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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길 17국악신문 특집부 「국악신문」이 국악의 위상정립 사업에서 박헌봉 선생의 업적을 소중하게 기리는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선생의 <國樂運動 半生記>를 정리, 조명하는 두 번째 글이다. 박헌봉 선생은 해방전후 민속음악 학자로는 거의 유일한 분이다.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역임하며 민속음악가들을 배출시키고 세상에 국악의 맛과 멋을 되찾아 주기에 열성을 다했다. 그래서 이 분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민속음악의 길을 찾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국악계의 큰 스승’, ‘국악교육의 선구자’, ‘국악계의 태두’라고 불리는 소이(所以)인데, 그런만큼 민속음악의 길로 가는 이들은 선생의 생애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 생애를 처음으로 스스로 정리한 것이 <國樂運動 半生記>이다. <國樂運動 半生記>는 월간 시사잡지 신동아(新東亞) 1968년 7월호부터 9회에 걸쳐 연재된 것을 국악신문 제98호 2000년 10월 25일자부터 분재(分載)한 글이다. 당시 국악신문 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는데, 이제 주요 내용을 정리하여 선생의 국악운동 업적을 되돌아보기로 한다. ‘반생기’란 자전적인 표현이다. 작고(作故) 10년 전에 쓴 글이라는 시점으로 볼 때 사실상 전 생애를 기술한 전기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선생은 이 글 외에 회고적 진술은 없었다는 사실에서 입증이 된다. 이 ‘반생기’ 첫 회 ‘樵童의 노래 듣고 樂에 눈떠’는 태어난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망추정(望楸亭)이라는 서당을 다니던 시절의 소리를 가슴에 담는 과정을 그렸다. 9세 때의 어느날, 서당 가는 산모루에서 나무꾼의 지게목발 소리 "골짝 골짝 산골짝에 줄기 줄기 비묻어 온다~”를 듣게 된다. 이후 흥겨움에 겨워 이 소리를 입속으로 따라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 해 마을에 굿패가 들어와 서당길을 멈추고 소리판에 빠져들게 되었다. 17세쯤 사내의 가야금 병창 ‘새타령’에 정신을 빼앗긴 것이다. "그 소년의 가야금 병창을 들은 뒤부터 전보다 더 한층 악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선생의 성향은 서당 선생과 가족들에게 노출되어 강하고 심하게 질책을 받게 되었다. 두 번째 ‘3.1운동 후에 書堂을 하직’에서는 3.1운동을 겪고 서당 다니는 것을 작파한 이후의 정황이 진술되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회의를 갖게 된다. 서당과 가정에서의 수업에서는 순임금은 오현금(五絃琴) 여주를 즐겼고, 공자는 "예와 악은 잠시도 사람이 멀리해서는 않된다(禮樂不可作須去身)”고 했음에도, 왜 소리를 좋아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지에 대한 반감으로 부터이다. 그래서 어린 나이이면서도 서당 공부에 등한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행이도 이를 이해한 5살 위의 형이 부모님을 설득하여 서울로 유학을 하게 되었다. ‘한성강습소’에서 6개월 만에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중동학교에 입학했다. 이어 1년 만에 휘문고보 2학년에 편입하였다. 이 때 수업은 1주일에 한 시간 음악 시간이 있었지만, 서양음악 중심이어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서당 시절에 경험한 민속음악만한 매력을 얻지 못함은 물론이어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학업은 지식을 얻는 과정이었다. 이로서 서울에서의 생활 중에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음악에 대한 열망인 것이다. 당시 진주에는 가야금으로 유명한 김덕천, 장단 신고주, 가야금 병창 김종기씨가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이분들에게 가서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배우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가족들은 물론 종친들도 격노(激怒)하여 음악을 연구한다는 것을 극구 말리고 나선 것이다. 3회분 ‘族譜에서 除名당할 뻔’한 진술에서는 가족과 종친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에 매진한 과정을 그렸다. "나는 의연했다. 우리민족의 고유한 예술인 민속악을 연구하겠다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반상의 계급을 타파하여 세상에서 버림받은 광대들과 더불어 이 민족예술을 지켜나가겠다는 나의 의지는 오히려 더 굳어가기만 했다.” 가사(歌詞)를 연구하여 와전(訛傳)된 부분을 바로잡고, 가야금과 창(唱)을 공부하는데 몰두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제가 지방의 전통음악 활동까지 규제하고, 곳곳에 자리 잡은 일본인들의 횡포도 심해져갔다. 이에 따라 가족들의 만류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암암리에 들어 안 상해(上海)로 가 임시정부 활동에 가담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의협심이었다. 결국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그러나 일본 하관(下關)항구에서도 상해행 배를 탈 수 없었고, 오사카에까지 가서 뱃길을 모색했으나 열리지 않았다. 두 달을 허송했다. 후회를 하였고, 상해 행을 포기하고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귀국하여 여러 가지를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주의 음악인들을 규합하여 ‘진주음율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 활동에 2년을 동분서주했다. 이 활동 과정에서 우리음악을 더 깊이 공부해야 한다는 자각을 했다. 그래서 다시 12년 만에 다시 상경하여 음악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처음 찾아 간 곳이 ‘정악전습소’였다. 8개월 동안 많은 공부와 음악적 교류를 하였다. 그리고 이어 ‘이왕직아악부’에 들어가 4개월간 공부했고, 이어 민속악의 총본산격인 최고 명창들의 조직체인 ‘朝鮮聲樂硏究會’에 입회했다. 여기서 이름 있는 이동백, 정정열, 송만갑 등의 명창들과 2년간 창법을 연구하였다. 이어서 역시 민속음악무용단체인 최경식과 박춘재가 주관하는 ‘朝鮮歌舞硏究會’에도 가입하여 경서도 가무(歌舞)를 연구하였다. 이렇게 하여 "4년 동안 정악, 아악, 민속악 등의 여러 분야를 연구하고 나니 내 나이 벌써 34세~”가 되었다. 실무경험과 당대 조선음악 명인 명창들과 함께 활동한 시기이다. ‘日帝時에 朝鮮樂部를 組織’은 선생의 활동상이 더욱 분명히 진술된 내용이다. 친일적인 단체인 ‘朝鮮音樂協會’에서 활동하며 함화진(咸和鎭/1884~ 1948) 선생과 함께 ‘조선음악부’ 신설을 추진하여 이를 성사시킨 것이다. 여기에는 남도 음악단과 경서도 가무단을 포함시킨 의미있는 업적이다. 이는 세 번의 시연(試演) 끝에 종로경찰서장 조선인 이사카(井坂)를 설득하여 허가를 받아 낸 결과였다. 그러나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모든 계획에 직접적인 난관을 맞아야 했다. 조선어, 그 중에서도 남도 성음을 중심으로 하는 ‘춘향전’ 같은 판소리조차도 일본어로 고처 공연하라는 압력이 닥쳐 온 것이다. 더 이상 견디는 것은 헛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단체를 해산하자는 합의를 하고, 선생은 진주로 낙향을 하게 되었다. 이 때가 해방 17일 전인 1945년 7월 29일이었다. 감격의 해방을 맞았다. 8월 19일, 선생은 곧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민속음악인들의 대동단결체를 표방한 ‘國樂建設本部’ 창설에 중심 멤버로 참여하였다. "오랫동안 민속음악을 천시해온 사람들의 그릇된 인식을 깨우침으로서 민속음악을 제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국악(國樂)’이라는 어휘를 최초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인식에서 단체명을 ‘국악원(國樂院)’으로 고치게 되었다. 원장은 함화진, 선생은 부원장으로 취임했다. 이 단체를 중심으로 실질적이고 본격적인 국악 중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활동 자금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침 귀국한 ‘재미한족연합회’ 미주 대표단 김호(金乎/1884~1968)씨 등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은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힘을 얻어 다양한 연주자들과 행정인력을 확보하여, 미군정청 간부 56명을 초청하여 국악을 소개하는 특별공연을 준비하여 막을 올렸다. 이렇게 해방 직후 민속악 중심의 국악단체를 구성하고 주도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 선생이 조직과 진행에 적극 앞장선 것이다. 5회분인 ‘해방된 조국에서도 냉대 받아’에서는 적극적으로 시민 대상 국악부흥운동을 전개하나 양악(洋樂)의 수입으로 입지가 축소되는 국악계의 처지와 이를 타개하려는 선생의 노력이 진술되었다. 그 첫 작업은 빚을 내서 최고의 공연장인 명동 시공관(市公館)에서 국극(國劇) ‘대춘향전’과 ‘선화공주’를 공연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애초의 시민 대상 국악을 알리는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비록 무거운 빚을 지었지만 우리는 무한히 기뻤다. 일반 대중이 국악을 외면하지 않는 한 국악의 장래는 어둡지 않다는 신념을 얻었기 때문이다. 암담하던 앞길에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았고 국악인들의 파리한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다. 계속되는 공연 준비에 여러 날을 새워도 피로한 줄을 몰랐다.” 그러나 미군정의 세월이 길어짐에 따라 서양음악이 학교 교육과정에서는 물론 모든 공연 등에서 주객을 전도시켰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인 운동으로 국악학교의 존재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국악을 이해하는 정부 고관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해야 했다. 우선 서울시경 장택상(張澤相/1893~1969) 청장을 찾아가 논의하는 동시에 명월관(明月館)에서 국악감상회를 열어 기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 첫 감상회는 당시 서울시장 김형민, 경무부장 조병옥 같은 관료와 박흥식, 백낙승, 조준호 같은 갑부와 군정청의 미군 장교 등을 초청하여 김소희, 박귀희 선생의 판소리를 내세워 갈채와 후원 약속을 받아냈다. 명월관 감상회 성공을 계기로 큰 계획이 수립되었다. 곧 ‘國樂學校設立期成會’ 결성이다. 크고 실직적이고,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다목적의 학교 설립 사업이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예상했던 제반 사항이 기대와는 미치지 못하였다. 기성회 중요 참여자 중에 이탈자가 생기게 되었고, 당초 약속한 기부금 액수도 크게 차이가 나는 등 의외의 난관이 이어졌다. 본격적인 국악중흥운동 열기가 크게 흔들리고 혼동을 겪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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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6국악신문 특집부 지난 회에서 살핀 정범태 선생의 사진과 해설로 연재된 <명인>은 이후 <정범태의 사진으로 보는 명인명창 이야기>로 100호에서 이어졌다. 이를 전후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연재물이 기획, 연재가 시작되었다. 이 역시 ‘국악의 위상정립과 대중화 방안 수립’이란 취지에 맞는 기획물이다. 바로 기산 박헌봉(岐山 朴憲鳳/1906~1977)의 <國樂運動 半生記>이다. 제98호 2000년 10월 25일자부터 분재(分載) 되었다. 이 글은 원래 신동아(新東亞) 1968년 7월호부터 9회에 걸쳐 연재된 것이다. 42년 전의 기록임으로 재수록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결과이나, 더 직접적인 이유는 국악신문의 국악관(國樂觀)과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박헌봉은 민속음악 학자이면서 교육자의 상징적인 인물로 1947년 국악원(國樂院)을 선립하여 그 원장에 취임하고, 1960년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를 설립, 교장을 맡은 인물이다. 박헌봉과 국악예술학교에 대한 관심은 2000년 4월 5일자 장연희 기자의 탐방 기사 <21세기 전통문화예술을 주도할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찾아서>에서도 확인되나 김호규 대표의 시론(時論) <서울국악예술학교의 미래와 희망>(2005. 5. 10. 제150호)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해방 전부터 국악진흥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한 국악이론가 기산 박헌봉과 당대의 명창인 향사 박귀희, 만정 김소희를 중심으로 국악인들이 민속악을 중심으로 전문교육기관을 건립하고 체계적인 보존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였다.” 국악예술학교의 설립 배경과 함께 한 이들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 학교의 기본적인 국악 교육관을 기술했다. 이는 김호규 대표의 국악관이기도 하여 의미가 있다. "국립국악원이 1951년 개원하고 현재의 국립국악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가 1955년 설립되었으나 국립국악원이 구왕궁아악사들로 중심이 되어 있었고, 민속악을 함께 가르쳤다고는 하나 국악사양성소가 그들이 주축이 되어 아악 중심의 교육과정을 운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속음악인들은 그들이 민속악 보존과 계승 발전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뜻있는 독지가들의 도움을 받아 1960년 3월 현재의 서울국악예술중고등학교의 전신이자 한국 최초의 사학 국악전문교육기관인 국악예술학교를 개교한 것이다.” 이 기술에서 두 가지가 확인된다. 하나는 정악 중심의 국립국악원 부설의 국립국악중고등학교와 민속악 중심의 국악원(국악협회) 관련 국악예술중고등학교의 뿌리 깊은 반목(反目)의 배경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국악신문의 재수록 배경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점이다. 제1회 연재 리드기사는 다음과 같다. 앞에서 살핀 의도가 재확인 된다. "국악신문은 우리 음악사를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초대교장으로 우리 국악사에 큰 줄기를 마련하신 박헌봉 선생의 회고록을 입수하여 연재합니다. 평생을 우리 음악과 함께 살아오며 남기신 발자취를 요악, 정리하여 연재합니다.” ‘신동아’에 처음 연재할 당시 <國樂運動 半生記> 9회 분재 제하(題下)는 다음과 같다. 이토록 민속음악의 위상 정립을 위해 노력한 이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1) 樵童의 노래 듣고 樂에 눈떠 (2) 3.1운동 후에 書堂을 하직 (3) 族譜에서 除名당할 뻔 (4) 日帝時에 朝鮮樂部를 組織 (5) 해방된 조국에서도 냉대 받아 (6) 초대 內閣에서도 國樂을 外面 (7) 자유당 때 大統領에게도 呼訴 (8) 괴로워 心火로 病席에 누워 (9) 한국 初抄로 國樂학교 設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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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길 15국악신문 특집부 제13회에서 밝힌대로 ‘국악의 위상정립과 대중화 방안 수립’은 국악신문의 대표적인 사업이다. 1996년 신년호 1월 23일자 제33호에 발표한 ‘96국악신문 기회사업’에 의하면 제1사업이 ‘예능보유자 인물사진 및 전통문화사진 자료 학교 보급’이다. 사업 반향이 교육에 방점을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공식화 한 것은 96년 들어 시작된 사업이지만 사실은 국악신문의 기조이기도 했다. 이 사업의 기본은 역대 국악인들, 그 중에서도 민속음악 대가들의 업적을 국악사에 정위(正位)시키는 일과 그 위상을 현장의 교육과 공연을 통해 재정립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해 국악신문은 세 방향을 취했다. 하나는 민속놀이에 민속음악을 위치시키고 이를 ‘국악’으로 일반화 하는 논리이고, 둘은 기사를 통해 민속음악의 역사와 가치를 제고시키고, 셋은 민속음악 명인의 추모와 기념사업 추동(推動)이다. 이는 창간호로부터 유지시켜온 기본 방향이다. 이번 회에서는 국악신문이 민속음악 대가들의 업적을 국악사에 정위시키는 일을 주목하기로 한다. 국악신문이 민속음악 대가들의 업적을 정리하는 것은 역대 명인들의 존재를 사진과 해설을 통해 국악의 기둥임을 제시하였다. 지면 기사로는 <명인>을 게재하고, 명인들의 기록(사진)을 수집하고, 자료를 교육용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창구 역할을 했다. 이 중에 <명인>은 표3 전면을 통해 연재를 했다. 사진의 작품성(Quality)로나 해설의 내용면에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사진과 해설을 정범태 선생이 맡았는데, 최고 명성의 기록 사진가로서 1세대 명인들을 직접 촬영한 원로라는 점에서 특징이며 강점이었다. <명인>은 씨리즈 넘버링(Numbering)이 되어있지 않고 결호(缺號)가 있어 정확하진 않지만 현재로서는 제40호부터 연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40호를 전후하여 신문사는 종로구 와룡동에서 동대문구 용두동으로 이전하고, 편집은 당시 연세대학교 박사과장에 있던 우실하 선생이 편집국장으로 함께 활동했던 시기이다. 신문사의 이런 변화 중에서도 단영 지면의 개선이고 그 중에서도 <명인> 면은 연재는 돋보인다. 소위 와이드 기사로 전면 통이다. 우선 사진이 내용의 보완재가 아니라 주제로 처리되어 시원하여 가독성을 높여 준다. 사진과 해설 집필은 편집고문 정범태이다. 제40호의 16면 <명인>은 "민초의 한 안고 유랑 예인 생활 60년 김재원”이다. 명인은 중요무형문화제 제3호 남사당놀이이다. 사진은 김재원 선생이 담배대를 물고 두 번째 과장인 버나 접시를 돌리는 장면을 게재했다. 제41호는 "설장고 명인 김병섭”이다. 김병섭은 우도농악의 꽂깔설장고의 명인으로 김호규 대표의 부친이다. 9년 전의 생전활동 사진을 수록하고 정읍 고향에서 11살부터 농악의 길을 걷고 30여년을 우도농악 2세대 명인으로 산 역정을 기술했다. 제42호는 "진도씻김굿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김대례”이다. 제42호는 "판소리 명창 임방울”이다. 이후로 가야금 병창 박귀희, 호남농악 채상소고 백남윤, 진도북춤 박병천 명인 등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재확인이 되는 것은 <명인>의 대상은 정악 보다는 민속악에 중심을 두었다는 사실이고,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여부를 떠나 실질적인 세평(世評)의 명인까지 포괄 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제도권적 시각과는 달리 비교적 자유로웠음을 을 알 수 있다. 해설 내용은 필자 자신이 직접 만난 명인들에 대해서는 이력보다는 종목의 고유 가치나 유사 종목과의 변별성을 중심으로 기술했고, 선대 명인의 경우는 기존 이력과 사승(師承)관계, 당대 평가 등을 저널리즘적인 토픽 위주로 기술했다. 1997년 3월 16일자 제50호에서 "판소리 흥보가 명창 장월중선”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이 <명인> 코너는 장기 기획물임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역대로부터 현역의 명인 명창을 주목한 기사는 이후 다양한 코너와 특집형식으로 계속 기사화 되었다. 주요 편집 방향이기 때문이다. 이 <명인> 기획 기사는 당시 다른 매체 기획 기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의미있는 기사이고, 오늘의 빅데이터 시대에도 주목되는 텍스트이다. 결국 이 <명인> 코너는 국악의 위상정립 사업이면서 국악신문의 독보적인 기획기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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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5국악신문 특집부 국악신문의 사시와 창간이념을 바탕으로 한 언론사로서의 지향성은 기사와 사업과 발행인의 발언 등을 통해 실현된다. 지난 회에서는 사시를 확인한 바 있는데, 이번 회에는 3년간의 신년사를 통해 국악신문의 지향정신을 살피기로 한다. 모든 기관 단체나 기업은 구성원을 대상으로 새해의 설계를 제시한다. 신문은 지면을 통해 축시나 저명인사를 통해 구성원과 독자들에게 문제의식을 제시한다. 국악신문 역시 매년 1, 2면을 통해 유관 단체장과 발행인의 신년사를 발표했다. 이 중에 창간 3년까지의 신년사를 대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3년 총 48호는 주간신문 언론사로서의 체재는 정립된 시점이다. 1995년 1월 17일자 제10호, 1996년 1월 23일자 제33호, 그리고 1997년 1월 28일자 제48호 신년사를 살핀다. 제10호는 1995년으로 창간 후 맞는 첫 신년으로 광복50주년이란 뜻깊은 해이다. 1면과 2면을 할애하여 5인의 신년사를 게재하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1면은 당시 이성림 18대 국악협회 회장의 신년사를 수록했다. 2면에는 김호규 발행인, 허규 창우극장 대표, 김선봉 봉산탈춤 예능보유자, 황재기 국악협회 농악분과위원장의 신년사를 수록했다. 이성림 이사장의 신년사는 당시로서는 협회 기관지로서의 기능을 겸했기 때문에 유일한 발표 지면이었다. 1면이 할애가 된 사실에서 알 수가 있는데, "우리의 문화유산인 국악의 메신저 국악신문을 통해~”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당시 전 분야의 화두였던 ‘세계화’에 대해 주체의식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전제로 "찬연하게 계승되어 온 문화유산의 역사적 의미를 주체화 할 때 국악은 그 중심에 있고 문화의 집결체임으로 국악을 통한 전통문화 진흥을 꾀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말미에서는 "국악계는 물론 문화계 전체의 소중한 자산으로 국악예술의 대변자”라고 국악신문의 위치를 제시하기도 했다. 국악신문 발행인으로서의 신년사는 처음이다. 김호규 발행인은 <국악인 모두가 보급과 교육에 힘을 다하는 해가 됩시다>라는 제하의 신년사이다. 먼저 지난해 ‘국악의 해’가 국악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였다고 긍적적인 평가를 했다. 그리고 그런 국악에 대한 국민적 관심에 부응하여 국악신문이 창간되었다는 시대적 배경을 먼저 밝혔다. 이어 국악교육의 문제점으로 "어렸을 적부터 서양식 음악교육을 받아 온 사람이 국악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이러한 교육에서의 편향성은 방송현상도 마찬가지라고 하며 "현재 각 방송국의 국악 편성을 보면 아예 없거나 있어도 형식적인 구색만 갖추고 있어 국악 발전을 위해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 두 가지 과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국악인과 국악단체가 앞장서야 한다고 했다. 국악신문의 1995년의 신년사는 국악교육과 보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향으로 내세운 것이다. 1996년 신년호는 1월 23일자 제33호이다. ‘96년 국악신문 사업계획’ 8개항을 발표한 해이다. 신년사는 국악협회장과 발행인 두 편이 수록되었다. 역시 1면에 국악협회 이사장 이성림의 신년사를 게재했다. 발행인의 신년사는 제2면에 수록하였다. 이성림 이사장은 "전통이 확립되는 해, 민족예술이 꽃피우는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이어 지난 신년사에 제기했던 세계화의 전제는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한 인식의 주체화라고 하였다. 그리고 국악신문을 ‘국내 유일의 국악전문지’라는 입지를 밝히기도 했다. 발행인의 신년사는 우선 ‘국악의 해’ 열기가 국악 보급으로 연결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였다. 그리고 ‘세계화’보다 현실적인 용어인 ‘국제경쟁력’을 위해 민족문화의 주체화가 우선한다고 전제했다. 이를 위해 방송의 역할을 강조했다. "국악을 발전시키려면 문화대국을 자부하는 프랑스와 일본을 배워야겠다.”라며 ‘문화예외론’과 ‘샹송 쿼터(quarter)제’를 제시했다. 전자는 문화는 일반 경제논리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후자는 프랑스가 실시하는 라디오 음악 방송에서 40%는 반드시 프랑스 샹송을 송출해야 한다는 문화정책이다. 그리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국악진흥법’ 제정을 주장하며 "국악진흥법을 제정하여 교육법을 보완하고 언론 매체의 전통문화 프로그램의 대대적인 개편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세 가지 제안은 매우 현실적이고 설득력있는 대안인 것이다. 1997년은 ‘문화유산의 해’로 신년호는 1월 28일 제48호로 발행했다. 신년사는 제2면에 두 편이 수록되었다. 국립국악원 이성찬 원장과 발행인의 신년사다. 이성천 원장은 <전통문화 계승보존 활성화 해>라는 제하로 정부가 선정한 ‘전통문화의 해’에 대한 의의를 전제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전통문화와 예술을 향수해야 한다.”고 했다. 발행인의 신년사는 <우리의 문화 그 멋을 찾아서>라는 제하이다. 전통문화 전승 보존을 국악신문 창간 이념이라며 "우리의 전통적이고 자랑스러운 문화예술을 발굴하고 보존하며 후손에게 전승시키기 위해 전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전국에서 활동하는 국악 전승 단체에 대해 "국악신문사는 전통문화예술의 홍보지로서 전국 방방곡곡, 음지와 양지에서 가꾸고 애호하는 국악인과의 대화의 광장으로서 등불을 밝히는 길잡이가 되겠다.”고 했다. 이상에서 창간 이후 3년에 이르는 신년사를 살폈다. 이를 통해 확인 되는 것은 발행인의 직접적인 발언을 통해 신문사의 경향성을 파악 할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째, 첫 신년사는 국악 교육 개선을 지적하며 국악신문 자체가 교육자료 발굴에 노력할 것임을 제시했다. 둘 째, 1996년 신년사는 문화대국의 ‘문화예외론’과 ‘샹송 쿼터제’, 그리고 국악진흥법 제정을 통해 음악교육 개선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셋 째, 전통문화 전승 보존을 위해 국악신문이 전국의 국악인들과 대화의 광장으로서 등불을 밝히는 길잡이 역할론 자임이다. 이 같이 신년사에서 발행인이 밝힌 것은 국악신문사의 사시와 창간이념의 실천을 스스로 다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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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길 14국악의 위상정립 사업(1) 국악신문 특집부 국악신문 사시(社是)는 다음의 4개 항이다. 첫째 ‘삶의 풍요를 인도하는 정보로 공동체 결속에 기여함’이고, 둘째, ‘놀이문화를 중심으로 한 국악 중흥’이다. 셋째. ‘민속음악 생활화에 기여’이고, 넷째, ‘국악 전승 공동체 지원’이다. 일반적으로 사시는 사주나 창간 동인들에 의해 제정되어 창간사와 함께 공시된다. 곧 그 신문사의 이념으로 창간 이후의 신문사 구성원의 지향정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사시의 실천은 사측의 사업과 기자들의 구체적인 기사로 표현된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 세계화의 시대가 될 것이고, 통일의 시대, 문화주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이런 시대적 동향은 우리의 문화예술의 상한을 돌이켜 보게 해서 급기야 우리 문화예술의 당위성을 논의하게 된다. (중략) 고급예술, 전통예술, 대중예술이란 3분법에 근거하여 오로지 서구적 근대 고급예술을 중심으로 보는 현제의 예술교육의 관행을 이번에 설립되는 민속예술대학 에서는 우리 선조들의 삶과 신명을 제대로 계승하기 바란다.” 한 기사 내에서 두 개의 팩트가 병렬되었다. 전자는 3년 후의 새 세기를 문화의 세기로 상찬했다. 그래서 전통예술교육의 전당을 필요로 한다는 전제를 단 것이다. 그리고 후자에서 민속예술대학 건립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이는 서양음악 중심교육 시스템과 대중예술의 지배적 우위를 타개하기 위해 대책이 필요한데, ‘민속예술대학’(가칭)을 건립해야 한다는 논조이다. 이 같은 기사 방향이 국악신문 구성원만의 인식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지향성은 국악협회와 민속예술 중심에서 근거한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국악신문은 1996년을 ‘국악의 위상정립과 대중화 방안을 수립하는 해’로 삼아 제1차 사업을 전개했다. 그것은 국악인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사적 자료와 그 가치를 제시하고 이를 교육 자료화 한다는 방침이다. 그래서 역대 인간문화재와 작고 명인의 인물사진과 관련사진을 수집하였다. 제50호에 <명인명창 선생님들의 사진을 구합니다>라는 사고를 낸 것이다. "초중고 교사들은 우리 명창 선생님들의 사진과 전통문화 사진은 찾기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따라서 국악신문사는 국악의 위상정립과 국악의 대중화 교육을 위해 사진 보급에 앞장서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제50호에는 이 사업의 추진이 매우 다각도로 추진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고가 있다. 보도사진 작가로 명성이 높은 정범태(鄭範泰/1928~1019) 선생이 운영하는 ‘풍류방’에 대해 안내하고 있다. 광고 문안에는 전통예술과 문화를 담은 사진자료를 갖추고 있는 곳이라며 "음악·춤·소리·인물 자료들은 우리 문화를 아끼는 슬기로운 이들에게 값있는 양식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풍류방’을 통해서도 교육 자료화 하는 통로를 운영한 것이다. 정범태 선생은 이 시기 판권난에 고문(顧問)으로 되어있고, 표3에 <명인·명창>을 연재 중이었다. 이 코너는 명인의 대형 사진과 해설로 전면을 할애했다. 제50호에는 <판소리 흥보가 명창 장원중선(張月中仙/1925~1998)>을 게재했다. 이는 이 시기 국악신문이 역대 한국 민속음악 명인·명창의 존재 가치를 통해 한국전통문화사의 주역들임을 제시하려고 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것이 국악의 위상정립 첩경임을 인식한 결과이다. 대개의 신문사는 <자료실>을 별도로 운영한다. 기자들의 취재 보조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국악신문은 국악교육 현장의 교재를 위해 지면을 통해 제공했고, 외부 전문가의 소장자료까지 활용하였던 것이다. 당시 전문 정보를 정기 매체에서 이 정도의 지면을 할애한 것은 국악신문만의 실적이다. 이 결과는 오늘의 빅 데이터(Big Date)시대에 주목해야 할 실적이다. 데이터는 자본이나 노동력과 거의 동등한 레벨의 새로운 원자재 역할을 한다. 이 기사의 데이터 활용 가치는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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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온 길 13국악신문 특집부 신문사의 사시는 창간이념이다. 신문사 사주의 경영철학이나 경영 이념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신문사의 경영방침이나 사원들의 행동지침으로 구체화된 것이기도 하다. 대중을 대상으로 한 언론사임으로 대개는 진실, 공정, 정의 등 언론의 역할과 관련된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일반 회사 사훈(社訓)과는 다르다. 예컨대 인화(人和)라든지 단결, 사랑 등의 키워드로 이익창출을 독려한다. 신문사 사시는 대개 단문형(슬로건형)과 문장형으로 이뤄진다. 전자는 1면 제호 위나 밑에 매일 싣고 있으나 설명체 사시는 특별히 제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시는 대부분 창간 때 제정된다. 창간사와 함께 창간호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그래서 창간 당시의 시대상황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통일이라는 단어는 옛 신문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만 88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창간된 일부 신문은 사시로 채택한 예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종교재단과 관련된 신문의 경우에는 당연히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기도 한다. 문제는 자신들이 내세운 사시가 실제 보도에 있어 얼마나 충실히 지켜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사시가 종사자들의 개인적 가치관과 합치되고 신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날 때 의미를 갖는다. 사시를 통해 그 신문의 어제와 오늘을 가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소위 10대 일간지(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한겨레신문·문화일보·한국일보·경향신문·서울신문·국민일보·세계일보)라고 하는 메이져(major)급 신문사의 사시는 독자에게 신뢰를 얻고, 소속원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기능도 하기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단문형과 문장형 사시를 갖고 있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살펴본다. 조선일보는 "독립운동가 조만식(曺晩植/1883~1950) 선생과 방응모(方應謨/1883~1950) 선생이 주도해서 만들었습니다. 이 사시는 지난 세월 동안 조선일보의 흔들림 없는 이념과 지향점이 되었습니다.” 제정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정의옹호(正義擁護) 문화건설(文化建設) 산업발전(産業發展) 불편부당(不偏不黨) 자신들을 ‘민족지’로 내세우고 정의를 통해 문화를 새롭게 세우겠다는 의지와 산업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어디에 치우침이 없겠다는 네 가지 슬로건을 사시로 하였다. 이는 1920년 창간 단시 제정한 사시를 100년간 유지하고 있다. 다음 중앙일보 사시다. 사주 이병철(1910~1987)에 의해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하자는 뜻으로 제정했다고 한다. 1. 사회정의에 입각하여 진실을 과감 신속하게 보도하고 당파를 초월한 정론을 환기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밝은 내일에의 희망과 용기를 갖도록 고취한다. 2. 사회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경제후생의 신장을 적극 촉구하고 온갖 불의와 퇴영을배격함으로써 자유언론의 대경대도를 구축한다. 3. 사회공기로서의 언론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이성과 실용을 겸비한 건전하고 품위있는 민족의 목탁이 될 것을 자기한다. 이 중앙일보 사시는 설명형 사시의 전형이다. 1965년 창간 당시로부터 현재까지 유지되는 사시다. 진실을 통해 밝은 미래를 이끌고, 경제후생으로 복지사회를 견인하며, 품위있는 민족의 목탁역할을 하겠다는 내용이다. 물론 살핀 두 신문의 창간이념대로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는 독자의 평가일 뿐이다. 국악신문의 사시는 창간호에서 ‘삶을 풍요롭게 인도하는 주간신문"이란 단문형이 제시되었고, 산발적으로 유사한 메시지가 제시되었다. 이와 함께 창간사와 발행인의 발언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사시는 창간 당시의 시대상에 그 배경을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1993년의 판소리 소재 영화<서편제>의 흥행 여파, 1994년 ‘국악의 해’와 ‘국악의 거리’로 제정, 첫 ‘한국방문의 해’ 제정이 그것이다. 국악의 재발견, 국악의 가치 발현, 그리고 국악의 세계화를 이슈화 한 시대였다. 이런 배경에서 창간함으로서 사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삶의 풍요를 인도하는 정보를 담아 공동체 결속에 기여한다. 2. 놀이문화를 중심으로 한 국악을 중흥시킨다. 3. 민속음악의 생활화에 기여한다. 4. 국악인 공동체를 지원한다. 이 사시는 제호와 창간사 내용과 발행인의 발언, 그리고 산발적으로 제시한 캐치프래이즈를 통해 정리한 것이다. ‘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6’에서도 언급했듯이 ‘전통놀이=민속음악=국악’이란 개념과 국악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간단체를 국악 전승 공동체로 이해한 기조에 기인 한다. 결국 국악신문 사시는 민속음악을 국악의 중심에 두고, 교육과 생활화에 기여하며, 국악 공동체 지원 실천을 표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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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온 길 12「국악신문」 시대(1) 국악신문 특집부 제8호부터 ‘신문’으로 총 11편의 ‘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에서는 주간 전문신문 《놀이문화》의 창간배경으로부터 수익구조까지를 살폈다. 그 기간은 1994년 9월 07일 창간호 발간으로부터 동년 12월 21일 3개월간의 제7호 발간까지이다. 이 기간은 국악신문의 도약기로 수익구조상 주간신문 운영 구조로는 열악하였다. 매우 심한 산후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서 새로운 개혁을 모색해야 할 상황으로 개혁을 단행했다. 그 개혁의 일단이 제호 변경이다. 바로 ‘놀이문화’에서 ‘국악신문’으로의 개제(改題)이다. 1995년 12월 28일, 드디어 제8호 「국악신문」 이 발행되었다. 이후 2020년 9월 7일 26년, 총 293호를 달린 것이다. 사실 ‘놀이문화’라는 제호는 잡지(誌)인지 신문(紙)인지 성격 구분을 애매하게 했다. 이 결과는 우선적으로 광고 수익에 결정적인 장애가 되었다. 잡지이냐 신문이냐에 따라 광고료 책정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성격상 시사적인 뉴스 중심이냐 전문적 내용 중심이냐에 따라 잡지냐 신문이냐가 분리됨으로 관장 부서와 독자 타깃(target) 자체도 다르다. 수익구조 개선은 결국 창간이념을 실현하느냐 포기하느냐의 기로임으로 새 이름을 표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호 변경에 대해서는 최종호인 제7호에서나 개제호인 제8호에서도 의도나 절차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그 단서는 남겨놓았다. 제7호 15면 하단 5단통 광고면에 독자에 대한 신년인사 ‘근하신년’에 "국악신문 놀이문화가 독자 여러분께 송년인사 드립니다.”라고 하여, ‘국악신문’을 앞세운 것이다. 또한 제8호에서 캐치프레이즈를 "전통예술의 보급화를 위해 앞서가는 국악신문사 놀이문화”라고 하였다. 전자에서는 국악신문사의 놀이문화인지, 놀이문화라는 국악신문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국악신문’이란 제호가 등장한 것만은 분명하다. 후자에서는 ‘국악신문사’라는 사명을 써서 신문을 발행하는 업체임을 밝힌 것이다. 이는 ‘국악’을 이슈(issue)로 뉴스를 전하는 ‘신문’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로서 「국악신문」은 ‘신문’(新聞/Newspaper)의 본령을 전제로 하게 된 것이다. 신문은 다른 매체와 다른 네 가지 고유한 특성을 갖고 있다. 하나는 접촉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으며, 둘은 기록성(記錄性)을 가지고 있어 반복해서 접촉할 수 있으며, 셋은 내용이 새롭고 시사적이며 시의성(時宜性)을 지니며, 넷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발행되는 정기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특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제한성도 갖고 있다. 그것은 문자를 해독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아예 접촉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약점이다. 신문은 네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하나는 보도기능이다. 독자들에게 사회에서 일어나는 제반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이다. 둘은 논평기능이다. 사회현상에 대한 해설과 논평을 가하는 기능이다. 셋은 오락기능이다.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기능이다. 넷은 광고기능이다. 독자들에게 상품 및 시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광고주가 그들의 상품이나 경제활동을 대중에게 알려주는 기능이다. 이 때문에 신문은 현대사회의 우리 생활에 중요한 일상배체 구실을 한다. 신문 기사문은 소위 3C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정확하고(correct), 간결하며 (concise), 명백하여야(clear) 한다. 이러한 기사문을 갖추기 위해서는 다음의 9개 요건을 갖춰야 한다. ① 표준어인 일반 관용어를 쓴다. ② 상용한자와 부득이한 외래어는 표준기준에 맞추어 쓴다. ③ 수식어(부사·형용사)를 쓰지 않으며 문장은 짧게, 내용은 단순하게 쓴다. ④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명확하게 한다. ⑤ 주어와 술어를 되도록 가깝게 한다. ⑥ 단락을 자주 둔다. ⑦ 문장기호를 쓴다. ⑧ 같은 말(용어)은 두 번 쓰지 않는다. ⑨ 전문어·약어·약자를 피한다. 신문의 표현문장이 뉴스기사문이라고 할 때 문장으로서의 구문형식을 갖춰야 한다. 내용이 세 번 되풀이되는 표현형태로 써야 한다. 그것은 표제( headline)·전문(lead)·본문(內容)의 3단계 구문이다. 이 기술 순서는 결과를 앞에 두고 뒤로 가면서 중요 부분이 약해진다. 이는 ‘도역삼각형서술법(倒逆三角形敍述法)’이다. 또한 뉴스기사의 표제와 전문도 그렇지만 본문은 뉴스의 구성요건인 5W1H,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왜(Why), 어떻게(How)라는 표현요소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어야 한다. 이상의 요건을 갖춘 기사문은 다음의 기본으로 편집하게 된다. 통일(unity)·조화(harmony)·균형(balance)·비율(proportion)·대조(contrast)·생동감(movement) 등의 기본을 맥락적으로 만족시켜야 한다. 당연히 이러한 요건들은 항상 서로 연관을 맺고 있으며 기사내용에 따라 적절하게 배합하게 된다. 이상은 종이 신문 ‘국악신문’이 갖춰야 하는 제 요건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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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1《놀이문화》 시대(7) 국악신문 특집부 《놀이문화》의 수익구조 《놀이문화》는 제호 옆에 ‘주간’으로 표기했고, 상단에는 ‘국악종합신문’ 또는 ‘주간생활신문’으로 표기하여 놀이문화(국악레포츠) 전문 신문임을 밝혔다. 포맷상 타블로이드판(380 mm × 300 mm/5 × 11¾ 인치)의 반 컬러형이다. 신문(新聞/Newspaper)은 소식과 사건을 전달해주는 정기 간행물의 하나이다. 뉴스를 신문 기사와 사진 등의 형태로 값이 싼 신문지에 인쇄하여 발행하는 매체이다. 이는 모든 종류의 신문의 일반적인 형태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모든 신문은 제호 밑에 "이 신문은 신문윤리강령 및 신문윤리 실천 요강을 준수한다.”를 표기하고 있다.총 7호까지의 《놀이문화》는 이상의 조건에 합치한다. 한국ABC협회 2019년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서 발행되는 주간신문은 총 633종이다. 열독률과 구독률의 최전성기였던 1990년대 《놀이문화》 시대는 훨씬 더 종류가 많아 매체간의 경쟁이 심했음을 추정한다. 전통적인 미디어 기업의 글로벌 브랜드는 오늘까지 유지되고 있지만 그 명성과 위력은 변하고 있고, 소규모의 매체는 명멸하였다. 그런데 이들 신문은 당시나 지금이나 전적으로 광고료에 의지하는 기업이다. 그러므로 신문 발행의 기본 운영은 광고수주률에 따라 결정되었다. 결국 모든 신문 광고료 확보라는 수익구조는 미디어 변화를 급속하게 이끌어냈다. 타임워너나 디즈니, 뉴스 코퍼레이션 같은 전통적인 미디어 기업의 글로벌 브랜드는 유지되고 있지만 그 명성과 위력은 변하고 있다. 대신 구글, 애플,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미디어 영역의 강자로 부상하고 있다. 미디어산업 지형 자체가 변하고 있는 현실에서 전통적인 비즈니스 모델과 관행을 고수하는 미디어 기업은 생존 자체가 점점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디어 기업들에게 필요한 것은 급변하는 환경에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변화에 적응하고 대처하기 위해 어떠한 혁신을 채택하여 실행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평가가 중요하게 되었다. 미디어 역사에서 백여 년 이상 독점적 지위를 누리며 광고라는 안정된 수익모델을 유지해 왔던 신문사들이 맞고 있는 변화는 다른 어느 미디어보다 더 급격하고 충격적이다. 오랫동안 사회적 공기(公器)로서 뉴스와 정보 생산과 배급의 중추였던 신문은 이미 그 중심적 지위를 잃어 가고 있다. 디지털 기술로 인해 뉴스와 정보를 둘러싼 생산과 유통, 소비방식이 전면적으로 변하는 환경에서 위기에 처한 신문사의 혁신은 더욱 중요하고 민감한 주제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신문은 경영방침을 다변화하며 생존을 꾸렸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광고수주 방침이다. 방침이란 어떤 조직이나 그 조직의 일을 목적에 맞게 이끌어 경영하는 원칙으로 반복하여 일어나는 같거나 비슷한 문제에 대한 의사 결정에 일관성을 유지하는 원칙이나 실행 절차이다. 과연 광고 수주를 기본으로 한 수익구조 창출을 위한 운영 방침은 무엇일까? 《놀이문화》 총 7호까지의 광고 게재는 일반 신문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광고는 광고주 입장에서 "판매를 목적으로 상품에 대한 정보를 매체를 통해 소비자에게 알려 구매를 촉진시키기 위해 고료를 지불하고 게재하는 선전물”이다. 이를 수용자인 신문사 측에서 보면 "생산자의 의뢰로 소비자와 연결시켜 독자를 소비자로 연계시키기 위해 게재료를 수익구조로 삼는 행위”가 된다. 모두 경제행위로 고도의 의도된 거래이다. 다만 광고도 정보라는 사실에서 공익성이 있기도 하다. 결국 이 광고가 신문사의 기본 수익구조이며 경영방침에 의해 선택과 집중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놀이문화》 광고란은 이 신문의 수익구조와 영업 방침을 합리적으로 추론케 한다. 크게 4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가장 큰 광고 부분은 신문 첫장 전면광고이다. 가로 36.2cm, 세로 15단(50cm)이다. 특별히 양면 '15단 스프레드 광고'가 있지만 7호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전면 광고는 1~5호까지 배면에 한국국악사 악기제작사 광고이다. 이 광고는 오늘의 종합일간지 기준으로는 단가가 1억원에서 1억5천원정도이다. 두번째, 큰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광고 부분은 5단통 광고란이다. 1면의 경우가 가장 고가인데, 1~3호까지가 한국정보통신주의 신용카드조회기 광고이다. 수주율은 30%이다. 다음 2~15면까지 하단 5단통 기사와 반 5단 광고이다. 유료 전체 광고 수주율은 55%정도에 머물고 있다. 세번째, 다음으로 많은 광고가 자사 광고이다. 전국 협력사 모집과 객원기자 모집이다. 이는 광고료 같이 크진 않지만 독자확대와 발송 시스탬상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 협력사 유치는 중요하다. 그리고 놀이문화 이용안내와 광고전문가 모집 광고가 있다. 이 광고는 20% 정도인데, 이는 유료 광고 수주율이 매우 낮은 실상을 메우기 위한 대체수단이기도 하다. (*사진1 참고) 네번째, 마지막 부분은 자사 운용 부대사업 광고이다. ‘정통우도정읍농악 강습’과 ‘이영상 설장구 강습’ 안내인데, 강습이 독자확보와 수익에 도움이 된다. 약 10%정도가 되는데 이 역시 유료광고 수주율이 낮은 결과로 대체 광고이다. 이외에 제호 좌우측 돌출광고와 지면 줄광고가 있다. 기사와 연계된 광고로 효과가 크다. 약 15%정도 수준이다. (*사진2 참고) 정리하면 《놀이문화》의 수익구조는 세 가지 광고 수익에 의존했다. 하나는 상업 유료 광고 수주다. 둘은 자사 고유사업 운영이다. 셋은 지역 지사(협력사) 확충에 의한 사세확장이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수익구조는 주간신문 운영 구조로는 매우 빈약한 편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개혁을 모색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3개월 총 7호 발간은 매우 심한 산후통을 겪은 것이다. 이 산후통은 성장통을 최소화 시켜주는 예방책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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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0《놀이문화》 시대(6) 국악신문 특집부 《놀이문화》, 민속악을 대변하다 《놀이문화》 총 7호의 발행 시기(9월~12월)는 ‘94 국악의 해’ 정점에 있었다. 창간의 시대적 배경과 그 영향권에서 발행되었다. 지난 호에서도 총 7호까지의 기사 방향은 ‘국악의 해’ 주요 프로그램 소개 중심이라고 밝혔다.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창간호-10면 <94 국악의 해 소식>(세종국악관현악단 중국 공연, 표어 3종 소개, 경기도 민속예술경연대회) -15면 <국악의 해 기념 민속예술 대공연>(국악협회 소식) 제2호-제7면 <94 국악의 해>(마당놀이 심청전 미국순회 공연, 세계사물놀이 겨루기대회) 제3호-제7면 <94 국악의 해>(국악협회 주최 제14회 대한민국국악제 서울 대국 부산 공연, 세계사물놀이 겨루기대회) 제5호-제8면 <국악의 해 소식>(제3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제4회 동리대상 시상식 및 축하공연, 아태민족음악학회 학술대회, 조선조 왕세자 국혼 재현, 대한민국 종교음악제,제5회 춘향가 및 민요발표회) 제7호-제7면 <국악의 해 대담>(전통공연예술협의회 발족에 관한 보고, 국악의 해를 이끈 사람임헌영, 94국악의 해 실시사업 현황 자체사업과 지원사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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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9《놀이문화》 시대(5) 국악신문 특집부 《놀이문화》의 주요기사 전 회에서는 《놀이문화》창간호에서 7호까지의 지면 분석을 통해 사시나 편집방향 등을 수립하지 못하였음을 지적했다. 이번 회에서는 이의 연장선상에서 주요기사를 살펴 현 단계의 상황을 구체화 하고자 한다. 우선 전체 7호까지의 주요 기사를 일별(一瞥)한다. 대상은 고정 지면으로 일종의 섹션화를 이룬 기사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창간호-<농악이란 무엇인가?>(2면), <소리/춤>(11면), <굿>(12면) 제2호-<전라좌도 중평굿 1회>(2면), <서도소리>(11면), <경사남도 제3호 한량무>(12면) 제3호-<전라좌도 진안 중평굿 2회>(2면), <봉산탈춤>(12면) 제4호-<강령탈춤>(2면) 제5호-<은율탈춤>(2면), <밀양백중놀이>(6면) 제6호-<동래들놀음>(8면), <경기안성 풍물놀이>(11면), <평안도소리>(13면) 제7호-<수영들놀음>(3면), <전라우도 정음농악>(10면), <경기도소리>(13면) 이상에서 확인되는 것은 민속음악(5회), 민속춤(6회), 민속놀이(5회), 굿(1회)을 다루었다. 이 4개 종목은 모두 ‘민속’에 속한다. 이는 궁중음악, 정재, 제례의 상대적의 종목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로서 《놀이문화》의 편집방향은 민속음악, 놀이, 춤(연희)에 편향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놀이문화》의 특집성 기사로 볼 수 있는 지면이 있다. ‘94 국악의 해’ 관련 기사이다. 《놀이문화》 창간 배경의 하나가 ‘국악의 해’ 제정에 여론지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발의하였다고 살핀 바 있다. 이 거국적인 행사는 당연히 최대의 기사 대상이다. ‘94국악의 해 소식’과 ‘국악계 동정’란인데, 총 6회를 다뤘다. 내용상으로는 ①‘국악의 해’ 조직위원회 소식 ②해외공연 ③국립극장과 국립국악원 공연 소개 ④세계 사물놀이 겨루기 대회 소개 ⑤국악협회 소식 ⑥조직위원회 사무국장 인터뷰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지면과 내용으로는 전문지로서는 매우 빈약한 편이다. 이런 사정은 당시 일간지와 비교하면 확연하게 들어난다. 우선 1월 주요 신문에서는 사설에서 ‘국악의 해’에 대한 기대와 실행을 추동했다. <국민의 국악이 돼야>(조선일보. 1994, 01. 06. ), <국제화 시대의 국악의 해>( 국민일보, 1994, 01. 20.), <국악, 생활화, 세계화의 해>( 서울신문,1994, 01. 21), <국악의 우리의 신명>(한국일보, 1994, 01. 21. ) 등이다. 그리고 특집 기사로는 「서울신문」 1월 22일자 임영숙 논설위원이 <수제천에 우는 아이와 국악교육>, 「국민일보」 2월 17일자 는 정진기 논설위원이 <국악의 해에 거는 기대>라는 기사를 올렸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연중 연재물이다. 「조선일보」는 1월 10일부터 <명사들의 국악 이야기>를, 「문화일보」는 <우리소리의 뿌리>를, 「경향신문」은 <가락 따라 소리 따라>를, 「한국경제신문」은 <명인명창>을, 「국민일보」는 <소리의 맥-명인명창의 고향을 찾아>를, 「일간스포츠」는 <국악 365>를, 「세계일보」는 <94국악의 해 맞아 살펴본 우리악기 우리풍류>를, 「동아일보」는 <한명희의 국악교실>란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방송에서도 연초에 비중있는 프로그램이 제작되었다. 1월 22일 KBS TV <심야토론-국악의 해>를, 2월 3일 SBS의 <시사기획-버려진 소리꾼들>을, 2월 10일 EBS <국악의 해 기념 특집기획-가얏고에 실은 민중의 정서>를, 2월 13일 KBS 1TV의 <문화가 산책-박동진 명창의 득음> 등을 방영하였다. 이 같은 언론의 반응은 1월 20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선포 기념식의 응답이었다. "우리의 것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국제화는 결코 세계인들로부터 존경도, 경쟁력도 가질 수 없으므로 올 한 해 동안 모든 국악인이 뜻을 모아 국악의 원형보존과 재창조에 힘써 달라"는 대통령의 메시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놀이문화》 두 달 동안 5회에 단신 정도의 내용은 매우 빈약했다고 본다. 그럼에도 《놀이문화》가 게재한 3가지 형태의 기념 표제(標題, title)는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주는 다음 기록이다. "올해는 국악의 해, 신명나는 밝은 사회” "우리 가락 겨레의 얼” "얼씨구 우리가락 좋을시고 우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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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8《놀이문화》 시대(4) 국악신문 특집부 《놀이문화》의 지면구성 지난 회에서《놀이문화》창간호를 분석하여 대체적 성격을 밝혔다. 이를 통해 7호까지 발행된 《놀이문화》 전체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번회에서는 7호까지 《놀이문화》지면을 여론지로서 형태와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시(社是)는 신문사의 창간이념이다. 일반적으로 제호를 중심으로 상하 또는 좌우에 배치하는데, '…하자'는 식의 슬로건형이나 진실·정의·정론 같은 키워드 제시형이 있다. 《놀이문화》사시는 제호 위에 "삶을 풍요롭게 인도하는 주간신문”이라고 제시했다. 그런데 이 창간시의 사시는 제2호에서 "국악 레포츠 주간 생활신문”으로 바뀐다. 그리고 나머지 호에서는 "국악인을 위한 국악 종합신문”으로 다르게 제시된다. 결국 사시에서 변화상은 창간 기획단계에서 확고한 방향을 세우지 못한 결과이다. 면수는 16면(창간호, 2, 3, 6, 7호)형태가 5회, 8면(4, 5호)형태가 2회이다. 색도는 4호부터 7호까지 1면과 최종면만 컬러 인쇄로 했고, 나머지는 흑백 인쇄이다. 이 색도에 대해서는 제4호 1면 자사 광고에서 예고했다. 이는 광고 수주와 광고료 책정에 관한 것임을 알게 한다. 3호 1면 자사 광고에서 ‘박스 광고’와 ‘줄 광고’에 대한 각각의 광고료와 10월 5일 발행의 제4호에서 컬러로 인쇄한다고 예고한 것이다. 제2~4호까지의 1면에는 기사 없이 모두 광고로만 구성했다. 제2호는 한가위 인사와 추석 휴간을 알리는 사고(社告)로 배치했다. 제3호는 광고 가격과 제4호부터 컬러로 발행한다는 사고를 냈다. 제4호는 지면 개선을 알리는 사고를 배치했다. 이 사고에서 두 가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8면의 ‘과감한 지면 개선작업’을 통해 놀이 전문지의 기능을 다하겠음을 밝혔다. 다음은 "지면의 컬라화를 이룸으로써 기존의 광고에 비하여 탁월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광고를 한 것이다. 제5호는 ‘신라 귀침 효과’라는 기사형 광고를 냈다. 문의 전화번호를 명기에서 광고라는 것은 확인된다. ‘지면 개선작업’의 결과는 제6호와 7호 1면 구성에서 확인된다. 기사 관련 사진 1컷과 광고성 공연 예고 사진 2컷으로 배치했다. 이는 제2~5호 까지의 전체 광고로 배치한 것과 전혀 다른 형태이다. 제6호 1면은 슬기둥 공연 사진(관련기사 6면)과 ‘고 김숙자 추모공연’(문예회관대극장)과 ‘품바’ 공연 사진이다. 제7호는 김연수(金演洙/1907∼1974)의 판소리 음반 복각 CD 사진(관련 기사 12면)과 왕기석의 수궁가 공연(국립극장) 광고와 김덕수패/래드썬 공연(호암 아트홀) 안내 사진으로 배치했다. 이는 제7호 ‘국악신문’으로의 개제호(改題號) 체재로 이어졌다. 이미 살핀 창간호를 제외하고 제2호에서 6호까지의 지면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각 호의 공통 고정 지면은 ‘풍물기행’, ‘동호인 동정’, ‘한국의 탈춤’ 세 분야이다. 창간호의 ‘문화계 소식’이 제2~4호에서는 ‘문화가 산책’으로 바뀌었다. 제6호와 7호에서는 제2면에서 ‘국악계 동정’난을 배치시켰다. 이 난도 지면 개선 작업으로 신설된 것이다. 이상에서 제7호까지의 지면 형태와 편집방향을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하나는 사시를 확정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창간의 당위(當爲)만을 앞세우고 편집방향 등은 확곡하게 수립하지 못한 결과이다. 둘은 고정 지면의 섹션(Section)화를 확립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역시 사시나 편집방향 등을 수립하지 못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셋은 4호부터 지면 개선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는 나름의 자체적 판단의 결과에서 개선한 것이다. 마지막은 제1면 광고에서 관련사진으로 대체한 것과 컬러인쇄 전환 등의 개선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광고료에 의지한 운영상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을 다소 극복하기 위해 조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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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7《놀이문화》 시대(3) 국악신문 특집부 창간호의 지면구성 ‘삶의 풍요를 인도하는 정보를 담아 공동체 결속을 구현하는 신문’이란 이념으로 발간한 창간호는 총 16면이다. 제1면은 신문의 얼굴로 제호와 창간사를 중앙에 배치하고, 지면 안내와 하단 광고로 구성했다. 그리고 자사 구독신청과 광고게재 안내하고, 제호 우측에 주간신문임을 ‘수요 서울 전역판’으로 표기했다. 지면 안내에서는 각 면의 기사를 소개했다. 하단 5단 통 광고는 신용카드 조회기 한국정보통신주식회사이다. 제2면은 ‘풍물기행’ 난으로 농악을 다루었다. 개념, 명칭, 유형으로 제시한 글은 기사이기 보다는 학술문 성격이다. 집필자나 기자명은 밝히지 않았지만 기존 발표자료의 전문 게재로 본다. 주요 내용은 농악을 연주예능, 종교예능, 노동예능으로 구분하고 명칭과 개념을 각각 제시했다. 유형에서는 기원농악, 노작농악, 걸립농악, 연희농악으로 4개 분류하고, 지역적 분류로는 영동농악, 영남농악, 호남우도농악과 호남좌도농악으로 4개 분류했다. 결국 제2면은 종합 일간지 섹션개념으로는 학술난이기도 하다. 학술난 성격의 면수가 11면과 12면에 연속된다. 11면은 ‘민요란 무엇인가?’란 개설적 논제로 경기민요, 서도민요, 남도민요, 전통민요로 분류하여 기술했다. 12면은 ‘1 동해안 무속의 특징’의 제하로 연재물이라는 것을 밝혔다. 주 내용은 2장의 사진과 함께 굿 중심으로 수록했다. 이 2면의 형태 역시 무기명으로 기존 학술자료의 인용인듯 하다. 제3면은 ‘여행스케치’란 타이틀로 경기도 가평군 ‘명지산 계곡’을 상세한 안내도와 함께 다루었다. 경춘가도를 통한 접근 방법과 인근 춘천댐과의 연계 코스를 소개했다. 같은 성격으로 10면과 연결된다. ‘주말산행’에서 강원도 철원군 상해봉을 다루었다. 15면도 같은 성격으로 ‘모험적인 레포츠 래프팅’에서 한탄강을 대상으로 장비 사용 등을 제시했다. 이상에서 언급한 3, 10, 15면은 종합지 셱션(Section) 개념으로는 문화면 중 ‘레져/오락’란으로 볼 수 있다. 제4면은 ‘동호인 동정’란이다. 1983년 흥사단이 운영하는 탈춤 동호인단체 ‘탈벗’을 두 장의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제5면은 ‘창작 뮤지컬 꿈꾸는 기차’라는 작품을 소개했다. 이 뮤지컬은 동학 1백주년 기념작으로 권오성 연출로 바탕골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작품이다. 6면은 국내 영화와 비디오 소개란이다. 조정래 원작 장선우 감독의 ‘태백산맥’을 소개했다. 특히 동일 영화사인 태흥영화사와 ‘서편제’의 주인공 김명곤 주연을 주목해서 기술했다. 더불어 국내 비디오 작품의 공급 유통과 수집 방법 등을 안내했다. 14면은 해외 ‘금주의 비디오’란으로 ‘방탄자들’과 ‘찰리 채플린’ 작품해설에 할애했다. 이상의 4, 5, 6, 14면은 취미란으로 볼 수 있다. 제7면은 ‘문화가 산책’으로 공연과 전시회 안내난이다. 무용은 유니버셜발레단 공연을 소개하고, 연극은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를 소개했다. 전시회는 서양화가 전병현 작품전을 소개했다. 이 난은 종합지의 공연 및 전람회란의 성격이다. 제13면 상단은 《놀이문화》 지사, 대리점, 직원 모집 광고로 구성했다. 이 같은 광고는 7면 객원기자 모집, 12면 광고 의뢰 방법 등을 소개하는 형식과 같다. 자사 광고가 전면 또는 하단 광고난에 게재한 것은 창간호로서 매체를 소개할 필요성 때문에 배정한 것이다. 제16면은 8면과 함께 전면 광고이다. 16면은 한국국악사와 판매 악기 광고이고 8면은 희조산업의 각종운반기구 광고이다. 그리고 전 지면의 하단에 광고를 배치하는 것은 오늘의 종합일간지의 굳어진 관행이다. 이 광고란은 운영 측면에서 중점 배치됨으로서 신문사와 사주 영업 방침 성격과 관련이 있어 별도의 분석 대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광고란을 분석하면 상업적 광고, 사업적 광고, 공익적 광고로 분류가 된다. 관련사업 광고와 공익성 광고는 부연할 필요가 있다. 사업적 광고는 2면 하단 ‘우도정읍농요 강습’, 5면 하단 ‘편집대행’, 9면 하단 ‘국악강습안내’가 있다. 이 중 2면의 우도농악 강습안내는 이영상 선생의 설장구 강습이다. 지금까지 《국악신문》 주최 발표회는 국악신문의 지속적 사업이라는 것은 주목해야 한다. ‘국악강습안내’ 역시 최근까지 ‘국악로 전통문화학교’(교장 안숙선)라는 형태로 지속해 온 사업이다. 이는 모두 《놀이문화》의 부대사업으로 전통문화 보급과 수익을 위한 광고이다. 공익광고는 10, 11, 15면 하단 5단 통 광고이다. 이 중 "사회를 좀 먹는 사이비 기자를 우리 손으로 신고합시다”를 내세운 공보처 광고이고, 두 편은 ‘94 국악의 해 소식’과 국악협회 국악의 해 기념 ‘민속예술 대공연’ 안내이다. 공보처 광고는 당시 언론환경을 알 수 있게 하고, 두 편에서는 "올해는 국악의 해 신명나는 밝은 사회"라는 표어 등을 통해 ‘국악의 해’ 사업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어 유용하다. 이상과 같이 전체 지면 구성과 기사 내용, 그리고 광고면 분석을 했다. 이를 통해 제호 《놀이문화》에서의 ‘놀이’는 연행 중심의 민속놀이고, ‘국악’의 중심을 민속놀이로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지난 호에서 살핀 창간사 분석 결과와도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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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6《놀이문화》 시대(2) 국악신문 특집부 《놀이문화》 창간 이념 1984년 09월 07일 창간, 제호(題號) 《놀이문화》, 캐치프래이즈(Catchphrase) ‘삶을 풍요롭게 인도하는 주간신문’, 창간사(創刊辭) 발행인 김호규 명의 6개 문단 17개 문장, 총 지면 16면, 이에 의한 창간이념(創刊理念)을 다음과 같이 표방했다. ‘삶의 풍요를 인도하는 정보를 담아 공동체 결속을 구현하는 신문’ 새마을운동 성취에 의한 ‘한강의 기적’,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성공적 개최에 의한 국제적 위상 제고, 이의 자부심으로 선포한 ‘국악의 해’와 ‘한국방문의 해’에 대한 희망이 표방된 창간이념이다. 그래서 ‘삶’, ‘정보’, ‘공동체’가 키워드로 제시된 것이다. 창간사는 17개 문장 6개 단락으로 구성되었다. 첫 문장은 "농경문화에 뿌리를 두고 생활해 온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흥겹고 신명나는 각종 놀이문화를 생활 속에서 구현해 왔습니다.”로 시작한다. 그리고 "소리만 요란하고 겉모습만 화려한 빈 수레이기를 거부하고, 비록 규모는 작지만 풍성한 수확물로 그득찬 소쿠리 역할을 당당히 해 나가겠습니다.”라는 다짐으로 끝맺는다. 삶의 풍요는 농경문화의 신명을 현재화 하는 것이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풍성한 정보를 담는 언론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각오의 피력이다. 첫 문단은 우리의 마을 공동체 결속은 농악·탈춤·마당놀이·백중놀이 등의 춤과 소리에 의한 신명에서 비롯됨을 강조하고 이의 구현을 ‘삶의 풍요’로 규정했다. 두 번째 문단은 ‘우리의 춤과 소리에 의한 전통문화가 서양문화 선호 인식에 점령당한 것은 아닌가’라는 자책과 함께 이의 ‘보존과 전승을 재주꾼들의 기교에 맡겨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세 번째 단락은 《놀이문화》는 이 지적을 해결하는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려고 창간한다고 밝혔다. 네 번째 단락은 ‘전통과 현대의 이상적 조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다섯 번째 단락에서는 대안 제시와 실천을 촉구하는 매체로서 ‘변변한 국악 관련 잡지나 신문이 없다’고 하며 국악계의 관심으로 신문을 창간하다고 부연했다. 여섯 번째 문단에서는 문화예술 ‘균형 발전을 위해 정서함양 및 가치관 확립을 위한 전문지를 꾸려간다’고 했다. 최종 단락에서는 ‘규모는 작지만 풍성한 정보를 담는 소박한 신문을 지향한다’고 선언했다. 이상의 창간사를 요약하면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1990년대 중반 전통문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수용하여 창간하였다는 사실이다. 둘은 전통문화의 핵심인 공동체 결속 요소를 춤과 소리에 의한 신명으로 보고, 그 중심을 농악·탈춤·마당놀이·백중놀이 같은 놀이문화로 보았다는 점이다. 셋은 다소 편중된 시각에서, 88올림픽경기 개회식 공연 고싸움놀이와 1993년의 영화<서편제> 흥행 성공에 의한 민속놀이나 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정중한 정재(呈才)나 장중한 정악(正樂)보다 신명나는 민속놀이와 음악을 더 선호한 배경을 반영한 것이란 점이다. 마지막은 우리의 전통적 가치인 신명(神明)을 오늘의 풍요로운 삶에 불어넣는 도구가 바로 전문지(專門紙)임을 확신하고, 그 소임을 사명(社命)으로 한 사실이다. 이상의 네 가지 사실은 《놀이문화》 창간사가 담은 시대정신인 것이다. 창간호의 백호(白蒿)는 창간사이다. 창간사는 수정(修訂)과 수정(修整)에 의한 수정(水晶)이다. 창간사의 생명은 시대정신에 있다. 《놀이문화》는 나름의 시대정신을 사시(社是)에 반영한 언론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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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5《놀이문화》 시대(1) 국악신문 특집부 《놀이문화》 창간호 2020년 9월 7일, 《국악신문》은 지령 26년을 맞았다. 1994년 09년 07일 창간으로부터 기산한 나이다. 그런데 창간 당시의 제호는 《국악신문》이 아닌 《놀이문화》이다. 이 제호는 제7호까지 유지되다가 제8호부터 《국악신문》으로 변경하였다. 지령을 승계한 것이다. 제호가 변경되면 성격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지령을 승계하면 동일체로 인정한다.* 창간호는 첫 번째 발간호로 초호(初號) 또는 수호(首號)라고도 한다. 이런 의미가 포함된 것은 그만큼 창간호에는 간행물의 정체성과 미래상을 제시하며 정성과 노력과 실험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데, 창간시기와 창간사가 가장 중요하다. 우선 1994년 9월을 창간 시기로 잡은 배경을 살펴보면 이 신문의 성격이 좁혀진다. 네 가지가 중첩된다. 하나는 1993년의 판소리 소재 영화<서편제>(임권택 감독)의 흥행 여파이다. 단성사에서 4월에 개봉하여 196일 동안 1백만 관객을 동원시키는 저력을 일으켰다. 이에 의해 판소리 같은 민속음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였다. 둘은 1994년 10월부터 2달간 ‘국악의 해’ 로 제정되어 대대적인 행사가 있었다. 전국적인 국악공연과 경창대회가 붐을 이루었다. 셋은 이 ‘국악의 해’와 연계한 첫 ‘한국방문의 해’(위원장 황병기)가 제정되어 모든 해외공관이 동원된 해이다. 국악이 우리 민족의 정서를 진솔하게 담고 있으면서도 개방화의 물결을 타고 들이닥친 서양음악에 밀려 오랫동안 방치된 채 홀대를 받아왔다는 점에서 국악을 통해 한국을 알리고 이를 관광객 유치의 계기로 삼자는 취지에서다. 넷은 종로3가 단성사와 창덕궁 중간의 4거리 일대를 ‘국악의 거리’로 제정, 선포하는 해이다. 이미 1992년부터 준비되어 온 것을 공식화 한 것으로, ‘국악의 해’ 조직위원회에서 10월에 선포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국악 부흥의 계기를 맞은 1994년은 국악계로서는 한국의 정체성에 전통음악은 있는가라는 자성과 함께 대대적인 잔치를 준비하게 되었다. 국악이 전통문화 분야에서 존재를 확인시킬 수 있는 계기였으니 활성화를 위한 여러 방안이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악인의 한 사람으로 창의적 발상을 한 것이 전통음악 전문 대변지의 창간이었다. 이 시기 유형문화재 중심의 전통문화 관련 잡지와 팝송과 서양 클래식 전문지는 있었어도 전통음악 전문지는 없던 상황이다. 《놀이문화》의 창간은 이런 정황에서 탄생한 것이다. "삶을 풍요롭게 인도하는 주간신문”이란 사시(社是)를 표방한 《놀이문화》 창간호는 타브로이드판 흑백 총 16면, ‘발행인 김호규’ 명의의 창간사가 제1면을 장식했다. 발간 배경과 취지는 물론 발행인으로서의 경영방침도 담겼다. 제1면은 창간사와 목차 그리고 3개의 광고를 배치했다. 제2면은 <풍물기행>이란 제하에 ‘농악’에 대해 해설했다. 3면은 <여행 스케치>로 경기도 가평의 관광지 명지계곡을 안내했다. 4면은 <동호인 동정>난으로 탈춤 단체 ‘탈벗’을 소개했다. 5면은 공연소개 난으로 동학 100주년 기념작 뮤지컬 <꿈꾸는 기차>를 소개했다. 6면은 영화와 비디오를 소개하는 난으로 영화<태백산맥>을 소개했다. 7면은 <문화가 산책>으로 미술분야 행사 등을 소개했다. 8~10면은 레져 분야 전면 광고와 관련 기업체를 소개했다. 11~12면은 학술면 성격으로 민요와 굿 음악을 소개했다. 13면은 본지 《놀이문화》를 소개하고 지사 모집을 안내했다. 14~15면은 오락과 스포츠난으로 배정했다. 16면은 광고성 기사로 ‘한국국악사’를 소개했다. 모든 기사는 무기명이다. 전 16면 모두 하단은 5단 통광고로 배치했다. 이렇게 《국악신문》 창간호는 우리 국악사 초유의 국민적 관심 속에서 옥동자의 하나로 탄생하였다. 국악인 35세 청년 김호규라는 한 선각자의 발상으로부터다. 이후 제호를 변경하여 정체성을 다지며 4반세기를 넘겨왔다. * 예를 들면 1945년 11월 23일 창간한 《서울신문》이 1998년 11월 11일 《대한매일》(大韓每日)로 변경하였다가 다시 2004년 1월 1일 《서울신문》으로 환원했다. 이 같은 변경과 환원에 있었어도 그 지령을 승계하여 동일체로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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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4국악신문 사장 ‘김호규의 김병섭’(3) 국악신문 특집부 국악신문 지면이나 일부 행사 자료에 김호규 사장이 무대에서 탈춤을 추거나 장구를 치는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나서 탈춤과 장구를 친다는 단 한번의 진술에서 이해가 쉽지 않다. 실제 실기인으로 활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런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즉, 부친에 대한 반감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평생 가정을 돌보지 않고 예인으로만 살아온 부친과 달리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오기의 반영이란 해석이다. 이에 대해 오랜 교우를 맺어 온 KBS 국악한마당 전 민속악단장 최우칠 선생의 전언이 뒷받침한다. "김사장이 부친 김병섭과 한 무대에 선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무대에서 공연자로 서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본 적이 없어요. 그러나 유전적인 기질은 있어서 국악계에 들어서 국악신문을 창간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부모에게서 예술적 ‘끼’는 받은 것이지요. 그런데 김사장이 부친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또 지인들도 함께 있을 때는 김선생님 얘기를 하지 않아요. 이건 절연하고 산 탓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낳아 준 어머니와는 같이 살지 못하고 떨어져서 정읍 본가에서 살게 된 것이 한이 되었던 것이겠지요.” ‘절연(絶緣)’이란 어떤 관계였다가 교류를 단절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진의는 부모자식지간의 인연을 끊고 산다는 극단적인 말이다. 절연의 시점이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제자들의 몇몇 기록에서 부자지간에 대해서는 단지 ‘3남 2녀 중 2남’이란 기록 외에는 어떤 부연 설명도 없는 것으로 보아 부친도 제자들에게 아들 김호규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황에서 김호규 사장이 국악신문을 창간한 배경을 추정할 수가 있다. 즉, 기질상 춤과 장구를 치고 싶으나 즐기는 정도에서 더 이상 직업으로 하지는 않았다. 다만 국악계에 발을 들여 관련된 일을 하고자 신문사 창간을 구상했다고 본다. 언론인의 사명감보다는 국악 행사 기획 등 사업성 측면에서 개업을 한 것이다. 부친의 작고 7년 후인 1994년 국악신문이 창간되었다. 8년 후 2002년 <설장구보존회>가 창립되고, 제1회 발표회를 개최했다. 회장을 김호규 사장이 맡았다. 8쪽의 자료에는 ‘선생님을 추모하는 제자 일동’ 명의의 <선생님을 그리며~>가 있다. 문면대로는 김호규 사장도 제자의 일원이 된 것이다. 실제 이 행사에서 사회까지 진행했다. 이렇게 절연에서 제자의 연으로 전환되였다. 그리고 2009년 20주기 추모공연을 국악신문사 명의로 주최했다. 국악협회와 한국농악보존회의 후원 행사였다. 이 행사 기록 자료에는 네 사람의 추모사가 수록되었다. 모두 업적을 기려 예찬했다. "설장구 구정놀이로 이 땅에 농악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하셨고, 우리 농악을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견인차의 소임을 다하셨다.”(국악협회 이사장 이영희) "선생은 장구를 메고 가락을 치실 때면 동산에 떠오르는 환한 아침 햇살처럼 밝고 따스한 미소와 한 올 한 올 엮어가는 듯한 발 사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설장구의 멋과 흥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한국농악보존회 이사장 전인삼) "선생님의 가락에 대한 학문적 연구자도 많이 늘어나고 선생님의 예술혼이 담긴 가락을 배우고 연구하는 후학들도 미국이나 영국 등 세계적으로 뻗어가고 있습니다. 이토록 큰 감명과 열기를 불어 넣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선생님의 창의적이고 남다른 전통문화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있기 때문입니다.”(전수제자 최수경) "1975년 선생이 제게 농악을 가르쳐주며 그랬어요. 젊은 한국인들은 이 음악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 당신이 이것을 연구해 세계에 알려 보존해 달라고 하였어요. 그런데 3년 후 사물놀이가 탄생했어요. 한국의 문화적 저력을 실감했어요.”(제자 음악학자 프로바인 교수) 이 행사에는 서양인 제자 유게리씨와 브라이언씨가 참여했다. 2002년의 설장구보존회 결성과 2009년 20주기 추모공연 주최를 통해 외적인 관계는 복원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저승에서는 부모자식 간으로 만났을 것이다. 김호규 사장은 자신이 직접 모신 경기도 고양시 하늘문추모공원 모친(최경자) 곁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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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3국악신문 사장 ‘김호규의 김병섭’(2) 국악신문 특집부 네이버를 비롯한 모든 포탈 싸이트 검색에서 ‘김병섭’을 치면 설장고 명인 김병섭은 검색되지 않는다. 그러나 ‘김병섭 류 설장구’라고 치면 검색이 된다. 이는 김병섭의 존재는 장구잽이로만 존재한다는 것이 된다. 돌려 말하면 ‘가정도, 자식도 내치고 오직 장구에만 미쳐 살았다’가 된다. 한편 이 시대 일부 ‘잽이’들의 삶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평소 김호규의 어떤 발언에서도 부친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역시 부인(고 최경자)의 구술자료 어디에서도 남편에 대한 정을 표현한 대목은 없다. 국악신문 유일의 기사인 사진작가 정범태의 연재물 ‘명인(名人)’ 국악신문 제41호(1996년 06월 18일자)에도 가족관계 같은 사생활은 기술되지 않았다. 해적이(연보) 조차 정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회에 제시된 해적이도 본 보가 처음 작성한 것이다. ‘김호규의 김병섭’은 설장구 명인이다. ‘설장구’란 판굿에서 우두머리 장구잽이(명인)가 나와 다채로운 가락과 춤으로 솜씨를 보이며 하는 연행으로, 장구놀이 중 으뜸이란 말이다. 상(上)장구, 수(秀)장구라고도 말하는 이유이다. 호남 지역 설장구 춤 중에서 김병섭 류 설장구는 다스름·휘모리·동살풀이·굿거리·삼채·연풍대로 구성되어 독자적인 유파를 이루었다. 장구가락과 발디딤을 베 짜듯이 잉어걸이․ 엇부침․ 엮음살이 등에 소삼과 대삼의 음양배합으로 엮어 최고의 장구놀음으로 표출했다. 고대 농악에서 비롯된 장구춤이 김병섭에 이르러서는 독자적인 ‘타악음악’으로 다듬어져 예술로 승화되었다. 1984년 한국일보사와 국립극장이 주최한 ‘명무전’에서 최막동·백남윤·유지화 그리고 김병섭이 선보인 장구춤에서 김병섭의 무대는 돋보였다. "섬세하고 화려하고 드라마틱”했다. 시인 이승하의 시집 <박수를 찾아서>에 수록된 ‘김병섭의 설장구’도 이 ‘명무전’의 감동으로부터 기억되고 있다. 이후 작고하는 1987년까지 많은 제자들이 형성되어 ‘김병섭 류’라는 유파를 형성하였다. 현재 유튜브 채널에는 비록 흐릿한 화면이지만 풍부한 김병섭 설장구 품새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002년 제자들이 개최한 제1회 설장구보존회 정기발표회 동영상 ‘김병섭 류 완판’(15분)이 올라 있다. 그 외 윤용준·한승철·박철선 등이 이 류를 계승하고 있다. ‘김병섭의 설장구’ 이승하 지 애비 죽고나서부터 장구를 쳐? 장구 가락 베를 짜듯 발놀림 연속무늬를 놓듯 신바람이 나서 쳤단 말이여? 우도농악 이어 받아 엇붙임 장단으로 좌를 때리고 우를 아우르면 세상은 음양이 어울려 잘 돌아가더라고이? 나라 빼앗겼을 땐 구성지게 구정놀이 나라 되찾을 땐 흥겨웁게 덩덕궁이 장구 하나에서 세상 살아가는 흥이 솟구치고 멋이 우러나서 아니, 그래 늙은 설장구 지 에미 죽은 날도 장구를 처? 치고 싶은데 못치고 않았으면 미쳐? 색동 끝동이 달리 붉은 쾌자를 입고 골수가 울리도록 치면 세 살 먹은 애도 춤이 나온다고이? 김병섭의 설장구에 대해서는 논문 1편과 단행본 한 권이 있다. 김병섭의 설장구 세계는 앞으로 다양한 국면에서 논의가 확장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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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국악신문 사장 ‘김호규의 김병섭’(1) 국악신문 특집부 "저는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아버님(故 김병섭)이 장구로 유명하셨던 분이시구 어머님(故 최경자)은 소리와 춤을 하셨어요. 자연스럽게 국악을 접한 것이지요. 학생 때부터 장고 치고 탈춤을 추었어요. 후에 제가 아는 국악을 어떻게 정리할까 생각하다 1994년 9월에 국악신문을 창간했어요.” 외부 언론과의 유일한 기사인 네이버 블로그 2016년 3월 31일자 ‘김호규 국악로전통문화학교 대표’라는 인터뷰에서 밝힌 신문사 창업 배경이다. 부모의 영향으로 장구 치고 탈춤을 추게 되어 국악계에 들게 되었고, 국악계의 기록을 남기는 일을 하고자 신문을 창간했다는 진술이다. 장구와 춤의 실기인에서 국악계 언론인으로 살게 된 배경과 계기를 밝힌 것이다. 이는 국악신문의 주 논조가 국악계 소식이고, 그 중 국악인 부고(訃告)기사를 가장 크게 보도(1995 만정 김소희 선생)하거나 수상 소식을 특집화 한 사실과 ‘명인명창 사진을 구합니다’(1995~96년)와 같은 사고(社告)를 통해 자료 구축과 기록정리 사업을 추진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수차의 주간, 격주간, 월간으로 형태 변경을 되풀이 하면서도 결코 휴간이나 정간을 하지 않고 견뎌온 사실에서 사명감도 발휘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한 언론인으로서의 분명한 업적인 것이다. 국악신문 사장 김호규는 1959년 김병섭과 최경자 사이 3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부친이 장고를 시작한 나이와 같은 11세 때 장고를 치고 탈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필연을 있게 한 주인공, 부친 김병섭은 누구인가? "우리의 어려운 마음을 다듬어 주시고 답답한 마음을 밝게 열어주셨던 아버님의 장고소리 새삼 아버님의 빈자리가 너무도 그립습니다.” 2009년 ‘고 김병섭 선생 20주기 추모공연’ 인사말의 일부이다. 자식으로서의 사적 감정보다는 장구 명인에 대한 추모의 정을 더 강조하고 있다. 부친 이기보다는 국악인 선배이며 객석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한 명인(名人)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 자신이 작성한 이력서에서 ‘부친’을 빼고 "김병섭 선생께 설장고 및 우도농악 사사”로 기록하고 있다. 김병섭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자료는 사진작가 정범태의 ‘설장고 명인 김병섭’이 있다. 글 쓴 시기는 1996년이지만 실제 여러 차례 만나 인터뷰하고 사진으로 기록한 인연으로 쓰여진 글이다. 이 글에서 김병섭은 우도농악 고깔 설장고 가락의 대가 김도순, 김학순, 백남길을 잇는 뚜렷한 계보가 자랑이라고 했다. 그리고 설장고 치는 모습을 매우 세밀하게 기술하였다. "흰 바지 저고리 위에 반소매 색동끈 동달린 붉은 쾌자를 입고, 어깨 허리에 청황록 3색 띠를 두르고, 배꽃 달린 고깔을 쓰고 장고를 비껴 맨 차림으로, 우도농악 엇부침 장단으로 춤을 추는 모습에 관객은 어느새 하나가 된다.” 현장의 현란한 몸짓이 그려진다. 바로 이 묘사의 대본인 사진 한장이 남아있다. 아쉽게도 컬러사진이 아닌 흑백사진이지만 고깔 아래 눈빛은 살아있다. 그나마 전문가가 찍은 소위 ‘작품사진’은 유일한 것이다. 작고한지 9년 후 국악신문 제41호, 1996년 6월 18일자 ‘명인’란에 실린 기록이다. 김병섭 명인 해적이 1921년 정읍 북면 출생 1932년 (11세) 농악입문, 명인 김학순 사사 1938~45년 (17~25세) 함경도 명천 아오지탄광 강제징용 1945년 종전후 징용에서 귀향, 형과 함께 마을 농악단에서 활동 1950년 전북에서 담굿, 풍장, 걸궁에 명성을 얻다 1956년 전국농악대회 개인상 수상 1963년 전국민속경연대회 정읍우도농악 국무총리상 수상 1964년 제5회 전국민속경연대회 설장고 개인상 수상 1965년 남원국악원 여성국악단 설장고 지도 1966년 로버트 프로바인(朴巴人/메릴랜드대학 음악학교수) 외 외국인 설장고 지도 1968년 서울로 이주, 미국인 평화봉사단 설장고 강습 담당 1970년 돈암동, 동대문, 종로5가에서 <김병섭농악연습소> 운영. 한양대, 서울예고, 선화예고 학생지도 1971~87년 전라 우도농악 장고잽이 설장고, 쌍장고, 굿거리, 동살풀이, 구정놀이, 덩덕궁이, 다르래기 명인으로 전국적 활동 1987년 (62세) 폐암으로 사망,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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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온 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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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정보의 메카 국악신문’ 재창간, 인터넷 국악신문새로운 도약, 재창간 인사 안녕하십니까. 국악신문입니다. 그동안 국악신문은 4반세기 국악계 소식을 전하는 일을 해 왔습니다. 1994년 9월 7일, ‘놀이문화’라는 제호로 창간, 금년 26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에 새로운 도약을 위해 주간 지면신문에서 인터넷 신문으로 전환, 재창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급격한 사회변화와 랜선 시대를 맞아 더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독자분들께 보고 드립니다. ‘전통문화 정보의 메카 국악신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합니다. 재창간을 기념하여 의미 있는 특집을 다음과 같이 준비하였습니다. 특집기사는 1. ‘국악신문이 걸어 온길(특집부)’ 2. ‘한러수교 30주년 기념, 고려인 30인전’(특집부)입니다. 기획연재는 1. ‘한악(국악)계의 별들’(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한명희) 2. 장편소설 ‘난계 박연-흙의 소리’(이동희 작/이무성 화백 작화) 3.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노래 사설’(한국서학회 한얼 이종선) 4. ‘정창관의 새 음반 소개’(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정창관) 5. ‘박대헌의 고서이야기’(완주책박물관 관장 박대헌) 6. 칼럼 ‘아리랑의 세계’(아리랑학회 이사 기찬숙)입니다. 7 국악인이 추천하는 시 뜻 깊은 국악콘텐츠를 전해드리기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특별행사는 북한 개별여행 관련 여론조사입니다. ‘금강산타령’이나 ‘몽금포타령’ 같은 국악 작품 소재지 답사를 목적으로 국악인들의 주체적인 남북교류 열망을 실행하기 위한 사전 준비입니다. 추후 진행 될 개별여행은 당국 간의 <신변안전 각서> 교환 하에 30여명 단위의 답사입니다.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당국과의 협의 하에 확정, 본보를 통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재창간을 통한 새로운 도약, 독자 여러분의 호응과 질책을 기대합니다. 온 가족의 건강을 기원드립니다. 2020. 09. 03 국악신문 사장 김지연 외 직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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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사반세기 만에 거듭납니다 (국악신문 재창간 자문위원회)[알림]국악신문, 사반세기 만에 거듭납니다 8월 인터넷 국악신문과 오프라인 주간 국악신문 병행 발행 1994년 9월 창간한 지령 25년의 국악전문지 ‘국악신문’이 오는 8월 재창간을 위한 자문위원회를 결성했다. 지난달 10일 6인으로 구성된 ‘국악신문 재창간 자문위원회’는 우선 5월 2일 ‘지역문화연구회’를 방문, 전국 국악 행사의 실상과 규모 등을 파악했다. 이어 주요 국악단체를 찾아가 7월 말까지 실무자들의 의견을 청취할 계획이다. 5월15일에는 메이저 일간지 출신 문화전문기자와 사업담당자를 초청해 인터넷과 종이신문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노하우를 공유하기도 했다. 한편 국악신문은 5월15일부터 인턴기자를 모집하고 있다. 최종합격자들은 경력기자들의 지도로 3개월 간 인턴과정을 거쳐 8월 재창간 시 수습기자로 활동하게 된다. 경력기자(편집위원)로 방송, 일간지, 주간신문의 베테랑 4인을 영입한다. 사업부도 신설한다. 대외사업이나 마케팅은 물론, 내년 재창간 1주년을 기해 설립되는 법인 업무를 중점적으로 담당할 예정이다. 지난 4월 초 재창간 준비 소식이 전해지자 국악계의 기대도 커지고 있다. 국내외 행사에 적극 참여 중인 아리랑 웹사이트 운영자 기미양 대표(벤처아리랑)는 "국악정책 관련 정론지가 절실하다. 주변에 주식 공모 참여를 권하겠다”고 전했다. 대금연주가 원장형 명인은 "기존의 틀을 깨고 언론의 기능에 충실한 국악계 대변지로 재창간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축하했다. ‘정창관의 아리랑’ 사이트와 함께 아리랑 유튜브를 운영하는 정창관 유튜버는 "국악신문도 핫 트렌드인 유튜브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했다. 2020.05.18 국악신문재창간준비위원회