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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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패랭이 쓰고 큰북 메고~얼쑤, 그리운 김법국 단장님기미양(아리랑학회 이사) 지난 3월 초 한 여성 국악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움과 애석함을 담은 간절한 목소리였다. "우리 김뻑국 선생님 2주기가 이번달 18일인데, 아무도 몰라주네요. 국악신문이 기념식 같은 것 못 하나요? 코로나도 끝났는데~” 아마도 2022년 3월 21일 자 국악신문 부고기사를 보고 전화를 한 것 같았다. 세상을 멈추게 하는 코로나 중이어서 유일하게 국악신문만 부고 기사를 냈기 때문이다. 그동안 종로 3가 국악로 로터리 ‘김법국예술단’ 사무실은 최고 원로 송해 선생으로부터 10대 소리를 배우려는 아이까지 사랑방처럼 들리는 곳이었다. 언제나 빙그레 웃으며 맞아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이 가신지 2년을 맞는 시기에 전화를 받은 것이다. 2주기가 되는 3월 18일 몇몇 지인들과 이 소식을 나눴다. 모두 공감을 표했다. 그래서 금년에 국악신문이 앞장서서 기념사업을 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더 많은 지인들의 뜻을 모아 기념사업회든 기념 시상제도든 결성하자고 합의하였다. 4월 중순경 ‘아리랑연합회’가 나섰고, 이어 ‘왕십리아리랑보존회가 나섰다. 이렇게 하여 국악신문을 포함하여 3자가 만났다. 그 결과 첫 회는 조직과 기금 마련 등이 어려우니 국악신문 주최의 기념상을 제정하여 첫 회 수상자를 배출하고, 내년에 기념사업과 제2회 시상을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상명은 ’김법국국악상‘으로, 수상은 5월 중 공고하고 심사하여 5월 중 시상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래서 지난 5월 1~4일까지 공고를 하고, 응모자 4인을 대상으로 12일 심사를 하고, 26일 시상식을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급하게 기념상 일정을 잡고 나니 선생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선생과 필자는 20여 년 전 CD 10장짜리 음반 ‘3代 정선아리랑’(신나라 레코드)을 내고, 이를 기념하여 ‘SBS토요무대 김순녀 정선아리랑’이란 발표회 겸 특집방송을 하게 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음반의 주인공 김순녀 선생이 ‘김법국예술단’ 주역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은 스승 이창배 선생의 탑시(塔詩) 액자를 중앙으로 하고, 역대 국악 명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 속에서 국악인들이 웃음꽃을 피우는 곳이었다. 그 특유의 제스처를 써가며 배꼽잡게 하는 약장사 시절의 에피소드며, 가슴을 찡한 배고픈 시절 웃음 품앗이 ‘딴따라’ 시절 얘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선생의 정확한 연대기를 아는 이들은 드물다. 선생의 일대기를 쓰기 위해 늘 만날 때마다 메모를 하고, 오랜 교유 관계의 지인이 전 종로문화원 반재식 원장을 통해 들어 알고 있는 아리랑연구가 김연갑 이사의 얘기 대로라면 대략 이렇다. 50년대 이전, 60, 70년대 인천 생활, 80년대 이후 김법국예술단 운영, 2000년대 말년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선생의 본명은 김진환(金鎭煥)이다. 송해 선생의 증언으로는 1962년 KBS 성우로 잠시 일했는데, 효과음으로 뻐국기(암수 우는 소리와 과부 뻐국이 우는 소리)소리를 잘내서 별명으로 부른 것이 ‘김뻑국’이라고 불려졌고, 이를 한자로는 ‘김법국(金法國)’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출생은 일본이고 1937년생이다. 9살 때 원폭투하를 목격한 뒤 귀국, 부친의 출생지인 충남 보령에 정착했다. 초등학교를 다녔으나 우리말이 서툴고 일본에서 왔다고 하여 ‘왕따’를 당해 졸업도 못하고 서울로 왔다. 기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역에 내려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뚝섬 근처에서 국악인 이충선 씨를 만나 1년6개월 동안 머슴생활을 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용인으로 피란을 갔다. 전쟁말기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국악인들이 모이는 탑골공원에서 노숙을 했다. 여기서 공연 중인 국악인 최경명 씨에게 일을 시켜달라고 매달렸다. 그래서 장구와 피리를 어깨 너머 배우면서 ‘약장수’ 생활을 했다. 주로 경기도 일대를 돌며 ‘구루무’(크림) 등을 팔며 공연을 하였다. 이 시기 틈틈이 이창배 선생한테 경기민요를 배우고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선생을 만나 무대도 섰다. 이렇게 유년의 50년 대는 험란한 시기지만 국악을 배우고, 국악인들을 만나 활동을 하게 된 시기이다. 1960~1970년대 초까지 인천 내동과 신포동의 신흥목공소에 주소를 두고 주로 인천지역의 인천극장, 문화극장, 현대극장에서 소리와 만담을 소시민들에게 전했다. 동행은 만담 콤비 장소팔과 고춘자, 재담가 김영운과 배뱅이굿의 이은관, 탈춤의 양소운, 소리는 이창배 문하의 김옥심, 이은주, 최창남 등이었다. 선생은 이른 아침부터 자전거를 타고 쇼를 알리는 포스터를 벽에 부치러 인천 시내는 물론 주안 일대까지 다녔다. 그리고 표를 팔고 무대청소를 하고 출연까지 했다. 이때부터 패랭이 쓰고 몸집만 한 큰북을 앞으로 매고 만담과 소리와 코로 대금을 부는 등 장기를 발휘했다. 이 것이 인천시대이다. 1980~1970년대 중반에 들면서 ‘김뻑국’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시기이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직후였다. 김 씨는 이은관 선생과 함께 종로 3가에 있는 요정에서 초대를 받았다. 이 부장이 북한을 무사히 다녀온 기념으로 파티를 열었는데, 김지미·서수남·하청일 등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다들 얌전하게 불렀다. 그러나 선생은 ‘네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지, 내가 먼저 살자고 계약에 도장을 찍었나.’라는 청춘가 한 대목을 불러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이에 이 부장은 "바로 이거야, 이런 사람 세 사람만 있으면 남북통일도 문제가 없지.”하면서 김법국 선생을 옆자리에 앉힌 뒤 백지수표(100만 원 이하짜리) 한 장을 손에 쥐어 주었다. 이 돈은 당시 집 한 채 값이었다. 바로 이 돈으로 ‘김뻑국예술단’을 차렸다. 그리고 묵계월·최창남·김덕수·임이조 등 이름있는 국악인들을 출연시킬 만큼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 특히 전방부대와 노인단체 위로 봉사 공연을 많이 했다. ‘김뻑국예술단’의 활동은 이런 90년 대까지 이어졌다. 이때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재담의 명인’으로 불렸다. 이때 노인들이나 소외 계층을 위한 자선 공연을 열면서 재능을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부 활동에 대해서 노태우 대통령 표창장(1998년),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상(1994년), 국방부 장관상(1996년), 김대중 대통령 감사패(1998년) 등 많은 표창장과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자신의 공연보다는 후배들의 무대를 마련해 주는데 힘썼다. 그리고 ‘정선아리랑전수소’를 거의 무료로 운영하여 아리랑 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였다. 특히 기획사 업무도 하며 노년을 보냈다. 이 시기 특별히 주목되는 활동은 반재식 원장을 통해 ‘국악로’를 제정하게 한 일과 최창남 선생을 보유자로 지정받게 하는데 역할을 해주셨고, 1996년 만담보존회를 꾸려 김용운 선생을 회장으로 모셔 전승활동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시기 두 번이나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완쾌후 건강을 되찾고 20여 년 활발한 활동을 하시다가 2022년 3월 코로나로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셨다. 마지막 제자로는 정선아리랑 명창 김순여 여사가 있고,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홍익대 미대를 나와 사업가로 활동 중이라고 전한다. 이렇게 주마간산 격으로 2주기를 보내며 선생의 생애를 되돌아봤다. 아, 김법국 선생님. 내일 오후 쯤 종로3가 지나서 '국악의 거리'에 나가면, 그 텁텁한 목소리와 인자한 미소에 패랭이 쓴 모습으로 만날 것 같다. 한 없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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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전설의 녹음스튜디오 ‘훈’에 대한 단상기미양(아리랑연합회 사무총장) ‘誕’의 순간을 마주하는 일은 설레고 벅차다. 생명의 탄생은 물론이거니와 원고 몇 장의 출력조차도 마찬가지다. 모두 전혀 다른 독립적인 원형의 탄생이며 형태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곳곳의 봄꽃들이 그제 모습들을 자랑하는 4월 마지막 금요일, 음원(音源)의 탄생 순간을 함께했다. "교대(서울교육대학) 후문에 있는 훈 스튜디오 사장님 아들이 근무하고 있는스튜디오”에서 만감이 오고 갔다. 만일 이렇게 부연(敷衍)한 상호가 아니었다면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나, 이 말에 불광동 골목을 돌고 돌아 찾아온 것이다. "훈 스튜디오 사장님”은 ‘이훈’, 그 아드님이 근무하는 고래사운드 스튜디오 실장은 ‘이유성’이다. 1992년 민주화 운동(?) 체류탄 연기 속에서 태어난 ‘아리랑CD 제1호’ 발매 이후 25종의 아리랑CD를 제작하면서 거의 대부분은 ‘훈’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고 믹싱(mixing) 같은 후반 작업도 했다. 코로나가 오기 직전 마지막 녹음이 ‘이혜솔, 인생의 소리길 왕십리아리랑’ 일부의 녹음이었다. 당시 교대 후문 훈스튜디오에 처음 오는 이들은 "와~!”라는 감탄사를 발한다. 대기실과 작업실과 녹음 부스 할 것 없이 곳곳에 80년 대부터 최고의 가수들 녹음장면 사진과 그들의 음반은 물론 스튜디오에 준 휘호(작곡가 김희갑 선생과 가수 장사익 선생)나 사인지(박범훈 총장 서태지와 아이들)가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놀라움에 두리번거리면 "아리랑이시지요. 이번은 어는 지역 아리랑인가요?”라며 우리를 맞이 하시는 분. 나직한 체구의 전문가 포스의 시선, 그러나 온화한 눈매의 이훈 사장님이다. 이어 작업실로 안내하여 들어가면 다소 거만하기까지 한 믹싱 전문 남성 기사와 역시 씨크한 인상의 여성 바란스 전문 기사 두 분을 소개해 준다. 이것이 그동안 2, 3년마다 만나는 진풍경이다. 녹음은 주로 훈 사장님이 직접 맡고, 부수 마이크 세팅과 체킹 등은 기사들이 완성해 준다. 믹싱과 바란스 작업은 두 전문가가 다른 일정을 잡아 수행한다. 이분들은 선율, 박자, 강약 등 미세한 부분까지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수정, 보완을 통해 완결된 음원을 내놓는다. 이런 직업상의 특성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사장님은 소리꾼과 반주자들, 그리고 함께 온 이들에게까지 부담을 갖지 않게 하는데 최대한 편안하게 배려를 해주신다. 까다로웠던 다듬이 소리가 들어가는 ‘문경새재아리랑’(송옥자 선생과 보존회원들) 음원 녹음 때도 특히 그랬다. 10명이 두드리는 다듬이 소리를 녹음하는 까다로운 작업이라 모두 긴강하고 있었는데, 훈 시장님은 하루종일 걸리는 오랜 기술적 시연을 반복하면서 원만하게 처리해 주었고, 오지에서 온 연로한 분들이 편하게 녹음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녹음실 부스에서 연행자와 각각의 악기 연주 기념사진을 찍는 번잡함도 장소 사용 등에 대해 배려를 해준다. 이러한 배려가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녹음 전문 스튜디오의 명성을 갖게 한 배경일 듯싶다. 바로 이런 스튜디오에서 탄생한 음원으로 정선·대구·밀양·문경·춘천·공주·경산 등 지역 아리랑 음반이 발매되었고, 이들은 나름의 완결성와 고유성을 독자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이런 지나간 시간들을 회상하며 들어선 스튜디오에서 콘설을 마주하고 있는 이를 보고 직감했다. "훈스튜디오 사장님의 아들”, 빼어 닮았다. 키도 그만하다. 자태도 그 모습이다. 이내 반가움과 편안함이 왔다. 4년여 만에 훈 사장님을 만나는 듯했다. ‘훈’ 스튜디오 자체가 아니라 그 사장님을 기억했듯이 ‘고래 사운드’가 아닌 ‘훈 사장님의 아들’인 것이 그저 너무 반가웠던 것이다. 가끔씩 손에 닿은 아리랑음반 해설에 담긴 훈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들. 이를 볼 때마다 떠올린 사장님. 분명 하늘에서도 이번 ‘이혜솔, 인생의 소리길 왕십리아리랑’ 녹음 작업을 내려다 보고 계시는 듯하다. 스튜디오를 방문한 이재옥(한연연회) 회장님, ‘정선에 가면’을 녹음한 유망한 소리꾼 곽동현, 피리와 장구 반주를 해준 두 분은 사장님에게는 낯선 분들이다. 그러나 모두 아리랑을 지극하게 생각하는 분들이니 반가워 하실 듯하다. "훈 사장님, 그립습니다. 사장님은 우리나라 역사적 음반의 존재와 함께 영원하실 것입니다. 의미가 있는 일은 누군가는 기억할 것입니다. 그 말석의 아리랑 음반들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추모의 마음, ‘이혜솔, 인생의 소리길 왕십리아리랑’에 고이 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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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아리랑 비가(悲歌)22일 오후 2시 의미있는 행사가 인사동 태회빌딩 회의실에서 개최된다. 1부는 ‘일본 아리랑을 말한다’, 2부는 ‘라일락회 송년회’이다. 이 중 1부에서는 ‘일본아리랑’의 전모를 대상으로 네 전문가가 근대사 속에서 일본 속에서 아리랑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을 나누게 된다. (주)국악신문의 후원으로 모든 자료의 번역을 담당한 ‘라일락회’, 가장 오래 주재하는 기자 '구로다 가쓰히로' 선생, 유튜버 정창관 선생, (사)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 네 분이 각각 발표를 한다. 이 중에 필자가 일부 참여하게 되어 확인한 자료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자료는 ‘가요이야기 아리랑 애가 엘레지’(歌謡物語 「アリラン哀歌 エレジー)이다. 일본이 아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에피소드라는 점에서 먼저 소개하기로 한다. 작가는 사이토 유노스케(斉藤 祐之介)다. 이 장르의 전문 작가로 ‘가요 이야기 '눈물의 밤기차’, ‘사랑의 단코부시(炭坑節)’라는 작품도 있다. 중간에 나오는 노래의 편곡은 도쿠다 다쓰오(徳田 達雄)이다. 노래는 스가와라 쓰즈코와 이즈미 시로가 맡았다. 가수 스가와라 쓰즈코 여사는 일본에서 아리랑을 애호하는 ‘아리랑 가수’로 불리는 여가수이다. 제작사는 테이치크(Teichiku ABCD-1250)음반사로 SP 음반 두 장에 이야기를 수록했다. 형식은 내레이션, 가수의 노래, 이야기의 두 남녀 주인공이 주고받는 방식이다. 1929년 나온 ‘영화설명 아리랑’ 장르와 유사하다. 시점은 1945년 8월 15일 패전 상황, 두 남녀(하루오와 처녀 마다오)가 조선 개성에서 일본으로 가는 히키아게배, 즉 귀국선을 타기 위해 부산항에 도착하면서 전개된다. 지로가 폭파하는 혼잡한 상황에서 처녀를 놓친 남자가 혼자 귀국하여 처녀를 회상하다 극적으로 재회하는 이야기다. 첫 나레이션과 첫 노래는 이렇다. "내레이션: 아리랑 부르면 마음은 나라 바다를 건너 눈물을 글썽이게 한다. 지난 인연의 고향도 지금은 타국의 처녀초(乙女草). 피고 지고 사라져 간다. 속세의 여행이라 생각하지만 슬픈 가락이여 왜 우는가? 노래:푸른 달밤의 창문으로 와 누가 여주하며 노래를 부르는지/ 먼 아리랑 다듬이 소리에 사라져 희미한 그 가락” 나레이션과 노래에서 아리랑이 회상(回想)의 도구로 기능한다. 즉, "패전의 비보에 만족하지 못한 일본 군대가 소련군들을 상대로 최후의 몸부림을 치듯”하여 일본으로 와서 조선에서 태어나 자란 시절을 회상한 것이다. 이 장면이 이야기의 기조임을 알려 준다. 그런데 여인 마다오는 귀국선을 타려 하던 날 지뢰의 폭팔로 눈을 다치게 된다. 그래서 길을 잃고 귀국선을 타지 못하여 이별을 한다. 이런 나레이션이 이어진다. "나레이션: 눈동자는 까맣게 빛나지만 보이지 않는 아리랑 그대 그리워. 속눈썹 이슬이 도라지꽃에 떨어져 슬퍼라 별똥별.” 혼자 내지(일본)에 돌아 온 남자는 조선에 두고 온 연인이 맹인이 된 줄을 모르고 ‘아리랑 그대’로 비극화하여 그리워한다. 그리고 매일 귀국선이 도착하는 항구 모지(門司) 길목에서 기다린다. 그렇게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다. 이어지는 나레이션은 비극이 극대화 된다. "내레이션: 그 무렵 모지의 환락가에 노래를 부르며 꽃을 파는 장님 처녀가 거리의 화제를 던지고 있었다.” 맹인 꽃 파는 처녀는 건달들의 횡포에 자릿세를 빼앗기는 등 수난을 격는다. 그리고 이를 알게 하루오가 나타나 맹인 처녀가 기다리던 여인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처녀는 맹인이 된 자신이 부담이 된다는 생각에 남자를 피한다. 이에 남자는 그것은 사랑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위로를 하며 재회하게 된다. 마지막 나레이션과 노래, 이렇게 ‘이야기 아리랑 비가’는 끝을 맺는다. "내레이션: 밝은 미소로 핀 밤하늘의 별 하나. 머지않아 떠오를 처연성(妻恋星)의 때가 쓸쓸한 아리랑 엘레지(哀歌). 노래:달이 구름 사이에 숨어도 손짓하여 부르는 억새풀에 다시 돌아온다/ 울면 안된다 눈물을 닦고 우러러보는 아리랑 별 하나” 고난을 겪고 만난 맹인 여인을 ‘아리랑 별’로 환생시킨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울리는 아리랑은 ‘悲歌(엘레지)’이다.(번역:라일락회) 이 자료는 한일관계사, 거기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개인사, 이를 형상화한 노래와 문학작품 등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짧은 텍스트이다. 그리고 이 속에 아리랑이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준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오는 22일 ‘일본아리랑을 말한다’, 과연 ‘일본아리랑’의 전체 모습과 각각의 실상이 어떻게 출현하여 오늘에 까지 전개되고 있는지, 독자 여러분과 함께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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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한일회담 60주년 기념, “아리랑으로 한일관계 재정립하자”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체결. 이는 일본이 한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한 것으로써 법적지위, 청구권, 경제협력, 어업문제에 대한 협정 체결이다. 1910년으로부터의 긴 한일관계의 정치적 매듭으로, 전후 격심한 혼란을 겪었지만 한일국교정상화라는 새로운 시대의 출발임은 분명하다. 이로부터 60년을 보낸 오늘, 새로운 개념의 진정한 한일관계 정상화를 문화의 저력으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문화 저력에 의한 한일관계 재정립, 이 시대적 과제의 단서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에 의탁할 수가 있다. 다음의 다섯 가지에 근거한다. 하나는 아리랑 역사상 첫 활자 기록을 일본인에 의해 존재한다. 바로 1894년(明治27년) 5월 31일자 『郵便報知新聞』(유우빈호우치신문) 기사 <朝鮮의 流行謠 아리랑>이다. 이는 조선 민중의 정서를 청취하기 윈한 목적으로 조선의 유행요 아리랑에 관심을 둔 결과이다. 이는 1896년 미국 선교사 H.B 헐버트의 <Korean vocal music> 보다 2년 앞선 기록이다. 둘은 한일회담 과정에서 아리랑은 양국 국가를 대신한 사실이다. 한일회담 최고 난제였던 대일청구권 문제 해결로 한일회담의 실질적인 타결이라는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오히라(金鍾泌大平) 메모’ 서명 순간, 일본 외무성이 아리랑을 연주해 주었다. 한일 국가 연주를 대체한 것으로 매우 의미가 크다. 이는 1993년 11월 6일 일본 수상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가 김해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리랑으로 환영한 것과 같은 것이다. 셋은 "앞당긴 통일”로 평가되는 남북단일팀 ‘단가 아리랑’ 합의에 따른 단일팀 출전에 공동 국가 아리랑을 처음으로 시행된 곳이 일본이란 사실이다. 1990년 남북단일팀 결성 후 첫 국제경기가 일본 고베에서 개최된 세계탁구경기였다. 이때 분단 46년만에 처음으로 ‘코리아KOREA’란 이름으로 한팀이 되어 ‘한반도기’를 들고 아리랑 연주 속에 출전하여 세계의 장벽 중국을 꺾고 우승을 하였다. 당연히 수상식에서 우승 메달을 받는 순간 아리랑이 국가(國歌)로 연주되었다. 명실공히 아리랑이 한민족의 노래임을 세계에 입증한 것이다. 넷은 1930년대부터 1965년까지 일본에서 유통된 ‘일본아리랑’이 48종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일본아리랑’이란 일본에서, 일본 작곡가에 의해 작곡/편곡 되고, 일본 작사가에 의해 작사 되고, 일본 가수가 일본어로 부른 ‘아리랑’ 표제 작품을 말한다. 그런데 이 ‘일본아리랑’이 1931년 ビクター文藝部 編曲, 西條八十八 작사, 小林千代子 노래 ‘アリラン’이 첫 작품이다. 이어 하세가와 이치노(長谷一郞)로 알려진 채규엽이 일본말로 부른 ‘アリランの唄’이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널리 유행했는데, 1932년 일본 최고의 작곡가 古賀政男 編曲, 佐藤惣之助 作詞, 淡谷のり子와 長谷川一郎(蔡奎燁)의 노래이다. 이로부터 ‘아리랑 야곡(’アリラン夜曲), ‘아리랑 추억(アリランの思ひ出)’, ‘도도이야쓰 아리랑(都々逸アリラン)’, ‘아리랑 부시(アリラン節), ’아리랑고우타(アリラン小唄), ‘아리랑이야기(アリラン物語) 등 ‘아리랑’ 표제의 총 48종이나 된다.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어느 나라도 이런 노래의 사연을 갖는 경우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다섯은 아리랑에 얼킨 숙제 하나가 일본에 있다는 사실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그것은 우리 영화 최고의 작품이지만 필름이 없어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영화 아리랑’ 필름이 일본에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대동아전쟁기 폭약 제조용으로 관리하고 있던 일본 한국 대만의 영화필름 속에 나운규 감독 영화‘아리랑’이 포함되어 있다”는 아베 요시시게(阿部善重)씨의 생전 주장에 근거한다. 아베씨는 군속(軍屬)으로 폭약 제조를 하다 1945년 패전이 되자 3인이 불하(拂下)를 받아 소장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조총련 영화제작소장 여운각에 의해 남북한에 알려진 것이다. 2005년 사망하여 유품이 일본영상센터에 이관되어 "영화‘아리랑’ 필름이 없음이 확인되었다”고 하지만, 생전 증언에는 "영화‘아리랑’ 필름은 불하를 받은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소장했는데, 고베에 보관하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여지가 있는 것이다. 특히 아베씨를 나봉한(나운규 선생 차남) 선생과 세 차레나 만난 바 있는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이 조사한 보고서 ‘아리랑이 보고 싶다’에 의하면 3인이 합동으로 작성한 소장 영화필름 목록은 일본영상센타에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 여지는 있다고 본다. 이 문제는 다시 접근할 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상의 ‘일본아리랑’과 일본 속의 아리랑을 통해 한국과 일본 간에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특히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써 국가 간의 대화 주제임은 분명하다. 이로서 한일회담 60주년을 앞에 둔 시점에서 일본아리랑 주제 학술모임, 양국 공동 타큐멘타리 제작, 한일 교차 공연 등으로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국가무형문화재 아리랑, 그리고 일본아리랑을 새로운 한일관계의 중요한 문화 자산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아리랑 정신은 대동 상생에 있다는 사실에서 주목해야 한다. 이제 공동의 실행 위원회 구성으로부터 아리랑을 통한 한일관계 교류의 힘찬 걸음을 내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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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한국전쟁과 아리랑(下) <br>지구상 마지막 분단국가 코리아# "UN참전 군인들은 애환이 담긴 애조의 아리랑을 전쟁 참상의 현장에서 가슴에 담았다. 일부는 아름다운 한국처녀의 아리랑으로, 일부는 처참한 어린 고아의 아리랑으로, 또 어떤 군인은 승전가 아리랑으로 담았다. 이들에게 아리랑은 영원한 한국 참전 인식표(認識票)이다.” # "유엔군은 한국군 전우에게 아리랑을 배웠고, 나라마다 다른 군가 대신 아리랑으로 연대하였다. 아리랑이 행진가와 진혼곡으로도 연주되기도 하여 한국의 국가로 아는 군인들도 많았다.” # "참전 유엔 정보 담당 군인들은 오끼나와 기지에서 기초적인 생활어와 아리랑을 배웠다. 한국전 포로 식별을 위한 정보교육이었다. 포로 중 아리랑을 부르지 못하면 중공군이고, 아리랑을 잘 부르면 북한군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또한 전투 중 고립되었을 때 아리랑을 부르면 한국인들이 공포심이나 거부감을 갖지 않고 보호해 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유명한 재즈 뮤지션 오스카 페티포드는 우연히 들은 아리랑에 영감을 받아 귀국하여 째즈 ‘아디동 부르스’을 취입해 인기를 얻었다. 오스카 페티포드는 40년대와 50년대 초 미국 재즈계에서 베이스와 피아노 연주자로 유명하였다. 그는 1953년 초 일본 오끼나와 미군기지에 위문공연을 왔다 한국 위문공연을 하고 있는 미국 뮤직션들과 합류하여 귀국하기 위해 인천의 야전 부대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야전 화장실에서 일을 볼 때 밖에 있던 한국 통역병이 휘파람으로 부는 노래를 듣었다. 일을 본 뒤 통역병에게 휘파람 연주에 대해 물었다. 이 때 ‘아-리-랑’을 ‘A-DEE-DONG’으로 듣게 된 것이다. 그가 취입한 SP음반에는 연습곡(take) 2곡까지 수록하여 처음 들었던 당시의 영감을 표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 "지난 4월 24일 90세로 별세한 룩셈부르크 레미히 성당의 질베르 호펠스(Gilbert Hauffels)씨의 장례식에는 아리랑이 연주되었다. 인구 20만의 나라에서 100명이 파병된 군인 중 19세의 청년으로 1952년 3월 참전하였다. 최후까지 휴전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또한 철원평야를 확보하기 위해 격전을 벌인 ‘철의 삼각지’ 백마고지 전투에서 생존한 이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의 전투에서 고지 주인이 12번이나 바뀐 전투로 포탄 27만발로 ‘395 고지가 무너져 내려 마치 누워 있는 흰말’(白馬高地)로 보일 정도로 되었다는 최고, 최후의 전투였다. 그는 조카에게 남긴 유언장에 ‘아리랑을 들려 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아리랑은 룩셈부르크 한인회 박미희 회장이 불렀고, 반주는 참전 후 재직한 세관의 관현악단이 맡았다. 이 나라도 독일에 점령되었다가 미국 등의 우방국 참전으로 해방이 된 역사를 갖고 있다. 그의 한국전 참정 일기는 룩셈부르크 전쟁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 "전우들을 위해 아리랑을 부르겠다.- 6·25 당시 미 해병대 병장이던 영국 참전 용사 콜린 새커리(93)옹이 부산에서 열린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서 아리랑을 불렀다. 1950년 9월 19세의 청년으로 영국군 제30야전포병대 소속 포병으로 참전했다. 같은 소대 전우 4명을 잃고 327고지 전투에서 생환했다. 4명의 전우가 잠든 부산 UN공원에서의 기념식에 그들을 위해 아리랑을 부르겠다는 의사에 따른 것이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배로 부산에 도착했을 때 뜻은 모르지만 선율이 너무나 애잔하고 아름다워 금방 기억하였다고 한다. 그 오랜 세월 한국전을 생각할 때마다 아리랑을 흥얼거렸다고 한다. 이제 혼자의 흥얼거림이 아닌 세계를 향해 평화를 기원하며, 전우의 죽음을 영예롭게 하기 위해 부른 아리랑이다.” # "70년 전,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협정 서명식을 마친 후 유엔군 군악대가 연주한 곡이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한국전쟁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빛을 발하는 노래이다. 지루하고 적군의 전략으로 오르내린 휴전 회담은 유엔군을 지치고 격분시켰다. 가장 길고도 이목을 끈 국제적인 정전 협정 조인식임에도 악수도 없고, 박수도 없고, 웃음기도 없는 조인식이었다. 그리고 동서 문을 통해 갈라졌다. 그런데 문을 나서는 순간 양측의 군악대가 연주한 곡이 아리랑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한민족이며, 전쟁의 최후 종결 주도자도 남과 북은 한민족이라는 것을 적과 동지가 공감한 결과이다. 아리랑이 남북간의 만남에서 연주되는 이유이다. 이제 아리랑 연주는 종전의 순간일 것이다. 그때는 악수하고 박수치고 웃으며 맺는 조인식이며 부등켜 함께 합창하는 아리랑일 것이다. 그 아리랑을 염원한다.” 룩셈부르크 아리랑 *유언장에 '아리랑을 불러달라'고 할 정도로 아리랑을 좋아했던 호펠스 씨는 아리랑을 들으며 떠나셨다. 인구 2o만의 룩셈부르크가 6.25 전투에 100명을 파병했다니, 그동안 몰랐는데 놀랍고 감동스럽다. 여러 나라의 넘치는 도움을 받고 선진국으로 우뚝선 대한민국이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데 결코 인색해선 안될 것이다. 호펠스씨의 명복을 기원한다 아리랑의 국제화가 이뤄진 게 6·25 전쟁부터다. 한민족의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미 7사단은 아리랑을 사단 공식 행진곡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1951년 위문공연 차 방한한 유명 재즈 가수 오스카 페티포드는 우연히 아리랑을 듣고 이를 바탕으로 이듬해 앨범을 발매해 인기를 모았다. ‘아디동 블루스’란 이름인데 아리랑을 아디동으로 오인한 것이다. 수많은 용사들이 종전 후에도 아리랑을 잊지 못했다. 지난 4월 24일 별세한 룩셈부르크의 질베르 호펠스씨는 "장례식 때 꼭 아리랑을 불러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6·25 당시 미 해병대 병장이던 이는 지난해 한국 정부로부터 ‘평화의 사도 메달’을 받으며 아리랑을 불렀다. 오늘 부산에서 열리는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서 직접 아리랑을 부를 예정이다. 참전 용사 60여명이 참석한다. 70년 후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남한에서 울려퍼질 아리랑을 듣는 노병들의 감회가 남다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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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한국전쟁과 아리랑(中)전쟁과 같은 극단적 위기의 순간은 인간 본성의 밑바닥과 고귀함을 치열하게 발현하는 상황이다. 정치적으로는 갖가지 선언문과 격문으로 표출되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함성과 노래로 나타난다. 곧 35년 간의 압박에서 갑작스럽게 맞은 해방공간과 그 3년 후에 맞은 한국전쟁기가 그것이니, 시민들은 아리랑으로 그 격정을 표출하였다. 오랜 세월 불러오는 아리랑은 저항성과 대동성과 상생정신이 담고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뉴욕에서 발행한 한국 안내서 ‘THE KOREANS AND THEIR CULTURE’에는 아리랑을 "··· one of the most famous of all Korean songs"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리랑은 이미 한국을 상징하는 노래로 알고 있었다. 이는 다음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술통신’ 1946년 7월 25일 자 ‘아리랑 곡이 미국에 대유행’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근착(近着) 미국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목하 미국의 경음악계엔 난데없이 ‘아리랑’이라는 애틋한 동양정서의 신곡이 급작스럽게 유행하고 있는데, 거리나 사교실에서 이 노래의 다정다한한 멜로디는 모든 사람의 귀를 기울이게 하고 너도 나도 창화(唱和)하는 지경이라고 한다. 더욱이 미국에서 유명한 흑인재즈밴드 B.C.B의 뉴욕 연주엔 이 노래가 가장 인기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아리랑’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아리랑’이 틀림이 없는데 바다 건너 몇 만 리 미국 본토엔 그동안 조선 38선 이남에 주둔하였다가 제대 귀국한 병사들이 돌아와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조미(朝美)문화 교류의 선봉을 차지하게 된 터이라 한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전에 참전하는 미군들은 일부이지만 아리랑을 알고 오게 되었다. 그리고 한반도에 집입 하기 전 일본 오키나와(沖縄県)기지서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도 아리랑 익히게 되었다. 일부 간부에게 한정된 과정이기는 하지만 포로 관리에서 중국군과 북한군을 구부하기 위해 아리랑을 부르게 하여 부르지 못하거나 서툴게 부르면 중국군으로 분류하기 위해서다. 또한 일반 병사들은 참전 중 통역 등 한국군에 의해 알게 되거나 위문공연 등의 기회를 통해 알게 된다. 한국전쟁기 미 제3사단 15 연대 정찰소대 통역병이었던 전 경안서점 주인 김시한 사장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하였다.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서로 친해졌다. 언어소통도 어느 정도 해결되니 자연히 서로 대화가 쉬워졌다. 한 친구는 나에게 군에 오기 전 무얼 했느냐고 물어서 티쳐(Teacher)라고 했더니 무엇을 가르쳤냐고 물어서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특히 음악을 많이 가르쳤다'라고 했더니 한국노래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우리 애국가를 가르쳐 봤더니 어렵다고 해서 아리랑을 불렀더니 아주 흥미를 가지고 따라 부르더니 쉽게 배우고 흥겹게 부르며 미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리랑만 부르면 흥겨워했다. 그리스 군인도 우리와 같이 근무한 일이 있었는데, 이들도 아리랑을 쉽게 배우고 흥겹게 불렀다." 이런 실상이 반영된 것이 영화 '전송가'(Battle Hymn)의 내용이다. 1957년 개봉된 이 영화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배우 록 허드슨이 주연하여 한국전쟁 당시 전쟁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던 미 공군 조종사 딘 헤스(Dean E. Hess) 대령의 6.25 참전 실화를 다룬 것이다. 고아들이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인상 깊게 인식한 결과로 아리랑을 주제가로 한 것이다. 한국전쟁 중 아리랑 사연으로 더 구체적인 실례가 있다. 1951년 1월 12일자 ‘조선일보’의 기사 '아리랑은 좋은 것, 효과 백퍼센트이다. 아리랑을 전쟁기간 중 심리전의 일환으로 활용된 사례인데, 국군에게는 향수를 달래는 노래로, 인민군에게는 귀순을 유도하는 선무용으로 쓰였던 것이다. 전쟁 중에 활용 된 것이니 소리로 만들어진 총탄이나 마찬 가지이다. 그래서 기사에는 '음탄(音彈)'말이 나온다. 민족의 비극과 함께했던 아리랑의 슬픈 운명이 보인다. "중부전선 854고지 대적방송(對敵放送)의 음탄(音彈)은 아리랑. 우리나 님은요 날 그려 울고 전쟁판 요내들 임 그려 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울며 넘네 "실황 대적방송으로 7169부대에 귀순병들만 하루 평균 40명이나 된다. 귀순병은 대개 40대가 많았다. 적병들은 "아리랑 타령에 마음이 뒤숭숭하다고 했다.” (사)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은 이 기사에 대해 "죽음을 목전에 둔 전쟁터에서 이런 가슴 시린 아리랑은 필시 적의 가슴을 향해 날아가는 총탄의 기능을 했음직하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북한 측에도 적용된 듯하다. 중국이 1953년 발행한 ‘항미원조 전쟁 군가집’에 실린 중국군 군가 중 '빨지산아리랑'이 있어 확인된다. 이 군가는 밀양아리랑 곡조에 이러한 가사로 되어있다. "백두산봉우리에 공화국깃발 날리고 제주도한라산에 유격대깃발 올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전쟁으로 지치고 아픈 마음을 달래 주는 한편에서는 무기가 된 것이니 아픈 아리랑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의 아픔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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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한국전쟁과 아리랑(上)한국전쟁 3년 1개월 2일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위 38°선 전역, 소련의 지령과 중국의 지원으로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였다. 약 5년간의 체제에서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냉전 속의 이 체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후자는 수립이 되자마자 군사력을 확충하며 소련과는 ‘조소군사비밀협정’을, 중국공산당과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준비했다. 이에 따라 중국 공산군에 있던 조선인 2만5천명이 북한군에 인도됨으로서, 13만명이 전선에 배치되었다. 우월한 전세를 갖춘 북한은 통일을 내세워 선전포고(宣戰布告)도 없이 남침을 했다. 이렇게 전 38선상에 남침함으로서 촉발된 전쟁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에 UN 결의에 따라 국제사회가 개입하게 되었고, 미7사단 주력부대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성공함으로서 서울을 수복하고 이어 9일만에 평양을 점령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교착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이 때부터 UN군 등에서 제한전쟁으로 휴전이 제기 되기에 이르렀다. 이 전쟁으로 한민족은 너무나 큰 손실을 보았다. 정신적 피해는 제처 두고라도 인적 물적 손실은 물론, 많은 이산가족 발생 같은 고통은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기에 이르렀다. 우선 인적 손실은 어느 전쟁보다 컸는데, 국군은 140여만 명, 북한은 약 329만 명, 유엔군은 약 15만 명의 손실을 보았다. 결국 남북은 무려 520만 명의 희생을 낸 것이다. 전쟁 피해, 희생은 이뿐만이 아니다. UN 참전군들의 희생도 크다. 참전국은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공 룩셈부르크 16개국이 유엔군으로서 약 190만 명의 전투병을 파병했으며, 인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가 야전병원, 병원선 등의 의료지원을 통해 참전했다. 이들의 인명 희생도 막중했다. 또한 많은 포로들의 발생도 그 처리로 갈등을 겪었다. 한민족이 남북군과 중공군에 동족임에도 편입되었고, 16개국 UN군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포로 교환 문제는 휴전회담 기간 내내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 포로 중에는 강제로 징집되어 많은 투항병이 발생하였고, 한국군 포로가 재 강제 징집 되어 북한군이 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중공군 포로 중에는 송환을 거부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UN '포로교환문제소위원회'와 '국제적십자조사위원회'는 곤경에 처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세 가지 문제로 급진전하게 되었다. 하나는 북한 지역에 전염병의 발발한 사실이고, 둘은 1952년 12월 유엔총회에서 120일간 설득하여 체코·폴란드·스웨덴·스위스 4개국으로 자유의사에 따라 선택하게 하자는 합의를 하였다. 마지막은 1953년 3월 소련의 스탈린의 사망이었다. 이런 경과로 휴전은 급진하였다. 드디어 1951년 7월 미국의 릿지웨이 유엔군 사령관과 북한 김일성과 평더화이 중공군사령관이 개성에서 회담이 시작되어, 군사분계선 설정, 세부사항 일괄타결, 전쟁포로 문제 합의와 협정 체결이 된 것이다.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협정을 맺어 전쟁은 중지되었다. 북한과 중공군 대(對) UN군 측의 미국이 대표하여 협정에 서명함으로서 휴전이 되었다. 3년 1개월 2일의 전쟁은 휴전 체제로 들어 간 것이다. 이로서 포로교환 등의 여진이 남았지만, UN군은 해체되어 참전 군인들은 각국으로 귀국하였다. 남북한은 전선에서 군인들과 무기를 철수하였다. 그리고 전쟁 복구에 들어갔다. 처참한 동족상잔 한국전쟁은 귀국 참전 군인들에 의해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그 결과로 ‘한국은 전쟁의 나라’, ‘한국은 고아의 나라’, ‘한국은 아리랑의 나라’ 같은 인상비평적(印象批評的) 표현들이 회자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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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울릉도에도 아리랑이 있다”"1985년 8월 15일 오전 11시부터 12반까지 90분간 송출된 특집방송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KBS 방송사상 유일하게 뉴스 없이 진행된 이 방송은 ‘울릉도아리랑’을 송출한 감동으로 내 가슴에 남아있다. '울릉도라 동해섬은 자물통세상/ 한번들어오면 나갈줄을 모르네”, 김제조 할아버지의 이 아리랑에는 울릉중계소의 전파음과 함께 파도소리가 반주로 따라온 매우 매력적인 소리였다. 20년 전의 그 감동으로 이 번 음반에 ‘울릉도아리랑’을 수록한다." 1999년 말에 나온 음반 ‘팔도아리랑’의 김연갑선생 해설 일부이다. 이 음반이 나오기 전까지 울릉도아리랑의 존재를 알고 있는 분들은 드물었다. ‘신비의 섬’, ‘환상의 섬, ’동해의 외로운 섬‘ 같은 표현으로 오히려 거리감을 느끼고 있던 울릉도에 아리랑이 있다는 것은 의외이고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은 "울릉도의 생활상을 노래한 아리랑으로 1980년대 울릉읍 사동리 김재조와 천부리 진태원이 구연한 것을 김연갑이 채록하였다”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올라있지만 당시로서는 생각을 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이런 인식은 2012년 유네스코의 인류문화유산 아리랑 등재 과정을 통해 전환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나아가 세계인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6개국의 인류문화유산 등재 심사위원들은 한국인이 사는 곳 어디에든 아리랑은 뿌리내리고 불러 오는 노래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결속에 기여하는 노래라고 평가하였음은 물론, 60여 종의 아리랑이 존재함을 ‘다양성의 가치’로 인정하기도 했다. "인간의 창의성, 표현의 자유, 공감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아리랑이 지닌 가장 훌륭한 덕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누구라도 새로운 사설을 지어 낼 수 있고, 그런 활동을 통해 아리랑의 지역적·역사적·장르적 변주는 계속 늘어나고 문화적 다양성은 더욱 풍성해진다. 그와 동시에 각 지역사회와 민간단체 및 개인을 포함하는 일단의 지방 민요인 아리랑 전수자들은 해당 지방 아리랑의 보편성과 지역성을 강조하면서 대중화와 전승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유네스코한국위원회 문화유산 ‘서정민요 한국 아리랑’) 정확한 실상 파악이면서 애정어린 시선의 평가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울릉도에도 아리랑이 있어야함을 직감하게 된다. 140km나 멀리 떨어진 섬이라하더라도 노래말처럼 지증왕 13년 서기 512년 신라시대에도 우리가 살아온 섬이기 때문이다. 1984년 김연갑선생의 조사 이후 몇 차례의 조사 결과로는 곡조상으로는 두 가지 버전에 가사 형태로는 세 가지 형태의 아리랑이 있음이 확인 되었다. 하나는 강원도 아라리의 메나리조의 것이고 또 하나는 1970년대 형성된 가요형태이다. 그렇다면 왜 이 울릉도의 ‘울릉도아리랑’이 강원도 아라리 곡조의 파생형이 된 것일까? 그것은 역사적 배경에서 이해가 될 것이다. 즉, 1882년(고종 19) 개척령이 공포되어 조정의 협조로 들어 간 개척민의 분석 결과인데, 이 때 곡식 종자와 가축과 함께 입도한16가구 54명 중에 7가구로 강원도민이 가장 많다는 사실이다. 이 연장선에서 1900년 처음으로 울릉군이 강원도에 편입된 사실도 이를 말해준다. 실제 이 시기 아리랑은 강원도에서 생활의 노래로 보편화 된 상황이다. 이런 정황에서 울릉도의 생활민속, 특히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은 당연히 울릉도에도 영향권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100여년 후인 1980년대 중반 울릉도아리랑의 채록은 인구가 1만2천명이 된 상황이니 당연히 버전이 다양해 질 수 있었다. 그것이 당시 60대 중반이던 김제조와 전태원선생의 아리랑 2종과 1편의 가요형 아리랑이다. 이들 3편 모두는 울릉도민의 정서를 오롯이 반영하고 있어 매우 각별하다. 육지와의 격리감을 ‘자물통’으로 표현 한 것이 특히 그렇다. 울릉도아리랑(1) 울릉읍 사동리 거주 김재조 선생의 구술로 채록되어 널리 알려진 아리랑이다. 당연히 조사지 사동리에서는 ‘울릉도아리랑’이 아닌 그냥 ‘아리랑’이란 곡명으로 조사되었다. 곡조는 강원도 정선아라리와 같은 메나리조로 불규칙하게 엮음형을 먼저 부르고 긴소리를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넘겨주소 1 동해바다 한복판에 층암절벽 120십리/구비돌아 솟앗으니 그리움의 울릉도라 2 울릉도라 동해섬은 자물통세상/한번들어오면 나갈줄을 모르네 3 바다에는 그물낚시 섬안에는 호미연장/부창부수 넘나드니 복을 받은 울릉도라 4 우리네 서방님은 오징어잡이 갔는데 /원수년의 돌게바람 왜 이리도 부노 울릉도아리랑(2) 천부리 거주 진태원의 구술로 채록된 것이다. 곡조는 김재조의 것과 같으나 전체가 엮음형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가사상으로는 이것이 더 고형으로 파악되나 같은 강원도 메나리조임으로 음악적으로는 같은 것으로 본다. 3절에서 인구수를 1만 2천으로 표현하여 1960년대 초기 널리 불린 노래임을 짐작케 한다. 자료에 따르면 1960년대 인구는 1만 4천 정도였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나를넘겨주소 1 창파에 배를띄워 순풍에 돛을달아/동해바다 칠백리로 바람결에찾아오니 울릉도라 2 산천은 험준하고 수목은 울창한데/처량한 산새소리에 산란한 이내심정 울게하네 3 바위돌이 솟은 곳에 향나무가 늙었으니/일만이천 백성사는 꿈나라에 울릉도라 4 바다에는 그물낚시 섬안에는 농기연장/부창부수 넘나드니 복을 받는 울릉도라 5 동해창파 넓은 바다 우뚝 솟은 울릉도에/성인봉이 주산이요 수원지가 수도로구나 울릉도아리랑(3) 형태는 전형적인 본조아리랑과 같은 2행 1련에 2행 후렴을 으로 불린다. 곡조는 유행가 조로 경쾌하다. 울릉도의 대표적인 처소를 드러내려 한 것으로 보아 울릉도의 한 문사가 애향심으로 지었다고 본다. 특히 후렴의 고정적인 ‘아리랑고개’가 ‘아리랑 장재’로 바뀐 것이 주목된다. ‘장재’는 저동 2리에서 나리동으로 가는 고개이다. (후렴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장재로 넘어간다 1 동해에 높이솟은 울릉도의/중첩한 명산들을 자랑하노라 2 갈미봉은 단풍으로 몸단장하고/홀벗은 노인봉은 가련도하다 3 남서동(南西洞) 투구봉은 영웅의 기상/간령의 가두봉은 호걸이로다 4 백운동 마당에는 신선이 놀고/학포동 둥허리에 실안개뜨돈다 5 북면의 송곳산은 재주도 좋아/앞바다의 구멍섬을 뚫어 놓았네 6 나리동 분지네는 설원이 좋고/ 향나무재 향기는 간곳이 없네 7 옥경동 맑은 물에 언어가 노니/ 금년에도 울릉도에 풍년이 온다네 이 아리랑 3편의 가사를 통해 1980년대 전후의 울릉도를 이해할 수 있다. 이해는 동경(憧憬)과는 다르다. 이해는 사실과 진실에 접근하는 기본자세다. 멀리 두고 관광의 대상인 울릉도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 아리랑이 있음이 이를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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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사할린’은 ‘동행’이다아리랑은 민중들의 공시매체이다. 간결한 선율에 두 줄의 사설로 개인적인, 또는 집단적인 심사를 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앞의 기쁨과 슬픔을 자연스럽게 반영하여 노래로 주고받아 소통하는 것이다. 아리랑의 이러한 매체성은 적어도 1930년대 해외 동포들에게는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으로 체화된 문화였다. 그래서 1930년대 말부터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된 동포들도 아리랑을 통해 참상을 드러냈다. 그 아리랑은 너무나 늦게 우리에게 전해진 ‘사할린아리랑’이다. ‘사할린아리랑’은 ‘동토(凍土)의 눈물’이었다. " 따뜻한 조선을 놔두고 사할린에는 왜 왔나 왜왔나 우리님 따라서 내여기 왔지"(사할린아리랑) 나의 사할린 동포에 대한 이해는 이렇게 아리랑이란 프리즘을 통해서였다. 2010년대 들어 접하게 된 사할린 동포사회가 왜 아리랑을 부르는지를 알게 된다. 아리랑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지 10년이 지나서 였다. 이 부끄러움으로 사할린 동포를 만나고 공부하였다. 결국 ‘사할린아리랑제’라는 이름으로 가서 함께하게 되었다. 남사할린 곳곳의 흔적은 모두 위령제의 대상이었다. 세상에 이런 지역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가서 부른 조국의 아리랑은 장송곡이며 위령가가 되었다. ‘사할린아리랑’에 밴 눈물은 1, 2세대만의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법령이란 또는 제도란 이름의 한계로 눈물을 흘리는 동포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런 사정들을 들으며 10여 년을 오가는 동안 세상을 뜨신 분들도 있다. 그때마다 그분들의 한결같은 마지막 눈길은 조국을 향하였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것은 곧 "조국이여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라는 한스러운 호소였다. 내가 미약하지만 사할린 동포들과의 ‘동행’을 마음으로 약속한 계기는 이런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나의 이 ‘동행’ 약속의 실천은 우선 동포들이 남긴 기록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국내에 알리는 일과 기회가 되는대로 기록을 남길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전자는 수십 편의 문학작품을 남긴 춘계 류시욱 선생 기록을 찾아 문경에 ‘디아스포라문화원’을 설립하게 한 것이고, 후자는 국내 언론에 동포들의 사연들을 보도하게 한 일이다. 특히 후자에 주력을 하고 있다. 이 중 하나가 KBS한민족방송의 뜻깊은 사업에 연계시키는 일이다. 이를 기록들을 통해 후세에게 ‘사할린의 눈물’뿐만 아니라 조국과의 동행 과정을 전해주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나의 이런 작은 동포들과의 ‘동행’ 실천을 이해해 준 KBS 한민족방송으로부터 영예의 공로상을 받았다.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상임을 안다. 지금 사할린 현지와는 코로나19로 거의 단절 상태이다. 대신 SNS통신을 통한 온라인 소통과 국내 영주귀국 동포들을 통해 작은 동행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런 정도의 단절에도 전전긍긍하는데, 80년 동안 단절은 오죽했겠는가. 이런 생각하면 동행을 통한 소통의 계기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알게 된다. 더 많은 이들과 더 많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더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어제는 양주에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 사할린에 살고 있는 박영자 단장의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 대상 수상을 자축하는 짧은 모임을 가졌다. KBS 한민족 방송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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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아리랑의 어원(2)아리랑 기원설은 ‘백설(百說)’로 표현된다. 많다는 뜻을 넘어 아예 너나 나나의 주장 모두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들 주장은 두 가지의 방향에서 출발하고 있다. 하나는 처음부터 완성형인 ‘아리랑’으로 출현했다는 주장이고, 또 하나는 점진적으로 아리랑으로 형성되었다는 주장이다. 비유한다면 전자는 창조론이고, 후자는 진화론인 셈이다. 1960년대까지는 전자가, 이후 오늘날에는 후자가 다수설이다. 필자 역시 후자라고 단언한다. 그 이유는 단적으로 ‘완성형 아리랑’이 19세기 이전에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치 진화론에서처럼 현생인류와 똑같이 생긴 화석이 밑바닥층에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과 같다. 지난 3회에서 살핀 충북 중원 지역 농요 ‘아라성’이나 이승훈(李昇薰, 1756~1801)의 ‘농부사(農夫詞)’에 나오는 ‘아로롱(啞魯聾)’이 그렇다. 본 회에서는 ‘아리랑’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제시하여 어원설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은 곡명으로서의 ‘아리랑’을 말하는 것이지, 곡조와 사설인 노래 자체를 말하는 ‘아리랑’이 아니라는 점이다. 1912년 총독부는 식민정책 수립을 위해 조선 내 민정을 조사했다. ‘민요·속담·이야기 등에 대한 조사[俚謠·俚諺及 通俗的 讀物等 調査]’이다. 전통문화 전반에 관한 전국 대상 조사로 각 도 도지사를 통해 각 군수에게, 군수는 다시 관내 초등학교 교장을 동원하여, 간접 조사를 하였다. 당시 식민제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의 선행 사례를 답습한 것으로, 조선 내에서 식민지 경영 정책 마련을 위한 것이었다. 궁극적인 정한론(征韓論)의 실천 방략으로 위장술인 문(文)을 가장하여 무(武)를 준비한다는 문장적 무비론(文裝的 武備論)에 입각한 것이다. 이 조사는 근대 사회과학 이론을 적용한 공식적인 민속조사 첫 사례이다. 이 중 민요 분야의 아리랑 조사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평가된다. 이를 구체적으로 학계에 보고한 것은 1986년 김연갑의 ‘민족의 노래 아리랑’(현대문예사)에 수록함으로써인데, 전국 7개도(경상남도 제외) 조사 56편 아리랑 각편(各篇)이다. 이 조사에 수록된 곡명을 음가(音價) 표기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아리랑歌 ② 阿朗歌 ③ 아리랑打令 ④ 酒色界의 雜歌 ⑤ 어르렁타령 ⑥ 아르렁打令 ⑦ 어르렁타령 ⑧ 啞而聾打詠 ⑨ 아리랑타령 ⑩ 啞聾歌 ⑪ 阿朗歌 ⑫ 아르랑타령 ⑬ 아르릉타령 ⑭ 啞利聾打令 ⑮ 아리랑타령 ⑯ 어르렁打令 ⑰ 愁心歌 ⑱ 아르렁타령 ⑲ 아르랑打令 ⑳ 아르랑歌 이상과 같이 표음(表音) 상의 곡명이 총 20가지이다. ‘아리랑타령’과 ‘阿朗歌’, ‘어르렁타령’은 두 번 나오고, 나머지 14가지는 각기 다르다. 이 같은 현상은 1세대, 즉 30년 전후의 현상으로 보는데, 곡명이 지역마다 다르게 불렸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아리랑’이란 음가로 이행 단계임을 보여 준다. 오늘의 음가 ‘아리랑’을 쓴 경우는 네 가지뿐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이 시기부터 점진적으로 ‘아리랑’이 형성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결과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아라리’에 ‘ㅇ’음이 첨가될 필요가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는 농사법 중 이앙법(移秧法)의 일반화이다. 이앙법은 볍씨를 논에 직접 뿌리는 직파법(直播法)과 달리 모판(못자리)에서 싹을 틔운 모(육묘)를 논에 옮겨 심는 농법으로, 모내기 철 가뭄에 주의하여 많은 품(노동력)을 들여 일시에 심는다. 이런 특성으로 모심는 이들 간의 동작을 통일하고, 허리를 굽혔다 펴는 고됨을 덜기 위해 노래가 필요했다. 이 노래는 멕이고 받는 형식에서 후렴이 필수임으로 조흥(助興) 음소인 ‘ㅇ’음이 첨가되었다. 그 결과 ‘아라리’에서 아로롱·아라성·아르랑·아르렁·아르랑 등으로 음전(音轉),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고종 시대 7년간의 경복궁 중수(1865~1872)라는 역사적 배경이다. 이때 ‘아라리’가 공사장 부역꾼들에게 주고받는 노래로 불리면서 조흥음 ‘ㅇ’이 첨가되어 ‘아리랑’으로 전음되었다고 보는 주장이다. 두 가지 모두 개인적인 삶의 노래 ‘아라리’가 집단적인 노동요로 기능이 확대되면서 후렴이 필요했고, 그에 따라 조흥 음소가 첨가되어 ‘아라리+ㅇ’이 되었다. 그리고 최종 완성형 아리랑으로 통일된 것은 1926년 영화 ‘아리랑’의 개봉으로 그 주제가가 전국화되면서 곡명에서나 후렴에서 ‘아리랑’으로 고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함에서 ‘아리랑’ 자체는 의미적 독자성을 갖지 못한다. 다만 ‘아리’나 ‘아라리’의 의미인 소리·노래·말이란 뜻이 있을 뿐이다. 극단적으로는 음소 ‘ㅏ’·‘ㅣ’·‘ㅇ’음의 결합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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