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한 깊은 시인의 숨결에 묻어나는 삶의 성찰과 인문학적 상상력",
"남도 문화의 숨결과 고전 계승을 담은 토속적 시편들",
이번에 펴낸 졸저 에 붙인 출판사와 서점들의 카피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송기원 선생은 이런 표사(表辭)를 써주셨다.
"이윤선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고여 자칫 글자를 놓치고는 하였다. 일자무식으로 평생을 살아낸 늙은 아버지와 일찍이 홀어미가 되어 세 남매를 거느리고 선창의 주모 노릇을 하다가 씨받이까지 된 어머니, 그 씨를 받아 금이야 옥이야 소중하게 길러낸 큰어머니, 배다른 누이들이며 뼈 다른 형들까지, 시에 나오는 이들 모두가, 나에게는 하늘에서 쫓겨온 적선(謫仙)들이며 그이들이 만든 신화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작은 눈의 눈물샘을 건든 것은 다름 아닌 시인이며, 시인이 살을 에어 빚은 시였다. 요즘처럼 시가 추악한 기형이 되어버린 흉한 시단에, 아직도 이런 아름답고 고귀한 시인이며 시가 한 송이 꽃으로 야생화 들판에 숨어 피다니...."
땔나무꾼에게는 과도한 헌사라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목포대학교 김선태 시인 또한 장문의 시평을 붙여주셨다. 그저 고개 숙여 감사드릴 뿐이다. 민망하게도 이 귀한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하는 것은 내 자랑을 하기 위함이 전혀 아니다. 오로지 남도인문학이라는 컨텍스트를 드러내고자 함이다. "고전과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에 깐 우주적 상상력과 초연한 삶의 태도"라는 김선태 시인의 시평으로 이를 변명할 수 있으려나. 다른 것은 내버려 두더라도 왜 남도라는 공간에서 남도의 말과 남도의 몸짓으로 시를 쓰고 노래하고 이야기하는지, 남도인문학이라는 표제를 걸어 글을 쓰는지, 에둘러 그 내력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여러분들의 해량을 구하며 김선태 시인의 시평 일부를 옮겨둔다.
흰그늘과 곰삭음
팁에 부기한 시, "'콩대를 태우며'는 남도문화의 본질인 곰삭음의 미학을 육화시킨 명편이다. 1연과 2연에서는 타들어 가는 콩대에서 나는 소리를 판소리의 '계면조(界面調) 선율'로 연결시킨다. 판소리가 몸에 배인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감각적 발견이다(이윤선은 고수이자 소리꾼이다. 참고로 필자는 발견이 있는 시를 높게 친다).
'따닥따닥' 소리가 마치 고수의 북장단 같다. 2연의 '어머니 정재서 딸그락거리시던 소리'도 마찬가지다. 다만 선율이 '그윽'할 수 있는 것은 '눈 내리지 않던 지난 겨울'과 '뒤늦은 여름장마' 때문임을 적시하고 있다. 이는 수많은 신산고초를 겪은 후에야 비로소 '그늘'(한)이 있는 소리를 얻을 수 있다는 판소리 득음의 과정을 의미한다. 3연도 '봄가뭄 여름장마'를 겪은 '콩알'이 모여 '간장 되고 된장 되고 고추장'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라도 사투리 중에 표준어로도 등재된 '게미'라는 독특한 말이 있다. 이 말은 판소리로 치면 앞에서 말한 '그늘'과 맞먹는다. 이는 오랜 발효(숙성)의 과정을 거쳐야만 '게미'(깊은 맛)가 있는 남도음식이 만들어짐을 의미한다.
'반성'(발효) 없는 소리는 그냥 '떡목'에 불과할 것이다. 4연은 콩대가 마지막까지 '한 몸 불살라' 나온 '콩재'와 '니람'(천연 쪽 염료)을 섞어 '쪽물'을 들여야만 숭고한 '남빛'이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을 '쪽빛보다 그윽한 남빛 가을(하늘)이 내려왔다'라고 표현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이렇듯 이윤선은 소리나 음식이나 색깔이 모두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련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곧 남도문화의 본질인 곰삭음의 미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삶의 마지막 여행지
그윽이 내 몸에 이르신 이는 시에서처럼 아버지이기도 하고, 내가 찾아 헤매던 사랑, 열정, 그리움 따위의 그 무엇이기도 하고, 남도인문학의 본질, 어쩌면 우주에 충만한 신령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김선태 시인의 시평으로 소개를 대신한다."'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모국어라는 우리의 문화유산 속에는 반만년 이어져온 인간과 자연의 모습, 전통, 역사, 문화, 예술의 혼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 했다.
여기에서 '모국어'는 방언(전북 사투리)을 가리킨다. 방언은 그 지역 공간에 사는 가족과 친구와 동네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지역 토착어인 방언을 통하여 서로 연대감과 동질감을 느끼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살아간다. 특정 지역의 정서를 드러내기 위한 문학작품의 창작에 있어서 방언의 활용은 어쩌면 필수적이다. 방언이 아닌 표준어로 그 지역의 독특한 정서나 문학적 리얼리티를 제대로 살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윤선의 이번 시집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은 전라남도 방언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남도 정서와 문화적 숨결을 잘 드러낸 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전라도 사투리의 경연장이라고 할 만하다. 이윤선의 이번 시집에는 "고전과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에 깐 우주적 상상력과 초연한 삶의 태도"가 엿보이는 시 63편이 실려 있다. 시인이라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사의 기억에서 출발해 지금껏 살아온 삶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남도의 정서적 숨결과 앞으로 남은 생에 대한 성찰을 고스란히 담았다.
가족사 다음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고전의 차용 혹은 인유이다. 고전 민속을 전공한 그답게 고전 시가의 율격과 말투를 충실하게 따르며 탄탄한 기본기를 드러낸다. 이윤선이 시로 풀어내고 있는 남도의 설화는 주로 '섬'에 집중돼 있다. 〈내 삶의 마지막 여행지〉는 고향 진도의 부속 섬들의 탄생 설화를 자세히 들려주면서 자신도 마지막엔 그 근원으로 돌아가 섬이 되고 싶은 소망을 드러낸다."
따닥따닥 타들어간다
고저장단 그윽하니 계면조(界面調)의 선율이다
눈 내리지 않던 지난 겨울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 헛기침하시던 불규칙 리듬
때때로 밑둥거리 타다가 튀어 오르는 리듬
대삼소삼 장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필시 뒤늦은 여름장마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 정재서 딸그락거리시던 소리
봄가뭄 여름장마 한 몸에 겪고도
반성 한 되 콩알 만들어낸 것이 가상하다
콩알 모여 간장 되고 된장 되고 고추장 된다
껍질은 모여 외양간 쇠죽솥으로 간다
마지막 남은 콩대 모아 태운다
니람에 콩재 섞고 무명배 풀어 쪽물 들였더니
쪽빛보다 그윽한 남빛 가을이 내려왔다
한 몸 불살라 만드신 그윽함 때문일 것이다
-「콩대를 태우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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