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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6)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초의와 차선고도 남도의 물길 따라 교우했을 옛 연인의 터에 앉아 그윽한 차향 맡는 것 어쩌면 내게 주어진 과분한 소확행일지 모르겠다 연하(烟霞)가 난몰(難沒)하는 옛 인연의 터에/ 중 살림 할 만큼 몇 칸 집을 지었네 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 간짓대 이어 백운천(白雲泉)을 얻었으며 다시 좋은 향과 약을 캐나니/ 때로 원기(圓機)로써 묘련(妙蓮)을 펴며 눈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초의선사가 일지암을 짓고 지은 시라 한다. 일지암을 아는 사람들은 이 시가 형용하고 있는 풍경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짙은 운무 출몰하는 비경과 초암에 앉아 차 한잔하는 즐거움이 보이지 않는가. 대흥사 일지암이 지금은 운용의 묘를 살린 탓인지 여러 채의 절간들이 들어서 있지만, 그 중심은 예나 지금이나 초암 곧 일지암에 있다.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각양의 인사들과의 교류가 낳은 총화라고나 할까. 여기에 초기 카톨릭의 숨겨진 영향까지 거론한다면 불선(佛禪)을 넘어선 유불선기(儒佛仙基)를 거론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초의는 본래 무안(당시에는 나주에 속함) 삼향 사람이다. 지금은 삼향에 초의기념관이 들어서 있고, 용운스님의 노력으로 일지암도 재현해두었다. 어떤 인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이곳에 터를 잡고 주경야독하는 중이다. 나는 곧 출판되는 졸저에서, 무안만(남도만과 무안만에 대해서는 본 칼럼에 여러 차례 소개하였다)의 차와 이를 재구성할 차선고도(茶船古道)를 상정하고 '고양의 길'이라는 표제를 붙여 두었다. 불교 중심으로 차 문화가 확장되었고, 스님들 중심으로 차 생활이 보편화 된 것도 어찌 보면 스스로를 고양하는 첨단의 콘텐츠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세간에 차와 명상, 힐링, 수련, 영성 등의 조합을 이룬 다종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추사가 남긴 명선(茗禪)이라는 글씨가 그 행간에 있다. 추사가 초의에게 지어준 호이기도 하다. 대개 이를 '차를 마시며 선정(禪定)에 든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문자 그대로 명(茗)은 차의 싹을 말하는 것이니 차를 마시며 선을 행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구체적인 차선고도의 루트나 프로그램을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차가 명상이나 요가, 이른바 마음수련에 있어 최고의 콘텐츠라는 생각은 부기해 둔다. 정민 교수의 작업에 기대어 차선고도(茶船古道)를 상상하다 중국에서 한해륙에 이르는 이른바 뱃길을 전제해본다. 초의에 앞선 차문화 정리의 맥락이기도 할 것이다. 정민이 쓴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글항아리, 2018)는 차선고도를 설정하는 데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지면상 몇 가지만 인용해 공부자료로 삼는다. "18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의 해금 정책이 풀리자 중국의 서남해안에서 북상하는 뱃길이 열렸다. 배를 통한 물류의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서남 연안에 중국 상선의 표착이 부쩍 늘어났다. 특별히 1760년 서해안에 표착한 중국 배에는 황차(黃茶)가 가득 실려있었다." 또 이덕리의 '기다' 중 '다설' 제3조에 남은 기록을 보고하고 있다. "경진년(1760, 영조36)에 차 파는 상선이 와서 온 나라가 그제야 차의 생김새를 처음으로 알았다. 이후 10년간 실컷 먹고 떨어진 것이 하마 오래되었는데도 또한 채취해서 쓸 줄은 모른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 사람에게 차는 그다지 긴요한 물건이 아니어서 있고 없고를 따질 것이 못 됨이 분명하다. 비록 물건을 죄다 취한다 해도 이익을 독점한다는 혐의는 없을 것이다." 정민은 이외에도 박제가의 '북학의'를 인용하며 1760년에 왔다는 표류선의 존재를 보고하고 있다. 황차와 관련된 내용이다. 지면상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관심 있는 분들은, 1762년 11월 7일자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표류선 기사를 참고해도 좋다. 정민은 사흘 뒤인 11월 12일자 '승정원일기'를 인용하며 중국 표류인들이 가져온 황차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표류선 관련 기록에서 황차가 등장하는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고군산진에 표착한 절강 상인의 배에 황차엽이 대량으로 실려있었고 당시 금주령 상태에 있던 조선에서 이 황차는 제사 때 쓰는 제주(祭酒) 대신으로 각광을 받아 수요가 갑작스럽게 급증하게 되었던 사정이 짐작된다." 이 시기 중국 남쪽 배들의 서남해안 표착이 상당히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금주령 하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황차가 특수를 누리면서 비로소 차의 존재가 조선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초의의 차를 가까이하게 된 것도 이런 시대적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초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덕리를 공부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민의 연구들을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다. 초의 이전의 이덕리에 대한 정보는 정민이 거의 유일하고도 상세하게 연구해놓았기 때문이다. 차마고도에서 차선고도까지 주지하듯이 차마고도(茶馬古道, Ancient Tea Route/ Southern Silk Road)는 비단길보다 먼저 생긴 무역로이다. 중국의 윈난성, 쓰촨성에서 시작된다. 티베트, 인도, 파키스탄 등지를 거쳐 실크로드로 이어진다.위키사전의 설명을 빌리면, 마방(馬幇)이라 불리는 상인들이 말과 야크를 이용해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서로 사고팔기 위해 지나다닌 길이다. 차와 말만 사고팔았겠는가. 당연히 이곳을 통해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 졌음을 알 수 있다. 전성기에는 유럽까지 연결되기도 했다. 해발고도 4000미터가 넘는 험준하고 가파른 길이지만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길로도 유명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2007년 KBS에서 6편으로 구성한 차마고도에 관한 다큐멘터리 '인사이트 아시아-차마고도'부터이다. 나도 여러 차례 윈난지역을 방문하여 관련 정보들을 갈무리한 적이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무역로라고 추정하는 길이기도 하다. 차선고도(茶船古道)는 이에 착안한 것이다. 광의의 차선고도는 멀리 중국으로부터 뱃길을 통해 우리와 연결된 항로 혹은 차도(茶道)를 말하는 것이고, 협의의 차선고도는 초의선사의 생가인 현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 혹은 신기마을에서 출발하여, 어린 나이에 출가한 나주의 운흥사로, 다시 평생을 보낸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까지 이어지는 길, 나아가 강진, 보성, 하동 등을 연결해본 것이다. 지금은 뱃길이 막혀있지만, 물골이 있던 때를 상상하여 이 루트를 재구성한다면 틀림없이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초의선사 생가 아래 오두막 하나 짓고 살면서 차에 대해 상고해나가는 중이다. 아마 초의선사가 고금의 중매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기회가 되면 소개하겠지만 차는 분청사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찍이 일본인들이 국보급 예우를 했던 분청사기는 사실 남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생활 용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리보다 먼저 이들이 분청이 가진 미학에 주목하였고 끝내 일본 최고의 다기로 대접하기에 이르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차나무에 귀를 대고 들으니 곧 새싹이 올라올 듯하다. 아, 봄이로구나. 올해는 보다 어린잎을 따서 황차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남도의 물길 따라 교우했을 옛 인연의 터에 앉아 그윽한 차향 맡는 것, 어쩌면 내게 주어진 과분한 소확행인지도 모르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대선이 끝났다. 승자에게는 축하의 차 한 잔, 패자에게는 위로의 차 한 잔 건넨다. 승자는 승자대로 패자는 패자대로 역할이 있을 것이다. 혐오와 배제는 저만치 던져버리고 오직 나라의 융성을 도모하는 데 힘을 합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라 생각한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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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97)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일제강점기 야마다만키치로우(山田萬吉郞)라는 일본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여를 무안지역에 살면서 가마터와 분청사기를 연구했다. '미시마하끼메(三島刷毛目)'란 이름의 책이다. 무안문화원에서 무양향토문화총서 9호로 '야마다만키치로우가 바라본 무안분청사기 귀얄문'(2020년)이라는 번역본을 출간했다. '삼도'는 분청(粉淸)을, 쇄모(刷毛)는 귀얄을 말한다. 분청은 조선시대 자기의 하나다. 청자에 백토로 분을 발라 다시 구워낸 양식이다. 회청색 혹은 회황색을 띤다. 귀얄은 풀이나 옻칠할 때 쓰는 솔의 하나로 수수붓이라고도 한다. 주로 돼지털이나 말총을 넓적하게 묶어서 만들기에 그 문양이 투박한 느낌을 준다. 책의 목차들을 보니 무안의 분청, 무안출토 분청 고찰, 무안분청을 통해서 본 조선도자기 등 모두 무안지역의 분청사기를 추적하고 분석한 글들이다. 무안지역이 분청사기의 중심이었다는 뜻일까? 하지만 당시의 무안분청은 광주군(광주시), 보성군, 나주군, 함평군, 무안군 등을 포괄하는 광역 개념이다. 고유명사처럼 사용했던 무안분청은 사실상 영산강 일대의 분청이었던 것이다. 이들 지역을 포괄하는 맥락으로 호명하였으니 영산강 분청사기의 핵심이 무안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안분청일까 영산강분청일까? 조선 분청사기의 성립과 삼도(三島, 미시마)의 발산 조선분청사기의 요모조모를 개괄적으로 풀이해둔 연구가 있다. 「조선분청사기 '귀얄문'에 나타난 직관적 '즉흥성'에 관한 연구」(방창현, 이헌국, 2014)가 그것이다. 여기 그 성과를 간략하게 요약해두고 공부자료로 삼는다. 고려시대에는 상감청자가 유행했다. 상감(象嵌)은 금속이나 도자기, 목재 따위의 표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겨서 그 속에 같은 모양의 금, 은, 보석, 뼈, 자개 따위를 박아 넣는 공예기법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상감청자와 나전칠기가 발달했다. 근대기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었던 자개농이 상감기법을 활용해 만든 것이다. 조선전기에는 분청사기가 발달한다. 청자의 시문기법을 계승한 양식이다. 분청사기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학자들이 미시마(Misima, 三島)라고 부르던 용어를 번역한 것이다. 고유섭(1905~1944)이 잡지 '조광(朝光)' 1941년 10월호에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고 언급하며 분청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분청의 기법은 화장토(clay slip)를 도자기에 바른 후에 장식하는 기법이다. 조선에서 자생한 고유양식은 아니고 중국 육조 후기인 6세기 월주요(越州窯)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시문기법이 조선의 것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삼강기법이나 분청 즉 귀얄기법은 다른 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은 조선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세종 이후에는 주로 국가에 진상하는 공납용으로 제작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전국에 자기소 139개, 도기소 185개 등 모두 324개의 도자소'에서 대부분 분청사기를 생산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5세기 중반 지배층 사이에서 백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관요라는 관청이 설치되고 백자의 수요가 급증하자 분청사기의 생산은 쇠퇴하게 된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사기장들에 의해 분청의 기술이 일본에 소개되고 전수된다. 16세기 후반 야마노우에소지(山上宗二)는 조선의 분청 다완(찻그릇)을 천하제일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그만큼 일본인들이 선호하던 양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분청의 기법은 상감, 인화, 박지, 철화, 조화, 덤벙, 귀얄 등이 있는데 이 중 귀얄기법을 가장 선호하였던 것 같다. 무안분청의 세계관과 서민예술로서의 미학 무안분청의 세계관을 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위 논문을 쓴 방창현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무기교의 기교'라는 맥락으로 분청의 세계관을 분석한다. 이것이 회화로 바뀌면 달마도처럼 직관적인 표현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과감한 생략과 절제, 무욕과 해탈, 여백의 미를 톺아낸다. 작위적인 기교가 없으니 도교적 세계관과 통하는 것이요 무욕의 심미안을 표상했으니 불교적 맥락과 통하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공(空), 도교에서의 자유의지의 표현이라고나 할까. 이 심미관이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양식으로 분청사기에 표현되었으니 그 융숭깊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일본의 지배층을 통해 세계 최고의 다완(tea bowl)로 인정받은 조선의 분청사기, 특히 무안분청이 일본의 차문화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김인규에 의하면 미국과 캐나다의 도예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는 조선의 다완을 동양미의식을 넘어 종교와 사상의 차원으로 끄집어 올린다. 오래 전 내가 도쿄 외곽의 야나기무네요시 생가를 꾸며 만든 민예박물관을 찾았을 때 놀랐던 이유이기도 하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가면 현관 가운데 딱 한 개의 옹기만 놔두었다. 남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질그릇, 그것도 약간 비대칭인 투박한 항아리 말이다. 야나기가 종교와 사상으로 확대시킨 분청과 옹기는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무안분청의 기능을 배태한 영산강 유역의 흙과 불과 땔감과 무엇보다 이 예술적 미감을 표현해낸 남도사람들을 상고해보면 양반예술과 대비되는 서민예술의 그윽함을 추적해볼 수 있다. 여기 표현된 도교적 자유의지나 불교적 공(空)의 심미안은 영산강 사람들의 생태적이고 호방한 세계관의 지향 속에 생성된 것들이다. 내식으로 말하면 남도풍류와 남도 미학의 발흥이다. 어찌 무안분청이 뿌리 없이 생겼겠는가.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일 것이다. 영암의 도기와 해남의 초기청자, 강진의 청자, 무엇보다 영산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옹관까지 거슬러 오르는 장대한 줄기, 그 속에서 발현되는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작품들과 세라믹산업의 세계들 말이다. 남도인문학팁무안분청에서 생활도자 세라믹산업까지 강진청자, 여주백자와 함께 무안분청을 우리나라 3대 도자기 발상지라 한다. 무안과 목포는 분청과 옹기 등 생활자기, 강진은 청자 중심지다. 이외 해남은 초기청자의 발상지, 영암은 도기로 특화되어 있다. '목포대학교헬스케어도자명품화사업단(단장 조영석 교수)'에 의하면 무안지역 도자산업벨트는 전국 최대의 생활도자클러스터다. 양질의 점토와 풍부한 땔감, 무엇보다 영산강을 활용한 해상운송로의 특질을 배경삼아 발현했던 무안분청이 목포의 행남자기로 이어지며 오늘날 생활도자클러스터를 이뤘던 것이다. 행남자기가 이전해가긴 했지만, 도자기의 일관 체계를 갖춘 전국 유일의 특성화지역이고 10인 이상의 도자업체 중 전국의 55%, 전남의 80%가 무안지역에 집중해있다. 전남도에서 역점을 두고 실천하고 있는 남도문예르네상스 조성사업 중 하나가 도자와 차라는 점에서도 주목되는 지점이다. 도자기산업은 인공치아는 물론 세라믹 일반으로, 건축물에서 첨단공업제품까지 확장되고 있다. 특히 차의 중흥조이자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무안군 삼향 출생)와 관련되어 있으니 도자산업과 차산업은 일석삼조의 콘텐츠이자 향토산업인 셈이다. 지역문화 창발과 재구성의 임무를 맡은 곳은 어디일까. 영산강 토대의 유구한 무안분청을 토대삼고 제4차산업혁명의 시대 첨단산업까지 이끌어내는 곳 아니겠는가. 남도의 르네상스 그 중흥의 역사를 선도해나갈 클러스터, 목포대학을 중심으로 한 관학산업계에 거는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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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명승 지정 별서정원 9개소 역사성 검토문화재청은 "명승 지정 별서정원 9개소 정원의 만든 이와 소유자, 정원의 변화과정, 정원 명칭의 유래 등을 고증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정원의 지정가치와 역사성에 대한 중요한 정보들을 새롭게 밝혀냈다"고 27일 밝혔다. 별서(別墅)는 살림하는 곳 외에 경치 좋은 곳에 따로 지어 때때로 묵으면서 쉬는 집을 뜻한다.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 광주 환벽당 원림 3개소에 대해 정원이 만들어진 시기와 초기 형태를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조선 중기 전시서라는 인물이 은거하며 억새로 만든 정자를 1872년 재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그가 은거했던 곳 서쪽에 후손인 전재택 등이 새로 세운 정자인 사실이 확인됐다. 광주 환벽당 원림 일원은 사촌(沙村) 김윤제(1501∼1572)가 노년에 후학양성을 위해 지은 정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 환벽당은 그의 부친 김후(金珝)의 정자를 김윤제가 중수하여 건립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문화재청은 "정원은 오랜 시간을 거치는 동안 화재나 목부재의 부식 등으로 중수나 중건 등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정원이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 형태뿐만 아니라 이후 정원의 형태나 위치가 변경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정원의 역사성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문화재청은 강진 백운동 원림이 1678년 이전에 만들어진 사실도 새로 밝혀냈다. 별서정원에 대한 역사성 검토는 앞서 실존하지 않은 인물인 '조선 철종 대 이조판서 심상응'이 소유했다고 알려져 부실 고증 지적이 나왔던 서울 성북구 '성락원 논란' 이후 이뤄진 후속 조치다. 문화재청은 지난해에는 담양 소쇄원과 예천 선몽대 일원 등 11곳을 조사한 바 있다. 정원의 초기형태뿐만 아니라 중수나 중건이 새롭게 확인된 사례는 담양 명옥헌 원림과 안동 만휴정 원림, 밀양 월연대 일원, 화순 임대정 원림 4개소다. 용암정은 순조 원년(1801)에 임석형(1751∼1816)이 조부와 부친을 따라 노닐던 용암 위에 세운 정자로, 고종 원년(1864) 증손 임수학이 중수했다.화순 임대정 원림은 철종 13년(1862) 사애(沙厓) 민주현(1808~1882)이 건립한 정자다. 애당초 풀이나 갈대 따위로 지붕을 인 한 칸의 초정(草亭)으로 지어졌으나 시간이 지나 허물어졌고, 민주현의 손자 대호(1860~1932) 등이 1922년 정자를 중수하며 2칸을 더 짓고 기와를 올려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이 외에 강진 백운동 원림은 이담로(1627~?)가 정원을 만든 시기가 명확하지 않았다. 이번 고증 과정에서 김창집(1648~1722)의 옛 시를 통해 1678년 이전 만들어진 정원임이 확인됐다. 이담로의 6대손 이시헌(1803∼1860)이 정약용, 초의선사와 교류하며 차를 만들고 즐긴 기록 등을 통해 국내 차 문화 산실로서 가치가 더해졌다. 문화재청은 "이번 결과를 토대로 명승 지정 고시문과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를 정정할 계획이다" 며 "향후 지정되는 명승 및 별서정원에 대해서도 고문헌 고증 등 역사성 검토를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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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나주신청문화관 복원은 전라도 천년정원 조성사업 중 하나다. 2018년 전라도 정도천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것으로 전남과 전북이 함께 하는 사업이다. 천년정원은 나주향교와 나주읍성 서성문을 중심으로 오향(五香)마당 즉 판소리 등 전통음악, 전통 차, 음식, 서책, 서예와 공예 마당으로 구성된다. 전남도에서 나주시에 제안을 하여 공동 예산으로 편성된다. 첫째 마당은 판소리 서편제와 남도 삼현육각의 뿌리가 나주신청이라는 점, 사실은 나주시에서 이미 기획했던 사업이라는 점에서 의미부여를 하고 싶다. 둘째 마당은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나주사람 초의선사가 출가했던 사찰이 나주 운흥사라는 점 외에도 불갑사보다 14년이나 앞선 불교전래지 불회사나 차를 진상했던 다소면(지금의 다도면)이 아예 차를 표방하는 지명이라는 점 등을 주목할 수 있는 마당이다. 셋째 마당은 발효음식으로 이름난 전라도 음식 전반을, 넷째 마당은 유네스코 지정 서원 등 수많은 문학작품 등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다섯째 마당은 서화와 공예를 포괄하는 미술정원으로 계획된다. 나주신청문화관 개관으로 전라도 천년 소리정원의 첫 삽을 뜬 셈이니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조성될 천년마당에 거는 기대가 크다.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역대의 신청처럼 문화적 거점이자 미래지향적 모티프를 제공할 공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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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원문화재단, ‘2020 명원 세계차박람회’ 개최명원문화재단(이사장 김의정)이 8월 6일 목요일부터 9일 일요일까지 나흘간 서울 코엑스 B홀에서 ‘2020 명원 세계차박람회’를 개최한다. ‘2020 명원 세계차박람회’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접하기 어려웠던 보성, 하동, 장흥 등 국내외 명품 햇차를 한자리에서 보고·느끼고·참여하고·배우고·현장에서 직접 구입할 수 있는 명차 박람회다. 2020년 박람회에서는 특별히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K-인플루언서를 초청한 컬래버 프로그램을 만나볼 수 있다. 먼저 ‘Healthy Tea Bar’ 부스를 통해 현실 세계와 분리되는 공간감과 미니멀함을 강조한 차의 분위기에서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새로운 개념으로 만나볼 수 있는 특별체험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또한 특별 무대 프로그램 ‘Color&Free Your Mind’는 글로벌 인플루언서가 출연해 전통적인 문화에서 최근 건강하고 힙한 문화로 평가받고 개성 있게 향유하는 문화로 발전 중인 트렌드를 소개한다. 이어 우리나라 자연환경과 재료에 대한 영감(자연에 대한 태도), 내면과 외면의 힘 기르기, 뮤직비디오를 소개한다. 2020년은 명원문화재단의 전신인 명원다회를 설립하고 한국 차 문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차의 선구자 명원 김미희 선생의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이에 따라 명원 선생의 발자취와 유지를 돌아보는 의미 있는 행사들이 예정되어 있으며 ‘명원 탄신 100주년 기념관’에서는 명원 선생의 차 문화 부흥 운동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명원 선생은 1979년 한국 최초의 차 학술발표대회인 ‘한국전통다도 학술발표회 및 생활 다도 정립 발표회’를 시작으로 1980년 한국 최초 전통다례발표회 <한국 전통의식 다례발표회>로 궁중다례·사당다례·접빈다례·생활다례·사원다례 복원 발표했다. 한편 명원 선생은 한국의 다성 초의선사가 40년 동안 기거한 우리 차의 성지 일지암 복원을 일구었으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한 바 있다. 박람회에서는 유서 깊게 내려오는 명원문화재단의 각종 대회가 열린다. 한국 차 문화와 전통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자들을 격려하는 ‘제25회 국제차문화대상 시상식’과 차와 인성교육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제25회 대한민국 차인성대회’가 박람회 기간 중 개최된다. 그뿐만 아니라 제3회 차 패키지 디자인 공모전의 수상작 전시회도 박람회 기간 내내 열린다. 대상은 농림축산식품부장관상을 받게 된다. 올해 제3회 공모전은 총 69팀이 디자인을 출품해 총상금 1100만원을 두고 선의의 경쟁을 벌인다. 공모전 수상작은 예년과 같이 실제 차 농가의 차 패키지 디자인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우리나라와 세계 차 추세를 파악하는 ‘월드티포럼’은 △티 트렌드, 그 변화의 중심에 서다(김진평 티소믈리에) △4차산업혁명과 차 문화(유양석 국민대학교 교수, 한국차학회 부회장) △세계 10개국 차 소개(섀린존스톤 호주티마스터스 대표, 영상 강연) 등을 통해 차에 대한 견문을 넓히는 시간을 갖는다. 월드티포럼은 50명 지정석으로 한정돼 사전등록을 해야만 참가할 수 있다. 올해 처음 신설된 프로그램도 눈길을 끈다. 행사 전인 8월 5일 명원다도대학원에서 열리는 K-TEA 블렌딩 대회는 국내에서 자라고 생산된 차·허브·꽃차 등을 혼합해 만드는 블렌딩 티 중 가장 우수한 조합의 블렌딩을 선정하는 프로그램이다. 시상식은 8월 9일에 열린다. 한편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도 박람회장에 마련된다. 2020경상북도 우수 공예작품전을 통해 경북도예협회 소속 작가들이 도예품과 목공예 작품을 관람객에게 선보인다. 참가하는 작가들은 수십 년 도예 외길인생의 장인부터 참신하고 새로운 해석으로 우리 도자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신진 작가까지 다양하며 좀처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없는 귀한 작품들을 전시할 예정이다. 국내외 차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2020 K-TEA FESTIVAL·명원세계차박람회’에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사전등록, 얼리버드 및 이벤트 혜택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무료 초대권 수령은 물론 박람회 SNS를 통해 댓글 이벤트에 응모하면 상품권, 아이스크림 등의 경품을 받을 수 있다. 행사장 내에서도 개인 찻잔, 퀸엘리사베스 바이올린 콩쿠르 최연소 입상, BBC 뉴제너레이션 아티스트, 클래식 FM 30세 이하 톱 30 아티스트로 선정된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연주 CD 증정 등 깜작 이벤트가 진행될 예정이다. 특히 명원세계차박람회는 코로나19 상황에 철저히 대비해 진행된다. 주최 측은 사전등록 및 현장 등록을 통해 입장객 전원을 파악한다. 현장 발열 체크와 손 소독, 박람회장 내 마스크는 필수며 개인의 위생적인 시음을 위한 참가자 개인 찻잔을 증정한다. 최대한의 거리두기를 시행해 참가자 안전에 만전을 기할 예정이다. 명원문화재단 개요 명원문화재단은 한국 차의 선구자인 명원 김미희 선생의 의지를 이어가고 있는 한국 차 문화와 다도의 종가이다. 명원 다례 전수관, 궁중다례원, 명원 다도 대학원, 지리산 명원 茶園, 전국 지부와 지회, 해외 지부에서 명원 다인을 교육, 육성하고 있으며 한국 최초로 정규대학교에서 다례 수업을 시작한 국민대학교에서 다례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