는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료 소리꾼들이 함께 부르는 소리라 더욱 감동이 진했다. 그들은 전혀 경쟁자가 아니었고, 서로 힘과 응원을 주는, 민요를 사랑하는 소리꾼들이었다. 어떤 소리를 해야 할까? 곽동현은 이 독창회를 통해 오랜 기간 소리를 하며 깨달은 것들과 정신에 관해 이야기했다. 차근차근 성실히 본인이 가진 소리를 찾겠다며 포부를 전한 그는, 깊이 있는 예술을 생각하고 그려내는 소리꾼이었다. 전통이, 전통 소리가 이 시대에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며 행복하게 꾸준히 노래하는 그의 이번 무대는 그가 가진 많은 고민과 피땀 어린 노력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만의 견고하고 특색 있는 서도소리가 앞으로도 꾸준히, 그답게 표현되며 발전돼 가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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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람 작창 ‘노인과 바다’ 공력 돋보였다9월 20일, 소리꾼 이자람의 판소리 ‘노인과 바다’가 영등포아트홀 무대에 올랐다. 영등포아트홀 기획공연 '시리즈Q'의 ‘주제극장’ 일환으로 진행된 판소리 ‘노인과 바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 소설을 바탕으로 '사천가', '억척가', '이방인의 노래', '추물/살인' 등의 작품이다.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판소리 창작자이자 소리꾼인 이자람이 직접 작창한, 2019년 11월 두산아트센터 초연 이래 국내외 다양한 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난 작품이다. ‘추물/살인’으로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수상한 박지혜가 연출하고, 무대미술가 여신동이 시노그래퍼로 참여했으며, 이자람의 목소리와 고수 이준형의 소리북 장단으로 2시간의 무대가 풍성하게 채워졌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책으로 읽으며 느꼈던 감정은, ‘이건 책이 아니라 영화가 아닌가?’였다. 분명 글을 읽고 있는데 눈앞에는 노인, 그리고 노인과 사투를 벌이는 청새치 두 생명체의 긴장감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펼쳐졌다. 당대 최고의 문학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대작을 판소리로 들려줄 때, 과연 눈 앞에 펼쳐지던 영화 같은 장면을 또 경험할 수 있을 것인지가, 이번 공연을 앞둔 나의 가장 큰 궁금증이었다. 오래도록 많은 무대에서 작창이나 소리를 통해 다양한 무대를 만들어 온 이자람은 희곡이나 근현대 소설을 판소리의 다양한 소재와 형식으로 개발하는 작업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오랜 시간 그의 다양한 행보에 관심이 있던 터라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는 작품 ‘노인과 바다’의 무대가 더욱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작년 10월 관람했던 국립창극단의 ‘나무, 물고기, 달’ 공연에서는 이자람이 음악감독을 맡아 대중적인 무대화와 창극단원들이 주축이 된 신선한 무대를 만들어 보였다. 이번 무대 ‘노인과 바다’는 ‘나무, 물고기, 달’과 다르게 많은 대사나 화려한 무대 연출이 아닌 이자람의 소리로만 무대를 채워 나가기에 어떻게 흥미를 끌어낼지, 어떤 흡입력을 보여줄지에 초점을 맞추고 관람하였다. 외국 고전 소설을 한국에서 무대화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문화가 다른 탓에 공감대를 얻기 어렵고, 그렇기에 그런 부분을 관객들에게 쉽게 설명하는 동시에 감동과 이해를 동시에 주기란 어렵다. 이자람은 우리나라와 정반대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이 고전, ‘노인과 바다’를 그만의 특출난 상상력과 유쾌함, 관객과 편안하게 소통하며 무대를 장악하는 능력, 능수능란한 재간으로 재해석해 만들어 냈다. 노인이 회를 썰어 먹는 장면에서는 "회는 간장에 와사비를 풀어 먹어야 하는데 그곳엔 와사비가 없다”고 유쾌하게 너스레를 떨며 문화적 차이를 좁혀 나가고자 했고, 관객들에게 편안하게 말을 건네며 자진모리장단과 추임새를 가르쳐 주는 등 관객들이 극에 편하게 참여할 수 있게끔 유도했다. 덕분에 관객들은 무대를 보고 관람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탄성을 내뱉거나 자유롭게 추임새를 하고, 박수치고 웃기도 하며 편안하게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작창’은 새로운 이야기에 판소리를 싣는 작업이다. 판소리가 지닌 특성과 문법을 이해한 후, 이를 활용하여 해체하거나 조합하고, 장단을 선택하며 소리를 구성한다. 가사를 잘 전달하기 위해 음고나 운율을 살리고, 가사의 내용에 맞게 소리의 어법이나 특성을 활용해야 한다. 작창 작업은 다양한 음악적 지식 외에도 수많은 관점과 해석을 고려해야 하며, 작창가의 역량에 따라 작품이 천차만별이 될 수밖에 없다. 이자람은 우리나라 대표 작창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다양한 작품에서 작창을 해 왔기에 그 명성은 명실상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일 수 있지만, ‘노인과 바다’ 작품을 통해 그의 오랜 공력이 더욱 돋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건 그의 독창적인 아니리와 다양한 몸짓이었다. ‘아니리’란 판소리에서 음률이나 장단에 의하지 않고 일상적 어조의 말로 하는 부분을 가리킨다. 일상적 어투로 이루어져 있기에 작품을 바라보는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는 부분으로, 판소리에서의 아니리는 소리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자람은 특히 동화책을 읽어주듯 편안하게 대사를 전하는 능력이 탁월하여,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여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또 바지를 움켜잡고 올려 입는 흉내를 내거나 부채를 상대방의 손인 양 잡고 팔씨름하는 모습, 청새치와 힘겨루기를 하는 등의 다양한 몸짓은 유쾌함과 집중력을 끌어내는 무대 장악력이 특히 돋보였다. 음악적인 부분에서의 작창도 훌륭했다. 관객들에게 자진모리장단을 가르쳐 준 후 ‘역시 산티아고-’ 의 가사를 반복해서 부르는 노래에서는 정박, 엇박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말 그대로 장단을 가지고 노는 유쾌함을 선보였고, 사람들이 속닥속닥 수군대는 장면은 고음의 속소리로 노래하여 장면과 잘 어우러지게끔 만들어 냈다. 또 청새치를 잡는 장면은 5박인 엇모리장단을 활용하여 긴장감과 몰입감을 최대치로 표현하였다. 그렇게 장면에 맞는 장단과 소리의 톤, 강약과 다이나믹이 한데 어우러지며 매끄럽게 변화하는 가운데 극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무엇보다 이 무대는 소리꾼 이자람이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청새치와 긴 힘겨루기를 하며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 노인은 멍하니 앉아 주변을 둘러보며 말한다. ‘나는 어부다. 나는 지금 바다 위에 있다.’ 그는 힘들고 주저앉고 싶은 순간, 본인이 있는 공간과 자기 자신을 자각하며 정체성을 드러낸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을 깨닫는다. 바다 위에 있는 어부가 할 일은, 물고기를 잡는 것.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청새치와 싸워 결국 이겨낸다. 이자람은 ‘지금 이곳에서 내가 할 일’에 노인을 대입하여 이야기했다. ‘버티고 또 기다린다.’ ‘나는 왜 판소리를 할까?’ ‘기다리는 것은 결국 나타날까?’ 등의 대사는 이자람이 오랜 세월 소리꾼으로 살아오며 고민했던 물음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났다. 그는 우리가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노인과 본인을 빗대어 말해주었다. 인생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어려움과 고민, 힘든 마음이 올 때도, 우리는 묵묵히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하며 이 삶을 계속해서 즐겁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관객들의 환호성과 벅찬 감동은 무대가 끝나고도 지속되었다. 이야기의 흐름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무대의 빛과 조명, 이자람의 강인하고 단단한 소리, 소리와 가장 조화로운 합을 보여준 이준형의 장단, 노인과 청새치, 그리고 상어와의 사투를 통해 조명해 보는 삶에 대한 의지와 주제 의식까지. 과연 책을 읽었을 때처럼 눈앞에 푸른 바다가 펼쳐질 것인가 궁금했던 나는, 책과는 또 다른 색다른 영화 한 편을 경험한 느낌을 받았으며, 전통성과 창의성, 현대성이 가미된 창작 판소리 ‘노인과 바다’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창작 판소리의 발전, 이자람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었다. 존재하는 그 자리에서, 나만의 정체성으로 묵묵히 지금 할 일을 해내는 것. 바로 노인과 소리꾼 이자람처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끊임없이 집중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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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관현악단 관현악시리즈Ⅰ, ‘디스커버리’국립국악관현악단의 관현악시리즈Ⅰ ‘디스커버리’가 9월 1일(금)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 올랐다. 이번 무대는 2023-2024 국립극장 레퍼토리 시즌 개막작으로, 지휘자 여자경이 발견한 국악관현악의 다채로운 매력을 만날 수 있었다. ‘디스커버리’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 지휘자의 시선으로 국악관현악 명곡을 새롭게 탐미하는 공연이다. 그 주인공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마에스트라 여자경이 지휘봉을 잡았다. 여자경은 빈 라디오심포니오케스트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등 국내외 유수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 현재 대전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정확한 해석과 연주자와의 호흡, 관객과의 뛰어난 소통 능력으로 탁월한 무대를 선보여 왔다고 평가받는 여자경은 이번 공연의 전 곡을 선곡하여 지휘자가 선택하여 만들어 내는 무대를 꾸려냈다. 이미 클래식계에서 명성을 크게 얻고 있는 여자경 지휘자의 지휘를 국악관현악으로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새롭고 신선한 기회였다. 서양음악 지휘자가 국악관현악단과 만나는 건 이전부터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최근 클래식 음악계의 화제가 되는 여성 지휘자 여자경이 국악관현악단과 만나는 것은 이번 무대가 최초였다. 여자경은 똑같지 않게 들리는 국악기의 음을 맞추어 보는 작업에 치중하고, 본인만의 음악적 색깔을 담아 국악관현악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겠다는 포부로 이번 무대를 준비했다고 한다. 연주된 관현악곡은 총 5곡으로, 국악을 잘 모르는 사람도 듣기 편하고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방향으로 곡이 선정되었다. 이 무대를 통해 무엇보다 지휘자가 끌어내는 음악의 색채감에 집중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만들어 내는 관현악곡은 무엇보다 하나 되는 화합이 중요하다. 각자의 연주를 잘하는 것을 넘어서, 서로의 소리를 듣고 조화롭게 음악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러기에 음악의 소리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곡을 해석하고 지시하는 데 지휘자의 역량이 굉장히 중요한데, 여자경 지휘자는 따뜻하면서 냉철한 카리스마로 무대를 압도하며 특유의 섬세하고 분명한 지휘법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기에 그의 지휘가 국악기의 소리와 울림, 관현악곡과 만나 어떤 표현을 보여줄지 기대하며 공연을 관람하였다. 첫 번째 무대는 이해식 작곡의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이었다. 전통춤·민속음악·무속음악 등 한국인에게 익숙한 전통적 요소를 잘 활용하여 대중적으로 사랑 받아온 곡으로, 춤과 바람을 주제로 자유로운 바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역동적인 선율이 특징인 곡이다. 경쾌한 가야금의 소리가 시작할 때부터 여자경의 깔끔하고 확실한 큐(cue) 사인이 도드라졌다. 특히 타악기가 반복적인 장단의 리듬꼴을 연주하는 부분, 피리와 대금이 점점 커지는 농음을 연주하는 부분, 해금이 고음에서 짧은 리듬 형태를 연주하는 부분 등 악기의 특수한 특성이 드러나는 연주를 할 때 정확한 타이밍에 손과 몸동작을 다양하게 사용한 큐 사인은 음악을 확실하고 섬세하게 끌어 나갔다. 이 곡은 도드라지는 리듬꼴로 이루어진 빠른 선율을 악기들이 유니즌으로 연주하기에 자칫 무너질 수 있는 어려운 곡으로도 느껴졌는데, 리듬 하나, 음정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깔끔하고 완전한 지휘에 매료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색 있는 국악기의 듣기 쉽고 귀에 맴도는 선율의 경쾌한 반복과 여자경 지휘자의 섬세한 지휘는 국악을 잘 모르는 사람도 쉽고 편하게 음악에 푹 빠져 감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두 번째 무대는 최지혜 작곡의 첼로 협주곡 ‘미소’. 우리 선조들의 삶을 바꿔 준 의료 선교사이자 교육자 ‘로제타 셔우드 홀’에게 감명받아 그녀의 삶을 담아낸 작품으로, 서울시립교향악단 첼로 수석을 지내고, 현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주연선이 첼로 협연자로 나섰다. 이 음악은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눈앞에 그 당시 조선의 배경이 그려지는 듯 직관적이고 아름다운 곡이었다. 대금과 해금, 피리가 얽히며 만들어 내는 단조와 반음계 선율은 제물포의 습한 새벽과 어울렸고, 사극 영화를 보는 듯한 서정적인 관현악과 첼로 솔로의 선율은 한국적이며 감성적이었다. 무엇보다 이 곡은 국악기로 연주하는 전통 어법을 첼로로 구현해 내고자 한 부분이 많아 흥미로웠다. 첼로는 메나리토리의 하행 진행을 연주하거나, 부드럽게 꺾어 내리는 퇴성, 쳐서 내는 표현, 농현 등을 다양하게 구사했다.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비슷하다는 첼로의 중후하고 우는 듯한 소리로 한국적인 색채를 감상하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이 시대의 새로운 전통적인 시도라고 느꼈고, 작곡가가 얼마나 많이 고민하며 곡을 만들어 냈을지 그 섬세함에 감탄했다. 더 나아가 시김새 등 전통 어법을 구현하기 위해 소리를 연구하고 훌륭하게 연주해 낸 첼리스트 주연선 첼리스트에게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휘 또한 훌륭했다. 국악기와 다른 원료, 특징을 갖고 있기에 합주로 묻어나기 어려울 수 있는 서양악기와의 협연이었음에도 관현악이 첼로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적재적소에 등장하고 빠지며, 받쳐주는 역할을 부드럽고 깔끔한 지휘로 만들어 냈다. 첼로의 카덴자(독주) 이후 첼로의 하모닉스 연주와 관현악단의 연주가 자연스럽게 하나 될 때는 희생과 섬김의 삶을 마친 선교사의 미소가 눈앞에 그려졌고, 관객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2부 무대의 첫 곡은 김백찬 작곡가의 ‘Knock’로 시작했다. 2021년 <리컴포즈>에서 위촉 초연된 이 곡은 한국 전통음악의 5음 음계(도·레·미·솔·라)를 기반으로 다양한 변주를 시도해 전통음악만이 가진 고유의 호흡과 리듬감을 효과적으로 구현한 음악이다. 여자경 지휘자는 이 곡이 표제음악처럼 어떤 형상을 소리로 만들어진 곡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만큼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색다른 시도가 곡에 많이 묻어났는데, 단3도 화음 형태의 선율 진행이나 자연스러운 전조 진행 가운데 반복되는 선율, 베이스의 반음계 빠르고 느린 반음계 진행 위에 얹어지는 악기들의 깔끔한 투티(tutti)(다 같이 합주함),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리듬꼴 등 다채로운 변화에 귀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너무 다양한 반복 때문인지 음악을 따라가느라 급급해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주제 선율이나 장단이 귀에 남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으나, 음악의 셈여림, 다이내믹을 깔끔하게 지시하고 다양한 몸짓과 방법을 통해 음악을 부드럽게 연결하는 지휘를 포함하여 색다르고 다양한 음악적 시도가 흥미로웠다. 네 번째 무대는 2021년 초연된 성찬경 작곡가의 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금희악기점’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경영했던 유일한 악기점인 금희악기점의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피아노 협주곡으로, 피아노 협연은 작곡가·피아니스트·음악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오은철이 함께했다. 앞서 첼로가 국악관현악과 자연스럽게 묻어 어우러진 것에 비해 피아노의 음색은 국악 관현악과 잘 맞지 않고 튀는 것 같아 아쉬웠지만, 곡이 진행될수록 작곡가가 의도한 ‘더 새로운 소리’와 잘 어울리는 곡이라고 느꼈다. 새로운 접근과 음색을 통해 오늘날의 음악, 더 새로운 소리에 대한 고민의 결과를 나누고자 한 작곡가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 음악은 오묘하면서도 현대적인 사운드가 잔뜩 묻어났으며, 특히 국악기로는 많이 시도되지 않던 선율 진행이 흥미로웠다. 어딘가 신비한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금희악기점’은 꿈속을 그려낸 이미혜의 소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생각나기도 하고,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의 ‘rhapsody in blue’가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 전통 음악, 창작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겸손하게 말하고자 하는 작곡가의 음악적 가치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무대였다. 마지막 무대는 북한 작곡가 최성환이 아리랑을 테마로 만든 국악관현악 ‘아리랑 환상곡’. 국내뿐 아니라 미국·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자주 연주되는 곡으로, 여자경 지휘자가 서양 오케스트라와도 꽤 자주 연주했던 곡이라고 한다. 이번 무대에서는 국악기를 가지고 서양악기의 앙상블을 만드는 쪽으로 접근했다고 하는데, 곡 전체를 관통하는 아리랑의 선율이 ‘국악기’가 만들어 내는 음색에만 치중되지 않아 그 해석의 의도가 다분히 드러났다. 이는 특히 해금 연주에서 잘 보였다. 해금은 바이올린 등 서양 현악기보다 상대적으로 거친 소리가 나고, 활을 바꿀 때 조금 더 세게 마찰하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곡에서 해금 연주자들은 일부러 활을 동일하게 나누어 균등한 소리를 연주하고, 끝까지 활을 마찰시켜 바꾸며 부드러운 ‘선율’을 만들어 나가는 데 치중했다. 악기의 색이 튀지 않게 ‘아리랑’ 선율을 만들어 나간 관현악단의 연주는 특히 여자경 지휘자의 지시를 믿고 집중하며 더 큰 빛을 발했다. 깔끔하고 화합된 합주에 하나의 통일된 톤은 흡입력 강한 여자경 지휘자의 지휘와 더불어 국악 관현악의 밝은 미래를 보여주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전통 음악의 현대적인 재해석, 한국의 정신과 정체성을 담은 사운드, 전 세계의 관객에게 감동을 전하는 현대적인 레퍼토리를 담은 차별화된 무대를 선보여 나간다. 그들의 연주는 해가 갈수록 더욱더 빛이 난다. 월등한 연주 실력과 더불어 지휘자를, 함께 연주하는 연주자들을 믿고 음악에 집중하여 하나 된 소리의 감동을 보여준 그들의 이번 무대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보여줄 앞으로의 행보를 더욱 기대하게 해 주었다. 여자경 지휘자는 ‘청중이 없으면 무대도 없다’는 신념으로 낯선 길을 마다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여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 그가 이번에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함께 보여준 무대는, 국악에 익숙한 관객도, 익숙지 않은 관객도, 또한 서양 음악 지휘에 익숙하거나 익숙지 않은 관객도 모두 음악 아래 하나가 될 수 있는 순간을 선사해 주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이 ‘발견’한 지휘자 여자경이 ‘발견’한 국악관현악 무대, ‘디스커버리’에서는 무엇보다 ‘화합’과 ‘상생’이 도드라졌다. 음악이라는 주체 아래 서로 다른 장르 사람들의 해석이 합쳐지는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통해, 우리 국악 관현악은 앞으로 더욱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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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譚 夜行2 망혼일 축제’8월 17일(목)부터 19(토)까지, 서울남산국악당에서 관객이 직접 참여하여 이야기를 완성하는 신개념 극장 투어형 공연, 남산골 밤마실 ‘기담야행2 : 망혼일 축제’가 펼쳐졌다. 올해로 6회째를 맞이한 ‘남산골 밤마실’은 신라 시대 귀신들을 무사히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지냈던 ‘망혼일 축제’를 모티브로 한 관객 참여형 공연으로,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망혼일’을 잘치러야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공덕이 돌아가는 것이라 믿었던 옛 전통을 재해석하여 현대적으로 선보인 공연이다. 이 공연의 대본을 쓴 정은영 작가는, 최근 몇 년 동안 좋아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한 것이 이 대본을 쓰게 된 계기라고 말했다. 이렇듯 누군가를 놓고 떠나는 자의 망설임과 아쉬움 못지않게 누군가를 잃어본 자들이 슬픔은 이 땅 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잠깐의 소나기가 내렸지만, 공연 시작 직전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맑아진 날씨 덕에 안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 관객들은 남산국악당 안쪽 마당에 놓인 캠핑 의자에 하나둘 착석하기 시작했다. 홍보 글이나 리플렛을 통해서는 따로 타겟 층이 확실히 인식되지 않아 몰랐는데, 관객의 절반 이상은 어린이들이었다. 아마 어른 대상의 공연으로 알고 온 관객들은 조금 당황했을 것도 같았다. 공연 시작 전 티켓 배부처에서는 삼색실을 단 사람 모양을 한 ‘넋종이’와 팔찌를 나눠주었다. 팔찌는 빨강, 노랑, 파랑 총 세 가지로 인원수를 나누어 분배해 주었고, ‘넋종이’에는 사랑했던 망자의 이름을 추억하며 쓰라고 하여 관객들은 각자 그리운 이름을 정성스레 종이에 새겨 넣으며 공연의 시작을 기다렸다. 저 멀리서부터 상기된 목소리로 배우들이 인사하며 뛰어나왔다. 이들은 일 년에 딱 하루, 저승의 문이 열리고 구천을 떠도는 혼령들이 이승으로 쏟아지는 날, 귀신들을 무사히 극락으로 보내주는 일을 하는 '삼도천 엔터테인먼트'를 맡은 배우들이었다. 관객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고 반갑게 인사하는 이들 뒤로 ‘연희점(店)추리’ 연희예술 창작팀이 사자탈을 들고, 음악과 함께 걸어 나왔다. 북청사자놀음의 반주로 사용되는 퉁소 연주와 함께 등장한 이들은 모두 신묘하고 유쾌한 귀신 분장을 한 채로 관객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신명나는 음악과 함께 마당놀이 형태로 유쾌한 이야기를 나눈 후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 공연은 관객이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는 공연으로, 시작부터 다 함께 줄을 지어 남산국악당 건물 안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계단에는 드라이아이스가 깔려 있고, 붉고 푸른 조명과 종이로 된 소품들이 사방에 걸려있어 어딘가 오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처음으로 간 곳은 야외 마당이었는데, 이곳에 각자 받은 사람 모양의 종이를 긴 줄에 삼색 실을 이용하여 달았다.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없지만 산 사람들의 그리움이 간절히 담긴 그 이름들은 모두 같은 하늘을 보고 매달려 있었고, 관객들은 함께 서 망자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한옥 마당의 작은 공간, 습한 여름 밤공기와 함께 그 자리에서 그리운 자들을 생각하는 시간. 대금과 징, 장구가 시나위를 반주하는 가운데 누군지 모르는 옆 관객들과 함께, 누군지도 모를 망자들의 이름을 한 공간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울림이 있었다. 망자들의 이름을 한 곳에 매단 후 빨강, 노랑, 파랑 팀을 나누어 이동해 간 본 무대의 문은굳게 닫혀있었다. 지난해 한번 망혼일을 넘겨 염라대왕이 화가 나 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 이때 붉은 조명과 긴장되는 음향을 활용하고, 굿에 사용하는 방울을 흔들며 대취타 반주가 깔려 어딘가 압도당하는 느낌을 주었다. 관객들은 그 분위기에 푹 빠져 있었고, 삼도천 엔터테인먼트 직원을 연기한 배우들은 그들의 노여움을 풀어주기 위해 혼령들이 좋아하는 춤과 노래를 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동시에 산자의 불행을 막는 축제를 함께 준비하자며관객들을 팀별로 나누어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다 함께 남산국악당 건물의 계단을 내려오며 도착한 곳은 분장실, 연습실이었다. 공연을 보러 왔는데 연습실까지 오게 되다니. 처음으로 겪는 형태의 공연이었다. 팀별로 나뉘어 연습실에 들어가니 연희꾼이 아기동자 분장을 하고 관객들을 맞았다. 붉은 팔찌를 두른 팀원들은 연습실에 놓인 소고를 들고 아기동자 연희꾼에게 간단한 소고춤을 배웠다. 단순한 동작이지만 장구 반주에 맞추어 소고를 치며 전통 음악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관객들은 즐겁게 소고를 쳤고, 그 후 무대 뒤편으로 이동했다. 무대가 열리기 전, 무대 뒤편에 모두 앉아 무대가 열리길 기다렸는데, 원래 관객석에서만 무대를 바라볼 수 있는 관객의 역할이 무대 뒤와 무대 위를 경험해 직접 공연하는 역할로 바뀌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무대가 열리고, 관객석 의자에는 넋종이들이 붙어있었다. 혼령들이 무대를 보러 온 컨셉으로 흥미롭고 재치 있는 연출이었다. 혼령들을 위한 공연으로 관객들은 세 팀으로 나뉘어 연습실에서 각각 배워 온 공연을 선보였다. 소고춤과 더불어 사자 탈춤, 한삼을 끼고 추는 춤까지. 관객들과 배우들이 함께 혼령들을 위한 무대를 마치고, 성주풀이, 씻김굿 반주와 함께 줄에 매단 넋종이를 한데 모아 다 함께 혼령들이 가는 길을 배웅하며, 다 같이 앞마당으로 나와 인사하며 공연은 끝이 났다. ‘기담야행’은 한옥 형태의 공연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민속적인 정취를 몸으로 느끼고, 무대와 무대 뒤를 경험하며 ‘공간’이 주는 색다른 경험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과, 눈앞에서 배우들의 연주와 연기를 생생하게 경험하고 직접 공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공연과는 확연히 구별되어 매우 흥미로웠다. 하지만 아쉬웠던 것은, 타깃(target) 설정이 모호했다는 점이다.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로 인해 어른들이 마음껏 즐기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반면, 망자를 떠올리고 죽음을 생각할 수 있는 진지한 연출은 아이들이 받아들이기에는 급작스러운 분위기의 변화로 느껴졌을 수 있다. 다양한 걸 보여주고 체험하게 하고자 한 것은 좋았으나, 그만큼 공연이 추구하는 전체적인 관객 연령대가 통일되지 않은 느낌이었기에 정확한 타깃을 설정하고 그에 맞춘 기획이 이루어졌다면 더 확실하고 특색있는 무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던 관객들은, 그리운 이름, 그리운 얼굴들이 가는 길을 배웅해 주며 많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망자를 떠올리고, 추억하며 만나는 시간 가운데 뜨거움과 서늘함이 공존하는 그 여름밤 ‘기담여행’은 모두에게 따뜻하고 그리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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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 울려 퍼지는 실험적 사운드 ‘광광 굉굉’8월 15일 세종 컨템퍼러리 시즌 ‘Sync Next - 싱크 넥스트’의 ‘광광, 굉굉’ 공연이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펼쳐졌다. ‘Sync Next - 싱크 넥스트’는 매년 여름 세종문화회관에서만 만날 수 있는 예술 무대다. 무용, 연극, 오페라, 뮤지컬, 국악, 미디어아트 등을 통해 시대를 선도해 온 아티스트들의 실험성을 엿볼 수 있었다. 첫 해에 이어 올해는 일렉트로니카, 인디, R&B, 트로트, 락 등 다채로운 음악 장르와 스트릿댄스, 마임, 설치미술까지 대중성과 다양성이 더욱 확장된 무대로, 7월부터 시작되었으며 9월 10일 막을 내리게 된다. 예술은 세상에 그어져 있는 무수한 경계들을 넘나들고 때로 그사이의 벽을 허무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가치로 기획된 이 무대는 독보적인 매력과 남다른 관점으로 자신만의 새로움을 찾고자 하는 많은 아티스트들이 참여하여 색다른 무대를 선보인다. 광복절인 8월 15일 무대에 오른 공연은 ‘성시영x이일우x황민왕-광광,굉굉’으로, 민중의 목소리가 모이는 역사적 공간인 광화문 ‘광장’이라는 공간에 흐르는 과거와 현재를 빛과 소리를 통한 실험적 도전으로 나타내고자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한 모든 곡이 초연되었다. 예술감독인 서울시국악관현악단 피리 연주자 성시영을 비롯하여 5인조 국악 밴드 잠비나이의 이일우와 중요무형문화재 남해안별신굿 이수자인 황민왕이 함께 무대를 기획하였고,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김지현(생황)·윤지현(가야금), 미디어 아티스트 윤제호가 협업하여 더욱 다채로운 색을 내고자 하였다. 성시영과 이일우, 황민왕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동기들이며, 이들은 모두 경계와 장르를 넘어서며 새로운 시도를 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연주자들로 오랜 기간 국악계에서 각자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기에 세 연주자가 모여 만들어 낸 이번 단독 공연이 더욱 기대되었다. 공연 시작 전, 세종문화화관 S씨어터에는 이 무대가 어떤 소리로 채워질지 모르는 고요한 백색소음만이 감돌고 있었다. 연주자들이 자리하고, 첫 무대가 시작되었다. 곡목은 ‘목소리’. 스크린에 뜬 해설에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라는 문장이 있었다.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이 다 함께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는 건가 싶을 정도로 큰 소리의 태평소 세 대가 내는 고음이 귀를 찔렀다. 실제로 관객석의 관객들은 모두 움찔 놀랐고, 태평소의 어지러운 고음은 무질서하게 서로 섞여 들었다. 금관 악기의 찌르듯 쏘는 소리가 온몸의 세포를 쭈뼛쭈뼛 서게 하는 듯 하는 그 느낌 그대로 ‘광장’을 떠올렸다. 공동체 모임에 쓰이는 열린 공간이라는 의미의 광장에서는 정치, 사회, 환경, 개인사를 비롯한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모두 받아내고, 서로 다른 의견들이 부딪치거나 하나 된다. 이 무대에서는 억울함과 즐거움, 흥과 한 등 모든 감정을 드러내는 광장의 이미지를 국악기 중 가장 존재가 잘 드러나는 태평소로 선택하여 연주했다. 사람이 많이 드나들고 늘 시끌벅적한 광장의 이미지를 태평소로 연주한 것은 언뜻 직관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질서하기도 했다. 그런 무질서함에서 광장의 질서를 지켜낸 건 가야금과 장구였다. 태평소 세 대가 서로 다른 고음을 불어낼 때, 장구는 기본 장단을 끝까지 지켜 나갔고, 가야금도 그 장단 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반복적인 리듬 형태를 연주했다. 그 균형감 있는 연주는 태평소와 함께 연주되며 무질서와 질서가 한데 어우러졌다. 두 번째 무대였던 ‘숨쉬다’는 피리가 조용히 연주하며 시작했는데, 마치 숨을 헐떡이는 듯한 소리의 반복적인 선율이 상·하행으로 반복되었다. 이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일우는 "화아아아아아 하고 불어달라”거나, "목소리를 흐느끼듯이, 숨을 쉬듯이” 피리를 불어달라는 추상적 요구를 했다고 하는데, 아마 이 부분도 그런 의성어와 의태어가 다양하게 쓰인 구간이 아닐까 짐작한다. 제목 ‘숨쉬다’가 그대로 반영된 숨 쉬듯 불어내는 피리 소리를 듣다 보니 그 호흡을 따라 함께 숨을 쉬게 되며 음악에 빠져들었다. 이때 조명은 3D 형태로 마치 다른 공간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어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해 냈고, 조용히 피리의 반복되는 리프가 연주되다가 갑자기 북, 태평소 두 대가 동시에 아주 큰 소리로 한데 매우 센 연주를 시작했다. 하이든의 ‘놀람 교향곡’을 능가하는 강약의 극단적 변화는 공연 내내 계속되어 잠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광장과 숨을 쉬는 행위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이 음악은 어떤 걸 표현하는 건지 생각하며 공연을 관람하다가, 어느 순간 생각을 그만두었다. 이 무대를 표제음악(음악 외적인 이야기를 음악적으로 묘사하는 예술 음악의 한 종류)이라고 정의 내리기엔 자유롭고, 즉흥적인 면이 컸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걸 멈추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음악에만 집중하자 피리가 내는 작은 숨소리부터 째지는 태평소의 고음까지 자연스럽게 감상하며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후에도 광장을 상징하는 ‘소음들’, ‘발자취’, ‘살아간다’ 등 광장을 표현하는 제목의 다양한 곡이 연주되었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인 무대는 ‘소음들’이었다. 광장 한구석의 조용한 소음과 목소리를 나타냈다는 이 곡에서는 여린 소리로 시작한 피리 소리가 점점 진성이 되고, 피리는 세 대가 되어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피리 세 대가 얽혀 연주하는 중심에는 질서 있는 장구 장단이 자리 잡았고, 이일우가 연주한 모듈러 신디사이저에서 나오는 고음 주파수와 일렉기타가 무대를 감쌌다. 그 위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샘플링된 사운드로 흘러나왔으며, 음향이 점점 커지고 황민왕의 구음이 진계면 형태로 불려 무언가의 한을 위로하는 느낌을 받았다. 또 고음과 소음으로 가득 찬 이 곡에서 베이스기타는 서정적인 라인을 연주하며 어떠한 ‘감성’을 나타내는 듯했다. 슬픔에 가득 찬 소수자의 간절한 외침은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이 공연에서는 성시영과 이일우, 황민왕의 다채롭고 자유로운 시도를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옛날 TV 소리 같은 이펙트의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거나 다양한 단어를 나열하기도 하고, 모듈러 신스를 활용하여 사운드를 만들어 내고 비틀고 뒤집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피리 소리를 녹음하여 쌓아 하나의 코드를 패드 형태로 만들어 깔아놓고 그 위에서 악기들이 연주한 아이디어는 훌륭했다. 전체적으로 피리와 태평소, 신디사이저 등 전자사운드로 만들어 내는 이들의 음악은 현대적이고 실험적이었지만, ‘국악 즉흥음악’이라는 틀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했다는 개인적인 아쉬움도 있었다. 루프스테이션 등을 활용하여 소리를 쌓아가는 과정은 이미 너무 많은 공연에서 선보인 형태이기에 어떤 식으로 쌓아 나갈지 음악적으로 예상이 가 조금은 진부했고, 계속해서 태평소나 타악, 전자 사운드의 비슷한 형태가 반복적으로 나와 어느 순간부터는 곡들의 차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또 함께 연주한 가야금과 생황 연주자들의 악기 소리는 태평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으며 어떤 음악적 연출을 하려고 한 건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물론 가야금은 곡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비슷한 리프의 장단이나 리듬 형태를 균형 있게 드러내어 음악의 중심을 잡아주긴 했지만 그 외에 튀는 부분은 없었고, 생황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으며 생황의 독보적인 매력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물론 그게 모두 의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관객의 입장에선 주로 태평소와 피리, 전자 사운드로만 음악이 이끌어져 나간 것에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곡이 비슷한 스타일로 가다가 마지막에 서정적인 코드의 기타 연주가 중심이 된 음악은 지금껏 이끌어 온 무대와는 급작스럽게 반대되는 당황스러운 감정 과잉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국악계에서 그 누구보다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세 연주자가 모여 ‘광장’을 주제로 다양한 사운드를 만들고, 연구해낸 이 연주는 기획과 연주자들의 연주 실력부터 호흡까지 모두 훌륭했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와 ‘즉흥’이 늘 난해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사운드 메이킹과 악기의 소리, 노래, 무대 연출, 전통음악이 모두 반영된 이 무대는 다양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 연주자들의 마음은 잘 드러났으나, 전체적인 무대를 관통하는 이미지와 음악 형태가 뚜렷하지 않고 모호하여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기도 했다. 자유롭고 새로운 시도는 예술가에게 꼭 필요하지만, 대중들에게 예술가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새로우면서도 대중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 또한 이 시대의 음악을 만드는 데 필요한 중요한 부분이기에, 이들이 다음번에 보여 줄 또 다른 새로운 시도를 기대 해 본다. 공연 내내 지속적으로 연주된 태평소와 타악, 전자 사운드의 큰 음량을 계속 듣다보니 귀가 굉장히 아파서 마음속으로 ‘제발 그만!’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로, 공연이 끝난 후에도 그 소리가 귀에 계속 맴돌며 내가 생각하는 광장의 이미지를 그리고 음악을 넘어선 그 가치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어떠한 한 주제를 가지고 음악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대단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만들어 낸 이번 실험적인 도전에 큰 박수를 보낸다. 성시영은 한 인터뷰에서 ‘하나의 특정한 장르가 아닌 성시영 이일우 황민왕 세 사람만의 장르, 우리들의 색깔을 가진 장르가 되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들의 실험적인 시도가 앞으로 어떤 보편화를 가지고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그들만의 장르와 감동을 줄 확장된 멋진 무대를 기대하며 이 시대의 광장을 다시 한 번 마음에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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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든이 코끼리 고아원을 떠나온 이유: 판소리 ‘긴긴밤’국립정동극장의 2023 시즌 '창작ing' 사업의 여섯 번째 작품, 판소리 '긴긴밤'이 7월 27일 첫 무대를 올렸다. '긴긴밤'은 작가 루리의 제21회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동화 ‘긴긴밤’을 새로이 창작한 작품으로, 스스로가 자신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갈 용기를 얻고 캄캄한 어둠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그 순간에 펼쳐지는 드넓은 바다와 긴긴밤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원작 동화는 출간 후 2년 동안 약 30만 부 이상 팔리는 등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현재까지도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창작 판소리 ‘긴긴밤’은 전통 타악기를 기반으로 다채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는 고수 이향하가 동화의 내용과 더불어 음악을 얹고 새로이 만들어 낸 작품으로, '2022 수림뉴웨이브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소리꾼의 시선에서 출발하는 판소리 창작의 방식과 달리, 판소리 ‘긴긴밤’은 숱한 요소들을 모두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형식으로도 충분히 ‘판소리'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그의 경험을 중심에 두고, 고수의 시선에서 쌓아 올린 작품이다. ‘긴긴밤’에서 주연을 맡은 이승희는 ‘입과손스튜디오’에서 이향하와 함께 꾸준히 함께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소리꾼이다. ‘입과손스튜디오’에서는 소리꾼과 고수, 기획자가 함께 모여 이야기를 결정하고,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모두가 중심이 되어 무대를 꾸려서일까, 그들의 무대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상적인 구간이 곳곳에 드러나고, 풍성하고 색다른 아이디어로 가득하다. 이번 무대 또한 ‘입과손스튜디오’에서 오래도록 호흡을 맞춰온 그들이 함께 무대를 꾸렸기에 더욱 기대되는 공연이었다. 덕수궁 뒤편에 자리한 작은 공연장, 국립정동극장 ‘세실’에는 첫 공연을 관람하러 온 관객들로 북적였다. 동화 ‘긴긴밤’의 내용을 어떻게 연극 형식으로 풀어냈을지 궁금하다는 관객들의 기대에 가득 찬 소소한 대화를 주워듣다 보니, 덩달아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 무대의 좌측에는 드럼과 각종 악기가, 우측에는 소리북과 타악기, 사운드를 만들어 내기 위한 맥북과 믹서(mixer)가 함께 놓여있었다. 이 무대는 소리꾼 이승희와 고수 이향하를 비롯하여 이유준의 연주, 배우 이상홍과 최영열의 다인 1역 연기로 꾸려졌으며, 이날은 배우 이상홍의 연기로 감상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이지만, 네 명이 보여주는 힘은 대단했다. 배우 이상홍은 흰바위코뿔소 로든 역을 맡아 연기했고, 소리꾼 이승희는 노든이 과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만났던 할머니 코끼리, 치쿠, 앙가부와 어린 펭귄 역을 맡는 동시에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이야기꾼, 즉 발화자의 역할도 함께 맡았다. 이는 ‘입과손스튜디오’의 공연에서도 자주 볼 수 있던 패턴인데, 소리꾼과 배우, 이야기꾼을 번갈아 가며 자연스럽게 극을 끌어나가 매끄러운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어 줄 뿐 아니라, 장면마다 가장 효과적이고 특색있는 무대를 만들어 냈다. 이 작품은 ‘고수가 만드는 판소리’라는 중심 테마로 만들어졌다. 각색과 연출을 맡은 이상숙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고수의 시선이 잘 드러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텍스트와 삽화로 구성된 원작의 구성을 그대로 대사와 이미지(음악과 움직임)로 만들자는 계획을 세웠고, 일반적인 판소리 작품에서라면 소리꾼의 시선으로 소리꾼이 아니리와 소리로 만들어 갈 호흡을 이야기 속 역할(배우)과 소리꾼, 고수가 두루 나눠 가지게 되었다고 전했다. 고수와 연주자가 음악으로 장면을 설명하기도 하고, 소리꾼이 배우의 고수로 작용하는 장면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며 장면마다의 소리꾼과 고수가 달라지는 연출을 선보인 것이다. ‘고수’는 그저 소리를 반주하는 반주자 역할만 있는 게 아니다. 판소리에서 고수는 장단의 한배를 조절해서 소리가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것을 보완하기도 하고, 추임새로 창자와 청중 사이에서 소리판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도 하며, 창자의 상대 역할도 하며 하나의 음악을 함께 만들어 나간다. 이 공연에서 고수가 보는 무대의 연출은 소리꾼이 배우의 연기 흐름을 따라 소리를 하거나 아니리처럼 상황 설명을 해주는 등 고수처럼 중심을 잡아준 것 외에도, 음악을 통한 무대의 전환을 통해 자연스레 드러났다. 이향하는 고수로서 소리를 반주하는 ‘소리북’을 연주하는 것 외에 극의 분위기를 결정해 내는 다양한 소리와 음악을 들려주며 극의 분위기를 끌어 나갔다. 원작이 그림책이어서일까, 무대를 보는 내내 동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선명한 색감과 그림자를 활용한 조명 연출과 더불어 대중성과 다양성, 이색적인 사운드가 무대를 풍성하게 채워 나갔다. 음악은 전반적으로 신디 사운드가 기반이 되어 분위기를 잡아주었고, 그 위에 몽환적인 벨(bell) 계열의 소리가 자주 등장했다. 축축하고 몽롱한 사운드는 ‘자연’을 자연스럽게 드러냈고, 그에 더해 이국적인 음색을 가진 리드나 한국 전통 악기 소리북이 조화롭게 연주되는 구간은 독특한 느낌을 물씬 자아냈다. 음악을 듣고 있다 보면 흰바위코뿔소와 어린 펭귄이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 넓게 펼쳐진 초원과 호수, 그리고 바다가 그려졌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예상되지 않는 선율과 박의 진행이었다. 드럼이나 북이 연주하는 리듬의 첫 박에 가사를 맞추어 노래하는 일반적인 형식 대신, 이야기의 흐름에 맞게 첫 박을 틀어 연주하고 노래한 구간은 오히려 더욱 무대에 집중하게 해주었다. 음악은 대부분 대중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코드와 베이스 진행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위에 얹어진 선율은 기대를 벗어나는 음으로 튀어 나가기도 했는데, 그러한 진행은 오히려 예측 불가능한 대자연의 신비롭고 오묘한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음원으로도 발매된 ‘리듬 인 뉴웨이브(Rhythm in Newwave)’는 특히 그 느낌을 잘 드러냈다. 사랑스러운 벨 사운드와 양금이 고음으로 조화롭고 아름답게 연주되는 듯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서로 부딪히는 음정을 연주하며 어딘가 어긋난 듯한 느낌을 연출해 냈다. 조화로움 속 부조화의 매력으로 가득한 이 곡은, 흰바위코뿔소와 코끼리, 흰바위코뿔소와 펭귄처럼 함께 있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이야기의 주제와 상응한다. 이승희는 연기를 하다가도 발화자가 되어 아니리처럼 극을 진행하고, 소리꾼이 되어 작창된 소리를 부르기도 했다. 그가 작창해내는 소리는 기존에 듣던 창작판소리와는 어딘가 다르다고 늘 생각했는데, 이번 공연을 통해 대중성과 전통이 조화롭게 녹여져 있기에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현재 작창 되어지는 창작 판소리는 대부분 새로운 가사에도 ‘조’와 판소리의 어법이 주가 된 소리가 많다. 계면조를 예로 들자면, 전통 판소리에 자주 등장하는 소리의 길을 그대로 차용해 와 떠는 구간과 꺾는 구간을 동일시한 채로 새로운 가사를 붙이는 식이다. 하지만 이승희의 소리는 떠는 음과 꺾는 음 등 판소리의 어법은 고수한 채, ‘선율’과 ‘가사’에 더욱 집중한다. 선율은 ‘미-라-도시’의 계면조를 구성하는 음뿐 아닌,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서양 음계의 음들을 자유롭게 사용하되 판소리의 색채를 짙게 녹여낸다. 그렇게 완성되는 소리는 한국적이면서도 대중적인 느낌을 동시에 전해준다.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오히려 명확하지 않은 모호한 음악이 될 수도 있는데, 이승희의 소리는 조화롭게 그 모든 걸 잘 녹여내어 극이 더욱 다채롭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승희에 따르면, "세상에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 곁을 머물다 떠나간 동물들 저마다의 사연과 캐릭터를 생각하며 이 공연을 위한 작창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극의 특성을 고려하여 노든의 장면을 좀 더 대중적으로, 그 외 캐릭터들은 역할에 따라 판소리와 정가, 경기와 서도 민요의 특징을 살려 그렸다고 하는데,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펭귄 치쿠가 노래하는 구간에는 경서도의 민요를 활용한 떠는 음과 선율진행이 자연스럽게 묻어나 특색있는 한국적이면서도 색다른 느낌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노든은 태어날 때부터 코뿔소가 아닌 코끼리 무리에서 자라나고, 이후 그들 곁을 떠나 코뿔소 무리에서 가정을 이루지만 인간에 의해 가족을 잃고, 동물원에서 만난 친구도 인간 손에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그 후에 만난 소중한 친구 펭귄 차코 또한 죽음을 맞이한다. 노든의 마음은 어땠을까. 계속해서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보내는 노든은 아마 앞으로 나아가길 주저했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슬픔에 그는 모든걸 포기하고 싶었을거다. 하지만 노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결국 어린 펭귄을 바다로 보내는 길잡이의 역할을 해낸 후 그의 바다에 잠잠히 머물게 된다. 만일 노든이 코끼리 무리를 떠나오지 않았더라면, 동물원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펭귄과 함께 바다로 떠나지 않았다면 어린 펭귄은 바다에 갈 수 있었을까? 그저 안정적으로 머물고 싶은 세계에서 발을 뗀 덕분에 노든은 슬픔과 좌절을 겪는 동시에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고 누군가에게 큰 바다가 되어주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수많은 마음과 물음표를 안겨준 이 작품은, 몽환적인 음악과 더불어 진심 어린 배우의 연기와 전통의 멋이 가미된 소리가 함께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많은 감동을 선사해 주었다. 호수에서 처음 수영을 배우던 어린 펭귄은, 노든의 도움으로 수영을 연습하다가 용기를 내어 홀로 물속으로 들어간다. 노든과 함께 수영할 때는 안정적인 초록빛의 조명과 편안한 음악이 흘러나왔지만, 어린 펭귄이 처음 혼자 물에 들어가자, 무대는 어둡게 전환되고 두려운 분위기가 엄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음악과 따뜻한 배경이 어린 펭귄의 헤엄을 응원해 준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게 아닐까. 첫발을 떼는 건 누구에게나 어렵다. 하지만, 미약한 우리 한 명 한 명의 가치는 너무나도 강인한 힘을 갖고 있기에, 누군가에게 큰 바다가 되어줄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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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락 페스티벌 '장:단(長短)'국립극장 대표 여름 음악 축제 '2023 여우락 페스티벌'이 6월 30일부터 7월 22일까지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하늘극장·문화광장에서 펼쳐진다. '축제하는 인간'을 주제로 12편의공연을 선보이고 있는 이 축제는 전통음악과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경계 없이 어우러지며 과감한 실험과 도전을 선보이고 있다. 7월 8일 토요일, 타악 연주자 황민왕과 즉흥음악 마스터로 불리는 사토시 다케이시가 서로의 장단을 맞대는 공연 '장:단(長短)'을 관람하였다. 황민왕은 전통음악에서부터 현대의 즉흥음악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활동 영역을 보여주고 있는 타악 연주자이며, 사토시 다케이시는 지역적으로는 아시아·남미·중동 등의 여러문화권을, 음악적으로는 민속음악과 재즈 등을 넘나들며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 중인 타악 연주자이다. 2015년 7월 여우락을 통해 처음 만난 황민왕과 사토시 다케이시는 공연 이후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내왔다고 한다. 황민왕은 사토시 다케이시의 악기 구성과 즉흥연주의 방식에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으며, 사토시 다케이시 또한 황민왕을 통해서 한국의 장단과 그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번 무대는 8년 만에 뭉친 그들이 오로지 두 사람의 연주로 서로의 길고 짧음을 대보는 시간이었다. 두 연주자는 동양 타악과 서양 타악의 물리적 만남 그 이상의 화학작용을 끌어내며 장단과 리듬, 즉흥과 즉흥이 만나 동서양의 경계를넘어서며 하나의 음악을 완성해 나가는 무대를 만들어 냈다. 타원형의 하늘극장에는 좌, 우로 나뉘어 연주자들이 연주할 각종 타악기가 놓여 있었다. 황민왕이 연주할 좌측 무대에는 장구와 징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우측 무대에는 사토시 다케이시가 연주할 다양한 종류의 북과 타악기들이 놓여있었다. 공연은 황민왕과 사토시 다케이시가 함께 꾸려나가는 무대 말고도 중간중간 각 연주자가 혼자 연주하는 무대도 있어 개개인의 역량을 더욱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공연 내내 계속해서 받은 느낌은 ‘청각의 시각화’였다. 그들이 연주한 타악기는 음의 높낮이를 연주할 수 있는 유율타악기가 아닌 무율 타악기가 대부분이었기에 악기의 고유한 음고와 음색이 뚜렷했는데, ‘음’으로 이루어진 선율이 아닌 리듬이 끌어나가는 무대에 다양한 색채의 타악기들이 번갈아 가며 연주되다 보니 타악기가 선사하는 음악에 온전히 귀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악기들의 사운드에 따라 눈 앞에 어떠한 풍경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징 소리로 시작한 첫 무대는 몽환적인 동화 같았고, 심벌즈와 높은 음고의 악기들이 챙챙거리며 연주되는 부분은 마치 동물들이 지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사토시 다케이시가 연주한 낮은 음고의 둥둥거리는 북소리는 고전문학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배경이 그려지며 우렁찬 자명고 소리로느껴졌다. 특히 음색에 더해져 쪼개지거나 늘어나는 역동적인 진행을 ‘리듬’을 통해 감상하니 더욱 신선한 공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장:단(長短)' 무대는 곡에 따라 한 연주자가 선도하면 나머지 한 명이 보조하여 따라가다가 합치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황민왕이 우리 전통 장단을 사토시 다케이시에게 제시하면 그가 자신만의 리듬을 더해 서로의 교집합을 축적하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보통 기본 장단을 연주한 후 변형 장단을 연주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감상할 수 있지만 장단의 틀 안에서 리듬을 색다르게 변형시키는 연주는 일반적이지 않기에 사토시 다케이시의 연주가 더욱 신선하고 참신하게 느껴졌다. 황민왕은 주제 장단으로 익숙한 자진모리 장단이라든지 굿 장단, 혹은 색다른 장단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사토시 다케이시는 어떤 장단을 제시받든 자유로운 강세와 밀고 당기는 표현을 더 해 새롭게 연결해 나갔다. 한국의 전통 장단과 세계의 다양한 리듬이 두 연주자의 연주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어디에도 없던 리듬의 새로운 형태가 즉흥으로 연주되다 보니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어 더욱 손에 땀을 쥐고 빠져들어 감상할 수 있었다. 이 무대에서 황민왕은 타악기 연주뿐 아니라 태평소를 연주하기도 하고, 구음이나 노래를 얹기도 했다. 중요무형문화재 남해안별신굿을 이수한 그답게한국적이고 민속적인 소리로 무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특히 황민왕이 계면조가두드러지는 태평소 선율을 연주할 때 사토시 다케이시가 그 선율에 맞추어 역동적이고 화려하면서도 뚜렷한 리듬의 색채를 선보인 부분을 통해 전통이 새롭고 다양한 방향으로 섞이고확장됨을 느꼈다. 또 흥미롭던 무대는 황민왕의 ‘구음 장단’과 사토시 다케이시의 ‘즉흥 장단’의 주고받음이었다. 황민왕이 ‘덩- 덩- 더궁-’, ‘덩 더덩 더덩’ 등 장구의 소리를 구음으로 나타내어 입으로 제시하면, 사토시 다케이시는 바로 그 장단을 받아 새로운 형태로 변형시켜 그만의 장단으로 연주해 냈다. 앞에 놓여있는 악기를 다양하게 활용하여 양손으로 치기도 하고, 두드리기도 하며 새로운 장단 세계를 만들어 나갔는데, 빠르고 속도감 있거나 여유로운 구음을 멋지게 구사하는 황민왕과 그 구음을 자연스럽게 즉흥으로 받아 연주하는 사토시 다케이시의 연주는 안정적이고 온전한 음악을 만들어 냈으며, 서로 즉흥으로 주고받다가 점점 하나 되어 함께 기본 장단으로 돌아와 연주하는 구간은 완벽한 타이밍과 호흡을 보여주어 숨이 멎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무대 바로 앞 좌식 자리에 앉아있던 관객들이 참여한 관객 참여 무대도 인상적이었다. 황민왕은 무작위로 징, 꽹과리 등의 악기를 네 명의 관객에게 나누어주고, 두 연주자의 느린 장단에 맞추어 자유롭게 연주하라고 제안했다. 그리고 정주를 받은 관객은 타이머를 3분 동안 맞춘 후 시간이 되면 정주를 쳐 맑은소리로 음악의 끝을 알렸다. 그 시간만큼은 그 공간에 있던 모두가 조용히 악기들의 소리에 온전히 집중했고, 연주자들은 서로가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여유로운 장단 안에서 본인의 색을 찬찬히 드러냈다. 천천히 귀를 열고 타점을 찍어 나가며 3분 동안 진행된 즉흥 연주는, 불규칙하지만 규칙적인 훌륭한 예술이자 함께 즐기는 축제, 여우락 그 자체였다. 황민왕은 즉흥 연주인 만큼 확실한 사인을 맞추기가 어려웠던 이 무대의 조명감독, 음향감독의 수고로움에 박수를 보냈다. 구름이나 바다 같은 잔잔하고 아름다운 풍경과 삼각형을 활용한 고급스럽고 따스한 느낌의 조명은 이 무대에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정도로 잘 어울렸고, 타악기의 특성상 극단적으로 세거나 여린 소리를 편안하고 적절한 사운드로 감상할 수 있던 음향도 훌륭했다. 여우락 페스티벌 무대가 얼마나 섬세하게 잘 준비되었는지 알 수있는 부분이었다. 무대는 황민왕이 관객들을 축원하는 비나리를 하고 두 연주자가 합을 맞추어 현란한 북춤을추는 듯한 힘찬 연주를 선보이며 끝이 났다. 70분의 공연 시간 내내 두 명의 연주자는 각각의 기량을 뽐내며 서로가 가진 길고 짧음을 선보이는 동시에 ‘리듬’, ‘장단’이라는 틀에 맞추어 함께 호흡하고 화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만들어 냈다. 자유로우면서도 완전하던 그들의 합은 관객 모두의 오감을 깨워주었고, 잊지 못할 시간을 선사해 주었다. 이번 무대를 계기로, 앞으로 더욱 다양한 방면으로 확장될 우리 장단과 리듬의 형태를 더욱 기대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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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락 페스티벌 개막작 ‘불문율’, 신선!전통 음악과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함께 과감한 실험과 도전을 펼치는 국립극장 대표 여름 음악 축제 ‘여우락 페스티벌’이 2023년 6월 30일부터 시작되었다. ‘축제하는 인간(Homo Festivus)’을 주제로 공연 총 12편을 선보이게 된 이번 여우락의 포문을 여는 개막작, 전통 예술의 매력과 가치를 재발견하는 무대 ‘불문율’을 관람하였다. ‘불문율’은 판소리 명창 윤진철과 동해안별신굿 명인 김동언이 판소리 강산제 ‘심청가’와 동해안별신굿의 ‘심청굿’을 번갈아 주고받으며 우리의 대표 고전 ‘심청’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공연이다. 11살에 소리를 시작해 최연소 판소리 무형문화재에 오른 윤진철 명창과 고(故) 김석출의 셋째 딸로 태어나 9살부터 굿판에 선 김동언 명인, 두 대가가 한자리에서 만난 이 공연은 판소리와 굿은 한 무대에 오르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불문율을 깼다는 점에서 공연 전부터 많은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전통 예술의 맥을 이어 온 명인들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이 무대는 일생을 바쳐 각자 다른 길에서 최선을 다해 전통의 길을 닦아 온 두 명인이 한 무대에서 무엇이 같고 다른 ‘심청’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지, 어떤 식으로 화합하며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나갈지 큰 기대를 품고 무대를 감상하였다. 둥그런 원형으로 이루어진 아늑한 하늘극장 작은 무대의 왼편엔 굿 반주를 위한 꽹과리와 징, 장구가, 그리고 오른편엔 소리북이 놓여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국악 공연을 봐 왔지만, 한 무대에 소리북과 굿 반주용 타악기가 함께 놓여있는 모습은 본 기억이 없다. 왠지 모르게 이질적이고 어색하면서도 새롭고 신선한 그 장면에 가슴이 뛰었고, ‘판소리와 굿은 한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새로운 명제를 마주한 벅참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판의 기운을 쥐락펴락하는 이 시대 최고의 무녀 김동언이 선사한 ‘심청굿’은 동해안별신굿에서 심청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자손들의 눈병을 예방하고 효자, 효부가 많이 나기를 기원하는 굿거리이다. 굿을 진행하는 김동언 무녀는 관객들에게 말을 걸거나 본인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며 유쾌하고 흥미롭게 무대를 끌어 나갔다. 특히 무녀가 춤과 소리로 관중을 즐겁게 하면 관중은 금전을 상급으로 주기도 하는 실제 굿판에서처럼, 관객들은 김동언 무녀의 옷에 돈을 꽂아주며 소원을 빌고, 무녀는 그들을 축원해 주는 시간을 가지며 실제 굿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느낌을 주어 더욱 생동감 있는 무대를 만들어 냈다. 두 명인은 번갈아 가며 심청의 이야기를 각자의 분야인 심청굿과, 판소리 심청가의 대목으로 주고받으며 연결해 나갔다. 공연의 상영시간은 쉬는 시간 없이 2시간 30분으로 매우 긴시간 진행되었는데,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심청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특히 판소리 심청가는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고, 다양한 무대를 접해 보았지만, 동해안별신굿의 ‘심청굿’은 무대에서 볼 기회가 별로 없었기에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심청굿’은 사설 읽듯 이야기를 끌어 나가는 특징을 지녔다. 글을 읽어나가듯 빠르게 심청전의 이야기를 전하는 동시에 중간중간 민요의 느낌을 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동부제의 메나리토리로 구성된 선율이 많았고, 질러내는 소리와 속소리가 적절하게 구사되었다. 왼편에 앉아있던 장구와 꽹과리, 징이 그 위에 굿 장단을 치며 반주했는데, 장구 반주자가 무녀의 노래 끝에 받는소리로 짧은 구음을 노래하는 것이 신선했다. 김동언 무녀의 소리는 곽씨부인이 죽기 전 심봉사에게 청이를 잘 부탁한다며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장면에서 특히 큰 울림을 주었다. 죽음을 앞두고 애절하고 슬픈 마음으로 남겨질 남편과 딸을 걱정하는 애달픈 그 이야기는, 마치 곽씨부인이 바로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 더욱 사람들을 울렸다. 김동언 무녀의 무대에 바로 이어 윤진철 명창은 힘 있는 소리로 단번에 좌중을 압도했다. 그가 열정적으로 뽑아내는 소리는 무대를 넋 놓고 보게 만들었고, 심청가의 배경으로 들어가 그 장면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듯했다. 심청굿의 진행이 민요처럼 자연스레 흘러가고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면, 판소리 심청가는 힘 있고 정갈한 고수의 북장단과 위엄 넘치는 판소리의 울림이 강렬한 위압감과 감동을 선사해 주었다. 이어 김동언 무녀가 선보인 ‘상여소리’는 그야말로 ‘상여소리’ 그 자체로, 상여꾼들이 상여를 들고 노래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애달픈 한이 절절히 드러나던 심청굿의 ‘상여소리’는 판소리 심청가의 ‘곽씨부인 상여 나가는 대목’과 같은 내용이지만 확연히 다른 구조를 보여주어 더욱 흥미로웠다. 판소리 ‘곽씨부인 상여 나가는 대목’은 진계면의 구성과 중모리장단으로 대놓고 깊은 슬픔을 자아낸다면, 심청굿 ‘상여소리’는 어딘가 담담한 진행으로 음악을 이끌어 간다.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를 흉내 내는 소리는 판소리와 굿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가사인데, 판소리는 느리고 애절한 선율로 노래한다면 굿에서는 정말 종소리를 흔들 듯 빠르게 그 소리를 읊어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곽씨부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굿의 소리로 듣자니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는 남겨지는 이들의 슬픔이 정통으로 느껴졌다. 한국인의 DNA에 새겨진 어떠한 ‘한’의 공감인 걸까? 반복되어 연주되는 굿거리장단 위에 슬픔 가득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얹어지며, 노래하던 무녀는 저고리의 고름으로 눈물을 훔쳐냈고, 관객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김동언 무녀는 중간중간 관객들과 계속해서 소통하고, 윤진철 명창에게도 장난스럽게 말을 거는 등 재치 있게 무대를 장악해 나갔다. 간드러진 기교와 확실한 힘이 있는 노래에 더해 어느 대목에서는 춤을 추기도 했다. 강렬한 굿 장단 위에 어지러운 듯 자유롭고 예술적인 무녀의 몸짓에 눈을 뗄 수 없었고, 이 무대를 서울의 공연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감격스러웠다. 심청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이야기는 절정으로 흘러갔다.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떠나간다며 아버지에게 절하는 부분에서 김동언 무녀는 심청의 역할을 하여 윤진철 명창에게 절하였고, 윤진철 명창은 심봉사가 되어 눈물 어린 부녀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렇게 서로 번갈아 가며 ‘심청전’을 끌어 나가다가, 판소리 ‘범피중류’가 울려 퍼졌다. 심청이가 제수로 팔려 배를 타고 인당수로 가는 대목. 인당수로 가는 배 위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길게 늘어지는 진양조장단 위에 꿋꿋한 우조로 힘차게 노래한 윤진철 명창의 소리는 관객 모두의 마음을 흔들었고, 질러내는 소리와 속소리가 번갈아 가며 등장하는 매력적인 소리에 맞추어 연주된 고수의 북 반주는 완벽한 판소리의 합치를 이루어 냈다. 그리고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왼편의 타악기들이 소리북과 함께 강하게 연주하며 역동적인 전개를 끌어 냈다. 수궁가의 ‘범 내려온다’에서 위엄있는 호랑이를 마주한 것처럼, 거친 파도와 풍랑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은 강렬함이었다. 굿을 반주하는 타악기와 소리북의 만남, 그리고 그 위를 힘 있게 노래하는 판소리. ‘풍-’하며 부채를 떨어뜨리는 연출과 함께 심청이가 바다에 빠지자, 관객석은 큰 박수와 추임새로 가득 찼다. 무대가 진행될수록 번갈아 가며 소리를 보여주던 두 명인이 다양한 모습으로 무대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범피중류를 시작으로 ‘방아타령’과 ‘자진방아타령’에서도 좌우의 모든 타악기가 함께 연주되었고, 윤진철 명창은 소리를 하며 흥청흥청 춤을 추며 관객들의 호응을 끌어냈다. 그리고 마지막, ‘심봉사 눈 뜨는 대목’에서 김동언 무녀는 심청이가, 윤진철 명창은 심봉사가 되어 극적 요소가 가미된 완성도 있는 장면을 만들어 냈다. 심청이와 심봉사가 맹인 잔치에서 마주하고, 결국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을 굿과 판소리가 함께 노래한 장면은, 그 어떤 눈뜨는 대목보다도 깊이있고 감동적이었다. 특히 심봉사와 심청이가 손을 마주 잡고 서로의 눈을 바라본 장면은 마치 불문율로 이루어져 왔던 서로 다른 장르 ‘굿’과 ‘판소리’가 합치되어 드디어 서로를 마주하고, 새로운 시각으로써의 전통 예술 형태를 더욱 넓혀 나가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대는 김동언 무녀가 관객들을 축원하고, 윤진철 명인과 함께 노래하며 막을 내렸다. 두 명인은 무대 내내 소리의 소품으로 ‘부채’를 사용했다. 김동언 무녀의 부채는 화려한 색채의굿 부채였고, 윤진철 명창의 부채는 선비의 느낌이 물씬 나는 판소리용 부채였다. 전통 예술이라는 큰 틀로 묶여있지만, 서로 다른 공간과 다른 시간에서 각자의 예술을 연마해 온 두 명인의 부채가 처음으로 한 무대에서 만났다. 일생을 바쳐 생명을 불어넣는 예술을 만들어 온 두 명인이 전한 ‘심청가’는 두 개가 아닌 하나였다. ‘심청’이라는 하나의 주제 된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은 삶의 한과 흥, 눈물과 해학의 정수를 서로 다른 전통의 화합을 통해 만났고, 상처를 치유 받았으며 또한 위로받았다. 이제 시작이다. 우리 전통 예술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렇듯 끊임없이 명맥을 잇고, 발전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해 낼 수 있는 가장 멋진 시도는, 선을 긋고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하나 된 마음. 불문율을 담대히 깨고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용기있게, 그리고 과감하게 해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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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사람을 위한 공동체 음악, 상여소리6월 29일(목)과 30일(금),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정기공연 ‘꽃신 신고 훨훨’이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올랐다. 이 공연은 지난 5월 부임한 유지숙 민속악단 예술감독의 첫 작품으로, 민속악단의 정기 공연으로는 최초로 상여소리를 주제로 하여 서도, 경기, 남도 지역의 상여소리 등 죽음을 다룬 노래와 음악으로 구성되었다. 지역별로 다른 상여소리를 통해 음악적으로 다양한 정서를 감상할 수 있던 이 무대에서는 민요, 잡가, 판소리, 무속음악 등이 다양하게 엮여 죽음과 삶에 우리 선조들이 대처했던 마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몽환적인 분위기 속 징의 잔잔한 소리 위에 얹어진 유지숙 예술감독의 담담하지만 애절한 소리로 무대가 열렸다. 첫 무대는 ‘서도 상여소리’로, 북녘의 땅에서 불려 온 애잔한 소리이다. 임의 분묘를 찾아가 한탄하고 삶의 회한을 표현한 첫 곡 ‘제전’은 느려서인지 격하게 떠는 음이 많은 서도제의 특징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제전’에 이어 ‘상구소리’에서는 장구와 대금의 수성가락이 얹히며 인생의 덧없음이 더욱 애잔하게 표현되었고, 이어 ‘산염불’이 불렸다. 산염불은 선율의 길이가 서로 다른 앞소리와 2장단으로 된 후렴으로 구성되었는데, 후렴구에 나오는 ‘에헤야 에헤야~나무아미타불’ 등의 후렴구나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등의 가사 위에 서도제의 색채가 짙게 묻어 마치 그 떠는소리가 울음 우는 소리처럼 더욱 애잔하게 느껴졌다. 이후 ‘황해도 배천 상여소리, 평양 상여소리’에서는 총 8명의 소리꾼이 나와 함께 노래했는데, 힘 있고 빠른 속도로 언뜻 경쾌하게 흘러가는 듯 들리기도 했지만, 애달프고 슬픈 가사로 인해 오히려 슬픔을 더욱 자아냈다. 북녘의 땅에서 불려 오던 서도제의 상여소리는 이 땅에서 많이 연주되지 않고 그 자료 또한 많지 않지만, ‘한’과’ ‘슬픔’이 서려 마음을 찢는듯한 그 애절한 선율은 공연장에 있던 모두를 울렸다. 다음으로는 가야금 병창 단가 ‘백발가’가 불렸다. "백발이 섧고 섧다. 백발이 섧고 섧네.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다.” 로 시작하여 세상사 서러움을 노래하는 이 곡은 사실 인생무상만을 노래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백발이 되고 보니 인생은 허무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우니 명승지를 구경하며 즐기자는 것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품고 있다. ‘백발가’를 세 명의 소리꾼이 밝은 평우조 음계로 구성지고 시원하게 불러내니, 꿋꿋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려는 사람의 의지와 힘이 공연장에 가득 울려 퍼지며 관객들의 집중을 불러일으켰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 들고 죽음에 이르지만, 이를 그저 슬픔으로만 대하기보다는 아름다운 이 삶에 집중하고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하였던 선조들의 지혜로운 태도가 가득 묻어난 무대였다. 세 번째로 경기 지방의 민요와 상여소리가 무대에 올랐다. ‘마음을 돌아보는 노래’라는 의미의 ‘회심곡’과 잡가 ‘이별가’, 그리고 고양시에서 불리는 상여소리로 구성된 ‘경기 상여소리’는 경기 지방에서 불리던 소리의 특징과 힘, 그리고 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회심곡’은 불법에 귀의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올바르게 살아갈 것을 권하는 내용을, ‘이별가’는 이별의 슬픔을 노래하는 경기 지역의 민요이다. 살아가며 맺어지는 부모와 연인과의 관계, 그리고 연 가운데 얽히는 수많은 감정의 소리는 삶을 돌아보게 했고, 그 후 바로 이어진 ‘상여소리’는 인생과 관계의 흐름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바라의 챙챙거리는 소리로 인해 더 민속적이고 한국적이던 ‘회다지소리’에서는 많은 소리꾼이 함께 메기고 받으며 노래하고, 악사들이 간드러지며 힘 있는 반주로 함께 음악을 끌어 나가니 망자를 위로할 뿐 아니라 이 세상과 저승의 경계를 다지는 절연의 의지와 역동적인 몸짓이 잘 드러났다. 인생의 연속성을 나타낸 경기 지역 음악 세 곡을 통해 경제의 기교 있고 차분한 표현을 마주할 수 있었고, 인생과 삶, 사람 간의 관계를 다각도로 생각하며 깊게 감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공연의 마지막은 ‘남도 상여소리’가 장식했다. ‘진도 다시래기’를 중심으로 엮어낸 무대. ‘진도 다시래기’는 진도지방에서 초상이 났을 때, 특히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며 행복하게 살다 죽은 사람의 초상일 경우 동네 상여꾼들이 상제를 위로하고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기 위해 전문예능인들을 불러 함께 밤을 지새우면서 노는 민속극적 성격이 짙은 상여놀이이다. 신명나는 풍물패의 소리와 함께 가상제(거짓 상주 역할을 하는 배역이자 다시래기를 이끌어 가는 진행자 역할)와 풍물패가 관객석에서 등장하여 소란스레 무대로 향했다. 가상제는 유쾌하게 다시래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한 명씩 호명해서 개인기를 펼치도록 유도했고, ‘거사’와 ‘사당’이 나와 연극형태의 연희를 벌였다. 이 연희에서는 ‘흥’에 초점을 두어 슬픔을 즐거움과 위로로 승화시켰는데, 재미있는 설정과 유희를 통해 떠들썩하게 즐기며 죽음의 상실감을 치유하고자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흥취 가득한 재담과 개사를 통해 유쾌하고 해학적으로 불러낸 소리는 마치 마당놀이의 어느 한 과장을 보는 듯 즐거워 죽음의 슬픔을 어느샌가 밀어내는 힘이 있음을 느꼈다. 특히 마지막 아이를 낳는 장면은 죽음이 있더라도 새로운 삶 또한 함께한다는 인생의 고유 진리, 그리고 상실보다는 연속된 삶이 더욱 중요하다는 가치 있는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한바탕 관객들과 함께 즐거운 무대를 선보인 후 가상제가 물러나고, 민속음악의 꽃, ‘씻김’이 시작되었다. 진도에서 전승되는 망자 천도굿인 ‘진도씻김굿’. 이는 살아생전의 좋지 못했던 기억이나 마음 깊은 곳의 앙금을 깨끗이 씻어냄으로써, 망자가 수월하게 저승으로 가도록 돕는다. 기존 씻김굿은 체계적인 순서에 따라 길게 진행되지만, 이 공연에서는 무대화되어 짧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치 사람이 흐느껴 우는 듯한 진계면으로 이루어진 선율과 소리는 사람의 감정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듯하였고, 무언가 엄숙하면서도 경건하게 만드는 힘 또한 존재했다. 흰 한복을 입고 지전을 든 무용수들이 보여준 망자를 위한 천도 의례 ‘지전춤’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액을 막아주는 춤의 몸짓이 격렬하면서도 진실하여 진도씻김굿의 예술성을 더해주었다. 지전춤에 이어 소리꾼 정회석이 저 멀리서부터 천천히 등장하며 심청가 중 ‘상여소리’를 담담히 불러냈다. 정확히는 ‘곽씨 부인 상여 나가는 대목’으로, 중모리장단의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템포 안에서 ‘이제 가면 언제 올거나’ 하며 애절하게 부르는 그의 소리는 마음 한편을 아리게 만들었으며, 그 깊이 있는 성음은 판소리의 진면모를 드러냈다. 그리고 자연스레 마지막 무대 ‘진도 상여소리’로 음악이 이어졌다. 진도의 상장례는 육지처럼 장례식을 엄숙하게 진행하기보다는 사물 악기를 앞세워 흥겨운 축제처럼 이어 나가는 특징을 갖고 있다. 죽음을 그저 슬픔과 아픔으로 여기기보다는 누구에게나 오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떠나간 이를 기억하고 남겨진 자들을 위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공동체의 따뜻함에 마음이 풍성해졌다. 특히 이 무대에서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 27-4호 고양 상여, 회다지소리 보존회의 상여꾼들이 특별출연하여 무대를 꾸렸다. 점점 사라지고 있는 장례문화인 상여소리를 서울, 국립국악원의 무대에서 실제 보존회 회원들과 국악원 민속악단의 연주로 볼 수 있어 굉장히 의미 있고 가치 있었다. ‘삶의 끝에서 마주하는 평안’이라는 부제의 공연 ‘꽃신 신고 훨훨’은 지루할 틈 없는 빠른 전환으로 구성되어 삶과 죽음을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는지 지역별로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었고, 위로와 치유, 넉넉한 마음을 가득 느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 무대는 음악을 넘어 우리의 소중한 장례 문화를 무대화시켜 보여줌으로써 전통 예술의 가치 있는 보존에 큰 역할을 하였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섧고 아픈 죽음이 있기에, 기쁜 새 생명의 시작 또한 존재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옛 선조들의 마음을 깊이 새기며,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마주하고 되돌아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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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향수, 2023 관현악 시리즈 ‘전통과 실험-풍물’6월 13일 화요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는 전통예술의 동시대적 탐구를 엿볼 수 있는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2023 관현악 시리즈 ‘전통과 실험-풍물'이 무대에 올랐다. 관현악 시리즈 ‘전통과 실험’은 2022년 김성국 단장 취임 이후 ‘명연주자 시리즈’와 함께 선보인 새로운 시리즈 공연이자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대표 레퍼토리 공연으로, 위촉 작곡가들이 우리의 전통예술 중 엄선된 하나의 공통 주제를 연구하고 실험한 창작곡을 선보여 나가고 있다. 2022년 ‘동해안 별신굿’을 주제로 첫선을 보인 ‘전통과 실험-동해안’에 이어 올해는 ‘풍물(농악)’을 주제로 한 창작곡들로 무대가 채워졌다. 1부에서는 임준희의 관현악곡 '혼불8-맥(脈)', 도널드 워맥의 거문고 협주곡 'Black Dragon', 장태평의 관현악곡 '춤꽃'이, 2부에서는 국악의 거장 박범훈 작곡가의 명곡인 사물놀이 협주곡 '신모듬'이 전 악장 연주되었다. 초여름의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던 화요일, 세종문화회관은 공연을 보러 온 수많은 관람객으로 북적였다. 이번 무대는 특히 ‘풍물’을 주제로 작곡가들이 제각기 실험하고 해석한 음악이 초연되었기에, 다양한 풍물 장단이나 풍물 악기를 어떤 식으로 관현악에 조화롭게 녹여내었을지 큰 기대를 품고 무대를 관람하였다. 1. 국악관현악을 위한 ‘혼불8-맥(脈)’ㅣ위촉 작곡 임준희 무대는 임준희 작곡가의 국악관현악을 위한 ‘혼불8-맥(脈)’으로 열렸다. 전통 음악을 세계화, 현대화하는 다양한 작업을 통해 국내외적으로 큰 주목을 받는 임준희 작곡가는 새롭고 다양한 시선으로 전통 음악을 해석하며 많은 음악을 발표해 왔다. 산조, 판소리의 어법이나 선율, 장단 등을 차용하여 서양악기로 연주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댄싱산조’나 ‘세 개의 사랑가’ 등의 작품을 통해 이미 큰 관심이 있던 터라, 이번 무대 또한 더욱 기대하게 되었다. 임준희 작곡가에 따르면, 풍물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영혼을 고양시키고 공동체적인 정신의 맥을 생동케 하며 유지, 전승하는데 그 핵심적인 역할이 있기에, 이 작품에서 한국인의 삶과 역사 속에 면면히 흘러온 혼불을 통해 발현되어 왔던 정신의 맥, 생명의 맥 등의 이미지를 풍물 속의 장단과 역동적 에너지의 흐름을 통해 표현해 보았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이 곡에선 처음부터 끝까지 콘트라베이스와 아쟁의 베이스 역할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베이스 음역대가 확실하게 들리며 그 안에서 화성이 진행되니 음악적 풍성함과 우직함이 돋보여 높은 완성도가 느껴졌다. 음악은 총 두 악장으로 이루어졌으며, 모든 악기가 국악의 시김새와 장단의 세부 리듬 꼴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게 인상적이었다. 각 국악기가 가지고 있는 음색과 특징을 가감 없이 나타내는 동시에 조화로움을 이루며 한국적인 색채를 물씬 드러냈다. 무대는 장구를 중심으로 꾸준히 다양하게 장단을 변화시켰다. 끊기지 않고 자연스레 계속해서 장단이 변화하는 가운데 관현악이 그 장단을 타고 조화롭게 연주되니, 열정적이고 여유로운, 공동체적인 정신의 맥이 뜨겁게 이어짐을 느꼈다. 2악장은 칠채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관현악기들은 타악기가 이끄는 칠채 장단의 기본 강세와는 다른 박에 강세를 둔 엇박을 연주하며, 장단의 기본을 가져가되 그 안에 현대적인 변화를 만들어 냈다. 선율은 5음 음계 평조를 기본으로 가져가 동양적인 이미지를 드러냈고, 특히 생황의 묘한 음색이 화음으로 들려주는 구간은 생경한 신비함을 더해주었다. 악기들은 어느 하나 튀거나 밀리지 않고 조화롭게 장단 위에서 음악을 펼쳐나갔다. 특히 1악장부터 계속해서 태평소가 풍성하고 힘 있는 사운드로 음악을 끌어 나갔는데, 마치 농악을 이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는 임준희 작곡가가 최명희의 소설 <혼불>의 글귀를 통해 영감을 받은 것처럼, 선조들의 숨결과 소리의 맥을 풍물 소리를 통해 표현하고 관현악으로 구현하고자 한 특징이 잘 드러났다. 경험하지 못했지만 우리 안에 꿈틀대며 살아있는 얼과 숨결이, 역사적 자취가 계속해서 이어져 오기에 우리는 지금도 이 땅에서 그때의 풍물을 무대에서 누릴 수 있는 게 아닐까. 2. ’춤꽃’ㅣ위촉 작곡 장태평 ‘춤꽃’은 호남여성농악단을 모티브로, 강렬하면서도 우아하게 숨통을 조였다 푸는 듯한 쇠가락과 우도농악의 특징을 관현악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작곡가 장태평은 어릴 적 명성과 예술적 노련미가 가득한 호남여성농악단의 대표 상쇠 유순자 명인에게서 호남우도농악(풍물굿)을 배웠으며, 그때 체화한 춤과 소리는 그가 하는 모든 음악의 바탕이 되고 있다고 한다. ‘춤꽃’은 단조를 바탕으로 다양한 반음계가 활용된 묘한 분위기로 연출되었다. 특히 해금의 음을 당겨내는 주법과 가야금, 거문고 등의 발현악기가 튕겨내는 주법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어두우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냈다. 악기들의 다양한 음색과 효과가 역동적으로 펼쳐지고, 그 안에서 장단의 리듬 꼴 또한 계속해서 들려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대금과 가야금, 생황이 엇모리의 리듬 꼴을 짧은 스타카토로 연주하거나 장단의 맺는 가락을 모든 악기가 함께 연주한 부분은 장단을 확연히 드러내며 효과음 같은 음향 효과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 음악은 전반적으로 다양한 장단 변화의 흐름 속에 음끼리 부딪치는 느낌을 주는 증4도 화음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더욱 어두우면서도 기묘한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그 안에서 연주된 자유로운 선율 진행은 이질적인 조화로움을 선사해 주었다. 작곡가가 우도농악에서 각각 장단과 선율의 동기를 차용, 그 특유의 호쾌한 가락과 복잡하면서도 유려한 마당을 작품에 녹여냈다고 전한 것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화음 진행과 신비로운 분위기 안에 농악이 가지고 있는 힘과 수려한 매력이 국악기의 특색 있는 음색으로 표현되고, 새로운 음향과 분위기가 연출되어 한국적이면서도 이국적인 느낌을 동시에 받을 수 있었다. 3. 9현 거문고 협주곡 ‘Black Dragon’ ㅣ위촉 작곡 Donald Reid Womack 도널드 워맥(Donald Reid Womack)은 다양한 장르에서 수많은 곡을 써 온 작곡가로, 한국의 전통 굿과 제례 음악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며 전통문화를 표현한 곡을 많이 발표해 온 작곡가이다. 특히 전통 악기의 고유 음색과 무한한 표현 가능성을 다양한 시각에서 제시하며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던 음악을 만들어 내 왔기에 이번 작품에서는 어떤 새로운 매력을 보여줄지 기대를 품고 관람하였다. 9현 거문고 협연에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부교수이자 블랙스트링의 단원으로 세계적인 위상을 떨쳐 나가고 있는 허윤정 연주자가 참여했다. 이번에 초연된 작품 ‘검은 용(Black Dragon)’은 거문고의 고대 명칭인 ‘현금’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협주곡으로, 거문고 독주를 통해 강렬하고 상서로운 저널 속의 검은 용, 신령함과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용의 모습을 표현한 곡이라고 한다. 무대는 마치 용이 꿈틀대듯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고음의 크레센도 지속음이 반복되며 시작되었다. 웅장한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9현 거문고의 힘 있는 타점은, 딴딴하지 않고 느슨한 굵은 현을 울리며 더욱 힘 있고 묵직한 느낌을 주었다. 거문고는 꾸준히 변화하며 이어지는 장단을 기본에 두고 자유로운 연주를 펼쳐 나갔는데, 미완의 용이 완전한 존재로 승천하는 과정처럼 장단의 기본 강세와 다른 부분에 강세를 주거나 장단 위에서 빠른 비트로 음을 쪼개 펼쳐 나가는 등 정제되지 않은 특색 있는 연주로 점진적인 변화를 끌어냈다. 2악장에서는 하나의 짧은 주제 선율을 반복되는 리프 형식으로 계속해서 보여주었다. 독주 거문고가 제시한 주제 선율을 타악기의 리듬 꼴로 받거나, 관현악기가 번갈아 가며 뒤에서 반주하거나 앞으로 가지고 나와 연주하기도 하며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귓가에 맴도는 짙은 주제 선율과 함께 연주된 대금의 바람 소리가 섞인 반음계 선율, 그리고 악기들이 만들어 낸 슬프면서도 묘한 분위기 속에서 연주된 거문고의 애절하고도 어지러운 듯한 소리엔 용의 고독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마지막 3악장은 용의 온전한 힘을 폭발적으로 드러낸 악장이다. 3+2 소박이 반복되는 리듬 형태를 반복해서 들려주고, 그 위에서 거문고가 강약을 살리며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연주를 선보였다. 강한 아우라가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관현악과 타악의 장단 진행, 거문고 독주가 함께 어우러지며 용의 승천을 향해 함께 달려간다. 이때 서로 밀고 당기는 리듬으로 선율을 주고받고 확장시키며 풍물의 자유로운 에너지를 보여준다. 허윤정 연주자의 강렬하고 감성 어린 힘 있는 연주와 풍물의 신명나는 자유로움, 그리고 국악 관현악단의 우직한 분위기 조성이 한데 어우러진 이 무대는, 우리 음악의 다양한 매력과 면모를 ‘용’의 이미지로 감상해 볼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4. 사물놀이를 위한 국악관현악 ‘신모듬’ 작곡 박범훈 국악관현악의 정수로도 불리는 ‘신모듬’은 사물놀이와 국악관현악이 만난 최초의 곡으로, 오랜 시간 꾸준히 사랑받으며 연주되온 스테디셀러 관현악곡이다. 보통 3악장 '놀이'가 가장 많이 연주되는데, 이번 무대에서는 ‘풍물’이 주제였던 만큼 전 악장을 감상할 수 있었다. 사물놀이는 사물광대가 협연하였으며, 그들의 깔끔한 합과 세련되고 섬세한 연주는 사물놀이의 매력을 더욱 크게 느낄 수 있었다. 제 1악장 '풍경'은 농악의 장단을 인용한 악장이다. 1악장에서는 민요 성주풀이의 선율이나 동부민요의 시김새 등이 활용 및 연주되며 한국적인 우리 소리를 구현해 냈다. 1악장이 시작되고 바로 든 생각은, 국악관현악이 연주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던 시기에 관현악과 사물놀이의 합을 생각해 낸 박범훈 작곡가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네 개의 악기로 무대를 꾸리는 사물놀이를 국악 관현악 위에 얹은 것은 대단한 발상이며, 자칫하면 음향적으로 무너질 수 있는 부분을 오히려 더 강하고 감성 어리게, 한국적으로 살려낸 박범훈 작곡가에게 찬사를 보내며 음악을 감상하였다. 2악장 ‘기원’은 가정의 평화, 국태민안 등을 비는 뜻으로 작곡된 은은하고 평화로운 기원 악장이다. 정주의 맑은 여운이 귓가에 오래도록 맴돌며 선조들이 기원했던 안온한 삶을 함께 느껴볼 수 있었다. 사물놀이 악사들은 잠시 사물 악기를 내려놓고 정주나 작은 북 등을 활용하여 연주했는데, 2악장이야말로 안녕을 비는 기원과 관련이 깊은 ‘굿’, ‘풍물’과 가장 잘 어울리는 구간이라고 느꼈다.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원했던 모두의 바람이 들어가 있는 2악장의 음악은 한국적인 향수를 그윽이 자아냈다. 마지막 3악장 ‘놀이’는 말 그대로 신명 나게 치고 즐기는 무대였다. 관현악단과 사물패, 그리고 관객들까지 모두 함께 음악에 빠져들어 흥겹게 그 공간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사물광대의 눈을 뗄 수 없던 화려한 연주와 퍼포먼스를 통해 우리 풍물놀이의 신명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으며, 관객들의 ‘얼씨구’, 큰 박수와 함성과 함께 무대가 마무리되었다. 전통은 그 자체로도 지켜 보존해야 할 가치 있는 우리의 역사인 동시에, 계속해서 다방면으로 연구하고 실험하며 발전시켜야 할 지금 이 세대의 숙제와도 같다. 그런 의미로 전통예술의 동시대적 탐구를 엿볼 수 있는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2023 관현악 시리즈 ‘전통과 실험’은 음악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국악관현악이라는 장르 안에서 어떠한 전통 보존과 어떠한 실험을 해 나갈 것인가는 우리가 계속 고민해 나가야 할 중요 논제이다. 최명희의 소설 ‘혼불’에 나오듯, 내 선조의 선조와 그 너머 더 먼 선조의 숨결이 스민 자취가 지워지지 않는 터를 잡아 오늘까지도 자국을 역력히 남기고 있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그 아름다운 혼이 담긴 전통을 꾸준히, 그리고 창의적으로 이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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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정기연주회, 4편을 보다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이 5월 11일(목)과 12일(금), 이틀에 걸쳐 전통 곡을 재해석한 국악관현악 무대 ‘전통의 재발견 Ⅲ’를 선보였다.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전통의 재발견’ 시리즈는 현재 전승되고 있는 대표적인 전통곡들을 오늘의 음악으로 재해석하여 선보이는 무대로 지난 2년 동안 여덟 작품을 선보였으며, 올해는 그 세 번째 무대로 수제천, 평조회상, 씻김굿, 서도음악을 바탕으로 창작된 국악관현악 4곡이 무대에 올랐다. 새로이 창작된 음악이지만 전통곡을 재해석한 곡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어떤 형식으로 편곡되어 해석되었을지 기대를 품고 관람하였다. 1. 국악관현악으로 노래하는 수제천 ‘소중한 빛...’_작곡 강은구 ‘수제천(壽齊天)’은 ‘정읍사(井邑詞)’를 관악합주곡으로 연주하는 ‘정읍(井邑)’의 아명(雅名)이다. ‘정읍사’는 멀리 떠나 있는 이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람의 노래로, 이를 위해 강은구 작곡가는 이 노래에 나오는 사람의 간절한 마음에 주목하여 작품의 한 축은 차분한 가곡조의 여창으로, 다른 한 축은 꽹과리, 징, 장구, 북, 모듬북 등으로 그리움의 이면에 끓어오르는 마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무대는 피리가 빠져있는 상태로 관악기들이 기존 수제천의 선율을 연주하며 시작되었다. 수제천의 백미로 꼽히는 연음형식(음이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연결되는 형식)과 악기별로 주고받는 구간이 기존의 수제천과 거의 동일하게 연주되었고, 피리와 대금, 해금, 아쟁이 적절하게 주고받으며 웅장하게 음악을 진행해 나갔다. 그러다 수제천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짧은 구의 선율을 발전시켜 현악기들도 함께 연주하기 시작하며 점점 음악이 빌드업되고, 꽹과리 등의 타악기가 점차 들어오며 자진모리장단으로 몰아가 정악과 민속악이 한데 어우러졌다. 웅장하고 정갈한 관악곡이 현악기와 타악기를 덧입혀 새로운 형태로 연주되니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신선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 안에 갑작스러운 반음계적 코드 진행이 들어와 전통 선율의 진행이 어딘가 희석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 위에 갑자기 서정적인 서양 음악적 화음 요소가 덧입혀지며 모든 장르가 어지러이 얽히는 느낌을 받아 아쉬움이 남았다. 역동적이면서도 감성적인 관현악의 연주가 어느 정도 끝나자, 정가앙상블 Soul지기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김나리의 노래가 시작됐다. 현재 정읍사는 노래가 남아 있지 않지만, 강은구 작곡가는 ‘소중한 빛(마음)을 널리 밝히는 노래’로 ‘중명지곡’을 만들었다. ‘달아 높이 솟아올라-’로 시작한 노래는 김나리의 맑고 청명한 음색으로 들으니, 마치 달빛 아래 유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가야금의 아름다운 아르페지오 선율과 악기들의 반주가 잘 어우러졌다. 비록 기존 수제천 음악과는 다른 분위기로 진행되었지만, 수제천을 관통하는 소중한 마음을 노래하던 희망이 음악에 짙게 묻어나 사랑과 희망을 더욱 느낄 수 있어 좋은 무대였다. 2. 대금과 피리를 위한 협주곡 ‘유초신지곡’_작곡 장석진 장석진 작곡의 ‘유초신지곡’은 거문고 중심의 줄풍류 ‘영산회상(靈山會上)’을 향피리 중심의 관현악곡으로 변주한 정악곡 ‘평조회상(平調會相)’을 바탕에 두고, 이 곡의 아명(雅名)인 ‘유초신지곡(柳初新之曲)’을 작품명으로 붙인 관현악곡이다. 무대가 시작하고 놀란 것은, 서양악기가 매우 많았다는 것이다. 스트링 계열 악기와 금관악기, 팀파니까지 합세하여 어떤 무대를 보여줄지 기대되었다. 무대는 상령산의 시작 선율인 ‘나니레-’를 시작으로 열렸다. 국악기로만 연주되던 기존의 상령산과는 달리 서양악기의 역동적이고 큰 사운드가 함께 연주되어 더욱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냈으며, 태평소가 염불도드리 멜로디를 연주하고 모든 악기가 tutti(다 같이 합주함)로 다 함께 음악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 후 협연자인 대금연주자 류근화의 대금 솔로로 음악은 다시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대금은 정악의 시김새가 확연히 드러나는 선율과 대금의 바람 소리 등의 특색을 보여주었고, 그 위에 자연스레 피리 연주자 임규수의 피리가 얹어지며 두 관악기의 유초신을 그려냈다. 이때 관현악단은 대금, 피리와는 다른 유초신 곡 선율을 반주하며 이질적이면서도 한데 어우러지는 신선함을 보여주었다. 이 곡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가야금이 아름다운 리프를 반복하는 선율 위에 다른 국악기들이 유초신지곡 선율을 감성적으로 연주한 부분이다. 현악기와 관악기가 역할을 나누어 주고받기도, 같은 선율을 연주하기도 하며 음악을 쌓아 올렸는데, 16비트나 엇박 등 다양한 리듬꼴을 활용하여 지루하지 않게 곡을 이끌어 나갔다. 마치 무릉도원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한 동양적 분위기를 자아내며 신비로움을 조성했고, 그 안에 유초신, 우리 정악의 선율이 확실하게 깔아냄으로 전통의 색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대금과 피리가 독주로 연주하는 카덴자 구간에서는 서양 현악기-바이올린, 첼로, 베이스-와 특종이 함께 반주함으로 오묘한 화성 진행으로 이국적이면서도 동양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 후 국악기가 들어오고 나서 진행된 화성이나 선율이 서양악기로 연주되었던 부분과는 극단적으로 달라 흐름이 깨지고 국악기, 서양악기가 잘 어우러지지 않는 듯 해 아쉬움이 남기도 했지만, 모든 악기가 한데 어우러져 이 시대의 새로운 유초신지곡을 만들어 낸 것이 인상적이었고, 특히 관악기의 부드럽고 힘 있는 협연이 함께 연주되어 더욱 단단한 한국적인 미를 느낄 수 있었다. 3. 아쟁ㆍ가야금ㆍ목소리를 위한 협주곡 씻김(Redemption)_작곡 유민희 유민희 작곡의 ‘Redemption’은 이태백 명인이 구성한 ‘진도씻김굿’의 틀에 작곡가가 직접 채보한 이완순 무녀의 희설(진도씻김굿 가운데 무당이 부르는 노래) 중 앞부분의 선율과 장단, 박병천의 ‘남도굿거리’ 가락을 적용한 곡이다. 종교적 구원을 의미하기도 하는 작품명 ‘Redemption’은 진도씻김굿의 구체적 재현을 담고 있으면서도,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슬픔과 구원에 관한 주제를 작품 안에 담아내,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삶의 무게나 슬픔은 아쟁과 대금으로, 삶의 끝이 평안을 기약하는 잔치라고 말하는 부분은 소리로 표현했다. 가야금과 징의 특색있고 집중되는 단조 선율로 구성된 반복적인 리프 위에 아쟁의 진계면 선율이 덧입혀지고, 관현악단이 다 함께 힘껏 웅장한 계면조 선율을 연주함으로 무대가 시작되었다. 아쟁 협연자 이태백과 가야금 협연자 이지혜는 진양 장단에 맞추어 계면조를 활용한 솔로를 연주했는데, 가야금과 아쟁이 조화롭게 빚어내는 남도제 연주에는 우리 음악의 특징적인 애환과 울림 있는 매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앞서 진계면이 연주되었다면 ‘남도굿거리’에서부터는 김나영 소리꾼의 소리가 덧입혀지며 신명 나는 잔치 한마당으로 우리 민족의 흥이 드러났다. 성주풀이를 비롯한 평조 선법의 연주가 진행되니 다양한 민속악적인 요소가 관현악에 붙어 더 웅장하고 한국적이었다. 또 굿거리와 타령 장단 위에 평조 선법과 반음 음계도 등장하며 다양한 음악적 시도 또한 볼 수 있었는데, 반음 루트 진행에 감성적인 느낌을 주고자 한 것은 좋았으나 조금은 익숙한 레퍼토리의 화음 진행이 전체적인 민속악 색채를 내는 곡 안에서 조금은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해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망자를 떠나보내는 슬픔과 살아남은 자에게 남겨지는 희망을 함께 보여주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인상적이고 감동적이던 무대였다. 4. 국악관현악 ‘풍류 그 너머에’_작곡 강상구 강상구 작곡의 ‘풍류 저 너머에’는 서도풍류, 서도민요 등 서도 지방에서 전승되어 내려오는 전통음악의 독특한 음악적 어법을 국악관현악으로 재창작한 작품이다. 무대는 모든 악기가 ‘서도풍류’를 연주하며 시작되었다. 서도풍류는 대중적으로 많이 연주되지 않는 곡이기에 관현악으로 함께 연주하는 이 무대가 더욱 특별하게 와 닿았고, 서도음악 위에 대중적이고 감성적인 베이스 화성진행 리프를 덧입힌 것 또한 인상적이었다. 이어서 서정적인 봉산탈춤을 연상시키는 선율로 곡이 이어졌는데, 신명 나는 장단에 맞추어 악기들이 함께 맺고, 끊고, 시김새를 표현하며 서도제의 느낌을 물씬 드러냈다. 장단은 다양하게 변화했으며 그 변화 안에 웅장한 악기들의 앙상블이 크게 돋보였다. 생황이 연주된 구간도 독특했는데, 묘한 선율과 민속악적 분위기가 어우러지며 마치 북청사자놀음을 보는 듯 동양적이면서도 이국적인 느낌을 주었다.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앞서 나온 서도민요의 선율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음악이 웅장하게 마무리되었다. 이 곡은 전반적으로 타악기의 역할이 매우 컸는데, 역동적이고 장단의 역할이 뚜렷한 것은 좋았으나 계속해서 달려 나가는 이미지 가운데 서도제의 색이 갈수록 흐려지는 것 같아 아쉬웠다. 하지만 현재 많이 연주되지 않는 서도음악을 중심으로 만들어 낸 관현악곡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 너머의 세상을 잠깐이나마 바라볼 수 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수제천’, ‘유초신지곡’, ‘진도씻김굿’, ‘서도풍류’ 라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우리의 전통음악이 국악관현악 곡으로 탈바꿈하여 대중들에게 선보여지는 순간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참 좋은 기회였다. 전통은 우리가 아끼고 지켜내어 원형을 고수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 전통을 현대의 흐름에 맞게 재해석하고 재발견하여 새로운 흐름으로 만들어 내는 것도, 또한 중요하기에 이번 공연이 더욱 뜻깊게 다가왔다. 하지만 네 곡 모두 기존의 창작 관현악곡과 뚜렷하게 다른 큰 특징이 드러나지 않고, 화성진행이나 음악적 요소가 거의 익숙한 래퍼토리로만 연주되어 아쉬움이 남았다. 전통을 살리되 더 새롭고 다양한 시도가 가미되어 연주된다면, 전통을 비롯한 국악관현악이 더 넓게, 멀리 발전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모든 국악인의 '현대적 계승'에 대한 행보를 마음 깊이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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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에 '아리랑'을 심은 두 주역을 만나다지난 4월 22일, ‘아리랑’을 주제로 부다페스트의 복합문화공간(Magvető Café)에서 강연이 진행되었다. 이 강연은 해외문화홍보원(KOCIS, 원장 김장호)과 주헝가리 한국문화원(원장 인숙진, 이하 문화원)은 '코리아 살롱 1.5' 라는 제목으로 총 4회에 걸쳐 진행되는 인문 예술 강좌 중 첫 번째 회차이다. 강연에는 45년의 역사를 지닌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이자 ‘아리랑의 연구자’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김연갑 선생이 강연자로 나서, ‘아리랑은 한국의 창窓’이라는 주제로, 아리랑의 역사와 세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의 위상, 해외 전파와 디아스포라 아리랑, 민요에서 모든 장르로 확산된 문화로서의 아리랑, 그리고 한류의 원류로서의 아리랑의 의미 등을 정치, 외교, 문화예술 영역의 역사적 사건과 함께 풀어갔다. 강연 후에는 민요를 기반으로 대중적인 음악 활동을 해 나가고 있는 음악집단 ‘민요밴드 bob(비오비)’의 공연으로 현지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헝가리에서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5월의 초입, 강연자 김연갑 이사장님과 민요밴드 bob를 함께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안녕하세요! 얼마 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국악을 널리 알리고 오신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먼저 헝가리에서 아리랑에 관해 강연을 맡아주신 김연갑 이사장님께 질문드릴게요. 이사장님께선 옛날부터 아리랑의 보편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 오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해외, 외국인 대상의 강연은 이번이 몇 번째였나요? A. 한러수교 직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구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주최의 아리랑 행사로부터, 일본, 중국, 사할린, 그리고 이번 헝가리까지, 이렇게 다섯곳에서 강연과 간담회를 가진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중국, 사할린은 청중이 대부분 교민이어서 통역 없이 했는데, 레닌그라드와 헝가리는 통역을 통해 했습니다. 이 두 곳은 부담이 컸습니다. 아리랑은 우리 현대사와 식민지 상황, 그리고 남북 분단 체재 등을 이해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 통역을 통한 강연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번 헝가리 행사로 이를 더욱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이에 대해 책임감과 함께 대책을 고심하고 있습니다. Q. 이번에는 민요에서 모티브로 음악을 만들어 내는 민요밴드 bob그룹 여러분께 질문드릴게요. 대중적이면서도 한국적인 bob그룹의 헝가리 공연 반응이 참 뜨거웠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공연을 마치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A. 헝가리의 원어가 아닌 우리 오리지널 민요를 보여드렸기에, 헝가리 대중분들에게 이 음악이 잘 와닿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었어요. 하지만 역시 음악은 만국 공통어라는 걸 다시금 느끼고 온 공연이었습니다. 관객분들 모두 음악에 집중하여 귀 기울여 주시고 공감해 주셔서 놀랐고, 큰 에너지를 받고 왔습니다. 관객분들이 음악에 임하는 자세가 매우 진지했어요. 매너가 참 좋으셔서 오히려 연주자로서 감동하였던 시간이었습니다. 타국의 민요와 전통음악이 외국인분들이 받아들이고 해석하기에 어려울 수도 있었을 텐데, 음악. 우리의 전통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해 주셔서 참 감사했어요. Q. 김연갑 이사장님께서 진행하신 아리랑 강연의 반응도 참 좋았다고 들었는데요, 옛날과 비교했을 때 해외에서의 우리 국악과 아리랑에 대한 입지 변화가 있나요? A. 당연히 차이가 있지요. 2000년 이전만 해도 외국에서의 반응은 6.25 전쟁과 관련한 아픈 사연을 연관 지어 말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필리핀 같은 나라에서는 아리랑이 나오는 록허드슨 주연의 ‘Battle Hymn’(전송가)같은 영화를 본 세대들이 많았으니까요. 이 반대 현상은 베트남의 경우지요. 파월 장병들의 위문공연 등을 통해 아리랑이 월남에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는 88올림픽 경기와 월드컵 대회 같은 국제적인 행사를 통해서 한국의 위상을 아리랑이 대신하게 되었어요. 특히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등재 이후 유럽에서는 아리랑을 ‘탁월한 보편성’을 지닌 노래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아 분명하게 차이를 느끼고 있습니다. Q. 이사장님께서 아리랑을 널리 알리고자 하시는 이유와 가치관이 궁금합니다. A. 아리랑은 한국인의 창조 정신을 입증하는 노래입니다. 90여 종에 1만 3천여 수의 노랫말을 가진 민족공동체 작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근대사 속에서의 기능 또한 특별합니다. 민중적 비애와 한(恨)에 의한 비극적 정조(情調)의 수렴제로, 권력에 대한 개인과 집단의 저항적 민중 의지의 발현체로, 고통과 모순을 극복한 미래 의식의 추동체로, 상상되고 가치화 되어 불리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리랑은 식민지를 거친 나라나 남북 분단과 같은 분열 상태에 있는 민족공동체에는 보편적 가치로 불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본조아리랑 같은 경우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모든 장르를 넘나드는 변용이 가능하여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가치와 특성을 세계인들과 함께하고자 해서입니다. Q. 이사장님의 끊임없는 노력만큼 아리랑이 앞으로도 더욱 위상을 떨쳐 세계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bob그룹이 이번 헝가리 공연을 위해 준비하셨던 레퍼토리는 어떤 것이었나요? A. 이번 헝가리 공연에서는 전통민요 아리랑을 비롯하여 전통/창작을 구분 지어 소개해 드렸어요. 원래 저희 팀은 창작음악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번 공연을 계기로 전통민요를 근간으로 만든 작품활동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평창아리랑과 본조아리랑을 공연했고, 음성군에서 전해지는 토속민요를 가지고 편곡한 ‘깨끼저고리’를 연주했습니다. 또 밴드식으로 편곡한 ‘경복궁타령’, ‘한오백년’을 모티브로 재즈 편곡한 기악곡 ‘섬머타임(Summer time)’을 선보였어요. 그리고 K-POP 가수 태연의 ‘아이’를 편곡한 곡과 민요 ‘권주가’를 모티브로 한 ‘주술’이라는 곡을 연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닐리리야’까지 연주함으로 헝가리 대중분들과 음악으로 즐겁게 소통했습니다. Q. 외국인을 대상으로 토속민요를 활용한 음악도 하신 게 신기합니다. 토속민요는 통속민요와 달리 잘 기록되고 전해지고 있지 않아 편곡에 어려움을 느끼셨을 법한데, 어떤 식으로 작업하셨나요? A. 토속민요 ‘깨끼저고리’의 경우에 음성군에서 구전으로 전래되는 민요를 복원해서, 민요의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는 '후렴구'를 가지고 작업했어요. 정확한 선율이나 리듬이 전해지지는 않지만, 시집살이 애환을 담고 있는 가사가 남아있어서, 시집살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창작하게 되었습니다. 토속민요로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게 확실히 어려운 작업이긴 하지만, 대중분들께 친숙하게 우리 토속민요를 들려드리기 위해 계속해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답니다. Q. 민요를 중심으로 두고 작업할 때 가장 염두에 두고 작업하시는 건 어떤 부분인가요? A. 기존에는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민요가 갖고 있는 특유의 느낌을 전해주려고 노력했었어요. 그리고 요즈음은 민요에서 모티브만 따 와서 새로운 가사를 창작하고, 다양한 변화를 통해 현대인들이 조금 더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새로운 방향으로 작업을 해 나가고 있어요. 음악적인 코드나 선율 등의 경우도 모두 함께 회의하며 발전시키고, 만들어 나가고 있어요. Q. 전통음악을 중심에 두고 서양악기로 음악을 만들어 나가며 특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요? A. (드럼) 장단이나 리듬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녹여낼 수 있을지 늘 고민하고 있어요. 드럼세트에 꽹과리를 얹는다든지, 다른 창작국악팀은 어떻게 장단을 사용하는지 항상 살펴보며 공부하고, 음악에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기본 장단 외 변형 장단까지도 살펴보며 장단을 활용하기도 하고요. 제가 국악 전공이 아니다 보니 조금 더 많이 고민하고 생각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드는 생각은, 무엇보다 민요. 소리에 리듬을 자연스레 맞추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음악을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해금) 저희가 처음 모였을 때는 실용음악의 칼박에 맞추는 리듬과 국악에서 맞추어 나가는 호흡이 조금 안 맞아 합주에 어려움이 있기도 했어요. 하지만 계속 함께 음악을 하다 보니 서로 듣고 호흡하며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저희 모두가 서로의 소리를 알고 이해하다 보니 우리만의 호흡이 생겼달까요? (건반) 코드 진행 같은 경우 무엇보다 민요에 너무 많은 코드의 변화를 넣을 때 원곡을 헤칠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대중적이면서도 깔끔한 코드 진행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 특징적인 섹션이나 실용음악적인 색을 자연스레 녹여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과하지 않은 선에서 전통을 살리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요. Q. 이번 공연에서 헝가리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bob그룹의 음악적 고민이 궁금합니다. 우리 아리랑을 어떻게 알리고 싶으셨나요? A. 사실 처음에는, 한국의 아리랑을 조금이라도 알리고 오자는 취지가 가장 컸어요. 우리 민요와 전통에 그들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런데 공연을 가서 함께 아리랑 강연을 듣고 공연하다 보니, 그저 아리랑과 우리 전통음악을 기억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들이 ‘공감’할 수 있게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한국의 전통음악을 매개로 그들의 마음 안에 어떠한 위로와 정서를 남기고 싶었어요. 우리나라 음악만이 가진 애환이나 흥과 신명 등의 특징적인 정서를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싶었던 거죠.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참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Q. 젊은 창작 국악팀으로서, 어떤 가치를 두고 음악을 만들어 나가시는지 궁금합니다. bob그룹은 어떤 음악을 하는 팀으로 기억되고 싶나요? A. 저희는 민요를 중심으로 두고 음악을 하는 팀이기에, 아무래도 ‘민요’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민요는 옛날 대중들의 음악이잖아요. 그 당시의 대중음악을 지금도 대중들에게 편하게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요. 어디서든 흘러나오는 K-POP이나 클래식처럼 저희의 음악도 어디서나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었으면 좋겠어요.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이니까요. 전통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언젠간 대중분들도 참 편하게 좋아하실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들었을 때 좋은 음악. 무엇보다 이걸 가장 많이 추구하는 것 같아요. 사실 대중음악 페스티벌 무대에 서는 게 저희의 꿈이자 목표에요. 저희의 음악이 국악이라는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그냥 하나의 ‘음악’으로 인식되어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편하게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저희가 연주하면서도 신나고, 편하고 즐거운 게 먼저겠죠? 늘 저희가 즐겁고 좋은 음악을 하려고 해요. 그렇게 하다 보면 모두가 좋아하는 음악을 오래오래 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Q. bob그룹의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A. 이번 헝가리 공연을 계기로 해외 공연을 조금 더 가려고 많이 알아보고 있습니다. 외국의 대중들에게 우리 전통음악을 대중적으로 더 많이 알리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또 늘 저희가 음악 작업을 하며 깰 수 없었던 틀이 있어요. 저희가 생각하는 ‘대중적인 음악’만 고려하지 않고, 진짜 대중들이 무얼 좋아하는지 더 많이 듣고 공부하며 bob만의 음악 색깔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싶어요. 새로운 작·편곡 방향을 시도하며 앨범 발매도 할 예정이니,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Q. 이사장님의 앞으로 계획과 준비하시는 일정은 어떻게 되시나요? A. ‘사할린아리랑제’를 3년간 하다 코로나로 인해 중단된 것이 가장 가슴 아팠습니다. 이제 코로나가 끝나가 다시 할 수 있으려나 했지만, 또다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대중공연을 하지 못하게 되어 올해에도 못 갈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크네요. 또 2012년 중국과의 아리랑 갈등 후유증이 아직 남아있어 가장 긴밀했던 연변 교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를 복원하는 일이 급합니다. 마지막은 코로나 이전 9회까지 해 온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이 중단되어 크라운 해태와 논의를 통해 재개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마음은 너무나 바쁜데 지난 10월에 코로나를 앓은 후 몸이 너무 무거워져서 걱정입니다. 그래도 차근차근 다시 준비하며 진행해 나갈 예정입니다. 김연갑 이사장님의 오랜 세월 아리랑을 향한 사랑이 보여주는 뜨거운 열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단단해져감을 공감했고, 그러한 단심이 이번 헝가리 행사에서도 빛을 발했다고 본다. bob그룹과 인터뷰하는 내내 느낀 것은, 무엇보다 이들의 팀 분위기가 매우 좋다는 것이다. 서로를 허물없이 편하게 대하며 음악적인 것들을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공유했다는 것이 모두의 대화에서 드러났고, 함께 더 즐겁고 좋은 음악을 만들어 내겠다는 열정으로 똘똘 뭉쳐져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의 명맥을 더 널리 이어 나갈 김연갑 이사장님, 국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국악의 장르에 국한되지 않은 ‘좋은 음악’ 그 자체를 대중들에게 더 많이 들려주고 싶다는 bob그룹, 앞으로 보여줄 그들의 멋진 행보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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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이 들려주는 하나의 수궁가 ‘절창 1’국립창극단은 이 시대 젊은 소리꾼의 참신한 소리판을 선보이기 위해 2021년부터 ‘절창 시리즈‘를 기획하여 선보였다. ’절창‘은 우리 소리의 전통을 이어 가면서 참신한 구성과 현대적인 무대를 통해 소리꾼들이 자신의 기량을 맘껏 펼치며, 관객들과 더욱 친밀하게 교감하고 소통하는 새로운 형태의 판소리 공연이다. 올해는 총 세무대로 나뉘어 진행되며, ‘절창Ⅰ’에서는 소리꾼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절창Ⅱ’에서는 민은경과 이소연이, ‘절창Ⅲ’에서는 안이호와 이광복이 각각 무대를 맡아 2인극 형식으로 무대를 꾸린다. 4월 27일 목요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국립창극단의 김준수와 유태평양의 ‘절창Ⅰ’을 시작으로 ‘절창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국립창극단의 단원이면서 막역한 친분을 보여 온 두 소리꾼이 만들어 낸 이 무대에서는 이들의 ‘수궁가’를 들을 수 있었다. 수궁가는 현존하는 판소리 중 유일한 우화로 해학과 풍자가 가득한 작품이며, 두 소리꾼 모두 수궁가 완창 경험이 있기에 이들이 함께 만들어 내는 짜임새 있고 새로운 수궁가는 어떨지 기대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수궁가의 유명한 하이라이트 부분만 모아 구성한 이번 무대는 빠른 이야기의 진행과 유쾌하고 흥미로운 연출로 관객들의 집중도를 높여 무대를 즐길 수 있게 꾸며졌다. 김준수와 유태평양은 역할에 따라 소리를 나누어 부르는 분창(分唱)에서 벗어나 판소리 장단에 맞춰 가사를 주고받거나 등장인물을 번갈아 넘나들며 역할을 맡아 부르고, 연극적인 요소를 다양하게 보여주며 무대를 채워나갔다. 이 무대를 연출한 남인우 연출가에 의하면, ‘전통 판소리의 동시대성을 어떻게 극장에서 구현하느냐’에 중점을 두며 구성한 2021년 ‘절창Ⅰ’에서 고민에서 더 나아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더욱 성숙해진 두 소리꾼의 면면이 잘 보이도록 작품을 전반적으로 보완했다고 한다. 소리꾼의 발림(판소리에서 창자가 소리의 가락이나 사설의 극적인 내용에 따라서 손·발·온몸을 움직여 소리나 이야기의 감정을 표현하는 몸짓)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청각적 상상력이 시각적 상상력으로 전환됨을 활용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무대에서 여실히 잘 드러났다. 자라와 토끼, 각종 동물을 흉내 내 연기하고, 노래하며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은 마치 극 중 모든 동물들이 눈앞에서 대화하는 듯 생동감이 넘쳤다. 특히 이들의 표정 연기와 몸짓이 그 역할을 충실히 해 주었는데, 쫓아가고, 쫓기고, 쓰러지고 깡충깡충 뛰는 등의 다양한 몸짓을 통해 더더욱 소리와 이야기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판소리에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특히 수궁가는 동물들이 주인공이 되어 육지와 바다를 넘나들고, 장면이 다양하게 전환되어 이야기적 요소가 매우 크다. 김준수와 유태평양은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쉽고 흥미롭게 전달해 주기 위해 중간중간 유머를 곁들이고, 관객들에게 말을 걸며 소통하기도 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소리 대목의 경우 소리를 하기 전에 그 대목과 장면에 대해 쉽게 설명해 주기도 하였다. 별주부가 토끼를 꾀어 등에 업고 용궁으로 들어갈 때 풍경의 아름다움을 부른 ‘범피중류’를 부르기 전 관객들에게 천천히 그 가사를 읊어주며 소리의 시적인 아름다움을 쉽게 와닿을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관객들은 소리를 듣기 전 가사를 천천히 음미하며 더욱 시각적 이미지를 연상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경드름’에 대해 설명할 때는, 관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소리가 불리던 시대와 그 느낌, 부르는 방식까지 찬찬히 설명해 주니 판소리를 어렵지 않고 쉽게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대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소리 중간중간 계속하여 소리와는 관계없는 설명이나 이야기를 하느라 수궁가 자체의 이야기 흐름이 끊기는 것은 아쉬웠다. 관객과의 소통은 좋았으나 이야기의 맥이 끊긴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 점이 조금 보완된다면 다음 절창 무대에서는 더욱 완성도 있는 무대를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악기 반주로는 계속해서 소리를 반주해 주는 고수의 북, 거문고, 피리(생황, 태평소), 타악기가 사용되었다. 소리의 적재적소에 악기가 덧입혀짐으로 수궁가의 희로애락과 감성, 유쾌한 감정을 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유태평양이 유쾌하게 ‘별주부 호생원 부르는 대목’을 부른 후, 김준수가 등장하며 호랑이가 위엄있게 등장하는 대목인 ‘범 내려온다’를 부르며 등장할 때는 태평소의 우렁찬 소리와 힘 있는 타악기의 타점이 어우러지며 좌중을 압도했으며, 섬세하고 아름다운 생황 선율과 평온한 파도 소리 위에 얹힌 ‘범피중류’는 바다의 아름다움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생황은 특히 무대의 처음과 끝에 밝고 웅장한 주제선율을 연주하며 두 소리꾼의 따뜻하고 즐거운 공연을 성황리에 시작하고 끝낼 수 있도록 해 주어 무대가 더욱 빛났으며, 다른 서양악기 없이 최소한의 국악기로만 사용되었기에 더욱 판소리 자체에 집중하면서도 한국적이고 다채로운 효과를 동시에 누릴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두 소리꾼의 이야기와 음악을 넘어 가장 좋았던 건 역시나 ‘소리’ 그 자체였다. 각기 다른 음색과 특징을 소유하고 있는 두 명의 소리꾼이 부르는 서로 다른 소리를 통해 그 힘과 매력을 다양하게 느낄 수 있었으며, 동시에 두 소리꾼이 하나 되어 화합된 무대를 꾸려나가는 것 또한 의미 있었다. 소리와 더불어 두 소리꾼의 우정과 화합, 하나 되는 호흡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두 명이 꾸려나가는 소리 ‘절창’의 큰 매력 중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관객들은 무대가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수궁가의 등장인물을 통해, 두 명의 소리꾼을 통해함께 웃고 울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고, 공연이 끝난 후 그들을 향한 박수갈채는 끝날 줄 몰랐다. 김준수와 유태평양은 수궁가를 통하여 인생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판소리의 진짜 멋을 선보이며, 힘들고 지치는 날 안에서도 웃을 수 있는 쉼을 선사한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는 토끼처럼, 첩첩산중 가운데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를 위로해 주며 힘을 전해주었던 편안하고 쉼이 된 공연 ‘절창Ⅰ’. 누군가가 이들의 판소리를 통해 얻었을, 불안하고 위태로운 시간을 넘어설 힘을 응원하며, 두 소리꾼이 앞으로 보여줄 가치 있고 깊이 있는 무대를 더욱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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