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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문경의 용(龍) 이야기 3이만유/향토사연구원 전국 곳곳에 용과 관련된 지명에는 용이 살았거나 승천한 곳이라는 전설을 품은 소(沼)가 많은데 그 명칭이 다양하다. 용연(龍淵), 용호(龍湖), 용지(龍池), 용당(龍塘), 용추(龍湫), 용담(龍潭), 용천(龍泉), 용정(龍井), 용소(龍沼) 등이다. 각각의 용어가 가진 명확한 뜻을 알 수 없지만, 필자가 보기엔 용추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아래 깊은 웅덩이가 있는 곳이고, 용연은 강줄기를 따라 흐르다가 물이 깊고 넓게 고여 있는 곳이며, 용소는 규모가 용추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작은 웅덩이를 말하는 듯하다. 문경 지역에도 이런 명칭을 가진 곳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문경팔경’의 하나로서 가은읍 용추계곡과 문경새재 용추폭포, 마성면 봉생정 앞 두물머리에 있는 영강구곡 제9곡인 용연 등이 있다. 용추계곡 용추에는 용이 승천을 할 때 용트림하다 남긴 용의 비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으며, 깊게 파인 소(沼)의 형태가 하트 모양인데 보는 사람에 따라 엉뚱한 생각을 하며 미소를 머금기도 한다. 용추에는 가뭄이 들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곳이다. 기우제를 지낼 때 돼지 등 살아 있는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데 제를 올리면서 용추 바위 위에 짐승의 붉은 피를 뿌리는 풍습이 있다. 이는 하늘로 승천한 용이 보았을 때 신성한 자기 영역이 부정한 피로 더럽혀져 있으니 이를 씻어내기 위해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 기우제 효험이 바로 나타난다고 한다. 다시 문경시의 용과 관련된 지명이나 전설을 찾아보았다. 신라 헌강왕(憲康王) 5년(879)에 가은읍 희양산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智證大師)가 유랑 중에 심충(沈忠)이란 사람의 청을 받아 이곳에 절을 세우기로 하고 큰 못을 매립할 때 여기에 살고 있던 용을 구룡봉(九龍峯)으로 쫓아내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원북리(院北里)에는 쌓여 있는 돌무더기가 용이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 하여 ‘용서덜’이라고 한다. 마성면 상내1리에 용주사가 있고, 신현3리(봉생-鳳笙)에는 군왕지지(君王之地)인 어룡롱주형(魚龍弄珠形) 지형의 어룡산(魚龍山-617m)이 있고, 남호1리 용마골이 있다. 문경읍 문경새재 조령산성 안에는 조선 시대 군창(軍倉)과 용화사(龍華寺)가 있었다는 ‘용사골’이 있다. 지금은 용의 기운이 서린 땅이어서인지 ‘문경새재오픈세트장’이 웅장하게 세워져 있고 그 촬영장 안에 용이 왕이고 왕을 용으로 인식하듯 왕의 침전인 강녕전 등 왕궁이 있으니 땅 이름값을 한 것이다. 그리고 마원리에 용마가 땅에서 솟아 승천했다는 용마골(龍馬谷)이 있고, 팔령리(八靈里)에는 용이 등천했다는 용추폭포가 있으며, 당포리(唐浦里)에도 역시 용이 승천하였다는 용추(龍湫)가 있다. 용연리(龍淵里)에 용뢰산(龍磊山), 용연천(龍淵川), 용지등(용재), 회룡원(回龍院), 돌무더기가 용의 비늘처럼 생겼다고 하는 ‘용서들’ 등의 용 관련 지명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천 년 묵은 구렁이와 지네가 서로 먼저 승천하기 위하여 보름 동안 밤낮없이 싸운 끝에 구렁이가 이겨 용으로 승천하였다고 한다. 이때 싸움이 격렬한 그곳의 땅이 움푹 패어 지금의 호수 ‘용연’이 생겼다고 한다. 갈평리(葛坪里)에는 용흥초등학교(龍興初等學校)가 있고, 옛날 교촌리(校村里)에는 신비로운 구름과 안개 자욱한 이곳 골짜기에 남자아이 9명이 들어갔다가 끝내 나오지 못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소년들을 위하여 제사를 올리고 기원을 드렸더니 9마리의 용(龍)이 하늘로 올랐다는 구룡골(九龍谷)이 있다. 영순면 오룡리(五龍里)는 중국 송나라에서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낸 여선재(余善才)를 시조로 하고, 그 후손인 의령여씨(宜寧余氏) 여덕윤(余德潤)이 조선 태종조(1400~1418) 때 이곳으로 이주하였는데, 그의 아들 오형제(五兄弟)가 문과에 급제하여 모두 벼슬길에 올라 사람들이 용이 다섯 마리 났다 하여 오룡골(五龍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호계면 용암보(龍巖洑)는 이곳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보의 이름을 용암보(龍巖洑)라 하고, 용암보의 물로 관개하는 견탄리 들을 용암들이라고 하였다. 부곡리 오얏골은 10년마다 여는 400여 년 전통을 지닌 ‘오얏골 별신굿’이 유명하다. 이 별신굿을 지낼 때 용이 산다는 암굴과 숫굴 2개의 천연동굴인 용담(龍潭)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며, 제물용 떡을 담은 ‘용시루’라는 것도 있다. 별암리는 원래 마을 이름이 굴암(窟岩)이었는데 굴속에 살던 용이 등천하여 그 굴이 빈 굴이 된 후로는 마을 옆에 흐르는 영강 물속에 자라 모양의 바위가 있어 ‘자라바위(별암-鱉岩)’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점촌2동에는 용지마을이 있다. 옛날 이곳에 용이 살았다는 못이 있어 용지(龍池)마을이라 불렀고 날이 가물면 주민들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지금은 못이 없어졌지만, ‘용지샘’은 남아있다. 점촌4동에는‘미르실’ 일명 ‘진곡(辰谷)’이라는 마을이 있다. 1800년경 평산신씨가 이주하여 개척할 당시 미르실 또는 진곡이라 불렀다. 미르의 뜻은 용을 의미하며 진(辰)자도 십이지 중 용(龍)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강구곡 제2곡인 ‘송정소’에는 천 년을 기다려야 용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는‘이무기’가 살고 있는데, 어느 날 한 청년이 송정소에서 잠수하여 보니 큰 굴이 있고 거기에 눈이 꽹과리만 한 구렁이가 혀를 날름거리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여 도망쳐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이곳에서 젊은이가 수영하다가 매년 한 명씩 원인 모르게 익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지막 들려줄 용 이야기는 ‘영신도령과 영신들’이다. 옛날에 ´미지니´ 마을에 최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얼굴이 못생기고 무식했지만, 야망을 품은 성실하고 힘세기로 소문난 영신이라는 머슴이 살고 있었다. 그가 어느 여름밤, 곤히 잠을 자고 있을 때 절세미인인 한 여인이 나타나 공손히 인사를 한 후에 자기의 청을 들어주면 자기도 영신 총각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기에 호기심으로 "좋습니다. 청이 무엇이오? 하니 그 여인이 말하기를 "소저는 사람이 아니고 송정소에 사는 암용인데 내 남편인 수룡과 지금까지 사이좋게 지내오던 중 얼마 전부터 이웃 요사한 암용을 만나 즐기고 소저를 싫어하니 그 암용을 죽여주시오. 내일 새벽 뒷산(돈달산)에 내려와서 놀고 있을 때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처치하면 됩니다” 하고 칼과 잿봉지를 놓고 사라졌다. 영신 총각이 깜짝 놀라 꿈을 깨어보니 머리맡에 실제로 어젯밤 꿈에서 본 칼과 잿봉지가 있는지라 신기하게 생각하고 한참을 망설이다 이내 결심하고 곧 칼과 잿봉지를 들고 뒷산에 올라가서 새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두 마리의 용이 내려와서 놀고 있는 것을 본 그는 어느 것이 암용인지 수용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날은 밝아 오고 급한 김에 앞에서 아양을 떠는 듯한 용이 암용이라 생각하고 칼로 내리쳐 죽였다. 그리곤 잘려 나간 머리가 펄떡펄떡 뛰고 있어 목이 다시 붙을까 봐 용의 목에 재를 뿌리고 정신없이 내려왔다. 그날 밤이었다. 어젯밤 그 여인이 머리를 풀고 나타나서 하는 말이 "총각이 죽인 것은 암용이 아니고 내 남편 수룡이니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이오.” 하며 슬피 울면서 "그러나 약속은 지켜야 하지요” 하고 총각에게 소원을 물으니, 그는 최부자보다 더 큰 부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여인은 영신에게 이르기를 "문종이와 지릅대(삼의 껍질을 벗긴 대)을 준비하여 영신이란 글자를 쓴 깃발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들어 비가 그칠 때까지 뒷산에 올라가 기다리다가 물이 빠지고 새 들판이 생기거든 깃발을 꽂아서 표시하세요. 그럼, 그 땅이 총각의 땅이 됩니다” 하고는 사라졌다. 그날부터 줄곧 보름 동안이나 큰비가 내리어 온 천지는 물바다로 변하는 동시에 점촌에서 함창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영신 앞으로 흐르면서 높던 뒷산이 깎여 돈짝만큼 작아졌고, 그때 산의 일부가 떨어져 흐르다가 멈춘 곳이 지금 송정소 앞의 딴봉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신은 암용이 시키는 대로 비가 그치자, 산에서 내려와 깃발을 꽂아 표시한 후 자기 땅을 만들었으며, 황폐한 들판을 부지런히 가꾸어 자기 소원을 이루고 큰 부자가 되었다. 이곳 윤직동 용지(龍池)마을 뒷산, 용지산에는 이 전설을 뒷받침해 주는 ‘용무덤’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렇듯 옥토‘영신들’은 신비로운 전설을 머금고, 문경 지역 생명의 젖줄 ‘영강’ 맑은 물을 받아들여 가을이 되면 들판 가득 황금물결 출렁이는 풍요로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PS 청룡은 희망과 성취를 상징합니다. 모두 2024년 갑진년(甲辰年) 올해에는 무병장수와 소원성취하시고 국민이 행복하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국운이 융성하는 한 해가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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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갑진년(甲辰年), 문경의 용(龍) 이야기 2이만유/향토사연구원 ‘미르’는 용(龍)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조선 중종 22년(1527)에 어문학자 최세진이 지은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용(龍)’자를 ‘미르 용’이라 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하늘에 거대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보이는 은하수를 우리 조상들은 큰 용이라고 생각하여 ‘미리내’라고 했는데 ‘미르’가 용(龍)을 뜻하므로 미르와 개천, 시내를 뜻하는‘내’가 합쳐서 용의 내[川], ‘미리내(미리는 미르에서 변천한 것)’가 된 것이다. 문경시 산양면 진정1리(辰井一里)에 ‘미르물’이란 마을이 있다. 조선조 초기 초계변씨 이흠(李欽)이란 선비가 이곳에 정착하여 보니 마을에 우물 3개가 나란히 이어져 있어 그 형상이 용같이 생겼다 해서 미르물(미르우물)이라 하였고, 용이 살던 우물이 있다 하여 미르물(辰井) 이라고도 하였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상․중․하 용정(龍井)이 남아 있다. 또 미르물 동북쪽에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정착해 살고 있는 텃골에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지형의 비룡상천지형(飛龍上天之形)을 이루고 있는 청룡산(靑龍山)이 있다. 그리고 진정2리(辰井二里) 추산(秋山)에는 제주 대정현감(大靜縣監)을 지낸 추재 김진석(秋齋 金振錫)의 장수지소(藏修之所) 추룡대(秋龍臺)가 있다. 산북면 김룡리(金龍里)에는 전통사찰인 운달산 김룡사(雲達山 金龍寺)가 있다. 김룡리는 480년경 효성이 지극한 김장자(金長者)라는 사람이 정착해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면서 영롱한 일곱 빛 무지개가 빛나면서 김장자는 용이 되어 승천하였다. 그 후 사람들이 이 마을을 김룡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김룡사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10년(588)에 운달조사(雲達祖師)가 창건하고 운봉사(雲峯寺)라 하였는데 김장자(金長者)가 용초에 살던 용왕의 딸과 결혼하게 되어 아들을 낳아 이름을 용(龍)이라 하였다 하여 마을 이름을 김룡리라 하고, 절 이름 또한 김룡사라 개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문경팔경인 운달계곡(雲達溪谷) 냉골에는 용이 살다 승천하였다는 용추(龍湫)가 있고 김룡사 암자(庵子)인 금선대(金仙臺)에는 용왕탱(龍王幀)이 봉안되어 있다. 산북면 이곡리(梨谷里) 배나무지 남쪽에는 옛날에 용(龍)이 살았다 하여 용바우라는 큰 바위가 있으며, 용바우 아래는‘용바우소’라는 깊은 소(沼)가 있다. 석봉리 희룡골(希龍谷)에도 회오리치는 깊은 소(沼)가 있었는데 그 소에 두 마리의 용이 살고 있다가 한 마리가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희룡골이라 불리어졌다. 종곡리(種谷里)에는 마을 앞산의 모습이 나는 용의 형상으로 된 비룡산(飛龍山)이 있어 마을 이름을 비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마을 북쪽 큰 바위 아래 소(沼)가 있는데 이곳에 살던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고 용난소(沼)라고 부른다. 약석리(藥石里)구룡판(九龍板) 용호동(龍湖洞)에는 마을 뒷산 봉우리가 아홉 마리의 용이 서로 다투어 승천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구룡판이란 지명은 구룡산 남쪽 산기슭에 평평한 곳이 있어 이곳에 마을을 세우고 마을 이름을 구룡판이라 하였다 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산세를 보고 조선에 큰 인물이 날 지세라며 군사들을 시켜 산혈(山穴)을 끊어 버리자 아홉 용의 피가 흘러 이 지역 모든 흙의 색깔이 붉게 되고 산 고개도 잘록해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회룡리(回龍里)는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이 흡사 용이 몸을 뒤틀며 기어가는 형상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회룡이라 하였으며, 1963년 이 냇물을 막아 ‘회룡못(回龍池)’이 축조되었다. 그때 사람들은 이제 용의 안식처가 생겨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지내리(池內里)에는 용마산(龍馬山)이 있다. 동로면 명전리(鳴田里) 당골마을 입구에 연못이 있고 이 연못 가장 깊은 곳을 용소(龍沼)라 하는데 아주 옛날 용(龍)이 승천을 하다가 벼락을 맞아 연못에 떨어져 죽었다는 안타까운 전설이 있다. 또 벌내에 있는 보(洑)를 용이 살고 있다고 해서 용보(龍洑)라고 하였다. 농암면 사현리에도 용바우 지명이 있고, 뭉어릿재 아래에는 깊은 소가 있는데, 용이 승천한 곳이라 해서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냈다. 농암리(籠岩里)에는 새장터 북쪽 가실목고개 아래에 ‘청룡끝’ 또는 ‘청룡등끝’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 고려말 청룡사(靑龍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 청룡골이라 하고, 풍수지리설에 의한 좌청룡의 등 끝에 위치한다고 하여 ‘청룡등끝’이라 부른다고 한다. 선곡리 칠봉산에도 용과 관련된 용소곡(龍沼谷:용추골)이 있다. 내서리 쌍룡계곡(雙龍溪谷)은 도장산 자락의 옥계수가 굽이굽이 휘감아 돌아가는 계곡으로 기암괴석과 층암절벽이 장관을 이루며 청룡과 황룡이 희롱(戲弄)하며 살던 곳이라 하여 용유동(龍遊洞)이란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여기에 명주실 한 타래가 다 들어간다는 깊은 용소(龍沼)가 있다. 신라 시대 고찰인 심원사(深源寺)가 있고 조선시대 유학의 꽃이며 성리학을 구현하는 공간으로 화운(華雲) 민우식(閔禹植)이 경영한 쌍룡구곡이 있는 곳이다. 연천리에는 용이 산다는 용추(龍湫)가 있는 궁기천 변에 후백제 왕 견훤과 관련된말바우(마암-馬岩)가 있다. 견훤이 왕이 되기 전에 오색 운무가 자욱한 어느 날, 이 바위에서 바람보다 빨리 달리는 하늘이 내린 용마(龍馬)를 얻었다고 하여 그때부터 이 바위를 말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견훤이 한껏 상기되어 용마가 빠른가 화살이 빠른가를 시험해 보려고 적지산으로 화살을 쏘는 동시 말을 달려 목표지점에 이르니 이미 화살이 꽂혀 있는지라 견훤이 크게 노하여 "이놈이 무슨 용마냐”고 소리치며 칼로 용마의 목을 베어버리자 순간 퓨웅∼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견훤이 처음 본 화살은 전날 무예를 수련하며 쏜 화살이었다. 이에 견훤은 ‘시불이희여 장차내하오(時不利 將次奈何, 세월의 불리함이여 장차 어찌할거나)’하며장탄식하며 자신의 경솔함을 크게 후회하고 방성대곡(放聲大哭)하였다고 전해 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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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갑진년(甲辰年), 문경의 용(龍) 이야기이만유/향토사연구원 2024년 갑진년(甲辰年)은 ‘푸른 용의 해’라 한다. 올해는 육십갑자(六十甲子)의 41번째로 갑진년(甲辰年)이 된다. 다시 말해 ‘푸른 용의 해’라 함은 천간(天干) 10개 중 갑(甲)으로 푸른색에 해당하고, 지지(地支)의 12개 중 5번째로 용을 뜻하는 진(辰)이 되어 갑진년(甲辰年)‘청룡(靑龍)의 해’가 되는 것이다. 용(미르)은 권위를 상징하는 전설 속 신수(神獸)로서, 기린·봉황·거북과 함께 사령(四靈)에 속하는 상서로운 상상의 동물이다. 인간을 초월하는 강력한 힘과 신통력을 지녔으며 특히 비와 물과 관련된 신령스러운 동물이다. 청룡은 동서남북을 지키는 벽사신(辟邪神)으로 사신도(四神圖)나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보는 좌청룡(左靑龍)·우백호(右白虎)·남주작(南朱雀)·북현무(北玄武) 중의 하나이고 동쪽을 지키는 신이다. 용의 모습은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81개)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영묘한 구슬, 여의주(如意珠)를 지니게 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지게 된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농경 생활을 영위하면서 우순풍조하길 바라며 풍농(豊農)과 풍어(豊漁)를 빌기 위해 용왕제·용왕굿·용신제·기우제를 지내는 등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기도 하였다. 용은 조화능력이 무궁무진하며, 물을 지배하는 수신(水神)으로 용왕·용왕할머니 등으로 부르며 모시는 까닭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또한, 신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용은 상서로운 힘을 지녀 호국(護國)과 왕권이나 왕위를 상징하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성인의 탄생, 군주의 거국적인 대사(大事)에 여러 차례 용이 출현하는 기록이 보인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동명성왕이 황룡을 타고 승천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태조 왕건은 용의 핏줄이라고 해서 왕씨 성을 가졌으며, 이 때문에 고려 왕 씨 후손의 겨드랑이에는 용의 비늘이 돋아 있다고도 한다. 황룡사구층목탑을 세우고, 문무왕이 죽어서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것이나, 만파식적(萬波息笛)에 얽힌 설화 등에서 호국룡임을 엿볼 수 있다. ‘문경새재오픈세트장’에 있는 사정전(思政殿) 안에는 ‘용상 체험장’이 있다. 거기에는 용상(龍床)과 왕이 입는 의대(衣帶)가 준비되어 있는데, 임금과 관계되는 것에는 거의 빠짐없이 ‘용(龍)’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호칭을 쓴다. 이를테면 용상(龍床)은 물론이고 용좌(龍座), 용포(龍袍), 용안(龍顔), 용루(龍淚), 용음(龍音), 용선[龍扇] 등이 있다.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할 때 위의 용과 관련된 낱말을 다 말하고 난 뒤, "그럼, 왕이 누신 응가(대변)는 무엇일까요?”라고 질문하면 "용똥”하는 대답이 나온다. 그래서 한바탕 웃음꽃을 피우는데, 정답은 ‘매화’라고 한다. 변기는 ‘매화틀’이라 하고요. 그리고 용포를 자세히 살펴보면 국왕을 상징하는 용문(龍紋)을 수놓은 용보(龍補)를 가슴 ·등 ·양어깨에 장식하였는데, 왕과 왕비가 입는 의대(衣帶)에는 오조룡(五爪龍-발톱이 5개 있는 용), 왕세자와 왕세자빈은 사조룡(四爪龍), 왕세손은 삼조룡(三爪龍)을 붙여 발톱 수로 지위를 나타냈다. 일설에는 중국의 황제만이 오조룡을 쓸 수 있고, 조선의 왕은 사조룡을 쓴다고도 하였다. 문경에는 대승사, 김룡사, 봉암사 등 전통사찰이 7곳 있다. 사찰마다 범종(梵鐘)이 있고 범종의 가장 위쪽에는 용의 모습을 한 고리가 있다. 이것을 종뉴(鐘紐) 또는 용뉴(龍鈕)라고 하고 이곳에 쇠줄을 연결하여 종을 매달 수 있다. 용생구자전설(龍生九子傳說)에 의하면 용이 낳은 아홉 자식에는 비희(贔屭), 이문(螭吻), 포뢰(蒲牢), 폐안(狴犴), 도철(饕餮), 공복(蚣蝮), 애자(睚眦), 산예(狻猊), 초도(椒圖)라는 용이 있다. 범종의 고리에 있는 용은 포뢰(蒲牢)라고 하는 용이다. 포뢰는 소리 지르는 걸 좋아하는 용인데, 특히 바다에 사는 고래를 무서워하여 고래를 보기만 해도 놀라 비명을 크게 지른다고 한다. 그래서 장인들이 포뢰 형상을 만들어 종의 윗부분에 장식하고 고래 모양의 당(경당-鯨撞)으로 종을 쳤다. 그렇게 하면 고래를 만난 포뢰가 경악하여 큰소리를 지를 것이고, 그에 따라 종소리도 멀리까지 크고 우렁차게 들리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범종 소리를 일명 경음(鯨音)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21년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간한 ‘띠 지명 이야기’에 따르면 전국 고시 지명 약 10여 만개 중 십이지(十二支) 동물 관련 지명은 4,109개인데 용과 관련 지명이 가장 많아 전국에 1,261개나 되며, 경상북도는 174개가 된다고 한다. 그중 문경에는 어룡산(魚龍山) 1개만 조사되어 있으나 필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우리 지역의 용 관련 지명은 수십 개 있다. 그럼, 지금부터 문경에서 용과 관련된 지명과 용(龍)과 얽힌 이야기를 펼쳐보기로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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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선사인(先史人) 주거지로 추정되는 ‘바위그늘 유적’ 발견향토사연구원 이만유 낙동강 상류 금천(錦川)이 흐르는 경북 문경시 산양면 일대에는 기존에 알려진 것 외에 필자가 향토사 연구 활동을 하면서 새롭게 발견하여 세상에 알린 청동기시대 대표 유적인 고인돌과 성혈석이 다수 남아 있다. 그중 2020년 4월 2일 ‘청동기시대 상징 고인돌, 성혈(性穴) 또 발견’이란 제목과 ‘북두칠성 별자리 성혈, 남근석(男根石)으로 추정되는 돌도 발견’이란 부제를 달아 언론에 보도한 바가 있는데 이 유적이 훼손될 위기에 처해, 행정당국에 보존 대책을 건의한바 관련 부서에서 현지 확인하고 보존 가치와 청동기 유적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하여 지난 1월 13일 고고학 전문가이신 세종문화재연구소 유병록 박사를 모셔서 현지 조사를 할 때 필자도 동행하였다. 이날 왕태리 청동기 유적 현지를 보고 난 뒤, 유병록 박사와 여운황 문경시 문화예술과 문화재관리팀장과 함께 금천변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기존 청동기 유적을 탐방하기로 하여 필자가 현지로 안내하였다. ‘연소리 대형 성혈석’ ‘ 녹문리 성혈석 군집지’ ‘현리 성혈석 너럭바위’ ‘ 산북면 서중리 웅창마을’ 등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금천변 현리 야산 남쪽에 있는 대형 바위를 살펴보든 유병록 박사께서 "암음(岩蔭-바위그늘)이다”하는 외침이 있었다. 깜짝 놀라 셋이 모여 움푹 들어간 바위 밑과 주변을 살펴보았는데 거기에는 도자기편(분청사기, 백자)과 와편(瓦片)이 흩어져 있었다. 선사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물길이나 지형이 덮이고 묻혀있어 그때와는 지금 외형이 많이 달라져 있으므로 쉽사리 ‘암음’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과연 이곳 대형 바위와 그 주변이 선사시대인들의 주거지인‘바위그늘’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발굴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 그러나 제반 여건이나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바위그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바위그늘유적’은 동굴유적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존재하는 대형 바위 아래 그늘을 이용한 선사인들의 주거지다. 자연 절벽에 그늘이 진 곳, 풍화작용에 의해 오목하게 형성된 곳, 하천이나 바다의 절벽에 파식작용에 의하여 움푹 파인 곳으로 햇빛이 잘 들어오고 북풍을 막을 수 있는 남쪽으로 트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늘 내부와 그늘의 트인 앞에 선사인들이 사용한 유물이나 생존을 위해 취했던 동·식물 등을 발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위그늘유적’이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곳은 충북 단양군 매포읍 상시리, 부산 금곡동 율리, 경북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유적 등으로 소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유적이 외국에서는 구석기시대 유물이 주로 발견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와 삼국, 고려, 조선시대까지의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 만약 문경에서 ‘바위그늘유적’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는 놀라운 일이 될 것이며 얼마 전 중부내륙고속철도 문경읍 마원리 문경역 주변 공사장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이 소수 발견되었다 하지만, 우리 문경지역의 역사가 청동기시대에 머물다가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확실하고 획기적인 일이 될 것이다. 필자가 여러 차례 고인돌과 성혈석이 다수 분포된 금천 일대는 지금으로부터 삼천여 년 전에 살았던 ‘청동기인들의 집단 거주지다’라고 말해 왔는데 이곳의 대형 바위가 발굴 과정을 거쳐 ‘바위그늘’로 최종 확정되는 결과가 나온다면 필자의 추정이 사실이 되는 것이다. 하루빨리 당국에서 ‘현리 바위그늘 선사유적’ 발굴 계획을 수립, 추진하여 묻혀있는 역사가 햇빛을 볼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아울러 필자가 이제까지 주장해 온 문경시 전체 청동기시대 유물인 고인돌과 성혈석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고 훼손을 방지하는 보존 대책도 함께 세워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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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파사현정(破邪顯正)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2023년 문경시 신년하례회’가 문경문화원 주관으로 올해 1월 3일 온누리스포츠센터에서 각 기관 단체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하였다. 그때 양재동 향토사연구소장께서‘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2023년 신년경구’를 발표하고 ‘그릇됨을 버리고, 올바른 도리를 행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설명하셨다. 필자가 문경문화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33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 난 뒤 지인들과 함께 문화탐방을 가는 버스에서 전 문경문화원 채대진 원장님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이다.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보람있게 살아가는 길이 뭘까 고민하고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맬 때, 문경문화원 회원 가입을 권유받고 2004년 회원이 되어 2년 전까지 17년이란 긴 세월 동안 운영위원, 이사, 감사, 향토사 연구위원, 문경문화유적회 창립 및 초대 회장, 문경구곡원림보존회 창립 및 초대 회장, 경상감사 교귀행사 주요 역할, 문경새재과거길달빛사랑여행 1회부터 계속 해설 등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문화 가족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한 인연과 활동으로 문경문화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필자는 근래 문경문화원에서 발생한 사건을 신문으로 읽고 경악했다. 입에 담기도 거북한 기사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잘잘못과 진실 여부는 행정과 사법기관이 판단, 처리하겠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어쩌다 ‘문경문화의 산실’이고, ‘문경의 정신을 담는 그릇’, ‘문경의 혼을 펼치는 마당’이라는 구호를 표방하는 문화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또 이것을 내부적으로 해결치 못하고(행정, 사법, 도의적으로 책임질 사람이나 임원들이 사퇴하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 대책 강구 및 수습 등) 언론에 보도될 지경까지 이르러게 되었는가 믿어지지 않았다. 필자는 2021년 11월 26일 문경문화원을 탈퇴하였다. "위의 사람은 문경문화원이 제가 꿈꾸는 문화 활동을 하는 데 있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함을 통감하며 문경문화원 회원을 탈퇴코자 합니다” 이것은 그때 필자의 회원탈퇴서 내용이다. 필자가 문경문화원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발전되길 바라는데, 왜? 17년간의 긴 세월을 몸담아서 정이던 문화원을 스스로 탈퇴하였을까? 사실 오늘의 이 부끄러운 사태의 씨앗은 이미 2년 전 필자가 회원 탈퇴를 할 그때 뿌려져 있었다. 기울기 시작한 문경문화원을 바르게 세울 기회가 그때였다고, 이번 이 사태가 일어나자, 일부 문화원 가족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내게 말하기도 했지만, 그 기회를 잡지 못했고 엎어진 물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직전 원장이나 임원들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하진 못할 것이다. 누가 어떤 동기나 기회로 직전 원장 12년 임기 동안 ‘문경문화원 이사회 회의록’을 한번 열람해 보시면, 그 당시 필자가 문화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책이나 대안을 제시한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식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이 떠났다. 탈퇴하고 얼마 뒤 어느 인사께서 필자에게 문경문화원의 최근 20여 년의 속속들이 역사는 물론, 명과 암까지 잘 알고 있으며 공정한 판단으로 기록을 남길 사람은 필자밖에 없으니 ‘문경문화원 백서’를 한번 써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웃고 넘어갔었는데 이제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기회를 보아 기록을 남겨 보았으면 한다. 이번 사태는 문경문화원 56년 역사상 있을 수 없는 치욕이라, 필자도 가슴이 먹먹하였지만, 뜻 있는 문화 가족들의 분노는 물론, 오늘날까지 문경문화원의 발전과 위상, 자존감을 지켜오시다 먼저 가신 역대 임원 및 회원들께서 이 참상을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시면서 통탄할 것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가슴이 아프다. 문제 발생 시점의 문화원 임원 중에는 전직 간부급 직책으로 근무한 공무원 출신이 다수 있다는데 사리 판단이나 책임감이 그리도 없는가?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무얼 했는가? 그리고 무얼 잘했다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계시는가? 참 답답할 뿐이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욕을 얻어먹어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몇몇 핵심 임원께서는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사현정(破邪顯正), 참 엄숙하고 무서운 말이다.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렵다. ‘사악(邪惡)하고 그릇된 생각을 깨뜨리고 올바른 도리(道理)를 드러낸다(顯正), 행(行)한다.’라는 이 말을 아무리 눈앞 비루빡에 붙여 놓고 매일 본다 한들 어리석고 못난 사람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다. 우리 문경이 새해 새날에 모두 모여 ‘Yes 문경’을 외치고‘파사현정(破邪顯正)’를 보고 마음에 새겼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입술에 침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이 무슨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그것도 문화를 창달하고 ‘파사와 현정의 쌍두마차가 거침없이 달리는 사회로 서로 믿고 아끼고 사랑하는 밝은 사회로 이어가자고 큰 목소리로 외친 문화원에서 참으로 어이없고 부끄럽고 참담할 뿐이다. 고쳐 쓸 수 없는 물건은 버려야 한다. 문경문화원 원장실 입구 벽에 붙여 놓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족자가 무색하다. 바로 옆 사무실에 계시는 문경 유림단체는 왜 침묵하고 계시나요? 선비정신은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다시 파사(破邪)하고 현정(顯正)의 정신으로 새로운 문경문화원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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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 순례 (3)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문경읍 갈평리 마을 입구 삼거리는 이강년 의병장 전적지로, 1907년 10일~11일 양일간에 있었던 갈평전투 전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7년 갈평리 주민들과 이강년을 추모하는 인사들이 뜻을 모아 경모각(景慕閣)을 세웠고, 1979년 관에서 전승기념비를 세웠다. 1907년 9월 9일 저녁 주흘산 혜국사 승려들이 상초곡에 주둔하고 있는 이강년 의진(義陣)을 찾아와 나라를 위해 싸우는 의병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며 저녁밥을 지어 왔다. 이강년은 주지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모두 배불리 먹고 하룻밤을 이곳에서 지냈다. 9월 10일 새벽 일찍 하초곡을 거쳐 요성으로 부대를 옮겨 주둔하고 있을 때 갈평 쪽에서 포성이 울려왔다. 척후병의 급보에 의하면 어젯밤 갈평리로 들어간 조동교, 김현규 부대와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의병이 대패하였으며 흐르는 시냇물에서 피비린내가 날 정도로 인명 피해가 크며 갈평마을은 왜군이 불러 질러 화염이 치솟고 있다고 하였다. 급히 진군계획을 세우면서 현지 정세를 살펴보니 수백 명의 일본군이 있었으나 달아난 의병을 추격하거나 마을에 숨어 있는 의병을 수색하기 위해 흩어져 있고 갈평 냇가에는 본진 50여 명, 1개소대 병력만 남아 있는데 지금 점심 취사 준비와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후기 의병의 주된 전술은 치고 빠지는 유격전이 대세였다. 운강 이강년은 기습작전을 펴기로 하고 제장(諸將)을 불러 사방으로 분산, 적의 주둔지 가까이 까지 은밀히 접근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내가 총을 쏘면서 깃발을 흔드는 신호를 보내면 일제히 진격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무방비 상태에서 사방에서 기습당한 일본군은 당황하여 일부는 총을 들고 저항했지만, 대다수는 도망가기 바빴다. 이렇게 하여 조동교, 김현규 의병부대에 치명적 타격을 주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 약탈을 일삼던 일본군 본진 1개 소대를 궤멸시키고(적 8명을 생포 및 사살) 일본군이 소지했던 무기와 탄약을 노획한 갈평전투는 의병 전투사에 빛나는 큰 성과였다. 이어서 9월 14일 적성전투에서 신태원 후군장 등 아군이 전사하는 피해를 당한 후 예천 명봉사에 머물다가 일본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단양을 거쳐 영춘으로 향했다. 9월 25일 영춘전투에서 승리하고, 10월 12일 괴산 연풍전투에서 일본 수송대를 급습하였으며, 10월 22일 원주 유치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11월 2일부터 11월 15일까지 4차에 걸친 죽령전투에서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 및 격퇴하였다. 이어서 소백산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세 불리로 단양 영춘으로 퇴각한 뒤 신돌석부대와 합진하여 순흥을 공격하여 일본군 퇴각시켰다. 다시 11월 26부터 12월 25일까지 충북 단양 일대에서 유치전투, 백자동전투, 영춘궁동전투, 복상동전투, 월계동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를 하며 승리와 패배를 거듭하며 일제에 항거하는 전투를 계속하다가 12월 말 서울진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춘천 쪽으로 이동하였다. 서울진공작전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있었다. 이에 반발한 신식무기와 탄약을 가진 정예 군인 3천 명이 합류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1만여 의병들이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1908년 1월 일으킨 한성 탈환 작전이다. 총대장으로 경기도 여주 출신이며 문경으로 이주하여 은둔 생활을 해 오다 거의하여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에 오른 이인영(李麟榮)을 추대하여 진공 작전에 돌입했으나, 효(孝)란 절대 가치를 가진 유림으로서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문경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이인영을 이어 총대장 역할을 맡은 창의군 군사장(軍師長)인 선산 출신 왕산 허위(許蔿)는 동대문 밖 30리(현재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 일대)까지 진격하였다가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철군하였다. 비록 실패한 작전이었지만, 서울진공작전은 흩어져 있던 민족의 역량을 집결시켜 일제에 대항,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때 운강 이강년은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참여하였다. 운강 이강년은 해가 바뀐 1908년에도 변함없이 항전하였는데, 1월 6일 경기도 동북부 낭천전투를 비롯해서 3월 28일까지 가평 건천전투와 용소동전투, 대청동전투, 포천 청계전투에 임했으며, 4월 6일부터 5월 3일까지는 강원도 인제 백담사전투, 강릉 하사동전투와 사동전투, 홍천 북면전투, 양양 백사장전투를 계속하였다. 5월 16일에는 경북 북부 봉화 서벽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대승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다시 6월 4일 봉화 내성전투, 6월 10일 봉화 재산전투, 6월 21일 제천 오미리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렇게 많은 전투 중에 ‘봉화 서벽전투’에서 이강년이 대승한 것을 기리기 위해 봉화군민들이 뜻을 모아1984년 12월 봉화군 춘양면 서벽초등학교 입구에‘항일의거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아! 슬프도다! 하늘도 무심하지! 강원도·충청도·경북 일대에서 종횡무진 활동하셨던 운강 이강년 선생의 13년(1896년∼1908년)간의 의병 투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애석하게도 1908년 7월 2일(음력 6월 4일) 청풍군 금수산 ‘작성산(鵲城山)전투’에서 발목에 총상을 입고 피체되셨다. 이강년은 체포 직후 상처를 치료해 주려는 일본군의 손길을 뿌리치고 그들이 주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이때 한탄하기를 "탄환의 무정함이여 발목을 다쳐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이런 수모를 받지 않을 것을” 또 옥중에서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사 삶을 어찌 구하랴만 오랑캐 쳐부수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고 해서 넋마저 사라지랴”라는 시를 남겼다. 의병장 이강년은 왕손으로서, 선비로서, 의병장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죽겠다며 면회 온 아들에게 구차하게 "살려 달라 하지 말라! 만약 그렇게 한다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는 의연함을 보였다고 한다. 한평생 나라와 민족을 위해 투쟁하신 이강년 선생은 마침내 1908년 10월 13일(음력 1908. 9. 19)51세를 일기로 의기에 찬 일생을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시니 하늘도 산천도 슬피 울었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두 아들 이승재(李承宰)·이긍재(李兢宰)와 도선봉장 권용일에게 인계되어 서울 서초구 방배동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역에 출빈(出殯-임시 운구 안치)되었다가 나중에(12월 13일) 제천 두학동 장치미로 반장(返葬) 후 다시(1944년)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장암壯岩) 뒷산으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강년 선생의 순국 후에 애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2층 중앙홀에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호국 인물인 을지문덕, 김유신, 계백, 최영, 강감찬, 이순신, 김종서, 권율, 곽재우,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등 22분과 함께 흉상으로 모셔져 있다. 이번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순례’ 중에 ‘애국과 의병정신’이란 주제를 두고 대비되는 두 인물이 있어 교육적 차원에서 학생들에게 들려준 내용을 소개하면, 문경시 가은읍 ‘운강이강년기념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선유구곡 제9곡 옥석대(玉蕮臺)에 학천정(鶴泉亭)이 있고 그 옆 너럭바위 위에 鶴泉(학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글의 옆에는 글의 주인인 듯한 이름으로 李完用(이완용)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이강년과 이완용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강년과 이완용은 1858년생 동갑이다. 이강년은 22세에 무과(고종 17년-1880년)에 급제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한 고난의 삶을 살다 중년인 51세(1858∼1908)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시고 전기한 바와 같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전쟁기념관 호국인물 흉상’으로 우리 곁에 계시며 만인의 존경과 추앙을 받는 역사에 빛나는 인물이 되었다. 이완용은 2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일신의 영달을 위한 처신으로 부귀영화와 노년인 69세(1858∼1926)까지 천수를 누렸으나, 을사오적,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는 인물로 남게 되었는데 학생 여러분은 누가 참삶을 산 인간 승리자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고 하였다. 문경에는 ‘독립운동 유공자’가 84인이 계신다. 그래서 문경은 ‘의병과 독립운동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문경 출신 역사 인물 중에 조국과 국민을 위해 헌신하다 생을 마치신 분이 많이 계신 반면에,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한일합방에 찬성하는 등 친일 매국을 하고 조국의 젊은 청년들을 희생물로 하는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제물이 되도록 하여‘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문경인으로서 불명예스러운 자도 있다. 이번 3박 4일 일정을 마치면서 학생들에게 맺음말로, 우리가 이번에 걷는 순례길에는 이강년 의병대장 외에 이름이 알려진 의병은 물론이고, 이름 없이 사라진 의병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고, 그 혼이 살아 있는 길을 걸었다. 우리가 이 힘든 산악길을 걷는 의미는 고난의 세월을 살며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의병들을 기리며, 세계 유일 분단국가로서 북한의 핵 위협과 열강들의 이해관계 속에 언제든지 또 다른 위기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우리 다 같이 의병 정신으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자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참여자 모두 마음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지난 2018년 6월 1일 ‘의병의 날’을 맞아 문경에서 개최된 행정안전부 주최 ‘제8회 대한민국 의병의 날 행사’에서 필자가 자작시인 ‘호국의 등불, 의로운 별들이여’란 추모 헌시를 낭독하였는데, 그때를 회상하며 낭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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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 순례 (2)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이강년은 유인석의 호좌의진(湖左義陣)의 유격장으로 임명된 후 잠시 휴식을 취할 사이도 없이 전투에 임해야 할 긴급한 상황이었다. 수안보와 문경 전투는 그쪽 지리를 잘 아는 내가 적격자라며 이강년이 자원하여 수안보와 문경 전투에 투입되었다. 수안보에 있는 일본 병참기지와 무기고를 공격하여 보급선을 차단하고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여 의병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한 중대 임무를 띠고 6초(哨-600명, 1초는 100명)의 의군을 거느리고 출전하였다. 제천을 떠나 1896년 3월 19일 수안보에서 전투가 있었으나 일본군의 방비가 예상외로 튼튼해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다시 전열을 강화 9초의 병력을 이끌고 문경으로 이동했다. 3월 25일부터 4월 20일까지 문경 조령 지역에 주둔하면서, 먼저 상주 함창 태봉 병참기지를 치기 위해 평천에 주둔하고 있는 서상열 의진을 간접 지원하고, 중군장 윤기영과 함께 조령전투에 임해 일본군 군기고를 공격하여 무기와 탄약, 유황 등을 노획하는 성과를 올리면서 조령을 완전하게 장악하여 일본군 병력 및 군수품 이동을 차단하였다. 이때 조령에서 멀지 않은 완장리에 집이 있었으나 가지 않았으며, 부인 김 씨로부터 편지가 왔지만 읽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 승재가 "어머님 편지인데 한 번 보시지요” 했는데도 보지 않고 불태웠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창의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있는데 집안일에 신경을 쓰거나 사사로이 정에 치우치면 마음이 약해질 수 있다며 장부다운 모습을 보였다. 4월 20일 제천 본진에 복귀하였다. 그 후 5월 23일부터 3일간 제천전투를 시작으로 단양, 원주 등에서 전투를 수행하였으나 의병의 피해가 극심하였고 일본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호좌의진이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러자 의암 유인석 선생이 만주로 떠나면서 요동에 있는 동포들과 힘을 키워 재기하겠다며 운강도 군사를 해산하고 요동으로 오라는 편지를 남기고 떠났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8월 23일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때 운강 이강년의 수하에 남아 있는 의병의 숫자는 1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의병부대를 해산한 이강년은 아들 승재와 고향 완장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왜군과 관군이 그의 집을 감시하고 있어서 가지 못하고 있다가 1897년 4월 요동으로 들어가 유인석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을 만나 ‘이주민 자치단체’를 결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나 여건이 여의찮아 거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내 비록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 일본과 싸울 것이오” 하고 그해 7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단양으로 돌아온 이강년은 때를 기다리며 단양 금채동에 은신, 학문에 몰두하면서 다시 재기할 때 전투력을 높일 수 있는 전략을 구상하며 지냈다. 이때 의병 전술에 관해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한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를 만들어 정미의병 때 실전에 활용하여 위력을 발휘하였다.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이 있었다면, 한 말 의병전에는 '속오작대도'가 있었다.”라며 그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을미의병 이후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일제가 노골적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1905년(광무 9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였고,1907년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하고, 행정ㆍ사법 사무를 통감부의 감독 아래에 두는 정미칠조약 체결과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을 자행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구국 항일 무력전이 전개되는 1907∼1910년간에 걸쳐 투쟁하는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시작되었다. 이에 운강 이강년 의병장도 분노하여 1907년 3월 유인석과 제천과 원주, 횡성 등지에서 군사를 소모(召募)하여 재거의(再擧義)하고 5월에 의진을 재편성하여원주 배양산에 지휘소를 설치하였다. 7월부터 본격적인 전투에 임해 해산된 군인을 소집하고 원주로 진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다량 확보하여 8월 15일 제천전투에서 민긍호 의진과 연합작전으로 500여 명의 적을 토멸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8월 19일 영월 주천 강가에서 40여 의진이 결집, 이강년은 호서의병대장에 추대되고 난 뒤 8월 23일 충주성을 공격 후 단양과 예천 상리 명봉사를 지나 문경으로 진군하였다. 9월 초 문경 동로 노은3리에 주둔하여 군사를 추가 모집하여 의병부대를 재편성하고 산북 김용사로 이동 주둔할 때 각 처의 의병장 휘하 1,500명의 의병이 문경으로 집결하였다. 9월 7일 문경읍을 장악하고 신현리 고모산성에 주둔하여 방어진을 구축하면서 고모산성에는 후군장 신태원을, 이화령은 좌익장 김영식과 참모 이정래를, 하늘재는 좌익장 천보락에게 각각 방어토록 하였으며 9월 9일 조령전투, 9월 10일, 11일 이틀간에 걸쳐 갈평전투, 9월 14일에는 적성전투를 벌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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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문경새재아리랑과 사할린아리랑의 만남이만유/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위원장 지난 주말 11일 문경 시민들이 사할린동포들이 살고 있는 경기도 양주를 찾아갔다. '아리랑도시 문경’을 알리고‘문경새재아리랑’의 저변 확대 및 대중화를 위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 이만유)’가 주관, 개최한 올해 세 번째 ‘찾아가는 아리랑학교’가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에서 열렸다. 아도위 회원 34명이 이른 아침 문경에서 버스로 3시간 반을 달려 이렇게 먼 곳 양주를 찾아간 연유는, 2014년 사할린 귀국 동포 101명(현재 95명)이 양주시에 새 둥지를 틀어 살고 있는 곳을 찾아가 디아스포라(이산) 아픔을 아리랑으로 풀어내고, 문경새재아리랑의 확산을 위함이었다. 율정마을 ‘양주시 사할린동포회(회장 : 김정희)’와는 이미 몇 차례 우리와 만난 인연이 있었으며, 특히 2018년‘디아스포라 아리랑제’가 열렸을 때 아리랑고개 문경새재에서 아도위가 주관한 고유제를 함께 지냈던 적이 있어 더욱 반가운 만남이었다.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에서도 전국 55개 지역 아리랑 전승단체와 러일중 동포들과 함께 광화문 광장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행진을 했다. 이 당시 이 분들도 함께 무대에서, 광장에서 만났다. 당시 전국아리랑경창대회에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이름으로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 양주시 사할린동포회 강상용 직전 회장, '카레이스키아리랑'(카레이스키는 러시아어로 ‘고려인’을 의미)을 창작하신 김세르게이 작곡가, (주)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최나타샤(최미분)단장,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 의정부 전호열 아리랑 애호가께서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시고 축사 및 격려사를 해 주셨다. 먼저 이만유 위원장이, 오늘 ‘양주시 사할린동포회’를 찾아와 여러분과 함께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열게 되어 반갑고, 이 만남이 큰 의미가 있다고 하며, 우리 문경새재아리랑이 역사가 오래되어‘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라 하면서도 정선, 진도, 밀양아리랑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순수 민간인들이 뭉쳐 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 전승시키기 위해, 지난 2017년 아도위를 창립, 아리랑학교 등 사업을 펼치고 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근래 인지도가 높아지고 문경새재아리랑을 주목하고 부르는 사람이 많아졌으며, 편곡하고, 여러 장르에서 활용되고 있어 가슴 뿌듯하다. 모쪼록, 오늘 아리랑학교가 끝날 때까지 함께 노래 부르고 춤추며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란다는 요지의 인사말이 있었다. 그리고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은 "조선시대 서민들과 왕이 마주 보면서 함께 부른 노래가 아리랑이고, 아리랑은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노래"라고 말씀하셨다.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시민의 이름으로 아리랑문화운동을 하는 자발적 시민운동단체이다. 2017년부터 지금까지 문경아리랑을 널리 알려오고 있는 아리랑공동체이다. 코로나가 발생했을 때는 '코로나아리랑'을 창작 발표하여 아리랑으로 코로나를 물리치자는 노래를 널리 알렸다"고 격려해 주었다. 직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은 "사할린에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2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하였으며, 오늘 이렇게 사할린 동포들을 위문하는 자리를 마련해 준 아도위에 감사하다"고 했다. 그리고 전 사할린동포회 강상용 회장은 "지금까지 양주사할린동포회와 문경시민들과는 7번의 만남이 있었다고 하며 오늘 이렇게 먼 길을 찾아주신 아도위에 감사한다"고 하였으며,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나타샤 회장은 "올해 ‘문경아리랑경창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전했다. 그리고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이사장, 삼정제빵소 대표에게 각각 감사장을 수여했다. 아도위가 받은 감사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의 보편 가치 실현에 힘써 오신 귀 단체의 활동에 경의를 표합니다. 특히 저항 대동 상생정신으로 사할린과 사할린아리랑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주셨음에 대해 전 회원의 뜻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2023. 06. 11.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장 권경석" 이어서 신현국 문경시장(함광식 문화관광농업국장)과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마련한 선물 전달식이 있었다. 문경새재아리랑 전승자 송영철 옹에 대한 구술생애사 책 ‘문경새재아리랑 소리꾼 송영철과 만남’과 문경오미자 김, 문경오미자 와인, 아도위 문은자 부위원장이 직접 가마솥에 끓여서 만든 생강조청이 전달되었다. 이날 아도위 황동철 이사의 사회로 시작한 아리랑학교는 식전행사로 ‘한두리국악단(단장:함수호)’의 여는 마당, 사물과 태평소(함수호: 쇠, 유대상: 설장고, 김원섭: 북, 이성자: 징, 김경숙: 태평소)의 풍물 공연으로 이날의 행사를 축하했다. 이어서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활동했던 사할린 동포 2세 김세르게이 작곡가의 아코디언 연주에 맞추어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단장: 최미분) 20명의 ‘사할린아리랑 합창’으로 첫 막을 열었다. 이어서 한두리국악단 반주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합창단(단장:박순자)의 ‘아리랑연곡(본조아리랑, 홀로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문경새재아리랑)’ 축하 공연이 있었다. 아도위합창단은 이어서 한두리국악단의 반주에 맞추어 아도위 창작곡인 이만유 작사 함수호 작곡의 ‘코로나아리랑’과 권순애 작사 함수호 작곡 ‘풍년아리랑’공연이 있었으며, 이어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이 왕십리아리랑을 선보이고,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이 동두천아리랑을 불렀다. 이어서 ‘문경새재아리랑 이야기’란 주제로 이만유 위원장이의 특강으로 아리랑은 어떤 노래인가?, 아리랑의 기원과 유래, 어원은 무엇일까?, ‘문경새재아리랑’은 우리 아리랑사에서 어떤 위치, 어떤 역할을 했을까?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문경새재아리랑은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다. 문경새재는 실제적 '아리랑고개'라는 내용이다. 이어서 이춘자・전정남・안복수 위원의 지도로 ‘문경새재아리랑 배우기’ 시간을 가졌으며, 안복수・이성자・김금옥 위원의 ‘다듬이 공연 및 체험’, 곽말득・신준식・조홍자 위원의 ‘하모니카 공연’, 가야금 함수호・해금 이기옥・장고 김경숙 국악인의 ‘가야금 합주’, 김영애・정행복 위원의 ‘신나는 가요 공연’, 정송위・김옥화(후) 위원의 ‘뱃노래’, 전정남・김옥화(선)・박춘자 위원의 ‘우리 비나리’, 사물놀이에는 쇠 함수호・설장구 유대상・북 김원섭・징 이성자, 태평소 김경숙의 멋진 공연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참여자 모두 함께하는 ‘한바탕 어울림’으로 마무리하였다. 이날 공연 총괄 지휘는 함수호 단장, 행사의 모든 기록(사진, 동영상)은 오석윤 감사가 수행하였다. 이상으로 모든 행사를 마치고 아도위가 준비한 떡과 수박, 오미자 와인 등과 사할린 동포께서 직접 구운 러시아식 빵과 차를 들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포애를 나누었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돌아가는 버스에서 우리 아도위 회원들은 대한민국 아리랑사에 또 하나 새로운 역사를 썼다는 자부심을 공유하고, 가슴 뿌듯하게 ‘아리랑도시 문경’으로 돌아왔다. 우리 아도위는 문경새재아리랑이 대한민국 5천만 국민, 아니 전 세계인들이 즐겨 부르는 그날까지 문경새재아리랑의 전도사가 될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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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 순례 (1)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호국보훈의 달’ 6을 맞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먼저 가신 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그 뜻을 가슴에 새기고자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進軍路)문경 구간 도보 순례’를 하였다. 지난 6월 3일부터 6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문경YMCA’와 ‘아리솔지역아동센터’ 주관으로 학생 26명, 지도 교사, 향토연구사 등 38명이 참가했다. 의병 활동 지역이 산악지대라 위험 구간은 조령산악구조대 10명이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도와주셨고, 차가 다니는 도로 구간은 문경경찰서 관할 지구대 파출소의 경찰차로 에스코트하여 주셨다. 이렇게 장장 41.3km를 도보 순례를 하면서 운강 이강년 의병 대장의 흔적을 찾아 학생들과 함께 창의한 ‘도태장터’와 피 흘려 싸워 승리한 ‘갈평전투’ 등 곳곳의 전투 현장을 찾아갈 때 문화관광해설사, 향토연구사들과 함께 필자는 4일간 동행하며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해설하였다. 유사 이래 우리 민족은 나라가 위급하면 의병이 활동하여 구국운동을 펼쳤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국가 부흥 운동’에서부터 조선 시대 임진왜란과 대한제국 시대 때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이 이곳저곳 들불처럼 일어났었다. 임진왜란 때는 고을 수령이나 관리들이 도망갔지만, 오히려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위해 백성들이 창의(倡義)하여 저항하였다. 당시 왜군이 조선의 약한 군사력을 파악하고 조선을 쉽게 점령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오산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민초들의 의병 활동으로 곤경에 처했다. 또 일본은 대장이 죽으면 오합지졸이 되고 해산하게 되는데 우리 민족은 대장이 죽으면 또 다른 대장이 뒤를 이어 일사불란하게 대응하는 우리 민족만의 특성이 있다. 일본 백성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산 위에서 구경하다 전투에서 이기면 세금 내고 복종한다는데, 우리 민족은 신분을 떠나 너도나도 직접 목숨 걸고 싸운다. 때로는 의병이 관군보다 더 조직적이고 더 용감하게 싸웠다. 운강 이강년은 1859년 2월 19일 문경시 가은읍 상괴1리 도태마을에서 조선 세 번째 왕인 태종의 차남인 효령대군 19세 손으로 출생하였다. 이강년 어머니께서 태양이 입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고 출생 시 도태마을 앞 둔덕산이 3번 울었다고 하였다. 이는 비범한 인물이 출생한다는 하늘의 계시라고 보았다. 1880년 22세 때 무과에 급제하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게 참여하였으며 청일전쟁, 갑오개혁에 이어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단발령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의병장 유인석 등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주도한 ‘을미의병’으로 알려진 의병 전쟁이 시작되었다. 운강 이강년도 선비이고 왕가의 후손으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1896년 2월 23일 자신의 가산을 털어 군사들을 모집하였고 가은 도태 장터에서 거의(擧義)하였다. 처음에는 문중, 포수, 농민 등 60여 명으로 출발하였다. 이후 창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도나도 의병에게 참여하겠다면서 300여 명이 합세하고, 거의 한지 이틀째인 2월 25일 왜적의 앞잡이며 양민을 토색질하던 반역 행위자 안동관찰사 김석중과 순검 이호윤·김인담을 체포하여 구 농암장터 ‘개바위’에서 효수(梟首)하였다. 그랬더니 유생과 농민 등이 찾아와 의병이 되겠다고 하여 600여 명의 의진(義陣)을 갖추게 되었다. 이어서 2월 26일 상주 함창 태봉과 충북 수안보 병참기지를 연결하는 중요 노선인 고모산성에 부대를 주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함창 태봉의 일본 병참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2월 27일 충주의진과 합공작전을 계획했으나 무슨 사정인지 알 수 없으나 충주의진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모젤소총, 기관총, 수류탄 등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6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패퇴하게 되었다. 이 ‘고모산성 전투’에서 이강년 의진은 큰 상처를입게 되었다. 의병은 기습공격을 받았고 구식 화기인 화승총이나 화살로 대응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때 인근 마을과 주막거리가 불탔는데 지금 돌고개 성황당 앞에는 타다 남은 느티나무가 반쪽이 타서 속살을 드러낸 채 서 있어 그날의 아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운강 이강년은 ‘고모산성 전투’에서 뼈아픈 시련을 겪었으나 좌절하지 않고 더욱 분발하여 의진을 재정비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3월 12일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이 조직하여 충청북도 제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호좌의진(湖左義陣)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고 합진(合陣)한 뒤 유격장으로 임명되었다. 유인석은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실천에 옮긴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하나인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정통 유학자로서 선비들 중심으로 조직된 의진으로 전투력이 약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데, 무장 출신 이강년과의 합진은 유인석이 고무(鼓舞)되고 호좌의진을 더욱 튼튼한 전투력을 갖추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이강년 의병장을 반겼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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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과거시험 병폐와 커닝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문경새재는 ‘과거(過去)길’인가 ‘과거(科擧)길’인가? 문경새재 입구에 ‘문경새재 과거길’이란 표석이 세워져 있다. 답은 둘 다 맞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란 사설로 부르는 ‘아리랑고개’이기도 한 문경새재는 문경문화의 보고(寶庫)로서, 조선 제3대 왕인 태종 14년(1414년)에 개척된 옛길이라 600여 년의 긴 세월을 지나오면서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그래서 오래된 ‘과거(過去)길’이다. 문경(聞慶)이란 지명은 ‘들을 문(聞)’과‘경사 경(慶)’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괴나리봇짐을 메고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이곳의 좋은 기운을 받아 장원급제란 꿈을 이루기 위해 추풍령이나 죽령보다는 멀리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굳이 문경새재로 넘어가길 원했다. 그러니 문경새재는 당연히 ‘과거(科擧)길’이다. * 표석은 ‘과거(科擧)길’란 의미로 세워졌음. 문경새재 제2관문 조곡관과 제3관문 조령관 사이, 옛날에 박석(薄石)이 깔려있었던 조금 가파른 구간이 있는데 여기를 ‘장원급제길’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과거 합격을 기원하는 ‘책바위’가 있고, 낙동강 발원지 ‘초점(草岾)’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길을 ‘금의환향길’로도 부르고 있는데,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 갈 때는 ‘장원급제길’이 되고 급제한 후 왕이 내린 합격증(홍패)을 지니고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내려올 때는 ‘금의환향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 과거시험은 정기적으로 치르는 식년시(式年試) 문과(대과)의 경우 3년마다 한 번 시행하며 최종 33명을 뽑는다. 그 외 부정기적으로 임금이 즉위할 때 보는 증광시(增廣試),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별시(別試), 임금이 문묘를 참배할 때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알성시(謁聖試) 등이 있다 하나 개인의 입신양명과 가문의 영광이 되는 과거시험에 모두가 목을 매고 치열한 경쟁을 하는 상황에서 급제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러다 보니 사실 과거시험에 낙방하여 절망과 좌절, 실의에 빠져 낙향하면서 넘었던 수많은 선비의 애환이 쌓인 고개가 문경새재이다. 오죽하면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하였고, 시에 능하며 후진 교육에 힘썼다는 유우잠(1575~1635)이란 훌륭한 선비는 문경새재를 넘으면서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을까? 그 심정 이해하고도 남는다. 지난해 새재에서 비를 만나 묵었더니 올해는 새재에서 비를 만나 지나갔네 해마다 여름비, 해마다 과객 신세 필경엔 허망한 명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이렇게 과거시험 합격은 어렵다. 조선 시대 때는 음서(蔭敍) 제도가 있어 과거 급제를 하지 않고도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 있지만, 조선 시대 유일한 공식 등용문인 과거시험에 급제하기 위해 큰 노력은 물론,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는데 어떻게든 합격하겠다는 사람들의 욕망이 결국 부정행위까지 하게 된다. 과거시험 글제인 시제(試題)에 따라 그동안 공부한 지식으로 자기의 의견이나 생각을 기술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의 문장을 그대로 베껴내는 일종의 표절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며, 세도가의 자제는 천자문을 몰라도 합격했다고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병폐와 기발한 커닝 또한 빈번히 자행되었다. 한 예로, 과거시험 부정 중에서 아주 악질적인 것은 관리를 매수하여 과거 답안지인 시권(試券)에 수험생과 4조(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이름 등 인적 사항을 적는 앞부분과 제술(製述)한 본문이 있는데 절차상 이를 분할하고 채점이 끝나면 다시 원상태로 붙이는데 그때 자기의 인적 사항을 합격 답안지에 붙이게 하여 남의 합격을 도둑질하는 적과(賊科)라는 짓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제 과거 시험장 분위기와 다양한 커닝 방법을 살펴보면, 수험생들은 옆 사람 것을 훔쳐보지 못하게 각각 6자(약 1.8m) 거리를 두었으며, 시험장의 좋은 자리로는 시험관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담벼락 밑이나 구석진 곳 등을 차지하기 위하여 쟁탈전을 벌이기도 하였다는데 이는 미리 준비한 쪽지 등을 감독관 몰래 슬쩍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커닝 방법으로는 눈동자를 사방팔방으로 돌려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는 것은 약과이고, 수진본(袖珍本)이라는 좁쌀책을 가지고 가는 것과 도포 자락 안쪽에 빼곡히 사서오경예상 답안을 써온 사람, 대리시험, 구석 자리에 앉아서 외부로부터 쪽지를 건네받는 사람, 붓두껍에 깨알 글씨로 작성한 예상 답안을 숨긴 사람, 콧구멍에 종이쪽지를 숨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시험관을 뇌물로 매수하거나, 남의 글을 베끼거나 다른 사람의 글을 그대로 빌어 제출하는 차술(借述)이라는 행위도 있었다. 이렇게 커닝하다 적발되면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시험장 안에서 책이나 문서를 가진 자가 발견되면 향후 2식년(2차례, 6년) 동안 과거시험 응시 자격을 박탈한다. 남의 제술(製述)을 빌리는 차술(借述)이나 남을 위하여 제술해 주는 대술(代述)을 한 자는 곤장(杖) 100대에 도형(徒刑-징역) 3년의 중형을 주고, 영조 때 차술·대술의 형벌을 더 강화하여 조정의 관료나 생원·진사이면 변방에 충군(充軍)하고, 유학이면 수군으로 삼았다. 낙방거자(落榜擧子)/ 이만유 괴나리봇짐 메고 청운의 꿈을 안고 떠난 한양간 과객 돌아오는 길 삐딱이 쓴 해진 갓 축 처진 어깨 꼬질한 도포 자락 문경새재 노송은 알고 있다 긴 세월 수없이 많은 사연을 간절한 염원을 그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