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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그는 작가가 아니었다. 건축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만든 건축물을 보기 위해 세계에서 연간 1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한적한 프랑스 남동부 시골, 오트리브(Hauterives)를 찾는다.
페르디낭 슈발(1836~1934)은 평생 걷고 또 걸은 우편배달부였다. 소중한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해 하루 약 30km 거리의 궁벽하고 척박한 길을 돌아다녔다.
어느 날 돌에 채 넘어졌다. 돌을 원망하다 돌을 자세히 본 그에게 영감이 떠올랐다. 이후 걷는 걸음마다 주변을 살피며 돌을 모으기 시작했다. 모은 돌로 '짓기' 시작했다. 지으면서 건물의 구조와 형태를 상상하며 자기 머리를 채운 '이상'으로 향했다.
그가 지은 건축물에 '팔레 이데알 (Palais Ideal)', 즉 '이상의 궁전'으로 이름 붙였다. 건축물을 결코 단기간에 지은 것이 아니다. 직업에 충실하며 틈틈이 지었다. 궁전을 지은 시간은 무려 9만 3천여 시간, 약 33년이었다.
1879년에 돌을 모으기 시작해, 외벽을 짓는 데만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멈추지 않고 내부를 꾸며 마침내 1912년 꿈을 이뤘다. 가히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과 미술에 대해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오늘날까지 굳건한 아름답고 튼튼한 성을 구축했다. 그의 집념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건축물을 자세히 보면 안토니 가우디가 지은 '성 가족 성당'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할 만하다.
평범한 한 시골 집배원 노력에 가족과 주민들은 아마 찬사를 보내기보다 '미친놈' 취급을 했을 것이다. 점차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가족들도 인정하고 도왔다고 한다.
그는 상상을 북돋우기 위해 다른 문화 건축물도 공부했다. 프랑스식 궁전 모양뿐 아니라 이슬람, 중국, 인도 문화 건축물 양식까지 합쳤다.
그는 자신이 지은 이 건축물에 묻히고 싶었지만,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포기할 법한데, 그는 아니었다.
허가조건에 맞게 다시 8년에 걸쳐 자신과 가족을 위한 영묘를 완성했다. 불굴의 의지로 그와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궁전 벽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농부 자식으로 태어나 농부로 살아온 나는 나와 같은 계층의 사람 중에서도 천재성을 가진 사람, 힘찬 정열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살고 또 죽겠노라"
유언으로 남긴 말도 의미심장하다.
"나는 '불가능'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선 안 된다고 했던 나폴레옹을 떠올렸다. 그가 옳다"
한 인간이 품은 '자존(自尊)'의 힘은 이만큼 크다. 돌을 하나하나 쌓을 때마다 스스로 쌓이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고, 자기 생각이 형상으로 실현되는 것을 보며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세월은 그에게 전혀 장애물이 아니었다. 33년이라는 자존의 시간에 그 어떤 방해가 그를 막을 수 있었을까?
작고한 시인, 신현정에게 '길 위의 우체부'라는 시가 있다.
'세상은 온통 나비 떼
나비 떼
정작 나는 행방불명이 되고 싶었다
민들레 옆에 자전거를 모로 눕히고 쪼그려 앉아 담배 피운다
아, 나는 선량했다'
이 시를 읽으며 슈발을 생각했다.
슈발은 선량했다. 슈발은 건축에 몰입하는 동안 행방불명이 되고 싶었다. 슈발에게 세상은 나비 대신 온통 돌이었고, 궁전이었고,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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