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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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9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책박물관 – 삼례 박대헌」 책례冊禮 - 책씨를 뿌리는 사내가 있다. 그는 책 속에서 산 날이 더 많다. 책농부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심례心禮 – 책 나무가 자라도록 애쓰는 사내가 있다. 그는 책 숲을 거닐며 논다. 책꾼 몸짓에 날이 새는 줄도 모른다. 창례創禮 – 책 열매 거두는 꿈에 부푼 사내가 있다. 그는 책신처럼 책마을을 지킨다. 책달인 경지에서 세상을 바꾸려고 한다. 세명대학교 이창식 교수가 2013년 내게 보내온 시다. 그는 내가 영월에서 무엇을 하고 싶어 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만큼 삼례에 거는 기대도 컸으리라. 2013년 6월 5일 책박물관이 영월에서 삼례로 옮겨 새롭게 문을 열었다. 삼례책마을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볕이 잘 드는 이층 서재에 수천 권의 장서를 갖추고 책속에 파묻혀 살았으면 하던 것이 내 십대 후반의 꿈이었다. 이때부터 고서수집에 뜻을 두더니 1983년 서른 청년에 고서점 호산방을 차리고, 1999년엔 영월에 폐교를 빌려 영월책박물관을 세우고 잘 나가던 광화문의 호산방도 모두 그곳으로 옮겼다. 그 후 2010년 12월 영월책박물관 문을 닫고, 호산방을 서울 프레스센터로 옮겼다. 파주 출판도시와 인사동을 거치는 사이 2013년에 완주군 삼례읍에 책박물관을 옮겼다. 그리고 2015년 8월 호산방 마저 삼례로 옮기고 책마을 사업에 매진했다. 그러는 동안 『서양인이 본 조선』『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고서 이야기』『한국 북디자인 100년』등 네 권의 책과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에 30여 차례의 고서 전시를 기획하였으니 40년 세월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책과의 모진 인연이다. 현재는 삼례책마을에서 세 개의 전시를 동시에 기획하여 전시 중이다. 책박물관의 <문자의 바다-파피루스부터 타자기까지> 그림책미술관의 <요정과 마법의 숲> 삼례문화예술촌의 <프랑스와 예술의 혁명>전이 그것이다. <문자의 바다-파피루스부터 타자기까지>는 인류 최초의 문자인 고대 오리엔트 쐐기문자를 비롯하여 이집트의 파피루스, 인도네시아 바탁족의 골각문자, 아메리칸 인디언의 암각 그림문자와 세계 여러 나라의 필사본, 타자기 등 모두 186종 2,775점의 전시이다. <요정과 마법의 숲>은 그림책미술관 개관기념으로 준비했다. 1940년대 영국 동화작가 그레이브스(G. Graves)의 미간행 타자 원고와 아일랜드의 나오미 헤더(Naomi Heather, 1911~1989)의 원화 전시다. 책도 출간했다. <프랑스와 예술의 혁명>전은 제1부‘초현실주의 탄생과 사랑의 폭주-아폴리네르와 그의 연인 마리 로랑생’ 제2부 ‘나폴레옹과 「조선 서해안 항해기」’ 제3부 ‘그대 프랑스 화가들의 반란’으로 구성되었다. 아폴리네르 관련 희귀 도서와 세잔과 외젠 부댕 등 벨 에포크 시대의 오리지널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유물은 모두 호산방 소장품이다. 나는 전시를 통해 ‘책이란 무언인가’ 말하고 싶었다. 이제 '박대헌의 고서 이야기'(2000.09. 09~2021.06.02/총 39회)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그동안 많은 사랑과 격려를 보내주신 '국악신문'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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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8호산방을 서울로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영월책박물관을 폐관하기 몇 해 전인 2006년 9월, 호산방을 서울시청 뒤 프레스센터로 옮겼다. 이곳을 호산방 자리로 낙점한데는 영월 가기 전 호산방이 있던 광화문 동아일보사 근처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프레스센터는 국제회의장과 기자회견장에 대규모 세미나와 국제회의가 자주 열리는 곳으로 문화예술인과 학자, 언론인이 자주 찾는 곳이다. 또 1층의 서울갤러리는 전시공간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이전부터 이곳을 고서점 자리로 주목하고 있던 터였다. 나는 이곳을 발판으로 다시 서울 생활의 재기를 꿈꾸었다. 갤러리에서는 1년에 한두 번 고서 전시회를 개최하려고도 했다. 이런 생각으로 프레스센터로 자리를 정했는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사하고 몇 달 뒤, 서울갤러리가 문을 닫고 이곳에 농어촌특산물 홍보전시장이 들어섰다. 농어촌 지역의 특산물을 이곳에서 홍보하겠다는 취지로 보였다. 전시장 문을 여는 날 전국에서 몰려온 지자체 단체장들로 행사장이 북적거렸다. 나는 이 자리에서 영월군수를 볼 수 있었다. 당시 시민운동으로 이름을 날리던 P씨도 만났다. 그날의 주인공은 바로 P씨였다. 그는 대권 주자로 거론되면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순간 그간의 모든 의구심이 풀렸다. 바로 P씨의 작품이었다. 나는 쥐똥 씹은 기분이었다. 나의 새로운 꿈이 초장부터 커다란 시련에 부딪치게 되었다. P씨는 장안평 호산방 시절부터 아는 사이다. 그러다 2004년경 영월에서 그와 속 깊은 이야기를 네댓 시간동안 나눈 적이 있다. 그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아니라 진지한 인터뷰였다. 그는 작정하고 나를 찾아온 듯, 일행도 물리치고 녹음기를 틀고 노트북에 인터뷰 내용을 받아 적었다. 그는 박물관 운영의 문제점, 특히 영월군과의 갈등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 후 사석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지만 박물관 얘기는 더 이상 없었다. 나는 아직도 그가 왜 나를 찾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파주출판단지는 80년대 말, 이기운 열화당 대표 등 뜻있는 이들이 출판 공동체를 건립하자는 마음을 모아 2000년대 초부터 경기도 파주시 문발리 일원 48만평 부지에 세운 출판도시이다. 2007년 5월, 파주출판도시 호텔 지지향이 오픈할 때 2층에 호산방을 하나 더 열었다. 이기웅 대표의 권유도 있었지만 박물관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파주에 터를 잡을 요량이었다. 얼마 후에는 파주에 전념할 생각으로 프레스센터 호산방을 접었다. 지지향 1층의 갤러리는 100평 규모의 아담한 공간이다. 사실 나는 이곳을 박물관 적임지로 생각하고 우선 호산방을 옮겼다. 파주에서 전력을 다해 보았지만 영월에서의 후유증이 워낙 컸던지 경제적으로 회복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영월에서의 10년 공백이 호산방 사업에는 치명적이었다. 주변여건도 많이 변해 모든 사정이 예전 같지 않았다. 거기다 갤러리의 사용도 여의치 않아 주변의 출판사 사옥의 임대를 고려해 보았으나 이것 역시 힘에 부쳐 포기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파주 호산방을 다시 서울 인사동으로 옮겼다. 2010년 4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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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7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영월 책박물관을 돌아보며 내가 영월에서 박물관을 꾸려가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생활의 불편함이나 경제적인 어려움보다도 주위의 무관심과 냉소였다. 김삿갓 가짜 글씨 문제는 그것을 잘 보여 주었다. 의롭지 않은 것을 보고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문화계와 영월군의 태도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책마을이 언젠가는 영월군민을 먹여 살릴 거라는 생각으로 영월에 박물관을 세웠다. 그것이 나의 세대에는 빛을 보기 어려우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산골 폐교에, 폐교만큼이나 옹색한 시설, 이것이 영월 책박물관이었다. 이런 곳을 어떻게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외견상으로는 맞는 얘기다. 내가 영월에서 펼친 박물관 사업은 책마을로 가기 위한 준비 단계였다. 나는 그것을 당당하게 평가받고 싶었다. 책마을의 실현 가능성은 우리 문화계와 영월군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책마을 사업에 뜻을 함께하고 동참한 이들 중에는 각계각층의 전문가가 여럿 있었다. 열화당 이기웅 대표와 정병규 디자이너, 홍동원 디자인너, 김연갑 아리랑 연구가, 한승태 시인, 김광수 사진가, 김정 숭의여대 교수, 전경수 서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이창식 세명대 교수, 교용균 변호사 등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나처럼 전 가족이 이주하여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나는 이들을 대신해 그 가능성을 시험받은 것이다. 2010년 12월 14일. 나는 책박물관 입구에서 지인과 기자 몇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월책박물관을 폐관하면서’라는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눈이 시렸다. 전날 내린 눈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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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6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영월군은 2004년 11월, 제5회 자치행정혁신대회에서 ‘박물관을 이미지화한 지역 만들기-세계 최대 지향 박물관 군(郡) 조성사업’이란 사례 발표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여기에서 영월군은 향후 2015년까지 총 20개소 이상의 박물관을 건립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어서 영월군은 정부의 신활력사업 정책의 일환인 ‘박물관 고을 육성사업’ 지역으로 선정돼, 2005년부터 향후 2009년까지 매년 약 30억 원을 지원받아 이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는 전국적으로 발전이 낙후된 70개 시·군의 사업계획을 평가한 결과로, 이제 영월군은 지역경제의 키워드를 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박물관’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곧, 영월 소나기재 아래에 ‘박물관 고을 영월!’이라는 대형 표지판이 나붙었다. 그 후 영월군의 박물관 사업은 발 빠르게 진행되었다. 나는 영월군 박물관협회를 구성하고 그 첫 사업으로 2005년 11월 「박물관 고을 조성과 발전방향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나는 이 심포지엄을 차후 국제적인 박물관 포럼으로 발전시켜 나가기로 몇몇 지인들과 뜻을 같이하고 전국 규모의 행사로 준비했다. 이 사업의 기획에는 당시 파주출판도시 이기웅 이사장과 서울대 인류학과 전경수 교수, 세종대 사학과 최정필 교수 등 문화계 여러 인사가 도움을 주었다. 주제 발표는 서울대 환경대학원 유병림 교수, 서울대 인류학과 이문웅 교수, 전통문화학교 최종호 교수 등이 맡았다. 전국에서 400여 명의 문화예술인이 참여하여 심포지엄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이어서 경기도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과 대구대학교 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순회전시회 「야! 영월이다」는 영월군이 박물관 고을임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앞의 심포지엄에서, ‘영월 박물관 고을 육성사업’의 당면 과제로, 영월군의 박물관 업무를 지속적으로 전담하는 관계 공무원과 박물관 전담부서의 신설이 요구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2006년 3월, 박물관 고을 육성사업 전담부서로 ‘지역혁신단’이 신설되었다. 이때 담당공무원이 바뀌면서 사업체제가 새롭게 갖추어지는 듯이 보였다. 나는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하고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해 왔다. 각종 전시사업과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은 물론 중장기 대형 사업계획을 여러 건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각 분야의 전문 학자와 현장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 준비한 것들이다. 여기에는 「영월책마을 환경설계」(이미경, 서울대 환경대학원 석사논문, 2002)와 중장기 계획인 「영월책박물관 사업계획」, 10여 개의 박물관 타운 건설계획인 「이상한 나라의 박물관 사업계획」등이 포함된다. 그러던 2006년 8월, 영월군은 책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 광전리 마을회관에서 책마을 선포식 및 사업 평가보고회를 가졌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책마을’이란 책박물관 주변 마을 일대가 서점과 공연장, 문화예술인의 작업실, 카페 등으로 어우러진 문화마을을 이름이며, ‘책마을 사업’은 박물관을 개관하면서부터 계획하고 준비해 온 사업이다. 이미경 선생의 논문 「영월책마을 환경설계」는 영월군의 박물관 고을 육성사업의 지침이 되어, 현재의 박물관 사업과 책마을 사업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새로 온 담당공무원은 그 동안 내게 책마을 사업에 대한 어떠한 의견도 묻지 않았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극단적인 예로, 나는 책마을 선포식 개최 사실을 행사 20분 전, 서울 출장길에 마을 주민에게서 전화연락을 받고서야 알았다. 영월군에서 책마을 선포식을 하는데 정작 책박물관 관장인 내게는 이러한 사실조차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책마을 선포식이라면 적어도 선포문 정도는 작성해야 할 것이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상의할 일도 많을 텐데 내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담당공무원은 심지어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책마을 사업과 책박물관은 무관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그 동안 맡고 있던 영월군 박물관협회장 자리를 내놓았다. 영월군의 박물관 고을 육성사업에 깊은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로, 개관 이후 8년 동안 단 하루도 문을 닫지 않았던 박물관을 무기한 휴관하고, 고민 끝에 호산방을 서울로 옮겼다. 영월에서 우리 가족이 거처했던 곳은 박물관 한편에 있는 허름한 관사다. 말이 관사지 10여 년 이상 사람이 살지 않은 건물이라 수리를 몇 차례나 했지만 벽과 천장에 온통 곰팡이가 슬고 겨울에는 연탄난로를 두 개씩이나 때워도 거실에서는 물이 얼 정도다. 또 해마다 한겨울이면 수도는 물론 박물관 화장실까지 얼어 터지기 일쑤다. 한번은 영하 20도가 넘는 강추위가 1주일 정도 계속되자 관사로 통하는 수도관이 그만 얼어 버렸다. 박물관의 수도는 지하수를 펌프로 끌어올려 사용하고 있는데, 물탱크는 펌프장에서 150여 미터 거리의 언덕 위에 있고, 이 물탱크가 박물관 화장실과 관사로 연결되어 있다. 그 거리 역시 150여 미터가 된다. 전문가에게 물으니, 다행히 펌프장에서 물탱크까지는 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물탱크에서 관사까지의 150여 미터 구간 중 어느 부분이 얼었는지 찾을 수가 없고, 엄동설한 중에는 암반지형에 포클레인 작업을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또 수도관이 얼기 시작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얼어붙은 범위가 점점 확대되어 사실상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대안으로 내놓는다는 것이, 물탱크에서 엑셀 PVC관을 연결해 땅 위에 그대로 노출시킨 채 겨울을 넘기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이 경우에는 수도꼭지를 겨우내 조금 열어 놓아야 물이 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아 그렇게 하기로 했다. 파이프를 물탱크에 연결하자 하얀 PVC관을 통해 물줄기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10여 분이 지났을까. 또다시 물이 나오지 않아 PVC관을 따라가면서 확인해 보니 그 사이에 파이프 안에서 꽁꽁 얼어 있었다. 그날 한낮의 기온이 영하 10도가 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나는 언제부턴가 집안에서는 무능한 가장으로 전락했다. 그러는 동안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1학년이던 두 아들은 원주와 영월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영월로 이사하면서 무엇보다 아이들 교육문제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다. 학교에 가려면, 두세 시간에 한 번 오는 버스를 타고 험한 고갯길을 40여 분이나 달려야 했다. 눈 내리는 날에는 고개를 넘을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길거리에서 한두 시간씩이나 보내야 했던 아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아이들을 위해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산골로 데리고 와서는 마음고생만 시킨 것 같았다. 그래도 어린 시절을 이런 산골에서 보낸 것이 훗날 세상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애써 위안해 본다. 언젠가 아이들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매일 보는 산과 나무들인데 어제 보았던 그 산과 나무들이 아닌 것 같다”고. 자연은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아름다운 마음을 길러 주었다. 그 아이들이 지금은 장성하여 첫째는 시카고 아르곤 연구소 연구원으로, 둘째는 작은 사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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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5산 넘어 산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2003년 3월 16일 일요일 밤, 영월책박물관에 도둑이 들었다. 전시실과 서고를 뒤져, 한적과 양장본 등 모두 이백여 권의 책을 훔쳐갔다. 여기에는 『탐라별곡(耽羅別曲)』을 비롯해, 1539년에 출판된 『몽산화상대도보설(蒙山和尙大道普說)』 목판본과,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石潭日記)』 필사본, 『복무정종(卜正宗)』 목판본, 『경주최씨세계』 필사본 등의 한적이 포함되어 있다. 또 『황야에서』와 『아기네 동산』 등 양장본 다수와 개화기 교과서도 도난당했다. 이것들은 대부분이 귀중본으로, 이 중 필사본을 포함한 몇 권은 유일본이기도 하다. 내가 아끼던 책도 여러 권 있었는데, 『탐라별곡』도 그 중 하나다. 이 책은 정언유(鄭彦儒, 1687-1764)가 지은 한글 가사 필사본으로, 표제는 ‘정문침(頂門針)’이라고 되어 있다. 정언유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제주목사를 거쳐 호조참판을 지낸 인물인데, 이 가사는 영조 25년(1749)에 그가 제주목사로 부임했을 때 제주를 소재로 지은 가사로 그의 친필본이다. 耽羅 掘都邑이 몇千年 基業인고 星主王子 긔난후에 物換星移 오라겨다 城郭이 고쳐시니 文物이들 녜랴 聖朝에 臣屬며 命吏을 리시니 조각 彈丸小島 大海에 잇 三邑을 화안쳐 솟발로 버려시니 山南은 兩縣이오 山北은 州城이라 土地는 긔얼마며 人物은 어 하니 이렇게 시작되는 가사는 모두 백이십 행 이백사십 구로, 제주에 대한 첫인상, 제주도민의 어려운 생활상,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목민관으로서의 다짐, 제주 경승지를 돌아본 감회 등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복무정종』은 인조(仁祖)의 수택본으로 ‘송창(松窓)’ ‘보우명지(保祐命之)’ 등 여섯 종의 낙관이 찍혀 있다. 『경주최씨세계』는 1800년대에 한글 궁체로 씌어진, 매우 아름답게 만들어진 가승보(家乘譜)로 필사본이다. 아버지가 시집가는 딸에게 만들어 준 친정의 족보다. 『황야에서』는 1922년 김영보가 쓴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집으로, 장정도 저자 자신이 했다. 「나의 세계로」 「시인의 가정」 「정치삼매」 「구리십자가」 「연(戀)의 물결」 등 모두 다섯 편의 작품들이 실려 있는데, 전통인습 타파라는 매우 진보적인 도덕관을 제시한 작품들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장정가가 알려진 단행본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것이다. 따라서 출판미술사적으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야 할 책이기도 하다.(*사진 101) 『아기네 동산』은 1938년 임홍은(林鴻恩)이 자신의 글을 포함한 여러 작가·작곡가의 동화·동요·곡보(曲譜) 등을 편찬한 아동도서로, 그가 직접 표지화와 삽화도 그렸다. 표지 그림은 꽃과 나비, 잠자리 등을 의인화한 것으로,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 노랑·연두·분홍·파랑 등의 밝고 경쾌한 색으로 꾸몄다. 면지·목차·서문·본문도, 표지 못지않게 다양한 삽화·문양·타이포그래피로 정성을 들였다. 주로 펜으로 그린 선화(線畵)나 수채물감으로 옅게 채색한 그림들로, 그 내용과 분위기에 어울리는 삽화가 아흔아홉 컷에 이르는, 매우 아름답게 만들어진 책이다.(*사진 102) 위와 같은 책들이라면 누구의 손에 들어가든 애장서로 대접받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이 정도의 희귀본이라면 어디에서 누가 소장하든지 언젠가는 공개될 수밖에 없다. 머지않아 그 책을 훔쳐간 자가 누구인지는 세상에 밝혀질 것이다. 나는 그 책들을 언제 어디서 보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자료들을 사진과 글로 정리해 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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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4책마을을 꿈꾸며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사람들은 내가 많은 책을 소장하고 박물관을 세우니 선대로부터 유산이라도 물려받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박물관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보통 사람들이 꿈꾸는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포기하고 오랜 시간과 모든 열정을 오직 책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이라 하면 대도시의 커다란 건물에 잘 갖추어진 시설을 떠올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영월 책박물관을 찾아온 사람들은 대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는 화를 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볼 것이 없다는 얘기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던 박물관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초라하고 옹색한 시골 폐교로만 보였던 것이다. 물론 내가 이러한 사정도 모른 채 박물관을 세우고 꾸려 가는 것은 아니다. 또 우리 박물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문제들은 한순간에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박물관의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갖는 문화적 역량과 발전 가능성이다.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은 문화 역량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나는 문화적으로 척박한 영월에, 책을 짊어지고 내 발로 찾아왔다. 서울의 호산방도 박물관 개관과 함께 영월로 옮겼다. 이렇게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모험을 한 것이다. 영월은 나의 고향이 아니다. 또, 아무런 연고도 없다. 그저 이곳이 좋아서, 책이 좋아서 온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영월에 그저 살러 온 것이다. 내가 꿈꾸는 책마을은 책박물관을 중심으로 하는 자생적인 문화마을이다. 고서점과 화랑이 있고 문화예술인의 작업실에 아름다운 카페가 있는 그런 마을이다. 나는 이를 위해 영월에서 열두 차례의 기획전을 치렀다. 「아름다운 책」 전시를 비롯하여 「음양지(陰陽紙)와 센카지(泉貨紙)」 「홍성찬 일러스트레이션 사십년 특별전」 「어린이 교과서」 「종이로 보는 생활풍경—근대 종이·인쇄·광고·디자인」 「책의 꿈, 종이의 멋」 「옛날은 우습구나—송광용 만화일기 40년」 「철수와 영이—김태형 교과서 그림」 「영월아리랑—꼴·깔·소리와 김정」 「유리물고기—1930년대 한국어류사진」 「님의 침묵과 회동서관—근대출판의 시작」 「책의 바다로 간다—정병규북디자인」 「우리들 마음에 꽃이 있다면—김정 그림책」 전시 등이다. 2001년에 개최한 「종이로 보는 생활풍경—근대 종이· 인쇄·광고 디자인」은 우리나라에 신식활판 인쇄술이 도입된 1883년경부터 1960년대 사이의 인쇄물 중에서, 포스터·사진·증명서·신문·호외·전단·광고지 등의 생활사 자료를 중심으로, 종이의 쓰임새와 인쇄·광고·디자인의 역사적 흐름을 보여주고자 마련한 전시다. 여기에 사용된 종이는 대부분이 양지(洋紙)이며, 인쇄·광고·디자인 면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한마디로 촌스럽다고 말할 수도 있다. 비록 궁핍한 시대의 산물이지만, 이 시기의 종이 문화를 통해 우리 지난 삶의 진솔한 모습을, 우리 근대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자 했다. 전시물 중에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마라톤 세계신기록으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孫基禎)의 육성을 담은 「우승의 감격」(콜롬비아 레코드)도 있다. 낡은 레코드판에 붙어 있는 동그란 레이블 종이에도 역사는 기록되어 있다.[*사진98] ‘복장계의 왕좌는 모샤이다’라는 내용의 포스터는 일제강점기 멋쟁이들에게 인기있었던 하늘하늘한 모슬린 천을 광고하는 것으로 당시 풍속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농촌형제여 풍년이 들어 쌀은 만소만은 다른 물건이 업서서 곤난하구려. 도시형제는 식량이 업서 매우 곤난하다. 농촌형제여 쌀을 생활필수품회사로 팔고 회사로부터 필수품구입증명서를 밧으라.”[*사진99] 광복 직후 미 군정청이 만든 포스터 ‘남는 쌀을 팔읍시다’의 내용이다. 정부에 의한 추곡수매라는 것이 없을 때 도시와 농촌 간의 원활한 물자교환을 위해 마련된 조치였다. 〈춘향전〉 〈산유화〉 〈유혹의 강〉 〈사랑〉 〈춘희〉 〈아내만이 울어야 하나〉 〈청춘극장〉 등 국내외 영화 리플릿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대중 인쇄물이다. 플라스틱보다 종이가 널리 쓰였던 시대에는 각종 상품 케이스와 포장에서도 종이가 일등공신이었다. 일제시대 ‘닭표 빈대약’과, 비슷한 시기에 동아약화학공업주식회사에서 만든 ‘강력살충제 구라콘’ ‘금복화투’도 그렇고, 풍년초담배·율곡성냥·대성성냥·백조성냥·유엔성냥 등 담배와 성냥 등의 포장갑도 모두 종이로 만들었다. 또 로맨스백분·장미백분·서가도란·화신장분·서가연지 등 일제시대와 오륙십 년대를 주름잡던 화장품들도 포함되어 있다.[*사진100] 작품의 생성학적 비평전문가인 프랑스의 피에르-마르크 드 비아지(Pierre-Marc de Biasi)는 저서 『종이: 일상의 놀라운 사건(Le papier, une aventure au quotidien)』에서 현대문명에서 종이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종이는 도처에 있다. 일상생활에서 순간순간마다 사소하고도 중대한 일을 수행한다. 종이는 그 상태로 머물면서 전달한다. 그때 종이는 언어와 민족의 기억을 소장한다. 종이는 증언한다. 그때는 증거이자 법이 된다. 또 종이는 순환하며 의사소통을 한다. 그때에는 당대의 지적 경제적 교류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재가 된다. 종이는 장식하고 포장한다. 그때 종이는 상품구매를 유혹하는 소비사회의 핵심이 된다.” 나는 종이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책의 또 다른 실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후 계속된 전시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주제 속에서 이루어졌다. 또 전시와 같은 주제로 세미나와 강연회, 음악회 등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지방의 작은 박물관 행사치고는 과분할 정도로, 각종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곤 했다. 영월 책박물관의 모든 행사는, 개관 당시 디자인 작업이 그랬듯이 순전히 자원봉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문화예술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나의 꿈과 의지를 믿고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책박물관이 어려운 고비를 맞을 때마다 후원을 자청하고 나섰다. 사실 이들이 아니었으면 삼례책마을은 물론 책박물관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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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3폐교를 책박물관으로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영월책박물관이 자리한 옛 여촌분교는 강원도 영월군 서면 광전 2리, 속칭 ‘뱃말’과 ‘골말’을 내려다보고 있다. 골말의 원래 지명은 ‘고운마을(麗村)’이다. 이는 마을의 경관이 아름다워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후 ‘고울마을’ ‘고울말’ ‘골말’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골말 주변 서강에는 꺽지·어름치·수달·물오리 등이 서식하고 있으며, 잘 보존된 성황당과 공개되지 않은 동굴 등이 산재해 있다. 평창강(平昌江)과 주천강(酒泉江)이 만나 흐르는 서강(西江)의 윗줄기에 오도카니 자리잡은 여촌분교는 일견 호젓하고 소박한 느낌을 자아낸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학교가 막 문을 닫은 직후인 1998년 3월이었다. 3월이라고는 해도 음지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 있었다. 적당히 빛바랜 계단을 오르자, 곧 눈앞에 칠팔백 평 규모의 아담한 운동장과 교사(校舍) 두 동이 나타났다. 계단에서 내려다보이는 골말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 너머로 커다란 산이 눈에 들어온다. 배거리산이다. 배거리산은 해발 852.5미터의 높은 산이다. 옛날 천지개벽으로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 뱃말에 살던 마음 착한 부부가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피난을 가다, 물이 점차 늘어나 배가 이 산 꼭대기에 걸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영월부읍지(寧越付邑誌)』에는 이 산을 석선산(石船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991년부터 H시멘트의 석회석 광산으로 원형을 잃기 시작했으며, 배거리산 중턱까지 파헤쳐진 광산이 흉물처럼 버티고 있어서 이 학교가 폐교된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여촌분교는 1962년에 개교하여 1998년에 문을 닫기까지 36회에 걸쳐 4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문 닫을 당시에는 4명의 학생이 있었다. 한때는 아이들의 북적거림으로 떠들썩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떠나고 황폐해진 곳. 폐교란 말 그대로 문 닫은 학교, 버려진 학교다. 학교만이 문을 닫은 것이 아니고, 마을까지 문을 닫았다. 그야말로 삶의 시곗바늘이 멈춘 마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로 여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8월말, 영월교육청으로부터 학교를 임대받았다. 폐교는 그 이름만 들어도 아련한 추억과 애틋한 정이 묻어나는 곳이다. 박물관은 옛 학교 터와 건물을 그대로 활용해서 산골 분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월 같은 강원도 산골에서 학교가 갖는 의미는 그저 배움의 장소만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매년 운동회가 열리고, 그날은 마을의 축제날이다.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치르는 마당이며,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기둥으로 공동생활터의 구실을 해 왔다. 어쨌든 지금 이 문 닫은 학교가 책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꾸며진 것이다. 1999년 4월, 경향 각지의 언론은 연일 강원도 영월의 문 닫은 학교에 책박물관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전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보다는 우려를 더 많이 했다. 산골 폐교에 박물관을 세운다니 우리의 문화풍토에서 그것은 분명 무모한 짓으로 비쳤을 것이다. 나는 박물관을 준비하기 오래 전부터 박물관 운영뿐만 아니라 디자인의 역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명함에서부터 로고는 물론 초청장·포스터·입장권 등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디자인 작업이야말로 박물관의 색깔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이러한 나의 뜻을 이해하고 함께할 디자이너를 만나는 것과, 그에 따르는 경제적인 부담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박물관 개관을 5~6개월 앞두고 나는 이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다행히 디자이너 홍동원 선생이 박물관 개관에 필요한 디자인 일체를 무상으로 제작해 주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당시 모 일간지의 편집을 전면 개편하는 대형 프로젝트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영월책박물관의 로고와 개관 당시의 포스터와 브로슈어, 내 명함 등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작업은 3명의 디자이너에 의해 4개월여에 걸쳐 이루어졌다. 개관 이후에는 기획전시를 비롯하여, 세미나·음악회·퍼포먼스 등 수십 차례의 문화행사를 치러냈다. 그때마다 책박물관의 소식은 대처의 문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특히 매년 5월에 열리는 영월책축제는 8회를 거치면서 전국적인 축제로 뿌리내렸다. 북디자이너 정병규 선생은 박물관 개관 이듬해부터 7년여 동안 10권 이상의 도록과 행사 초청장, 포스터 등 전시회 관련 인쇄물의 디자인을 단 한푼의 수고비도 받지 않고 도맡아 주었다. 언젠가 정 선생이 한 디자인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박대헌이란 사람을 잘 알고, 그가 영월에서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디자이너로서 영월의 디자인에 참여하고 있다”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두고두고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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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2『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30여 년 전, 열화당 이기웅(李起雄) 대표와의 술자리에서 책 표지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마침 나는 오래 전부터 장정(裝幀)에 관심을 갖고 이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던 차였다. 무심결에 얘기를 하니, 이 대표는 다짜고짜 열화당에서 책을 내자고 제의했고 나는 엉겁결에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 후 이 사실을 잊을 만하면 이 대표는 어떻게 돼 가냐고 나를 다그치곤 했다. 틈나는 대로 원고를 써 보았지만 좀체 마음에 들지도 않고 진전도 없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1999년 4월, 영월책박물관 개관에 맞추어 우여곡절 끝에 열화당에서 출간되었다. 사실 이 책이 나오기까지는 이 대표의 조언과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담당 편집자였던 이 대표의 따님 수정 씨는 기획에서부터 편집은 물론 원고를 깁고 다듬느라 필자인 나 이상으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 책, 『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에서는 우리나라의 전통 장정과 양장(洋裝)이 처음으로 만난 1883년부터 6·25가 끝난 1953년까지, 즉 우리의 근대 인쇄ㆍ출판 70년간 단행본들의 장정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가를 책에 따라 살펴보았다. 여기에 실린 자료 역시 내가 직접 수집한 것들로, 『서양인이 본 조선』에서처럼 고서 수집과 연구에 이르는 과정에서 주제를 선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사진93) 우리는 어떠한 책에 처음 다가갈 때,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음미하기에 앞서 두 눈을 자극하는 이미지 앞에 놓인다. 그리고 팔을 뻗어 그것의 구체적인 꼴과 감촉을 손안에서 느낀 후에야 비로소 그 내용과 만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정신·감정·사상을 기록한 책은 단순히 읽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어루만지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책의 내용을 만드는 기획·편집 과정 못지않게,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물리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제작의 과정도 매우 중요하다. 그 중 책의 겉모습을 만드는 작업이 바로 장정으로서, 표지·면지·표제지·케이스 등을 시각적으로 꾸미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장정은 사람마다 각각 개성이 다르듯 책의 내용과 성격에 따라 제각기 어울리는 모습을 가지며, 장정가·저자·출판사의 생각뿐만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던 시대적 상황과 경제적 여건까지 반영한다. 결국 잘 만들어진 한 권의 책은 그 자체로 독립된 예술품인 동시에, 그 시대의 문화·경제·예술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장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고서 수집을 시작하면서부터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장정이라는 말도 몰랐거니와 그 개념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저 됨됨이가 반듯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책을 보면 왠지 가슴이 설레고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 후 장정이 출판편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체득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화적이나 문학적으로 이름난 책들은 대체로 장정도 잘 되어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 이런 책을 한두 권 수집하다 보니 어느새 수백 권이 되었다. 우리의 장정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정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기상도(氣象圖)』를 들고 싶다. 『기상도』는 김기림(金起林)의 시집으로, 이상(李箱)이 장정을 했다. 1936년 7월 8일 창문사에서 발행되었다. 모두 424행의 장시로, 「세계의 아침」 「시민 행렬」 「태풍의 기침시간」 「자최」 「병든 풍경」 「올빼미의 주문」 「쇠바퀴의 노래」 등 일곱 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현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기이한 소재와, 기지·해학·풍자·반어 등의 수법을 이용해 모더니즘 시를 시도한 작품이다.(*사진94) 잘 알려진 대로 이상은 시인이며 소설가다.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하면서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1931년에는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자상(自像)」을 출품해 입선하기도 했다. 1933년, 종로에서 다방 ‘제비’와 카페 ‘낙랑’ ‘쓰루’ ‘69’를 경영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이태준·박태원·김기림·윤태영·조용만 등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특히 박태원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삽화를 그리는 등,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 방면에도 많은 재능을 보였다. 이상이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의 장정을 하게 된 동기는, 당시의 문화풍토가 그렇듯이 이상과 김기림의 친분관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창문사는 서양화가 구본웅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출판사로, 구본웅은 이상보다 네 살 연상이었지만 1921년에 신명보통학교를 같이 졸업한 사이였다. 구본웅은 화가이면서 예리한 비평안을 지닌 문필가이기도 했다. 그는 창문사 일을 도우면서 이상 등 여러 문인들과 교우관계를 가졌고,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 1938년 문예잡지 『청색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이상은 구본웅과의 이러한 인연으로 1936년에 창문사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었는데 『기상도』는 그때 장정한 책이다. 이 책은 두꺼운 합지를 표지로 씌워, 얼핏 한 장의 검은 판지처럼 보인다. 검정색에 가까운 암회색 종이를 씌우고, 그보다 조금 옅은 색의 종이 띠를 약 이 센티미터 폭으로 잘라 앞뒤에 두 개씩 세로로 덧붙였다. 표제 ‘김기림 저 장시 기상도(金起林 著 長詩 氣象圖)’는 보일 듯 말 듯 작은 크기의 어두운 레몬색 활자로 표지 위에 도장 찍듯이 직접 찍었다. 일반적으로 표지 인쇄는 사용하는 표지의 재질에 따라 인쇄를 하거나 금박, 압인(押印) 등으로 처리한다. 그러나 『기상도』의 표지는 위의 모든 작업을 일일이 손으로 해야만 했다. 표제지는 활자의 크기를 이용했는데, ‘기상도(氣象圖)’의 활자를 모두 석 장(張)에 걸쳐 약 9·12·15포인트로 점점 키워 마치 이 시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마지막 장의 저자명 바로 아래에는 ‘장정 이상(裝幀 李箱)’이라 적어 넣었다. 상아색 본문 용지에 작은 글씨로 시행을 촘촘히 배열하고 여백을 많이 살렸으며, 인쇄 상태도 양호하여 전체적으로 깔끔한 편집을 보여주고 있다. 제본은 철사매기로 했다. 당시의 편집은 장정은 물론 본문편집까지 편집자가 거의 혼자 도맡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장정에 관심을 둔 몇몇 장정가의 출현으로, 장정과 본문 편집 작업이 비로소 나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상도』의 경우, 장정뿐만 아니라 본문 편집 작업도 이상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석 장의 속표제지와 본문의 편집 양식이 동일인의 솜씨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이상은 교정과 조판 등 출판과 관련하여 김기림과 상의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상은 『기상도』 장정에서, 특정 사물의 형상이나 추상적인 문양에서 벗어나 표지 전체를 암회색 계통으로 일관하면서, 표제 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문자도 보이지 않는 한 덩어리 어둠의 공간을 표현하고 있다. 표지란 독자에게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정보를 상징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기상도』는 표지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정보인 서명과 저자명의 표기가 거의 무시되었다. 한마디로 장정의 이론과는 거리가 먼 디자인이다. 이러한 장정으로는 『기상도』의 내용이나 김기림 시의 성향을 독자에게 전달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기상도』에 실린 작품들이, 「태풍의 기침시간」 「병든 풍경」 「올빼미의 주문」 「쇠바퀴의 노래」 등의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기이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 또는 기지·해학·풍자·반어 등의 수법을 이용해 모더니즘 실험을 시도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독자라면 또 모를까, 설령 이러한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독자라 하더라도 『기상도』 장정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연상하길 기대하기란 사실 무리다. 그러나 이상은 『기상도』 장정을 한 덩어리의 암회색 공간으로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장정이 나오기까지는 『기상도』의 내용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겠지만, 무엇보다도 북디자이너 이상의 정신세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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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1『서양인이 본 조선』 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고서를 수집하여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수집가에 따라 다르다. 이는 고서 수집을 하기 전에 이미 그 목적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목적이 어떻든 간에,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자연히 그 방면에서는 저절로 많은 지식이 쌓여 전문가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저술가 중에는 유명한 고서 수집가가 많다. 나는 고서를 수집하면서 『서양인이 본 조선』(호산방, 1996)과 『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열화당, 2008), 『한국 북디자인 100년』(21세기 북스, 2013)이라는 세 권의 책과, 몇 편의 논문을 썼다. 나야말로 고서를 수집하다 보니 저절로 글이 써지고 책이 만들어진 경우라 할 수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가 서양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이며 또 우리나라를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은 누구일까 하는 막연한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30여 년 전, 서양에서 출판된 한국 관련 자료들을 하나 둘 접하면서부터 우리나라와 서양의 접촉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관련 서양 도서의 수집은 『서양인이 본 조선』을 출간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와 마에마 교사쿠의 『고선책보』의 영향을 받아서다. 나는 이 두 책을 알고 난 후 우리의 서지 작업이 외국인에 의해 이렇게 정리되었다는 것에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결국 나로 하여금 서양에서 출간된 조선 관련 서지를 정리하도록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서양인이 본 조선』은 1655년부터 1949년까지 약 300년 동안 서양의 선교사·탐험가·군인·학자들이 조선을 관찰하고 연구한 바를 서술한 188종 261판본 287책의 여러 서양어계 도서들을 서지학적으로 정리한 책이다.(*사진 84) 각 도서의 제목과 저자·출판사·출판지·출판연도·판수·책수·면수·크기와 삽화 수 등을 표시했고, 책에 실린 흑백과 컬러 사진 몇 점을 실었다. 그 다음에는 저자와 책 내용을 소개하면서, 그 동안의 국내 연구 상황을 주석으로 소상하게 밝히려고 했다. 그 다음 장에는 각 책에 들어 있는 목차와 삽화 목록, 사진과 삽화를 수록했다. 목차에는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영어·불어·독어·네덜란드어·스웨덴어·러시아어 등이 원전 그대로 실려 있다. 따라서 이 목차만 보고도 원전의 내용이 어떠한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설명한 대로, 이 책은 서지에 관한 전문서적인 동시에 역사서이다. 서지는 모든 학문의 기초이자 출발점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정한 연구대상이 지금까지 어떻게 조명되었고 또 어떤 관련 자료가 있는가를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한다. 어떤 시대에 어떤 내용의 책이 어떻게 출판되었는가를 종합하여 밝히는 일은 모든 학문에 기초를 닦는 작업이다. 더구나 그 자료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희귀본이라면 그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서양인들이 기록한 우리의 역사적 사실은 한국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자 민족문화의 자산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 선조들이 미처 기록하지 못한 당대의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 주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이 땅의 역사를 제삼자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연구되었는가 하는 것은 서양 접촉사와 관련해 큰 의미를 갖는다. 이들 책 중에는 개항 이전 조선의 모습뿐만 아니라, 조선어의 소개, 서양에서 제주를 일컫는 명칭, 서양 술의 조선 전래, 성서의 조선 전래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조선이 나라 문을 걸어 잠근 채 집안싸움만 하고 있을 때 서양 여러 나라들은 앞 다투어 조선을 방문 또는 탐사했으며 그때마다 이러한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껏 이러한 사실조차도 잘 모르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이 방면의 자료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사진 85~88) 고서 수집에서 수집 대상의 주제는 독창적이어야 한다. 다른 수집가나 박물관에서 미처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라면 더욱 좋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선 관련 서양 도서는 매우 매력적인 주제라 할 만하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주제가 정해졌다 하더라도 자료가 저절로 구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유능한 파트너와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유능한 파트너는 모든 자료를 한곳으로 모으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자료들을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외국에 직접 나가서 구하기도 하고, 국제적인 고서적상을 한국으로 직접 불러들여 구입하기도 했다. 이미 조선 관련 서양 고서가 미국·독일·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스웨덴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판된 관계로 나는 각 나라별로 유명 고서점 또는 중개인을 선정해 이들과 긴밀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이들 파트너가 제공하는 자료를 거의 다 구입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책을 대여섯 권씩 사기도 했다. 하지만 파트너들이 나를 위해 구해 준 것들이므로, 중복되는 책이 있어도 싫은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가격이 점점 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고서에서 초판본은 의미가 각별하다. 당연히 모든 고서 수집가들이 초판본을 선호한다. 그러나 나는 초판본 못지않게 모든 판본의 책이 각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국 관련 서양 고서를 수집할 때부터 모든 판본에 의미를 두었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앞에서 소개한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1897년 뉴욕 플레밍 레벨 출판사(Fleming H. Revell Company)에서 초판본이 간행된 이후, 같은 해에 삼판본까지 출간되었다. 1898년에도 판본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책이 간행되기도 했다. 한편 1898년과 1905년에는 런던 존 머레이(John Murray) 출판사에서도 출간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각 판본의 표지 장정과 편집, 책의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사진 89~90)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의 목사이자 동양학자인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가 쓴 『은자의 나라 한국(Korea, the Hermit Nation)』은, 1882년 뉴욕 찰스 스크리브너스 선스(Charles Scribner’s Sons) 출판사와 런던 앨런(W. H. Allen) 출판사에서 같은 해에 출간되었는데, 이 두 책은 내용은 똑같으나 접혀 있는 지도 한 장과 책등 부분에 인쇄된 글자가 약간 다르다. 그후 이 책은 1888년·1897년·1904년·1907년에 각각 증보판이 나왔으며, 여러 차례 중판되었다. 나는 이들 중 1882년 뉴욕과 런던에서 나온 초판본과 또 다른 갈색 장정의 1882년 뉴욕판본, 1888년 뉴욕 삼판본, 1894년 뉴욕 사판본, 1897년 뉴욕 육판본, 1904년 뉴욕 칠판본, 1907년 뉴욕 팔판본을 『서양인이 본 조선』에 소개했다. 『서양인이 본 조선』은 사업성이 없는 책이다. 그러니 어떤 출판사에서도 욕심낼 이유가 없다. 그래서 나는 호산방에서 직접 출간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양인이 본 조선』이 출간되기까지 자료수집에 10수 년, 집필·제작에 5년이 걸렸다. 교정도 스무 번 넘게 보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자랑이겠는가. 지금 생각하면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아쉬움만 남는다. 그나마 이 책이 이만큼의 모습이라도 갖추게 된 데는 사진의 역할이 컸다. 사진 작업만도 꼬박 삼 개월이 넘게 걸렸는데, 이때 테스트로 찍은 필름만도 한 박스가 넘는다. 사진작업은 구름 사진가로 유명한 김광수 선생이 맡았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반향이 대단했다. 광화문 일민문화관에서 가진 『서양인이 본 조선』 출판기념 전시회는 성황을 이뤘고, 관련 학자들에게도 대단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쑥스러운 얘기지만 이 전시는 우리의 고서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고서 전시와는 분명 그 궤를 달리했다. 장소부터가 전문 미술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시기획에서부터 디스플레이, 진행에 이르기까지, 고서가 미술의 한 장르에 포함되어도 아무런 손색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사진 91~92)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나는 이 책의 출간과 전시를 통해 나의 문화적 역량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이때의 모든 전시기획과 진행을 내가 직접 주도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평생의 꿈인 책박물관 설립의 가능성을 미리 점쳐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이렇게 책을 내고 성대한 전시를 하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서양인이 본 조선』에 소개된 책들은 고서 수집가들은 물론 학계에서도 잘 모르고 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내 주위의 연구자와 수집가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나는 미처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출판기념 전시회의 열기가 구매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다. 위안이라면, 이 책으로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 책을 출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정을 바쳤는지 모른다. 또 나의 전 재산을 이 작업과 맞바꾸는 오기를 부려야만 했다. 이제 그 대가로, 내가 지금까지 책을 수집하고 글을 쓰고 또 출판을 하기까지 겪었던 어려움보다 더 큰 고통이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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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0도서목록에서 인터넷까지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호산방에서는 1988년 1월부터 『호산방도서목록』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를테면 판매가격을 문서화하여 공개한 것이다. 나는 그 첫 호에서, "고서의 공정한 평가를 꾀함은 물론, 고서가격을 공개 전시하여 고서의 유통을 활성화하고 학자 및 수집가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도서목록을 간행하게 됐음을 밝혔다. 이 목록은 멀리 보아서는 훌륭한 학문적 자료가 될 수 있고, 가까이는 호산방의 판촉활동이기도 했다.(* 사진 80~82) 도서목록에는 보통 도서명·저자·출판사·출판연도·가격과 함께 간략한 서지사항 등의 정보가 수록된다. 물론 이 모든 사항은, 내가 고서를 직접 확인하면서 작업하기 때문에 어떤 도서목록보다도 정확한 정보를 보장한다. 따라서 그 자체만으로도 연구자와 고객에 대한 훌륭한 서비스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와 함께 『호산방도서목록』을 전산으로 정리했다. 여기에는 언제 누구한테 얼마에 구입하여 어디로 판매되었다는 정보가 모두 수록되었다. 이러한 운영 방식은 당시로서는 혁명과도 같았다. 정찰제를 실시하면서 도서목록이 발행되자 일부 수집가와 고서점 주인들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어떤 수집가는 고서의 정보가 공개되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고, 특히 흥정의 여지가 없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일부 고서점 주인들은 호산방의 고서 가격을 터무니없이 비싼 것으로 소문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호산방도서목록』은 이들 모두에게 매우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도 했다. 수집가들은 자신들이 소장한 책들에 대한 평가가 격상된 것에 내심 흡족해 했고, 다른 고서점들에서는 호산방의 책값을 기준으로 하여 적당한 선에서 판매하니 매우 현실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또 이제 막 고서 수집에 발을 들여놓은 수집가는 나름대로의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오히려 환영했다. 나는 『호산방도서목록』을 발행한 후 곧이어 고서 경매전을 개최했다. 아직도 대부분의 장서가들은 책을 판다는 행위를 썩 떳떳하지 못한 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경매전은 그같은 부담을 자연스레 덜어 준다. 그후 호산방을 영월로 옮기기까지 『호산방도서목록』을 18호까지 발행했으며, 고서 경매전도 여러 차례 개최했다. 1999년에는 영월책박물관 설립과 함께 호산방도 영월로 옮겼다. 그리고 8년, 호산방은 그 동안 박물관 사업에 밀려 명맥만 이어 왔다. 그러던 2006년 9월, 호산방을 서울 프레스센터로 이전했다. 박물관을 운영한다는 것이 의지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 때였다. 그래서 호산방 사업을 서울에서 재개하기로 한 것이다.(*사진 83) 2007년 5월, 파주출판도시 호텔 지지향 이층에 호산방을 하나 더 오픈했다.(*사진 84~85) 이와 때를 같이하여 『호산방도서목록』을 『호산방통신』이라 제호를 바꿔 근 10년 만에 제19호를 발행하면서 새로운 사업체제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간의 고서점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고서 수집가도 상당수가 바뀌었고, 고서점의 운영 방식에도 인터넷 온라인 서점으로 그 중심축이 옮겨 가고 있었다. 온라인 서점으로 말하면 호산방이 그 원조다. 『호산방도서목록』을 발행하면서부터 이들을 전산관리하기 시작했으니 벌써 20년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영월에서 운영하던 방식으로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호산방 사이트를 개편하여 새로운 변화를 꾀하기로 했다. 이에 앞서 인터넷 고서점의 문제점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온라인 판매의 구조적 특성은 고객과의 의사소통이 거의 단절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 상품 사진과 설명에 의존하여 판매가 이루어진다. 또, 대금 결제에 따른 고객의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 하는 점도 지나칠 수 없는 문제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고서를 보는 정확한 안목과 이를 바탕으로 한 성실함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사진과 상품 설명에 보다 사실적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적어도 물건에 대한 의문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능하면 많은 사진과 함께 정확한 설명을 곁들이도록 노력하고 있다. 특히 상태와 관련한 시비를 없애기 위해 흠이 있는 부분을 상세한 사진으로 보여 주면서, 상태에 따라 매긴 등급을 별도로 알려 주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2007년 여름, 미국의 세계적인 경매 사이트에 호산방 사이트를 개설했다. 동시에 기존의 사이트를 전면 개편하여 2008년 1월에 새롭게 오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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