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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점점 조절되고 길이 들어 달리 마음 쉬어지고, 물 건너고 구름 뚫어 걸음걸음 따라오나, 손에 고삐 잡아 조금도 늦추지 않고, 목동이 종일토록 피곤함을 잊어라." 명언 같은데 알쏭달쏭하고 오래된 시어 같은데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연초 배냇소와 더불어 소개했던 십우도(十牛圖)의 한 장면이다. 본성을 찾는 것을 소에 비유한 선화(禪畵)이기에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한다. 종교적 깊은 뜻을 두루 알 수는 없지만, 쇠고삐 틀어쥐고 소를 이끄는 것 정도는 이해하겠다. SNS에 걸어둔 내 표제어, '깔 비고 소 띠끼고'의 의미라고나 할까. 항간에 회자 되는 '소는 누가 키우나'라는 언설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른다. 산으로 들로 나가 소에게 풀을 뜯기고, 꼴(말이나 소에게 먹이는 풀) 베어 망태기에 담아오던 것이 소싯적 일상이었던 이들에게는 너무도 선명한 풍경, 이를 남도에서는 '소뜯긴다'고 했다. 시골에서 자란 이들은 기억할 것이다. 어린 시절 날마다 산으로 들로 나가 소에게 풀 뜯기는 일이 일상이지 않았는가. 이를 불교 선종(禪宗)에서 본성을 찾는 깨달음에 비유했으니 그윽한 은유, 나아가 지극한 철학이 아닐 수 없다. '소 부리는' 일이 그렇게 심도 있는 일일까? '부리다'는 기계나 기구 따위를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뜻이다. 소나 말(馬)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시켜 일하게 하는 데도 사용하는 말이다. 소를 키워보지 않은 이들은 궁금해할지 모른다. 그렇게 덩치 큰 소를 어린이가 어떻게 다룰 수 있나? 하지만 소는 간단한 명령어를 잘 알아듣고 행동한다. '이랴!'하고 고삐를 당기면 오른쪽으로 가라는 뜻이고 '자라!'하고 고삐를 찰싹거리면 왼쪽으로 가라는 뜻이다. '워워!'하고 고삐를 잡아당기면 정지하라는 뜻이다. 본래 소의 성품이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 어린이에게도 순종하는 이유는 고삐 때문이고 고삐에 연결된 코뚜레 때문이다.쇠코뚜레(牛鼻环) 매어 길들이는 법언제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쇠코뚜레의 역사는 매우 깊다. 쇠코뚜레라는 뜻의 한자 권(桊)이 있으니 적어도 한자 발명 이전일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소를 가축으로 다루기 시작한 기점인지도 모른다. 사전에서는 '소를 순조롭게 잘 다루기 위해 소의 코를 뚫어 끼우는 둥근 나무테'라고 코뚜레를 정의한다. 본래 소는 힘이 세고 고집이 세어 말을 잘 듣지 않는데, 이를 제압하기 위해 코뚜레를 꿰어 잡아당기면 아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역에 따라 '코꾼지', '코빼이', '군들레' 등으로 부른다. 노간주나무, 박달나무, 물푸레나무, 다래나무, 소태나무, 이게 모두 쇠코뚜레 재료들이다. 이 나무들은 껍질을 벗길 때 물기가 적당하여 잘 벗겨진다. 껍질을 벗겨낸 표면이 매끈하여야 소의 콧구멍을 뚫을 때 고통이 적다. 또 나무가 잘 휘어져야 한다. 박달나무는 견고하기에 아예 삶아서 사용하기도 한다. 코뚜레를 언제 하는가? 출생 후 5~6개월 정도다. 계절로는 여름철이 좋고 적어도 1년 안에 해야 한다. 1년이 넘어가면 소가 새끼를 밸 정도로 성장하기 때문에 제압하기 힘들다. 대개 오월 단오에 쇠코뚜레 뚫기를 한다. 상처는 일주일쯤 지나 아물게 된다. 코뚜레를 뚫은 소는 길들이기를 해야 한다. 멍에를 지우고 무거운 돌을 달아 끌게 한다. 장차 소달구지나 쟁기를 끌게 하기 위해서다. 이때 간단한 명령어를 습득하면서 점차 사람에게 순응하게 된다. 이 소 길들이기가 단순하지 않다. 선종의 심우도에 깃든 과정들이 난해하긴 하지만 소 길들이기 과정, 잃어버린 소를 찾는 과정들이 지극한 은유로 설정되어 있지 않은가.씨압소의 코뚜레와 깨달음연초, 소의 해를 맞는 의지를 씨압소 전통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코뚜레와 관련된 행간만 요약해둔다. 씨압소는 씨앗이소 즉, 씨를 잉태하는 소라는 뜻이다. 그래서 배냇소라고 했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입히는 옷을 배내옷이라고 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열네 살이 되면 씨압소를 부릴 수 있게 된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입학생부터다. 무상으로 분배받은 송아지가 생후 6개월이 되면 '목매기' 즉 목에 고삐걸이를 한다. 이후 뿔이 나오고 생후 1년이 지나기 전에 코뚜레를 뚫어 채운다. 생후 13달 정도 되면 새끼를 밴다. 임신 기간이 280일로 사람과 거의 같다. 생후 2년이면 새끼를 분만하게 된다. 통상 이 새끼를 씨압소 받은 소년이 갖고 어미소를 씨압소 준 이에게 갚는 것이 씨압소 전통이다. 소년은 16세가 되어 자기의 소를 갖게 된다. 혼인할 수 있는 자격도 얻게 된다. 성년으로의 도약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소를 생구(生口)라고 했다. 왜 그리 불렀을까. 사전에서는 '집에서 기르는 짐승, 소, 말, 돼지, 닭, 개 따위를 통틀어 이른다'고 풀이한다. 하지만 지금의 반려동물에 비추어보면 가족을 식구(食口)라고 부르는 것에 견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소와 개, 고양이 따위는 가축보다 반려동물로서의 의미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지난번 개의 목줄 혹은 개목걸이를 소개하면서 그것이 제압이나 복종만을 위한 매개인지 재삼 질문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의 코뚜레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벽사진경의 한 상징으로 활용되었던 사례를 보면 더 명료해진다. 그러지 않고서야 불교의 지극한 깨달음의 과정에 잃어버린 소를 찾고 길들이며 종국에는 흰소 타고 피리 불며 들어오는 동자를 상정했겠는가. 물론 코뚜레를 깨달음의 과정에 중요한 제재로 등장시키는 온전한 이유를 다 알기는 어렵다. 단순히 짐작할 뿐이다. 잃어버린 소를 찾아 길들이고 종국에는 미련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과정을 그린 그림이 심우도라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곽암의 심우도와는 다르게 보명의 심우도에서는 수제(受制)로써 규칙을 따르는 것을 세 번째 단계로 설정한다. 보명의 다섯 번째 단계인 목우(牧牛)가 바로 그것이다. 소싯적 일상으로 돌아가 소 풀 뜯기던 일과 견주어 본다. '깔비고 소띠끼고' 이것을 한자로 바꾸면 목우(牧牛)다. 농담조로 말하자면 누가 시키거나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어린 시절부터 깨달음의 도(道)를 닦기라도 했던 것일까? 비유를 달리해보면 이 생각이 좀 더 명료해진다. 키우라는 소는 키우지 않고 헛짓만 해대는 이들이 누구인지 말이다. 묵묵히 자신의 영역에서 꼴 베어 소 키우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의 과정을 걷는 이들 아닐까.쇠코뚜레와 반려동물 목줄의 행간구례 운조루 대문 한 가운데에 소의 코뚜레가 걸려 있다. 남도뿐 아니라 전국에 산재한 풍속이다. 입춘첩을 붙이고 소코뚜레를 걸어놓거나, 정초에 엄나무, 복조리와 함께 코뚜레를 벽에 거는 풍속이 모두 그렇다. 성질이 고약한 소를 길들이는 것이기에 사악한 귀신도 길들일 수 있다는 믿음의 발로일지 모른다. 나쁜 것을 물리친다는 생각은 벽사진경 즉, 나쁜 것은 몰아내고 좋은 것을 불러들인다는 관념으로 이어진다. 쇠코뚜레와 고삐를 포함해 목줄의 사전적 의미는 개나 고양이 등의 동물 목에 둘러매는 줄을 말한다. 하지만 영혼의 끝을 지키는 체로키족의 개로부터 이집트 신전을 지키는 개, 민화로 그려져 대문을 지키는 문배도의 개까지 그 의미는 더욱 확장되었다. 쇠코뚜레가 갖는 벽사진경의 의미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각자의 전공으로 묵묵하게 소 키우는 일이야말로 벽사진경의 진정한 부적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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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싸구려 어허허 굵은 엿이란다 정말 싸다 파는 엿/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석달 열흘 백일삼제/ 화초가리 더덕가리 동삼가리가 다 들어간 엿/ 열아홉살 먹은 크내기가 동삼물로 제조를 했다 지름이 찍찍 흐른다~" 2009년 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졸업식 발표회 장면 중 하나, 객석의 뒷자리에서 갑자기 엿판을 든 엿장수가 등장하더니 관객들을 훑으며 무대로 올라온다. 엿가위로 리듬을 맞추며 해학적인 엿타령을 구수하게 뽑아낸다. 저자에 흘러 다니는 말은 '엿장시 맘대로'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격조 있고 운율 있는 노래이니 '엿장수 가락'이라고나 할까. 무대에 오르자 걸쭉한 입담이 판소리의 아니리처럼 이어진다. "에, 이 엿장시로 말할 것 같으면 저 멀리 진도에서 올라온 엿장시인디, 오늘 엿을 쪼깐 많이 폴아서 진도 갈 여비를 해야 쓰거쏘!" 객석에서 웃음이 터진다. 자그마한 키에 귄 있는 몸짓, 엿타령을 한 주인공은 졸업생 조유아다. 엿타령 하며 객석을 돌았는데 엿판에 수북이 돈이 쌓였다. 자그마치 진도를 십수 번 다니고도 남을 금액이었다나. 그뿐 아니다. 당시까지는 이름이 조은심이었던 송가인이 씻김굿으로 졸업 공연을 준비했으니 관객들의 폭발적인 호응이 어쨌을 것인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후 조유아는 전공 판소리보다 엿타령 가수로 더 많이 알려져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고 송가인은 트롯트 가수로 전향하여 이미 국민가수가 되었다. 박색구, 조오환, 조유아로 이어진 삼대 엿타령 국립창극단 정단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조유아가 엿타령을 잘하는 데는 그만한 내력이 있다. 아버지 조오환이 엿타령의 명인이기 때문이다. 무형문화재 닻배노래(전남도지정 제40호) 보유자이기도 한 조오환은 엿타령 뿐만 아니라 만년필타령, 뱀장수타령, 비손소리 등 못하는 소리가 없다. 일찍이 고향 민속문화의 보전 전승에 눈을 떠, 진도북놀이며 사물놀이, 상여소리 등에 주도적으로 관여해왔다. 조오환의 엿타령은 어머니 박색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MBC민요대전(한국민요대전)에 고 박색구의 엿타령과 민요가 여러 곡 실려있다. 명실상부한 삼대의 엿타령이다. 뿌리를 추적하면 아득한 조상으로 연원을 좇아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들 엿타령이 현장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찍 남편을 여읜 박색구는 좁쌀 등으로 엿을 만들어 오일장인 진도군 의신면 돈지장이나 읍장에 내다 팔았다. 친척이나 이웃들의 비웃는 소리를 감수하며 목포, 무안 등 서남해 일대를 유랑하며 엿을 팔기도 했다. 그 현장에서 엿을 팔면서 불렀던 노래가 지금의 조유아 엿타령이다. 조오환은 이 현장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진도민속예술단'이라는 연희단체를 만들어 활동한다. 진도읍에서 실제 엿을 만들어 팔면서 엿타령 공연도 하고 전수도 한다. 무쇠솥에 장작을 지피는 등 엿 만드는 과정도 전통방식 그대로를 고집하고 있다. 농업이나 어업의 맥락이 사라져 노래만 남은 문화재들에 비하면 컨텍스트까지 보존하고 전승하는 명실상부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장시(場市)와 엿타령 엿타령은 엿판을 지고 엿을 팔면서 부르던 노래다. 엿장수타령, 엿파는 소리 등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통칭하여 엿타령이라 한다. 어떤 시점 이후에 유흥을 위한 노래나 현장 맥락이 소거된 민요로 정착했다. 근대 이후 무대화되어 유희 민요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북한 민요집이나 전국 각지의 민요자료에도 엿타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잘 알려진 정보 중 하나는 김홍도의 씨름 그림이다. 엿판을 지고 엿을 파는 엿장수가 그림의 포인트다. 당대 풍속을 소상하게 알려준다. 엿판 지고 엿을 팔기에 통상 시장을 배경 삼는 상업풍속으로 해석한다. 상업민요니 상업노동요니 하는 이름이 그래서 나왔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15년(1520) 3월 21일자 기사를 참고한다. "신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철저하게 금지했는데도 지금은 전일보다 심하여 시장에 나오는 자가 몇만 명에 이르니 (중략) 장시(場市)는 근년부터 생기기 시작하여 시장이 열리는 날에는 남녀간에 주육(酒肉, 술과 고기)을 마련하여 시장에서 팔아 그 이(利益)를 취하고 있으니..." 이 행간에 엿장수가 있다. 엿의 문화사를 추적해보면 명절떡과 조청엿에 닿고 장시의 엿장수에 닿는다. 16세기 이후 서울 중심으로 급속하게 확산된 장시(오일장)가 엿장수의 배경이라는 점 명백해 보인다. 엿파는 행위만 있는게 아니다. 예컨대 농사를 지어 좁쌀을 생산하고 무쇠솥과 장작 등 전통적인 방식으로 엿을 만들며 또 오일장에 내다 팔면서 엿타령을 연행하는 것은 명백한 종합장르다. 개별단위가 아닌 종합장르를 무형문화재 지정 등의 방식을 빌어 보존 전승할 필요가 있다. 장시의 맥락을 전제하면 장타령, 각설이타령까지 포괄한다. 생산, 유희, 소비까지 포섭한다. 더구나 김치, 식혜, 주류 등 우리 발효문화의 중요한 키워드라는 점에서 엿타령이 재조명되어야 한다. 조유아(들)의 활동을 응원한다. 어뜬 엿장시/이윤선 우리집 모방에 총각 엿장시가 한 분 살았습니다. 쌀엿 좁쌀엿 호박엿 감자엿 통째로 엿 한 통을 솥에 곱고는 손뿌닥 철석철썩 때래감시로 가락엿을 맹글았습니다. 양짝에서 질게 엿을 느래 잡고 고운 가루 무채 찰싹찰싹 때래 니리믄 크내기 허벅지만하던 것이 쫑쫑한 가락들이 됩니다. 귀갱삼아 문을 빼꼼이 열믄 어서 들온나. 어서 문 다채라. 바람 따라올라 조막만한 나를 다그채며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가락엿 맹글 때 바람 들어오면 안 된담시로요. 어짜다 한골목에서 총각 엿장시 만나믄 가락엿을 냉큼 집어 고사리 내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쥔집 귀한 아들래미라 그러했을 것입니다. 버짐한놈 코흘린놈 종기난놈 내 동무들 앨곤하니 쳐다보믄 어찌 나 혼자 먹을 수 있겄습니까. 대가리 큰놈부터 척척 나놔주고 엿치기를 합니다. 딱 부러띠래갖고 끊어진 자리 훅! 불고서는 모도 벌어터진 손꾸락 사이 삐죽삐죽 엿가락들을 대봅니다. 어뜬 날은 똘똘말이 몰아주어 한 입 못 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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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개의 친밀감에 대하여개가 얼마나 친밀한 존재이고 심성적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몇 차례 장그르니에를 인용해 소개한 적이 있다(장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 민음사, 1997).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개의 부류는 '친밀감'을 속성으로 한다. 인간의 친구인 개, 인간이 얻은 가장 고상한 피정복물 아니 지금은 동맹관계로 바뀌어버린 말(馬), 흔히 무고한 희생물의 대명사로 사용되기까지 하는 비둘기, 이 동물들만큼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없다. 토끼를 비롯한 다른 몇 동물들도 이 부류에 포함 시킬 수 있을까. 인간은 친밀감을 열망한다. 이는 친구로서의 남자, 어머니로서의 여자, 그리고 아이들에게서 두드러진다. 하지만 친밀감이라는 것이 대립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친밀한 이들 사이에서도 반목은 일어날 수 있다. 이 부류의 동물들이 지닌 특성은, 인간이 함부로 인간만의 속성으로 분류해놓은 '인간미'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온정'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개(犬)적인 온정'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럴까? 그르니에가 말하는 '개적인 온정'이라는 것이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개 같은~'이라는 비하적 언설과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개(犬)적인 온정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실 인간적인 본연의 온정을 찾는 길이라는 둥 피상적인 심리 정도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렇게 질문해보면 문제 제기가 좀 더 명료하다. 이 온정을 붙들어두기 위해 고안한 것이 개목걸이일까? 고양이의 거리감으로부터개에 비해 고양이의 부류는 '거리감'을 속성으로 한다. 장그르니를 다시 인용한다. "이 고양이의 부류에는 원숭이와 앵무새도 포함된다. (때때로) 우리의 찬탄을 이끌어 내기도 하지만 이 동물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게다가 뷔퐁의 생각처럼, 이 부류의 대표격인 고양이가 우리에게 애정의 몸짓을 보이기는커녕 우리를 이용해 제 몸을 쓰다듬는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도저히 이 녀석들이 아무리 완벽하게 사람의 흉내를 내도 (그 거리감은) 좁혀질 수 없다. 앵무새는 목소리를, 원숭이는 몸짓을 흉내 내지만 바로 그 순간에도 녀석들은 우리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식물이 우리와 가깝다. 결국 생활 방식은 친밀감과 거리감이라는 양극으로 특징 지어진다. 결합을 도모하는 것과 결별을 꾀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이는 '심성'과 '지성'이라는 양극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심성'과 '지성'의 경계를 확연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단지 애착으로 결합하는 것들과 냉담하게 이탈하는 것들을 대립시킬 뿐이다. 로마의 들판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처럼, 지평선 위로 수직선을 그리며 홀로 자라는 나무들이 있는가 하면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처럼 모여 조화를 이루는 나무들도 있다. 뾰로통하고 새침한 고양이, 그 이지적 지성에 비해 아무 조건 없이 그저 영혼 모두를 우리에게 의탁하는 개의 무구한 심성이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인류가 태고이래 고안하고 재구성하며 천착해왔던 신(神)에 이르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엠비로스 비어스는 우리 누구보다 먼저 이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괄호는 가독(可讀)의 편의를 위해 내가 추가한 것이다. 지면상 인용한 컨텍스트를 일일이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대체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개는 심성적이고 고양이는 지성적이라고. 재차 질문해둔다. 반려견 혹은 반려동물에게 채우는 목걸이는 이 거리감 혹은 친밀함과 관련된 것인가? 혹은 사람들의 (주로 여성들이 거는) 목걸이조차도 이 친밀함이나 거리감과 관련된 장식들인가? 반려동물 목걸이의 문화사이주은이 지은 "개와 고양이에 관한 작은 세계사"(파피에, 2019)를 통해 고대풍속의 편린들을 확인해볼 수 있다. "기원전 1401년부터 기원전 1391년의 이집트, 왕실 부채 관리인 마이헐프리라는 사람이 24세쯤 사망하였다. 그의 무덤에서 유리잔, 도자기, 화살통 2개, 화살 75개, 고기, 빵과 더불어 개목걸이 2개가 출토되었다. 선인장 꽃과 말들이 그려진 개목걸이에는 황동 단추가 장식되어 있었다. 다른 목걸이에는 아이벡스(커다란 뿔이 있는 야생 염소의 근연종)와 가젤을 사냥하는 개들이 그려져 있고, 개의 이름 '탄타누트'가 새겨져 있었다." 탄타누트는 이집트에서 일반적으로 여성 이름이었다. 평자들이 이 개목걸이의 주인을 암컷 사냥개로 추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왜 개의 목걸이에 황동단추가 장식되었으며 여성의 이름을 새겨 넣게 되었을까? 애완견 혹은 반려견의 역사적 맥락들을 살펴보면 여성 비하와 동물 비하의 행간들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기에 제기하는 질문이다. 애완견이 너무도 사랑스러웠기에 지어준 명예로운 이름이었을까 하는 점 말이다. 이주은은 이렇게 설명한다. "목줄이나 목걸이가 제재용만이 아니라 오히려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는 사례를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서기 79년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로 사라진 폼페이에서는 세베리누스라는 소년의 개였던 델타가 특별한 목걸이를 차고 다녔다. 용암과 화산재가 쏟아지던 마지막 순간까지 꼬마 주인을 보호하다 세상을 떠났는데, 그 목걸이에는 바다에 빠질 뻔한 주인을 구해준 일, 강도를 물리쳐 주인을 구한 일, 다이애나 여신의 땅에서 늑대에게 공격당한 주인을 살린 일이 새겨져 있었다. " 켄돌란 델 베치오는 '반려동물을 잃은 반려인을 위한 안내서'에서 또 이렇게 소개한다. "왕족들도 그러했지만 프랑스의 샤를 5세의 개는 진주와 루비가 장식된 벨벳 목걸이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개에게 진주목걸이와 금목걸이라니! 표현의 결이 달라서 그렇지 반려대상으로 삼은 이들에게 '개목줄'이라는 평상의 비하적 언설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이쯤 해서 눈치 빠른 독자들은 짐작할 것이다. 왜 반려동물 목줄을 목걸이에 비유하는지를. 이 이야기는 올 초, 소의 해 씨압소 전통을 말하면서 언급했던 쇠코뚜레와 수많은 고분에서 산견되는 목걸이로 상고해 오른다. 오늘은 지면이 다하였으니 차차 소개해나가기로 한다.반려동물 목줄에 대한 명상목줄이나 목걸이도 소의 코뚜레처럼 상징적이거나 민속신앙적인 것일까? 이를 역사적으로 추적해보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어떤 관념들 아니면 해명되지 않는 무의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밝혀질지도 모른다. 마치 쇠코뚜레를 벽에 걸어두고 벽사진경(辟邪進慶), 즉 악한 것을 막아내고 좋은 것을 불러들이는 금기나 풍속으로 삼았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 어쩌면 개를 길러 문지기 삼고 개그림을 그려 대문에 걸었던 것처럼 반려동물을 기르는 것 자체가 무의식적 어떤 관념이나 신앙의 발로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개가 집안의 지킴이 특히 여성 등 위약자의 지킴이를 넘어 죽은자의 영혼을 지키는 신앙물로 나타나겠는가 말이다. 켄돌란 델 베치오는 이렇게 말한다. "낸시와 저는 많은 성인 남녀들로부터 떠나보낸 반려동물의 봉제 인형이나 목줄, 목걸이가 있어야 잠을 잘 잘 수 있다는 고백을 들었어요." 그래서다. 나는 이 목걸이를 보다 더 근원적인 무의식까지 추적하고 있는 중이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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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2)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한 깊은 시인의 숨결에 묻어나는 삶의 성찰과 인문학적 상상력", "남도 문화의 숨결과 고전 계승을 담은 토속적 시편들", 이번에 펴낸 졸저 에 붙인 출판사와 서점들의 카피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송기원 선생은 이런 표사(表辭)를 써주셨다. "이윤선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고여 자칫 글자를 놓치고는 하였다. 일자무식으로 평생을 살아낸 늙은 아버지와 일찍이 홀어미가 되어 세 남매를 거느리고 선창의 주모 노릇을 하다가 씨받이까지 된 어머니, 그 씨를 받아 금이야 옥이야 소중하게 길러낸 큰어머니, 배다른 누이들이며 뼈 다른 형들까지, 시에 나오는 이들 모두가, 나에게는 하늘에서 쫓겨온 적선(謫仙)들이며 그이들이 만든 신화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작은 눈의 눈물샘을 건든 것은 다름 아닌 시인이며, 시인이 살을 에어 빚은 시였다. 요즘처럼 시가 추악한 기형이 되어버린 흉한 시단에, 아직도 이런 아름답고 고귀한 시인이며 시가 한 송이 꽃으로 야생화 들판에 숨어 피다니...." 땔나무꾼에게는 과도한 헌사라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목포대학교 김선태 시인 또한 장문의 시평을 붙여주셨다. 그저 고개 숙여 감사드릴 뿐이다. 민망하게도 이 귀한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하는 것은 내 자랑을 하기 위함이 전혀 아니다. 오로지 남도인문학이라는 컨텍스트를 드러내고자 함이다. "고전과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에 깐 우주적 상상력과 초연한 삶의 태도"라는 김선태 시인의 시평으로 이를 변명할 수 있으려나. 다른 것은 내버려 두더라도 왜 남도라는 공간에서 남도의 말과 남도의 몸짓으로 시를 쓰고 노래하고 이야기하는지, 남도인문학이라는 표제를 걸어 글을 쓰는지, 에둘러 그 내력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여러분들의 해량을 구하며 김선태 시인의 시평 일부를 옮겨둔다.흰그늘과 곰삭음팁에 부기한 시, "'콩대를 태우며'는 남도문화의 본질인 곰삭음의 미학을 육화시킨 명편이다. 1연과 2연에서는 타들어 가는 콩대에서 나는 소리를 판소리의 '계면조(界面調) 선율'로 연결시킨다. 판소리가 몸에 배인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감각적 발견이다(이윤선은 고수이자 소리꾼이다. 참고로 필자는 발견이 있는 시를 높게 친다). '따닥따닥' 소리가 마치 고수의 북장단 같다. 2연의 '어머니 정재서 딸그락거리시던 소리'도 마찬가지다. 다만 선율이 '그윽'할 수 있는 것은 '눈 내리지 않던 지난 겨울'과 '뒤늦은 여름장마' 때문임을 적시하고 있다. 이는 수많은 신산고초를 겪은 후에야 비로소 '그늘'(한)이 있는 소리를 얻을 수 있다는 판소리 득음의 과정을 의미한다. 3연도 '봄가뭄 여름장마'를 겪은 '콩알'이 모여 '간장 되고 된장 되고 고추장'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라도 사투리 중에 표준어로도 등재된 '게미'라는 독특한 말이 있다. 이 말은 판소리로 치면 앞에서 말한 '그늘'과 맞먹는다. 이는 오랜 발효(숙성)의 과정을 거쳐야만 '게미'(깊은 맛)가 있는 남도음식이 만들어짐을 의미한다. '반성'(발효) 없는 소리는 그냥 '떡목'에 불과할 것이다. 4연은 콩대가 마지막까지 '한 몸 불살라' 나온 '콩재'와 '니람'(천연 쪽 염료)을 섞어 '쪽물'을 들여야만 숭고한 '남빛'이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을 '쪽빛보다 그윽한 남빛 가을(하늘)이 내려왔다'라고 표현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이렇듯 이윤선은 소리나 음식이나 색깔이 모두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련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곧 남도문화의 본질인 곰삭음의 미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내 삶의 마지막 여행지그윽이 내 몸에 이르신 이는 시에서처럼 아버지이기도 하고, 내가 찾아 헤매던 사랑, 열정, 그리움 따위의 그 무엇이기도 하고, 남도인문학의 본질, 어쩌면 우주에 충만한 신령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김선태 시인의 시평으로 소개를 대신한다."'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모국어라는 우리의 문화유산 속에는 반만년 이어져온 인간과 자연의 모습, 전통, 역사, 문화, 예술의 혼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 했다. 여기에서 '모국어'는 방언(전북 사투리)을 가리킨다. 방언은 그 지역 공간에 사는 가족과 친구와 동네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지역 토착어인 방언을 통하여 서로 연대감과 동질감을 느끼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살아간다. 특정 지역의 정서를 드러내기 위한 문학작품의 창작에 있어서 방언의 활용은 어쩌면 필수적이다. 방언이 아닌 표준어로 그 지역의 독특한 정서나 문학적 리얼리티를 제대로 살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윤선의 이번 시집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은 전라남도 방언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남도 정서와 문화적 숨결을 잘 드러낸 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전라도 사투리의 경연장이라고 할 만하다. 이윤선의 이번 시집에는 "고전과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에 깐 우주적 상상력과 초연한 삶의 태도"가 엿보이는 시 63편이 실려 있다. 시인이라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사의 기억에서 출발해 지금껏 살아온 삶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남도의 정서적 숨결과 앞으로 남은 생에 대한 성찰을 고스란히 담았다. 가족사 다음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고전의 차용 혹은 인유이다. 고전 민속을 전공한 그답게 고전 시가의 율격과 말투를 충실하게 따르며 탄탄한 기본기를 드러낸다. 이윤선이 시로 풀어내고 있는 남도의 설화는 주로 '섬'에 집중돼 있다. 〈내 삶의 마지막 여행지〉는 고향 진도의 부속 섬들의 탄생 설화를 자세히 들려주면서 자신도 마지막엔 그 근원으로 돌아가 섬이 되고 싶은 소망을 드러낸다."따닥따닥 타들어간다고저장단 그윽하니 계면조(界面調)의 선율이다눈 내리지 않던 지난 겨울 때문일 것이다아버지 헛기침하시던 불규칙 리듬때때로 밑둥거리 타다가 튀어 오르는 리듬대삼소삼 장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필시 뒤늦은 여름장마 때문일 것이다어머니 정재서 딸그락거리시던 소리봄가뭄 여름장마 한 몸에 겪고도반성 한 되 콩알 만들어낸 것이 가상하다콩알 모여 간장 되고 된장 되고 고추장 된다껍질은 모여 외양간 쇠죽솥으로 간다마지막 남은 콩대 모아 태운다니람에 콩재 섞고 무명배 풀어 쪽물 들였더니쪽빛보다 그윽한 남빛 가을이 내려왔다한 몸 불살라 만드신 그윽함 때문일 것이다-「콩대를 태우며」 전문.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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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1)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말라카 황징항(皇京港)에서 마조해협까지 오래전 중국 복건성 천주시에 갔을 때 깜짝 놀랐던 것이 있다. 신라여관, 신라 주유소, 신라 다리 등 신라라는 수식을 건 간판이나 이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적화원이라는 절을 복원하여 관광지가 된 산둥반도 석도진을 포함해 신라관, 신라방, 신라소, 신라원의 거점이 천주시를 위시한 복건성 지역이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3년여 오가며 현장조사를 했던 절강성 주산군도의 보타도 앞에는 심지어 '신라초'라는 이름의 암초가 있다. 얼마나 많은 신라의 배들이 이곳에 부딪혔으면 신라초(新羅礁)라는 이름을 붙였겠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신라 사공(선장)들이 배를 몰고 이곳을 지나다녔으면 이같은 이름을 붙였겠는가. 물론 신라초에는 신라로 싣고 오려던 관음불과 관련된 몇 가지 설화들이 있다. 보타도의 조음동(潮音洞)은 낙산사 홍련암과 설화 맥락이 거의 동일하다. 아쉽게도 일본에서 먼저 이곳에 사찰을 세우기는 했지만, 관음보살을 넘어서는 고대로부터의 아시아적 네트워크 흔적임에는 틀림없다. 이곳 복건성과 절강성을 횡단하는 마조(媽祖)해협으로부터 말레이시아 말라카해협은 단순한 물길이 아니다. 시진핑이 정화(鄭)의 원정 내력을 들어 일로(一路)의 비전을 세운 것도 이 해양실크로드가 가진 중요성 때문이다. 심지어 주산군도에서 시작한 어민화(어민들이 그리는 민화)도 실크로드의 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이 투자해 짓고 있는 말레이시아 말라카 황징항(皇京港)도 맥락이 같다. 나는 오래전 말라카해협의 정화박물관에 들러 이곳을 오고 갔을 고대의 한반도인들을 떠올리곤 했다. 신라초니 신라방이니 하는 거점의 신라인들이 필경 정화 못지않은 선박운영을 하였을 것이고 종교적인 맥락으로만 말하더라도 불교의 관음 네트워크를 넘어 이슬람교와 힌두교 혹은 더 이전의 브라만교나 시바교에까지 닿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 가야 방면의 여러 사찰에서 산견되는 요니와 링가 등의 힌두교 흔적들은 가야국 수로왕과 허황옥 전설을 넘어서는 상상들을 가능하게 해준다. 변산반도 죽막동 출토 유적들이 오키노시마와 양자강 하류의 유적과 동일하다는 점을 비롯해 해남 등 서남해에 출토되는 중국발 유물들을 통해 이를 충분히 확인해볼 수 있다. 신라인이라는 호명은 백제로 마한으로 아니 더 이전의 한반도인들로 거슬러 오른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다. 중국의 해양실크로드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해양과 관련된 지정학적, 철학적 아젠다를 내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아니 중국에 비해 너무 늦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해경표(海經表)의 새로운 구상 해경표란 무엇인가? 내가 오랫동안 제안해온 갱번론(gengbone theory)의 하나다. 해항도시니 강항도시니 하는 사람 중심의 지정학을 넘어선 생태학적 포지셔닝이기도 하다. 지난주 이미 갯벌이 'Getbol'이라는 우리 고유명칭으로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바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Gengbone'(본 칼럼에서 수차례 제안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피한다)이라는 명칭이 가지는 의미에 관해서다. 신경준(1712~1781)이 썼던 <산수고(山水攷)>와 <강계고(疆界考)> 등을 토대로 우리 국토를 산맥 중심으로 해석한 것이 이른바 <산경표(山經表)>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지리산에 이르는 산맥을 대간(大幹)으로 읽고 거기에 12지류를 정맥과 정간으로 읽으며 그 안의 도시와 강과 섬들을 배치하는 국토 인식론이다. 설정해둔 산이나 도시들을 보면 중앙중심, 수도 중심의 사고와 12지라는 철학적 사고가 직조해낸 철학 체계임을 알 수 있다. 중심으로 설정한 한양이나 개성 등은 백두산에 이르고 심지어 마고산에 이른다. 실증을 중시하는 주류사학계든, 일종의 관념을 투사하여 인식의 범주를 넓히려는 비주류 사학계든 이 산맥 중심의 사고는 서로 대립적이지 않다. 이들의 관념에는 단군신화의 동굴도 백두산에 있고 환웅이 천부인을 갖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단수와 신시도 백두산에 있다. 고구려와 발해를 전제하는 이 지정학적 지향임에도, 급기야 백두산을 넘어 히말리야에 이르고 마고여신과 마고산이라는 정점으로 치닫는다. 산경표의 인식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다. 나는 거꾸로 해경표(海經表)를 제안한다. 지면상 짧게만 언급하면, 적도 상간의 흑조(黑潮, 크로시오해류)로부터 한반도를 향해 거슬러 올라오는 물골(해류와 조류 포함)론이다. 흑조의 본류는 일본의 동쪽을 거슬러 올라 태평양을 횡단한다. 여러 개의 지류 중 황해난류(한국연난류)가 한해륙 서해로 올라오는데 그 정점 혹은 기점에 흑산도(黑山島)가 있다. 흑조의 끝이어서 흑산도다. 이 지류는 내륙으로부터 내려오는 물길 좇아 큰골과 작은골들을 만들고 갯벌 먼 끝에서 내륙 깊은 곳에 이르러 회합한다. 갱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점, 시대가 어려울 때마다 향나무 묻어 천년 후 오실 메시아를 기원하던 바로 그 지점이다. 이 권역을 통칭해 조간대(潮間帶) 이른바 갯벌이라고 한다. 불교의 관음과 미륵이 그렇고 기독교의 메시아가 그러하며 1900년 어간 900여 개에 달하던 신종교의 몸부림들이 그러하다. 근자에 일어나고 있는 코로나의 범람은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보다 더한 시대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 생활 태도의 변화, 마음의 변화, 아니 모든 것을 통째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처럼 일대일로의 욕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섬과 바다와 해양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거기에 시대적 비전도 있고 희망도 있으며 심지어 먹거리도 있다. 해경표에 주목하기를 권유한다. 한해륙 4대 물골론(中灣, Middle Bay)과 6대 작은물골론(小灣, Small Bay) 갯벌의 철학적 인유(引喩)이자 해정학(海政學)적 포지셔닝이다. 남도인들의 인식 범주, 바다를 강으로 생각하고 강을 바다로 생각하는 대대적(對待的) 사고의 형상화다. 출처는 강변(江邊, reverside)이되 조하대의 보이지 않은 물길까지 포괄하는 갱번이다. 강항(江港)이나 해항(海港)보다 강포(江浦)라는 용어를 채용하는 것은 개(갱번)의 어귀라는 생태적 입지 때문이다. 한해륙을 4대 물골로 설정하고 6대 작은물골로 구성한다. 첫째는 무안만(務安灣)이다. 지금의 영산강이 본래 바다였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삼면의 바다, 삼대 중사(中祀)였던 영암 남포로, 광주와 담양으로 오르는 물골과 법성포 고창으로 오르는 물골을 포괄하는 만(灣)이다. 기점에는 흑산도가 있고 정점에는 마한 문화권이 있다. 둘째는 금강만이다. 부여, 공주, 논산으로 오르는 금강, 백강 물골과 김제, 전주 물골을 포괄한다. 기점에는 위도와 고군산군도가 있고 정점에는 부여, 공주 백제 등이 있다셋째는 경기만이다. 예성강, 임진강으로 북한강, 남한강으로 흐르는 한해륙 가장 중요한 물골이다. 기점에는 덕적군도가 있고 정점에는 고구려, 신라를 포괄하는 개성 고려, 한양 조선 등이 있다. 넷째는 발해만이다. 범주가 너무 넓어 황하만(베이징, 톈진), 요하만(다렌, 창다오), 압록만(단둥, 신의주), 남포만(대동강, 평양), 해삼위만(블라디보스토크)으로 다시 나눈다. 이외 6대 작은물골(small bay)로 강진만, 여자만, 김해만, 울산만 외 발해만의 중만(middle bay)으로 설정했던 남포만, 압록만을 포함시킨다. 김해만은 가야의 네트워크, 울산만은 경주 신라의 네트워크 물골이다. 6대 작은물골은 다시 작은 강과 하천으로 올라 백두산 천지연과 삼지연에 이른다. 거꾸로 보면 보인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불에서 물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지난 1~2세기 동안 현자들이 이구동성 외쳐왔던 후천개벽, 새로운 시대의 기점을 마련하는 방안이다. 그 시작에 적도(赤道)를 둔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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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0)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대나무 장구 소리가 유려하다. 몇 년 전이든가 담양에 들렀다가 들은 소리다. 날렵한 자세로 장구를 두드리는 춤사위가 곰삭았다. 무릎을 구부려 질겅질겅 스탭을 밟으니 소가 무논에서 쟁기질하는 모양이다. 굿거리다. 참새가 마당을 쪼르르 달리는 모양도 나온다. 휘모리다. 오금을 구부렸다가 폈다가 하는 동작들이 그침이 없다. 대삼 소삼이 어울리고 궁편 채편이 어울린다. 굵은 음이 잔 음을 에워싸며 교융(交融)한다. 왼쪽과 오른쪽이 혼융하고 큰것과 작은 것이 교섭하며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견준다. 결이 다른 음들을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라 스스로 낸 음마저도 다시 끌어안는다. 대나무로 만든 장구여서 그럴까? 그렇지 않다. 우리 음악 전반이 그렇다. 음악만 그러할까? 예컨대 활도 굽은 모양에 따라 밭은오금이 있고 한오금이 있으며 먼오금이 있다. 줌통(손잡이)으로 끌어 당긴 짧은 곡선을 밭은오금이라 하고 양무릎을 굽힌 듯 내민 부분을 한오금이라 하며 정강이로 내리는 부분을 먼오금이라 한다. 활의 줌피를 떠난 화살의 향방은 활대의 곡선이 지어내는 춤사위로부터 결정된다. 무릎의 춤사위와 연통하는 용어들이다. 대나무를 자기 땅의 터-무늬로 상정하는 담양이어서 그랬을까. 웅비하는 가락들이 병풍산을 에워싸고 추월산을 넘나든다. 필시 이 가락들이 용소를 지나고 수많은 용자(龍字) 돌림 영산강을 내달려 광활한 남도의 갯벌에 이르렀을 것이다. 궁금해진다. 죽장고의 출처. 요고(腰鼓)에서 청자장구(靑瓷鼓)까지 대나무로 만든 장구(長鼓)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그것을 추적하기는 어렵다. 요고나 청자 장구처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확인한 적이 없다. 근자에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도 확답하기 어렵다. 광주시 지정 인간문화재 이복수 명인에 의하면, 오래전 담양에 들렀더니 일부 어르신들이 대나무로 장구를 만들어 사용하더라고 했다. 죽장고의 내력이 근자의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장구뿐 아니라 대나무로 만든 악기의 출처는 다양하다. 젓대(大笒)의 기원으로 삼을 만한 기록은 삼국유사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이다. 신라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짓고 용이 출입할 굴을 뚫어 바닷가에 이견대를 지었더니 하루는 거북이 머리 같은 돌덩이가 동해로 떠밀려 왔다. 그 돌배에는,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대나무가 있었다. 이를 취해 피리를 만들어 불었더니 천하가 태평해졌다. 그래서 세상의 시끄러움(萬波)을 잠재우는(息) 악기라 해서 만파식적이라 이름 붙였다. 효소왕 때까지 이 이적이 거듭 일어나니 만만파파식적이라 고쳐 불렀다. 대나무로 만든 피리만 그러할까?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는 대나무의 은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타악기로 말하면 장구가 대표적이다. 장구의 가장 오래된 형태는 요고(腰鼓)다. 여러 연구자에 의하면 <고려기>, <서량기>, <구차기>등에 요고가 등장한다. 고구려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집안 17호분 등 다양한 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이나 평창의 화엄사나 상원사 범종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모래시계를 연상하면 쉽다. 허리처럼(腰) 잘록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실제 허리에 차고 연주를 한다. 음양의 철학을 담은 악기 장구 칠머리당굿을 포함한 제주도의 무속음악이나 별신굿을 주축 삼는 동해안 무속음악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요고를 떠올리게 하는 작은 사이즈의 장구를 사용한다. 사이즈가 길고 통이 넓은 교방(敎坊) 장구의 음악과는 차이가 있다. 고고학적 유물 유적에서 요고를 확인할 수 있다. 진도 등지에서 출토된 청자 장구는 요고보다 사이즈가 크다. 고려 이후의 일일 것이니 적어도 그 이전 시대의 음악과 차이가 난다는 점 알 수 있다. 크고 긴 장구를 바리톤에 비유한다면 요고류의 악기들은 소프라노에 비유할 수 있다. 신창동 출토 두 개의 고깔북도 나는 장구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중이다. 울림과 공명의 혼융, 세상의 시끄러움을 잠재우는 중용의 소리, 그 조화의 철학을 체화시킨 이들이 이 땅 마한인들이고 한반도 사람들이라는 전제에서 그렇다. 그렇지않고서야 어찌 남도땅에서 판소리나 산조음악을 시작할 수 있었겠는가. 지난 2014년 진도 명량해협에서 건져 올린 '이형도기', 허리가 잘록한 아령 모양이어서 그릇 받침 정도로 추정하던 유물이다. 이를 이복수 명인이 요고로 해석했다. 근거는 울림통, 울림턱, 자웅성 등 세 가지다. 울림통의 가운데가 잘록한 것이 요고다. 양 주둥이 안쪽에 돌출된 부분은 소리를 넘기는 공명턱이다. 예컨대 궁손에서 출발한 공기의 파장이 채손에 닿고 돌아와 이 턱에 부딪힌다. 반대로 챗손에서 출발한 공기의 파장은 궁손의 공명 턱에 부딪혀 화음을 만든다. 양쪽 주둥이의 크기 또한 다르다. 큰 편이 굵고 낮은 소리를 내며 작은 편이 가늘고 높은 소리를 낸다. 이 자웅(雌雄)의 소리가 혼융하여 장구의 음색과 음악을 만들어낸다. 조화로움이며 균형이며 중용이다. 부부나 연인의 밀접함을 비유할 때 늘 금슬(琴瑟)에 비유한다. 금(琴)은 거문고의 하나이고 슬(瑟)은 기타와 비슷한 비파의 하나다. 두 악기가 서로 음률을 간섭하고 교직하여 천상의 음악을 만들어낸다. 장구 또한 음양의 조화를 꾀해 그 미학을 완성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음악의 요체다. 담양의 터-무늬가 대나무라는 점에서 죽장구의 연원을 올려잡아 추정할 수 있다. 얼멍치(어레미)의 대나무 테를 버리지 않고 이른바 법고(벅구, 버꾸라고도 한다)로 만들어 활용했던 조상들의 생활 음악을 전제하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만파식적처럼 장구의 울림은 세상을 다스리는 기운, 세상과 공명하는 에너지를 가졌다. 장구의 리듬, 대삼소삼과 오끔조끔의 미학 엿타령을 잘 부르는 조오환 명인은 '오끔조끔'이라 한다. 오금에서 온 말일텐데 춤사위의 크고 작은 것, 울리는 소리의 크고 작은 것들이 서로 융기하고 침강하는 조화를 말하는 것이다. 국악계에서는 대삼소삼이라 한다. 대삼은 양(陽)적인 것, 소삼은 음(陰)적인 것이다. <주역>의 계사전에는 남성을 이루는 것이 건도(乾道)요, 여성을 이루는 것이 곤도(坤道)라 한다.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불과 물, 낮과 밤 등 모두 대대성(對待性)의 역리를 주창한 이론들이다. 주의할 것이 있다. 남자를 하늘에 비유하고 여자를 땅에 비유한 것이 지위의 우월함이나 격의 고저나 상하를 말함이 아니다. 대칭은 대등한 것을 넘어 비로소 하나가 되는 이치를 말한다. 낮에 둘이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는 만파식적과도 같다.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고 내가 있음으로 네가 있다는 상보의 원리다. 여기에 중용이 있고 조화가 있으며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우리 음악의 철학이 있다. 하지만 음악은 변한다. 마치 지금의 가요가 100여 년 전의 판소리나 민요와 다른 것과 같다. 예컨대 6~70년대를 횡단하던 기타(quitar)는 어떠한가. 악기도 바뀌고 음악도 바뀌고 기호 또한 바뀐다. N세대 Z세대가 부모 세대와 향유하는 음악이 다르듯, 이전 시대라고 해서 동일한 기호가 유지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시대를 횡단하는 음악의 근간은 균형의 도모, 장단과 화음의 지향에 있다. 그래서다. 담양의 대나무장구, 그 출처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 만들어지고 향유된다는 점을 오히려 주목한다. 올곧고 청정한 기운 실어 어떤 시대적 공명을 이루어 낼지. 담양 사람들의 지혜가 기대된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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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노래 '부용산'이다. 박기동이 노랫말을 쓰고 안성현이 지었다. 안치환과 윤선애가 불러 세간에 알려졌지만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 지난해 본 지면을 통해 '산동애가'를 다루면서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다. 부용산 가사를 빼닮은 절명(絶命)의 노래라는 카피를 붙였던 이유가 있다. 마디마디 포개진 혹은 다 말하지 못했던 굴절의 역사, 사람들이 전율하는 선율과 장단 행간에 겹겹이 쌓인 질곡을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그 중심에 월북이란 오명을 달고 있는 안성현이 있고 좌익이라는 딱지를 달고 평생 감시 속에서 살았던 박기동이 있다. 박기동은 천재 문학소녀를 위해 초빙될 만큼 출중한 문학인이었다. 안성현은 가야금산조의 중흥조라고 하는 안기옥의 아들이기도 하다. 훗날 박기동은 <부용산>이라는 책을 냈다. 나주문화원에서는 <안성현 백서>를 출간했다. <백서>에 의하면, 김 종 시인 등 숱한 연구자들에 의해 광폭의 추적과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가 이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부용산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해방 직후 1948년, 지금의 목포여자고등학교 전신인 항도여중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있었다. 천부적인 문학소녀였던 모양인데 당시 교장이던 조희관이 이 학생을 위해 박기동을 교사로 초빙한다. 당시 목포는 수많은 문학인, 예술인들의 에너지가 폭발되는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근대문학의 시작을 목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만큼 다종의 문학인들이 배출되었고 각종 문예대회가 열렸으며 예술공연이 펼쳐졌다. 박기동의 <부용산>(삶과꿈, 2002)에 의하면, 미네르바 다방 등지에서 박화성, 조희관 등 문학인들, 시인들, 평론가들, 음악가, 미술가 등 예술인들이 날이면 날마다 문학을 논하고 시대를 말하며 노래를 불렀다. 각종 다방이며 술집이며 공적 공간들이 르네상스기의 살롱 역할을 한 셈이다. 여기에 <항도여중 예술제>가 큰 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박기동과 함께 안성현도 채용되었다. 가야금의 중흥조 안기옥의 아들이어서인지 천부적인 작곡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부임한지 8개월여 뒤 김정희가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이팔방년 열여섯 나이였다. 안성현은 박기동의 습작노트에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발견하고 곧바로 곡을 붙인다. 아끼는 제자의 죽음을 육자배기 선율에 얹어 절절한 심중을 담아낸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래 <부용산>이다. 물론 이 시는 박기동이 항도여중에 부임하기 전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썼던 습작이다. 여수 돌산이 고향인데, 큰누이 박영애가 어린 나이에 벌교로 시집갔다가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방년 스물 넷 꽃다운 나이였다. 안성현이 곡을 붙이자 박기동은 마지막 구절을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 노래를 제망매가에 견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배금순이라는 상급학생에 의해 초연된 이 노래는 항도여중 학생들의 입에서 입을 통하여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애틋한 사연들이 날개를 달고 스토리텔링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빨치산, 월북, 좌익감시 등 파란만장한 분단의 시절들이 눈물과 핏물 속에서 구겨지고 찢겨지며 오늘에 이른 것,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들이다. 부용산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해방 직후 1948년, 지금의 목포여자고등학교 전신인 항도여중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있었다. 천부적인 문학소녀였던 모양인데 당시 교장이던 조희관이 이 학생을 위해 박기동을 교사로 초빙한다. 당시 목포는 수많은 문학인, 예술인들의 에너지가 폭발되는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근대문학의 시작을 목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만큼 다종의 문학인들이 배출되었고 각종 문예대회가 열렸으며 예술공연이 펼쳐졌다. 박기동의 <부용산>(삶과꿈, 2002)에 의하면, 미네르바 다방 등지에서 박화성, 조희관 등 문학인들, 시인들, 평론가들, 음악가, 미술가 등 예술인들이 날이면 날마다 문학을 논하고 시대를 말하며 노래를 불렀다. 각종 다방이며 술집이며 공적 공간들이 르네상스기의 살롱 역할을 한 셈이다. 여기에 <항도여중 예술제>가 큰 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박기동과 함께 안성현도 채용되었다. 가야금의 중흥조 안기옥의 아들이어서인지 천부적인 작곡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부임한지 8개월여 뒤 김정희가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이팔방년 열여섯 나이였다. 안성현은 박기동의 습작노트에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발견하고 곧바로 곡을 붙인다. 아끼는 제자의 죽음을 육자배기 선율에 얹어 절절한 심중을 담아낸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래 <부용산>이다. 물론 이 시는 박기동이 항도여중에 부임하기 전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썼던 습작이다. 여수 돌산이 고향인데, 큰누이 박영애가 어린 나이에 벌교로 시집갔다가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방년 스물 넷 꽃다운 나이였다. 안성현이 곡을 붙이자 박기동은 마지막 구절을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 노래를 제망매가에 견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배금순이라는 상급학생에 의해 초연된 이 노래는 항도여중 학생들의 입에서 입을 통하여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애틋한 사연들이 날개를 달고 스토리텔링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빨치산, 월북, 좌익감시 등 파란만장한 분단의 시절들이 눈물과 핏물 속에서 구겨지고 찢겨지며 오늘에 이른 것,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들이다. 누이와 제자의 죽음을 애달파했던 상여소리 제망매가(祭亡妹歌) "죽고 사는 길이 예 있으매 저히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다이 한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 아으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내 도닦아 기다리리다" 우리 향가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월명사(月明師)의 제망매가다. 누이의 죽음을 다룬 노래여서 '위망매영재가'라고도 한다. 양주동이 해석을 하였는데, 연구자들에 따라 약간씩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월명사가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제사하였더니),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지전(紙錢)이 서쪽으로 날아가 없어졌다. 하늘을 감응하게 하고 귀신을 감복시켰다는 향가의 주술력을 말하는 것이다. 박기동의 <부용산>에서도 향가의 전통을 승계한 숨결들이 포착된다. 한 가지에서 난 잎들이 가을 낙엽이 되어 떨어지나 우리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 누이는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마치 낙엽처럼 날아가 버린다. 월명사는 미타찰(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세계) 곧 종교적 초월을 빌어 누이와의 재회를 염원하는데 박기동은 부용산 봉우리 휘감아 도는 바람결을 통해 누이의 흔적을 좇는다. 안성현은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을 이 심상에 포개어 마치 남도의 만가(輓歌)같은 선율을 직조해 낸다. 어디 이것이 노래에 그치겠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떨어지는 월명사의 낙엽이기도 하고 벌교 부용산 봉우리를 맴도는 바람결 자체이거늘. 금지곡 <부용산>은 오래도록 우리 곁을 떠나있었다. 민족동란 전후기에 월북하거나 이른바 산사람이 된 이들이 많고 그들에 의해 많이 불리었기 때문에 문제 삼았던 것일 뿐이다. 새삼스럽게 <부용산>을 소환하는 것, 안성현의 월북은 월북대로 냉정하게 평가하되, 향가에서 김소월로 혹은 박기동으로, 고려가요에서 안성현의 선율로 이어지는 얼개는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지난 굴절의 시기를 거치며 쌓은 우리의 내공이 탄탄하다는 점에서 <부용산>은 보다 널리 불릴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자신감이 교착된 남북의 물꼬를 트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부용산>은 남도의 육자배기다 박기동이 글을 짓고 안성현이 곡을 붙인 <부용산>은 한마디로 말하면 남도의 육자배기다. 육자배기의 전형적인 떨고 밀고 꺾는 선율로 곡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남도전통의 시김새들이 새록새록 들어있다는 점도 그렇다. 죽음을 앞둔 빨치산들이 고향에 두고 온 누이며 부모며 형제자매들을 그리며 불렀던 한의 노래였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서슬 퍼렇던 박정희 정권에서도 남도의 어느 옴팍진(오붓한) 다방에서 이 노래를 숨어 부르던 이들이 있었다. 좌익이라서가 아니라 이 노래 자체가 우리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얼개나 음악적 결은 거슬러 올라 향가에 닿고 굽이쳐 올라 육자배기에 닿는다. 나주시립국악단 윤종호 감독은 늘 그렇게 주장한다. 단조 즉 마이너 기반의 계면조가 <부용산>뿐만 <엄마야 누나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스며들어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요 <엄마야 누나야>는 김광수가 작곡한 것인데, 본래 안성현의 곡 <엄마야 누나야>는 전통음악 계면조 기반의 곡으로 사뭇 다르다. 가곡풍의 <부용산>을 굳이 그렇게까지 해석할 필요가 있겠냐고 반문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를 남도창법의 계승으로 풀이하지 않으면 법고창신의 큰 줄기를 놓치는 잘못을 범하고 만다. <엄마야 누나야>뿐만 아니라 김정호의 <님>을 비롯한 대부분의 노래들, 내가 이름 붙여둔 송가인이나 김태연의 '남도트로트' 창법에 이르기까지 <부용산>류의 법고창신에 대해서는 차차 고를 달리해 다루기로 하겠다. 오늘 막걸리 한잔 마시며 <부용산>을 불러봐야겠다. 1971년경 목포 예술인 공연 장면. 목포예총 제공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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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다도해 어업권의 어구어법(漁具漁法) 다도해 어업권과 득량/여자만 어업권의 고기잡이 도구와 방식에 대해서도 소개해둔다. 지난 칼럼에서 나는 영광지역을 기점으로 서해 위쪽은 어살권으로 서남해 남쪽으로는 대발권으로 나눈 바 있다. <한국의 해양문화>(2002)에서 내가 최초로 시도한 방법이라고 밝혀두었다. 아직 학계의 합의를 얻지 않은 시론이니 본격적인 논의를 거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는 점도 곁들였다. 고군산군도 어업권과 위도칠산어업권을 살펴보면서 목적하는 어류나 방식, 특히 우리말 호명 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도해 어업권은 목포를 센터로 신안, 진도 완도를 아우르는 권역으로 설정했다. 우리나라 2/3의 섬이 집중된 지역이니 명실상부한 다도해라 할 만하다. 이 권역은 정치망 어업이 주축이었다. '살(箭)'이라는 용어를 '그물'이나 '발'이라는 용어로 호명한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목그물' 혹은 '명지그물'은 명주실로 만든 그물을 말한다. 일자형 혹은 타원형으로 그물을 세우고 임통을 양쪽 모서리에 설치하는 형태다. 그물의 이름과 고기잡이 방식의 이름을 동일하게 쓴다는 점 확인할 수 있다. '대발'도 동일하다. 이것이 후대에 '면사그물'로 바뀐다. 본래 '죽방렴(竹防廉)'이란 의미인데 명주나 면사로 만든 그물에도 동일한 이름을 붙였다. '큰살거지대발'은 이 형태를 대형으로 구성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ㄱ자로 설치한다는 점, 양쪽에 임통을 설치하지 않고 꼭지점에 해당하는 '북아리'에 '골통'을 설치한다는 점이 여타의 그물과 다르다. 북쪽으로 설치된 날개 그물을 '북아리'라 하고 남쪽으로 설치된 날개 그물을 '남아리'라 한다. '숭어덤장'은 숭어를 잡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ㄱ자인 점은 동일하다. 양쪽 끝에 어취부와 임통을 둔다. '덤장'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삼각망이나 사각망의 틀에 질그물을 길게 두는 형태다. 고군산군도 어업권이나 위도칠산어업권의 각형이나 타원형 등의 어살 형태와 유사하다. '등그물'과 '송어행'은 소규모로 설치하는 각자형이다. '송어행'은 '큰살거지대발'이 설치된 안쪽의 조간대에 소형으로 설치한다. 일자형이나 갈지자형으로 만든다. '등그물'은 대나무 마장(기둥)을 사용하여 이동이 용이하고 '송어행'은 갈지자형으로 그물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다. '독살/쑤기땀'은 '독장' 혹은 '독발'로 호명되는 등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예컨대 해남지역에서는 '쑤기땀' 즉 '쌓아서 만든 담'이란 뜻으로 이름을 붙인다. 일명 돌그물이기에 인류 최초의 고기잡이 방식이라는 수식이 가능한 어법이다. '독다믈'은 '장어얼'과 유사한 형태로 연전 강진만의 장어잡이를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갑오징어 방배질'은 가공하지 않은 싸리나무 다발을 그대로 점심대(漸深帶, 조간대)에 침강하는 함정어법이다. 득량/여자만 어업권의 고기잡이 다도해 어업권의 동편, 경남 어업권의 서편에 해당하는 권역이다. 경상도 일부를 포괄하는 어로권역으로 설정해두었다. 이 권역도 어살의 형태가 주류를 이룬다는 점 크게 다르지 않다. '사각형 맬덤장'과 'V자형 맬덤장'은 사각으로 된 어취부 및 임통과 각각 일자형, V자형의 유인그물을 사용한다는 점이 유사하다. '주벅그물'은 사각 어취부에 일자형의 유인그물을 설치하는 점이 동일하다. 'ㄱ자형 덤장'과 '꼬쟁이발'은 각자형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나 ㄱ자형 덤장이 중앙의 모서리에 임통을 설치하는 데 반해 꼬쟁이발은 그물의 날개 양쪽에 '만산이(임통)'을 설치하는 점이 다르다. '대발매기'는 대나무로 엮어서 만들었기에 붙여진 이름일 뿐 위와 유사한 형태다. '뻗거리' 혹은 '뻘거리'는 바다 일부를 막는 '개맥이'를 호명하는 다른 이름이다. '장어담장'은 '장어얼'이나 '장어독다믈'과 동일한 형태이고 '토전발'은 개펄에 흙을 쌓아 올려서 만들 일종의 '토살(土箭)'이다. 뻘흙으로 만든 독살(石箭)인 셈인데 '숨은통'이라고 부르는 임통이 설치되기도 한다. '붕장애구덕' 혹은 '붕장애굴'은 '장어얼'처럼 피라밋 형태로 돌을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뻘 바닥을 파고 돌을 채워 넣는 형식이다. '담'이나 '얼'이 아닌 '구덕' 혹은 '굴'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전래 어구의 재료와 유형에 남은 우리말 재료는 보통 소나무, 참나무, 대나무, 오동나무, 칡덩굴, 싸리나무, 비사리나무, 억새(갈대), 볏짚(새끼줄), 돌, 개펄/흙, 명주, 면사 등으로 나타난다. 소나무, 참나무 등 말목은 그물을 고정시키는 데 쓰였고 나머지 재료들은 발장(어살)을 엮거나 축조하는 데 쓰였다. 참나무나 오동나무는 그물 윗배리(벼리)가 뜨게 하는 '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말목을 지른다는 의미의 '주목', 돌로 쌓는다 해서 '독발', 개펄을 막는다 해서 '개맥이', 크게 막았다 해서 '대맥이', 모양이 꼬쟁이처럼 생겼다 해서 '꼬쟁이발', 굴처럼 개펄을 판다고 해서 '붕장애구덕', 대나무로 엮는다 해서 '대발'이라는 이름들이 붙었다. 특히 서남해지역은 '어살'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어법에 '발' 혹은 '발장'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특징적이다. 장어를 잡기에 장어얼 혹은 장어독다믈, 멸치를 잡는다 해서 '맬덤장', 숭어를 잡는다 해서 '숭어덤장', 송어를 잡는다 해서 '송어행', 새우를 잡는다 해서 '젓뚝' 등으로 불렀다. 고기를 가두는 임통만 해도 골통, 쑤기통, 쑹생이, 숨은통, 만산이(큰 만산이, 작은 만산이), 그물통 등의 이름이 있다. '후꾸리' 등의 일본말이 남아 있긴 하지만 대부분 순 우리말이다. 어구어법의 생태적 지형이나 개펄이 가진 레퓨지움이라는 의미를 넘어, 이 이름들이 가진, 그 이름들에 담긴 남도의 뿌리와 배경과 그리고 사람들의 흔적들을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순 우리말의 보고, 개펄해역 고기잡이 이름들 남도의 많은 섬들과 해안에서 이루어지던 어구어법의 이름들을 상기해본다. 자루그물, 주목망, 비사리그물, 덤장, 고개미살, 억새살, 개매기살, 버커리살, 야달매기, 대맥이, 개맥이, 독살, 장어얼, 등그물, 송어행, 숭어덤장, 목그물, 큰살거지대발, 독발, 쑤기땀, 장어독다믈, 싸리나무 방배질, 맬덤장, 대발매기, 꼬쟁이발, 뻗거리(뻘거리), 맬덤장, 토전발, 장어얼, 장어담장, 붕장애구덕, 낙지퉁어리, 윗배리, 아랫배리, 툽, 만산이, 주벅, 북아리, 남아리, 숨은통, 쑹생이, 젓뚝, 골통 등 남도어로권의 고기잡이 도구와 어로방식에 남아 있는 이름들은 그야말로 순 우리말의 보고라고 할 만하다. 형태에 따라 ㄱ자니 V자니 W형이니 등의 수식을 내가 붙였을 뿐 그 지역에서 부르는 이름들이다. 나승만 목포대 명예교수를 도와 내가 조사하고 이름 붙였던 2002년 이래로 20여 년이 지났다. 대부분의 개펄 어로 자체가 사라졌으니 이름 또한 망실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호명하던 남도 사람들도 하나둘 세상을 떴을 것이다. 이름도 빛도 없던 그들의 존재를 기억하는 방식이 뭘까? 생태적인 개펄어업, 맨손어법으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이 이름들에 남아 있는 순 우리말의 조어방식들, 그 이면에 들어있는 생태환경의 흔적들, 쓰여지지 않은 행간에 남은 그들의 자취를 기억하는 방식을 말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들의 존재와 그들이 붙여둔 이름들을 상고하는 의미를 오늘 여기 우리가 존재하는 의미에 견주어 묵상해 본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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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7)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기후위기와 노아의 방주 민주·비민주 담론, 극한투쟁 뛰어넘는 생태와 반생태 아니, 삶과 죽음의 담론 성장·개발 담론을 공생·공존 담론으로 뒤집어엎는 선한 에너지가 절실하다 무안군 무안읍 매곡리 도깨비굿 이야기를 다시 소개한다. 무안과 함평 일대의 명산이라는 보평산 아랫마을이다. 보평산 정상에는 조선시대 때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봉수대가 있다. 보평산과 감방산 사이에 있는 능성에는 용굴샘이 있어 명산 보평산의 풍수 스토리를 완성해준다. 이 물이 마르거나 마르지 않거나를 가지고 한해의 기후와 운수를 점쳤다. 누군가 몰래 묘를 쓰는 일이 발생하면 이 샘의 물이 말라버린다. 보평산은 명산이고 용굴샘은 그를 보전하는 상징공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진 자라도 이 산에 묘를 쓸 수 없다. 하지만 자기 자손들만의 발복을 위해 몰래 묘를 쓰는 자들이 있다. 도장(盜葬) 혹은 암장(暗葬)이라 한다. 그럴만한 능력과 사회적 부를 거머쥔 자들이다. 이런 경우 마을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본 지면에 여러 번 소개했듯이 도깨비굿을 한다. 고을의 여자들이 호미와 낫 등을 들고 보평산을 뒤진다. 결국은 몰래 쓴 묘를 발견하고 파헤친다. 유골들을 흩뿌려 버린다. 그래도 묘지 임자가 되었건 문중이 되었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일종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명산대천은 공동체의 것인데 마을 사람들 몰래 독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뭄이나 기근 특히 역병의 원인을 발복이나 사회적 권력의 독점 때문이라고 진단했음을 알 수 있다. 졸저 (다ᄒᆞᆯ미디어, 2021)에 자세하게 소개하고 분석해두었다. 도깨비굿은 기울어진 운동장, 극단으로 흐른 생태적 위기, 사회적 위기를 전복(顚覆)하는 행동의 은유다. 아니, 불순한 기운을 선한 에너지로 바꾸어 균형을 회복하려는 혁명이다. 기후위기와 문명의 상관글로벌 경제전문가 100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것을 기후에너지 캠페이너 정상훈이 소개해두었더라. 일부 내용을 여기 인용해둔다. 설문의 요지는 지금 우리 세계가 당면한 가장 큰 위기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응답자 가운데 가장 많은 93%가 '기후위기'라고 답했다. 빈곤 84%, 물 부족 79%, 전염병 78% 등으로 이어진다. 경제전문가들이 왜 기후위기를 가장 큰 문제로 꼽았을까? 정상훈은 이렇게 분석했다. "지난 2016년 세계은행은 기후변화를 방치하면 2050년까지 158조 달러(18경 5천 729조 원)에 이르는 손실이 발생한다고 전망했다. 이는 지난 2020년 우리나라 GDP(1조 6240억 달러)보다 100배 가까운 수준이다. 세계경제포럼도 2021년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를 통해 극단적인 기상현상이나 기후변화 대응 실패 등 기후 관련 문제가 '인류에게 실존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후위기로 인한 극단적인 기상현상이나 경제 시스템에 영향을 끼쳐 막대한 손실을 유발하고 더 나아가 인류 생존 자체를 위협할 것이라는 경고다." 그러면서 기후위기 대응 최선책은 재생에너지의 확대라고 진단한다. 경제뿐이겠는가. 문화적으로도 설명 가능하다. 엘스워스 헌팅턴의 (민속원, 2013)에 의하면, 기후와 문명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며 이렇게 말한다. "전 세계 대분의 지역들은 인구가 상당히 많이 거주하기 때문에 불리한 경제적 변동이 발생하면 이는 곧 곤궁과 질병, 그리고 높은 사망률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좀 더 활동적이고 모험심이 많은 사람은 이주를 택하기도 한다. 경제적 곤궁의 가장 일반적인 원인은 아마도 날씨 혹은 기후 변화(위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흉작을 초래하거나 동물들이 먹고 마실 풀과 물을 부족하게 한다. 이와 같은 경제적 곤궁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정치적 소요를 불러오며, 이것은 다시 이주를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경제적으로 부득이하게 이주한 사람들은 열악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이들의 숫자는 계속 감소하여 오직 특별히 우월한 자질을 지닌 소수의 집단만이 선택적으로 살아남는다." 끔찍하지 않은가? 예컨대 조선후기 경신대기근처럼 말이다. 만약 그러할지라도 젖과 꿀이 흐르는 지구별의 어떤 땅이 있어 이주할 수 있단 말인가. 빌게이츠는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제안한다. "매년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 510억 톤을 2050년 선진국부터 '순 제로net zero'로 만들자." 여러 가지 정답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실천하는가이다.가치관의 거대한 전환기, 진보의 끝자락에 서서여성 전유의 문화적 혁명이라는 도깨비굿, 그 문명적 은유를 새삼 반추해본다. 구마 겐고와 미우라 이쓰시는, 대담으로 엮은 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위대함, 고상함, 고층을 지향하는, 즉 '위에서의 기준'을 들이댄 건축을 선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저층, 저자세, 작음, 저탄소, 낮은 가격 등이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속, 높은 마력을 선호하던 시대에서 속도가 느려도, 크기가 작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진보의 끝, 진보의 종말이다. 산업, 기술적인 의미에서 진보의 끝만이 아니다. 인간관계의 형식까지 포함한 진보, 정확히는 진보라고 여겨져 온 모든 것이 막을 내린다는 의미다. 가치관의 근대화가 막다른 곳에 다다른 거대한 전환기다." 명문대학 졸업자, 부유한 집안 출신, 미모가 출중한 자 등을 경외하거나 선호하는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꼴지들의 반란이라고나 할까. 오로지 성장만을 위해 내리달리는 그 가속을 멈춰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 했다.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철학가들, 사상가들이 이를 진단하고 주문했다. 예컨대 김지하가 내다봤던 문명사적 전환 같은 것이다. 서양에서 동양으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불에서 물로, 율려와 동학의 전망 모색 등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비전의 재구성을 도모할 때가 아닌가 싶다. 비유컨대 개발 지향적이고 성장 우선적인 혹은 남성성으로 비유되는 진보담론의 해체가 답일 수 있다. 민주 비민주의 담론이나 극한투쟁을 뛰어넘는, 생태와 반생태 아니, 삶과 죽음의 담론이자 필사의 투쟁 아니겠는가. 코로나 팬데믹 시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물과 불의 심판에 준비했던 노아의 방주 같은 것 말이다. 분명한 것은 방주를 만들 마지막 위기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이른바 도깨비굿이다. 성장과 개발 담론을 공생과 공존담론으로 뒤집어엎는 선한 에너지 말이다.기후위기시대, 노아의 방주목포산돌교회 김경희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할 때 단 한 사람을 남겨뒀다. 그가 바로 '노아'다. 노아란 이름의 뜻은 '멈춤(Stop)'이다. 아크 노아(오직 노아), 이것이 죄악으로 치달았던 세상을 향해 던진 하나님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물 심판뿐이겠는가. 불 심판 또한 마찬가지다. 성장과 개발을 진보로 여긴 인류가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기후위기 시대, 더 이상의 성장과 개발은 안 된다고 'No'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노아'란 뜻이다. 거대한 자본과 반생태적 정치권력의 카르텔을 과감하게 무너뜨리고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 말이다. 이들이 생각하고 준비하며 실천하는 것들,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방주(方舟)' 아니겠는가. 지금 이 시대, 설령 인류의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될지라도 '아니오'하며 방주를 만드는 이, 이것이 어쩌면 김대중 대통령이 말했던 '행동하는 양심'의 현재적 버전일지 모른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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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곧 한여름이 오고 장마가 시작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영화산업이 주눅 들긴 했지만 연례적인 테마들은 변함없이 등장할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무엇일까? 한여름 밤의 영화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 그렇다. 고전적으로는 여고괴담 시리즈다. 영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여성 특히 처녀성을 강조하는 고전적 이미지는 소설 장화홍련전으로 좇아 오른다. 아니, 뱀에게 바친 처녀 이야기로, 백년 묵은 여우 이야기로 갈래를 치며 끊임없이 좇아 오른다. 이들 서사는 아마도 어떤 시대 어떤 의도에 의해 강요되거나 권장되었을 것이다. 이른바 권선징악의 표상이라 한다. 과연 그럴까? 드라마 <도깨비>마저도 성격은 귀신에 가까웠지만 이 전형적인 서사를 파괴한 것 같지는 않다. 여성이 피해자로 등장하는 이 스토리의 얼개는 물론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역사 이래 여성이 억압과 핍박의 중심에 서있었으니까. 도깨비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도깨비는 후덕한 남성상을 그 배경으로 한다. 본래부터 그랬을까? 그렇지 않다. 민속학자 임동권이 보고했던 도깨비들, 1960년대까지 채록된 다종다양하던 도깨비들 속에는 처녀 도깨비, 여성도깨비들이 대거 등장한다. 지면상 다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남성을 능욕한 여자도깨비 이야기 등이 흥미롭다. 남성의 몸을 가시덩굴로 긁고 개똥을 먹여 보기 좋게 전복시켜버린다. 남성 전유의 섹슈얼리티가 전복되는 순간이랄까. 처녀귀신의 함의를 무너뜨리는 도깨비 본연의 모습이 여기 있지 않을까? 여고괴담 시리즈에서 도깨비굿으로 나는 본 지면을 통해 여러 차례 도깨비굿을 소개했다. 여성 전유의 전복(顚覆) 축제 말이다. 왜 여성들만 모여서 해괴한 의례를 치렀을까. 일반적인 기우제가 비내림을 염원하는 것이라면 기우제 도깨비굿은 비 내리지 않은 자연현상과 사회에 대한 일종의 반란제의였다. 이 의례의 목적은 기왕의 질서를 뒤엎는다는 데 있다. 부조리한 사회를 뒤집어엎고 난망한 세상을 뒤집어엎는 상징이자 놀이이며 의례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내 책에서 자세하게 설명해두었지만 남근에서 두꺼비로, 불에서 물로, 남깨비에서 여깨비로, 불도깨비에서 물도깨비로의 전화(轉化)다. 일종의 카니발리즘이다. 바흐친은 이 용어를 권위적이며 모순적인 기존의 질서가 폭발적으로 터지는 축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낡은 권위에 대한 비판과 해체는 결국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려는 양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정격에 대칭되는 비정격, 권위에 대칭되는 비권위편에 있는 것은 여성, 어린이들을 포함한 노약자, 장애인 등이다. 여성성으로 상징되었을 뿐, 도깨비굿의 컨셉 안에 이들 모두를 포괄할 수 있다. 사람 살만한 세상이라고 하고 민주화되었다고도 하지만 이들이 속했던 위치나 위상은 역사 이래 고정되어 왔다. 권력에 대항할 힘이 없거나 무력을 행사할 능력이 부족한 이들 말이다. 공장의 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죽고, 버스타고 가다가 건물이 덮쳐 어처구니없는 죽임을 당한다. 그래서다. 한여름 밤의 여고괴담 시리즈를 새삼 상고하며 도깨비굿을 소환해본다. 고대로 거슬러 오를수록 분기마다 절기마다 행해진 뒤집음의 의례적 맥락이 또렷해진다. 프레이저의 명저 <황금가지>에 나오는 왕 살해 매커니즘을 닮았다. 내 책에서 비주류들의 전이지대, 평범한 존재들의 혼불, 가장 낮은 자들의 유쾌한 반란이라고 호명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설적으로 도깨비같은 세상을 뒤집어엎고 재구성하기 위해 떨쳐 일어난 여성들, 아니 이름도 빛도 없이 충직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들이 도깨비굿의 분장 주체들이다. 처녀귀신과 도깨비의 섹슈얼리티를 넘어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섹슈얼리티는 불평등한 권력 관계의 산물인 성에 관련된 행위, 태도, 감정, 실천, 정체성 등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개념이다. 도깨비 이야기 중 전형성을 갖고 있는 귀태(鬼胎)의 경우를 사례 삼아본다. 아비가 누군지 모르는 처녀 임신에 대한 대응방식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 여성에게 강요된 정절 관념과 순결에 대한 강박이었고 셩폭행과 음행 누명에 대한 원귀서사를 대량생산함으로써 처녀귀신이라는 기피 담론을 정당화시켜주는 섹슈얼리티에 지나지 않았다. 수많은 괴담 속의 여귀설화는 어떤가? 공동체 전체의 변화를 요구하는 담론의 기능은커녕 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자극적인 방식으로 유포시킴으로써 억압 기제를 오히려 강화시켜오지 않았는가. 햐얀 소복을 입고 입가에는 피를 흘리는 순결한 처녀상 혹은 여고생의 기괴한 이미지들만을 드러내 불안감과 공포심을 자극해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시각적인 부분을 드러내 파편화시키고 극단화시키는 이유는 물론 기왕의 체제나 담론에 대한 복종과 굴복 혹은 흡수에 있다. 이를 반역하고 전복하는 것이 도깨비굿의 내면이자 속성이었다. 나는 이 여성성을 <삼국유사>와 섬진강을 매개 삼는 두꺼비와 달, 그리고 갯벌과 마을숲의 여성성에서 찾고자 했다. 이것이 처녀귀신으로 표방되는 섹슈얼리티에만 국한되겠는가. 탄소발자국을 너무 많이 낸 반생태적 환경, 여전히 가진자들의 놀음으로 치닫는 정치적 현실, 이 세상은 여전히 빛도 이름도 없는 민중들의 희생과 굴종을 강요하고 있다.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 나는 올 초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다ᄒᆞᆯ미디어, 2021)>를 출판했다. 처녀귀신과 도깨비의 이중성이 아니라 본질적인 우리 욕망의 투사물을 통해 한국사회를 통째로 읽어내고 싶었다. 여고괴담류의 섹슈얼리티를 극복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우리는 구체적인 무엇을 강요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보다 선명해야 하고 논리적이어야 하며 합리적이어야 한다. 공부를 잘 해야 하고 얼굴도 예뻐야 하고 하는 짓도 우수해야 한다. 하지만 귀신과 도깨비는 선명하기보다 흐리멍덩하고, 논리적이라기보다 우유부단하며, 합리적이라기보다 불합리한 존재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하는 그런 존재다. 확실한 공간에서 출몰하는 정격의 신성이 아니라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중간한 공간에서 출몰한다. 마을과 숲 사이가 그렇고 바다와 육지 사이 갯벌이 그렇고 땅과 강 사이의 습지가 그렇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자적 존재다. 제국과 서양으로부터 들어와 이땅의 주인노릇을 하는 이른바 고등종교의 신격들에 치여 행간과 여백으로 숨어들어버린 이 땅 토종의 신격들이다. 그래서 애매모호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엉뚱한 존재로 살아남아 혹은 시대마다 기발한 모습으로 재창조되어 민중의 욕망들을 가감 없이 담아냈다. 귀태나 원귀처럼 남성 중심의 섹슈얼리티를 정당화시키기도 하고 도깨비방망이처럼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 재화를 선물해주기도 했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처녀귀신과 도깨비로 나뉜 행간이었다. 치우친 균형, 기울어진 운동장, 편향된 시대감각들을 바로잡는 것 말이다. 다그치고 몰아치는 현대인들의 삶 속에서 도깨비의 존재는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그것을 여백이라고 생각한다. 바다와 강 사이의 갯벌 혹은 습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아무 기능도 없어 보이는 그 여백 말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들어가지 못하는 비무장지대 같은 곳이다. 좀 더 고상한 말로 표현하면 마음의 여유다. 일등이지 않아도 꼴찌이지 않아도 회색분자여도 괜찮다. 나는 끊임없이 생태적 본원 레퓨지움으로 돌아올 도깨비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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